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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선물이 되어 준 서로 (14/31)

14. 선물이 되어 준 서로

바람이 살살 불며 가을 향이 물씬 풍겨 왔다. 희원은 기준에게는 조금 이따가 집에서 출발할 거라고 말했지만 이미 집에서 출발한 지 두어 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안녕하세요.”

희원은 가게 앞에 잠시 차를 세운 뒤 가게 안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인사를 했다.

“여기 앞에 잠깐 차 세워도 될까요?”

“네, 괜찮아요.”

“전화로 주문했는데요…….”

희원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주인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희원은 저절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게 하는 향기가 가득한 가게를 둘러보며 자신이 주문한 게 여기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기를 바랐다.

“좋아하시려나.”

희원은 혼잣말을 하면서 조금 긴장이 되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와아!”

주인이 가지고 나온 것을 보는 순간 희원은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기대 이상이에요. 정말 예뻐요.”

희원이 눈꼬리를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받으시는 분이 좋아하셨으면 좋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희원은 주인에게 커다란 꽃다발을 받아 품에 안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꽃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 향을 맡는데 마치 꽃밭에 누워 있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하셔야 할 텐데…….”

희원은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혼잣말을 했다.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꽃다발을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희원은 긴장감에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폈다.

이제 정말 기준네 집으로 출발할 때였다. 희원은 시간을 확인하고 더욱 떨리는 가슴에 지나가다 약국에 들러 청심환이라도 먹어야 할지 고민했다. 생전 이렇게 떨리긴 처음이었다. 유치원 교사 면접을 볼 때도 이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연인의 가족들을 만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이전에 지나가며 인사를 했다고 해도 그게 정식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무게는 무거워지기 마련이었다.

희원은 기준의 아버지를 빼고 나머지 식구들과는 얼굴도장을 찍었다. 박 여사와 막냇동생인 해준은 유치원에 몇 번 기준 대신 오갔고, 해준의 배우자인 루세도 백화점에서 본 적이 있었다. 기준의 형 이준은 아예 집에서 맞닥뜨렸고.

이제 남은 식구는 기준의 아버지였다. 기준이 정략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기까지 이 회장은 성격이 불같고 보통이 아니었다고 했다. 이 회장의 말이 곧 이씨 집안의 법이었다고 했다.

언론에서 다루었던 이 회장에 대한 기사들은 하나같이 그가 정확한 판단력을 지니고 있고 냉철하다고 평했다. 기준이 그와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하는데 희원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우선 희원이 알고 있는 기준은 다정하고 따듯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네, 기준 씨.”

한창 생각에 빠져 있는데 기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마 기준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어디쯤이에요?

“거의 왔어요. 5분 뒤에 도착이에요.”

―알겠어요. 대문 앞에 나가 있을게요.

희원은 막상 5분 뒤에 도착이라는 대답을 뱉고 나니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운전대를 쥔 손에 땀이 촉촉이 배었다.

* * *

“희원 씨! 왔어요?”

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기준이 희원의 차가 정차하니 조수석에 얼른 올라타려고 차 문을 열었다.

“이게 뭐예요? 설마 박 여사 주려고 꽃 샀어요?”

기준이 조수석에 놓인 꽃다발을 제 허벅지 위에 올리고 앉았다.

“저번에 내 차 희원 씨가 주차한 곳 알죠? 거기에다 주차하면 돼요. 근데 희원 씨 정말 빈손으로 와도 된다니까요. 설마 또 뭐 샀어요?”

“다 와 계세요?”

희원은 선물에 관해서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는 목이 타서 컵 홀더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빨았다.

“와 있을 게 뭐 있어요, 다들 추석 명절 내내 모여 있었는걸요. 원래 형은 명절 당일에만 왔다가 아침만 먹고 사라지는데 이번에는 희원 씨 인사하러 온다고 해서 어제 와서 지금까지 집에 있어요. 다른 식구들은 명절 내내 본가에 있는 편이고요.”

“루세 씨는요? 루세 씨는 본가에 안 가요?”

희원은 원래 루세가 그의 본가에 가야 하는데 괜히 희원 때문에 가지도 못한 거 아닌가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 몰랐구나. 해준이 배우자는 부모님이 일본에 계세요. 그래서 명절 내내 여기 있다가 맛있는 거 바리바리 싸서 집에 가곤 해요. 안 그래도 본가에 와 있는 날이 많아요. 내가 말했잖아요. 박 여사랑 쿵짝이 맞아서 밖에 나가면 해준이가 아니라 루세 씨가 아들인 줄 안다고요.”

기준의 말대로 박 여사와 루세는 꽤 친해 보였다. 정말 모자간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희원은 저도 그렇게 친해질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희원은 기준이 가리킨 곳에 주차를 하고 안전벨트를 풀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기준이 그런 희원의 머리칼을 어루만지고 뺨을 끌어다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긴장 안 해도 돼요. 가볍게 식사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기준의 말에도 불구하고 희원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의지를 불태웠다.

“저 진짜 잘할게요.”

“그러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만약에요, 진짜 만약에, 제가 말문이 막힐 일이 있으면, 아니면 뭔가 실수할 것 같으면 꼭 기준 씨가 지원사격 해야 해요!”

희원의 말이 마치 전쟁을 앞둔 사람 같아서 기준은 웃었다. 비장하기가 그렇게 비장할 수가 없었다.

“전쟁 나가요, 희원 씨?”

“웃지 말고요! 정말 도와줘야 해요!”

정말 긴장했는지 평소보다 얼굴이 더 하얀 희원을 보며 기준이 아까 입을 맞춘 뺨이 아닌 반대쪽 뺨에 입을 맞췄다.

“알겠어요. 알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기준이 도와주겠다는 대답을 들은 뒤 희원은 그제야 안심하고 차 밖으로 나왔다.

“기준 씨 꽃다발 잠깐만 들고 있어요. 다른 것도 좀 있어서 꺼내야 해요.”

“진짜 말 안 들어. 아무것도 안 사도 된다니까요.”

기준이 트렁크에서 꺼내는 물건들에 기함을 했다.

“기준 씨보다는 덜 샀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이것만 좀 들어 줘요.”

기준은 벌써 다섯 개가 넘는 쇼핑백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말을 더럽게 안 듣지만 그래서 사랑스러운 애인이었다.

“어머니, 희원 씨 왔어요.”

기준이 현관에 들어서며 외치자 박 여사가 얼굴에 함지박만 한 미소를 달고 버선발로 뛰어나오듯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어서 와, 희원아.”

“안녕하세요, 어머니.”

