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환장하게 예쁜 그 말(외전 2) (26/31)

5. 환장하게 예쁜 그 말

퇴근을 하던 기준은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다름 아닌 제 형인 이준이었다.

“왜?”

―퇴근?

“응.”

랑일이가 봄방학인지라 랑일이 하원을 함께해야 하는 부담감이 줄어든 만큼 퇴근 시간이 조금 늦어졌다.

―왜 오늘은 칼퇴근 아니야?

“그러게 말이야. 칼퇴근했어야 하는데 랑일이가 집에 있다 보니. 랑일이 봄방학 중이거든.”

―아, 시기가 그렇게 되는구나.

그런데 웬일인가 싶었다. 형은 별 용건 없이 안부 전화를 하고 그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로 일 때문에 전화를 하거나 그도 아니면 해준을 이용했다. 그리고 일은 정말 바쁘고 중요한 것이 아닌 이상은 이메일로 주고받았다.

“웬일이야?”

―주말에 시간 될까 싶어서.

“누구? 나?”

―너랑 희원 씨도.

“무슨 일인데?”

주말에 별일이 없긴 했다. 귤희가 태어나고 아직 날씨도 춥고 귤희도 어리기 때문에 네 식구는 거의 집에 콕 박힌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귤희 100일 전에 희영이 본가에 소개하고 싶어서.

“그럼 주말에 데리고 오게? 박 여사도 알아?”

―그 전에 루세 씨랑 희원 씨랑 둘이 너무 친하잖아. 본가에 어머니랑 아버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너랑 해준이랑 루세 씨, 희원 씨 다 처음 보면 우리 애가 너무 낯가릴 것 같아서, 좀 미리 만나서 친해지게 해 주고 싶어서.

“응? 낯을 가린다고? 누가?”

기준이 미간을 좁혔다.

―누구겠어. 우리 희영이.

“하!”

기준이 코웃음을 쳤다. 이준의 오메가를 기준이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낯을 가린다고? 누가? 도대체 누가?

기준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낯을 가린다’라는 단어와 형네 오메가와 연관을 짓는 건 단어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형, 말은 좀 바로 하자. 대체 누가 낯을 가린다는 거야? 그 형네 오메가가 그 최 팀장 아니야? 최희영 팀장?”

―맞는데.

“그러니까 우리 회의할 때마다 브리핑하는 그 최 팀장, 아니야?”

―맞는데.

아, 사람이 사랑이라는 것을 하면 이렇게도 되는구나. 그 표본과도 같은 기준이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알파와 오메가가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 사회생활에서는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 차별이 존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메가는 애초부터 사회에서 어떤 위치 이상으로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러기도 힘들었고.

최희영은 오메가임에도 팀장 자리까지 꿰찼고 그 과정이 어떻든 간에 본사 회의까지 참석하는 위치가 되었다. 그런 그가 낯을 가린다고? 기준은 기가 찼다. 어딜 봐서? 사회생활을 그렇게 잘할 수가 없는데?

“아무튼 그렇다고 치고. 그럼 언제 만나자고?”

―돌아오는 주말 아무 때나. 토요일이 좀 편하지 않아?

“희원 씨한테 물어볼게. 근데 어디서 만나게?”

―우리 희영이가 희원 씨나 루세 씨나 둘 다 아이 있으니까 괜찮으면 밖에서 만나지 말고 집에서 만나는 게 어떠냐고 하던데?

기준이 헛웃음을 켰다.

‘우리 희영이래.’

“와 진짜 이이준 호구 잡혔구나? 우리 희영이래. 아무튼 그건 그렇고 어느 집에서 만나게?”

―설마 내가 너네 집에서 만나자고 하겠니? 우리 집으로 와.

기준이 코너를 돌며 물었다.

“거기 우리 식구 다 들어가?”

벌써 기준네 식구만 네 명이었다. 거기에 해준네도 세 명. 다 모이면 아홉 명인데, 그 집에 다 들어갈 수 있다고?

―집들이라고 생각해.

“아, 형 이사했다고 했지. 근데 애들 가면 막 이것저것 만질 텐데 그런 거 싫어하는 거 아니야?”

기준은 속으로 ‘꽤나 까칠할 것 같던데.’라고 생각한 말은 뒤로 숨겼다.

―희영이도 조카 있고 그래서 그런 거 상관 안 해.

“알았어. 토요일 저녁쯤으로 생각하면 돼? 아니면 점심?”

―희원 씨 편한 시간으로 말해 줘. 해준이한테는 내가 전화할게.

“알았어. 끊어.”

기준은 눈앞에 보이는 집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순둥순둥한 희원 씨랑 그를 판에다 찍어 놓은 것 같은 귤희, 그리고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랑일이가 있는 집으로 말이다.

주차를 하고 현관문 앞에 서니 희원이 얼른 문을 열었다.

“기준 씨! 고생했어요.”

희원이 안으로 들어와서 문을 얼른 닫은 기준의 목을 끌어안으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기준이 그런 희원을 꼭 끌어안았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랑일이가 안에서 달려 나왔다. 원래는 희원과 랑일이가 같이 현관문 앞에 서서 기준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머리가 젖은 것을 보니 씻고 나온 모양이었다. 기준이 얼른 랑일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목욕했어?”

“응!”

“머리 젖은 채로 나오면 감기 걸려.”

기준이 안으로 들어가는 걸음을 빨리했다. 랑일이를 소파 위에 앉히고는 욕실로 들어가서 손을 씻고 수건을 가지고 나왔다.

“기준 씨가 머리 말려 줄래요? 금세 저녁 차릴게요. 배고프죠?”

“응, 그럴게요. 귤희는요?”

“귤희 깨서 놀고 있어요.”

안 그래도 귤희 방에서 아기 체육관 소리가 들려왔다. 기준은 랑일이의 머리를 빠르게 말려 주고 귤희를 잔뜩 안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준이 아이들과 한바탕 놀아 주고 시간을 가졌을 때 희원이 저녁 먹자고 불렀다. 식탁을 보는 순간 기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준이 해물탕을 한 입 먹자, 맞은편에 앉은 희원이 눈빛을 빛냈다.

“어때요?”

“희원 씨가 한 거예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요. 칼칼하고 시원하고.”

“맛있다니 다행이에요.”

희원이 웃으며 동태 조각을 건져 잘 발라서 랑일이 접시에 놓았다.

“랑일아, 너무 매우면 안 먹어도 돼.”

“나 매운 거 먹을 수 있어요.”

랑일이는 웬만한 음식들은 잘 먹었다. 김치도 잘 먹고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도 잘 먹었다. 생선이랑 고기도 가리지 않았다. 채소도 잘 먹고 말이다. 잘 먹다 보니 그만큼 쑥쑥 컸다.

“마미, 근데 귤희는 언제부터 밥 먹어요?”

식탁 옆에서 귤희가 바운서에 앉아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놀고 있었다. 이제 귤희는 깨어 있는 시간이 점점 늘고 있었다. 눈도 잘 마주치고 방긋방긋 잘 웃었다.

“귤희는 조금 더 지나야 이유식 먹을 수 있어.”

“이유식이요?”

“응, 우리처럼 이런 밥이 아니라 죽같이 조금 묽은 음식들. 아직 귤희는 소화를 잘 시키지 못하고 이도 없으니까 이유식으로 조금씩 밥 먹는 연습을 하는 거야.”

희원은 귤희가 얼른 이유식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직접 이유식을 만들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희원 씨, 귤희 이유식도 만들어 주려고요?”

“그럼요, 당연하죠.”

“요즘에는 많이들 사서 먹인다고 하던데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웃어 보였다.

“나는 육아휴직 중이잖아요. 쉬는 동안만이라도 해 줄 수 있는 것 다 해 주고 싶어요. 엄마들 마음 다 똑같지 않을까요? 다 해 주고 싶은데 워킹 맘들은 너무 바쁘고 몸이 피곤하니까 할 수가 없는 거고요. 근데 저는 휴직 중이니까 괜찮아요.”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밥상머리가 아니었으면 이미 기준은 희원의 얼굴을 붙들고는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을 것이다. 희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말이다.

옆에서 열심히 먹던 랑일이가 희원의 팔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동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랑일아, 조금씩 먹어.”

볼이 터져라 먹고 있는 랑일이에게 물을 밀어 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물고기 너무 맛있어요.”

“생선. 얘 이름은 동태야.”

희원이 동태 한 조각을 더 퍼서 가시를 발라 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기준이 다정한 둘을 바라보다 퇴근길에 이준과 이야기했던 게 생각났다.

“아, 맞다. 희원 씨.”

“네?”

“아까 형한테 전화 왔었는데, 주말에 인사시키고 싶다고 하던데 시간 괜찮아요?”

희원은 이준이 인사시키고 싶다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저는 토요일에 괜찮은데 혹시 우리랑 형네랑 이렇게만 만나요?”

“왜요? 싫어서?”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조금 걱정돼서…….”

희원이 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렸다.

“걱정하지 말아요. 회사에서 몇 번 봤는데 나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날 우리 말고 해준이네도 같이 만나자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어디서 만나요? 랑일이랑 귤희를 엄마네에 맡겨야 할까요?”

“마미, 누구 만나는데요?”

랑일이가 희원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 큰아빠가 사랑하는 삼촌이 있는데 마미랑 아빠한테 소개해 주고 싶은가 봐.”

“아! 희영이 형아?”

“응?”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어봤다. 기준도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랑일아, 어떻게 알아?”

“나, 희영이 형아네 간 적 있어! 쿄우 보러.”

그 순간 기준은 생각했다.

‘이이준이 랑일이를 먼저 포섭했겠다! 와, 세기의 사랑꾼 납셨네!’

누가 들으면 사랑꾼들 대결이냐고 할 법한 생각이었다.

