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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3)화 (3/300)

달의 황홀경

3화

어쩐지 황제가 혼례를 치르는 날치고는 궁이 잠잠하다 싶었다. 왕족이 혼례를 올리는 날이면 온 궁이 떠들썩한 연국과 달라 그런 줄로만 알았다. 아쉬운 마음은 크지 않다. 다만 이날을 위해 몇 번이나 연습했던 혼례 의식들이 아까울 뿐이었다. 목이 곧게 펴지지 않을 정도로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데. 꽃송이를 목 뒤에 올려 두고 하루 종일 궁 주변을 걷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차라리 잘됐구나. 이 치장을 하고 혼례 치를 생각을 하니 아침부터 머리가 아팠거든.”

“송구하옵니다, 전하.”

“괜찮다 나는.”

한편으로는 정말 잘된 일인 것도 같다. 이런 가체와 치장을 하고 혼례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이설은 정말이지 혼례 중간에 제 모가지가 똑 분질러지는 건 아닐까 심각하게 걱정하기도 했다. 사내인 탓에 보통 여인들이 하는 가체보다도 작고 비녀의 수도 많지 않다는 말이 위로가 되지 않을 만큼 머리 장식 무게가 상당했다.

가체 위에 꽂는 금채들이 늘어날 때마다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반가의 여인들도 혼례식에서는 이보단 화려할 것이라는 단호한 말에 이설은 가체를 지탱하는 가느다란 목만 빳빳하게 힘을 줄 뿐이었다.

“그럼 이제 나는 어찌하면 되는 것이냐.”

“대전에 들러 황제께 예를 드리고 하사하시는 품계와 궁을 받으면 된다 하십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금방 끝나겠구나. 다행이야.”

“피곤하십니까?”

“조금. 어디든 가서 빨리 쉬고 싶다. 이 가마 안도 벗어나고 싶고.”

“폐하가 계시는 대전으로 곧 출발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설에게 고개 숙인 기연이 다시 휘장을 내려 모습을 감췄다. 모르긴 몰라도 이제 막 궁을 들어왔으니 대전까지는 또 한참을 가야 할 게 뻔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렸을 적 와 본 적이 있다. 한낮의 햇빛을 받아 보이는 모든 것들이 금빛으로 빛나던 이곳이, 이설은 마치 새로운 세계처럼 마냥 신기하게만 느껴진 기억이 난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꼭 다시 와 보고 싶던 곳이었는데, 바람대로 정말 오기는 왔다.

금국에서 가장 더운 주안. 그중에도 한낮의 햇볕이 가장 뜨겁게 내리쬔다는 궁에 들어와서 그런지 몸에 열기가 한층 더 뜨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약간 어지러워졌을 때쯤 가마가 다시 멈춰 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주안의 여름은 낮이 무척 길어 연국에 있을 때처럼 태양의 높이나 위치로 시간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이설 님. 대전 앞에 도착했습니다.”

무덤덤한 주 상궁 목소리를 들으며, 지금 긴장하고 있는 건 나뿐인가 하는 외로움이 밀려왔다.

“이제 나오셔도 괜찮습니다.”

활짝 열린 가마 문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곧바로 소매를 들어 눈을 가린 이설이 혼잣말을 되뇌며 바깥으로 발을 내디뎠다.

…익숙해져야 해. …전부 익숙해져야 해. …이제 이곳이 내가 살 곳이야.

“걸음을 조심히 하셔야 합니다. 여기, 이쪽을 붙잡으세요.”

“괜찮습니다. 혼자 걸을 수 있어요.”

“이설 님. 주 상궁의 말대로 하세요. 오르실 계단이 무척… 많습니다.”

가체가 무거워 고개를 들어 대전의 문까지 향하는 계단을 올려다볼 수 없었다. 다만 기연의 목소리가 새삼 걱정스러워 별수 없이 주 상궁이 내민 팔을 붙잡았다. 뒤에서 기다린 치맛자락을 누가 들어 주기라도 하는지 가마에 타기 전 느꼈던 의복의 무게는 좀 덜었지만 여전히 양어깨가 무거워 가슴을 펴기가 어려웠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셔야 합니다.

계단을 오르며 주 상궁이 나지막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 이상 허리를 세울 수가 없었다. 가체는 무겁고, 올라야 할 계단은 많고, 내리쬐는 태양은 자비 없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진짜 모가지가 똑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이 들 무렵 대전의 문 앞에 드디어 다다랐다.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뒤를 따라왔던 궁녀들이 옷매무새와 장신구들을 다시 만져 주었다.

“문이 열리면 들어가시면 됩니다.”

“주 상궁은… 다른 궁인들은 함께 들어가지 않습니까?”

“저희도 뒤따라 들어갈 것입니다. 다만 황제 폐하 앞까지 나아가는 건 이설 님 혼자 하셔야 합니다.”

긴 날 내내 황제와의 혼례 의식에 대하여 배웠던 것 중에 이런 경우는 없었다. 이제야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키는 이설의 뒤로 주 상궁과 궁녀들이 대열을 갖춰 섰다.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커다란 문을 마주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등 뒤로 수족들이 붙어 따라올 것이라는 걸 알지만 온전히 저 혼자서 황제를 만나는 것 또한 알기에 마음을 굳게 다져야 한다.

이 문 너머 황제가 있다.

