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신기하고 소중했던 시간들 (27/31)

6. 신기하고 소중했던 시간들

서울 중심가에 있는 고층 빌딩. 그 건물 15층에 기준이 있었다. 기준은 원 실장에게서 하루 스케줄에 대해서 들으면서도 자꾸만 위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가 없었다. 브리핑을 하던 원 실장은 이기준 이사의 얼굴을 힐긋 보고는 속으로만 츳츳 혀를 찼다.

늘 표정이 없던 이기준 이사는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더니 점점 변하고 있었다. 일을 할 때는 예전과 똑같았으나 가끔 복도를 걷다가 전화를 받거나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지을 때가 있었다.

그러더니 오늘 거의 피크를 달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이기준 이사의 손가락에 꼽히는 반차 날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직장인이란 위로 올라갈수록 받는 연봉만큼 일이 정비례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연차라는 게 사실 무의미했다. 과연 그 연차를 다 소진하는 윗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건 이기준 이사도 마찬가지였다. 기준은 늘 바빴고 휴가는 정말 무슨 일이 있어야 쓰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 무슨 일이 있는 날 중 하나였다.

“준비는 다 하셨습니까?”

“희원 씨가 하겠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혼자서는 무리일 것 같아서 점심때 아예 이동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점심에 미팅 없다고 했죠?”

“네, 그렇습니다. 그럼 점심에 이동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점심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준은 잠시 생각해 보다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희원 씨도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점심 건너뛸 게 분명하니 호텔 가서 먹죠, 뭐.”

“네, 알겠습니다. 그럼 자리 예약해 둘까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원 실장은 그 뒤로 몇 마디 더 나누고 패드에 메모했다.

“그리고 이사님.”

“네. 잠깐만요. 네, 희원 씨.”

자신에게 잠깐 기다려 달라고 손을 들어 표시하는 기준을 보며 원 실장은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새삼 놀라워했다.

예전 같았으면 일하는 도중에는 절대 기준이 직접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기준은 랑일이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개인 핸드폰도 원 실장이 먼저 받게 했다.

하지만 랑일이가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서서히 변하더니 이젠 시도 때도 없이 희원과 통화를 했다. 차 안에서는 물론이고, 복도에서도, 이사실에서도 수도 없이 통화를 했다.

“귤희 데리고 혼자 움직일 수 있어요? 원 실장님 보내 줄까요? 괜찮겠어요?”

기준이 나가 보라는 말이 없었기에 원 실장은 옆에서 기준의 통화 내용을 듣고 있었다. 원 실장은 기준의 말에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니, 희원 님의 직업이 다른 것도 아니고 유치원 선생님인데 아이 한 명을 케어 못할까? 어련히 알아서 할 텐데 이기준 이사는 꼭 자기 배우자 일에 한해서만 판단력이 흐려졌다.

“다 준비하고 나서라도 힘들면 꼭 연락해요. 내가 조금 더 일찍 나갈 테니까.”

원 실장이 그건 안 된다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자신과 눈이 마주쳤지만 이기준 이사는 못 봤다는 듯 모른 척 계속해서 통화를 했다.

“진짜 혼자 할 수 있겠어요? 또! 또! 그 정도는 과보호도 아니라니까요.”

하지만 원 실장은 이미 너무, 정말 너무 이기준 이사가 배우자를 과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원래도 랑일 도련님한테 하는 행동을 봐서도 익히 알고 있지만 이기준 이사는 팔불출이어도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귤희가 원래도 차만 타면 잘 자는 것 아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요. 알았죠? 그래요, 알았어요. 이따가 같이 점심 해요. 자리 예약해 둘 테니까 괜히 대충 때우려고 생각하지 마요. 응, 알았어요. 출발할 때 전화해요. 알았죠?”

이기준 이사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같은 내용을 당부하고 또 당부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얘기했죠?”

“네, 이사님. 오늘 귤희 공주님 100일이라서 비서실에서 작은 선물을 준비했는데요, 이따 점심때 가시기 전에 갖고 가시라고요.”

원 실장 말에 기준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아, 저번에도 선물 받아 왔다고 희원 씨한테 엄청 혼나서 받아 가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마음만 받아 가겠습니다.”

“제가 희원 님께 전화하겠습니다.”

이건 무슨 학부모가 아들 대신 선생님한테 전화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이번 한 번만 받겠습니다. 다음에는 정말 마음만 주시면 됩니다. 안 그래도 오늘도 다 같이 불러서 밥 먹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가족만 모이는 자리라 그러지 못하는 게 미안하다고 했는데, 그런 상태에 선물까지 받아 가면 또 혼날 게 분명합니다. 내가 원 실장님 때문에 희원 씨한테 자주 혼납니다.”

원 실장은 상상이 안 되었다. 희원 님처럼 순하게 생긴 사람이 화를 낸다니 말이다.

“그런데 희원 님도 화를 내십니까?”

정말 궁금했던 것이라 원 실장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제가 지금 거짓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희원 씨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데요. 말 잘 들어야 합니다.”

“네, 그렇군요. 오늘 100일 답례품 감사하다고 말씀 전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원 실장은 이사실을 나오면서 희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100일 동안 고생 많으셨다고, 축하한다고 말이다.

* * *

“우리 공주님, 오늘 방긋방긋 웃어 줘야 해. 알았지?”

희원은 귤희 원피스를 입히며 조용히 당부했다. 평소에도 순한 귤희라서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는데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아이들은 꼭 중요한 날에 컨디션이 좋지 않고 순하던 애들도 아프거나 울거나 한다는 거다. 은근 걱정이 되어 희원은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귤희 컨디션을 체크했다.

다행히 귤희는 방긋방긋 웃으며 좋다고 소리를 질렀다. 희원은 저번에 쇼핑하러 가서 산 붉은색 코트를 입히고는 품에 안았다.

“가는 동안 좀 자고 컨디션 유지해 줘야 해, 알았지?”

잘 웃는 귤희는 희원을 볼 때마다 발을 구르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귤희를 뒷좌석 시트에 눕힌 희원이 차를 몰기 전에 기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호텔로 출발한다고 말이다. 그에 맞추어 기준도 출발하겠다고 했다.

희원이 귤희를 안고 호텔 라운지에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기준이 단숨에 다가왔다.

“왔어요? 오는 길 힘들지는 않았어요?”

귤희가 기준을 보더니 또 신이 나서 발을 굴렀다. 평소에는 편한 옷차림에 아기 띠를 하곤 하는 희원이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정장에 아기 띠를 한 모습에 기준은 그게 또 새로워서 잠깐만 창가에 서 보라고 하고는 핸드폰을 들이댔다.

“사진을 왜 찍어요!”

“왜요, 예쁘기만 한데.”

핸드폰을 들고는 그레이 슈트에 타이까지 맨 채 아기 띠를 하고 있는 희원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며 기준은 계속해서 광대를 실룩거렸다. 희원이 창피해하며 그러지 좀 말라고 했지만 들을 기준이 아니었다.

“얼른 앉아요. 배고프겠다.”

그러고 보니 점심이라고 하지만 이미 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희원은 아침부터 정신이 없어서 배고픈 줄도 몰랐지만 시간을 확인하고 나니 기준이 더 배고플 것 같았다.

“나보다 기준 씨가 더 배고프겠어요. 어서 먹어요. 귤희는 조금 이따가 먹을 것 같긴 해요.”

“룸도 잡아 놨으니까 종일 안 안고 있어도 돼요.”

“응, 고마워요.”

희원이 웃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요즘 세상에 무슨 100일도 챙기느냐고 하겠지만 희원은 소소한 것 하나하나 다 챙기고 기억하고 싶었다. 그건 랑일이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랑일이 유치원 원복을 맞추는 일, 7세가 된 랑일이의 유치원 첫 등원 날, 랑일이의 앞니가 빠진 날, 그 작은 일들이 희원에게는 소중했고 희원은 당연히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고 말이다.

귤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양가 가족만 모아서 호텔에서 100일을 챙기기로 했다. 같이 저녁 한 끼를 먹고 사진을 찍고 가족이 아니라서 미처 오지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답례품을 선물하고 싶었다.

3월 24일. 하필이면 평일이라서 점심으로 모이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이 저녁 식사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것저것 준비하는 것도 희원 혼자서 하게 되었고 부지런히 움직이려다 보니 점심부터 호텔에서 부산을 떨게 된 것이었다.

기준은 희원을 단 한 번도 타박하지 않았다. 뭘 그렇게 유난을 떠느냐고도 하지 않았고 희원이 하고 싶다는 것은 다 들어주며 배려해 주었다.

기준은 룸도 예약해 두어서 오후에서 저녁 행사 시간까지 중간에 뜨는 시간에는 룸에서 쉴 수 있도록 해 놓았고, 랑일이는 자신이 알아서 데려오는 것으로 했다.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은근히 희원이 이것저것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기준은 행여 희원이 그러다 100일 끝나고 몸살이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이었다.

“희원 씨, 이것 좀 먹어요. 왜 이렇게 못 먹어요?”

“먹고 있어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오늘 좀 신경 쓰는 게 많다 보니 별로 입맛이 없긴 해요.”

기준은 아예 포크로 스테이크를 찍어서 희원의 입에 밀어 넣어 주었다.

“그럴수록 더 잘 먹어야 해요. 한 입이라도 더 먹어요. 응?”

희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은 점심 식사 후 희원과 귤희는 룸에 데려다 놓고 둘을 좀 재웠다. 아무래도 희원이 걱정되었다. 3월 말이 다가오고 있어서 안 그래도 서서히 회사 일이 바빠질 것인데 그러다 희원에게 조금이라도 소홀해져 그가 아픈 것도 모르고 넘어가는 불상사는 없길 바랐다.

희원과 귤희가 곤히 잠든 것을 바라보다 기준은 다시 호텔을 나왔다. 원 실장이 랑일이를 데리고 오겠다고 하는 것을 기준이 말렸다. 희원의 부탁이기도 했다. 이런 날 아무래도 사람들 이목이 귤희에게 집중될 텐데 그로 인해 랑일이가 조금이라도 섭섭한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고 희원은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직접 랑일이를 데리러 가고 싶다고 했지만 기준이 그건 제발 자제해 달라고 했다. 그 대신 아무리 바빠도 랑일이는 자기가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유치원 앞에 도착한 기준은 유치원에서 나오는 랑일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미리 당부해서 랑일이가 유치원 원복이 아닌 정장으로 갈아입고 나오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기준은 재벌이다 보니 이렇게 집안 행사가 있거나 중요한 일이 있으면 파파라치가 따라붙곤 했다. 오늘 역시 사진이 찍혔을 테다.