도대체 언제부터 얼마나 연락을 했으면 둘은 마치 어제 만난 사람들같이 인사했다. 주방에서 박 여사와 같이 있던 루세도 나와서 반갑게 인사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죠, 얼른 오세요.”

뒤이어 희원과 몇 번 본 적이 있는 해준과 이준이 인사를 했다. 이제 남은 이는 이 회장뿐이었다. 희원이 왔다는 소식에 이 회장이 저쪽 방에서 나왔다. 희원은 무릎이 덜덜 떨렸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안녕하세요, 이희원입니다.”

희원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 회장은 언론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차가운 얼굴이었다. 언론에서는 대외용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굴은 매서워 보였다. 희원은 지금 자신이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어서 와요.”

이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안으로 들라는 눈짓을 했다. 기준이 희원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때였다. 2층에서 누군가가 우다다다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오고 있었다.

“선생님!”

랑일이가 전속력으로 뛰어 희원에게 달려들었다. 희원이 양손에 있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랑일이를 받아 안았다.

“우리 애기! 그렇게 달려오면 위험하다고 몇 번을 말했어.”

하지만 랑일이는 매번 있었던 일이기에 그런 말에는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희원의 목에 손을 두르고 꼭 끌어안았다.

“선생님, 왜 왔어요?”

몸을 떼고는 정말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아이의 순수한 물음이었다. 이렇게 식구들이 다 같이 있는 날 희원이 할머니네에 찾아온 게 랑일이는 그저 이상하면서도 좋았다.

“우리 랑일이 보고 싶어서 왔지.”

“정말요?”

희원의 대답에 랑일이의 광대가 움찔움찔 움직이더니 입꼬리가 쭉 올라가며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랑일이랑 밥도 먹고, 랑일이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도 하러 왔지.”

“큰아빠랑 작은아빠랑 작은마미도 있는데요?”

“응. 다 같이 저녁 먹으려고 왔어.”

“진짜요? 우아! 신난다!”

랑일이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희원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버릇처럼 희원의 뒷머리를 꼼지락꼼지락 만졌다. 식구들은 랑일이가 생일 때 선생님 같은 마미를 갖고 싶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저렇게 좋아하니 그런 말이 나오고도 남았다.

“문 앞에서 이러고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희원아, 안으로 들어와. 그런데 뭘 이리 많이 사 왔어?”

박 여사가 희원을 잡아끌며 응접실로 안내했다. 희원이 안겨 있는 랑일이를 옆에 내려놓고 소파에 앉으려고 했는데 랑일이가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이랑 같이 앉을래요.”

“랑일아, 선생님이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잠깐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옆에 앉아 있거나 다른 곳에서 놀다가 오면 안 될까?”

“으으응.”

랑일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희원에게 더욱 달라붙었다. 기준은 이런 랑일이의 행동에 익숙해져 떼어 낼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그건 박 여사도 마찬가지였다. 희원이 난처한 얼굴로 기준을 바라봤지만 기준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희원 씨라고 했나요?”

이 회장의 질문에 희원이 랑일이를 안은 채 잔뜩 긴장했다.

“랑일이가 만날 선생님 이야기를 하더니만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네요. 우린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앉아요. 어차피 여기에서 랑일이를 이길 사람은 없으니까.”

이 회장의 말에 희원이 고개를 숙여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표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 당연히 랑일이는 희원에게 꼭 매달린 채였다. 랑일이는 몇 번 더 희원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이 회장을 바라봤다.

“할아버지!”

“그래, 랑일아.”

“나 추석 선물 생각했어요!”

뜬금없는 추석 선물 이야기에 희원이 어리둥절해서 기준을 쳐다봤다.

“아직 랑일이가 명절 선물 못 받았거든요. 뭐 받고 싶은지 얘기 안 하더라고요. 그래, 랑일아. 뭔데? 할아버지께 달라고 말씀드려.”

기준이 랑일이를 부추겼다. 그러자 랑일이가 그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선생님이요! 선생님이 마미였으면 좋겠어요!”

뒤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던 해준이 살며시 랑일이와 눈을 맞췄다. 그러자 랑일이는 자신의 생일 때 해준이 사람은 선물로 받을 수 없는 거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작은아빠, 사람은 선물로 받을 수 없어요?”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은 랑일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해준이 랑일이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이리 와. 작은아빠랑 이야기할까?”

“으응.”

눈썹이 축 처져서도 랑일이는 희원의 품을 떠나 해준에게 갔다. 지금 랑일이에게는 사람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해준은 랑일이를 안고 돌아서며 이제 천천히 말씀 나누시라는 표정을 지었다. 해준의 배려에 희원이 고개를 살짝 숙이는 걸로 그에 감사를 표했다.

응접실에는 기준의 부모님과 기준, 희원만이 남았다.

“랑일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희원 씨를 좋아하는군요.”

“네, 그런데 아버님, 말씀 낮추셔도 됩니다.”

“추후 천천히 하지요.”

“네.”

박 여사는 희원에게 처음부터 호감을 보였던 것에 반해 이 회장은 박 여사만큼 친근하게 굴지는 않았다. 사람을 찬찬히 뜯어보는 듯한 눈빛에 희원은 허리를 곧게 폈다.

“인사하러 왔다는 건 단순히 연애를 하겠다는 뜻은 아닐 테고요.”

“네, 그렇습니다. 기준 씨와 조금 더 먼 미래까지 생각하고 있어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아무래도 평범한 집안은 아니니까요.”

이 회장은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원래 재벌가는 정재계(政財界) 모임이 많은 거 알고 있습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희원이 무릎 위에 올린 주먹을 꽉 쥐었다 풀었다. 긴장으로 손에 땀이 배었다.

희원은 기준이 자신의 집안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과 자신이 기준네 집안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건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아무리 기준이 평소에 희원만 아는 사랑꾼처럼 행동한다고 해도 그는 태생이 재벌가 사람이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기준이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고요.”

“아버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셔서 그래요?”

결국 듣다 못한 기준이 말을 잘랐다. 희원은 그러지 말라고 기준의 허벅지를 살짝 쥐었다 놓았다. 하지만 기준은 모른 척하고 제 아버지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네, 저 기준 씨와 나중에 결혼까지 생각합니다. 저는 재벌가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유치원 교사일 뿐입니다. 아버님께서 보시기에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것도 압니다.”

“희원 씨.”

기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희원이 그 시선을 모른 척했다.

“아직 서로를 알아 가는 중이고 이제 연애가 한창인데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게 어찌 보면 오버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주제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준 씨가 재벌가라고 해서 제 직업을 버리고 내조만 할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제 직업 때문에 기준 씨가 사업하는 것에 나 몰라라 하지도 않을 겁니다.”

