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당연히 내가 더 사랑하니까
보글보글 끓는 죽을 바라보며 희원이 입꼬리를 올려서 미소 지었다. 아기 새처럼 작은 입을 벌리고 받아먹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벌써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따듯해지고 행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자신의 허리를 껴안는 커다란 손에 희원이 방금 전보다 더 맑게 웃었다.
“희원 씨.”
“일어났어요? 잘 잤어요?”
“자다가 깨 보니까 희원 씨가 없어서.”
아이같이 투정을 부리는 모습에 희원이 작게 웃었다.
“자다가 사라지지 좀 말아요. 없어진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요.”
“내가 어디를 가겠어요? 언제 기준 씨 놔두고 간 적 있나?”
기준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희원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볐다. 희원은 목덜미에 닿는 머리칼이 간지러워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거 뜨거워요. 좀 비켜 봐요.”
“으응.”
대답은 넙죽 하면서도 희원 대신 기준이 먼저 인덕션 불을 끄고 희원을 끌어다가 자기 허벅지에 앉혔다.
“아침 인사. 응?”
갓 깬 것처럼 굴더니만 언제 다 씻고 나왔는지 말끔한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만 살짝 젖은 상태였다. 희원이 기준의 뺨에 손을 대고는 입을 맞췄다. 스킨 향이 물씬 풍겼다.
“옷 좀 골라 줘요.”
“응.”
대답이 나오자마자 기준이 그대로 희원을 안아 들었다. 희원이 똥그래진 눈으로 기준을 바라봤다.
“귀여워.”
기준이 희원을 안고 드레스 룸으로 향하면서 놀란 희원의 콧잔등에 입을 맞췄다.
“이제 그만 내려 줘요.”
“옷 골라 줘요.”
“아니, 이러고 어떻게 옷을 골라요?”
희원이 자기를 내려 달라고 해도 기준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고는 희원을 안은 채로 드레스 룸을 돌아다녔다.
“자, 이제 타이 골라 줘요.”
기준은 정말로 작정한 듯 셔츠랑 베스트, 바지 등을 고르는 내내 희원을 안고 내려놓지를 않았다.
“음, 타이는 저거요!”
“이거?”
“아니, 그 옆에 거.”
“저거?”
“아니이! 잠깐만.”
희원이 기준을 불퉁하게 바라봤다. 이 남자가 지금 계속해서 못 알아듣는 척 장난을 하고 있는 거였다.
“나 내릴래.”
“알았어, 알았어. 이거 맞죠? 검은색에 네이비. 그쵸? 자, 이제 시계 골라 줘요.”
그때였다. 저쪽에서부터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둘의 눈이 딱 마주쳤다.
“랑일이다!”
“아들이다. 이제 내려 줘요.”
“마미!”
“저 훼방꾼.”
“아니 기준 씨, 이제 내려 주라고요!”
랑일이가 오고 있으니까 내려놓으라고 해도 기준은 들은 척 만 척 했다. 희원은 기준의 어깨를 쭉쭉 밀었다. 하지만 기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희원은 정말 자기도 이제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랑일이 온다니까요.”
“괜찮아요, 뭐 어때!”
“마미!”
“어, 랑일아. 마미 여기 있어.”
기준은 말도 안 듣고 계속해서 희원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마미, 귤희 깼어요!”
“어! 귤희 깼다. 희원 씨, 귤희 깼대요.”
기준이 얼른 희원을 내려놓았다. 희원이 서둘러 방문을 박차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읏쌰! 랑일이 잘 잤어? 귤희한테 같이 갈까?”
“네!”
제법 더워진 여름의 여느 날과 같은 아침이었다.
랑일이는 예전처럼 희원의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벌써 일곱 살이지만 여전히 자신에게는 아기 같은 랑일이가 희원은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우리 귤희가 깼어요?”
요즘 혼자서 앉아서 잘 노는 귤희는 아침에 일어나서도 울지 않고 순둥이처럼 놀았다. 기준을 닮아서 그런지 아침잠이 없는 랑일이가 일어나서 귤희를 보고 같이 있다가 희원을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고 아니면 랑일이가 조금 늦게 일어나서 비몽사몽간에 희원을 찾아서 귤희가 깬 것을 알릴 때도 있었다.
“맘마! 맘마!”
제법 뭐라 뭐라 소리를 내는 귤희는 종일 희원과 붙어 있으면서 희원의 조잘거림에 익숙해져서 요즘에는 더 많이 종잘거렸다.
“우리 귤희 공주님이 맘마 먹고 싶어요?”
어느새 옷을 다 입은 기준이 나타나서 귤희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식탁으로 데리고 가서 앉혔다. 그러는 사이 희원은 랑일이가 씻고 나오도록 하고 재빨리 아침밥을 차렸다. 귤희 앞에도 죽을 내놓았다.
“우리 공주님, 맘마 먹을까요?”
“어어! 어제처럼 또 셔츠 버리지 말고 놔둬요. 내가 할게요.”
