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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화 (2/300)

달의 황홀경

2화

*

금회력(金懷曆) 649년. 영토 확장 전쟁으로 하늘과 땅이 피로 물들었던 시대가 저물고, 가히 태평성대라 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지 수십 년이 흘렀다. 검은 연기를 태워 보내며 불타오르는 잿더미 사이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고, 이제 살아남은 사람 중에 그 지독했던 전쟁을 기억하는 자는 몇 남지 않았다. 기록과 구전으로 전해지던 이야기들은 이제 기록만 남았고, 사람들은 더 이상 그것에조차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긴 전쟁을 종식시킨 것은 금국의 왕이었다. 패전국 왕족들이 납작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대전 가장 높은 곳에서, 그는 스스로를 황제로 추대하며 대륙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초대 황제의 승하 후에도 금국은 변함없이 번영함을 누렸다. 들판의 곡식은 해마다 백성들의 곡창을 가득 채웠고 국경을 지키는 수만 병사들 덕에 이민족의 침입을 불안해할 필요도 없었다. 배곯지 않고 두 다리 쭉 펴고 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금국의 백성들은 제 나라를 좋아했고, 황제를 찬양했다.

금국의 백성들은 황제를 자신들이 가진 복 중 최고의 복이라고 생각했다. 때가 되면 마른 땅에 비가 내리는 것도, 이민족이 더 이상 국경을 침범하지 않는 것도, 역병이 돌지 않는 것도, 하늘에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모두 황제의 은덕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황제가 즉위한 뒤로 더 없는 태평성대를 누린 것에도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황제의 용모 때문임이 자명했다.

황제는 아름다웠다. 금국의 건국 설화를 뒷받침하듯 그는 태양에서 갓 떨어져 나온 불꽃처럼 눈이 부셨다. 젊은 나이에 승하한 선대 황제도 못지않게 아름다웠으나 현 황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금빛 비단을 두른 황제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평생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는 말이 있어, 황제를 보기 위해 금국의 수도 주안(宙安)까지 찾아오는 타국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주안은 늘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리고 금일. 여느 때보다도 주안의 거리 곳곳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날이었다. 백성들은 길게 늘어진 가마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금 궁으로 들어가는 동보문(東報門) 입구까지 모여들어 병사들에게 제지를 당했다. 저 멀리서부터 천천히 다가오는 붉은색의 꽃가마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저마다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연국의 왕자가 황제의 후궁으로 입궁하는 날이다.

*

“이설 님. 휘장을 거두시면 안 되옵니다. 어서 얼굴을 가리세요.”

“갑자기 밖이 소란스럽기에 열어 보았습니다. 아직 금 궁에 도착하지 못하였습니까?”

“곧 동보문을 지날 것입니다. 금의 백성들이 가마길을 구경하느라 소란스러운 것이니 염려 마시고 휘장을 내리시옵소서.”

예,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힘없이 시무룩했다. 휘장을 걷어도 가마 옆으로 나란히 걷는 호위병들 탓에 바깥 구경은 전혀 하지 못했다. 호위병 사이사이로 얼핏 보이던 금국 백성들의 환호 소리에 마음이 착잡해져 주 상궁의 말대로 천천히 휘장을 내렸다. 휘장을 내리자마자 답답하고 더운 가마 안 공기에 숨이 막힐 것만 같다.

하룻밤을 연국에서 보낸 황제는 다음 날 아침, 지체 없이 금국으로 떠났다. 이설에게는 서찰로 남기는 인사 한마디조차 없었다. 대신 황제는 연국 왕실의 혼례 법도대로 왕족 여인에게 혼례를 청한 사내가 바쳐야 할 품목들을 연국의 궁에 남기고 떠났다. 대전 앞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연국의 왕은 고개 숙인 이설의 어깨를 말없이 토닥여 주었다.

