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0화
“마마! 여기 이 잡초 냄새를 맡아 보셔요! 정말 푸릇푸릇하고 좋지 않나요?!”
잡초 냄새를 맡아 보라는 말은 처음 들어 봤다. 전 같았으면 웃고 말았을 소리에 이설은 대충 고개만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뺐다.
“저기 화홍이와 단향이가 누구와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냐.”
“아, 아무도 아닙니다! 담장 밖에 아는 이가 있나 봅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마마께서는 얼른 궁 안으로 들어가셔요. 벌써 석반 드실 시간입니다!”
해가 아직 밝은데 석반이라니. 뭔가 숨기는 기색이 역력한 주란을 옆으로 밀고 담장 가까이 다가갔다. 다들 할 일을 하다 말고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서는 이설을 보지만, 누구 하나 말릴 생각은 하지 못했다. 누군가 상궁 마마 모셔와, 하는 소리를 들으니 더 의심스러워졌다.
“화홍아, 단향아. 게서 뭘 하고 있는 거니?”
“마, 마마…!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궁 밖에 아는 이가 있어 잠깐 얘기를 나눈 것입니다.”
어지간한 일로는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 화홍이 저리 당황하니 묻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다.
“누가 분명 쥐새끼처럼 훔쳐본다 하지 않았느냐.”
“마마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소인들이 해결할 테니 괘념치 마시옵소서.”
“그리 숨기는 걸 보니 내 일이긴 한가 보구나.”
“…….”
“화내지 않을 것이다. 말해 보아라.”
“정말 아무 일도 아닌데…….”
우물쭈물 담장 밖과 이설의 눈치를 보던 단향이 화홍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낙담한 얼굴의 화홍이 자포자기한 듯 말했다.
“마마께서 화내실까 말씀드리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왜 말하지 못하느냐.”
“속상하실까 염려되어 말씀드리지 않는 겁니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땅만 보며 우물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용케 알아는 들었다. 이설이 고개를 갸웃했다가 재차 물었다.
“난 정말 괜찮으니 도대체 무슨 일인 건지 말해 보거라.”
“요즘 저희 궁 안을 훔쳐보는 자가 많습니다.”
“무슨 연유로?”
“…마마를 보려구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깜짝 놀랐지만 곧 그 대답이 수긍이 갔다.
황제에게 이름을 새기고 정인으로 입궁한 주제에 소의 첩지와 비은궁을 하사받고 초야에 소박까지 받은 후궁이다. 궁인들이 궁금히 여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보기 드문 연국의 왕족이기도 했고, 심지어 공주도 아닌 왕자였다. 지루한 황궁 생활에 이런 구경거리를 마다할 리 없다.
이런 까닭에 주 상궁이 관청에서 사람을 불러 앞뜰의 소제를 맡긴다 했을 때 말린 것이다. 가급적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고 싶었다. 별거 아니라 마음 단단히 먹고 있긴 하지만 공연히 사람들의 손가락질 받을 것을 알면서 궁 안에 사람을 들일 수는 없다.
이설의 천성이 무덤덤하고 예사스럽긴 해도 이런 경험 없는 모욕에 완전히 통달한 것은 아니었다. 이설은 아직도 가끔 새벽달을 볼 때 하염없이 황제를 기다리던 그 순간이 떠올라 마음이 서글펐다.
이설이 한참 동안 말이 없자 괜히 소리를 했다 생각한 화홍이 송구하다 머리를 조아렸다.
“네가 송구할 일이 아닌데, 왜 사과를 하느냐.”
“제가 마마를 속상하게 한 것 같아…….”
“속상하지 않다. 어차피 저러다 말 것이다. 앞으로 상대하지 말거라.”
“전에는 담장이 더럽다며 쳐다도 안 보던 것들이 요즘은 담장 밖을 얼마나 기웃거리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생과방(生果房 :생과, 전과, 다식 등 별식을 만드는 육처소 중 하나) 어린 계집년 하나가 마마께서 아끼시는 능소화도 한 움큼 뽑아 갔습니다.”
약올라 죽겠는지 이를 가는 단향을 보니 웃음도 나고 괜히 가라앉았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담장 밖으로 자라는 능소화는 요즘 이설이 꽃을 피우기 위해 한창 공을 들이는 것이었다.