희원이 귤희 숟가락을 쥐고 있는 기준을 말렸다. 어제 아침에도 귤희 이유식을 기준이 먹이다가 귤희가 숟가락을 턱 쥐는 바람에 귤희 옷이 이유식 범벅이 되는 것은 물론 기준의 셔츠에도 다 묻었다. 그 바람에 기준은 입었던 옷을 죄다 갈아입어야 했다.
“뭐 어때요. 그깟 옷 갈아입으면 되죠.”
그깟 옷이라고 하기에는 셔츠 하나가 몇백만 원임에도 딸내미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었나 보다.
결국 오늘도 귤희 숟가락은 기준이 쥐었고 아침 내내 귤희 이유식을 먹이는 데에 정신이 다 팔려 있었다.
“아, 맞다. 기준 씨.”
“응?”
희원이 아직 욕실에서 나오지 않은 랑일이 눈치를 한번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요즘 유치원에 랑일이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나 봐요.”
“랑일이야 원래 친구 많은데요?”
기준이 그게 무슨 특별한 일이냐는 듯 희원을 바라봤다. 그러는 동안 귤희는 자기 이유식 안 준다고 손을 뻗고 발을 구르고 난리가 났다.
“아고, 우리 공주님이 배고픈데 아빠가 맘마를 안 줬어요? 마미가 해 준 맘마가 그렇게 맛있어요?”
기준이 얼른 공주님 입 앞에 숟가락을 대령했다. 희원이 다시 욕실을 힐긋 쳐다보고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랑일이한테 여자 친구가 생긴 것 같다고요.”
“응?”
기준이 숟가락질하던 손이 우뚝 멈췄다.
“여자 친구뿐만 아니라 남자 친구도 생긴 것 같다고요.”
“아. 그게 뭐가요?”
희원은 자기 가슴을 콩콩 쳤다. 자기가 헷갈리게 말하기는 했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란 말이다.
“그 말이 아니라 랑일이를 그 뭐냐 짝사랑하는 친구들이 생겼다고요.”
“으응? 짝사랑?”
희원이 목소리를 낮추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고는 눈짓을 했다.
“며칠 전에 랑일이 두고 남자 친구랑 여자 친구가 싸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그게 그냥 남자 사람 친구랑 여자 사람 친구가 아닌, 아무튼 어쨌든 그 뭐냐 두 명이 랑일이를 좋아한다는 그 말인 거죠?”
기준의 물음에 희원은 이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들을 좋아하는 친구가 두 명이나 된다고요? 이놈 설마 양다리 이런 건 아니죠?”
“기준 씨는 우리 랑일이를 어떻게 보는 거예요!”
희원이 눈을 흘겼다. 그때였다. 욕실 문이 열리더니 랑일이가 위풍당당하게 나왔다.
“마미! 다 씻었어요!”
“그래? 잘했어. 이제 혼자서 세수도 하고, 우리 아들이 다 컸네!”
희원이 랑일이 얼굴에 로션을 발라 주고는 식탁 앞에 앉혔다. 랑일이가 밥을 먹기 시작하고 이제 이유식을 다 먹은 귤희가 숟가락을 쥐고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한창 이가 나기 시작하는지 잇몸이 간지러워서 뭐든 입에 가져가서 질겅질겅 씹었다.
“에그, 공주님 지지. 입술에 침 다 묻었어요.”
기준이 자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귤희 입가를 닦아 주었다.
“랑일아.”
기준이 뭔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랑일이를 불렀다. 밥을 복스럽게 먹고 있던 랑일이가 제 아빠를 바라봤다.
희원은 아침부터 기준이 또 랑일이를 놀릴 것 같아서 하지 말라는 눈빛을 마구 보냈다. 하지만 평소에는 희원이 눈빛으로 뭔가를 말하면 금세 알아듣는 기준은 이럴 때만 못 알아듣는 척을 했다.
“유치원은 좀 어때? 재미있어?”
“하지 말라고오. 쫌!”
희원이 이를 윽물고 작게 말했지만 여전히 기준은 안 들리는 척했다.
“유치원? 재미있는데? 근데 마미가 없어서 조금 쓸쓸해.”
‘쓸쓸하다는 단어는 또 어떻게 알았을까? 역시 우리 아들은 똑똑해.’
희원은 잠깐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금세 이게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기준이 또 랑일이를 상대로 장난을 치려고 하는 게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귤희에게는 벌벌 떠는 팔불출 아빠가 랑일이에게는 유독 장난꾸러기로 변하고 있어서 희원은 걱정이 많았다. 그럼에도 둘이 너무 사이가 좋아서 어쩌면 사서 하는 걱정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아들, 너 요즘 누구랑 사귀어? 근데 한 명만 사귀어야 하는 거야.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 안 되는 거야.”
랑일이가 무슨 소리 하는 건가 싶어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너 두고 친구 둘이서 싸웠다며.”
“아아.”
그제야 랑일이가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번에 소풍 갔잖아.”
“그랬지.”
“그때 나랑 손잡겠다고 해서.”
“아. 우리 아들 인기 많네?”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이다 말을 툭 뱉었다.
“그런데 두 명 아닌데?”
“그럼?”
“세 명인데?”
희원하고 기준의 눈이 딱 마주쳤다. 희원도 그건 몰랐던 모양이다.