“재벌가라고 해서 드라마에나 나올 것처럼 본가로 들어와서 내조만 하라고 할 생각 없어요. 그 부분은 안심해도 좋아요.”

“감사합니다.”

말한 그대로였다. 희원은 유치원 교사가 제 천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일이 너무 바쁜 나머지 기준과 랑일이를 등한시할 생각도 없었다. 희원은 그런 면에서는 욕심이 많아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었다.

“우리 루세도 잘나가는 퓨전 요릿집 사장이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준이네 처가 들어온다면 그때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재벌가이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정재계 모임이 많고 그러다 보면 동반 모임도 많다는 거죠. 그런 모임에 참여할 수 있겠어요?”

그런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네, 가능합니다.”

“요즘 이기준이 연애에 푹 빠져서 그런 모임들에 일절 코빼기도 안 비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아버지.”

기준이 다시 이 회장을 불렀다.

“내 말이 틀렸니?”

“여보, 그만해요. 이기준이 언제 이렇게 연애를 해 보겠어요? 이제야 좀 인간다워져서 난 좋은데. 희원아, 저녁 먹으러 가자.”

“거참, 사람 이야기하는 중인데.”

“됐어요. 꼰대처럼 왜 이렇게 사람 앞에다 두고 일장 연설을 하려고 그래요? 희원이가 알아서 어련히 잘할까. 희원아, 나가자.”

박 여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희원의 손을 잡았다.

“애 긴장해서 손 차가운 것 좀 봐요. 자리 정리하고 다 나와요. 기준아, 아버지 모시고 나와.”

“네.”

박 여사는 희원의 손을 잡아끌고 다시 현관으로 향했다.

“정원에서 밥 먹을 거야. 식탁 앞에서 딱딱하게 먹는 것보다는 정원에서 자유롭게 먹는 게 더 편할 거야.”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긴장 많이 했어? 뭘 그렇게 떨어?”

“아, 아니에요.”

희원이 웃어 보였다. 박 여사는 저보다 훨씬 키가 큰 희원에게 손을 뻗어 하얗게 질린 얼굴을 쓰다듬었다.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더 하얘진 거 봐. 혹시라도 마음 쓰이는 이야기 있어도 마음에 담지 마. 이씨 집안 남자들이 별로 말할 줄을 몰라서 그런 거니까.”

“네, 걱정 마세요.”

“그래, 그중에서도 이기준이 제 아빠랑 가장 많이 닮아서 화법이 똑같은데, 기준이가 희원이한테는 잘해 주지?”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준이 희원의 마음에 상처를 준 적은 없었다. 그는 다정하고 말 한마디를 해도 신중하고 따듯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말씀도 마음에 담지 마. 알겠지, 희원아.”

“괜찮아요, 어머니. 다 좋은 말씀, 알아 두어야 할 말씀 하신걸요.”

“어디서 이런 복덩이가 굴러 들어왔을까?”

박 여사는 희원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반면 응접실에 남은 두 사람 사이에는 냉랭한 기운이 가득했다.

“좀 알아봤다.”

“무슨 얘기 하시려고요?”

희원이 박 여사에게 이끌려 마당으로 나간 사이에 기준과 이 회장은 둘이 마주 앉은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집안은 교육자 집안이고 경제적인 것도 괜찮더구나.”

기준은 들어나 보기로 했다. 아버지가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 어머니한테 말하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메가 페로몬에 문제가 있다고.”

“뭘 새삼스럽게 그러세요? 제가 희원 씨 데리고 한의원 간 게 언제부터인데요?”

“아이는 안 가질 셈이냐?”

“아버지, 가족계획은 제가 알아서 해요.”

기준은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랑일이가 태어난 후에 유해졌다고 해도 이 회장은 아직까지도 놀을 경영하는 그룹 총수이자, 장사꾼이었다.

“아버지, 저는 랑일이 외에는 생각 없어요. 물론 희원 씨 사이에서 아이가 또 있으면 좋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랑일이가 받아들일 문제는 생각 안 하세요?”

“흠!”

이 회장이 헛기침을 했다.

“장남인 랑일이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하고 계신 거예요? 나중에 형이 오메가 데리고 오면 그때 가서 생각하세요.”

“놀은 랑일이 거다.”

“아버지, 랑일이가 가지면 물론 좋겠지요. 하지만 전문 경영인도 생각해 보셔야 해요. 지금 다독다독이랑 놀책처럼요.”

다독다독과 놀책은 놀의 자회사였다. 그리고 그 두 곳은 현재 이준이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해준이 발을 담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주주들이 있었고 사장이 따로 있었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알겠어요. 하나만 부탁드릴게요. 희원 씨 앞에서 오메가 페로몬 어쩌고 이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래.”

“그리고 어쨌든 인사하러 온 사람이잖아요. 좀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기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랑일이가 2층에서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할아버지!”

“녀석, 뛰다가 넘어지면 어쩌려고.”

이 회장은 보통의 할아버지들처럼 랑일이를 품에 꼭 안았다.

“할아버지, 선생님은요?”

“선생님은 정원에 계시지. 우리도 나가 볼까?”

“네! 아빠도 빨리!”

랑일이가 기준과 이 회장을 재촉했다. 뒤에서 해준이 설이를 데리고 내려왔다.

“루세 씨는?”

“루세는 벌써 정원으로 나갔지. 아마 엄마랑 형수랑 신이 났을걸?”

해준은 언제부터인가 희원을 형수라고 불렀다. 같은 남자지만, 그렇다고 희원 씨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나저나 랑일이한테는 뭐라고 설명했어?”

랑일이는 이미 이 회장과 정원으로 나가고 난 뒤였다. 기준이 설이를 받아 안고는 해준에게 물었다.

“내가 잘 설명해 뒀지.”

“뭐라고? 우리 아들이 누구 고집 닮아서 자기가 납득이 안 되면 계속해서 이해할 때까지 물어볼 텐데?”

“누구 고집? 형?”

그에 기준이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잘 설명했어. 나가서 랑일이가 형수한테 뭐라고 하는지 들어 봐.”

해준은 개구지게 웃으며 먼저 신발을 신고 기준의 품에 안긴 설이에게도 신발을 신겼다.

현관을 나왔을 때 이미 정원에서는 고기를 굽고 있었다. 군침이 돌게 하는 고기 냄새가 가득했다.

“희원아, 이것 좀 먹어 봐. 이번에 선물 들어온 한우인데 우리 희원이 주려고 뒀지.”

박 여사는 희원이 이 자리가 어렵지 않도록 살뜰히 챙겼다. 그리고 이 회장이 랑일이를 품에 안고 다가가자 옆자리를 내주었다.

“여기 앉아요. 우리 랑일이는 어디 앉을래?”

