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둘만 아는 주접(외전 1) (22/31)

1. 둘만 아는 주접

“다리 아파.”

희원은 다리를 통통 두들겼다. 20주가 되니 이제 슬슬 배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첫 임신이라서 그런지 조금 넉넉한 옷을 입으면 여전히 티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건 티가 나지 않는다고 쳐도 임신부인 희원은 느끼는 게 많았다. 입덧을 심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아기가 커 가면서 먹는 양이 현저히 줄었다. 소화가 잘되지 않는 것 같아 말이다.

다리도 좀 저려서 자다가 깨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희원은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기준을 깨우기 미안해서 몰래 그 품을 떠나 거실로 나오곤 했다. 잠귀가 예민한 기준이 행여 희원의 뒤척임에 깰까 봐 말이다.

아무리 희원에게 유치원 일이 천직이라고 해도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는 건 사실이었다. 아직 2킬로그램도 안 되는 아이가 있을 뿐인데 체력은 점점 떨어졌다. 희원이 누나한테 ‘노산이라서 그런가 봐.’ 하고 말했다가 그게 무슨 노산이냐고 핀잔만 잔뜩 들었다. 그러면서 누나는 원래 임신하면 몸이 힘든 거라며 그럴수록 더 잘 먹고 잘 쉬어야 한다고 했다.

오늘도 결국 새벽에 깨 버린 희원은 조심스레 거실로 나왔다. 7월 한여름이지만, 거실 실내는 꽤나 쾌적했다. 하지만 희원은 거실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었다. 서서히 동이 트고 있었다. 창문을 여니 더운 바람이 훅 하니 불어왔다. 하지만 그리 불쾌할 정도는 아니어서 희원은 그냥 열린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희원 씨.”

기준의 목소리에 희원이 고개를 돌렸다.

“어? 왜 깼어요?”

“희원 씨가 없어져서. 근데 여기서 뭐 해요?”

기준은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인지 열린 창문을 힐긋 쳐다보고는 휘적휘적 걸어와서 창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냥 둬요. 바깥 공기 쐬고 싶어서 내가 열어 뒀어요.”

기준이 창문으로 뻗었던 손을 뗐다. 희원은 그런 기준을 지나쳐서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좀 주물렀다.

“왜 여기 있어요? 안 자고.”

“그냥 잠이 깼어요.”

“잠이 안 와요?”

희원이 희미하게 웃었다.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자요.”

“희원 씨는요?”

“저도 들어갈게요.”

희원이 기준의 뒤를 따랐다. 기준이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희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희원 씨 옆에 없으면 허전해요. 어디 가지 마요.”

기준의 응석에 희원이 웃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희원은 일주일 동안 랑일이랑 단둘이 잤다. 기준은 당연하다는 듯 그에 불만을 품었다.

랑일이랑 단둘이 잔 첫날, 결국 기준이 그 몇 시간을 참지 못하고 희원의 뒤에서 잔 것을 랑일이가 알아채고는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마미랑 단둘이 자기로 약속했는데 아빠가 못 하게 했다면서 말이다.

그러는 바람에 말 그대로 기준은 일주일 내내 아들에게 희원을 빼앗겼다. 그 후로 기준은 절대 랑일이와 단둘이 자는 유의 약속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하지만 얼마 전 랑일이가 무서운 꿈을 꿨다며 또 며칠을 희원하고만 자는 바람에 기준의 집착은 더 심해졌다. 자다가 희원이 없으면 희원을 찾으러 다니고 일어나 보면 꼭 희원의 등 뒤에 붙어 있었다. 앞에는 랑일이가 뒤에는 기준이. 희원은 행복하지만 자꾸만 부자가 싸워 대서 가끔 어떻게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곤 했다.

새벽잠을 설쳐서 그런지 희원은 기준이 운전하는 차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임신한 뒤 잠도 많아졌고 쉽게 피로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희원 씨.”

처음에는 듣지 못했다. 기준이 희원의 뺨을 쓰다듬으며 다시 희원을 불렀다.

“희원 씨, 다 왔어요.”

눈앞에 유치원이 보였다. 착한 귤이는 안정기에 접어들자 이제는 멀미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기준이 태워다 주고 있었다. 뒤에서 랑일이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는 희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미! 유치원에 도착했어요!”

희원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희원 씨, 많이 피곤해요? 새벽에 깼다가 다시 자서 그런가?”

기준이 희원의 안전벨트를 풀어 주며 말했다. 희원은 차마 요즘은 늘 졸려요, 하고 대답할 수가 없어서 그냥 웃었다. 기준이 걱정할 게 뻔했고 더 나아가 그럼 유치원 쉴래요? 하고 물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희원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랑일이가 내려서 희원의 손을 잡았다. 랑일이가 기준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희원도 기준에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다.

“희원 씨, 이따가 어머니가 랑일이 데리고 가신다고 했어요.”

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정기 검진 날이었다. 둘 다 시간이 없으니 정기 검진은 퇴근 후에 이루어졌다.

“랑일아, 할머니랑 집에 가 있어. 아빠랑 마미랑 병원 갔다가 갈게.”

“응!”

랑일이는 왜 자기는 데리고 가지 않느냐고 떼를 쓸 법도 한데 착하게도 그러지 않았다. 희원이 잘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원은 병원을 다녀오면 가장 먼저 랑일이에게 귤이 초음파 사진을 보여 주고, 심장박동 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랑일이는 이제 알고 있었다. 마미가 병원에 다녀오면 조금 더 큰 귤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희원과 랑일이는 다시 한번 기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기준이 모는 차가 골목길을 돌아 나갈 때까지 둘은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들었다.

* * *

“오셨어요?”

의사가 희원과 기준을 반갑게 맞이했다. 희원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요즘은 어때요?”

그동안 몇 번이나 병원에 왔지만 희원은 의사가 이렇게 물으면 그때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임신이 처음인지라 어떠냐는 질문이 몸 상태를 말하라는 건지 아니면 기분을 말하라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책도 찾아 읽고 누나한테도 물어봤다. 유치원 교사이다 보니 아이들이 물어 오는 ‘동생은 어떻게 생겨요?’ 또는 ‘아기는 어떻게 태어나죠?’ 이런 질문에 대답해 주어야 해서 지식적으로는 아기가 몇 개월 때는 어떻고 그다음은 얼마나 성장하고 이런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물어보는 건 아닌 듯했다.

“어디 아픈 데는 없고요?”

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입덧도 안 하고 다른 사람이 모는 차에 타도 멀미 안 해요.”

희원이 제 상태에 대해 생각하며 대답했다.

“어지럽거나 그렇지는 않으세요? 피 검사 결과 보니까 살짝 빈혈기가 있던데요. 약을 하나 더 먹어야 하는 건 아닌데 좀 잘 드셔야 할 것 같아요. 이사님, 소고기 이런 것 좀 많이 사 주세요.”

“아니에요, 저 잘 먹고 있어요.”

기준이 걱정할까 봐 희원이 손을 저으며 의사의 말에 반박했다. 의사가 빙그레 웃었다.

“희원 님, 임신했을 때 누려야지 언제 누리려고 하세요?”

“지금도 많이 누리고 있어요.”

기준은 둘의 대화를 유심히 듣다가 희원을 바라봤다. 왜 얘기 안 했냐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희원도 뭐를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지 알지 못해 망설였던 거라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귤이가 얼마나 컸나 볼까요?”

희원이 뭔가 꺼린다는 것을 느낀 의사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희원은 초음파 화면을 보며 미소 지었다. 언제 봐도 참 신기했다. 귤이는 부쩍부쩍 자랐다. 평균보다 조금 작았는데 그래도 잘 자라고 있다고 했다.

