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토끼 같은 배우자와 아가들 (23/31)

2. 토끼 같은 배우자와 아가들

이제 희원은 겉으로 봐도 임신부인 게 티가 날 정도가 되었다. 귤이는 배 속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고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평균보다는 조금 작지만 그래도 주수에 맞추어 기특하게 잘 크고 있었다.

이제는 귤이를 만나기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다. 36주가 지난 이제는 조산이 아니기에 언제 낳아도 괜찮았지만 아직 귤이는 배 속이 더 좋은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저번에 병원에 갔을 때는 조금 운동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요즘 희원은 저녁마다 근처 공원에 산책을 나가곤 했다.

12월, 기준은 다시 크리스마스, 연말 신제품 때문에 한창 바쁜 시기에 들어갔지만 어떻게 해서든 희원과 같이 출근하고 퇴근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일이 많아서 어쩔 수 없으면 집에 일을 가져와서 새벽에 몰래 처리하곤 했다. 그리고 저녁마다 희원의 산책길에 꼭 같이했다. 희원을 따듯하게 입혀야 한다는 명목 아래에 눈사람처럼 만드는 것은 당연했다.

희원은 회사 일도 바쁜데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또는 과하게 보호하는 기준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컸다.

“아!”

귤이는 요즘 배 속에서 엄청 활발하게 놀아서 희원이 자다가도 귤이의 발길질에 깜짝 놀라서 깰 때가 있었다. 희원이 작게 신음하자 윗옷을 걸치던 기준이 재빠르게 돌아봤다.

“괜찮아요?”

“으응, 괜찮아요. 또 발로 옆구리를 차서.”

“귤아, 살살. 마미 아야 하잖아.”

기준은 희원의 배를 커다란 손으로 어루만져 주며 속삭였다.

“근데 배 살짝 뭉치거나 이런 건 아니에요?”

기준이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뭉쳤다가 풀렸다가 그래요.”

“이번 주까지만 일하고 다음 주부터는 출산휴가죠?”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유치원을 다니고 있는 희원은 기준이 휴직을 조심스레 물어봤지만 어차피 아이들이 12월에 겨울방학을 하니 그때까지는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기준은 작년에 희원이 랑일이를 만날 품에 안고 있었던 걸 떠올리고는 몇 번 더 우려를 표했지만 희원은 정말로 무리되지 않게 자기가 잘하겠다고 해서 기준이 그 부분에서는 한 발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안 그래도 희원은 귤이를 낳고 나면 당분간 유치원을 휴직해야 할 것 같아서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지금 5세 아이들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는 것도 아쉽고 미안했다.

“늘 조심해야 하는 거 알죠?”

기준은 노파심에 다시 한번 당부했다. 그에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랑일이가 밖에서 우당탕탕 뛰는 소리가 들렸다.

“마미!”

“응. 마미 여기 있어.”

요즘 랑일이는 점점 활발해지고 개구쟁이가 되어 조심스레 걷는 법이 없었다. 랑일이가 우당탕탕 또는 도도도도 뛸 때마다 희원은 집이 아파트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기준의 본가도, 희원의 본가도, 신혼집도 모두 주택이라 랑일이에게는 좋다고 생각했다.

작년의 랑일이는 뭐가 그리 조심스럽고 경직되어 있었는지 희원은 그런 랑일이가 어릴 때부터 재벌가에 길들여져 있다는 생각에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희원은 지금의 랑일이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랑일이는 집에서만 그 또래 아이처럼 굴었지 밖에 나가면 또 점잖게 행동했으니 희원은 따로 예의나 몸가짐새나 이런 것에 대해 걱정할 게 없었다.

“마미! 오늘 이거 입어요?”

랑일이는 자기 코트를 가져와서 들어 보였다. 유치원 원복이 있어서 늘 똑같은 옷이었지만 랑일이는 겨울이 되자 겉옷에 관심을 보이고, 입고 싶은 코트를 꺼내 아침마다 이렇게 아빠와 마미의 드레스 룸에 난입했다.

“응. 랑일이 이 코트 마음에 들었나 보다.”

랑일이는 희원이 선물해 준 코트와 제 큰아빠를 통해서 선물받은 코트를 번갈아 입으며 놀 유치원의 패셔니스타로 자라나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랑일이 큰아빠 이준이 쇼핑하다가 샀다며 랑일이 코트에 신발, 바지, 니트까지 구입해 와서 기준도 희원도 깜짝 놀랐다. 기준은 그게 이준이 산 게 아니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물론 지금 랑일이가 들고 있는 이 코트도 말이다.

“귤아, 우리 얼른 유치원 가자.”

랑일이는 희원의 배에 입을 맞추며 빙그레 웃었다. 귤이가 12월에 나올 것을 아는 랑일이는 점점 신나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더욱 오빠 행세를 하며 귤이를 궁금해했다.

“마미, 이제 가요!”

랑일이가 코트를 입고는 거울에 비추며 웃어 보였다. 희원은 그런 랑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우리 멋진 왕자님.” 하고 속삭였다. 랑일이는 희원의 뺨에, 그리고 희원의 배에 입을 맞추고는 그대로 밖으로 돌진했다.

“랑일아, 천천히.”

“네!”

랑일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계단을 덤벙덤벙 뛰어 내려갔다.

“진짜 많이 컸어요. 그쵸? 너무 사랑스러워.”

희원이 랑일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렇게 사랑스럽게 키운 건 희원 씨예요. 고마워요.”

기준은 희원의 옷매무새를 다시 점검해 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희원이 배시시 웃었다.

“아!”

차에 타던 희원이 다시 배에 손을 올렸다. 보통 귤이는 새벽에 놀고 아침에는 자는데 오늘 유달리 활발했다. 그리고 아랫배가 좀 뻐근했다.

“괜찮아요?”

“으응.”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병원 가는 거죠? 그 전에라도 이상 있으면 꼭 얘기해 줘야 해요.”

“그럴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기준은 유치원 앞에 도착해서도 랑일이와 유치원으로 향하는 희원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날 오후, 기준은 회의 중에 희원의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향하게 되었다.

* * *

중요한 회의 중이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있어서 이번에 기획한 장난감을 어떻게 팔아야 할지에 대해서 갖는, 콘텐츠 팀과 마케팅 팀이 같이하는 회의였다.

콘텐츠 팀의 수장인 기준은 느긋하게 앉아서 회의를 관망하는 듯했지만 그가 누구보다 날카롭게 짚고 넘어간다는 것은 그를 경험했던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앞에서 회의에 준비해 온 자료를 발표 중이던 마케팅 팀의 팀장은 이기준 이사가 허리를 곧게 세우고 눈빛을 빛낼 때마다 간담이 서늘했다. 눈치를 살피며 발표를 하던 중이었다. 이기준 이사 옆에서 그림자 역할을 하고 있는 원 실장이 이기준 이사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회의 때 회의 내용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방해를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기준 이사에게 그가 무슨 말을 전했을까? 앞에 선 마케팅 팀장과 부장은 신경이 곤두섰다.

“잠시만요.”

이기준 이사가 회의를 멈췄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미안합니다. 회의 중에.”

이기준 이사가 빠르게 그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면 마케팅 팀장과 부장은 극도의 긴장으로 아마 졸도하고 말았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회의를 좀 연기하도록 합시다. 미안합니다.”

기준은 길게 말하지도 않고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니는 원 실장이 웬일로 그 뒤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이기준 이사가 회의실을 급하게 벗어나고 난 뒤에야 원 실장은 사정을 설명했다. 이기준 이사가 그렇게 끼고 살며, 제 목숨처럼 사랑하는 배우자가 산통으로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언론에 노출된 적이 몇 번 없는데도 불구하고 놀의 직원들은 이기준 이사의 배우자의 얼굴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언론에 공개된 그의 결혼식에서 그가 얼마나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그들은 확실히 봤기 때문이다.

서슬 퍼런 이기준 이사가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안다는 것을 직원들은 그날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날 사내 메신저는 난리가 났다.

몇 번 이기준 이사의 배우자가 회사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날을 콘텐츠 팀과 마케팅 팀 직원들은 확실히 기억한다. 그날도 회의가 있었는데 오전이라 무사히 끝난다면 맘 편히 점심을 먹어야지, 하고 직원들이 생각하고 있던 날이었다. 무사히 회의를 마치고 직장인들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 중의 하나인 점심 식사를 하러 구내식당으로 가던 중이었다.

