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둘만 아는 결혼
중요한 회의를 앞두고 기준은 기획안과 상대 회사에서 제시했던 수정 보완 기획안을 비교 검토했다. 그리고 그동안 들어왔던 1차, 2차 시안을 검토했다. 5월 어린이날을 앞두고 새로 기획한 콘텐츠는 다름 아닌 자회사인 놀책과의 협업이었다.
“이사님, 30분 뒤에 놀책의 이이준 이사님과 담당자 도착 예정이라고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기준은 서류를 향한 눈을 들지 않고 계속해서 검토하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아!”
그러다 문득 뭔가가 생각난 듯 원 실장을 쳐다봤다. 다음 건을 말하려고 했던 원 실장이 잠시 기다렸다.
“그 같이 온다는 담당자가 이이준 이사와 만난다는 오메가인가요?”
“네, 맞습니다.”
“네, 참고하죠.”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이이준이 그동안 꽤나 고전했고 지금도 거의 호구 잡힌 거처럼 행동한다고 들었다. 도대체 제 형을 잡아 쥐고 흔들고 있는 오메가가 얼마나 대단한지 기준은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괘씸하기도 했다.
“저 이사님.”
“네.”
“그렇다고 오늘 회의에서 그러실 건 아니죠?”
“뭐를요?”
기준이 무슨 소리냐는 듯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내렸다.
“그, 상대 담당자에게 막 그러실 건 아니죠?”
“설마요. 공적인 자리에서 제가 뭐를 할까요?”
원 실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기준 이사는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원 실장은 마음 놓고 웃을 수가 없었다.
이전에 정재계 모임에서 희원에게 막말을 한 P 자동차 후계자에게 기준이 어떻게 했는지 원 실장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계속해서 시리즈를 이어 가고 있던 놀의 장난감 자동차의 신상 출시를 앞두고 P 자동차와 협업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 보란 듯이 계약 파기한 이가 이기준 이사였다. 거기에 놀 측이 아니라 P 자동차가 위약금을 물도록 한 것도 이기준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다 알고 있는 원 실장이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제발 이사님.”
“뭐를 그렇게 걱정하세요? 제가 설마 우리 형 마음고생시킨 오메가라고 회의 석상에서 쪽을 주길 하겠어요, 아니면 그쪽으로 질문 공세를 하겠어요?”
한다는 소리다. 그럴 생각이라는 소리다. 원 실장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러지 마세요, 이사님. 그래도 지금은 잘 만나고 있는 커플이에요. 이이준 이사님 앞입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안 한다니까요.”
원 실장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희원 쌤에게 전화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이기준 이사를 말릴 사람은 희원 쌤밖에 없기 때문이다. 원 실장은 기준과 대화를 나누면서 한 손으로는 잽싸게 희원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아주 짤막한 내용이었다. SOS.
“이사님, 원래 연인 일은 연인밖에 모른다고…….”
“잠시만요. 희원 씨 전화 왔네요.”
다행히 희원이 메시지를 바로 확인했는지 전화가 왔다. 구세주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 실장은 속으로 희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열 번은 더 했다.
“희원 씨. 응? 우리 귤이가? 우리 귤이가 사과가 먹고 싶다고요? 알았어요, 이따 점심에 사과 좀 보낼게요. 응. 아! 그리고 우리 오늘 청첩장 나오는 거 알죠?”
원 실장은 부디 그 청첩장이 이이준 이사가 오기 전에 나오길 바랐다. 그래야 제 상사가 결혼과 청첩장에 한눈을 팔 것만 같았다.
“응, 희원 씨. 너무 무리하지 말고요. 알았죠? 오늘은 중요한 회의가 많아서 바로 전화는 못 받는데 그래도 메시지 남겨 놓으면 바로 확인할 수 있어요. 응, 사랑해요. 우리 귤이 공주님한테도 사랑한다고 전해 줘요.”
기준이 전화를 끊고는 원 실장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죠?”
원 실장이 기준 몰래 돌아서며 이마를 짚었다.
“뭐, 문제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저는 회의실 준비 상태 점검하러 다녀오겠습니다.”
기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사실을 나가는 원 실장을 보며 피식 웃었다. 원 실장이 일일이 회의실 점검을 하지 않는 걸 기준이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원 실장이 지금 자신과의 대화를 회피하기 위해 회의실로 도망간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내가 뭐 형네 오메가를 잡아먹길 해, 뭘 해? 아니면 내가 뭐 회의에서 깽판을 치겠어 어쩌겠어?”
원 실장이 들었으면 아주 기함을 할 일이었다.
회의실 앞에서 기준은 제 형과 떡하니 마주쳤다. 기준이 피식 웃었다. 등 뒤에 숨기듯 세운 남자가 이준의 오메가라는 것을 기준은 알고 있었다.
그동안 제 형은 그 오메가를 무슨 귀한 보석이라도 되듯 단 한 번도 제 식구들에게 소개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공식 석상에 데리고 나왔다는 것은 무슨 결심을 했다는 거였다.
“안녕하십니까, 이이준 이사님.”
기준이 그려 만든 미소로 인사를 하자 이준이 점잖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이사님. 여기는 우리 놀책의 편집 팀장이자 이 기획 담당자인 최희영 팀장입니다.”
이준이 자기 뒤에 숨겨 둔 존재를 앞으로 끌어냈다. 남자는 하얀 밀랍 인형 같았다. 정말로 만들어 놓은 인형같이 생겼다. 자신과 제 형도 화려하게 생겼는데, 이 남자는 예쁘면서도 화려하게 생겨 딱 봐도 나 우성 오메가입니다, 라고 말하는 듯했다. 눈에 확 띄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최희영입니다.”
“이기준입니다.”
남자는 허리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무표정에 살짝 입꼬리만 올려 웃는 게 사회생활에 능통한 웃음이라는 것을 기준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최 팀장, 먼저 들어가서 자료 띄워 놔요.”
“네, 알겠습니다.”
기준은 제 형이 제 오메가이자 연인을 회의실로 먼저 들여보내 기준의 시야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으로 데려왔어?”
“뭐를? 담당자라서 부른 것뿐인데?”
“그래? 그럼 회의에서 마음에 안 들면 내 맘대로 해도 돼?”
이준이 피식 웃었다.
“이거 왜 이래, 이 이사. 좋게 좋게 가자고. 쟤 성질 지랄 같아서 상상을 초월하거든. 괜히 미친개 건들지 말고 좀 봐줘라. 너한테 먼저 인사시키고 싶어서 데려온 거야.”
“나한테 왜?”