희원은 잘 모르겠지만 희원이 귤희를 안고 호텔에 들어선 순간부터 사진이 찍혔을 수도 있다. 랑일이도 마찬가지일 거였다. 기준의 차에서 내려 둘이 손을 잡고 움직이는 순간 사진이 찍힐 거였다.

“아버님, 오늘 축하드려요. 희원 쌤에게도 축하한다고 말씀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답례품도 잘 받았어요. 감사해요.”

랑일이 담임 선생님의 인사에 기준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랑일이가 정중하게 배꼽 인사를 하고는 차에 탔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희원에게 안겨서 인사하고 하원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커서 의젓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마미는 아빠?”

“호텔에 가 있지. 귤희랑.”

“응, 얼른 가자. 마미랑 귤희랑 보고 싶어.”

“그래.”

기준이 부드럽게 운전했다. 똑같은 네이비 스트라이프 정장을 입은 두 사람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호텔에 있는 희원과 귤희를 보고 싶어 했다.

* * *

“아버지, 오셨어요? 어머니, 어서 오세요.”

희원이 웃으며 이 회장과 박 여사를 맞이했다. 가장 첫 손님이었다. 저녁 7시부터 시작이었는데, 누가 보면 호텔 앞에서 6시 59분까지 기다렸다가 들어온 줄 알 거였다.

“희원아, 이걸 혼자서 다 준비한 거야?”

박 여사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희원에게 물었다. 희원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이걸 어떻게 제가 해요. 호텔에서 다 세팅한 거죠.”

“얘는, 누가 그걸 말하니. 사진 고르고 답례품 고르고 이런 거 다 우리 희원이가 했을 거 아냐.”

그 말은 맞았다. 전시할 사진을 고르고, 손님들에게 나누어 줄 선물을 고르고, 귤희 옷을 사서 입히고……. 이 모든 것에 희원의 손길이 묻어 있었다. 귤희를 안은 기준이 다가오자 박 여사가 단번에 타박했다.

“너는 희원이 좀 도와주지 그랬어.”

또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기준이 황당한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희원에게 또 무슨 일이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희원이 웃으며 기준을 살짝 가로막고는 박 여사에게 말했다.

“어머니, 기준 씨는 회사 다니잖아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세요. 아버지도 들어가세요.”

박 여사가 기준을 흘기고는 기준에게서 귤희를 받아 안았다. 뒤에 서 있던 이 회장이 기준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회사는 너 혼자 다니냐. 그걸 핑계라고.”

이 회장의 말에 기준은 그야말로 억울할 지경이었다. 자신은 가만히 있었는데 왜 또 욕은 자기가 고스란히 먹느냐 말이다. 희원은 기준의 등을 두드려 준 뒤 부모님 뒤를 바짝 쫓았다.

“이 서방.”

기준의 등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본 기준은 그제야 웃었다. 천군만마와 같은 희원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등장한 거다. 제 편이 왔다는 것에 기준이 어깨를 펴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제 부모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마치 나도 내 편이 있다고, 하는 표정이었다.

“희원 씨, 아버지 오셨어요.”

“어, 아빠!”

귤희 사진을 구경하고 있던 이 회장과 박 여사가 뒤돌아봤다. 이 회장이 성큼 다가와서 이 교수와 악수하며 인사했다.

“이 교수님, 오는 길에 차 막히거나 그러지는 않으셨습니까?”

“네, 괜찮았습니다. 일찍 오신 모양입니다.”

“저희도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양가 아버지들은 일 때문에 몇 번 만나고 그 이후로 골프도 가끔 치더니 부쩍 친해졌다. 아버지들은 테이블 한 곳을 잡고 벌써부터 골프 이야기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박 여사와 희원의 어머니는 귤희 사진을 보며 너무 예쁘지 않느냐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귤희 칭찬을 했다.

희원네 형과 누나 가족이 와서 또 한바탕 귤희 칭찬을 하고 랑일이는 누나네 조카 둘이 오자마자 그쪽으로 붙어서 놀기 시작했다. 박 여사는 그 모습에 랑일이가 희원네 가족과 잘 지내는 모습에 다행이고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형님!”

루세가 희원을 불렀다. 희원이 뒤돌아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루세 씨.”

“이거 다 준비한 거예요? 너무 예쁘다. 귤희 사진 언제 이렇게 정리했어요?”

귤희가 태어난 순간부터 100일까지 날마다 찍어 두었던 사진을 모은 거였다. 아이의 하루하루가 신기하고 소중해서 말이다. 그 사진들을 정리해서 곳곳에 전시해 놓았다.

“휴직이니까요, 그러니까 시간이 남아서 이런 거라도 하자 싶어서요.”

“형님, 나한테까지 그렇게 겸손할 필요 없어요. 이건 시간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정말 대단하다.”

루세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희원이 같이 웃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해준 도련님은요?”

“아빠는 회사에 있어요.”

설이가 루세보다 먼저 대답했다. 희원이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루세를 바라보자 루세가 한 발 가까이 와서 대답했다.

“한낱 과장이 뭐를 할 수 있겠어요? 회사 일 때문에 조금 늦는대요. 지금 출발했으니까 아마 30분 정도 뒤에 도착할 것 같아요.”

“아, 그렇구나. 배고플 텐데 설이랑 먼저 뭐 좀 먹어요. 저기 아버지랑 어머니 계시니까 가서 인사하고요.”

“응, 그럴게요. 아! 오늘 희영이 형도 온대요?”

희영을 말하며 루세는 한층 들뜬 얼굴을 했다. 희원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희영네 집에서 술을 한잔하고는 그 뒤에 희영은 따로 밖에서 박 여사와 이 회장을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놀 본사에서 희영은 이 회장과 차도 한잔 마셨다고 했다. 희원은 만나지는 못하고 통화만 했는데 그래서 더 희영을 만나고 싶었다.

“일 마치자마자 온다고 했어요.”

“잘됐다.”

루세가 웃으며 설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희원 씨.”

“네?”

“왜 여기 서 있어요. 이리 와서 뭐라도 먹어요.”

“응, 귤희는요?”

기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귤희가 희원의 엄마에게 안겨 있었다. 기준이 희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가족들이 귤희를 안고 이야기를 나누고 랑일이가 희원의 조카들과 노는 모습을 보니 왠지 가슴 한편이 뭉클했다.

“오늘 제대로 먹지도 못했잖아요.”

“아까 점심, 기준 씨가 주는 대로 먹었잖아요.”

“그것도 억지로 먹었으면서. 어디 아픈 데는 없고요?”

기준이 희원의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희원이 그 손을 잡아 내리며 웃었다.

“괜찮아요. 아픈 데 없어요.”

희원은 기준의 손을 꼭 잡고는 안으로 이끌었다. 기준이 음식을 챙기는 동안 누나가 와서 희원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준비하느라 애썼다, 희원아.”

“뭐를. 돌도 아니고 100일이라서 그냥 가볍게 했어. 식구들하고만 밥 먹을 거기는 해도 그동안 귤희 큰 것도 보여 주고 싶었고.”

“누나가 뭐 애 안 키워 봤니? 집에 사람 불러다 한 끼 먹는 데에도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데. 이렇게 장소 빌려다가 먹는다고 해도, 준비하고 연락하고 하면서 애썼을 거 다 알아.”

“고마워 누나. 와 줘서.”

“당연히 와야지. 귤희 100일인데. 우리 막내 수고했다. 100일 동안 아기 키우느라.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누나의 말에 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낳고 체력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집에만 있어서 그런 것도 같고,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도 같았다. 남자 오메가라서 그런 것도 같았지만 희원이 제대로 된 오메가로 산 거는 불과 몇 년 되지 않아서 원래 이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떻게 아이를 낳았는데도 이렇게 말랐어? 좀 잘 먹고 응?”

“나 잘 챙겨 먹고 있어.”

“그쵸? 희원 씨 좀 마른 것 같죠?”

언제 왔는지 기준이 접시에 음식을 수북이 담고는 희원의 앞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 서방, 너무 걱정 마요. 원래 애 낳으면 이래저래 움직일 일이 많아져서 그런 거니까. 희원아, 어서 먹어. 이 서방도 어서 먹어요.”

누나는 자리를 비켜 주며 희원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기준과 희원은 마주 앉아서 와인을 한 잔 마시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평일이었지만 행사가 끝난 뒤 기준과 희원은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 랑일이랑 귤희도 함께 말이다.

“근데 기준 씨. 귤희 집에 안 가도 될까요? 100일 딱 되자마자 너무 오랜 시간 밖에 있는 것 같아서 좀 걱정되긴 해요.”

“괜찮아요, 희원 씨. 너무 걱정 말아요. 다른 아가들은 50일 되자마자 외출하기도 한대요.”

“누가요?”

그건 좀 너무한 처사이긴 했지만 그래도 희원을 안심시키려면 좀 극단적인 예시를 들기도 해야 했다. 희원은 기준이 생각하기에도 귤희와 랑일이에 대해서 너무 조심스러워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행사하고는 또 집에 가는 것보다 바로 올라가서 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요.”

“어딜 가서 쉬는데? 희원 씨, 우리 왔어요. 귤희 100일 축하해요. 고생했어요, 희원 씨.”

이준이 희영과 나타났다. 희원은 희영을 보자마자 왠지 마음이 놓였다. 희영은 좀 그런 구석이 있었다. 까칠해 보이는 만큼 누군가를 지켜 줄 것만 같은 든든함이 있었다.

“혀엉!”

“안녕하세요, 이사님. 희원아, 밥 좀 먹었어? 오늘 이거 준비하느라 너무 고생했겠다.”

희영은 아예 희원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위를 올려다보며 희원과 눈을 마주했다. 희원은 자신의 형과 누나에게도 늘 의젓한데 왠지 희영을 보면 어리광이 부리고 싶어졌다.

“선물 고르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선물 너무 예쁘던데! 센스 끝내줘. 근데 오늘 옷은 누가 골라 줬어? 너무 예쁜데!”

희영이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더니 이준에게 척 넘겼다.

“나 사진. 희원이랑 사진 찍을래.”

희영의 요구에 이준은 별말 없이 분부를 수행했다. 기준은 제 형이 하는 짓이 이젠 신기하지도 웃기지도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밥 많이 먹고 있어. 나 어르신들께 인사만 좀 하고 올게.”

희영이 희원을 품에 안고는 부둥부둥하는 걸 결국 이준이 떼어 내고는 끌고 갔다. 그 모습을 보며 희원이 웃었다.

“기준 씨, 다들 오신 것 같은데, 인사해요.”

돌잔치가 아니기에 사회를 부르거나 이벤트를 열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대신 기준이 인사말을 하기로 했다.