평소 품위 있는 걸음새를 유지하는 이기준 이사가 무슨 급한 일이 있는지 빠르게 회사 로비를 지나가는 것을 직원들은 목격했다. 그는 직원들의 인사에 그저 가볍게 인사를 받고는 빠르게 걸었다. 사실 그게 말이 가볍게였지 인사를 받을 정신이 없는 사람 같았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던 직원들의 눈에 이기준 이사가 누군가를 격하게 품에 안는 것이 보였다. 그때 생각했다. 아, 그 배우자구나.

이기준 이사는 마치 보물을 품에 끌어안고 감추듯 배우자를 그런 모양새로 품에 감추고는 황급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마치 첩보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무척이나 많았다. 그런 일화들을 모아 봤을 때 이기준 이사가 자신의 배우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직원들은 알 수 있었다.

누군가는 이기준 이사가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가는 것을 봤다고도 했다. 그렇게 아끼는 배우자가 무려 공주님 출산을 눈앞에 뒀다는데 그깟 회의가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냐 말이다.

기준은 빠른 걸음으로 병원에 들이닥쳤다. 이미 소식을 들은 희원의 부모님과 기준의 부모님이 병원에 와 있었다.

“기준아.”

겨울임에도 이마에 땀을 송송 매달고 들어온 기준에 박 여사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빨리 와. 이미 많이 진행되어서 희원이 분만실 들어가야 한대.”

“희원 씨는요?”

기준은 간호사의 안내로 희원에게 갈 수 있었다.

“희원 씨.”

새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얼굴 곳곳에 땀이 범벅이었다.

“희원 씨.”

“괜찮아, 읏, 요.”

희원이 얼마나 고통을 잘 참는지는 기준이 더 잘 안다. 그런 희원이 얼굴이 하얗게 되어 입술을 질끈 물고 있는데 기준은 할 수 있다면 제가 아팠으면 했다.

“괜찮아, 이따…….”

“응, 말 안 해도 돼요. 미안해요.”

기준은 희원의 손을 잡아 주었다. 기다랗고 하얀 손은 온통 땀이 가득이어서 차가웠다. 마음이 아팠다. 부디 귤이가 희원을 오래 아프게 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분만실로 이동할게요.”

기준이 조금이라도 온기를 나누어 주려고 희원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희원은 분만실로 들어가는 중에도 기준을 보며 희미하게 웃어 주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고통의 시간이었다. 기준은 끊었던 담배가 다시 생각났다. 하지만 잠시라도 시간을 비우면 그사이에 귤이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을 것만 같아서 기준은 자리를 뜨지도 못했다.

그건 희원의 부모님과 기준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희원이 분만실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기준의 형제들에게도 희원의 남매에게도 전해졌다.

유치원에서 같이 있다가 갑자기 마미가 병원으로 가는 바람에 랑일이는 또 얼마나 놀랐을까? 랑일이는 이준이 맡아 주기로 했다. 대리 나부랭이인 이해준보다는 시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이사 이이준이 조금 더 시간을 빼기 편했기 때문이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랑일이는 이준에 의해 기준과 영상통화를 했다. 자기도 병원에 가겠다고 하는 걸 기준이 귤이가 나오면 바로 전화할 테니 그때 큰아빠랑 오라고, 지금은 마미가 힘드니까 큰아빠랑 같이 응원해 달라고 진정시켰다.

“이 서방,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이거라도 좀 마시게.”

희원의 아버지가 음료를 사 와서 기다리고 있는 식구들의 손에 쥐여 주었다. 세월의 흔적을 담은 손이 그보다 더 큰 기준의 손을 어루만지는데 기준은 왈칵 눈물이 비집고 나와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죄송합니다.”

울컥한 기준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뭐가 죄송하단 말인가. 그런 말 말게.”

“희원 씨 혼자 감내해야 할 거 생각하니…….”

기준은 끝내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이렇게 마음이 여려서야.”

희원의 아버지가 기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기준은 희원이 혼자 입덧으로 고생했을 때도, 갑자기 변한 몸에 울적해할 때도, 귤이가 배 속에서 커 가며 희원이 허리와 골반이 아파 옴에 얼굴을 찡그릴 때도, 그 고통을 같이하지 못해서 미안했다. 자기의 욕심으로 이렇게 된 것 같아서 희원의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희원이 웃어 주었다. 미안해하지 말라고, 자기는 귤이가 배 속에 있어서 너무 기쁘다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기준아, 너무 걱정하지 마. 희원이 이미 병원에 올 때 많이 진행되어서 왔다고 했어. 금세 나올 거야.”

박 여사가 기준에게 손수건을 쥐여 주며 토닥였다. 기준은 갑자기 제 어머니가 너무 대단해 보였다. 그렇게 따지면 희원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세 명이나 낳았을까? 그러고 보면 아버지들은 참 욕심도 많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진짜 엄마한테 잘해야 해요.”

뜬금없이 화살이 이 회장에게로 향해 이 회장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제 아들을 쳐다봤다.

“너나 잘해. 희원이 고생시키지 말고.”

“아유, 이 서방만큼 잘하는 사람도 없어요.”

희원의 어머니가 기준의 편을 들어 주었다.

“한의원에 연락해 뒀으니까 모레쯤 약 찾아가.”

“무슨 약이요?”

“아기 낳으면 몸 따듯하게 해야 한다고 네 엄마가 그러더라. 네 엄마랑 가서 약 지어 뒀으니까 찾아다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먹여. 잊지 말고.”

“알겠어요.”

이 회장의 말에 기준이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희원의 부모님은 희원이 사랑받고 사는 것 같아서 한시름 놓았다.

그때였다.

“아빠, 오셔서 탯줄 자르세요!”

“낳았나 보다. 기준아, 얼른 들어가.”

기준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양가 부모들은 웅성거렸다. 공주님이 얼마나 예쁠지 벌써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안에 들어간 기준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탯줄을 어떻게 잘랐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주책맞게 눈물이 쏟아져 줄줄 흘렀다. 기진맥진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던 희원이 기준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리 와요. 왜 이렇게 울어요.”

초록색 천에 둘러진 아가는 아직 쭈글쭈글 불그스레했지만 이목구비가 딱 봐도 희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누가 봐도 희원의 미니미였다. 큰 희원이 쪼그마한 희원을 안고 있었다. 그게 기준은 그렇게 눈물이 났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희원의 손을 잡아 쥐었다.

“고생했어요. 고마워요. 미안해.”

기준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옆에서 의사는 기가 막혀했다. 세상에, 산모보다 더 우는 아빠라니!

“울지 마요, 괜찮아. 귤이도 나도 괜찮아요.”

희원이 작게 속삭였지만 기준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귤이가 초록색 천에 싸여서 신생아실로 가고 희원이 병실로 가는 중에도 기준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랑일이 때는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들이었다.

병실로 옮기고 나서 양가 부모님은 조심스레 병실로 들어섰다. 박 여사가 희원의 손을 꼭 잡고는 고맙다고 고생했다고 말했고 양가 부모님들이 돌아가며 희원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시간 뒤 신생아실 앞에는 어른 여섯 명이 창가에 짜르르 붙었다. 귤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거였다. 신생아실 앞에 붙은 다섯 명은 모두 한목소리로 말했다.

“귤이가 희원이 판박이예요. 너무 예쁘다. 귤아, 우리 공주님, 너무 예쁘다.”

그중 희원만 귤이가 기준을 하나도 닮지 않아서 그게 조금 속상했다. 하지만 모두 눈에 하트를 달고, 그렇게 무게 있던 이 회장까지도 입을 헤벌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미소를 짓고 있어서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어머니, 우리 귤이 너무 예쁘죠. 진짜 희원 씨랑 너무 똑같이 생겼어요. 세상에서 제일 예뻐. 진짜 예뻐요.”

희원은 연신 귤이 찬양을 해 대는 기준을 보며 팔불출도 저런 팔불출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민망해서 기준의 손을 잡고 눈치를 주는데도 평소에 그렇게 눈치가 빠르던 남자는 아까 눈물과 함께 눈치까지 버렸는지 전혀 알아듣지를 못하고 있었다.

“정말 예뻐. 이렇게 예쁜 신생아를 본 적이 없다니까요.”

모두 동의하는 가운데 희원만 민망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 * *

기준은 휴가를 일주일이나 냈다. 원 실장이 사정했다. 누가 배우자 출산에 일주일이나 휴가를 쓰냐고 말이다. 그러자 기준은 그럼 자기는 육아휴직을 하겠다고 해서 원 실장이 기함을 했다.

