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사랑스럽게 (31/31)

10.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사랑스럽게

알록달록한 사탕들이 가득한 가게는 화이트 데이라서 그런지 꽤나 북적북적했다. 하지만 어느 한 곳을 기점으로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인파가 갈려 있었다.

“그, 어디서 많이 본 사람 아니야?”

젊은 연인들이 한 남자의 뒷모습을 힐긋거리며 속삭였다.

“연예인은 아닌 것 같은데.”

“근데 진짜 어디서 본 것 같다니까.”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있던 점원이 다른 연인이 하는 말에 그쪽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정말 안 어울리는 뒷모습이었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정장을 입고서 작은 바구니를 든 채 신중하게 사탕을 고르는 모습이라니! 점원은 많은 유형의 손님을 봐 왔지만 이런 손님은 처음이었다.

그가 돌아섰다. 바구니에 알록달록한 사탕이 많이도 담겨 있었다. 남자는 얼음 같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는 카운터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게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음에도 그의 앞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준은 조수석 옆에 조심스레 내려 둔 바구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같이 놓인 귀여운 꽃다발도 흡족하게 바라봤다. 기준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유치원으로 차를 돌렸다.

“얘들아, 안녕!”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아이들에게 양손을 흔들어 주며 웃는 자신의 짝의 모습을 기준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생각도 없어 기준은 계속해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실실 흘리며 희원을 바라봤다.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몇 년 전에 랑일이를 데리고 유치원에 오가던 때와 똑같다.

“어떻게 저렇게 안 늙을 수가 있지?”

여전히 기준은 희원을 혼자 외출시키는 데에 불안함을 느꼈다. 나이는 다른 사람만 먹는지 희원은 여전히 아름답고 예뻤다. 아이들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확인하다가 아이들이 아쉬운 듯 뒤돌아보면 웃으며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기준은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차에서 내릴 타이밍을 세고 있었다. 아이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무렵 기준은 차에서 내렸다.

“이희원 선생님.”

기준의 부름에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기준 씨!”

“반가워요?”

희원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얼굴에 반가움을 한껏 달고는 그대로 기준에게 뛰어와 그를 꼭 끌어안았다. 기준이 낮게 웃으며 희원을 마주 안으며 등을 커다란 손으로 쓸어내려 주었다.

누가 보면 한참을 떨어져 지낸 사람들인 줄 알겠지만 우습게도 이들은 아침 출근길에 헤어졌다가 퇴근길에 만난 참이다.

“어떻게 왔어요?”

“희원 씨하고 같이 퇴근하려고요. 이제 퇴근이죠?”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만 갖고 나오면 돼요. 조금만 기다려 줘요.”

“천천히 나와도 돼요. 희원 씨 기다리는 거 하나도 지루하지 않아요.”

“우리 남편은 말도 참 예쁘게 해.”

희원이 생글생글 웃으며 기준을 칭찬했다. 회사 사람들이 들으면 기함을 하고 뒤로 넘어갈 일이었다.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이걸 새로운 사업 기획안이라고 들고 온 거냐며, 어째 연차가 쌓일수록 이렇게 식상한 기획안만 들고 오는 거냐며 빈정거렸다. 이기준 이사의 빈정거림을 그대로 맞은 부장은 깨갱거리며 꼬리를 말고 바닥을 기는 개처럼 이사실에서 퇴장했다.

그런 이기준이 말을 참 예쁘게 한단다. 그건 희원 한정이었는데 희원은 그 사실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지 모르겠다.

기준이 오른쪽 손목에 감긴 시계를 확인했다. 가는 길이 조금 막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준은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아빠!

“아이고, 우리 공주님이 받았어요?”

―응!

기준이 희원 다음으로 껌뻑 죽는 귤희였다. 벌써 초등학생이 된 귤희는 클수록 더욱 희원을 닮아 갔다. 누구네 집안의 공주님과는 전혀 다르게 온순하고 사랑스러웠다.

“우리 공주님, 뭐 하고 있었어요?”

―오빠랑 저녁 먹으려고. 아빠는? 마미랑 언제 와?

“아빠가 마미랑 저녁만 먹고 얼른 들어갈게. 응? 오늘은 이해 좀 해 줘.”

며칠 전부터 두 아이에게 사정을 했다. 3월 14일은 아빠가 마미랑 저녁을 먹고 들어올 테니 둘이서 저녁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그에 랑일이는 피식 웃었다. 그 표정은 마치 선심 쓴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응, 아빠. 오빠가 맛있는 것 만들어 준다고 했어.

“고마워 공주님. 아빠가 공주님 사탕도 따로 준비했어.”

―고마워 아빠! 아빠, 오빠가 바꿔 달래.

기준은 귤희에게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을 하고는 랑일이와 통화를 했다.

“귤희 좀 잘 챙기고.”

―그건 걱정하지 말고. 근데 아빠.

랑일이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에 기준은 내용이 귤희에 대한 내용일 거라 짐작했다.

―오늘 학교에 귤희 데리러 갔는데.

“너 학교는 어쩌고?”

―아빠, 진짜 아들한테 이러기야? 오늘 우리 학교는 개교기념일이잖아.

랑일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랑일이는 희원이 더 많이 신경 써 주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가끔 이럴 때가 있었다. 기준은 가볍게 사과하고는 계속해서 말하라고 했다.

―아무튼 아빠, 귤희한테 집적거리는 놈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 귤희가 진짜 사탕을 보따리로 들고 나오는 거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진짜?”

