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그냥 보호와 과보호의 차이 (20/31)

20. 그냥 보호와 과보호의 차이

기준은 희원이 선물한 넥타이를 매며 거울을 통해 랑일이를 내려다봤다.

랑일이는 제 아빠 앞에 서서 거울을 보며 유치원 원복을 열심히 입고 있었다. 작년에 원복을 딱 맞추어 입힌 바람에 이번에 원복을 새로 맞춘 랑일이는 빳빳한 새 옷이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했다.

“랑일아, 유치원 가니까 좋아?”

“응!”

여섯 살이 된 랑일이는 다섯 살 동생들이 들어오자 요즘에는 ‘오빠가…….’ 하며 말하는 데에 재미를 붙였다. 그 전에는 사촌 동생 설이가 있어도 ‘내가…….’라고 말했는데, 날마다 다섯 살 동생들과 한 공간에 있으니 새삼 자신이 여섯 살이 된 것을 실감하는 듯했다.

“우리 랑일이 형아 되어서 그런지 의젓하네.”

“응! 마미가 여섯 살 되면 스스로 하는 거라고 했어.”

웃긴 건 ‘형아’라고 말하면서 꼭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는 ‘오빠가’라고 말한다는 거였다.

“어제는 뭐 했어?”

기준이 어제는 야근 때문에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랑일이와 대화를 할 시간이 없었다. 어제도 희원과 함께 하원한 랑일이는 희원이 어젯밤에 집에 돌아가 아침에 없는 바람에 사실 입이 조금 나오긴 했다.

“어제 샌드위치 만들었어.”

“맛있었겠네? 아빠는 안 줘?”

“마미랑 먹었어.”

기준은 랑일이 머리를 빗으로 빗겨 주고는 마미 주었으면 됐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마미랑 만드는 게 훨씬 재미있어.”

랑일이는 여섯 살이 된 첫날, 처음으로 유치원에 다녀와서 집에서 펑펑 울었다. 이유는 더 이상 희원이 자기네 담임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말로만 들었기 때문에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생판 모르는 아이들이 희원에게 매달리고 안겨 있는 것을 본 순간 실감하게 된 거다.

3월 첫 주 동안 랑일이는 조금 우울해했다. 하지만 희원이 직접 집에 와서 며칠 동안 같이 자고 놀아 주고, 함께 등하원을 한 결과 한 달이 다 된 지금은 많이 풀렸다. 그리고 이제 자기는 의젓한 형아라고 말하고 다니곤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렇게 불쑥불쑥 희원에 대한 그리움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오늘은 뭐 해?”

“오늘은 음악!”

여섯 살이 되자 놀 유치원에서는 일주일에 두 번씩 음악을 배웠다. 랑일이는 다섯 살 때 희원의 옆에서 그림을 그렇게 그려 대더니 요즘은 노래를 부르는 것에 재미를 느껴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불렀다.

“오늘 노래 배우면 아빠한테 들려줘.”

“응! 마미한테 먼저 불러 주고 나서.”

여섯 살이 되어도 랑일이의 세계는 여전히 희원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기준은 그에 피식 웃고는 랑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 *

[오늘도 야근이에요?]

아이들을 한차례 보내고 난 뒤 잠깐 짬이 나서 희원은 기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기준의 야근은 이번 주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5월 어린이날을 앞두고 놀의 계열사와 새로운 콘텐츠를 한다고 했다. 그것도 그렇고 5월에 결혼식도 앞두고 있어서 일을 미리 몰아서 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어제처럼 늦지는 않을 텐데 그래도 일단 야근이에요. 희원 씨 랑일이 좀 부탁해요. 미안해요.]

기준은 여전히 랑일이를 맡길 때 미안해했다. 희원이 이제 그러지 말라고 해도 벌써부터 당연하게 여기면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난 뒤에도 육아는 함께하는 거지 누구의 몫이 되어 버리면 안 된다고 했다. 그 말에 희원은 고마웠고 기준이 다정한 사람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희원은 아이들에게 간식을 먹이고 아이들 방과 후 수업을 듣도록 안내했다. 아이들이 외부 강사가 진행하는 방과 후 수업을 듣는 동안 희원은 아이들이 새 학기를 맞이해서 낸 서류를 검토하고 기록했다.

그러다가 랑일이가 과학 실험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작년 랑일이 모습을 떠올렸다. 기준과 손을 잡고는 잔뜩 긴장한 채 인사하면서도 또래 아이들과 같지 않던 아이가 이제는 제법 또래 아이들다워졌다.

자기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누르는 게 당연한 거인 줄 알았던 랑일이는 지금은 웃기면 해맑게 웃고, 슬프면 울 줄 알았다. 가끔 떼도 쓰고 장난도 치는 평범한 여섯 살 감정을 가진 아이로 성장하고 있었다.

“희원 쌤. 애들 끝났어요.”

이번에도 다섯 살을 맡은 희원은 아이들을 일일이 챙겼다. 아직 유치원 생활 한 달밖에 안 되어서 아이들은 여전히 손이 많이 갔다. 실내화를 신발장에 집어넣고 신발을 찾아 신는 것도, 가방을 스스로 메는 것도 서툴렀다.

희원은 아이들 뒤에서 아이들이 서툰 손짓으로도 스스로 할 수 있게 도왔다. 다 하고 난 뒤 가방끈이 꼬여 있다거나 옷깃이 접혀 있다거나 한 것을 정리해 준 뒤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웠다.

다섯 살이 집에 갈 준비를 하는 동안 저쪽에서 여섯 살이 나오고 있었다. 랑일이가 맨 앞에 서서 담임 선생님을 돕고 있었다. 랑일이가 의젓한 모습으로 나오다 희원과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었다. 희원도 마주 웃어 주고는 반 아이들과 현관 밖으로 나갔다.

랑일이는 여섯 살 줄의 가장 앞에 서서 나왔지만 희원과 집에 가야 해서 다른 아이들이 하원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치원 정원 의자에 앉아서 친구들이 가는 것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예전 같으면 가장 늦게 가는 게 쓸쓸했겠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가장 좋아하는 마미와 함께 갈 수 있으니 말이다.

“다 끝났다. 집에 가자 랑일아!”

랑일이가 배시시 웃으며 희원의 품에 뛰어들었다. 희원은 랑일이를 꼭 끌어안고는 손을 잡았다. 얼마 전까지 희원이 안아 들었던 랑일이는 이제 무거워졌기도 했고 기준이 마미 힘들다고, 힘들게 하면 안 된다고 주입식 교육을 해서 이전처럼 안아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오늘 재미있었어?”

“네! 근데 마미랑 노래 부르는 게 훨씬 더 재밌어요.”

아침에 기준에게 했던 말을 고대로 하는 랑일이의 머리를 희원이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뒤에 타세요.”

랑일이 가방을 뒷좌석에 놓고 랑일이를 의자에 앉힌 희원이 앞에 앉고는 서서히 운전하기 시작했다. 기준은 어제보다는 일찍 갈 수 있다며 저녁은 같이 못 먹겠지만 따듯한 차는 같이 마실 수 있다고 기다려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희원은 알겠다고 연락을 하고 집으로 출발했다.

“마미.”

“응?”

“우리 저녁에 고기 먹어요!”

“그래. 오늘은 삼계탕 먹을까? 닭고기.”

“네! 고기면 다 좋아요.”

랑일이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여전히 랑일이는 고기를 좋아했다. 충분한 단백질 섭취 때문인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고 있었다.

집에 도착한 희원은 랑일이 목욕물을 받기 전에 찹쌀을 불려 놓았다. 그리고 랑일이 목욕을 시키고 저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워킹 맘, 워킹 대디들이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 종일 회사에서 치열하게 일하고 그들은 또 집에 들어와 쉬지도 못하고 집안일을 하는 게 보통이 아닐 텐데, 당연하게 여기고 임하는 부모들에 희원은 존경심마저 들었다.

“기준 씨 진짜 대단하다.”