* * *

희원은 토요일 오전에 루세에게 전화를 했다. 루세에게 할 말이 많았다. 뭐부터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찰나 루세가 전화를 받았다. 옆에서 설이가 종알거리는 게 들렸다. 희원은 설이가 어떻게 조잘거릴지 눈에 선해서 벌써부터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여보세요, 루세 씨. 혹시 내가 너무 아침부터 전화했을까요?”

―지금이 무슨 너무 아침이에요. 벌써 11시인걸요.

루세가 작게 웃었다.

“잠깐 통화 괜찮아요?”

새로운 식구를 맞이한다는 게 설레기도 하고 조금 떨리기도 했다. 루세도 희원이 집에 인사하러 온다고 했을 때 과연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럼요. 가게는 이따가 오후에 나가면 되니까 지금은 괜찮아요.

원래 세 커플이 토요일 점심에 만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루세가 가게를 비우는 게 힘들 것 같아서 일요일 점심으로 약속 시간을 정했다.

“당장 결혼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서 바로 식구가 되는 것도 아닌데 나 왜 이렇게 떨리죠?”

희원의 말에 루세가 이번에는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희원은 자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새 식구를 맞이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형이 결혼할 때 형수를 데려온 적도 있었고, 누나가 결혼할 때 매형을 데려온 적도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기준네 집안에 인사하러 간 것도 불과 몇 년 전이다.

“루세 씨는 괜찮아요?”

―음, 저도 살짝 느낌이 다르긴 해요. 오히려 형님이 처음 왔을 때는 이런 느낌 아니었는데, 모르겠어요. 뭔가 이상해요.

“진짜 왜 그러죠? 연애하고 있는 거 몰랐던 것도 아닌데.”

하물며 희원은 백화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도 있었고,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이래저래 선물을 받은 것도 많았다. 희원이 귤희 낳았을 때 완도산 미역을 사서 이준에게 보내기도 했고, 종종 랑일이 옷을 사서 보내곤 했다.

―우리가 뭔가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어요. 특히 형님같이 순둥순둥한 사람은 센 사람한테 위축될 수도 있어요. 그런 거 아닐까요?

“그런가요? 그렇게 따지면 뭐 루세 씨도 순둥이잖아요.”

순둥이 두 명이 서로 순둥이라며 고개를 갸웃했다. 누가 봤으면 아마 서로 순둥이인 거 내기하냐고 했을지도 몰랐다.

옆에서 종잘거리던 설이 목소리가 이제는 안 들리는 걸 보아하니 아마도 해준이 데리고 피해 준 것 같았다. 반면 방 밖에서는 랑일이가 희원을 찾는지 뭔가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희원이 통화 중인 것을 아는 기준이 랑일이에게 설명을 했는지 금세 조용해졌다.

“아, 맞다! 랑일이는 만난 적 있대요.”

―진짜요?

“랑일이는 일요일에 만나러 간다니까 엄청 좋아했어요. 원래 아이들이 좋아하면 좋은 사람인데. 나 이렇게 안 떨어도 되겠죠?”

희원은 진짜 자기가 왜 이러나 싶었다. 나름 사람 안 가리고 모든 사람과 잘 지내는 편인데 유독 떨렸다. 괜히 긴장되었다. 아무래도 형님이 생기는 것에 대한 중압감이나 이런 걸까?

희원은 이런 감정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5세 학부모들은 아이가 처음 유치원에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긴장도 많이 하고 걱정도 많은 편인데, 그렇기 때문에 유치원이나 교사하고 부딪치는 문제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일수록 희원은 학부모 편에서 충분히 이해하고 안심시키곤 했다. 그래서 학부모 사이에서 평판도 좋았고 유치원에서도 꽤나 믿음직스러운 교사였다.

그런 희원이 형님 자리에 올 사람과의 인사를 앞두고는 괜히 긴장되어 이렇게 떨고 있다는 게 자기가 생각해도 참 이상했다.

―만약에 진짜 사납거나 좀 성격이 그래서 형님한테 뭐라고 하거나 그러면 막내인 제가 형님 편 팍팍 들어 줄게요. 동서들 무서운 게 뭔지 보여 줄게요!

루세의 결의에 찬 대답에 희원이 웃고 말았다. 희원은 그 뒤에도 뭐를 입고 가야 할지, 가서 얼마나 있어야 할지, 뭐를 사 가야 할지 등을 루세와 의논했다.

* * *

“랑일이, 무슨 옷 입고 갈까?”

희원은 드레스 룸에서 랑일이 옷을 이것도 꺼내 보고 저것도 꺼내 봤다. 그래도 인사하는 자리인데 격식을 좀 갖춰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또 집으로 가는 거니 편하게 입혀야 하는 거 아닐까 싶어서 다른 옷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랑일이뿐만이 아니었다. 희원 역시 무엇을 입고 갈지 아까부터 고민 중이었다. 슬랙스를 꺼냈다가 정장 바지를 꺼냈다가 난리였다.

“희원 씨, 아직 멀었어요?”

기준이 드레스 룸을 들여다봤다. 이미 기준은 다 준비한 상태였다.

“어? 기준 씨, 지금 몇 시죠?”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가는 길이 좀 막히는 구간이라서 조금 서둘러야 약속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미안요. 얼른 준비할게요.”

귤희를 품에 안고 있던 기준이 방의 풍경을 보고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요?”

“랑일이랑 희원 씨랑 무슨 패션쇼 하러 가요?”

“네?”

기준이 턱짓으로 여기저기 널려 있는 옷들을 가리켰다. 그에 희원은 화들짝 놀랐다가 이내 민망한 듯 웃어 버렸다.

“그렇게 긴장할 거 없다니까요. 누가 보면 희원 씨 무슨 선보러 가는 줄 알겠네.”

“에엑!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렇잖아요. 뭘 그렇게 잘 보이려고 해요. 나한테만 잘 보이면 됐지.”

그러고 보니 쓰리피스 정장을 입을 것만 같던 기준이 오히려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회색 바지에 네이비 니트를 입은 기준의 모습을 보고 희원이 눈썹을 갉작였다.

옆에서 랑일이가 옷을 고르다가 제 아빠의 ‘나한테만 잘 보이면 됐지.’라는 말에 아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제 아빠를 바라봤다. 마치 ‘아빠는 왜 아무 데서나 그렇게 질투를 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

희원은 뒤늦게 뭘 그렇게 잘 보이려고 하느냐는 말에 변명을 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기준이 희원의 말을 가로채며 대답했다.

“알아요. 나밖에 없다는 거.”

기준의 말에 랑일이가 슬그머니 드레스 룸을 빠져나갔다. 손에 이미 고른 옷이 들려 있었다.

“마미, 나 이거 입을래요!”

랑일이는 눈치도 좋게 이준의 연인이 사 준 옷을 들고 있었다. 청바지에 안에 기모가 들어 있는 체크무늬 셔츠였다. 그리고 코트는 깃 부분에 보들보들한 털이 들어가 있어서 랑일이가 일명 ‘보들이’라고 부르며 좋아하는 거였다.

“그래!”

희원이 얼른 랑일이 뒤를 쪼르르 따라붙었다. 기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희원의 뒤를 바싹 붙었다.

“뭐예요, 왜 대답을 안 해요?”

“응? 뭐가요?”

이제 랑일이의 옷을 입히는 데 집중하기 시작한 희원이 기준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박였다. 그 순간 기준은 희원이 토끼 같다고 생각했다. 하얀 토끼. 품에 안고는 마구 비벼 주고 싶은 그런 사랑스러운 토끼 말이다.

“내가 희원 씨한테 나밖에 없지 않느냐고 물었잖아요.”

“아……!”

“마미, 여기 단추도 잠가 주세요!”

희원이 뭔가 대답하려고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랑일이가 자기 소매를 내밀었다. 희원이 얼른 단추를 잠가 주며 눈을 맞추고 빙그레 웃자 랑일이도 따라서 배시시 웃었다.

“우리 랑일이 예뻐라! 옷 너무 멋지다!”

희원이 랑일이를 품에 안고는 이리저리 흔들었다. 기준이 뚱한 표정으로 둘을 내려다봤다.

“나 안 가.”

“네?”

랑일이의 셔츠 단추를 마저 잠가 주던 희원의 손이 뚝 멈췄다.

“나 기분 나빠서 안 갈래요. 희원 씨랑 랑일이랑 둘이 다녀와요.”

그러고는 기준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품에 있던 귤희가 뭔가 불편한지 칭얼거렸다. 기준은 뚱한 표정을 지은 채로 그래도 귤희를 능숙하게 얼렀다. 그에 희원이 랑일이 단추를 다 정리해 준 뒤 말했다.

“우리 기준 씨, 몇 살?”

“진짜 기분 나빠서 안 갈래요.”

기준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자 희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꼭 그걸 말로 해야 해요?”

“네, 말로 해야 해요.”

“나는 기준 씨랑 랑일이, 귤희만 있으면 돼요.”

“치, 됐어요.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지 뭐.”

기준이 귤희 웃옷을 입히며 투덜거렸다. 희원은 기준이 저럴 때마다 그 모습마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기준도 첫인상은 너무 무서웠다. 일단 말이 그리 많지 않고 표정도 없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안 됐다. 게다가 그가 놓인 사회적 위치가 희원을 더 경직되게 만들었다.

랑일이가 미끄럼틀에서 떨어질 뻔한 걸 희원이 받았던 적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희원이 대단한 일을 한 거였다. 본능적으로 자기 몸 생각 안 하고 아이를 받은 거니 말이다. 하지만 마치 아이가 발을 헛디딘 것조차 희원은 자신의 탓인 양 미안하고 그로 인해 위축되었다.

그랬던 둘 사이가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희원은 야무지게 귤희 옷을 입히고 있는 기준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려서 웃었다. 희원은 살며시 기준 옆으로 붙어서 기준에게 속삭였다.

