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역시 뭔가를 해 주고 싶은 마음
일요일 날, 희원은 루세와 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웬일로 박 여사가 같이 안 나왔나 했더니 박 여사는 지인 결혼식이 있어서 이 회장과 그곳에 갔다고 했다.
만약 박 여사가 끼었으면 해준이 주말에 루세 좀 그만 뺏어 가라고 한 소리 했겠지만 루세와의 약속이 희원이라는 것을 알고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해준은 설이를 데리고 랑일이네로 간 상태였다.
“그날 귤희 봐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둘은 점심부터 만나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기준이 자기 카드를 희원의 손에 꼭 쥐여 주고는 가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쇼핑도 실컷 하고 수다를 실컷 떨며 재미있는 시간 보내다 오라고 했다.
원래도 기준은 희원의 외출에 희원에게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뒤에서 그 상대방을 타박한 건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박 여사였다. 하지만 기준의 불만에 눈 깜짝할 사람이 아니기에 기준만 열받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기준은 왠지 배부른 사자처럼 관대하기만 했다. 그러고는 한동안 희원을 끌어안고 희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페로몬 향을 맡았다. 그만으로도 풍족한 얼굴을 했다.
희원이 차를 몰고 집에서 나갈 때까지 지켜보던 기준은 희원이 골목을 돌아설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 맞다! 형님.”
파스타를 돌돌 말던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편하게 불러도 된다니까요.”
“자꾸 버릇되면 안 돼요. 게다가 이제 그분이 온다고 하던데요?”
“그분?”
희원이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루세가 콜라를 쪽 빨아 먹고는 심호흡을 했다.
“그, 큰형님네.”
그것까지 듣고는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억났다. 귤희 낳고 얼마 안 있어서 이준이 집에 잠시 들러 이런저런 선물을 주며 말했던 적이. 조만간 데리고 올 건데 희원이 응원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 드디어 오시는구나.”
“드디어? 알고 있었어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했다.
“해준이 말로는 대단할 것 같다고 하던데요.”
기준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기준은 원래 다른 사람 얘기를 잘 하지 않는데 자기 형이랑 관련되다 보니 몇 번 가볍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형네 회사랑 협업을 하고 있는데 그 일 때문에 회사에서 몇 번 봤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야기만 들어서는 모르니까요.”
루세는 그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준이 결혼하고 나면 짝들끼리 함께할 일이 많으니 조금 걱정이 앞서기는 했다.
“아! 나 그분 얼굴 본 기억 나요.”
“언제요? 결혼식 때?”
“아뇨. 결혼식 때는 솔직히 정신없어서 누가 왔었는지도 잘 기억 안 나요. 그때 말고 예전에 백화점에서 우연히 두 분이 있는 것 본 적 있어요.”
기준이 희원네 집에서 술 마시고 꽐라 된 날, 그래서 희원이 화가 나 혼자 백화점에 가구 보러 나온 날이었다. 그때 우연히 이준을 마주쳤는데 멀찍이서 누군가 이준을 부른 적이 있었다.
“인사는 안 했는데 모습은 기억나요.”
루세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의자를 바짝 끌어다가 앉았다.
“어땠어요?”
“음…….”
희원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조금 전까지 들은 이야기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그때 기억을 되살려 보니. 그래. 그랬다.
대단할 것만 같았다. 새침하고 도도한 고양이 같았다. 곁을 내주지 않을 것만 같은.
점심을 먹고 희원은 루세랑 같이 남성복 코너로 향했다. 루세의 옷을 사기 위해서였다. 기준이 루세는 은인이나 마찬가지라며 꼭 봄옷을 한 벌 사 줘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다.
희원은 이벤트를 할 수 있게 귤희를 봐준 게 그렇게 은인이라고까지 할 수 있나 싶었지만 어쨌든 루세가 아니면 외출은 꿈도 못 꾸었을 테니 은인만큼 고맙다는 생각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루세 씨, 봄옷 뭐가 좋겠어요? 트렌치코트가 좋을까? 아니면 라이더 재킷?”
희원은 걸려 있는 옷들을 살펴보며 루세에게 물었다.
“근데 진짜로 사 주는 거예요?”
“응! 기준 씨가 예쁘고 좋은 거 사 주라고 카드도 줬어요. 진짜 고마웠나 봐요. 나중에 귤희가 조금 더 커서 외출할 수 있게 되면 가끔 데리고 회사 앞으로 나갈까 봐요. 그렇게 좋아하더라고요.”
희원이 웃자 루세도 따라서 웃었다.
둘은 원래도 직원이 와서 이것저것 말을 거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박 여사와 같이 와도 셋은 조용히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으며 쇼핑을 하곤 했다. 재벌가 사람들이라고 티를 내는 것을 둘 다 내켜 하지 않았고 그건 박 여사도 마찬가지였다. 셋은 늘 사부작거리며 조용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둘이 이 옷 저 옷을 몸에 대 보며 웃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백화점 직원들은 소란스럽게 굴고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다른 재벌가 며느리들보다 이 두 사람을 훨씬 좋아했다.
“근데 루세 씨는 평소에 좀 캐주얼하게 입으니까 코트보다 다른 게 더 나을까요? 음, 뭐가 좋을까요?”
루세는 대학교 근처에 가게가 있어서 그런지 정장보다는 캐주얼한 옷을 주로 입었다. 물론 일을 할 때는 유니폼을 입고 앞치마를 하며 단발인 머리도 단정하게 묶지만 평소에는 마치 대학생처럼 하고 다녔다.
루세네 가게는 젊은 사장님이 직접 서빙도 종종 해 주고 친근하게 말도 붙여 주는 친절하고 다정한 가게로 평이 높았다. 가격대가 조금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1층에는 늘 대학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2층은 1층과는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 주로 근처 회사원들이 많이 찾았다.
회사원들 사이에서도 젊고 잘생긴 사장님이 늘 웃으며 단골들을 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주류는 생맥주와 사케 위주로 팔았고, 안주는 우리 식으로 한 퓨전 일식이었다. 맛도 좋았고 보는 맛도 있어 회사원들이 많이 찾았다.
“루세 씨, 이거 입어 볼래요?”
희원이 기다란 체크무늬 겉옷을 들어 보였다. 정장 상의처럼 생겼지만 길이가 무릎까지 오는 옷이었다. 갈색 체크무늬가 꽤나 멋스러웠고 하얀 루세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예쁜데요? 입어 볼까요?”
루세가 셔츠 위에 옷을 걸치는 동안 희원은 또 다른 옷을 골랐다.
* * *
한편 기준과 해준은 육아의 늪에 빠져 있었다. 아이들 점심으로 따듯한 우동을 해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랑일이와 설이를 불렀다.
일곱 살이 된 랑일이와 여섯 살이 된 설이는 만나면 뭐가 그리 좋은지 종일 재잘거렸다. 둘은 식탁 앞에 앉아서도 젓가락을 쥐고는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만 봐도 웃음이 터져서 웃어 댔다. 해준도 옆에 앉고 기준도 식탁 앞에 앉았다.
랑일이는 이제 젓가락질도 제법 했다. 물론 어린이용이었지만 젓가락을 든 손이 야무졌다. 반면 설이는 아직 서툴지만 열심히 젓가락질을 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도 먹자.”
기준이 조금 식은 우동을 잘도 먹는 설이와 랑일이를 보며 자신도 젓가락을 들었을 때였다.
“우에엥.”
“어, 아빠. 귤희 깼어.”
기준이 한 젓가락도 먹지 못한 채 귤희 방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해준아, 애들 밥 좀 먹여.”
기준은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에도 아이들을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직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동을 바라보며 해준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저 우동은 못 먹을 가능성이 컸다.
“우리 공주님 깼어요?”
방으로 들어간 기준은 공주님 기저귀 확인부터 했다. 자고 일어나서 배도 고프고 축축한 기저귀에 심기가 매우 안 좋은 귤희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기준의 눈에는 어여쁘기만 했다.
해준은 아이들 우동을 먹이면서 자기도 빠르게 먹기 시작했다. 제 형도 뭔가를 좀 먹어야 하니 말이다.
자기도 설이 어릴 때를 돌아보면, 꼭 밥 먹으려고 할 때 아이가 깨서 울고 보채서 제대로 밥도 못 먹었던 기억이 났다.
어느 날은 어쩔 수 없이 싱크대 앞에 서서 밥을 먹다가 자기 모습이 초라하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울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애를 낳은 건 루세인데 왜 네가 그 유난이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해준은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감정이 생생했다.