기준은 귤희를 품에 안고 앞에 섰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익숙한 기준인데도 귤희를 안고 서는 건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오늘 이 자리에 시간 내어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희원 씨와 사랑하여 낳은 귤희가 100일 동안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음은 가족 여러분의 사랑과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귤희가 건강하고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사랑과 관심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 즐거운 시간 보내다 가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귤희는 뭔가 아는 것처럼 눈을 똘망똘망 빛내며 웃어 주었다. 기준이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박 여사가 나서서 희원에게 한마디 하라고 했다. 희원은 괜찮다고 하다가 기준에게 이끌려서 앞으로 나왔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희원은 떨리는 마음으로 앞에 서서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봤다.

기준을 데려왔을 때 놀라면서도 반겨 주었던 자신의 식구들, 아버지, 엄마, 누나와 형네 내외, 그리고 랑일이를 자기네 동생처럼 사랑해 주는 조카들, 기준네 집안에 비해서는 부족한데 그저 반겨 주었던 기준의 어머니, 페로몬에 문제가 있는 오메가인데도 받아 주었던 기준의 아버지, 묵묵하게 희원을 응원해 주던 기준의 형제들과 루세.

“오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희원은 기준과 연애를 하던 때부터 시작하여 귤희를 가지고 낳고 기르기까지의 시간을 더듬어 보았다. 모두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

랑일이와 눈이 딱 마주친 순간 희원은 가슴 깊숙이에서 울컥하고 감정이 올라왔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기준을 이어 준 고마운 존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미로 인정해 주고 사랑해 준 랑일이. 희원은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라서 결국 몸을 뒤로 돌리고 말았다.

“이게 뭐야.”

희원이 부끄러워져 작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눈물이 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거라 자기도 당황스럽기 마찬가지였다. 기준이 얼른 다가와서 희원의 어깨를 도닥이며 대신 말을 마무리 지었다.

“감사합니다. 식사들 하세요.”

* * *

놀은 물류 센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기준은 물류가 몰리는 5월 전에는 꼭 물류 센터를 방문해서 직원들을 격려하고 시설을 돌아보며 안전상의 문제는 없는지를 점검했다. 그리고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기준 씨, 운전 조심해서 하고요.”

“제가 안 하고 원 실장님이 하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응, 원 실장님 커피도 내렸으니까 드리도록 해요.”

희원은 직접 내린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서 기준에게 내밀었다. 기준이 고맙다고 미소 지으며 희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근데 희원 씨, 안색이 조금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은 거죠?”

귤희는 100일이 지나고 요즘 한창 뒤집기 시도 중이었다. 푹 자고 방긋방긋 웃기만 하던 귤희가 끙끙거리고 신경질을 부렸다. 귀엽긴 한데 그만큼 희원이 귤희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졌다.

“잠을 좀 못 자서 그래요. 괜찮아요.”

기준은 희원의 안색을 살피고 또 살폈다.

“마미, 어디 아파요?”

랑일이가 가방을 메고 나오면서 희원에게 물었다. 랑일이는 기준이 가는 길에 유치원에 내려 주기로 했다. 이제는 혼자서 가방도 척척 메고 준비하는 랑일이를 희원이 대견스럽게 바라봤다. 희원이 랑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미 안 아파. 랑일이 유치원 잘 다녀오고, 이따 오후에 보자.”

“네!”

“오늘은 아빠가 못 데리러 가시는 대신에 마미가 데리러 갈게.”

“네!”

랑일이가 헤벌쭉 웃었다. 오늘은 기준이 지방 출장으로 귀가가 늦어질 듯했다. 그러니 랑일이를 데리고 오는 것은 희원이 대신하기로 했다. 기준은 박 여사에게 부탁하면 된다고 했지만 희원은 자기가 귤희 데리고 갔다 오면 된다고, 괜찮다고 했다. 이제 날씨는 완연한 봄이었다.

“귤희 100일 지난 뒤부터는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아요.”

기준은 지방에 내려가는 게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듯 희원을 살피고 또 살폈다. 희원은 간밤에 잠을 잘 못 잔 게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이따 귤희가 낮잠을 자면 자신도 자면 되니 괜찮았다.

“다른 엄마들도 다 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집에만 있는데 그게 쉬는 거지 뭐예요. 늦겠어요, 얼른 가요.”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 줘요.”

희원이 기준의 등을 떠밀었다. 기준은 잔뜩 걱정 어린 눈을 하고는 현관에서 쫓겨 나왔다.

“랑일아, 잘 다녀와. 이따가 보자.”

“네, 다녀오겠습니다!”

희원은 무릎을 굽혀 랑일이 이마에 입을 맞추고, 기준의 입술에 입을 맞춰 주었다. 기준과 랑일이가 탄 차를 보며 차의 뒤꽁무니가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날씨 너무 좋다.”

4월이 되면서 아직 아침저녁으로는 바람이 쌀쌀할 때도 있었지만 낮에는 따듯했다. 4월이 기준에게는 가장 바쁜 달이었는데, 그런 만큼 점점 기준의 퇴근이 늦어지고 있었다. 같이 벚꽃이라도 보러 가면 좋을 텐데. 희원은 그런 생각을 하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까지 귤희가 자는 것을 확인한 희원은 집안일을 사부작사부작 하기 시작했다. 아침을 먹고 난 뒤 담가 두었던 설거지를 하고, 귤희 옷만 따로 세탁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커피를 한 잔 마시려고 하는데 곤히 자던 귤희가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더니 이윽고 눈을 떴다. 이제부터는 전쟁의 시작이었다.

“우리 귤희가 일어났어요?”

희원과 눈을 마주하자 귤희가 발을 굴렀다. 이제 제법 다리도 통통해지고 팔에 힘도 들어간 귤희는 요즘 먹는 양도 늘어서 볼이 통통했다. 희원이 귤희 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우리 공주님이 일어나서 기분이 좋으시네요?”

귤희가 까르르 웃었다. 울기보다는 잘 웃는 귤희를 볼 때마다 희원은 자기도 어릴 때 이랬나 궁금했다. 희원은 휴대폰을 들고는 귤희가 웃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그러고는 양가 부모님이 있는 채팅방에 각각 사진을 보냈다.

곧 있으니 사진을 받은 박 여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어머니!”

희원이 반가워서 외쳤다.

―응, 희원아 엄마야. 아침은 먹었니?

박 여사는 늘 희원을 먼저 챙겼다. 귤희나 랑일이에게 더 관심을 갖고 아이들의 안부를 먼저 물을 수도 있을 텐데 꼭 희원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네, 먹었어요. 어머니는 드셨어요?”

―그럼, 커피 한잔하고 있었지. 기준이는 물류 갔니?

“네, 아무래도 다음 주는 신상품 출시 때문에 바쁘니까 이번 주가 나을 것 같다고 해서요.”

―그래. 요즘에 별일은 없고?

“네.”

별일을 논하기에는 희원은 박 여사와 자주 만나는 편이었다. 시댁 식구들과 이렇게 편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희원은 주말마다 루세와 만나고, 요즘에는 희영까지 더해져서 거의 매주 만났다. 게다가 박 여사도 별일이 없으면 함께해서 커피를 마시고 전시회를 보고 쇼핑을 했다.

쇼핑은 희영과 박 여사가 정말 죽이 맞아서 둘이 수시로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고, 희원은 주로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했다.

―희원아, 엄마가 다른 일은 아니고. 여름 되기 전에 약 한 제 해 주려고 전화했어. 같이 한의원 한번 가는 게 어떤가 하고.

희원은 한의원 얘기가 나와서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고 생각했다.

“어! 안 그래도 기준 씨 한약 한 제 지어 주고 싶었는데 잘됐어요, 어머니!”

희원은 기준이 더 바빠지기 전에 체력 보강을 위해서 한약을 좀 지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한의원에 가려고 했는데 박 여사와 가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괜히 신이 났다.

―얘는! 기준이 말고 너 말이야, 희원아. 내가 언제 기준이 지어 준다고 했니.

“저는 괜찮은데…….”

―원래 집에서 애 키우는 사람이 더 건강에 신경 써야 하는 거야. 배 속에 아가 있을 때 아가가 영양분 다 빼앗아 가고 나와서는 애 보느라 바빠서 자기 돌볼 틈도 없고 그런 법이야. 시간 괜찮으면 오늘 오후에라도 같이 갈래?

희원은 그러겠다고 했다. 이왕이면 하루라도 빨리 약을 지어서 기준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희원은 오후에 랑일이를 데리러 갔다가 박 여사를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우리 귤희가 마미 전화 통화하는 동안 또 뒤집었어요?”

희원이 귤희가 뒤집고 낑낑거리는 것을 보고 다시 바로 누였다. 얼굴이 빨개져서 낑낑대며 신경질을 부리던 귤희가 허공중에 발을 굴렀다.

그렇게 귤희가 몇 번 뒤집고 희원이 바로 눕혀 주고, 그러다 귤희가 신경질을 부리고……. 이 행동이 반복된 뒤에야 귤희는 분유를 먹고 잠에 들었다. 희원도 피곤한 나머지 귤희 옆에서 몸을 뉘었다.

얼마나 잤을까? 잠에서 깬 희원은 살짝 몸이 추운 느낌을 받았지만 막 자고 일어나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기준에게서 전화가 와 있었다. 도착해서 전화를 한 듯싶었다. 희원은 곧장 기준에게 전화를 하며 점심을 먹을 준비를 했다.

―희원 씨.

“기준 씨, 전화했죠? 흠흠, 미안해요. 자느라 못 받았어요.”

―목소리가 좀 가라앉은 것 같은데요?

“흠! 자다가 지금 막 깨서 그래요.”

희원은 따듯한 물을 한 잔 마셨다. 목이 아프거나 그러지는 않는데 집이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희원은 전화 통화를 하며 카디건을 하나 껴입었다.

―도착했다고 전화한 거였어요.

“네. 점심은 먹었어요?”

벌써 점심시간은 훌쩍 지난 상태였다. 희원은 냉장고를 열고 뭐를 먹을까 고민했다. 아무래도 혼자서만 먹게 되는 점심은 대충 때우게 되었다.

나중에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정말 정신이 없어서 싱크대 앞에 서서 밥을 먹는다는데……. 희원은 그 말의 의미를 십분 이해했다. 유치원 교사일 때 그만큼 정신이 없다는 것을 경험했으니 말이다.

―점심은 아까 물류 센터 직원들하고 먹었어요.

“물류 센터에 문제는 없고요?”

―네, 다행히. 그래도 이것저것 더 살펴보고 관계자들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면 좀 늦어질 것 같은데…….

“일이잖아요. 집 걱정은 하지 말고 일 잘 보고, 조심히 올라와요.”