옆에서 기준이 꼼지락거리는 귤이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게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이사님, 뭐 궁금하신 거 있으세요?”

“저, 오늘 우리 귤이 공주님 옷을 사러 가기로 해서요.”

희원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무슨 옷?

“음, 귤이가 보여 줄지 모르겠네요.”

“뭐를요?”

희원이 물었다.

“이사님이 옷 사러 가셔야 하는데 옷 스타일 고민하시는 것 같아서요.”

기준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희원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근데 귤이한테 달린 문제라서요. 만약에 귤이가 다리 사이 가리고 있으면 드레스를 사냐 마냐는 다음 달에나 결정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여태 가만 듣고 있던 기준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 선생님.”

“네, 이사님.”

“귤이랑 잠깐만 얘기해도 될까요?”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준이 희원의 배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귤아, 아빠야. 오늘 우리 귤이가 공주님인지 아닌지 좀 보여 주면 안 돼? 아빠가 귤이 드레스 사러 가고 싶은데 응? 협조 좀 해 주세요.”

희원이 이마를 짚었다. 귤이가 왕자님이면 삐쳐서 절대 안 보여 줄 것만 같아서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왔다.

“이사님은 아예 귤이가 공주님이라고 확신하시네요?”

“음, 그게…….”

기준은 부정하지 못하고 초음파 화면만 힐긋 쳐다볼 뿐이었다. 의사가 결국 웃어 버렸다.

“자, 볼게요. 귤아, 좀 보여 줘요.”

의사가 이리저리 기계를 움직였다. 희원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희원은 왕자님이든 공주님이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옆에 있는 이 남자와 집에 있을 또 다른 꼬마 도련님이었다.

의사가 초음파 기계를 정리하고 희원의 배를 닦아 줄 때까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희원이 침대에서 내려 의자에 앉을 때까지도 의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사가 초음파 사진을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어떤가요?”

누가 보면 중한 병이라도 얻은 사람처럼 기준이 심각하게 물어봤다. 희원도 사실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구누구 씨들 때문에 말이다.

“이사님, 축하드려요. 소원 이루셨네요. 가시는 길에 사고 싶으셨던 스타일로 옷 사셔도 되겠어요.”

“진짜요?”

“그럼요.”

“잘못 보신 거 아니죠?”

“네.”

“귤아 고맙다!”

기준은 정말로 환하게 웃었다. 희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 보면 나라라도 구한 줄…….

기준은 실실 새는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숨길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희원의 손을 잡고 병원 문을 나서는 기준은 마치 개선문을 통과하는 장군과도 같았다.

“그렇게 좋아요?”

“그럼요. 너무 좋아요, 정말로 너무!”

희원이 피식 웃었다. 그 표정이 마치 네가 좋다면 됐다는 뜻 같았다.

“희원 씨는 안 좋아요?”

“그럴 리가요. 저도 좋아요.”

집에 있는 랑일이가 이 소식을 들으면 엄청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희원은 걸음을 좀 빨리했다.

“좀 천천히 가요.”

“랑일이가 기다리잖아요. 빨리 가서 말해 줘야죠.”

뒤에서 희원의 팔을 기준이 잡아끌었다. 그러면서도 혹시 넘어질까 품으로 몸을 받쳤다. 그 조심스러운 손길과 몸짓을 다른 사람이 봤다면 무슨 신줏단지 모시냐고 할 거였다.

“왜요?”

“우리 백화점 들러서 귤이 옷도 좀 사고, 저녁도 먹고 가요.”

“아직 20주나 더 남았는데 무슨 옷을 벌써 사요? 그리고 랑일이 자꾸 어머니께 맡기는 것도 죄송해요.”

사실 이것저것 다 핑계였고 희원은 좀 피곤했다. 잤으면 싶었다. 희원이 앞으로 다시 걸어가는데 기준이 다시 희원을 붙잡았다.

“어머니한테 맡기는 게 뭐 어때서요. 이왕 둘이 나왔는데 같이 시간 보내다 들어가면 좋잖아요.”

“다음에요.”

희원은 살짝 미소 지으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기준이 희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 뒤를 따랐다.

집으로 가는 내내 희원은 차에서 잠들었다. 아이를 갖고 몰려오는 잠은 사람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희원 씨.”

“으응.”

잠에 취한 희원의 뺨을 기준이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고는 이마를 가리고 있는 머리칼도 옆으로 쓸어 주었다.

“희원 씨, 집에 다 왔어요. 너무 졸리면 차에 있을래요? 얼른 들어가서 랑일이만 데리고 올게요.”

희원이 잠결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애써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그래도 랑일이 봐주셨는데 들어가서 인사드리고 나와야죠.”

희원은 조수석 문을 열고 밖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가 자기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살짝 어지러웠던 거다. 운전석 문을 열고 희원 쪽으로 오던 기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희원 씨!”

“괜찮아요.”

희원도 살짝 놀라긴 했지만 넘어진 게 아니니 안심이었다.

“어디 아파요?”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기준이 그래도 염려스러운지 희원의 팔 한쪽을 잡아 제 몸에 기대게 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랑일이가 거실에서 놀다가 벌떡 일어났다.

“마미!”

랑일이는 코앞까지는 뛰어와 놓고는 앞에 다다르자 희원에게 살며시 안겼다. 희원이 랑일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밥 먹었어?”

“네! 할머니가 국수 해 줬어요.”

“잘 먹었습니다 했어?”

“네! 나 인사 잘해요. 마미 닮아서.”

희원이 랑일이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은 뒤 주방에서 나오는 박 여사를 보고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어머니, 저희 왔어요.”

“뭘 이렇게 일찍 왔어? 기준아, 희원이 밥이라도 사 먹이고 오지 그랬어.”

“제가 일찍 오자고 했어요. 랑일이가 기다릴까 봐요.”

희원의 말에 박 여사가 웃으며 그럼 들어와서 밥 먹고 가라고 주방으로 이끌었다. 기준과 희원이 마주 보며 앉자 랑일이는 희원의 옆에 딱 붙어 앉았다.

“이랑일, 마미 옆에 그렇게 앉으면 마미가 밥 먹을 때 불편하잖아.”

기준이 랑일이에게 조금 떨어지라고 손짓하자 랑일이가 불퉁하게 제 아빠를 쳐다봤다. 희원은 그런 랑일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자기 쪽으로 붙였다.

“괜찮아. 마미 왼손잡이니까 여기 오른쪽에 앉으면 돼. 기준 씨, 랑일이랑 싸우지 좀 마요.”

희원이 그렇게 말하며 주방에서 일하는 이모님에게 밥을 받으면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박 여사가 주방으로 들어와 희원이 좋아하는 나물을 조금 더 밀어 주며 말했다.

“희원이 많이 먹어. 병원에서는 뭐라니? 귤이 잘 크고 있대?”

박 여사의 물음에 대답한 이는 희원이 아니라 기준이었다.

“어머니, 귤이 공주님이래요. 랑일아, 귤이가 어여쁜 여자 동생이래.”

“응, 원래 귤이는 공주님이었는데?”

랑일이의 반응에 희원이 작게 웃었다. 아이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처음부터 성별을 여자로 믿고 있었기에 기준하고는 반응이 완전히 달랐다. 희원은 그런 랑일이의 반응을 이해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랑일아, 더 먹을래? 여기 랑일이 좋아하는 닭고기 있다. 이거 더 줄까?”

