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7화
“꼭 드려야 할 말씀입니다, 폐하.”
“불허한다 하지 않았느냐. 내 너에게 맡긴 일들이 분명 있을 텐데 왜 이곳에 서 있는 것이냐.”
“감진어사 윤중숙의 고발 문서 건이라면, 지명된 파감 지방 관리들을 모두 추포하라 연통을 보냈습니다.”
황제가 아무 반응이 없자 차란이 말을 계속 이었다.
“또한 밀직부사 나정택에게 황궁으로 납품되는 비단 중 경 국에서 수입되는 것들의 상단 출처를 은밀히 조사하라 명했고, 광흥창(廣興倉:관리들의 봉급을 관리하던 관청) 비리 관리들을 모두 엄벌에 처하고 추가 조사 중입니다. 혹여 달포 전 명하셨던 중앙 구황청(救荒廳:흉년에 백성들을 구제하는 관청) 일이라면, 관리 열여덟 명을 각각 지방성으로 차출하여…….”
차란이 딱 거기까지 말했을 때, 황제가 읽고 있던 상소문을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이각 만에야 차란에게 향한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았지만 정작 차란은 태연한 표정으로 묻는 게 다였다. 계속 고할까요? 묻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약간 섞여 있었다.
“…흑영.”
“…….”
“지금부터 비차란 저놈이 한마디만 더 뻥긋할 시, 혀를 잘라 네 화살 과녁으로 삼아도 좋다.”
“폐하, 농이 지나치십니다.”
“그리해 달라, 아주 재촉을 하는구나.”
되로 주고 말로 받게 생겼다. 농인 걸 아는 데도 섬뜩해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다. 게다가 융통성이라고는 개구리 눈물만치도 없는 흑영이 벽 앞에서 정말 스윽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간이 다 떨어질 뻔했다. 그러나 황제와 알고 지낸 세월 덕분에 는 건 담뿐이라, 금세 평정심을 찾은 차란이 힘없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제 세 치 혀를 자르고 싶으시다면 폐하께서 직접 해 주십시오. 그럼 미천한 이 몸, 저승 가는 길이 적어도 영예롭긴 할 테니.”
“그깟 혀 하나 뽑은 게 저승까지 갈 일이냐.”
황제의 무념함은 표정과 어투, 그리고 목소리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조롱도, 위협도 모두 얼핏 들으면 무던한 것 같은 말투이나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황제가 휘휘 젓는 손짓에 흑영이 다시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검은 복면에 내놓은 눈이 차란과 마주쳤지만 아무런 반응 없이 시선을 비꼈다. 한결같은 반응이 놀랍지도 않다.
황제는 다시 상소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반도 다 읽지 않은 것 같은 상소문 하나를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의도된 것인지, 제 바로 앞 발치에 내리꽂힌 상소문을 물끄러미 내려다본 차란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상소문을 주워 들었다.
“회 국 군사 경계선에 주둔 중인 추암 무장의 상소문이 아닙니까?”
“그딴 게 상소문일 리가 없다. 앞으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상소를 내 정무에 들였다간 정말 저승 구경할 생각이나 하여라.”
제가 쓴 상소도 아니고, 전국 5도 27성에서 올라오는 상소를 하나하나 자신이 검열한 뒤 황제에게 올리는 것도 아닌데 왜 그 화가 자신에게 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지만 생각하는 바를 곧이곧대로 내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변방 국경으로 좌천된 무장의 상소이니 또 얼마나 구구절절 기가 막힐까. 나름대로는 황제의 마음을 헤아리며 송구하다 고개만 숙였다.
황제의 화풀이를 듣거나 숙청 위협을 들으러 온 게 아니었는데. 멀리 기둥에 새겨진 봉황의 깃털을 세며 스스로 신세타령하기를 또 한참. 끝내 황제가 상소문을 모두 읽을 때까지 다시 입도 뻥긋 못한 차란은 가만히 황제의 옆자리만 지켰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라 어지간하면 다음 알현에 고하려 했겠지만 이 정도면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생각했다.