기준은 이참에 육아휴직을 자신부터 써서 회사에 솔선수범을 보이겠다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원 실장이 말리느라 고생 좀 했다. 결국에는 정말 면목 없게도 희원에게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합의를 본 게 일주일이었다.

사실 희원은 수술을 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일주일씩이나 병원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기준의 극성에 1인실, 그것도 가장 좋은 병실을 얻어서 일주일을 푹 쉬기로 했다. 어차피 희원은 유치원을 휴직했으니 일은 상관없었지만 기준이 24시간 종일 옆에 있어서 희원은 기준이 좀 걱정이었다.

“기준 씨, 진짜 일주일이나 비워도 돼요?”

“네, 근데 나 진짜 육아휴직 하고 싶은데.”

“귤이 아버지, 랑일이 아버지. 이제 애가 둘이에요. 열심히 버셔야죠. 어떻게 제가 다시 유치원 나갈까요?”

기준이 희원을 흘겨봤다.

“약았어.”

희원이 기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기준 씨 있어서 제가 마음 놓고 육아휴직도 하고 그러는 거 알죠?”

“정말 약았어, 희원 씨. 알았어요. 애 둘 아빠는 열심히 벌어 볼게요.”

“아유, 장하다 우리 기준 씨.”

희원이 웃으며 이번에는 기준의 입술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더니 랑일이가 얼굴을 쏙 내밀었다.

“마미!”

“랑일아! 우리 랑일이 왔어? 오늘은 누구랑 왔어?”

랑일이는 귤이가 태어나자마자 그 밤중에 이준을 졸라서 병원에 왔다. 와서 신생아실 창에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귤이는 제 오빠가 온 걸 귀신같이 알고는 내내 자다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쳐다봤다. 랑일이는 신이 나서 연신 종잘거렸다.

그러고 나서 유치원에 가기 전에 꼭 병원에 들렀다 갔다. 이른 아침이라서 졸리고 피곤할 텐데 꼭 박 여사나 이 회장을 대동하고 병원을 찾았다.

“할머니랑 왔어요.”

“희원아.”

박 여사가 보따리를 잔뜩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기준 씨, 어머니 짐.”

기준이 박 여사에게서 짐을 받아 들었다. 보나 마나 먹을 거였다.

“희원아, 아침 먹었어?”

“네. 먹었어요. 어머니가 어제 해다 주신 거로 먹었어요.”

“그래, 아기 낳고는 잘 먹어야 해. 무조건 잘 먹어야 해.”

박 여사는 희원의 손을 만져 주며 말했다. 랑일이는 어느새 침대 위에 올라와서 희원의 옆에 딱 붙어 앉아 있었다.

“오늘은 어머니 혼자 오셨어요?”

“응, 아버지는 회사에 일 있어서 일찍 출근하셨어. 귤이 못 보고 가신다고 얼마나 안타까워하셨는지 몰라. 그래서 내가 사진 찍어서 보내 주기로 했어.”

희원이 웃었다. 희원은 박 여사와 이 회장의 극성스러움이 전혀 귀찮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두 분이 귀엽다고 생각되었다.

“마미, 우리 귤이 언제 봐요?”

시간을 보아하니 10분 정도 있으면 볼 수 있었다.

“조금 있으면 볼 수 있어. 근데 우리 랑일이 밤에 혼자 자기 안 무서웠어?”

“네! 할머니랑 잤어요. 근데 이제 오빠 됐으니까 혼자 자도 안 무서워요.”

“기특해라. 진짜 용감한 오빠네.”

희원의 칭찬에 랑일이가 어깨를 쭉 펴고는 으쓱 움직였다. 희원이 랑일이를 꼭 끌어안고는 이마에 입을 맞췄다.

“희원 씨, 귤이 보러 갈 시간이에요.”

기준의 말에 희원도, 랑일이도, 박 여사도 모두 일어나 신생아실로 향했다.

“마미, 나 가방에서 그림 꺼내 줘요.”

“응? 그림?”

“네! 어제 그림 그렸어요. 귤이 주려고요.”

“그래? 잠깐만.”

희원은 랑일이의 가방을 열어 봤다. 그 안에 정말로 하얀 종이가 둘둘 말려 있었다.

“이거야?”

“네!”

랑일이는 얼른 종이를 받아서 펼쳐 들었다.

“자, 우리 귤이 공주님 인사하세요.”

드디어 귤이가 나왔다. 처음 봤을 때는 양수 때문에 쭈글쭈글 붉은 공주님이었던 귤이는 이제 세상에 나와 며칠이 흐르니 젖살이 올라서 뽀얘졌다. 희원을 닮아서 하얀 얼굴에 까만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귤아!”

“우리 공주님이 오늘은 눈 뜨고 있네.”

기준과 희원이 가면 자기 바쁜 귤이는 꼭 랑일이가 오면 제 오빠가 온 것을 아는 것처럼 까만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귤아! 오빠가 우리 귤이 그림 그려 왔다. 볼래?”

랑일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종이를 쫙 펴서 보여 주었다. 아직 신생아는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데 귤이는 마치 그 그림을 보는 듯 보였다.

“어때? 마음에 들어?”

귤이가 작게 웃었다. 배냇짓인데 랑일이는 그게 자기를 보고 웃어 줬다고 생각하는지 입이 귀에 걸릴 만큼 함박웃음을 지었다.

“마미, 지금 봤어요? 귤이가 내 그림 보고 웃어 줬어요.”

“그럼 봤지. 맞아, 귤이가 랑일이 오빠가 그려 준 그림이 무척 마음에 들었나 봐.”

귤이가 작게 하품하자 랑일이는 두 손을 들어서 흔들었다.

“귤아, 잘 자. 오빠는 유치원 다녀올게!”

귤이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 랑일이는 씩씩하게 박 여사의 손을 잡고 유치원 등원길에 올랐다. 희원은 랑일이가 귤이를 정말 예뻐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기준이 박 여사와 랑일이를 배웅하러 간 사이 희원은 병실에 돌아와 침대 위에 앉았다. 여기저기 계속해서 축하 문자가 와 있었다.

귤이를 낳은 그날 밤에 이준과 랑일이가 왔었고, 그다음 날 해준과 루세가 왔다. 그날 희원의 식구들도 왔는데 조카들은 오고 싶은데도 희원이 피곤해할까 봐 하루 쉬었다가 다음 날 오겠다고 했다.

벌써 귤이가 태어난 지 닷새째인데도 여전히 축하 문자가 오고 있었고 사람들이 선물을 보내왔다. 잘 먹어야 한다며 희원을 생각해서 품질 좋은 미역이니 과일이니 이것저것 보내왔고, 귤이 선물도 어마어마하게 보내왔다.

지금 귤이는 희원이 틈틈이 만들었던 배냇저고리를 입고 있었지만 그것 말고도 배냇저고리도 엄청 많이 들어왔고 손싸개니 발싸개, 속싸개, 겉싸개도 많이 들어왔다. 그뿐 아니라 내복에 우주복에 각양각색이었다.

희원은 주변에서 주는 사랑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귤이는 정말 선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좀 쉬지 그래요.”

기준이 들어오며 침대에 앉아 있는 희원에게 말했다.

“으응, 기준 씨도 좀 쉬어요.”

“내가 힘들 게 뭐 있어서 쉬어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응, 괜찮아요. 아!”

희원이 몸을 움직이다가 작게 신음했다. 기준이 놀라서 희원에게 바투 다가왔다.

“희원 씨,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기준은 손을 뻗어 희원의 이마부터 만져 봤다. 이마가 살짝 뜨끈했다.

“간호사 부를까요? 어디 아픈 거예요?”

신기하게도 그 순간 간호사가 혈압과 열을 재러 들어왔다. 기준은 미열이 있는 것 같다며 왜 그런 거냐고 극성을 떨기 시작했다. 희원은 또 극성을 부리는 기준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그런 겁니까? 어디가 문제인 거죠?”

간호사가 머쓱하게 웃었다.

“젖몸살이 와서 그래요.”

“네?”

기준이 단번에 알아듣지 못해서 되물으며 미간을 좁혔다. 희원은 자신이 어디가 아픈지도 알고 그 전에 책으로 이것저것 찾아봐서 그 말이 무엇인지 알아들었다. 희원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남자 오메가는 반 정도 나타나는 증상이기는 해요. 아무래도 아이를 낳게 되면 젖이 도는 게 당연하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장 좋은 건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건데 남자 오메가들은 아이에게 먹일 수 있을 만큼 젖이 나오는 게 아니니까요, 그럴 때는 가슴 마사지를 해 주고 좀 풀어 주는 게 좋아요. 따듯한 수건으로 대 주는 것도 좋고요.”

