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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쉽지 않은 계획 (15/31)

15. 쉽지 않은 계획

제 연인이 같이 씻자는데 그걸 마다할 기준이 아니었다. 기준은 그 새끼는 나중에 조지고 지금은 연인의 부탁을 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처사였다.

기준은 망설임 없이 희원의 정장 단추를 풀어 주었다. 그 비싼 정장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벨트 버클을 풀었을 때 희원이 분홍빛 뺨을 하고는 기준의 옷에 손을 뻗었다.

“왜요? 혼자 벗기 창피해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보여 줬으면서 부끄러워하긴. 그래서 난 희원 씨가 참 좋아요. 내외하는 새색시 같아.”

기준이 희원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고 빗장뼈에도 입을 맞췄다. 몸이 뜨끈했다. 그리고 달콤한 과일 향이 조금 더 진해진 것 같았다.

기준은 자신의 옷도 벗어 던졌다. 손길이 급해져 커프스를 빼는데 손이 엇나갔다. 희원이 기준의 가슴에 얼굴을 갖다 대고 비비고는 자신이 커프스를 빼 주었다. 그러고는 셔츠 단추도 풀었다.

알몸이 된 희원을 그대로 안아 들었을 때 희원이 부끄러움에 몸을 숨기듯 기준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희원 씨, 이러면 더 불붙이는 거란 거 모르죠?”

“네?”

기준을 쳐다보는 눈망울에 어느새 열기가 가득했다.

“이렇게 딱 붙으면 희원 씨 거가 내 몸에 마구 비벼지는데.”

희원이 깜짝 놀라서 몸을 떨어뜨리려고 했다.

“어어! 그러면 떨어져요. 꽉 붙잡아요.”

“그치만.”

“뭐가 그치만이에요, 어서요!”

희원은 이제 귓불까지 붉어져 있었다. 기준이 개구지게 웃으며 붉어진 귓불을 혀로 핥았다. 희원이 움찔 떠는 게 느껴져 기준은 더욱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언제부터인가 기준은 희원이 부끄러워할 때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누군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정말 그럴 때만이냐고 되묻겠지만 그러면 그렇게 대답해 주고 싶다. 사랑스러운 순간이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때라고 말이다.

욕조에 들어앉은 둘은 따듯한 물속에서 서로 맞춤처럼 딱 붙어 앉았다. 기준이 뒤에 앉아 연신 희원의 목덜미를 핥고 빠는 중이었다.

“흐읏!”

“희원 씨.”

“네에.”

빨아서 붉어진 목덜미를 혀로 할짝이다가 기준이 물었다.

“나한테 혼날 거 있죠.”

“네?”

희원이 고개를 돌려서 기준을 보려고 했지만 기준은 이번엔 희원의 귓불을 이로 살짝 씹었다.

“읏!”

“말해 봐요. 지금 얘기하면 혼 안 낼게요.”

“그게…….”

기준이 페로몬을 풀면서 희원의 아랫배를 살살 만졌다. 희원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기준은 그 어깨에 턱을 올려 두고는 귓불을 자근자근 씹었다. 희원이 못 참겠다는 듯 어깨를 뒤틀었다.

기준은 불쑥 심술이 치고 올라와서 아랫배를 만지던 손을 내려 이번에는 희원의 성기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기준 씨…….”

“없어요? 아니면 몰라요?”

희원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자 기준은 뒤에서도 다 안다는 듯 오른손을 가져가 희원의 아랫입술을 꾸욱 눌렀다.

“예쁜 입술 상처 내지 마요. 난 어떤 식으로든 희원 씨가 상처 입는 거 싫어요. 그게 희원 씨가 내는 상처라도요. 혹시 그런 성향이에요?”

“네?”

화들짝 놀란 희원이 이번에는 고개를 빠르게 꺾어서 기준을 바라봤다.

“그런 성향이라도 그건 못 들어주는데. 희원 씨가 아파하는 건 어떤 식으로든 못 해 줘요.”

“그런 거 아니에요!”

희원은 행여 기준이 오해할까 봐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 왜 힛싸인 거 얘기 안 했어요?”

기준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내려앉아 있어 희원은 바싹 긴장했다.

* * *

기준의 아래에 깔린 몸은 기준이 움직이는 대로 헐떡였다. 축 처진 몸은 힘을 잃어 기준의 팔뚝을 잡은 손아귀에서는 전혀 힘을 느낄 수 없었다.

“기준, 흣!”

“지금 혼나는, 읏, 중이에요. 안 들어줄 거예요.”

인상 쓴 기준의 미간을 향해 희원이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찌푸려진 미간을 펴지도 못한 채 손은 툭 떨어졌다. 극우성 알파의 강한 페로몬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아서 희원이 몸을 뒤틀었다.

“희원 씨.”

“아아!”

“내가 몸이 안 좋으면, 읏, 말하라고, 했잖아요.”

좁은 구멍을 벌리고 내벽을 긁는 거대한 성기에 희원이 피하려고 허리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기준은 그것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골반을 꽉 틀어쥐고는 아래로 쑥 잡아 내렸다.

희원의 몸이 벌벌 떨렸다. 희원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뜨거운 숨을 내쉬며 신음을 지르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아래에서 힛싸 왔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으읏! 아파, 아파요!”

“좀 아파야지요. 말 안 들었으니까 혼 좀 나야죠.”

“기준! 기준 씨, 읏!”

성이 날 대로 성이 난 성기가 내부를 여기저기 들쑤셨다. 자극이 너무 심해서 희원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힛싸 와서 이렇게 예쁜 걸 다른 새끼들이 보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올 줄 몰랐어요, 아아! 진짜예요!”

“내가 컨디션 안 좋으면, 읏, 얘기하라고 했죠!”

기준은 인정사정없이 박아 댔다. 희원은 굵은 몽둥이로 안을 맞는 느낌이 들었다. 기준의 페로몬에 온몸이 따끔거렸고 고통을 수반한 쾌락은 너무 커서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이렇게 달콤한 향을 아무한테나 흘리려고 그랬어요?”

“아냐, 아니에요! 내 향 안 나는 거 알잖아요.”

“희원 씨도 힛싸 오면 당연히 향 나요. 이 달콤한 향이 질질 흐르는 거 몰라요?”

희원은 안을 조였다. 이렇게라도 해야 기준이 화를 풀 것 같았다.

기준의 페로몬 때문에 영향을 받아서 구멍에서는 애액이 질질 흘러나와 시트를 동그랗게 적셨다. 구멍은 있는 대로 풀려서 마치 헤픈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희원은 구멍을 조여서라도 기준에게 자신이 기준밖에 없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싶었다.

“지금 조르는 거예요? 더 큰 걸 달라고?”

하지만 기준은 자신의 성기를 꽉꽉 물어 대는 이 야한 구멍이 더 들쑤셔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기준 역시 머리가 하얘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희원 씨 이렇게 예쁘고 달콤하고 야한 거 나만 봤으면 좋겠어요.”

“으응, 응, 아! 아아!”

희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기준이 찌르면 찌르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신음했다.

“이 예쁜 얼굴도, 이 예쁜 쇄골도, 그리고 이 예쁜 젖꼭지도.”

“아앗!”

기준이 바짝 선 유두를 입에 넣고 쪽 빨았다. 희원이 구멍을 확 조이며 질질 사정하기 시작했다. 꼿꼿하게 선 성기에서 하얀 정액이 터져 기준의 몸 여기저기를 더럽혔다.

“이것 봐요. 얼마나 예쁜가. 맛있기도 하고.”

“아아! 기준, 기준 씨.”

기준이 혀를 내밀어 희원의 갈빗대에도 튄 정액을 핥았다. 울긋불긋한 가슴 밑에 하얗게 튄 정액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눈이 돈 기준이 정액을 깨끗이 핥고는 그것도 모자라 유두 밑에도 순흔을 남겼다. 기준의 입술이 깊게 빨아들일 때 희원은 뜨거운 것에 덴 것처럼 허리를 튕기며 몸을 비틀었다.

“그런데 힛싸 오는 걸 얘기도 안 해 줘서 하마터면 별 상관도 없는 새끼들한테 다 보여 줄 뻔했잖아요. 이 예쁜 걸.”

“그치만 얘기하면…….”

