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분주함 속에서도 그대가 있다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희원은 자신을 여전히 끌어안고 있는 기준의 팔을 조심스레 치우고 침대를 벗어났다. 자신을 찾듯 더듬는 손에 희원은 살짝 베개를 기준의 팔 사이에 끼워 주고는 이불도 잘 덮어 주고 거실로 나왔다.
식구들은 어젯밤에 했던 말처럼 죄다 집으로 돌아가고 텃밭에 가고 그랬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희원은 거실에 있는 욕실로 들어가서 간단하게 씻고 나와서 주방으로 향했다.
속이 쓰린 기준을 위해서 무얼 해 줄까 싶어서 살펴보니 아무래도 엄마가 해 놓은 듯한 콩나물북엇국이 있었다. 게다가 뚜껑 위에 엄마 필체인 게 틀림없는 글씨로다가 ‘이 서방 줘.’라고 쓰인 쪽지가 붙어 있었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더니 벌써…….”
희원이 피식 웃으면서도 제 사람 사랑받는 거에 신이 나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희원은 냉장고를 열어서 다른 반찬은 뭐가 있나 살폈다. 싱싱한 무가 있어서 그걸 꺼내어 생채를 만들기로 했다. 무가 술 마신 다음 날 해장하는 데 좋다고 한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달걀말이도 하기 위해 달걀도 꺼내 두었다.
희원은 기준이 행여 깰까 봐 최대한 소리를 죽여 가며 아침상을 차렸다. 그러고는 그가 잠들어 있는 자기 방으로 향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기준은 아직도 잠에 빠져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희원이 기준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다 머리칼을 매만졌다. 검은색 머리가 손끝에서 사르르 퍼졌다.
“잘생기기도 했다.”
검은 눈썹과 길고 살짝 올라간 눈꼬리. 이 눈이 번쩍 뜨이면 꽤나 차갑고 매섭게 보인다. 하지만 다정한 웃음을 걸치는 순간 얼마나 예쁘게 휘어지는지 희원은 안다. 풍성한 속눈썹은 겨울날 눈이 내리면 그 위로 눈이 쌓일 것같이 길었다. 랑일이도 꽤나 길던데 아마도 기준을 닮은 것 같았다.
“기준 씨.”
희원이 기준의 볼을 만지며 불렀다. 새벽에 깨서 씻고 다시 잠들었지만 어제 너무 많은 술을 마셔서 그런지 쉬이 깨지 않았다.
“기준 씨.”
희원이 한 번 더 불렀다. 붉은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오뚝한 콧날을 검지로 쓸었다.
“어쩌면 이렇게 그려 놓은 것 같지?”
기준은 마치 여자들이 틴트를 바른 것같이 입술이 선명하고 붉었다. 희원은 기준이 깨지 않자 이번에는 붉은 입술을 검지로 꾹 눌렀다. 기준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더니 스르르 눈꺼풀이 움직였다.
“기준 씨, 일어나서 밥 먹어요.”
“으응.”
잠이 덜 깬 기준이 희원을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희원의 몸이 쑥 끌려 기준을 덮치는 모양새가 되었다.
“기준 씨, 그만 일어나요.”
“잘 잤어요?”
이제 막 깨서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낮은 목소리로 잘 잤냐고 인사를 건네는데 희원은 심장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네, 잘 잤어요. 아침 차려 놨어요. 속 쓰릴 텐데 밥 먹어요.”
“밥이요?”
“네. 집에 아무도 없어서 우리 둘만 먹으면 돼요. 그만 일어나요.”
여행을 가서도 늘 기준이 먼저 일어나서 희원과 랑일이가 깰 때까지 기다렸는데 어제 기준은 꽤 많이 마셔서인지 아직도 미미하게 술 냄새가 났다.
“희원 씨랑 이러고 있으니까 정말 결혼한 것 같아요.”
기준이 자신의 위를 어쩌다 보니 점령하게 된 희원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결혼이라는 단어에 희원은 자신도 모르게 볼을 붉혔다.
“너무 좋다 정말.”
희원의 등을 쓰다듬던 손이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희원의 엉덩이까지 내려가 동그랗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주물렀다.
“흣! 기준 씨.”
“아무도 없는데 한 번만 하면 안 돼요?”
기준이 시커먼 속내를 드러내며 속삭였다. 희원이 기준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이미 기준이 허리를 바짝 당겨 안고 있어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기준은 희원의 허리를 한쪽 팔로 당겨 안고 한쪽 손으로는 엉덩이를 주물렀다. 희원은 기준의 맨가슴에 볼을 딱 붙이게 되었다.
“응? 희원 씨 먼저 먹고 그다음에 밥 먹으면 안 돼요?”
이제 막 자고 일어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기준이 페로몬을 풀어서 그런 건지 그의 향이 희원의 콧속을 파고들었다. 기준은 이제껏 페로몬을 풀기 전에 풀겠다고 언급하곤 했는데 아직 그런 말은 없었다.
“기준 씨, 페로몬 풀었, 으앗!”
기준은 희원이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몸을 움직여 희원을 밑으로 보내고 제가 그 위를 점령했다. 순식간에 바뀐 위치에 희원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준은 그대로 희원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갖다 댔다. 그러고는 희원의 말캉한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우리 희원 씨는 아침에 봐도 예쁘구나?”
희원이 눈썹을 찡그렸다. 기준이 살짝 찌푸려진 미간에 입을 맞추고는 희원의 한쪽 손을 잡아끌었다.
“희원 씨, 얘 좀 어떻게 해 줘요.”
아침이라서 본능적으로 발기한 성기가 드로어즈를 뚫고 나올 기세였다. 촘촘하게 짜인 근육 밑으로 이미 성기가 대가리를 들고 있었다.
“희원 씨, 응? 좆 터질 것 같아요. 한 번만 넣으면 안 돼요?”
“기준 씨, 밥 퍼 놨단 말이에요. 다 식겠어요.”
“나야말로 몸 달아오른 거 안 보여요? 이러다 다 식겠어요. 한 번만, 응?”
기준은 희원의 귓바퀴를 핥으며 낮은 목소리로 연신 졸라 댔다. 애처럼 칭얼거리는 기준에 희원이 고개를 모로 돌렸다. 목부터 귀까지 붉게 달아오른 희원은 손을 내려서 기준의 드로어즈 속으로 집어넣었다.
“하으.”
기준이 앓는 소리를 냈다. 벌써부터 등줄기를 타고 쾌감이 쭉 이어져 머리를 강타하는 것 같았다. 기준이 서둘러 자신의 드로어즈를 내리고 희원의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내렸다. 하얀 다리와 가랑이 사이에 자리한 분홍빛 성기를 보고 기준이 그대로 고개를 내렸다.
“흐읏!”
지금 기준에게 중요한 것은 아침 식사보다 더 꿀맛 나는 희원이었다.
희원의 오금을 잡고 다리를 들어 올린 기준은 망설이지 않고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씻은 뒤라 바디샤워 향이 은근히 나는 사타구니를 기준이 맛있다는 듯 핥으니 희원은 온몸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으읏!”
몸이 펄쩍 뛰었다. 기준이 입술을 모아서 도장 찍듯이 가랑이 사이 여기저기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연한 피부를 빨고 핥고 그러다 살짝 깨물 때마다 여지없이 몸이 튀어 올랐다.