기준은 궁금한 것은 꼬치꼬치 물어봤다. 간호사는 그게 직업이니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는 것인데 괜히 중간에 앉은 희원만 얼굴이 붉어졌다 하얘졌다 난리였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간호사가 나가고 난 뒤 기준이 희원을 타박했다.

“가슴이 아프면 아프다고 얘기를 해야죠. 말을 안 하면 도와줄 수가 없잖아요.”

“그게 따듯한 수건 주면 제가 대고 있을…….”

그 순간 기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면 거짓말일까? 아니면 기분 탓일까? 희원이 말을 하다가 멈칫했다.

“방금 전에 뭘 들었어요. 간호사 선생님이 말할 때 잘 귀담아들어야죠.”

“뭐, 를요?”

희원이 설마 싶은 눈빛을 보냈지만 기준은 벌써부터 눈빛에 장난기가 다글다글 가득했다. 희원이 앉은 채로 뒤로 한 엉덩이 물렀다. 그러자 기준이 침대로 바투 다가왔다.

“다 들었잖아요.”

“기준 씨 여기 병원이에요.”

“네, 알아요.”

“그러니까 우리 이제 좀 쉬도록 해요.”

“응, 희원 씨는 가만 누워서 쉬면 돼요.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기준의 커다란 손이 환자복 상의 속으로 슬금슬금 들어오고 있었다.

희원은 제 환자복 상의를 잡고 침대 헤드에 바짝 붙어 앉은 상태였다. 기준이 그런 희원을 장난기가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니, 내가 뭐를 한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제가 한다고요.”

“그냥 가슴 마사지 해 준다니까요.”

그 말이 나오는 순간 희원은 얼굴이 홧홧해졌다. 저 남자가 왜 저렇게 됐을까? 희원은 정말로 저 남자가 상당히 금욕적일 거라고 예전에 그렇게 생각했다. 기억 조작일까? 원래 저런 남자였는데 착각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랬으면 좋겠다는 자기의 바람인 걸까?

2년 전을 돌아보면 분명 기준은 차갑고 금욕적인 분위기마저 풍기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도 그는 밖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

“기준 씨는 사회적 지위 이런 것도 없어요?”

생각이 그대로 입 밖으로 나왔다. 희원은 자신이 말해 놓고도 그 뜬금없는 말에 아차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준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잠시 지었다.

“아, 나 두고 지금 다른 생각 중이었어요?”

“아뇨! 그것도 기준 씨 생각이긴…….”

희원은 또다시 아차 싶었다. 기준의 페이스에 그대로 말린 거였다.

“음, 생각해 보니까요.”

기준이 뭔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금세 다시 입을 열었다.

“응, 사회적 지위 같은 거 내가 희원 씨 앞에서 챙겨 봐야 뭐 하겠어요?”

그러더니 희원의 발목을 당겼다. 그 바람에 희원이 침대에 주르륵 끌려가서 드러눕게 되었다.

“기, 기준 씨!”

“걱정하지 마요. 아무도 안 들어와요.”

주르륵 환자복 상의가 위로 올라갔다. 기준은 몇 개 안 되는 상의 단추를 풀었다. 하얀 몸을 보자 기준이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일단 따듯한 수건으로 풀어 줘야 한다고 했어요.”

“흣!”

가슴에 따듯한 수건이 올라온 순간 희원은 무심결에 신음을 냈지만 그것과는 반대로 몸이 노곤하게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병원은 늘 쾌적하고 적당한 온도로 유지되지만 그래도 겨울인지라 추울까 봐 기준은 희원의 배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러고는 배를 쓰다듬어 주었다.

“저기, 기준 씨.”

“네?”

“배에서 손 좀…….”

귤이가 배 속에 있을 때 크림을 발라 준다든지 배를 만지며 말을 건다든지 그런 스킨십은 있었지만 성적인 스킨십을 둘 사이에 한 지는 좀 오래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희원은 자꾸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기준의 손길이 그다지 담백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보다 희원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응?”

기준은 희원의 말을 듣고서도 못 들은 척했다.

“손 좀.”

“아.”

기준이 손을 치우는 듯하더니 바지 속으로 쑥 집어넣었다. 희원의 몸이 팔짝 뛰었다.

“만지기만 할게요. 응?”

“아니 잠깐만, 기준 씨 여기 병원.”

“응, 병원.”

“읍!”

기준이 그대로 입을 막았다. 자기 입으로. 혀를 안으로 집어넣고 피하려고 하는 희원의 혀를 찾아 얽었다. 그러고는 바지 속을 침범한 손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더니 뻔뻔스럽게 희원의 성기를 잡아챘다. 말랑말랑한 성기를 손으로 주무르며 이제는 혀를 비비고 빨았다.

“읏! 으, 으응!”

희원은 아랫배가 묵직해져 옴을 느꼈다. 기준의 손안에서 말랑했던 성기가 점점 단단해져 가며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욕망이 배 속을 돌아 온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 와서 희원이 허리를 비틀었다.

“가슴, 기준 씨 나 가슴.”

입이 떨어졌을 때 희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가슴이 더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며 아팠다. 기준이 희원의 성기를 잡지 않은 손으로 가슴을 덮고 있는 수건을 치우고는 그대로 가슴에 입을 갖다 댔다.

“아니, 그게 아니라.”

희원은 계속해서 아니라고 말했지만 기준이 그 소리를 들어줄 리가 없었다. 기준이 희원의 가슴을 쪽쪽 소리가 나게 빨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왼손으로는 희원의 성기를 만지고 오른손으로는 빨고 있지 않은 다른 쪽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으읏! 기준 씨, 기준 씨!”

희원은 혹시라도 복도를 지나가던 누군가가 자신의 신음을 들을까,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어 터져 나오는 신음을 자기 손으로 막았다. 기준은 희원이 허리를 들썩거리는데도 계속해서 가슴을 빨았다.

가슴에서 젖이 줄줄 새어 나왔다. 주무르고 있는 가슴에서도 젖이 흘러 기준의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희원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바들바들 떨었다. 어디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몰랐다. 기준의 머리를 밀어내니 밑의 자극이 너무 세고 바지 속에 있는 손을 빼내려고 하니 가슴을 빨고 있는 자극이 너무 셌다.

희원은 금세라도 사정할 것 같았다. 하지만 기준의 손에, 그것도 병원에서 사정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음을 삼키며 참았다.

“괜찮아요. 그냥 싸도 돼.”

기준은 다 안다는 듯 입을 떼고는 속삭였다. 그 순간 희원이 허리를 부르르 떨었다. 기준의 손안에 질척한 우윳빛 정액이 흩뿌려졌다. 따듯하고 끈적끈적한 액체를 기준이 직접 확인하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오랜만이라서 많이 쌌네요?”

희원은 상체를 일으켜 앉아서 민망함에 얼른 상의 단추를 잠갔다. 그러고는 기준에게 베개를 집어 던지고 그길로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어어! 삐쳤어요?”

화장실로 따라 들어온 기준이 손을 닦으며 거울 너머로 희원을 살폈다. 희원이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자 기준이 수건에 손을 닦고는 찰싹 달라붙었다.

“그럼, 나도 할까요?”

“그게 아니라!”

“응? 나도 병원에서 하면 그럼 안 삐칠 거예요?”

“이이!”

희원이 기준을 툭 때리고는 옆으로 밀었다. 앞섶이 불룩한데 기준은 그저 희원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내 것도 만져 달라고 하고 싶은데 지금은 안 돼요. 내 거 잡고 흔들려면 손목에 힘 들어가서 안 돼.”

기준은 여전히 희원을 과보호 중이었다.

“그리고 뭐 어때? 가슴 아파서 남편이 마사지해 준 건데?”

희원이 한숨을 쉬며 기준을 불퉁하게 쳐다봤다. 기준은 그런 희원도 예뻐서 눈가에 입을 맞추고는 속삭였다.

“어때요? 이제 괜찮죠? 가슴 좀 풀렸죠?”

그러고 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단단하게 뭉쳤던 가슴이 어느새 괜찮아졌다. 희원은 민망함에 고개를 돌리고는 칫솔을 입에 물었다.

“어어! 내가 해 줄게요! 원래 산후조리할 때는 아무것도 하면 안 돼요. 이도 막 세게 닦으면 안 되고.”

