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마음 둘 곳이 생겼다는 것은
귤희는 조금 작게 태어났음에도 잘 먹는 만큼 잘 크고 있었다. 그에 희원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기준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희원은 식구들 먹는 것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몰랐다. 그게 귤희에게는 더했다.
바쁜 엄마들은 이유식을 할 시간이 없으니 사서 먹이곤 했지만 희원은 꼭 발품을 팔아서 좋은 고기와 신선한 채소를 골랐다. 귤희를 데리고 매번 장을 보는 게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아무리 희원이 남자라곤 해도 아이를 낳은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틀어졌던 골반도 아프고 가끔 허리도 아팠다. 아이를 오래 안고 있으면 손목이 시큰하기도 했다. 그런 것을 일일이 티 내거나 하진 않았지만 희원은 그럴 때마다 조금은 우울해지기는 했다. 그러는 반면에 아이를 셋이나 낳은 엄마가 존경스러웠다.
아무튼 희원은 귤희를 안고 또는 업고 장을 보곤 했다. 누군가는 유모차를 끌면 되지 않겠냐고 하지만 아이가 자리에 앉고 스스로 무언가를 잡고 일어나 한 발 두 발 떼기 시작하면 유모차에서 자꾸 내리려고 한다는 사실! 아무 생각 없이 유모차를 끌고 장을 보러 갔다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도로 집으로 온 희원은 다시는 유모차를 끌고 장을 보러 가지 않았다.
귤희는 배 속에서는 그렇게 얌전하더니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어찌나 활발해졌는지 모른다. 눈 깜짝할 새에 온 집 안을 활보하곤 했다.
“우리 귤희, 마미랑 같이 장 보러 갈까? 맛있는 거 사러 갈까?”
희원은 귤희를 차 뒷좌석에 태우고는 천천히 운전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카 시트에도 잘 안 앉아 있으려고 해서 멀리 운전하지도 못했다.
기준은 자기가 장을 보겠다고 했지만 희원은 귤희에게 먹이는 음식은 식재료가 늘 싱싱하기를 바랐다. 누가 보면 너무 극성인 것 아니겠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희원은 기준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니 기준을 만나고 나서도 자기 인생에 아이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귤희는 자신에게 기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다 왔다!”
귤희가 지루해하기 전에 마트에 도착한 희원은 아기 띠로 귤희를 안았다. 처음에는 혼자서 아기 띠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고 그러다 진땀을 빼곤 했는데 이제는 혼자서도 척척 잘해 냈다.
늘 혼자서 몸을 가눌 줄 아는 유치원생만 돌봤던 희원인지라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되고 혼자 몸을 가눌 수 있는 아이들에게는 능숙해도 그렇지 못한 아가에게는 초보 마미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자, 가자!”
하지만 이제는 초보의 단계를 벗어난 희원은 혼자서도 척척 쇼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귤희가 고기 좋아하니까 한우도 사고.”
희원이 간간이 귤희와 눈을 맞추며 대화를 했다. 귤희는 마치 알아듣는 것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 이름이 나올 때마다 발을 굴렀다. 기준이 사 준 하얀 운동화가 허공중에 팔딱팔딱 움직였다.
“오빠가 좋아하는 닭고기도 사자. 그리고 또 뭐가 좋을까? 아빠가 좋아하는 것도 사야 하는데.”
오빠와 아빠라는 단어에 반응한 귤희가 꺄악꺄악 소리를 질렀다. 희원이 그런 귤희의 이마에 제 입술을 대고는 웃었다.
“아빠랑 오빠가 그렇게 좋아요? 얼른 아빠랑 오빠가 집에 왔으면 좋겠다, 그치?”
귤희가 방방 엉덩이를 움직이며 발을 굴렀다. 다리 힘이 부쩍 생겨서 희원은 귤희가 이럴 때마다 귀엽지만 사실 조금 휘청했다. 그래도 예쁜 건 어쩔 수 없었다.
희원이 귤희가 먹을 과일과 채소도 카트에 집어넣고는 빠르게 계산대로 향했다. 이렇게 귤희가 안겨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잠시였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자꾸 내리려고 해서 긴 외출은 자제하는 편이었다.
계산을 마치고 카트를 끌고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귤희를 뒷좌석에 앉히고 그 뒤에 트렁크를 열어서 짐을 실으려고 할 때였다.