“좋아요?”
기준이 움찔거리는 구멍을 바라보며 물었지만 지금 희원은 대답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흐잇!”
혀를 내어 꽃봉오리 같은 주름을 길게 핥자 희원이 신음을 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기준이 잡고 있는 희원의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페로몬 좀 풀게요.”
기준이 서서히 페로몬을 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희원도 페로몬을 풀었다. 아예 오메가인지 모를 정도로 향이 없던 희원도 요즘에는 기준에 맞추어 조금씩 제 향을 내기 시작했다. 몸을 점령하는 녹음의 향이 달콤한 열매를 움트게 하는 거였다.
“기준…….”
희원이 기준의 이름을 불렀다. 너무 자극적이었다. 그의 혀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불에 덴 것같이 뜨거웠다.
“으응.”
기준은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아직 풀어 주지 못한 구멍에 혀끝을 찔러 넣었다. 희원이 허리를 들썩거리며 그 자극을 피하려고 했지만 양쪽 다리가 기준에게 잡혀 있어서 그저 몸을 파드득거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냥, 기준 씨, 그냥 넣어, 줘요.”
여기서 더 자극을 주었다가는 그대로 쌀 것만 같았다. 차라리 기준의 성기로 휘저어 주며 그러는 가운데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조금만 더요.”
“흣! 쌀 것, 쌀 것 같아, 아아!”
희원은 밀려오는 사정감을 억지로 참으며 발바닥으로 기준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지만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기준은 말을 들어주지 않고 희원이 막 사정할 것 같던 그 찰나 고개를 들고는 희원을 한 번 힐긋 본 뒤 그대로 자신의 성기를 구멍에 갖다 댔다.
“바로 넣을게요. 싸지 않게 앞에 좀 막아 봐요.”
희원이 고개를 젓자 기준이 직접 희원의 손을 잡고는 요도를 막게 했다. 그러고는 희원의 골반을 양쪽으로 잡고는 허리를 거세게 밀어붙였다.
“아아!”
몇 번을 그와 몸을 섞어도 삽입하는 순간은 버겁기만 했다. 커다란 몽둥이가 몸을 가르고 들어오는 순간은 눈앞이 하얘졌고 머리가 울리는 것 같은 충격을 가져왔다.
“아파, 아파요.”
“미안해요. 읏! 힘 좀, 희원 씨 힘 좀 풀어 봐요.”
긴장으로 성기를 꽉 조이고 있는 내벽이 마치 성기를 잡아먹을 듯 달라붙었다. 기준은 커다란 손으로 희원의 말랑하고 하얀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그에 맞추어 잔뜩 긴장한 구멍도 서서히 힘을 풀었다.
“옳지 착하다. 이제 움직일게요.”
말이 끝나자마자 기준이 허리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로의 페로몬이 섞이면서 이미 희원의 뒤는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기준이 움직일 때마다 찌걱찌걱 물이 튀는 소리가 들리고 엄지로 억지로 막고 있는 요도 역시 프리컴으로 잔뜩 질척거렸다.
“으읏, 읏, 기준 씨, 살살. 아파, 아파요.”
자꾸만 거세지는 허리 짓에 희원이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는 애원했다. 하지만 기준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희원이 자신을 깨울 때부터 한껏 부풀어 오른 성기는 이제는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 같았다.
“윽, 희원 씨, 이제 같이 싸, 아아!”
요도를 막고 있는 희원의 손을 치우고는 기준이 빠르게 허리 짓을 이어 갔다. 몸을 바짝 붙이고 포악하게 움직이는데 잔뜩 선 희원의 성기가 기준의 배 위에서 비벼졌다. 그러면서 단단한 배 위에 물길을 만들었다. 그게 그렇게 야할 수가 없어 기준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안에 있던 성기를 급하게 끄집어냈다.
“아읏!”
기다랗고 굵은 성기가 내벽을 주르륵 긁으며 빠져나왔다. 희원이 몸서리를 쳤다. 기준은 희원과 자신의 성기를 마주 잡고는 그대로 비비기 시작했다. 서로의 성기가 얽히고설키며 결국 욕망을 분출했다.
“아아, 아.”
희원의 뺨이 분홍빛으로 잔뜩 달아올라서 더운 숨을 내뱉었다. 방에는 기준의 진한 알파 향과 기준만이 알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한 희원의 오메가 향이 섞여 들었다.
* * *
기준은 땀을 흘리고 욕망을 분출했음에도, 그리고 희원이 해 준 아침밥으로 해장을 했음에도 조금 술 냄새가 났다. 결국 희원이 기준의 차를 끌고 데려다주기로 했다.
“하아.”
기준이 조수석에 앉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왜요? 어디 불편해요? 아니면 속이 안 좋아요?”
희원이 걱정스레 옆을 바라보자 기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그래요?”
“이제 늙었나 봐요.”
“응?”
희원이 웬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연스럽게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했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다음 날 숙취라고는 없었는데 오늘은 술이 안 깨요.”
“그렇게 부어라 마셔라 하면 누구나 이 시간까지 술이 안 깨는 게 당연해요.”
“치, 냉정해.”
기준이 입술을 삐죽였다. 신호에 걸려서 정차하자 희원이 기준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또 랑일이 같다고 생각했죠?”
“이제 우리 기준 씨가 독심술도 할 줄 아네요?”
“왜 나랑 있을 때도 랑일이밖에 생각 안 해요?”
“어이고, 이렇게 질투가 심해서 어쩌려고 그래요.”
기준이 고개를 팩 돌리려고 하자 희원이 그대로 기준의 뺨을 잡고 짧게 입을 맞췄다. 타이밍 좋게 신호가 바뀌고 희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를 출발시켰다.
“희원 씨는 나를 너무 조련하는 것 같아요.”
“술 냄새 하나도 안 나요. 그냥 내가 태워다 주고 싶었어요. 기준 씨 어제 고생했으니까요.”
기준의 불평에 대해서는 전혀 대꾸하지 않고 희원은 제가 할 말만 했다. 기준의 입꼬리가 호를 그리는데 기준은 그걸 숨길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어제 우리 식구들 술 상대 하느라 고생했어요. 다음에 기준 씨 식구들과 식사할 때는 제가 할게요.”
“됐어요. 술 잘 못하잖아요.”
“그래도 점수 따려면 노력해야죠.”
기준이 희원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희원이 옆을 힐긋 돌아보고는 살짝 웃었다.
“희원 씨는 그 존재 자체가 선물이라서 따로 준비할 것도 노력할 것도 없어요. 우리 여사님이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나는 박 여사가 자꾸 희원 씨 불러낼까 봐 걱정이에요.”
“그게 왜 걱정이에요. 어머님이랑 친해지면 좋지요.”
“그러니까 그게 걱정이라고요. 루세 씨도 만날 어머니랑 붙어 다녀서 밖에서 보면 루세 씨가 아들인 줄 안다니까요. 해준이는 만날 쉬는 날마다 자기랑 안 놀고 박 여사랑 논다고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희원이 배시시 웃었다.
“이래도저래도 나한테 우선은 기준 씨예요. 걱정하지 마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미치겠어. 정말.”
“응?”
저 앞에 기준네 집이 보였다. 희원이 왜 그러냐고 묻자 기준은 잠시 대답을 않고 희원이 집 앞에 차를 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그러고는 희원이 시동을 끄고 내리려고 하자 그의 손목을 잡고는 품에 당겨 안았다.