“네 결혼식에 데려오려고. 그리고 이거 박 여사가 너 갖다주라더라? 청첩장 예쁘게 잘 나왔던데?”
이준이 안겨 주는 쇼핑백을 보고 기준이 진심으로 웃었다.
“청첩장 봤어?”
“응. 내가 한 장 빼 갔어.”
“잘 나왔어?”
“응, 희원 씨 예쁘게 나왔더라.”
“우리 희원 씨 예쁘지?”
지금까지 으르렁거리며 건수를 잡아서 뭔 짓을 할까 싶었던 이기준이 청첩장 하나에 마음이 사르르 풀어져서 해실해실 웃었다. 뒤에 서 있던 원 실장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보며 이준은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희원 씨한테 한라봉하고 천혜향 보냈는데 받았어?”
“아 맞다! 형, 고마워. 어젯밤에 받고 희원 씨가 전화했다는데 전화를 안 받았다며. 바빴어?”
“어, 좀.”
제 형이 회의실 안을 힐긋 쳐다보며 말꼬리를 흐리는 것을 보고는 기준은 픽 웃었다.
“아주 꽉 잡혀 사네. 안 그래도 해준이가 그러는데 형 집에 잘 없다며? 아예 둘이 집을 합쳐.”
“몰라. 시간 됐다. 들어가고 나중에 얘기해. 희원 씨 또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나한테 연락하라고 해. 배 속 조카 위해 그거 하나 못 해 주겠냐?”
“고마워. 형네 최 팀장 내가 잘 대해 줄게.”
기준은 청첩장을 꼭 끌어안고는 회의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사님, 청첩장 저한테 주세요.”
“왜요?”
원래 기준의 짐은 원 실장이 들곤 해서 당연하게 자신에게 달라고 했던 건데 기준은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품에 안고는 고개를 저었다.
원 실장은 한 번 더 짐을 달라고 하려다가 그랬다가는 꿀단지 빼앗긴 이기준 이사가 성질을 부릴 것 같아서 앞으로 내밀었던 손을 슬그머니 뒤로 물렀다.
다행히 회의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우려했던 이기준 이사가 딴지를 걸지도 않았을뿐더러 그걸 떠나서 저쪽 놀책에서 회의 준비를 너무 잘해 왔기에 따로 트집을 잡을 것도 없었다.
회의실을 나서며 기준은 조용히 제 형에게 귓속말을 했다.
“이이준이 좋아할 만하네.”
그에 이준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제 연인을 칭찬하는 것이기에 미간을 좁히면서도 따로 뭐라 하지는 않았다. 그러고 나서 기준은 마치 병 주고 약 주는 듯 제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조카 사진.”
조카라면 껌벅 죽는 이준에게 며칠 전에 랑일이 사진을 핸드폰으로 전송해 주었는데 이번에는 귤이 초음파 사진이었다.
“귤이야?”
“응. 예쁘지?”
아직 콩알만 해서 구분도 안 가는데 누가 팔불출 아니랄까 봐 벌써부터 눈에 꿀이 뚝뚝 떨어졌다.
“가져. 희원 씨가 형 한 장 주래. 아버지한테도 안 준 사진인데, 내가 선심 쓰는 거야. 우리 희원 씨랑 귤이한테 선물 사다 줬으니까.”
“그래, 고맙다고 전해 줘.”
사진을 가져다주라고 한 건 희원이었고 기준은 그걸 전하기만 한 거였기에 이준은 딱 잘라서 희원에게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러든 말든 기준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청첩장 쇼핑백을 끌어안고 먼저 등을 돌렸다.
“원 실장님.”
“네, 이사님.”
“점심 약속 없죠?”
“네, 이사님 오늘은 점심 약속 없으십니다.”
“그럼 유치원에 다녀올게요.”
기준은 그길로 사과를 한 박스 사 들고 청첩장을 차에 넣고는 유치원으로 향했다. 가서 사과를 먹고 싶다는 희원에게 사과를 주고 같이 유치원 선생님들께 청첩장을 돌릴 생각이었다. 생각만으로 벌써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아이들이 점심을 먹고 양치를 한 뒤 잠시 갖는 휴식 시간. 그때를 노려 기준이 유치원을 찾았다. 물론 그러다 보니 자신은 점심을 건너뛰기는 했지만 그보다 지금은 사과가 먹고 싶다는 희원에게 사과를 건네주고 나온 청첩장을 돌리는 일이 중요하기에 점심쯤은 상관없었다.
기준이 마치 면접을 보러 온, 또는 큰일을 앞둔 사람처럼 유치원 대문 앞에 비장하게 섰다. 그러고는 벨을 누르기보다는 희원에게 전화를 했다.
“희원 씨, 나 유치원 앞이에요.”
―네?
점심때 사과를 보낸다고 했지만 이렇게 기준이 직접 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던 모양이다. 희원이 벌컥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내려와요. 조심히!”
기준은 대문 너머에서 안달이 났다. 저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저렇게 빠른 걸음으로 내려온단 말인가! 일단 단단히 일러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점심은요?”
희원이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그렇게 뛰면 어떡해요. 넘어지면 어쩌려고. 조심해야죠.”
“알았어요. 근데 어떻게 왔어요?”
“뭘 어떻게 와요. 사과 갖다주러 왔죠. 희원 씨는 점심 먹었어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를 받으려고 했다.
“무거운 거 들면 안 돼요. 그리고 우리 청첩장 나와서 그것도 전해 주러 왔어요. 유치원 선생님들께 돌리고 가려고 하는데 그래도 돼요?”
희원이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기준은 사과 박스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이 시간에 유치원 안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아무리 휴식 시간이라고 해도 도떼기시장과 다름없었다.
“정신없죠?”
아이들이 복작복작 떠들고 있었는데 희원은 아이들을 피해서 조심히 기준을 이끌었다. 랑일이는 2층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머, 랑일이 아버님!”
랑일이 담임 선생님이 보고 알은척을 했다. 기준은 희원이 가리키는 책상 위에 사과 박스를 내려놓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랑일이 불러 드릴까요?”
담임 선생님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기준이 손을 저으며 말렸다.
“아닙니다. 사실은 이거 드리려고 왔습니다.”
기준이 내미는 봉투를 무심결에 받아 들고 담임 선생님은 기준의 얼굴만 바라봤다. 그러자 희원이 나서서 말했다.
“선생님, 이제 말씀드려서 죄송해요. 이거 청첩장이에요.”
“청첩장이요? 랑일이 아버님 재혼? 아니 죄송해요. 목소리가 컸네요. 근데 왜 희원 쌤이 얘기해요?”