“혹시 다 보여 주고 싶었어요? 혹시 여럿이 하는 게 취미예요? 그런 게 좋아요? 아, 어쩌지? 그것도 못 들어주는데.”

기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씹었다. 희원은 기준의 이런 태도가 내심 서운했다. 오후까지는 그저 몸이 안 좋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그리 비바람을 흠뻑 맞아서 말이다.

그러다가 그저 컨디션이 안 좋은 정도가 아니라는 걸 느낀 것은 그 남자와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그 전까지는 그래도 참을 만했다. 분명히 모임 장소에는 우성 알파들도 많았겠지만 그만큼 파트너인 오메가들도 많았을 거다. 그래서 그런지 알파들은 제 페로몬을 숨기고 있었다. 그게 예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남자가 희원에게 베타냐면서 페로몬을 개방하며 조금씩 흘렸을 때 희원은 구역질이 났다. 그러면서 몸이 더욱 안 좋아졌다.

그걸 느끼면서도 딱히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은 행여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기준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서였다. 그랬던 것인데 기준이 자꾸만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해서 희원은 이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눈물이 흘렀다.

그렁그렁했던 눈망울에서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희원은 그런 모습을 기준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얼굴을 모로 돌렸다.

“뭘 잘했다고 울어요?”

“흐윽.”

기준의 물음에 어째 더욱 서운해졌다. 희원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희원 씨.”

“내가, 흡,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희원은 손목으로 거칠게 제 눈을 닦았다. 붉어진 눈가를 보고 기준이 그 손을 잡았다. 하지만 희원은 손을 빼려고 했다.

“가만있어요.”

“놔줘요.”

“얼굴 상해요. 그렇게 문지르면 안 돼요.”

“내가 거기서 몸이 별로라고, 흑, 했으면 기준 씨는, 차 돌릴 게 뻔하니까…….”

기준이 희원의 눈가를 살살 쓰다듬었다. 희원은 그 손길도 싫어서 고개를 팩 돌렸다.

“희원 씨 또 잊었어요?”

“뭘요.”

“나 봐요.”

기준이 희원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고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 희원은 눈을 꾹 감았다. 거부의 의사였다. 기준이 한숨을 내쉬고는 희원의 눈꼬리에 입을 맞췄다.

“나한테는 희원 씨만큼 중요한 게 없어요. 그깟 모임 좀 안 가면 어때요? 다음에 가면 되는 거지.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럽고 야한 건 나만 알았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달콤한 향도 나만 알았으면 좋겠다고요. 그래서 난 우리가 각인했으면 좋겠어요. 내 욕심이겠지만 서로한테만 반응하고 서로 떨어질 수 없었으면 좋겠어요.”

희원이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기준은 이번에는 혀를 내밀어 붉어진 눈가를 살살 핥았다.

“사랑해요.”

기준의 다정한 말에 희원은 허겁지겁 기준의 목에 팔을 감았다. 이번에는 희원의 페로몬이 기준을 그대로 덮었다.

희원의 페로몬은 달달한 독주와도 같았다. 달콤하여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그 향과 맛에 취해 어느새 일어날 수도 없게 하는 그런 독주 말이다.

기준이 움직일 때마다 서로 접합하고 있는 부위에서 찌걱찌걱 야한 소리가 났다. 열에 들뜬 희원은 평소 부끄러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자신의 모가지를 물어뜯으라는 듯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아아! 아읏!”

희원이 소리를 지를 때마다 기준은 그 숨을 모조리 삼켜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입으로 희원의 입을 막았다. 희원은 그게 힘이 드는지 기준의 어깨를 손으로 밀어내려고 했다.

“으읍! 읍!”

기준 때문에 막힌 신음이 기준의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갔다. 기준은 희원이 질질 흘리는 타액을 마시며 어째 제 연인은 그 모든 게 맛있을까 싶어 심히 곤란해했다.

희원이 세게 어깨를 밀었을 때 그제야 기준은 입을 떼 주었다. 산소가 모자라는지 희원이 벌벌 떨었다. 그러면서 자꾸만 구멍을 움찔거렸다.

“흐읏!”

기준이 살짝 빼냈다가 성기를 확 꽂아 넣으니 희원이 몸서리쳤다.

“오늘 금요일이라서, 읏, 얼마나, 좋아요.”

“아아! 아! 아읏!”

“주말 내내 개처럼 뒹굴어, 으읏, 보자고요.”

기준은 이를 윽물며 허리를 더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준이 움직일 때마다 희원의 성기도 같이 움직였다.

생전 자위도 안 하고 어디에다 갖다 박지도 않았는지 희원의 성기는 그의 피부만큼 뽀얗고 하얬다. 귀두만 분홍빛을 띠고 있는 게 그렇게 야하고 먹음직스러울 수가 없었다.

“으읏! 손, 하지, 읏, 마요.”

기준이 희원의 성기를 덥석 잡아서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면서 엄지로는 귀두 구멍을 세게 후볐다.

“아아! 아! 하지, 마요, 제발!”

기준이 그토록 핥고 입을 맞추었던 눈꼬리에서 다시 눈물이 질질 흘렀다. 동시에 기준이 엄지를 떼 주자마자 희원의 성기에서도 물이 질질 흘렀다.

“희원 씨한테 취할 것 같아요.”

기준은 이 한마디를 던지고는 희원의 양쪽 다리를 제 어깨에 넘겼다. 몸을 더 밀착하자 희원의 허리가 들리면서 새하얀 엉덩이 사이 자신의 것을 물고 있는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한계까지 늘어난 구멍은 팽팽했다. 기준은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몸을 찍어 댔다.

“아! 아아! 안 돼, 기준 씨! 깊어! 깊어요!”

방아를 찧듯 기준이 쿵덕쿵덕 몽둥이를 구멍 안에 쑤셔 박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희원의 발이 허공중에서 흔들흔들 달랑거렸다.

희원은 더 이상 맥을 못 추고 기준의 팔을 밀어냈다. 죽을 것만 같았다. 기준의 페로몬에, 그의 성기에, 부딪치는 몸에 온 감각이 날을 세워서 그대로 뇌를 찌르는 것 같았다.

“아읏! 아아! 아!”

“읏, 씨발!”

자신의 몸 아래에서 하얀 몸을 군데군데 붉게 물들이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희원을 보는 순간 그 절경에 기준의 입에서 욕이 감탄사처럼 튀어나왔다. 기준의 페로몬도 더 풀려서 둘의 페로몬이 섞여 들었다.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기준은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희원의 허벅지를 꽉 잡고는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희원은 기준이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숨이 컥컥 막혀 왔다. 이러다가 몸속의 모든 것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았다. 먼저 요동치는 심장부터 말이다.

“아악! 이제 그만, 기준 씨, 아아! 그만.”

“조금만, 조금만 더요.”

“안 돼요. 제발, 으으! 노팅은 하지 마요.”

“크읍!”

결국 희원은 다시 사정했다. 동시에 기준 역시 희원의 안에 사정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노팅이 되기 전에 희원의 몸속에서 빠져나왔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희원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제는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힘이 없었다. 그렇게 희원은 까무룩 수마에 잠겼다.

기준은 잠든 희원을 내려다봤다. 나비 날개 같은 속눈썹은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금세 바사삭 소리를 내며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예뻐해 주고, 아껴 주고 싶은 사람. 그럼과 동시에 꼭꼭 숨겨 두고 나만 보고 싶은 사람.

기준도 알고 있다. 희원의 히트사이클은 주기가 일정치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예전에는 그것 때문에 희원이 계속해서 약을 먹고 있었던 것도 안다.

하지만 기준은 희원이 그 약을 끊기를 바랐다. 약으로 몸을 통제하면 어느새 내성이 생길 거라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예상치 못했던 히트사이클이 와도 자신이 함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페로몬에 문제가 있는 희원에게는 기준의 알파 페로몬이 더 효과가 있다고 한의사가 이야기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기준도 처음에는 희원이 단순히 컨디션이 안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를 돌리자고 할까 하다가 그러면 희원이 자기 탓으로 돌리고 속상해할 게 뻔해서 모른 척했다. 페로몬이 평소보다 조금 진해진 것 같았지만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런 거라고 치부했다.