“기준 씨. 왜요?”
“좀 안고 있을게요.”
희원이 기준의 등을 손으로 살살 매만졌다. 기준이 희원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눈을 맞췄다.
“진짜 내가 우선이에요?”
희원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죠? 어디서 예쁜 말만 배워 오나 봐. 희원 씨가 그렇게 예쁜 입술로 예쁜 말들 뱉을 때마다 나 심장 떨려서 죽을 것만 같아요.”
기준이 희원의 손을 잡아서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었다.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희원의 손에 전해졌다.
“느껴져요?”
“네.”
“그럼 내가 희원 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겠네요?”
희원이 배시시 웃더니 기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어서 들어가요. 집 안에까지 주차해 줄까요? 지금은 술 냄새 안 나기는 하는데.”
“데려다줄까요? 택시 타고 가기 힘들잖아.”
기준의 말에 희원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그렇게 종일 서로 데려다주고 또 데려다주고 그러려고요?”
“그럼 좋고요.”
기준의 대답에 희원이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기준도 조수석에서 내리고는 희원의 앞으로 다가왔다.
“택시 불러 줄까요?”
“콜 부르면 되고 올 때까지만 같이 기다려 줘요.”
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희원을 품에 안았다. 희원이 기준을 살짝 밀었지만 기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러다가 집에서 누구라도 나오면 어쩌려고요.”
“집에 보내기 싫어 죽겠어요. 결혼 전에 연애를 정말 원 없이 해 보고 싶은데 이렇게 또 집에 보낼 때는 결혼을 할까 싶기도 하고. 정말 사람 마음이 간사해.”
기준의 말에 희원은 동의했다. 둘의 연애 기간이 아직 짧아서 이런저런 추억을 많이 쌓고 서로의 소중한 시간과 기억을 만들어 가고 싶은데 이렇게 집 앞에서 헤어지는 그 순간이 참으로 아쉬웠다.
둘이 같은 생각을 갖고 한껏 아쉬워하고 있는데 그때였다.
“아빠! 어, 선생님이다! 선생님!”
저쪽에서 언제 들어왔는지, 차 한 대가 들어오더니 뒷좌석에서 창문이 내려지고 랑일이 목소리가 들렸다. 기준의 품에 안겨 있던 희원이 화들짝 놀라서 황급히 떨어졌다. 차 안에는 이준이 있었는데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피식 웃었다.
“이기준, 차 좀 안으로 집어넣어. 들어가게. 안녕하세요.”
이준이 운전석에서 고개를 빼고는 기준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희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희원 씨, 우리 형이요.”
“안녕하세요.”
문 앞에서 안겨 있다가 들킨 게 한없이 민망해서 희원이 인사를 하며 목 뒤를 긁었다.
“희원 씨, 주차 좀 해 줘요.”
“제가요?”
“응, 빨리요. 우리 형 성격 급해서 미적거리면 또 성질부려요.”
희원이 다시 운전석 쪽에 타고 기준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기준은 대문을 넘어 어디에다 주차하면 되는지 위치를 알려 주었다. 엄청 넓은 정원을 보며 희원은 옆에 앉은 이 남자가 재벌가 아들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금 느꼈다.
희원이 여유롭게 기준이 말한 공간에 차를 집어넣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예요? 응? 왜 그런 표정이에요?”
“어떻게 내 애인은 못하는 게 없지? 주차하는 희원 씨 보면서 새삼 또 반했잖아요.”
기준의 칭찬에 희원이 부끄러워서 고개를 모로 돌렸다.
“아, 집에 보내기 싫다.”
택시는 점점 도착할 때가 다가오고 기준은 희원이 가는 게 싫어서 그저 꼭 끌어안고만 있고 싶었다. 그때 옆에 주차를 한 이준의 차에서 랑일이가 급하게 내렸다.
“선생님!”
랑일이는 역시나 기준에게 오기보다는 희원을 먼저 찾았다.
“랑일아! 선생님 내릴 테니까 잠깐만 뒤로 가 주세요.”
“네!”
희원을 본 랑일이는 벌써부터 신이 났다. 발을 동동 구르며 희원에게 안길 준비 중이었다. 그러는 사이 기준이 차에서 내려서 랑일이를 쑥 안아 올렸다.
“아빠는 안 보고 싶었어? 어디 갔다 왔어? 큰아빠랑 아침 먹었어?”
기준이 랑일이에게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랑일이는 발을 구르며 기준을 밀어냈다.
“으응, 내릴 거야. 선생님한테 갈 거야.”
희원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랑일이가 달려와서 폭 안겼다. 희원이 웃으며 당연하다는 듯 랑일이를 안아 들었다. 이준이 차에서 내리며 그런 희원을 바라봤다.
“이기준, 안에 아무도 없어. 들어가서 커피라도 한 잔 드려.”
“선생님, 할아버지랑 할머니 어디 갔어요. 들어가서 나랑 놀아요.”
“그럴까요, 희원 씨? 희원 씨, 택시 취소해야겠다. 내가 취소해 줄게요.”
기준은 희원의 핸드폰을 자연스레 가져갔고 랑일이는 희원을 꼭 끌어안고는 버릇처럼 그의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들어오세요.”
이준이 앞장서며 희원을 안으로 안내했다. 압도적인 집의 크기에 희원이 주춤거렸다. 어느새 기준이 다가와서 희원의 등을 살짝 밀어 주었다.
“들어가요. 커피 마시고 조금 놀다가 집에 데려다줄게요.”
결국 데려다주고 다시 데려다주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아버지랑 어머니 어디 가셨어?”
“점심 약속 있다고 나가셨어. 커피 뭐 드실래요? 종류별로 있어서 뭐든 상관없어요.”
“희원 씨, 형이 커피 잘 내려요. 마셔 보면 시중에서 파는 거랑 다르다는 거 느낄 거예요. 형, 따듯한 거 두 잔 줘.”
기준의 말에 이준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너님 거는 네가 타서 드세요.”
그러면서도 이준은 잔을 세 개 꺼냈다. 그러고는 플라스틱 컵을 따로 꺼내어 거기에는 랑일이 우유를 따라 주었다.
“랑일이는 이거 마셔.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니면 이기준이 쓰던 방 구경하셔도 되고요.”
이준의 말에 기준이 희원을 끌어당겼다.
“집 구경할래요? 이리 와 봐요.”
희원은 여전히 랑일이를 안고 있다가 같이 일어섰다.
“이랑일, 선생님 힘드셔. 내려서 걸어.”
하지만 랑일이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더욱 몸을 붙이고 희원의 머리를 매만질 뿐이었다. 희원이 웃으며 그런 랑일이 엉덩이를 도닥여 주었다.
“형, 근데 진짜 아직까지 고양이 있네?”
어디에서 자고 있었는지 고양이가 계단에서 내려오다 기준을 보며 멈칫했다.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는 이준에게 말하니 이준이 대충 “어.” 하고 대답했다.
기준은 희원에게 “이 고양이가 말이죠, 아무래도 형이 썸 타는 사람 고양이인 것 같아요. 원래 저 인간이 귀찮아서 남한테 상관도 안 하는데 고양이까지 데리고 온 거 보면 꽤나 공들이는 모양이에요.” 하고 어떻게 된 연유인지 설명해 주었다.
