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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2)화 (12/300)

달의 황홀경

12화

이설의 말에도 남자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여전히 목 뒤에 쇠의 서늘한 촉감을 느끼며 이설은 멀리 저처럼 꼼짝 않고 서 있는 연화를 바라봤다. 자세히 보니 등불 반경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누군가가 연화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이 시간에 검을 든 자들이 궁을 돌아다니다니.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릴 만큼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야 목을 겨눈 검이 사라졌다. 뒤를 돌아도 좋다는 허락으로 받아들인 이설이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저기 등불을 든 아이는 제 궁의……아……!”

“…….”

“…….”

“…뭘 그리 쳐다보고 있는 것이냐.”

몸을 다 돌리고 나서도 이설은 하려던 말을 끝내지 못했다. 불빛 하나 없이 어두운 밤이었지만 상대와의 거리는 겨우 칼 한 자루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아는 사람이었다면 얼굴을 보자마자 깨달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설은 낯익은 얼굴을 마주하고도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상대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서야 이내 대경실색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폐, 폐하!”

“…….”

“폐, 폐하. 송구합니다. 감히 폐하를 몰라뵙고 불경…….”

“일어나라. 그대가 지금 내 꽃들을 해치고 있다.”

눈을 질끈 감고 자리에 엎드린 이설이 횡설수설 하는 것을 듣지 않고 황제가 말을 막았다. 눈을 떠보니 코앞에 황제의 가죽신과, 제 무릎에 짓이긴 금잔화가 보인다. 주춤거리며 일어나 뒤로 조금 물러서자 거리가 조금 멀어졌으나 여전히 한 보 앞에 서 있는 것은 황제였다. 첩지를 받았던 날 이후로 처음 보는 황제는 여전히 아름다워 감히 똑바로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초야 이후로 다소 무념했던 마음이 황제의 만나자 다시 설레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황제가 들고 있던 검을 옆으로 건네자 어둠 속에서 검은 복면을 쓴 자가 스윽 나타나 검을 받고 다시 사라졌다. 기척 없는 행동에 이설은 마른침을 삼켰다. 황제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모습을 보니 입안이 바짝바짝 마를 지경이었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느냐.”

“…신첩은… 그저……, 소, 송구하옵니다…….”

“다시 묻겠다. 짐의 금잔화 화전에서 무얼 하고 있었느냐.”

이설이 다시 질끈 눈을 감았다. 누군가 돌보고 있다 생각은 했는데 설마 황제일 줄이야. 온화한 말투에 노기는 없으나 상냥함도 없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목소리와 달빛에 빛나는 수려한 용모가 서로 이질적으로 섞인다.

황제의 화전인 줄도 몰랐고, 황제의 화전에 해가 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단지 꽃씨를 조금 가지러 왔을 뿐이다. 잘못한 게 없으니 이렇게 겁먹을 필요 없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곳 금잔화가 절경이라 하여 꽃구경을 왔습니다.”

“이 늦은 밤에 꽃구경이라.”

“…낮보다는 날씨가 선선하여 걷기가 좋아…….”

황제의 혼잣말에 이설이 말을 흐리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시원하다 느끼던 바람이 어느 순간 싸늘하게 둘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금국에 와서 느끼는 가장 싸늘한 공기였다. 문득 이 공기가 저를 향한 황제의 마음 같다 느껴졌다.

이설의 대답을 듣고도 황제는 침묵했다. 씨앗을 가지러 왔다는 말도 덧붙여야 할지 고민하다 허락하지 않을까 싶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의 화전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다시는 걸음 하지 않겠습니다.”

“걸음 하지 말라 명한 적 없다.”

생각지 못한 말에 이설의 얼굴에 화색이 돌려는 순간. 황제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허나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말라. 낮이든, 밤이든. 이곳에서 그대를 보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

“훔친 꽃씨는 가져가도 좋다.”

말을 마친 황제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황제가 뒤를 돌아 멀리 등불을 가지고 있던 내관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황제가 걷는 길에 불을 밝혔다. 멍하니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설에게 가벼운 묵례는 하였으나 이설은 보지 못하였다.

황제가 멀어지고 그를 밝히는 불빛이 계속 멀어져 보이지 않을 즈음에야 주 상궁이 이설을 부르며 다가왔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다급하게 묻는 주 상궁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마마,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멀리서 허겁지겁 달려오며 울먹이는 연화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황제의 멀어지는 뒷모습만 보는 게 너무 서글퍼서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

연화는 세답 일을 싫어했다. 세답방 시절 허드렛일을 모두 도맡아 했던 기억 때문이다. 이설을 상전으로 모시기 전까지는 세답 일 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그래서 비은궁에서는 다른 궁녀들에게 세답 일을 미뤘으나, 그네들 하는 일이 영 성에 차지 않아 연화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빨랫방망이를 들었다. 일하는 팔자 저가 만드는 거라던 어머니의 말씀을 새겨들었어야 했다.

빨랫감에 사정없이 방망이질을 해 대던 연화는 문득 어제의 일이 떠올라 몸을 흠칫 떨었다. 이설에게 칭찬받고 싶어 모셔 간 녹염각 금잔화 화전에 갑자기 폐하가 나타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치를 떨다가,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내내 몸져누워 있는 이설이 생각나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황제가 떠나고 한참을 자리에 서 있던 이설은 다시 비은궁으로 돌아오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침소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잠이 들어서는 새벽 내내 끙끙 앓았다.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는 걸 보고 주 상궁이 궁의를 불러오겠다 했지만 이설이 허락하지 않았다. 궁의가 싫으시면 내의원(內醫院:황궁의 약과 약의 처방전을 다루는 기관)에서 탕약이라도 지어 오겠다는 것조차 마다한 이설이지만, 기연과 유강이 궁 밖에서 약을 사 오겠다는 말은 말리지 못하였다.