“근데 난 관심 없어.”
“왜?”
기준이 다시 물었다. 그 와중에 희원은 도대체 ‘관심’이라는 단어는 또 언제 알았고 이럴 때 쓰는 건 누가 가르쳐 줬을까 하고 랑일이의 언어 실력에 대해 감탄하고 있었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팔불출 집안이었다.
“난 마미가 제일 좋거든.”
기준은 랑일이 대답에 이마를 딱 짚었다. 그 마미는 자기 거라고 말하려고 했다. 자칫하면 아들이 마마보이가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 마미. 할머니가 그러는데요.”
“응?”
“내가 인기 많은 건 아빠 닮아서래요. 아빠도 어릴 때 막 삼각 그 뭐였지? 그 삼각형? 아닌가?”
“삼각관계!”
희원의 말에 정답이라는 듯 랑일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희원은 돌을 씹은 듯 굳어졌고 그보다 먼저 기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있었다.
“잠깐만 앉아 봐요.”
희원이 기준의 손목을 턱 잡았다. 그에 기준이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다 어색하게 웃었다. 입꼬리를 올리기는 했는데 눈동자가 심하게 방황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랑일이는 해맑은 표정으로 제 아빠를 올려다보더니 다시 밥 먹는 데에 집중했다.
“희원 씨, 옷에 뭐가 묻어서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아요.”
셔츠 소매 끝에 귤희가 묻힌 이유식 잔해가 묻어 있었다. 희원이 기준을 가만 바라보다 스르륵 손을 풀어 주었다. 그에 기준은 속으로 ‘역시 우리 공주님이 아빠의 구세주다.’ 하고 생각했다.
기준은 드레스 룸에 다시 들어가서 머리를 회전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서 나온 말이지? 그런 말이 왜 나왔지? 박 여사한테 전화를 해 볼까? 지금 뭐를 해야 하지?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뱅뱅 맴돌고 있을 때였다.
“뭐 해요? 회사 안 가요?”
희원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날카롭게 들리는 것은 기분 탓일까? 기준이 재빨리 다시 셔츠를 입고 타이를 매고는 서둘러 거실로 나갔다.
“아빠, 뭐 해? 아빠 때문에 유치원 늦겠어.”
기준이 랑일이를 노려봤다. 지금 너 때문에 이 아침 분위기가 험악해진 거 안 보이냐?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진짜로 말을 뱉을 수는 없었다.
“그, 그래. 가야지.”
기준이 이를 윽물며 대답했다. 그러든 말든 랑일이는 자기 가방을 스스로 메고 희원에게 다가가서 포옹을 했다.
“마미 다녀오겠습니다! 귤희야, 오빠 유치원 갔다 올게. 마미 말씀 잘 들어야 해.”
의젓한 랑일이의 모습에 희원이 흐뭇하게 웃었다. 랑일이는 꼭 외출할 때 집에 있는 귤희에게 마미를 잘 도와야 한다는 둥,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둥 당부를 하고 나갔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동생에게 말이다. 하지만 희원은 그런 랑일이가 기특하고 귀엽기만 했다.
희원은 랑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우리 랑일이도 유치원 가서 재미있게 지내고 와. 친구들이랑 잘 놀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말 안 해도 우리 아들은 잘하지만. 랑일아, 이따 저녁에 보자.”
“네! 마미 사랑해요!”
“응, 마미도 사랑해.”
랑일이는 귤희를 꼭 안아 주고 희원을 다시 안아 준 뒤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었다. 유치원 하복을 입고 나가는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 발랄해 보였다.
반면 기준은 조심스레 랑일이 뒤에 바짝 붙었다.
“기준 씨.”
“네?”
기준이 화들짝 놀라서 벽에 등을 붙였다.
“얼른 가요. 뭐 해요? 벽에 붙어서?”
“그러게요. 이따 저녁에 봐요. 다녀올게요.”
“네, 다녀오세요.”
오늘따라 유독 배웅 인사가 딱딱하다고 생각되는 건 그저 기분 탓일 거다. 기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어색하게 웃으며 집을 나왔다.
랑일이를 뒤에 태우고 운전을 하면서 기준은 거울로 아들을 힐긋 쳐다봤다. 참 천연덕스러웠다. 어찌나 해맑은지 원, 콧노래를 다 부르고 있었다. 기준은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랑일이에게 말한다고 알아들을 것도 아니고, 그래, 이건 모조리 박 여사 때문이다. 화살이 어머니한테로 향했다.
“이랑일.”
“응?”
“할머니가 진짜 그렇게 말했다고?”
“뭐를?”
랑일이는 아침에 있었던 사건을 이미 머릿속에서 지운 것 같았다. 기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너한테 말해서 뭐 하겠냐.”
“뭐가?”
“됐어. 유치원 다 왔어.”
기준이 운전석에서 내려서 랑일이를 꺼내 주고는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랑일이가 뚱하게 기준을 올려다봤다.
“왜?”
“아빠, 왜 잘 다녀오라고 뽀뽀도 안 해 줘?”
기준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희원이 잘 다녀오라는 인사도 없었고, 다녀오라고는 했지만 앞에 ‘잘’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웅의 키스도 없었다.
