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쁜 사람을 소유한 게 누구인지
출근길을 눈앞에 두고 있는 회사원은 아침만큼 분주한 시간이 없을 거였다. 그건 기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일찍 일어나서 준비한다고 해도 기준에게 변수는 늘 있었다. 랑일이가 생긴 뒤로는 말이다.
요즘은 더 그랬다. 희원이 산후조리가 끝난 뒤라 집에 오는 도우미는 끊은 상태였다. 희원도 기준도 다른 이가 집에 있는 것을 불편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아침에 더 정신이 없었다.
“랑일아, 아빠 식사하시라고 해.”
랑일이 원복을 싹 입히고는 머리를 빗겨 준 뒤 희원이 말했다. 귤희가 방금 전에 깬 탓에 기준은 기저귀를 갈고 있을 거였다. 희원은 랑일이가 귤희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난 뒤 식탁 위에 따뜻한 국과 살짝 미지근한 국을 놓았다.
귤희가 태어나기 전에는 세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아서 아침을 먹곤 했는데 지금은 불가능해져 버렸다. 귤희는 꼭 식구들이 일어나서 움직이면 자기도 일어났다. 그래서 희원이 같이 아침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아빠, 식사하세요!”
평소에는 ‘아빠, 밥!’ 하고 외치면서도 자신이 시키면 꼭 가서 정석대로 말하는 랑일이가 희원은 웃기고 귀여웠다. 랑일이는 기준을 데리러 들어갔으면서 결국에는 귤희에게 정신이 팔려서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들여다봤다. 이제 흑백 모빌에서 컬러 모빌로 바뀐 천장을 보며 귤희는 발을 구르며 까르륵거렸다.
상을 다 차렸는데도 부자가 나올 생각을 안 해서 결국 희원이 나서야 했다.
“랑일아, 얼른 먹고 기준 씨도.”
“우리 공주님 까꿍!”
“공주님, 오빠야, 오빠! 귤희야, 여기 봐!”
넋을 놓고 귤희를 보며 같이 웃고 있는 부자를 보며 희원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들 좋아요? 그러다 둘 다 늦어요.”
희원의 목소리에 그제야 둘이 돌아봤다.
“귤희야, 아빠랑 오빠랑 식사하게 우리 거실로 나가자.”
희원이 귤희를 안고 둘을 방에서 몰아냈다. 희원의 뒤를 기준과 랑일이가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 뒤를 따르는 아이들처럼 따랐다. 아침마다 있는 일이라서 이제는 뭐 색다를 것도 없었다.
기준과 랑일이는 식탁 앞에 앉아서도 희원의 품에 안긴 귤희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얼른 먹어요.”
희원의 말에 다시 숟가락을 열심히 놀리고 있기는 하는데 영 속도가 안 나는 게 문제였다. 귤희 안 태어났으면 큰일 날 뻔했네. 희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귤희에 대한 사랑이 지나친 둘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 우리 공주님, 아빠랑 오빠 잘 다녀오세요, 하자!”
아직 겨울이기에 기준은 절대 귤희를 안고 현관 앞까지도 못 오게 했다. 행여 찬 바람에 감기라도 걸릴까 염려해서다. 기준과 랑일이는 가방을 들고 현관이 보이는 복도 끝에서 이른 인사를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오빠 갈게.”
“다녀올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요. 공주님, 아빠 다녀올게요.”
기준이 희원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귤희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희원도 귤희의 손을 잡고는 둘에게 흔들어 주었다.
“자, 아빠랑 오빠 갔으니까 우리 귤희는 잠시 누워 있자.”
두 사람이 나가고 나니 집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희원은 귤희가 모빌을 보고 놀게 하고는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다른 집안일은 죄다 기준의 차지였다. 산후조리가 끝났음에도 기준은 희원의 손에 물 한 방울 못 묻히게 했다.
빠르게 설거지를 한 희원은 그 뒤에 분유를 탔다. 슬슬 배가 고파지는지 귤희는 자기 발을 잡고는 버둥거리다 조금씩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우리 공주님이 배고파요?”
희원이 웃으며 분유를 자기 손목 안쪽에 몇 방울 떨어뜨려 봤다. 온도가 적당하니 괜찮다고 생각하고 희원은 이제 귤희에게 분유를 먹이기 시작했다. 귤희는 희원과 눈을 마주하며 분유를 쭉쭉 빨아서 먹었다.
“우리 공주님 잘 먹네!”
희원이 웃으며 귤희와 눈을 마주했다. 그렇게 귤희가 트림까지 하고 서서히 꾸벅꾸벅 다시 잠에 빠져들면 새벽에 귤희 때문에 몇 번씩 깨곤 했던 희원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게 요즘 희원의 하루 일과 중 아침의 일상이었다.
눈을 조금 붙이던 중 희원은 누군가의 연락에 잠에서 깼다. 다름 아닌 루세였다.
“어, 루세 씨!”
―통화 괜찮아요?
“응, 괜찮아요.”
둘이 동갑이라서 그런지 희원과 루세는 친구처럼 종종 통화하곤 했다. 말이 종종이지 사실은 통화는 일주일에 두어 번, 메시지는 더 자주 주고받았다.
―집에 놀러 가도 돼요?
루세의 말에 희원은 밝게 웃었다. 마침 심심하던 차였는데 잘됐다 싶었다.
“설이는요?”
―설이 유치원 갔죠.
“아, 그렇구나. 그럼 얼른 와서 맛있는 거 먹고 같이 수다 떨어요.”
사실 희원은 집에까지 불러서 같이 놀 만한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요즘 낮이 꽤나 무료했는데 그러던 차에 받은 루세의 전화는 반갑기 그지없었다.
희원은 자고 있는 귤희를 다시 살피고는 거실로 나왔다. 냉장고를 열어서 먹을 만한 음식을 찾아보고 어떻게 해서 줄까 싶다가 루세가 요식업 종사자라는 게 생각나서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을 뻔했네.”
조금 뒤에 루세가 도착했다. 루세는 뭐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왔다.
“어서 와요, 근데 이게 뭐예요?”
“먹을 거랑 귤희 용품이요. 아기 체육관 아직 안 샀죠? 저번에 해준이가 물어봤는데 없다고 했다는데요.”
“기준 씨한테요? 아, 그래서 아기 체육관이 뭐냐고 나한테 물어봤구나. 기준 씨가 갑자기 전화해서 아기 체육관이 뭐냐고 그래서 설명해 줬더니 아직 사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랬구나. 고마워요.”
희원이 웃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루세는 자신이 가게에서 싸 온 음식들을 식탁 위에 쭉 펼치고는 브런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마치 자기 주방인 양 자연스러웠다.
“아직 아침 안 먹었죠?”
“어떻게 알았어요?”
“설이 키울 때 생각해 봤더니 똑같을 것 같아서요. 원래 아가랑 패턴이 똑같아지니까 아가 깨면 같이 깼다가 아가 자면 같이 자잖아요. 그때는 뭐를 먹고 내 시간을 갖는 것보다는 잠이 부족하니까 애 잘 때 얼른 자고 그랬어요.”
희원이 공감한다는 듯 웃었다.
“분명히 대충 먹고 그럴 것 같아서 브런치라도 좀 그럴싸한 거 해서 먹여 주고 싶어서 왔어요.”
“고마워요.”
“고맙긴요. 이런 거 누가 챙기겠어요. 겪어 봤던 사람들이나 아는 거죠.”
루세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남편들이 잘 챙기고 그런다고 해도 세심함이 몇 프로 부족하죠. 커피 있어요? 커피만 내려 주면 되는데.”
“응, 그럴게요. 잠시만요.”
희원이 옆에 와서 커피를 탔다. 그러고는 둘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루세 씨도 참 외로웠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루세가 웃었다.
“맞아요. 저는 일찍 결혼했는데 아는 친구도 없어서요. 저는 집이 여기가 아니니까요.”
루세는 재일 교포 3세라서 본가는 일본이다. 그러다 보니 정말 이곳에서는 해준만 믿고 의지하고 있는 거였다.
이 커플도 우여곡절이 많아서 연애 중간에 한 번 헤어졌다가 해준이 루세를 찾으러 일본에 가서 오랜 시간을 머물다 다시 데리고 왔다고 했다. 다시 연애를 하고 그러다 결혼 전에 임신을 했는데 루세는 그때 외로움을 겪었다. 지금은 다 지난 일이지만 그때 희원을 만났으면 참 좋았을 텐데 싶었다.
둘은 맛있는 브런치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서 사이를 넘어서 친구와도 같은 존재였다.
“근데 귤희 낳았는데도 몸이 예전하고 그대로네요?”
“그렇지도 않아요. 운동해서 살을 좀 빼야 하는데 기준 씨가 아직 운동하면 안 좋다고 못 하게 해요.”