부모 둘이서 해도 힘들 텐데 기준은 어쨌든 작년 내내 혼자서 랑일이를 키운 거나 다름없었다. 갑자기 희원은 기준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뭔가 기준에 대한 믿음이 더욱더 올라갔다.

희원이 닭고기를 손질하고 배 속에 불린 찹쌀을 집어넣었다. 랑일이는 식탁 앞에 앉아서 희원의 모습을 구경했다.

“랑일아,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 줘.”

“마미, 유치원에서 간식 먹어서 괜찮아요.”

한창 클 때라 돌아서면 배고플 텐데도 희원을 생각해 주는 의젓한 여섯 살 랑일이 덕에 희원은 힘을 내서 요리를 했다.

“이거 팔팔 끓고 조금 식으면 먹자.”

희원은 삼계탕을 불 위에 올리고는 다른 반찬을 꺼내 놓았다.

“아함.”

졸음이 몰려왔다. 나이 한 살 먹었다고 몸이 예전과 달랐다. 아무래도 3월이고 신경 쓸 게 많다 보니 더 그런 것 같았다.

희원은 팔팔 끓인 삼계탕을 조심히 식탁 위에 올려 두고 닭고기를 꺼내 먼저 접시에 잘게 찢어서 담았다. 랑일이가 먹기 좋게 말이다.

그때였다. 초인종이 울려서 랑일이가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아빠다!”

“아빠 벌써 오셨어?”

기준이 일찍 온다고 하더니 정말로 대문 앞에 서 있었다. 희원이 대문을 열어 주고 주차를 할 동안 랑일이와 함께 현관 앞에서 기준을 기다렸다.

“다녀왔어요!”

“아빠!”

“기준 씨, 왔어요.”

랑일이가 신나서 기준에게 매달렸다. 희원도 웃으며 기준을 반겼다. 결혼식도 올리기 전인데 벌써부터 한 가족 같아서 희원은 마음 한편이 뭉클했다.

“저녁은요? 아직이죠?”

“네, 아직인데 맛있는 냄새 나네요?”

희원은 기준과 랑일이를 다시 식탁 앞에 앉히고는 고슬고슬한 밥도 한 그릇씩 퍼 주었다. 셋이 오랜만에 같이하는 식사 자리에 희원은 기분이 좋았다.

“잘 먹겠습니다!”

“마미, 잘 먹겠습니다!”

기준과 랑일이가 똑같이 말하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희원도 같이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한 입 먹었다.

“어.”

희원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왜요, 희원 씨? 뭐 이상해요?”

“어, 뭐 잘못 넣었나?”

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삼계탕은 희원도 좋아하는 음식이었는데 별로였다. 기준이 얼른 한 숟가락 먹고는 괜찮다고 맛있다고 말하는데, 랑일이는 이미 접시에 코를 박고 있었다.

“왜 그러지?”

유치원에서 애들하고 과일을 간식으로 먹었을 때는 괜찮았는데 삼계탕은 별로였다.

“기준 씨, 먼저 먹어요. 나 아까 간식으로 귤을 먹었는데 좀 많이 먹어서 그런지 입맛이 별로예요.”

“그래도 조금이라도 먹어요.”

“아니에요. 조금 소화되고 배고프면 따로 먹을게요. 랑일아, 미안. 많이 먹어.”

희원이 랑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식탁 앞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거실로 나와서 소파에 앉았다.

“아함.”

다시 하품을 한 희원이 피로감에 잠시 눈을 감았다.

밥을 다 먹고 희원에게 다시 밥을 먹으라고 하려고 기준이 거실로 나왔다.

“자네.”

희원은 아직 8시밖에 안 됐는데 소파에 옆으로 누워서 곤히 자고 있었다. 기준이 희원을 깨울까 하다가 너무 곤히 자서 그대로 안아 침대에 눕히는 것으로 대신했다.

* * *

식당에 모인 아이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희원은 점심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보며 애써 웃었다.

“희원 쌤, 요즘 얼굴이 별로 안 좋은 것 같아. 어디 아파?”

“아니에요.”

옆의 식탁은 6세 반이었다. 식당에 앉을 때 반끼리 앉기 때문에 희원네 반 옆에는 랑일이네 반이 있었다. 6세 반 선생님의 물음에 희원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 흘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다 같이 먹을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희원은 아이들에게 급식 판을 잘 놓아 주고 아이들이 숟가락과 포크를 꺼내길 기다려 주었다. 놀 유치원은 제대로 갖추어진 식당도 따로 있고 워낙 점심과 간식이 잘 나와서 부모들도 만족하고 아이들도 먹는 시간을 무척 기다렸다.

아이들은 “잘 먹겠습니다.” 하고 인사하고는 열심히 숟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들도 아이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데 희원은 왠지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봄에는 입맛이 돌기 마련인데 이상했다. 요즘은 도통 먹고 싶은 게 없었다.

“선생님.”

랑일이가 희원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벌써 다 먹었어?”

랑일이가 텅 빈 식판을 들고 희원을 불렀다. 김치에 나물까지 싹싹 비운 랑일이가 예뻐서 희원이 랑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랑일이는 희원의 손길에 기분이 좋은지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 용건이 생각났는지 다시 희원을 올려다봤다.

“선생님 왜 점심 안 먹어요?”

“선생님 점심 먹었는데?”

“조금밖에 안 먹었잖아요. 내가 다 봤어요.”

랑일이의 말에 희원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랑일이가 옆 식탁에 앉아서 희원을 유심히 본 모양이었다. 랑일이는 잠시 귀를 기울여 달라는 듯 손짓했다. 희원이 허리를 굽혀서 귀를 가까이 대자 랑일이가 속삭였다.

“아빠가 속상하다고 했어요. 마미가 잘 안 먹어서.”

희원이 웃으며 랑일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눈을 맞추었다.

“선생님 이따가 저녁에는 많이 먹을게. 아까 간식을 너무 많이 먹었나 봐.”

“간식은 조금만 먹는 거예요. 그래야 밥을 많이 먹을 수 있어요.”

“그래. 알았어.”

언제 이렇게 컸는지 이제는 말도 똑 부러지게 잘하는 랑일이의 모습에 희원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5세 반 아이들의 식판 정리를 돕기 시작했다.

“희원 쌤.”

“네?”

“요즘 살이 좀 빠졌어요?”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고 아이들과 함께 책 정리를 하고 있는데 5세 다른 반 선생님이 물었다. 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입맛은 없고 새 학기라서 몸을 움직일 일은 많아서 그런가 몸무게가 조금 빠진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늘만 벌써 끼니나 몸무게 등에 대한 말을 몇 번 듣는지 몰랐다.

“바빠서 그런가 봐요.”

“좀 많이 먹어요. 요즘 잘 안 먹는 것 같아요.”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희원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들이 집에 갈 시간이 되었고 희원은 박 여사가 갑자기 결혼 선물을 해 주겠다고 해서 백화점 약속을 잡은 상태였다. 원래는 박 여사가 일요일에 루세랑 같이 가자고 했는데 기준과 해준이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라며 자기네들 배우자 좀 빼앗아 가지 말라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오늘 둘이서만 가기로 약속했다.

해준은 그동안 찍소리도 못 하고 박 여사에게 루세를 주말에 빼앗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은 기준의 기세에 숟가락을 얹고는 자신도 루세를 주말에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걸 박 여사는 같잖게 생각했지만 일단 이번에는 기준에게 한 발 양보하기로 했다.

여느 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하게 된 희원이 백화점으로 차를 몰았다. 요즘 도통 멀미가 나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없던 멀미가 생겨서 희원은 적잖이 당황했지만 방법이 없어서 최근에는 계속해서 자기 차를 몰고 다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박 여사를 만나러 위로 올라가는데 카페 앞을 지나는 순간 레몬이 눈에 띄었다.

“맛있겠다.”

희원이 레몬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희원아.”

“아! 어머니.”

“뭘 그렇게 보고 있어?”

