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새로운 공간의 세 사람
희원은 백화점을 한 바퀴 돌면서도 이게 잘하는 짓인가 싶었다. 형수와 누나가 이런 건 초장에 바로잡고 가야 한다고 해서 강하게 나가긴 했는데 그러고 나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둘이 같이 쓸 침대를 고르려고 나온 건데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어떡하지.”
희원이 침대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섰다. 그 와중에 기준에게서는 계속해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안 받는다니까, 정말.”
희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이제는 통화 거절을 눌렀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장문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희원 씨, 제발 전화 좀 받아 줘요. 어디 있어요? 내가 직접 가서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우리 제발 얼굴 보고 말해요.]
희원은 입술을 삐죽였다. 자꾸만 이렇게 전화가 오고 메시지가 들어올 때마다 마음이 봄바람에 눈 녹듯 풀려서 큰일이다.
“희원 씨?”
그때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희원이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기준의 형인 이준이 서 있었다. 희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안녕하세요.”
희원이 정신을 차리고 금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준이 희원을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왜 혼자 있어요? 이기준 화장실 갔어요?”
“아, 아니요. 저 혼자 있어요.”
“오늘 혼수품 보기로 한 날 아니에요? 이기준이 랑일이 맡기고 나간다며 들떠 있었는데 같이 안 나왔어요?”
희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좀 일이 있어서요.”
“아…….”
희원이 난감해하자 이준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과 그렇게 마주 서 있는데 저쪽에서 누군가 다가오며 이준을 불렀다. 이준이 손을 들어서 알은척을 하더니 희원에게 다음에 또 보자고 했다. 문득 희원은 이준이 기준에게 전화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이준을 붙잡았다.
“저, 잠시만요.”
이준이 희원에게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희원이 말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사실은 기준 씨랑 좀 싸워서요.”
“싸웠다고요? 이기준이 희원 씨랑요?”
싸운 건 아니고 희원이 혼자 화가 나서 나온 거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곧이곧대로 이야기하자니 왠지 기준을 욕하는 것 같아서 좀 그랬다.
“아무튼 그래서요, 저 여기서 봤다는 것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고 싶긴 한데…….”
이준이 턱으로 뒤를 가리켰다. 희원은 뭔가 싶어서 뒤를 돌았다.
“희원, 희원 씨.”
희원이 도망이라도 갈까 봐 기준이 희원의 손목을 꽉 잡았다. 뛰었는지 숨소리가 조금 거칠었다. 희원이 잡힌 손목을 빼려고 했지만 기준은 놓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로 더욱 꽉 쥐었다.
“손목 아파요.”
“미안, 미안해요. 그치만!”
“어디 안 갈 테니까 손 좀 놔요.”
기준이 그제야 손을 놨다. 하얀 손목에 금세 벌겋게 자국이 남았다. 희원은 그의 형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다. 눈치 빠른 이준이 상황을 살피다 말했다.
“희원 씨, 갈게요. 이기준, 똑바로 해.”
이준이 자리를 뜬 뒤 기준은 다시 희원의 손을 잡았다. 희원이 손을 빼려고 했지만 기준은 다시 잡고는 허겁지겁 말했다.
“희원 씨, 우리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얘기해요.”
“지금 얘기하기 싫어요.”
“그렇다고 내내 피할 거예요?”
희원이 입술을 꾹 물었다.
“그럼 차에 가서 얘기해요. 설마 기준 씨 차 끌고 온 거 아니죠?”
기준이 그럴 리가 있겠냐며 고개를 붕붕 저었다. 희원은 입술을 한일자로 꾹 물고는 앞서 걸었다. 그 뒤를 기준이 안절부절못하며 바짝 쫓았다.
희원은 결국 백화점 주차장에서 차를 빼 한적한 장소로 향했다. 옆에서 기준이 희원을 한 번 봤다가 등을 꼿꼿이 폈다가 또 한 번 보며 눈치를 살피기를 계속했지만 희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운전만 할 뿐이었다.
한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주차했을 때 희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희원 씨.”
기준이 조심스레 희원을 불렀으나 희원이 그 말을 막았다.
“기준 씨, 제가 한마디만 좀 해도 될까요?”
“그럼요! 하세요. 들을 준비 되어 있어요.”
기준이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기준 씨가 나한테 장문의 문자를 보냈던데 진심으로 반성하는 게 아니라면, 그저 지금 불편한 상황을 지나가기 위함이라면 사과하지 마세요.”
“그게 아니에요, 희원 씨. 어떻게 제가 불편한 상황을 지나가려고 그런다고 생각하세요?”
희원은 팔짱을 끼고 말하고 있어서 기준은 괜스레 말투가 공손해졌다.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 기준이 눈치를 봤다.
“그럼 뭔데요? 제가 분명히 어제 술 조금만 마시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치만…….”
“변명하려고 하지 말고 제가 묻는 것에 대답해요. 제가 분명히 어제 술 조금만 마시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상스러운 욕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반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존칭을 다 사용하고 있었으나 말투가 차가웠고 서슬이 퍼래서 기준은 고개를 푹 숙였다.
“했어요.”
“그런데 왜 약속을 안 지켜요? 제가 화내지도 않고 그저 웃고만 다니니까 저랑 한 약속은 안 지켜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니면 이제 혼수니 결혼이니 얘기 나오니까 다 잡은 물고기 같았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말도 안 된다. 다 잡은 물고기라니!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단 말이다. 기준이 앉은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하지만 희원은 냉랭한 얼굴을 한 채 계속해서 말했다.
“저한테 반문하지 마시고요,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해 주세요. 기준 씨가 무슨 생각으로 약속을 안 지킨 건지 말씀해 보세요.”
기준은 희원이 이렇게 무서운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늘 방싯방싯 웃었던 사람이 무표정으로 따박따박 말하고 있는데 기준은 좁은 차 안에서 숨을 쉬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둘 다 아니에요.”
“그러면 왜 약속을 안 지킨 건지 말씀해 보세요.”
기준이 입술을 꾹 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당연히 술을 많이 마신다고 해도 그렇게 인사불성이 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혹시 그렇다고 해도 다음 날 조금 느지막이 일어나 희원에게 조금 혼이 나도 같이 백화점에 갈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말이다.
“희원 씨,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미안하다, 잘못하다 말고 이유를 알고 싶어서 그래요. 그래야 제가 기준 씨가 한 행동에 대해서 이해를 하든가 그러죠.”
기준이 고개를 푹 숙였다.
“희원 씨 진짜 잘못했어요. 희원 씨 식구들 만나서 기분 좋아서 한잔한다는 게 그렇게 됐어요.”
“제가 기준 씨 술 많이 마신 거로 뭐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오늘 일정이 없었으면 한 번쯤은 그렇게 풀어지는 모습도 괜찮아요. 늘 밖에서 긴장하며 사는 거 아니까요. 그런데 오늘은 일정이 있었잖아요. 무리한 몸 이끌고 일정 소화하는 걸 내가 좋아할 것 같아요?”