“너무 과보호하신다. 이제 산후조리도 끝났는데.”
희원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우리 쇼핑하러 언제 가요? 어머니가 만날 우리 희원이도 얼른 껴야 하는데, 그러세요.”
“나는 뭐 사는 것보다 어머니랑 만나서 커피 마시고 밥 먹고, 이야기 나누고 그런 게 너무 좋더라고요.”
“응, 맞아요. 나는 진짜 해준이네 집안이 이렇게 화목하지 않았으면 여기서 더 외로웠을 것 같아요.”
희원은 공감했다. 기준네 가족이 유독 화목한 편이긴 하다. 시댁이 너무 화목하면 며느리들이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다행히 희원도 루세도 그 분위기를 좋아했다.
“복직하고 싶거나 그렇지 않아요? 만날 일하다가 집에서 애만 보면 너무 심심하던데.”
“귤희 보면 너무 예쁜데 아직 산후 우울증 기미가 조금 남았나 봐요. 정신없고 소란스러운 아침이 딱 지나면 어떨 때는 좀 허무하고 외롭고 그럴 때 있어요.”
“그럴 때는 나를 불러요. 어차피 가게는 오후 늦게 나가니까 낮에는 시간 되거든요.”
“응, 그럴게요. 고마워요.”
이런 감정을 기준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기준이 알면 정말로 육아휴직을 내고도 남을 터였다.
산후 우울증은 누구나 다 있다고 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아이를 낳은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감정이라고 했다. 누구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 눈물이 주룩주룩 난다고 했다. 하지만 희원은 가끔 무기력하고 허무함을 느끼는 정도지 앞서 말한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 모레 밸런타인데이잖아요. 이벤트 이런 거 뭐 할지 생각했어요?”
루세의 말에 희원이 깜짝 놀랐다. 사실 날짜가 어떻게 지나고 있는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날짜 가는 것도 몰랐구나. 그럼 이건 어때요? 내가 점심때 귤희 봐줄게요. 예쁘게 입고 몰래 회사 가서 놀래 주고 와요.”
루세의 권유에 희원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래도 될까요?”
“응! 귤희 걱정은 하지 말아요. 가서 점심도 먹고 시간 뺄 수 있으면 데이트도 하면 좋은데 그건 안 되려나? 아무튼 가서 깜짝 이벤트 해 주고 와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 이렇게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람이 가족이라는 것에 희원은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 * *
“어디 가요?”
자다 깬 기준이 희원의 손목을 잡았다.
“귤희 깬 것 같아서요. 더 자요.”
“아냐, 내가 갈게요.”
“아니에요. 조금 이따가 또 일어나야 하잖아요. 출근해야 하니까 더 자요.”
희원은 자신의 손목을 잡은 커다란 손을 풀고는 기준의 등을 도닥여 주었다. 기준은 언제 깼냐는 듯 다시 잠에 빠져들었고 희원은 이제 우렁차게 울 준비를 하는 귤희에게 서둘러 갔다.
매번 귤희 방에 네 식구가 잘 수 없어서 만든 해결책은 귤희 방문과 부부 침실 방문을 열어 두는 거였다. 그 뒤로는 랑일이도 제 방문을 열고 자곤 해서 이 집 안은 어째 방문이 필요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희원은 귤희 기저귀를 봐주고 분유를 얼른 타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귤희가 제 발을 잡고는 신경질을 부릴 준비를 했다.
“우리 공주님이 배고파서 깼어요?”
희원은 귤희 방문을 닫았다. 혹시 보채며 울면 기준이나 랑일이가 깰지도 몰라서였다. 아침부터 일과가 있는 둘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희원의 작은 마음이었다.
희원은 귤희를 잘 안고는 등을 도닥여 주다가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젖병을 물리니 귤희가 허겁지겁 쪽쪽 빨았다. 희원은 귤희가 자라는 것을 볼 때마다 신기하고 기뻤다. 정말 작았는데 언제 이만큼이나 컸는지 하루하루가 감동이었다.
“많이 먹고 잘 자서 무럭무럭 크자!”
희원이 귤희에게 흥얼흥얼 노래를 불러 주며 분유를 먹였다. 귤희는 제 발을 잡고 놀며 분유를 먹었다. 그러다가 젖병을 쥔 희원의 손을 꼼지락꼼지락 만졌다. 희원은 그런 귤희를 볼 때마다 예쁘고 귀여워서 가슴이 뛰었다.
분유를 다 먹은 귤희를 안아서 등을 쓸어 주니 금세 트림을 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귤희가 잠에 들자 희원도 귤희를 눕히고 옆에 누웠다. 방바닥 따듯하고 노곤하니 금세 졸음이 몰려와 희원도 잠에 빠져들었다.
한편 알람 소리에 아침 일찍 잠에서 깬 기준은 옆에 희원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찾으러 방 밖으로 나왔다. 둘 중의 하나였다. 주방에서 아침상을 차리고 있거나 귤희 방에 있거나. 거실로 나온 기준은 희원이 주방에 없음을 확인하고는 곧장 귤희 방으로 갔다.
“이불도 안 덮고는.”
기준이 얼른 방에 들어가서 이불을 가지고 와서 희원에게 덮어 주었다.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울 수가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서 기준은 조용히 방문을 닫아 주었다. 그러고는 오늘은 랑일이랑 둘이서 살금살금 출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준비를 하고 랑일이를 깨웠을 때는 자기를 깨우는 이가 희원이 아니고 기준임에 살짝 실망한 눈치였다. 하지만 랑일이도 이제 알고 있다. 아빠가 깨우는 건 마미가 귤희와 잠들어 있을 때라는 걸 말이다. 랑일이는 두 사람을 위해서 조용히 욕실로 향했다.
기준과 랑일이는 오랜만에 둘이서만 준비를 하고 아침은 가는 길에 간단하게 먹기로 했다. 그 전에 나가기에 앞서 귤희 방문을 열어 자고 있는 두 사람을 한동안 바라봤다.
“마미랑 귤희랑 똑같지.”
“응.”
귤희는 태어났을 때부터도 그렇게 희원 판박이더니 자는 모습도 희원을 닮았다. 둘의 모습에 랑일이와 기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빠, 마미한테 초콜릿 주려고 했는데.”
“이따가 갔다 와서 주자.”
“응.”
사랑꾼 부자는 마미를 위해 준비했던 초콜릿을 냉장고에 잘 넣어 두고는 출근길과 등원길에 올랐다.
* * *
희원은 집에서 출발했다는 루세의 메시지에 잠에서 깼다. 세상모르게 잤다. 기준과 랑일이가 깨우지 않고 나간 것을 알고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랑일이는 이따 저녁에 실컷 놀아 주고 기준은 조금 이따가 놀래 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두근거렸다.
아직 귤희가 깰 시간이 아닌지라 희원은 빨리 씻고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첫 임신 때는 몸이 그렇게 불지 않고 배도 많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니 진짜로 그런 건지 몸은 금세 예전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다만 운동을 못 해서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 그게 좀 속상했다.
희원은 하얀색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연한 오렌지색 니트를 입었다. 그러고는 아래는 물 빠진 청바지를 입었다.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추어 보고는 만족스럽게 웃다가 오랫동안 펌과 염색을 하지 못해서 살짝 처진 머리에 거울 앞에서 좀 좌절했다.
“뭐를 어떻게 해야 하지?”
살짝 길어 버린 검은색 머리를 보며 희원이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귤희가 태어난 뒤 밖으로 나간 게 거의 손에 꼽았다. 귤희 예방접종 아니면 나갈 일이 없었다. 장도 기준이 다 봐서 가져다주고 랑일이 등원 하원도 다 기준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는 바람에 요즘 기준은 아예 야근이라는 것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희원이 밖에 나갈 일이 더욱 없었다.
“여보세요.”
핸드폰 진동에 확인해 보니 루세였다.
“왔어요?”
―네.
“응, 문 열게요.”
루세는 혹시라도 초인종 소리에 귤희가 깰까 봐 전화를 하고는 조용히 들어왔다.
“와, 우리 형님 진짜 멋지네. 오늘 제대로 힘 줬는데요?”
루세가 들어오자마자 자신을 칭찬해서 희원은 그제야 좀 웃었다.
“근데 나 머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유치원 교사로 일할 때는 여자아이들 머리도 척척 땋아서 묶어 주던 희원이 시무룩해져 말했다. 루세가 웃으며 앉아 보라고 하며 드라이를 해 주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거 할 줄 알아요?”
“그냥 손으로 하는 건 이것저것 해요.”
그 손으로 하는 것에 재주가 있기로 유명한 희원조차도 혀를 내두르며 칭찬할 만한 솜씨였다.
“어때요? 좀 마음에 들어요?”
“응, 고마워요. 머리가 이렇게까지 긴 건 처음이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었어요.”