“옛다, 이게 마지막이다.”

이설이 어제 입었던 옷을 가져온 단향이 연화의 머리 위에 던지며 깔깔 웃었다. 연화가 성질을 꽥 부리며 물을 튀기자 더 크게 웃으며 도망갔다.

연화는 이설이 입는 이 회백색의 옷이 좋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옷감이라 구하기도 쉬웠고, 뭣보다 이설에게 잘 어울렸다. 은회색 머리카락을 푸르고 이 옷을 입고 있는 이설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고아하고 신비로웠다. 이설은 정말 금국인들과 달랐다.

세답 일을 마친 연화가 종종걸음으로 이설의 침소로 달려갔다.

“마마! 몸은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아…, 연화구나. 그래, 많이 좋아졌다.”

“왜 누워 계시지 않고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어? 환복하셨네요?”

이설은 침상에서 내려와 침의를 갈아입고 머리 손질 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혼자서 질끈 묶고 말았을 텐데, 주 상궁이 완강히 고집을 부려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궁녀 손에 머리를 맡겼다. 면경에 비추어 보려는데, 예쁘게 했으니 걱정 말라며 주란이 면경을 뺏어 간다. 평소보다 머리가 무거운 걸 보니 단잠 말고 또 다른 비녀를 꽂았나 보다.

“비녀를 또 꽂았구나.”

“탄영당에 가시는데 이 정도는 약과입니다.”

“마마, 탄영당에 가십니까?”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는 연화가 오늘도 주 상궁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탄영당에 가시는데 이 정도 비녀로는 택도 없습니다.”

주 상궁 눈치를 보며 입을 비죽이는 연화가 유심히 이설의 머리를 살폈다. 어디 하나 모난 곳이라도 있을까 찾아보려 애쓴다.

“폐하의 후궁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단잠 하나만 꽂아 마마를 보낼 수는 없습니다. 지금쯤 다들 가락지 하나라도 더 끼려고 난리일 걸요?”

“연화 말이 맞습니다. 다른 후궁 마마들이 무슨 대단한 정사를 논하려 탄영당에 모이는 줄 아십니까? 다 자기들 금가락지나 자랑하러 오는 겁니다.”

“단향이 네 이년. 마마 앞에서 말조심하거라.”

기어코 주 상궁의 쓴소리를 들었지만 단향은 별로 기죽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심통 난 얼굴로 툴툴거리기만 할 뿐. 가락지 하나 없이 빈 이설의 손이 성에 차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결국 아무 가락지도 끼지 않은 빈손으로 이설이 비은궁 문을 나섰다. 나무 그늘이 없는 궁 밖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으나 점차 눈이 적응을 한 모양인지 눈을 가늘게 뜨지 않고도 앞을 볼 수 있었다.

처음 나서보는 대낮의 황궁 외출은 힘들었다. 어젯밤부터 몸이 좋지 않아 기운이 없기도 했고 오며 가며 마주치는 궁인들이 저를 보고 멀리서부터 수군거리는 것도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조롱인 것 같기도 하고, 안타까워 혀를 차는 것 같기도 하고. 뭐든 좋은 의미는 아닐 얘기들이 사람들 모인 곳곳에서 들렸다.

마음이 편치는 않으나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묵묵히 걷기만 하는 이설 뒤로 궁녀들만 씩씩거리며 울분을 가라앉혔다. 당장에라도 쫓아가 머리채를 잡을 것처럼 구는 아이들을 달래는 게 더 진이 빠졌다.

“모른 척하거라. 궁에서 오가는 말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 없잖느냐.”

“저것들이 누구 안전이라고 저런 소리를 쑥덕거린답니까? 저런 것들은 아주 혼쭐머리를 내 줘야 합니다.”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닌데 뭘. 헌데 탄영당은 아직 멀었느냐?”

“저기 모퉁이만 돌면 됩니다.”

아직 좀 머리가 아프다. 참석을 다음으로 미루지 않은 것을 조금 후회했다. 사실 몸도 몸이지만 어제 황제의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아 정신이 아득해졌다.

허나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말라. 낮이든, 밤이든. 이곳에서 그대를 보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감정 없다 느꼈던 황제의 목소리는 착각이었다. 그것은 완전한 냉대였고, 상대를 향한 적대감이었다. 그 뒤에 남겨진 이설은 무력한 좌절감으로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첩지를 받은 이후로 처음 만난 황제는 그 흔한 안부를 묻지도 않았다. 아마 이설이 신분을 밝히지 않고 얼굴을 보였다면 누군지도 몰랐을 것이다. 황제에게 이설은 겨우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자신을 등지고 멀어지는 황제의 뒷모습이 눈앞을 아른거린다. 황제 생각만 하면 자꾸 의기소침해지는 자신을 질책해 정신을 차렸다가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감정이 야속하다.

내내 이 생각을 반복하다 정신을 차리니 탄영궁 문 앞이다. 옆에 선 주 상궁이, 고하겠습니다 하고 말하기도 전에 안쪽에서 누군가 문을 열었다. 흠칫 놀란 이설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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