기준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잘못한 거 맞죠?”
“네.”
“일주일 동안 나한테 터치하지 마요. 따로 데이트도 안 할 거예요. 철저하게 반성하세요.”
기준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이건 일주일 동안 연락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희원 씨! 차라리 내가 무릎 꿇을까요? 뭐 손이라도 들까요?”
“기준 씨는 벌을 자기가 정해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벌 잘 받고 반성 잘하면 용서해 줄게요. 집으로 갈 거예요. 가구는 다음에 고르도록 해요.”
“네.”
기준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느꼈다. 일단 한발 물러나 얌전히 쭈그러질 수밖에.
* * *
“선생님! 안녕하세요!”
랑일이가 골목길을 도다다다 소리가 날 정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쪽에서 다른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던 희원이 랑일이 소리를 듣자마자 휙 뒤돌아서 그대로 돌진하는 랑일이를 품에 안았다.
“아가, 그렇게 뛰면 다친다고 했잖아.”
랑일이는 희원이 뭐라고 해도 그저 헤헤 웃으며 희원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고 희원을 꼭 끌어안았다.
“잘 잤어?”
“네!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그래, 선생님도.”
매일 보고 있는데도 요즘에 랑일이는 아침마다 안겨서 인사하며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게 희원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흠.”
기준이 희원의 앞에 서서 인기척을 냈다. 희원이 랑일이를 땅에 내려 주며 기준을 바라보고는 섰다.
“안녕하세요.”
희원이 여느 학부모 대하듯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기준이 인사를 하며 희원의 눈치를 살폈다. 희원이 인상을 쓰는 것도 아닌데 왠지 표정이 냉랭해 보였다.
“자, 랑일아. 아빠한테 안녕히 다녀오세요, 하고 인사하자.”
“아빠, 안녕히 다녀오세요!”
랑일이가 제 아빠한테 인사를 하고는 희원의 손을 꼭 잡았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희원이 허리 숙여 다시 인사하고는 쌩 뒤돌아 유치원으로 들어갔다. 기준은 그 뒷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차에 다시 탄 기준은 날짜를 확인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제 수요일이네.”
한 주가 길었다.
기준은 희원을 보기는 하지만 그건 여느 학부모나 마찬가지로 아침저녁일 뿐이었다. 랑일이를 데려다주고 데리러 가면서 희원과 인사를 나누긴 했다.
하지만 희원은 어찌나 냉정한지 여느 때처럼 랑일이를 안고 기준의 차가 골목길을 돌아 나갈 때까지 배웅을 해 주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러면서도 랑일이에게는 한결같이 다정하고 사랑이 뚝뚝 넘치는 시선으로 바라봐서 날이 지날수록 기준의 욕구와 질투도 커져만 가고 있었다.
기준은 희원이 이렇게 독한 사람인지 몰랐다. 희원은 연락은 다 받아 주었다. 기준이 밤에 잠자기 전에 하는 전화나 점심때 건네는 메시지를 일부러 피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기준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 벌을 처절하게 받고 있었다.
기준은 그야말로 욕구불만이었다. 극우성 알파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게 해결되지 않으니 매사가 불만이었다. 희원을 만나기 전에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렇게 쌓인 욕구는 결국 화가 되어 사방으로 펑펑 터지고 있었다.
“지금 이 기획안들이 괜찮다고 생각해서 가지고 올라온 겁니까?”
회의실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기준이 소속되어 있는 팀이 콘텐츠 사업부인 만큼 그 기초라고도 할 수 있는 아이템과 그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기획안은 굉장히 중요했다. 원래도 기준은 아이템에서는 다양한 시각을 위해 제약을 두지 않지만 그것을 기획안으로 확장하는 단계에서는 까다롭게 굴었다. 한데 요즘은 그 강도가 심했다.
“우리 회사가 문구와 완구 회사라는 것을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요? 만날 이미 나온 장난감 이어 붙일 생각만 하지 말고 새로운 걸 만들 생각을 좀 하세요. 새로운 아이디어 없이 이미 다른 사람이 만든 거에 숟가락 얹을 생각 하지 마시고요. 완구와 문구를 접목시킨다든가, 아니면 다른 회사와 합작을 한다든가, 이런 생각은 아예 없는 겁니까?”
콘텐츠 사업부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금요일 오전 9시 반에 다시 회의합시다. 다시 짜 오도록 하세요.”
기준이 차가운 얼굴로 먼저 일어나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직원들은 야근 확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회의실에서 이사실로 올라오는 동안 원 실장이 뒤에서 그 뒤 일정을 줄줄 읊었다.
“이사님, 점심에 회장님과 놀책 이이준 이사님하고 점심 식사 하신다고 합니다. 이이준 이사님께서 일정 괜찮으시면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아직 점심 일정 없으신데 참석하신다고 전할까요?”
아버지랑 형은 웬만해서는 외부에서 따로 만나지 않았다. 형이 그걸 별로 원하지 않았다. 웬일로 둘이 따로 점심 식사를 한다는 건지 기준은 궁금하긴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기준도 참석할 것을 권했다는 것은 아마 형이 사업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게 있다는 뜻일 거였다.
“그래요, 같이한다고 전해요.”
기준은 원 실장에게 대답하고는 이사실로 들어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책상에 놓인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희원과 랑일이가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랑일이가 희원의 손을 꼭 잡고는 한없이 밝게 웃고 있었다. 그런 랑일이를 희원이 내려다보며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고 말이다.
“후유, 미치겠네. 정말.”
희원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몸이 자꾸 달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연말도 얼마 남지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벌써 다음 주였다. 크리스마스에 이 사달이 안 난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싶었다.
“일이나 하자.”
크리스마스와 연말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회사에 있는 동안은 죽어라 일에만 매달리면 되니까 말이다. 기준은 쌓여 있는 서류를 보며 한숨지었다. 빨리 시간이 흘러 일요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 * *
“랑일아, 잘 가!”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희원이 쪼그리고 앉아서 눈을 맞추고는 팔을 벌리자 랑일이가 품에 폭 안겼다. 그러고는 희원의 머리칼을 만지며 더욱 꼭 끌어안았다.
“마미, 빠빠이.”
“응, 우리 아가. 잘 자고 내일 봐.”
둘이 그렇게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기준이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희원이 랑일이를 놔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아버님도 안녕히 가세요.”
희원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기준이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기준이 서둘러 말했다.
“희원 씨.”
희원이 가만히 기준을 바라봤다. 기준이 뭔가를 말할 것같이 하다가 그냥 입을 합 다물어 버렸다.
“아닙니다.”
쫄기는. 희원은 속으로 웃었다.
“네, 안녕히 가세요. 랑일이 잘 가. 내일 보자.”
“네!”