그 새끼 앞에서 희원이 벌벌 떨었을 때 기준은 그제야 알았다. 이게 단순한 컨디션의 문제가 아님을 말이다. 그 새끼는 늘 기준에게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형을 제치고 기업의 후계자로 서 있는 차남인 기준에게 말이다.

엄연히 상황이 달랐다. 기준네는 형인 이준이 놀을 갖는 것에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고 야망도 욕심도 기준이 어릴 때부터 훨씬 컸다.

이준은 한글을 모를 때부터 글자 없는 그림책을 보기 시작했고 한글을 떼자마자 방에 처박혀서 주야장천 책을 봤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그림 보러 갈 거냐고 물으면 그제야 방에서 나왔다.

그러니 조금 더 독하고 조금 더 맹렬한 이기준이 놀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에 대해 형은 별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 새끼는 기준을 보면 부들부들 떨었다. 기준은 곤히 잠든 희원을 바라보며 그 새끼를 언젠가 한번 조지긴 조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예쁜데 어딜 봐서 베타래. 눈깔을 확 뽑아 버릴까 보다. 그쵸, 희원 씨?”

잠에 빠져 듣지 못하는 희원에게 속삭이며 기준은 희원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목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조금 잠잠해진 좆이 다시 서는 것만 같았다. 이러다가는 자고 있는 사람 구멍에 다시 좆대가리를 들이밀 것만 같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희원을 씻기는 게 기준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기준은 희원의 이마에 다시 입을 맞추고는 욕실로 향했다.

* * *

무언가가 자신의 가슴을 누르고 꽁꽁 묶고 있었다. 희원은 갑갑증이 일어 잠에서 깨어나 꿈을 꿨나 싶어 천장을 골몰히 바라봤다. 이내 자신을 옥죄고 있던 게 기준의 팔임을 알고는 얼굴을 붉혔다.

“화장실 가고 싶은데.”

희원이 중얼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은데 이 단단한 팔이 뱀의 똬리처럼 자신을 옭아매고 있어 희원은 조금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지?”

희원이 기준의 팔을 살짝 밀어내려고 하자 예민한 기준이 희원의 가슴을 토닥토닥했다. 마치 더 자라는 듯이 말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움직이면 기준이 깰 것만 같아서 희원은 기준의 팔을 들어서 얼른 몸을 빼내고 그 사이에 이불 뭉텅이를 집어넣었다.

깨지 않고 잘 자는 기준을 바라보며 희원은 싱긋 웃었다. 몸을 빼냈는데도 조금 더워서 희원이 손부채질을 하며 침실에서 나왔다. 화장실에 갔다가 나온 뒤에 희원은 곧장 침대로 돌아가지 않고 냉장고 안에 들어 있는 맥주를 하나 꺼내어 입에 물었다.

“하아.”

이제야 갈증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알몸인 게 스스로 민망했지만 지금은 열이 나서 뭔가를 걸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걸을 때마다 안에서 기준이 싸 놓은 씨물들이 흘러서 허벅지를 타고 내려왔다.

“후유.”

희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만 몸이 더워 왔다. 희원은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러고는 뺨에 맥주 캔을 가져다 댔다.

“시원하다.”

간밤에 기준과 여러 번 몸을 섞었다고 해도 히트사이클은 이틀 정도 가기 때문에 아직 희원의 몸 상태는 좋지 못했다.

희원은 두 모금 마신 맥주를 내려놓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지금 침대로 들어가면 기준이 깰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잠시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 위해서는 혼자 누워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읏!”

몸을 뒤챌 때마다 가랑이를 타고 정액이 흘렀다. 정신을 잃은 듯 잠들었을 때 기준이 씻긴 것 같긴 한데 아마도 자고 있는 사람 구멍까지는 어쩌지 못했나 보다.

“어떡하지? 긁어내야 하나.”

“뭘 긁어내요?”

“어!”

기준의 낮은 목소리에 희원이 뒤를 돌아봤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기준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서 뭐 해요?”

“화장실 갔다가…….”

“화장실 갔으면 다시 들어올 거지. 뭐야, 맥주도 마셨어요?”

“더워서요.”

희원은 괜히 혼나는 기분이 들어서 시선을 피했다. 기준이 희원의 곁으로 다가와서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희원이 움찔 놀라 하니 기준이 희원의 턱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왜 시선 피해요?”

“그냥…….”

“왜? 희원 씨가 내 팔에 이불 더미 쑤셔 박고는 화장실 가서 안 들어오고 맥주나 마시고 있어서 화낼까 봐요?”

희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왜요? 우리 예쁜 희원 씨를 왜 혼내요? 예쁘다 예쁘다 하기에도 모자라는데.”

기준이 희원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희원이 놀라서 허겁지겁 기준의 목에 팔을 감았다. 기준이 희원의 엉덩이를 받쳐 들고는 엉덩이 한쪽을 잡아 벌렸다.

“하지, 하지 마요!”

“왜요?”

“하지 마요.”

희원이 부끄럽다는 듯 기준의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다. 기준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아파요.”

희원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기준의 어깨를 이로 잘근 물었다. 기준은 별로 아프지도 않았지만 여기서 아픈 척도 안 하면 희원이 삐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노팅 못 하게 해요? 나는 우리 희원 씨 안에 처박고 흔들고 싸고 싶은데.”

“읏!”

기준이 희원의 주름을 확 긁더니만 조금 부어 있는 구멍 안으로 중지를 집어넣었다. 손가락을 구부려서 틈을 만드니 바닥으로 정액이 뚝뚝 떨어졌다.

“싸 준 거 잘 물고 있어야지 이게 뭐예요.”

“기준, 기준 씨.”

기준이 페로몬을 살살 풀어내자 희원이 다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말해 봐요. 왜 노팅하면 안 되는지. 아기 만들기 싫어요? 응?”

“……일이.”

“응?”

“랑일이한테 물어보고 만들고 싶어요. 동생 읏, 만들어 달라고 하면, 아응, 그때.”

기준이 피식 웃었다. 이건 매번 아들놈이 기준의 발목을 턱턱 잡는 꼴이었다.

“그래요, 집에 가면 세뇌 교육에 들어가야겠네요. 그 전에 우린 하던 것 마저 하고.”

기준이 희원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침실 안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흣!”

희원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는 엉덩이만 든 채로 흔들렸다. 뒤에서 기준이 골반을 단단히 잡고는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희원은 신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점점 빨라지는 허리 짓에 신음도 못 내지르고 침을 질질 흘렸다. 쾌락으로 마치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건 기준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그만, 그만해요. 아아! 아!”

희원이 손을 뒤로 뻗어서 기준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기준의 몸에 채 닿지도 못한 채 허공만 휘저을 뿐이었다. 뒤에서 들이박을 때마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숨이 턱턱 막혔다. 둘의 열기 때문에 가뜩이나 달아오른 몸은 이제는 타 버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으읏! 기준 씨.”

“예뻐요. 뒤에서 보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읏, 다음엔 사방이 거울인 데서, 하아, 할까 봐요. 이렇게 처박다가 거울에다 싸고. 응?”

희원은 양쪽 귀를 막았다. 기준이 섹스하는 중에 낮은 목소리로 저급한 말들을 흘릴 때마다 희원은 귀를 막았다. 부끄러워서 당장 사라지고 싶었다. 몸이 침대 밑으로 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악!”

기준이 희원의 팔오금 부분을 잡아서 뒤에서 확 당겼다. 그러는 바람에 처박혔던 몸의 상체가 강제로 들려 뒤로 젖혀졌다. 동시에 하체가 더 맞붙었다.

“내 얘기 들었어요? 응? 거울 보고 하자고. 그럼 드레스 룸에서 하면 되겠다, 그쵸?”

“하지, 마요. 읏, 깊어요. 아아!”

기준은 낮게 속삭이면서도 허리를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철썩철썩 기준의 허벅지와 희원의 엉덩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그렇게 야할 수 없었다. 탱탱한 엉덩이의 탄력감을 느끼며 기준은 희원의 팔을 더 끌어당기면서 허리 짓을 이어 갔다.

깊게 찔러 오는 성기에 희원은 당장이라도 기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힘들었다. 이러다가는 밑이 남아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어요, 기준, 씨. 힘들어, 아응!”