기준은 아무래도 오랜만에 지방에 내려간 거라서 그런지 다른 때 같으면 안 하던 걱정을 사서 하고 있었다. 희원은 귤희와 함께 랑일이를 데리러 갔다가 박 여사를 만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기준은 그래도 박 여사를 만나면 같이 저녁이라도 배부르게 먹고 들어올 것을 알아서 그런지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평소 기준이 집에 있을 때는 함께하는 시간을 내주기 싫어서 싫은 기색을 팍팍 비치더니 오늘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어서 그게 좀 웃겼다.

―집에 올 때 애 둘 데리고 오기 힘들면 어머니한테 기사 붙여 달라고 해요.

“그냥 뒤에 태우고 오면 되는데 뭘 힘들어요.”

―그리고 아직 저녁에는 좀 쌀쌀하니까 따듯하게 입고 나가고요.

“알았어요. 알아서 할 테니까 일 열심히 하고 이따 조심히 올라와요.”

―환절기에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돼서 그래요. 몸살이라도 나면 나 진짜 회사 휴가 내고 옆에 내내 붙어 있을 거니까 알아서 해요. 오늘 늦게 들어갈 거 생각하니 벌써 보고 싶네요.

희원은 기준의 옆에 원 실장이 있었으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너무 훤하다는 듯 눈가를 찡긋거렸다.

―어! 왜 희원 씨는 대답 안 해요?

그새를 못 참고 기준이 채근했다. 그에 희원이 소리 내어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보고 싶어요.”

―그래요. 이따 밤에 봐요.

기준은 핸드폰에 대고 쪽 소리와 함께 뽀뽀를 남기고는 전화를 끊었다. 희원은 웃으며 달아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희원은 점심을 먹고 귤희를 챙기기 시작했다. 옷을 입히는 와중에 자꾸만 귤희가 뒤집기를 시전해서 애를 먹었다.

“공주님. 오빠 보러 가야지요. 예쁘게 입고 랑일이 오빠한테 가야 해요.”

희원이 선물받은 옷을 입히고는 귤희를 바운서에 앉혔다. 그러고는 자신도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집에서도 조금 쌀쌀한 기운을 느끼며 나중에 옷을 벗더라도 조금 껴입고 나가야지 싶었다.

* * *

집 주차장에 도착한 기준은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25분.

빨리 출발한다고 출발했는데, 자주 들르는 물류 센터가 아니기에 이것저것 처리하다 보니 이미 출발 시간 자체가 한참 뒤로 밀린 상태였다.

기준은 올라오면서 희원에게 메시지를 보냈으나 워낙 그 시간의 희원은 아이 둘을 돌보느라 바쁘기 때문에 확인하지 않았다. 전화를 할까 하다가 행여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울까 봐 하지 않았다.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었을 때 거실은 무드 등 하나만 켜져 있고 깜깜한 상태였다. 기준은 얼른 손을 씻고 랑일이 방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걷어찬 채 자고 있는 랑일이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 주고 얼굴을 한 번 매만져 주었다. 요즘 한창 클 때인지 랑일이는 잘 먹고 잘 잤다.

귤희는 요즘 희원과 같이 잤다. 귤희가 뒤집기를 시작하면서 새벽에도 깨서 몸을 뒤집고는 낑낑거렸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희원이 새벽에 자주 깨곤 하는 것을 기준도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큰방으로 가니 귤희와 희원이 나란히 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기준은 두 사람을 조용히 내려다봤다. 닮은 두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나저나 귤희는 자꾸 뒤집고 그래서 바닥에서 재운다고 하지만 희원까지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해도 참 말을 안 듣는다.

희원이 귤희 때문에 새벽에도 종종 귤희 방에서 자는 게 못마땅해서 귤희를 아예 큰방으로 데려온 건데 그러다 보니 자꾸만 뺏기는 기분이 들었다. 기준은 희원을 안아서 침대에 올려 두려고 했다.

“어?”

기준이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희원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희원 씨, 희원 씨?”

희원을 조심스레 안아 침대에 눕힌 기준이 희원의 이마를 닦아 주며 불렀다. 하지만 희원은 끙끙 앓을 뿐이었다. 기준은 마음이 급해졌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희원 씨. 눈 좀 떠 봐요. 희원 씨.”

“으응. 기준 씨.”

희원이 눈을 깜박깜박 떴다 감기를 반복했다. 하얀 얼굴에 볼만 발그레했다.

“어디가 아파요? 괜찮아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기준이 희원의 가슴을 누르고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일어나지 마요. 아프잖아요.”

희원이 추운지 몸을 웅크렸다.

“나 이불 좀…….”

이불을 덮고 있는데도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기준은 희원의 이마를 만져 봤다. 열은 없는데 오한이 나는 것 같았다. 날짜로 봐서 히트사이클은 아니고 아마도 몸살이 온 것 같은데 지금 시간이 이래서 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기준은 희원에게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고는 전화를 들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 줄 알고…….

“어머니, 오늘 희원 씨 만나셨죠.”

―왜! 희원이한테 무슨 일 있니?

물어볼 데가 박 여사밖에 없어서 전화를 한 건데 희원의 이름만으로도 박 여사는 벌떡 일어났다.

“희원 씨 낮에는 괜찮았어요? 아프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희원이가 아파?

“몸살인 것 같은데요.”

―그럼 정 박사한테 전화를 해야지. 어떻게 엄마가 갈까?

“아니에요. 낮에는 괜찮았나 싶어서 전화했어요. 정 박사님 부를게요.”

기준이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박 여사가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 박사한테는 내가 전화할게. 너는 희원이만 신경 써. 그리고 랑일이랑 귤희 데리러 엄마가 갈게.

뭐를 자꾸 온다는 거야. 기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됐어요. 전화만 해 주세요. 애들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너 내일 회사 가야 할 거 아냐.

“안 가요. 아버지한테는 내일 저 휴가라고 전해 주세요.”

기준은 일방적으로 휴가를 내고 전화를 끊었다. 아침부터 왠지 불안하더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지방 출장도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을 보냈을 거다. 원 실장이 알면 뒤로 넘어갈 일이지만, 기준은 회사고 나발이고 희원이 더 중요했다.

기준은 일단 미지근한 물수건을 만들었다. 랑일이가 아프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아이는 뭔가 신호라도 주고 아팠다. 희원은 그런 신호도 없었단 말이다.

“뭘 도대체 혼자 얼마나 참았던 거야.”

기준은 덜덜 떨고 있는 희원을 보며 이를 으득 물었다.

“그러게 왜 지방에는 내려가서는…….”

당분간 몇 년 동안은 물류 센터에 내려가는 건 아버지한테 하라고 할 셈이었다. 물론 아버지가 알면 노발대발할 게 분명했지만 지금 기준은 올바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기준은 물수건으로 희원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열이 나는 건 아니라서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놓을 필요는 없지만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은 닦아 주는 편이 좋았다.

“아프면 말을 해야죠.”

희원은 정신이 없어서 대답도 못 하는데 기준은 혼자서 볼멘소리를 했다. 그건 자신을 향한 화살인지도 몰랐다.

정확히 30분 뒤 정 박사가 집 앞에 도착했다고 전화를 했다.

“들어오세요.”

기준은 문을 열어 주며 정 박사를 맞이했다.

“밤늦게 죄송해요.”

“아닙니다, 이사님. 희원 님이 아프시다고요.”

“네, 몸살인 것 같은데 그래도 진찰을 좀 받아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정 박사는 기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들어가다 기준이 여전히 정장 차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사님, 언제 오셨기에 아직도 정장 차림이십니까?”

“아!”

기준은 그제야 자신이 옷도 갈아입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제가 희원 님 몸 상태 보는 동안 옷 갈아입고 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씻으셔도 되고요.”

“아뇨, 옆에 있겠습니다.”

“진찰하고 링거 놓고 그러는 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편하게 씻고 오세요. 그래야 희원 님 깨셨을 때 희원 님께서 덜 불편하시지요.”

정 박사의 말에 기준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자신이 옷도 안 갈아입고 정장 차림인 것을 희원이 발견하면 희원의 성격에 분명 미안해할 게 뻔했다.

“그럼 희원 씨 좀 부탁드립니다.”

“네.”

기준은 이제야 좀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희원이 히트사이클을 제외하고는 아픈 적이 없었기에 정말 놀랐다. 기준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서둘러 씻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좀 어떻습니까?”

“피로가 누적되어서 몸살이 온 것 같습니다. 링거 맞고 푹 쉬시면 금세 괜찮아질 겁니다. 몸살로 인해서 소화 기능도 떨어졌을 테니 식사는 부드러운 음식으로 하시는 게 좋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약은 이틀 치 두고 가겠습니다. 혹시 열이 나거나 그러면 해열제도 놓고 갈 테니 해열제 드시면 됩니다.”

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푹 쉬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네, 늦었는데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준은 정 박사를 배웅한 뒤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희원이 몸을 둥글게 말고서 잠들어 있었다. 기준은 속상한 마음으로 희원을 애틋하게 바라봤다.

* * *

잠에서 깬 희원이 자기가 잠든 곳이 바닥이 아닌 침대라는 것을 알고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러다 손에 뭔가가 툭 걸리는 느낌이 들어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어?”

“희원 씨, 일어났어요?”

“기준 씨?”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희원은 자신이 입을 열고도 깜짝 놀라 당황했다.

“그대로 있어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눈만 껌벅였다. 귤희가 깼다가 다시 분유를 먹고 잠이 들려고 하는지 기준이 귤희를 안고서 토닥토닥 재우고 있었다. 그나저나 자신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아프면 말을 해야죠.”

“아……!”

그제야 희원은 자신의 몸 상태가 계속 좋지 못했고 지금도 컨디션이 별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렇게 링거까지 꽂을 줄이야!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미안해요.”

“희원 씨가 뭐가 미안해요. 나야말로 미안하죠.”

귤희가 잠이 들었는지 기준이 귤희를 바닥에 잘 눕혔다. 귤희가 낑 하고 소리를 냈다가 기준이 커다란 손으로 가슴께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니 다시 안정감을 느끼고 잠에 빠져들었다. 기준은 이제 침대에 걸터앉아 희원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 봤다.

“다행히 열은 없네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예요?”

“새벽 4시예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떡해요! 미안해요. 얼른 자요. 기준 씨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

“목소리가 이게 뭐예요. 따듯한 물 좀 마시고 더 자요.”

기준은 제 할 말만 하고는 희원의 입가에 따듯한 물을 대 줬다. 입술도 바짝 말라서 까칠했고 목소리도 쩍쩍 갈라져서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내가, 마실게요.”

희원이 컵을 쥐려고 하자 기준이 컵을 물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딘가 기준의 표정이 딱딱해 보여서 희원은 어쩔 수 없이 기준이 입가에 컵을 대 주는 대로 물을 마셨다. 따듯한 물이 목구멍을 통해 들어가자 이제야 사막에 있는 것 같던 갈증이 해소되는 듯했다.