랑일이는 아빠와 마미 사이의 묘한 기류를 읽었지만 희원이 자신에게 잘해 주니 그저 신이 났다. 엉덩이를 흔들며 아빠 차에 기어올랐지만 기준의 발걸음은 느렸다. 희원은 그것을 뒤에서 지켜보며 장난꾸러기처럼 작게 웃었다.
항상 자신만만했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내 남자 어깨가 저게 뭐람.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엄하게 굴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기준이 뒤를 슥 돌아봤다. 희원이 홱 하고 고개를 돌리고는 유치원으로 쏙 들어갔다.
“귀여워.”
희원이 중얼거렸다.
그거 좀 혼났다고 기준이 그렇게 풀이 죽을 줄 몰랐다. 게다가 착실하게 벌을 받을 줄은 더더욱 예상도 못 했다. 조금 냉랭하게 굴었다고 귀가 축 처진 대형견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게 그저 귀여웠다.
“얼마나 더 귀여워지려고 저래.”
희원은 유치원에 들어가 가방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문단속을 하고는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그러고는 차를 몰기 시작했다.
처음에 봤을 때 기준은 언론에 나오는 이미지 그대로 차갑고 냉철한 이미지였다. 말하는 것도 딱딱하고 사무적이었고 말이다. 일부러 고압적인 건 아닌데도 원래 타고난 포스가 있어서 그런지 분위기가 무겁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희원은 기준이 지금 같은 사람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기준은 이면에 다정함이 있었고 쓸데없이 고압적이지 않았다. 갑질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누구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기가 잘못한 건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사과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희원은 기준이 저렇게 풀 죽은 모습을 보이는 게 마냥 귀여웠다.
희원은 차를 몰며 어딘가에 도착했다. 사실 기준이 많이 풀 죽어 있어서 ‘뉘우쳤으면 이제 됐어요. 다음에 또 그러면 그때는 더 화낼 거예요.’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할 게 많아서 그냥 두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선 희원이 웃으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오는 데 춥지는 않으셨어요?”
희원이 머플러를 풀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저기 사각사각 연필이 종이 위를 달리는 소리, 물감 냄새, 종이가 부딪치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희원을 즐겁게 만들었다.
“차 타고 와서 괜찮아요.”
“커피 한잔 드시면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앞에 학생들 조금만 봐주고 갈게요.”
“네, 천천히 오세요. 어제 그리던 거 마저 그리고 있을게요.”
희원이 여기 드나들게 된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갔다.
희원은 기준과 처음으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때 기억에 남는 무엇인가를 해 주고 싶었다. 그저 돈으로 해 주는 선물 말고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느낄 수 있는 선물을 말이다.
사실 돈 많은 기준에게 아무리 비싼 것을 사 준다고 해도 그게 감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치원 교사를 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학부모들은 유치원에서 주는 값비싼 선물보다는 담임교사가 직접 쓴 편지라든가 아니면 손이 많이 간 아이들 앨범을 더 좋아하곤 했다.
그러던 찰나 우연히 화실을 알게 되었다. 요즘은 원데이 클래스로 이것저것 많이 하던데 그런 것을 할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학부모 중 한 명이 가족 중 화실을 운영한다고 해서 한 달 정도의 시간을 갖고 드나들게 되었다.
“와! 이제 거의 완성이네요?”
“네, 크리스마스 전에 할 수 있겠죠?”
“그럼요.”
희원의 그림을 봐주는 선생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은 자신감을 갖고 붓을 들었다.
* * *
랑일이를 태우고 본가로 향하는 기준의 표정은 침울했다. 오늘은 하원하는 시간에 유치원에 갔더니 희원이 없었다.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일찍 퇴근한 희원에 기준은 당황했다.
부담임 선생님 말에 따르면 일이 있어서 일찍 퇴근했다고 한다. 기준은 희원에게 조심스레 전화를 했지만 희원은 받지를 않았다. 그래도 이번 주에 기준에게 희원이 먼저 전화를 한 적은 없지만 기준이 전화하면 꼬박꼬박 받기는 했는데 말이다.
“랑일아, 마미 어디 가셨어?”
“몰라.”
랑일이가 창밖을 보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오늘 랑일이는 어딘가 우울해 보였다.
“랑일아.”
“응?”
여전히 랑일이는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유치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단답형 대답에 기준은 랑일이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일이 있었다면 그걸 희원이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일단 운전 중이니 집에 가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주말이라 식구들이 모여 밥을 먹기로 했다. 어차피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희원과 보낼 생각이었기에 미리 모이기로 한 거였다.
사실 기준에게는 크리스마스나 무슨 행사 같은 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의미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랑일이가 태어나면서 아이에게 일상을 선물하고 일상의 재미를 알게 해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이제 기준은 더욱 이런 날을 챙기려 들었다.
“랑일아!”
차에서 내리자마자 해준이 랑일이를 불렀다. 평소 같으면 해준에게 달려가 안겼을 랑일이가 왠지 힘이 없었다. 해준이 다가와 랑일이를 안아 들었다.
“우리 랑일이가 왜 그럴까? 왜 이렇게 힘이 없을까?”
“작은아빠.”
“응.”
랑일이는 해준을 불러 놓고서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 랑일이가 궁금한 거 있어? 저기 가서 작은아빠한테만 얘기할까?”
해준이의 물음에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은 그런 랑일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들이나 마미나 왜 저한테는 말을 안 하는지 갑자기 소외감이 몰려왔다.
기준이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고 할 때 해준이 방으로 불쑥 들어왔다.
“노크 좀 해.”
“뭐 어때?”
해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랑일이는?”
“설이랑 놀아.”
“설이랑 자꾸 붙여 놓지 마. 그러다 보니까 설이가 친동생이라고 생각하고는 다른 동생은 필요 없다잖아.”
기준의 말에 해준이 피식 웃었다.
“진짜 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어쩌다 형이 이 지경이 됐는지. 형수 화났다며?”
해준의 말에 기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반듯한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원래 해준은 집에서 무서울 게 없는 전형적인 막내였다.
“누구한테 들었어?”
“엄마.”
기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마. 아버지만 몰라. 우리 집안 식구들 형이 잘못해서 형수가 엄청 화난 거 다 알고 있어.”
이놈의 집구석은 비밀이 없다.
“큰형이 말했냐?”
“응. 큰형이 백화점에서 봤다며? 큰형의 말을 빌리자면 이기준이 뭐 마려운 똥강아지처럼 백화점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는데?”
기준이 이를 으득 갈았다.
“형은 요새 왜 자꾸 본가에 온대? 연애 전선에 문제 있냐?”
“큰형 본 지 오래됐어? 아니지, 백화점에서 만났다며. 큰형 몸에서 특정 오메가 페로몬 향 나는 거 몰라서 그런 말이 나오냐?”
“근데 너 왜 들어왔어?”
그제야 해준은 방으로 들어온 용건을 기억해 냈는지 기준을 끌어다 앉히고는 저도 침대에 걸터앉았다.