“그런 것치고는 아직도 더 달라고 씨발, 조여 무는데요. 아아! 희원 씨 안은 너무, 야해요.”

“하지 마요, 그런 소리.”

“잊었어요? 우리 개처럼 뒹굴기로 한 거.”

기준이 뒤에서 한 번 더 확 치고받았을 때 희원의 성기는 다시 한번 질질 싸고 말았다. 침대 여기저기에 이제는 물처럼 묽은 정액이 마구 튀어 흔적을 남겼다.

그 뒤로도 기준은 뱉은 말을 실천하기라도 하듯 희원과 개처럼 뒹굴었다. 둘이 몸을 안 섞은 곳이 없었다. 욕실, 침실, 소파, 하물며 식탁에서도 몸을 섞었다. 희원은 내내 울면서 밀어내다 매달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까무러치듯 다시 잠들었다.

“체력이 이것밖에 안 돼서 어떡해요?”

잠든 희원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기준이 중얼거렸다.

“나중에 내 러트는 어떻게 견디려고요. 극우성 알파는 러트도 일반 알파들보다 오래 한다는 거 알고나 있어요?”

기준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했으나 희원은 잠에 빠져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나랑 러트 보내려면 우리 희원 씨 맛있는 것 더 많이 먹어야겠다.”

기준은 희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하얀 얼굴에 열이 올라서 볼만 복숭앗빛이었다.

“귀여워.”

기준이 이번에는 뺨에 입을 맞추고 중얼거렸다.

“나중에 희원 씨 닮은 딸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

기준은 생각만으로도 광대가 씰룩이고 입이 귀에 걸릴 것 같았다. 얼마나 예쁠까? 하얀 얼굴에 커다란 눈, 그 눈으로 사르르 웃다가 또 똥그랗게 뜨고 바라보면 기준은 아마 기절할지도 모른다.

종일 뒤를 쫓아다니며 고 작은 붉은 입술로 종잘거리면 기준은 심장이 아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준은 랑일이한테 이제부터 세뇌 교육을 단단히 시킬 예정이었다.

* * *

“다녀왔습니다.”

희원을 집에 고이 모셔다드리고 본가로 온 기준은 현관 앞에서 이준과 맞닥뜨렸다. 담배를 손에 든 이준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아주 호텔에 있다가 왔다고 광고를 하지 그러냐?”

“랑일이는?”

“내 방에.”

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 대놓고 담배를 피우는 형이 랑일이가 방에 있어서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모양이었다.

“근데 왜 형은 또 여기 있어?”

“랑일이 있다고 해서 왔어. 이따 집에 갈 거야.”

“형 요즘 본가에 있는 횟수가 많다? 그 형네 오메가랑 뭐가 잘 안 돼?”

그때 뒤에서 애옹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랑일이가 따라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랑일아. 잘 놀았어?”

“응! 큰아빠가 쿄우 데리고 와서 같이 놀았어. 내 옆에서 잤어.”

랑일이가 기준의 다리를 잡고 얼굴을 비볐다. 기준이 제집인 양 돌아다니는 검은 고양이를 보다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또 데리고 왔어?”

지난번부터 형은 고양이를 종종 맡는 것 같았다. 고양이 주인이 오랫동안 집을 비우면 이준이 데리고 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 랑일이가 본가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맡은 고양이를 데리고 본가로 오는 것 같았다.

“얘 주인은?”

“그쪽 본가 갔어.”

이준의 대답이 어찌 떨떠름했다.

“본가를 왜 이제 가? 추석 때 간 거 아니었어?”

“그때 일했잖아. 그러다 지금 가셨어.”

아무래도 이준은 주말에도 그 오메가랑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워낙 공사다망하신 모양이었다.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암튼 랑일이 봐줘서 고마워. 올라간다. 이따 형 갈 때 말하고 가.”

“어.”

이준은 대충 대답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준이 사라지자 고양이는 마치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현관 앞에 앉아서 이준을 기다리는 듯 굴었다. 기준은 그런 고양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랑일이를 안고 2층으로 올라갔다. 이제부터 세뇌 교육을 할 셈이었다.

“아빠! 마미는?”

랑일이는 지난번에 가르쳐 준 뒤로는 집에서는 희원을 마미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기준은 뿌듯한 듯 바라봤다.

“집에 있지.”

“우리 집에?”

“아니. 마미 집에.”

랑일이가 아쉬움이 한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마미 보고 싶은데. 아빠 우린 언제 마미랑 같이 살아?”

주말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희원이 기준네 와서 자고 가지만 그래도 랑일이는 희원과 매일 같이 있고 싶은 모양이었다. 유치원에서 5일 내내 봐도 말이다.

“마미랑 빨리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

“응!”

랑일이는 뭘 당연한 것을 묻냐는 듯 대답했다. 그러면서 기준에게서 희원의 향을 맡듯 킁킁거렸다.

랑일이는 알파이기는 하지만 아직 어려서 타인의 페로몬에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매일 희원과 붙어서 생활하는 랑일이는 꼭 페로몬이 아니더라도 그의 체향에 안정감을 느끼는 듯했다.

“마미 냄새 난다.”

랑일이가 기준의 품에 안겨서 희원을 만지듯 옷을 매만졌다. 기준이 따듯한 눈으로 랑일이를 바라봤다.

“랑일아. 랑일이는 동생 갖고 싶지 않아?”

“응? 동생?”

기준이 침대에 눕자 그 위에 엎드려 누워 있던 랑일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다가 이내 다시 기준의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설이 있잖아. 내 동생.”

나름대로 집안이 화목한 이 씨네는 곧잘 모이곤 해서 랑일이는 해준이네 딸 설이를 자기 동생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기준은 생각지도 못한 벽에 부딪혀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내 기준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랑일아.”

“응?”

“우리 다음 주 일요일에 마미랑 설이네랑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응!”

마미 소리만 나오면 신이 나는 랑일이는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는데도 신이 나는지 침대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그러다가 이준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밖에서 들리니 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자랑을 하러 가는 게 틀림없었다.

기준은 괜히 형에게 약 올리는 것 같아서 랑일이를 막으려다 말았다. 자극이 되면 뭘 어떻게 하겠지 싶었다.

“우리 집에 연애 고자는 없는데 이이준은 왜 저 모양인지 몰라.”

기준은 제 형이 들으면 뒷목 잡고 쓰러질 말을 하며 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에.

“잤어요?”

―으응.

“그럼 끊을게요. 더 자요.”

희원의 목소리에 잠이 듬뿍 묻어났다. 그럴 수밖에. 기준이 이틀 동안 밤새 물고 빨고 핥았으니까 말이다.

―아니에요. 끊지 마요.

“아직도 졸린 것 같은데요. 괜찮으니까 더 자요. 이따가 전화할게요.”

―괜찮아요. 근데요, 기준 씨이.

“네.”

―우리 집에 기준 씨랑 같이 있는 것 같아요. 기준 씨 향이 듬뿍 따라왔어요오.

희원이 작게 웃었다. 말끝이 늘어지는 걸 보니 여전히 잠결인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전화를 끊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게 기준은 마냥 귀여웠다.

“내 방에서도 희원 씨 페로몬 향 나요. 지금 희원 씨랑 같이 있는 것 같아요.”

희원의 향이 아직까지도 기준에게 남아 있었다. 이준이 마주치는 순간 눈치챌 정도로 말이다. 기준은 자신에게 매달려서 울며 헐떡이던 희원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훤했다. 생각하니 다시 좆이 설 것만 같아서 기준은 슬며시 다리를 꼬았다.

“희원 씨.”

―네?

“우리 돌아오는 일요일에 해준이네랑 밥 먹을래요? 랑일이가 설이랑 놀고 싶은가 봐요. 랑일이가 워낙 설이를 예뻐하니까요.”

―그래요. 그때 보니까 설이 엄청 귀여웠어요. 사랑스럽고요.

기준은 희원의 말에 웃음 지었다. ‘희원 씨가 낳을 딸이 더 예쁠 거예요.’라는 말은 애써 삼키고.

* * *

상반기에 봄 소풍과 어린이날 행사가 있다면 가을에는 가을 소풍과 아람제가 있었다. 아람제란 상수리나 밤의 열매를 뜻하는 아람에서 비롯된 것으로 1년 동안 아이들이 배운 것을 가족들 앞에서 보여 주는 일종의 발표회였다.

