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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9)화 (9/300)

달의 황홀경

9화

모두들 황제가 이설을 박대한다 수군거렸지만 황제는 이설을 박대할 만큼의 관심조차도 없었다. 물처럼, 공기처럼 그저 존재 자체에 의식을 두어 본 적이 없다. 초야에 비은궁을 찾아가지 않은 것은 윤 내관이 일러 주기 전까지 이설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알고 난 뒤에도 찾아가지 않은 건 고의였다.

여인도 아니고 사내이니 그것에 자존심 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리어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같은 사내에게 안기고 싶어 하는 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약소국이기는 하나 그래도 왕족은 왕족. 사내에게 안기는 수치보다 초야에 소박맞는 치욕이 더 참을 만할 테지. 둘 중 하나도 참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그자가 짊어질 짐이다. 황궁에 들어온 이상 저런 치욕쯤은 견뎌야 한다. 제게 이름을 준 정인이라고 해서 구명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사실 진짜 자신의 정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니.

소의 첩지와 비은궁을 하사한 것은 다분히 충동적이긴 하였으나 번복할 생각은 없다. 적당한 때가 되면 움직여도 늦지 않다.

“폐하 침수 드실 준비를 하오리까?”

문밖 윤 내관이 조심스레 물었다. 언제 해가 진 건지, 밖을 보니 이미 캄캄한 밤이다. 금국의 밤은 순식간에 찾아온다. 잠시 한눈을 팔았다 돌아보면 달이 중천이다. 새벽잠을 설쳐 요즘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평소보다 일렀다.

“잠시 기다리거라.”

평소 같았으면 침전에 들었을 시간. 황제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수에 들기 전 가벼운 산책이라도 하는 것이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태의의 말이 왜 하필 그때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황제가 문을 열고 나오자 궁인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렸다.

“윤 내관.”

“예, 폐하.”

“녹염각(綠染閣)으로 간다.”

*

이설은 처음 금국의 평복을 입었을 때 재차 궁녀 단향에게 물었다. 이것이 정말 사내가 입는 평복이냐고. 단향은 그렇다 했고 이설은 똑같은 질문을 각기 다른 궁녀들에게 모두 물었으나 대답은 한결같았다.

마마 이것이 금국의 사내들이 입는 평복이옵니다.

거짓말이든 농이든 절대 할 것 같지 않은 주 상궁에게도 같은 대답을 들었을 때야 이설은 환복했다.

여인의 의복을 입는 것 같은 이설도 곤욕이지만, 그걸 준비해야 하는 궁녀들도 곤욕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의복이야 안 입을 수 없는 것이고 준비된 게 그것뿐이니 어쩔 수 없이 입는다지만 이설은 여타 장신구들은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금가락지를 끼는 것도 싫다, 입술에 연지를 바르는 것도 싫다, 비녀를 꽂는 것도 싫다. 발만 동동 구르는 궁녀들에게 이설이 겨우 허락한 것은 비취옥으로 만든 작은 단잠뿐이었다. 그나마도 궁녀들이 해 주는 머리 손질을 받지 않고, 이설이 스스로 반 묶은 머리 어딘가에 푹 찔러 넣는 게 전부라 궁녀들은 애가 닳았다.

매일 아침 의복과의 전쟁을 치르던 이설과 궁녀들은 열흘이 지날 무렵 마침내 타협점을 찾았다. 아직 바느질 솜씨가 좋지 않던 단향이 연습 삼아 엉성하게 지은 회백색 옷을 이설이 마음에 들어 한 것이다.

이설은 더 이상 아침마다 한숨을 쉬는 일이 없어졌고, 궁녀들도 이설의 눈치를 덜 보게 되어 좋았다. 이따금 이설은 옥빛이나 쪽빛 같은 색의 의복을 입기도 했지만 보통은 회백색 의복을 입는 날이 많았다. 처음에는 영 마땅치 않아 하던 궁녀들도 머리카락 색과 엇비슷한 그 옷이 이설과 무척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마마, 여기 연화가 뽑은 것 좀 보셔요! 꽃나무를 잔뜩 뽑았지 뭡니까?”

“아닙니다, 마마! 제가 뽑은 건 다 잡초입니다. 단향이야말로 멀쩡한 꽃가지를 몽땅 잘라 냈습니다!”