“작은아빠, 천천히 먹어야 해요. 마미가 밥 먹을 때는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고 했어요.”
랑일이가 급하게 먹는 해준을 바라보며 걱정 어린 시선으로 말했다. 그에 해준은 랑일이 입가에 묻은 음식을 닦아 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천천히 먹을게. 근데 작은아빠가 빨리 먹고 귤희 봐줘야 아빠도 식사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
“랑일이가 귤희 봐주면 돼요.”
아직 반도 못 먹었으면서도 제 동생이라고 챙기려고 하는 랑일이의 마음이 예뻤다.
“귤희는 이렇게 멋있는 오빠 있어서 좋겠다.”
해준이 랑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해준의 말에 랑일이는 굉장히 뿌듯한 얼굴을 했다.
“우리 공주님 우유 먹을까요?”
기준이 귤희를 품에 안고 나오며 말했다. 해준은 어련히 알아서 젓가락을 놓고 귤희를 기준에게서 받았다.
“어유, 오랜만에 봤다고 묵직해졌네.”
해준은 귤희를 안고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말을 걸었다. 그사이에 기준은 서둘러서 귤희 분유를 타기 시작했다. 기준은 랑일이를 온전히 혼자서 키운 게 다섯 살 때부터였기 때문에 처음에 귤희를 볼 때는 몇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읽었던 육아서가 아마 탑을 쌓았기 때문일까, 지금은 누구보다 능숙했다.
기준의 귤희에 대한 사랑은 누구보다 극진해서 귤희에게는 늘 최고로 좋은 것들만 선사했다. 분유 하나 고르는 데도 얼마나 심사숙고했는지 해준 또한 알고 있다.
“귤희 공주님 예쁜 옷 입었네? 아고, 우리 공주님이 예쁜 꼬까옷 입었어요? 누가 입혀 줬어요?”
해준이 귤희를 안고는 토닥이며 말을 거는데 옆에서 랑일이가 말했다.
“마미랑 같이 산 거예요.”
“랑일이가?”
“네!”
해준이 랑일이 머리를 쓰다듬고는 따듯한 눈빛을 보냈다.
“오빠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 줘서 귤희한테 이렇게 잘 어울리는구나? 근데 랑일아, 얼른 먹어야지. 다 불겠어.”
귤희가 거실로 나오는 순간부터 시선을 못 떼던 랑일이는 멈췄던 젓가락을 해준의 말에 다시 놀리기 시작했다.
“해준아, 귤희 주고 밥 먹어.”
“나 어느 정도 먹었어. 형 먹어.”
기준이 식탁 위 우동을 보고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우동 면발이 국물을 다 집어삼켜서 탱탱 불어 있었다. 배는 고팠지만 사실 별로 내키지 않았다.
“아냐, 너 마저 먹어.”
기준은 귤희를 다시 품에 안고는 바닥에 앉아서 분유를 먹이기 시작했다. 해준은 그런 형을 바라보며 정말 사람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바닥에 털썩털썩 앉을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귤희가 분유를 먹고 옷에 게워 내도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아빠, 다 먹었어!”
설이가 그릇을 내밀었다. 그에 언제 다 먹었는지 랑일이도 그릇을 내밀며 다 먹었다고 했다. 둘은 식탁을 벗어나서 귤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언니와 오빠의 등장에 귤희는 분유를 먹다가 혓바닥으로 쭉 밀어냈다.
“안 돼, 안 돼. 공주님 분유 먹어야 해.”
이제 아예 신경을 랑일이와 설이에게 쏟은 귤희는 기준이 다시 입술에 분유를 대도 혓바닥으로 밀어내며 발을 구르며 웃었다. 결국 해준이 가져온 이불 위에 귤희를 내려놓은 기준은 식탁 앞에 앉았다가 그냥 물이나 한 잔 마셨다. 희원이 나간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지독하게 보고 싶었다.
평소 잘 먹고 잘 자던 귤희는 한번 깨더니 랑일이와 설이가 있어서 그런지 좀처럼 자려고 하지 않았다. 분유를 주려고 하면 조금 빨다가 툭 뱉고는 에베베 푸흐흐흐 하고 투레질을 했다.
“안 돼, 공주님. 투레질하지 마요.”
기준이 고개를 저었지만 랑일이와 설이는 꺄르르 웃어 댔다. 그에 귤희가 더 신나서 발을 구르고 허공중에 손을 저었다.
그러는 사이 해준은 아이들의 간식을 준비하고 아이들이 어질러 놓은 장난감을 상자에 담았다. 아무리 불러도 귤희 옆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준은 몇 번 부르다가 결국 자기가 장난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해준 역시 이 집에 온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루세가 몹시 보고 싶었다.
기준과 해준은 핸드폰에 몇 번 손을 뻗었다가도 모처럼 외출한 두 사람을 부르면 안 된다고 자신들을 다독이고 또 다독였다.
“아빠, 귤희 맘마 먹고 싶은가 봐.”
랑일이 말에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기준이 기다란 몸을 일으켰다.
“아빠가 귤희 맘마 먹이는 동안 우리는 간식 먹을까?”
해준이 루세가 미리 만들어 두고 간 마들렌과 우유를 아이들에게 내주었다. 그러는 동안 기준은 귤희 분유를 먹였다. 몇 시간 만에 찾아온 평화였다.
두어 시간 뒤 현관문이 열리고 희원과 루세가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조용한데요?”
“그러게요.”
양손 가득 짐을 든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와 거실의 광경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거실 한복판에 귤희가 누워 잠들어 있었고 그 옆에 기준이 랑일이를 품에 안고 잠들어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해준이 설이를 안고 잠들어 있었고 말이다.
희원과 루세가 이불을 갖고 나와서 덮어 주다 작게 웃었다.
“진짜 힘들었나 봐요.”
“응, 이따 저녁에는 맛있는 거 먹여야겠다. 루세 씨, 저녁 먹고 천천히 놀다 가요.”
곤히 잠들어 있는 가족들이 깨지 않도록 루세와 희원은 주방에 가서 조용히 차를 한 잔씩 마셨다. 평화로운 일요일이었다.
* * *
자고 일어난 식구들은 같이 저녁을 먹고 설이는 욕실에서 목욕까지 하고 돌아갔다. 이왕 밥까지 먹고 가는데 집에 가는 길에 분명 차 안에서 잠들 게 뻔했다. 차에서 곤히 잠든 아이를 깨워서 다시 목욕시키고 재우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고 그만큼 부모도 지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희원이 아예 다 씻기고는 차에서 자면 그대로 들어 눕혀서 재우라고 했다.
육아는 해 본 사람만이 안다고 루세는 희원의 배려에 고마워하며 밤 8시가 넘은 시간에 돌아갔다. 세 사람이 돌아간 뒤 커다란 집에는 늘 그랬듯 조용함만이 감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랑일이도 이미 목욕을 한 뒤라 생각보다 일찍 졸려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미 졸려요.”
“우리 랑일이가 오늘 아빠랑 작은아빠랑 신나게 놀았구나?”
“네, 설이랑도 재밌게 놀았어요.”
“그래. 우리 다 씻었으니까 그럼 오늘은 조금 일찍 잘까? 마미가 자장가 불러 줄까? 랑일이 아빠한테 굿나잇 인사 해야지.”
희원의 말에 랑일이가 기준에게 가서 꼭 안아 주며 “아빠, 굿나잇.” 하고 속삭였다. 종일 같이 있었던 부자는 서로 또 친해져서 뺨에 뽀뽀를 하고 난리였다. 마치 상봉한 이산가족 같은 부자를 보며 희원은 그야말로 엄마 미소를 지었다.
“랑일이 재우고 올게요. 들어가서 좀 쉬고 있어요.”
희원은 랑일이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며 기준에게 말했다. 기준이 귤희가 잘 자는지 한 번 더 살펴본 뒤 방으로 들어갔다.
희원은 랑일이 옆에 모로 누워서 랑일이 머리를 만져 주며 흥얼흥얼 노래를 불러 주었다. 랑일이는 요즘 자장가보다는 숲속을 거닐면서 부르는 노래를 좋아했다. 아무래도 겨울이 되어 유치원에서 숲 체험을 자주 못 가니 노래로라도 흥얼거리는 듯했다.
희원은 랑일이 눈썹도 손가락으로 덧그려 주고 머리칼도 넘겨 주며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랑일이는 원래도 기준과 똑 닮았지만 커 갈수록 더 똑같아지고 있었다. 그린 듯한 눈썹도 오뚝한 콧날도, 쌍꺼풀 없이 큰 눈도, 웃는 모습도, 모두 기준 미니미였다.