“희원아!”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희원의 눈이 커다래졌다.
“엄마?”
“장 보러 왔어? 귤희는?”
“귤희는 차에.”
엄마는 트렁크에 희원을 대신해서 짐을 실어 주었다. 희원이 하려고 했지만 엄마가 얼마나 빠른지 눈 깜짝할 새였다. 엄마가 들기에는 무거울 텐데도 엄마는 힘이 장사인 것처럼 번쩍 들었다.
“얼른 시동 걸어. 귤희가 지겨워할라.”
“엄마는 장 보러 왔어?”
“응.”
그때였다. 뒷좌석에 앉은 귤희가 지겨워지기 시작한 건지 몸을 비틀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공주님이 지겨운가 보다. 엄마가 뒤에 타서 가는 동안 봐줄 테니까 너 어서 운전해.”
“엄마 장 봐야 한다며.”
“됐어 됐어. 그깟 장 좀 오늘 안 보면 어때? 얼른 타.”
엄마는 희원을 운전석에 몰아넣고는 자신은 뒤에 탔다.
“아이고, 우리 공주님. 조금만 참자. 우르르르 까꿍! 까꿍!”
엄마가 혼신을 다해서 귤희를 달래기 시작했고 희원은 그러는 동안 잽싸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귤희는 칭얼칭얼하다가도 외할머니가 불러 주는 노래에 꺄르르 웃곤 했다. 그러다가도 아기 의자가 불편한지 아니면 잠이 오는지 칭얼거리기를 반복했다.
가는 내내 희원은 조바심이 났지만 그래도 뒤에서 엄마가 귤희를 어르고 달래 주는 덕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행여 둘이 있을 때 귤희가 뒤에서 계속해서 칭얼거렸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귤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들어 있었다. 집 주차장에 주차를 하자 엄마가 귤희를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귤희가 살짝 칭얼거렸지만 엄마가 귤희의 등을 토닥토닥 몇 번 두들겨 주자 금세 고롱고롱 잠에 빠졌다.
“엄마, 귤희 눕혀요.”
“조금 이따가. 지금 눕히면 또 깰라.”
“엄마 힘들잖아.”
“괜찮아. 힘들긴 뭘 힘들어. 넌 얼른 냉장고에 재료들 갖다 집어넣어.”
엄마의 말에 희원은 귤희를 맡기고는 냉장고에 재료를 정리하고 그중 고기는 미리 빼서 핏물을 빼기 시작했다.
엄마가 귤희를 잘 눕히고 난 뒤 방에서 나오자 희원이 엄마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엄마 안 만났으면 나 혼자 애탈 뻔했어.”
“원래 저만할 때는 자주 저러는 법이야. 이제 유모차도 안 타려고 그러지?”
엄마의 물음에 희원은 지난번에 귤희가 유모차에서 내린다고 발버둥을 쳐서 결국 집에 서둘러 왔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에 엄마가 안타깝다는 듯 웃었다.
“장을 뭐 그렇게 자주 봐. 힘들면 인터넷으로 시키든가 아니면 이 서방한테 좀 부탁하든가 하지.”
“집에 내내 혼자 있으면 뭐 해. 그렇게라도 귤희랑 바깥바람 쐬는 거지.”
“너도 참 극성이다.”
엄마가 퉁바리를 놓았지만 그게 자기를 걱정해서 그러는 거라는 것을 희원은 알고 있다. 희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엄마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엄마는 어떻게 애 셋을 키웠어? 나는 귤희 하나도 가끔 너무 힘들다는 생각 할 때가 있는데. 그나마 랑일이는 의젓하고 잘하니까 다행이지만.”
“엄마는 너보다 훨씬 어렸잖아.”
“그래도. 누나랑 형은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고 그때 아버지는 만날 바빠서 집에 늦게 들어왔을 거 아니야.”
엄마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피식 웃었다.
“그랬지. 네 아버지가 그때는 연구에 불타오를 때라서 밤낮 없이 논문 쓰고 연구하고 그랬지. 강의도 많았고. 그래 봬도 네 아버지 잘나가는 교수였잖아.”
“와, 엄마 혼자 어떻게 키웠대? 그래도 나는 어머니랑 아버지랑 귤희랑 랑일이 자주 맡아 주기도 하고 엄마나 누나가 맡아 주기도 하고 그러지만 그때 엄마는 아무도 없었을 거 아니야.”