* * *
랑일이를 재우고 기준은 침대에 길게 누웠다.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원래 이렇게 사는 게 재미없었나? 일은 일대로 많고 욕구는 욕구대로 쌓였다. 알파면 뭐 해. 쓸데가 없는데. 자신이 극우성 알파가 맞나 싶기도 했다.
기준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반쯤 서 있는 제 앞섶을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욕구대로 살았을까? 희원을 만나기 전에는 러트 때나 오메가와 잤고 그것을 제외하면 별로 몸이 동하는 때도 없었다. 늘 일에 파묻혀 워커홀릭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희원을 고 일주일 품에 못 안았다고 몸이 난리가 났다.
“하아, 미치겠네.”
욕구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제 몸이 이제는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든가 하지.”
도대체 언제 섹스하고 안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희원의 생일에 하고는 그 뒤에는 또 서로 바빠서 밤에 같이 잘 시간도 없었다.
저녁을 먹기 전에 해준이 그랬다.
‘랑일이가 동생에 대해서 말 안 해?’
‘동생? 요즘에는 아예 얘기 안 하던데.’
유치원에서 랑일이랑 가장 친한 친구에게 동생이 태어난 모양이라고 해준은 말했다. 그래서 친구가 시도 때도 없이 동생 자랑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전에는 랑일이와 둘이서만 놀았는데 이제는 그 가운데 동생이 미묘하게 끼어 있는 느낌이 들었나 보다.
‘랑일이가 자기 동생하고 설이는 다르냐고 물어봤어.’
‘동생은 설이 있으니까 괜찮다고 했는데?’
‘뭔가 다른 걸 느꼈나 봐. 그보다 친구가 자꾸 동생 자랑을 하니까 자기도 똑같은 자랑을 하고 싶은 모양이야.’
“희원 씨 보고 싶네.”
희원을 떠올리니 성기가 한 번 더 꿈틀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기준은 트레이닝 바지 속으로 왼손을 집어넣었다. 희원을 생각하는 동안 기준의 성기는 점점 몸집을 불려 나갔다. 커다란 손에 성기가 꽉 차게 잡혔다.
“으윽!”
기준이 인상을 썼다. 당장 희원에게 전화를 걸어서 야한 말이라도 지껄이고 싶었다. 그랬다가는 크리스마스고 연말이고 물 건너가겠지. 기준은 이를 윽물었다.
바지를 뚫고 나올 것 같은 성기를 옷 밖으로 끄집어냈다. 희원이 눈앞에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 구멍에 들이박고 싶었다. 희원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성기 끝은 번들거렸다.
“읏!”
기준이 자신의 성기를 손에 꽉 쥐었다. 희원의 구멍에 들어갈 때 느낌이 났다. 언제 해도 처음 하는 것처럼 좁은 구멍은 집어넣을 때가 가장 힘들면서도 쾌감이 있었다. 안으로 쑥 밀려 들어갈 때 마치 제집을 찾은 것 같은 안락감이 들었다.
기준은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를 위아래로 쓸기 시작했다. 방 안은 어느새 기준의 페로몬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으읏, 읏!”
희원의 하얀 몸이 생각났다. 기준이 물고 빠는 대로 분홍빛 자국을 남기는 하얀 몸. 다리가 길고 특히 종아리가 긴 희원의 몸은 보는 것만으로도 자지를 발딱발딱 세우게 했다. 하얀 몸에 번들번들 땀방울이 맺혀 흐를 때마다 기준은 그게 마치 생명수라도 되는 듯 핥아 댔다.
“하아, 희원 씨.”
기준은 낮은 목소리로 희원의 이름을 불렀다. 당장이라도 희원을 붙들고 뒹굴고 싶었다. 기준은 눈을 감고 목을 뒤로 젖히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아무리 좆을 쥐고 위아래로 흔들고 조여도 희원의 구멍 속만큼 황홀하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일요일이 되자마자 희원을 찾아가 무릎이라도 꿇고 구걸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방 안에 쩌걱쩌걱 습한 소리가 울렸다. 당장이라도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이 꼴을 다 내보일 것 같았다. 하지만 기준은 지금 문도 잠그러 가지 못할 판국이었다.
희원이 너무 보고 싶었다. 랑일이가 드디어 동생이라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데 도대체 이 연인은 저를 홀로 내팽개치고 어디 가 있는 걸까?
희원의 생각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더불어 좆도 터질 것 같았다.
기준은 더 빠르게 성기를 움직였다. 아랫배가 더욱 묵직해져 오며 엉덩이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페로몬도 더 진해졌다.
“희원, 희원 씨. 하아, 하아.”
커다란 손에 진득한 우윳빛 액체가 잔뜩 뿌려졌다. 그걸 보는 순간 기준은 눈을 감았다.
“씨발.”
“나이 처먹고 잘한다, 새끼야. 문이나 잠그고 딸을 치든가.”
문가에서 들리는 소리에 기준이 벌떡 상체를 세웠다. 형인 이준이 문가에 기대서서 비웃고 있었다.
“왜 들어와!”
“2층에 네 알파 페로몬 떠다니는 거 지금 딸 친다고 광고하는 거지! 아무리 애들 1층에서 자고 있다고 해도 그렇지. 지금 희원 씨랑 못 만나서 욕구불만이냐?”
“문 닫아.”
기준이 신경질을 냈다. 형이 본가에 와서 희원이 기준에게 화난 걸 미주알고주알 다 말하는 바람에 온 집안 식구들이 다 알게 되어서 쪽팔려 죽겠는데 자위까지 들키니 짜증이 났다.
“문이나 잠그고 해라, 새끼야.”
이준은 직접 문을 잠가 주고는 나갔다. 기준은 신경질이 나서 베개를 냅다 문으로 집어 던졌다. 서른셋 먹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자괴감이 들었다.
* * *
잠에서 깬 기준이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래저래 피곤했던 모양이다. 샤워를 하고 잠을 깬 기준이 방에서 나왔다. 아직 2층은 죄다 자고 있는지 조용했다. 1층도 마찬가지였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아마 일하는 이모님과 어머니만 깨서 주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 것 같았다.
기준이 2층에서 터덜터덜 내려갔다.
“기준이니?”
“네.”
박 여사의 물음에 기준이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1층으로 내려왔다.
“어!”
기준은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싶어 눈을 깜빡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시간에?
“거봐라, 희원아. 쟤가 저런다니까. 기준아, 뭐 하니. 네 짝 왔으면 오랜만에 좀 안아 주든가 그래야지. 저렇게 애가 맹해서 장가나 가겠니?”
“희원 씨?”
희원이 이전과 다름없이 방싯방싯 예쁘게 웃고 있었다.
“희원 씨.”
기준이 그대로 희원의 어깨에 이마를 갖다 박았다. 희원이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자신보다 키 큰 기준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엄마, 2층에 아무도 올려 보내지 마요.”
