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황홀경 (1)화 (1/300)

달의 황홀경

1화

1장. 입궁

여느 날과 비슷한 아침이었다. 간밤에 꾼 꿈 탓에 종일 기운이 없었던 것만 빼면 거의 그랬다. 조반을 드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상을 물릴 때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서책을 억지로 읽을 때도, 낯빛이 새파랗게 질린 유강이 기별도 없이 침소로 뛰어 들어올 때도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설은 허벅지 위에 포갠 두 손을 겹쳐 힘주어 잡았다. 벽 없이 사방이 뚫린 정자로 연못가의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시원하기는커녕 긴장된 목덜미만 차게 훑고 지나갔다.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포개진 제 손만 바라보기를 한참. 급히 달려온 이설에게 앉으라는 말 뒤로 내내 한마디도 없던 남자가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름이 연이설이 맞느냐.”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에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음에도 이설은 본능적으로 남자의 언짢은 심기를 느끼며 조용히 대답했다.

“예. 제가 연이설이 맞사옵니다.”

“배꽃 이(梨:배꽃 리)에 눈 설(雪:눈 설) 자를 쓰는 이설이 맞느냐.”

“예. 맞습니다.”

두 번의 긍정에 남자가 허, 하는 소리를 내며 손끝으로 탁자를 쳤다. 이설은 달그닥 부딪히는 찾잔 소리에 놀라 움찔하고는 슬며시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영 탐탁지 않아 보이는 표정으로 고민을 하는 듯 보이던 남자가 다시 차 한 모금을 마셨다. 뒤늦게 남자를 따라 목을 축이려던 이설은 다시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천지명관(天指名官:이름을 등록하는 기관)에 새긴 게 그 이름이란 말이지. 아명은 없느냐.”

“아명은 있으나 천지명관에 새긴 이름은 연이설 하나입니다. 저희 연국에서는 아명을 천지명관에 새기지 않습니다.”

“눈 설 자는 쉬이 쓰이는 글자가 아니다. 이 글자를 아는 자도 드물지.”

“…….”

“다시 묻겠다. 네 이름의 설 자가 눈 설 자가 맞느냐.”

“예. 확실히 맞사옵니다.”

조금의 지체도 없이 이설이 확답하자 남자의 표정이 곧바로 어두워졌다. 바라는 대답을 얻지 못한 듯 굳은 얼굴이 이설을 향했다가 천천히 정자 바깥 너머의 연못가를 돌아선다. 내내 남자의 눈빛에 숨통이 막혀 있던 이설은 티 나지 않게 깊은숨을 내쉬며 침을 삼켰다. 조금 전 남자와 조우하며 잠시 넋을 잃어 미처 보지 못한 그 얼굴을 제대로 볼 기회였다.

금국의 황족은 그 미모가 세상천지의 것이 아니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 왔고, 특히나 이번 대의 황제는 역대 황족들 가운데서도 최고라 칭송받는다는 사실 역시 들어 왔으나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렸을 적 현 연국의 왕이 즉위 후 예를 올리려 금국에 갔을 때에 그 아들 되는 이설 역시 동행하여 선선대 황제를 뵙고 놀랐던 적은 있지만 감히 말하기를,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어깨 아래를 넘어서지 않을 정도의 긴 머리가 보통인 연국의 사내들과 달리 금국의 황제는 어깨를 훨씬 넘는 검은 머리카락의 반을 금색의 비단띠로 묶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검은 머리카락과 금띠가 흩날리며 황제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한 올 한 올 빛나는 머리카락을 멍하니 쳐다보던 이설은 홀린 듯 저도 모르게 얼굴로 눈길을 옮겼다. 이목구비는 또렷하고 날카로워 사내다우나 험상궂은 인상은 절대 아니었다. 모난 곳도, 흠잡을 곳도 없는 수려한 외모가 마치 그려 놓은 듯 완벽했다.

“정인이 있느냐.”

“……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멀리 연못가만 바라보며 묻는 말에 이설이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황제가 개의치 않고 다시 물었다.

“정인이 있느냐 물었다.”

“아직 없습니다.”

“다행이군.”