희원은 상상만으로도 혀를 내두를 판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대단하다는 거야.”
“맞아. 내가 생각해도 우리 엄마 대단해.”
“너 말이야, 너. 우리 희원이.”
희원은 엄마의 말에 괜히 가슴이 찡해져서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에그, 애 키우는 거 힘들지는 않아?”
희원은 티슈로 눈가를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뭘 안 힘들어. 힘들지. 아무리 내 새끼라고 해도 몸이 지치고 힘들 때는 애 보는 것도 힘들고 그런 거야.”
“그러지는 않는데…….”
“그럼?”
엄마는 다그치지 않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겠어. 여기저기 쑤시고 그러면 나이 들었나 싶기도 하고……. 헤에, 이건 엄마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치?”
희원은 본인이 말하고서도 쑥스러운지 작게 웃었다. 그에 엄마가 눈가를 훔쳐 주고는 말했다.
“힘든 거 있으면 이 서방한테 말하고 그래. 너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너는 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혼자 그렇게 끙끙거리더라. 막내면서도 말이야.”
“그랬나?”
“그래. 그랬어. 어릴 때 누나랑 형이 그렇게 잘해 주는데도 어리광도 잘 안 부리고… 아무튼 일찍 철이 들었어. 대학 때는 더했고.”
희원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메가로 발현하고 나서도 히트사이클이 오지 않아서 알았다. 자신의 페로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진단을 받고 나서는 더 의기소침해졌다. 그러고는 폐를 끼치면 안 된다, 다 힘드니 표시 내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혼자 앓고 있으면 다른 사람은 몰라. 말하지 않으면 그 속을 알 수가 없어. 가끔은 툭 터놓고 말하고 그래.”
“응.”
“이 서방이 이해 못 해 줄 리가 없잖아.”
“응.”
희원이 웃었다.
“엄마, 간다. 이 서방 오겠다.”
“랑일이 올 텐데 얼굴 보고 가지. 오면 같이 저녁 먹고 내가 태워다 줄게.”
희원의 말에 엄마가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아빠 혼자 엄마 기다리고 있어. 장 보러 가서 왜 이렇게 안 오나 하겠어.”
“응. 그럼 다음에 아빠랑 같이 와.”
“그래, 아. 사돈댁에서 귤희 돌맞이해서 다 같이 여행 가자고 하시더라.”
“진짜? 근데 아빠가 그렇게 한대?”
“응, 시간 맞춰 보기로 했어. 아무튼 희원아, 혼자 짊어지지 말고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대화를 해. 알았지? 그리고 귤희한테도 랑일이한테도 엄마가 보기에는 너무 잘하고 있어. 더 잘해야 한다고 조바심 내지 마. 알았지?”
희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엄마를 배웅했다. 늘 작아 보이기만 했던 엄마의 뒷모습이 오늘은 웬일로 커다래 보였다. 이래서 엄마는 대단하다고 하는가 보다 싶어 희원은 빙그레 웃었다.
* * *
그건 겨울이었지만 눈이 아닌 비가 내리던 주말 어느 날이었다. 어째 아침부터 하늘이 우중충하더니 오전 11시가 넘으니 비가 한 방울, 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했다. 운전을 하던 희원은 앞 유리를 토독토독 두들기는 빗방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비 오네.”
주말 점심에 모처럼 약속이 잡혔다. 다름 아닌 일명 이씨 집안의 며느리들끼리의 점심 식사였다. 사실 죄다 남자라서 며느리라고 지정하기에도 뭐하고, 박 여사는 이씨 집안의 또 다른 아들들이라고 일컫지만 정재계에서는 일명 며느리라고 부르고 있음을 희원도 알고 있었다.
별다른 일은 아니고 최근 모두 각자의 사정으로 바빠서 도통 만나지를 못했다. 기준과 그의 형인 이준은 새로운 사업 때문에 둘이 만나는 날이 늘어난 만큼 일이 많아져 야근이 잦아지고 있었고 해준은 여전한 독박 육아로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기준은 공장 시찰로 며칠 전까지 지방 출장이 있었다. 랑일이가 꽤 컸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런 랑일이와 이제 막 걸으며 종일 종잘거리는 귤희를 희원 혼자서 며칠씩 돌보는 건 아무리 베테랑 유치원 교사라고 해도 체력적인 한계가 있었다.