유치원 교사로서 늘 단정한 머리만 하던 희원이 조금 길어 버린 머리에 고민하던 차에 루세는 와서 슥슥 매만지더니만 긴 앞머리를 자연스럽게 드라이하고 긴 옆머리는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거울에 비친 희원의 모습이 그리 청순할 수가 없었다.
“오늘 형님 완전 청순한데요. 옷도 그렇게 입어서 누가 보면 대학생쯤 된 줄 알겠다. 누가 서른 넘게 보겠어요? 이러다 누가 대시하면 어쩌지?”
“농담하지 마요.”
“농담 아닌데?”
루세가 희원의 머리를 조금 더 정리해 주면서 말했다. 농담이라고 해도 루세의 말은 희원을 용기 있게 해 주었다.
“이거 주문한 초콜릿이요.”
“고마워요. 원래 내가 만들고 싶었는데 기준 씨가 눈치챌까 봐 집에서 아무것도 못 했어요.”
희원은 쿠키 굽는 것도 좋아해서 종종 랑일이를 위해서 쿠키도 구웠고 랑일이 간식으로 초콜릿도 만들었다. 그래서 이번 밸런타인데이에는 두 사람을 위해서 직접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는데 그러면 요즘 냉장고를 책임지고 있는 기준에게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정말로 성공한 이벤트를 해 주고 싶어서 희원은 직접 만든 초콜릿은 포기했다. 대신에 루세에게 주문했다.
루세는 요리만 잘하는 게 아니라 간식 종류도 잘 만들었다. 쿠키, 초콜릿은 물론 빵도 잘 구웠다.
“포장해 온 터라 다시 뜯기는 뭐하고 그래서 안에 사진 찍어 왔어요. 내부는 이렇게 생겼어요.”
루세가 보여 준 사진에 희원은 눈이 동그래졌다.
“너무 맛있겠다.”
“마음에 들어요?”
희원이 감동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이거 나중에 꼭 알려 줘요! 나중에라도 랑일이 간식으로 해 줄래요.”
“이러니 질투하죠. 형님 세상의 중심은 아직도 랑일이인 것 같아요.”
희원이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
희원은 잠에서 깬 귤희랑 조금 더 놀고 난 뒤 귤희가 잘 때쯤 되어 루세에게 맡기고는 집에서 나왔다. 루세가 자기 오늘은 오후 시간 충분하니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오라고 해서 희원은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낯을 가리지 않고 식구들 누구에게나 덥석 안기는 귤희에게 고마웠고 좋은 시간 보내라며 먼저 나서서 헤아려 준 루세에게 무척 고마웠다. 그리고 이 사실을 다 알면서도 비밀을 지켜 준 입 무거운 해준에게도 희원은 고맙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희원은 오랜만에 차를 몰고 기준네 회사로 향했다. 기준은 요즘 시키지 않아도 자기 스케줄을 미리 희원에게 다 알려 주었다. 무슨 일이 있거나 아니면 심심하면 전화하라는 뜻이었다. 희원이 부담 느끼지 않게 주저하지 않도록 한 배려였다.
기준이 미리 알려 준 스케줄에는 오늘 오전에는 회의가 하나 있고 점심은 비어 있는 상태였다. 희원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회사 안으로 들어가서 이사실에서 기다릴까 하다가 보는 눈이 많을 것 같아서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모처럼 데이트를 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설렜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서 희원은 몇 번을 심호흡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카페에 도착한 희원은 기준이 아닌 원 실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직 회의 중일 시간이었고 기준을 조금 더 놀라게 하기 위함이었다.
원 실장은 15분 정도 걸릴 것 같다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희원은 천천히 와도 괜찮다며 커피 마시며 기다리면 된다고 원 실장을 안심시켰다.
커피를 한 잔 시킨 희원은 창가에 앉아서 책을 한 권 읽으며 오랜만에 맞는 한가로운 시간을 가졌다. 루세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고 메시지를 보낸 희원은 이런 날 눈이라도 오면 딱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 기준이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저 잠시 앉아도 될까요?”
“네?”
누군가의 목소리에 희원이 시선을 올렸다.
“혹시 일행이 있으신가요?”
“네?”
“아까부터 봤는데 혼자이신 것 같은데 좀 앉아도 될까요?”
“아뇨, 좀 있음 일행이 올 거라서.”
“꽤 오래 기다리시는 것 같던데. 혹시 바람맞으신 거라면 저랑…….”
희원은 이런 적이 처음인지라 눈만 깜박거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사태를 좀 파악하다가 자기도 놀라서 입을 헤벌렸다.
“약속이 깨진 거라면 제가 커피 한잔 사도 괜찮을까요?”
“저 죄송한데 제가 일행이 올 거라서요.”
“꽤 오랫동안 기다리시는 것 봤는걸요. 들어오실 때부터 너무 예뻐서 계속 눈이 가더라고요.”
희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자기더러 예쁘다는데 정색을 하고는 저리 가라고 할 수도 없고 희원은 애초에 자기와 상관이 없다고 해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모질게 말할 성격이 못 되었다.
“오메가 맞으시죠? 향이 너무 좋아서요.”
“네?”
기준은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희원은 제가 귤희를 낳은 뒤에도 여전히 예전처럼 오메가 향이 안 나는 줄 알고 있었다. 집에서 간간이 맡아지는 제 향은 집 안에 예전부터 묻어 있던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메가 향이 난다고?
“오메가 맞으시구나. 우성 오메가신가 봐요. 정말 향이 짙은데 너무 예뻐요.”
자신의 향을 맡을 수 있다면 이 사람은 알파임에 틀림없었다. 기준이 오기 전에 해결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 희원은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저 알파 있어서…….”
“저도 알파예요. 그것도 저는 우성 알파.”
“나는 극우성 알파인데 무슨 볼일 있습니까?”
희원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문을 등지고 남자와 대치 중이었기에 기준이 오는 것도 몰랐다.
남자는 꽤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였다. 남자는 희원의 키와 비슷했는데 기준은 그보다 더 컸으니 말이다. 기준은 희원에게는 운동도 못 하게 하면서 저는 무슨 운동을 하는지 나날이 짱짱한 근육이 붙고 있었다.
“물었습니다. 무슨 볼일 있냐고 물었는데 왜 대답을 안 하십니까? 방금 전까지 뚫린 입이라고 잘만 말하던데요.”
“기준 씨.”
희원이 기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괜히 그러지 말라는 뜻이었다.
“죄송합니다. 일행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알파는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그게 기준의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우리 여보가! 그렇게 일행이 있다고 계속해서! 말하는데, 들은 척도 안 하고. 참 나, 기가 막혀서. 우리 여보가! 예쁜 건 사실이지만 어딜 그냥 알파가 들이대고 그러는지 하!”
기준이 진심으로 기가 막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말끝마다 “여보가!” 하고 힘주어 말하는 게 화가 잔뜩 난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알면 좀 그만 비켜 주시지요. 우리 여보랑 데이트해야 하니까.”
희원은 손바닥으로 자기 눈을 가려 버렸다.
‘아, 진심 창피하다. 부끄러워.’
분명 기준은 희원에게는 보여 주지 않는 차가운 얼굴을 하며 매섭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의 내용은 차마 눈 뜨고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저렇게 낯부끄러운 말을 서슴없이 뱉을 수 있는 사람인 줄 몰랐다.
기준의 새로운 면모를 볼 때마다 희원은 자기가 사기 결혼을 당한 게 아닌가 싶어서 어리둥절했다.
알파가 꽁지 빠져라 카페에서 도망가자 기준은 희원의 맞은편에 앉아서는 희원을 가만 바라봤다. 희원은 괜히 자기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과를 해야 할 분위기라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기준 씨.”
“뭐가 미안한데요? 설마 대시 받아서 기분 좋았어요?”
“아뇨, 그게 아니라. 괜히 와서 바쁜 사람 불러내고는 기분 안 좋게 해서요.”
“그게 왜 희원 씨 잘못이에요?”
희원이 고개를 숙였다.
“희원 씨, 나 봐요.”
희원이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어서 그저 도리질했다.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벤트 같은 거 하지 말걸. 뭘 하겠다고 귤희까지 맡기고는 여기까지 왔나 싶었다. 초콜릿 같은 거 안 줘도 그만이고 저녁에 주어도 됐을 텐데 말이다.
“희원 씨.”
“미안해요. 바쁜데 들어가 봐요.”
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휴.”
기준이 커다랗게 한숨을 쉬는 게 희원의 귀에 들려왔다. 희원은 가방을 얼른 챙겨 들고는 뒤로 돌았다. 그때 기준이 희원의 팔을 잡고 돌려서 품에 안았다.