말과는 달리 여전히 탐탁지 않은 태도다. 황제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넘기는 사이 이설은 문득 황제의 왼쪽 손목에 비단 띠가 감겨 있다는 걸 눈치챘다. 제 손의 궤적을 좇는 이설의 눈길을 읽은 황제가 소맷자락을 내려 손목을 숨겼다.

이름과 손목.

불현듯 짧은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음에도 행여 크게 결례가 될까 싶어 묻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기를 잠깐. 덤덤히 이설을 바라보던 황제가 말했다.

“내 손목에 그대의 이름이 있다.”

“…….”

“별로 놀라지 않는군.”

놀라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무리 천성이 무덤덤하고 뭐든 침착하게 넘겨 버리는 이설이라도 갑작스럽게 저런 소리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상대가 황제다. 광활한 이 대륙의 여덟 나라와 열두 이민족을 발아래 두는 금국의 황제. 평생에 한 번 볼일도 없을 거라 여겼던 그 황제의 손목에 제 이름이 새겨졌다니, 이설은 황제가 볼 수 없는 탁자 아래로 두 손을 세게 맞잡으며 낮고 긴 한숨을 뱉었다. 어쩌면 황제가 천지명관의 이름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생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 설 자가 드물다고는 하나 아예 쓰이지 않는 글자는 아닙니다. 눈을 보기가 어렵지 않은 북쪽 극지방에서는 흔히 쓰이기도 한다 들었습니다.”

“북쪽 설산의 이민족을 말하는 것이냐. 그자들은 천지명관에 이름을 새기지 않는다. 더 말할 것도 없지.”

“혹 저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자가 있지 않았습니까?”

“있었다.”

“그렇다면…….”

이설이 말끝을 흐리며 질문을 대신했다.

“천지명관에 오른 연이설은 너를 제외하고 네 사람이 있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일흔의 노파와 갓난 배기 남자아이. 그리고 몇 해 전 혼례를 치른 만삭의 여인과 이미 다른 정인의 이름을 가진 처녀였다.”

“하오나 저는……,”

“알고 있다.”

“…….”

“내 이름을 가지지 못했을 테지.”

황제의 말이 맞다. 이 몸 어디에도 황제의 이름은 없다. 사실 황제의 이름을 알지도 못한다. 황제는 이름이 있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부를 수 없는 이름을 어찌 이름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금국 황족은 특히나 이름을 고결하게 여기기 때문에 황족 간일 경우를 제외하고는 함부로 알려 줘서도, 불러서도 안 된다. 궁에서 일하는 자들도 자신이 모시는 황족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고 만에 하나 알게 되더라도 죽을 때까지 함구해야 하는 것이 직무를 막론한 그들의 책무였다. 대개는 밖으로 새어 나갈 것을 염려해 신뢰하는 몇몇 측근과 수족들을 제외하고는 이름을 알고 있는 자는 아예 살려 두지도 않는다 들었다.

이 와중에 이설이 황제의 이름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몸에 새겨진 이름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 아침에도 없었던 이름이 지금에서야 갑자기 생겨 날 리도 없으니, 이설은 구태여 제 손목을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 엉망진창이 되어 가는 머릿속을 정리해 보려고 했지만 황제가 그럴 틈조차 주지 않는다.

“상관없다. 그걸 바라고 여기까지 찾아온 게 아니니.”

“……특별히 제게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그대를 내 궁에 들일 생각이다.”

제 이름을 손목에 가졌다는 말에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던 것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직접 입으로 듣는 것과는 다르다. 오늘 아침까지도 평화롭고 단조로웠던 일상에 균열이 생긴 기분이다.

혼례에 대한 얘기가 조금씩 나오고 있긴 했으나 마찬가지로 아직 혼례 전인 손위의 형님과 누이 덕에 몇 년은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연국은 아무리 왕족이라 하여도 혼례 상대와 시기는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하기 때문에 이설은 아직까지 이 문제에 대해 신중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왕가에서 태어난 이상 연정만 가지고 혼인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안이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 본 낯선 사람, 그것도 같은 사내인 황제를 따라 타국의 궁에 들어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는 새 울음소리라도 아련히 울리던 정자 위로 이제는 적막함만 무겁게 내려앉았다. 한참 고민하던 이설이 먼저 입을 뗐다.