이틀 전에 출장에서 돌아온 기준은 희원을 내내 잡고는 물고 빨았다. 그러고는 희원을 끌어안은 채 곤히 잠들었다. 희원이 기준의 장단에 모든 것을 다 맞춰 준 뒤 일요일 점심은 따로 약속이 있다고 했더니 기준은 싫은 티를 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세요.”
신호에 걸려서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을 와이퍼가 깨끗하게 씻기는 것을 보고 있는데, 기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희원 씨, 비 오는데 운전 괜찮아요?
“네, 이제 막 오기 시작하는 것 같은데요. 약속 장소에 거의 도착했어요.”
아마 애들하고 놀다가 거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에 자신이 걱정스러워 전화한 것일 거다. 희원은 기준의 걱정이 고마워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우산은 있어요?
“응, 트렁크에 우산 가지고 다니니까요. 걱정돼서 전화했어요?”
―응, 아무리 차 갖고 이동한다고 해도 걸을 일 생기니까요.
희원은 기준의 작은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며 눈앞의 약속 장소를 보고 눈을 크게 키웠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이제 막 비 오는 것 같은데 나가서 놀지도 못해서 어떡해요? 애들하고 집에 있어야겠다.”
그래도 나가서 놀면 조금이나마 덜 힘든데 집에만 있으려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요. 정 심심하면 어머님 댁에라도 가죠, 뭐.
“우리 엄마네?”
―네. 애들 데리고 가서 놀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모처럼 루세 씨랑 만나는 거 재미있게 놀고 와요.
기준의 대답에 희원이 작게 웃었다.
기준이 희영을 묘하게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게 희영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들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음에서 오는 불편함이라는 것을 희원도 알고 있다.
게다가 희영이 기준보다 나이가 어림에도 형의 배우자이기 때문에 손윗사람 대접을 해야 하는 게 묘하게 불편한 모양이었다.
“기준 씨, 또 희영이 형은 쏙 빼고 말하네요.”
괜히 기준을 놀려 주고 싶은 마음에 희영의 이름을 거론하자 기준이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희원은 그런 기준이 귀여웠다. 기준은 어릴 때부터 후계자 수업을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많은 사람을 만나 봤을 텐데 유독 희영을 꺼렸다.
―알았어요. 형수하고도 잘 놀고 와요.
기준이 그렇게 말하고는 덧붙였다.
―이상한 거는 배워 오지 말고요.
그 말에 희원이 웃어 버렸다.
예전에 희영이 이준과 싸우고는 한밤중에 박 여사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집이 발칵 뒤집혔다. 이준이 이 회장한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를 들었고 박 여사에게 등짝 스매싱을 당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영이 박 여사 옆에 딱 달라붙어서 집에 안 간다고 해서 애를 먹었다고 한다.
왜 싸웠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일을 듣고는 희원이 재미있는 에피소드인 양 기준에게 말했는데 그에 기준이 학을 뗐다. 절대 그런 건 배우면 안 된다고. 싸워도 둘이 풀어야지 무슨 친정에 이르러 쪼르르 가듯 박 여사를 찾아가느냐고.
그에 희원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친정 아니잖아요, 엄연히 말하면 시댁인데 뭐. 이랬다가 기준이 그것도 안 된다고, 아무튼 싸울 일도 우리 사이에는 없지만 혹시라도 싸우게 된다면, 아니 기준이 희원을 서운하게 한다고 해도 절대 다른 사람에게 가면 안 된다고 말하고 또 말했다.
희원에게 있어 희영은 의지할 수 있는 형이자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는 사람인데 그것에도 기준은 불만을 표했다.
해준도 그건 마찬가지라고 루세가 그랬다. 왜냐하면 셋이 모였다 하면 점심은 물론 저녁까지 먹고 놀다가 술까지 한잔하고 들어오니 대놓고 싫은 티는 안 내도 해준과 기준은 이준에게 뒤에서 압박을 넣는 모양이었다.
“기준 씨 덕분에 재미있게 놀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마워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줘요!”
―알겠어요.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재미있게 놀아요. 맛있는 건 형수한테 쏘라고 해요.
그 말에 희원이 또 웃었다. 매번 셋이 모일 때마다 기준은 질리지도 않고 같은 소리를 했다.
“알겠어요, 그럴게요. 나 도착했어요. 애들 잘 부탁해요.”
