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5화
이설은 탁자 위 두 손을 모아 잡았다. 혼자 남으니 착잡한 마음을 숨길 길이 없어 자꾸만 한숨이 나온다. 어둠을 밝히려 켜 둔 촛불과 대전에서 보았던 황제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온통 금빛으로만 반짝거리던 황제는 지난번 연국에서 봤을 때보다 더 눈부신 모습이었다. 천자는 태양의 현신이라 그 아름다움이 감히 입에 담기가 불경할 정도라던 궁녀들의 말이 맞았다. 황제의 미목수려함은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이설에게는 그런 황제였는데 정작 황제는 이설의 입궁을 기다리던 눈치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루 일과 중 하나였던 듯 첩지를 내리는 일을 마쳤을 때 황제의 관심은 이설에게서 완전히 멀어졌다. 물러가겠다는 인사를 했을 때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다소 의기소침해진 기분으로 대전을 나가며 들은 말이 있었다. 모두가 저에 대한 말을 쑥덕거리는 와중에 하필 그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폐하께 징금수를 놓고서도 고작 받은 게 소의 첩지에 비은궁이라니. 신세 참 알 만하군.
안타까움보다도 조롱이 섞여 있던 그 말에 발걸음을 멈춰 세운 건 의도한 게 아니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던 건 제 처지를 실감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빼어난 절색도 아니고 황제의 권력에 힘을 실어줄 만한 든든한 뒷배가 있는 게 아니다. 또한 머리가 비상해 황제를 보좌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뭣보다 후궁 된 도리로서 황자를 낳을 수도 없는 사내의 몸이었다. 황제가 제 이름을 가지지 않았다면 황제를 만나는 일은 일평생에 절대 없었을 것이다.
연국 왕족들은 지학(志學:열다섯 살)이 지나면 함부로 연국을 떠날 수 없다. 왕족 신분으로도 비교적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연국에서 엄격히 지키는 법도 중 하나였다.
이렇게 모자란 것투성이인 자신이 금국 황제의 후궁이 되었다. 황제에게 호정을 바라는 게 더 무리인 것 같다.
그래서 비은궁으로 향하는 가마 안에서 이설은 생각했다.
오늘 밤 황제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마마, 합근(合巹:초야 시 신랑과 신부가 함께 술을 나눠 마시는 일)에 드실 감홍로를 들이겠습니다.”
“예.”
주 상궁이 시탁에 술이 담긴 도자기병과 잔 두 개를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술병은 탁자 가운데에, 그리고 잔은 이설 앞에 하나 맞은편 빈자리에 놓았다. 잔을 내려놓은 주 상궁이 조금 전 궁녀와 같은 말로 하대하라 하니 이설은 그저 웃었다. 이상하게 주 상궁에게는 하대하기가 더 어려웠다.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나는 괜찮네. 소제는 얼마나 되었는가?”
“아직 한창입니다만 폐하를 모실 길은 깨끗이 정리해 두었습니다.”
“어차피 오늘 다 끝낼 일이 아니지 않은가. 날도 어두워졌고 다들 고단할 텐데 이만 쉬게.”
“내일 아침 마마께서 쓰실 목간(沐間:목욕할 수 있도록 마련한 곳)까지만 정리해 두겠습니다.”
주 상궁은 오늘 밤 황제가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 믿는 걸까. 이설은 문득 궁금해졌지만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행여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주 상궁은 제게 거짓을 고할 것이다.
“마마, 머리가 흐트러지십니다.”
“아, 미안하네.”
또 얼결에 비녀를 만졌나 보다. 삐뚤어진 비녀를 제대로 꽂고 가체를 만져 주며 주 상궁이 작게 한숨 쉬는 소리를 들었다. 누구 못지않게 피곤할 그녀는 모두가 낙심한 얼굴로 이설을 모실 때 얼굴 찌푸리는 일 한번 없이 이설을 보필했다. 문득 그 사실이 고맙게 느껴졌다.
“주 상궁.”
“예 마마.”
“고맙네.”
“……무엇이 말입니까?”
“그냥 전부 그렇네.”
피곤한 얼굴로 활짝 웃는 이설을 주 상궁이 빤히 쳐다보다 이내 황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주 상궁은 침상으로 몸을 돌려 포단을 다시 정리한 뒤 돌아왔다.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이경부터는 폐하 외에 아무도 이곳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
“이른 아침 제가 오겠습니다. 그전까지는 아무도 이 처소에 들지 않을 테니 마음 놓으시옵소서.”