희원이 웃으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발길을 돌리려고 하는데 자꾸만 레몬이 눈에 밟히는 거다. 입에 침이 고이고 저 시큼한 것을 입 안 가득 물고 싶었다. 지금 바로 말이다.

“희원아, 뭐 마실래?”

희원이 레몬에 눈을 못 떼고 있으니 박 여사가 물었다.

“그래도 돼요?”

“안 될 게 뭐 있어?”

“그럼 어머니, 레몬주스 한 잔만 마시고 가요. 제가 살게요!”

“뭘 희원이가 사? 엄마가 살게. 희원이가 시간 내준 건데 그 정도도 못 할까.”

희원은 박 여사의 손에 이끌려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레몬주스를 받아 들고 입에 물었다. 입 안에 퍼지는 달콤하고 새콤한 맛에 희원이 그제야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오늘 종일 먹은 음식 중에 이게 가장 맛있었다.

“어머니, 이거 너무 맛있어요.”

“희원이가 맛있으면 된 거야. 가자. 엄마가 오늘은 그릇 좀 사 주려고.”

“그릇 있어요, 어머니.”

“이번에 새로 한정판 접시가 나왔는데 너무 예뻐. 저번에 산 거는 평소에 쓰고 오늘 사는 건 손님 대접할 때 내면 되니까 또 사도 괜찮아. 그리고 방짜유기 트렁크를 한정판으로 판다는데 정말 예쁘더라. 보는 순간 희원이 사 주고 싶어서 보자고 했어.”

박 여사는 희원의 손을 잡아끌었다. 희원이 레몬주스를 쪽쪽 빨면서 박 여사 옆을 따랐다.

“근데 희원아, 살이 또 빠졌니?”

“아니에요, 어머니.”

“뭘 아니야. 온 김에 옷도 좀 사자. 그나저나 기준이가 맛있는 거 안 사 줘?”

희원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박 여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돈을 그렇게 벌면 뭐 하냐고 제 배우자 맛있는 것도 안 사 주고, 살이 빠졌는데 옷도 안 사 주고 뭐 하는 거냐고 기준을 흉봤다.

“기준 씨도 요즘 바쁘니까요.”

“그래도 걔는 잘만 먹고 돌아다니더라. 전화할 때마다 한정식집이니 일식집이니 그런 데 앉아 있더라고.”

“기준 씨 만날 야근하니까 잘 먹어야죠.”

희원의 말에 박 여사가 웃었다.

“그래도 이기준 챙기는 건 우리 희원이밖에 없구나. 이기준은 복도 많지. 희원아 우리 얼른 사고 스테이크 먹으러 가자. 근처에 맛있는 데 있어. 오늘도 버스 타고 왔니?”

박 여사의 말에 희원은 요즘 이상하게 멀미를 해서 차를 갖고 다닌다고 하니 그럼 박 여사가 데려다줄 테니 희원의 차는 기사에게 맡기라고 했다.

둘은 고부라고 하기보다는 엄마와 아들같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쇼핑을 즐겼다. 그러고는 스테이크집에 들어갔을 때 희원이 그대로 화장실로 직행해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기준은 박 여사의 전화를 받고 그길로 랑일이를 차 뒤에 태우고 본가로 달려왔다. 박 여사는 희원이 저녁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다 토하고 난리가 났다며 일단 본가로 데려갈 테니 오라고 했다.

기준이 도착했을 때는 주치의인 정 박사도 이제 막 도착한 상태였다.

“도련님, 오랜만에 뵈어요.”

“네. 안녕하세요. 희원 씨는요? 희원 씨는 어때요?”

누가 보면 불치병에라도 걸린 거 아니냐고 할 성싶게 기준은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도련님 저도 이제 막 도착해서요.”

“희원 씨, 괜찮아요?”

“선생님, 아파요?”

정 박사가 자기도 이제 도착했다고 말하는데 그건 듣지도 않고 기준과 랑일이가 똑같은 얼굴을 하고는 소파에 앉아 있는 희원에게 달려갔다. 희원의 옆에서 박 여사가 희원의 손을 만져 주고 등을 쓸어 주고 있었다.

“괜찮아요. 죄송해요, 어머니.”

“뭐가 죄송해. 이제 좀 괜찮아졌어?”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있던 이 회장도 소식을 듣고 놀랐는지 주방에서 직접 차가운 물을 들고 나오는 중이었다.

얼굴이 허옇게 질린 희원을 보자 기준은 손끝이 떨렸다.

“얼른 희원 씨 진찰 좀 해 주세요. 빨리요.”

기준은 정 박사에게 재촉했다.

“요즘 잘 먹지도 못하고 일도 많더니, 내가 이럴 줄 알았어요. 희원 씨 오늘 점심도 많이 안 먹었다면서요. 걱정되어 죽는 줄 알았는데, 잘됐다. 오늘 간단하게 진찰받고 내일이라도 우리 같이 병원 가서 자세하게 검진받아요. 나랑 꼭 같이 가요.”

기준이 희원의 옆에 서서 안절부절못하자 희원이 이제 정말 괜찮다고 했다. 그러고는 이 회장 내외와 기준과 랑일이가 보는 앞에서 진찰을 받았다.

“사모님, 잠시 말씀 좀요.”

정 박사는 기준 말고 박 여사와 희원을 먼저 불렀다. 기준이 어리둥절해서 세 사람을 쳐다봤지만 정 박사는 잠시 두 사람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아버지 뭐죠?”

“아빠 왜 그래?”

기준이 이 회장에게 묻자 랑일이도 똑같은 표정으로 제 아빠에게 물었다. 삼대의 얼굴에 똑같이 초조한 기색이 어렸다.

“어머! 희원아!”

갑자기 2층에서 박 여사의 높은 목소리가 들렸고 그걸 듣자마자 기준이 2층으로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랑일이도 제 아빠를 따라서 뛰었다. 이 회장도 빠른 걸음으로 2층으로 향했다.

“어머니! 무슨 일인데요! 희원 씨 무슨 일이에요? 어디 아프대요?”

기준이 속사포로 궁금증을 표했고 희원이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정 박사가 뭔가를 기준에게 내밀었다. 기준이 얼떨결에 받고는 의사를 한 번, 희원을 한 번 돌아가며 쳐다봤다.

“기준아, 축하해! 얘, 축하해! 희원아, 정말 잘했다, 잘했어. 축하해 우리 희원이.”

박 여사가 누구보다 기뻐했다. 기준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이 회장이 넌지시 보다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희원의 등을 도닥여 주었다.

“장하다, 희원아.”

이 회장의 축하까지 받고 나자 그제야 실감이 나서 희원은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다. 그러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자신이 건네받은 게 두 줄짜리 선이 그어진 임신 테스트기인 것을 알게 된 기준이 그대로 희원을 품에 안았다.

“고마워요, 희원 씨. 사랑해.”

기준이 희원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마주한 가슴에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정말 고마워요.”

기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느새 기준도 희원을 따라 울고 있었다.

랑일이가 희원의 옷자락을 쭉쭉 잡아당겼다. 아빠의 눈이 빨갰다. 그리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런 아빠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랑일이는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왠지 나쁜 분위기는 아니라서 랑일이는 희원을 찾았다.

“마미.”

희원이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랑일이와 눈을 마주했다.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었지만 희원은 랑일이에게 말해 주기 위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시선을 맞추었다.

“마미 왜 그래요?”

“랑일아.”

희원은 옷소매로 눈을 꾹꾹 눌러 눈물을 닦고는 입을 뗐다.

“랑일아, 우리 랑일이 동생 갖고 싶다고 했지?”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랑일이한테 선물이 왔어.”

“선물?”

“응! 랑일이 위해서 동생이 생겼어. 여기 마미 배 속에.”

“진짜요?”

“응, 진짜.”

랑일이의 커다란 눈이 더욱 커졌다. 랑일이는 아직은 판판한 희원의 배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희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희원이 미소 지으며 랑일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마미 배 속에 동생이 있어요?”

“그럼!”

“내 동생?”

“그럼, 랑일이 동생.”