“희원 쌤. 5세는 좋겠어요. 옷만 입혀 놓아도 예쁘니까요.”

“맞아요. 5세는 올라가서 울고 잘 못하고 그래도 그게 또 매력이니까 부담이 없겠어요.”

희원은 선생님들의 그 말에 빙그레 웃었다. 선생님들 말이 사실이기는 했다. 만 3세, 즉 5세 아이들은 아무리 쉬운 것으로 발표회 준비를 해도 올라가면 꼭 우는 아이가 발생했고, 여지없이 엄마를 찾았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런 모습을 귀여워했고 사랑스럽게 여겼다.

“그치만 그렇다고 해서 대충 할 희원 쌤이 아니지.”

“다들 베테랑인 선생님들께서 왜 그러세요.”

“그냥 부러워서 그래요. 사실 5세는 연습시킬 때는 정말 힘든 거 우리도 아는데 무대에 올라갔을 때 실수해도, 그러다 또 잘해도 이래저래 주목받으니까.”

희원은 선생님들 말이 맞아서 그저 웃음 지었다.

“그나저나 아이들이 잘 따라와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게요. 아프지 말고요. 하다 보면 이게 재미있고 신나자고 하는 건데 꼭 아픈 아이들이 생기니까요.”

선생님들은 모두 같은 마음으로 이번 아람제가 한 명도 아픈 아이 없이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행사가 되길 빌었다.

“자, 선생님들. 이건 저랑 원감 선생님이랑 짠 계획표예요. 검토하고 우리 다음 주 월요일에 회의하도록 해요. 전체적으로 부를 건 원가랑 마지막에 부르는 노래니까 그건 공통으로 연습 미리미리 하면 좋겠어요.”

“네!”

“그리고 미리 알림 작업해서 각 가정에서 11월 11일에 이 행사 기억하고 일정 조율하실 수 있도록 협조 구하고요.”

원장 선생님의 조회로 유치원은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희원은 내부 정리는 다른 선생님들께 맡기고 아이들을 맞이하러 밖으로 나갔다. 같이 나간 부담임 선생님이 희원에게 넌지시 말했다.

“희원 쌤. 주말에 좋은 일 있었어요?”

“네?”

“금요일에 일찍 퇴근한 것도 그렇고 주말 지내고 왔는데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아서요.”

희원은 아니라며 웃었다. 주말 내도록 맛있는 걸 그렇게 먹었지만 반면에 체력 소모가 컸던 탓에 오히려 그 며칠 사이에 체중은 조금 빠졌다.

“요즘 희원 쌤 좋은 일 있어요?”

“아뇨, 그런 건…….”

기준과 사귄 지는 벌써 반년 정도 지났다. 그러고는 변함없는 일상이었다. 딱히 특별할 일은 없었다. 단지 기준과 랑일이와의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즐겁긴 했지만 말이다.

“요즘 점점 얼굴이 좋아진단 말이에요. 혹시 연애……?”

“선생님!”

“랑일아!”

랑일이는 등원이 그다지 이른 편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아침에 기준 혼자 모든 것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랑일이가 가장 처음으로 유치원에 온 것이다. 언제 유치원 안까지 들어왔는지 랑일이가 마당에 서서 희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희원은 얼른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우리 랑일이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일찍 일어났어요. 선생님 보고 싶어서요.”

“그랬어? 부담임 선생님한테도 인사해야지.”

희원에게는 다리를 붙잡고 얼굴을 비비던 랑일이가 계단 위에 선 부담임 선생님을 보더니 배꼽에 손을 척 올리고는 표정을 싹 지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 랑일아.”

랑일이는 언제 어리광을 부렸냐는 듯 반듯한 도련님처럼 인사를 했다. 그러더니 다시 희원에게 안겨 들었다. 희원이 아직 다른 아이들이 올 시간은 안 된 상태이기에 랑일이를 안아 들고는 다시 대문 밖으로 향했다.

“아빠는?”

“아빠 저기요!”

차를 골목 옆에 바짝 붙인 기준이 차에서 내리고는 걸어오고 있었다. 오늘도 몸에 꼭 맞춘 정장을 입고 걸어오는 태에 마치 모델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아빠는 언제 봐도 참 멋지다, 그치 랑일아?”

희원이 랑일이 귀에 속삭이자 랑일이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희원의 귀에 속삭였다.

“난 선생님이 더 좋아요.”

“선생님도 랑일이 좋아해.”

그 말에 랑일이는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희원의 목을 꼭 감싸고는 버릇대로 희원의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기준이 앞으로 다가오자 희원은 웃으며 물었다.

“오늘 랑일이가 일찍 일어났어요?”

“네, 그래서 평소보다 여유롭게 나왔어요. 근데 어째 하루 못 봤다고 살이 좀 빠진 것 같아요.”

기준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희원은 할 말이 많았지만 말을 삼키고는 어깨만 으쓱였다.

“지금 눈으로 나한테 욕한 것 같은데요.”

“설마요.”

희원이 웃었지만 기준은 그 눈빛을 읽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이번 돌아오는 주말에는 더 잘 먹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 11월 둘째 주 토요일에 유치원 행사 있어요. 아람제라고 매해 11월에 있는 행사인데 발표회 같은 거예요.”

“토요일?”

“네.”

날짜를 확인하던 기준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날 희원 씨 생일 아니에요?”

“네, 그러네요.”

희원이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뭔가 민망하거나 곤란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기준은 당장이라도 그 코를 꽉 깨물어 주고 싶었다.

“생일? 선생님 생일이에요?”

“오늘 아니고 11월에.”

“그럼 나 선생님 생일 선물 살래요!”

“선생님 기대할게. 고마워. 어! 다른 애들 올 시간 됐다. 우리 랑일이는 이제 유치원에 올라갈까?”

랑일이를 바닥에 내려 주자 랑일이가 기준에게 손을 흔들고는 유치원 안으로 들어갔다.

“뭔 생일날에도 일을 해요?”

기준이 차로 돌아갈 것처럼 뒤돌며 불퉁하게 말했다. 그에 희원이 웃었다.

“유치원 행사가 뭐 제 맘대로 되나요? 가족들 많이 보러 올 수 있는 날이 토요일이니까 그렇죠. 정 그러면 기준 씨가 금요일에 유치원 가족들 일 좀 빼 줘요. 그날 행사해도 다 보러 올 수 있도록이요.”

희원이 기준의 차가 선 곳까지 같이 걸으며 그렇게 말하자 기준이 우뚝 서서 희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직 그럴 힘이 없긴 한데, 내년부터라도 우리 희원 씨 주말에 일 안 하게끔 힘 좀 길러 볼까 봐요.”

희원이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권력 남용이 예정인 이사님. 출근 잘하시고요, 오늘도 힘내세요!”

“네, 우리 예쁜 선생님도 오늘 힘내세요. 이따 저녁에 봐요.”

희원이 웃으며 손을 흔들자 기준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가까이 와서 속삭였다.

“입 맞추고 싶어 죽겠어요.”

“그건 이따 밤에요. 같이 퇴근해요.”

“그래요, 이따 봐요.”

기준이 평소보다 일찍 온 덕에 희원은 다른 아이들이 오기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기준을 배웅할 수 있었다. 손을 흔들며 기준의 차가 골목을 빠져나가는 것까지 보고는 희원은 웃으며 뒤돌아섰다.

특별할 것 없는 그저 평범한 월요일 아침이었다.

* * *

주말에는 당연하다는 듯 기준과 금요일 밤부터 함께해서 일요일까지 보내곤 하는데 오늘 루세네 가게에 가기로 해서 희원은 어젯밤에 집으로 돌아왔다.

기준은 자기네 집에 있는 옷으로 입고 가면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희원은 모처럼 더 신경 써서 꾸며 입고 싶었다. 그래도 엄연히 기준네 가족을 만나는 일이니까 말이다.

“여보세요?”

전화해 온 사람은 다름 아닌 루세였다.

―잠깐 통화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음식 뭐 좋아하는지 물어보려고요. 가리는 거 있어요?