“기준 씨, 그 말 한 100번 한 거 같아요.”

“응, 알아요. 그래도 걱정되니까 그러죠.”

기준은 희원이 귤이를 낳고 나자 더 과보호가 심해져서 다 자기가 해 주려고 했다. 무거운 것도 아닌데 그 뭔가를 들지도 못하게 했고 찬물 세수, 찬물로 이를 헹구는 것, 다 못 하게 했다. 그러고는 샤워도 따듯한 물로 자기가 직접 씻겨 주려고 했고 이도 닦아 주려고 했다.

“다음 주부터 기준 씨 회사 가면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이에요.”

“그러니까 그 전까지 내가 해 주려고 하는 거예요. 여기 앉아요.”

기준은 희원을 끌어다가 다시 침대에 앉히고는 입을 벌려서 직접 이를 살살 닦아 주기 시작했다.

“진짜 안 해도 돼요?”

간단하게 씻고 난 다음에 희원이 기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기준의 그곳은 아직까지도 몸짓을 키운 상태였다. 왜 안 줄어들어. 그런 생각을 하며 희원이 묻자 기준이 희원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대답했다.

“안 된다고 했잖아요. 지금은 아직 힘주면 안 돼요. 나 회사 나간 뒤에도 마찬가지예요. 절대 귤이 안을 생각도 하지 마요. 적어도 한 달 정도는 몸조리 잘해야 한단 말이에요. 알았죠?”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 여사는 희원에게 비싼 산후조리원을 예약해 주겠다고 했지만 희원은 랑일이가 걸려서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 여사는 집에서는 산후조리가 잘 안 될 거라며 그래도 조리원에 들어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희원은 병원에 일주일 있는 것도 랑일이에게 미안했기 때문에 괜찮다고 했다. 예전처럼 랑일이랑 같이 놀아 주고 안아 주는 건 힘들겠지만 그래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있고 싶어 이번에는 희원이 조금 고집을 부렸다.

원래 집에 누군가를 들이지 않는 기준도 이번 조리 기간에는 희원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희원이 얼마나 랑일이에게 신경 쓰는지 아는 기준은 희원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희원의 뜻에 따라 주고 싶었다.

이제 네 식구가 온전히 한집에서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퇴원 날, 희원은 기준이 입혀 준 옷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이 12월이고 한겨울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원이 입원하면서 입고 온 대로 입고 퇴원하려고 하자 기준은 그사이에 날씨가 더 추워졌다며 뭔가를 덧입히고 목에 두르고 장갑을 끼우고 모자를 씌우고 난리였다.

“기준 씨.”

“네?”

짐을 먼저 실으려고 하는 기준을 보며 희원이 말했다.

“우리 기준 씨 차 타고 가는 거 아니에요?”

“네, 맞아요.”

“혹시 일주일 사이에 차 뚜껑이 안 닫힌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응?”

기준이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자 희원이 울상을 지었다. 거울에는 기준이 만들어 놓은 인간 눈사람이 있었다.

* * *

일주일 만에 회사에 나온 이기준 이사는 아침에 회사 로비에 발을 집어넣기가 무섭게 원 실장에게 들들 볶이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게 원 실장이 일 때문에 전화를 하면 기준은 이런저런 핑계로 교묘하게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9시부터 콘텐츠 팀 회의가 있고 10시에 마케팅 팀과 회의가 있습니다. 11시에 디자인 팀과 시안에 대해서 회의가 잡혀 있으며…….”

“잠깐만요.”

뒤를 따르며 하루 일과에 대해서 줄줄 읊고 있는 원 실장의 말을 기준이 뚝 잘랐다. 원 실장이 뭔가 불길함을 느끼며 침을 꼴깍 삼켰을 때였다.

“제가 올해 놀의 목표 중 하나가 회의의 간소화라고 말씀 안 드렸나요?”

“아직 새해 안 되었습니다.”

사실 기준은 지금 날짜가 어떻게 지나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냥 집에서 딸 바보 아빠 노릇을 하느라 정신이 없을 뿐이었다.

“아, 그렇군요. 그래도 오늘 회의가 너무 과하다고 생각되는데 회의 하나를 좀 미루죠.”

“안 됩니다.”

원 실장은 딱 잘라 말했다. 이제부터는 기 싸움이었다. 여기서 밀리면 죽도 밥도 안 됐다.

“왜요? 회의를 취소하자는 게 아닌데요.”

“안 됩니다.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이사님 스케줄은 한 시간 단위로 짜여 있어서 미룰 것도 취소할 것도 없습니다.”

“하아.”

기준이 대놓고 한숨을 쉬었지만 원 실장은 꿋꿋하게 버텼다. 여기서 주춤거리면 분명히 일정을 뒤로 미루자고 하거나 취소하자고 할 게 분명했다.

이기준 이사는 분명 지독할 만큼 워커홀릭이었는데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더니 사람이 변했다.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가 없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원 실장은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저 ‘일단’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절대 야근은 없는 것으로.”

원 실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못다 한 뒤의 일정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 점심은 오랜만에 비서실 식구들하고 다 같이 먹도록 하죠.”

“…네, 알겠습니다.”

원 실장은 태블릿을 슬쩍 내려다본 뒤 한 호흡 늦게 대답했다. 이기준 이사는 콘텐츠 팀원들하고는 밥을 안 먹을뿐더러 그건 자신의 비서들과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바쁘기도 바쁘고 밥은 좀 편하게 먹자는 데에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이기준 이사가 비서들과 점심을 먹자는 부분이 원 실장으로서는 상당히 껄끄러웠다.

“왜요? 저랑 밥 먹기 싫으세요?”

“아닙니다.”

원 실장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도 화들짝 놀라서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기준은 그런 원 실장을 눈을 가늘게 해서 쳐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바뀌는 층수를 보며 원 실장은 왜 갑자기 밥을 먹자고 하는 건지에 대해서 이유를 유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쑥 이기준 이사가 뭔가를 내밀었다.

“예쁘지 않습니까?”

핸드폰에는 갓난아기가 곤히 자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었다.

“네, 희원 님을 많이 닮았네요.”

원 실장이 희원에게 사모님이라고 했다가 희원이 펄쩍 뛰며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그냥 이름을 불러 달라고 해서 합의점을 찾아낸 게 ‘희원 님’이었다.

“그쵸? 엄청 예뻐요.”

원 실장은 이기준 이사가 연애를 하면서부터 팔불출 면모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랑일 도련님한테 하는 행동도 다정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사진을 보여 주며 자랑을 하는 일은 없었다.

“눈 뜨고 있는 사진도 있는데 보실, 아, 잠깐만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기준이 전화를 받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희원 씨.”

목소리부터 바뀌는 것에 원 실장은 주위를 둘러보며 한 걸음 뒤에서 걸었다. 다행히 이사실만 우뚝 존재하는 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행한 일이었다.

“응, 그래요. 잘 먹어야 하는 거 알죠? 무거운 거 들지 말고 귤이도 아직 안으면 안 돼요. 지금은 몸매 신경 쓸 때가 아니에요. 일단 무조건 잘 먹고 잘 쉬어야 하니까 그런 거 하나도 안 중요해요. 그리고 살이 어디가 쪘다는 거예요?”

원 실장은 요즘 이기준 이사가 원래 저렇게 말이 많았는지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저런 이기준 이사는 새로웠다.

“그래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연락 줘요. 응, 그럴게요. 우리 희원 씨가 한 말은 다 기억하고 있죠. 그래요. 이따 또 전화해요. 응. 사랑해요.”

이기준 이사가 전화를 끊고는 이사실로 쑥 들어갔다. 원 실장은 그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전은 무난히 지나갔다. 마케팅 회의에서 회의 내용을 성에 안 차 했지만 그래도 괜찮게 지나갔다. 사람들은 아이가 한 명 더 생기면서 여유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반면 비서실은 점심시간이 다가올수록 서로 짐작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점심은 일식집에서 먹기로 했다. 룸을 잡아서 그야말로 점심 회식을 가졌다. 그래 봐야 이기준 이사가 일주일이나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1시 반부터 시작되는 일정에 오래 앉아 있을 수는 없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일주일 동안 제가 자리 비웠을 때 회사에 차질 없도록 일 처리 해 주어서 고맙다는 뜻으로 사는 점심입니다. 그리고 이건 아주 작은 선물이지만 받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작은 선물이라고 하지만 그러기에는 좀 부피가 컸다.