랑일이가 제 아빠를 쳐다보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잇달아 바라봤다. 박 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랑일이에게 말했다.

“우리 랑일이 좋겠네. 동생 생겨서.”

이 회장도 이어서 말했다.

“랑일이 동생 갖고 싶다고 하더니 잘됐네?”

“랑일아, 축하해.”

기준까지 랑일이에게 속삭이자 그제야 랑일이가 그 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우아! 나도 이제 동생 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동생이 생겼을 때 랑일이가 그렇게 부러워하더니 제 동생이 생겼다는 말에 랑일이는 상상 이상으로 좋아했다. 그게 너무 고마워서 희원은 랑일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 다시 눈물 흘렸다.

정 박사를 보내고 난 뒤 희원은 소파에 앉아서 랑일이를 품에 안았다. 기준이 그러지 말라고 조심해야 한다고 했지만 희원은 벌써부터 랑일이에게 이전과 다르게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희원은 랑일이를 마주 안고 랑일이는 아직 아무 티도 나지 않는 희원의 배를 만지며 둘이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마미, 동생이 얼만해요?”

“아직 너무 작을걸.”

“여기 있어요?”

“그럼.”

“유치원 가서 자랑해도 돼요?”

“응.”

아직 결혼식도 올리기 전이지만 희원은 랑일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그동안 안 그래도 많이 숨기고 억누르며 살아온 아이한테 더 이상 저지하고 싶지 않았다.

“희원아, 이것 좀 먹으렴.”

박 여사는 저녁에 희원이 레몬주스 말고는 먹은 게 없다는 걸 깨닫고는 이번에는 오렌지주스를 내왔다. 직접 집에서 갈아 만든 거였다. 오렌지의 새콤달콤한 냄새를 맡는 순간 희원의 입에 군침이 돌았다.

“고맙습니다.”

“희원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엄마한테 언제든 말해, 알았지?”

“네.”

이 회장은 기준과 서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라 희원은 랑일이를 안고 주스를 마시며 기준을 기다렸다. 조금 뒤 나온 기준이 희원과 랑일이를 데리고 집으로 출발했다.

“혹시 멀미 나면 말해요. 쉬었다 가든가 그럴게요.”

“응, 아니면 내가 운전해도 돼요.”

“희원 씨가 운전하는 거 위험한데.”

기준의 말속에 걱정이 한가득 묻어났다.

“괜찮아요. 천천히 조심히 할게요.”

“그래요. 조금 괜찮아지면 내가 아침저녁으로 모실게요.”

희원이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희원 씨, 내일 같이 병원 가요. 아버지가 주치의 선생님하고 다 이야기 끝났대요. 희원 씨 시간에 맞추어 언제든 진료받을 수 있도록이요. 희원 씨 내일 편한 시간에 나랑 같이 가요.”

“그치만 기준 씨 요즘에 바쁘잖아요.”

“그것도 아버지랑 이야기 끝났어요. 아가가 먼저니까 그런 건 신경 안 써도 돼요.”

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그렇게 시간을 빼면 나중에 그만큼의 시간을 더 써야겠지만 그래도 기준과 같이 병원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희원 씨네 집에다가는 내일 초음파 사진까지 찍고 말씀드려요.”

“응, 그래요.”

“내가 이번 주에 말씀드리러 갈까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빤히 쳐다보자 기준이 선수 쳐서 말했다.

“술 조금만 마실게요. 희원 씨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달려 나가야 하니까 마시지 말까요?”

희원이 피식 웃었다.

“조금만 마셔요. 아가가 순해서 뭐 먹고 싶은 거라고는 과일밖에 없어요. 특별하게 구는 건 아직 없는 것 같아요.”

기준은 그에 벌써부터 효녀라고 생각했다.

* * *

어젯밤 박 여사가 해준과 이준에게는 말했는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축하 메시지가 와 있었다.

희원이 루세의 메시지까지 읽고는 회신을 하려고 하는데 씻고 나온 기준이 침대로 다가와 희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희원의 배에도 입을 맞췄다. 희원은 부끄러워서 기준의 물 묻은 머리를 밀어냈다.

“왜요, 우리 아가랑 아침 인사 좀 하려고 하는데요.”

“그래도요, 아직 배도 안 나왔는데.”

“그래도 이 안에 있잖아요. 잘 잤어, 우리 공주님?”

“진짜 아들이면 어쩌려고 이래요.”

희원이 기준의 어깨를 쭉 밀며 볼멘소리를 하자 기준이 뻔뻔하게 말했다.

“그럼 태명 공주님 하지 뭐.”

“왕자님이면 서운해해요.”

“알겠어요. 알았어.”

기준은 대충 대답하며 희원의 배에 입을 맞춰 주었다. 희원은 팔불출은 기준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뭘 봐요?”

“축하한다고 메시지가 와 있어서요.”

“누군데? 아, 이해준이네? 루세 씨랑. 형도 왔어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준에게 온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희원 씨, 축하해요. 이기준 마음껏 부려 먹어요. 새벽에도 깨워서 뭐 사다 달라고 하고, 집안일은 죄다 이기준한테 시켜요.]

기준이 형인 이준의 메시지를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직접 전화를 걸었다.

“형은 왜 나한테는 축하한다고 말 안 해? 그리고 뭐? 난 원래도 잘해. 걱정하지 마. 알아서 잘하니까. 형이나 좀 어떻게 더 잘해 봐. 그렇게 공들이면서…….”

희원에게만 축하 메시지가 오고 기준에게는 오지 않아서 역시 이 집의 형제는 화목한 것 같으면서도 차갑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이준과 통화하던 기준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왜요?”

“말하고 있는데 끊었네요? 우리 형 짜증 났나 봐요.”

기준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 형을 짜증 나게 만들어서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럴 때는 아직도 어린아이들 같았다. 희원이 제발 철 좀 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희원 씨, 오늘 몇 시에 병원 갈래요?”

“오늘 끝나고 저녁에 가도 돼요? 오늘은 일찍 빠질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어제도 일찍 퇴근해서요.”

회사원들은 잠시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볼일을 보거나 반차 같은 것을 쓸 수 있었지만 유치원은 아무래도 맡은 반 아이들이 있으니 그게 쉽지 않았다. 기준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실로 나왔다.

“희원 씨 씻는 동안 밥 차려 둘게요. 씻고 와요.”

“아직 그런 거 제가 해도 돼요.”

기준은 희원의 말에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우리 아가가 내 러트 기간에 왔을 것 같은데 그러면 아직 한 달밖에 안 된 거예요. 절대 안정 몰라요? 마음 같아서는 희원 씨 씻는 것도 내가 직접 해 주고 싶은데 참는 거예요.”

“괜찮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해요.”

희원이 펄쩍 뛰며 서둘러 욕실 안으로 숨어 버렸다. 기준은 그런 뒷모습을 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기준은 주방으로 가서 채소 위주로 밥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단백질이 필요하니 고기 대신 두부와 달걀로 대신했다. 박 여사로부터 배 속 아가가 고기류보다는 과일을 더 찾는 것 같다고 들었기 때문에 식단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마미이!”

랑일이는 희원이 같이 자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기준 말고 꼭 희원을 찾았다. 잠옷을 입은 랑일이가 눈을 비비며 문가에 서 있었다. 기준이 랑일이를 안아 들었다.

“아빠, 마미는 어디 갔어?”

“마미 씻어. 랑일이도 가서 세수하고 와.”

랑일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실에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희원이 머리까지 말리고 나왔을 때 식탁 앞에 앉았던 랑일이가 희원에게 다가갔다. 희원이 습관처럼 팔을 벌리자 랑일이가 품에 폭 안겼다.

“우리 랑일이 잘 잤어?”

“네, 마미도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랑일이가 희원을 한 번 쳐다보고는 따뜻한 눈빛에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희원의 배를 만지며 말했다.

“안녕, 동생아. 잘 잤어? 오빠는 잘 잤어.”