희원은 랑일이를 안고 집 안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삼 형제가 다 독립한 상태인데도 그들이 쓰던 방은 마치 오늘 아침까지도 썼던 것처럼 모든 물건들이 갖추어진 상태였다.
기준의 방만 해도 그랬다. 옷장 속에 여분의 옷도 꽉 들어차 있었다. 랑일이가 어릴 때부터 썼다는 방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
“응?”
한창 구경 중인데 랑일이가 희원을 불렀다. 기준이 그렇게 내리라고 말해도 랑일이는 말을 듣지 않더니 실컷 안긴 다음에 스스로 품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도 희원의 손을 꼭 잡고는 놓지 않았다.
“선생님,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요?”
“응? 자고 가라고?”
“네.”
이제는 같이 자는 게 당연하다는 듯 랑일이가 말했다. 그에 희원이 기준을 쳐다보며 곤란한 듯 표정을 지었지만 기준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전혀 도와줄 생각이 없는 듯 구는데 마침 1층에서 이준이 커피 마시러 내려오라고 불렀다.
“랑일아, 일단 내려갈까?”
희원이 화제를 돌리며 랑일이를 아래로 내려보냈다. 그러고는 기준을 팔꿈치로 콕 찔렀다.
“왜 못 들은 척해요?”
“내가요? 다 들었죠.”
“그럼 왜 가만히 있어요.”
“나도 희원 씨랑 같이 있고 싶으니까.”
그에 희원이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팔자로 내리자 기준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알아요. 요즘에 외박 잦아서 곤란한 거. 오늘은 집에 고이 모셔다드릴게요. 랑일이도 이따가 잘 설득하고.”
랑일이가 계단을 내려가 시야에서 안 보이자 기준은 희원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손을 잡고 아래로 향했다.
식탁 앞에 앉자 이준이 기준과 희원 앞에 커피가 담긴 잔을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희원이 잔을 들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준도 살짝 고개를 숙여 답하고는 자신의 커피 잔을 챙겼다.
언제 내려왔는지 계단 위에서 한창 경계 중이던 고양이는 이제 이준의 발치에서 그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이준은 주머니에서 고양이 간식을 꺼내 들고는 주방을 벗어나며 말했다.
“다음에 또 뵈어요.”
희원이 일어나서 다음에 또 뵙겠다고 같이 인사를 했다.
“이기준, 오늘 집에 가?”
“응, 이따가 가려고. 쉬어. 알아서 갈 테니까.”
“그래. 다음에 선생님 오실 때 연락 줘. 시간 빼 놓을게.”
옆에서 듣고 있던 랑일이가 이준을 쳐다보며 말했다.
“큰아빠, 다음에 또 고양이 데리고 와요?”
“글쎄, 형아한테 물어볼게.”
“다음에 그 고양이 주인도 집에 데려와.”
기준의 말에 이준이 인상을 쓰며 쳐다보자 기준이 얄밉게 어깨를 올리며 웃었다. 희원이 없었으면 분명히 이준이 욕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이준이 고양이까지 집에 데려올 정도면 상대가 꽤나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미 자기 아래 두고도 남았을 이이준이 여태 노력하고 있다는 건 상대가 이전 파트너들과는 다르다는 의미였다.
왠지 희원의 등 뒤에서 약을 올리고 있는 듯해서 이준은 기준을 한 번 더 노려봤다. 기준은 여전히 장난기가 가득한 웃음을 달고 제 형을 모른 척했다.
“선생님, 다음에 뵈어요. 랑일이 잘 가고.”
“네, 다음에 뵐게요.”
“큰아빠, 안녕.”
이준이 랑일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드리자 랑일이가 짧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이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나서 고양이에게 츄르를 보이고는 커피를 들고 위로 올라갔다. 고양이는 야옹거리며 이준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형님이랑 기준 씨랑 많이 닮았어요.”
“응, 형이랑 저는 어머니 닮았거든요. 막내는 아버지 닮았고요.”
“형님이랑 많이 친해 보여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웃었다.
“친한 편이에요. 여느 재벌가랑은 다르긴 하죠. 그래서 나는 희원 씨가 나밖에 몰랐으면 좋겠어요. 우리 집 식구들은 언제 연락해서 친한 척 굴지 모르거든요.”
기준의 말에 이번에는 희원이 웃었다. 이렇게 집착하는 사람인 줄 몰랐는데 희원이 본 기준은 꽤나 독점욕도 강하고 소유욕도 강했다.
“기준 씨 식구들하고 나랑 친해지면 좋은 거 아니에요?”
“분명히 나 빼고 만나려고 할걸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희원 씨…….”
기준이 뭔가를 말하려고 하면서도 뜸을 들였다. 그새 랑일이는 다시 희원의 허벅지 위에 올라와 있었다. 희원은 버릇처럼 랑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기준에게 말해 보라고 눈짓했다.
“식구들한테 핸드폰 번호 안 알려 주면 안 될까요?”
“네?”
“아니다, 이미 박 여사는 알던데. 그럼 식구들한테 핸드폰 번호 알려 주고 그 뒤에 다른 번호로 바꿀까요?”
희원이 진심으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되겠죠?”
기준이 혀를 차고는 자기도 민망한 듯 커피를 마셨다. 희원은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기준의 집착이 큰일인 게 아니라 기준의 저런 모습이 자꾸만 귀엽게 보여서 큰일이라고 말이다.
희원이 아무 대꾸도 안 하고 커피만 마시니 기준이 슬슬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알았어요, 안 할게요.”
희원은 그래도 대답을 안 하고 커피를 마저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기준이 희원이 마신 잔을 치우며 다시 눈치를 살폈다. 희원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입술을 꽉 물고 참아 내며 랑일이를 안고 일어났다.
“자꾸 귀여워지면 어쩌자는 거예요, 정말.”
희원이 대꾸하지 않자 불안해하던 기준은 희원의 말에 금세 웃음을 되찾고는 그의 뒤에 바짝 붙었다.
* * *
추석처럼 긴 연휴를 달고 있는 그달은 기준에게 바쁘기만 한 달이었다. 아이들은 생일이어도,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이어도,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이어도 한결같이 선물을 원했고 그 말은 곧 기준에게는 대목임을 뜻했다.
“원 실장님, 마케팅 팀 윤 부장 올라오라고 좀 해 줘요.”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마케팅 기획안을 읽으며 한숨 쉬던 기준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손목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우리 희원 씨 보고 싶네.”
랑일이는 이미 박 여사가 데리고 본가로 갔고 기준은 9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인데도 퇴근하지 못하고 회사에 붙잡혀 있는 꼴이었다. 8월 중순부터 9월 추석까지는 늘 바빴고 그게 올해도 되풀이되는 것이지만 연애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올해의 기준에게는 새삼 짜증을 유발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결국 기준은 참다못해 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준 씨, 퇴근했어요?
“아니요. 아직이요.”
―저녁은요?
“아직이요.”
희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기준은 당장이라도 이사실을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녁도 안 먹고 일한다고요?
“희원 씨, 나 정말 칼퇴하고 싶어요.”
진심으로 이기준 사전에는 없던 칼퇴근이 하고 싶어졌다. 너무나도 제 연인이 보고 싶었다. 저녁도 아직 안 먹은 상태였지만 밥을 먹기보다는 희원을 끌어안고 커피 또는 술이나 한잔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힘들어서 어떡해요.