“그래요. 희원 씨는 좀 미안해해야 해. 왜 이렇게 예쁘게 생겨서 온갖 벌레들이 다 달라붙게 해요? 숨겨 두고 나만 보는 것도 아까워 죽겠는데 이렇게 작정하고 예쁘게 하고 나와서는 사람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고.”
“네?”
희원은 눈물이 날 뻔해서 그렁그렁한 눈으로 기준을 올려다봤다. 기준이 그런 희원의 눈두덩에 입을 맞췄다. 나비 날개 같은 속눈썹에 눈물이 묻어났다.
“왜 울어요? 뭐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내가 누누이 말했죠? 희원 씨는 그렇게 모든 일을 자기 잘못으로 돌리는 건 고쳐야 한다고.”
“기분 나빴잖아요, 기준 씨가.”
“그럼 기분 좋겠어요? 웬 똥파리 같은 게 알파라며 으스대면서 내 거에 손대고 있는데? 그렇게 뿌리치면 어떻게 해요? 사람이 좋아서 말이야. 그럴 때는 잡은 손을 물어뜯든가 아니면 조인트를 까서라도 물리쳐야지.”
“네?”
희원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무슨 치한 퇴치도 아니고.
“그러다 다치면 어떻게 해요?”
“나 돈 많아요. 깽값 치를 돈 충분한데요.”
희원이 기준의 어깨를 솜방망이 같은 손으로 툭 쳤다. 나중에 랑일이랑 귤희에게 이런 대사를 칠까 겁났다. ‘아빠 돈 많아. 깽값은 얼마든 물어 줄 수 있으니 싸우고 싶은 대로 다 싸우고 오렴.’ 그런 생각에 희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답해요. 다음에는 그렇게 거절하는 거예요. 알았죠?”
“어떻게 그래요.”
“이거 봐.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라니까. 빨리 대답해요. 대답할 때까지 이렇게 껴안고 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 아무리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도 카페였다. 희원은 얼른 고개를 대강 끄덕였다. 그제야 기준은 희원을 품에서 떼어 냈다.
“점심 먹으러 갈래요?”
“응.”
“우리 여보 왔으니까 맛있는 것 사 줘야겠다.”
만날 기준 씨, 희원 씨 이렇게 불렀는데 여보라는 말을 들으니 괜히 부끄러워졌다. 희원의 하얀 뺨이 복숭앗빛으로 어여쁘게 물들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희원이 고개를 젓자 데이트하러 나와서 그런 것도 생각 안 하고 왔냐고 기준이 타박했다.
“그냥 잠깐만 얼굴 보고 가려고 했어요. 바쁠 것 같아서.”
“큰맘 먹고 왔으면 같이 점심도 먹고 커피도 먹고 좀 노닥거리다가 갈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갈 생각을 하지? 나랑 있는 게 안 좋은가?”
기준이 희원의 손을 잡고 카페 밖으로 나와서 거리를 좀 걸으면서 불퉁거렸다. 이제야 희원은 제가 아는 기준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어어! 웃어요? 지금 웃었어?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웃겨요?”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매번 그렇게 불퉁하게 굴면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수가 있나 싶어서요. 어떻게 기준 씨랑 있는 게 안 좋을 수가 있어요. 계속 같이 있고 싶죠.”
“그쵸! 그렇죠? 그래서 하는 말인데.”
기준이 또 뭔가를 말하려고 하자 희원이 기준의 눈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육아휴직은 안 돼요. 알았죠, 두 아이의 아버님.”
기준이 굉장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희원은 그게 너무 귀여워서 길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기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어! 지금 유혹하는 거예요? 자꾸 그러면 나 퇴근해요.”
“제발 그러지 말아요! 이러다 나중에 기준 씨가 회장 되면 놀 말아먹겠어요. 그렇게 되면 나도 실업자 되는 거 알죠? 놀이 있어야 놀 유치원도 있는 거예요.”
기준이 피식 웃었다.
“우리 여보는 나보다 일을 더 사랑해.”
희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나저나 우리 공주님은 누가 보고 있어요?”
“루세 씨가요.”
“응, 루세 씨한테 나중에 선물 사 줘야겠다.”
“응, 꼭이요.”
희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손잡고 걸으니까 연애할 때 생각난다. 그쵸?”
기준의 따듯한 손이 희원의 손을 꽉 쥐었다. 이제 희원의 손은 예전처럼 얼음장 같지 않았다.
“아! 맞다. 기준 씨 나한테 오메가 향 나요?”
기준이 우뚝 섰다가 금세 따듯하게 웃었다.
“몰랐어요? 아, 내가 말 안 했나? 오메가 향 진하게 나는데. 어쩔 때는 내 페로몬 향 때문에 희원 씨 향 안 날 때도 있는데 요즘에는 못 했으니까. 완전 달콤한 과일 향이 저만치서부터 나요.”
“근데 왜 말 안 해 줬어요? 나는 그게 집에서 내 향이 묻어서 나는 줄 알았어요.”
“일부러 말 안 했는데요?”
기준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왜요?”
“왜냐고요? 당연하잖아요. 나만 알고 싶으니까. 희원 씨 향이 그렇게 예쁜 것도, 그 향이 내 향으로 푹 싸이는 것도, 나만 알고 싶으니까요. 난 우리가 각인했으면 좋겠어요.”
“각인이요?”
“당연하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나만 바라봤으면 하는 거.”
희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자 기준이 바투 다가와서 속삭였다.
“난 지금 이 순간에도 희원 씨가 너무 예뻐서 죽을 것 같아요. 심장이 아직도 마구 뛰어요. 가슴이 막 두근거려. 늘 희원 씨한테 취한 사람처럼 살고 있어요. 사랑해요.”
폭풍 같은 사랑 고백에 희원이 결국 웃어 버렸다. 밸런타인데이 선물은 희원이 준 게 아니라 오히려 받은 기분이었다.
기준은 잡은 희원의 손을 자기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어어! 코트 주머니 처지는데.”
희원의 말에 기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봤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옷은 나중에 또 사면 돼요. 하지만 희원 씨랑 함께하는 이 시간은 지나면 되돌릴 수 없는 거잖아요. 옷보다 희원 씨가 훨씬 중요해요.”
“고마워요.”
“뭐가요?”
“늘 나를 먼저 생각해 줘서요.”
기준이 피식 웃었다.
“당연하잖아요. 희원 씨인데.”
희원은 지금이라도 발꿈치를 들어서 기준의 뺨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길거리이고 기준의 회사 근처이기도 했으며 그는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같이 점심 먹고 회사 올라가서 커피 마시고 가요. 그럴 시간은 있죠?”
“네. 루세 씨가 4시까지는 여유 있다고 했어요.”
“잘됐다. 나중에 내 카드 갖고 가서 루세 씨 봄 재킷 하나 사 줘요. 응?”
희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점심을 먹으러 가는 내내 손을 꼭 쥐었다. 기준이 자주 가곤 하는 일식집으로 향했다. 룸이 있어서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는 곳으로 기준이 이 회장하고 자주 찾곤 하는 곳이었다.
“근데 예약 안 해도 돼요?”
“네. 거기 우리 식구 전용 룸이 있어서 괜찮아요. 다른 가족 안 왔으면 비어 있어요.”
둘이 일식집에 들어왔을 때는 점심이 이미 지난 뒤라서 가게 자체가 조금 한산한 상태였다. 원래 희원의 계획은 점심때에 맞춰 점심을 먹는 거였는데 카페에서 작은 소동이 있어서 시간이 뒤로 밀렸다.
“이사님,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주인이 나와서 기준을 맞이했다.
“아, 희원 님하고 같이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희원 님.”
희원은 자기를 알고 있는 것에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에 기준이 작게 웃으며 희원에게 말했다.
“아버지랑 저랑 올 때마다 희원 씨 얘기 많이 했어요.”
“네, 사모님께도 희원 님에 대해 많이 들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안녕하세요.”
희원이 웃으며 인사하자 주인이 안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사모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고우시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사님, 조금 점심 지난 뒤에 오셔서 다행이네요. 방금 전까지 큰도련님께서 식사하고 가셨어요.”
“형이요?”
기준이 이상하다는 듯 시계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준네 회사는 여기에서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식사를 했다고?
“어디 가시는 길에 식사하고 가신다고 했어요. 정장 차림이 아닌 걸로 봐서 여행이라도 가시는 것 같았어요.”
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룸에 들어가 앉아 주문을 하고는 희원에게 말했다.
“형이 일밖에 모르던 사람인데 연애를 하더니 요즘 휴가란 휴가는 다 챙겨서 쓰는 것 같아요.”
“부러워요?”
희원이 따듯한 차를 마시며 웃었다. 그러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육아휴직은 안 돼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미간을 좁혔다. 마치 자기 생각을 읽힌 양 눈을 다른 곳으로 도로로로 굴리는 게 희원의 예측이 정확히 들어맞은 것 같았다.