랑일이 담임 선생님은 갑자기 받은 청첩장에 당황했는지 말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희원이 민망한 듯 웃으며 작게 말했다.
“저 그게…….”
“저랑 희원 선생님하고 합니다. 결혼.”
“네?”
담임 선생님은 정말 놀랐는지 눈이 댕그래졌다.
셋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다른 선생님들이 지나가다 멈칫했다. 유치원에서 여러모로 유명한 랑일이 아버님과 랑일이의 이전 담임과 지금 담임이 모여 있으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말이다.
“선생님.”
담임 선생님이 지나가던 선생님에게 손짓했다. 그 선생님이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가까이 다가가자 담임 선생님이 더듬더듬 말했다.
“희원 쌤 결혼한대요.”
“진짜? 축하해요, 쌤!”
“그게 아니라, 여기 랑일이 아버님하고 결혼한대요.”
정적이 흘렀다. 주변에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밖에 없었다. 놀란 선생님들과 어쩐지 민망한 희원과 당당한 기준이 있었다.
* * *
[반가운 봄비가 내리던 4월의 마지막 주말. 종일 계속되는 비를 피해 연인들도 실내로 찾아들 법한 날, 놀 그룹 이기준 이사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결혼을 발표한 이기준 이사가 지난해 정재계 모임에서 소개했던 약혼자를 데리고 레스토랑에서 다정하게 봄날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 포착돼 주말부터 화제를 모으고 있다.]
기사가 떴다. 놀에서 배포한 기사였다. 기준은 유치원에 청첩장을 돌리고 희원의 임신 소식까지 전한 뒤 보란 듯이 언론에 기사를 뿌리기 시작했다.
기준과 희원이 그렇게 연애를 했지만 둘의 연애는 거의 집에서 이루어졌고 고작 모습을 드러내 봤자 정재계 모임 정도였기에 그동안 언론 보도는 놀 측에서 막고 있었다. 그러다 이제 결혼식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기 시작한 거였다.
[놀의 이기준 이사와 약혼자는 서울 강남구의 한 레스토랑에서 둘만의 시간을 가진 사실이 알려졌다. 보도에 따르면 이기준 이사와 약혼자는 이날 오후 한 차를 타고 이곳을 찾았고 공개 커플답게 굳이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2층으로 올라가 오붓한 시간을 즐겼다.]
기준은 그동안 희원이 일반인이기에 공개되는 것을 막았다. 자신으로 인해 희원이 피곤해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렇게 공개되는 것도 지금과 결혼식뿐이었다. 기준은 희원의 일상을 지켜 주고 싶었다.
물론 파파라치들은 어느 곳에나 있었다. 하지만 기준은 최대한 막고 싶었다. 게다가 희원은 그냥 일반인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가 학계에서 알아주는 교수였다. 희원의 아버지 이 교수, 이것만으로도 신상이 털리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기준도 언론에 오르내리는 게 피곤해서 최대한 피하는 사람이었다. 아직 그는 회장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마케팅 팀 이사도 아니었다. 기준이 콘텐츠 팀을 선택한 것은 그가 그쪽으로 재능이 있는 것도 당연했지만 최대한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한 것도 한몫했다.
언론에 오르내리는 게 얼마나 피곤한 건지는 기준은 이미 겪어 봤다. 정략결혼과 기업 합병, 랑일이의 출산과 아내와의 이혼. 이미 겪어 본 기준은 희원이 그 피곤함을 겪지 않기를 바랐다. 게다가 희원은 지금 홑몸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희원 씨.”
기준이 희원의 옆에 찹쌀떡처럼 딱 붙어 앉아서 희원을 불렀다. 희원은 제 다리를 베고는 배를 바라보고 누운 랑일이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며 기준의 시선을 받았다.
랑일이는 희원의 배에 대고 오늘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를 한참 부르다가 곤히 잠들어 버렸다. 희원이 머리를 살살 만져 주면 잠드는 게 요즘 랑일이의 버릇이었다.
여섯 살이 된 랑일이는 동생이 생긴다는 것에 엄청 의젓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매일 ‘오빠가!’를 연발하며 아직 티도 나지 않는 희원의 배에 대고 이야기를 종잘거리고 노래를 부르고 책을 읽어 주다 잠이 들었다.
기준이 마미는 동생이 배 속에 있어서 힘든 일 하면 안 되고 우리가 마미를 많이 도와줘야 한다는 것을 세뇌시키다시피 해서 랑일이는 자기 일은 알아서 척척 해냈다. 먹은 그릇은 알아서 싱크대까지 갖다 놓고, 장난감도 놀고 난 뒤에는 꼭 치우곤 했다. 그게 예뻐서 희원이 옆에서 같이 도와주려고 하면 랑일이는 뒷짐을 지고 어깨를 쭉 펴며 말했다.
‘귤아, 오빠는 이런 게 전혀 힘들지 않아. 스스로 해야 하는 거라고 아빠가 그랬어.’
가끔 랑일이가 너무 빨리 철이 드는 게 아닐까 싶어서 희원은 그런 랑일이를 안쓰러워했다. 그리고 랑일이에게 더 많이 신경을 썼다.
“희원 씨.”
“네?”
한창 생각에 빠져 있던 중 기준이 또다시 희원을 불렀다. 이번엔 희원이 제대로 대답하자 기준이 물었다.
“혹시 언론에 보도 자료 뿌린 것 때문에 누가 운전하는 데 따라붙는다든가 일상생활에 불편이 있다든가 그런 게 있으면 바로 말해야 해요.”
“네, 그럴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기준 씨 요즘 과보호가 더 심해진 거 알죠?”
기준이 희원의 입술에 촉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과보호의 ‘과’도 시작 안 했어요. 과보호 세 글자까지 다 하려면 아직 멀었어요.”
희원이 작게 웃었다.
“팔불출.”
“응, 나 팔불출. 그나저나 랑일이 방에 뉘일까요?”
희원이 랑일이를 들려고 하자 기준이 미간을 좁혔다.
“습! 설마 유치원에서도 이렇게 애들 번쩍번쩍 들고 그러는 거 아니죠?”
희원이 헤헤 웃었다. 그러자 기준이 그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남자 오메가는 초기에 늘 조심해야 한다. 초기뿐만 아니다. 중기에도 임신 말에도 다 조심해야 한다. 절대 무거운 거 들면 안 되고 무리해서도 안 되며 피곤하면 쉬어야 하고 철분이 부족해서 머리가 핑 돌거나 그러면 바로 앉아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 철분은 꼭 챙겨 먹어야 하며 입덧이 심하지 않으면 삼시세끼 꼭 챙겨 먹어야 한다…….