―응, 혹시 술 마시게 되면 전화해요. 데리러 갈게.
“알았어요. 사랑해요.”
사랑한다는 희원의 말에 기준이 웃으며 핸드폰 너머로 쪽쪽 입을 맞췄다.
“어째 비가 더 오네?”
창가에 앉은 희영이 창밖을 내다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희원과 루세에게 춥지는 않느냐고 물었다.
“괜찮아요, 형. 딱 좋아요.”
“저도요.”
“추우면 말해야 해. 감기라도 걸리면 나 욕먹어.”
희영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희원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 주었다. 희원이 괜찮다고 하는데도 희영은 안 된다며 꽤나 희원을 과보호했다. 그러는 동시에 다 구워진 고기를 루세의 접시 위에 올려 두었다.
“희원아, 귤희 돌 때 여행 가서 우리끼리 식사하는 거로 끝내도 괜찮아? 그래도 돌잔치 하는 게 낫지 않나?”
희영의 물음에 희원이 배시시 웃었다.
“그때 되면 복직해야 해서 신경 쓸 게 많을 것 같아서요.”
“벌써 복직해?”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직에 대해서 기준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복직에 대해 기준이 먼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전적으로 희원의 의견을 따르겠지만 자신은 희원이 원한다면 귤희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희원이 복직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희원이 집에서 귤희와 랑일이에게만 매여서 자기 생활이 없는 듯 보여서 그 부분이 신경 쓰인다고 했다. 나가서 돈을 벌라는 게 아니라 말이다. 솔직히 희원은 너무 돈을 안 써서 기준의 입장에서는 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이유 때문에 돈이 둘 사이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기준이 희원에게 복직을 권한 것은 순전히 희원만의 생활을 위함이었다.
“기준 씨가 제가 유치원 애들하고 있을 때가 반짝반짝하다며, 아! 이런 말 하면 너무 닭살인가요?”
그 말에 희영이 마구 웃었다.
“랑일이 아버님께서 우리 희원이 과보호하는 거 누구보다 잘 아는데 그게 뭐 닭살이야.”
“맞아요.”
앞에 앉아 있던 루세도 맞장구쳤다.
“그래서 복직하기로 했어?”
“네. 예전처럼 늦게까지 일하고 그럴 수는 없겠지만요.”
“그럼 귤희는 아이 봐주는 이모님 구하기로 했어요?”
루세의 물음에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봐준다고 했어요. 기준 씨는 우리 엄마 힘들다고 안 된다고 했는데 엄마가 사람 쓰지 말라고. 안심할 수 있겠느냐고 그래서요.”
“하긴 이씨 집안은 돈 없어서 사람 못 쓰고 그런 게 아니지. 랑일이도 어머니가 키웠다고 하지 않았어?”
희영의 물음에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이 랑일이와 분가하기 전까지 박 여사는 사람 쓰지 않고 손수 랑일이를 키웠다고 했다. 집에 있는 이모님은 온전히 집안일을 하는 분이고 랑일이에 관한 건 박 여사가 오롯이 담당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 귤희도 박 여사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죄송스러워서 희원은 사람을 쓰려고 했다. 물론 아이는 세 살 정도까지는 부모가 키워야 한다고 하지만 기준이 봤을 때 이미 희원은 너무 많은 것이 귤희와 랑일이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우열을 가린다는 게 뭐하지만 사실 기준에게 있어서는 희원이 먼저였다.
희원이 사람 문제로 고민하던 때에 마치 희원의 고민이 뭔지 안다는 듯 엄마가 귤희를 봐주겠다고 했다. 집도 가까웠고 희원이 아침에 귤희를 맡기고 가면 될 문제였다. 사실 엄마만큼 힘이 되는 사람이 없기도 했다.
“어머님께는 좀 죄송스럽지만 그래도 희원이에게는 정말 잘됐다.”
희영의 말에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요즘 아버지도 은퇴하고 다들 결혼하고 나니까 뭔가 재미가 없어서 좀 우울하고 그랬나 봐요. 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귤희 맡아 준다는 거에 기뻐하니까 더 기뻐했어요. 아버지도 엄청 좋아했고요.”
“잘됐다.”
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희원 앞으로 고기를 밀어 주었다.
“형도 좀 먹어요.”
“응, 나 먹고 있어.”
“언제 먹고 있었어요? 랑일이가 봤으면 또 뭐라고 했을 것 같은데.”