“마미 옆에요!”

“응?”

희원이 랑일이를 쳐다봤다. 랑일이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었다.

“작은아빠가 이제 마미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어요. 집에서만요.”

희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놀랐지만 안 될 말은 아니었다.

“작은아빠가 이미 선생님은 가족으로 랑일이한테 온 거래요. 선물로 온 거라고 했어요. 사람을 선물로 받을 수는 없지만 이번에는 음 뭐였지? 뭐라고 했죠 작은아빠?”

해준이 이렇게 저렇게 설명한 모양이었다. 아직 어려서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똑똑한 랑일이는 이미 핵심은 다 이해한 거였다.

희원이 웃으며 랑일이를 품에 안았다.

“맞아. 선생님이 랑일이한테 선물인 거야. 그리고 우리 랑일이도 선생님한테 선물인 거야. 고마워 랑일아.”

여러 사람의 마음을 따듯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 * *

아침부터 빗방울 듣는 소리가 나더니 금세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버스에 탄 희원은 대번에 눈앞을 가로막는 빗줄기에 몸이 푹 가라앉는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 유치원까지 오는 길에 우산을 때리던 빗방울이 결국 우수수 소리를 내며 불어 댄 바람에 같이 휩쓸려 희원의 온몸을 흠뻑 젖게 만들었다.

희원은 아무 가게 밑에나 들어가서 비를 긋고 싶었지만 출근길이 바빠 그러지도 못한 채 척척히 젖은 바지를 끌고 유치원 앞에 다다랐다.

“희원 쌤! 오늘 날씨 뭔 일이래요?”

5세 부담임 선생님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차 갖고 오셨어요? 그래도 비 안 맞으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희원은 얼른 대문을 열고 부담임 선생님부터 안으로 들어가게끔 했다.

“조금만 늦게 나왔어도 영락없이 도로에 갇힐 뻔했어요. 그나저나 희원 쌤 옷 왜 그래요? 완전 쫄딱 젖었는데?”

“괜찮아요. 다행히 여벌 옷 있어요.”

희원은 웃으며 안으로 들어서서 재빨리 행동했다. 아침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면 그날은 분주하고 복잡했다. 우선 아이들이 평소보다 줄줄이 늦게 올 게 뻔했고 그러다 보면 등원이 몰려서 서로 우산으로 치고 비에 맞고 난리 법석일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금요일에는 아이들도 피곤한지 등원 시간이 여느 날에 비해 늦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아마 더할 게 분명했다.

[희원 씨, 출근했어요? 비 많이 와서 걱정되네요.]

기준의 메시지였다. 아침나절은 기준도 바쁘기 때문에 연락하는 게 좀처럼 쉽지 않은데 아무래도 버스를 타고 출근길에 올랐을 제 연인이 염려스러웠던 모양이다.

[네, 저는 출근했어요. 기준 씨, 비 많이 와요. 운전 조심히 해요! 이 메시지 읽고 답 안 보내도 돼요!]

아마 기준도 운전 중에 잠시 신호에 걸린 틈을 타 메시지를 보낸 것일 테다. 희원 역시 연인의 안전을 바라며 재빨리 답을 보냈다.

“희원 쌤, 오늘 왜 차 안 갖고 왔어요? 새벽부터 비가 계속 오긴 했는데.”

“차 막힐까 봐요.”

희원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비 오는 날에는 신발이고 바지고 비에 젖는 것보다는 차 갖고 편하게 오는 게 더 나아요.”

희원은 비 오는 날 차가 막힐 것 같으면 더 일찍 나오곤 했다. 지각이라곤 해 본 적이 없었다. 늘 유치원에 제일 먼저 와서 문을 열고 정리하는 이가 희원이었다. 오늘이 궂은 날씨임에도 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유가 있어서였다.

“정말 하늘에 구멍 난 것처럼 와요!”

선생님들이 한두 명씩 출근하며 조용했던 유치원은 금세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들어오는 사람마다 어깨도 흠뻑, 신발도 흠뻑 젖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비에 젖은 선생님들은 유치원에 예비해 둔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따듯한 차와 커피를 마셨다.

“오늘 엄청 정신없을 것 같아요.”

선생님들은 저마다 오늘 하루가 무사하길 바랐다. 희원은 선생님들의 담소를 들으며 행여 바닥에 물이라도 떨어졌을까 봐 열심히 걸레로 훔쳤다. 비가 오는 날은 어디서 어떻게 아이가 미끄러져 넘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선생님! 애들 오기 시작해요!”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시간을 확인해 보니 이제 아이들이 등원할 시간이었다. 희원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커다란 우산을 펼쳐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거센 바람이 우우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안녕하세요!”

희원이 바람 소리보다 더 커다란 목소리로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우산을 두드리는 빗줄기에 콩이 볶아지는 듯 후드득 소리가 났다.

희원은 아이들이 비에 젖지 않게 우산을 최대한 아이들 쪽으로 기울여 주었다. 부모들이 아이들 손에 우산을 들려 주었지만 작은 몸은 강한 바람에 이리 휘청 저리 휘청 막무가내로 휘둘렸다.

“선생님! 비가 막 와요! 다 젖었어요!”

아이들이 울상을 하며 말했다. 희원은 아이들을 얼른 제 몸에 딱 붙이고는 우산을 더 기울여 주었다.

“천천히. 절대 뛰면 안 돼.”

희원은 아이들을 계단까지 올라가게 해 주었고 그러면 계단 위에 있던 선생님들이 커다란 수건으로 아이들을 한 명씩 닦아 주었다. 그야말로 등원부터 도떼기시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이 한차례 들어오고 난 뒤에야 선생님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희원도 그제야 한숨 돌리고 대문 안쪽이 아닌 바깥쪽으로 이동했다. 강한 바람과 함께 미친 듯이 퍼붓던 비도 조금 잦아들었다. 그래 봐야 온몸은 홀딱 젖었지만 말이다. 소란스러움이 좀 잦아들자 희원은 그제야 한기를 느꼈다.

“선생님!”

저 멀리서 랑일이가 첨벙첨벙 뛰어왔다. 조금 자란 랑일이는 얼마 전 희원이 사 준 핑크색 장화를 신고 달려왔다.

“랑일아, 조심히. 뛰지 말고 천천히.”

희원이 말했지만 들을 랑일이가 아니었다. 랑일이는 도다다다 소리가 들릴 정도로 달려와서 희원에게 늘 그랬듯이 안기려고 했다.

“랑일아, 잠깐만.”

“선생님, 안아 주세요!”

랑일이는 버릇처럼 희원에게 팔을 벌렸다. 하지만 희원은 아침 내내 이리저리 비를 맞았기에 여기저기 젖어 있었다. 그대로 안았다가는 랑일이 옷도 젖을 것 같았다.