랑일이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희원은 아침부터 마음 한구석이 뭉클했다. 동생에게 벌써부터 잘하는 랑일이의 모습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 * *

퇴근하고 난 뒤 랑일이는 희원의 부탁으로 희원의 어머니가 데리고 갔다. 그리고 기준과 희원은 병원으로 향했다.

희원이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못 타서 어쩔 수 없이 따로 차를 끌고 갈 수밖에 없었던 둘은 병원 로비에서 만나자마자 한동안 못 봤던 사람들처럼 반가워했다.

“희원 씨 오는 길에 놀라거나 그런 건 없었죠?”

“네.”

“운전 내가 해 주고 싶은데 우리 아가가 그걸 허락해 주질 않네요. 아가야, 아빠가 운전하면 안 될까? 응?”

기준이 희원의 판판한 배를 만지며 이야기하는 통에 희원이 기준의 손을 밀어냈다.

“로비에서 왜 그래요.”

“뭐 어때요? 내가 우리 아가 만진다는데. 그리고 퇴근 시간이라서 병원에 아무도 없잖아요.”

희원이 기준의 손을 잡고 더 이상 자기 배에 못 얹게 했다.

“근데 기준 씨 혹시 긴장했어요?”

희원이 기준의 손을 잡았을 때 자신의 손보다 기준의 손이 더 차가운 것에 놀라 기준을 쳐다봤다. 올려다보는 희원의 눈빛에 기준이 헛기침을 했다.

“사실 희원 씨 집에 인사하러 갔을 때보다 더 떨리기는 해요.”

“뭘 떨어요.”

희원이 머쓱한지 웃으며 기준의 손을 잡아끌었다.

사실 기준은 요즘 랑일이에게 조금 미안하기는 했다. 랑일이를 가졌을 때는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는 결혼이었고 사실 아이를 원하지도 않았다. 러트 때 덜컥 생겨 버린 랑일이로 인해 쇼윈도 부부 행세를 하며 같이 병원을 다니곤 했지만 지금처럼 떨리고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그런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때의 기준은 그저 바빴고 회사 인수와 합병 문제로 정신이 없었다. 의무는 다하고 있지만 그 이상의 것은 하지 않았고 랑일이 친모도 재벌가의 정석대로 태교를 할 뿐 따로 기준에게 뭔가를 바라거나 부탁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지금 희원과의 사이처럼 애틋함도 없었고 배 속의 아이를 향해 기준이 그렇게 살갑게 말을 걸어 준 적도 없었다. 그때의 일들이 생각나 기준은 요즘 랑일이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랑일이에게 더욱 신경 쓰고 있었다.

“잠시만요 희원 씨. 랑일이 전화 왔네요.”

집에 도착했는지 희원네 집 전화번호로 전화가 왔다. 기준이 희원의 손을 놓지 않고는 진료실로 안내하며 전화를 받았다.

“그래, 랑일아.”

―아빠, 마미는?

“마미는 옆에 있지.”

―그럼 동생은?

“아빠가 진료실 들어갔다가 나와서 다시 전화해도 될까?”

―응! 아빠 이따 봐.

랑일이는 흔쾌히 알겠다며 자기는 외할머니랑 밥 먹고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전화를 끊었다.

“들어가요, 희원 씨.”

기준이 희원의 손을 잡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주치의가 소개해 준 산부인과 의사는 웃으며 둘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이사님. 희원 님, 이리 오세요.”

기준은 첫 아이도 아니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희원이 채혈을 할 때는 옆에서 안절부절못한 채 서 있고 소변 검사를 하러 갈 때는 화장실 앞에서 서성였다. 그리고 절정은 초음파로 착상 상태를 볼 때였다.

“여기 보세요. 아직 5주 정도밖에 안 되어서 작지만 여기 잘 착상한 게 보이시죠?”

희원은 초음파로 보이는 작은 생명에 감격해서 기준을 올려다봤다. 그러다 기준이 입을 헤벌쭉 벌리고 서 있는 것에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왜요, 희원 씨?”

“그렇게 좋아요? 입에서 침 떨어지겠어요.”

옆에 있던 의사도 듣고 웃었다.

“이사님은 처음도 아니시면서요.”

“그때는 저도 어려서 잘 몰랐습니다. 그저 어리둥절했던 게 더 컸지요.”

“랑일 도련님은 잘 있죠?”

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 랑일이를 받았던 것도 이 의사였다. 의사는 기준의 집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은 물어보지 않았다.

희원은 콩알만 한 아이 사진을 보며 신기해했다. 사실 희원은 자신이 아이 초음파 사진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그 감동은 더욱 컸다.

“희원 님, 이제 슬슬 입덧하실 텐데 어떠신가요?”

“아직 심하지는 않아요. 근데 고기 이런 건 못 먹겠어요.”

“너무 억지로 뭐를 드시려고 하지 마시고요, 조금씩 자주 먹는 것도 방법이에요. 너무 맵거나 단 거만 좀 피하시고요. 혹시 입덧이 너무 심하면 무리해서 먹는 것보다는 병원에 와서 주사를 맞거나 그러셔도 돼요.”

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사가 하는 말에 귀 기울였다.

“이사님은 뭐 궁금한 거 없으세요?”

의사의 질문에 기준이 조금 망설이는 게 보였다. 희원이 올려다보니 기준이 한 번 웃고는 입을 열었다.

“결혼식이 5월인데 그때 해도 괜찮을까요? 아니면 결혼식을 좀 당겨야 할까요?”

희원은 그 부분은 생각도 못 했는데 그제야 아차 싶었다. 의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5월에는 아직 배 안 나오니 괜찮습니다. 육안으로 봤을 때 전혀 모를 수도 있어요. 희원 님이 피로할 수도 있지만 이사님이 옆에서 많이 도와주시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장거리 여행은 피하시는 게 좋고요, 3개월까지는 삽입 성관계는 하지 마셔야 합니다.”

의사의 말을 귀담아듣던 기준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희원이 같이 듣다가 기준을 흘긋 쳐다봤는데 너무 안 좋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희원은 좀 놀랐다.

“기준 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기준이 희원과 눈을 마주했다.

“혹시 어디 불편해요? 표정이 안 좋은데요.”

“아니에요.”

기준이 애써 웃었지만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병원에서 나온 둘은 초음파 사진을 들고 그대로 희원네 본가로 가기로 했다. 그 전에 기준이 희원에게 뭔가 먹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다. 희원은 아직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런데 기준 씨. 아까 선생님 말씀 들을 때 진짜 어디 불편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기준이 문을 앞에 두고 우뚝 섰다. 희원이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자 기준이 희원을 끌어다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아가가 들으면 안 되니까 작게 말하는 거예요.”

“응?”

“우리 신혼여행 유럽으로 가서 한 달 정도 안 오려고 했는데 물 건너갔어요.”

“네?”

희원이 놀란 토끼 눈으로 기준을 쳐다봤다. 신혼여행에 대해 논의할 때 유럽 여행 이야기가 나오긴 했는데 희원도 유치원 아이들 때문에 오래 비울 수 없어서 일주일 정도 생각하고 가까운 곳으로 다녀오기로 했다. 그런데 한 달은 어디서 나온 이야기란 말인가?

그것보다 기준이 한 달이나 회사를 비우는 것은 더욱더 말도 안 됐는데 왠지 기준은 배 속 아이가 아니었으면 뭐라도 구실을 만들어서 한 달 동안 유럽에 있었을 것 같아 희원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했다.

“근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또 뭐가 있어요?”

“앞으로 몇 달 동안 우리 섹스 못 하는 거 알아요?”

희원이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배를 가렸다. 마치 아이의 귀를 가리는 것처럼 말이다.

“크흠. 기준 씨 얼른 가요. 랑일이가 우리 기다리겠어요.”

희원은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홱 발걸음을 돌리고는 병원 밖으로 나갔다. 기준이 얼른 뒤에 붙으며 왜 못 들은 척하냐고 그랬지만 희원은 걸음만 빨리할 뿐이었다.