“고마워요.”

“배는 안 고파요? 저녁도 조금밖에 안 먹었다면서요.”

희원이 그걸 어떻게 아냐는 듯 바라봤다.

“어머니랑 통화했어요.”

“언제요? 기준 씨 언제 왔어요?”

“좀 됐어요. 배고프면 죽이라도 갖다줄게요.”

“죽이요?”

희원은 도대체 기준이 언제 집에 와서 죽까지 끓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한테는 언제 전화를 했으며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로 보아 정 박사님도 왔다 간 모양인데 그건 또 언제인지.

희원이 귤희를 재우고 누운 게 10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그때까지도 기준이 오지 않았으니 그 이후에나 왔다는 소리인데 그럼 도대체 언제?

“지금은 별로 배 안 고파요.”

주방으로 나가려는 기준의 손목을 희원이 잡았다. 기준이 희원의 뺨을 만져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 자요.”

“기준 씨도 얼른 자요.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

“내일 휴가 냈어요.”

“네? 지금 바쁜 때인 것…….”

“그만 말해요. 아픈 사람이 뭐 이렇게 말이 많아요. 누워요.”

희원이 계속해서 조잘조잘 떠드는 건 좋지만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애처로워 더 이상은 들어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준은 희원을 억지로 눕혔다. 희원이 꿈틀꿈틀 움직여서 기준도 그 옆에 눕고는 희원을 품에 안았다.

“더 자요. 푹 쉬어야 한대요.”

“기준 씨도 잠 못 잔 거 아니에요?”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예요. 좀 자요.”

“그치만!”

“계속 종잘거리면 이제 내 입으로 막을 거예요. 나한테 감기 옮기고 싶은 거면 계속 말해요.”

희원의 입이 합 다물렸다. 희원이 불퉁하게 기준을 바라봤지만 기준은 희원을 품에 꼭 안은 채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커다란 손으로 토닥토닥 희원의 등을 두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프지 마요.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희원 씨 아파서 오늘 내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갔는지 알아요? 정말 아프지 말아요. 내가 대신 아프고 싶어. 속상해 죽겠어요.”

희원은 다시 가물가물 감기는 눈을 하고도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기준의 품에서 다시 편안하게 잠들었다.

* * *

초인종 소리에 희원은 잠에서 깼다. 몇 시쯤 되었을까? 그 전에 누가 온 것 같은데 나가 봐야 할 텐데 싶어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방 밖으로 나갔는데…….

“어? 기준 씨?”

도대체 몇 시지? 기준이 거실에 있었다. 뭔가 분주한 분위기 속에서 기준은 희원이 나온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정신이 없는 희원이 서둘러 현관 쪽으로 가려고 하다가 뒤돌던 기준과 마주쳤다.

“왜 나왔어요?”

기준이 단박에 눈을 크게 뜨며 희원을 향해 얼른 들어가라고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누가 온 것 같아서…….”

“원 실장님이 와서요. 아니, 그 전에 희원 씨 얼른 방으로 들어가요. 실장님, 잠시만요.”

그러고 보니 원 실장이 현관으로 이어지는 복도 끝에 서 있었다.

“원 실장님한테 인사라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얼른 들어가라고요.”

희원은 결국 기준에 의해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앉았다.

“좀 있어요. 금방 얘기 나누고 올게요. 응?”

희원은 할 말이 많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기준이 많이 바빠 보였는데 더 이상 그를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직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지 착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희원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몇 분 지나지 않아서 기준이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누워 있지 그랬어요.”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기준이 손을 뻗어서 희원의 이마를 만져 봤다.

“열은 없네요. 목이 아프다거나 춥거나 머리가 지끈거리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괜찮아요.”

“밥 먹어야죠.”

“근데 원 실장님은 왜 오셨어요? 그리고 기준 씨 회사는요?”

아무리 찾아도 핸드폰을 어디다 뒀는지 모르겠어서 희원은 아직 시간도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오늘 회사 안 간다니까요. 랑일이는 원 실장님이 유치원에 데려다줬어요.”

“왜 회사를 안 가요? 무슨 일 있어요?”

희원이 잔뜩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기준은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희원 씨가 아픈데 무슨 회사를 가요. 그나저나 새벽에 얘기한 거 기억 못 하는구나.”

“네?”

희원은 새벽에 잠깐 얘기했던 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마 정신이 없어서 그랬을 거다.

“오늘 회사 휴가 냈어요. 오늘은 희원 씨 옆에서 종일 붙어서 간호할 거예요.”

“저 괜찮은데요.”

“아직도 안색이 안 좋아요. 좀 누워 있어요. 금방 죽 갖다줄게요.”

희원이 괜찮다고 반복해서 말했지만 기준은 희원의 말을 들을 생각이 아예 없었다. 어제 아침에도 몸이 별로 안 좋아 보인다고 했지만 희원은 괜찮다고 했고 결국 이 사달이 난 거기 때문이다.

기준은 주방으로 와서 미리 끓여 두었던 죽을 데우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박 여사가 전복을 들고 집에 찾아왔다. 그러고는 귤희를 데리고 갔다. 랑일이도 하원 때 박 여사가 데리고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집에 아이들이 있으면 희원이 신경 쓸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기준은 전복죽을 따듯하게 데우고 물과 약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기준 때문에 억지로 누워 있던 희원이 일어나 앉았다.

“이것 좀 먹어요.”

“근데 집이 왜 이렇게 조용해요?”

희원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랑일이도, 귤희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게다가 정말 지금 몇 시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랑일이는 유치원 갔다가 이따 본가로 갈 거고요, 귤희는 아침에 박 여사가 데리고 갔어요. 오늘 하루 봐준다고요.”

“왜, 왜요?”

희원은 끙끙 앓던 어젯밤보다는 괜찮았지만 아직도 정신이 좀 몽롱한 상태였다. 상황 파악이 빨리 되지 않았다.

“아이들 있으면 희원 씨가 푹 쉴 수가 없잖아요.”

“그래도 어머니께 너무 죄송하잖아요.”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죽부터 먹어요. 아, 해요. 아.”

기준이 한 숟가락 뜨고는 뜨거울까 봐 후후 불었다. 그러고는 희원의 입 앞에 숟가락을 가져다 댔다.

“내, 내가 먹을게요.”

하지만 기준은 그저 고개를 젓고 숟가락을 조금 더 갖다 댈 뿐이었다.

“얼른 아 해요. 떨어져요.”

희원은 어쩔 수 없이 아, 하고 입을 벌렸다. 기준이 희원의 입 속으로 죽을 넣어 주었다. 고소하고 따듯한 죽이 입 안에 퍼졌다. 온통 입 안이 까끌까끌하다고 생각했는데 따듯한 기운이 감도며 군침이 돌았다. 희원이 죽을 오물오물 먹었다.

“잘 먹네요. 입맛 없을까 봐 너무 걱정했는데.”

“걱정 많이 했어요? 미안해요.”

“응, 좀 미안해해야 해. 나한테 아프다고 말도 안 하고. 걱정돼서 가슴이 너덜너덜해졌어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눈썹을 팔자로 누이고 정말 미안해했다. 기준은 그런 희원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다시 입 앞에 숟가락을 들이밀었다. 희원이 자기가 먹겠다고 하려다가 어차피 그렇게 말해 봐야 기준이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것을 알고 그대로 입을 벌려서 받아먹었다.

기준은 싹싹 긁어서 죽을 끝까지 먹인 뒤에 물을 입에 대 주었다.

“이제 내가 마실 수 있어요.”

“얼른 아 해요.”

결국 물도 대 주는 대로 마시고, 약도 먹었다. 약을 입으로 옮겨서 먹여 준다고 하지 않은 게 어딘가 싶을 정도로 기준은 희원이 손 하나 까닥하지 않도록 했다.

기준이 쟁반을 챙겨서 방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희원도 따라서 침대로 발을 빼려고 했다.

“왜요? 어디 가요?”

“응?”

“희원 씨 지금 어디 가냐고요.”

“화장실에요. 좀 씻고 싶어서요.”

기준이 우두커니 서서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희원이 뭔가 잘못 말했나 싶어서 망설이고 있는데 기준이 먼저 입을 뗐다.

“앉아 있어요. 씻겨 줄 테니까.”

“네?”

“좀 기다려요. 아무것도 하지 마요.”

희원이 여기서 자기가 알아서 씻겠다고 하면 기준은 뭔가 화를 낼 것만 같았다. 표정이 너무 비장해서 스스로 씻겠다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결국 희원은 고개를 주억이고는 다시 침대에 앉았다.

주방에 그릇을 가져다 놓고 온 기준은 그대로 침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욕조에 따듯한 물을 받기 시작했다.

“옷 벗겨 줄게요.”

“아니, 그러니까 내가 씻는다고……!”

물론 둘이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사이지만 이렇게 대낮에 기준의 앞에서 옷을 벗는 게 싫었다. 부끄러워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알았어요. 그럼 안 볼 테니까 물에 들어가 있어요. 금방 따라 들어갈게요.”

“그러니까 기준 씨, 씻는 것 정도는 제가 할 수 있어요.”

무슨 어디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중병에 걸린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현기증 나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아니, 그러니까 현기증이 그렇게 쉽게 나는 것도 아니고, 쓰러지는 게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라고요.”

“어제 집에 왔는데 희원 씨가 바닥에 누워서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거 본 거는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피가 식는 느낌이었다고요.”

“미안해요.”

“미안하면 오늘은 고집부리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줘요. 희원 씨 연애할 때도 느낀 거지만 은근히 고집 센 거 알죠?”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기가 욕조에 들어가 앉을 때까지 보지 말아 달라고 했다. 기준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기준이 잠시 자리를 비운 뒤 희원은 옷을 벗고는 욕조에 들어가 앉았다. 그러자 마치 시간이라도 잰 것처럼 기준이 안으로 들어와서 욕조 턱에 앉았다.

“물은 어때요? 적당해요?”

“응, 온도 딱 좋아요.”

“다행이다. 머리 감겨 줄게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은 샴푸를 짜서 희원의 머리를 조심스레 감기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머리와 목, 어깨까지 지압을 해 주었다.

“흐응.”

“시원해요?”

“네에.”

몸이 녹진하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희원은 몸을 기준에게 맡기고는 눈을 감았다. 기준이 손을 부드럽게 움직이며 기다란 속눈썹을 바라봤다. 촘촘한 속눈썹이 풍성했다. 기준이 고개를 내려 감은 눈두덩에 입을 맞췄다.