나중에 랑일이가 더 자라면 어떤 모습일까? 그때도 이렇게 다정하고 속이 깊은 아이일까? 요즘 희원은 학교에 들어가고, 사춘기를 지나고, 그 후의 랑일이 모습까지도 상상을 해 보지만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어린 기준은 어땠는지 궁금했다.
아직 기준의 어릴 적 사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희원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의 어린 시절이 말이다.
“랑일이는 잠들었어요?”
“네, 오늘 신나게 놀았나 봐요. 노래 몇 소절 불러 줬더니 금세 잠들었어요.”
“우리 희원 씨, 오늘도 수고 많았어요.”
침대 위에서 책을 보고 있던 기준이 팔을 벌리자 희원이 그 품에 파고들었다.
“나보다 우리 기준 씨가 더 고생 많았죠. 오늘 고마워요, 기준 씨 덕분에 루세 씨랑 재미있게 놀다 왔어요.”
“고마우면 뽀뽀.”
기준의 요구에 희원이 웃으며 짧게 입 맞췄다. 기준은 희원을 침대 안으로 끌어들이고는 팔베개를 한 뒤 얼굴을 어루만졌다.
“우리 희원 씨는 예쁘기도 하지.”
여느 때와 똑같이 희원을 만지며 칭찬하는 기준에 희원이 배시시 웃다가 퍼뜩 생각난 게 있어서 말했다.
“맞다. 기준 씨.”
“네?”
“기준 씨 어릴 적 사진 앨범은 본가에 있어요?”
“응? 사진 앨범이요?”
희원이 기준의 팔을 베고 누웠다가 몸을 일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웬 앨범이요?”
“아니, 아까 랑일이 옆에 누웠는데 랑일이가 기준 씨랑 너무 똑같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랑일이 구경하다 보니 문득 기준 씨 어릴 때는 어떤가 싶은 거죠. 앨범 본가에 있어요?”
“흠. 글쎄요.”
기준이 뭔가 뜨뜻미지근하게 반응해서 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기억이 잘 안 나네요. 늦었는데 잘까요?”
“응? 아직 9시밖에 안 됐는데요?”
“그럼 다른 거라도 할까요? 잠 잘 오게?”
기준이 희원을 조심스레 눕히고는 그 위를 점령했다.
“어?”
“왜요? 어른들만의 놀이를 하고 자자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일단 입부터 좀 맞추고 시작합시다. 좀 협조해 줘요. 사실 아까부터 내 상태는 좀 이러니까.”
기준이 자신의 앞섶을 비비며 희원의 입술을 찾아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말랑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서 입을 열게 하고는 혀를 집어넣어 희원의 혀를 찾아 비볐다. 말캉한 입술 두 개가 서로 비벼지고 얽히면서 방 안에 서로의 페로몬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으응.”
기준의 앞섶이 희원의 허벅지를 찌르자 희원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움찔 움직였다. 기준이 손을 희원의 옷 안으로 집어넣어서 옆구리를 쓸었다. 간지러운지 희원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옆으로 틀었지만 기준은 커다란 손으로 몇 번 더 허리와 옆구리를 지분거렸다.
“옷 좀 벗어 봐요. 만세.”
기준은 아이에게 말하듯 희원을 얼렀고 희원은 두 손을 위로 올려서 기준이 옷을 벗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희원의 윗옷을 벗긴 기준은 자기 옷도 훌러덩 벗어서 침대 아래로 던졌다.
“도대체 운동은 언제 하는 거예요?”
탄탄한 어깨 근육과 판판한 배에 새겨진 근육을 어루만지며 희원이 불퉁하게 물었다.
요즘에는 새벽에 깨는 귤희를 보는 건 희원이 하고 있지만 그래도 간간이 기준도 깨곤 했다. 그럼에도 기준은 늘 아침에 운동을 하고 들어왔다. 어느 때는 기준이 운동을 하고 들어오는 것을 볼 때도 있었고 귤희를 새벽에 보다 잠에 취한 경우에는 못 보고 샤워를 한 기준만 볼 때도 있었다.
“원래 독서랑 운동은 시간 쪼개서 하는 거예요.”
“기준 씨 혼자서 하루 48시간 사나 봐.”
“귀엽게 굴기는. 이제 그만 말하고 몸으로 대화를 좀 하자고요. 나 급해요.”
“흐읏!”
기준이 그대로 고개를 내려서 희원의 가슴을 혀로 할짝였다. 벌써부터 바짝 선 젖꼭지는 붉은색을 띤 채 기대감에 가득 차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기준은 입술을 모아서 젖꼭지를 빨고 뾰족하게 솟아 있는 유두를 혀로 건드렸다.
“아응! 읏! 으읏!”
희원이 허리를 들썩였지만 기준은 집요하게 왼쪽 가슴을 빨았다. 귓가에 희원의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기준의 마음을 간질였다. 기준은 희원이 자기로 인해 이렇게 가슴이 뛰는 게 그저 신기하고 즐거웠다. 이렇게 사랑스럽다니! 이런 사랑스러운 사람이 자신의 것이라니. 생각만으로도 좆이 터질 것만 같았다.
“흐응, 그만, 그마안 기준 씨.”
너무 잘 느끼게 된 페로몬 때문인지 아니면 기준의 페로몬이 오늘따라 유독 진한 건지 희원은 금세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당장이라도 쌀 것 같아서 기준을 죽죽 밀어냈지만 기준은 집요하게 달라붙어서 가슴을 쪽쪽 소리가 나도록 빨았다.
“기준 씨, 으읏, 그만, 그만.”
기준이 얼굴을 뗐을 때는 이미 희원의 얼굴은 복숭앗빛으로 달아오른 뒤였다. 쌔액쌔액 거친 숨소리에 기준은 허겁지겁 자기 바지와 속옷을 벗고 희원의 것을 잡아 내렸다.
“벌써 쌌어요? 야하기는.”
“그래서 내가 그만이라고!”
“우리 희원 씨는 이제 가슴만 빨아 줘도 싸는구나.”
창피해진 희원이 기준의 팔을 찰싹 때렸지만, 기준은 느물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이렇게 축축해진 속옷 발목에 걸친 채 삽입해 볼래요? 또 다른 기분일 것 같지 않아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못 들을 것 들었다는 듯 귀를 막았다. 그러고는 옆으로 홱 몸을 돌렸다. 하지만 기준은 여전히 능글맞게 웃으며 이제는 희원의 허리를 안은 채 몸을 돌려 희원이 엉덩이만 들고는 엎드리게 만들었다.
“잠, 잠깐. 기준 씨 잠깐만!”
놀란 희원이 뒤돌아보고는 기준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기준은 희원의 허벅지를 잡고는 벌려서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희원이 끙끙 앓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기준의 욕망에 불을 지피는 꼴이라서 기준의 페로몬만 진해질 뿐이었다.
“흐응, 읏, 흐읏!”
행여 아이들 방에까지 소리가 갈까 싶어서 희원이 베개로 입을 막았다. 침이 흘러내려서 베개가 흥건해졌지만 그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기준이 혀로 자기 구멍을 쑤실 때마다 성기에서 프리컴이 흘러 이불을 적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준, 기준 씨!”
기준은 춥춥거리며 게걸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희원의 구멍을 빨았다. 붉은 구멍은 축축한 애액으로 흠뻑 젖어서 기준이 혀로 구멍을 쑤실 때마다 물기에 젖은 소리를 냈다. 야한 소리에 기준은 좆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그보다 희원의 맛있는 구멍을 입으로 먼저 맛보는 게 우선이었다.
“으응, 기준, 아아, 아읏!”
희원이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었다. 자기 딴에는 몸을 앞으로 빼려고, 도망가려고 하는 모양새였지만 기준의 입장에서는 엉덩이를 흔들며 보채는 모양새였다.
“아아! 기준 씨, 나올 것 같아, 으응!”
희원이 시트를 쥐고는 바들바들 떨었다. 어떻게 참아 볼 새도 없이 기준이 뒤를 쑤셔 주는 것에 흠뻑 느끼고 말았다. 붉어진 몸으로 떨고 있는데 그제야 기준이 얼굴을 떼고는 희원의 하얀 등에 제 얼굴을 훔쳤다.
“이제 뒤로 싼 거예요? 우리 희원 씨 날이 갈수록 너무 야해 죽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그만이라고…….”