“희원 씨가 귤이 태어났다고 옷이니 신발이니 사서 보내 주신 것 다 기억하고는 일일이 감사 편지도 써서 넣어 두었더군요. 선물도 희원 씨가 한 분 한 분 다 생각하며 다르게 넣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식사 자리는 고마운 것보다는 자기 배우자가 선물을 준비했는데 그걸 좀 생색내야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원 실장은 희원 님의 배려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이사님이 어쩌다 저렇게 팔불출이 되셨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이사님, 공주님 사진 좀 보여 주세요.”

“원 실장님 말씀에는 공주님이 사모님 닮아서 그렇게 예쁘다면서요.”

기준은 흔쾌히 랑일이와 귤이가 같이 찍은 사진을 비서실 식구들에게 돌렸다. 이기준 이사는 사진을 보여 주면서도 입이 귀에 걸려서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비서실 사람들은 제 상사의 기분이 좋으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 * *

공주님이라고 온통 분홍빛 가득한 옷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노란색 옷. 희원이 그 옷을 들고는 환하게 웃었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네, 엄청 귀여워요. 이거 입혀 놓으면 완전 꿀벌 같겠어요. 감사합니다, 잘 입힐게요.”

희원은 집에 찾아온 이준에게 고개 숙여서 인사했다.

귤이가 자는 것을 보고 거실로 나오는데 이준에게 전화가 와서 깜짝 놀랐다. 이준이 희원에게 전화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해준 같은 경우는 루세를 통해서 집안일에 대해서 주고받는다지만 이준은 아직 결혼을 안 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렇게 직접 전화를 하곤 했다. 하지만 기준의 형이기에 아랫사람인 해준보다는 조금 더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

퇴근 시간도 아니고 오후인데 전화를 해서는 올해 아직 못 쓴 연차가 있어서 여행을 다녀오는 길인데, 줄 게 있어서 그러니 문 앞에 놓으면 갖고 들어가라고 했다. 희원은 그렇게 받는 게 예의가 아니니 잠깐 들어왔다가 가시라고 했다.

정확히 10분 뒤 이준은 완도 미역과 귤이 옷을 한 아름 들고 들어왔다. 귤이 것만 사면 랑일이가 섭섭할 테니 랑일이 옷도 샀다며 짐을 보따리 보따리 들고 왔다.

“들어와서 커피라도 한 잔 드시고 가세요.”

여전히 현관에 서 있는 이준에게 말했지만 이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밖에 기다리고 있어서요.”

희원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혹시 이 옷도…….”

“맞아요. 예전에 유치원 발표회 때 랑일이가 꿀벌 옷 입은 사진 보여 준 적 있거든요. 그게 기억에 남았나 봐요. 쇼핑하러 갔는데 눈에 보이기에 제가 사려고 했더니 먼저 계산해서 갖다주라고 하더라고요. 이거 귤이 내복이랑 랑일이 패딩도 그 친구가 샀고요.”

“만날 이렇게 받기만 해서 어떡해요. 저번에 사 주신 코트도 랑일이가 엄청 좋아했는데, 이번에도 진짜 좋아하겠어요.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다 점수 따려고 하는 거예요. 걔가 여우 같아서.”

희원은 이준의 말에 웃고 말았다. 기준과 해준은 대놓고 팔불출인데 이준은 츤데레 같았다. 기준에게 형은 이 첨지 같다고 말했다가 기준이 그게 뭐냐고 해서 설명했는데 기준이 그에 박장대소했다. 그러면서 만날 자기 애인 욕을 그렇게 하면서도 전화 오면 무슨 5분 대기조처럼 튀어 나간다며 뒷담화를 했다.

“조만간 데리고 올 건데 그때 좀 편들어 줘요. 우리 집에서 박 여사 반응이 가장 중요한데 제가 봤을 때는 도 아니면 모일 것 같아서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어머니한테 좋은 말 많이 해 둘게요.”

“고마워요. 추운데 제가 현관에서 너무 오래 잡고 있었네요. 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쉬는데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조카 사랑 극진한 것도 고마운데 그러면서 완도에 놀러 간 와중에도 제 선물도 사 온 것에 희원은 정말 고마웠다.

“산후조리 끝나면 같이 맛있는 것 먹어요.”

“네, 감사해요. 조심히 가세요. 그리고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이준이 웃으며 나갔고 희원은 그러자마자 기준에게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기준이 귤이가 꿀벌 옷을 입은 것을 봐야 한다며 칼같이 퇴근한 건 어쩌면 희원이 그 핑계를 제공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알면 점심때 받은 선물을 쥐고 우리 사모님은 정말 좋으신 분을 외쳤던 비서실 식구들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 * *

랑일이는 귤이 옆에 딱 누워서 천장에 달린 흑백 모빌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는 귤이 방에 침대가 있었는데 랑일이가 하도 귤이 침대 옆 바닥에 누워 있거나 거기 앉아서 귤이를 보는 바람에 어느새 그 침대는 치워지고 바닥에 요가 깔린 상태였다.

천장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빌이 예뻐서 손을 뻗으니 귤이가 자기도 손을 뻗었다.

“응? 오빠가 손잡아 줄까?”

랑일이가 엎드려서 귤이를 보며 손가락을 뻗자 귤이가 랑일이 손가락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좋은지 허공에 발을 굴렀다.

“랑일이 뭐 해?”

희원이 방에 들어오며 묻자 랑일이가 고개를 돌려서 대답했다.

“귤이랑 손잡고 있어요. 귤이 손 엄청 귀엽고 따듯해요.”

“그렇구나. 우리 랑일이 오빠가 동생 손잡아 줬구나. 자상하고 다정하기도 하지.”

희원이 미소 지으며 랑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랑일이는 자상하다라는 단어와 다정하다는 단어의 뜻을 몰랐지만 그저 희원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미소 지어 줘서 그게 마냥 기뻤다.

희원은 이 둘이 계속해서 이렇게 사랑스럽고 다정한 남매로 자라길 기도하고 또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귤이를 잘 길러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 랑일이는 틈만 나면 귤이와 붙어 있었다. 놀아도 귤이 옆에 장난감을 갖고 와서 놀았고 책을 봐도 귤이 옆에서 봤다. 그러다가 졸음이 오면 까무룩 잠이 들곤 했다.

“우리 랑일이 크리스마스 선물 뭐 받고 싶어?”

랑일이가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귤이가 있어서 괜찮아요.”

“정말?”

“네.”

랑일이의 말에 희원은 마음이 뭉클했다. 작년을 돌아봤을 때 랑일이는 특별한 날마다 사람을 선물로 주면 안 되냐고 했다. 그게 마미였던 적이 있었고 동생이었던 적이 있었다. 랑일이는 늘 말했다. 그 작고 어린 것이 어른스럽게 자기는 마미랑 귤이를 선물로 받았다고.

“어쩜 이렇게 속이 깊을까? 그럼 우리 크리스마스 때는 랑일이가 좋아하는 것 먹어야겠다.”

“응, 좋아요!”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아직 희원이 산후조리 기간인지라 밖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안 되고 안에서 네 가족이 오붓한 시간을 갖기로 했다.

희원은 랑일이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을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랑일이가 귤이가 있어서 괜찮다는 어른스러운 대답을 내놓는 바람에 기특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이가 너무 일찍부터 철든 게 아닌가 싶어 애석한 마음도 들었다.

희원은 그래도 랑일이를 위해 뭔가를 해 주고 싶었다. 랑일이에게 꼭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 싶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방에서 나온 희원이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 있자 일찌감치 퇴근하고는 여태 집안일을 한 기준이 옆에 앉으며 물었다. 희원이 고개를 저으며 기준의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 주었다.

“밖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는 집에 와서도 집안일 해서 어떡해요?”

“그게 뭐 어때서요?”

낮에는 희원을 도와주는 도우미가 있지만 원래 기준은 자기 집 안에 다른 사람을 들이는 것을 싫어해 기준이 퇴근하면 도우미는 돌아갔다. 그러니 기준이 퇴근한 뒤의 집안일은 오롯이 기준의 차지가 되었다.

“나도 기준 씨 도와주고 싶은데.”

기준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누누이 말하죠. 산후조리 잘해서 건강해지는 게 희원 씨가 할 일이라고요. 오늘도 귤이 안으려고 하는 거 내가 다 봤어요.”

희원이 살짝 눈치를 봤다. 그건 언제 봤대. 그런 표정이었다. 기준은 귤이를 안지 말라고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가 울면 반사적으로 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산후조리 기간이라 귤이를 대신 봐주는 도우미가 있음에도 희원은 아이 옆에 붙어 있다가 아이가 울면 안아 들었다.