“매일 이렇게 머리도 감겨 주고, 씻겨 주고 싶어요. 희원 씨가 나를 아주 많이 필요로 했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기준 씨를 아주 많이 필요로 하고 있는걸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피식 웃고는 희원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거짓말하지 마요. 나는 희원 씨가 나 없이도 뭐든 너무 잘해서 불안해요. 누구는 아이 한 명 혼자 키우는 것도 못해서 만날 남편을 찾아 댄다는데 우리 희원 씨는 내가 지방에 가든, 야근을 하고 늦게 들어오든 전혀 찾지를 않잖아요.”

“그거야 내가 뭔가를 요구하기도 전에 기준 씨가 알아서 잘해 주니까 그런 거잖아요.”

“치, 말은 잘해서 내가 할 말도 못 하게 하고.”

기준이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 희원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감기 옮아요.”

“걱정 말아요. 희원 씨는 감기 아니고 몸살이니까. 그리고 나는 면역력 강해서 괜찮아요.”

기준은 보란 듯이 다시 한번 입을 맞추고는 희원의 몸을 마저 씻겨 주었다.

“이제 나갈래요? 물속에 너무 오래 있어도 체온 떨어져서 좋지 않으니까요.”

“응, 그럴게요. 먼저 나가요, 기준 씨. 가운 입고 나갈게요.”

하지만 기준은 희원의 말에도 뚱하니 서서 희원을 가만 바라볼 뿐이었다.

“왜요?”

“뭐가 창피해요? 내가 다 씻겨 주면서 다 봤는데.”

기준의 말이 맞았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다.

“그치만……!”

“오늘 희원 씨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 내가 다 할 거예요.”

기준은 희원을 일으켜 몸의 물기를 구석구석 닦아 준 뒤 가운을 걸쳐 주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품에 안았다.

“기준 씨, 혼자 걸을 수 있어요!”

“희원 씨, 방금 전에도 말했잖아요. 내가 다 한다고요. 희원 씨는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내가 다 입혀 주고 먹여 주고 재워 줄 거예요. 오늘은 걸어 다닐 필요도 없어요.”

“기준 씨, 정말 과보호라고요!”

“그동안 그랬죠? 과보호가 뭔지 시작도 안 했다고. 오늘 어디 한번 봐요.”

기준은 찻잔을 들고는 희원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 정도는 내가 할 수 있다고요!”

그 표정 속에 제 아빠 때문에 심통을 낼 때 짓는 랑일이의 표정이 있어서 희원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또! 또! 그 표정 짓지 말라고요!”

희원의 말에 기준은 이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희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제 차 정도는 제가 들고 마실 수 있단 말이다. 아니 이제가 아니라 애초에 밥도 혼자 먹을 수 있었고 씻는 것도 혼자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준이 하겠다고 하니까 그러라고 한 건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희원 씨는 내가 뭐를 해 주는 게 싫은가 봐요.”

기준이 어깨를 주저앉히며 등을 돌렸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알았어요, 아.”

졌다. 결국 희원이 입을 벌렸다. 그러자 기준이 신나서 잔을 입에 대 줬다. 그래, 분명 이건 즐기는 표정이다! 희원은 이제 그냥 마음대로 하라는 식으로 기준이 입 안에 넣어 주는 따듯한 차를 꼴깍꼴깍 삼켰다.

“맛있어요?”

“네.”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은 씻고 나온 희원의 머리를 말려 주고 로션을 발라 주더니 몸을 따듯하게 해 주는 차를 우려 와서는 입에 넣어 주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희원을 품에 안고 앉아서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열나거나 그러진 않고요?”

“네.”

“목이 아프거나 그러지도 않고요? 막 춥거나 그러지는?”

“이제는 괜찮아요.”

기준은 다행이라며 한숨 푹 자라고 했다.

“그런데 귤희는 안 데리러 가도 돼요?”

집에 기준과 단둘이 있는 게 오랜만이라서 좋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걱정되었다.

“귤희는 오늘 종일 어머니가 봐주기로 했어요. 그런데 희원 씨는 나랑 둘이 있는 게 싫어요?”

“아니요!”

또 삐칠까 봐 희원이 서둘러 대답했다.

“그런데 왜 벌써 애들을 찾아요? 나 서운하게.”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희원이 웃으며 기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이러면 뭐 내가 풀리나?”

기준의 말에 희원이 다시 입을 맞추자 기준이 희원의 뺨을 잡고는 그대로 입을 맞췄다.

“풀리지. 완전 풀리지. 희원 씨는 나를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요. 우리 오랜만에 끌어안고 한숨 잘래요? 희원 씨도, 나도 이렇게 자는 거 너무 오랜만인 것 같아요.”

기준이 희원을 품에 안고 침대에 누웠다. 희원은 기준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는 그의 단단한 손을 만지작거렸다.

“희원 씨.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푹 자요. 오늘만큼은 귤희랑 랑일이 잠시 잊고 몸 생각만 해요.”

“응, 그럴게요. 기준 씨도 푹 자요. 요즘 계속해서 제대로 못 잤잖아요.”

“으응.”

희원을 끌어안은 기준은 벌써 잠이 오는지 목소리가 나른했다.

“어제 밤새 나 간호해 준 거예요?”

“으응.”

“고마워요.”

기준이 희원의 목덜미에 이마를 박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은 기준의 커다란 손을 토닥이며 같이 잠에 빠져들었다. 실로 이렇게 평안한 낮잠은 오랜만이었다.

잠에서 깼을 때 등 뒤에 있던 기준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희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 봤다. 거실에서는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가득했다.

“기준 씨?”

“일어났어요?”

기준이 주방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희원은 기준에게 다가가 등을 감싸고는 꼭 끌어안았다. 따뜻한 체온을 느끼면서 기준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더 자지 벌써 나왔어요? 자고 있으면 키스로 깨우려고 했는데. 원래 잠자는 공주님 깨우는 건 키스가 정석이라는데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작게 웃었다.

“기준 씨는 좀 잤어요?”

“응, 오랜만에 푹 잤어요. 희원 씨는요?”

“저도요. 근데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조금 늦었지만 점심 먹으려고요.”

희원이 살짝 몸을 떼고는 시계를 확인했다.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정말 아무 걱정도 없이 푹 잔 모양이었다.

“희원 씨, 따로 먹고 싶은 것 있어요? 해 줄게요.”

희원이 기준의 넓은 등에 이마를 대고는 고개를 저었다.

“기준 씨가 해 주는 건 다 맛있어요. 나보다 음식 더 잘하잖아요.”

“영양밥 했는데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뚝배기 두 개가 나란히 절절 끓고 있었다.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념장 만드는 중이었어요? 내가 할까요?”

“아니요. 오늘은 다 내가 해요. 앉아 있어요. 이제 칼질해야 해요.”

희원은 얌전히 기준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기준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를 바라봤다.

어쩌면 저렇게 잘생겼을까? 희원은 그런 생각을 하며 기준을 구경했다.

랑일이가 점점 기준을 닮아 가는 게 신기했다. 깎아 놓은 것 같은 옆모습과 시원시원한 눈매가 마음에 들었다. 살짝 위로 올라가 있어서 조금 무서워 보이긴 하지만 기준은 저한테는 늘 상냥한 사람이니 상관없었다. 그리고 사업하는 사람이 너무 순한 인상을 갖기보다는 조금 날카로운 인상이 오히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쳐다보면 남편 뚫어지는데?”

기준이 피식 웃으며 뚝배기 두 개를 식탁 위에 놓았다.

“아니, 안 쳐다봤는데…….”

“진짜? 진짜 안 쳐다봤다고요?”

기준이 얼굴을 쑥 들이밀며 물었다. 잘생긴 얼굴에 희원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응? 대답해 봐요. 진짜 안 쳐다봤어?”

“쳐다봤어요. 너무 잘생겨서.”

희원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기준이 입꼬리를 올려서 웃으며 희원의 입술에 또 입을 맞췄다.

기준은 고소한 냄새가 나는 양념장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냉장고에서 반찬도 꺼내어 세팅을 했다. 희원에게는 따듯한 물을 주고, 자신도 희원의 옆에 앉았다.

“여기 앉으려고요?”

자신의 옆에 착 달라붙은 기준의 행동에 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싫은 건 아니지만 랑일이와 귤희가 있을 때는 이렇게 나란히 앉은 적이 없어서 어색하기도 하고 새롭기도 했다.

“내가 지금 희원 씨, 내 허벅지에 앉히고 밥 먹고 싶은데 참고 있는 거예요.”

“네?”

“다 해 준다고 했잖아요.”

그러더니 기준은 희원의 밥부터 양념장을 넣고 싹싹 비비기 시작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운데 봄 향기가 가득한 나물들과 살이 통통한 해물들이 한데 어우러져 보기만 해도 군침이 꿀꺽꿀꺽 넘어갔다.

기준은 희원 것을 비벼 주고 난 뒤에 먼저 희원의 입 안에 밥을 한 숟가락 넣어 주었다. 희원은 우물우물 먹으며 기준을 향해 눈웃음을 보여 줬다.

“맛있어요.”

“그쵸? 그래서 말인데요, 희원 씨.”

은근히 자기를 부르는 기준의 목소리에 희원이 물을 얼른 마시고는 손바닥을 딱 들어서 표시했다.

“놀 그만두고 요식업 하니 어쩌니 안 돼요.”

“에이, 사람 말을 끝까지 좀 들어 보고…….”

“그건 안 된다고 그랬어요. 기준 씨 저번에 진짜로 어머니한테 그런 얘기 꺼냈다면서요? 어머니가 완전…….”

얼마 전에 기준이 지나가는 말로 자꾸 이렇게 부려 먹으면 이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요식업 한다고 했다가 정말로 박 여사한테 등짝을 한 대 얻어맞았다. 그걸 박 여사가 또 희원에게 다 이른 것 같았다.

기준은 얼른 희원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그의 말을 막았다. 희원이 주먹을 들어 기준의 어깨를 툭툭 쳐 냈지만 기준은 입술을 떼어 주지 않았다.

“기준 씨이, 밥 먹다가 지금 뭐 하는……!”

드디어 떨어진 입술에 희원이 기준의 어깨를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툭 쳤다. 하지만 기준은 그런 희원의 손목을 잡고 이번에는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혼 좀 그만 내요. 무슨 비밀이 없어. 박 여사랑 그렇게 다 공유하지 마요. 우리끼리만 비밀 만들어요. 박 여사랑 통화도 많이 하지 마요. 나랑만 해요.”

기준의 투정 섞인 말에 희원은 귀여워서 마음이 풀리려다가도 할 말은 해야 한다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비밀이에요. 어머니가 엄청 놀라서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그건 다 거짓말이다. 놀라기는커녕 기준이 그런 말을 뱉었을 때 어머니는 엄청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게 왜 또 헛소리지?’ 이런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희원에게는 엄청 놀랐다는 듯 말한 게 분명했다.

