달의 황홀경
14화
“정말 이렇게 올려 두기만 해도 되는 것이옵니까?”
“벌써 여섯 번째 묻는구나, 주란아.”
“어의를 부르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자꾸 고집을 부리시니 여쭤보는 겁니다.”
“괜찮다. 정말 이렇게만 두면 돼.”
이설이 손등에 찧은 약초를 바르는 게 못마땅한 주란은 몇 번째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벌겋게 부어오른 살에 이깟 풀떼기 좀 찧어 얹어 놓는다고 나으면 어의는 왜 필요한가. 풀을 찧어도 어의가 찧으라, 하는 것을 해야지. 이설을 못 미더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주란은 마음이 영 찜찜했다.
“여기를…, 그래 그렇게 감싸면 된다. 옳지, 잘하는구나.”
넓게 바른 풀 위를 하얀 무명천으로 감싸 끝을 묶었다. 천위로 짙은 풀색이 배어 나오긴 했으나 이 정도면 괜찮았다. 아릿한 고통이 벌써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설이 긴 숨을 내쉬었다.
탄영당에서 돌아와 옷을 벗고 확인해 보니 다행히 화기가 심하게 든 곳은 없었다. 도리어 주 상궁에게 다리를 훤히 드러내 보여 줬다는 것에 얼굴이 붉어져 혹 얼굴에도 찻물이 튀었냐는 오해를 받아 설명하기 더 곤란했다.
황제가 나간 후 이설도 얼른 도망치듯 탄영당을 나왔다. 젖은 옷이 자꾸만 다리에 붙어 걷기 불편했던 것도 잠시. 내리쬐는 햇빛에 금세 마른 옷은 비은궁에 도착하고 보니 거뭇한 얼룩만 남겨져 있었다. 회백색의 옷감에 이런 얼룩까지 있으니 마치 어디서 주워 입은 옷처럼 낡고 닳은 느낌이 났다.
사정을 모르는 화홍은 이설을 보자 대뜸, 마마 이런 옷을 입고 다니시면 옷 짓는 저희 체면이 무엇이 됩니까, 하며 이설을 장난스럽게 탓하다가 이설의 표정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설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곧장 침소로 향했다.
겨우 일각의 시간 동안 혼자 마음을 다스린 이설이 다시 침소 문을 열었을 때는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여상한 말투로 유강에게 후원에서 어느 풀을 찾아 뽑아 오라 했고, 유강이 한참 만에야 찾아온 풀을 빻아 손등에 얹어 처치한 게 다였다. 탄영당에서 있었던 일을 봤던 궁녀도, 주 상궁도 누구도 그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았다.
“마마, 점심 수라를 지금 준비할까요?”
“……그리하게.”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끼니를 거르면 사정이 더 안 좋아질 것이다. 돌아오는 내내 제 눈치를 살피던 궁녀들이니, 끼니까지 거르면 정말 무슨 사단이라도 나는 줄 알고 제 걱정을 할 게 분명했다.
이설은 자신이 지는 마음의 짐으로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지는 게 늘 싫었다. 그래서 늘 괜찮은 척을 하고, 모두를 안심시켰다. 이건 다른 사람을 향한 배려이기도 했고, 이설 스스로의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설은 꼭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슬퍼했다.
*
후원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그 형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 담장보다 높은 나무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길게 늘어진 나무 담장 중 유독 빽빽하게 심어진 곳이 있다. 이설은 그곳을 항상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쳤다. 하지만 오늘, 우연히 그 옆을 지나던 이설은 나무 풀숲 사이에 쪼그려 앉아 턱을 괴고 그 아래를 유심히 바라는 중이었다. 뭔가가 푸드덕푸드덕 움직인다.
날이 어두웠으면 정말 깜짝 놀랐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지금은 해가 밝았고, 이설은 놀라기 전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도와줄까?”
우거진 나무 풀숲 사이에서 튀어나온 것은 사람의 팔이었다. 무척 짤따란 걸 보니 어른의 것은 아니다. 마치 이곳에서 꺼내 달라는 듯 버둥대던 팔이 이설의 목소리를 듣고 놀란 듯 멈췄다. 그리고는 다시 푸드덕푸드덕. 도와 달라는 뜻으로 알아들은 이설이 한 손으로는 팔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풀숲을 휘저어 공간을 만들었다.