희원의 말에 희영이 웃었다.
“랑일이한테 비밀로 해 줘. 어째 랑일이가 클수록 점점 보수적인 측면이 큰아빠 닮아 가는 것 같아. 아주 둘이서 만나면 왜 이렇게 밥에 집착하는지 원.”
“그래서 밥 먹이려고 이렇게 왔지.”
“응?”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향하니 그곳에 이준이 랑일이를 안고 서 있었다.
“뭐야?”
희영의 물음에 랑일이가 말했다.
“큰아빠 만나서 놀다가 같이 왔어요. 귤희는 비 와서 할머니네 있어요.”
이준이 랑일이를 내려 주니 랑일이가 희원의 옆으로 다가와 희원의 품에 폭 안겼다. 희원은 단번에 랑일이를 자기 허벅지에 앉혔다.
“우리 아가 아직 밥 안 먹었지? 고기 좀 먹을까?”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기를 날름 받아먹었다.
“근데 랑일아, 아빠는?”
“아빠 주차 중이요.”
희영은 당연하다는 듯 이준에게 고기 집게를 넘겼고 이어서 올라오는 이는 다름 아닌 해준이었다.
“뭐야, 애 좀 보고 있으라니까 본가에다 다 맡기고 여기로 행차들 하셨나 봐.”
루세의 말에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뒤로 희원의 눈에는 누가 봐도 가장 잘생기고 잘난 남자가 올라오고 있었다. 비 오는 날 빨간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고서 말이다.
“와, 뭐야. 비 오는 날이라고 장미꽃 사 왔나 보다.”
희영의 말에 희원의 귀가 빨개졌다. 희영이 얼른 희원의 허벅지에 앉은 랑일이를 자기 허벅지에 올리고는 랑일이에게 속삭였다.
“아빠가 장미꽃 사 왔어요?”
“네. 그리고 이건 랑일이가 산 거예요. 마미, 이건 랑일이가 마미한테 주는 거예요.”
랑일이가 자기 주머니에 꽂혀 있던 분홍빛 장미 한 송이를 희원에게 내밀었다. 희원의 시선이 기준에게서 랑일이에게로 향했다.
“이랑일, 반칙! 먼저 그러기 없기로 했잖아.”
기준이 다급하게 말했으나 이미 희원은 랑일이가 내민 장미꽃을 받고는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옆에서 묵묵히 고기를 굽던 이준이 이번에도 랑일이에게 선수를 빼앗긴 기준을 비웃었다. 그에 희영이 이준의 팔등을 툭 쳤다.
“왜 나는 없어?”
“뭐가?”
“왜 랑일이 아버님만 꽃 사 오고, 나랑 루세의 하인들께서는 아무것도 안 사 왔냐고.”
이준이 “허!” 하고 코웃음 쳤다. 그러더니 결국 희원의 시선을 자기에게로 돌리고 희원과 알콩달콩 이야기하고 있는 기준에게 화살을 돌렸다.
“야, 이기준. 빨리 사정 얘기해.”
“뭐를?”
“들었잖아. 빨리 얘기해.”
하지만 기준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희원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어때요? 꽃다발 마음에 들어요?”
“네, 고마워요, 기준 씨. 나 비 오는 날 꽃다발 처음 받아 봐요.”
희원이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말하는 동안 희영이 소주를 콸콸 부으며 이준을 어떻게 하면 골릴까를 궁리했다. 그에 앞에 앉은 해준이 자기 둘째 형을 노려봤다.
“나랑 큰형이랑 둘이 차 타고 작은형만 따로 차 끌고 왔는데 오는 중에 보니까 어디로 사라진 거예요. 그러고는 저러고 나타났다니까요. 완전 배신자. 우리한테도 귀띔 좀 해 주지.”
해준의 말에 루세가 피식 웃었다.
“그걸 뭐 귀띔해 줘야 아나?”
“와, 자기까지 그러기야?”
해준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희영도 루세도 어깨를 으쓱이며 로맨스는 밥 말아 먹은 두 남자를 욕했다.
“이기준 너만 사랑받으니까 좋냐!”
이준이 희영의 잔을 뺏고 그 대신 고기를 그릇에 덜어 주며 말했다. 하지만 기준은 뻔뻔하게도 고개를 끄덕이며 희원의 고기를 챙기고 음료수를 더 주문할 뿐이었다.