“그러다 나중에 손목 아파요. 희원 씨 귤이랑 랑일이 예뻐하는 거 내가 다 아는데 나한테는 희원 씨가 더 중요해요.”

“알았어요. 주의할게요.”

희원은 자신을 생각해 주는 기준의 사랑에 고마움을 느꼈다. 기준 역시 자신의 말에 잘 따라 주는 희원이 예뻐서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때였다. 방에서 랑일이가 나와서 희원을 불렀다.

“마미, 귤이가 울 것 같아요.”

“응, 배고픈가 보다. 마미가 갈게!”

기준이 일어서려는 희원의 손목을 잡아 다시 앉혔다.

“앉아서 쉬어요. 내가 할게.”

“여태 쉬었는데요.”

“내가 분유 타서 먹일게요. 희원 씨는 종일 하잖아요.”

그러고는 기준은 능숙하게 분유를 타 들고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랑일이는 희원에게 다가와서 소파에 앉았다. 희원이 랑일이를 끌어다가 제 다리 위에 올리니 랑일이는 이전처럼 희원의 품에 뺨을 대고 폭 안겨 들었다.

“랑일아, 내일 아빠랑 랑일이 먹고 싶은 거 사러 마트 갔다 올래?”

“마미는요?”

“마미는 아직 밖에 나가면 안 돼서. 미안해. 우리 다음에 단둘이 나가자?”

랑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이 거의 세뇌 수준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랑일이는 금세 알아들었다.

“마미, 졸려요.”

“가서 잘까?”

“같이 자고 싶어요.”

“응, 그러자.”

랑일이는 희원의 손을 잡고 귤이 방으로 들어갔다. 귤이는 기준의 품에 잘 안겨서 분유를 쪽쪽 힘차게 빨고 있었다. 귤이는 평균보다 조금 작게 태어났지만 태어나서는 잘 먹고 잘 자서 쑥쑥 크고 있었다. 희원과 기준을 닮으면 작지는 않을 것 같았다.

“기준 씨는 애 대여섯 키워 본 사람 같아요.”

“응?”

희원의 말에 귤이 분유를 먹이던 기준이 뒤돌아서 희원을 바라봤다.

“귤이 분유 먹이는 폼이 너무 능숙해서요. 기저귀 갈고 목욕시키는 것도 그렇고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이것저것 보면서 공부 좀 했어요.”

“대단한 아빠야. 그치 랑일아?”

희원은 랑일이에게 무릎베개를 해 주고는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었다. 랑일이는 눈을 감고는 꾸벅꾸벅 졸더니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 랑일이 옆에 희원이 눕고 그 뒤에 기준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귤이가 그 옆에 있었다.

귤이 방인데 갓난아이 방치고는 엄청 큰 편이라 네 명이 누워도 방이 넉넉하고도 남았다. 넷은 각자의 방이 있음에도 어느 순간부터 귤이 방에 모여서 잠을 자게 되었다. 누가 보면 이렇게 넓은 집에서 뭐 하냐고 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좋으니까.

기준은 희원의 뒤에서 희원을 품에 안고는 속삭였다.

“자라면서는 한 번도 바닥에서 자 본 적이 없어요. 잠자리를 되게 가리는 편이었거든요.”

희원이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중얼거렸다.

“도련님.”

희원의 말에 기준이 피식 웃었다. 그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삼 형제 중에서 기준은 유독 까칠했고 예민했다.

형은 서재에서 책을 누워서도 보고 엎드려서도 보다 책을 베고 자기 일쑤였다. 해준은 어릴 때도 털털한 편이었고 대학교 때는 외박을 밥 먹듯 했다. 엠티니 친구네 집이니 전전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기준만은 달랐다. 어릴 때나 학창 시절이나 대학교 때나 여지없이 까칠했고 예민했다. 그런 기준은 랑일이를 낳고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혼 후 랑일이를 혼자 키우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희원을 만나고 더욱 달라졌다. 랑일이에게 잘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선이 있었다. 그런데 희원이 랑일이를 마치 자기 자식처럼 정성을 다해,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쏟아붓는 것을 보며 기준은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준 씨 맨 처음에 봤을 때 너무 차가워 보여서 좀 벌벌 떨었어요, 안 그래도 학부모면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기준 씨는 그냥 학부모도 아니고 놀의 후계자니까 더 다가가기 힘든 존재 같았어요.”

“응. 나도 알아요. 맨 처음에는 희원 씨가 너무 어려 보여서 지금 생각하면 진짜 주제넘고 경우 없는 짓이었지만, 희원 씨를 못 믿고 랑일이를 다른 반으로 옮겨 달라고 하려고 했거든요.”

“진짜요?”

희원이 그것까지는 몰랐다는 듯 뒤돌아보며 놀란 표정을 했다.

“지금에라도 사과하고 싶어요.”

희원이 예쁘게 웃으며 몸을 돌려서 기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딪쳐 왔다. 말랑한 입술에서 달콤한 맛이 나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고마워요. 참아 줘서.”

희원의 말에 기준이 희원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자신의 볼을 어루만지는 커다란 손이 따듯했다.

“기준 씨가 그때 당장 실천하지 않고 참아 준 덕분에 이렇게 우리 만날 수 있었잖아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랑일이한테 고마워해야 해요. 랑일이가 첫날 집에 와서 바닥에 드러누웠거든요. 선생님 마음에 드는데 반 바꾸면 안 된다고요. 어머니랑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을 텐데 분위기를 읽었나 봐요.”

“우리 랑일이가 그때도 참 영특했구나.”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다지만 랑일이에 대한 마음은 어째 기준보다 희원이 더했다.

“어! 생각났다.”

“응? 뭐가요?”

희원이 갑자기 발딱 일어났다. 기준은 사실 희원을 껴안고 몸을 더듬고 입을 맞추는 동안 성기가 점점 몸집을 부풀리고 있던 차였다. 어떻게 분위기를 잡고 뭐라도 좀 해 볼까 싶었는데 희원이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황당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랑일이 크리스마스 선물 뭐 해 줄까 고민 중이었거든요.”

“근데요?”

“생각났어요, 해 줄 거!”

“그래요? 다행이네요. 살 거 있으면 내일 얘기해 줘요. 장 보러 갔다가 오는 길에 사 올게요.”

기준은 다시 희원을 자리에 눕히려고 했다. 분위기를 다시 잡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으응, 사는 게 아니고, 만들어 주는 거요. 크리스마스 선물 지금 만들어야겠어요.”

“응?”

“기준 씨, 먼저 자요! 랑일이 잘 때 만들어 줘야겠어요. 잘 자요.”

희원이 기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가벼운 몸짓으로 방을 벗어났다. 기준은 자신의 앞섶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이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 * *

귤이가 태어난 지 3주가 되었을 때, 마치 삼칠일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양가 부모님이 기준과 희원 부부의 집을 방문했다. 마치 날짜를 손으로 꼽고 있기라도 했던 것같이 딱 하루의 오차도 없이 삼칠일이 되는 그날이었다.

간밤에 전화를 두 통 받은 희원은 전화를 끊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박 여사한테서 전화가 왔고 그다음은 희원의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박 여사는 처음에는 희원의 건강을 걱정했고 그다음에는 희원이 먹고 싶은 게 없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랑일이가 귤이랑 갈등은 없는지, 마지막은 귤이랑 랑일이를 본 지 오래되어서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기준에 대한 안부가 하나도 없어서 희원이 전화를 끊기 전에 ‘기준 씨도 잘 있어요.’라고 말했으나 박 여사는 그건 별로 궁금하지 않다고 해서 희원이 핸드폰을 들고 기준을 바라보고 있던 차였는데 그만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희원의 엄마는 전화를 해서 박 여사와 비슷하게 희원은 건강한지, 귤이는 잘 자고 잘 먹고 잘 노는지, 랑일이는 동생 때문에 스트레스받아 하지 않는지, 기준은 아기 울음소리에 자꾸 깨서 피곤해하지는 않는지를 물었다.

그나마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그래도 희원네 본가에서만큼은 사랑받는 기준 씨구나 싶어 희원은 안심했다. 희원의 엄마는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본 지 오래되어서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희원은 통화를 끝내고는 기준에게 양가 부모님을 초대해서 저녁 식사라도 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기준은 희원에게 괜찮겠느냐, 피곤하지 않겠느냐 몇 번이나 물어보고 확인한 뒤 그러자는 대답을 해 주었다.