“그래도 나는 기준 씨가 가장 먼저예요. 제일 사랑해요.”

기준이 놀란 표정으로 희원을 쳐다봤다. 희원이 그 틈을 타서 기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거봐요, 역시 더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죠?”

이번에는 희원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 기준이 희원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요?”

“내가 더 사랑한다고요.”

기어코 자신이 더 사랑한단다. 그에 희원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뭐 어쩌겠는가. 눈앞의 이 잘난 남자가 자신을 그렇게 사랑한다는데 말이다.

“자, 우리 귤희 공주님, 다 됐다. 가자!”

기준이 혹시 바람이라도 들어갈까 귤희를 품에 안고는 그 위를 겉싸개로 폭 싸맸다. 그러고는 시동을 걸어 놓은 차 안으로 쏙 들어가서 귤희를 카 시트에 앉혔다. 어느새 기준의 차 뒷좌석은 카 시트만 두 개가 나란히 놓이게 되었다.

희원도 랑일이를 뒷좌석에 앉히고는 벨트를 매 주었다. 이제는 희원과 나란히 뒷좌석에 앉을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옆에 동생이 앉아 있어서 랑일이는 마냥 기뻤다.

“마미, 우리 가서 점심 먹고 놀다 와요?”

랑일이는 그래도 자기가 아는 사람이고 그곳에 자신이 좋아하는 고양이가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난 모양이었다.

“글쎄, 점심 먹고,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한번 봐야 할 것 같아.”

“가서 쿄우랑 놀래요.”

랑일이의 말에 기준이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물었다.

“그런데 희원 씨, 고양이 있다고 하는데 귤희는 괜찮겠죠?”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희원도 걱정하던 차였는데 미리 이준에게서 희원에게 전화가 왔었다. 고양이가 아기를 해코지하거나 그럴 거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많이 오기 때문에 한동안은 나오지도 않을 거라고. 그래도 걱정된다면 방 한 곳에만 있게끔 하면 되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고 또 안심시켰다.

희원은 이준과의 통화 내용에 대해서 말하며 이준의 배려에 고마워했다. 그리고 더불어 아이들이 편하게 놀라고 흔쾌히 집으로 초대해 준 이준의 연인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40분 정도를 갔을 때 드디어 알려 준 집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차에서 내린 희원은 심호흡을 크게 했다. 그리고 둘은 아파트가 아닌 주택으로 들어갔다.

희원은 주택이라는 것 자체에 이미 랑일이와 설이가 마음껏 놀아도 층간 소음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싶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마미의 마음에 이미 마음이 반쯤 놓인 상태였다.

동네는 빽빽한 아파트로 둘러싸인 곳이 아니고 서울 외곽의 조용한 마을이라서 그런지 꽤나 한적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기준이 주차 문제로 제 형에게 전화를 하자 이준은 재빠르게 주차장 문을 열어 주었다.

“여기에 세우면 돼? 근데 이 집은 차 없어? 안에 아무것도 없는데?”

―우리 차는 거기 담벼락에 있잖아.

그러고 보니 형의 차랑 또 한 대가 담벼락에 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손님 차 세우라고 집주인 차를 밖으로 빼놓은 상태인 것 같았다.

―주차하고 들어오면 돼. 문 열렸으니까.

“어.”

주차를 하는 내내 옆에 앉은 희원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다.

“희원 씨, 왜 이렇게 긴장해요?”

“모르겠어요. 자꾸 떨려요.”

“괜히 그런다. 걱정할 거 없어요. 다 됐다. 들어가요.”

기준이 먼저 내리고는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희원이 내려서 랑일이를 챙기고 기준은 귤희를 품에 안았다. 현관까지 금방이지만 그래도 들어가는 길에 찬 바람 쐬면 안 되니 희원은 꼼꼼하게 기준이 안고 있는 귤희에게 겉싸개를 덮어 주었다.

“랑일아, 여기 와 본 적 있어?”

“여기가 희영이 형아네예요? 저번에 간 곳은 아파트였는데.”

“그래?”

아무래도 이사를 한 겸 해서 식구들을 부른 모양이었다. 들어가려고 하는데 마침 해준네 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기준 씨, 설이네 왔어요. 같이 들어갈까요?”

“그래요.”

해준이 주차를 하는 동안 희원은 랑일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랑일이가 제 마미를 올려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마미.”

“응?”

랑일이의 부름에 희원이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 희영이 형아 좋아요.”

“응?”

“엄청 재미있어요. 그리고 착하고 예뻐요. 마미가 제일 예쁘지만요.”

자신이 뭔가 긴장하고 있는 게 랑일이한테도 보였는지 그 뜬금없는 말에 희원이 웃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마미가 제일 예쁘지만 하고 말하는 것에 랑일이의 따듯함이 담겨 있었다. 희원이 다리를 굽히고 앉아서 랑일이와 눈을 마주했다.

“우리 랑일이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착하고 다정할까?”

“응, 마미 닮았어요!”

당연하다는 듯 날아온 대답에 희원이 랑일이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형수님!”

해준이 차에서 내리며 기준보다 희원을 먼저 찾았다. 희원은 해준과 루세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러고는 설이에게도 손을 흔들어 주며 인사했다. 설이가 달려와 희원의 다리를 붙잡고 올려다봤다.

“들어가요, 희원 씨.”

식구들을 보니 굳었던 마음이 점점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계단을 올라가 문 앞에 서자마자 문이 열리며 이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주차장에서 계 모임 하는 줄 알았어. 왜 이렇게 들어오는 데 오래 걸려? 귤희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이준이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귤희를 안은 기준을 얼른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시끌벅적한 식구들 등장에 안에서 기준도 아는 그 얼굴이 나오는 게 보였다.

“안녕하세요.”

“네, 오랜만이네요.”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기준의 눈에 비친 그는 집에서 보는 거라서 그런지 간혹 회사 회의 때 봤던 느낌과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조금 더 편안하고 여유로운 느낌이었다.

식구들이 거실에 다 들어섰을 때 이준이 제 연인을 앞으로 끌어다 소개했다.

“여기는 최희영이에요. 희영아, 인사해. 여기 내 바로 밑에 동생, 이기준 알지?”

“네, 알아요.”

“형아.”

희원의 손을 잡고 있던 랑일이가 먼저 알은체를 했다.

“랑일이, 안녕.”

랑일이는 희영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 희영이 무릎을 굽히고는 팔을 벌려 주자 자연스럽게 품에 쏙 안겼다. 랑일이 말대로 한두 번 본 게 아닌 듯했다.

“그리고 여기는 랑일이랑 귤희 마미이자 기준이 배우자.”

희원은 평소에도 이준이 배려심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아주 사소한 행동이나 말에서 나타나곤 했는데, 가끔 희원은 제 짝인 기준이 그렇게 다정하고 자상한 사람임에도 이준의 어떤 행동을 보며 ‘아, 이래서 형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예를 들면 바로 지금 같은 때였다.

무심코 기준의 배우자라고만 말하거나 귤희 마미라고만 소개할 수도 있는 거였다. 그건 그럴 수도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를 랑일이 마미라고 인식한 적이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준은 희원이 기준과 결혼을 함과 동시에 머릿속에 희원은 랑일이 마미라는 것을 입력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써 주는 게 희원은 고마웠다.

“안녕하세요, 최희영입니다.”

“안녕하세요, 이희원입니다.”

희원이 인사하자 앞에 선 남자가 생긋 웃었다. 그야말로 ‘생긋’이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게끔 예쁘게 웃었다. 살짝 마른 체형에 희원보다는 조금 아주 조금 큰 키였다. 하얀 얼굴에 오른쪽 눈 밑에 자리한 점이 매력적이었다. 이렇게 하얗고 예쁘게도 생길 수 있구나 하고 희원이 생각했다.

희원이 순하고 귀엽게 생긴 인상이라면, 앞에 선 희영은 예쁘면서도 살짝 사납게 생긴 인상이었다. 아마도 살짝 올라간 눈꼬리 때문일 거였다. 희원은 살면서 강아지 같은 인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에 반해 희영은 고양이 같은 인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 같았다.

“희영아, 여긴 막냇동생 이해준. 그리고 그 옆에는 해준이 배우자이자 설이 마미인 루세 씨.”

해준네 부부랑도 인사를 마쳤다.

“귤희는 저쪽 방에 누일까요? 아직 자고 있죠?”

희영이 어느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기준에게서 귤희를 받아 든 희원이 희영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아마 서재인 것 같은 방에는 귤희를 위해 마련한 건지 작고 귀여운 이불이 깔려 있었다.

“혹시 몰라서 아기 전용 세제로 세탁해 둔 거예요. 염려 안 하셔도 돼요. 고양이가 건드리지 못하게 했어요.”

희원이 그 말에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저 유치원 교사라서 그렇게 유난 떨면서 아이 키우거나 그러지 않아요.”

희원은 말을 하고도 아차 싶었다. 뭔가 말이 오해할 만한 발언인 것 같았다. 희영 딴에는 분명 배려한답시고 한 행동이었을 텐데 그걸 마치 자신과 기준이 유난을 떠는 것처럼 보였냐는 듯이 말한 거다. 전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말이다.

“아니 그러니까 제 뜻은…….”

“무슨 말씀 하시려고 하는지 알아요. 여기 귤희 눕힐까요? 아직 곤히 자는 것 같은데 조금 더 자게 하는 게 좋겠죠?”

희영이 웃으며 이불을 걷고 요를 가리켰다. 희원이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고는 귤희를 눕혔다. 귤희는 사람들이 많아서 시끄러운 와중에도 잘만 잤다.

“와, 진짜 귀엽고 예쁘다. 희원 씨, 아, 제가 희원 씨라고 불러도 되죠?”