희원이 기준의 입을 손으로 턱 막았다.
“알았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그만하고 랑일이 안아서 침대에 눕혀 주세요.”
기준이 눈을 흘기고는 랑일이를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랑일이 방으로 들어갔다.
희원은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루세가 보낸 브루스게타가 있었다. 바게트에 치즈와 과일이 잔뜩 올라간 브루스게타는 희원이 입덧 때문에 과일을 달고 사니 직접 해서 보낸 거였다. 저녁 퇴근길에 맞추어 해준이 직접 가지고 왔다.
희원은 브루스게타를 접시에 담아서 사진을 찍어서 루세에게 보냈다. 아까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마침 저녁 시간이라 요식업을 하는 루세는 전화를 안 받을 게 뻔했다. 그래서 희원은 이제야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인증 샷을 찍어 보냈다.
[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희원은 종종 루세와 티타임을 갖곤 했다. 일요일에 말이다. 물론 박 여사도 함께였다. 박 여사는 여기 큰며느리도 함께하면 좋겠다며 이준이 연애 고자라고 욕하곤 했다. 들은 바로는 이준이 그 문제의 연인을 데리고 회사 공식 석상에 출두를 했다고 기준에게서 들었는데 그래서 요즘 희원은 자신의 형님이 될 수도 있는 그가 궁금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랑일이를 방에 누이고 나온 기준이 희원의 건너편에 앉았다.
“기준 씨는 와인 한잔해요. 나는 따듯한 레몬차 마실래요.”
기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실 거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식탁에 앉아서 주방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기준을 보는 것은 꽤나 즐겁다.
“기준 씨. 여기서 바라보는 기준 씨는 밖에서 보는 기준 씨와는 또 달라요. 또 다른 매력이 있다고나 할까?”
기준이 레몬차를 희원의 앞에 놓으며 미소 지었다. 그러다 희원에게 속삭였다.
“난 주방 들어오면 내 러트 때 여기서 했던 기억이 나요. 바로 여기 식탁에서.”
그에 희원이 질색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 * *
거울 앞에 선 희원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자꾸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이 차갑고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떨려요?”
기준이 따듯한 차를 희원의 손에 쥐여 주며 물었다. 희원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손님이 많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청첩장 찍을 때도 그 어마어마한 수에 놀랐고, 일단 기준네 집안이 알아주는 그 ‘놀’이 아닌가! 아무리 추리고 추려서 가까운 사람들만 불렀다고 해도 그 수는 대단했다. 희원은 대기실에서 밖을 빼꼼 내다보고는 다시 심호흡을 했다.
“왜 이렇게 떨어요.”
“그럼 안 떨려요?”
희원은 기준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열 때마다 자꾸 목소리까지 덜덜 떨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희원에게 다가왔다.
“아니,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덜덜 떨면 어떡해요.”
기준이 희원을 자기 품에 꼭 안았다. 맞춤 턱시도를 입고 달달 떨고 있는 희원이 느껴졌다. 순백의 신부를 안고 있는 느낌이라 기준은 이제야 내가 이 사람과 백년해로를 하겠구나 싶었다.
사실 결혼식을 남겨 둔 하루 전인 어제도 실감이 안 났다. 근래는 희원이 아예 신혼집에 들어와 살고 있었기에 무덤덤했는데 어제 희원이 결혼식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본가에서 자고 오겠다고 하는 바람에 기준은 홀로 커다란 침대에 누워야만 했다. 그러는 바람에 밤잠을 설쳤다.
사람이라는 게 무릇 있다가 없으면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법이라 기준은 자신이 쓰고 있는 침대가 그렇게 큰 줄 새삼 깨닫고 말았다.
기준은 아기였을 때부터 혼자 방을 썼다. 당연히 크면서 누군가와 자 본 적이 없었다. 랑일이도 태어나자마자 따로 방을 썼기 때문에 랑일이와 기준은 따로 잠에 들었다. 당연히 랑일이 친모와도 같이 침대를 쓰지 않았다.
기준이 랑일이를 데리고 분가를 한 뒤 자다가 깬 랑일이가 아빠를 찾으며 옆에 붙은 게 처음이었다. 랑일이는 예전에도 자다가 깨곤 했는데 그때마다 제 아빠가 아닌 할머니를 찾아 할머니 방에서 자곤 했다.
처음에 기준은 아무리 자기 핏줄이고 아들이라고 해도 같이 자는 게 꽤 불편했는데 그게 점점 익숙해졌다. 하지만 랑일이가 아닌 다른 이와 잔 건 희원이 처음이었다.
어젯밤은 내내 희원과 자다가 갑자기 희원이 사라져 버리니 그 쓸쓸함이 바로 찾아왔다. 기준은 널따란 침대에 누워서 쉬이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일 뿐이었다. 그러다 결국 희원과 오랜 전화 통화를 한 뒤 잠에 들 수 있었다. 마치 엄마 찾는 아이처럼 말이다.
기준이 희원의 등을 쓰다듬으며 주문을 외듯 속삭였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떨림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기준이 웃으며 희원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이제 괜찮죠?”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화장을 한 얼굴이 곱고 예뻤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귀여워요.”
“네?”
“귀엽고 예뻐.”
뺨이 분홍빛으로 물드는 걸 보고 기준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기준은 다시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눈을 바라봤다.
“오늘 진짜 예쁘다. 다른 때도 예뻤지만 정말 예뻐.”
“기준 씨도요.”
“응?”
기준은 희원이 한 말을 알아들었으면서도 못 들은 척을 했다.
“응? 뭐라고 했어요?”
“기준 씨도 멋있다고요.”
희원은 그 말을 내뱉고는 고개를 숙이며 부끄러워했다. 기준은 귀여운 희원의 뺨에 다시 입을 맞췄다.
“근데 희원 씨. 피곤하지는 않고요?”
병원에서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남자 오메가라고 해도 배가 나올 테니 지금처럼 티가 나지 않을 때 결혼식을 올리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임신을 하고 어느 정도 주수가 흐른 뒤라 안정기에 접어든 거나 마찬가지이니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이를 가진 몸으로 피곤할 게 뻔했다. 기준은 희원이 임신한 게 너무 기쁘고 고맙긴 하지만 가끔은 희원이 피곤해 보이고 힘들어 보여서 미안할 때가 있었다.
“괜찮아요. 오늘은 입덧도 없고요.”