희원이 다시 전화를 해서 양가 부모님께 다음 날인 토요일에 저녁 드시러 오시겠느냐고 했을 때 양가 엄마들은 단 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희원이 혹시 아버지들이 약속이 있는 거 아니냐고 물었을 때 한결같이 랑일이랑 귤이 보러 가는 게 먼저지 외부 약속이 먼저냐며 그런 것쯤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토요일 저녁. 주방에서는 희원 대신 기준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희원 씨, 이거 맛 좀 봐 줘요.”

랑일이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책을 보고 있던 희원이 기준의 부름에 주방으로 들어왔다. 갈비찜 냄새가 코를 파고들었다.

“와! 진짜 대단하다.”

아침에 랑일이와 장을 보러 가더니 집에 돌아와 주방에 틀어박혀 뭔가를 만드는 것을 봤다. 도대체 뭐를 저렇게 열심히 하나 했더니 바로 갈비찜이었다.

“맛은 어때요? 괜찮아요?”

“응! 맛있어요.”

희원이 웃으며 엄지를 세워 보였다. 희원의 얼굴에 정말로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이 있어서 기준은 더 신나서 음식을 하기 시작했다.

“희원 씨.”

“응?”

희원이 갈비찜 하나를 들고 랑일이에게도 맛을 보여 주려고 할 때였다. 기준의 부름에 희원이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자 기준이 희원의 입에 갑자기 입을 맞췄다. 놀란 희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냥 너무 귀여워서요.”

“어! 마미랑 아빠랑 뽀뽀했다. 마미, 나랑도 해요.”

랑일이가 희원의 옷자락을 쭉쭉 잡아당겼다. 기준의 기습 뽀뽀에 정신을 놓았던 희원이 랑일이의 부름에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미소 지었다.

“그래! 마미랑 뽀뽀하자.”

희원이 허리를 굽혀서 랑일이 뺨에 입을 맞춰 주자 랑일이가 희원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희원은 귤이를 낳았어도 여전히 랑일이에 대한 사랑을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 그걸 랑일이도 아는지 희원에게 받은 만큼 고스란히 동생에게 쏟아 주고 있었다.

한창 주방에서 세 식구가 알콩달콩 이야기를 나누는데 희원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할머니 오셨나 보다!”

희원의 말에 랑일이가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사이 희원은 대문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랑일이가 현관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랑일아, 추워!”

희원이 뒤늦게 점퍼를 들고 뒤를 쫓았지만 랑일이는 이미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박 여사의 치마폭에 안겨 든 뒤였다.

“아고, 내 강아지!”

박 여사가 랑일이를 푹 안고는 걸음을 빨리해서 계단을 올랐다.

“왜 이러고 나왔어. 추운데. 아이고! 희원아, 얼른 들어가. 그러고 나오면 어떡해!”

박 여사는 조금의 찬 바람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이 회장이 뒤에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문을 얼른 닫았다.

“어어! 어머니, 뒤에 아버지!”

“아버지가 문제니? 아직 산후조리 중인데 그러고 찬 바람 쐬면 어떡해.”

박 여사가 랑일이를 치마폭에 싸고 희원의 등을 밀며 현관문에서 더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기준이 주방에서 느릿하게 나오며 그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어째 박 여사의 희원 사랑은 기준 저리 가라다.

뒤이어 기준의 아버지가 멋쩍은 표정으로 들어섰다.

“당신은 나 주차하고 있는 사이에 그렇게 쏙 들어가 버리면 어떡해.”

“지금 당신이 문제예요? 랑일이가 맨발로 뛰쳐나왔는데. 우리 강아지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아버지 오셨어요?”

희원이 허리를 굽혀서 인사하자 이 회장이 겸연쩍게 웃으며 잘 있었냐고 안부를 물었다.

기준네 부모님이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기 무섭게 이번에는 희원네 부모님이 들이닥쳤다. 이번에는 랑일이가 점퍼까지 입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차라 희원의 아버지 품에 안겨서 들어왔다.

양가 부모님은 서로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는 당연하다는 듯 귤이가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귤이는 거실에서 난리굿이 벌어지는데도 깨지 않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머, 그사이에 부쩍 컸다.”

“사진으로 보는 거랑은 또 다른데요? 그쵸?”

희원의 어머니 말에 박 여사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어머니는 마치 소녀처럼 서로 손을 꼭 잡고는 귤이를 이리저리 들여다봤다. 뒤로 밀린 아버지들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를 찾을 때 희원이 아버지들의 손을 이끌고는 반대편으로 모시고 와서 귤이를 보게 해 주었다.

무뚝뚝한 아버지들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귤이를 바라봤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희원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희원 씨. 저녁 다 됐어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부모님들께 저녁이 다 되었다고 식사하시라고 권했다. 거실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 오고 있었다.

“이 서방이 이걸 다 한 거야?”

희원의 엄마가 상을 보며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얼굴이 희원의 것과 너무나 닮아 있어서 기준은 그저 미소 지었다.

“별로 차린 건 없지만 그래도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서방, 이게 별로 차린 게 없으면 작정하고 차리면 한정식집 정도 되겠는데?”

희원의 엄마의 말에 기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한정식집 하려고 했는데 희원 씨가 절대 안 된다고, 놀 이어받아야 한다고 해서 못 합니다. 의외로 우리 희원 씨가 명예욕이 있더라고요.”

기준의 말에 모두 웃었는데 희원만 얼굴이 빨개져서 왜 그러냐며 기준을 타박했다.

모두 어느 정도 식사를 했을 때 이 회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귤이 이름을 지어야 하지 않겠니, 희원아.”

그제야 다들 여기 와 있는 이유를 상기했다는 얼굴을 했다.

“귤이 이름은 저희가…….”

기준이 말하려고 했는데 희원이 기준의 팔을 잡고 저지했다. 그러고는 물었다.

“혹시 생각해 두신 이름 있으세요?”

“그래서 말이다, 우리가 조금 생각해 봤는데 말이지.”

지금까지 점잖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있던 이 회장은 자기가 유명한 작명소를 다녀왔다면서 이름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기준은 제 아버지를 보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박 여사는 이미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아버지 원래 작명소 다니셨어요?”

기준이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네 아버지가 그런 데 다닐 사람이니?”

박 여사는 아직도 네 아버지를 모르냐는 듯 물었지만 그건 기실 물어본 기준도 당황스러워서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네 아버지가 귤이 이름 짓겠다고 그런 데를 다 갔지 뭐니.”

원래 자식보다 손주를 더 예뻐한다고 하더니 그게 딱 이 회장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때였다.

“흠흠.”

가만있던 희원의 아버지인 이 교수가 이번에는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환기했다.

“혹시 아버님도 다녀오셨어요?”

“그건 아니고, 내가 좀 한자를 여러 개 찾아봤는데…….”

누가 국문학 교수 아니랄까 봐 생전 처음 들어 보는 한자까지 보여 주며 희원의 아버지는 여러 개의 이름을 보여 주었다.

“아버지, 그건 좀 올드해요.”

지켜보던 희원이 결국에는 말리고 말았다. 희원의 아버지는 이게 얼마나 좋은 한자인지를 연설했지만 희원이 그건 자기 시대에나 지었던 이름이라며 불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막내를 이겨 본 적이 없는 이 교수는 결국에는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이 서방, 희원이랑 생각해 본 이름 있어?”

희원의 어머니가 물었다. 그때였다. 옆에서 갈비찜을 야무지게 뜯던 랑일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마미, 나는 그냥 귤이가 좋아요. 아니면 귤희. 마미 이름에 있는 ‘희’.”

“응?”

랑일이의 입을 닦아 주던 희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기준을 바라봤다.

“기준 씨, 우리 귤이 이름 귤희로 지을까요? 귤이를 만나서 기쁘다는 뜻으로요.”

“마미, 근데요.”

희원의 이야기를 듣던 랑일이가 조심스레 희원을 불렀다. 희원이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랑일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도 희 자 들어가는 이름으로 바꾸고 싶어요.”

“응?”

“마미 이름이랑 합칠래요.”

희원이 랑일이를 꼭 끌어안았다.

“랑일아, 내 사랑스러운 아들. 마미 이름 없어도 랑일이는 그냥 마미 아들이야. 마미 가슴에 랑일이 이름이 쏙 박혀 있어. 그러니까 랑일이 이름에 마미 이름 없어도 괜찮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까? 사랑하는 우리 아가.”

희원은 랑일이의 뺨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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