“네, 그러셔도 돼요.”

희원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귤희가 희원 씨 많이 닮았어요. 우리 이사님이 그렇다고 말하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진짜 많이 닮았어요. 정말 귀엽다.”

희영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희원은 마음이 조금씩 놓여서 자기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그에 희영의 눈이 커다래졌다.

“와, 희원 씨 웃으니까 진짜 귀엽다.”

“네?”

“아, 초면에 귀엽다는 말 실례죠? 미안해요.”

“아뇨,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희원이 쑥스러워하면서 고개를 숙이자 희영이 또 웃었다. 그때였다.

“그만 웃고 나와. 사람들 기다려. 귤희 눕히러 들어가서 둘이 뭐 하냐고 궁금해해.”

이준이 문가에 서서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희원이 화들짝 놀라서 얼굴이 붉어지자 희영이 코를 찡긋하더니 말했다.

“둘이 얘기 좀 하느라. 미안요. 나갈게요. 희원 씨, 나가서 식사해요.”

희영이 먼저 일어나서 희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희원이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싱긋 웃으며 손을 조금 더 뻗었다. 넘어진 것도 아니고 일어나기 힘든 상황도 아닌데 희원은 뭐에 홀린 듯 그의 손을 잡았다.

희영이 희원을 잡아 일으키고는 어깨를 감싸 밖으로 향했다. 희원은 그가 굉장히 스킨십에 익숙한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귤희 눕히면서 얘기하다가 보니 재미있어서요. 루세 씨, 기다렸죠. 미안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설이랑 랑일이 장난감 꺼내 주고 있었어요.”

굉장히 까칠하고 새침할 거라 생각했는데 형님이 될 이 사람은 금세 마음을 놓고 친해질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희영아, 앉아. 밥 다 차려 놨어.”

“응, 이사님. 내가 뭐 할 거 없어?”

“없으니까 앉아서 먹기만 하면 돼.”

이준이 물컵을 랑일이에게 내밀고 돌아서자 희영이 그 뒤로 가서 살포시 이준을 안았다. 그러고는 등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나 술 한잔하면 안 돼? 희원 씨랑 루세 씨랑. 응? 희원 씨랑 루세 씨, 맥주 한잔 정도는 괜찮죠?”

희원이 루세를 바라보자 루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도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기준을 바라봤다.

“마셔요. 애들은 나랑 해준이가 볼게요.”

“네, 형수님 마시세요. 제가 애들 볼게요. 이왕 친해지러 왔는데 온 김에 재미있게 놀고 친해지면 좋죠.”

기준은 희원이 뭐를 염려하고 바라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에 희원이 웃으며 기준과 해준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사이 이준은 제 연인에게 단단히 다짐을 받고 있었다.

“많이 마시면 안 돼. 조금만.”

“응. 조금만 마실게.”

희원은 지금까지 봐 왔던 이준의 모습이 아니라서 조금 놀랐다. 기준이 희원을 걱정하는 것과는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걱정의 다른 형태 같아서 희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준에게서 벗어난 희영은 어느새 루세와 희원의 손을 잡고 끌어다가 제 옆과 앞에 앉혔다. 그러고는 다시 배시시 웃었다.

“사실 저는 집안일 잘 못해서 이거 음식 다 이사님이 했어요. 그래도 옆에서 열심히 거들었어요. 즐겁게 드셨으면 좋겠어요.”

희영의 말에 희원도 루세도 잘 먹겠다며 인사했다. 희영은 어느새 희원과 루세에게 술을 따라 주고 가볍게 짠 하고 잔을 부딪쳤다. 그러고는 또 사르르 웃었다. 이 집에 들어와서도 조금은 긴장하고 있던 희원은 어느새 마음이 스르르 풀려 버려서 같이 마음을 놓고 웃고 있었다.

희원은 앞에 앉은 희영이 정말 신기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보지 못했던 그런 종류였다.

희영은 옆에 앉은 이준에게서 몸을 반 틀어서 루세와 희원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이준의 팔에는 자기 등을 기대앉았다. 이준은 그런 채로 밥을 먹으면서도 전혀 불편하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희영아, 잠깐만.”

“응?”

“음식 좀 더 갖고 올게.”

“내가 갖고 올게, 이사님. 아직 반도 안 먹었잖아.”

희영이 몸을 일으켜서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준이 피식 웃었다.

“근데 원래 양이 적은 거예요?”

희원이 희영의 밥공기를 보고 이준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애초에 반밖에 차 있지 않았는데, 별로 먹는 것에 관심이 없는지 그 밥도 반이나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러게요. 원래 잘 안 먹어요. 입도 짧고요. 애 키우는 심정이 어떤지 알 것 같아요.”

이준의 대답에 루세와 희원이 웃었다. 특히 루세는 설이가 입이 짧아서 어쩐지 이준에게 공감이 갔다.

희원은 이제 슬슬 아이들 밥도 먹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희영이 고기가 잔뜩 담긴 그릇을 들고 랑일이와 루세를 뒤에 붙이고 나타났다.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 같은 모습이었다.

“랑일이랑 설이도 맘마 먹을까?”

“네!”

“잠시만. 밥 줄게. 랑일이랑 설이는 어디 앉을까? 아빠들 옆에 앉을까?”

희영이 아이들에게 눈웃음 짓고는 기준과 해준의 옆을 가리켰다. 아이들이 희영의 말대로 기준과 해준의 옆에 앉았다. 희영이 짧은 순간 희원과 루세와 눈을 맞추고 웃었다. 희원은 그 순간 희영이 일부러 아이들을 아빠들 옆으로 보낸 걸 알았다.

아이들이 컸다고 해도 밥을 먹는 동안 손이 가기 마련이었다. 그걸 알고는 일부러 아빠들 옆에 앉힌 거였다. 밥 먹을 동안이라도 마미들 편하게 먹으라고 하는 그의 배려임을 희원은 알고 있었다.

“맥주 한 잔 더 줄까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번에는 자기가 따르겠다며 병을 집어 들었다.

잔을 든 길고 하얀 손가락에는 양쪽 중지에 다 반지가 하나씩 자리하고 있었다. 희원은 자신의 약지에 있는 결혼반지를 무심코 내려다봤다.

셋은 잔을 부딪치고는 웃었다. 그때 귤희가 깼는지 저쪽 방에서 칭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희원이 반사적으로 일어나려고 하는데 기준이 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원 씨, 밥 먹어요. 나 다 먹었어요.”

기준이 서둘러 귤희가 있는 방으로 갔고 옆에 사라진 아빠 자리를 물끄러미 보던 랑일이가 희원을 찾으려고 했다. 그때 희영이 먼저 랑일이를 불렀다.

“랑일아, 이리 와. 형아랑 밥 먹자.”

랑일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희영에게 와서 자연스럽게 희영의 다리 사이에 자리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모양이었다.

“희원 씨, 밥 편하게 먹어요. 이런 데 나와서라도 편하게 먹어야죠. 평소에 집에서는 정신없잖아요. 랑일아, 잡채 줄까? 이거 큰아빠가 한 건데 맛있어.”

희원은 까칠하게 생긴 희영의 의외의 모습에 자기가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는 게 미안해졌다. 그나저나 희원은 조금 전 이준이 한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희영은 이제 랑일이 밥 먹이는 데에 재미를 붙였는지 자기 밥그릇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저기 형님.”

희원은 자기가 희영을 불러 놓고도 제대로 부른 게 맞나 싶어서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희영이 화사하게 웃으며 눈을 마주했다.

“저요?”

“네.”

“와, 희원 씨가 형이라고 불러 주니까 기분 되게 좋다. 나 집안에서 막내라서 동생 있었으면 싶었거든요.”

희영이 정말 기쁜 듯 웃었다. 그에 희원은 제가 형이라고 부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근데 왜요?”

“랑일이만 먹이지 말고 형님도 좀 드세요. 아까부터 밥이 그대로예요.”

“들었지? 술만 마시지 말고 밥을 좀 먹어. 아니면 다른 걸 먹든가.”

옆에서 이준이 거들었다.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희영의 밥그릇은 가져가서 그 밥은 자기 밥그릇에 덜고 그 대신 잡채가 수북이 담긴 새 접시를 희영의 앞에 놓았다.

애를 키우는 느낌을 알겠다는 이준의 말에 희원은 다시 한번 동감하며 자기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엄마들이 아이 밥 먹이다가 먹기 싫어하거나 남기면 그 남긴 밥은 자기가 먹고 아이가 좋아하는 것으로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고 노력하는데, 지금 이준의 모습이 딱 그러했기 때문이다.

“형아, 또 혼나겠다.”

희영의 다리 사이에 앉아 있던 랑일이가 고개만 위로 들어서 말을 툭 뱉었다. 그에 희원과 루세의 시선이 랑일이에게 향했다.

“랑일아, 그만. 형아 창피한데.”

“그러니까 밥 잘 먹어야죠. 마미, 형아 만날 큰아빠한테 혼나요. 밥 안 먹는다고.”

“랑일아, 내가 언제!”

“저번에도 밥그릇 들고 큰아빠가 잔소리했어요.”

랑일이 말에 희영이 랑일이를 꼭 끌어안고는 귓가에 “그만해. 제발 그만해.” 하고 속삭였다. 앞에서 희원과 루세가 그만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랑일이는 다 폭로한 게 미안한지 나중에는 희영의 뺨을 쓰다듬고는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것 봐. 애 앞에서 잔소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화살이 이준에게 향하자 이준이 희영의 머리를 툭 쳤다.

“너님이 잘하시면 잔소리 안 하겠지. 얼른 먹어. 그거 안 먹으면 맥주 못 마시게 할 테니까 알아서 해.”