담장 아래로 늘어지는 꽃이 얼마나 예쁜지 설명해 주어도 궁녀들의 반응이 시큰둥해 반드시 이 절경을 보여 주겠다 다짐하고 물을 길어 주는 것조차 직접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설이 그렇게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것을 한 움큼이나 뽑혀 뺏겼으니 분한 마음은 이해가 갔다.
“능소화 꽃이 피고 잎이 더 풍성하게 자라면 이 궁 안이 보이지도 않을 게다. 그때까지만 참아 보자꾸나.”
“앞으로는 저와 화홍이 담장 밖에서 보초도 설 예정입니다.”
“아서라. 나무 그늘 아래도 이리 더운데 담장 밖은 더하지 않겠느냐. 그러다 정말 큰일 난다.”
“궁 안이 담장 밖보다 더 시원한 건 맞지만 이 정도면 보통의 여름날입니다. 아직 가장 더운 날은 오지 않았는걸요.”
이설은 이미 평생 살며 가장 더운 날의 기록을 깨고 또 깼다. 입고 있는 의복은 연국에서 입던 침의보다도 얇았고, 궁녀들은 가슴 윗부분과 어깨가 훤히 드러난 옷을 입고 그 위에 얇은 하피를 걸쳤다. 연국에 비하면 옷차림이 가벼워 좋았지만 더운 것 그 자체는 적응하기 힘든 일이었다. 함께 연국에서 온 기연과 유강의 말로는 햇빛이 강한 것 말고는 큰 온도 차는 없다고 한 걸 보면 자신이 유별나게 더위를 못 견디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마마께서는 앞으로 염려 놓으세요. 저희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설이 비은궁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에도 불구하고 이설 아래에 남은 궁녀들은 이곳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편이었다. 주 상궁의 말대로 여기를 떠나면 황궁 어느 곳에도 머무를 곳이 없었고, 있다 해도 세답방 허드렛일이나 해야 할 테니 그럴 만도 했다.
담장을 둘러보며 능소화 상태를 한번 보려고 했는데, 화홍과 단향에게 등 떠밀려 다시 도월소로 되돌아왔다. 바윗돌에 앉아 다시 서책을 펴니 연화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저년들 혼구녕을 단단히 내줄 테니 걱정 말라 말한다. 말씨가 정말 고운 아이들이었는데. 그래도 자신을 눈요깃거리로만 여기는 궁인들 사이에 내 편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 좋았다.
보고 있는 서책은 주 상궁이 궁 밖에서 들여온 물건이었다. 이설이 연국에서 가져온 서책들을 모두 보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자 사람을 시켜 서책 몇 권을 더 들여왔다. 대부분 금국의 역사, 신화, 문화 등에 대한 것들이었지만 개중에는 약초와 식물도감도 있었다. 물어 대답해준 적이 없는데, 용케 이설의 관심거리를 알아냈다.
주안은 해가 잘 들고 날이 쾌청해 물만 넉넉히 주면 무슨 식물이든 잘 자란다. 도감에 그림을 보니 연국에서는 본 적도 없는 꽃들이 많았다. 지금도 앞뜰과 후원에 꽃나무는 많지만 꽃이 핀 것은 하나도 없어 이설은 그게 못내 아쉬웠다.
책장을 넘기는데 도월소 못가에 돌을 옮기던 연화가 와서 흘끔 보고는 아는 체를 한다.
“마마, 이 꽃 이름이 무언지 아십니까?”
“글쎄, 모르겠구나. 연화 너는 아느냐.”
“금잔화입니다.”
“민들레도 몰랐던 네가 어찌 이 꽃 이름은 아느냐?”
“황궁 저쪽 누각 뒤에 가면 잔뜩 피어 있어 알고 있습니다.”
“잔뜩?”
“예! 어찌나 예쁜지, 저만 알고 싶어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않은 곳입니다. 마마께만 몰래 알려 드리는 거예요.”
“그 정도로 예쁘다면 벌써 궁인들도 다 알고 있지 않을까?”
“사용할 일이 없는 오래된 누각이라 발길이 끊긴 지 오래입니다. 저도 입궁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길을 잃고 발견한 곳입니다.”