“선생님 옷이 젖어서 지금은 못 안아 주겠는데, 랑일아.”

“음, 그럼 나도 비 맞을래요!”

랑일이가 당장이라도 우산을 옆으로 치울 것 같아서 희원이 기함을 하고 커다란 우산을 온전히 랑일이에게 기울였다. 아까보다는 비가 그쳤지만 그래도 여전히 적잖은 비가 내리고 있었던 상태라 희원은 비를 뒤집어쓰는 꼴이 되었다.

“희원 씨!”

놀란 기준이 자신의 우산을 희원에게 씌웠다.

“이랑일. 비 맞으면 감기 걸려. 얼른 들어가!”

“그래, 랑일아. 어서 들어가자. 선생님이 옷 갈아입고 많이많이 안아 줄게!”

랑일이가 희원을 올려다보자 희원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랑일이가 배시시 웃으며 계단으로 폴짝폴짝 뛰었다. 가는 곳곳마다 물웅덩이의 물이 여기저기 튀었다.

“선생님, 랑일이 좀 닦아 주세요!”

희원이 계단 위에 있는 부담임 선생님한테 부탁하고 기준의 우산을 똑바로 쥐게 해 주었다.

“왜 이렇게 젖었어요?”

“아침부터 비 많이 왔잖아요.”

“감기 걸리는 거 아니에요?”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근데 날씨 이래서 오늘 저녁에 괜찮을까요? 어차피 자가용으로 움직이니까 다들 상관없겠죠?”

“네, 괜찮아요. 그치만 조금이라도 희원 씨 몸이 안 좋거나 그러면 안 가도 돼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 정도 비에는 전혀 문제없으니까요. 늦어요, 그만 가요.”

오늘 저녁에는 모임이 있었다. 가족 모임도 친구 모임도 아닌 기준의 일적인 모임이었다. 이 회장이 말하던 정재계 모임 중 하나로 파트너 동반이었다.

기준은 어렵게 말을 꺼내며 동반 모임이기는 한데 기준의 나이 또래만 모이는 자리라서 오히려 이편이 더 편할 거라고, 하지만 희원이 싫으면 안 가도 된다고 했다. 희원은 흔쾌히 함께한다고 대답했고 그게 오늘 퇴근 후 밤이었다.

“유치원에 여벌 옷 있어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아침에 바지를 한차례 갈아입어서 티셔츠는 있지만 바지가 없었다.

“말리면 돼요.”

희원이 어색하게 웃고는 어서 가라고 기준의 등을 떠밀었다. 기준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차로 걸어갔다. 가나 보다 싶어서 희원은 손을 흔들어 배웅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기준은 차 뒷좌석에서 뭔가를 꺼내 들고는 다시 희원에게 왔다.

“왜 안 가요?”

“이거로 갈아입어요. 혹시나 해서 차에 두고 다니던 희원 씨 옷이에요. 들어가자마자 갈아입어요.”

희원이 얼떨결에 받아 들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갈게요. 이따 원 실장이 데리러 올 거예요. 저녁에 봐요.”

“네, 운전 조심해요!”

희원은 쇼핑백을 끌어안고는 기준의 차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 * *

일이란 끝이 없었다. 추석 명절 대목이 끝나자 이제는 연말연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 전에는 크리스마스도 있었다. 기준은 여러 부서에서 올라온 기획안을 살펴보며 피로한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똑똑. 노크 소리에 기준은 그제야 서류에서 보던 시선을 문 쪽으로 향했다.

“네.”

문을 열고 원 실장이 안으로 들어섰다.

“이사님, 도련님은 지금 사모님이 데리고 가셨다고 합니다. 희원 님 옷은 도착한 상태이고, 헤어 숍은 6시로 예약해 둔 상태입니다. 이사님 자리도 예약해 두었으니 일 마치시고 이동하시면 됩니다. 희원 님 먼저 모시러 가면 될까요?”

“저도 지금 퇴근할 겁니다.”

기준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하지만 원 실장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힐긋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5시 반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리 대목이 지났다고 해도 기준은 바빴다. 그 말인즉 아직 퇴근할 때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사님, 아직 5시 반밖에 되지 않았고, 이사님 예약 시간은 6시 반입니다.”

원 실장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요즘 제 상사가 연애를 하더니만 자꾸만 일을 안 하고 퇴근만 하려고 해서 원 실장은 고역이었다. 그렇다고 이전같이 일에 미쳐서 내내 야근만 하던 때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더 이상 할 것도 없고 처음 가는 헤어 숍에 희원 씨 혼자 보내는 것도 좀 그렇습니다.”

원 실장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더 이상 할 게 없는 게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리고 어린애도 아닌데 혼자 헤어 숍에 보내는 게 뭐 어떻다는 건지 원 실장은 속에 담아 둔 말들을 내뱉고 싶었다.

하지만 요즘 이기준 이사가 많이 유해졌다고 해도 그는 언제든 예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기준 이사를 젊은 시절부터 모셔 왔던 원 실장은 그에 대해 빠삭했다.

“오늘이 금요일이라 지금 퇴근하시면 일이 월요일로 밀릴 텐데요.”

“아…….”

원 실장은 좀 안도했다. 이 이사가 생각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자신이 틀렸다는 깨달았다.

“각 팀에 기획안들 건질 거 없으니까 다시 써 오라고 알리세요. 그럼 퇴근합시다.”

기준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나 앞서 이사실을 나갔다. 안면에 경련이 일 때까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미소를 짓던 원 실장의 입꼬리가 축 처졌다.

“하아, 이사님이 얼른 결혼을 하시는 게 낫겠네.”

원 실장은 한탄하며 서둘러 이사실을 벗어났다.

* * *

“희원 씨.”

기준의 차를 기다리고 있던 희원은 차 앞모습이 보이자마자 준비하고 있다가 뒷좌석에 올라탔다. 오늘은 여느 때와는 달리 기준이 운전하지 않고 원 실장을 대동했다. 모임이 있을 때는 그리한다고 했다.

“아침에 비 맞았는데 몸은 괜찮아요?”

“네.”

자리에 앉자마자 기준이 물었다. 살짝 컨디션이 별로이기는 했지만 희원은 표현하지는 않았다. 기준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도 싫었고 저 때문에 행여 모임에 못 가게 되어 기준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싫었기 때문이다.

기준이 손을 뻗어 와서 희원은 놀라 뒤로 몸을 뺐다.

“이마가 약간 뜨거운 것 같은데요? 혹시 열 있는 거 아니에요?”

희원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에요. 기준 씨 손이 차가워서 그런걸요.”