그렇다고 유치원 앞에서 아들에게 너 때문에 마미랑 뽀뽀도 못 했으니 너한테도 해 주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기준은 랑일이를 안아서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아빠, 안녕! 이따 봐!”
“그래.”
기준은 손을 휘휘 흔들었다. 랑일이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얼른 차에 탔다. 그러고는 즉시 박 여사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박 여사는 당연하다는 듯 전화를 받지 않았다.
* * *
“이사님, 이사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기준이 원 실장을 쳐다봤다.
“네, 뭐라고 하셨죠?”
“아뇨,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다만 안색이 좀 안 좋아 보여서 그러는데 컨디션이 좀 안 좋으신 게 아닌가 싶어서요.”
“아닙니다.”
단호하게 딱 잘라 대답하는 기준에 원 실장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 이기준 이사가 아플 리 없다. 결혼하고 나서 줄곧 꽃밭인데 아플 리가!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라는데 지금의 이기준 이사는 스트레스를 전혀 받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이기준 이사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혹시 희원 님하고 싸운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긴 했지만 원 실장은 늘 방실방실 웃는 희원과 싸울 게 뭐가 있을까 싶었다.
“정말 아무 일 없으신 거죠?”
“네, 아무 일도 없습니다.”
기준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원 실장에게 나가 보라고 했다. 하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건 아니었다.
도대체 삼각관계가 뭔 말이람. 그러다 하나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정말 옛날 일이다. 대학교 다닐 때니 말이다.
물론 기준은 늘 인기가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놀의 후계자로 내정되어 있었고 그러면서 사교 모임에 자주 나갔다. 이 회장이 큰아들인 이준 대신 기준을 데리고 다니면서 진작부터 놀의 차기 주인은 이기준이라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그가 극우성 알파답게 피지컬도 끝내준다는 것 또한 정재계에서 소문이 아닌 사실로 자리 잡고 있었다.
어디 피지컬뿐이겠는가? 생긴 것만큼 명석한 두뇌는 어쩌고. 이기준은 상위권을 놓쳐 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기준의 눈에 어떻게든 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넘쳐 났다. 오메가는 물론이고 알파도 있었다.
베타는 어차피 상류층에 존재 자체가 희박했고 여전히 평등하다고 해도 상류층은 알파와 그 알파의 씨를 가질 오메가의 세상이었다. 그러니 기준의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오메가는 학생 때부터 존재했고, 알파들은 어떻게든 사업적으로 줄을 대고 싶어서 접근했다.
하지만 이기준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인가.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경영 공부 해야 한다고 모두를 쳐 냈고 러트 때나 되어야 오메가를 불렀지만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러트 때 부르는 오메가와는 사전에 각서를 받아 냈다. 대강 내용은 그런 거였다. 러트 이후에 어떤 이류를 대서든 이기준이나 놀에 달라붙을 생각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철벽을 쳤어도 문제는 생기기 마련이었다. 이기준이 아무리 얼음장 같다고 하여도 그도 사람인데 호감 가는 인물 하나 없었을까? 아끼는 후배 정도는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절대 호감 이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전 그런 감정을 가져 본 적도 없고 그래서 표현한 적은 더더군다나 없었던 이기준이었기 때문에 그가 베푼 조금의 호의에 상대방은 오해를 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이기준과 그 후배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둘이 만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기준을 둘러싸고 그 호감이 있던 후배와 기준의 러트 때 같이했던 오메가가 싸움이 붙었다는 거다. 공교롭게 같은 대학이었다. 그야말로 떡 줄 사람은 꿈도 안 꾸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격이었다. 서로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거라며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는데 결과는 뭐 보나 마나였다. 그야말로 자기를 둘러싸고 소동을 벌인 두 사람을 기준은 가차 없이 귀찮다는 이유로 싹을 잘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사건은 두고두고 이씨 집안에서는 놀림거리였다. 박 여사는 자기 아들이 바람기가 있었다며 한탄하는 듯한 어조로 걱정하는 게 아닌 비웃었고, 형인 이이준은 조신하게 살라고 말했다. 동생인 해준은 개 같은 이기준 성격 괜히 건드렸다가 맞을지도 몰라서 깐죽거리지는 않았지만 뒤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고 한다.
그나저나 그게 언제 일인가? 20대 초반이니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걸 이렇게 불쑥 꺼내기 있나?
기준은 다시 어머니한테 전화를 했지만 박 여사는 역시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도대체 전화는 왜 안 받으시는 거야!”
기준은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보다 희원의 상태가 어떤지를 알 수가 없어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희원에게 전화를 해 볼까 싶다가도 분명 박 여사와 통화를 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넘겨짚어서 말했다가 실수할 것 같기도 해서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기준은 끊었던 담배가 피우고 싶을 정도로 속이 타들어 갔다.
“하아.”
길게 한숨을 쉬고 서류를 보는데 글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진짜 이러기 있냐고!”
기준은 다시 한번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가 안 받는 전화에 분통을 터뜨렸다. 이건 분명 복수나 다름없었다.