“아빠가 열심히 일할 때가 멋진 거예요. 아니면 나 출산휴가 끝나 가는데 내가 복직할까요? 기준 씨가 육아휴직 할래요?”
“희원 씨 없는 육아휴직이 무슨 소용이에요. 희원 씨랑 하루 종일 붙어 있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기준의 말에 희원이 작게 웃었다.
“그렇게 종일 붙어 있다가 나중에 기준 씨가 나한테 질리면 어떡해요? 적당한 거리는 필요한 거라고 했어요.”
“누가요?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요?”
기준은 정말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 물었다.
“유치원의 어떤 엄마는 주말에 남편이 있는 게 그렇게 불편하다는 거예요. 숨이 막히고 갑갑하고. 차라리 독박 육아를 해도 괜찮으니까 남편이 밖에 나갔으면 좋겠대요.”
“설마 그거 희원 씨 얘기는 아니죠?”
“그런 사람이 아기 맡겨 놓고 이렇게 이벤트 하러 왔겠어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희원 씨 이야기였으면 정말 충격받을 뻔했어요. 근데 그럴 수도 있구나.”
기준이 남의 이야기이지만 충격이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희원은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연애할 때는 서로 헤어지는 게 싫어서 결혼을 한 거지만 결혼은 현실이었다. 30년가량을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이 방식을 맞추기란 쉽지 않은 거다.
결국 간극을 좁히지 못하면 그렇게 되는 거다. 아이 때문에 같이 살고는 있지만 같은 집에서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것은 현실이어서 서로 맞추고 또 맞추고 이해하고 또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희원은 기준이 넓은 이해심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앞에 두고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한데, 과연 희원 씨에 대한 콩깍지가 벗겨질 날이 오기나 할까요?”
기준이 희원에게 회 한 점을 내밀며 물었다. 희원이 기준이 내민 회를 입을 벌려 받아먹으며 웃었다.
“그 콩깍지 안 벗겨지게 제가 잘할게요.”
이번에는 희원이 기준에게 회를 내밀었다. 기준이 받아먹고 나서 대답했다.
“지금도 잘하면서 뭘 더 어떻게 잘해요?”
“이렇게 나 듣기 좋은 소리만 해 주는 기준 씨가 있어서 나는 권태기라는 건 모르고 살 거 같아요.”
둘은 그렇게 알콩달콩 사랑을 속삭이며 점심 식사를 했다. 점심을 다 먹고 난 뒤 둘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기준은 자신의 머플러를 희원의 목에 둘러 주었다.
“괜찮아요. 기준 씨 해요. 춥잖아요.”
“회사가 코앞인데 희원 씨 해요. 그리고 이렇게 춥게 입고 나오면 어떻게 해요.”
“차 가져왔잖아요.”
그러면서도 희원은 고맙다는 말을 했다. 기준은 이렇게 작은 행동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희원이 사랑스러웠다. 기준은 희원이 계속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에 들어가자 이미 점심시간이 끝났는지 로비는 조용했다. 간간이 손님을 맞이하러 내려오는 몇몇 사람들만이 있었다.
기준은 희원의 손을 꼭 붙잡고는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지나오는 길에 로비에서 몇몇 사람들을 마주했는데 사람들이 기준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희원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희원이 회사 안으로 들어온 건 손에 꼽히고 이렇게 나란히 가는 모습은 더욱 손에 꼽히기 때문이다.
기준은 아마 오늘 사내 메신저가 꽤나 시끄러울 것을 예상했지만 한 번쯤은 이렇게 희원을 자랑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일반인인 희원의 얼굴이 공개되는 것은 별로지만 이렇게 둘의 다정한 모습을 소수의 사람이 보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런 특별한 날 말이다.
“그때 기준 씨가 일정 알려 줘서 빈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오긴 했는데요, 혹시 다른 일정이 생겼거나 그런 건 아니죠?”
엘리베이터에서 조심스레 묻는 희원에 기준이 CCTV를 한 번 확인하고는 등을 돌렸다. 희원이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기준이 입꼬리를 올려서 웃고는 그대로 희원의 입술을 훔쳤다.
“어어!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희원의 얼굴이 분홍빛으로 변해서 기준의 어깨를 톡 때렸다.
“그래서 등으로 막았잖아요. 그리고 이제 와서 일정이 걱정돼요? 귀여워라.”
“귀엽다니요. 왜 그래요.”
희원이 자신의 입술을 팔로 가리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조차 귀여워서 기준은 희원의 팔을 내리게 하고는 다시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사실에 희원이 들어서자 비서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그중 원 실장이 가장 반겼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이거 한 분당 하나씩 드세요.”
희원이 들고 있던 커다란 쇼핑백을 원 실장에게 내밀었다. 원 실장이 얼떨결에 받으면서도 어리둥절해하자 희원이 웃으며 말했다.
“기준 씨 것만 챙기기 미안해서 여기 비서님들 것도 챙겼는데 마음에 드실까 모르겠어요.”
“희원 님 별말씀을 다 하세요. 저번에도 선물 챙겨 주셔서 저희가 엄청 감동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마다 다른 선물을 챙겨 주셨어요?”
“똑같은 거 드리는 것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 생각해서 드리는 게 더 감동일 것 같아서요.”
희원이 원 실장이 준 커피를 마시며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어느새 희원과 랑일이의 웃는 모습이 닮아 있어서 원 실장은 낳은 힘보다 기른 힘이 더 크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초콜릿 감사합니다. 오후에는 이사님 별다른 스케줄 없으니 편하게 시간 보내세요.”
“네, 감사합니다.”
원 실장이 나가자 희원이 기준에게도 선물을 내밀었다.
“이건 내 거예요? 밸런타인데이인데 주려면 나만 주지.”
기준이 불퉁하게 말하자 희원이 기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 치고는 말했다.
“질투쟁이.”
이번에는 기준이 희원의 손가락을 가지고 와서 손가락 끝을 잘근 씹으면서 대답했다.
“응, 나 질투쟁이. 그래서 지금 조금 못된 짓 하려고요.”
“응?”
“희원 씨 왜 이렇게 예쁘게 입고 나와서 내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그래요? 아주 혼나야겠어. 이렇게 작정하고 예쁘게 하고 나오면 어? 막 시답잖은 것들이 꼬이잖아요. 응? 내 건데. 희원 씨 내 건데, 그쵸? 응?”
기준이 희원을 소파에 눕히고는 목에 입을 맞췄다. 희원은 갑자기 이렇게 달려드는 기준이 당황스럽고 여기는 그의 일터인 데다가 밖은 비서들이 있기에 기준의 어깨를 죽죽 밀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밀릴 기준이 아니었다.
“읏!”
희원의 쇄골을 쭉 빨고는 기어코 키스 마크를 남긴 기준이 그제야 배부른 사자처럼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희원을 끌어다 제 허벅지에 앉힌 뒤 희원의 귀에 속삭였다.
“희원 씨가 너무 예뻐서 희원 씨한테 자국 남기다가 여기가 이렇게 됐어요.”
어느새 희원이 깔고 앉은 기준의 그곳이 딱딱하게 서서 희원의 엉덩이를 찌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얀 뒷목이 금세 붉게 변하는 것을 보며 기준이 이번에는 뒷목에 쪽쪽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희원은 극히 상식적인 사람인지라 이렇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얼른 기준의 허벅지 위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그걸 쉽게 허용할 기준이 아니었다. 기준은 희원의 뒷목에 계속해서 도장 찍듯 입술을 누르고는 배에 두른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몸에 닿은 기준의 숨결에 희원은 당장이라도 활활 타 버릴 것 같았다.
“기, 기준 씨.”
“으응.”
희원이 살짝 몸을 비틀며 깍지 낀 손을 풀려고 노력했다.
“저기, 여기 회사예요.”
“응, 알아요.”
“그러니까 이것 좀 놔 봐요.”
“으응.”
대답은 착하게 넙죽넙죽 하면서도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 게 분명했다. 손에 들어간 힘도, 뒷목을 누르고 있는 입술도 비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아무도 안 들어와요.”
기준이 다시 진득하게 뒷목을 빨며 대답했다. 말캉한 입술이 하얀 목을 먹어 치우듯 야금야금 빨아 댔다.
“누가 이사실을 허락도 없이 막 들어와요.”
“그러니까 이사님, 이제 좀 일을 하시는 게… 으읏!”
희원이 얼른 자기 귀를 잡고는 기준을 돌아봤다. 자신의 귀를 핥아 놓고는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쳐다보는 기준이 얄미워서 희원이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 표정 역시 기준의 눈에는 귀여워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기준이 희원의 입에 입을 짧게 맞추고는 입꼬리를 올려서 웃었다.
“귀여워.”
“쫌!”
“오늘은 별일 없는데 나도 퇴근할까요?”