희원이 포크로 닭고기 조각을 찍어서 랑일이 손에 포크를 들려 주었다. 랑일이는 한입 가득 고기를 물고는 제 아빠를 힐긋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희원에게 고정시켰다. 희원이 랑일이와 눈을 맞추고는 웃어 보였다.

“희원아, 엄마가 귤이 침대 사 줄게. 사지 마.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

“요즘에는 잘 먹고 있니? 어째 얼굴이 더 새하얀 것 같아. 혹시 빈혈 있니?”

기준은 또 희원 대신 대답하려고 했다. 분명히 희원은 아니라고 할 게 뻔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희원이 더 빨랐다.

“네, 조금 그런 것 같아요. 병원에서는 약을 하나 더 먹을 필요는 없다고 하는데요, 가끔 살짝 어지러울 때가 있어요.”

기준이 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준과 눈이 마주친 희원이 왜 그러냐는 듯한 시선을 던졌지만 기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박 여사는 희원의 다른 쪽 옆에 앉아서 희원의 밥그릇에 반찬을 퍼다 나르기 시작했다.

“희원아, 이거 먹어 봐. 엄마가 직접 만든 건데 희원이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임신하면 어지럽고 그래. 없던 빈혈도 생긴다니까. 빈혈에는 소고기가 좋으니까 많이 먹고 가.”

박 여사는 소고기와 신선한 채소에 새콤한 드레싱이 들어간 샐러드를 희원의 앞에 놓아 주었다. 희원이 감사하다고 인사하고는 샐러드를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앞에 앉은 기준은 말없이 밥만 먹었다.

“희원아, 다른 데는 이상 없어? 밤에 잠은 잘 자고?”

“네. 뭐…….”

뭔가 말하려다가 희원이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기준의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준이 가졌을 때 밤에 잠을 못 자겠는 거야.”

박 여사의 말에 기준을 살피던 희원이 박 여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갱년기인 사람처럼 자다가 보면 체온이 올라서 잠에서 깨는 거야. 그래서 혼자 한참 새벽에 깨서 잠 못 들고 그랬어. 그럴 때 옆에서 남편이 곤히 잠드는 거 보면 그렇게 밉고 그러더라.”

희원이 작게 웃었다. 박 여사가 계속해서 말했다.

“기준이 가졌을 때는 어땠는지 아니? 기준이 가졌을 때는 왜 그렇게 다리가 저리고 허리도 아픈지. 그때도 잠 못 잤어. 생명 하나 배 속에 품고 있는 게 얼마나 힘든 건데. 우리 희원이는 괜찮니?”

희원은 그저 살며시 웃었다.

그 뒤에도 박 여사는 임신 중에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줬다. 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지만 맞장구를 칠 수가 없었다. 왠지 기준의 분위기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집에 가려고 희원이 랑일이의 손을 잡고 일어났을 때 박 여사는 희원이 저녁 식사 때 잘 먹었던 음식들을 한 보따리 싸서 차에 실어 주었다.

“희원아,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언제든 전화해. 엄마가 해서 갈 테니까.”

“네, 감사해요 어머니. 오늘 맛있는 것 많이 먹었어요. 랑일아, 할머니께 인사해야지.”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할머니 빠빠이!”

랑일이는 처음에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서 인사한 뒤 바로 손을 흔들며 가볍게 인사했다. 희원이 랑일이를 뒷좌석에 태우고 자신은 조수석 쪽으로 넘어갔다.

“기준아, 날이 갈수록 몸은 더 힘들어져. 기분도 오르락내리락하고. 아무리 희원이가 성격 좋고 밝아도 임신했을 때는 자기도 감정을 주체 못 할 때가 있는 법이야. 더 살피고 더 정성 들여야 해. 알지?”

“알아요.”

무뚝뚝한 기준의 대답에 박 여사는 기준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긴 뒤 출발하는 차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희원은 기준을 살피고는 뒷좌석에 앉은 랑일이를 살폈다. 랑일이가 아직 깨어 있어서 기준과 무슨 이야기를 하기가 뭐했다. 기준은 가는 내내 별로 말이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졸려 하는 랑일이를 간단하게 씻기려고 하자 기준은 자기가 하겠다며 랑일이를 데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희원은 오도카니 거실에 서 있다가 자신도 씻으려고 침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왔을 때도 기준은 방에 없었다. 랑일이와 같이 씻고 재우나 싶어서 희원은 조용히 침대에 앉아 요즘 한창 하고 있는 배냇저고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참을 만들었는데도 기준이 들어오지 않자 희원은 그제야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거실로 나가 봤다.

“기준 씨.”

기준은 거실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여름 밤, 밖은 푹푹 찌더니 안은 에어컨 바람 덕에 쾌적했다. 희원이 기준에게 다가가자 기준이 뒤돌아 희원을 가만 쳐다봤다.

“기준 씨, 왜 여기 이러고 서 있어요?”

“그냥 좀 생각하느라고요.”

“응?”

희원은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기준이 희원을 끌어다가 자신의 품에 안았다. 얼결에 안긴 희원이 마주 껴안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자 기준이 희원의 귓가에 말했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요?”

“네?”

희원이 몸을 떼려고 했는데 기준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기준은 계속해서 말했다.

“왜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해요? 어머니한테는 조잘조잘 다 얘기하면서 왜 나한테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아요?”

“그게 무슨…….”

“새벽에 잘 못 자고, 깨서 홀로 거실에 나와 있고, 가끔 어지럽기도 하고,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이런 거 왜 나한테는 하나도 말해 주지 않아요? 근데 이런 거 내가 먼저 알아채야 하는 거잖아. 희원 씨가 말 안 해도 내가 척척 알아야 하는 거잖아. 나는 진짜 희원 씨한테 빵점짜리 남편인가 봐. 미안해요. 근데 희원 씨가 말 안 해서 속상해. 그리고 이런 거에 속상해하는 내가 정말 못난 것 같아요.”

희원이 기준을 살짝 밀어내고 올려다봤다. 기준은 정말 속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서운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기준 씨가 바쁘고, 집에 오면 피곤하고 그러니까…….”

“희원 씨도 일하잖아요. 나만 일하나 뭐. 희원 씨는 내가 정말 못 미더운가 봐.”

기준이 고개를 모로 돌리며 창밖을 쳐다봤다. 어쩐지 한숨을 내쉰 것 같기도 했다.

“늦었어요. 자요.”

기준이 희원의 등을 감싸고 방으로 들여보냈다. 둘은 침대에 누웠는데 왠지 공기가 서먹서먹했다. 그날 둘은 처음으로 가만히 누워 천장을 보다 잠들었다.

* * *

마침 금요일이었고 희원은 오랜만에 랑일이를 보고 싶다는 희원네 식구들 덕에 본가에 랑일이와 함께 가기로 되어 있었다.

기준이 자신도 처가댁에 가겠다고 했지만 희원은 오랜만에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쉬라며 기준에게 홀로 가질 수 있는 시간을 내주었다. 그 바람에 기준은 원하지 않는 자기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아직 그날 밤의 서먹함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 기준은 희원이 자신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라며 희원네 본가에 못 가게 한 게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희원이 아직 자신에게 마음이 다 안 풀렸나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희원은 앞으로 귤이가 태어나면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니 지금 시간을 가지라며 기준을 설득했고 그렇게 기준은 오랜만에 금요일 밤을 홀로 보내게 되었다. 기준은 그 시간에 도대체 무얼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희원 없이 보내는 게 실로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회사에서 형인 이준을 만났다. 5월에 놀책과 했던 협업은 반응이 좋았고 그러면서 그 협업을 계속해서 이어 하고 있었다. 그 일 때문에 이준이 놀 본사에 회의를 하러 들어왔다.