또 고부간의 모임을 갖는다는 소리에 기준이 총대를 메고는 무슨 모임을 매일 갖느냐고 어머니가 아무리 그래도 희원 씨는 자기 거라며 못 만나게 했다. 다른 형제들은 그냥 쥐 죽은 듯 가만있는데 나서서 그 모임에 재를 뿌렸으니 분명 그래서 이러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 내가 뭐 사귀기를 했어, 뭐를 했어!”
기준은 종일 생각하고 내린 결론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준은 차에 타서도 계속해서 자기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걸로 희원 씨가 화내면 말이 안 돼. 내가 걔네랑 사귀기를 했어, 아니면 양다리를 걸쳤어, 뭐를 했어. 난 진짜 아무것도 안 했는데 걔네 둘이 북 치고 장구 치고 그런 걸 나한테 어쩌라고.”
기준은 랑일이를 원 실장에게 부탁하고는 집으로 향했다. 물론 퇴근한다고 하니 원 실장이 눈을 부릅뜨고 뭔 소리냐고 게거품을 물었다. 저번에도 희원 님 아프다고 일방적으로 쉬시지 않았냐고 뭐라고 하는데 기준은 그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니 그럼 이사가 쉬겠다는데 일방적으로 쉬지, 뭐 다 허락받고 쉬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또 귀결점이 희원인지라 그러다 보니 정말로 컨디션이 별로인 것 같아 그 핑계를 대며 들어가겠다고 했다. 사실 컨디션이 별로라기보다는 희원이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일이 전혀 손에 잡히지 않았다. 희원과 무슨 이야기라도 해야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희원이 화를 내면 그에 대한 변명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준은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벨도 누르지 않고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던 희원이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뭐 놓고 갔어요?”
“아니요.”
“그럼요?”
“내가 집에 오는 게 이상해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건 아니지만…….”
기준이 타이를 풀며 소파에 앉았다. 왠지 날이 서 있는 것 같은 기준의 말투와 행동에 희원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눈치를 살피며 옆에 앉았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아뇨.”
“그럼…….”
“아니, 내가 뭐를 어떻게 한 건 아니잖아요?”
“네?”
날이 선 것은 아니었고 그냥 도둑이 제 발 저린 거였다. 뜬금없는 기준의 말에 희원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박이며 기준을 바라봤다.
그래, 기준은 혼자서 계속 땅을 파다 보니 지금 판단력이라는 게 실종된 채였다.
“삼각관계? 그게 말도 안 되는 게 나는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니까요?”
“아…….”
눈치 빠른 희원은 지금 기준이 갑자기 왜 집에 들이닥쳤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 남자가 계속해서 그걸 신경 쓰고 있었던 거다. 아침에 랑일이가 툭 던진 그 말을 말이다.
“기준 씨, 설마 그 아침에 그러니까, 랑일이가 말한 삼각관계가 신경 쓰여서 지금 귀가한 거예요? 그런데 랑일이는 어쩌고요?”
희원은 자기가 오후 내내 잊고 있었던 그 아침의 일들이 다시 생각나기 시작해서 자기도 모르게 팔짱을 척 하고 끼었다.
“랑일이는 원 실장님한테 부탁했어요. 이따가 데리고 올 거예요. 그건 그렇고 희원 씨. 진짜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희원 씨가 그렇게 반응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요.”
희원이 기준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렇게 반응하는 게 뭔데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기준이 말을 멈췄다. 희원이 조금 더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그러니까 뭐요?”
“그러니까! 그래, 그러니까 화를 내는 거요.”
희원은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었다. 화를 내다니 누가? 황당했던 건 사실이다. 갑자기 그런 식으로 기준의 옛이야기를 훅 하고 들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그냥 기준이 예전에 친구가 많았지, 또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똑똑해서 성적이 늘 우수했어, 이런 내용이 아니니까 말이다.
무려 연애사다. 모든 사람에게 차가웠을 것만 같은 기준에게도 연애사가 있었다는 거다. 그런데 그게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희원에게는 모든 게 다 처음이라는 식으로, 이렇게 사랑하는 건 네가 처음이야, 이런 식으로 말했으니 말이다.
물론 기준은 이미 결혼도 했던 사람이지만 그건 정략결혼이었고 마음도 없었다는 것을 희원도 알고 있다. 하지만 연애 이야기는 다른 거다. 연애라는 건 마음이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기분이 이상했던 건 사실 아침 그 순간뿐이었다. 기준이 출근한 이후에 희원은 자기가 출근길인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어서 살짝 반성도 했단 말이다.
가뜩이나 일 때문에 바쁜 사람인데 괜히 신경 쓰이게 한 건 아닌가 싶어서 이따 저녁에 오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맛있는 것이라도 좀 차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시간이 지나니 아무렇지도 않았고 말이다.
희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기준이 이어서 말하기 시작했다.
“정말 사귄 것도 아니고 특별한 관계도 아니었어요. 그냥 둘이서 김칫국 마시고 싸운 거예요. 내가 중간에 어떻게 한 것도 아니고요.”
“싸웠다고요? 말다툼 이런 거?”
“아뇨, 정말로 육탄전.”
“진짜?”