“귤희는 본가에 있어요? 엄마네 간다고 하더니?”
“네, 형이랑 해준이 다 본가 와 있다고 해서 본가로 갔다가 비 와서 귤희는 데리고 나오면 감기 걸릴 것 같아서 두고 왔어요.”
“응, 그럼 이따 귤희 데리러 가야겠다. 랑일아, 큰마미 거 고기 먹지 말고 이거 먹어.”
희영의 허벅지에 앉아서 희영의 그릇에 담긴 고기를 날름날름 받아먹고 있는 랑일이를 보며 희원이 놀라서 말했다. 그에 희영이 희원에게 눈짓으로 괜찮다고 말했지만 이준이 또 그 모양이냐는 표정을 지으며 희영의 입에 고기를 처넣었다.
“이이!”
“맞고 먹을래? 랑일이도 이렇게 잘 먹는데, 안주 없이 술만 먹고 집에 가서 나를 또 얼마나 괴롭히려고 이래!”
“어? 형 주사 있어요?”
루세의 물음에 희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없어.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루세랑 희원이가 오해하잖아.”
“그래, 네 맘대로 생각하세요.”
이준의 말에 희영이 무시하고는 루세와 희원에게 물었다.
“루세랑 희원이도 주사 없지?”
“희원 씨 술 마시고 취하면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팔불출.”
기준의 대답에 해준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귤희 돌맞이해서 다 같이 여행 가자는데 갈 수 있어요?”
희원이 희영과 루세에게 물었다. 백일잔치 때 워낙 크게 했었고 돌 때는 희원이 유치원 복직을 앞두고 있어서 박 여사가 먼저 나서서 백일 때처럼 신경 쓰지 말자고 했다. 그때 희원이 너무 모든 것을 하려고 했던 것을 박 여사가 알고 있었고 그런 희원을 안쓰러워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박 여사는 자신이 다 준비할 테니 여행을 가자고 했고 그에 희원네 부모님께서는 좋다고 한 상태였다. 희원의 누나와 형네는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부득이하게 이번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대신 희원은 희영과 루세가 함께 가기를 원했다.
“우리는 시간 괜찮아요. 우린 같이 가면 좋죠.”
루세가 대답하자 희원이 해준을 보며 물었다.
“해준 씨는 괜찮아요? 직장인인데 미리 휴가 내는 거 말해야 하는 거죠?”
“이해준같이 회사 막 다니는 애가 어디 있다고요. 희원 씨, 이해준은 걱정하지 말아요. 쟤처럼 상사 눈치 안 보는 애도 없어요.”
“형, 그 말 지금 꼰대 같은 거 알지?”
역시나였다. 기준의 말에 해준이 꼰대를 들먹였고 이제는 부사장 직급을 가진 이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이해준은 꼭 나중에 너 같은 부하 직원 만나라.”
“와, 너무하네, 큰형까지!”
옆에서 소동이 벌어지든 말든 여전히 희영은 자기 몫의 고기를 랑일이에게 몰래 먹이고 있었다. 또 이준이 한 소리 하겠다 싶어서 희원은 얼른 대화의 화살을 희영에게 돌렸다.
“희영이 형은요?”
“우리도 괜찮아. 나는 아직 연차 많이 남았어.”
“다행이다.”
희원이 너무 좋아했다. 희원도, 루세도, 희영도 서로 뜻이 잘 맞아서 모이면 즐겁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희원은 사실 자라는 동안 아픈 이야기나 고민거리를 잘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의 페로몬 문제 때문에 안 그래도 가족들이 고민이 많았는데 그에 덧붙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 커서, 그것도 결혼을 해서 마음 편히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요즘 희원은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 * *
희원은 다 같이 가는 여행이라고 해서 뭔가 옛날 크리스마스 때 봤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크리스마스만 되면 방영하곤 하는 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정신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서로 다들 바쁜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시간을 며칠씩 뺄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여행은 국내의 조용한 섬으로 장소를 정했고, 배가 섬으로 들어갈 곳에 약속 시간 맞추어 각자 모이기로 했다.
“기준 씨, 나 정말 궁금한 거 있는데요.”
“네, 말해요.”
“여기 섬도 기준 씨네 거예요?”
“응. 이젠 잘 아네요?”