희원의 목소리가 울먹울먹했다. 하지만 기준은 그게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희원의 마른 등 여기저기에 붉은 흔적을 마구 만들어 냈다.
“이제 나도 못 참겠어요. 나도 이제 싸고 싶어.”
기준이 성이 날 대로 난 성기를 희원의 엉덩이에 툭툭 치며 문지르기 시작했다. 희원의 하얀 엉덩이에 기준이 흘린 프리컴이 길게 자국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 * *
기준은 곤히 자고 있는 희원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하얀 얼굴에 뺨만 복숭앗빛이었다. 더운 곳에 있으면 볼만 발갛게 물드는 것같이 말이다. 기준은 작은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곯아떨어진 희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잘생긴 남편이 여기 있는데 왜 사진 속 꼬꼬마를 보려고 해요.”
기준이 속삭였지만 희원은 듣지 못하고 고로롱거리며 자고 있었다.
맨 처음에 사진 이야기를 했을 때 사실 좀 황당하기도 했다. 기준은 어릴 적부터 너는 기업의 차기 총수가 될 몸이니 늘 자기 관리를 해야 한다고 들으며 컸다. 그렇기에 부드러운 모습보다는 카리스마 있고 차가운 이미지 쪽에 더 신경을 썼고 그게 기준의 성정이기도 하였지만, 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그 사소한 사진 한 장에도 평소 추구하는 이미지가 들어가 있어 사실 기준이 찍힌 사진은 일상의 추억들을 담은 게 거의 없었다. 여느 사람들이 누리는 일상이 담긴 소소한 사진들은 찍은 적도 없을뿐더러 해 봐야 기록처럼 어떤 행사에 참여하여 흔적을 남긴 사진들이 전부였다.
그건 랑일이도 마찬가지여서 랑일이는 다섯 살 이전까지는 그 흔한 육아 일기에 어울릴 법한 사진도 손에 꼽았다. 랑일이가 유치원에 들어간 뒤에야 그런 사적인 사진들이 모아지기 시작한 거였다. 그건 다 희원 덕이었다.
하루 종일 쇼핑을 하고 집에 와서 또 집안일을 했으니 얼마나 피곤했을까. 기준은 희원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며 자는 모습을 구경하고 또 구경했다. 아마 희원이 깨어 있었으면 자기 얼굴 닳겠다고 핀잔을 주었을지도 몰랐다.
희원이 옆으로 돌아누웠다. 기준은 자면서도 자기에게 등을 보이는 게 싫어서 희원의 몸을 다시 돌리려다 자기가 물고 빤 뒷덜미가 보여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다시 뒷덜미에 입술을 묻고 자근자근 빨면서 웃었다.
“이제 우리 희원 씨는 어디 가지도 못해요. 그동안 내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요?”
기준의 입꼬리가 예쁘게도 호선을 그렸다. 희원을 보면 기준은 미친놈처럼 비실비실 웃음이 샜다.
“예쁘다. 정말 예뻐. 아예 여기에 계속 자국 남았으면 좋겠다.”
기준이 중얼거리며 희원의 배를 감싸고는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희원은 계속해서 치근거리며 만져 대는 기준에 살짝 칭얼거렸지만 순하게도 깨지 않고 다시 곤히 잤다.
“진짜 귤희랑 닮았네.”
귤희랑 자는 모습이나 얼굴이 똑 닮아서 기준은 아빠 미소를 잔뜩 지었다. 기준은 한참을 그렇게 구경하다가 희원에게 붙어서 잠이 들었다.
희원은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 같은 갑갑함에 잠에서 깼다. 멀리서 귤희가 잠에서 깼는지 강아지처럼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원이 자기 허리를 감고 있는 팔을 내려다봤다. 어디 도망갈 것도 아닌데 이렇게 꽉 끌어안고 있을 일인가 싶어서 웃음이 터졌다.
희원은 자기를 끌어안고 있는 손의 깍지를 풀려고 조심히 손을 움직였다. 손가락 한 개 한 개를 풀려고 하는데 기준이 잠에서 깨는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자기 뒷덜미에 얼굴을 푹 묻었다.
“저기, 저기 기준 씨.”
잠들어 있는 기준을 깨우고 싶지는 않지만 멀리서 귤희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깍지를 끼고는 몸을 더욱 바짝 붙인 기준은 꼼짝도 안 해서 희원은 진퇴양난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준 씨, 공주님 깼어요.”
“으응. 우리 공주님. 더 자요.”
기준은 잠결에도 희원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희원이 기준의 손가락을 풀면서 다시 속삭였다.
“아니, 아니 나 말고, 진짜 공주님. 귤희.”
“으응?”
“귤희 깨서 울기 직전이라고.”
그제야 기준은 잠에서 깨서 일어났다. 희원은 기준에게서 벗어나서 그를 다시 눕혔다.
“미안해요 깨워서. 더 자요. 더 자도 돼.”
기준을 눕힌 희원이 기준의 가슴을 도닥였다. 기준이 자기가 가겠다고 했지만 이미 희원은 정신이 맑아져서 잠결인 기준을 재우는 게 더 나았다.
“자장, 자장.”
희원이 마치 아이 재우듯 기준을 조금 더 도닥인 뒤 얼른 걸음을 빨리했다.
귤희 방에 들어갔을 때 귤희는 빨리 오지 않은 마미에게 화가 났는지 허공중에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아고, 우리 공주님이 화가 나셨어요.”
희원이 얼른 기저귀를 갈아 주고는 귤희를 품에 안고 다독다독해 주었다. 몇 번 어른 뒤 이불 위에 내려놓고는 천장에 달려 있는 모빌을 눌러 멜로디 소리가 나게 해 주었다. 뱅글뱅글 춤추며 움직이는 모빌을 보며 귤희가 조금 진정된 듯했다.
희원은 다시 몸을 빠르게 놀려서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분유를 타기 시작했다. 갓 태어났을 때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몸집도 작고 그리 많이 먹지 못해서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제법 먹는 양이 늘었다. 같은 개월 수 아이들만큼 먹기 시작해서 희원은 한시름 놓았다.
희원은 분유를 자기 손목 안쪽에 몇 방울 떨어뜨려서 온도를 맞추고는 서둘러 방으로 향했다.
“우리 귤희 공주님, 맘마 먹을까요?”
희원이 귤희를 품에 안고는 앉아서 입가에 젖병을 물려 주었다. 귤희가 허겁지겁 젖병을 빨며 쩝쩝 소리를 냈다. 포동포동 젖살이 오른 얼굴이 그저 어여쁘고 귀여웠다. 희원은 귤희를 볼수록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싶어서 같이 행복해졌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그저 행복했다.
* * *
기준을 출근시키고 랑일이도 유치원에 보낸 뒤 희원은 인터넷으로 100일 사진 촬영을 알아봤다. 기준에게 이야기하면 기준이 원 실장에게 말해서 알아서 다 준비하겠지만 갓난아이를 처음 키우는 희원은 이런 것도 자기가 해 보고 싶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스스로 배냇저고리를 만들고 손싸개, 발싸개, 모자, 속싸개까지 만들었는데 그나마 희원이 손재주가 있어서 망정이었지 그런 게 없었다면 꽤나 고전할 법했다. 만들면서 몇 번을 그냥 재봉틀로 박을까, 아니면 사다가 입히는 게 나을까, 하고 고민을 했다.
하지만 막상 귤희가 태어나고 그 옷을 입혔을 때 그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희원은 너무 신나서 사진을 얼마나 찍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담아낸 순간순간의 조각들이 추억이 되었다.
일요일에 루세한테 스튜디오와 100일 선물 등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봤고 몇 군데 스튜디오에 대해 추천을 받았다. 그렇게 루세한테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한창 스튜디오 정보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을 때 저쪽에서 핸드폰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
박 여사였다.
―그래, 엄마야. 희원아, 뭐 해? 엄마가 혹시 쉬는 거 방해했니?
“아뇨, 아뇨. 아니에요. 귤희 100일 사진 어디서 찍어야 하나 싶어서 스튜디오 알아보고 있었어요.”
―루세한테 물어보지 그랬어.
“안 그래도 일요일에 만나서 물어봤어요.”
―그래, 잘했다. 혹시 귤희 100일에 엄마가 해 줄 거 있나 싶어서 전화했어.