희원은 놀라서 묻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그렇구나. 알겠어요.”
사실 희원은 기준의 나이가 있으니 경험도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물며 그는 극우성 알파에 집안도 좋고 외모도 뛰어났다. 지적 능력도 훌륭하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기준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을 거다. 그가 인기가 없었다고 하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였다.
그래서 희원은 아침에 순간 좀 기분이 묘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니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기준을 둘러싸고 치고받고 싸웠다는 게 놀랍긴 하지만 그 싸움이 놀라운 거지, 기준이 인기가 많았다는 게 놀라운 건 아니었다.
“알겠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예요. 사실 기준 씨가 인기 없었다고 말하는 게 더 거짓 아니겠어요? 기준 씨 조건은 객관적으로 봐도 훌륭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사건, 뭐 그런 삼각관계 정도는 그럴 만하다는 거죠. 이해해요. 있을 법한 일이에요.”
“아니, 잠깐만.”
기준은 뭔가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걸 알았다.
“왜요?”
희원이 너무 해맑은 표정으로 기준을 들여다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희원은 더 이상 고민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와, 랑일이가 그렇게 해맑은 게 희원 씨 닮은 거였구나.”
갑자기? 랑일이가 자신을 닮았다고? 희원이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지? 눈으로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러니까 희원 씨는 뭐 다른 감정은 없어요?”
기준은 종일 희원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어서 혼자 마음 졸이고 전전긍긍한 게 이제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정작 희원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혼자 뭐를 했던 거지? 사실 기준은 희원이 있지도 않았던 일을 상상하고 오해하고 있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지금 뭐라고? 알겠어요? 알겠다고? 뭐를? 도대체 뭐를 알겠다고?
“다른 감정 뭐요?”
희원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기준은 희원과 사귀지 않았을 때 한 가게에 갔다가 희원의 옛 연인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찌질한 알파 새끼가 희원과 말을 섞는 것도 싫었는데 지금 희원은 너무 넓은 마음으로 기준을 대하고 있었다.
“아!”
희원이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런 건 있었어요. 좀 그랬어.”
“그쵸? 좀 그랬죠?”
어이가 없던 기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기준은 그래, 희원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분명 질투를 했을 거야, 하는 마음으로 눈이 잔뜩 초롱초롱해져서 희원을 바라봤다.
“기준 씨는 극우성 알파니까 막 이 사람 저 사람 만났을 거 아니에요. 주변에 늘 사람도 많았을 테고, 러트나 오메가 히트사이클이나 이럴 때 같이 할 사람도 널렸고. 그런데 나는 정말 대학교 때 이상한 알파랑 만난 게 다라서…….”
“잠깐만요.”
뭔가 흐름이 이상했다. 기준은 분명 지금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왜요? 아무튼 그러고 보니 나는 사실 연애 경험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뭔가 아쉽다는 생각을 했어요.”
“뭐요?”
“응?”
희원이 말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닌 게 아니라 기준이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다른 놈이라도 만나 보고 싶다 이거예요?”
말을 하다 보니까 열이 훅 받았다. 당연히 희원이 질투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 사람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요? 그 두 사람은 어떻게 생겼는데요? 저보다 더 예뻐요? 아니면 나보다 더 고와요? 더 착해요? 지금 저보다 더 좋았어요?
기준이 듣고 싶었던 말들은 이런 거였다. 희원이 기준에게 막 매달려서 종잘거리면서 하얀 얼굴로 씩씩거리며 성을 내는 거였다. 그런데 지금 이 반응은 뭐란 말인가?
이건 마치 자기도 뭔가 화려하게 연애를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는 투 아닌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뭐 다른 놈을 만나 보고 싶다는 그런 이야기인가?
“뭐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좀 그렇잖아요. 나는 뭔가 경험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그에 반해 기준 씨는 만난 사람도 많고 경험도 많을 테니…….”
“그래서 지금이라도 다른 놈하고 연애라도 하고 싶다는 말이에요?”
“그게 어떻게 그런 말이 돼요? 그런데 기준 씨, 왜 화를 내고…….”
희원이 아랫입술을 내밀며 왜 화를 내느냐고 불퉁하게 말했다. 사실 희원으로서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기준 혼자 종일 전전긍긍하다가 지금은 화내는 꼴이었으니 희원으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희원 씨 혹여 다른 놈 만날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우린 이미 부부인데 다른 놈 만날 생각이라니요. 애초에 말이 안 되잖아요.”
희원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아무튼 안 돼요. 안 그래도 나갈 때마다 벌레 같은 것들이 꼬여서 신경 쓰여 죽겠는데.”
“무슨 소리예요.”
“하긴 이제 그렇게 벌레가 꼬여도 별수 없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건 나쁜 거예요. 아무리 우리가 서로한테 각인해서 다른 놈하고 만나 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고 하지…….”
“네? 지금 뭐라고 했어요? 각인이요?”
기준은 아차 싶었다. 사실 말 안 해 주고 좀 즐기려고 했는데 본의 아니게 툭 튀어나와 버렸다.
“왜 대답이 없어요? 우리가 각인했다고요? 그 세계에 별로 없다는 그 각인?”