“우리 귤이가 오늘 무슨 날인지 아나 보다. 귤아, 마미 힘들게 안 해 줘서 고마워.”
기준이 희원의 배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희원은 초기에는 기준이 자신의 배를 만질 때마다 부끄러워했는데 이제는 하도 만져서 그냥 그러려니 했다.
“결혼식 끝내고 비행기 타면 좀 자요.”
“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조금이라도 피곤하면 꼭 얘기할게요.”
“그나저나 오늘 정말 예쁘다.”
기준은 다시 한번 희원을 칭찬하고는 손님들 좀 맞이하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희원은 문을 바라보며 다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희원아!”
“누나!”
문이 열리고 누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희원은 누나를 보는 순간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누나가 들어와서 희원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내 동생 정말 오늘 멋지다. 안아 봐도 돼?”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누나가 희원을 품에 안았다. 이미 훌쩍 커서 자신의 키를 넘어 버린 동생. 집안의 사랑둥이, 막둥이. 작던 아이가 이제는 새로운 가정을 이룬다. 누나는 갑자기 울컥해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너무 멋지다.”
누나의 목소리가 멘 것을 깨닫자 희원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누나 주책이지. 어어, 울지 마. 울면 안 돼.”
누나가 뒤돌아 눈가를 닦다가 희원의 눈을 보고는 얼른 휴지를 들어서 눈가를 꾹꾹 눌러 눈물을 없앴다.
“이렇게 좋은 날 우는 거 아냐. 그리고 울면 화장한 거 다 지워진단 말이야.”
남자라서 그리 진하게 화장을 한 것도 아닌데 누나는 마치 신부 화장 지워지는 것을 염려하는 것처럼 수선을 떨었다. 누나는 희원의 눈물 자국을 꾹꾹 눌러 닦아 주면서도 자신은 이제 줄줄 울고 있었다.
“가서 잘 살고.”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그래도 만날 엄마네 가면 너 있었는데 이제는 없잖아.”
누나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보고 싶을 때 보면 되지. 그게 뭐 어렵다고. 울지 마, 누나.”
희원이 누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하자 누나는 제 옷자락을 잡고 따라다니던 꼬맹이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싶어 울면서도 웃었다.
하객들 앞에 선 기준과 희원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고는 미소 지었다. 기준은 살짝 맞잡은 희원의 손이 떨리는 게 느껴져 힘을 주어 꽉 잡았다.
“떨지 마요. 떨리면 나만 생각해요. 나만 보고.”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하라는 소리에 기준과 희원은 손을 잡고 동시에 입장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박수를 쳤고 그 소리에 맞추어 희원은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배 속에 있는 귤이는 오늘 얌전한지 희원은 컨디션도 괜찮았고 피곤하거나 속이 울렁거리지도 않았다. 희원은 귤이가 정말 배 속에서부터 효도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는 기준의 친구 중 한 명인 일명 빵집 아들이 했다. 저번 정재계 모임에서 기준이 희원에게 빵집 아들이라고 소개해 준 H 제과 전무였다.
주례는 따로 없이 결혼 서약문을 읽는 것으로 대체했다. 서약문을 읽을 때 기준은 자꾸만 실실 웃음이 나서 하객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며 숙덕거리기도 했다.
“양가 부모님께 인사가 있겠습니다.”
기준네 집안 식구들은 다들 웃고 있는데 희원네 집안 식구들은 눈물이 흥건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희원이 팔려 가는 줄 알 것 같았다. 먼저 기준네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박 여사는 행복한 얼굴로 희원을 품에 꼭 안고는 속삭였다.
“고마워 희원아.”
“어머니 제가 잘할게요.”
“지금도 충분해. 기준이랑 잘 살아 줘.”
“감사해요, 어머니.”
박 여사는 희원에게 그저 고마웠다. 냉랭한 아들의 마음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집어넣어 준 희원이 은인 같았다. 박 여사는 이씨 집안 차남이 평생을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어 늘 걱정했다. 이렇게 누군가와 사랑하고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릴 줄은 몰랐다.
반면 희원은 자신이 오메가 페로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재거나 따지지 않고 그저 이희원이라는 사람만 보고 받아 준 기준네 가족에게 감사했다.
이번에는 희원네 부모님께 인사를 할 차례였다. 기준은 희원의 부모님 앞에 넙죽 큰절을 올렸다. 그러고는 희원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 번씩 꼭 안았다.
“감사합니다. 잘 살겠습니다.”
기준의 씩씩한 말에 희원의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고맙다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희원을 품에 안고는 결국 모자가 울고 말았다. 그동안 서로 말은 못 했지만 염려했던 고민과 근심이 두 사람 머릿속에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배 속에 있는 귤이가 생각나서 더 눈물이 났다. 희원은 기준과 랑일이, 그리고 귤이가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큰 선물 같았다.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희원아, 잘 살아야 해.”
희원은 차마 대답은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기준이 희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눈물을 살살 닦아 주었다.
“울지 마요. 눈이 빨개졌어. 이따 사진 찍어야 하는데 빨갛게 된 눈으로 찍으면 어떡해요.”
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지막으로 둘이 행진할 때 그제야 희원은 활짝 웃었다. 기준은 행진하는 길 내내 희원을 바라보며 같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기준의 친구들은 저놈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본다며 수군거렸고 기준네 집안 식구들은 팔불출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부디 저 모습 변하지 말고, 희원의 말 잘 들으며, 희원에게 소박맞지 말고 잘 살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자, 사진 찍게 모이세요. 이번에는 친구, 직장 동료분들 오세요.”
가족사진을 찍고 난 뒤 마지막으로 친구와 직장 동료들이 사진을 찍는 차례였다. 기준 쪽은 대부분이 재벌가 친구들이었고, 희원 쪽은 학교 친구, 유치원 선생님들이었다.
“부케 던질게요.”
희원은 자신이 들고 있는 부케를 던지려고 했다. 부케를 받기 위해 유치원 선생님이 섰다.
“자, 이렇게! 이렇게 던지는 거예요.”
사진사가 던지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 적당히 던지면 되는 줄 알았는데 사진을 찍어야 하니 이것도 요령 있게 던져야 하나 보다. 희원은 뒤를 보며 부케를 던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마미! 있잖아요, 마미!”
저 멀리서 랑일이가 달려오고 있었고 그 뒤에서 이준이 랑일이가 혹시라도 넘어질까 봐 따라오고 있었다.
“어어!”
희원의 손에서는 이미 부케가 날아갔고 랑일이가 너무 씩씩하게 희원을 불러 대서 얼떨결에 몸이 이상한 방향으로 향하는 바람에 부케는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사람 손에 안착했다.