기준은 한마디만 하고는 희원의 손목을 잡고 위로 잡아끌었다. 얼마나 급했으면 평소에는 어머니라고 정중히 말하더니 절로 ‘엄마’라는 말이 나왔다.
“기준 씨.”
“조금만요. 나 진짜 딱 죽을 것 같으니까 좀 살려 줘요.”
희원은 난처해서 박 여사를 돌아봤다. 박 여사가 피식 웃으며 올라가라고 손짓하고는 커피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기준은 방문부터 잠갔다. 그러고는 그대로 희원을 꽉 끌어안았다.
“기준 씨.”
“하아. 진짜 너무 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품에 안고 싶어서 혼났어요.”
기준의 페로몬이 넘실거렸다. 복잡한 그의 심경처럼 파도치자 희원의 페로몬도 조금 영향을 받는지 울렁거렸다.
“기준 씨, 페로몬.”
“으응, 미안해요. 갈무리할게요.”
기준이 희원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머리칼이 간질거려 희원이 작게 웃으며 기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희원 씨, 나 많이 반성했어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약속 안 어길게요.”
“응. 착해.”
“나 용서해 주는 거예요?”
여전히 희원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기준이 물었다.
“네.”
“나 그럼 이제 마음대로 할래요.”
“기준 씨!”
기준이 그대로 희원의 목을 살짝 깨물고 핥았다. 그러고는 희원을 번쩍 들어 안아 침대에 눕혔다. 희원이 어리둥절해 기준을 쳐다보자 기준이 희원의 위에 엎드렸다.
“기준 씨 무거워요.”
희원이 기준의 어깨를 밀자 기준이 얌전히 옆으로 비켜 주었다. 그러면서 둘은 서로 마주 보게 되었다. 기준의 날카롭던 눈매가 축 처져 있었다. 희원이 손가락으로 기준의 잘 빠진 눈꼬리를 매만졌다.
“그렇게 힘들었어요?”
“응.”
기준이 어리광 부리듯 희원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고는 희원을 바싹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기준의 몸에서 그의 페로몬 향이 짙게 났다.
“뭐 했는데 페로몬이 이렇게 짙어요?”
“여기 내 방이니까 그렇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어젯밤 여기 이 침대 위에서 희원의 이름을 부르며 자위를 하는 바람에 더 향이 진한 것은 숨겨야 할 진실이었다.
“저번보다 더 진한 것 같은데요.”
“몰라요.”
왠지 기준의 목소리가 토라진 것 같아서 희원이 고개를 살짝 위로 올려 기준을 쳐다보자 기준이 희원의 눈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가렸다.
“왜요? 기준 씨 얼굴 좀 보려고 하는데.”
“이따가요.”
“응? 왜요?”
기준이 희원의 눈을 가린 손을 치우고는 다시 희원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요.”
“응, 어제요?”
“희원 씨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서요?”
“여기서 좆 꺼내고 자위했어요.”
“네?”
희원이 기준의 가슴을 밀어내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봤다.
“으응, 떨어지기 싫어요.”
기준이 희원의 몸에 파고들며 말했다. 희원이 어이가 없어 웃었다.
“일주일 새에 만났더니 뭐라는 거예요.”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러겠어요. 사실 지금도 섰어요.”
기준이 희원의 손을 잡아끌어 자기 앞섶을 만지게 했다. 언제 이렇게 됐는지 기준이 성기가 딱딱하게 발기해 있었다.
“기준 씨.”
“희원 씨가 상대 안 해 줘서 그래요.”
희원이 웃고 말았다. 그러고는 기준의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읏!”
기준이 신음을 작게 흘렸다. 희원의 하얀 손이 자신의 단단한 성기를 감싸 쥐고 만져 주는데 아무리 같은 층에 형이 있다고 해도 신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일주일 새에 어리광이 늘었어요.”
“응, 너무 힘들었어요. 아읏! 나 넣으면 안 돼요? 응? 넣고 싶어요.”
기준이 손으로는 만족을 못 하겠는지 조르기 시작했다. 희원의 귓불을 핥고 자근자근 씹으면서 허리를 흔들었다. 팽팽하게 선 성기가 아파 보일 정도였다.
“희원 씨, 응? 다음에는 잘못 안 할 거예요. 희원 씨한테 절대복종할 거예요.”
“절대복종이 뭐예요. 연인 사이에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아무튼 희원 씨 말 잘 들을게요. 안 보겠다, 연락 안 하겠다 이런 말은 하지 말아요. 정말 말라 가는 화초처럼 그렇게 살았어요. 희원 씨, 나 좀 예뻐해 줘요. 응?”
희원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기준은 대형견이 치대듯 달라붙어서 졸라 댔다. 희원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손이 어찌나 빠른지 자신의 옷부터 훌렁훌렁 벗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희원의 위에 올라타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뭘 이렇게 많이 껴입고 왔어요.”
티셔츠를 벗기고 안에 입은 셔츠 단추를 풀며 기준이 불퉁하게 말했다. 희원이 눈썹을 찡그렸다. 겨울이니 따듯하게 입으라고 그동안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더니만.
“팔 좀 빼 봐요. 옳지, 잘한다.”
하얀 상체를 보자마자 기준이 희원의 유두를 혀로 핥았다.
“흣!”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몰라요.”
기준은 게걸스럽게 빨기 시작했다. 어미 젖 찾는 아이처럼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혀로 핥고 입에 담아 쭉쭉 빨았다. 희원이 발로 기준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욕구불만인 알파가 그리 쉽게 떨어질 리가 없었다.
기준은 페로몬을 풀며 이제는 희원의 바지에 손을 댔다. 벨트 버클을 풀고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벗겼다. 기준의 페로몬에 반응한 희원이 성기를 반쯤 세우고 있었다.
“아읏! 기준 씨.”
기준이 몸을 내려서 희원의 성기를 한입에 넣었다. 춥춥 소리가 날 정도로 기준이 희원의 성기를 빨기 시작했다. 반 정도 세웠던 성기가 꼿꼿하게 서기 시작했다. 기준은 둥그런 고환을 손으로 주무르며 고개를 계속해서 움직였다.
“아아, 기준, 기준 씨.”
금방이라도 쌀 것 같아서 희원이 기준의 어깨를 발로 밀었지만 기준은 페로몬을 더 풀며 희원의 성기를 압박했다.
“기준 씨, 으응! 응!”
희원의 페로몬이 줄줄 새고 있었다. 형의 방은 저 안쪽에 있고 희원의 향은 희미하지만 기준은 갑자기 독점욕이 확 샘솟았다. 기준은 얼른 끝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자신도 한계이기도 했지만.
“기준 씨! 거긴, 아아! 안 돼, 하지 마요.”