기준이 헛기침을 했다. 혼자 희원을 독점하며 하찮은 알파 새끼들이 접근해도 어차피 이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으로 좀 으스대려고 했는데 자기 입으로 까발린 게 되어 버렸다.
“그… 희원 씨… 혹시 각인한 게 기분 나쁘……! 어! 왜 울어요!”
“어, 어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희원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미안할 건 없는데. 희원 씨, 혹시 기분 나빠서…….”
희원의 눈물에 당황한 이는 오히려 기준이었다. 기준은 희원을 울릴 생각은 아니었다. 희원이 울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고, 애초에 지금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된 건 어쩌다 보니 자기변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거지 희원을 탓하거나 울리려고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아뇨, 기분 나쁜 게 아니라…….”
희원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뒤돌아 눈물을 훔쳤다. 자꾸 눈물이 나는지 어깨를 움찔거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훔치는 듯했다. 기준이 일어나서 희원에게 다가가 뒤에서 그를 껴안았다. 어깨가 바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미안해요. 울리려고 그런 게 아닌데. 미안해요. 희원 씨 울지 마요. 내가 잘못했어요. 마음대로 각인해서 미안해요.”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희원을 안고 있는 기준의 팔뚝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희원 씨, 진짜 미안해요. 제멋대로 굴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치만 정말 각인하고 싶어서…….”
“정말로 기분 나쁜 게 아니라 오히려 좋아서…….”
“네?”
희원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말하던 기준이 놀라서 고개를 바짝 들었다.
“응? 뭐라고요?”
그러고는 희원을 돌려서 자기를 바라보게 했다. 하지만 희원은 눈물이 난 게 쑥스러워서 그런 건지 기준의 품에 얼굴을 묻고는 숨어 버렸다.
“근데 우리 진짜, 진짜 각인한 거예요?”
여전히 얼굴을 묻고 있어서 목소리는 작았지만 기준은 정확하게 희원이 뱉은 말을 알아들었다. 기준이 희원의 몸을 살짝 떼고는 말했다.
“고개 좀 들어 봐요. 예쁜 얼굴 좀 보여 줘요.”
하지만 희원은 운 게 창피해서 다시 기준에게 바짝 붙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도대체 예쁜 얼굴을 왜 안 보여 주려고 그래요.”
“울어서 눈코 빨개져서 못생겼어요.”
“뭐라는 거야, 진짜. 어디가 못생겼다고.”
기준은 희원을 끌어다가 자기 허벅지에 앉히고는 티슈로 얼굴 여기저기를 닦아 주었다. 희원은 자기가 하겠다고 했는데 그걸 가만히 둘 기준이 아니었다. 굳이 희원의 얼굴을 들게 해서 눈물도 닦아 주고 코도 풀게 하고는 뺨 여기저기 입을 맞췄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희원 씨, 저번에 같이 카페 갔을 때 웬 알파 새끼가 와서 혼자 왔냐고 어쩌고저쩌고 한 거 기억나요?”
희원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물었다.
“언제요? 밸런타인데이 때요?”
“아니, 그때 말고. 아, 생각해 보니 벌레 새끼가 꼬인 게 저번 한 번이 아니었어. 맞아. 밸런타인데이 때도 그랬지. 근데 혹시 그 전에도 그랬어요? 나 없이 혼자 마트 갔을 때나 출퇴근길에, 버스나 지하철, 백화점 이런 데에서도 알파 새끼들이 마구 꼬이고 그런 거 아니에요?”
기준이 잔뜩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희원이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기준 씨, 정말 걱정돼서 그러는 건데요, 혹시라도 밖에 나가서 그런 말은 하지 마요. 기준 씨 착각 속에 산다고 사람들이 욕해요.”
희원이 정말 걱정된다는 눈으로 기준을 바라봤다.
“이렇게 예쁜데요? 정말 희원 씨 밖에 나갈 때마다 너무 걱정되는 거 모르죠?”
“아니,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응? 저번에도 말이야, 애들 데리러 가기 전에 들렀던 카페에서 있었던 일 기억나요?”
“아아!”
희원은 그제야 기억이 난 듯했다.
“그런데요?”
“그게 알파였거든요?”
기준은 마치 사람이 아닌 물건을 대하듯 말했다.
“기준 씨, 근데 말 좀 예쁘게!”
“내가 지금 예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날 그 알파 새끼를 안 때려잡은 것만 해도 대단한 거지.”
희원이 잔뜩 미간을 좁히자 기준은 엄지로 희원의 미간을 펴 주며 말했다.
“아무튼 그게 알파였는데 그 알파가 막 페로몬 내뿜고 그랬단 말이에요.”
“진짜?”
희원의 눈이 댕그래졌다. 기준이 희원의 눈가에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귀여워.”
“네?”
희원이 대화하다가 뭔 짓이냐는 듯 어이없어했지만 뭐 사실 기준이 이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이렇게 귀여워서 어떻게 밖에 내보내지?”
“아니! 그런 말 하지 말고, 하던 얘기 마저 해 봐요. 그래서 진짜 페로몬을 내뿜었다고요? 그 사람이?”