황제가 떠난 자리에는 온갖 보옥과 비단, 아름다운 그림과 글이 걸린 족자뿐만이 아니라 금국의 궁녀들도 함께 남았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며 머리를 조아리는 궁녀들은 그로부터 보름 동안 이설과 함께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며, 하루 일과가 온통 금국의 황실 예법을 배우고 혼례 절차를 익히는 것뿐이었던 이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연국을 떠나 먼 여행에 접어든 뒤였다.

“전하 조금만 더 참으세요. 방금 금 궁에 입궁하였습니다.”

“가마 안이 무척 덥구나. 차라리 말을 타는 게 낫겠어.”

“혼례를 치르러 가시는 길입니다. 외간 사내에게 안겨 말을 타실 수는 없습니다.”

슬쩍 위로 빗겨 올라간 휘장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말을 타고 가마 뒤를 따르던 기연이 말에서 내려왔나 보다. 희미하게 웃는 얼굴이 보일 듯 말 듯했다.

출발 길에서부터 어제저녁까지 이설은 제 호위로 차출된 기연과 함께 말을 타고 왔다. 자신을 위해 준비된 백마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서서 멀뚱히 서 있기만 하는 이설을 보고 금국의 궁녀들은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였다. 이설이 혼자서는 말에 올라타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상궁은 어쩔 도리가 없어 이설을 기연의 말에 함께 태워야만 했다.

“사내와 혼인을 한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여인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혼례 준비를 하는 동안 여인들의 장신구과 복장을 치장하느라 진이 다 빠졌던 이설이 괜히 투덜거렸다.

“사내와 혼례를 치르시는 게 아닙니다. 전하는 지금 황제 폐하와 혼례를 치르러 가시는 길입니다.”

“그리 일러 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전하께서 너무 태평하시어 깜빡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놀리는 게 분명한, 하지만 어쩐지 난처함이 묻어나는 그 말에 이설은 뾰로통했던 표정을 지우고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입가를 매만졌다. 오늘 아침 조반을 들 때 유강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오늘이 혼례인데, 이설 님은 떨리시지도 않으신가 봅니다?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며 묻는 유강은 기연과 달리 놀리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 말에 이설은 지금처럼 어색하게 웃으며 입술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하는 습관이라는 걸 아는 유강이 못 본 척 말을 돌려 다행이었다.

태평할 리가 없다. 황제가 저를 만나러 왔었던 그날 이후로 마음 편히 잠들어 본 적조차 없다. 눈을 떠도, 감아도 온통 황제 생각뿐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설을 정말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다가올 혼례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아니라 이것과 함께 찾아오는 옅은 설렘이었다.

다시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설렘.

이 마음이 너무 처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아 이설은 초조했다.

“…전하?”

“아, ……응. 듣고 있어. 계속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

“긴장되십니까?”

웃음기 가신 목소리가 안타까움에 젖어 있다는 것을 알아 이설은 차마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연국을 떠나던 날, 연국의 공주이며 이설과 같은 어미를 둔 누이는, 차마 눈물을 보이지 않던 아버지와 다른 형제들을 대신해 궁이 떠나가라 펑펑 울며 이설을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보며 궁인들도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일생의 경사 중에서도 최고의 경사인 혼례길을 눈물로 배웅하는 게 어디 있냐며 누이를 위로하였지만 사실 이설도 착잡한 마음을 숨기기 힘들어 괜히 더 밝게 웃을 뿐이었다.

모두가 이설이 팔려 가는 것이라 여겼다. 다른 모든 나라의 왕족들은 적어도 한 명 이상씩 모두 금국의 유학 명목으로 발이 묶여 있었다. 실상은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들이었다. 유일하게 금국의 견제로부터 자유로웠던 연국이었지만 결국은 이렇게 끌려가게 되었다며 모두들 수군거렸다.