이준이 으름장을 놓자 희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희원은 주변에 이런 인물이 없어서 새롭기도 하고 이제는 희영이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도도하고 차가워 보였는데 알고 보니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형, 제가 랑일이 먹일까요? 랑일이가 거기 앉아 있어서 잘 못 먹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러고도 잘 먹을 수 있어요. 랑일이 너, 그러기 있어?”

“형아가 약속 안 지켰잖아요. 서로 밥 잘 먹기로 약속해 놓고는 형아만 안 먹고 있잖아요.”

“우리 랑일이 잘한다!”

이준이 랑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칭찬했다. 그에 희영이 뒤에서 랑일이를 한 번 더 끌어안고는 이리저리 옆으로 흔들흔들 몸을 흔들면서 그러기 있냐며, 너무하다고 말했지만 기준을 닮은 구석이 있는 랑일이는 이런 면에서 단호하고 매정했다.

“희원 씨. 귤희 의자만 좀 놓아 줘요.”

방으로 들어갔던 기준이 귤희를 안고 나왔다. 희원이 일어나서 귤희 바운서를 놔 주고 귤희를 받아서 잘 앉혔다. 귤희가 바운서에 연결된 모빌을 손으로 잡으려고 했다. 그사이 기준은 귤희 분유를 타려고 주방으로 향했다.

“희원 씨. 이기준 이사님은 집에서 자상한 것 같아요. 랑일이한테 듣는 아빠 얘기도 그렇고 지금 하는 행동도 그렇고요.”

희영의 말에 희원이 미소 지었다. 희원은 기준이 밖에서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어떤지 잘 알고 있다. 그걸 겪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인이 되기 전에 희원이 겪었던 기준의 모습은 지금 희원에게 보이는 모습과는 딴판이기 때문이다.

“아, 형님도 본사 들어가곤 한다 했죠?”

“네, 맞아요. 이사님 회의 있을 때 가끔 같이 갔어요. 갈 때마다 이기준 이사님 뵙곤 하는데 오늘 모습 보니까 자상하고 다정해 보여서요. 우리 이사님하고는 또 다른 느낌이에요. 형제라고 다 같을 수는 없겠지만요.”

희영이 말하는 것이 뭔지 희원은 이해했다. 삼 형제 중 해준은 막내라는 티가 확실히 났다. 그래서 위의 두 형제와는 확연히 분위기가 달랐다. 이준과 기준은 둘 다 가족들에게는 잘하지만 그 다정함의 깊이는 좀 다른 듯했다. 희영과 단둘이 있을 때의 이준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 잔 비었다. 희원 씨랑 루세 씨는 술 얼마나 마셔요? 오늘 이렇게 좀 마셔도 괜찮아요? 나중에 내가 술 먹였다고 미움받는 거 아닌가?”

희영이 맥주를 들고 잔에 따르면서 묻자 이번에는 루세가 고개를 저었다.

“둘 다 어느 정도는 마셔요. 걱정하지 마세요. 근데 내일 출근 아니에요? 괜찮으세요?”

그에 희영이 뭔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저 내일 연차. 이사님이 빼 줬어요.”

“사내 연애가 이래서 좋구나.”

희원은 뭔가 부러웠다. 희원도 기준과 멀리 떨어져 있는 건 아니지만 놀 유치원은 계열사일 뿐 같은 회사는 아니다.

“좋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그래요. 연애하는데 티도 못 내고, 일하다가 혼나면 또 그게 그렇게 기분 상하고 그렇거든요.”

“내가 너를 뭘 얼마나 혼냈다고 이래.”

옆에서 이준이 희영이 잡채를 다 먹은 그릇과 이번에는 전이 놓인 접시를 바꿔 놓은 뒤 타박했지만 희영은 제 할 말만 했다.

“희원 씨랑 루세 씨는 별로 언성 높일 일도 없죠? 우리 이사님은 은근히 화 잘 낸다니까요.”

희영은 코를 찡긋거리며 맥주를 마셨다. 그러고는 이준이 준 전을 자기가 먹는 대신 희원과 루세의 접시에 올려 주었다. 덤으로 랑일이에게도 주자 랑일이가 희영을 올려다보더니 다시 희영의 접시에 놓았다.

“형아, 밥 안 먹으면 큰아빠한테 혼나요.”

“나 다 먹었어.”

이준이 옆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봤다. 마치 그 눈빛이 네가 이러니까 자꾸 혼나지 하는 눈빛이라서 희원이 웃었다. 루세도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았는지 따라 웃었다. 저쪽에서는 기준이 귤희 분유를 먹이고 해준이 설이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이쪽만 즐거워서 난리가 났다.

맥주가 들어갈수록 희영은 점점 더 이준에게 등을 기대고 반쯤 누운 채였고 희원과 루세도 점점 긴장이 풀려서 허리를 꺾으며 웃고 종잘거렸다.

“그래서 그때 나보고 왜 말을 안 하냐고 그러는 거예요. 근데 어떻게 말을 해요? 안 그래요? 하루 종일 일하고 들어온 사람 붙들고는 이래서 힘들다, 저래서 힘들다 어떻게 말해요?”

점점 서로의 배우자 험담으로 나아가더니 이제는 희원이 지난번에 기준과 다투었던 일을 꺼냈다. 희영이 희원에게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와, 희원 씨 진짜 착하다. 임신하면 그냥 그 자체로 힘들다는데 어떻게 배려할 생각을 하지? 만날 우리 이사님이 희원 씨 너무 착하다고 이기준 이사님은 복 받은 거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데 다 이유가 있었구나.”

“아니에요.”

희원이 발그레해진 볼을 하고는 손사래를 쳤다.

“근데 희원 씨 진짜 귀엽다. 루세 씨 귀여움하고는 또 달라.”

“형님, 나 귀엽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요.”

이번에는 루세가 손사래를 쳤다.

“아냐, 진짜 둘 다 너무 귀여워. 나 정말 딱 두 사람 같은 동생 있었으면 싶었거든요. 이이준하고 사귀기 진짜 잘한 것 같아.”

옆에서 듣고 있던 이준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나도 나도! 나도 형 같은 형 있었으면 싶었는데 이해준하고 결혼한 게 형 만나려고 그랬나 봐.”

얼씨구! 이번에는 저쪽에 있던 해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봤다. 평소 누군가에게 형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 루세가 저렇게 풀어져서 헤실헤실 웃는 것부터가 어이없는데 아주 난리가 났다.

“근데 우리 작은형님은 벌써 친형이 있잖아. 뭔가 아쉽겠다.”

루세의 말에 희원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더니 희영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혀엉. 나 형 진짜 마음에 들어요. 우리 자주자주 만나요.”

그 순간 기준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기준에게는 곧 죽어도 ‘기준 씨’인 희원이 만난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은 희영을 붙잡고는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기준이 눈빛으로 제 형에게 이게 뭐냐는 시늉을 했지만 이미 제 형은 연인의 술버릇에 골치가 아픈 듯, 도를 닦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기준은 난장판이 된 거실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그러고는 눈으로 제 형을 열심히 욕했다. 그건 해준도 마찬가지였다.

“형, 어떻게 할 건데?”

“뭘 어떻게 해? 각자 알아서 하자고.”

“와, 자기는 여기가 집이라고 저렇게 쉽게 말하는 거 봐.”

이준의 대답에 해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모두 잠들었다. 실컷 먹고 뛰고 뒹굴던 아이들은 따듯한 집에서 놀다가 그대로 엎드려 잠이 들었고 그에 진작 이준이 방에다 눕힌 상태였다. 그러고 나서도 술 타임은 계속되었다.

누가 그랬던가. 낮술은 에미 애비도 못 알아본다고 말이다.

셋은 신나게 마시더니 결국 취했다. 이준이 가장 우려했던 일이고, 기준과 해준은 이 집에 와서까지도,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전혀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나 우리 희영 형, 정말 좋아.”

“나도 나도! 루세 씨 나도!”

루세의 말에 질세라 희원이 동의했다. 셋은 언제 봤다고 서로 끌어안고 어깨를 다독거리며 헤헤거렸다. 이게 다 저 원흉 때문이라고 기준은 생각했다.

“아, 진짜 미치겠네.”

기준이 이마를 짚었다.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셋이 여기서 눌러살기라도 할 기세였는데 어떻게 떼어서 데리고 갈지 고민이었다. 물론 자기 배우자는 잘 말하면 헤실헤실 웃으며 말을 잘 듣겠지만 그 전에 기준은 이제 챙길 사람이 세 명으로 늘어난 셈이다.

“나도 우리 희원이랑 루세랑 정말 좋아.”

이준은 포기한 듯했고,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눈빛에 또 올 게 왔구나 싶은 체념이 서려 있었다.

“최희영. 그만 정리하자.”

“왜에! 우리 이제 시작인데! 그치이?”

“응응!”

저러다 고개 부러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셋이 말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또 헤벌쭉 웃었다. 해준이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손목으로 꾹꾹 눌렀다.

“희영아, 다음에 또 마시면 되잖아. 이제 그만 좀 놔줘.”

무슨 안전 이별도 아니고……. 이준은 이 와중에도 웃으면서 제 연인을 구슬렸다. 기준은 제 형이 죽고 나면 몸에서 사리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준의 말에 희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고민하는 사이에 나라 잃은 백성처럼 슬픈 표정을 지은 이들은 다름 아닌 루세와 희원이었다.

늘 의젓했던 연인에게서 거의 처음 보는 어리광 가득한 표정이 나왔다. 그 표정을 사진에 담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지만 기준은 자기가 여기서 핸드폰을 집어 들면 그야말로 미친놈 취급당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저 귀여운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싶은데 그건 집에서 추후에 보기로 하고 일단은 데리고 가는 게 우선이었다.

“희원 씨, 우리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에는 우리 집으로 부를까요?”

“진짜요?”