“그런가요?”

기준은 제 손을 뺨에 대 보기도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희원을 끌어다 제 품에 안았다.

“기준 씨?”

희원이 앞에 운전하고 있는 원 실장을 의식해서 기준의 어깨를 손으로 밀어냈다.

“페로몬 향도 좀 나는 것 같은데요.”

“기준 씬 이제 제 향에 익숙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평소에도 조금 난다고 하잖아요.”

희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화제를 다른 것으로 돌렸다.

“그런데 그런 곳에 처음 가 보는 거라서 좀 걱정되긴 해요.”

“걱정할 것 없어요. 내 옆에 잘 붙어 있으면 돼요.”

“기준 씨가 어련히 잘할 거라 믿지만, 혹시 제가 뭔가 실수하면 어쩌죠?”

“그럴 일 없어요. 걱정하지 마요. 희원 씨는 평소처럼만 사랑스러우면 돼요.”

기준은 걱정하는 희원을 안심시키면서도 헤어 숍으로 가는 내내 그런 자리에는 피앙세가 함께하기는 하지만 꼭 그런 관계가 아니더라도 오곤 한다, 그러니 자신이 소개해 주는 사람하고만 인사하면 된다, 아무나하고 말하면 안 된다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희원 씨,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네.”

기준의 말이 조심스러워서 희원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었다.

“사람들한테 제가 희원 씨를 약혼자라고 표현해도 될까요?”

희원은 기준이 너무 조심스럽게 말해서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안 될까요? 아직 약혼도 안 해서 그건 좀 그럴까요? 그냥 연인이라고 할까요?”

기준이 여러 번 물었을 때 그제야 희원은 정신을 차렸다.

“아니에요. 말해도 돼요. 괜찮아요.”

“다행이다. 고마워요, 희원 씨.”

기준이 부드럽게 웃었다. 원래도 다정한 그이지만 오늘따라 배는 더 다정한 것 같았다.

“다 왔습니다, 이사님.”

이윽고 둘은 헤어 숍에 도착했고 조금 더 이런 문화에 익숙한 기준에 의해 속전속결로 일이 진행되었다. 모임은 8시부터였고 장소는 호텔이었다. 금요일이라서 차가 막힐 테니 조금 서둘러야 했다.

“이사님, 옷도 도착했습니다.”

“그래요, 수고했어요.”

한 시간 정도가 흐른 뒤 기준은 희원을 보고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원래도 희원은 자세가 곧고 피부가 하얀 데다가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전문가의 손에 의해 꾸며 놓으니 더욱 빛을 발했다.

“희원 씨, 만날 이런 정장만 입혀 놓고 집에 두고 싶어요.”

기준은 희원에게 바짝 다가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희원은 눈가를 찌푸리며 실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기준은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지 자각이 없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희원 씨, 정말 예뻐요. 어쩌면 이렇지? 오늘 모임 가서 꼭 제 옆에만 붙어 있어야 해요. 알았죠?”

“알겠어요.”

“가요.”

기준과 희원은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름만 들어 봤지 와 본 적은 없는 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 그제야 희원은 또 다른 현실 속에 놓였음을 깨달았다.

그래, 이 사람이 재벌이었지.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기업의 후계자이지. 희원은 그런 생각을 하며 기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넓고 곧은 등, 뭐 하나 움츠러들지 않은 모습은 그가 원래부터 모든 것을 가진 상태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을 입증하는 듯했다. 당당하며 어찌 보면 오만했다. 그 모습은 마치 3월 초 기준을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게 했다.

모든 아이들을 편견 없이 대하려고 하는 희원이라고 해도 맡은 아이의 할아버지가 유치원이 소속된 기업의 회장이고 그 아버지가 차기 주인이라고 하면 신경 쓰이기 마련이었다. 그게 어떤 식의 신경이든 말이다.

입학 상담을 할 때 박 여사가 왔고 희원이 아닌 원장이랑 상담을 했기에 아는 정보는 없었다. 그래서 희원은 첫날 더 긴장했다. 냉랭한 시선과 굳은 표정, 날카로운 눈빛을 기억한다.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 위에 있었던 사람만이 갖는 당당함과 오만함, 그 자연스러움도 기억한다.

랑일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린애 같지 않았던 모습이 선명하다.

다섯 살짜리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다니다가 유치원에 왔어도 첫날은 낯설어하고 그중에는 우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데 랑일이는 의젓함을 넘어서 아이 같지가 않았다. 예의 바르게 말하며 곧은 자세를 유지하는 모습에 희원은 그날 아침에 봤던 기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뒤로도 얼마 동안은 랑일이의 모습에서 기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반듯하고 예의 바르나 어딘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모습을 말이다.

“희원 씨.”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희원은 기준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기준을 바라봤다. 그가 변함없는 미소로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희원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얼른 그의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 긴장했어요?”

희원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나란히 서기는 했지만 옛 기억이 떠오르며 왠지 처음 기준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위화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진짜 페로몬 향이 조금 나는 듯한데 괜찮은 거죠?”

희원이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기준은 희원의 등에 살포시 손바닥을 갖다 대고는 다시 한번 웃어 보였다.

“파파라치가 있을 수도 있는데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안에 들어가서도 나만 믿고 따라와요.”

희원이 주먹을 꼭 쥐었다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은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여기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파파라치 좋은 일만 잔뜩 시키는 것보다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선 희원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기준이 모임 이야기를 꺼냈을 때 희원은 흔쾌히 승낙을 해 놓고는 며칠 동안 이곳에 올 법한 인물들을 포털에 검색해 봤다. 그 인물들이 정말 눈앞에 있는데 희원은 현실성이 없어 반걸음 뒷걸음쳤다.

“희원 씨.”

“네?”

“손잡을까요? 아니면 팔짱 낄래요?”

눈앞에 있는 인물들은 옆에 파트너를 동반하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서로 잔을 들고 간단한 요기를 하기도 하고 삼삼오오 모여 사업 이야기로 보이는 듯한 대화를 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커플도 몸을 붙이고 있거나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있지는 않았다.

“괜찮아요.”

“얼굴색이 좀 창백한데 괜찮아요?”

희원은 오늘 하루가 좀 고되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비만 안 왔으면 희원도 방싯방싯 웃을 텐데 어째 벌써부터 살짝 피곤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희원은 기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이 이사!”

누군가 기준을 보며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기준은 입꼬리만 살짝 올려서 인사를 했다.

“그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만 파트너 동반이라고 하니 떡하니 나타났네?”

“인사해. 내 약혼자.”

“뭐?”

남자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뒤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한 무리에게 말했다.

“야, 이기준이 피앙세랑 왔다.”