“기준 씨, 정말 그렇게 아무 말이나 해서 어머니께 심려 끼치고 그러면 안 돼요. 물론 우리 기준 씨가 안 그런다는 것도 아는데…….”

기준은 희원의 입술을 다시 물었다. 희원이 작정하고 나무랄 때는 기준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누가 유치원 선생님 아니랄까 봐 희원의 말발은 기준조차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무력으로 입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으읍!”

입술이 떨어졌을 때는 희원이 순한 눈을 무섭게 만들고는 기준을 쳐다봤다. 하지만 아무리 희원이 무서운 눈을 한다고 해도 전혀 무서워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그만 혼내요. 일 열심히 할게요. 오늘 희원 씨 간호만 하고 아픈 거 다 나으면 회사 출근해서 또 열심히 할게요. 응?”

“알죠, 우리 기준 씨 열심히 하는 거 아는데 그래도……. 이제 진짜 밥 먹어요.”

희원은 잔소리가 길어지는 것 같아서 말을 아끼고는 밥을 먹자고 했다. 그 말에 기준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응. 내가 먹여 줄게요.”

기준은 그러면서도 다시 희원의 입술을 물었다. 희원이 기준의 어깨를 툭툭 때렸지만 결국 기준은 희원을 끌어다 자기 허벅지 위에 올리고는 본격적으로 입술을 먹기 시작했다.

아니, 밥을 먹자고! 희원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기준에게 물린 입술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 *

“집에 혼자 있어도 돼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벌써 옷까지 다 챙겨 입은 상태였다.

“아직 다 안 나았잖아요.”

기준이 다시 말했지만 희원은 기준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는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고는 위를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기준 씨가 간호해 줘서 이제는 괜찮아요. 다 나았어요. 나도 애들 보러 가고 싶어요. 같이 갈래요.”

좀처럼 뭔가를 조르지 않는 희원이 이렇게 올려다보며 졸라 대면 기준은 이길 방법이 없었다. 기준은 그저 희원의 이마에 입을 맞춰 주고는 희원의 옷을 여며 주었다.

“조금이라도 컨디션 안 좋으면 말해요. 본가 가서 조금 자다가 와도 괜찮으니까.”

“응.”

희원은 기준이 조수석 문을 열어 주자 잘 올라탔다. 기준이 운전석에 앉아서 희원의 안전벨트 먼저 채워 주었다.

“가는 길에 피곤하면 자도 돼요.”

“으응, 기준 씨 우리 가다가 커피 한 잔 사 갈래요?”

며칠 동안 기준은 희원의 몸을 위해서 카페인이 들어간 음료는 절대 주지 않았다. 대신 몸을 따듯하게 할 수 있는 차를 주었다. 하루에 한 잔씩 꼬박꼬박 커피를 마셨던 희원이기에 이젠 커피가 간절했다.

희원의 말에 기준이 피식 웃었다.

“응? 나 진짜 커피 마시고 싶어요. 달달한 바닐라 빈 라테 이런 거로. 응?”

“알았어요. 사 줄게.”

“기준 씨, 최고다. 정말 사랑하는 거 알죠?”

“이럴 때만?”

희원이 고개를 저으며 작게 말했다.

“늘 사랑해요.”

그 대답에 기준도 대답했다.

“나도, 나도 사랑해요. 우리 희원 씨가 먹고 싶다는 커피 사러 갑시다. 다른 건 안 사도 돼요? 마들렌 좋아하잖아요. 그것도 사 줄까?”

희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본가에 가는 길에 종종 가는 카페에 들렀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기준은 희원의 목에 머플러를 둘러 주었다. 그러고는 이마에 손을 올려서 다시 한번 열을 체크했다.

“거봐요, 이제 열 없지. 원래도 열은 없었다고요.”

종잘대는 희원이 예뻐서 기준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둘은 손을 잡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앉아 있어요. 주문하고 올게요.”

기준은 희원을 창가 테이블에 앉히고는 자신은 카운터로 향했다. 평일인데도 꽤나 사람이 많았다. 원래도 유명한 카페고 마들렌이나 마카롱 같은 것을 시작하면서 더 사람이 많아졌다. 아마 주문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거였다.

달달한 빵 냄새와 고소한 커피 향이 섞여서 벌써부터 입 안이 달콤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희원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든 기준을 한 번 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잘생겼어.”

멀리서 봐도 남들보다 우뚝 솟아 있어서 눈에 띄었다. 희원 때문에 연차를 몰아서 낸 터라 지금은 정장 차림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희원이 괜찮다고 출근하라고 했는데도 말도 안 듣고 결국 연차를 왕창 몰아서 냈다. 오늘은 회사 가 보라고 했지만 이왕 쉬는 거 금요일인 오늘부터 주말까지 쭉 쉴 거라고 했다. 원 실장은 애가 타는지 사흘 전에는 시간 단위로 연락을 하는 것 같더니만 이제는 거의 포기 상태인 것 같았다. 기준이 전화를 도통 받지 않으니 말이다.

희원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래도 괜찮으냐고 물었더니 기준은 지금 자기가 육아휴직도 못 하고 있는데 배우자 병간호도 못 하냐며 불퉁거렸다. 그놈의 육아휴직. 그리고 누가 기준의 말을 들으면 무슨 희원이 큰 병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희원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기준이 알아서 하겠지 싶었다.

희원은 기준이 주문을 위해 줄에 서 있는 동안 핸드폰으로 맛있는 간식거리를 검색해 보았다. 기준이 월요일에 출근할 때 비서실 사람들에게 마카롱이라도 한 박스 사서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였다.

“혹시 혼자 오셨어요?”

“네?”

희원이 눈을 깜박깜박 떴다. 눈앞의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꽤 오랜 시간 혼자 앉아 계시는 것 같아서요.”

희원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아서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였지? 분명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어디선가 기준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혹시 오메가세요?”

남자는 희원에게 오메가냐고 물으면서 뭔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 남자는 알파인가? 생긴 게 키가 크고 체격이 좀 있는 것으로 보아 알파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알파 페로몬을 느낄 수가 없었다.

“제가 우성 알파거든요.”

남자의 말에 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성 알파라고? 그런데 왜 페로몬 향이 하나도 나지 않지? 그때였다. 숲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시원하고 상쾌한 향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희원이 밝게 웃었다.

“기준 씨!”

아니나 다를까 기준이었다. 남자가 움찔 놀라며 뒤돌아봤다. 뒤돌아보는 고개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남자는 황급히 “죄송합니다. 일행이 있으셨군요.” 하고는 자리를 떴다.

“희원 씨, 여기 커피요. 우리 가면서 먹을까요?”

“네, 좋아요.”

기준이 팔짱을 내주자 희원이 척 끼고는 기준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그 표정이 ‘나 잘했어요?’ 하는 표정이라 기준은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볼을 만져 주었다.

차에 타고는 기준은 희원의 안전벨트를 채워 주며 말했다.

“우리 희원 씨는 예뻐서 꼭 그렇게 똥파리들이 꼬이더라. 이러니 내가 밖에 못 내놓는 거예요.”

채워 주는 안전벨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희원이 대답했다.

“기준 씨, 그 사람 알파라고 하는데 향이 하나도 안 느껴지는 것 있죠. 그런데 희한하게도 아까 기준 씨가 나를 부른 것도 아니었는데 기준 씨가 온 게 딱 느껴지는 거예요. 기준 씨 향이 딱 느껴졌어요. 그래서 엄청 신기했어요.”

“내 페로몬만 알면 됐지, 뭐. 안 그래요? 다른 알파 새끼 페로몬 알 필요 있어요?”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맞아요. 기준 씨 페로몬만 맡으면 됐죠, 뭐. 근데 너무 신기하잖아요, 어떻게 기준 씨가 온 걸 딱 알 수 있었지?”

“그거야 희원 씨가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래요.”

기준이 입꼬리를 올리며 시원스레 웃고는 희원의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입술을 떼고는 운전을 하는 기준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후련해 보였다.

* * *

“랑일아!”

“마미!”

기준이 온다는 소리에 정원까지 나온 랑일이가 희원이 부르자마자 저쪽에서 마구 뛰어왔다. 그러고는 희원의 품에 폭 안겼다.

“우리 아들, 잘 있었어?”

“네! 이제 마미 안 아파요?”

“응, 랑일이가 걱정해 준 덕분에 이제는 다 나았어.”

희원이 랑일이를 품에 안고는 들어 올리려고 하자 기준이 어느새 다가와서 그런 랑일이를 제 품에 안았다.

“이랑일, 아빠 봤으면 인사해야지.”

“아빠, 안녕.”

랑일이가 왠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마지못해 인사했다. 그러고는 다시 희원에게 가려고 하는데 기준이 그걸 제지했다.

“마미가 아픈데 이제 다 큰 우리 랑일이가 안아 달라고 하면 되겠어? 우리가 마미를 많이 도와줘야 해. 그러다가 마미가 또 아프면 어떡해.”

“마미가 또 아파?”

“랑일아 마미 괜찮아. 이리 와.”

희원이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안으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박 여사가 끼어들었다.

“우리 희원이 왔니? 어머, 그 며칠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됐네. 얘는 그날 몸이 아프면 나오지를 말았어야지. 엄마가 미안해서 혼났잖니.”

“어머니 죄송해요. 걱정하셨죠.”

“뭐가 죄송해. 이기준이 제대로 집안일 도와주지도 않아서 우리 희원이가 아팠던 건데. 그날도 이기준이 전화해서 아픈 애를 데리고 돌아다녔다고 얼마나 난리를 치던지 원. 새벽에 자는 사람 깨워서 어찌나 짖어 대고…….”

“어머니!”

기준이 미간을 좁혔다. 박 여사가 어깨를 으쓱이며 희원의 팔짱을 끼고는 얼른 안으로 이끌었다.

“엄마가 우리 희원이 먹이려고 장어 덮밥 해 놨어. 여기서 아예 점심 먹고 싸 갖고 가. 알았지?”

“네.”

희원이 맑게 웃었다.

“귤희는 거실에서 범퍼에 앉아서 놀고 있어.”

희원이 서둘러서 안으로 들어갔다.

“귤희야!”

범퍼에 연결된 나비를 쫓아서 손짓하던 귤희의 손이 허공중에 딱 멈췄다. 희원이 귤희 앞에 무릎을 꿇고는 시선을 맞췄다.

“귤희야, 마미 왔어. 잘 있었어?”

귤희가 희원과 눈을 딱 마주했다. 그러더니 끼야 소리를 내며 발을 동동 엉덩이를 들썩들썩 움직였다.

“귤희가 마미 보고 싶었나 보다.”