“그럼요, 희원 씨가 원한다면 뭔들 못 하겠어요.”

기준이 그려 만든 미소를 지으며 제 배우자를 토닥거렸다. 희원이 두 손을 들고는 기준의 목에 팔을 두르며 품에 안겼다.

“우리 기준 씨는 정말 착해.”

그 말에 이준과 해준이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표정을 해 보였지만 그걸 알아차릴 사람은 기준밖에 없었다.

“뭐! 왜!”

기준이 입 모양으로 말하며 제 형과 동생을 향해서 사납게 눈을 치떴다. 어차피 희원은 형제들과 등을 지고 있어서 기준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는지 몰랐다.

“희원 씨, 우리 갈까요? 주차장까지 안아 줄까요?”

술이 오르는지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 희원 씨 먼저 차에 태울 테니까 짐 좀 챙겨 줘.”

“그래, 내가 판 무덤이니 내가 수습해야지.”

희영은 이준에게 거의 업히다시피 해서 귓가에 뭐라고 지껄이는데 거의 반쯤은 음담패설인 것 같아서 기준은 얼른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이준은 짐짝을 등에 매단 채로 일어나서 기준네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해준이 제 작은형에게 안긴 형수의 등 위로 옷을 덮어 주었다.

“희영 형, 안녕!”

기준에게 안겨서도 손을 흔드는 제 배우자에 기준은 어쩜 이렇게 예의가 바를까 하는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이준의 등에 매달린 짐짝은 거의 제 형의 목을 조르다시피 하며 그 와중에도 손을 흔들며 희원에게 인사했다.

저런 게 큰며느리로 들어온다는 걸 알면 박 여사가 쓰러지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 뭐 그건 뒷일이고, 기준은 일단 희원이 이렇게 즐겁다면 된 거다 싶었다.

“희원 씨, 일단 여기 좀 앉아 있어요. 랑일이랑 귤희 데리고 올게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볼이 발그레한 게 귀여웠다.

“헤에, 가만있을게요.”

“그래요, 착하다.”

기준은 희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곧 희원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강아지 귀가 축 처진 듯한 모습이어서 기준은 어째 웃음이 났다.

“못 도와줘서 어쩌죠? 도와주고 싶은데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

기준은 이렇게 취한 희원의 모습은 처음 보는 거라서 그저 귀엽기만 했다. 이마에 입을 맞춰 주고는 단단히 일렀다.

“괜찮아요. 희원 씨가 재밌었으면 됐어요. 랑일이랑 귤희 얼른 데리고 나올게요. 추우니까 여기 있어야 해. 알았죠?”

“응!”

말 잘 듣는 아이처럼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 눈치 빠른 해준이 랑일이부터 안고는 주차장으로 나오고 있었다. 해준은 기준네부터 보내고 난 다음에 갈 생각인 듯했다.

“형, 뒷문 열어.”

기준은 뒷좌석에 랑일이를 태우고 귤희를 데리러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제 형이 등에 짊어지고 있던 짐짝을 구슬렸는지 떼어 내고는 귤희를 곱게 안고 나타났다. 해준이 짐을 트렁크에 싣는 동안 이준은 귤희를 조심히 앉혔다.

“수고했어. 간다.”

“조심히 가고 오늘 와 줘서 고맙다.”

“다음에는 우리 집에서 봐. 세 명 챙기는 거 버겁다.”

기준이 차에 타면서 말했다.

해준과 이준은 그 순간 그래도 모이지 말자는 소리는 안 하네 싶어서 이기준이 사랑하더니 변하긴 변했구나 싶었다.

예전의 이기준 같으면 자기 집에 형제든 부모든 발 들이는 거 싫어서 오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을 텐데, 제 배우자가 같이 모였으면 좋겠다고 하며 즐거워하는 걸 보니 자기네 집으로 오라는 게 이준과 해준의 눈에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기준은 잠든 세 명을 태우고 조심히 운전했다. 그나저나 집에 도착해서는 세 명을 어떻게 옮길지 고민이었다.

* * *

“기준 씨.”

거의 집에 도착했을 때 희원은 술에서 조금 깼는지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원래도 희원네 집안 식구들이 술을 잘 마시는 편이라서 그런지 희원도 술에 취한 게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술 좀 깨요?”

“어, 어! 차구나. 아…….”

희원은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지 바깥 풍경을 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뭘 미안해. 나도 희원 씨 집에 가서 취하도록 마시고 그랬는데요. 술 깨는 약 샀으니까 지금 좀 먹어요.”

운전석과 조수석 가운데 위치한 컵 홀더에 언제 샀는지 술 깨는 음료와 약이 같이 있었다. 희원은 기준의 말대로 그걸 먹은 뒤 다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미안해요. 혼자 애기들 보느라 힘들었죠.”

기준이 고개를 저으며 다정하게 웃었다.

“랑일이는 알아서 놀았고, 귤희는 내내 잤잖아요. 희원 씨도 다 알면서 그런다. 내가 손 갈 게 뭐 있었다고요.”

말 그대로였다. 랑일이는 설이와 잘 놀았고, 희영에게 익숙해서인지 집 안을 돌아다니며 편안하게 즐기다가 잠들었다. 귤희도 분유 먹을 때 한 번 깨고는 실컷 놀다가 다시 잠들어서 지금까지 순하게 자는 중이었다.

“그래도요. 나 혼자서만 신나게 논 것 같아서…….”

“그렇게 미안하면 잠들지 말고 내 옆에서 말동무나 좀 해 줘요. 집에 거의 도착하긴 했지만 그래도요. 오는 내내 심심하긴 했어.”

기준이 희원의 왼손을 끌어다 쥐자 희원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민망하고 그런 모양이었지만 부부 사이에 그럴 것도 없었다.

“희원 씨. 오늘 즐거웠어요?”

기준의 물음에 희원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은 정말 오랜만에 그렇게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고 웃어 본 것 같았다.

루세랑은 원래 마음이 잘 맞았다. 말도 잘 통하고 같은 나이라서 느끼는 공감대도 있었다. 같이 육아 이야기와 집안 이야기를 하다 보면 훌쩍 시간이 지나곤 했다.

그런데 희영과도 이렇게 잘 맞을 줄은 몰랐다.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희영은 하는 행동이 정말 귀엽고 의외인 구석이 많았다.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부분이 있었고 무엇보다 시원시원했다.

희영과 루세랑 함께 웃고 떠들다 보니 벌써 밖은 깜깜한 한밤중이었고, 어떻게 이렇게까지 놀 수 있었을까 희원도 신기하긴 했다.

“희원 씨, 솔직히 나 오늘 좀 반성했어요.”

“네?”

기준의 말에 희영과 루세를 떠올리던 희원의 눈이 놀라서 댕그래졌다. 갑자기 기준이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다.

기준은 즐거워하는 희원을 보며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가끔 루세가 집에 놀러 와서 희원의 말동무를 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걸 제외하면 집에서 말 안 통하는 귤희와 단둘이 있는 게 얼마나 심심할까?

아무리 집안일에 이것저것 챙기느라 바쁘다고 해도 혼자 집에 오도카니 들어앉아 있는 건 그 전까지 매일 활동적으로 일하던 희원에게는 힘든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런 것까지 기준은 생각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퇴근하고 육아를 같이하면 된다는 생각만 했다.

“희원 씨가 혼자 귤희 보면서 집에만 있는 거 지루하거나 심심하지 않아요? 귤희 볼 사람 구해 줄까요? 좀 나가서 이것저것 하다 보면 괜찮지 않을까요?”

집 앞에 다 도착해서 내리기 전에 기준이 말을 꺼냈다. 하지만 희원은 생각도 안 해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나는 평생 아기는 못 낳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귤희 낳고 지금이 너무 꿈만 같고 행복해요.”

“오늘 너무 즐거워하기에 집에만 있어서 답답하지 않을까 싶…….”

“그럼 이렇게 해 줘요. 음, 자주는 아니고, 가끔, 아주 가끔만 나랑 희영이 형이랑 루세 씨랑 이렇게 만날 때, 그때만 랑일이랑 귤희 봐줘요.”

기준은 희원이 정말 착하고 순하다고 생각했다. 그에 희원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당연한 거잖아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배시시 웃었다. 아직 술기운이 살짝 남아 있는 것인지 볼이 발그레하니 귀여웠다. 그러다 문득 기준은 뭔가가 떠올랐다.

“아, 나 희원 씨한테 할 말 있어요.”

갑자기 무게를 잡는 기준에 희원이 눈을 깜박였다. 뭔지 전혀 예상이 안 되는 눈빛이었다. 기준이 희원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는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최 팀장보다 더 나이 많고 희원 씨보다도 많은데 왜 나한테는 형이라고 안 불러 줘요?”

“네?”

“들었잖아요. 형. 형이라고 한 번만 불러 봐요. 그럼 다 들어줄게.”

희원이 침을 꼴깍 삼키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뒤로 손을 뻗어서 차 손잡이를 붙잡았다.

기준이 희원을 보며 입꼬리를 올려서 웃었다. 희원이 손잡이 문을 열려고 하는 동시에 기준이 희원을 확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기, 기준 씨?”

“어딜 도망가려고 그래요.”

“도망이라뇨. 집에 도착했으니까 들어가 보려고…….”

“그래요?”

기준이 희원을 살짝 떼어 놓고는 눈을 마주했다. 항상 마주한 눈인데 왠지 능글맞아 보였다. 희원은 애써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단순히 집에 들어가 보려고…….”

“그래요. 그럼. 일단 들어가서 좀 보자고요.”

희원은 ‘뭐를요?’ 하고 물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희원도 잘 알고 있다. 평소 이성적이고 금욕적이게 생긴 기준이 그 겉모습을 해제했을 때 얼마나 능글맞고 야해지는지 말이다.