기준은 가는 길에 그래도 처가댁에 가는데 뭐라도 사 가야 한다며 과일을 한 아름 샀다. 문제는 그 과일이 처가댁 운운하면서도 오렌지에 귤, 레몬, 키위 같은 신 과일뿐이라는 거였다. 결국 그 과일들은 죄다 희원의 차지가 될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또 각자 차를 몰고 희원의 본가 앞에 도착한 둘을 맞이한 이는 다름 아닌 랑일이였다. 랑일이는 현관 앞에 앉아서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랑일아, 왜 여기 있어?”

“마미 빠방 소리 나서 나왔어요.”

랑일이가 기쁘게 웃으며 희원의 배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고는 작게 뭐라 뭐라 속삭였다. 무슨 내용인지는 잘 들리지 않아서 알 수 없었으나 제 동생한테 하는 말임은 분명했다.

희원과 기준이 왔다는 소리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현관으로 나와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와, 이 서방. 이 서방 온다는 소리 듣고 다들 오고 있다고 하니까 우리 먼저 저녁 먹으면서 기다리면 돼.”

“같이 저녁 안 먹고요?”

“저녁은 다들 먹었다고 하고 술 한잔하자고 오고 있으니까 오면 간단하게 마시지 뭐.”

어머니의 말에 기준이 희원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희원 씨, 나 많이 안 마셔요.”

“알아요.”

“내일은 쉬는 날인데 그래도 조금만 마실게요.”

“응, 알았어요.”

희원은 단호하게 대답하고는 랑일이 손을 잡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뒤를 따라오며 희원에게 물었다.

“그런데 희원아, 랑일이가 동생 어쩌고 하던데 유치원 친구가 또 동생 생겼대?”

희원이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러고는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말했다.

“엄마, 나 할 말 있는데 그거 이따가 형이랑 누나네 식구 다 오면 말할게.”

희원은 괜히 엄마를 보는 순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했다.

조금 뒤 누나가 현관을 벌컥 열며 들이닥쳤다.

“희원이 왔다며?”

조카들과 매형도 그 뒤를 이으며 요란스럽게 들어왔다.

“삼촌!”

희원을 좋아하는 조카들은 들어오자마자 희원을 덥석 끌어안았다. 살짝 희원이 뒤로 밀리자 기준이 희원을 뒤로 빼냈다. 그러고는 자기 뒤로 숨겼다. 조카들이 어리둥절해서 바라봤지만 기준은 그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희원 대신 랑일이를 조카들에게 밀어 주었다.

“형아!”

“랑일이 오랜만이네. 잘 있었어?”

얼떨결에 랑일이가 희원의 조카들에게 안기게 되었지만 제법 자연스러웠다.

“이 서방 오랜만이야. 요즘 결혼 준비하느라 바쁘지?”

누나가 기준의 어깨를 두들기며 주방으로 쑥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형네 식구들이 시끌벅적하게 들어왔다.

“으, 추워. 아직 밤에는 춥네. 희원아, 형 왔다!”

“도련님! 형수 왔어요!”

영양사인 형은 집에서 또 뭔가를 잔뜩 했는지 보따리들을 들고 들어왔다. 고기 냄새가 훅 하고 들어왔다.

“읍!”

희원이 입술을 꾹 사리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희원 씨. 속이 안 좋아요? 괜찮아요? 토하러 갈래요?”

기준의 극성에 희원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식구들이 거실 한복판에 오도카니 섰다. 그러고는 서로 눈치를 봤다.

“희원아, 어디 아파?”

형이 희원에게 넌지시 물었다. 희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형, 미안한데 고기 좀 치워 줘. 미안해.”

“응? 고기? 왜? 너 좋아해서 해 온 건데.”

“도련님!”

눈치 빠른 형수가 희원을 불렀다. 그러고는 희원이 말하기 전에 서둘러서 고기가 든 음식들을 눈에서 치웠다. 형이 왜 그러냐는 듯 쳐다봤지만 형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저 드릴 말씀 있습니다.”

어차피 분위기가 이렇게 된 거 기준은 빨리 말하기로 했다. 소파 근처에 있던 아버지도 그 옆에 서 있던 어머니도, 랑일이를 품에 안고 있던 조카들과 그 주위에 있던 누나와 매형도 기준을 쳐다봤다.

기준이 안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희원 씨, 아기 가졌습니다.”

“어?”

“응?”

“뭐라 했나?”

제각각의 반응이 나왔다. 거실이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고요했다. 그때 저쪽에서 누나와 엄마가 소리 죽여 울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보였다.

“도련님, 축하해요.”

형수도 간신히 말을 뱉고는 뒤돌아 눈물을 훔쳤다. 형수는 웬만한 일에는 눈물도 보이지 않는데 형수가 우는 모습에 희원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왜, 왜 그래, 여보. 좋은 일인데…….”

옆에 있던 형이 무척 당황해서 허둥지둥 휴지를 찾았다.

“고마워요, 형수… 흡!”

결국 눈물보가 터진 희원이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고 희원을 먼저 품에 안은 이는 기준이 아닌 아버지였다. 아이가 자라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품에 안을 날이 점점 적어진다. 무뚝뚝한 아버지는 데면데면해진 아들을 품에 안고 그 여린 등을 도닥였다.

“축하한다, 희원아.”

아버지의 낮은 음성이 희원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 주었다. 희원은 아버지의 품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알고 있다. 아버지가 그동안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아들의 마음이 다칠까 봐 입에조차 담지 않았지만, 오메가 아들 페로몬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신경을 쓰고 살았는지 말이다.

“마미.”

랑일이가 다가와 희원의 옷자락을 쭉쭉 잡아당겼다. 희원이 내려다보니 랑일이가 손수건을 건네고 있었다. 기준의 것이었다.

“고마워 랑일아.”

“마미 기뻐서 우는 거죠? 동생 생겨서?”

“그럼.”

랑일이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니 랑일이는 희원을 꼭 끌어안으며 희원의 배에 대고 속삭였다.

“그렇대. 네가 생겨서 기쁘대.”

랑일이의 모습에 어머니와 누나, 형수는 또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눈물바다 이후에는 술잔치가 벌어졌다. 식구들은 이런 날 맹숭맹숭 있으면 안 된다며 축하주를 마시자고 했다. 기준이 희원의 눈치를 살피며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모를 말을 했다.

“희원 씨랑 약속했으니 저는 오늘 조금만 마시려고요.”

그걸 가족들이 아닌 희원에게 말하며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데 희원은 그런 기준이 그저 귀엽고 웃기기만 했다.

“그래요. 약속했으니까 지켜야죠.”

“알았어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눈치를 보는 기준이 귀여워 희원은 가족들이 없었으면 입을 맞췄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일 기준 씨 아무 일정 없으니까 그냥 놀아요.”

“진짜요?”

마치 먹잇감을 덥석 물고는 꼬리를 치는 대형견 같았다.

“응. 나중에 아가 나오면 놀고 싶어도 못 논다고 그러더라고요. 오늘은 과일도 이렇게 많으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기준 씨 신나게 놀아요. 너무 무리해서만 마시지 말고요.”

“알겠어요! 나 진짜 많이는 안 마실게요!”

기준이 희원의 뺨에 짧게 입을 맞추고 소매를 걷어붙이며 상에 가서 앉았다. 누가 보면 전장에라도 나가는 줄 알겠다고 생각하며 희원은 피식 웃었다.

희원은 고기가 가득한 상 앞에 앉는 대신 기준이 사 온 여러 가지 과일을 끌어안고 소파 위에 앉았다. 랑일이가 옆에 와서 딱 붙어 앉았다.

“랑일이 고기 더 먹지.”

“마미랑 있을래요. 이따가 형아들하고 같이 자도 돼요?”

지난번에도 조카들하고 같이 자더니 그게 생각이 났나 보다. 희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랑일이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나중에 동생 태어나면 동생하고 같이 잘 거예요. 밤에 동생이 무서우면 안 되니까요.”