박 여사는 용건이 없는 이상은 별로 전화를 하지 않았다. 며느리들 부담스럽게 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오히려 박 여사보다 희원이 먼저 전화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희원에게는 기준을 뺀 단체 채팅방이 있었다. 박 여사와 이 회장하고 만든 거였는데, 그곳에 매일같이 귤희랑 랑일이 사진을 보내곤 했다. 그게 의무가 아니라 아이들 자라는 게 너무 예쁘다 보니 그걸 혼자서 보기가 너무 아쉬워서 자랑하듯 보내는 거였다.
처음에는 기준이 매일같이 사진을 보내는 희원을 보고 그렇게 안 해도 희원 씨가 얼마나 부모님들께 잘하는지 안다고, 너무 애 안 써도 된다고, 편하게 하라고 했다. 하지만 희원은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아이들을 자랑하고 싶었다.
기준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니 그 흔한 SNS도 못 하고, 그러다 보니 아이들 사진을 공유하며 자랑할 만한 곳이 없었다. 그 아쉬움을 양가 부모님들께 푸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아침에 등원하는 랑일이가 코트 입은 모습이 너무 멋져서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그에 이 회장은 우리 왕자님이 하루가 다르게 커 간다며 감탄했다. 희원이 랑일이가 점점 기준을 닮아 간다며, 너무 멋있지 않느냐고 물었으나 그에 대해서는 두 분 다 아무 대답이 없으셔서 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반면 희원네 부모님과 함께하는 단체 채팅방에 똑같은 사진을 보내자 그에 대한 반응은 너무 달라 깜짝 놀랐다.
―희원아, 엄마는 늘 해 주고 싶은 게 차고 넘쳤으니까 말만 해. 응?
희원은 박 여사의 말에 늘 고맙고 황송한 마음뿐이었다.
“어머니 그런 거 없어요, 괜찮아요.”
희원이 대답했지만 박 여사는 계속해서 뭔가를 해 주고 싶어 했다. 희원은 이런 것에 굉장히 감사했다. 누군가는 애를 낳자마자 확 변하곤 했다. 그 관심이 오롯이 아이한테 쏠린다든지 말이다.
하지만 기준네 식구들은 달랐다. 귤희보다 희원의 안부가 먼저였고 그 마음이 늘 희원에게도 느껴졌다.
희원은 전화를 끊고 한참을 생각했다. 100일밖에 안 되어서 소란을 일으키기에는 조금 머쓱했다. 하지만 역시 그래도 뭔가를 해 주고 싶었다.
그때였다. 통화를 마친 박 여사에게서 사진이 한 장 전송되었다. 희원이 뭔가 싶어서 얼른 사진을 살펴봤다.
[희원아. 엄마가 정말 생각해 보고 생각해 봤는데. 줄 수 있는 선물이 이것밖에 없어서. 혹시 마음에 안 들면 기준이 통해서 다른 거 말해도 돼.]
사진 속에는 수영장이 딸린 새로운 별장 한 채가 있었다.
희원은 너무 놀라서 다시 박 여사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박 여사는 희원이 부담스럽다며 그 선물은 받지 못하겠다고 할 게 뻔하기에 전화를 받지 않았다. 희원은 빛의 속도로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어머니, 이걸 어떻게 받아요. 100일 선물로는 너무 과해요.]
분명히 박 여사가 읽었음에도 주고 말겠다는 확고한 의지 때문인지 답이 없었다. 희원 혼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하게 구는데 마침 기준에게 전화가 왔다.
“기준 씨!”
―희원 씨,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먼저 전화를 해 놓고는 희원이 다급하게 자기를 부르자 기준은 무슨 일이 났는 줄 알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자기가 기준을 놀라게 했다는 것을 깨달은 희원은 목소리 톤을 살짝 낮췄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큰일은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으면 됐어요.
기준이 다정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희원은 이렇게 말해 놓고서도 정말 아무 일이 아닌가? 큰일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가 아이 100일에 별장을 선물한단 말인가. 그래, 이건 보통 일은 아니다.
“기준 씨, 다른 게 아니라, 어머니께서요.”
―왜요? 박 여사가 귀찮게 해요?
“아뇨, 아뇨.”
희원은 마치 앞에 기준이 있기라도 하듯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조금 전에 통화하다가 귤희 100일 선물로 뭐를 받고 싶으냐고 해서요. 별로 생각한 게 없어서 없다고 했더니 갑자기 별장 사진을 보내셨어요.”
―별장이요?
“네, 이번에 새로 구입하신 별장이라고 하면서 그거 선물로 주신다고…….”
―아… 그 별장.
희원은 그 별장의 존재를 기준도 안다고 생각하니 이제야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근데 그게 왜요?
“네?”
―그 별장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럼 다른 건물 달라고 할까요? 저번에 어머니가 건물 뭐 하나 샀다고 하던데 그거 달라고 할까요?
희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여기도 재벌이었지, 참.
“기준 씨. 그런 문제가 아니라요.”
―그럼요?
전혀 대화가 되지 않았다. 말이 뱅글뱅글 돌며 떠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규모의 선물은 받을 수가 없다고요.”
―아, 그 얘기였구나.
희원은 기준이 포인트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알았어요. 희원 씨 말뜻 알았어요. 내가 어머니랑 통화할게요.
“어머니 오해하지 않으시게 잘 이야기해야 해요. 알았죠?”
―응, 알았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희원은 그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기준 씨는 무슨 일 있어요?”
―아니에요, 회의 끝나고 잠깐 시간이 나서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응, 잘했어요. 조금 있으면 점심 먹겠네요?”
―네, 희원 씨도 점심 거르지 말고 먹고요.
“응, 기준 씨도 맛있는 것 먹고 힘내요!”
희원은 전화를 끊기 전에 기준에게 한 번 더 힘내라고 속삭인 뒤 사랑한다고까지 말하고 끊었다. 기준 역시 사랑한다고 대답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희원은 그제야 자기가 기준 옆에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사랑한다고 말하게 만들었나 싶어서 주책맞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싶어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다시 핸드폰을 들어서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통화 중에 옆에 사람 있었는데 내가 너무 주책맞게 길게 통화한 거 아닌가요?]
기준은 아까 선물 이야기를 할 때는 전혀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더니 이번에는 정확하게 희원이 걱정하는 부분을 짚어 냈다. 하지만 대답은 그다지 원하는 바가 아니어서 메시지를 받고서도 희원 혼자 민망해했다.
[내가 내 배우자한테 사랑한다고 하는 게 뭐 어때서요? 난 희원 씨만 원한다면 영상통화도 가능해요.]
* * *
“흠흠.”
전화를 끊은 기준이 한 발짝 뒤에 선 원 실장을 흘긋 돌아봤다.
“왜요?”
기준이 묻자 원 실장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고 싶은 말이 턱밑까지 차 있었지만 기준의 옆에서 그를 보좌한 게 세월이 얼마인가. 그가 이사 자리에 오르는 날부터 여태 붙어 있었는데 이제는 원 실장도 기준이 뭐를 좋아하고 뭐를 싫어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공주님 100일이라고요.”
“네, 요즘 얼마나 예쁘게 구는지 몰라요. 방긋방긋 웃어 줄 때마다 발길이 안 떨어진다고요.”
그에 원 실장이 이를 으득 물었다.
“그래도 육아휴직은 안 되십니다.”
“뭐, 그래요.”
기준은 다시 복도를 슥슥 걸었다.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걷는데 컴퍼스도 길어서 원 실장은 그 뒤를 늘 바쁘게 따랐다.
“100일 파티는 따로 하십니까?”
“희원 씨가 가족들 모시고 조촐하게 하고 싶은 모양이에요. 그래 봐야 양가 가족이 워낙 많으니 조촐해질 수가 없지만요.”
“저도 작은 선물이라도 하고 싶은데요.”
“네, 희원 씨한테 뭐 필요한 거 있냐고 물어볼게요.”
기준은 이사실 앞에서 문고리를 잡았다가 오도카니 멈추어 섰다. 원 실장이 무슨 일이냐는 듯 기다리자 기준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100일 선물로 별장을 주겠다고 했는데 희원 씨가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요. 왜 그럴까요?”
원 실장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고는 아, 이 사람이 만날 회사에서도 ‘희원 씨, 우리 희원 씨가.’를 입에 달고 살아서 그렇지 사실 굉장한 재벌이었지 싶었다. 그나저나 조금 전까지 통화를 해 놓고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럴 때 뭐라고 해야 할지 원 실장은 곰곰 생각해 보았다.