“폐하.”
“…내 즉위하고 가장 후회하는 게 뭔지 아느냐?”
불쑥 괜한 걸 묻는 황제에게 모른다 답하기 송구스럽고, 그렇다고 아는 걸 답하자니 그건 또 그거대로 곤란하여 대답을 못 했다. 황제는 참을성이 강하나 차란은 적용 대상 밖이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답한다.
“비차란 네 놈에게 승상 자리를 내어 준 것이다.”
예상하고 있던 대답에는 상처받지 않는다. 사실 저 말을 처음 들었을 때도 차란은 아무렇지 않았다. 즉위 전 황자나 황태제 시절에도 황제는 저와 비슷한 말을 차란에게 곧잘 하곤 했다. 보다 아름답고 숭고한 얼굴로,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모욕을 듣고도 태연하게 송구스럽다 고개만 숙이는 차란을 보며 황제는 기가 찬다는 듯 헛숨을 뱉었다.
아무리 비차란이 자신의 구박과 모욕에 익숙하다고는 하나 기실 이 정도까지 참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걸 황제는 알고 있었다. 말을 꺼내려 몇 날 며칠을 기다린 것도 알고 있다. 적당한 명분을 세우기 위해 음흉하게 기다린 그 참을성이 기특하지는 않다.
“허나 신 비차란. 오늘 이 자리에 내려오더라도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 주시옵소서.”
세 치 혀에 기름을 바르기라도 했는지 기가 막히는 말만 골라 하는 차란이 놀랍지는 않다. 황제가 코웃음을 치며 차란을 봤다.
“네 승상 자리를 걸어야 할 만큼 루 소의가 중요한 사안인 것이냐?”
차란이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았던 황제나, 황제가 제 의중을 알고 있었다는 것 역시 예상하던 차란이나 누구 하나 놀라고 당황하지는 않는다. 차란이 잠시 생각하는 동안 황제가 삐딱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약삭빠른 놈. 머리 굴리는 소리가 다 들린다.
“실언하였습니다. 송구합니다. 신 비차란, 폐하께서 물러나라 명하시기 전까지 천지가 개벽하는 한이 있어도 폐하를 모시겠습니다.”
결국 의도했던 대로 황제에게서 먼저 루 소의 얘기를 꺼내게 한 비차란이 한결 풀어진 웃음으로 허리를 숙였다. 차란의 계략에 휘말렸다 생각하여 황제가 노여워한 것은 아니었다. 차란도 그리 생각하지는 않았다. 황제는 그저 차란의 장단에 맞춰 주고 있다는 걸, 저 멀리 벽 뒤에 기척을 숨기고 있는 흑영까지도 알고 있었다.
황제가 흘러내리는 긴 머리를 쓸어 넘기자 소매에 가려진 팔목이 드러났다. 팔목에 감긴 붉은 비단은 그 아래에 무엇인가를 가리기 위해 묶어 놓은 것이다. 이 황궁에서 그것을 본 자는 기껏해야 서너 명. 그중 하나가 비차란이었다.
금의 여름이 막 시작할 무렵의 어느 새벽 날. 황제는 은밀히 윤 내관을 통해 차란을 침소로 들였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당황한 기색 하나 안 내비치던 차란이지만, 황제가 침의 소매를 걷어 제 팔목을 보여 준 순간 저도 모르게 황제의 손을 잡아당겨 눈을 가까이했다.
황제의 손목 안쪽에 은사로 수를 놓은 듯 이름 석 자가 천자(天字:고대에 대륙의 모든 나라가 통용으로 사용하던 글자)로 아로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저 탁한 잿빛 색이 아니고 은사라 확신했던 이유는, 새벽 어스름한 햇빛을 받은 이름이 은빛으로 은은히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새기는 걸 비유적으로 ‘징금수 놓다’라고 흔히들 얘기하는데, 이래서야 정말 황제에게 누군가 징금수를 놓은 게 되지 않겠는가. 징금수란 그저 비유적 표현일 뿐 보통의 이름은 붉거나 피부색보다 조금 어두운 정도로 새겨졌다.