“밑에 희원 씨만큼 일 잘하는 직원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때 원 실장이 마케팅 팀 윤 부장이 올라왔다고 말했다.
“희원 씨, 전화 끊어야 할 것 같아요.”
―네. 기준 씨, 이따가 운전하기 힘들면 내가 데리러 갈까요?
그 말만으로도 힘이 났다. 하지만 제가 힘들다고 하루 종일 아이들과 씨름한 제 연인을 불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아요. 너무 힘들면 희원 씨 보러 집 앞으로 갈 테니까 얼굴만 잠깐 보여 줘요.”
―응. 힘내요. 사랑해요.
“나도요. 진짜 끊어요.”
기준은 희원과 전화를 끊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 * *
“무슨 회사가 밥도 안 먹이고 야근을 시켜?”
희원이 뾰로통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희원의 말은 묘하게 어폐가 있었다. 밥을 안 먹인 게 아니고 기준이 안 먹은 거고, 야근을 당했다고 하기에는 기준이 앉아 있는 위치가 있었다.
“일을 시키려면 뭐라도 든든하게 먹여야지.”
희원은 샌드위치를 만들면서 연신 투덜거렸다.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기준이 한 끼 안 먹는다고 쓰러질 위인인가? 하지만 사랑에 빠진 이는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어제도 커피 한 잔으로 때웠다고 하더니만 오늘도 그러고.”
그거야 예민한 이기준이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입맛이 없던 터라 거른 거지만 희원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기에 희원은 기준과 ‘예민’이라는 단어를 매치시킬 수가 없었다.
기준이 밥도 안 먹었다는 소리를 하는 순간부터 부리나케 주방으로 달려가 냉장고 문을 열고 샌드위치를 만들기 시작한 희원은 온 마음을 다해 정성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이미 9시가 넘었지만 그래도 뭔가를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희원은 얼른 먹을거리를 장만해서 그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가끔 기준이 늦게까지 일하면 희원이 나서서 랑일이를 맡아 주곤 했는데 이번에는 야근이 꽤 길어질 것인지 기준이 희원을 애초부터 말렸다.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니 랑일이는 이번엔 본가에 맡기겠다고 말이다. 기준의 말이 희원은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다 했다!”
희원은 예쁜 도시락 통에 샌드위치를 담았다. 그러고는 과일도 예쁘게 깎아서 다른 통에 담았다. 녹즙도 하나 챙겼다.
“아주 냉장고를 갖다가 주지 그래요?”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희원이 깜짝 놀라서 돌아봤다. 언제 왔는지 소리도 없이 형수가 뒤에서 희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형수, 놀랐잖아요!”
“어떻게 사람이 들어와서 아까부터 구경하고 있는데 모를 수가 있어요?”
“언제 오셨어요?”
희원이 시간을 확인했다.
“샌드위치 담을 때부터 와 있었죠.”
“그럼 인기척이라도 좀 내지 그랬어요?”
“도련님 하는 짓이 귀여워서 구경 좀 했어요. 동영상 찍어서 이기준 씨 보여 줘야 하는데.”
형수가 잔뜩 장난기 서린 표정으로 웃었다.
“그런데 형수는 이 밤중에 웬일이에요?”
“김치 가지러 왔어요. 어머니가 겉절이 하셨다고 해서요.”
“진짜요? 나는 왜 몰랐지?”
형수가 웃으며 김치 냉장고를 열어서 살피더니 말했다.
“여기 있네요. 좀 줘요?”
“네?”
“지금 이기준 씨한테 가는 거 아니에요? 가는 김에 좀 갖다줘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형수의 말에 희원은 웃으며 커다란 반찬통을 찾아 내밀었다. 형수가 소리를 내어 웃기 시작했다.
“아, 우리 도련님 연애하면서 정말 더 귀여워졌구나. 원래 친정 냉장고는 딸이 털어 간다고 했는데 어머니네 냉장고는 우리 도련님이 다 털어 가게 생겼네요.”
희원이 눈을 흘기면서도 형수한테 붙어 놀리지 말라고 치댔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형은 결혼도 일찍 하는 바람에 희원은 형수를 학생 시절부터 봐 왔다. 그래서 그런지 멀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형수 성격 자체가 털털하고 호방했다.
“근데 형수는 지금 퇴근해요?”
“네, 돈 버는 게 쉽지 않죠.”
이 집이나 저 집이나 다들 벌어먹기 위해 애쓴다고 희원은 생각했다. 사장이나 이사 정도의 위치면 조금 여유를 부려도 좋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형수나 기준이나 그럴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치 차에 실어다 드릴까요?”
“괜찮아요. 조금만 갖다가 먹을 거예요. 어머니가 갓 했을 때 먹어야 맛있다고 그러셔서 퇴근길에 들른 건데 우리는 식구도 적고 형이 겉절이 이런 거 다 직접 하잖아요. 그냥 제가 어머니 음식 좋아하니까 맛만 보려고 들른 거예요. 차에 싣는 건 제가 도련님 도와야 할 판인데요. 뭐가 이리 많아요?”
그러고 보니 뭔가 짐이 많았다. 가볍게 샌드위치만 싸려고 했는데 과일에 녹즙에 이제는 김치까지 있다. 희원이 민망해져서 배시시 웃었다.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뭐를요? 김치 훔쳐 가는 거?”
“그냥 이것저것 다요.”
형수가 웃으며 짐을 하나 들어 주었다. 그렇게 둘은 같이 차로 향했다.
기준네 회사 앞에 도착했을 때는 10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요즘 기준은 퇴근하면서 전화를 하곤 했는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여전히 사무실인 듯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희원은 전화를 미리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네, 이기준입니다.
“기준 씨?”
―아, 희원 씨. 잠시만요. 이것 좀 처리해 주세요. 최대한 빨리.
정신이 없는 듯했다.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 확인도 못 하고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희원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옆의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리는 기준의 말투는 정중하면서도 차가웠다. 한껏 예민해진 데다 신경이 곤두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희원 씨?
“네. 기준 씨. 아직도 많이 바쁜가 봐요.”
―미안해요. 지금 급하게 처리할 게 있어서요.
그래도 어제까지는 10시 전에는 일을 마치고 퇴근했는데 오늘은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아직 일이 많이 남았어요?”
―아니에요. 이제 정리하려고요. 잠깐만요.
옆에 사람이 있는지 대화 소리가 들리고 기준의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이거 누가 작성하셨죠? 이렇게 대충 할 거면 아예 처음부터 다른 사람한테 넘기세요.
희원은 핸드폰을 쥐고는 차창 너머로 건물 위를 올려다봤다. 바쁘다고 하더니 정말로 커다란 건물 곳곳에 불이 켜져 있었다.
“다들 바쁘게 사는구나.”
희원이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기다렸죠?
“괜찮아요. 기준 씨, 일 보세요. 밑에서 기다릴게요.”
―네?
희원은 기준이 바쁜 것 같아서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는 용건만 간단히 말했다. 그에 기준이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차 갖고 왔어요. 밑에 있으니까 천천히 일하고 내려오세요.”
―희원 씨가 왔다고요?
“네. 저 신경 쓰지 말고 일 다 하고 내려오세요.”