“저 다 잘 먹어요. 근데 루세 씨 쉬는 날까지 음식 하게 해서 어떡해요? 이런 줄 알았으면 루세 씨 가게 말고 다른 데서 먹자고 할걸.”

어쩌다 보니 식사를 하는 장소가 루세네 가게가 되었고 그러다 보니 쉬는 날인데도 루세는 쉬지도 못하게 되었다.

―제가 여기서 먹자고 했어요. 다른 데 가면 랑일이랑 설이가 마음껏 놀기가 불편하잖아요. 제 가게니까 여기서는 마음껏 놀아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니까 애들도 편하고 우리도 편하고요.

“제가 가서 설이 많이 봐줄게요.”

―응, 그래요. 천천히 와요.

주변에 결혼한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시댁이든 처가든 뭐가 되었든 함께 살던 가족이 아니라서 불편하다고 하던데 희원은 기준네 가족들이 모두 성격도 좋고 타인을 편하게 해 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알고 보니 루세는 희원과 동갑이었다. 또래가 있다는 건 생각보다 더 힘이 되었다.

기준의 형인 이준도 연애를 하고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나중에 형님 될 사람이랑도 잘 맞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봤다. 그런 말을 했을 때 기준은 희원이라면 어느 누구와도 잘 맞을 테니 걱정 말라고 했지만.

희원은 아가들을 봐야 하니 조금 편한 복장을 하고 가기로 했다. 그래서 맨투맨 티셔츠와 슬랙스를 꺼냈다.

“전화하면 나오라니까 거참 말 안 들어.”

대문 밖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희원을 보고 기준이 운전석에서 내리며 말했다.

“기준 씨가 기사도 아니고 어떻게 그래요.”

“뭐 좀 어때요, 사모님.”

“놀리지 마요.”

“잘 잤어요? 나도 없이 혼자 자는데?”

기준은 희원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이제 랑일이도 둘의 사이를 아는 만큼 기준은 랑일이 눈치도 안 보고 마음껏 애정 표현을 했다.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 아니 준마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랑일이가 뒤 창문을 열고 말했다.

“마미, 나도 뽀뽀! 나도 뽀뽀할래!”

희원이 랑일이 뺨에 입을 맞춰 주자 랑일이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기준은 랑일이가 뒤에 타라고 하기 전에 얼른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얼른 타요.”

“어! 마미 뒤에!”

“너 아빠랑 말한 게 다르잖아! 오늘 얌전히 타고 가기로 했잖아.”

둘이 오면서 또 투덕거렸는지 랑일이가 기준의 말에 단번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희원은 랑일이의 뺨에 다시 입을 맞춰 주고 말했다.

“랑일아, 마미 앞에 타도 될까요? 이따 집에 올 때는 뒤에 탈게.”

기준에게는 불퉁한 표정을 지었던 랑일이가 희원의 말에는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기도 그러려고 했다고 대답했다. 기준이 기가 찬다는 듯 랑일이를 바라본 건 당연한 일이었다.

10월의 날씨는 선선했고 가는 길에 양쪽으로 뻗은 은행나무는 샛노래서 희원은 핸드폰을 들고 연신 사진을 찍었다.

“마미! 이따 나도 사진 찍어 줘요!”

“그래. 아빠랑 같이 찍어 줄게.”

“응! 마미랑 같이 찍을래요.”

기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랑일이는 희원이 선물이 되어 자신에게 왔다는 말을 들은 뒤로 굉장히 기뻐했지만 한편으로는 제 아빠를 라이벌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을 하는 데에 있어 꼭 희원을 같이 집어넣었고 기준과 단둘이 뭔가를 하라고 하거나 기준이 무슨 말을 하면 귓등으로 들었다.

같은 알파라서 그런지 자존심 싸움이 대단했다. 저러다 또 부자의 난이 일어나지 않을까 희원은 노심초사했다.

“근데 희원 씨.”

“네?”

“누가 보면 대학생인 줄 알겠어요.”

희원이 제 옷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어리게 입었나요? 설이랑 랑일이 봐주려고 그러다 보니까요.”

“애들을 왜 희원 씨가 봐요. 이해준 있는데.”

“아니 해준 씨도 좀 한가하게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래야죠.”

“희원 씨도 일주일 내내 애 보잖아요.”

희원은 차가 신호 때문에 정차하자마자 기준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기준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희원이 키득거렸다.

“내가 종일 기준 씨만 바라보고 있었으면 좋겠죠?”

기준이 희원을 쳐다보며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는 종일 희원 씨가 내 옆에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 허벅지 위에 올라앉아 있으면 더 좋고요.”

“뭐라는 거예요, 진짜!”

희원의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이번에는 기준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희원 씨, 거의 다 왔어요. 저기 앞에 보이는 건물이에요.”

“저 2층짜리 건물이요?”

“네, 맞아요.”

“그때 기준 씨랑 왔던 동네 아니에요?”

“맞아요. 우리 맥주 마셨던 곳.”

요즘 젊은 층에게 가장 핫한 곳이었고, 기준과 연애 전에 맥주를 마시러 왔던 동네였다. 그때는 그냥 유치원 담임교사와 학부모였는데, 기준의 플러팅에 홀딱 넘어가서 사귀지도 않는데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와, 루세 씨 대단하다!”

“원래 저쪽 길 건너편 골목에 조그맣게 있었는데 맛있으니까 금방 소문나더라고요. 그러더니 이만큼 커졌어요.”

기준의 말에 희원은 제 일도 아닌데 굉장히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대단하다 정말. 주말이 손님 가장 많을 텐데 일요일에 문 닫는 거잖아요.”

“네, 가족이랑 시간 보내고 싶다고 문 닫는다더군요. 그리고 평일에도 재료 떨어지면 마감한다고 해요.”

희원은 연신 와, 와 하고 감탄했다.

기준이 루세 가게 옆에 주차를 하고는 먼저 내렸다. 그러고는 조수석 문도 열어 주고 뒷문도 열어 주었다. 안전벨트를 풀어 주니 랑일이가 폴짝 뛰어내려서 당연하다는 듯 희원의 손을 잡았다.

“형, 왔어? 형수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설아, 안녕!”

설이가 작은 손을 흔들었다. 희원은 설이의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마주 손을 마구 흔들며 웃었다. 옆에서 보는 기준의 모습이 어딘가 흐뭇해 보였다.

“기준 씨, 설이 옷 입은 것 좀 봐요.”

설이는 체크무늬 멜빵 치마를 입었는데 갈색 체크무늬가 해준이 입은 남방의 무늬와 같은 모양이었다. 기준에게 듣기로는 설이의 모든 옷은 해준이 입힌다고 들었는데, 공주님 옷 입히면서 얼마나 기분 좋을까, 하고 희원은 생각했다.

“아빠랑 커플 룩이네. 진짜 귀엽다 설아.”

희원이 감탄하며 설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희원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며 랑일이가 제 아빠를 올려다봤다. 기준은 랑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루세 씨는요?”

“안에 있어요. 음식 하고 있는데 거의 끝난 것 같아요.”

안으로 들어와서 해준이 설이를 내려 주니 랑일이는 설이 손을 꼭 붙잡고는 “오빠가 손잡아 줄게.” 이러면서 걸었다. 그 모습에 희원은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기준 씨, 랑일이 하는 말 들었어요? 자기도 아기면서 지금 오빠 흉내 냈어요. 우리 랑일이 진짜 귀엽다.”

“랑일이가 설이 만나면 얼마나 의젓하게 행동하는지 몰라요.”

“어, 루세 씨!”

기준 대신 뒤에서 루세가 대답하는 바람에 희원은 깜짝 놀랐다. 희원은 뒤돌아서 루세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둘은 몇 번 만나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굴었다. 서로 어깨를 두드리고 잘 지냈냐고, 쉬는 날 고생하는 거 아니냐며 서로 길게 인사를 나눴다.

기준은 둘이 저렇게 친한 건 좋지만 살짝 위기감을 느꼈다. 저기에 박 여사가 끼면 어떻게 될지 아찔했기 때문이다.

“형, 지금 엄마 생각했지?”

“말도 꺼내지 마. 말이 씨가 된다고 했어. 오늘 같이 식사하는 거 난 집에 얘기 안 했으니까 너도 나중에라도 하지 마.”