다른 때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애인을 옆구리에 끼고는 바람같이 사라지던 이준이 오늘은 그리하지 않기에 기준이 웬일이냐고 물었다. 이준은 그 유명한 애인님께서 공사다망하시어 동기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형제는 갑자기 시간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해준은 육아 중이려나?”

이준의 물음에 기준이 대답했다.

“그러지 않겠어? 루세 씨는 금요일에 제일 바쁘잖아.”

“박 여사한테 전화해서 설이 맡아 달라고 하고 이해준도 여기 오라고 할까?”

삼 형제 사이가 좋은 편이긴 했지만 특히 이준과 해준은 종종 기준을 빼고서도 만나는 것 같았다. 이해준이 육아하다가 지치면 제 큰형네 집으로 피신하는 것 같았다. 기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가 해준에게 전화를 했다.

“이해준.”

―웬일이셔? 신혼이신 분이?

해준과 기준이 통화를 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집안일이나 그 외 다른 일로 통화할 일이 있으면 형제가 하기보다 희원과 루세가 했다. 둘은 동갑인지라 마음이 잘 맞는 것 같았다. 기준과 해준으로서는 둘이 주말마다 만나지 않는 것에 감사할 정도였다.

“설이 보고 있어?”

―그럼 뭐 하겠어?

“박 여사한테는 큰형이 말해 준다니까 설이 맡기고 여기로 와. 주소 보낼게.”

이미 이준이 박 여사에게 전화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준은 전화를 끊고는 해준에게 술집 주소를 보냈다. 놀 근처에 있는 술집으로 기준과 이준이 종종 찾는 곳이었다. 회원제였고 룸이 따로 있어서 사생활이나 중요한 이야기에 대한 보안이 보장되어 있었다.

정확히 30분 뒤 이해준이 도착했다.

“무슨 일인데? 무슨 일로 여기 다 모였어?”

해준이 들어오면서부터 궁금해했다. 그러고는 이준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냥 시간이 어쩌다 맞았어.”

“아아. 근데 우리 큰형 어째 살이 빠진 것 같다? 그 악명 높은 애인께서 막 회사에서도 못살게 굴고 그러시나?”

해준이 이준의 잔을 제가 가로채 목을 축이며 말했다.

막내인 해준은 싹싹하고 살가운 동생이었다. 형들을 챙기고 서로의 소식을 전하는 이도 해준이었다. 이준이 연애를 하고 있는 것 같다며 기준에게 말한 이도 해준이었다. 평소처럼 집에 놀러 갔더니 집주인이 없더라나 어쨌다나. 기준이 그게 연애랑 무슨 상관이냐고 하자 해준은 그게 너무 빈번하다고 했다.

“큰형은 일이 너무 많대. 나만큼 바쁘겠냐마는.”

“작은형은 꼭 말을 얄밉게 하더라. 작은형수 아니면 형은 누구랑 살지도 못하지.”

해준의 말에 이준이 피식 웃었다.

“근데 정말 어쩐 일이야?”

금요일은 원래 다들 바빠서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고 그래서 집안일이 있어도 금요일에는 만나지 않는다. 그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이준은 금요일은 대개 중요한 회의가 있거나 애인과 밤을 보냈고 기준도 금요일임에도 야근이 종종 있었다. 해준은 요식업을 하는 루세 때문에 금요일 밤은 오롯이 독박 육아였다.

이렇게 금요일 밤에 삼 형제가 모인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작은형이 어떻게 시간이 났어? 혹시 너 형수랑 싸웠냐? 임신한 형수랑?”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라는데 이놈의 집은 모두가 희원의 편이었다.

“너가 뭐냐, 이해준?”

“작은형도 만날 큰형한테 이이준이라고 하면서.”

해준이 이준에게 더 붙으며 말했다. 이준이 해준의 머리를 툭 쳤다.

“나한테 맞먹는 건 애인 새끼 하나로 족하다. 너도 기준이한테 맞먹지 마.”

그 말인즉, 기준에게도 자기한테도 맞먹지 말라는 뜻이었다. 기준에 비해서는 덜하지만 이이준도 까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알았어. 근데 정말로 작은형은 어떻게 된 거야?”

“희원 씨 본가 갔어.”

“진짜? 싸우고 본가 간 거야? 형이 뭐 잘못했어? 형수가 보따리 싸서 랑일이 데리고 간 거야? 엄마가 알아?”

“그런 거 아니라고.”

기준이 짜증을 부리자 이준이 피식 웃으며 술을 따랐다.

“술이나 마셔. 이해준, 뭐 타고 왔어?”

“차 갖고 왔어. 대리 부를 거야. 형들은?”

“우리도.”

모처럼의 시간에 셋의 대화가 더욱 무르익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왜 나한테 말을 안 해 주냐고 했더니 희원 씨가 회사 다니느라 피곤한 사람한테 어떻게 다 말하느냐고 하는 거야. 아니 회사는 원래 다녔잖아. 내가 뭐 언제 회사 안 다녔어? 그리고 희원 씨도 일하면서 그렇게 말하면 진짜 서운하지 않겠어? 뭐 나만 일해? 자기도 일하지? 아무래도 나를 못 미더워하는 것 같아.”

기준의 잔에 양주를 따르며 해준이 웃었다.

“그래, 서운할 수도 있겠네. 나도 루세가 임신했는데 계속 일했을 때 서운했어. 그때 나는 하물며 학생이었잖아. 어렸으니까 뭘 알았냐고. 나중에 임신하고 일할 때 힘들었다고 얘기하는데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진짜 서운하더라. 그때 말을 해 줬으면 회사를 더 일찍 들어가서 돈을 벌고 루세보고는 일을 그만하라고 그랬지.”

“일 그만하란다고 그만하냐? 그때도 사장이었는데.”

“그래도. 어쨌든 만날 괜찮다고 해서 진짜 괜찮은 줄 알았지 뭐. 아직도 내가 1학년 신입생인 줄 알아.”

이준이 입에 담배를 물며 비웃었다.

“행복에 겨워서 아주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알고 지껄이지. 어떻게 우리 공주님 좀 일주일 빌려줄까? 최희영이랑 좀 있어 볼래? 그런 말이 나오나?”

기준이 인상을 확 썼다. 이준이 미주알고주알 말하지는 않지만 기준과 해준은 대강 알고는 있었다. 어쩌다 본가에 이준이 고양이를 안고 오는 것만 봐도 그랬다.

“너희는 무슨 배려를 해 줘도 불만이야. 어떻게 파트너 좀 바꿔 줘?”

“뭐라는 거야, 형은!”

“잠깐만. 호랑이 전화 왔다.”

이준이 핸드폰 액정을 확인하더니 그대로 전화를 받았다. 마치 5분 대기조 같은 모습이었다.

“어. 뭐? 당연히 안 될 거 알면서 전화한 거지? 내가 뭐라고 그랬어. 몇 시에 끝나든 상관없으니까 끝나고 전화하라고 그랬잖아. 어디서 외박할 생각을 해? 너 지금 끌려 들어올래, 그냥? 지금 술자리 파투 내 줘?”

통화를 할수록 점점 이준의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걸 실시간으로 구경하며 기준과 해준이 술을 마셨다.

기준은 제 형이 저렇게 말이 많은 사람인 줄 몰랐다. 어릴 때부터 이준은 집에서도 별로 말이 없었고 자라는 내내 서재에만 박혀 있어서 저렇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전혀 예상 밖이었다.

“왜?”