근처에 다른 아이가 들을까 속삭이는 연화가 헤죽 웃었다. 칭찬을 바라는 아이 같아 이설이 덩달아 웃으며 어깨를 토닥여 주자 볼이 발그스름해졌다.
도감에 그려진 그림은 꽃의 생생한 색이나 모양을 담지는 못한다. 금잔화는 더운 기후에 자라는 꽃이라 연국에서는 보기 힘들다. 일단 씨앗이나 모종만 있다면 키우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 미관을 해치는 잡초와 풀들을 거의 다 뽑은 덕에 넓은 뜰에 꽃이든 나무든 심을 자리는 충분했다. 곰곰이 생각을 하던 이설이 연화에게 물었다.
“그 누각이라는 곳은 여기서 얼마나 멀지?”
“태금궁과 대전을 가로질러 가면 그리 멀지 않습니다.”
“석반을 들고 부지런히 갔다 오면 해시(亥時:아홉 시부터 열한 시) 전에는 돌아올 수 있겠구나.”
“예? 마마께서 다녀오시려구요?”
이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연화가 당황했다.
“마마께선 입궁 후 한 번도 비은궁을 나가 본 적이 없으시지 않으십니까?”
“이참에 나가 보면 좋지 않겠느냐?”
“하지만…….”
“걱정 말거라. 석반을 들고 해가 지면 다녀올 테니. 그때쯤이면 궁인들 눈에도 띄지 않을 게야.”
“마마께서 잘못하신 게 있어 궁인들 눈에 띄면 안 되는 게 아닙니다! 고 입만 싸게 놀리는 잡것들을 보고 마마께서 맘이 상하시…….”
“알았다, 알았어. 연화 네 말 다 알았으니 그만하거라.”
왈칵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연화 어깨를 다독여 급히 달랬다. 입을 삐죽이는 연화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누각 이름이 무엇이냐.”
“초록 기왓장을 올린 누각입니다. 이름이 아마…….”
자주 가는 곳이 아닌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주 상궁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하는 찰나, 연화가 손뼉을 쳤다.
“녹염각입니다!”
*
“녹염각 말입니까?”
“그래, 녹염각 말이네.”
석반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는 이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발길이 끊긴 누각이라더니, 황궁 사정을 뭐든 훤히 알던 주 상궁도 녹염각은 생소한 곳인지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곧 기억났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예, 대전을 가로질러 한참을 가면 있는 오래된 누각이옵니다.”
“한참을 가야 한다고?”
“황궁 전체 크기를 헤아려 보면 여기서 멀다고 할 수는 없으나 소인의 걸음으로는 여기서 이각 정도는 걸릴 겁니다.”
생각보다 멀군.
함께 걸으면 제 걸음이 느려 주 상궁이 걸음 속도를 맞추는 걸 알고 있다. 그 걸음으로 이각이라면 제 걸음으로는 그보다 더 걸리는 셈이었다. 바삐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황궁을 너무 늦은 시간에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조금 고민이 됐다.
뜬금없이 아무도 찾지 않는 누각의 위치를 물어 대답을 듣고는 고민하는 표정이 길게 이어졌다. 찻잔에 차를 채우며 주 상궁이 물었다.
“갑자기 녹염각은 왜 물으십니까, 마마.”
“녹염각 앞에 금잔화가 만발하다 들어, 보고 싶어 물었네. 주 상궁 자네도 보았는가?”
“금잔화인지는 모르겠으나, 샛노랗고 다홍색의 꽃들이 만발해 있는 건 보았습니다.”
“그게 금잔화라네. 예쁘지 않던가?”
“가까이서 본 건 아니라…. 샛노란 꽃이 도월소보다도 넓게 피어 있으니 아름답기는 할 것 같습니다.”
도월소는 꽤 넓다. 나룻배를 하나 띄어도 될 정도니, 그 넓이만큼 금잔화가 만개해 있다면 절경일 게 분명하다.
갈 길이 멀다 하며 시무룩해졌던 마음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주 상궁도 저리 말하니 직접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지고 마음이 급해졌다. 해가 저물기 시작했으니 곧 있으면 날이 어두워질 거다. 걸음이 느린 자신이니 서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