“…어푸흐, 어후… 푸흐흡, 퉤!”
한참 만에야 풀숲에서 튀어나온 ‘그것’이 흙바닥에 철퍼덕 엎어지고 그 옆으로 이설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아이쿠.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난 이설은 여전히 옆에 엎어져 있는 그것이 꼬물꼬물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괜찮니?”
“…아…….”
아이였다. 7살쯤 됐을까? 아니면 8살? 얼굴과 몸집만 봐서는 도통 나이를 짐작할 수 없어 추측을 그만두고 아이의 옷에 묻은 흙을 털어 주었다. 단순히 흙먼지가 아니라 바닥에 엎어지며 묻은 젖은 흙이라 암만 털어도 깨끗해지지는 않아 결국 포기했다. 아이는 이설이 하는 양을 그대로 두었다. 풀숲에 끼어 있어 놀란 것인지 아니면 이설을 보고 놀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설이 다시 물었다.
“괜찮으냐?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예, 괜찮습니다. ……소자, 초면에 큰 폐를 끼쳤습니다.”
말투가 예의 바른 걸 보니 황궁에 온 어느 귀족의 자제인 것 같다. 의복도, 가죽신도 모두 질이 좋은 것들이다. 하기야 그런 게 아니라면 이 정도 되는 어린아이가 황궁에 걸음 할 리가 없겠지. 풀숲에 걸린 탓인지 검은 머리카락이 완전히 산발이지만 어린아이답지 않게 얼굴도 단정하고 별거 아닌 행동도 기품 있었다.
“그 뒤에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거니? 담을 넘었느냐?”
“……담장에 큰 구멍이 있어 그것을 통해 들어오려다…….”
대답을 숨기려던 아이가 이설을 흘끔 올려다보더니 실토했다. 혼내려던 게 아닌데, 괜히 주눅이 들어 보이는 아이에게 이설이 눈높이를 맞춰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아이는 땅에 닿는 이설의 무릎을 보고 조금 놀란 눈치였다.
“처음 온 것이 아니구나.”
이설이 웃으며 묻자 아이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다가 다시 가로젓고는 네, 하고 소리 내서 대답했다. 고갯짓을 하면 어른들께 혼이 나곤 했나 보다.
“헌데 이곳에는 왜 들어오려 한 것이냐? 혹 길을 잃어 헤매고 있었던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라…….”
“황궁에는 또 어떻게 들어온 것이고. 너와 함께 온 이가 무척 걱정하겠구나.”
무슨 일로 입궁하였는지는 모르나 이리 어린아이를 혼자 돌아다니게 놔두진 않았을 것이다. 아이의 부모든 아이를 모시는 시중이든 지금쯤 아이를 찾느라 한바탕 난리가 났을 거다. 그 마음을 모를 게 아니라 이설이 아이의 부모를 찾기 위해 앞뜰의 궁녀를 부르려 하였다. 거기 누구 있느냐, 하는 소리에 놀란 아이가 갑자기 이설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잠시만요!”
앳된 아이 특유의 목소리가 이설을 막아 세운다.
“……소자, 종학(宗學:황족의 교육을 담당하는 관서) 태감의 장남… 해도원이라 합니다. 황…, 황태자 마마와 함께 글공부를 하러 입궁하였습니다.”
“그런데 글공부를 하러 가지 않고 왜 이곳에 있느냐?”
“그것이…….”
아이가 우물쭈물 할 말을 고르며 이마를 벅벅 문질렀다. 말은 어른스럽게 곧잘 해도 영락없는 어린아이다. 순순히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아 이설이 푸스스 웃고 말았다.
아이는 이설이 웃는 걸 보고 놀란 모양인지 아직 붙잡고 있던 이설의 소맷자락을 급하게 놓으며 뒤로 물러섰다. 이설을 들여다보는 눈이 겁을 먹고 있기도 했지만 동시에 순수한 호기심도 가득했다. 깜빡이는 두 눈이 이설의 얼굴을 향했다가 어깨 위 머리카락으로 옮겨졌다.
“몰래 도망을 쳤구나.”
“…….”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냐?”
“……맞습니다.”