“왜 이래요, 진짜!”
희원이 기준의 가슴을 밀면서 허벅지 위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기준은 끝내 놓아주지 않고는 희원의 가슴에 제 머리를 비볐다.
“퇴근하고 싶어요.”
“아니, 이 이사님. 이러시면 안 된다니까요.”
“희원 씨 집에 데려다줄래.”
“왜 이러세요, 정말.”
막무가내도 이런 막무가내가 없었다. 아이를 낳은 후 오히려 랑일이는 의젓한 오빠가 되어 가고 있는데 기준은 점점 어리광이 심해지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 한 번만 빼요.”
“뭐를요?”
희원이 화들짝 놀라면서도 설마 하는 눈으로 기준을 바라봤다. 눈에 황당함이 가득했지만 애써 아닌 척을 하고 있는 게 기준으로서는 그저 귀여웠다.
“이거.”
기준이 자신의 앞섶을 가리켰다. 불룩하게 올라와 바지를 뚫을 것 같은 모양새에 희원이 몸을 비적비적 움직이며 벗어나려고 들었다.
“지금 엉덩이로 문지르면서 자극하는 거예요?”
“아뇨!”
희원이 단번에 부정했다.
“아닌데? 지금 희원 씨가 문지르는 바람에 더 커졌잖아요. 한 번만 빼요, 우리.”
“왜 우리예요?”
지금 희원의 몸은 기준이 이러는 게 곤란하고 난감해서 반응하지도 않는데 우리라니! 희원은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 정말 기준이 이사실에서 뭔가를 할까 더럭 겁이 났다. 정말 이 남자가 미쳤나 봐!
“그럼 나만 발정했어요?”
“뭐라는 거예요, 정말!”
“그럼 이런 것도 각오 안 하고 왔어요? 와, 희원 씨 큰일 날 사람이네. 나를 아직도 몰라요?”
희원은 이 남자를 진정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빠르게 굴리기 시작했다.
“집에 가서!”
“응?”
“집에 가서 해요. 집에 가서!”
기준이 희원의 옷을 들추려고 옷 안으로 집어넣던 손을 멈칫했다. 그런데 언제 손을 여기까지 집어넣었지? 희원이 자기 옷 속으로 들어간 손을 잡아서 꾹꾹 내리눌렀다.
“왜요? 윗옷 말고 아래 벗기라고요?”
“아니!”
다시 부정했다. 희원은 황급히 뒷말을 이었다.
“집에 가서 하자고요.”
“내가 집에 데려다준다고 했더니 안 된다면서요.”
희원이 기준을 째려봤다. 하지만 기준은 뻔뻔스러운 표정에서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쫌! 집에 가서 다 하게 해 줄게요.”
“진짜?”
“진짜.”
“귤희 깼네 랑일이가 어쨌네 이러기 없어요!”
아, 이 남자가 욕구불만이었구나! 희원이 입을 헤벌렸다. 그동안 참을성 많게 기다린다 하였더니 여기서 터질 줄이야!
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이 화가 나서 일주일 동안 연락 안 했을 때 본가에서 다른 형제들도 있는데 자위를 했다고 하더니, 어째 그런 사람이 오래간다 했다.
“알았어요. 다 하게 해 줄게요.”
“가요!”
“어디를요?”
“집에 데려다줄래요.”
그러더니 기준은 벌떡 일어나서 뒤에서 희원을 품에 안았다. 여전히 발기한 기준의 것이 뒤에서 희원의 엉덩이를 찔렀다.
“이러고 어떻게 나가요!”
“코트 입으면 안 보여요. 빨리 가요.”
기준은 자기가 나서서 희원의 짐을 챙기더니 손목을 끌고 이사실을 박차고 나갔다. 원 실장이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준이 됐다며 손을 휘휘 젓고는 그대로 지나쳤다. 하지만 원 실장이 그렇게 가만히 서 있을 사람도 아니었다.
“이사님, 어디 가십니까?”
“퇴근이요.”
“네?”
놀라기는 원 실장 못지않게 희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사님, 왜 퇴근을…….”
“기준 씨, 아까 집에 데려다준다고…….”
“그럼 이렇게 하죠. 반차. 됐죠?”
올라온 엘리베이터에 기준은 그대로 희원의 손목을 붙잡은 채 탔다. 닫히는 문 사이로 당황한 원 실장이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신경 쓸 틈이 희원에게는 없었다. 희원 역시 황당함에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으니 말이다.
“희원 씨 차 어디 있어요?”
“저기요. 근데 잠시만.”
“그만. 나 진짜 참기 힘들어요. 아직도 얘가 안 가라앉아요.”
기준이 자신의 앞섶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이해하냐는 눈빛으로 희원을 한 번 바라보고는 그대로 희원의 차를 찾아서 올라탔다.
“좀 급하니까 내가 몰게요.”
“어어! 안전 운전 해야 하는데!”
“당연히 안전하게 운전하죠. 옆에 우리 희원 씨가 탔는데. 어쨌든 차는 내가 몰아요. 이렇게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나도 내가 뭔 짓을 할지 몰라요.”
기준이 그대로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어떻게 잘 갔다 왔어요? 좋아하죠? 공주님은 이제 막 자기 시작했어요. 근데 생각보다 빨리 집에 왔……!”
희원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루세가 생글생글 웃으며 묻다가 뒤에 따라서 들어오는 기준을 보고 놀란 표정으로 말을 멈췄다. 순식간에 희원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왜 수치심은 자기의 몫인지 희원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벌써 퇴근하셨어요?”
루세가 어색하게 웃었는데 기준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네. 오늘 반차 냈어요.”
기준의 대답에 희원은 아직도 어이가 없었다.
“루세 씨, 우리 공주님 봐줘서 고마워요. 나중에 희원 씨랑 하루 재미있게 놀아요. 사고 싶은 것도 사고요.”
“아아, 네.”
“오늘은 희원 씨가 너무 예쁘게 하고 나와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루세는 속으로 ‘뭐를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째 물어보면 안 될 분위기였다. 왠지 그보다 빨리 퇴장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여서 가방을 주섬주섬 들었다.
“루세 씨, 오늘 고마워요. 우리 일요일에 따로 만나요.”
“네네, 그래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희원이 얼굴이 벌게진 채 흐릿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루세는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한 인사말을 남기고는 얼른 집에서 후다닥 나왔다. 그러고는 도망치듯 차를 몰았다.
한편 집 안에서는 기준이 희원을 그대로 소파에 눕히고 그 위를 점령하고 있었다. 다짜고짜 입을 맞추려고 하는 기준의 입술을 턱 막은 희원이 시간을 확인하고는 “랑일이…….” 하고 중얼거리자 기준이 희원의 손을 잡고 살짝 떼며 대답했다.
“아까 원 실장한테 부탁했어요.”
“언제요?”
“주차장에 있는 내 차는 어떻게 하냐고 묻기에.”
희원이 놀랍다는 생각을 하자 기준이 희원의 손바닥에 입을 한 번 맞추고는 말했다.
“이제 해도 되죠?”
희원이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기준의 손은 희원의 니트를 들춰서 희원의 머리통을 빼내고 있었다.
“지금 속으로 내가 섹스에 미친 놈이라고 생각하죠?”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어요. 근데 이것만 좀 짚고 넘어가요. 그냥 섹스에 미친 놈이 아니라 희원 씨랑 하는 섹스에 미친 놈이에요, 나는.”
희원은 이 와중에도 생각했다. 섹무새처럼 아까부터 계속해서 졸라 대던 이 남자가, 어리광을 잔뜩 부리며 자기에게 치대던 이 남자가, 또 어느 한순간 이렇게 낭만적인 남자가 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누가 들으면 둘 다 제정신이냐고 하겠지만 말이다.
희원은 기준의 단단하고 따듯한 몸을 그대로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따듯한 품이 좋았다. 다정한 말 한마디가 그렇게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맡는 그의 페로몬에 자신의 몸이 녹아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원래부터 그의 페로몬 없이는 살 수 없었던 사람처럼 그에게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청량한 여름 숲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 희원은 자기가 그 숲을 가득 채우는 달콤한 여름 열매가 되고 싶었다. 그와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그런 열매 말이다.
“흣! 으흣!”
희원은 행여 자기 목소리에 방에서 곤히 자고 있는 귤희가 깰까 봐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기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희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새콤달콤한 달달한 향이 희원의 몸에서 났다. 머리를 아찔하게 만드는 향이었다.
“기, 기준 씨. 아아.”
기준은 희원의 쇄골을 깊게 빨아들였다. 하얀 몸은 금세 붉은색으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쇄골에서 가슴으로 내려가서 바짝 서 있는 유두를 혀끝으로 콕콕 찔렀다. 희원은 벌써부터 성기가 바짝 서서 귀두 끝이 반질반질 액체를 흘려 댔다. 뒷구멍도 기준이 몸을 핥고 빨 때마다 움찔움찔 움직였다.