“사모님 성격상 선물을 물리지는 않으실 것 같고요, 그렇다면 희원 님도 답례품같이 뭐 간단한 저녁을 대접한다든가 이런 게 좋지 않을까요?”
“음.”
기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하죠.”
그리고 그날 밤, 기준은 퇴근 뒤에 들어가자마자 희원을 끌어다 자기 허벅지에 앉혔다. 랑일이가 목욕 중이라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자기도 마미랑 붙어 앉겠다고 난리가 났을 거였다.
“희원 씨. 어머니랑 통화해 봤는데, 선물은 일단 받고 그 대신에 답례로 부모님 한번 모시고 저녁 먹는 건 어떨까요?”
희원은 자기 등을 쓰다듬는 커다랗고 다정한 손에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귤희가 태어나고 삼칠일 후에 이름 때문에 양가 부모님 오신 다음에는 희원 씨 힘들게 왜 집에서 밥을 먹느냐고 하는 바람에 이 회장과 박 여사는 사진으로만 귤희를 보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나마 희원네 어머니는 낮에 종종 오시곤 하는데 박 여사에게는 기준이 괜히 낮에 와서 육아로 지쳐서 잠시 쉬는 사람 힘들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바람에 박 여사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다.
희원이 몇 번 전화를 해서 어머니 왜 안 놀러 오시냐고, 귤희 보러 오시라고 했지만 박 여사는 그럴 때마다 웃으며 바쁘다고 할 뿐이었다. 배후에 성질 지랄 같은 기준이 버티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기준은 마치 선심 쓰듯 희원 씨가 너무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는데 희원 씨 마음 편하게 저녁 한 끼 먹자고 했다. 물론 밖에서 말이다. 하지만 희원의 생각은 달랐다.
“그럼 주말에 부모님 집에 오시라고 해야겠어요. 우리 뭐 해 먹을까요?”
희원이 신난다는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기준이 살짝 굳었던 얼굴을 얼른 풀고는 마주 웃어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희원 씨 힘들게 왜 집에서 먹느냐고 하고 싶었지만 한 번쯤은 희원이 해 달라는 대로 해 줄 필요도 있었다.
“그래요. 대신 장은 내가 봐 올게요.”
“어어! 이번에는 내가 요리할 거예요. 물론 기준 씨보다는 잘 못하겠지만, 그리고 이모님만큼 잘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뭔가 해 드리고 싶어요.”
기준은 일 못 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생각했다.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왜 자꾸 몸을 혹사시키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서 대답하지 않았지만 희원이 계속해서 허벅지에 앉은 그 상태로 조르고 졸랐다.
“응? 응? 왜 대답 안 해요?”
“그래요, 알았어요. 희원 씨 원하는 대로 해요.”
희원이 배시시 웃으며 기준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고마워요, 기준 씨. 중간에서 잘 조율해 줘서.”
기준이 일어나려는 희원을 얼른 붙잡아 다시 앉혔다. 희원이 왜 그러냐고 멀뚱멀뚱 쳐다보자 기준이 말했다.
“그렇게 고마우면 뽀뽀 쪽으로 끝나면 안 되죠.”
“그, 그럼요?”
“혀라도 넣어 줘야죠.”
“네?”
희원이 펄쩍 뛰었지만 기준은 희원의 허리를 감싸고는 놓아줄 생각을 안 했다. 그때 저 멀리 욕실에서 랑일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미, 나 목욕 다 했어요!”
희원이 이때다 싶어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꽁지 빠지게 도망갔다.
“어유, 이랑일 아무튼!”
어느새 불룩해진 앞섶을 기준이 씁쓸하게 내려다봤다.
한편 희원은 랑일이를 욕실에서 잘 데리고 나와서 옷까지 싹 갈아입힌 뒤 조용히 박 여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머니, 토요일에 드시고 싶은 거 말씀 주세요! 제가 맛있는 거 대접하고 싶어요. 그리고 어머니, 저 기준 씨 어릴 때 앨범 구경시켜 주시면 안 돼요? 들고 오시기 너무 무거울까요? 그렇다면 사진 몇 장만 빼다가 보여 주셔도 되는데. 요즘 랑일이 크는 거 보니까 기준 씨 어렸을 때가 너무 궁금해서요. 네? 꼭이요.]
잠시 뒤 박 여사에게서 회신이 왔다.
[그래, 희원아. 우리 토요일에 맛있는 것 먹자. 그런데 너는 기준이 뭐가 좋다고 어릴 때 사진을 보여 달라니. 걔 진짜 볼 거 없어. 어릴 때도 귀여운 구석 하나 없었어. 하지만 우린 또 보면서 놀리는 재미가 있으니까 내가 앨범 가져갈게. 토요일에 보자.]
* * *
‘시부모님 오시는 게 뭐가 저리 즐거울까?’
기준은 희원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원래 시댁의 ‘시’ 자 싫어서 ‘시금치’마저 꼴도 보기 싫다는 사람도 있다는데, 도대체 희원 씨는 뭐가 저리 좋을까? 기준은 아침부터 분주한 희원을 정말 궁금한 눈으로 살폈다.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자기 부모님이지만 기준은 누군가가 집에 오는 게 귀찮을 뿐인데 희원은 신나서 난리가 났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청소를 하고 기준과 랑일이 아침을 차려 주더니 장을 보러 가겠다고 했다.
“기준 씨, 귤희 깨면 분유만 좀 먹여 줘요. 나 마트 갔다 올게요!”
당장이라도 나갈 기세에 기준이 희원의 손목을 잡았다.
“지금 나가 봐야 아직 마트 문도 안 열었어요.”
“9시부터 열어요.”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밥 같이 먹고 조금 이따가 나갔다 와요. 마트 가는 것까지 말리지는 않을게요.”
기준은 마음 같아서는 장도 자기가 보고 음식도 자기가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까지 하겠다고 그러면 왠지 희원이 삐칠 것만 같아서 그건 양보했다.
“알았어요. 그럼 같이 밥 먹어요.”
희원은 식탁 앞에 앉아서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해서 저녁에 무얼 먹을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돼지고기 수육 좋아하실까요? 아니면 능이 백숙은요? 월남쌈을 할까요?”
희원의 눈이 초롱초롱 별을 박은 것처럼 빛났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당연히 좋죠. 나 어머니랑 아버지 오랜만에 뵙거든요. 그렇게 오시라고 했는데도 바쁘다고 하셔서 얼마나 아쉽고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아니, 희원 씨는 전화도 진짜 자주 하고 채팅방에서 메시지도 많이 주고받잖아요. 나랑 대화하는 것보다 더 많이 하는 것 같던데.”
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아이처럼 웃었다.
“뭐예요. 기준 씨 또 질투해.”
“아유, 아빠. 질투 좀 그만해.”
옆에서 밥을 먹던 랑일이가 맞장구를 쳤다.
랑일이는 하도 많이 ‘질투’라는 단어를 들어 와서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희원이 랑일이랑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할 때, 둘이 꼭 끌어안고 있을 때, 랑일이를 허벅지 위에 올려 두고 등을 도닥일 때 등 희원과 랑일이 단둘이 무언가를 하면 꼭 기준이 와서 ‘나는, 나는요!’라고 외쳤다. 그럴 때마다 마미가 ‘아들한테 질투 좀 하지 마세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그건 랑일이도 마찬가지였다.
마미가 아빠랑만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할 때, 랑일이가 마미랑 아빠 사이에서 잤는데 일어나 보면 마미, 아빠 그다음에 랑일이가 있을 때, 마미가 아빠 허벅지에 앉아 있을 때 랑일이도 마찬가지로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랑일이, 질투 좀 그만해. 어차피 마미는 아빠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거봐요, 기준 씨. 랑일이도 질투 그만하라고 하잖아요.”
희원이 웃으며 랑일이와 눈을 맞췄다. 랑일이는 뭔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제 아빠를 힐긋 쳐다봤다.
“누구는 시댁이 미국에 있었으면 좋겠다고들 하는데, 나는 우리 이사한 게 좀 아쉬워요. 차라리 그때 기준 씨 원래 살던 집에서 살걸. 거기가 본가랑 더 가깝잖아요. 걸어서 몇 분 걸리지도 않았는데.”
희원이 여전히 아쉽다는 눈을 했다.
기준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도 박 여사가 너무 희원을 불러내는 것 같아서 불만인데 예전 집에 살았으면 아마도 거의 매일을 봤을 거다.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쳐졌다. 희원 씨를 빼앗기는 건 주말 쇼핑으로도 충분했다.