며칠 아이들과 떨어져 있는 동안 간간이 영상통화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 격한 반응이라니! 희원이 얼른 범퍼에 연결되어 있는 안전벨트를 풀고는 귤희를 품에 안았다. 귤희가 희원의 품에 폭 안겼다. 마치 랑일이가 어릴 적 희원에게 안겼던 것같이 품에 쏙 들어왔다.

귤희가 손을 뻗어서 희원의 뒷머리를 만졌다. 랑일이가 만지듯 말이다.

“마미! 귤희가 나 따라 해요!”

어느새 따라 들어온 랑일이가 희원의 품에 안긴 귤희를 보며 말했다. 랑일이 목소리가 들리자 귤희가 더 좋아서 꺄아꺄아 소리를 질렀다. 희원이 활짝 웃으며 랑일이에게 말했다.

“우리 귤희가 오빠 따라쟁이인가 보다.”

“따라쟁이요?”

“응! 오빠가 좋아서 오빠 하는 건 다 하고 싶은가 봐.”

그때였다. 귤희가 손가락으로 희원의 뒷머리를 계속해서 만지며 말했다.

“마아마! 마암미!”

“세상에! 희원 씨, 들었어요?”

희원이 귤희 옹알이에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가 금세 다물렸다. 기준이 벌써 오버스럽게 반응하며 한달음에 달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머니, 들었어요? 우리 공주님 말하는 거?”

“기준 씨, 말을 했다고 하기에는 쫌…….”

희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희원 씨는 너무 냉정한 구석이 있어요. 분명히 들었다니까요. 우리 공주님이 말하는 거! 방금 그랬잖아요. 마미라고요!”

“그게 그러니까 옹알이…….”

“우리 공주님 천재인가 봐!”

희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자신의 아이가 뭐든 잘한다고 생각하는 유치원의 학부모를 보는 것 같았다.

“쟤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저렇게 팔불출이니?”

희원은 속으로 ‘아마도 아버지……?’ 하고 생각했다. 이 회장은 은근히 팔불출기가 있었다. 물론 그게 아들놈들이 아닌 박 여사에게만 존재하는 게 문제이긴 했으나 아들들이 전혀 서운해하지 않으니 문제라고 할 것도 없었다.

기준은 희원에게서 귤희를 받아서 품에 안고는 실실 웃었다.

“우리 공주님이 벌써부터 마미 소리를 했어요?”

기준은 귤희와 눈을 맞추고는 싱글벙글 웃었다. 그러더니 귤희를 보물 품듯이 품에 잘 안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식사를 차리고 있는 이모님을 보더니 말했다.

“이모님, 우리 공주님 말하는 거 들어 보셨어요?”

“어머, 진짜요?”

“네, 방금 전에 마미라고 말했다니까요.”

희원은 자기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기준이 팔불출인 건 희원도 안다. 그런데 점점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랑일이가 희원의 반에 있을 때는 어느 정도 겸손했고 예의를 알았다. 그런데 이건 뭐 염치도 없고 낯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기준은 주방에서 이모님과 신난 얼굴로 몇 마디를 더 나누다가 이제 자리를 옮겨서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귤희를 보며 말했다.

“아빠도 해 봐, 공주님. 아빠! 아빠! 해 봐. 응?”

희원과 손을 잡고서 제 아빠를 지켜보던 랑일이가 희원의 소매를 쭉쭉 잡아당겼다.

“응, 랑일아?”

“마미, 아빠는 그냥 두고 우리 밥 먹으러 가요.”

“그럴까?”

희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랑일이의 표정이 ‘아빠는 왜 저 모양인 거죠?’ 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희원이 오히려 민망해졌다.

“마아마! 맘아미!”

귤희가 또다시 옹알이를 하자 기준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귤희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아직 아빠는 안 해 줄 거야? 괜찮아, 괜찮아. 나중에 하면 돼. 우리 큰아빠한테 전화할까?”

“전화를 왜 해요!”

희원이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기준은 핸드폰을 꺼내서 이준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어, 형! 난데!”

희원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다른 게 아니라 진짜 중요한 일이 있어서 전화했지.”

“전화 끊어요.”

희원이 옆에서 속삭였지만 기준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오랜만에 귤희 만났는데. 어? 왜 오랜만이냐고? 우리 희원 씨가 며칠 동안 아팠잖아. 그러니까. 애 보느라 고생했지 뭐. 뭐? 내가 더 잘해야 한다고? 알았어, 알았어. 아무튼 왜 전화했냐면 우리 공주님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아니나 다를까 희영에게 바로 전화가 왔다. 희원이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 형!”

희영은 희원에게 아팠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냐, 뭐 먹고 싶은 건 없냐, 조금 따듯해졌다고 옷 너무 얇게 입고 다닌 거는 아니냐며 이것저것 물어보고 확인했다. 기준이 이준과 통화를 하는 도중에 전화가 온 것으로 봐서 둘이 같이 있다가 들은 게 분명했다.

희원은 걱정해 줘서 고맙다고, 이제 정말 괜찮다며 전화를 끊었다. 희원은 전화를 끊고 나서 기준을 봤는데 기준은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

“어! 해준아, 우리 공주님이 진짜 언어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

“아!”

어느새 이준과 전화를 끊고 해준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이러다가 동네방네 다 소문낼 것만 같았다.

희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랑일이와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 따라 들어오는 박 여사도 한심하다는 눈으로 기준을 쳐다봤다.

“와, 어머니, 이게 다 뭐예요?”

희원은 눈앞에 펼쳐진 식탁 위의 음식들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어 덮밥이라고 해서 밥 위에 장어 몇 개 올라간 정도를 생각했는데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우리 희원이 몸보신해 주려고 했지. 이리 와. 앉아. 저 밖에 있는 저놈은 상관하지 말고.”

희원은 자리에 앉아서 랑일이와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거실에서 기준의 통화는 계속되었다.

드디어 기준이 들어왔을 때 희원은 기준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저렇게 됐지?

“희원 씨, 맛 괜찮아요? 맛있으면 우리 많이 가지고 가요.”

“어머니랑 아버지도 드셔야죠. 아, 아버지는 오늘도 바쁘세요?”

희원의 물음에 박 여사가 기준을 힐긋 보고는 혀를 찼다.

“희원아, 아버지가 회장 돼서는 생전 하지도 않는 야근을 누구 때문에 하고 계신다.”

“네?”

“어머니, 이거 정말 맛있네요.”

기준이 중간에서 대화를 툭 끊었다. 희원이 기준을 물끄러미 쳐다봤지만 기준은 더 이상 회사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니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 맞다. 희원아. 약 와서 챙겨 뒀으니까 가져가. 알았지?”

“네, 아! 어머니, 그럼 그때 같이 주문한 기준 씨 약도 왔어요?”

“응, 같이 와서 챙겨 뒀어. 이따 집에 갈 때 가져가면 돼.”

희원이 배시시 웃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기준이 그 소리에 희원을 가만 바라봤다.

“희원 씨, 내 약이라니요?”

“응, 요즘 기준 씨 내내 바빴잖아요. 그래서 저번에 어머니랑 같이 한의원 가서 기준 씨 약도 지어 왔어요.”

기준이 희원의 말에 감동한 눈을 했다.

“진짜 우리 희원 씨는 천사라니까. 그래서 약 지으러 갔다가 아팠던 거예요? 그럴 줄 알았으면 안 가도 됐는데.”

기준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박 여사가 쯧쯧 혀를 찼다.

* * *

집에 돌아온 희원은 랑일이와 귤희를 재우고는 기준과 둘이 욕조 안에 앉았다.

희원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욕조의 물이 작게 출렁이며 밖으로 넘쳤다. 희원은 기준의 목을 끌어안고는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몸을 움직였다. 기준이 같이 허리를 밑에서 위로 쳐올릴 때마다 희원의 내벽이 꽉 조여 왔다.

“으응, 응, 아, 아아!”

귓가에 흘리는 신음이 마치 밀어를 속삭이는 것 같아서 기준은 희원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기준, 기준 씨.”

기준이 움직일 때마다 물도 같이 요동치며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배가 가득 찬 느낌이 드는 데다가 안에서 움직이는 기준의 성기는 커질 대로 커져서 이러다가는 자신의 뱃가죽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힘들어요?”

“으응.”

“어떻게 해 줄까요?”

기준이 희원의 축 처진 눈썹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길게 잘빠진 물방울 모양의 눈꼬리에다가도 입을 맞췄다.

“이제 그만 나갈래요.”

“이 상태로 나갈까? 내 거 꽂은 채로?”

희원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희원 씨는 어떤 때 보면 꽤 단호해요.”

그 누구도 성기를 그곳에 끼운 채 걸어 다니는 것을 반기지 않는단 말이다. 희원은 이렇게 말하는 기준에 어이가 없었다. 인상을 팍 쓰고 기준을 노려보지만 기준은 그저 왜 그러냐는 듯 능글맞게 웃을 뿐이었다.

“점점 짓궂어지고 있어요.”

“내가요?”

모르쇠로 일관하는 기준에 희원의 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기준이 희원의 아랫입술을 쪽쪽 빨았다.

“귀여워, 귀여워 죽겠어.”

“그런 말 좀 하지 마요.”

“그럼 귀여운 걸 귀엽다고 그러지 뭐라고 해요? 사람들은 참 이상해. 나는 정말 솔직하거든요. 희원 씨가 귀엽고 천사 같아서 그렇다고 말하는 건데 희원 씨는 들을 때마다 질색을 하고, 아까도 그래. 우리 귤희가 정말 천재 같아서 천재 같다고……!”

희원이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어 자신의 입술로 기준의 입을 막았다. 기준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희원을 쑥 들어 올려서 자기 성기를 빼냈다. 그러고는 희원을 욕조 턱을 짚고 엉덩이를 내밀게 한 뒤 뒤에서 빠졌던 성기를 한 번에 쑥 집어넣었다.

“아아!”

“잘 잡고 있어요. 미끄러지면 안 되니까.”

기준은 희원의 골반을 잡고는 뒤에서 뭉근히 쳐올리다가 뒤로 확 빠졌다가 한 번에 팍 치고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기준의 성기가 귀두만 걸친 채 빠졌다가 내벽을 주르륵 긁으며 치고 들어올 때마다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아, 아아, 아! 기준, 기준 씨!”

“희원 씨 좆이 질질 싸요. 수면 위에 물방울 떨어지는 것 좀 봐요.”

“하지, 하지 마요, 그런 말. 으읏, 으응, 아아!”

기준이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치 일반 이야기를 하는 것같이 속살거리지만 사실 그 내용은 들어 줄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봐 봐요, 희원 씨. 내 천사, 응? 질질 싸고 있다니까!”

“천사라고 하지, 아아, 마! 그런 소리, 제발, 아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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