“흣!”
기준이 입술을 모아서 희원의 오른쪽 유두를 빨아들였다. 등골을 타고 고통을 수반한 쾌감이 짜르르 올라와 머리를 휘저었다. 희원은 금세라도 쌀 것만 같았다. 그게 앞이든 뒤든 말이다.
기준은 계속해서 희원의 오른쪽 유두를 입 안에 넣고 쭉쭉 빨면서 왼손으로는 왼쪽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아이를 낳으면서 살짝 도톰해진 가슴을 커다란 손으로 주무르다 엄지와 검지로 뾰족해진 왼쪽 유두를 콱 집었다.
“아앗!”
여태 신음을 어떻게든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희원이 허리를 튕기며 소리를 내질렀다. 높은 신음이 기준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귤희는 예민하지 않아서 거실에서 난리굿을 뺀다 하여도 쉬이 일어나지 않을 거였다. 그걸 기준도 알고 희원도 알지만 희원은 외줄 타기를 하는 것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그게 기준으로서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희원에게서 나는 신음을 듣고 싶었다. 잘 연주되는 악기 같은 그 신음을 말이다.
“기준 씨, 살살요.”
“으응. 나도 그러고 싶은데 너무 오래 굶어서 그럴 정신이 없어요.”
기준은 희원을 쳐다보지도 않고 이제는 희원의 판판한 배에 입을 맞추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이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기준이 운동 같은 거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말리고 방해를 함에도 불구하고 희원의 배는 언제 임신 중이었냐는 듯 판판하기만 했다. 게다가 요즘은 기준이 출근하고 나면 혼자서 몰래 운동을 하는지 배에 살짝 근육이 잡힐락 말락 했다.
기준은 그게 괜히 심술이 났다. 아니 이렇게 유부남인 게 티가 안 나면 어쩌겠다는 건가. 오늘도 말이다. 그런 똥파리 같은 게 붙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 말이다.
기준은 카페에 들어가서 정말 깜짝 놀랐다. 분명 저 창가에 앉아 있는 이는 자신의 사랑, 여보 이희원인데 그 옆에 생전 처음 보는 놈이 달라붙어 있는 게 아닌가.
가까이 가서 말을 들어 보니 더 가관이었다. 바람맞은 것 같은데 자기와 대화를 좀 하자고? 기준은 주먹을 말아 쥐고 심호흡을 했다.
감히 누구에게 집적거린단 말인가. 애가 둘이나 있고 멀쩡하게 생긴 남편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어딜!
기준은 희원이 기어코 그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을 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희원은 무슨 생각인지 아주 세상 모든 이를 꾀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하고 나온 거다. 오렌지색 니트는 도대체 어디서 났는지, 희원의 하얀 얼굴과 조금 길어 버린 머리칼하고 어우러져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게다가 아이를 낳고 난 뒤 더욱 성숙해진 몸은 가뜩이나 긴 종아리와 탄력 있는 엉덩이로 끝내주는 뒤태를 자랑했는데 그게 더 육감적으로 변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쳐다보게 만들었다.
기준이 조금 더 몸을 내려서 희원의 다리를 들고 종아리를 슥 핥았다. 그러고는 발가락을 입에 넣었다.
“아읏! 기, 기준 씨. 더러워요!”
“뭐가 더러워요. 맛있기만 한데.”
기준이 말하면서 자기 입술을 혀로 길게 핥았다. 새빨간 혀가 그렇게 색정적일 수가 없었다. 희원의 구멍은 이제 애액으로 푹 젖어 있었다.
기준이 희원의 발가락 한 개 한 개를 입 안에 넣고 쪽쪽 소리가 나도록 빨았다. 그러면서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온몸이 붉게 달아오른 희원을 눈에 담았다.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운지. 기준은 자꾸만 허기가 졌다. 희원을 마음껏 탐하고 싶었다.
기준이 희원의 무릎을 세워서 접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다리를 벌리고는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기준이 얼굴을 내려서 희원의 탄탄한 허벅지 안쪽을 쪽쪽 빨았다. 하얀 살결에 붉은 자국들이 꽃잎 떨어지듯 하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으응읏! 아아!”
기준의 입술이 희원의 성기 끝에 뭉그러질 때 희원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기준의 뺨에 그대로 정액을 쏘았다. 뺨을 타고 정액이 흘러서 입가로 흘러들었다. 기준은 그 정액을 혀를 내어 길게 핥았다.
“미, 미안해요. 얼굴!”
희원은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오랜만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제 남편의 얼굴에 쌀 생각을 했을까? 이건 그야말로 사고와도 같았다.
“뭐가 미안해요. 난 좋은데.”
기준이 뺨에 묻은 정액 한 방울까지 손가락으로 끌어서 입에 넣고는 쪽 빨았다. 그 야한 얼굴에 희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벌써 눈을 감으면 어떡해요. 나를 실컷 봐야죠.”
“기준 씨.”
희원은 애원하고 싶었다.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달라고 말이다. 기준은 가뜩이나 섹스를 하면 음담패설이 짙은 편인데 아이를 낳고 욕구불만이 되면서 그게 극에 달한 것 같았다.
“빨리 싸면 좋죠. 그만큼 희원 씨도 나를 원했다는 뜻이니까요. 그런 의미로 이제는 내가 못 참을 것 같아요.”
기준은 희원의 다리를 더 접어 올려서 구멍이 적나라하게 보이게 했다. 희원은 정말 이것만큼은 너무 창피해서 다리를 동당거렸다.
“가만있어요.”
“아아! 안 돼요, 안 돼!”
희원이 비명과도 같은 신음을 질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기준이 희원의 볼기짝을 꽉 쥐고는 옆으로 벌린 뒤 빼꼼 드러난 구멍에 그대로 입술을 가져다 대어 혀로 길게 핥았기 때문이다. 희원은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새빨개지는 것 같았다.
애액으로 이미 흠뻑 젖은 구멍을 기준이 빨자 희원의 허리가 더 높이 들렸다. 허벅지를 팔로 누르고 있는 기준은 희원이 바르르 떠는 게 느껴졌다.
“아아, 기준 씨, 제발!”
희원이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였지만 그게 좋아서 그런 것을 기준이 모를 리 없었다. 희원의 달콤한 페로몬이 훨씬 더 진해져서 커다란 거실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것만 같았다.
“우리 여보 좋아요?”
기준은 여전히 얼굴을 희원의 가랑이 사이에 처박고는 물었다. 희원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모로 돌렸다. 얼굴이 홧홧해 터질 것만 같았다. 쌕쌕거리며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기준이 희원의 구멍이 예쁘다는 듯 혀를 내어 길게 핥았다.
“으아앗!”
“좋아서 자지러지는 것 좀 봐.”
기준이 웃으며 몸을 일으키고는 제 성기를 몇 번 길게 쓸었다. 오랜만에 보는 길고 굵은 성기는 마치 몽둥이 같았다. 흉포한 크기에 희원은 자기도 모르게 구멍을 조였다 풀었다.
“달라고 조르는 거예요?”
기준은 자기만 급한 게 아니었다는 둥, 희원 씨가 이렇게 기대하고 있었냐는 둥, 마음껏 박아 줄 테니 잘 먹어 보라는 둥 쉬지 않고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희원을 뒤돌아서 엎드리게 했다.
“오랜만이니까 이게 더 편할 거예요.”
그 와중에도 배려심을 발휘해 주어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지 어째야 하는지 희원은 마음이 어지럽기만 했다. 하지만 기준은 희원의 고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희원의 엉덩이를 예쁘다는 듯 토닥토닥 두드리더니 자신의 성기를 구멍에 맞추었다.
“기준 씨, 살살.”
너무 오랜만에 하는 거라서 희원은 덜컥 겁이 났다. 자기가 어떻게 저 흉포한 흉기를 맞이해 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기준의 페로몬이 자신을 푹 감싸자 그 기억도 날아가 버렸다.
“으흣!”
희원이 자꾸 구멍을 움찔거렸다.
“너무 꽉 조이면 못 들어가요. 착하지, 응? 우리 여보.”
기준의 입에서 여보라는 소리가 나올 때마다 희원은 고개를 저었다. 여보라는 말은 그렇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아무 때나 쓰라고 있는 말이 아니란 말이다. 여보라는 단어에 희원이 약한 것을 알면서 기준은 그걸 이럴 때 써먹었다.
“아앙!”
기준이 잔뜩 긴장한 희원의 엉덩이를 주물주물 움켜쥐고는 손에서 놀리다가 희원의 귓바퀴를 콱 깨물었다. 놀란 희원이 교성을 지르는 동시에 기준이 안으로 쑥 하고 성기를 밀어 넣었다. 예고도 없이 쑥 들어온 무례한 손님에 희원은 자기도 모르게 구멍을 확 조였다.