“……제가 폐하의 반려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다.”

“또한 저는 사내입니다. 그럼에도 저를 궁으로 들이시겠습니까.”

“네 이름이 연이설인 이상은 그러하겠다.”

황제의 의지는 확고했다. 조금 더 황제를 설득하고 타협을 시도해볼까 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사실 황제에게 설득이나 타협이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황제는 명령을 하고 이설을 뒤따라야 하는 게 올바른 이치니까. 금국과 연국이 그랬고, 그렇기 때문에 황제와 이설이 그랬다.

굳이 황제가 직접 이곳까지 찾아올 필요도 없었다. 가타부타 다른 이유 없이 서신 한 장에 ‘연이설’ 한 글자만 써서 보내왔어도 이설은 한달음에 금국으로 달려가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어야 했다. 금국의 황제는 그런 존재였다.

황제에게는 아직 황후가 없다. 선대 황제가 급사하는 바람에 정사가 어수선해졌고,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현 황제는 내정을 수습하고 황권을 강화하는 데에 시간을 쏟았다. 들은 바로는 후궁도 많이 들이지 않은 편이라 황제의 여인들이 모여 기거하는 전각에 방이 텅텅 남아돈다 하였다.

그중 하나가 내 방이 되겠군.

아무리 황제에게 이름을 준 정인이라 하더라도 사내인 데다가 타국의 왕가 사람을 귀한 자리에 앉힐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저를 보는 눈에 정애는커녕 배려도 느껴지지 않으니 첩지라도 내려 준다면 성은이 망극해야 할 눈치다. 보통의 귀족 여인쯤이라도 됐다면 황비까지도 기대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어울릴 만한 첩지는 생각해 보도록 하지.”

그늘진 얼굴로 손끝만 멀거니 바라보는 이설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는 말이었다. 봉황이 꿈에 나오는 것은 길몽이라 들었는데, 이 일을 어찌 길사라 할 수 있을까.

“보름 후 가마를 보내겠다.”

“……예.”

민가의 평민들도 혼례 날짜를 결정하는 데에 두 달이 넘게 걸린다. 마주 앉아 담소 몇 마디 나눴다고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물며 황제의 혼례는 이렇게 쉬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쯤 되니 황제가 저를 궁에 들인다는 것을 얼마나 안이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인지 짐작이 갔다.

허나 이설은 달리 토를 달 수가 없어 힘없는 대답과 함께 고개만 끄덕였다.

“자세한 건 그자에게 들으라.”

황제의 턱 짓에 고개를 돌리자 이설이 앉아 있는 의자 바로 옆에 금국의 예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다가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을 만큼 지금 정신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황제가 일어났다. 키가 크다 생각은 했지만 다시 보니 자신보다 한 뼘 이상은 더 클 것도 같다 생각하며 멍청히 고개를 올려다봤다. 그러다 뒤에서 들리는 헛기침 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바닥을 향한 시선으로 금빛 도포 자락이 펄럭이며 지나가고 발걸음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진다. 천천히 허리를 세운 이설은 정자 비원을 잇는 아치형 다리를 멀거니 바라봤다. 형식적인 인사도 한마디 없이 멀어진 황제는 다리 위를 막아서고 있던 금군의 호위 속으로 사라졌다.

아…….

사라지는 황제를 보며 문득 어젯밤 꿈의 봉황이 생각났다. 오랫동안 이설을 바라만 보던 봉황이 날개를 펼쳐 제 부리로 깃털 하나를 뽑았다. 여전히 붉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깃털을 입에 문 봉황이 이설을 제 쪽으로 손짓하여 부르듯 한쪽 날개를 펄럭였다. 하지만 이설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경외심에 압도당할 것 같은 봉황은 눈부시게 아름다우나 선뜻 가까이 다가갈 용기를 내어 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마주 보기만 하는 사이 달이 저물기 시작했고, 아스러지는 달빛처럼 봉황도 그렇게 사라지며 잠에서 깨어났다.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 깨어난 오늘 아침을 다시 겪고 있는 것만 같다. 아스라이 사라진 봉황처럼 황제가 멀리 검은 머리를 흩날리며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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