기준이랑 말하다 보면 자꾸만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기준은 희원과 말을 잘 이어 가다가도 희원의 얼굴을 부여잡고 여기저기 입을 맞추거나 연신 귀엽다, 예쁘다 주문 외우듯 말하곤 했다. 그래서 결국 하던 이야기를 다시 하게끔 만드는 건 늘 희원의 역할이었다.
“희원 씨, 그날 못 느꼈죠?”
기준의 질문에 희원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또 제 페로몬에 문제가 있어서…….”
희원이 조심스레 말하는데 기준이 단번에 잘라 냈다.
“무슨 소리예요! 그전에도 희원 씨 페로몬이 희미해서 타인이 희원 씨 페로몬을 잘 못 느꼈던 거지, 희원 씨는 다른 사람 페로몬 맡을 수 있었잖아요. 그리고 지금은 내 페로몬 잘 맡잖아요. 거봐요. 각인이라니까!”
“아……! 진짜?”
“네! 정 믿기 힘들면 병원 가 볼래요?”
희원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게 각인이구나…….”
희원이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희원은 다른 부분에서는 눈치도 빠르고 금방 알아차렸는데 꼭 이렇게 페로몬에 관련되어서만 뭔가 어설펐다. 그건 우성 오메가임에도 불구하고 꽤 오랜 기간을 페로몬 문제 때문에 마음고생했기 때문이다.
“그럼, 저만 기준 씨한테 각인한 건가요?”
희원이 순수하게 물어봤다. 정말 궁금했다.
“희원 씨만 각인했으면 좋겠어요?”
“뭐… 기준 씨도 각인하면 좋겠지만 제가 기준 씨를 더 많이 좋아하니까 저만 했어도 그게 당연한 거고, 괜찮아요.”
“허!”
기준은 기가 막혔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기준이 희원의 콧등을 손가락으로 톡 쳤다.
“나는 희원 씨가 가끔씩 이럴 때마다 정말 당황스러워요.”
“응? 뭐가요?”
“어떻게 자기가 날 더 좋아한다고 뻔뻔스럽게 얘기하지? 너무 뻔뻔한데? 당연히 내가 희원 씨를 더 좋아하죠. 더 많이 사랑하죠. 그게 당연한 거 아닌가? 이건 뭐 마음을 열어서 보여 줄 수도 없고 정말 답답하네요.”
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서 작게 “아닌데, 내가 더 사랑하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기준은 답답했다. 먼저 좋아한 것도 자기였고, 먼저 고백한 것도 기준이었다. 그런데 희원은 늘 자기가 더 좋아한다고 했다. 정말 증명할 수 있으면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튼! 내가 더 사랑하니까 나도 당연히 각인했죠, 희원 씨한테.”
“정말요?”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진무구한 토끼 같았다. 기준이 놀라서 벌어진 희원의 아랫입술을 살짝 빨면서 말했다.
“어차피 나는 각인 안 했어도 이제는 희원 씨 없이는 못 살아요. 그치만 희원 씨가 각인한 건 정말 좋아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에요.”
희원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기준의 손을 잡아끌어서 자기 가슴에 갖다 댔다.
“이것 봐요, 기준 씨. 완전 콩닥콩닥 뛰죠? 내가 더 좋아요.”
“각인해서 좋아서 운 거예요?”
기준의 물음에 희원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응? 대답해 봐요.”
“그럼 좋지 안 좋아요? 이제 기준 씨는 나밖에 없다는데.”
기준이 입꼬리를 올리며 활짝 웃었다.
“나는 원래 희원 씨밖에 없었어요. 근데 희원 씨.”
어째 표정이 능글맞아졌다. 희원이 살짝 뒤로 몸을 피하려고 했다. 아무래도 뭔가 낌새가 심상치 않아서 희원이 살짝 움직이려고 하는데 기준이 희원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바짝 당겼다. 그러면서도 조금 전부터 만지고 있는 가슴께를 더 더듬기 시작했다.
“기준 씨. 랑일이 올 때 됐는데요.”
희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닌데요. 아직 시간 안 됐어요.”
“그럼 랑일이 데리러 갈까요?”
“아뇨, 원 실장님이 할 일이 없어지잖아요. 남의 일을 빼앗는 건 안 돼요.”
이게 말이여, 뭐여. 희원이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기준은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앗!”
기준이 희원의 가슴을 살짝 움켜쥐었다. 설마! 희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요?”
“아, 아뇨. 귤희 깰 때 됐어요.”
희원이 기준을 살짝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직 안 깼잖아요.”
“깰 때가 돼서. 이유식이라도 만들어 둘까 하는데, 으앗!”
이번에는 기준이 희원의 유두를 정확히 꾹 눌렀다. 희원이 허리를 둥글게 말며 피했지만 기준이 허리를 감고 있던 손에 힘을 주고는 바짝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희원의 목에 입을 갖다 대고는 입술을 꾹 눌렀다.
“각인 언제 한 건지 궁금해요?”
“네?”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기준 씨, 간지러워……!”
기준이 목을 할짝할짝 핥았다.
“각인 어떻게 하는 건지 다시 알려 줄까요? 그때 어떻게 했는지 알려 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