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6화
“…….”
“상전의 명으로 하는 말이네.”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명하시는 겁니까?”
“주 상궁이 원한다면 그렇다네.”
주 상궁은 잠시 생각하듯 말을 멈췄다. 재촉할 생각은 없어 쳐다보지 않고 멀리 후원을 바라봤다. 침소로 들어오는 문 말고도 궁 뒤 후원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따로 있었다. 양 문으로 개방되는 그 문을 열어 놓으니 후원과 침소의 경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은 비록 잡초가 무성하고 초목의 푸르른 느낌보다는 음침한 그늘이 더 짙었지만 손질만 잘해 놓으면 꽤나 절경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설은 주 상궁의 엄격하고 올곧게 뻗은 심성이 마음에 들었다. 유약하다 할 정도는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우유부단하다는 말에는 딱 잘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자신에게 무척 필요한 존재이다. 그러나 자신 같은 처지의 상전을 모셔야 하는 주 상궁과 다른 궁녀들이 한편으로는 가여웠다. 기연은 이설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지만 상전을 선택할 수 없는 궁녀들의 잘못 또한 아니었다.
저 후원을 어떻게 손질하면 좋을까 생각 중이었다. 길고 외로울 황궁 생활에 좋아하는 소일거리가 생겨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닿았을 무렵 주 상궁이 대답했다.
“소신은 마마 곁에 남겠습니다.”
“정말 그래도 괜찮겠나?”
“제가 모시던 상전께서는 몇 해 전 유명을 달리하셨고 그 뒤로 견습 궁녀들의 훈육을 맡아 왔습니다. 마마께서 마음 쓰실 만큼 애정이 깊었던 곳은 아니니 심려치 마시지요.”
의연한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스치며 이설이 웃었다. 모아진 주 상궁의 손을 가볍게 두드려주며 고맙다 말하니 황송하다는 말로 답한다.
“하온데 마마. 폐가 안된다면 왜 그러한 명을 내리셨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별다른 이유는 없네. 나와 함께 온 기연과 유강은 어쩔 수 없다지만, 그저 내 궁인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정도의 선택권을 주고 싶었거든.”
“…….”
“원하는 궁이나 부서로 보내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를 떠나도 좋다는 선택권 말이야.”
자애로운 미소 끝에 쓸쓸함을 숨긴 이설은 미지근하게 식은 차 한 모금으로 입술을 적셨다. 주 상궁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제가 여쭙는 건, 무슨 연유로 저와 궁녀들이 마마를 떠날 생각을 하였다 여기시는지 입니다.”
“……나는 사내라네. 빼어난 미색도 아니고, 폐하의 정치에 도움이 될 만큼 머리가 비상하거나 그런 뒷배가 있는 것도 아니지. 폐하의 총애를 받을 수 없는 후궁을 모시고 싶어 하는 궁인이 어디 있겠는가.”
“마마께서 입궁하신 지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폐하의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어젯밤 폐하께서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겠지, 주 상궁?”
이설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눈치챈 주 상궁은 부러 대답하지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궁인 모두가 알고 있을 거야. 해가 질 때쯤이면 황궁을 드나드는 모든 자들이 알 테고, 내일이면 주안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자가 없을 테지.”
“…….”
“그리고 저 마당에 모인 궁녀들도 모두 알고 있을 걸세.”
빙그레 웃는 이설을 보며 주 상궁은 놀라지 않았다. 아마 짐작하고 있었을 터였다.
목간 가는 길에 만난 기연에게, 궁녀들을 모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거나 원하는 궁이나 부서가 있다면 떠나도 좋다 말을 전하라 일렀다. 주 상궁에게 건너 말을 전하지 않은 까닭은, 궁녀들이 행여 주 상궁의 눈치를 보고 원치 않는 데도 이설의 곁에 남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기연이 사분사분하지는 않아도 주 상궁에 비하면 덜 어려울 테니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주 상궁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하네. 일손이 더 모자라질지도 모르겠어.”
“아이들은 마마를 좋아합니다.”
“나도 저 아이들이 좋다네.”
“…마마, 소인 말씀드리기 송구스러우나……,”
“말해 보게.”
주 상궁이 이렇게 말끝을 흐리며 어렵게 얘기 꺼내는 것을 처음 본 터라 조금 긴장한 이설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잠시 적당한 단어를 고르던 주 상궁이 말했다.
“저와 함께 온 궁녀 대부분은 견습 시험에서 낙방하여 출궁을 준비하거나, 세답방(洗踏房:빨래와 다듬이질, 다림질 따위를 맡아 하던 곳) 허드렛일을 하던 아이들입니다. 궁인이 되기에 아직 기본 소양이 부족한 그 아이들을 받아 주는 곳은 그다지…… 없을 것입니다.”
무겁게 고개를 젓는 주 상궁에게 이설이 다급히 말했다.
“쫓아내는 게 아니네. 원하는 곳이 있다면, 그렇다면 가도 좋다고 한 것뿐인데…….”
“상전의 마음 씀씀이에 익숙한 궁인들이 아닙니다. 마마께서 직접 말씀하지 않으시면 오해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찻물에 젖은 입술이 벌어지며 나지막한 소리를 낸다. 경솔한 짓을 하였나, 조금 후회가 생기던 순간 복도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설의 침소 바로 앞에서 소리가 멈춘다. 기연의 목소리가 들어가도 되겠냐 기별하길래 그러라 대답했다. 문이 열리자 올망졸망한 궁녀 몇 명이 와르르 쏟아지듯 들어와서 이설의 앞에 무릎 꿇었다.
