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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3)화 (13/300)

달의 황홀경

13화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비은궁의 안주인 루 소의 마마 아니십니까.”

“…아…….”

“오신다 기별은 받았으나 너무 늦으시어 아니 오실 줄 알았습니다. 이리 드시지요.”

문이 열린 순간 이설은 정말 이곳이 꽃밭이 아닌가 하는 망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 어느 곳에서 본 것보다 화려한 여인들이 저마다의 꽃 향을 내며 앉아 저를 보고 웃고 있었다. 색색의 비단으로 만든 옷과 한눈에 척 봐도 진귀한 보석들로 만든 머리 장신구들. 온통 호화로운 것들뿐이라 여인들의 얼굴보다 치장이 먼저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그렇다고 하여 미모가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 황제의 후궁들이다. 누구 하나 빼어나지 않은 미모가 없다.

“루 소의 마마 이쪽에 자리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어서 와서 앉으시지요.”

멍하니 자리에 서 있는 이설에게 가장 상석에 앉은 후궁 한 명이 나긋하게 말했다. 뒤에 바짝 붙어 있던 연화가 작게 속삭인다. 저분이 양 소원 마마십니다. 상석에 앉아서인지, 아니면 미모가 가장 출중해서인지 확실히 눈에 띄기는 띄었다.

“…제가 때를 잘못 알았나 봅니다. 제 결례를 용서하시지요.”

기별 받았던 시간보다 한참 이르게 도착했다는 걸 알고 있다. 어제처럼 황궁 가는 길에 여기저기 한눈이라도 팔아 걷는 길이 길어질까 채비를 일찍 맞추고 궁을 나섰다. 먹고 있던 전과와 다식들을 보니 모인 것은 이미 한참 전이다. 일부러 비은궁에만 시간을 잘못 알려 기별을 보낸 게 틀림없다. 저를 보고 수군거리며 웃는 다른 후궁들을 보니 이설이 혼자 하는 오해는 아닌 듯했다.

“결례라니요. 당치도 않으십니다.”

여전히 상석에 앉아 있는 양 소원이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선 제 옆의 빈자리를 가리키며 자리를 청했다. 이설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누구 하나 일어나 예를 갖추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양 소원입니다.”

“연이ㅅ… 아니, 루 소의입니다.”

하던 대로 제 이름으로 소개하려던 이설이 곧바로 말을 정정했다. 아직 익숙치 않아 얼마나 더 이런 실수를 할지 모르겠다.

상석 가까이 앉은 순으로 세 명의 후궁들이 자신들을 소개하였으나 이설은 사실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멀리 따로 앉아 있는, 아마 81어처 중 양 소원의 눈에 들어 이 자리에 앉게 되었을 후궁들이 대놓고 저를 보며 쑥덕거리는 모습을 완전히 무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드문드문 들리는 단어들 중 좋게 들리는 건 아무것도 없다. 누가 누구라 소개했는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멀거니 탁자 위에 제 손끝만 바라보는 시선이 갈 곳 없이 흔들렸다.

“…마마, 루 소의 마마.”

“아, 네. 듣고 있습니다.”

“그간 비은궁에서 두문불출하신다 하여 찾아뵙지 못한 점 송구합니다. 마마께서 먼저 부르지 않으시기에 사정이 있으시다 생각했습니다.”

“네…, 염려치 마세요. 마음 쓰지 않습니다.”

“차를 내왔습니다. 드셔 보시지요.”

화사하게 웃으며 양 소원이 찻잔을 밀었다. 별생각 없이 찻잔을 잡았다가 깜짝 놀라 잔을 놓쳤다.

“…앗…!”

“어머! 마마, 괜찮으십니까?”

“뭐 하느냐! 냉큼 수파를 가져오거라!”

놓친 잔이 하필 이설의 허벅지 위를 떨어져 찻물을 반쯤 쏟아 내고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찻잔 깨지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이설의 낮은 신음 소리와 그 옆에 앉은 우 미인의 비명 같은 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이설이 찻잔을 들고 떨어뜨리기까지의 일련의 모습을 빤히 보고 있던 양 소원이 옆에서 시중을 들던 궁녀에게 소리쳤다. 궁녀가 허겁지겁 자리를 떠났다.

금국 사람들은 차를 뜨겁게 마시지 않는다. 냉차로 마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차갑지 않을 정도로만 미지근하게 마시는 게 보통이었다. 처음에는 그걸 어색하게 여겼으나 이설도 곧 거기에 익숙해졌다. 그런 탓에 평소처럼 찻잔을 잡은 게 화근이었다. 잔에 담긴 차는 방금 끓인 물처럼 뜨거워 손을 대자마자 화들짝 놀라 잔을 놓치고 만 것이다.