기준의 대답에 희원이 입을 떡 벌렸다. 그래, 이 집안이 이런 집안이었지. 희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희원 씨, 애들 옷이랑 이런 거 다 챙겼는데 짐 실을까요?”
기준의 물음에 희원이 그러라고 대답했다. 보통 어디라도 이동하려면 오메가들이 하는 일이 더 많았다. 아이들 옷을 챙긴다든가 먹을 것을 챙긴다든가 이런 일들은 여전히 오메가들이나 엄마의 역할이었는데 기준은 혼자서 랑일이를 키워 봐서 그런지 알아서 척척이었다.
“귤희 기저귀랑 분유랑 이유식 통 같은 것들도 다 챙겼어요!”
“네.”
“애들 상비약도 챙겼으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희원이 배시시 웃었다. 결혼 한번 잘했지.
“희원 씨가 우리 옷 가방만 챙겨 주면 돼요.”
“응, 그럴게요!”
해 봐야 주말 끼고 3박 4일뿐인 여행이었지만 아이가 둘이나 있다 보니 챙길 게 많았다.
“마미! 추우니까 코트 입어요?”
“응, 가는 길에 휴게소 들를 수도 있으니까 챙겨 가자.”
랑일이는 이제 쑥쑥 자라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어찌 보면 편하지만 어찌 보면 너무 일찍 철이 드는 게 아닐까 걱정스럽고 아쉽기도 했다.
“압빠! 압빠!”
걷는 데에 한창인 귤희가 아장아장 기준에게 다가와 다리를 부여잡았다. 그에 딸 바보인 기준은 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귤희를 안아 들었다.
“아빠 여기 있지요.”
“압빠!”
“응, 아빠 여기 있어요. 우리 공주님 이제 차 타야 하는데 가면서 울기 없어요.”
“응!”
알아듣는 것처럼 귤희가 대답하자 기준은 또 그게 너무 예뻐서 귤희를 안고는 배에 머리를 마구 비볐다. 귤희가 간지러워서 까르르까르르 웃었다.
“자, 그럼 가자!”
희원의 말에 기준이 귤희를 잘 안고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랑일이는 뒤에서 귤희와 얼굴을 마주하며 방그레 웃으며 귤희를 얼렀다. 그런 랑일이가 예뻐서 희원은 또 랑일이 머리를 연신 쓰다듬어 주었다.
“기준 씨.”
“네.”
“애들 배 타고 멀미 안 할까요?”
희원이 염려스러운 듯 물었다. 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귤희는 내내 잘 것 같고 랑일이는 이미 멀미약을 먹인 상태였다.
“랑일이는 멀미약 먹였잖아요. 그러는 희원 씨는 괜찮겠어요?”
“응, 나는 괜찮아요. 나 대학교 때 여행 가느라 배 탄 적 있거든요. 일행 중에 나만 괜찮았어요.”
“다행이에요.”
기준이 희원을 마주 보며 안심이라는 듯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가족끼리 여행을 떠나는 게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작년에 신혼여행이 있었고 그 전에 강원도 별장 여행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규모로 움직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희원네 가족은 꽤나 오순도순하지만, 희원과 누나, 형은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희원이 일찍이 취업하는 바람에 서로 시간을 맞춰서 여행을 가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다. 어릴 때 희원은 영화를 보면서 가족끼리 가는 여행을 꿈꾸곤 했다.
둘은 두어 시간을 달린 끝에 배가 정박해 있는 항구에 도착했다. 이미 양가 부모님은 도착해서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겨울이지만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바람도 불지 않아서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았다. 바닷가 위에 햇빛이 쏟아져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희원아, 어서 와!”
희원을 보고 저 멀리서 박 여사와 엄마가 손짓했다. 희원은 새로운 가족과 함께하는 이 여행이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벌써부터 가슴이 설렘으로 가득 차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희원 씨, 가요.”
뒤에서 기준이 다가와 품속에 꼭 안고는 속삭였다.
부족한 것 많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 줬던 사람, 아무 조건도 요구하지 않고 희원 그 자체를 사랑해 준 사람, 새로운 가족을 선물해 주고 마음을 따듯하게 채워 준 이 사람. 희원이 늘 영원히 사랑하고자 마음먹게 하는, 멋진 이 사람. 희원의 삶의 기준이 되어 버린 이 사람에게 희원은 오늘 이 순간 또다시 반하고 말았다.
희원은 기준을 향해 햇살같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