평소 같지 않게 이설의 눈을 똑바로 보며 당부하듯 말한 주 상궁이 침소를 나갔다. 약조라도 하는 것처럼 곧은 시선이 의아하다 생각하며 또 버릇처럼 가체에 손을 댔다가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가체를 머리에 단단히 고정하는 작은 비녀들이 모두 느슨하게 빠져 있었다. 이설이 마음만 먹으면 위로 번쩍 들어 올려 내려놓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초례를 치른 후궁의 가체는 반드시 초야 때 황제가 내려 주어야만 한다는 황궁의 법도를 귀에 딱지가 앉게 말해 주던 주 상궁이었다. 이설이 직접 가체를 내릴 수 있게 배려해 준 것일까, 아니면 황제가 손쉽게 가체를 내릴 수 도와준 것일까. 이설을 배려한 것이라면 그녀도 오늘 밤 황제가 이설의 처소로 오지 않으리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는 것일까.
따뜻하게 데워진 술병의 온기가 적당하다. 홀로 지새울 긴 밤에 술이라도 있어 다행일까 싶지만 황제가 오지 않는다 해도 혼자서 술잔을 기울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란히 놓여 있는 잔 두 개가 좋아 보이기도 하고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이경이 지나면 황제는 확실히 오지 않을 것이다. 아는지 모르는지 밤은 계속 깊어져만 간다.
창밖 기울어지는 달이 마침내 사라질 때까지도 이설은 고요히 앉아 있었다.
*
어제 오후 내내 쓸고 닦아 그래도 제법 사람 살 만한 궁다워진 복도를 걷는 주 상궁은 여전히 고단한 얼굴이었다. 교대로 잠을 청하는 궁녀들과 달리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하고 궁을 지킨 그녀는 새벽닭이 울자마자 이설의 침소를 찾았다. 문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이설이 아직 취침 중이라고 생각한 주 상궁은 기별 없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가 흠칫 놀랐다.
“마마…?”
“주 상궁 왔는가?”
당연히 침상에 잠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한 이설이 어젯밤 침소를 나가며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비녀 꽂힌 가체는 말할 것도 없고 침상 위에 포단도 흐트러진 모양 하나 없이 어제 모습 그대로다.
“마마, 밤새 한숨도 안 주무시고 앉아 계셨던 겁니까?”
“그런 것 같네.”
남의 말 전하듯 제 얘기를 하는 이설도 주 상궁 못지않게 고단한 얼굴이었다. 하얀 얼굴은 하룻밤 새 핏기가 사라져 창백해졌고 대답하는 목소리는 힘없이 갈라졌다.
밖을 확인하고 문을 닫은 주 상궁이 두고 간 술병을 확인해 보았다. 술은 어젯밤 그대로 단 한 방울도 줄지 않은 것 같았다.
“이리 일찍 올 필요는 없었는데.”
“침수 드신 줄 알고 기별 없이 들어왔습니다. 송구하옵니다.”
“괜찮네. 그보다 주 상궁 한 가지 부탁을 좀….”
“말씀하십시오.”
“내 가체 좀 내려 주겠나?”
“…….”
“왜 그러는가? 설마 폐하가 내려 주시기 전까지는 이걸 계속 이고 다녀야 하는 건 아니겠지?”
창백한 얼굴로 이설이 물었다. 다분히 농일 게 분명한 그 소리를 듣고도 주 상궁은 웃지 않고 이설의 뒤에 섰다. 어제 느슨하게 풀어놓은 비녀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꽂혀 있다. 가체를 위로 들어 올리자 본래 이설의 머리카락이 아래로 떨어진다. 하루 내내 가체 아래에 눌려 있던 머리인데도 마치 얇은 은사처럼 부드럽게 떨어지는 것이, 역시 이설이 금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게 했다.
이설은 가체가 사라지고 난 뒤의 가벼움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흘러내리는 머리를 넘겼다. 준비해 온 가체의 머리색과 달라 골칫거리였던 제 머리카락이 좀 낯설었다. 연국을 떠나고 매일 검은 머리카락만 보다 보니 거기에 익숙해진 것 같다.
“목간 소제를 마쳤다면 그만 씻고 싶은데.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았는가?”