기준이 입 안에서 성기를 뱉고는 희원을 엎드리게 했다. 그러고는 엉덩이를 양쪽으로 벌리더니 그 사이에 혀를 갖다 대고는 구멍을 핥고 찌르기 시작했다. 희원이 기함을 하고는 앞으로 기었지만 기준이 희원의 골반을 꽉 잡고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군가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이렇게 춥춥 소리가 날 정도로 빨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은 히트사이클도 아니기 때문에 극히 제정신이란 말이다. 희원은 온몸이 발갛게 익어 갈 것 같았다.
“그만, 하지 마요.”
기준이 페로몬을 더 푸는 바람에 희원의 페로몬도 반응하고 있었다. 희원은 페로몬 문제가 여전히 있지만 기준과는 꽤 많이 페로몬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기준의 페로몬에는 조금씩 반응해서 기준만이 알 수 있는 페로몬을 뿜었다.
그걸 기준도 알고 있었고 희원이 자신에게 반응하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기준은 붉은 꽃봉오리를 혀로 찌르고 넓게 핥았다.
“흐읏, 기준 씨. 그만. 그만요.”
“이제 넣을게요.”
기준이 입을 떼고는 그대로 귀두를 구멍에 맞췄다. 어서 들어오라는 듯 구멍이 움찔거리는 게 마음에 들어서 기준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온통 붉어진 희원의 몸도 마음에 쏙 들었다.
“힘 빼요.”
기준이 희원의 엉덩이를 톡톡 두들기고는 그대로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아읏!”
“쉿! 저쪽 끝에 형 있어요.”
“기준 씨, 아아, 아파.”
“우리 떡 치는 소리 다 들려주고 싶어요? 읏!”
희원이 자신도 모르게 구멍을 조이자 기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하는 거라 그런지 아무리 게걸스레 빨고 핥아 풀어 주었다고 해도 아직 부족한 듯했다.
기준은 희원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힘을 빼라고 속삭였다. 귓구멍에 혀를 집어넣고 귓불을 잘근잘근 빨며 이러면 못 움직인다고, 좆이 터질 것 같다고, 지금 남편 자지를 터뜨리려고 이러냐며 온갖 음담패설을 흘려 댔다.
“흐읏!”
“다, 들어갔어요. 아, 씨발 좋아.”
기준이 자신의 성기를 꽉 물어 오는 내벽을 느끼며 허리를 떨었다. 당장이라도 미친 듯이 처박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좁은 구멍이 찢어질 것 같았다. 기준은 조금 더 페로몬을 풀었다. 그러고는 희원의 등줄기에 꼼꼼하게 입을 맞춘 뒤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아, 아! 아!”
“너무 좋아.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아요.”
기준이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이를 윽물었다. 하얀 양말을 신은 발이 발가락을 꼭 오므렸다. 희원이 신음을 참으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기준은 집이 아닌 본가라서 마음껏 박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뒤에서 보니까 내가 읏, 잡아먹고 있는 게 다 보여요. 미칠 것 같아.”
“으읏, 기준 씨, 으, 싸고 싶어요.”
“응, 나도. 나도 싸고 싶어요. 아아, 같이 싸요.”
기준이 몸을 더 붙이고는 희원의 성기를 잡았다. 바짝 성이 나서 프리컴을 뚝뚝 떨어뜨리는 성기를 위아래로 훑으며 기준이 허리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퍽철퍽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희원이 베개 사이로 흘리는 신음 소리, 기준이 이를 윽물며 참는 신음이 섞여서 야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아아, 아읏!”
“읏!”
둘은 동시에 신음하며 희원은 기준의 손안에, 기준은 희원의 등허리에 사정했다. 기준이 희원의 고개를 돌려서 입을 맞췄다. 촉촉 소리가 들리며 둘은 그렇게 한동안 입을 맞췄다.
둘은 다시 단잠에 빠져들었고 기준이 눈을 떴을 때는 점심 무렵이었다.
기준은 옆에서 곤히 잠든 희원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한 주 동안 이 얼굴을 보고 싶어서 혼이 났다. 아침저녁으로 얼굴은 봤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 자세히 보고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하얀 얼굴에는 그려 만든 듯한 이목구비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기준은 희원의 반듯하고 단정한 이목구비를 좋아했다. 오뚝한 코와 쌍꺼풀 없는 커다란 눈, 그리고 순해 보이는 다정한 눈동자. 이목구비 하나하나는 또렷한데 모아 두면 예쁘고 순한 얼굴이 되었다.
기준은 붉은 입술이 어여뻐서 자는 희원에게 입을 맞췄다. 말랑하고 촉촉한 입술은 언제 봐도 예뻤다.
“으응.”
도장 찍듯 몇 번 입을 맞추니 희원이 부스스 눈을 떴다.
“희원 씨.”
“으응.”
“점심 먹으러 가요.”
희원이 주먹으로 눈을 비비려고 하자 기준이 얼른 손을 잡아 내리고는 눈두덩에도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희원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너무 좋아.”
“으응.”
잠이 덜 깬 희원이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하고는 기준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이제 점심 먹어야 해요. 아침도 안 먹었을 거 아니에요.”
“아침 먹었어요.”
“아침도 먹고 온 거예요?”
꽤 일찍 왔던데 그럼 집에서 몇 시에 일어나서 나온 거란 말인가? 쉬는 날인데도 게으름도 피우지 않는 희원이 그저 대단해 보였다.
“기준 씨는 아침도 안 먹었죠? 배고프겠다.”
“근데 어떻게 왔어요? 나한테는 연락도 한 통 안 해 주고.”
희원이 기준의 입술에 촉 입을 맞추고는 속삭였다.
“기준 씨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어머니랑만 연락했어요.”
“깜짝 놀라게 해 주는 게 목적이었으면 성공했네요.”
기준이 웃으며 희원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둘이 방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밑에서 가족들이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기준이 희원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오다 이준과 마주쳤다.
“희원 씨 왔어요?”
“안녕하세요. 식사 벌써 다 하신 거예요?”
“네, 이따 저녁에 같이 먹어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에는 다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다. 루세도 가게는 직원들에게 맡기고 일찍 온다고 했다. 희원이 먼저 계단을 내려가고 그 뒤를 기준이 내려가는데 이준이 그 앞을 막았다.
“너 내가 2층에 있는 거 뻔히 알면서 페로몬 그렇게 풀래? 어제는 딸을 치더니 오늘은 아예 대놓고 광고를 해라.”
둘 다 극우성 알파인지라 남의 페로몬에 예민한 건 사실이었다. 형제라고 해도 말이다.
“부러우면 형도 최 팀장 빨리 데려오기나 해.”
이준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러고는 기준의 어깨를 어깨로 치고는 위로 올라갔다. 기준이 그런 제 형을 비웃었다. 일 때문에 회사에서 만났을 때 보니 엄청 공을 들이는 것 같은데 생각보다 진도를 못 빼는 것 같았다. 기준은 제 형의 뒤에 대고 연애 고자라고 중얼거렸다.