―알았어요, 얼른 하고 내려갈게요. 먼저 끊을게요.
정말 바쁜지 기준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끊긴 전화를 보고 희원이 웃었다.
“천천히 일하고 내려오랬더니 뭘 얼른이야. 말 안 들어, 정말.”
그렇게 정확히 30분 뒤에 기준이 빠른 걸음으로 차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희원은 반가워 차에서 내려 기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새까만 어둠이 깔린 거리는 지나다니는 차도 사람도 얼마 없었다.
“고생했어요, 기준 씨.”
희원이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반기자 기준의 발걸음이 이제는 뛰다시피 했다. 그러더니 희원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희원이 놀라서 주변을 둘러봤다.
“기준 씨, 회사 사람들…….”
“하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여태 야근하던 사람들인지 하나둘 건물 밖으로 파김치가 되어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 희원이 기준을 밀어냈다. 하지만 기준은 더 힘을 주고 희원을 당겨 안은 뒤 목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쉬었다.
“기준 씨…….”
“잠시만요. 조금만…….”
“사람들이 봐요.”
“내가 내 애인이랑 좀 안겠다는데 뭔 상관이에요. 하아,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희원은 말려서 될 일도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저 손을 들어 기준의 너른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늦게까지 일하느라 힘들었죠?”
“그것보다 애인 보고 싶어서 종일 힘들었어요. 회사 그만둘까 봐요.”
기준의 어리광에 희원이 품에 안겨서 소리 내어 웃었다.
희원은 기준의 허벅지 위에 도시락 통을 올려놔 주고 부드럽게 차를 움직였다.
“먹고 싶은 것 먹어요. 샌드위치도 있고, 과일도 있고, 녹즙도 있어요.”
“희원 씨가 만들었어요?”
“네.”
희원이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자연스럽게 오른쪽 차선으로 들어갔다. 기준이 그런 희원을 빤히 쳐다봤다.
“왜요?”
희원이 기준을 힐긋 쳐다보고 다시 앞을 보며 물었다.
“퇴근하고 만든 거예요?”
“아까 기준 씨랑 통화하고 나서요.”
“그 짧은 시간에?”
“샌드위치 만드는 데 뭘 얼마나 걸린다고요.”
기준이 녹즙을 입에 물고는 눈을 감았다.
“피곤해요?”
“괜찮아요. 눈이 좀 뻑뻑해서요.”
“좀 잘래요? 집까지 가는 동안 좀 자요.”
“그럼 희원 씨가 싸 준 도시락 못 먹잖아요.”
희원은 그게 뭐 어떠냐는 듯 오른손으로 기준의 눈을 살짝 덮었다가 뗐다. 여전히 체온이 낮은 희원의 차가운 손바닥이 기준의 눈꺼풀 위에 내려앉자 기준은 그것만으로도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도시락은 나중에 먹어도 되잖아요. 피곤하면 좀 자요. 도착하면 깨울게요.”
“그래도 힘들게 쌌는데…….”
“괜찮아요. 힘들지도 않았어요. 기준 씨 위해서 싸는 도시락이 뭐가 힘들겠어요. 좀 자요.”
기준은 녹즙만 마시고는 결국 잠이 들었다. 희원은 그새 조금 마른 듯한 기준의 얼굴에 속이 상했다.
“회사 일은 혼자 다 하나.”
물론 직급이 높아질수록 연봉도 높아지고 그만큼 책임져야 할 일도 많다는 걸 알고 있다. 게다가 기준의 성격으로 봐서는 회장님 아들이라고 해도, 차기 놀의 주인이라고 해도, 뭐 하나 허투루 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말랐잖아.”
기준은 살이 빠지면 얼굴부터 빠지는 편이라 티가 금방 날 뿐인데 사랑에 빠진 연인의 눈은 이미 가려졌기 때문에 그저 모든 게 안쓰러울 뿐이었다.
희원은 한숨을 폭 쉬면서도 제 연인이 짧은 시간이나마 좀 눈을 붙일 수 있도록 안정되게 운전했다.
집 앞에 도착한 희원은 곤히 잠든 기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떻게 이렇게 잘생겼지?”
신이 기준을 만들 때 콧대에 무척 신경을 쓴 것 같았다. 눈은 어떻고. 날카롭고 차가워 보이는 눈이 다정한 눈빛을 띨 때 희원은 심장이 요동치곤 했다. 붉은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을 때는 심장이 발밑으로 데구루루 굴러떨어지는 느낌이었고, 관능미가 넘치는 목소리는 늘 희원의 가슴을 간질거리게 했다.
“기준 씨.”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빨리 자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희원은 기준의 팔을 살짝 흔들었다.
“으응.”
“기준 씨, 다 왔어요. 들어가서 자요.”
잠에서 깬 기준이 화들짝 놀라 허리를 곧추세웠다.
“아, 미안해요. 잠들어 버렸네요.”
“뭘 미안해요. 눈 좀 붙이라고 했잖아요. 다 왔어요. 들어가서 자요.”
기준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었다. 희원도 따라서 차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트렁크 문을 열고 기준을 불렀다.
“기준 씨, 이거 갖고 들어가요.”
자신이 싸 준 도시락을 품에 안고 있는 폼이 귀여워서 희원이 눈을 좀 찡그렸다. 대놓고 웃으면 왠지 삐칠 것 같아서 입술을 꾹 물고는 트렁크 속 김치 통을 노려봤다. 기준이 다가와서 트렁크 속을 바라봤다.
“이게 뭐예요?”
“김치요.”
“냉장고 털어 왔어요?”
기준이 자신이 들고 있는 도시락을 한 번 보고, 김치 통을 한 번 봤다.
“설마요. 엄마가 겉절이 했다고 해서 조금 담아 왔어요. 기준 씨 저번에 보니까 잘 먹는 것 같아서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소리 내어 웃다가 결국 희원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렇다고 냉장고 털어 오지 마요.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나 어머니께 미운털 박혀요. 차라리 내가 희원 씨네로 밥 먹으러 갈게요.”
희원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와서 또 말도 안 듣고 술독에 빠지려고요? 걱정하지 마요. 우리 집에서 기준 씨 미운털 박힐 일 없어요. 얼른 이거 갖고 들어가서 쉬어요.”
기준이 희원을 빤히 바라봤다.
“왜요?”
“집에서 자고 갈래요? 내가 내일 아침에 유치원까지 태워다 줄게요.”
희원이 기준을 가만 바라보며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응? 같이 자고 출근해요, 우리.”
“잠만 자요.”
“그럼 잠만 자죠. 또 뭐가 있어요?”
그 표정이 그렇게 능글맞을 수가 없었다. 희원이 살짝 째려보고는 기준의 품에 안긴 도시락을 빼앗아 들었다.
“약속 지켜요.”
“내가 뭘 한다고 그랬나?”
기준이 트렁크를 닫고 희원 대신 주차를 했다. 희원은 이미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집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누가 보면 집의 주인이 희원인 줄 알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기준 씨, 뭐 좀 먹을래요?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을까요?”
기준이 희원과 마주 서고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날카로운 눈꼬리를 달고 있지만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기준이 희원의 뺨을 살짝 잡고는 입술을 마주했다. 늘 촉촉한 입술이 피곤해서 그런지 살짝 까칠했다.