한때는 그 크기가 엄청났을 고목이 베어진 자리 위에 앉아 있던 이설이 큰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멀리 연화와 단향이 치맛자락을 엉거주춤 들고 앞다투어 달려오고 있었다.

“뛰지 말고 오거라! 흙이 젖어 미끄럽다!”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지 이설의 앞에 설 때까지도 둘 다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이설의 앞에 불쑥 내미는 흙 묻은 손에 꽃나무와 꽃가지가 들려있다. 이설이 보고 있던 서책으로 얼굴을 가리며 곤란한 표정을 감췄다. 눈칫밥으로 이 바닥에 남은 아이들답게 제 주인의 반응에 금세 사색이 된다.

“다, 다시 가서 심고 오겠습니다!”

꽃이 피기 직전의 봉오리가 달린 작은 나무를 쥔 연화가 다시 뒤를 돌아 냅다 달린다. 꽃나무는 다시 심기라도 하지, 나뭇가지를 댕강 잘라 온 단향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이설의 눈치만 봤다.

“저… 그게…, 잎이 나지 않은 가지이기에 죽은 줄 알고…….”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지, 죽은 가지는 아니란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마마!”

아무리 애지중지 돌보고 있는 나무들이라지만 설마 나뭇가지 좀 잘라 내는 실수 좀 했다고 죽음을 면치 못할 거라 생각한 걸까. 이설이 다시 곤란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죽을죄를 짓기까지야. 가서 기연이에게 쳐 내야 할 가지 고르는 법을 물어보거라. 잘 알려 줄 게다.”

“기연 님은… 무서워서 싫습니다. 자꾸 똑같은 것을 묻는다 얼마나 화를 내시는지 마마는 모르실 겁니다.”

“나도 안다. 유강이가 혼나는 것을 매일 봤는걸.”

“기연 님은 마마께만 상냥합니다. 저희랑은 얘기도 안 나누시는걸요.”

입을 삐죽이는 단향이 기연이게 이미 몇 차례 혼이 나는 것을 봤기 때문에 이설도 그저 웃고 말았다. 궁녀 아이들은 기연과 친해지고 싶어 이런저런 말을 거는데 정작 기연은 거들떠도 안 보니 다들 심통이 단단히 난 것을 알고 있다.

“이 가지는 저쪽 도월소(燾月沼) 옆에 잘 심어 두거라. 운이 좋으면 싹이 날 수도 있으니.”

대번에 화색이 돈 단향이 알았다 대답하며 왔던 길을 다시 뛰어갔다. 저러다 정말 다칠 텐데. 방금 물을 준 흙 바닥이 아직 미끄럽다는 걸 얘기해 줘도 잘 듣지 않는다. 그래도 아이들이 밉지는 않아 이설은 개의치 않았다.

황궁에 들어온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하루는 처음 황궁에 왔던 날뿐. 그 뒤로는 매일이 비슷비슷한 날들이었다.

비은궁은 궁의 목재와 건축만 훌륭했던 게 아니었다. 궁의 담장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이설의 눈에는 완벽한 전경의 밑그림이었다.

얼핏 고목들이 만들어 내는 음침함은 단지 손질 안 된 나뭇가지들이 이리저리 뻗어 궁에 햇빛이 드는 것을 모두 막았기 때문이다. 그늘진 바닥에는 풀과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다. 꽃나무도 있으나 사람의 손질 없이 버틸 수 있는 몇 종류만 살아남은 것일 뿐, 꽃을 피운 것은 아직 없었다.

나무와 풀, 꽃 하나하나가 의미 없이 심은 것도 아닌 게 분명했다. 이설이 알기로는 대부분의 것들이 물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는 나무와 꽃이었다. 금국의 날씨를 헤아려, 이 궁에서도 적은 양의 물로 오랫동안 살 수 있는 것들을 고르고 골라 심었을 것이다.

이설은 천지에 널린 잡초와 나무를 보며 울상을 짓는 궁녀들을 앞장서 소매를 걷어붙였다. 영토의 반 이상이 숲이며, 궁조차 산속에 지어진 연국에서 평생을 자란 이설이다. 이까짓 일들이야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었다.