핸드폰을 내려놓는 이준에게 기준이 물었다.

“다짜고짜 자고 가면 안 되겠냐고 하잖아.”

시간은 10시인데 벌써 외박을 이야기한다면 그건 작정하고 마시겠다는 거였다.

“남자잖아. 뭐 어때? 친구들 만나러 갔다며. 남자들끼리 술 마시다 보면 친구네서 자고 올 수도 있지 형은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래? 형이야말로 너무 과보호 아니야?”

그러자 해준이 기준에게 고개를 저으며 하지 말라는 얼굴을 했다. 기준이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짓자 해준이 대신 대답했다.

“알파래.”

“누가? 친구들이?”

“응, 근데 다 여자래.”

기준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준이 이준의 잔을 얼른 채우고는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뭐, 남자 알파들 아닌 게 어디야.”

“아, 진짜 돌아이 최희영. 어떻게 이기준, 최희영 좀 빌려줄까?”

“아니!”

기준은 단번에 거절했다. 갑자기 착하고 천사 같은 희원이 보고 싶었다.

“너는 인마, 복 받은 거야. 희원 씨가 그렇게 배려를 해 주는데도 그게 불만이냐? 이기준하고 이해준은 감사하면서 살아야 돼. 하아, 진짜 내가 우리 집 애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이준은 두통이 밀려오는지 관자놀이를 손목으로 꾹꾹 누르고는 담배를 또 한 대 입에 물었다.

“형, 담배 좀 끊어.”

해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준의 옆으로 이동했다.

“둘 다 골초였으면서……. 나도 랑일이랑 설이 앞에서는 안 피우잖아. 너희 집에 가면 바로 옷 갈아입어. 오늘은 그냥 나 좀 피우게 놔둬라. 내가 우리 망나니 때문에 담배를 끊을 수가 없어.”

이준이 양주를 한 번에 털어 넣자 기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회의 때 보니까 일은 잘하던데.”

“그래, 일은 참 잘하지. 사회생활 만렙이야, 아주. 근데 그러면 뭐 해. 집에서는 개차반인데. 하긴 너희 만나면 또 엄청 잘하겠다. 걔가 다른 사람한테는 참 잘해. 나한테만 그 지랄이고.”

기준의 기억에 형은 그래도 순한 인간들만 만났던 것 같은데 어쩌다 저렇게 매운맛에 코가 꿰였는지 궁금했다.

“잘해 줄 때 감사하면서 열심히 잘해. 내가 봤을 때는 희원 씨랑 루세 씨만큼 가정에 잘하고 착한 사람들도 없어. 부부 사정이야 부부 당사자들밖에 모른다지만 밖에서도 열심히 일하고 집에서도 잘하는 사람이 어디 그렇게 흔한 것 같냐.”

기준은 제 푸념을 하러 나왔다가 어째 이준의 푸념을 듣는 것만 같아 미간을 좁혔다. 그러는 사이 술병은 하나씩 늘어났고 삼 형제의 말들은 더욱 많아졌다.

“그러는 형은 언제 결혼해? 설마 결혼은 안 하고 연애만 하고 싶다 뭐 이런 건 아니지?”

“누가? 최희영이? 그 성격에 그럴 거였으면 네 결혼식에 오지도 않았지. 조만간 해야지.”

“형, 부케 받고 6개월 안에 결혼해야 하는 거 알지?”

해준의 말에 이준이 피식 웃다가 핸드폰 메시지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전화를 했다.

“어딘데? 네네, 모시러 갈게요. 그럼요, 우리 공주님 집에 가신다는데 제가 당연히 모시러 가야죠.”

통화를 마친 이준은 계산서를 들었다.

“왜? 가게?”

“우리 공주님께서 집에 가신단다.”

“왜? 외박하니 어쩌니 그랬잖아.”

“마음이 바뀌셔서 집에 가서 편하게 주무시겠대. 모시러 가야지.”

기준과 해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준은 다시는 불평불만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형수가 될지도 모르는 그에 비해 자신의 짝은 정말 순하고 착하고 배려 많은 사람이었다.

“우리도 가자.”

기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얼른 제 짝을 보러 가고 싶었다. 날개만 없지 천사 같은 그를 말이다. 지금 기준에게는 혼자만의 시간보다 희원이 더 절실했다.

기준은 커다란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를까 아니면 전화를 할까 망설였다. 시간을 보니 12시가 넘어 있었다. 이미 자고 있을 텐데, 괜히 여기로 온 걸까? 지금 시각에 초인종을 누르면 식구들 다 깰 것 같고, 그러면 실례일 테니 전화를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름이라서 밤 날씨가 춥지 않다는 거였다. 희원이 보고 싶어서 무작정 왔는데 만약에 희원이 잠에 곤히 들어서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할 수 없이 차 안에서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우려와도 달리 희원은 단번에 전화를 받았다.

―기준 씨.

“희원 씨. 안 잤어요?”

―잠깐 잠들었는데 기준 씨 전화 와서 깼어요.

기준은 미소를 지었다. 보고 싶은 희원을 당장이라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깨워서 미안한데요…….”

―괜찮아요. 잠이 안 와요? 그래서 전화했어요?

“아니요, 나 문 좀 열어 줘요.”

―네?

희원이 놀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기준은 당장이라도 대문을 쾅쾅 두드리고 싶었다. 제 연인이 너무 보고 싶었다.

“나 집 앞이에요.”

―응? 여기 왔다고요?

“응, 희원 씨 보고 싶어서.”

―잠깐만요, 좀만 기다려요.

희원이 옷을 걸치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고스란히 들려왔다. 그러고는 조금 뒤 현관문이 열리고 희원이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희원 씨, 천천히! 천천히 나와요.”

기준은 한밤중이라서 목소리를 높이지는 못하고 톤만 높인 채 속삭였다. 하지만 희원의 발걸음은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아니, 여길 어떻게 왔어요?”

희원이 놀란 얼굴로 대문을 열며 물었다. 대문이 열리자마자 기준이 쏟아지듯 희원에게 몸을 기울여 그를 꼭 끌어안았다.

“읏! 술 냄새!”

희원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준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떻게 왔어요, 기준 씨?”

“차 타고. 음주 운전 아니고 대리 불러서.”

“그래서 여기다가 두고 간 거구나?”

희원이 집 담벼락에 주차된 차를 보고 츳 하고 혀를 찼다.

“차 키 어디 있어요?”

기준이 주머니를 뒤져서 희원에게 공손히 차 키를 바쳤다. 희원은 기준을 조금 떼 놓고는 대문을 마저 열었다.

“주차하고 들어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요.”

“싫어요.”

기준이 희원을 다시 끌어안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리광 부리는 아이 같은 모양새에 희원은 몇 시간 전까지 자신을 끌어안고 귤이에게 뭐라고 속삭이던 랑일이가 생각났다. 어쩌면 부자가 이렇게 하는 짓이 똑같을까?

“이렇게 안고 있으면 주차를 못 하잖아요. 비싼 차 아무 데나 세워 두면 어떡해요. 내가 얼른 마당으로 가져다 놓고 들어갈게요.”

“싫어요.”

“또 말 안 듣는다.”

그래도 기준은 막무가내였다. 여기서 몸을 떼면 엄마를 잃어버릴 것 같은 아이처럼 떼를 썼다.

“도대체 술을 얼마나 먹은 거야. 알았어요. 그럼 같이 들어가요. 조수석에 타고 있어요.”

“응!”

기준이 단번에 대답하고는 희원의 손을 끌고 친히 차 앞에 가서 희원을 운전석에 넣어 주고 자기는 척척 걸어가 조수석에 앉았다. 그러고는 희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희원이 시동을 걸기 전에 같이 바라봤다.