―진짜. 작년보다 더 많아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한창 랑일이와 통화를 하는데 희원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게 보였다. 귤희는 유치원 때부터 남자아이들이 서로 도와주겠다, 보호를 하겠다는 등 따라다녔는데, 학교에 들어가니 그게 더했다.

“학교를 안 보낼 수도 없고 곤란하네.”

기준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공주님을 집에만 있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빠의 마음은 이런데 공주님한테 극성인 오빠의 마음은 어떨까.

―마음 같아서는 만날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고 싶다니까.

“랑일아, 마미 나왔어.”

―응, 귤희는 내가 알아서 잘 데리고 있을게. 마미 맛있는 거 많이 사 줘.

두 부자의 통화를 들으며 희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째 랑일이는 날이 갈수록 기준을 똑 닮아 갔다. 하는 말이나 행동 모두 말이다.

“희원 씨, 얼른 타요.”

기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우선 사탕과 꽃을 꺼내 희원에게 내밀었다. 귀여운 꽃다발과 잘 어울리는 사탕 꾸러미를 보며 희원이 감동하여 웃었다.

“마음에 들어요?”

“네, 엄청. 이건 또 언제 사러 갔다 왔어요? 기준 씨가 직접 골랐어요?”

“그럼요, 우리 희원 씨한테 줄 선물인데요.”

희원이 다시 한번 꽃다발과 사탕 꾸러미를 내려다봤다. 바구니 안에 사탕이 종류별로 담겨 있었다. 아기자기 귀여운 걸 기준이 직접 고르고 사 왔다는 것에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배고프겠어요. 저녁 먹으러 가요.”

기준은 희원을 먼저 조수석에 태우고는 자신은 운전석에 앉아서 예약해 둔 식당으로 향했다.

“랑일이가 귤희를 따라다니는 남자애들이 점점 많아진다고 걱정이에요. 귤희를 홈스쿨링 시킬 수도 없고, 걱정이네요. 그래도 유치원은 희원 씨랑 같이 있었으니 걱정이 없었는데, 학교는 쫓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기준과 랑일이는 귤희가 걸을 때부터 뒤를 졸졸 쫓았다. 귤희가 행여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두 남자가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희원은 이제는 두 남자의 극성을 그러려니 했다.

“아이고, 좀 그만해요. 그러다 나중에 우리 귤희는 결혼도 못 하겠어요.”

“희원 씨,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벌써부터 결혼이라니요! 나는 진짜 우리 공주님 평생 끼고 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희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준은 식당에서 밥을 다 먹을 때까지도 귤희 걱정이 한 아름이었다.

“기준 씨, 밥 맛있게 먹었어요. 우리 데이트할 때 생각나니 좋네요.”

희원이 커피를 손에 쥐고는 산책로를 걸으며 말했다. 기준이 희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사귀기 전에 커피를 들고 지금 걷고 있는 산책로를 걸었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했다. 그 뒤로 둘은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보다 더 사랑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았다.

“기준 씨, 나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희원은 자기 커피를 기준의 손에 쥐여 주고는 화장실로 향하는데 뒤에서 기준이 뚜벅뚜벅 쫓아오는 소리가 났다. 희원이 뒤돌아서 가만 쳐다보니 기준도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왜요?”

결국 희원이 먼저 물었다. 기준이 아무런 표정도 없이 대답했다.

“따라가려고요.”

“응? 설마 화장실을요?”

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위험하니까요.”

“응? 공원 화장실이?”

“아무래도 밤이니까요.”

희원이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가 결국 웃음이 터져서 푸흐흐 웃고 말았다.

“아직 8시도 안 된 시각인데요?”

“그래도 희원 씨는 예뻐서 안 돼요.”

“아이고. 우리 여보는…….”

결국 희원은 마치 등 뒤에 대형견 한 마리를 데리고서 가는 것처럼 화장실로 향했다. 차마 안에까지 따라 들어가는 것은 자기가 생각해도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기준은 희원이 안에 들어갔다 나올 때까지 문밖을 지켰다.

희원이 나왔을 때 기준은 희원의 손을 꼭 잡고는 옆구리에 딱 붙이고 걸었다.

“희원 씨는 모르죠?”

“뭐를요?”

“아까 식당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사람들이 희원 씨를 힐긋힐긋 쳐다본다는 걸요.”

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아마도 기준 씨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요?”

그룹 놀의 이사, 차기 후계자 이기준은 꽤나 유명했다. 꼭 그가 누군지는 정확히 모른다고 해도 연예인같이 생긴 외모에 누구나 한 번쯤은 뒤돌아볼 만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눈을 빛내는 건 모르고 그걸 희원 때문이라고 생각하다니!

“아니에요. 내가 다 봤어요. 희원 씨가 예쁘니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호감을 드러내는 눈빛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은 채 보는 거 다 봤어요. 여전히 나는 희원 씨가 귤희 낳고 집에만 있던 때가 가장 좋아요. 꽁꽁 숨겨 두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내 욕심이니까…….”

희원이 작게 웃었다. 이 남자는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남들이 들으면 기함할 말이지만 희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래서 나랑 같이 있을 때만큼이라도 내 품에 꽁꽁 숨기고 싶어요.”

희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기준의 얼굴을 잡고는 그대로 입을 맞췄다. 키를 맞추기 위해서 뒤꿈치를 올린 그 뒷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울 테다. 그걸 아는 기준은 자신이 뱉은 말처럼 희원을 자기 품에 꽁꽁 숨겼다. 아무에게도 희원의 사랑스러운 뒷모습을 보여 주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둘은 서로만 볼 거고 사랑할 것이다. 둘만 아는 방식으로, 지금 이 순간처럼 말이다.

(둘만 모르는 연애 외전 완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