주 상궁은 흙바닥에 쪼그려 앉아 잡초를 뽑는 이설에게 충격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소맷자락에 흙먼지를 묻힌 채 저를 보고 웃는 이설에게 이렇다 해야 할 말을 떠올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전연사(典涓司:궁의 수리와 청소를 맡아 보던 관청)에 사람을 보내 달라 연통을 보내겠습니다. 마마께서 이런 일을 직접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옆에 있던 궁녀에게 수파(手帕:궁중에서 부녀자들이 사용하던 손수건)에 물을 적셔 가져오라는 말을 이르며 주 상궁이 딱딱하게 말했지만 이설은 고개를 저었다. 괜한 일에 사람을 부르지 말라며,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지내고 싶다는 말에 주 상궁은 결국 수긍했다.

이설이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불철주야로 화원을 가꾸는데 궁녀들이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이설에게는 진두지휘를 맡기고 잡초를 뽑고 가지를 치고 도월소에 이끼를 치우는 것은 이제 궁녀들의 일이었다. 다른 후궁전의 궁녀들은 날마다 새 옷을 짓고 유명한 세공 상인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장신구 세공을 부탁하는데, 비은궁의 궁녀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후원을 손질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이설 님! 화홍 누님이 또 담장의 파산호(爬山虎:담쟁이덩굴)를 몽땅 잘라 내었습니다!”

석반 들기 전까지 조용히 서책을 읽으려던 이설에게 유강이 뛰어왔다. 이제는 이설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주 상궁의 호된 꾸짖음에도 유강은 꿋꿋이 이설의 이름을 불렀다. 이설도 마마라고 불리는 것보다야 훨씬 좋았지만 단순히 자신이 좋고 나쁘다로 허락되는 문제는 아니기에 유강을 질책했다.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 이설을 보고 유강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루 소의 마마! 화홍 누님이 또 사고를 쳤지 뭡니까! 하며 말을 고쳤다.

“제가 분명 아래로 길게 떨어진 것들만 조심히 잘라 내라 그리 당부를 했는데 또 일을 그르치고 말았지 뭐예요.”

“담장의 파산호는 네가 관리하기로 한 곳이 아니냐, 강아?”

“화홍 누님이 저만 쉬운 일을 맡았다 툴툴거리시어 제가 어디 누님께서 한번 해 보라 하였습니다.”

“전정(剪定:식물의 곁가지 따위를 자르고 다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화홍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제가 옆에서 잘 보고 있으니 다치지 않습니다!”

“그럼 화홍이 파산호를 몽땅 자른 것도 다 옆에서 잘 보고 제대로 알려 주지 않은 네 탓이겠구나.”

아니, 그건 아닌……!

짐짓 잘난 척을 하던 유강이 허를 찔려 말문이 막혔다. 이설이 소리 내어 웃으며 저를 지나쳐 가자 씩씩거리며 뒤를 따랐다.

한산하던 후원과 달리 앞뜰은 궁녀 여럿이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석반을 준비하는 궁녀들을 빼고 모두 이 일에 매달리고 있는 중이다. 가뜩이나 많지 않은 궁녀들이었는데 비은궁 첫날 이설의 말에 짐을 싸 나간 자들도 있어 손이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설은 시간이 많았고 이 일을 소일거리처럼 즐기고 있어 느릿하게 진행되는 일들에 불만은 없었다. 이 적은 인력으로도 벌써 잡초 많던 앞뜰이 깨끗해지고 햇빛을 가리던 가지들도 많이 쳐 내 궁이 훤해졌다. 처음에는 별다른 기대 없이 상전이 일하는 것만 볼 수 없어 따르던 궁녀들도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깨끗해지는 앞뜰과 후원을 보며 신이 나서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화홍에게 전정하는 법을 더 자세히 알려 주고 이설은 도월소 옆 판판한 돌에 앉았다. 달을 비추는 연못이라는데 아직 수면에 떠 있는 나뭇잎들을 건지지 못해 확인하진 못했다. 주 상궁의 말로는 깊이가 제법 깊어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단다.

인공으로 만든 연못이긴 하지만 지하수가 지나는 자리에 만든 연못이기 때문에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도 항상 일정한 수심을 유지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이곳 나무와 풀들이 이렇게까지 버틴 이유를 알듯 싶었다.

“이 잡년들! 뭘 그리 쥐새끼처럼 훔쳐보는 거야!”

“예끼, 꺼져라, 이년들아!”

“쉬이, 조용히 해! 마마께서 저기 계신다!”

나뭇잎을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실리는 뭘 잘못 들었나 했다. 늘 고운 소리만 하는 아이들이라 저런 말 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놀라 주변을 살피는 이설의 눈치를 보며 가까이 있던 주란이 이설의 시야를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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