아이가 죄책감에 무너진 얼굴로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 고작 해야 열 살도 되지 않았을 어린아이가 세상 다 산 노인네처럼 내쉬는 한숨만큼 귀여운 것도 없을 것이다. 땅이 꺼져라 뿜는 한숨 소리에 이설이 웃음을 참으려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제 속도 모르고 웃는 이설이 야속한 건지 아이는 괜히 가죽신 앞코로 흙바닥을 콩콩 내리찍었다.
“매번 이곳으로 도망을 온 것이냐?”
“…매번 도망을 치지는 않습니다.”
“…….”
“가끔, 아주 가끔만 오는 것입니다. 인적이 드물어 숨기에 좋아……. 계신 줄 몰랐습니다. 송구합니다.”
아이는 아마 이설이 이 궁의 주인이 된 줄 모르고 있었나 보다. 빈 궁일 때 드나들었던 대로 평소처럼 담장의 구멍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려다 풀숲에 몸이 걸린 듯하다. 그간 이설이 돌보며 담장을 둘러싸고 있는 수풀들이 더 울창하게 자랐으니, 그걸 몰랐던 아이가 곤란에 빠질 수도 있었겠다 싶다.
아이는 자꾸만 이설의 눈치를 봤다. 자신이 이곳으로 도망친 사실을 이설이 누군가에게 알릴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하는 아이의 한쪽 손에 깍지를 끼고 잡자 내내 고개만 푹 숙이고 있던 아이가 동그란 눈으로 이설을 본다.
“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아이의 말랑한 손이 한 손에 가볍게 잡힌다. 들으면 안 될 소리를 들은 것처럼, 아이는 놀란 얼굴로 이설을 봤다. 화사하게 웃는 이설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입만 벙긋거리다 이내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도르르 굴렸다.
이설은 어린아이가 좋았다. 하얗고 말랑말랑한 볼과 짧은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씩씩하게 걷는 모양과 거짓 없이 순수하게 제 감정을 보여 주는 게 늘 눈길이 갔다. 연국의 궁에서는 아이를 보는 일이 거의 없다. 새로 태어나는 생명이 있지 않은 이상 잘 볼 수 없는데, 이설보다 나이가 어린 아래 왕손은 겨우 공주 둘뿐이었다. 그 공주들도 이제는 무척 자라서 아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는 귀여웠다. 글공부가 하기 싫어 도망을 쳤다는 그 발상마저도 아이들은 사랑스럽다. 고작해야 일고여덟 살의 아이다. 황궁까지 와서 태자와 함께 아버지께 글공부를 배워야 한다면 이설 자신이라도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정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실 겁니까?”
“약조하마.”
“그럼 다음에 또 이곳에 들러도 괜찮을까요?”
“또 글공부를 하다 도망 오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냐?”
가늘게 뜬 눈을 하고 엄한 목소리로 묻는 이설이지만, 아이는 이설이 가벼운 장난을 친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아이 특유의 구김살 없는 웃음을 배시시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허락을 받아 오겠습니다.”
“이곳은 네 또래 아이가 없어 심심할 텐데…. 차라리 태자마마와 글공부를 하는 게 재밌지 않겠느냐?”
“저는 이 궁의 나무들이 좋습니다. 귀찮게 하지 않고 앉아만 있다가 갈 테니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
저런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쫓아내지 말아 달라니. 마음 약한 이설이 아이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쫓아내지 않겠다, 약조했다.
아이는 곧 왔던 길을 되돌아 궁 담장 밖으로 나갔다. 앞뜰로 나가 문을 이용하라는 이설의 말에도 이리 가는 것이 훨씬 빠르다며 수풀을 가로질러 갔다. 들어올 때 못지않게 애를 먹은 아이가 겨우 담장 밖으로 나간 후, 수풀을 헤쳐 보자 담장에 정말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딱 아이 정도의 몸집만 드나들 수 있는 크기였다.
수풀을 나오다 나뭇가지에 걸린 머리끈을 발견했다. 아이 머리카락이 산발이던데, 아마 수풀을 헤쳐 나오는 길에 머리끈이 여기에 걸려 풀어졌나 보다. 다음에 또 온다 하였으니, 그때 돌려줘야겠다 생각하며 붉은색 머리끈을 가지고 궁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