랑일이 말에 희원은 가슴이 뭉클해져 랑일이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 * *

양가 집안에 아이가 생겼음을 알린 뒤 희원은 아예 기준과 신혼집으로 옮겼다. 임신 초기라서 조심할 것도 많고 이제 막 입덧이 시작이라 기준은 자신과 함께 있는 게 좋겠다고 양쪽 집 식구들을 설득했다.

랑일이는 이제 날마다 희원과 같이 유치원에 등원하고 하원할 수 있어서 신이 났고, 언제든 희원을 볼 수 있어서 행복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유치원에 가서 친구들에게 자신도 마미가 생겼고 동생이 생겼다고 은근히 자랑하고 다녔다.

아직까지도 남이 운전하는 차에 앉으면 멀미를 하는 바람에 희원과 기준은 따로 출퇴근을 했지만 그래도 같이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눈뜨면 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오늘은 랑일이를 데리고 퇴근한 희원이 랑일이와 저녁을 먹고 기준을 기다렸다. 기준은 5월에 결혼식을 올리고 그래도 가까운 곳에 신혼여행이라도 가기 위해 시간을 빼려고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랑일이는 소파에 누워서 희원의 무릎을 베고는 배에 대고 뭐라 뭐라 속삭였다. 요즘 랑일이는 틈만 나면 배 속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책을 들고 와서 책을 읽어 주고 대화를 했다. 그게 희원으로서는 너무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랑일아, 침대 가서 자.”

졸음이 몰려오는지 기다란 속눈썹이 끔벅끔벅 감기는 게 보였다. 희원이 랑일이 볼을 만져 주며 묻자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소파에서 스르르 내려갔다.

이전 같으면 안아서 침대 위에 눕혀 줬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랑일이는 희원의 마음을 아는지 잔뜩 졸린 눈을 하고서도 배시시 웃으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희원이 따라 들어가서 랑일이가 잘 때까지 옆에서 자장가도 불러 주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어느새 랑일이는 고롱고롱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배 속 아가는 유별나게 입덧을 하지는 않았으나 고기는 거부하고 과일을 입에 물고 살게 했다. 그러다 보니 시도 때도 없이 배가 고픈 게 흠이었다. 희원은 기준이 들어올 때까지 텔레비전이나 잠깐 볼까 싶어서 텔레비전을 켰다.

한창 먹방을 하던 때인지 텔레비전에서 수제비가 보글보글 끓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마른 새우를 한가득 우려 끓인 육수에 시래기와 애호박을 잔뜩 넣고 직접 반죽한 밀가루 반죽을 뚝뚝 끊어 넣은 털레기 수제비였다.

“와!”

커다란 뚝배기 안을 카메라가 비추었을 때 희원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맛있겠다.”

오랜만에 과일이 아닌 뭔가가 당겼다. 희원은 입술을 짓씹다가 핸드폰을 들어서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내일 저녁에라도 가서 먹을 생각이었다. 검색을 하다 보니 더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그때 기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기준 씨.”

―지금 퇴근 중인데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요?

희원이 침을 꼴깍 삼켰다. 텔레비전에서는 털레기 수제비를 먹은 사람들이 모두 엄지를 치켜들며 맛있다고 칭찬 일색이었다. 하지만 여태 일하고 오는 사람에게 수제비가 먹고 싶은데요, 하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수제비를 어디 가서 어떻게 사 온단 말인가.

“아니요. 없어요.”

고민하던 희원이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말이라도 해 볼까? 그럼 내일 퇴근길에 같이 갈 수 있지 않을까? 근데 랑일이에게는 좀 매워 보이는데 그 가게에 랑일이가 먹을 만한 게 있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희원 씨, 고민하지 말고 말해 봐요. 제주도 음식이에요? 제주도 잠깐 갔다 올까요?

“네?”

―나는 어디라도 갈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어서 말해 봐요, 고민하지 말고.

희원과 관련된 일에서는 귀신같은 기준이 재촉했다.

“아니, 있기는 한데 그게 지금 당장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내일 저녁에 퇴근하면서 먹으면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알았으니까 일단 메뉴라도 좀 말해 봐요.

기준의 재촉에 희원은 작게 수제비라고 속삭였다. 기준이 알았다며 가는 데 20분쯤 걸릴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정확히 20분 후, 기준이 마트에 들렀다 온 건지 밀가루에 애호박에, 마른 새우, 시래기까지 잔뜩 들고 나타났다. 쓰리피스 정장을 차려입고 채소를 든 그 모습에 희원은 그대로 기준에게 달려가 입을 맞췄다.

* * *

기준은 옷만 갈아입고는 조리대 앞에 섰다. 그러고는 밀가루를 풀고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밀가루 반죽을 하는 기준을 희원은 식탁 앞에 앉아서 구경했다. 왼손으로 밀가루를 치대는 모습에 희원은 또다시 반할 것만 같았다.

“기준 씨.”

“네.”

“어떻게 수제비를 직접 할 생각을 했어요?”

기준이 왼손으로 밀가루를 반죽할 때마다 힘줄이 선 단단한 팔뚝의 근육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희원은 기준이 요리할 때 또 그게 멋져서 기준이 주방에 서 있을 때 꼭 이렇게 옆에서 구경하곤 했다.

“육수 끓일 건데 거기 있어도 괜찮겠어요?”

“왜요?”

“냄새 괜찮나 싶어서요.”

기준이 장을 풀고 마른 새우를 집어넣으며 희원에게 물었다. 희원이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괜찮아요. 먹고 싶었던 거라 지금 엄청 기대 중이에요.”

“희원 씨가 임신해서 입덧하는 건 너무 안타까운데, 이렇게 내가 맛있는 걸 해 주고 그걸 희원 씨가 당연하게 먹기만 하면 돼서, 솔직히 미안한 말이지만 입덧하는 거 조금 더 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뭐예요.”

세상에 자기가 집안일하는 게 좋다고 말하는 알파가 어디 있단 말인가.

“뭐긴 뭐예요. 앞으로도 희원 씨가 나한테 의지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뜻이죠. 희원 씨는 뭐든 자기가 하려고 하잖아요. 나한테 의지도 잘 안 하고. 말해 봐요. 오늘도 내가 안 물어봤으면 말 안 하려고 했죠?”

“그건 아니고 내일 저녁에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하려다가 수제비집은 랑일이가 먹을 만한 게 없어서 고민하긴 했어요.”

“거봐요. 지금은 희원 씨가 임신부라서 가장 우선인데 그 와중에도 랑일이 걱정하고 나 생각해서 해 달라고 안 했잖아요.”

기준은 육수가 팔팔 끓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이렇게 앉아 있자며 희원을 끌어다 제 허벅지에 앉히고 바라봤다. 희원이 기준의 목을 끌어안고는 얼굴을 비볐다.

“고마워요, 이렇게 직접 해 줄 줄은 몰랐어요.”

“내가 요리 잘한다고 했잖아요. 좋아하기도 하고.”

“그치만 요즘 기준 씨 너무 바쁘잖아요.”

“일을 그만둘까요?”

“네?”

희원이 정색을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기준은 툭하면 회사를 그만둔다고 해서 희원이 그때마다 질겁했다. 기준은 희원을 꼭 끌어안고 희원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결혼식 올리기도 전에 내가 쓰러지겠어요. 이럴 바에는 재벌이고 뭐고 안 하고 싶어요.”

철없는 소리를 또 시작했다. 하지만 희원은 기준의 등을 도닥이며 위로하기 시작했다.

“놀을 기준 씨가 아니면 누가 맡겠어요. 지금 원래 바쁜 시즌이잖아요. 요거 끝나면 좀 괜찮아질 테니까 조금만 힘내요, 응?”

“이럴 때는 그동안 벌어 둔 돈 있으니까 그냥 쉬어요, 이렇게 말해야죠. 아니면 아버지한테 유산 미리 달라고 해서 쉬어요, 이래야죠.”

희원이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나 철없는 소리 했다고 눈으로 욕했죠?”

“아니에요. 아이고 우리 기준 씨가 힘들어서 어떡해요? 내가 일할 테니까 그럼 기준 씨는 일 그만둬요.”