“걱정 마. 나도 할 마음 없어. 난 지금도 툭하면 박 여사가 루세 불러내서 죽겠단 말이야. 나 완전 루세 쉬는 날이면 독박 육아.”

기준은 그 말에 자신도 같은 미래를 가질까 봐 고개를 저었다.

“마미! 우리 소꿉놀이할래요. 가방에서 꺼내 주세요.”

“그럴래? 놀다가 마미가 맘마 먹자, 하면 오는 거야.”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은 미리 기준이 준비해 온 장난감을 가방에서 꺼내 주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마치 자기 자식 사진 찍듯 랑일이와 설이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희원 씨, 밥 먹어요. 누가 보면 여기 유치원 선생님으로 와 있는 줄 알겠어요.”

루세가 음식들을 테이블 위에 놓으면서 말했다.

“네? 하하. 애들이 너무 귀여워서요.”

“그래도 와서 밥 먹어요. 일단 어른들부터 먹고 애들은 천천히 먹여도 될 것 같아요. 지금은 노느라 정신없어서 앉혀 놔도 안 먹으려고 할 거예요.”

“그럴까요?”

희원이 자리에 앉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희원 씨, 또 토끼 됐다.”

“이 많은 걸 언제 준비했어요? 진짜 쉬는 날 너무 미안하다.”

“괜찮다고 했죠. 나중에 결혼하면 형님 됐다고 나 너무 구박하거나 그러지만 마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희원이 루세의 팔을 콩콩 때리며 웃자 루세도 따라서 웃었다.

넷은 둘러앉아서 루세가 차린 진수성찬을 먹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식탁 앞에 앉는 순간 어차피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에 잠시의 평화라도 누리기 위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놀던 설이가 아장아장 다가와서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희원은 버릇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설이 손을 잡았다. 그러자 기준이 희원을 앉히고는 해준에게 가라고 눈짓을 했다.

“형수님, 앉아서 식사하세요. 형수님 시켰다가는 저 형한테 맞아 죽어요.”

해준이 설이를 번쩍 안고 화장실로 사라졌다. 희원이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오히려 루세는 이 광경을 보고 그저 웃었다.

해준은 설이를 화장실에 데리고 갔다 와서는 그대로 유아용 의자에 앉혔다. 그걸 보고 희원도 랑일이를 데려다 유아용 의자에 앉혔다.

해준이 식전용 죽을 떠서 설이 입 앞에 들이밀었다. 하지만 설이는 잘 먹지를 않는다고 했는데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입술을 뿌우 내밀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걸 희원이 보고 얼른 죽을 한 숟가락 떴다.

“우리 랑일이 오빠는 뭘 먹을까?”

희원이 똑같은 죽을 설이에게 보여 주고는 랑일이 입 앞에 들이밀자 랑일이는 마치 아기 제비처럼 입을 앙 하고 벌렸다.

“우아! 우리 랑일이 오빠 정말 잘 먹는다! 우리 설이도 한 번 먹을까요?”

희원이 배시시 웃으며 해준의 손에서 숟가락을 가져가 설이의 입 앞에 들이밀었다. 설이가 살짝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희원은 랑일이 숟가락을 한 번 더 들었다. 랑일이가 또 앙 하고 먹자 설이가 작은 입을 벌렸다.

“와! 우리 설이도 진짜 잘 먹는다. 그치, 랑일아? 오빠가 잘 먹으니까 동생도 잘 먹는 것 봐.”

랑일이는 희원의 칭찬에 스스로 죽을 떠먹기 시작했다. 설이의 식사도 수월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도 희원은 두 아이들에게 번갈아 가며 숟가락을 물려 주었다.

랑일이는 희원이 칭찬하니 그저 좋아서 입을 벌렸고 평소 입이 짧아서 해준과 루세의 속을 태웠던 설이도 랑일이 오빠가 잘 먹으며 응원하니 그에 따라서 입을 쩍쩍 벌렸다.

“역시 유치원 선생님은 다르구나.”

루세가 감탄했다. 감탄하기로는 해준과 기준도 마찬가지였다. 랑일이는 볼록 나온 배를 두드리며 희원의 칭찬을 받았고 설이도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우리 다 먹었으면 소화도 시킬 겸 저기 가서 좀 놀까?”

“네!”

희원은 랑일이를 유아용 의자에서 먼저 빼 주고 그다음으로 설이를 내려 주었다. 설이가 바닥에 발을 대자마자 랑일이는 설이 손을 잡고는 둘이 발맞추어 다시 놀이를 하던 장소로 향했다.

루세가 웃으며 희원의 앞에 맥주를 놓아 주었다.

“희원 씨는 한잔해도 되죠?”

“희원 씨 마시고 싶으면 마셔요. 랑일이 걱정하지 말고요.”

기준은 희원이 혹시라도 눈치를 볼까 봐 선수 쳐서 말했다. 랑일이가 둘의 사이를 알고 난 뒤 좋은 건 랑일이 앞에서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랑일이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져 희원이 결혼도 전에 육아에 빠져 있다는 게 기준은 내내 마음에 걸렸다.

기준은 희원이 랑일이를 예뻐하고 사랑해 주는 것과는 별개로 희원의 삶을 즐기고 그의 친구들처럼 놀고 싶을 때는 실컷 놀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넷은 잔을 들어서 건배를 했다. 운전을 해야 하는 기준과 해준은 탄산수로 대신했고 루세와 희원은 맥주잔을 들었다.

“나중에 희원 씨 아기 낳으면 랑일이가 좋은 오빠가 되어 줄 텐데.”

“그쵸? 딱 딸이겠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이기준이 루세의 말을 옳다구나 덥석 물었다.

“형은 무슨 벌써 성별을 혼자 정했어? 그리고 뭐 형이 딸 낳고 싶다고 낳을 수 있는 줄 알아?”

“야,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어.”

“그걸 어떻게 여기에 갖다 붙이냐? 그래서 뭐 만날 하기라도 하게? 아악! 아파. 왜 꼬집어!”

루세가 옆에서 꼬집었는지 해준이 아프다고 난리를 쳤다.

“희원 씨, 이 철없는 우리 집 남편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요.”

희원이 민망한지 얼굴이 분홍빛이 되었는데, 그때였다. 잘 놀던 설이가 눈을 비비며 희원에게 다가왔다. 희원이 설이를 보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안아 들었다.

“왜? 우리 공주님 졸려요?”

설이는 꼼지락거리며 희원의 품을 파고들었다. 해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설이에게 오라고 했지만 설이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 밥 먹여 줬다고 고새 설이는 희원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희원은 설이를 안고 일어나서 등을 도닥거리며 흥얼흥얼 노래를 불러 주었다.

설이가 자리를 뜨자 같이 놀던 랑일이가 기준의 옆으로 왔다. 루세는 눈치 좋게 우유 한 잔을 랑일이에게 쥐여 주었다. 랑일이가 우유 잔을 들고는 설이를 안은 희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설이는 랑일이가 그러듯 희원의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더니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어깨에 머리를 대고는 고롱고롱 잠에 빠진 설이한테서 우유 냄새가 났다.

다섯 살 아이들만 줄곧 봐 오던 희원도 이렇게 작은 아이는 너무 오랜만이라서 안고 있는데 조심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어쩜 이렇게 예쁘죠?”

희원이 루세를 보며 작게 말했다. 랑일이는 희원을 쳐다보지도 않고 제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이는 엄마 아빠 예쁜 부분만 빼다박은 것 같아요.”

“루세를 조금 더 많이 닮아서 다행이에요.”

해준의 말에 희원이 미소 지었다. 누구나 배우자를 사랑하면 그 사람이 자신보다 훨씬 사랑스럽고 예쁘기 마련인 듯했다. 그건 희원도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희원도 나중에 혹시라도 아이가 태어난다면 자신보다 기준을 더 많이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준이 들으면 펄쩍 뛸 이야기였지만.

“해준아, 설이 유모차에 눕혀 줘. 희원 씨 힘들어.”

“아직 곤히 잠 안 든 것 같은데 눕혀 놔도 괜찮을까요?”

루세의 말에 희원이 조심스레 물어봤다. 아가들은 잘 잔다고 생각해서 내려놓으면 귀신같이 눈을 뜨고 잠투정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설이는 밥투정은 하는데 잠투정은 잘 안 해요. 설이도 오래 안고 있으면 무거워요. 눕히고 이거 좀 먹어요. 다 식겠어요.”