“절대 그 동네로 이사할 생각은 없어요.”
“누가 뭐라고 했나요, 뭐.”
희원이 어깨를 으쓱이면서도 질투심 많은 기준을 조금 귀여워했다.
“마트 혼자 다녀올 수 있어요?”
“어쩔 수 없잖아요. 누구 한 명은 귤희 보고 있어야 하니까요.”
“내가 다녀올까요? 희원 씨가 재료 적어 주면 다녀올게요. 밖에 좀 춥잖아.”
“기준 씨는 나를 너무 과보호해.”
기준이 허 하고 헛웃음을 켰다.
“정말 과보호가 뭔지 보여 줄까요?”
“아니요. 아니에요. 제가 실언했어요. 다녀올게요!”
희원은 행여 기준이 더 두꺼운 옷과 목도리, 장갑, 모자 등으로 또 자신을 눈사람처럼 만들까 봐 얼른 인사를 하고 집에서 달려 나왔다. 뒤에서 랑일이가 손을 흔들었다.
* * *
“어서 오세요! 밖에 춥죠?”
희원이 들어오는 박 여사와 이 회장을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거실에서 놀던 랑일이가 희원의 뒤를 바짝 붙어서 달려 나오며 이 회장에게 폭 안겼다.
“녀석, 그렇게 뛰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이 회장은 랑일이를 품에 잘 안아서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랑일이도 할아버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우리 랑일이는 일곱 살 되더니 엄청 컸구나. 좀 있으면 안지도 못하겠어.”
“할아버지, 나 많이 컸지요?”
“누가 이렇게 많이 먹여서 쑥쑥 크게 한 거야.”
“마미가 맛있는 것 엄청 해 줘요. 마미가 해 준 밥은 꿀맛이에요.”
이 회장과 박 여사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단 한 명 웃지 못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기준이었다.
“와, 아들은 키워 봐야 소용없다고 하더니만 딱 맞는 말이네.”
이랑일이 철저하게 희원의 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최근까지도 기준은 여전히 희원보다 더 많이 요리했다. 기준이 요리를 잘하고 좋아하는 것 외에도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본 희원을 그렇게라도 좀 쉬게 해 주고 싶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희원은 기준도 하루 종일 일하고 왔는데 쉬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지만 요리는 수많은 집안일 중에서 기준에게 있어서는 전혀 힘든 일이 아니기에 상관없었다. 그런데 누가 랑일이 말을 들으면 희원이 요리 담당일 줄 알 것 같았다.
“그 말을 내가 이기준한테 들을 줄을 몰랐네.”
박 여사가 혀를 찼다. 누가 할 소리인지 원.
“어머니, 좀 자주 오시지 그러셨어요.”
그 말에 박 여사는 ‘네 옆에 껌처럼 달라붙어 있는 저놈 새끼 때문에 못 왔단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그저 온화한 웃음으로 무마했다. 어쨌든 박 여사 입장에서는 기준이 희원에게 잘하는 게 좋았으니 말이다.
제 둘째 아들은 인간답지 않더니 희원을 만나고 이제야 인간다워졌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굴었는데 이제는 팔불출도 그런 팔불출이 없었다. 하지만 박 여사는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희원에게 고마웠다.
“희원이 몸은 좀 괜찮니?”
“그럼요. 이제 살도 좀 찐 것 같아요.”
희원의 대답에 기준과 박 여사가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마치 ‘어디가?’ 하고 묻는 것 같았다. 그에 희원이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도 그럴 게 귤희 가졌을 때도 그리 살이 붙지 않았는데 낳고 나니 다시 쏙 빠져서 이전으로 돌아와 버렸다.
기준과 박 여사는 한목소리로 희원이 너무 말랐다고, 여기서 5킬로그램만 더 쪘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먹어도 희원은 살이 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 희원이 잘 먹고 잘 자야 살도 좀 붙을 텐데. 원래 갓난아기 키울 때 잠을 잘 못 자긴 하지. 그러니까 기준이가 집에 있을 때 충분히 잠 좀 자 둬. 알았지?”
희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만큼 잘하는 남편도 없는데, 그래도 박 여사의 눈에는 모자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와, 근데 아버지, 혹시 이거 앨범이에요?”
“그래, 앨범 보고 싶다고 했다며.”
“네! 근데 무거우셨겠어요.”
희원이 죄송스러워하자 이 회장이 고개를 저었다.
“차 타고 왔는데 뭐가 무겁겠니. 식사하고 같이 보자꾸나.”
희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저거 내 앨범은 아니죠?”
기준이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묻자 박 여사가 “왜 아니겠니?” 하고 대답했다. 그에 기준이 미간을 확 좁혔지만 박 여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희원의 팔짱을 끼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니 왜 앨범에 꽂혀서…….”
기준이 탄식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희원이 저녁으로 한 음식은 능이 백숙이었다. 안 그래도 집에 능이버섯이 있던 차였다. 선물받은 것인데 국내산 능이버섯을 얻기란 참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그걸 이전에 선물받은 게 기억났다.
닭은 기준도 랑일이도 좋아해서 오랜만에 희원은 솜씨를 부려 보았다. 보글보글 끓는 뚝배기에 담긴 뽀얀 국물이 벌써부터 군침을 돌게 만들었다.
“희원아, 이 귀한 능이버섯이 어디서 났어?”
“선물받았어요.”
“그럼 희원이 몸보신하는 데 먹지.”
“어머니랑 아버지랑 같이 몸보신하면 좋잖아요.”
희원의 맑은 미소에 두 분도 같이 웃었다.
저녁을 배부르게 먹고는 디저트로 과일을 깎으려고 하는데 기준이 나섰다.
“희원 씨 가서 앨범 봐요. 실물 멀쩡한 남편이 여기 있는데 앨범까지 가져다 달라고 하고. 가서 봐요, 얼른.”
투정하는 기준이 귀여워서 희원이 부모님 안 보는 사이에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거실로 나가서 거실 한복판에 앨범들을 펼쳤다.
“와! 어머니! 이 아이가 기준 씨예요? 진짜 귀엽다.”
희원은 혼자 감탄하며 핸드폰으로 사진을 찰칵찰칵 찍어 댔다. 연신 “진짜 귀엽다!”, “어릴 때부터 너무 잘생겼구나!”, “정말 인기 많았겠다!” 칭찬을 해 대며 사진을 핸드폰으로 찍는 희원을 이 회장과 박 여사는 그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부부는 내심 바라고 또 바랐다. 희원의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기를 말이다.
* * *
6세를 마치고 봄방학을 한 랑일이는 종일 희원과 같이 있을 수 있어서 그저 행복했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자고 늦잠도 실컷 자고 희원에게 폭 파묻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랑일이는 아직 자요?”
자신을 배웅하려고 현관 앞에 선 희원의 뺨을 어루만지며 기준이 물었다.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자는 게 조금 늦어지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늦어지고 있어요. 이번 주만 그렇게 하고 다음 주에는 다시 조정하도록 해야죠. 그다음 주부터는 다시 유치원 가야 하니까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피식 웃으며 뺨에 입을 맞췄다.
“누가 유치원 선생님 아니랄까 봐.”
이번에는 희원이 기준의 뺨에 입을 맞추고 정장 어깨를 털어 주었다.
“맞다. 랑일이 원복이 작아져서 새로 맞춰야 할 것 같아요. 작년 말에는 바짓단 내려서 입혔는데 그새 부쩍부쩍 자라서 이제는 더 내릴 바짓단도 없어요.”
“뭘 고민해요. 하나 맞추면 되지.”
“그래서 오늘 엄마한테 귤희 맡기고 랑일이랑 나갔다 오려고요.”
“그러지 말고 내가 오늘 일찍 퇴근할까요? 귤희 내가 볼게요. 어머니 힘드시잖아.”
희원이 잠시 생각하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두 아이의 아버님. 자꾸 그렇게 퇴근할 생각 하시면 안 돼요. 원래 남자는 일할 때 멋있는 거랍니다.”
희원이 기준을 돌려 세우고는 어깨를 툭툭 밀었다.
“이러다 지각하겠어요. 어서 가세요.”
“혹시 원 실장님하고 통화하고 그래요?”
어깨를 두드리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희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갸웃했다.
“아니요. 설마 그럴 리가요.”
“아닌데! 지금 잠깐 멈칫했는데!”
“아니에요. 나는 내 남자가 일할 때 그렇게 멋있더라. 얼른 가요. 이사님이 모범이 되셔야죠. 늦게 가고 그러면 직원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신발을 신던 기준이 희원을 응시했다. 희원은 그저 생긋 웃을 뿐이었다.