기준이 형을 지나쳐 내려왔을 때는 희원을 발견한 랑일이가 희원의 품에 안겨서 얼굴을 작은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마미, 그럼 오늘 자고 가요?”
“응.”
“그럼 나 이따 마미랑 잘래요.”
그 소리에 기준이 다가와 희원의 품에 안긴 랑일이를 뒤에서 빼앗듯 안았다. 갑자기 희원의 품에서 떨어지게 된 랑일이가 휙 뒤돌아봤다.
“이랑일, 일어났으면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으응, 비켜. 마미한테 갈 거야.”
“아빠한테 인사 먼저 해야지.”
“아빠 안녕. 됐지? 이제 마미한테 갈 거야.”
하지만 기준은 그 말을 들어주지 않고 랑일이를 안고 그대로 주방으로 향했다. 랑일이가 내려 달라고 마미한테 가겠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기준은 심술궂게도 그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마미와 자겠다고 한 제 아들에게 부리는 심술이었다.
결국 희원이 티격태격하는 부자를 떼어 놓고서야 둘의 싸움은 종식되었다.
* * *
지난주에 본의 아니게 랑일이도 희원과 유치원에서밖에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바람에 랑일이는 희원이 기준네 본가에서 있는 동안 껌딱지처럼 달라붙었다. 희원은 랑일이와 설이와 함께 본가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설치하는 중이었다.
“우리 랑일이랑 설이 뭐 해?”
아무리 이씨 집안 식구들이 아이들 때문에 이런 특별한 날들을 챙기게 되었다지만 한 번도 크리스마스트리를 설치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저녁을 함께 먹는 정도였다.
그런데 거실에 벌어진 풍경에 저녁에 먹을 음식 재료를 직접 사러 간 해준이 집에 들어서면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빠! 트리 만들어.”
북적거리는 집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설이는 네 살인데 말을 제법 잘했다. 희원이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늘었다.
“작은아빠, 같이 만들어요.”
랑일이가 제 얼굴보다 커다란 별을 들고는 웃었다. 희원이 설이에게도 작은 별을 쥐여 주다 해준을 보자 웃었다. 해준은 어째 랑일이와 희원의 미소가 닮아 간다고 생각했다.
“직접 장 보고 온 거예요? 제가 도울까요?”
“아니에요. 형수님은 앉아 계세요. 루세도 조금 이따가 온다고 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오면 루세랑 같이 트리 만드세요. 근데 형수님, 트리 설마 형수님이 사 온 거예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준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만 해도 없었다. 박 여사가 희원이 와서 기준의 방에 있다고는 했지만 지금까지 종일 해준과 희원은 시간이 엇갈려서 지금 처음 본 거였다.
“언제 설치하셨어요?”
“집에서 가지고 왔는데 아침에 못 꺼내고 지금 꺼냈어요.”
“형수님 진짜 대단해요. 어떻게 트리를 가져올 생각을 다 하셨어요?”
“같이 만들면 좋잖아요. 원래는 크리스마스 날 기준 씨한테 가족들하고 다 같이 보내자고 했는데, 그때는 각자 가족들끼리 보내자고 딱 잘라 말해서 바로 전 주의 주말로 저녁 먹자고 한 거거든요.”
해준이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해준네로서는 단출하게 세 식구 모이는 것보다는 북적북적 본가에서 보내는 게 더 좋았다. 루세는 아무래도 직업이 직업인지라 저녁에는 가게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어서 설이가 할머니, 할아버지랑 북적거리는 게 더 마음이 편하긴 했다.
그래서 은근히 바라고 있었는데 기준이 중간에서 딱 자른 거였다. 그것도 도리어 해준네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해준은 형한테 언젠가 복수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걸핏하면 루세와 박 여사가 합심하여 제 형수를 몰래 빼돌려 형이 복장 터져 죽으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말이다.
해준은 새하얀 꼬마 나무 두 개를 보며 웃음 지었다. 사람 한 명이 더 가족이 되는 것뿐인데 집안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제 형은 일밖에 몰랐는데 그런 사람이 이제야 사람다워진다고 해준은 생각했다. 그래서 해준은 전적으로 희원의 편이었다. 그건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 샌님 같고 붙임성 결여인 큰형조차도 말이다.
“작은아빠, 나 이거 꼭대기에 걸래요.”
랑일이가 커다란 별을 들고 꼭대기를 가리켰다. 키가 작은 나무였지만 랑일이에게는 버거웠다. 해준이 랑일이를 번쩍 들어 별을 꼭대기에 걸도록 해 주었다.
“아빠! 나, 나도 할래.”
이번에는 설이가 다가와 팔을 쭉 뻗고 까치발을 들었다. 해준이 설이도 번쩍 들어 올려 주었다. 설이가 신이 나는지 꺄르르 웃었다.
해준이 두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주방으로 가려고 하다가 문득 뭔가가 생각난 듯 발걸음을 멈췄다.
“아, 형수님.”
“네?”
“혹시 결혼 선물 갖고 싶은 것 있으세요?”
“결혼 선물이요?”
아직 5개월이나 남았는데 벌써 물어보니 희원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게다가 받을 만한 게 없었다. 이미 기준은 차고 넘칠 정도로 돈이 많으니 말이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갖고는 싶은데 내 돈 주고 사기에는 조금 아까운 가구라든가, 전자 제품 이런 거요.”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깜박였다. 보통 형제가 결혼 선물을 줄 때 그런 걸 해 주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 희원은 제 누나와 형이 결혼할 때는 학생이어서 큰 걸 해 줄 수가 없었다.
누나가 결혼할 때는 공기청정기를, 형이 결혼할 때는 식기세척기를 해 주었다. 그것도 정말 희원의 입장에서는 모으고 모아서 큰맘 먹고 사 준 결혼 선물이었다. 그런데 해준이 막상 뭔가 필요한 게 있느냐고 물으니 희원은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때였다. 기준이 희원을 뒤에서 끌어안고 말했다.
“있는데 해 줄 거야?”
순간 해준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나 지금 형수한테 물어본 건데? 그런 표정이었다.
희원이 뒤돌아 기준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다 갖고 있는 기준도 뭔가 갖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기준 씨, 뭐 갖고 싶은 거 있어요? 집에 웬만한 건 다 있는 것 같던데요.”
“응, 나 갖고 싶은 것 있어요. 이해준 해 줄 거야?”
해준이 미간을 좁혔다. 수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었다. 하지만 희원에게 운을 떼 놓았기에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말해 봐.”
“냉장고.”
“뭐?”
해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삼 형제 다 요리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그중 기준이 가장 잘했고 관심도 많았다. 그건 랑일이가 있어서 더욱 그랬다. 분명히 냉장고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사 줄 거야?”
“뭐야, 산 지 얼마 안 되었잖아.”
“이해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야?”
기준이 대놓고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해준이 난처한 기색을 표했고 중간에 끼인 희원만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봐 놓은 거 있는데 지금 메시지 보낼게.”