“읏! 남편 좆 잘라먹으려고요?”
“아아, 기준 씨, 좀. 너무 커요.”
“그래서 좋아하잖아요.”
기준이 느물거리며 웃고는 희원의 성기를 커다란 손으로 잡았다. 그러고는 뒤에서 살살 허리를 움직이며 앞에 잡은 성기를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쾌감과 아픔이 서로 부딪치며 요동쳤다. 결국 아픔을 누르고 이긴 쾌감이 머리에서 폭죽을 펑펑 터뜨리기 시작했다. 눈앞이 하얘지는 것만 같아서 희원은 눈을 꼭 감았다. 감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지만 기준은 그걸 저지하지 않았다.
“아아! 너무 커. 아파. 아읏, 기준 씨, 좋아요, 아아!”
자기가 뭐라고 말을 뱉는지 알 수 없었다. 희원은 뇌를 거치지 않은 것만 같은 단어를 마구잡이로 뱉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뇌는 온갖 쾌감으로 가득 차서 단어를 거르고 할 수가 없었다.
“하아. 좋아. 더.”
어느새 희원은 기준의 허리 짓에 맞추어 엉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찰박찰박 서로의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그렇게 야살스러울 줄 몰랐다. 가죽 소파에 닿은 몸은 찌걱찌걱 소리를 남기며 온갖 의성어, 의태어들로 범벅이 되었다.
기준도 이제 한계였다. 기준은 조금 더 빨리 허리를 난폭하게 흔들었다. 희원의 낭창한 몸이 속절없이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기준은 자신의 몸짓대로 흔들리는 희원이 어여쁠 뿐이었다.
“아앙! 아아!”
“같이, 같이 싸요.”
“아앗!”
“윽!”
기준이 희원의 뒷덜미를 콱 깨물었다. 사냥하는 맹수처럼 하얀 목을 이로 물고는 배부른 얼굴을 했다. 희원이 파드득 움직였지만 이내 기준의 품에서 조용히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기준은 두 사람의 페로몬이 가득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이며 더욱 세게 희원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고는 살살 혀로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배가 불렀다.
* * *
희원이 눈을 떴을 때는 침실 침대에 누워 있었고, 집에는 귤희와 희원만이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아무래도 랑일이가 올 시간이라 기준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기준이 씻기고 옷을 입히는 것까지 한 모양이었다.
희원은 귤희 방에 가서 잠들어 있는 귤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분명 중간에 한 번 깼을 것 같은데 기준이 귤희한테 분유를 먹이고 다시 재우기까지 한 것 같았다. 누군가는 100일의 기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100일까지 아이는 등에 센서라도 있는 듯 눕히기만 하면 다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울려고 한다던데 귤희는 그런 것도 없이 조금 놀다가 분유를 먹이면 그대로 잘 자곤 했다.
“우리 순한 공주님.”
귤희가 잘 자고 잘 논다고 하자 희원의 엄마는 어릴 적 희원이 그랬다고 했다. 희원이 그렇게 순해서 혼자 잘 놀고 잘 울지도 않았다고 했다.
반면 박 여사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귤희가 희원을 닮아서 다행이라며 귤희 칭찬과 희원의 칭찬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했다. 누가 보면 박 여사는 기준의 엄마가 아닌 희원의 엄마 같았다. 그러면서 박 여사는 어릴 적 삼 형제가 엄청 까칠해서 꽤나 고생했다고 한탄을 했다.
“누굴 닮았는지 원, 특히 이기준이 제일 심했어.”
삼 형제가 골고루 유난이었지만 그나마 그중 가장 순한 측이 막내 해준이라고 했다. 해준은 형들한테 치여서 제 주장을 펼치려야 펼칠 수도 없었고 워낙 위에 형들한테 엄마의 손길이 가 있으니 그냥 체념하는 모양새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 해준은 다정하고 정이 많았던 루세를 대학교 들어가자마자 좋아하더니 루세한테 그렇게 애정을 갈구했다고 한다.
이준과 기준의 까칠함은 비슷했는데 그래도 이준은 서재에만 콕 틀어박히게 된 순간부터는 어느 정도 무난해졌다고 한다.
다만 기준은 성인이 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리는 것도 많고 싫어하는 것도 많던 이기준이 희원을 만나서 사람이 바뀌었다고 하며 박 여사는 얼마나 희원에게 고맙다고, 네가 기준이 사람 만들어 준 거라고, 애정 듬뿍 어린 말을 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기준 아빠를 좀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희원이 귤희를 보며 뭔가 아쉽다는 듯 혼잣말을 했다. 아이는 크면서 몇 번이고 얼굴이 바뀐다고 하는데, 희원조차 놀랄 정도로 귤희는 여전히 희원 판박이였다.
희원은 순하게 콜콜 자고 있는 귤희 얼굴을 들여다보며 작은 손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예쁜 공주님.”
아이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랐다. 그저 신기하고 행복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 희원은 거실로 나갔다.
“마미!”
랑일이가 희원을 보자마자 빠르게 달려와서 품에 폭 안겼다. 희원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랑일이는 다시 온몸으로 안기곤 했다. 이제는 조금 컸다고 랑일이가 그렇게 전력으로 뛰어와서 안기면 희원의 몸이 휘청거리거나 뒤로 밀렸는데, 그럴 때마다 기준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희원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우리 아들!”
“다녀왔습니다.”
“응, 재미있게 놀았어?”
“네!”
희원은 랑일이 손을 잡고 욕실로 가서 손을 깨끗하게 씻겼다. 그러는 동안 기준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몸에서는 찬 기운이 느껴졌다.
“랑일이 원 실장님하고 같이 온 거 아니에요?”
“네, 맞아요. 도착할 때 되었다고 해서 밖에서 좀 기다렸어요.”
희원이 손을 뻗어서 기준의 뺨을 살며시 만져 주었다. 만날 데리러 가다가 오늘 그러지 못한 거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기준이 뺨을 기울여 희원의 손바닥에 자기 얼굴을 비볐다. 아이 같은 행동에 희원이 작게 웃었다.
“잘 잤어요?”
“응.”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기준이 희원의 뒷덜미를 힐긋 보다가 윗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응? 왜요?”
희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기준을 바라보자 기준이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희원은 아마 정신이 없어서 신경 쓰지 못한 것 같은데 기준에게는 너무 잘 보였다. 뒷덜미의 울긋불긋한 잇자국이 말이다.
기준은 마음 같아서는 푹 파인 옷을 입혀서 희원을 밖에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이 사람은 자기 사람이라는 것을 마구 알리고 싶었다. 이렇게 예쁜 사람을 소유한 게 누구인지 알려 주고 싶었다. 자랑하고 싶기도 하고 말이다.
“아! 맞다. 기준 씨.”
“네?”
기준이 울긋불긋한 목을 힐긋 쳐다보다 다정하게 웃었다. 볼 때마다 입꼬리가 저절로 꿈틀꿈틀 움직였다.
“근데 왜 자꾸 웃어요?”
“그냥요, 좋아서.”
랑일이가 아까부터 거실 한복판에 서서 시선만 교환 중인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희원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응? 랑일이 왜?”
“마미 배고파요.”
“응! 밥 먹자.”
희원이 랑일이의 손에 이끌려 주방으로 가려다가 기준의 손에 다시 붙잡혔다. 희원이 왜 그러냐는 듯 바라봤다.
“지금 뭐예요? 나랑 말하다가 가는 게 어디 있어요? 그리고 뭐 말하려고 하던 거 아니에요?”
“아! 맞다.”
기준이 잔뜩 인상을 쓰고는 자기 아들을 내려다봤다. 랑일이는 뭔가 이겼다는 눈으로 제 아빠의 눈빛을 받아쳤다. 또 부자 전쟁이 일어날 것 같아서 희원이 랑일이를 뒤에 숨기고는 기준의 시선에서 차단했다.
“또! 또 싸운다.”
기준이 불만스러운 눈으로 희원을 바라봤지만 이번에는 눈에 들어오는 쇄골 쪽 키스 자국에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나운 눈빛을 지웠다.
“안 싸워요. 뭐 애도 아니고. 어서 말해 봐요.”
“아! 조금 있으면 귤희 100일이라서요. 사진이라도 찍으면 어떨까 하고요. 가족들하고 식사 자리 가져도 좋고요.”
“좋지요. 희원 씨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뭐든 들어줄게요.”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럼 저녁 먹을까요? 나가기 전에 고기 재워 둔 거 있어서 그거 먹으면 될 것 같은데요.”
희원은 가정적이고 다정한 기준이 너무 좋아서 랑일이가 보는 앞임에도 불구하고 기준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에 기준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