원 실장이 며칠 전 전화해 와서 제발 이사님한테 ‘일하는 남자가 멋져 보여요.’ 이 한마디만 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조만간 4월부터 또 바빠질 텐데 그때 야근하지 않으려면 미리미리 일을 해야 한다며 희원 님도 이사님 늦게 퇴근하는 거 싫지 않느냐고 사정하고 또 사정했다.
“이사가 조금 늦겠다는데 그게 뭐 잘못인가?”
“아유, 또 왜 이러실까? 지각 한 번 안 하시는 분인 거 다 알고 있는데 말로만. 얼른 다녀오세요. 돈 많이 벌어 오세요, 여보.”
희원을 노려보던 기준이 갑자기 희원을 끌어다 안았다.
“한 번만 더 해 줘요.”
“뭐를요?”
“그 여보 소리. 응?”
기준이 입술에 계속 도장을 찍는 바람에 희원은 입을 열지도 못했다. 여보 소리를 해 달라고 해 놓고는 이렇게 끌어안고는 입을 맞추면 어쩌자는 건지.
“마미!”
저쪽 복도에서 랑일이가 희원을 찾으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희원이 얼른 기준을 밀어냈다. 기준의 얼굴이 불퉁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응, 랑일아. 마미 현관에 있어.”
랑일이가 모퉁이를 돌아서 이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그사이에 희원은 얼른 기준의 귀에 속삭였다.
“여보, 오늘도 파이팅이요! 힘내고 사랑해요.”
그제야 기준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희원은 랑일이를 얼른 안아 들고는 같이 손을 흔들었다.
“랑일아, 아빠 다녀오세요, 해야지.”
“네, 아빠 빠빠이!”
랑일이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자 기준이 랑일이 이마에 한 번, 희원의 뺨에 한 번 입을 맞추고는 그제야 현관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열린 문틈으로 들어오자 기준이 행여 찬 바람에 두 사람이 감기라도 걸릴까 봐 얼른 밖으로 자취를 감췄다.
“으아! 추워.”
“그러게. 얼른 안으로 쏙 들어가자!”
희원이 랑일이를 품에 안은 채 빠르게 걸어 안으로 들어갔다.
“랑일이 맘마 먹을래요?”
“네!”
“그 전에 세수 좀 하고 올까?”
희원이 랑일이 눈곱을 떼 주며 말했다. 랑일이가 희원의 손을 잡아서 화장실을 가리켰다. 같이 화장실에 가자는 소리였다.
희원은 랑일이가 봄방학 2주 동안은 충분히 자신의 품을 즐기길 바랐다. 아무리 의젓해도 분명 귤희가 태어나면서 결핍이 생겼을 텐데 랑일이는 그걸 표현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희원은 랑일이가 짠하기도 했다.
랑일이는 그 뒤에도 계속해서 희원에게 달라붙어서 졸졸 쫓아다녔다. 마치 엄마 닭 따라다니는 병아리 같아서 희원은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다가도 문득 뒤돌아 랑일이를 꼭 끌어안는다든지 아니면 랑일이 이마에 입을 맞춘다든지 그랬다.
점심 무렵 두 사람은 희원의 엄마를 기다리며 귤희를 보며 어르고 있는 중이었다.
“까꿍!”
랑일이가 아기 체육관의 버튼을 누르며 노래를 따라 부르자 귤희도 제 오빠를 보며 몸을 버둥거리며 좋아했다.
“우리 귤희가 신났어요!”
랑일이가 즐거운 듯 노래를 더 크게 불렀다. 희원은 옆에서 그런 둘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물론 그 동영상은 각 부모님이 있는 채팅방과 기준에게 전달되었다.
딩동. 벨이 울리는 소리에 희원이 말했다.
“할머니다!”
“어, 할머니! 마미 내가 문 열게요!”
랑일이가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희원은 귤희와 눈을 맞추며 까꿍 하고 웃어 보였다. 귤희가 발을 버둥버둥 움직이며 꺄르르 웃었다. 웃을 때 영락없는 이희원이어서 희원 본인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이 집안에서 희원을 가장 좋아하는 귤희가 희원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우리 귤희가 마미한테 안기고 싶어요. 마미가 안아 줘요.”
희원이 귤희 뒤통수를 잘 받치고는 품에 안았다. 귤희가 희원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마미! 할머니 왔어요!”
“응, 왔어요, 아니고 오셨어요.”
“네, 오셨어요!”
방에서 나오니 희원의 엄마가 랑일이를 꼭 끌어안은 채 들어오고 있었다.
“엄마!”
“우리 랑일이가 며칠 못 본 새 엄청 컸다. 겨울이라고 먹고 잠만 자나 봐. 예쁘게 살이 올랐어. 키도 쑥 크고.”
“응, 잘 먹어서 예뻐.”
엄마는 손을 씻고 나오더니 귤희를 품에 안았다.
“우리 귤희 잘 있었어요?”
엄마의 표정은 희원을 바라보던 것과는 또 달랐다. 랑일이를 예뻐하던 눈빛과 귤희를 바라보는 눈빛이 똑같아서 희원은 그럴 때마다 엄마에게 정말로 고마웠다.
“랑일아, 우리 할머니 오셨으니까 유치원 옷 맞추러 나갈까?”
“네!”
희원은 드레스 룸에 가서 랑일이 옷을 꺼내어 입히고 그다음에 귤희 분유를 타서 엄마 손에 쥐여 주었다.
“엄마, 귤희 조금 이따가 먹이면 돼. 우리는 나가서 점심 먹고 원복 맞추고 올게.”
“그래. 귤희는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놀다 와.”
“할머니, 다녀오겠습니다!”
희원은 랑일이의 손을 잡고는 주차장으로 가서 이미 시동을 켜 둔 차에 쏙 들어앉았다. 아직 어려서 뒷좌석에 앉은 랑일이는 예전처럼 희원과 뒷좌석에 앉아서 같이 가지는 못하지만 오랜만에 단둘이 갖는 시간에 그저 신이 났다.
“랑일아, 이제 출발할게!”
희원은 조심스레 차를 몰기 시작했다.
보통 유치원은 원복을 직접 유치원에 문의해서 제작하곤 했지만 놀 유치원은 워낙 규모가 크고 원생이 많아서 유치원 근처에 학교 교복집처럼 원복집이 있었다. 주차를 마친 희원이 랑일이 손을 잡고 원복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아이 원복 좀 맞추려고요.”
“일곱 살인가요?”
“네, 맞아요. 랑일아, 코트 벗을까?”
희원이 랑일이 코트를 벗기다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었다. 랑일이가 따라서 배시시 웃었다.
원복집 사장님은 랑일이 치수를 꼼꼼하게 재고는 원복이 나오는 날짜 등등을 기록하며 말했다.
“그런데 아빠랑 아들이랑 사이가 엄청 좋네요.”
“저 마미랑 제일 친해요.”
사장님 말을 듣고는 랑일이가 먼저 대답했다. 랑일이는 백화점을 가나, 하물며 동네 편의점을 가나, 어디서든 누군가 희원과 닮았다고 하는 소리를 가장 좋아했고, 희원과 엄청 사이가 좋아 보인다는 소리를 그다음으로 마음에 들어 했다.
“저는 마미가 가장 좋아요.”
묻지도 않은 말에 랑일이가 엄지를 딱 치켜들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원복집 사장님은 그런 랑일이를 엄청 귀여워했다.
둘은 가게를 나와서 음식점으로 들어가는 길에도 손을 꼭 잡았다.
“마미!”
“응?”
희원이 길을 걷다 랑일이의 부름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숙여서 귀를 기울여 주었다. 랑일이가 희원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나는 우리 귤희도 사랑하지만요, 마미를 제일 사랑해요.”
그 말에 희원이 랑일이 귓가에 속삭였다.
“마미도. 근데 랑일아, 우리 아빠도 좀 사랑해 줄까?”
랑일이가 가만 서서 팔짱을 착 꼈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희원은 그런 랑일이가 점점 기준을 닮아 가는 것 같아서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지난번 부모님이 가져온 앨범을 보며 기준의 어릴 적 사진을 핸드폰으로 찍어 담았는데 분명 그 몇 장 중에 지금 랑일이가 취한 포즈와 똑같은 포즈를 한 기준이 서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희원은 속으로 어린 기준을 떠올리며 큰 기준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둘만 모르는 연애 외전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