기준이 핸드폰을 꺼내서 해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희원의 어깨를 감싸고는 속삭였다.
“희원 씨, 김치는 원래 냉장고가 최고여야 해요. 그리고 요리도 마찬가지예요.”
웃으며 말하는데 희원은 어리둥절했다. 그때 뒤에서 해준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이기준! 진짜 이거라고?”
“저게 어디다 대고 야래.”
“정말 이거라고? 진짜?”
“어.”
희원이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데 해준이 쐐기 박듯 말했다.
“뒤에 0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은데?”
“어, 그거 맞아.”
* * *
토요일 저녁은 그야말로 파티였다. 날씨가 추워서 밖에서 고기를 굽지는 못했지만 집 안에서 두툼한 스테이크를 하나씩 썰고, 술을 마셨다. 설이와 랑일이는 어른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잔뜩 받고는 신이 나서 온 집 안을 뛰며 돌아다녔다.
희원은 식구 머릿수대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해 와 식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기준이 이런 걸 왜 했냐고 해도 희원은 비싼 게 아니라며 웃으며 말했다. 그 대가로 기준은 제 형에게도 결혼 선물을 거하게 뜯어냈고, 어머니에게는 비싼 패물을 얻어 냈다.
희원은 이러려고 준비한 선물이 아니라고 했지만 기준은 식구들 상대로 사업가 기질을 드러내어 제 아버지조차도 이마를 짚게 만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을 때 희원은 기준과 결혼하면 랑일이와 함께 셋이서 살게 될 집으로 가서 구경을 하자고 했다. 뜬금없이 말이다. 하지만 기준은 희원이 하고 싶다는 대로 해 주는 사람이었기에 군소리 없이 그러자고 했다.
“마미! 우리 새로 이사할 집에 가는 거예요?”
“응.”
“거기 가서 자요?”
“아니, 아직은 거기서 못 자.”
가구가 다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집 정리도 아직 안 되었고 말이다.
“그럼 왜 가요?”
“마미가 보여 줄 게 있어서.”
랑일이는 희원의 손을 잡고는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를 굴렸다. 뒤에서 둘의 모습을 보는 기준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고 행복했다.
“기준 씨.”
“네.”
“정말 별거 아니긴 한데,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면 안 돼요.”
“실망할 게 뭐가 있어요. 저는 희원 씨가 하는 것과 좋아하는 거면 다 좋아요.”
전적으로 자신을 믿어 주고 밀어주는 다정한 눈빛에 희원은 고마움을 느꼈다.
“정말 별거 아니에요.”
집 안에 들어서면서 기준은 뭔가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현관에서 거실로 들어오는 복도에서 기준이 우뚝 멈추어 섰다.
“희원 씨!”
기준이 놀란 목소리로 희원을 불렀다. 희원이 배시시 웃었다.
“이거 설마 희원 씨가 직접 그린 거예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개의 작은 액자가 복도를 따라 벽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사진이 아닌 그림이었다. 기준이 랑일이를 안고 있는 그림, 기준이 랑일이와 손을 꼭 잡고 있는 그림, 기준이 랑일이를 목마 태운 그림 등 온통 두 사람의 그림이었다.
“희원 씨가 정말 그린 거예요?”
“네, 두 사람의 그림을 그려 주고 싶었어요. 근데 그림 그린 지 너무 오래되어서 크게는 못 그리겠고, 그래서 작은 사이즈로 그려서 걸어 두었어요.”
언뜻 희원이 학생 때 그림을 잘 그려서 미대에 진학할 줄 알았다고 한 희원의 가족들 이야기가 생각났다. 희원은 원체 손재주가 좋아서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했다. 그래서 가족들은 희원이 당연히 미술을 하고 싶어 할 줄 알았다고 했다.
“랑일이 방에도 있어요.”
랑일이가 자신의 방에 우다다다 뛰어 들어갔다.
“와! 아빠 이것 봐. 여기 나 있어!”
랑일이 방에는 랑일이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유치원에서 생활하는 모습들인 것 같았다. 기준이 보지 못했던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유치원에서 랑일이 사진만 찍을 수는 없으니까요.”
희원이 쑥스러운 듯 말했다.
“마미, 이거 진짜 나죠?”
“응, 랑일이 맞아.”
“우아!”
랑일이는 연신 감탄하며 기뻐했다.
기준은 마음 한쪽이 뭉클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랑일이 사진을 많이 남겨 두지 못했다. 지나간 시간과 추억들은 기억에는 남아 있지만 그걸 꺼내 볼 기록은 없어서 아쉬운 적이 있었는데 희원은 그것들을 이렇게 그림으로 남겨 준 거였다.
“희원 씨, 고마워요.”
“기뻐해 줘서 다행이에요. 그림 너무 오랜만에 그리는 거라서 사실 그리면서도 자신이 없긴 했거든요.”
희원은 지난 한 달 동안 꾸준히 저녁 시간에 몰래 화실에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집에서도 시간 날 때마다 그림만 그렸다. 두 사람을 기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 말이다.
“앞으로는 두 사람의 행복한 추억들이 많이 남겨졌으면 좋겠어요. 그게 그림이든 글이든 사진이든요.”
기준이 희원을 끌어다가 품에 안았다. 랑일이가 저도 안으라고 폴짝폴짝 뛰었다. 희원이 웃으며 랑일이를 안아서 제 품에 안았고 기준이 그 둘을 자기 품에 안았다.
“나랑 랑일이뿐만 아니라 희원 씨도 이제 함께예요. 다음에는 희원 씨 사진도 많이 찍어서 벽에 걸어 둬요. 여긴 이젠 희원 씨도 같이 사는 우리 집이잖아요.”
‘우리’라는 말에 희원의 가슴도 콩닥콩닥 뛰었다. 결혼이라는 게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날을 잡고서 이런저런 준비를 하면서도 정말 하는 걸까 싶었다. 왜냐하면 희원은 결혼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누가 페로몬에 문제가 있는 오메가랑 살고 싶어 할까? 그런 생각 때문에 아예 결혼은 희원의 머릿속에 없는 단어였다.
그런데 기준을 만나고 이제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였다. 기준은 희원이 오메가가 아니더라도 사랑했을 거라고 말했다. 베타건 알파건 그저 희원이 좋다고 말했다. 그 말에 희원은 자신을 옭아매던 무엇인가가 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희원은 자신에게 행복을 선물한 두 사람에게 자꾸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다. 두 사람이 기뻐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랬기에 한 달 동안 저녁 내내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게 힘들지 않았다.
“희원 씨 그런 김에 사진 찍을까요?”
“무슨 사진이요?”
“우리 나가서 가족사진 찍어요. 제대로 찍어서 걸어 둬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 찍기 좋아하는 랑일이는 벌써부터 신이 났다. 그렇게 새로운 공간에 세 사람의 모습이 자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