“어, 어떡해!”
희원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봤고 얼결에 부케를 받은 이준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기준이 웃기 시작했고 정작 부케를 받으려고 했던 유치원 동료 선생님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희원의 얼굴이 빨개졌다.
식을 마친 두 사람은 신혼여행을 떠나기 위해 차 앞에 섰다. 가족들이 두 사람을 배웅했다.
“아빠, 마미, 다녀오세요!”
해준의 손을 잡은 랑일이가 손을 흔들었고 부케를 쥔 이준이 다정하게 웃었다.
“랑일이는 저랑 형이랑 잘 돌볼게요.”
“네, 부탁드려요.”
랑일이는 왜 아빠랑 마미 둘이서만 여행을 가냐고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희원이 여행 갔다가 집에 오면 일주일 동안 랑일이랑 단둘이 자겠다고 약속을 한 뒤 알겠다고 했다.
“희원아, 조심히 다녀오고, 너무 무리하지 말고.”
“네, 어머니. 랑일이 좀 잘 부탁드려요.”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이번에는 루세가 말했다. 희원이 고맙다고 대답하며 웃었다.
“이 서방, 잘 다녀오고.”
희원이 아기를 가졌을 때도 묵묵히 안아 주던 희원의 아버지는 결국 오늘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희원의 가족들도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워낙 양쪽 집안 다 대식구인지라 인사만 종일 걸릴 판이었다. 결국 기준이 먼저 희원을 태우고 자신이 탄 뒤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희원 씨, 고생했어요.”
“응, 기준 씨도요.”
기준이 희원의 손을 잡고는 깍지를 꼈다. 늘 차갑던 손이 요즘에는 예전처럼 얼음장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는 동안에 뭐라도 좀 먹어요. 아니면 눈 좀 붙여요.”
“괜찮아요. 비행기 타고 자면 되고 아까 과일 좀 먹어서 괜찮아요. 그리고 고기도 좀 먹었어요.”
알고 있다. 희원과 내내 붙어 있던 기준이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기준은 그래도 여러모로 걱정이 되었다.
“고마워요, 희원 씨.”
“뭐가요?”
“나랑 결혼해 줘서.”
새삼스럽게 고백하는 기준의 음성에 희원도 미소 지었다.
“나도요. 나도 고마워요.”
기준은 너무 빠르지 않게 차를 몰면서 희원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혼여행은 제주도로 가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유럽으로 가고 싶었는데 배 속에 귤이도 있고 원 실장이 제발 딱 일주일만 쉬고 나오라고 사정사정했다. 그리고 담임인 희원도 그렇게 오랫동안은 자리를 비울 수 없고 말이다.
아무렴 어때. 기준은 희원과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둘이서만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제주 공항에 도착한 둘은 곧장 호텔로 향했다.
아무리 간소하게 치러진 결혼식이라고 해도 한쪽은 재벌가이고 한쪽은 교육자 집안인지라 하객 수를 줄이고 줄여도 한계가 있었다. 좋은 날이라고 해도 몸이 피곤한 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고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희원과 가벼운 산책이라도 하고 싶은데 오늘 종일 하객을 맞이하고 식을 치른 희원은 이제 체력적으로 한계를 느꼈다.
“샤워하고 좀 쉬어요.”
“응.”
기준이 희원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희원을 먼저 욕실로 들여보냈다. 그동안 기준은 양가 식구들에게 전화를 해서 잘 도착했다고 알리고 랑일이와 통화를 했다. 그러는 사이 희원이 욕실에서 나왔다.
“희원 씨, 전화요. 랑일이.”
“응, 기준 씨 씻어요.”
기준이 전화를 넘기고 욕실로 향했고 희원은 영상통화로 돌려서 랑일이와 통화하기 시작했다.
―마미!
“응, 랑일아. 뭐 하고 있어?”
―작은마미가 피자 구워 줬어요. 그래서 설이랑 먹고 있어요.
랑일이는 루세가 직접 만들어 구워 줬다는 피자를 핸드폰으로 비추어 보여 주었다. 토핑을 어찌나 많이 올렸는지 보기만 해도 푸짐하고 맛있어 보였다.
“우리 아가 좋겠다! 랑일이 많이 먹어. 작은마미한테 잘 먹겠습니다, 하고 인사하고!”
―네! 근데 마미!
“응.”
―나중에 귤이랑도 먹고 싶어요.
그 와중에도 동생 생각을 하는 랑일이가 예뻐서 희원은 저절로 다정한 미소가 흘렀다. 귤이가 태어나서 저런 걸 먹으려면 몇 년이 더 있어야 하지만 요즘 랑일이는 귤이와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나중에 귤이와 먹고 싶다고 하고 그림을 그리면서는 나중에 귤이 얼굴을 그려 줄 거라고 했다. 유치원에서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와서는 꼭 귤이랑도 이 놀이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희원은 랑일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마미 귤이는 잘 있어요?
“응, 귤이는 잘 있지. 우리 랑일이 작은마미 말 잘 듣고 설이랑 잘 놀고 있어. 알았지?”
―네! 내일은 할머니네 가기로 했어요. 내일도 전화할게요!
“응. 이따가 밤에 또 전화해도 돼. 랑일이 전화하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전화해. 알았지?”
―네!
희원과 랑일이는 서로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기준이 욕실 문에 기대 희원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랑일이와 통화를 끝내자 옆에 와서 앉았다.
“뭘 아무 때나 전화를 해요. 나랑 놀아야지. 우리 오랜만에 단둘이 있는 건데 그 시간 방해받고 싶지 않아요.”
구시렁거리는 기준이 희원은 마냥 귀엽기만 했다. 그래서 희원이 기준의 입술에 촉 입을 맞췄다.
“아들한테 또 질투해.”
“당연하죠. 희원 씨는 내 건데 나보다 더 랑일이한테만 신경 쓰고.”
점점 입이 나오고 있는 기준을 보며 희원이 다시 뽀뽀했다.
“배 속의 귤이가 아빠가 이러는 거 보고 흉봐요.”
그러자 기준은 커다란 손으로 희원의 배를 덮었다. 마치 자신의 이런 모습을 귤이가 못 보게 눈을 가리듯 말이다. 희원은 이 남자가 점점 귀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이번에는 기준이 희원에게 조금 더 진하게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희원을 천천히 소파에 눕혔다.
“으응.”
벌어진 잇새로 희원이 신음을 흘렸다. 기준은 희원의 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옆구리를 쓸었다. 그러면서도 혹시라도 자신이 희원을 위에서 누를까 조심히 위치를 잡았다.