“왜요?”

“몇 시간 새에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요?”

기준이 중얼거렸다. 불퉁하게 나온 입술에 희원이 피식 웃으며 오뚝한 코를 검지로 톡 쳤다.

“어디서 이렇게 술을 자시고 오셔서 술주정을 하실까?”

희원의 물음에 기준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희원의 뺨에 제 입술을 갖다 댔다. 알코올 향이 물씬 풍겨 왔지만 다행히 입덧 중이 아니기에 참을 만했다.

“오늘 형이랑 해준이 만나고 왔어요.”

“셋이 술 마셨어요?”

“응.”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동을 걸었다. 그러고는 차를 조심히 움직여 마당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옆에서는 기준이 계속해서 말했다. 희원은 자연스럽게 주차를 하면서도 기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금요일에 해준이는 설이 보느라 시간 안 되는데 오랜만에 셋이 시간 맞춰서 만났어요.”

“그럼 더 놀지 그랬어요.”

“희원 씨 보고 싶어서.”

“그래요, 잘했어요.”

제 남편이 저를 보고 싶어서 이 한밤중에 여기까지 왔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희원도 사실 기준을 보고 싶었기에 희원은 그런 기준을 타박하지 않았다.

“다른 두 분도 집에 가셨고요?”

“응, 아마도. 해준이는 설이 때문에 본가로 갔을 거고, 형은 애인 데리러 갔어요.”

“응? 술 마셨는데 애인을 데리러 갔다고요? 일단 내려요, 기준 씨.”

희원이 시동을 끄고 기준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기준은 또다시 희원을 끌어다 품에 안았다.

“몰라요. 형은 아무튼 그랬어요. 형이 자꾸 말끝마다 그렇게 불평할 거면 자기 애인 빌려줄 테니까 일주일 데리고 있어 보라고 하는데, 정말 미쳤냐고. 어? 귤아, 자는 거지? 아빠 욕한 거 아니야. 나쁜 말 안 했어.”

술에 취한 와중에도 귤이를 신경 쓰고 희원의 배를 커다란 두 손으로 막는 기준이 귀여웠다.

“기준 씨가 무슨 불만을 가졌는데요?”

희원은 자기 배에 턱 올려 둔 기준의 손을 가져다가 깍지를 끼고 집 안으로 이끌었다. 다들 자는지 집은 조용하기만 했다. 기준은 희원을 따라서 희원이 원래 쓰던 방으로 들어갔다. 랑일이는 다른 방에 있는지 그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응? 말해 봐요, 무슨 불만 가졌는데?”

희원이 기준의 타이를 풀어 주고 셔츠 단추를 열어 주며 물었다. 갑자기 기준이 또다시 희원을 끌어안았다.

“희원 씨.”

“네?”

“희원 씨, 내 예쁜 희원 씨.”

“응, 말해요. 듣고 있어.”

기준은 희원을 꽉 끌어안고는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희원은 재촉하지 않고 그런 기준의 넓은 등을 도닥도닥 두들겨 주었다.

“잘못했어요.”

“응? 뭐가요?”

“내가 희원 씨한테 말 안 한다고,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다고 화냈잖아요. 그거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희원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생각해 봤는데 서운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미안해요, 이것저것 말하지 않아서.”

이번에는 기준이 고개를 저었다.

“나 정말 큰형 말 듣다가 희원 씨가 너무 보고 싶은 거예요. 우리 천사. 자꾸만 형이 자기 애인 빌려준다고 그래서 나랑 해준이랑 정색했어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작게 웃었다.

“형은 좀 서운했겠다. 그렇게 정색하면서 거절하니까.”

“그래도 싫어. 우리 회사에 회의 때 오잖아요. 너무 기가 세.”

희원은 좀 놀랐다. 기 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기준이 세다고 하면 얼마나 센 걸까? 저번 결혼식도 데리고 온 걸 보니까 관계를 진전시키려고 그러는 것 같던데 그러면 희원에게는 형님이 될 텐데 잘 지낼 수 있을까? 아무리 순한 희원이라도 조금 겁이 났다.

“몰라요. 그냥 우리 희원 씨가 제일 좋아. 제일 예뻐. 천사 같아. 날개 잃어버렸어요?”

희원이 손을 오므리며 진저리 쳤다. 이 남자가 술에 취하더니 이런 술주정을 하고 내일 도대체 자기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이러는지 얼른 재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할 텐데 얼른 씻고 자요.”

“왜 대답 안 해요?”

“응? 무슨 대답이요?”

희원은 기준의 셔츠를 벗기고 바지도 벗겨 주며 욕실로 몰아넣었다. 마치 양치기 개가 말 안 듣는 양을 우리에 집어넣듯 말이다. 하지만 이 양은 순순히 말을 들을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염소가 아닐까 싶었다.

“왜 대답 안 해요? 응? 날개 어디 있어요? 잃어버렸나?”

희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억지로 기준을 욕실에 넣었다. 그러고는 희원은 욕실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기준이 잡고 놔줄 생각을 안 했다.

“같이 씻어요.”

“나는 씻었어요.”

“그래도 또 씻어. 씻겨 줄래.”

희원이 곤란한 듯 눈썹을 갉작였다. 지금 상태로 봐서는 기준이 욕조에 빠져서 자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희원 씨 보고 싶어서.”

점점 술이 오르는지 대화가 빗나가고 있었다.

“우리 기준 씨 착하다. 얼른 씻고 자요. 응? 지금 빨리 씻으면 내가 자장가 불러 줄게. 응?”

만날 랑일이랑 귤이에게는 자장가 불러 주면서 자기에게는 왜 안 불러 주느냐고 불평을 늘어놓던 기준이 멈칫했다. 그러고는 이내 희원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빠르게 씻기 시작했다. 희원은 웃으며 나와서 기준의 속옷을 찾아 문 앞에 놓아 주었다.

희원이 침대에 누워 있자 어느새 다 씻은 기준이 옆에 착 달라붙었다. 그러고는 몸을 비비며 희원에게 추근거리기 시작했다. 희원은 기준을 바로 눕히고는 가슴을 도닥여 주었다. 그러고는 노래를 불러 주었다.

기준의 기다란 속눈썹이 느리게 감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조금 뒤 고롱고롱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 기준을 바라보다 희원이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며칠 집에서 서먹하던 게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찾아와 준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노래.”

잠결에 기준이 노래를 부르라며 궁싯거렸다. 희원이 피식 웃으며 기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에휴, 내가 애 셋을 키우게 생겼지.”

아마도 그중 가장 말을 안 듣는 아이는 큰아들이 아닐까 싶었다.

* * *

“엄마 뭐 해?”

주방으로 들어선 희원은 그렇게 물으면서도 북엇국 냄새에 엄마가 뭘 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서방 술 많이 마셨니?”

“어떻게 알았어?”

“그럼 그 밤중에 웬 차가 우리 집 마당에 들어오는데 그걸 어떻게 몰라?”

“아, 자다 깼구나.”

희원이 멋쩍은 듯 웃었다.

“요즘에 회사에 무슨 일 있대?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셨대?”

“아니, 회사는 아무 일도 없어. 어제 형하고 동생하고 만났대.”

“그랬구나. 오랜만에 형제들 만나서 좋아서 부어라 마셔라 했구나. 하긴 결혼식 때 보니까 형제 사이가 좋은 것 같긴 하더라.”