희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차에서 나와 트렁크에서 짐을 꺼냈다. 그러는 동안 기준이 랑일이를 먼저 안아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다음에는 귤희를 안아서 데리고 들어갔고 그 뒤를 희원이 짐을 들고 쫓았다.

“희원 씨, 먼저 씻어요. 귤희가 깨서 귤희 보고 있을게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은 이제 어느 정도 술이 깬 상태였다. 아까 주고받은 연락처로 희영에게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루세에게도 잘 쉬라는 연락을 했다. 그러고 나서 욕실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욕조에 앉아 있다가는 아직 옅게 남은 술기운에 잠이 들 것만 같아서 얼른 씻고 나가기로 했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희원은 재빠르게 씻었다. 그러고는 샤워 가운을 걸치고 욕실에서 나갔다.

희원이 거실로 나왔는데도 기준은 아직 귤희 방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희원은 귤희 방으로 향했다. 귤희가 기준의 어깨에 턱을 괴고는 희원과 마주치자 신이 나서 발을 굴렀다.

“공주님.”

기준이 갑자기 움직이는 귤희 때문에 뒤를 돌아보니 여지없이 희원이 서서 빙그레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언제 봐도 예쁜 내 연인. 기준이 다가와서 희원의 뺨에 입을 맞췄다.

“머리 말려야죠.”

“응, 귤희는 분유 먹었어요?”

“아직 배 안 고픈가 봐요. 아무래도 조금 놀다가 잘 것 같은데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뭔가를 할 게 없나 두리번거리는데 기준이 말했다.

“감기 걸려요. 얼른 머리 말려요. 귤희는 내가 보다가 분유 먹이고 재울 테니까요.”

희원은 아직 술기운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상태라 기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조금 미안해졌다. 내일 출근하는 사람에게 밤늦게까지 아이를 보라고 하게 된 것이 말이다. 희원은 미안한 마음에 발꿈치를 들어서 기준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기준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희원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기준은 희원의 하얀 얼굴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흘러내린 머리칼을 이마 뒤로 넘겨 주었다.

“으응.”

잠결에 희원이 뒤척였다. 평소 같으면 깨우지 않으려고 금세 손을 거두었겠지만 조금 짓궂어진 기준은 희원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희원 씨.”

“으응.”

“희원 씨, 그냥 잘 거예요?”

말랑말랑한 볼을 손가락으로 살살 콕콕 찌르면서 희원의 귓가에 계속해서 속삭였다.

“희원 씨, 아까도 잤잖아요. 응? 나랑 좀 놀아 줘요.”

“으응, 졸려요, 기준 씨.”

자꾸 자기 볼을 찌르는 기준이 귀찮은지 희원이 등을 돌렸다. 그걸 가만히 두고 볼 기준이 아니었다. 기준이 희원의 등 뒤에서 바짝 붙어서 희원을 꽉 품에 안았다. 그러고도 계속해서 속삭였다.

“오늘 모처럼 쉬는 날인데 희원 씨가 나랑은 안 놀아 줬잖아요.”

“으응, 내이일…….”

아마도 내일 놀자고 하는 것 같은데 내일은 월요일이란 말이다. 직장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날. 아무리 기준이 이사라고 해도 직장인이다. 그도 집에 귀여운 토끼 같은 배우자를 남겨 두고 출근하기 싫은 보통의 직장인이었다.

“내일 월요일이란 말이에요. 나는 출근해야 하는데? 희원 씨, 좀 일어나 봐요. 우리 놀자. 응? 같이 놀자.”

희원이 고개를 저었지만 기준은 이제 제 앞섶을 희원의 엉덩이에 문지르고 있었다. 그러고는 손을 앞으로 뻗어서 품에 안겨 있는 희원의 윗옷 속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졸려어, 내이일.”

“그러니까 내일은 내가 출근해야 한다니까요. 아니면 내일이라도 육아휴직계 낼까요?”

그 말에 희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으으응.”

희원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드디어 제 짝이 잠에서 깬 것을 캐치해 낸 기준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 예쁜 희원 씨가 잠에서 깼네. 조금만 나랑 놀다 자요.”

“아읏!”

어느새 가슴까지 올라온 손이 엄지와 검지 사이에 유두를 끼고는 주무르고 있었다. 희원은 몸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기준이 그 타이밍에 바로 앞섶을 희원의 엉덩이에 대고 허리를 튕겼다. 그러고는 마치 뭔가를 하듯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응? 응? 나랑 놀아 줄 거예요? 응?”

희원의 귀가 붉어지는 것을 보며 기준이 집요하게도 물어봤다. 희원이 자기 유두를 희롱하는 손을 잡아 내리려고 옷 위에서 손을 움직였지만 기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페로몬을 풀기 시작했다. 짙어지는 페로몬에 희원의 몸이 뜨거워졌다.

“흠, 좋다.”

기준이 희원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는 크게 심호흡했다. 달콤한 과일 향이 콧속에 들어와 몸을 뒤흔들었다. 기준은 당장이라도 목덜미에 이를 박고 쭉쭉 빨아 먹고 싶었다. 과즙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응, 기준 씨.”

“응? 왜요? 좋아?”

기준이 앞섶을 희원의 구멍에 대고 비비댔다. 옷을 뚫고 들어올 것만 같은 딱딱한 성기에 희원은 벌써부터 구멍이 간지러웠다. 아랫배도 묵직해져 오고 말이다.

“대답해 봐요. 좋아요? 응? 좋으면 형이라고 불러 봐, 응?”

기준의 손을 밀어내던 희원이 뚝 멈췄다. 그러니까 이 남자가 아까부터 ‘형!’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이러는 거였다. 희원은 잠이 확 깨는 듯한 느낌이었다. 희원이 뒤돌아보자 눈이 딱 마주쳤다.

“응? 말해 봐요. 아까 ‘형’이라는 소리 잘하던데?”

“내, 내가 언제요.”

희원은 한껏 눈썹을 팔자로 누이고는 잔뜩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 남자가 오늘 작정한 모양이었다. 쉬이 끝날 것 같지 않아서 희원은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응? 왜요?”

방법은 둘 중의 하나였다. 기준의 말을 들어주든가 아니면 그의 입을 막든가. 희원은 ‘옜다!’ 하는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형!”

아, 숨고 싶다. 희원은 이대로 침대가 땅으로 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기준을 바라보던 고개를 휙 돌려서 다시 등을 돌린 채 이불을 확 끌어다가 얼굴을 가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아, 씨발 죽겠네.”

뒤에서 들려오는 적나라한 욕설과 함께 커졌다! 분명 엉덩이를 찌르고 있던 기준의 성기가! 더! 커졌다!

희원은 부끄러움에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금세 자신을 덮쳐 오는 페로몬에 뒤로 애액이 주르륵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읏!”

“그렇게 갑자기 말하면 어떡해요. 누구 죽으라고. 예고는 좀 해 줘야지.”

그런 걸 뭐 어떻게 예고를 해! 희원이 미처 불만을 표하기 전에 기준이 유두를 만지고 있던 손을 빼더니 그대로 희원의 잠옷 바지를 잡고는 확 끌어 내렸다.

“하, 하지……!”

기준이 뒤에서 바지를 끌어 내리더니 그대로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는 혀를 갖다 댔다. 놀란 희원이 도망가려고 했지만 우악스러운 손길로 볼기를 잡고 있는 바람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하지, 하지 마요!”

하지만 기준은 그에 대한 대답으로 추르릅 하는 소리를 냈다. 자신의 뒷구멍을 벌리고 그걸 빨아 대는 소리가 너무 적나라했다. 희원은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자기 구멍을 쑤시는 혀의 감각이 너무 생경해서 뒤로 손을 뻗어서 기준을 밀어내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아응, 아아, 아!”

뒤로 주르륵 흐르는 게 이제는 자신의 애액인지 아니면 기준의 타액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기준의 짙은 페로몬이 희원의 몸을 쥐고 흔드는 것 같았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희원은 그저 쾌감에 절어 울어 댔다.

“흐윽, 윽, 아아. 하지, 기준, 기준 씨.”

“왜 또 기준 씨로 돌아왔어요? 형이라고 부를 때가 좋은데.”

“안 해, 흣, 안 해.”

형이라고 불렀다가 이 사달이 났는데 또 부르라고? 희원은 쾌감에 눈물을 뚝뚝 떨구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하지만 오늘 기준은 집요했다.

“다시 형이라고 불러 줘요.”

“싫어, 싫어요. 그만해.”

“그래? 그럼 다시 불러 줄 때까지 내 맘대로 할래.”

기준은 엉덩이 양쪽에 쪽쪽 뽀뽀를 하더니 다시 혀를 세워 구멍을 찔렀다. 강한 페로몬 때문에 희원은 성기가 꼿꼿하게 서서 프리컴이 질질 새어 나왔다. 바짝 선 성기가 아파 왔다. 이제는 좀 어떻게 해 줬으면 싶은데 기준은 정말 마음대로 할 건지 뒷구멍만 줄기차게 빨아 댈 뿐이었다.

“아, 아응, 너무 세, 앞에, 기준 씨 아아!”

쭙쭙거리는 소리만 들리고 뒤를 빠는 혀는 멈출 줄 몰랐다. 양쪽 볼기를 쥐고 있는 손의 힘은 어찌나 센지 이러다가는 손자국이 남을 것만 같았다.

“으응, 응! 아아! 아응!”

혀를 길게 내어 혓바닥으로 주름을 길게 핥고 입술을 모아서 쪽쪽거리며 구멍을 빨아 댈 때 결국 희원은 외쳤다.

“형, 혀엉! 기준이 혀엉! 아아, 아앙!”

그제야 기준의 혀가 딱 움직임을 멈췄다. 희원은 그대로 뒤로 애액이 왈칵 흐르면서 동시에 앞에서도 하얀 우유가 울컥울컥 터져 나왔다.