“마마…! 소인들이 무슨 잘못이라도 하였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무엇이든 저희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이 궁을 나가라는 말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제발 출궁만은 면하게 해 주세요! 시키는 대로, 뭐든 다 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난 이설이 문 앞에 곤란하게 서 있는 기연을 쳐다봤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는 말이 없어도, 그 의미를 눈치챈 기연이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마께서 말씀하신 대로 궁인들에게 전했는데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더니 이렇게….”
소제 일을 하다 기연에게 불려가 말을 전해 듣고 곧바로 달려왔는지 행주치마 차림 그대로의 궁녀들이 바닥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조금 전 목간에서 이설과 새초롬하게 말을 하던 궁녀 둘도 있었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들이 간신히 고개만 들어 이설에게 애걸복걸한다. 이설이 당황하는 사이 주 상궁이 앞으로 나왔다.
“마마 앞에서 지금 이게 무슨 추태들이냐! 당장 울음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훈육 상궁이었다는 말에 절로 수긍이 갈 정도로 엄하게 다그치는 말에 궁녀들이 가까스로 울음을 삼켰다. 끅끅거리는 울음소리를 입안으로 숨겼지만 여전히 눈물들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니 이설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
“기연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
“나는 자네들을 내쫓으려는 게 절대 아니네.”
“저 역시 그렇게 전하였습니다.”
기연이 재빨리 말했다.
“아, 아닙니다, 마마! 기연 님께서 말씀하시길, 마마께서 저희가 모두 있던 곳으로 돌아가길 원하신다고…….”
“예! 그, 그것을 원치 않는 자는 황궁을 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마, 저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되었다. 기연이 너는 이만 나가 보아라. 유강이가 혼자서 잡초를 베고 있던데, 가서 일손을 거들어 줘.”
영 찜찜하게 침소를 나가는 기연을 확인하고 궁녀들을 모두 일으켜 세웠다. 기연의 말을 듣고 정말 있던 곳으로 돌아간 궁녀는 있는 모양인지, 몇몇 궁녀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원하는 자리를 찾아 주었으니 죄책감은 들지 않겠다 싶어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직접 말하겠네. 모두 알다시피 나는 사내이며, 초야에 지아비에게 소박을 맞은 후궁이기도 하지.”
쓰게 웃은 이설이 가볍게 말했지만 따라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혹여, 상전을 잘 모셔 출세 가도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이 자리를 떠나도 좋다. 난 그대들이 모시는 주인을 선택할 기회를 주고 싶었네. 내가 전하고 싶던 말은 이게 다일세.”
비슷하긴 하겠지만 기연에게 들은 말과는 묘하게 의미가 달라 궁녀들이 울음을 멈추고 이설의 말을 곱씹었다. 잠시 조용한 시간이 흐르고 아무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중 이설의 바로 앞에 서 있던 궁녀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희는 이 비은궁을 나가면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습니다. 마마를 평생 곁에서 모시는 게 궁인으로서 저희의 단 한 가지 소임입니다.”
말을 마치고 다시 바닥에 엎드리는 그 궁녀를 따라 다른 궁녀들도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옆에 서 있던 주 상궁도 이내 조용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제 아래로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약조하는 궁인들의 모습을 보며 당황하던 이설이 허탈하게 웃으며 머리를 넘겼다.
외로이, 쓸쓸하게 세월을 보낼 줄 알았던 황궁 생활에 마음을 나눌 이들이 있어 그래도 조금은 다행이라고. 그게, 아주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
금국은 여러모로 하늘 신의 복을 받고 있는 나라임이 틀림없었다. 비옥한 토지와 따뜻한 날씨 덕에 농사 걱정할 일이 없었고, 북방 이민족의 침략에도 끄떡없이 견뎠으며 바다 건너 해국과의 교역이 자유로워 못 구할 물건이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가장 큰 복이라 여기는 것은 황제의 빼어난 미모였다. 발 밟은 자리마다 꽃이 핀다 할 정도로 용모가 아름다운 황제는 보는 이들의 넋을 빼앗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넋을 빼앗는 게 단지 용모뿐만은 아니었다.
황제는 포악하지 않았다. 성정이 사납고 잔인하여 이유 없이 도륙을 행하는 광인도 아니었고, 전쟁에 미쳐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미치광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황제가 어딘가 한참 모자란 반편이었던 것은 더욱 아니었다. 황제는 황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권모술책과 모략 등에서 단 한 번도 허를 찔린 적이 없었다. 그 철두철미함과 냉정함으로 황제는 대소신료들의 넋을 뽑았다.
황제는 그저 무심할 뿐이었다.
황제는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어 거의 웃지 않았고, 화내지 않았다. 세상천지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는 것처럼 언제나 무념한 얼굴로 정무를 보는 게 전부였다. 후궁을 만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적당히 도리는 다하였지만 그 이상 누구 한 명에게라도 총애를 주지는 않았다. 황제에게는 모두 똑같이 하찮은 후궁들이었다.
매일 매일이 똑같은 일상에 똑같은 얼굴. 손목에 천명이 맺어 준 정인의 이름을 새기고, 그 정인을 후궁으로 맞은 뒤에도 황제는 변함이 없었다.
“폐하.”
“…불허한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불허하신단 말씀입니까?”
“짐을 부르지도 말라.”
“조금 전에 입실하여 폐하를 처음 부른 것이었습니다.”
“누가 그걸 모른다 하였느냐?”
그 변함없는 황제의 곁을 변함없이 보좌하는 승상 비차란이 상소문을 읽고 있는 황제의 옆에 서 있은 지 이각. 겨우 말을 꺼낼 준비가 된 차란을 황제가 단칼에 쳐 냈다. 눈길은 여전히 상소문에 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