쏟은 찻물을 옷 위로 그대로 뒤집어쓴 이설이 자리에서 놀라 일어났다. 옷감이 얇은 탓에 뜨거운 찻물이 그대로 살갗에 닿은 게 느껴졌다. 먼저 수파를 가져오라 보낸 궁녀는 오지 않고 마루 아래에 있던 연화가 소매에 가지고 있던 수파를 가지고 급하게 올라왔다.

“루 소의 마마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습니다…. 찻잔이 뜨거워 놓쳤습니다.”

다리 안쪽까지 흠뻑 젖은 곳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닦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충 옷 위를 닦으니 그나마 화기가 좀 가라앉아 이설도 겨우 한숨 돌려 자리에 다시 앉았다. 옷이 젖은 찝찝함보다 주변 분위기가 더 신경이 쓰였다. 어쩐지 저와 제 궁녀들을 뺀 모두가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다.

“마마, 정말 괜찮으십니까?”

한 명, 바로 옆에 있는 후궁만 빼고.

“예, 정말 괜찮습니다. 우 미인…께서도 괜찮으십니까? 찻물이 튀었습니다.”

“전 치맛자락에 튄 것이라 괜찮습니다.”

우 미인이라 소개했던 걸 용케 기억했다. 걱정하는 표정이 유달리 진심인 것 같은 우 미인이 벌겋게 익은 이설의 손을 들여다봤다. 그 둘 사이에 양 소원이 끼어들었다.

“연국에서는 차를 뜨겁게 마신다 하여 특별히 마마를 위해 그리 준비하라 일렀는데, 아랫것들이 실수를 했나 봅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지요. 뭣들 하느냐, 어서 사죄드리지 않고.”

“송구하옵니다, 루 소의 마마.”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게.”

태평한 양 소원의 말에 뒤에 있던 궁녀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상전에게 사과를 하는 태도가 어딘지 가벼워 보였으나 이설은 모른 척 넘어갔다.

다시 차를 준비하겠다는 양 소원의 말에 그럴 필요 없다 말하며 이미 마른 손등을 수파로 문질렀다. 찻물이 바로 쏟아진 왼쪽 손등이 붉어져서 수파가 닿으니 조금 쓰라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본 양 소원이 과장된 말투로 입을 연다.

“마마께서는 손이 참 하얗고 고우십니다.”

“양 소원 마마께서는 손도, 용모도 모두 고우십니다.”

“제 용모가 곱다 한들 어디 황제 폐하만 하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나저나 루 소의 마마…,”

기세 좋던 양 소원의 목소리가 갑자기 비밀스러운 말을 꺼내기라도 하듯 작아졌다. 그렇다 한들 오밀조밀 모인 모두가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양 소원이 묻는다.

“마마는 참 좋으시겠습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마마의 이름 말입니다. 황제 폐하께 새기신 그 이름이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몸을 살짝 기대 오는 양 소원에게서 짙은 꽃 향이 났으나 그다지 향기롭지는 않았다.

“폐하께서 그 이름을 비단 천으로 가리고 다닌다지 않겠습니까?”

“…….”

“폐하께서 마마를 정녕 귀히 여기시나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천명이 정해 준 정인의 이름을 그리 꽁꽁 가리고 다니시겠습니까?”

양 소원이 터뜨린 웃음을 따라 다른 후궁들이 따라 웃었다. 곱게 분칠한 얼굴들이 소녀처럼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는데 순간 이설은 이곳에 자신 혼자만이 사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꽃밭에 초대받지 않은 벌레 한 마리처럼, 이설만 이곳에 어울리지 않았다.

황제가 제 이름이 새겨진 손목을 가리고 다니는 것을 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첩지를 받을 때도, 그리고 어제 보았을 때도. 황제는 손목에 비단 띠를 감고 있었다. 제 이름이 새겨 있다 말만 들었지 본 적도 없다. 황제는 그러하다 말만 할 뿐 제게 직접 보여 준 적이 없기 때문에 그저 붉은색의 제 이름이 적혀 있겠거니 할 뿐이었다. 궁금하긴 하나 감히 보여 달라 청할 엄두도 내 보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때문에 양 소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양 소원도, 다른 후궁들도 그리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의 선택을 받아 인연을 점지받은 것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일생일대의 복조. 이설을 귀히 여겨 그 복조의 증표를 가리고 다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이설이 초야를 홀로 보내 머리를 직접 내렸다는 것을.