황제가 왜 저 이름을 가리고 다니는지는 차란도 알지 못했다. 이설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황제는 이설을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비단으로 손목을 꽁꽁 감싸고 다녔다. 모두들 그 이름의 주인을 너무 진귀하게 여겨 함부로 이름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라 지레짐작했지만 차란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황제에게 그런 사사로운 감정이 있을 리가 없었다.
“네 장단을 얼마나 더 맞춰 줘야 나를 혼자 내버려 두겠느냐.”
“폐하를 삼 보 옆에서 보좌하는 것이 신의 책무입니다.”
“나는 네게 그런 책무를 준 적이 없다. 앞으로 오 보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
황제가 여기서 더 말을 돌리거나 차란을 밖으로 물리면 기회는 또 날아간다. 근래에 부쩍 심기가 언짢아진 황제에게 다시 이런 얘기를 꺼낼 수 있을까. 차란이 마음을 의연하게 먹었다. 황제는 불필요한 말이 길게 늘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용무는 언제나 서두에 놓아야 한다.
“폐하. 루 소의 마마의 품계를 정1품 귀비로 올려 주시옵소서.”
황제는 놀라지 않았고, 노여워하지도 않았다. 아무 생각도 읽히지 않는 얼굴로 손목에 묶은 비단 끈만 만지작거리는 게 전부였다. 최근에 새로 생긴 황제의 손버릇이었다.
“정2품 소의 첩지로는 태부(太師:황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직) 손조익의 견제를 완전히 누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처음 마음에 정해 두셨던 건 황후의 자리가 아니십니까? 그런데 갑자기 소의 자리를 내어 주시다니, 그날 대전에 있던 손조익의 얼굴을 보셨어야 합니다.”
“보았다. 그날 네가 일러 주지 않았느냐.”
“제 말은 하나도 듣지 않고 계셨잖습니까.”
“모두 들었고, 모두 보았다.”
이설에게 품계를 내리던 날의 광경을 잊지 못한다. 손조익 그자의 표정은 그중 가장 압권이었다. 예정되었던 혼례식을 황제의 일언지하에 취소시켰을 때 뜻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조짐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설마 황제와의 독대 중 약조됐던 사안을 온 황궁 신료들이 보는 와중에 깨 버릴 줄은 몰랐을 테니, 그날 그 표정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손조익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벌써부터 사마(司馬: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관직으로서 주로 군사 방면을 담당) 육추명과 사도(司徒: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관직으로서 주로 군사 방면을 담당) 견갑승의 문지방을 아침저녁으로 드나들고 있다 합니다.”
“그래서 지금 네 말은, 내가 뒷방 늙은이의 요구대로 그자에게 황후 자리를 내어 줘야 한다는 것이냐?”
“폐하께서 가지고 있는 패는 소의 마마께서 황후일 때 가장 쓸모 있는 것이라는 걸 알려 드리는 겁니다.”
황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모든 계획의 시작은 황제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네 놈도 내가 황손을 못 보고 절명하길 바라는구나.”
조용히 차란의 말을 듣던 황제가 여상한 어투로 말했다. 멈칫한 차란이 딱딱한 목소리로 황제의 말을 부정했다.
“폐하,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낱 사내를 황후로 맞으라 종용하느냐?”
“신은 오로지 폐하의 안위를 걱정할 뿐입니다. 뭣보다 폐하가 지키시고자 하는 것을 함께…….”
“농이었다. 긴말 꺼내지 말아라. 듣기 싫으니.”
누가 저런 표정으로 농을 한단 말인가.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힌 차란이 이마에 손을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