그 무리에 있는 사람들도 놀란 표정으로 기준을 쳐다봤다. 기준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들 놀라? 어쨌든 인사해. 내 약혼자야. 희원 씨, 인사해요. 여기는 빵집 아들, 여긴 과자집 아들, 여기는 옷집 아들…….”

기준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앞에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점점 굳어지는데 기준의 얼굴에서는 장난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너는 문방구집 아들이냐!”

빵집 아들이라고 소개된 남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잔말 말고 인사해.”

기준은 앞에 선 다섯 명을 대충, 정말 귀찮다는 듯이 소개했다. 다섯 명의 남자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착실하게 희원에게 인사를 했다. 희원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희원입니다.”

“그런데 어디 집안 분이세요? 모임에서 한 번도 뵌 적이 없는데.”

희원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였다.

“알아서 뭐 하게? 우리 같은 가겟집 자식 아니니까 함부로 할 생각 하지 마. 교육자 집안의 귀한 아들이야.”

“와, 이기준 벌써부터 말 한마디 못 붙이게 하면서 위하는 것 좀 봐. 그나저나 뭐 좀 드실래요?”

기준이 차갑게 이야기해도 기준의 친구들로 보이는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칵테일 드실래요?”

과자집 아들이라고 소개된 남자가 칵테일 한 잔을 희원에게 내밀었다. 과자집이라고 소개된 기업은 사실 50년 전통의 제과 회사임을 희원은 나중에 알았다. 기준이 정확한 회사명을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희원은 잔을 받고 눈웃음 지으며 인사했다.

“이기준, 오늘 피앙세 소개해 주려고 온 거야?”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할 건데?”

희원은 기준의 옆에서 조용히 있다가 가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목을 끄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기준의 친구들뿐 아니라 그들과 동반한 파트너들도 희원을 힐긋거렸다. 그중에는 부러워하는 듯한 시선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시선도 있음을 희원은 눈치챌 수 있었다.

“아직 결혼 날짜는 안 잡았어.”

기준이 대답하자 친구들은 청첩장 찍으면 꼭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희원은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기준이 소개한 이가 아니니 기준의 친구는 아닌 게 분명했다. 눈을 마주친 것은 분명 찰나였다. 하지만 희원은 그 시선이 절대 우호적이지 않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모임 중에서 본 기준의 모습은 색달랐다. 한결같이 무심한 표정과 차가운 눈동자로 관망하는 듯 바라보고 있지만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달라붙었다.

모여든다기보다는 달라붙는다는 표현이 더 적합했다. 누구든 기준과 인사를 나누고 싶어 했고, 뭔가 사업적으로 깊어지기를 원했다.

“희원 씨, 괜찮아요? 지루하거나 재미없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기준은 희원이 들고 있는 잔을 빼앗아 들며 물었다.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기준 씨 일하는 모습 보니까 색달라요.”

“색달라요? 뭐가요?”

희원과 함께하는 기준은 다정하고 따듯했지만 일을 하는 기준은 반대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매섭고 냉철했으며 그래서 그 모습이 섹시하기까지 했다.

“그냥요.”

희원은 웃음을 머금고는 고개를 저었다. 기준이 희원의 생각을 듣고 싶어서 궁금해하며 조금 더 안달 내려고 할 때였다.

“이 이사님?”

누군가 기준을 불렀다. 기준이 웃는 표정을 싹 지우고 뒤돌아봤다.

“이게 누구십니까? 언제 들어왔어요?”

기준이 눈앞에 선 여인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희원은 여인을 보는 순간 우아한 한 떨기 꽃과 같음을 느꼈다. 기준보다는 서너 살 위인 것 같은 그녀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심플한 디자인임에도 불구하고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보름 전에 입국했어요. 잘 지냈어요? 어떻게 더 멋져진 것 같네요.”

희원은 자신도 모르게 기준에게서 두어 걸음 떨어졌다. 기준과 자신 사이에 벽이 하나 생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희원에게 잔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희원이 잔을 받지 않고 그 사람을 쳐다봤다. 조금 전의 그였다. 한 무리에 있었지만 기준이 끝까지 희원에게 소개를 해 주지 않았던 남자.

“받아요.”

“괜찮습니다. 이미 많이 마셔서요.”

희원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아쉽네요.”

남자는 희원과 시선을 피하지 않고 술을 입에 머금었다. 남자의 시선은 꼭 뱀 같았다. 희원을 평가하듯 찬찬히 훑는 시선이 소름 끼쳤다.

“아니면 설마 이기준이 먹는 것 하나하나 간섭해요? 혹시 허락받고 먹어야 한다거나.”

“아니요.”

남자는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 희원에게 조금 다가와 속삭였다. 희원은 별로 이 남자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기준이 직접 소개해 주었던 가겟집 친구들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이 사람은 벼린 칼날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분위기가 서늘했고, 우호적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적대적이었다.

“그런데 말이죠.”

남자가 두어 발자국 더 다가왔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희원은 피하지도 못했다.

“혹시 베타예요?”

“네?”

갑자기 형질 이야기가 나와서 희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기준이 이번엔 재혼이라 그런가? 향이 안 나네?”

희원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가 말하는 ‘향’이 기준의 알파 향인지 아니면 희원에게서 아무것도 맡지 못한다는 뜻인지 애매모호했다.

하지만 그 둘 다 해당되는 상태라 희원은 멈칫했다. 요즘은 희원과 기준 둘 다 바빠 서로 관계를 한 지 오래되었고, 그러는 바람에 희원을 뒤덮었던 기준의 알파 향이 사라진 지 좀 되었다. 그리고… 희원은 여전히 페로몬 문제를 겪고 있어서 향이 나지 않고 말이다.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나랑은 말도 섞기 싫다는 건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이기준이 말하는 것도 허락받고 말하래요? 그래, 이기준?”

언제 왔는지 기준이 희원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희원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기준이 희원의 팔을 잡아 제 뒤로 숨겼다.

“내 피앙세랑 인사하고 싶었어? 내가 별도로 소개 안 해 줘서 서운했나 봐? 주제도 모르고.”

남자가 주먹을 꽉 쥐었다 펴는 게 보였다. 분노가 페로몬을 통해 넘실거리는 걸 희원도 느낄 수 있었다. 희원이 기준의 소맷자락을 꾹 잡았다.

“이기준은 여전히 지금이 신분제 사회인 줄 아나 봐?”

“아무리 평등한 세상이 왔다고 해도 이 바닥에서는 아니지. 안 그래?”

“아, 그래서 이번에는 베타랑 결혼하려고? 그 잘난 네 꼬마 도련님이 나중에라도 첩의 자식한테 밀릴 것을 걱정해서?”