“초야에 하셔야 할 본분은 모두 끝났습니다. 조반은 목욕 후에 준비할까요?”
“배가 고프진 않은데…….”
“어제 하루 종일 끼니를 거르셨습니다. 속이 불편하시면 묽은 죽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그래, 그게 좋겠네.”
목간에 물을 데우러 주 상궁이 나갔다. 다시 혼자 남겨진 이설이 한결 가벼워진 머리를 좌우로 털며 기지개를 켰다. 굳었던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며 의자에서 일어나니 밤사이 축적된 고단함이 급격하게 밀려왔다. 새 포단이 깔린 침상이 이리 와서 제 위로 몸을 누이라 손짓하는 것 같다. 잠시 몸을 뉘어 볼까 하다가 역시 목욕이 먼저인 것 같아 꾹 참았다.
목간으로 가는 길에는 빈방에 쌓여 있던 목재를 밖으로 나르던 기연을 만났다. 간밤에 황제가 찾아오지 않은 걸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그 일에 대해선 묻지 않고 이설의 안색 걱정만 했다. 밤 내내 생각했던 일 한 가지를 기연에게 부탁한 뒤 목간으로 향했다.
목욕 시중을 들겠다는 궁녀들을 한사코 물리고 혼자서 옷을 벗고 욕탕에 들어갔다. 연국과 복식이 다르기도 하고, 여인의 옷을 입은 것도 처음이라 탈의하는 데에 애를 먹긴 했지만 궁녀들에게 나체를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온몸을 데우는 따뜻함에 몸이 풀리고 나서야 정신이 맑아진다. 아무도 답해 주지 않을 고민과 걱정들이 이어지던 새벽에 비하면 이제야 이설 자신다워졌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찾아오지 않는 긴 밤 동안 까닭 없이 쓸쓸했던 마음이 쓸려 내려가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목욕 후에 다시 옷을 입느라 진땀을 뺀 이설이 겨우 의복을 갖추고 목간을 나서자 밖에서 기다리던 두 궁녀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마, 심의를 거꾸로 입으셨습니다.”
“아……, 여, 여인의 의복은 처음이라…….”
이설의 말에 두 궁녀가 더 짓궂게 웃는다.
“마마께서 입고 계시는 옷은 모두 저희 금국 사내들이 입는 그대로입니다. 여인들의 의복이 아닙니다.”
“사내가 이리 화려한 옷을 입는다는 겐가?”
“이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는 귀족들도 많습니다. 그런 옷을 준비해 드리려 했는데, 옆에 계시던 기연 님께서 한사코 말리셔서 가장 무난한 것으로 고른 것입니다.”
“색이 고운 옷들이 많습니다. 침소로 가져다드릴까요?”
“아, 아니 괜찮다. 근데 정말 이게 사내의 의복이란 말이냐?”
“예, 그럼요. 저기 동보문 앞에 가서 보셔요. 제 말인지 참인지 거짓인지.”
새초롬하게 대답하는 궁녀의 말을 듣고 소맷자락을 다시 확인했다. 꽃과 나비 자수가 놓인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사내의 의복일 리 없다 여기며, 허둥지둥 심의를 벗었다 뒤집어 걸쳐 입었다.
침소에는 주 상궁이 묽은 죽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로 식사 생각이 없었는데 기운이 없는 게 끼니를 계속 거른 탓인 것 같기도 하고, 주 상궁과 말씨름을 하기 싫기도 해서 먹는 척 숟가락을 들었다. 금국에 당도한 이후로 제대로 된 식사를 통 하지 못했다. 평소 먹던 음식보다 향이 강하고 맛이 자극적인 데다 육류 요리가 많아 그다지 입맛이 돌지 않았다. 덕분에 이설이 남긴 고기반찬을 먹는 궁녀들만 신이 났다.
반쯤을 겨우 먹고 이 정도면 생색내도 괜찮을 것 같아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옆에 선 주 상궁을 쳐다보자 예, 마마 하고 대답한다. 엄하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주 상궁은 어쩌다 나를 모시게 되었는가? 자진하였는가, 아니면 차출당하였는가?”
“……차출되었습니다.”
“그럼 더 다행이군.”
솔직히 대답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주 상궁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이설이 안도했다. 주 상궁은 그런 것을 왜 물어보냐는 질문 대신 잠자코 이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설이 의연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주 상궁이 원한다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