새긴 이름마저 박대를 받고 초야까지 소박맞은 이설을, 모두들 조롱하고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마다요. 마마의 이름이 남부끄러운 게 아니라면 가리실 필요가 없으시지요. 안 그런가, 감 재인?”

“양 소원 마마 말씀이 맞습니다. 폐하께서는 이름뿐만이 아니라 루 소의 마마 또한 꽁꽁 숨겨 두고 싶으셨나 봅니다. 그러니 마마께 비은궁을 하사하셨겠지요.”

아직 앳된 얼굴의 감 재인이 양 소원이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모진 말을 하는 게 분명한데도 저리 즐거운 걸 보니 자신이 뭔가를 잘못했나 싶기도 해서 이설은 대꾸 없이 손에 든 수파만 만지작거렸다.

“비은궁은 어떻습니까, 마마? 나무가 많아 연국 생각이 많이 나시겠네요.”

오가는 대화를 듣기만 할 뿐인 이설에게 옆에 앉은 우 미인이 슬며시 말을 걸었다. 미소 띤 얼굴을 보니 질문에 이설을 당황하게 할 의도는 없는 듯했다.

“예, 나무도 많고 풀도 많아 연국 생각이 많이 납니다.”

“궁 앞뜰 도월소에 달이 비추면 참 아름답다 들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언제 저도…….”

“우 미인.”

양 소원이 부르는 소리에 우 미인이 하던 말을 뚝 멈추고 얼굴에 미소를 지웠다. 대신 양 소원의 얼굴엔 미소가 더 짙어졌다.

“내가 준비한 차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찻잔에 아직 차가 많이 남았는데.”

“아닙니다. 아주 향긋…하고, 맛이 좋습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가기 전에 찻잎을 좀 챙겨 주겠네.”

양 소원은 웃었으나 우 미인은 웃지 않았다. 그저 감사하다 대답하는 얼굴에 뜻 모를 난처함만 가득하여 이설은 그녀가 안쓰러웠다. 목선 아래 살갗에 새겨진 검은 문양을 보니 변방 이민족의 출신임이 틀림없다. 부족의 흥망을 어깨에 짊어졌으니 황궁 생활이 알 만하다.

“하온데 루 소의 마마께서는 왜 폐하께 받은 금가락지를 끼지 않으셨습니까?”

“무슨 금가락지 말씀입니까?”

“폐하께서 초야를 보낸 후궁에게 직접 주시는 금가락지 말입니다.”

“혹 마마께서는 받지 못하셨습니까?”

초야에 발걸음도 하지 않은 황제에게 받았을 리가 없는 것을 물으니 이설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알고서 물어보는 게 분명한 질문. 적당히 둘러댈 말을 찾지 못해 시선을 돌리는 이설을 보며 모두 숨죽여 웃고 있다.

“저는 폐하께……,”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는 말끝을 흘리는 동시에 탄영당 문이 기별 없이 벌컥 열렸다. 뭣보다 즐거운 얼굴로 이설에게 쏠려 있던 시선이 자연스레 문 앞으로 옮겨졌다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희고 마른 제 손가락만 멀거니 쳐다보는 이설만 빼고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폐하! 이곳에 어인 일이십니까?”

양 소원의 나긋한 말씨에 놀란 이설이 다른 이들보다 늦게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옆으로 열린 문 사이로 황제가 들어오고 있었다.

“대전을 가는 길에 다들 이곳에 모여 있다 하여 잠시 들렀다. 차를 마시고 있었느냐.”

“예. 루 소의 마마께 인사도 드릴 겸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탄영당에 모인 후궁들을 둘러보았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유려하게 흐르던 시선이 중간에서 멈춘다. 슬쩍 미간이 좁아졌다 금세 펴지지만 다들 고개를 숙이고도 보았다. 어디에서 황제의 시선이 멈추었는지.

이설은 제 근처에 머무는 황제의 시선을 느끼며 슬며시 젖은 옷의 앞섬을 손으로 가렸지만 그 아래까지 모두 가릴 수는 없었다. 황제의 시선이 근원지인 것처럼 또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 같다.

“꽃들 사이에,”

“…….”

“웬 벌레 한 마리가 끼었군.”

이설이 놓친 수파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이로 꽉 물며 고개를 더 숙이자 이번에는 황제뿐만이 아니라 온 후궁과 궁인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훗. 비웃음이 확실한 콧방귀 소리의 정체도 누군지 안다.

“양 소원은 앞으로 꽃밭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라.”

“예, 폐하. 명심하겠사옵니다.”

황제가 뒤를 돌아 나가고 문이 닫힌다. 모두들 꼿꼿이 편 허리로 이설을 바라봤다.

꽃밭의 벌레는 이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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