기준이 자신의 페로몬을 풀어 남자의 페로몬을 짓이기듯 눌렀다. 자신의 소맷자락을 잡고 있는 희원의 손끝이 떨려 오는 걸 기준은 느끼고 있었다.

“그런 걱정 하지 마. 첩이라니?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자격지심 아닌가? 인사는 이만하면 된 것 같은데.”

기준이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렸다. 남자는 뭔가 분하다는 듯이 쌩하니 그 자리를 떴다.

“희원 씨?”

희원의 얼굴이 하얬다. 기준의 소맷자락을 잡고 있는 손이 아까보다 더 떨렸다.

“희원 씨.”

“아, 괜찮아요.”

희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희원의 페로몬이 울렁거리는 파도와도 같았다. 기준만이 느낄 수 있었다. 기준이 미간을 좁히며 제 페로몬을 밟듯이 눌렀다.

“나갈래요? 걸을 수 있겠어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이 뭔가를 참는 듯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요.”

희원은 벌써 가도 되냐고,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거냐고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수가 없었다.

“희원 씨, 조금만 참아요.”

희원의 상태가 안 좋은 걸 눈치챈 기준이 희원의 손을 꽉 쥐었다.

기준은 호텔 룸으로 올라가자마자 희원의 이마를 만졌다.

“희원 씨.”

“괜찮아요.”

희원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이마가 뜨끈뜨끈했다.

“희원 씨, 계속 몸이 안 좋았던 거예요?”

“아니에요. 조금 쉬면 괜찮아요.”

희원은 힘든지 기준에게 몸을 기댔다.

찰나였다. 기준네 집안 식구들이 애용하는 백화점집의 딸이었다. 희원이 박 여사를 우연히 만났던 그 백화점 말이다.

원래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백화점의 마케팅 팀을 맡고 있다가 5년 전에 더 공부를 하고 싶다고 이탈리아로 나갔다. 기준보다는 네 살 정도 위였지만 원래 집안끼리도 아는 관계였고 어릴 적부터 이런저런 모임에서 자주 봐 와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잠시 동안 대화를 했을 뿐인데 그 잠깐 동안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희원 씨, 좀 누워요.”

기준은 희원을 침대 위에 눕혔다. 희원은 자꾸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단순히 오후까지는 비를 맞아서 컨디션이 안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하아.”

희원이 더운 숨을 내쉬었다.

“희원 씨, 많이 아파요? 의사 부를까요?”

“괜찮아요.”

희원은 몸을 모로 돌리고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기준이 희원의 옆에 앉아서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옷 벗고 편하게 누워요.”

“조금만 누웠다가 씻고 잘래요. 지금은 좀 어지러워서요.”

돌아누운 등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지금 기준이 할 수 있는 건 그 등을 다독여 주는 것뿐이었다.

“미안해요. 조금 더 잘 챙겼어야 하는데.”

“아니에요. 기준 씨 바쁜데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요.”

“그 새끼, 아니 그 자식, 아니 걔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잊어버려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자꾸 뜨거웠다. 심장이 빨리 뛰는 것 같기도 했다.

“P 자동차 아들이에요. 지금 후계자이기는 한데 원래는 걔 형이 후계자였어요. 걔랑은 이복형제. 우리 형이랑 친구이기도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교통사고 나서 먼저 갔어요. 그 뒤에 그 새끼가 올라갔어요.”

희원도 들은 적이 있었다. P 자동차 장남의 죽음, 그리고 계속되는 P 자동차의 내리막길.

“걔가 열성 알파에 회장님이 상처하고 그다음에 걔 엄마랑 재혼한 거거든요. 밖에서 낳아 온 자식도 아니고 재혼해서 생겼는데 걔는 어릴 적부터 마치 사생아인 것처럼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형이 너무 잘났으니까 그런 걸 수도 있고, 그 새끼 능력이 달려서 그런 걸 수도 있는데 그걸 모르더라고요.”

“그 사람이 심하게 말한 것 없었어요. 괜찮아요, 기준 씨.”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희원은 그 남자가 했던 말들을 하나하나 다 기억한다. 기준이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제약을 두냐, 혹시 베타냐, 재혼하는 이유가 베타라서, 애를 낳을 수 없어서 그런 거 아니냐, 그 이유가 랑일이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애가 태어날까 봐 그런 거 아니냐…….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걸 희원은 처음 깨달았다. 그저 기준이 좋고, 랑일이가 예뻤다. 단순히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페로몬 문제를 기준도 알고 있고, 그 문제로 인해서 희원이 난임일 수도 있다는 것도 기준은 알고 있기에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준은 평범한 집안이 아니었다. 그걸 간과했다.

“혹시 기준 씨.”

“네, 희원 씨.”

“제가 페로몬 문제가 있는 것과는 별개로… 랑일이를 위해서라도 우리 사이에는 랑일이만 있는 게 낫겠지요?”

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기준과 눈을 맞췄다. 기준이 찰나였지만 인상을 썼다.

“내가 아까 그 새끼를 조지지 못한 게 여기서 한이 되네. 기다려요. 아주 밟아 버리고 올 테니까.”

기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란 희원이 기준의 팔을 붙잡았다.

“기준 씨!”

“희원 씨, 미안한데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올게요.”

기준이 희원의 손을 떼고는 웃어 보였다. 하지만 평소 보여 주었던 다정한 미소가 아니었다. 눈빛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기준 씨, 미안해요. 내가 잘못 말했어요.”

“아니에요. 희원 씨는 잘못한 거 없어요. 빨리 갔다 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기준 씨!”

“내가 이 씨발 새끼를 아주 박살을 내 버려야지. 어디서 뚫린 입이라고 내뱉으면 다 말인 줄 아나. 괜찮아요. 10분이면 돼요.”

10분이고 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준은 여전히 상큼하게 웃으며 희원의 손을 도닥였다. 누가 보면 이 앞에 있는 편의점에 가서 음료 좀 사 올게요, 같은 일상적인 말을 내뱉는 것만 같았다.

“아, 미친 새끼가 아주 주제를 모르고, 뭐? 베타? 어딜 봐서 베타야. 눈깔이 삐었나. 첩의 자식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희원 씨, 걱정 마요. 5분이면 돼.”

기준의 알파 페로몬이 아주 승부욕으로 절절 끓는 상태였다. 희원은 이대로 기준을 보내면 정말 큰일 날 거라는 걸 직감했다.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희원은 할 수 없다는 듯 기준의 품에 폭 안겼다.

“희원 씨?”

“기준 씨, 나 씻고 싶어요. 기준 씨랑 같이요.”

그 순간 희원에게서 더욱 달콤한 페로몬이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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