희원은 물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은 좀 덜한 것 같은데 이준과 해준은 밖에서도 종종 만나는 것 같았다. 그것 외에도 본가에서 모임을 갖는 것도 잦은 편이고 말이다.

그런 것 귀찮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이면 문제가 될 텐데 희원도, 루세도 좋아하는 편이라 상관없었다. 오히려 이씨 집안 모임에 가면 희원은 박 여사랑 루세랑 셋이서 수다 떨고 맛있는 것 먹고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응, 우리만큼 좋은 것 같아. 그치 누나?”

“응? 뭐를? 근데 이 서방 왔어? 마당에 차 있던데?”

랑일이가 온다고 하니 당연하다는 듯 어젯밤 누나네 식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누나네 아들 둘은 랑일이를 제 친동생처럼 예뻐했다. 그래서 희원의 조카들이 오면 랑일이는 꼭 조카들하고 잠을 자곤 했다.

“밤늦게 왔어. 아직 자.”

“응. 어쩐지 바늘 왔는데 실이 안 와서 이상하다 했어. 우리 막내, 따듯한 차 한 잔 줄까?”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고 아침부터 남매는 주방에서 밥을 준비하는 엄마를 졸졸 쫓아다니며 수다를 떨었다. 어린아이였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희원은 내내 기분이 좋았다.

“희원 씨.”

한창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였다. 일어나서 씻었는지 기준이 젖은 머리로 거실로 나왔다. 그러고는 주방으로 쑥 들어왔다.

“아! 어머님, 안녕하세요. 처형도 계셨네요. 안녕하세요.”

기준은 조금 민망한 표정이었다. 희원이 기준을 끌어다가 제 옆에 앉게 했다. 그런 둘을 보며 희원의 엄마가 말했다.

“왜 벌써 일어났어. 휴일인데 더 자지.”

“많이 잤습니다.”

“어젯밤에 12시 넘어서 들어왔으면서.”

“아, 저 때문에 깨셨어요? 죄송해요.”

기준이 고개를 숙이자 희원의 엄마가 아니라고 괜찮다며 기준의 앞에 꿀물을 놓아 주었다.

“마셔. 술 많이 마셨다며.”

“감사합니다.”

기준은 다른 곳에서는 술 마시고도 멀쩡한데 꼭 희원네만 오면 이 모양이었다.

“술도 잘 못 마시면서 왜 그렇게 많이 마셔. 조금씩만 마셔.”

“네, 죄송합니다.”

“엄마는. 기준 씨 어디 가서 취하거나 그러지도 않아. 우리 집 식구들이 너무 잘 마시니까 기준 씨가 상대적으로 못 마시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희원이 열심히 두둔하자 희원의 누나가 피식 웃었다.

“제 짝이라고 덮어 주는 것 좀 봐. 엄마 우리 막내 아주 눈꼴시어.”

“누나 좀 그러지 마.”

희원이 민망함에 누나에게 불퉁거렸다.

“이 서방, 피곤하면 들어가서 더 자. 아니면 북엇국에 밥 먹을래?”

“밥 먹을게요. 근데 아버님은 어디 가셨어요?”

기준의 물음에 희원이 대신 대답했다.

“아빠, 아버지 만나러 가셨대요.”

“아버지? 누구요? 우리 이 회장?”

기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말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응, 그거 뭐지? 놀책? 거기랑 뭐 하는 것 있어서. 아빠가 고전문학 관련해서 책을 봐주는 게 있다는데? 그치, 엄마? 나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응.”

엄마는 북엇국을 대접에 푸며 대답했다.

이 회장이나 기준은 놀 본사 사람이니 놀에 더 신경을 많이 쓰고 있으나 다독다독이나 놀책도 자회사이니 아예 신경을 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기준은 놀에 더 많이 관심을 갖고 있어서 다독다독이나 놀책의 세세한 사항은 신경 쓰지 않고 있지만 아무래도 기업 회장인 이 회장은 관심의 정도가 기준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아버지랑 아빠랑 골프 치러 가셨대요.”

“아버님도 골프 치세요?”

기준의 물음에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북엇국을 푼 대접을 기준의 앞에 놓아 주었다.

“이 서방, 밥 먹어.”

기준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어머니, 잘 먹겠습니다. 근데 세 분 다 식사하신 거예요?”

“우린 먹었고 희원이랑 이 서방만 먹으면 돼. 희원이 먹고 싶은 거 있어?”

“나는 국 안 먹을래. 반찬 이거 있으면 돼. 근데 랑일이랑 애들은 자?”

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랑일이가 있는 방으로 향하려고 하자 기준이 희원의 손목을 잡고는 다시 자리에 앉혔다.

“밥 먹어요. 랑일이는 내가 먹고 난 다음에 깨워서 먹일게요.”

“으응.”

“희원 씨, 어젯밤에 철분 잘 챙겨 먹었어요?”

“응.”

기준은 희원의 상태를 점검하고는 희원에게 젓가락을 쥐여 주었다. 맞은편에 앉은 누나가 좋을 때네 하는 눈으로 미소 지으며 바라봤다.

밥을 거의 먹었을 때 저쪽 방에서 누군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미!”

랑일이가 깼는지 일어나자마자 희원을 찾으며 거실로 나오는 모양이었다.

“마미!”

“응, 랑일아. 마미 밥 먹어.”

“마미!”

랑일이가 뛰어오는 발소리가 저쪽에서부터 들렸다. 장난기가 발동한 기준이 일어나려는 희원을 앉혀 두고는 주방 앞에 짠 하고 섰다. 도도도도 뛰어오던 랑일이 발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어?”

“아들!”

랑일이가 커다란 눈을 껌벅껌벅 움직였다. 랑일이가 아빠 언제 왔어? 내지는 아빠! 하며 안기겠지? 기준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팔을 벌려 주었다.

“마미는?”

“응?”

“마미는 어디 있어?”

기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랑일이는 제 아빠한테 안기지도 않았고 그저 희원만 찾았다. 식탁 앞에서 그걸 보고 있던 누나가 크게 웃었다.

희원은 민망함에 이마를 짚었다. 저 남자가 분명 또 질투할 게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준이 랑일이를 번쩍 안아 들고는 거실로 도로 나가고 있었다.

“내려 줘! 마미한테 갈 거야.”

“싫어. 우리 집에 갈 거야. 마미는 여기 있고 우리 둘이 집에 갈 거야.”

“싫어! 내리라고. 마미한테 간다고.”

“싫어.”

기준의 단호한 말에 결국 랑일이가 으아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희원이 못 말린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랑일이에게 팔을 뻗었다. 기준은 랑일이를 안겨 주는 대신 바닥에 내려 주었다. 희원이 푹 안기는 랑일이를 꼭 안으며 기준에게 눈을 부라렸다.

“왜 그래요!”

“내가 뭘요? 밥이나 마저 먹어야겠다.”

“으유, 심술쟁이.”

아들을 울려 놓고는 다시 밥 먹으러 들어가는 기준의 등을 희원이 짝 하고 때렸다. 기준이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자 희원은 끝내 자기가 때린 널따란 등을 문질러 주었다.

셋은 아침을 느긋하게 먹고 난 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랑일이는 희원의 옆에 딱 붙어 앉아서 제 아빠를 경계했다. 기준이 피식 웃고는 랑일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랑일아, 아빠랑 화해하자.”

“싫어.”

랑일이가 희원의 배를 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희원은 그런 랑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속삭였다.

“랑일아, 귤이가 아빠랑 화해하래.”

“귤이가?”

“응.”

랑일이가 작은 손으로 희원의 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귤아, 오빠가 아빠랑 화해할까?”

“응!”