“내가 집에 왔을 때 이렇게 희원 씨가 반겨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희원 씨가 유치원 끝나고 집에 왔을 때 내가 희원 씨가 지금 나한테 했듯 반겨 주고 싶어요.”
기준은 희원을 끌어다 품에 안았다. 희원의 목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하아, 오늘 정말 피곤하고 힘들었는데 희원 씨 보는 순간 모든 피로가 풀렸어요. 희원 씨가 나한테 비타민인가 봐요.”
“내가 그런 존재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에요. 요즘 계속 야근하느라 고생 많죠.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예요?”
“추석 전까지는 아마도.”
희원은 늘 단단해 보이기만 했던 기준이 피곤하고 힘들다는 말을 하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기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기준 씨, 보약 좀 먹을래요? 저번에 나 데리고 갔던 그 한의원 말이에요. 의사 선생님이 정말 잘하시는 것 같아요. 거기 가서 보약 한 제 지어 줄게요.”
세상에나! 어떤 극우성 알파가 보약을 먹는단 말인가! 이씨 집안 이이준과 이해준이 알면 땅을 치며 웃을 일이었다. 하지만 기준은 제 연인이 저를 더 많이 신경 쓰고 사랑해 준다면 그깟 알파의 자존심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희원 씨.”
“네?”
기준이 희원의 목에 다시 코를 박고는 숨을 들이마셨다. 확실히 희원의 페로몬 향이 조금 진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이런 소소한 차이는 다른 이들은 느끼지 못할 거였다. 극우성 알파인 데다 희원과 페로몬을 주고받은 기준만이 알 수 있는 거였다. 하지만 이전에 비해 차이가 있는 건 확실했다.
“페로몬 좀 풀어 봐요.”
“네?”
뜬금없는 말에 희원이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토끼 한 마리가 앞에 있는 것 같은 모양새에 기준은 조금 웃었다. 그러고는 더 몸을 붙이며 말했다.
“지금 식욕은 없는데 먹고 싶은 게 있어요.”
“그게 뭔데요?”
“이희원.”
희원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기준이 그대로 희원을 번쩍 안아 들고는 욕실로 향했다.
* * *
기준이 허벅지 위에 앉은 희원을 뒤에서 안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욕조의 물이 찰박거리면서 넘쳐흘렀다. 욕실은 둘의 더운 숨과 페로몬이 뒤섞여서 언제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했다.
“흐읏! 기준…….”
희원이 기준의 단단한 팔뚝을 손으로 꽉 움켜쥐고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목울대를 타고 땀인지 물방울인지 모를 것이 흘러 몸이 반질반질했다. 그게 절경이라 기준은 희원의 목을 할짝거리며 또 그곳에 얼굴을 묻고 비비댔다.
“하아, 희원 씨. 힛싸 또 언제 와요?”
“흣! 아아! 기준 씨.”
자극이 너무 심했다. 기준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성기가 안으로 치고 들어오면서 물도 같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배가 가득 차서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집요하게 기준이 희원의 어깨를 물어 와서 신경이 바짝바짝 섰다.
“희원 씨.”
“읏! 좀 천천히.”
“회사도 안 가고 만날 이렇게 둘이 이어져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아! 천천히, 빨라, 빨라!”
“희원 씨 힛싸 또 왔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내 러트가 오든가.”
기준은 날것의 말을 뱉어내고는 허리를 점점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품에 안고 있던 희원을 욕조 턱을 잡고 엎드리게 만들어 놓고는 뒤에서 골반을 잡더니 빠르게 움직였다. 물이 찰박찰박 튀는 소리와 희원의 신음이 섞여 들었다.
나무가 가득 들어찬 것 같은 여름 숲의 청량한 향이 희원의 온몸을 감쌌다. 희원은 페로몬에 범벅이 된 채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물에 잠겨 있는데도 불에 덴 듯 온몸이 뜨거웠다. 기준이 뒤에서 몸을 붙일 때마다 닿는 자리마다 자극이 너무 심했다.
“기준, 아아, 쌀 것, 아, 같아, 아아, 잠깐.”
“같이, 응? 같이 싸요. 희원 씨.”
“아아! 아, 아!”
기준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기준의 허벅지와 희원의 궁둥이가 철썩철썩 소리를 냈다. 희원은 미칠 것 같아서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하반신을 앞으로 내밀었다. 조금이나마 기준의 성기로부터 해방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이기준이 아니었다. 희원의 납작한 아랫배를 왼팔로 끌어안고는 바짝 당겼다.
“아아! 기준 씨, 읏!”
“좋아, 좋아 죽을 것 같아, 읏!”
기다랗고 굵은 성기가 내장을 힘껏 밀어내는 것 같았다. 판판한 뱃가죽을 뚫고 성기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으읏! 빨라! 찢어져. 아아, 기준!”
“희원 씨, 조금만 조금만, 읏!”
둘의 몸이 조금의 공간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찰싹 붙었다. 그리고 이어서 희원의 안에 기준의 흔적이 잔잔하게 스며들었다. 기준이 도대체 언제 피곤해했냐는 듯 희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요.”
“거짓말쟁이. 잠만 자겠다더니.”
희원의 째려보는 눈초리조차도 예뻐서 기준이 웃으며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재차 속삭였다.
“사랑해요.”
하지만 희원은 토라졌는지 아니면 부끄러운지 대답해 주지 않았다. 결국 안에 싼 흔적을 처리해 주고 깨끗하게 씻긴 뒤 둘이 나란히 누웠을 때, 그제야 희원은 기준의 손을 가져다 손바닥에 뭔가를 그렸다.
기준이 고개를 젖히며 웃다가 결국 희원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그건 다름 아닌 하트였다.
* * *
―아빠, 추석이 뭐야?
랑일이가 가정 통신문으로 보이는 종이를 들고는 기준에게 물었다. 안 그래도 유치원 알림 앱에 추석을 맞이해서 송편 빚기와 전통 놀이를 하는 시간이 있다는 내용을 본 기억이 난다. 하도 바빠서 대강 읽고 말았는데 똑쟁이 랑일이는 잊지 않고 집으로 가는 길에 기준에게 직접 전화를 해서 물어봤다.
“응? 랑일아, 잠깐만. 원 실장님, 저는 저녁 안 먹으니까 드시고 오세요. 랑일아, 다시 말해 줘.”
추석을 이틀 앞두고 야근은 오늘로 끝이었다. 내일은 명절 하루 전이기 때문에 모두 오전까지만 일하고 퇴근이었다. 기준은 이 지긋지긋한 야근도 오늘로서 끝이라는 생각에 욕이 턱 끝까지 찼음에도 인내심을 발휘해서 누르고 또 누르던 중이었다.
―아빠!
“그래, 랑일아. 집에 가는 중이야?”
―응. 작은아빠가 데리러 왔어. 근데 추석이 뭐냐고. 내일 한복 입고 오라고 했어.
“아, 한복!”
기준이 복도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한복! 분명히 유치원에서는 보름 전부터 지속적으로 알림을 했지만 기준이 그 알림을 제대로 봤을 리가 없었다.
―아빠?
랑일이가 이상한 기류를 눈치챘는지 다시 한번 기준을 불렀다.
“어어, 그래. 추석은 설 같은 명절이야. 설날 기억나? 한복 입고 세배했잖아.”
―응! 나 기억해. 큰아빠가 세뱃돈 엄청 많이 줬어!