희원이 과장된 표정으로 말하자 기준이 구시렁거렸다.

“약았어. 내가 희원 씨한테 약한 거 알고는 그렇게 말하는 거 봐. 내가 희원 씨 고생하는 걸 보겠어요?”

“그러니 아버님. 조금만 더 힘내요. 우리 배 속 아가를 위해서라도요.”

희원이 기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니 기준이 희원의 배를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제비 반죽을 뚝뚝 끊어서 넣기 시작했다. 얼큰하고 매콤한 냄새가 희원의 코를 찔렀다. 벌써부터 군침이 도는 게 배 속 아가도 반기는 듯해서 희원 역시 기뻤다.

“희원 씨, 뜨거우니까 조심히 먹어요.”

“기준 씨도 같이 먹어요. 혼자 먹기 싫어요.”

분명히 저녁도 못 먹고 일했을 기준을 희원이 끌어다 제 맞은편에 앉혔다. 희원이 한 숟가락을 뜨는 걸 기준은 긴장된 마음으로 바라봤다. 행여 먹고 싶었다가 마음이 바뀌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입덧 때는 먹고 싶다가도 막상 먹으면 속에서 안 받는 일도 허다하다고 하는데 기준은 그런 일쯤은 사실 상관없었다. 다른 먹고 싶다는 것을 해 주면 그만이니 말이다. 하지만 희원이 이래저래 못 먹는 건 마음이 아팠다.

“기준 씨, 맛있어요.”

“다행이다. 희원 씨 많이많이 먹어요.”

희원의 맛있다는 소리에 기준이 활짝 웃었다. 이제 막 출시한 장난감의 반응이 좋다는 소식을 들은 것만큼 기준은 기뻐했다. 그런 아빠의 모습이 좋은지 배 속 아가는 평소보다 더 많이 먹게 했다.

둘은 사이좋게 수제비를 먹고는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사실 이렇게 앉아 있는 건 오랜만이었다. 기준이 최근에는 계속해서 늦었기 때문에 서로 대화를 할 시간도 부족했다. 둘은 서로 손을 잡고는 가만 속삭였다.

“우리 이제 식만 올리면 된다, 그쵸?”

“네. 난 기준 씨랑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기준은 놀 유치원이 속한 그룹의 이사였고 처음 이미지는 차갑고 딱딱해서 무서운 학부모일 뿐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렇게 다정하고 그걸 넘어서 팔불출일 줄 누가 알았으랴!

“나도 희원 씨 아니었으면 누구를 만나는 건 생각조차 안 했을 거예요.”

“사람 인연 참 모른다. 그쵸?”

어느새 둘은 말투도 비슷해져 가고 있었다. 둘은 서로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 * *

희원은 숲길을 걷고 있었다. 나무가 우거진 숲의 오솔길을 콧노래 부르며 걸어갔다. 내리쬐는 햇빛은 따뜻했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니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아, 날씨 너무 좋다.”

희원이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 눈앞에 보이는 나무를 들여다봤다.

“이게 뭐지?”

눈앞에 샛노란 귤이 나무에 엄청 달려 있었다. 향긋한 귤 향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희원이 손을 뻗어서 귤 하나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귤에서 나는 향이 훨씬 더 진해졌다. 희원이 발꿈치를 들고는 코를 킁킁거리며 향을 맡았다.

꿀꺽. 군침이 돌았다.

“너무 맛있겠다.”

“담을 만큼 담아 가요.”

누군가 희원을 향해서 말했다. 뒤를 돌아봤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희원은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피다 귤을 유심히 쳐다봤다. 유독 한 개가 눈에 띄었다. 마음껏 담아 가라고 했지만 담아 갈 바구니나 가방 같은 게 없었다.

“딱 한 개만 따 가야지.”

희원은 신나는 얼굴로 가장 예쁜 귤을 땄다.

“어어어!”

분명히 작은 귤이었는데 희원이 따는 순간 엄청 커다래져 희원의 품으로 안겨 들었다.

“어!”

희원이 벌떡 일어났다. 옆에서 자던 기준이 희원의 인기척에 깨서 쳐다봤다가 희원이 앉아 있으니 자신도 놀라 벌떡 일어났다.

“희원 씨. 왜요? 어디 아파요?”

“아뇨. 아. 귤이.”

“응? 귤? 귤 먹고 싶어요? 귤? 알았어요. 내가 사 올게요.”

기준은 벌써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아뇨, 아뇨. 기준 씨 아니에요. 미안해요, 기준 씨.”

“아니에요. 뭐 먹고 싶은 게 왜 미안해요.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귤 얼른 사 올게.”

기준이 협탁에 놓인 지갑과 핸드폰을 들고는 나가려고 하는 걸 희원이 허겁지겁 말렸다.

“미안해요. 꿈꿔서 깼어요. 기준 씨도 놀라서 깼죠. 나 때문에 깨서 어떡해.”

기준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희원의 뺨을 어루만졌다.

“괜찮아요. 잠 좀 깨면 어떻고 희원 씨가 밤에 뭘 먹고 싶으면 어때요. 근데 무슨 꿈이었기에 그렇게 화들짝 놀라서 깼어요?”

“일단 옷 갈아입고 다시 누워요. 누워서 들어요.”

기준은 희원이 하라는 대로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러고는 희원에게 팔베개를 해 주고 희원이 꾼 꿈 이야기를 들었다.

“어, 그거 태몽 아니에요?”

“태몽이요?”

“맞네, 태몽! 배 속에 아가는 있는데 태몽은 도대체 누가 꿀까 궁금했는데 결국은 희원 씨가 꾸는구나. 귤이면 공주님 아니에요? 진짜 공주님인가 보다. 내가 뭐라고 했어요. 공주님일 거라고 그랬죠? 귤아, 귤이 공주님.”

기준은 희원의 배를 만지며 속삭였다.

“귤이요?”

“네, 귤이. 우리 귤이 공주님.”

순식간에 태몽에 태명까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태명 어때요? 예쁘죠?”

희원도 별 이의가 있는 건 아니어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황빛의 달콤한 향이 나던 깨끗하고 토실한 귤. 가슴으로 커다란 귤이 파고들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했다.

“귤아.”

희원도 기준의 손 위에 제 손을 얹고는 가만 속삭였다. 제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것도 사실 신기했다.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기 때문이다. 희원은 이런 행복을 느껴도 될까 싶을 정도로 요즘 행복했다.

“귤아, 마미 괴롭히지 말고 건강하게 잘 있다가 우리 만나자. 입덧은 너무 심하게 하지 말아 줘. 아빠가 우리 귤이 공주님이 먹고 싶다는 건 다 갖다가 바칠 테니까 까칠하게 굴면 안 돼. 알았지?”

기준의 말에 희원이 피식 웃었다. 누구는 물도 못 마신다고 하던데 고기 좀 못 먹는 걸 가지고 벌써부터 마미를 괴롭힌다고 이런 유난도 없다.

“귤이는 엄청 순한 거예요, 기준 씨. 누군 물도 못 마시고 만날 수액만 맞는 사람도 있다는데요, 뭐. 입덧도 심하지 않고 착상도 잘돼서 무럭무럭 큰다잖아요. 얼마나 착해요.”

“다 희원 씨 닮아서 그래요. 그러니까 순하고 착하지. 귤아, 마미가 우리 공주님 착하대. 그러니까 계속해서 건강하게만 있다가 나오면 돼. 알았지? 아빠가 다 준비하고 있을게.”

기준은 그 말을 지키듯 그다음 날, 양손 무겁게 오렌지빛 옷과 신발을 잔뜩 들고 퇴근했다. 희원은 그제야 다 준비하고 있겠다는 말이 그런 뜻이었음을 알고 이마를 짚었다.

어째 이러다 기준을 닮은 왕자님이 태어나면 기준은 울 것만 같아서 그간 성별에 아무 상관 없었던 희원조차도 이제는 저를 닮은 공주님을 기도하게 되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