희원은 조심히 설이를 유모차에 눕히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희원이 옆자리에서 조용한 랑일이를 보며 물었다.

“랑일아, 맘마 많이 먹었어? 더 먹을래?”

랑일이가 고개를 저었다.

“마미.”

“응?”

제 발끝만 바라보고 있던 랑일이가 희원을 불렀다. 희원이 대답하자 랑일이는 희원을 힐긋 보고는 다시 제 발끝을 내려다봤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안아 주세요.”

그러다 랑일이는 자기도 안으라는 듯 팔을 쭉 뻗었다.

“랑일이도 안아?”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이 랑일이를 안으려고 하자 옆에 앉아 있던 기준이 말했다.

“랑일아, 마미 아직 밥 다 안 먹었잖아.”

“아냐, 괜찮아. 랑일아 이리 와. 안아 줄게.”

희원이 그러지 말라고 기준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고 랑일이를 안으려고 했다.

“어? 랑일아! 울어?”

기준의 말에 고개를 푹 숙여 버린 랑일이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희원만 놀란 게 아니었다. 기준도 해준과 루세도 놀라서 모두 랑일이에게 주목했다.

랑일이는 어른들이 제게 주목하자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희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랑일이를 그대로 안아 들었다.

“랑일아, 우리 아가가 왜 울까.”

랑일이는 희원의 목을 꼭 끌어안고는 어깨에 얼굴을 묻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랑일아.”

당황한 기준도 랑일이를 불렀다. 기준이 한 말이라고는 희원이 아직 식사 중이라는 말 한마디였는데 아들이 울어 버리니 기준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희원은 기준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고는 랑일이 등을 도닥거렸다.

“설이 싫어. 동생 싫어.”

랑일이가 툭 뱉은 말에 같이 있던 어른들은 그제야 탄식했다.

“마미 내 거야. 마미 랑일이 거야.”

이어서 뱉은 말에 기준이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해준이 제 형을 쳐다보자 기준은 말 시키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루세는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것 같아서 얼른 맥주나 홀짝였다. 그러지 않으면 기준의 행동에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루세는 나중에 박 여사를 만나면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미가 설이 안고 있는 게 싫었어?”

랑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희원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희원은 랑일이를 안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엉덩이를 도닥여 주었다.

“우리 아가가 마미가 설이 안고 있어서 슬펐구나?”

랑일이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마미는 랑일이 건데. 그치?”

희원이 의자에 앉아서 안겨 있는 랑일이 얼굴을 닦아 주며 물으니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과 코가 빨개진 얼굴이 그저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희원은 자신이 랑일이에게 푹 빠졌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설이가 아가인데 졸려 해서 잠시 안아 준 거야. 그래도 랑일이가 슬펐으면 미안해.”

희원의 말에 랑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희원의 품에 안겨서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근데 랑일아, 마미한테는 랑일이밖에 없어.”

“정말요?”

“그러엄. 마미는 랑일이만 사랑해.”

“나도 마미만 사랑해요.”

희원은 랑일이를 품에 꼭 끌어안으며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랑일이는 조금 마음이 풀렸는지 희원에게 꼭 붙어서 희원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아, 랑일이 너무 귀여워.”

랑일이의 울음이 어느 정도 그치자 루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 희원에게 좀 먹으라고 그의 맥주잔에 짠 하고 부딪쳤다. 희원은 랑일이를 계속 품에 안고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형은 표정이 왜 그래?”

“당분간 너랑 보지 말아야겠다.”

“뭐야, 뭔 소린데?”

“다 망했어. 이랑일이 이런 데서 질투할 줄 몰랐지.”

그에 대충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해준이 루세를 붙잡고 웃었다. 계획이 완전히 꼬여 버린 기준은 짜증이 나서 앞에 놓인 오렌지 껍질을 비웃는 해준에게 그대로 던져 버렸다. 희원이 무슨 짓이냐며 타박을 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형수님, 형이 저런다니까요.”

“조용히 해, 이해준.”

“형수님, 저것 봐요. 괜히 저한테 짜증 내는 거.”

해준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계속해서 기준을 놀려 댔다.

아빠와 작은아빠가 투덕거리는 와중에도 랑일이는 희원에게 꼭 붙어서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졸음이 오는지 희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눈을 비볐다. 희원은 랑일이가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등을 토닥여 주었다.

랑일이가 이내 잠들자 루세가 말했다.

“그렇게 오빠 흉내를 내도 아직 애는 애네요.”

“아직 다섯 살밖에 안 됐으니까요.”

희원의 대답에 루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를 마셨다. 희원도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랑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 2세 계획은 나중으로 미뤄야겠다?”

“이랑일이 이럴 줄 몰랐지. 당분간 희원 씨 설이한테 잘하지 마요. 그러다가 영영 동생 싫다고 그러면 어떡해요.”

기준이 쓰게 웃자 희원은 아이처럼 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에 기준은 지금 자기 혼자 심각한 거냐고 투덜거렸다.

아마 둘만 있었으면 희원은 기준의 입술을 훔쳤을 거다. 점점 귀여워지는 기준을 가만히 두고 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원은 랑일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에 일단은 랑일이 편을 들어 주기로 했다. 그러지 않으면 기준은 시도 때도 없이 동생 낳을 궁리를 할 게 분명했다.

“아직 랑일이는 엄마 품이 그리울 나이예요. 그때까지 좀 기다려 줘요.”

“그러다가 초등학교 들어가고 중2병 걸려서 다 싫다고 하면 어떡해요?”

옆에서 제 형의 이야기를 듣던 해준은 걱정도 팔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랑일이는 사랑을 듬뿍 받고 나면 분명히 그 사랑을 나누어 주려고 할 게 틀림없는데 제 형은 아무래도 감성적인 부분과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하긴 만날 손익 분기 따지고 머리로만 일했던 사람이 연애를 하는 것만으로도 용한 일이니.

“랑일이는 사랑 많이 받으면 분명히 그걸 베풀어 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거봐. 형수님도 아는 걸 왜 아빠인 형이 몰라? 아들을 너무 모르는 거지.”

해준의 퉁바리에 기준은 인상을 쓰며 노려봤다.

“어쨌든 우리 당분간 만나지 마. 계획이 완전 틀어졌어.”

제 형의 말에 해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편하게 생각하고 우리 이씨 집안 막내로 랑일이 동생을 낳아.”

“내가 봤을 때는 이준 형이 가장 늦게 애 낳을 것 같은데 뭔 소리야.”

해준은 희원이 이씨 집안 막내를 낳아서 사랑을 독차지하라는 뜻이었는데 기준은 이렇게 보고 저렇게 봐도 이준이 가장 늦지 않을까 싶었다.

“큰형은 결혼을 안 할 것 같다니까. 아니 못할 것 같아.”

해준의 말에 기준이 뭔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고양이를 툭하면 본가에 끌고 오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는 거였다.

“내가 봤을 때는 섹파 같아.”

“야 인마! 애들 들어.”

희원이 얼른 랑일이 귀를 막았다. 곤히 자고 있는 랑일이가 들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애들 앞에서는 물도 조심해서 마셔야 한다고 했다.

“근데 진짜야. 큰형 입사하고부터 묻히고 다니는 페로몬은 늘 똑같은데 형이랑 형수님하고는 진도가 다르잖아. 집에 한 번도 안 데리고 오잖아.”

“연애를 오래 하고 싶은가 보지. 우리도 연애 오래 하고 싶은데 뭘.”

기준의 말에 희원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수님, 결혼은 언제로 생각하세요?”

“랑일이가 있어서 빨리하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또 유치원에서는 제가 담임이니 집에서는 마미였다가 유치원에서는 선생님이었다가 이러면 헷갈릴 수도 있을 것 같고요.”

물론 지금도 영특한 랑일이는 유치원에서는 절대 마미라고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결혼을 하고 날마다 같이 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렇게 되면 랑일이는 희원과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거니 말이다.

“내년에 랑일이 담임은 다른 선생님이 맡는 거죠?”

기준의 물음에 희원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기준은 꽃 피는 봄이 되었을 때 희원을 생애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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