기준이 대신 대답하자 랑일이가 아랫입술을 뿌 내밀고는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기준은 자꾸만 랑일이에게 심하게 장난을 쳐서 곧잘 울리곤 했다. 그래서 희원이 아주 골치가 아팠다.

“이랑일, 자꾸 삐치고 그러면 귤이가 삐쟁이 오빠라고 놀려.”

“아니야.”

“희원 씨, 우리 자꾸 삐치는 랑일이는 여기 두고 마트 갈래요?”

희원이 그만하라고 기준의 등을 또 짝 하고 때렸다. 랑일이가 제 아빠를 불퉁하게 쳐다봤다.

“아빠는 마미랑 마트 가서 랑일이가 좋아하는 고기도 사고, 랑일이가 좋아하는 수박도 사고, 랑일이가 좋아하는 샤인머스캣도 사야지. 랑일이는 아빠한테 삐쳤으니까 안 갈 거지? 귤아, 가자. 희원 씨 가요.”

“랑일아, 아빠랑 마트 갈까?”

희원이 랑일이에게 물어보자 랑일이가 계속해서 희원의 배를 작은 손으로 만지며 기준의 눈치를 살폈다.

“랑일이는 삐쳐서 아빠랑 같이 안 간다고 했어요.”

“갈 거야.”

“응?”

“나도 마트 갈 거야.”

랑일이가 작게 말하자 기준이 랑일이 쪽으로 다가와 바짝 붙어 앉으며 다시 물었다.

“아빠랑 화해할 거야?”

랑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래? 고마워 랑일아. 아빠가 랑일이 좋아하는 고기랑 수박 사 줄게.”

“샤인머스캣도.”

“그래. 그것도 사 줄게. 우리 랑일이 아빠도 좋아하는 것 맞지?”

“응.”

랑일이가 마지못해서 대답했지만 기준은 그것도 좋다는 듯 랑일이를 안고 얼굴을 마구 비볐다. 희원은 아무래도 기준이 애정 결핍인 것 같다고 심각하게 생각했다.

* * *

일요일,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세 식구는 거실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랑일이는 책을 들고 희원의 옆에 앉았다. 그 둘 뒤에는 기준이 자리를 잡고 앉아 둘을 품에 같이 꼭 끌어안고 있었다. 기준이 희원의 배를 만지자 랑일이도 한쪽 손으로 희원의 배를 만졌다. 중간에 끼인 희원은 이제 그러려니 하며 랑일이가 하는 행동을 어여쁘게 바라봤다.

“그래서 미하일은 붉은 딱지를 또 받았어요. 미하일은 점점 슬퍼졌어요. 미하일도 황금색 별을 받고 싶었어요.”

얼마 전에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읽어 주었던 책에 푹 빠진 랑일이는 그 책을 사서 이제 귤이에게 읽어 주곤 했다. 책장마다 랑일이의 손때가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랑일이가 얼마나 이 책을 많이 읽었는지 알 수 있었다.

랑일이는 다른 것들도 또래보다 앞서 나갔지만 무엇보다 언어 쪽이 발달했다. 책을 워낙 좋아해서 집에 있을 때도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핸드폰 같은 데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저 책을 끼고 놀았다.

가끔 기준은 그런 랑일이의 모습을 보며 질색하곤 했는데 희원이 왜 그러냐고 물으니 랑일이의 모습에서 형의 모습이 보인다는 거였다. 형이 어릴 때 랑일이처럼 책만 끌어안고 살았다며 말이다. 그래서 기준은 주말에는 랑일이와 바깥 놀이를 더 많이 하려고 했다.

“그때 하늘에서 빛이 내려왔어요. 그리고 말했지요. 너는 참 특별한 아이란다.”

랑일이는 마지막 말을 할 때 꼭 희원의 배에 대고 말했다. 귤이에게 너는 참 특별하다고 말하고 나면 희원이 그런 랑일이를 꼭 끌어안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랑일이도 정말 특별해. 마미한테 있어서 랑일이는 선물이야.”

“마미도 랑일이한테 선물이에요.”

그럼 뒤에 앉은 기준이 그랬다.

“나도, 나도 해 줘요. 나도. 랑일아, 아빠한테도 말해 줘.”

아무리 봐도 요즘 기준은 사랑에 목이 말라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희원은 그 말 대신 기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춰 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고 나면 랑일이도 마지못해 기준의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 도돌이표처럼 희원과 랑일이가 또 쪽쪽거리며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춘다는 거였다.

“귤아, 요즘 아빠는 너무 외롭다. 우리 귤이가 얼른 무럭무럭 자라서 나왔으면 좋겠어.”

기준이 기댈 곳은 이제 귤이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어!”

기준과 희원이 동시에 목소리를 높였다. 랑일이도 희원을 돌아봤다.

“마미! 귤이가!”

“기준 씨, 맞죠?”

“방금 귤이가!”

“응! 나만 느낀 거 아니죠?”

기준의 눈이 크게 떠졌다. 희원도 놀라서 감격에 젖어 있었다. 랑일이가 둘을 말똥말똥 쳐다봤다.

“랑일아, 귤이가 발로 툭 찬 거 느꼈어?”

“네! 귤이가 오빠한테 인사했어요.”

“맞아. 우리 귤이가 랑일이 오빠한테 인사했어.”

기준은 처음 느껴 보는 태동이었다. 랑일이가 배 속에 있을 때 랑일이의 친모와 이렇게 앉아 있었던 적도 없을뿐더러 랑일이 친모가 태동을 느꼈다고 말했던 적도 없었다. 둘 사이는 철저히 정략결혼, 쇼윈도 부부였다. 집에서 같이 있는 시간도 적었고 같이 있다고 해도 각자 방에서 생활했다.

아이에 대해 처음 겪는 일들이 생길수록 기준은 신기함에 마음이 벅차면서도 한편으로는 랑일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같이 찾아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우리 카페 가서 맛있는 디저트 먹을래요?”

희원이 먼저 제안했다. 희원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감격스러운 순간에도 기준은 랑일이한테 무심했던 자신이 생각나서 한편으로는 괴롭고 미안해한다는 것을 말이다. 희원은 그럴 때마다 기준과 랑일이가 시간을 더욱 많이 갖게끔 길을 제시했다.

기준이 희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고마워요.”

“응? 뭐가요?”

“그냥 다.”

기준 역시 그런 희원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랑일아, 우리 랑일이가 좋아하는 카페 가서 마카롱 먹을까?”

“응! 마미 나 마카롱 두 개 먹어도 돼요?”

“그럼요, 되죠. 두 개 먹어도 되죠. 우리 왕자님이 먹는다는데 설마 아빠가 안 사 주실까? 그쵸, 아빠?”

“그럼. 오랜만에 우리 랑일이 아빠가 안아 줄까?”

랑일이는 귤이가 배 속에서 자라면서 당분간은 희원에게 예전처럼 안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편으로 아쉬워했다. 그럴 때마다 기준이 더 높이 번쩍번쩍 안아 주었다. 평일에는 기준이 바빠서 거의 랑일이가 자는 모습만 보기 일쑤인데 오랜만에 세 식구가 갖는 주말은 랑일이에게 기쁘기 그지없었다.

카페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서 살짝 더웠지만 가까운 거리라서 기준은 가는 내내 랑일이를 안고 길을 걸었다.

오후 늦게 카페에 가서 음료와 마카롱을 먹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 셋은 해가 넘어가 바람이 살살 불어오자 근처 공원으로 나갔다. 그러고 나서 공원 산책을 즐겼다. 귤이가 나오기 전에 즐길 수 있는 소중한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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