심지어 사내를 후궁으로 들이겠다니. 사내 간에 혼인이 세간에서 아주 없는 일은 아니며 이름을 새겼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느냐 수긍은 하여도 그 상대가 하필 금국의 황제인 탓에, 꼬리의 꼬리를 무는 소문이 안 생길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혼례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소리가 점점 사그라드는 걸 보니 궁 안쪽까지 들어온 것 같다. 휘장을 더 위로 걷어 밖을 보려는데 갑자기 가마가 멈춰 섰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전하.”

타박타박, 기연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버릇처럼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려다 가체와 온갖 장신구들에 손가락이 걸려 깜짝 놀라 손을 내렸다.

초야 때까지는 절대 머리를 만지시면 안 되옵니다.

처음 해 보는 머리단장이 어색하기도 하고 가체와 장신구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 자꾸만 손이 머리로 향하는 이설에게 주 상궁이 몇 번이나 엄포를 놓았다. 머리 장식은 반드시 지아비가, 그러니까 이설에 경우에는 황제가 내려 주어야만 한단다. 그래야만 비로소 혼례가 끝이 나는 것이라던 주 상궁의 말이 떠올라, 가체에 꽂힌 비녀들을 다시 잘 만져 주고 손을 가지런히 모아 아래로 내렸다. 손끝만 멀거니 바라보기를 잠깐. 이설 님, 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이설 님.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십니까?”

휙 젖혀진 휘장 너머로 앳된 얼굴이 보인다. 연국에서부터 시동 명목으로 데려온 유강이다.

“아무 생각도 안 했단다. 그나저나 가마는 왜 멈춘 거지?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연 형님과 주 씨 할망구가 저쪽에서…….”

“강아.”

“……기연 형님과 주 상궁이 저쪽에서 금국 내관들과 이야기 중이에요.”

“지금부터는 정말 버릇없이 굴면 안 된다 강아. 여기는 연국이 아니야.”

유강은 주 상궁을 싫어했다. 막냇동생처럼 어여삐 여기며 오냐오냐해 주는 이설 탓에 다소 천방지축으로 구는 유강이 주 상궁의 눈에도 귀여워 보였을 리 없다. 주 상궁이 매서운 얼굴로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유강은 사색이 된 표정으로 이설의 눈치를 살폈다. 그 탓에 주 상궁에게 불만이 잔뜩 생긴 유강은 그녀를 할망구라고 부르는 것으로 제 심술을 표현했고, 이설은 그 행동을 엄격지 꾸짖었다.

“이제부터는 항상 조심해야 해, 강아.”

“……송구합니다, 전하. 그렇지 않아도 기연 형님이 전하의 체면에 누를 끼쳤다간, 그대로 벌거벗겨 오악산 눈 봉우리에 저를 묻어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기연이 농이 지나쳤구나.”

“기연 형님은 농담을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전하는 사람을 너무 좋게만 보시는 게 문제입니다.”

날이 더운 탓에 벌겋게 달아오른 두 볼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작아졌다. 가마 안이 덥긴 해도 사방이 막혀 있어 한낮의 햇살이 얼마나 뜨거운지 이설은 알지 못했다. 금국의 태양이 가장 밝고 뜨거운 곳이 수도 주안이라고 하니, 이설은 어제까지 느꼈던 뜨거운 햇살을 떠올려 보며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정말 살 수 있을까, 이런 곳에서.

“앗, 기연 형님이 오십니다.”

잠시 가마에서 멀어졌던 유강이 돌아오며 말했다. 옆에 선 기연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이설이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느냐.”

“…저, 그게…,”

“괜찮으니 말해 보아라.”

기연이 슬쩍 옆으로 바라보자 발소리가 멀리 멀어졌다. 유강에게 옆으로 피해 있으라 눈치를 준 것 같았다.

“송구하오나 전하. ……황제 폐하께서 옥체가 미령하시어 예정되었던 혼례식을 치르실 수 없다 하십니다.”

“……아.”

감추지 못한 가느다란 탄성이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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