기준이 희원의 혀를 잡아채어 비비고 쪽쪽 빨았다. 그러고는 입천장을 쓸어 주고 고른 치열도 훑어 주었다. 그러면서 왼손으로는 희원의 판판한 배를 만지고 조금 더 손을 올려서 가슴을 만졌다.
“흐응.”
한동안 둘은 키스만 했지 이렇게 몸을 만진 적은 없어서 희원은 지금 작은 자극에도 몸이 떨렸다.
기준이 입을 떼고는 분홍빛 뺨을 한 희원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예쁘고 아름다운 나만의 연인. 기준이 희원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이제 해도 되죠?”
며칠 전에 병원에 갔을 때 의사한테 물어봤다. 삽입 섹스에 대해서 말이다. 의사는 너무 깊게 하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했다. 그동안 기준은 바쁘지 않았으면 정말 욕구불만으로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회사가 너무 바빠서 다행이었다.
“천천히 조심히 할게요. 응?”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침대에서요.”
“응. 잘 잡아요.”
기준은 희원을 번쩍 안아 들었다. 희원이 기준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침대로 가는 길이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웠다.
희원을 침대에 눕힌 기준이 희원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는 희원의 셔츠 단추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희원이 기준의 손목을 끌어가 그의 손목 안쪽에 입을 맞췄다.
기준은 희원의 요염한 시선과 자신의 손목 안쪽을 핥는 혀에 벌써부터 바지가 터질 것 같았다. 이러다 넣기도 전에 싸는 게 아닐까 싶었다.
“유혹하지 마요. 안 그래도 지금 쌀 것 같단 말이에요.”
기준은 원래도 잠자리에서 야한 말을 지껄이곤 했는데 희원은 귤이가 있어서 그런지 더 얼굴이 빨개졌다.
“귤이가 듣겠어요.”
기준이 희원의 셔츠를 들어 올려 배에 입을 맞추고는 속삭였다.
“귤아, 아빠가 마미랑 잠깐만 사랑 좀 나눌게. 못 들은 척해 줘. 아니면 좀 잘래?”
희원은 기준을 정말 못 말리겠다는 듯 쳐다봤다. 그렇게 둘의 첫날밤 아닌 첫날밤이 시작되었다.
* * *
곤히 잠든 희원을 바라보며 기준은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희원의 배를 쓰다듬어 주었다.
“귤아, 귤아. 놀라지는 않았지? 눈 감고 있었어?”
희원은 임신하더니 더 느끼는 것 같았다. 기준이 물고 빨고 핥는 동안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평소에는 손가락을 집어넣어 안을 넓혔는데 그럴 수 없어서 구멍을 빨아 주었더니 어쩔 줄 몰라 했다. 결국에는 기준의 얼굴이 흠뻑 젖을 정도로 애액을 질질 흘려서 기준이 빨아 주다가 자기도 사정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살짝 마른 몸이지만 체력 하나는 알아줬는데 임신을 하면서 체력도 많이 떨어졌는지 이제는 한 번 하고 거의 정신을 잃다시피 잠이 들었다. 잠이 든 희원을 욕실에 안아 들고 가서 따듯한 물에 씻기고 다시 재우는 일 모두 기준의 몫이었다.
기준은 희원의 배를 살짝 걷고는 입을 맞췄다. 아직은 판판한데 그런 배 속에 귤이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게 기준은 여전히 신기했다.
결혼식을 하기 전에 둘은 귤이 상태를 보러 병원에 갔다 왔는데 그날 들은 심장 소리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빠른 콩콩콩콩 하는 소리가 기준은 얼마나 감격에 겨웠는지 모른다.
랑일이 가졌을 때도 쇼윈도 부부 행세를 하느라 몇 번 병원을 갔다 온 적이 있는데 사실 랑일이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때는 이렇게 큰 감동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얻는다는 게 이렇게 큰 축복이고 선물이며 감동인지 기준은 이제야 알았다.
협탁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작게 진동했다. 기준은 혹시라도 잠든 희원이 깰까 봐 핸드폰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어, 랑일아.”
잠들기 전에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아빠, 마미는?
“마미는 잠들었는데.”
―그럼 귤이는?
“귤이도 코하고 있지. 우리 랑일이도 자야지.”
랑일이는 지금까지 뭐를 했는지 죽 열거했다. 설이와 놀았던 이야기를 하며 내일은 점심에 큰아빠인 이준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고 말했다. 아직 기준이 서울로 올라가려면 며칠 더 있어야 하는데 참 여러 사람이 신경 써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점심에 큰아빠가 쿄우 볼 수 있게 해 준다고 했어.
“할머니네로 쿄우 데리고 온대?”
―아니. 큰아빠가 쿄우네 집에 데리고 간대.
“응?”
기준은 속으로 이제 이이준이 별짓을 다 한다고 생각했다. 혼자서 애 보는 게 버거우니 이제는 애인까지 동원하는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그 애인도 애를 좋아하는 듯해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빠가 서울 갈 때 맛있는 거랑 선물 많이 사 갈게!”
기준은 랑일이를 돌봐 준 사람들에게 서운치 않게 선물이라도 푸짐하게 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
“응, 랑일아.”
―내일 마미랑 전화할래.
“응, 내일 마미 일어나면 전화하라고 할게. 잘 자고. 내일 큰아빠 만나서 말썽 부리지 말고.”
랑일이는 자기는 원래 마미 닮아서 말도 잘 듣고 말썽도 부리지 않는다고 했다. 랑일이는 요즘 좋은 점은 죄다 마미를 닮아서 그런 거라고 말했다. 기준은 랑일이가 하도 그래서 이제는 별로 기가 막히지도 않았다. 그러려니 했다.
“그래. 잘 자. 사랑해.”
―응! 사랑해. 마미랑 귤이한테도 사랑한다고 말해 줘!
랑일이는 제 동생한테까지도 사랑한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일전에 랑일이가 동생의 존재에 대해 싫다며 울었을 때 기준은 사실 걱정도 많이 했고 그 무엇보다도 랑일이와 희원에게 미안했다. 아직 준비도 되지 않은 랑일이에게 욕심을 부린 것 같아서 미안했고, 그런 랑일이 때문에 희원이 더 신경 쓰는 것 같아서 그 점도 미안했다.