“뭐예요.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앞뒤로 쌌네?”

기준이 능글능글 말하자 희원의 얼굴이 단숨에 붉게 물들었다. 기준은 그 순간 희원이 엄청 귀엽다고 생각이 되었다. 볼을 깨물면 복숭아 과즙이 터져 나올 것 같았고 입술을 깨물면 체리 과즙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그 전에 배에 묻은 정액은 어떤 맛일까?

기준이 희원의 배에 튄 정액을 손가락으로 쓸어서 입 안에 넣고 쪽 빨았다. 희원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울망울망해졌다.

“그, 그걸 왜 먹어요!”

“맛있는데요. 맛있어.”

기준이 다시 손가락을 빨았다. 희원은 더 이상 그 꼴을 볼 수가 없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귀여워. 귀여워서 죽을 것 같아요.”

“아앗!”

기준은 그대로 희원의 발목을 잡고 슥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발목 안쪽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워!”

“가만히. 예뻐해 주잖아요.”

“그치만!”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는 매서운 눈을 해 보여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저 사랑스럽고 예쁠 뿐이었다.

기준이 혀를 내밀어서 발목 안쪽을 길게 핥았다. 그러고는 입술을 모아서 도장을 찍었다. 촉, 하고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질척한 소리가 났다.

“흣!”

“어쩌면 발도 이렇게 예쁠까?”

“잠깐!”

기준은 별로 희원의 애원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다. 여기서 희원의 애원이라고 해 봐야 그만하라는 말일 테니까.

기준이 희원의 발가락을 입 안에 넣고 쪽 빨았다. 희원이 기겁을 하며 발을 빼려고 했지만 기준은 한 손에 잡히는 발목을 꽉 붙잡고는 발가락을 차례로 쪽쪽 빨기 시작했다.

“하지 마요, 더러워요.”

“뭐가 더러워요. 아까 뒷구멍도 빨았는데.”

“그런 말 하지 마요.”

부끄러워진 희원의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기준은 자꾸만 희원을 놀리고 싶었다. 울망울망한 눈동자도 붉게 달아오른 뺨도, 울어서 분홍빛으로 변한 코도 다 귀여웠다.

“뒷구멍 빨 때도 바디 워시 향밖에 안 나던데?”

이제 희원은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기준은 그저 웃으며 희원의 발을 자신의 어깨에 걸었다. 그러고는 자리를 잡고 제 성기를 위아래로 쓸었다. 흉흉하게 커진 성기의 귀두를 희원의 구멍에 맞추고는 조금씩 밀어 넣기 시작했다.

“흐읏, 읏, 아아, 아!”

앞뒤로 다 싼 주제에 구멍은 요망하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 빠듯하게 기준의 성기를 조여 왔다. 희원이 버거운지 미간을 찌푸렸다. 기준은 상체를 숙여 희원의 미간에 입을 맞췄다.

“힘 좀 빼 봐요.”

“으응, 아파.”

“내 자지도 터지겠어요.”

“으읏!”

기준이 희원의 엉덩이를 꽉 움켜잡았다 놓았다. 희원이 살짝 힘을 뺀 순간 기준이 안으로 쑥 밀었다.

“다 삼켰네?”

“기준 씨, 제발.”

기준이 씩 웃고는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준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접합부에서 찌걱찌걱 달콤하고 야한 소리가 들렸다. 볼이 붉게 물든 희원이 눈을 질끈 감고는 기준의 팔을 잡은 채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제 눈에만 담고 싶은 모습이었다. 아무도 모르지, 희원 씨가 얼마나 야하고 얼마나 예쁜지.

“읏, 으읏, 기준, 씨, 그, 그만!”

“형, 응? 형.”

“싫, 싫어! 으읏, 아아!”

희원은 아랫입술을 꽉 물고는 기준이 흔드는 대로 흔들리며 생각했다.

‘내가 다시는 형이라고 부르나 봐라.’

이러다 ‘형’이라는 단어에 트라우마라도 생길 것만 같았다. 자기 친형한테도 못 부르게 되는 거 아닌가 싶다.

“싫은 거 맞아요? 여긴 읏, 이렇게 조르는데?”

기준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허리를 확 쳐올렸다. 기준의 성기가 반쯤 빠졌다가 안으로 밀고 들어가면 내벽이 꽉 물어 오는데 그때마다 기준은 미칠 것만 같았다. 머리가 하얗게 변하면서 당장이라도 쌀 것 같은 것을 애써 참고 있는 거였다.

“아아, 아, 너무 커어.”

“커서 좋아하잖아요. 응?”

“그치만, 그치만, 으읏!”

하얀 발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자신의 시야에 보이는 발에 괜히 민망해진 희원이 고개를 모로 돌렸다. 그러자 기준은 자신에게서 시선을 이동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 희원의 고개를 자기 쪽으로 돌리게 했다. 희원이 조금이라도 다른 곳에 눈길을 주는 게 싫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토록 빠질 거라는 건 불과 몇 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누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배길까?

“왜요? 응? 부끄러워요?”

희원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게 뭐 있어요? 부부인데? 부부 사이에 부끄러울 게 뭐 있어요?”

기준은 자기가 언제 짓궂었냐는 듯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아직도 안을 들락날락하는 성기는 흉포하기 그지없었다.

“읏!”

“응? 말해 봐요. 어떻게 해 줄까?”

“힘들어요.”

눈가에 맺힌 눈물을 기준이 혀로 핥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치만 그런 것치고는 아직도 내 좆을 꽉꽉 물어 오는데?”

“아파, 찢어질 것 같아요.”

“안 찢어져요.”

“졸려요.”

희원은 아래 깔린 몸뚱이가 이제 너무 곤했다. 자고 싶었다. 기준이 그만 좀 나와 줬으면 싶었다.

“희원 씨는 체력을 좀 키우는 게 좋겠어요.”

희원이 그 말에 어이가 없어서 눈가를 찌푸렸다. 기준이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가를 혀로 핥았다. 그러고는 속삭였다.

“재워 줄게요.”

“아아! 아, 아아!”

기준이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쾅쾅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망치로 두들기듯 흉포한 성기로 안을 들이박기 시작했다. 기준의 허리 짓에 따라서 내벽이 딸려 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희원은 기준의 팔뚝을 잡고는 신음을 삼키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힘줄이 돋은 강인한 팔뚝을 잡고 손톱을 박아 넣었지만 기준은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여 박아 넣을 뿐이었다.

숲이 덮치는 것 같았다. 녹음이 짙은 숲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숨을 쉬면서도 숨이 막혔다. 산소가 다량으로 폐를 찌르는 것 같았고 금방이라도 정신이 나갈 듯했다.

“하아, 아, 아아! 기준, 기준 씨!”

“조금만, 응? 같이 싸요.”

“으응, 아! 더 못 참……!”

“흣, 사랑해.”

기준이 허리를 잘게 떨었다. 희원의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둘은 그렇게 몸을 꼭 붙인 채 사정하고 말았다.

곤히 잠든 희원을 보며 기준은 입꼬리를 올려서 웃었다. 희원을 먹어 치운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따듯한 수건으로 희원의 몸을 닦으면서 기준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기준이 형이라니!”

기준이 희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어깨를 떨며 웃었다.

“아, 미치겠다 정말.”

이 맛에 사랑하지 싶다.

기준은 곤히 잠든 희원의 가슴에, 배에 얼굴을 비비며 실실 웃었다.

이해준이 형이라고 부를 때는 정말 그 단어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이해준은 그저 귀찮은 꼬맹이일 뿐이었다. 그래도 형제애가 끈끈한 집안이지만 오히려 제 형인 이준과 해준이 더 친했으면 친했지, 기준이 해준과 친해진 건 성인이 된 뒤였다.

그래도 이준과는 좀 거리가 가까운 편이었다. 그렇다고 기준이 이준에게 바짝 붙어서 고민을 털어놓고 그러지는 않았다. 애초에 고민거리도 없었고 살가운 성격도 못 되었다.

그런데 희원이 부르는 ‘형’은 정말 사람 환장하게 했다. 희원이 술에 취해서 최희영에게 붙어서 ‘혀엉’거리는데 그게 그렇게 질투가 날 줄이야! 그렇다고 희원에게 형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희원이 ‘형’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처음도 아닌데 말이다.

심술이 나서 몰아붙인 것도 있다. 기준은 종종 희원에게 ‘형’이라고 불러 달라고 해야지 싶은 마음을 가지며 희원의 여기저기를 살폈다.

살을 맞대고 있던 부분이 조금 붉게 부어 있어서 연고를 짜서 발라 주었다. 자는 와중에도 움찔거리기에 맛있어 보여서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너무 곤히 자고 있는 희원을 더 이상 힘들게 할 수는 없었다.

마음의 풍족함을 얻은 기준은 뒤에서 희원을 끌어안았다. 희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눈을 감았다. 이제는 기준만이 느낄 수 있는 페로몬.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둘의 사이를 희원은 과연 알고 있을까? 서서히 알아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제 희원은 그 누구에게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기준은 결혼하고 귤희를 낳고서도 몸매가 허물어지기는커녕 더욱 예뻐진 희원 때문에 안달복달이 났다. 지금은 희원이 집 안에만 있어서 그렇지 육아휴직이 끝나고 복직을 하고 나면 걱정거리가 더 늘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기준은 이제 좀 안심이다. 이 품 안에 들어온 몸이 어디도 못 갈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사랑해요, 희원 씨.”

“으응.”

잠결에도 희원은 대답하는 것같이 굴었다. 그게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기준은 희원을 더욱더 끌어안고는 뒤통수에 입을 맞췄다.

“귀여워. 잘 자요.”

품 안에 안긴 따끈따끈한 몸이 깊은 잠에 빠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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