*

주안의 여름은 해가 길고 햇살이 아름답게 부서지는 곳으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하늘 수신(水神)이 주안에서 여름을 나기 위해 비와 함께 내려온다는 우장절(雨墻節)을 제외하면 날씨가 흐려 해가 사라지는 일도 거의 없었다. 태양신의 비호를 받는 금국, 그중에서도 수도 주안은 비조차도 태양이 잠시 쉬러 간 밤사이에나 내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요 며칠 유난히 햇살이 눈부신 나날들이 이어졌다. 태양이 강하고 밝은 빛을 보내 줄수록 금국에 더 큰 번영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금국 사람들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특히나 황제의 새 후궁이 드디어 오늘 황궁으로 입궁한다는 소식에 모두들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태양의 현신으로 믿고 있는 현 황제에게 징금수(금사 또는 은사로 듬성듬성 수를 놓는 것)를 놓은 연국의 왕자라고 하니, 백성 중 누구 하나 관심 없는 자가 없었다.

저잣거리의 백성들도 모였다 하면 황제의 새 후궁 이야기인데, 황궁이라고 덜하지 않을 터였다. 신료들은 신료들대로, 궁인들은 궁인들대로 삼삼오오 모여 자신들이 황궁에서 보고 들은 바를 나누며 이야기를 만들었다.

예정대로라면 영채전(榮債殿)에서 치러졌을 초례식이 취소됐다는 연통을 받은 대신들이 대전에 모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초례 의복은커녕 평상시와 다른 게 없는 모습이었다. 금색 비단으로 반만 묶은 검은 머리와 붉은 실로 수가 놓인 금색 용포가 전부인데도, 황제는 어느 곳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에 탁월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눈을 뗄 수 없는 그 아름다운 미모 덕분이기도 했지만 황제는 그 이상의 경외감을 갖게 하는 무거운 힘이 있었다.

제좌에 앉은 황제는 대부분의 날들이 그렇듯 감정 없어 보이는 얼굴로 대전을 한 번 훑어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옆을 지키는 비승상이 간간이 하는 말을 듣는 듯하기도 했지만 따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얼핏 봐도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상황. 대신들 중 누구도 황제가 새 후궁을 맞이하는 걸 감축한다는 말을 올리는 이는 없었다.

황제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측근 내관 한 명이 비승상의 귀에 말을 전하고 사라졌다. 비승상이 다시 그 말을 황제에게 전하자 황제가 손을 위로 들었다 내렸다. 허한다는 의미였다.

“폐하께서 들라 하십니다.”

“문을 열어라.”

황제의 손짓은 내관을 거쳐 문 앞을 지키던 병사에게 다다라 문을 열었다. 육중한 대전의 문이 양쪽으로 열리며 한낮의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모두가 고대하던 황제의 새 후궁, 연국의 사왕자가 태양의 후광과 함께 대전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에게 징금수를 새긴 자가 사내라는 말을 들었던 많은 대신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길었던 금국의 역사 가운데 왕과 황제가 사내 후궁을 들인 것은 선례가 많았으나 서로 간의 징금수를 나눠 새겼던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의 경우에는 황제만이 상대의 이름을 새기긴 했으나 이 또한 선례가 없었다는 점은 동일했다.

게다가 더 놀라운 점은 그 사내라는 자가 연국의 왕자라는 것이다.

연국은 지리적 특성상 다른 나라, 특히 금국과의 교류가 매우 어려운 나라이다. 거리도 거리지만, 회 국과 맞닿은 국경선이 산세가 험악한 지형인 탓에 쉬이 국경을 넘기도 어려웠다. 금은(金銀) 매장량이 풍부하고 평지가 거의 없어 산악림에 민가가 분포해있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것이 없어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가는 일이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소문에 오르내린 것은 연국의 왕족들이었다.

사람들은 연국의 왕족들에게 대대로 사람을 홀리는 요사스러운 재주가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의 오랜 시작은 수백 년 전 연국의 공주에게 마음을 홀린 어느 대장군이, 제 나라에서 역모를 꾀해 스스로 왕좌에 앉아 그녀를 무력으로 제 비로 삼았던 것이었다. 강제로 고향을 떠나게 된 공주는 왕후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슬픔으로 정신을 잃은 왕은 궁을 피로 물들이다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왕족의 대가 끊긴 나라는 얼마 못 가 망국에 이르렀다.

그 뒤로도 이와 같은 전례는 수없이 많았다. 연국의 왕족에게 마음을 홀려 백년가약을 맺어 행복하게 여생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게는 결말이 좋지 못했다. 또한 이는 공주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약관의 나이까지 한참 남은 왕자를 후궁으로 삼겠다며 군사를 이끌고 온 어느 왕의 기록이 있다.

훗날, 달빛 아래에 서 있는 어린 왕자에게 눈부신 빛이 났다는 글을 남긴 그 왕은 후궁으로 맞은 연국의 왕자와 드물게도 백년해로하며 생을 마쳤다.

이런 탓인지 연국의 왕족들은 언제서부턴가 다른 나라와의 협약이나 교역 등을 피하고 점점 더 국문을 걸어 닫고 자신들의 모습을 꽁꽁 감췄다. 그렇게 대륙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감추며 험한 산 지형에 숨어 살 듯 지내기를 백여 년. 더 이상 사람들이 연국 왕족에게 대단한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됐을 즈음에야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수백 년에 걸쳐 저런 기록들이 전해지니 모두들 연국 왕자의 외모에 관심이 쏠렸다.

문이 열리고 햇살과 함께 들어오는 연국의 왕자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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