기준은 사실 랑일이가 이렇게 동생의 존재에 긍정적으로 반응할 줄 몰랐다. 해준이 아이에게 사랑을 많이 주면 랑일이는 알아서 동생에게도 그 사랑을 베풀 거라고 말했는데 그때도 기준은 제 동생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제 돌아보니 자신을 빼고 모두가 랑일이를 믿고 있었던 거다. 참 못난 아빠라는 생각이 들면서 랑일이에게 더 큰 사랑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랑일이와 단둘이 시간을 갖고 싶어도 랑일이가 희원과 단둘이 갖는 시간을 원하지 기준은 여전히 희원을 놓고 경쟁의식을 보인다는 거였다. 그 부분은 좀 어이가 없긴 하다.
기준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희원이 잠결에도 기준의 품에 파고들었다. 기준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희원을 품에 안고 도닥였다. 그러면서 속삭였다.
“희원 씨, 랑일이가 사랑한대요. 그리고 귤아, 오빠가 사랑한대.”
기준은 몰려오는 피로에 서서히 눈을 감았다.
* * *
기준이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났을 때, 희원은 이미 잠에서 깨어 거실 소파에 앉아 랑일이와 통화 중이었다. 기준이 희원에게 걸어가 옆에 앉고는 영상 통화 중인 랑일이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아직도 잠이 깨지 않아서 희원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마미, 아빠는 잠꾸러기예요.
랑일이의 말에 희원이 가볍게 소리 내며 웃었다. 그러고는 기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랑일이와 계속해서 말했다.
주말에 늦게까지 자는 랑일이는 해준네 집에서 어제 너무 일찍 자는 바람에 아침 일찍 일어난 모양이었다. 뒤에서 여유롭게 요리를 하는 루세의 모습이 보였다.
“랑일아, 아침 많이 먹고 먹기 전에 꼭 작은마미한테 잘 먹겠다고 말씀드려야 해.”
―네! 그리고 밥 다 먹고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인사하는 거 맞죠?
랑일이는 굉장히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 희원이 엄지를 세우며 랑일이를 듬뿍 칭찬해 주었다. 랑일이는 희원의 칭찬과 사랑을 먹고 자라는 아이 같았다.
“랑일아, 마미 작은마미랑 통화해도 돼?”
―응! 잠깐만요. 작은마미!
전화를 넘겨받은 루세와 희원이 열심히 통화를 할 때도 기준은 여전히 희원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희원의 배를 만지며 꾸벅꾸벅 졸았다.
희원은 기준을 욕실로 보내지 않고 그냥 그렇게 있도록 놔뒀다. 그동안 이 남자가 결혼식 한번 하겠다고 얼마나 힘든 일정을 소화했는지 알기에 희원은 신혼여행 내내 기준을 그냥 놔둘 생각이었다. 이렇게 여유롭고 늦장 부리는 날도 있어야지.
“응, 고마워요. 갖고 싶은 선물 없어요?”
희원은 루세와 여러 말을 주고받으며 종잘거렸다. 둘이 동갑이라 그런지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응, 가볍게 걷는 건 괜찮다고 하니까 우리 종종 만나서 산책해요.”
뒤에서 기준이 희원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산책은 나랑.”
이 남자가 또 질투하기 시작한 것을 눈치채고 희원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준은 희원이 전화를 끊자마자 투덜거렸다.
“나랑 뭘 하기도 바쁜데 왜 자꾸 다른 사람이랑 뭐를 한다고 그래요.”
“알았어요. 기준 씨랑 제일 많이 놀아 줄게요. 완전 질투쟁이도 이런 질투쟁이가 없어.”
희원은 그러면서도 기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춰 주었다.
“희원 씨, 우리 조식 먹고 해변 가서 좀 걸을까요?”
“응, 좋아요.”
“그래요, 더워지기 전에 나가요.”
여유롭게 조식을 먹고 난 뒤 나가기 전에 기준은 희원을 앉혀 두고는 꼼꼼하게 선크림을 발라 주었다.
“이렇게 많이 안 발라도 돼요.”
“안 돼요. 예쁜 얼굴 탄단 말이야.”
정작 기준은 자기 자신은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희원만 신경 썼다. 어차피 차를 끌고 가는 것이라서 가서 너무 덥거나 그러면 근처 카페로 금세 자리를 옮겨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기준은 희원을 어린아이 보호하듯 또 과보호하기 시작했다.
옷도 반팔에 긴팔까지 챙기고 모자도 챙겨 주었다. 그리고 신발도 미끄럽거나 바닥이 딱딱하지는 않은지를 살피고 또 살폈다.
“여행 오기 전에 기준 씨가 다 알아서 챙긴 건데 뭘 또 점검하고 있어요.”
“그래도 혹시 싶어서 그렇죠. 내가 희원 씨 홑몸이면 이렇게까지 극성 안 떠는데 혹시라도 몸에 무리 갈까 봐 그래요.”
희원이 기준을 바라보며 작게 웃고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금 스스로 극성떨고 있다는 거 아는 거죠?”
기준이 어깨를 으쓱였는데 그건 자기도 멋쩍어서 그런 거였다. 희원은 그런 기준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짧게 입을 맞췄다.
밖으로 나온 둘은 해변으로 향했다. 제주도는 늘 사람이 많지만 지금은 5월 초 성수기가 지난 상태라 생각보다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둘은 손을 잡고는 여유로운 해변을 천천히 걸었다.
“기준 씨, 물 색깔 좀 봐요. 너무 예뻐요.”
에메랄드빛을 보며 희원이 감탄했다.
“이렇게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작은 집이라도 한 채 있으면 좋겠어요.”
“하나 지어 줄까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웃었다.
“농담이에요.”
“어! 나 재벌인데. 지어 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지어 줄 수 있어요.”
희원이 기준의 코를 손가락으로 콕 눌렀다.
“귀여워. 누가 재벌인 거 몰라요? 알지. 그냥 해 본 소리예요. 바다가 너무 예뻐서요.”
기준이 자신의 코를 누른 손가락을 가져가 이로 살짝 깨물었다. 그러고는 희원을 향해 속삭였다.
“예쁘기는 우리 희원 씨가 훨씬 예뻐요. 여기 해변보다, 여기 제주도보다 훨씬 더.”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사랑 고백을 하는 기준에 희원의 하얀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런 희원이 예뻐서 기준은 바다를 배경으로 그에게 진하게 입을 맞췄다.
“희원 씨.”
“응?”
“우리 여행하고 돌아가면 진짜 부부의 일상이네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해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살짝 발꿈치를 올리고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응, 나도 잘 부탁해요.”
나를 사랑해 준 사람, 나에게 사랑을 알게 해 준 사람. 둘은 바다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불완전했던 그들이 완전해지는 순간이었다.
(둘만 모르는 연애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