“맞아. 우리 아들 기억력 좋네. 똑쟁이네.”
―응. 나 똑쟁이야. 선생님이 맨날 우리 랑일이는, 우리 애기는 똑쟁이네 그랬어.
희원이 만날 랑일이를 품에 안고 이 칭찬 저 칭찬 세상의 온갖 칭찬은 다 한다는 걸 기준은 알고 있었다. 저러다 애 버릇 나빠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저렇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중에서 반만 저한테 해 주지 싶을 정도로 제 연인은 제 아들에게 사랑한다고 더 많이 말하곤 했다.
“오늘 선생님이랑은 뭐 했어?”
기준은 희원이 보고 싶었다. 요즘에는 랑일이가 본가에서 등하원을 하고 있어서 기준이 랑일이와 같이 출퇴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바람에 이전에는 희원을 아침저녁으로 봤는데 랑일이를 못 본 만큼 희원도 못 보고 있었다.
―아빠, 오늘 할머니네 올 거야?
그래도 매일 집으로 퇴근하는 건 아니고 상황을 봐서 본가로 퇴근도 하고 그랬다. 그런 날은 당연히 다음 날 랑일이를 태우고 유치원에 데려다주면서 희원을 봤지만 근 일주일 동안은 랑일이도 희원도 전혀 보지 못했다.
“아빠가 갈 수 있으면 갈게.”
―응! 아빠 보고 싶어.
“그래, 아빠도 우리 랑일이 보고 싶어.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저녁 많이 먹고!”
그 뒤로 기준은 랑일이와 조금 더 대화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한복! 지금 이 시간에 한복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올 설날에 입혔던 한복은 이미 작아서 새로운 것을 구입해야 하는데 앞이 깜깜했다.
기준은 박 여사에게라도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다. 박 여사라면 지금 시간에 얼마든지 랑일이의 한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랑일이를 어떻게든 혼자서 키워 보겠다며 분가를 한 거였는데 결국 이렇게 어머니를 의지할 수밖에 없을 때면 기준은 피로감과 무력감을 느끼곤 했다.
“어머니.”
기준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박 여사에게 전화를 했다.
―랑일이는 해준이가 데리고 오고 있어.
“알아요. 랑일이랑 통화했어요.”
―그럼 무슨 일이니?
“다른 게 아니라, 어! 어머니, 전화 들어와요. 조금 이따 다시 전화할게요.”
희원에게 전화가 들어오고 있었다. 기준은 박 여사와의 통화를 얼른 끊고 희원의 전화를 받았다.
“네, 희원 씨.”
―바빠요?
“지금은 괜찮아요. 퇴근했어요?”
기준은 오른손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7시 전이긴 했지만 유치원 교사들은 대체로 아이들 하원하면 바로 퇴근하니 희원도 퇴근길일 거였다.
―아니요, 아직이요.
“설마 희원 씨 야근은 아니죠?”
야근은 기준 혼자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내일 행사 있잖아요. 그거 준비 조금 더 하고 퇴근하려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기준 씨. 혹시 랑일이 한복 준비했어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어머니랑 통화 중이었는데, 희원 씨 미안한데 제가 그것 때문에 조금 급해서요. 어머니랑 통화 좀 하고 다시 전화할게요. 미안해요.”
기준은 희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시라도 빨리 박 여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희원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기준 씨, 잠깐만요!
“네?”
―제가 랑일이 한복 샀어요. 그러니까 준비하지 마요. 제가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서프라이즈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는 바람에……. 미안해요.
기준이 이사실에 들어와서 자신의 의자까지 가지도 못하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기준 씨?
기준이 대답하지 않자 희원이 조급한 목소리로 기준을 불렀다. 기준은 크게 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희원 씨. 도대체 뭐가 미안해요.”
―아뇨, 그게 아니라, 원래는 서프라이즈로 숨기고 있다가 오늘 랑일이 집에 갈 때 기준 씨한테 주려고 했거든요. 근데 요 근래 기준 씨도 계속 바쁘고 저도 바빠서 얼굴도 못 보고 통화도 잘 못 하고 그러다 오늘도 랑일이가 작은아버지 되는 분하고 하원하다 보니 이제야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기준 씨가 미리 한복을 사 놨으면 소용이 없겠구나, 만약에 한복을 지금까지 준비 못 했으면 지금 한복 구하느라 정신이 없겠구나……. 저도 요즘 바빠서 판단력이 흐려졌나 봐요. 미안해요.
기준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 도대체 자기가 미안할 게 뭐람.
“희원 씨, 그러니까 도대체 뭐가 미안하냐고요. 미안할 일이 전혀 없잖아요.”
―제가 빨리 말했어야 했어요. 그래야 기준 씨가 한복 때문에 신경 쓸 일도 없고 편할 텐데…….
“진짜 미치겠네. 아빠인데도 바쁘다는 이유로 유치원 알림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지금까지 애 한복 준비도 못 한 건 제 잘못이지 그게 희원 씨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희원 씨는 선물을 준비한 건데 그걸 언제 주고 언제 말하든 그건 희원 씨 마음이지 그게 왜 미안할 일이에요.”
착하고 순한 사람. 자신보다 상대를 더 생각해 주고 걱정해 주는 사람. 기준은 당장이라도 희원에게 달려가 여기저기 입 맞추며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고마워요, 희원 씨. 희원 씨가 랑일이 한복 사 준 덕에 걱정거리 하나 덜었어요.”
―그래도 조금 일찍 말했어야 하는데…….
“희원 씨, 지금이라도 끌어안고 입 맞춰 주고 싶어요. 내가 정말 사랑하는 거 알죠?”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에 희원은 당황했는지 대답이 없었다.
“왜 대답이 없어요? 설마 몰라요? 설마 내 사랑 의심해요?”
―아뇨, 그게 아니라 너무 당황해서.
“뭘 당황하고 그래요, 정말 사랑해요. 한복은 제가 이따 퇴근하면서 희원 씨네 들르면 될까요?”
기준은 소파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았다. 빨리 일을 끝내고 희원네 들러 한복을 받아서 본가로 가야 했다.
―아니에요. 집까지 오면 피곤해서 안 돼요. 제가 퇴근하면서 회사 데스크에 맡기고 갈게요.
“희원 씨네 집에 가는 게 뭐가 피곤해요.”
희원을 본 지도 며칠 되었다. 아직 희원의 사진도 갖고 있지 않아서 기준은 유치원에 올라온 희원의 사진으로만 기갈을 대신하곤 했다.
―무리하지 마세요. 오늘은 제가 회사에 맡기고 갈게요.
“우리 애인 진짜 단호해. 보고 싶지 않아요?”
언젠가부터 기준은 희원에게 자신이 매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기준은 그까짓 게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알파의 자존심이라는 걸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저도 보고 싶지만 기준 씨 요즘 너무 힘든 거 제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알았어요. 참을게요. 그치만 내일은 시간 내줘야 해요? 내일은 일찍 끝나니까.”
기준은 희원에게 신신당부를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그제야 박 여사에게 전화를 했다. 랑일이 한복이 필요했는데 희원이 미리 준비를 했다고 간단하게 상황 설명을 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기준아. 언제 제대로 보여 줄 거니?
“네?”
―모른 척 좀 하지 말렴.
기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왼손으로 마우스를 건성으로 돌리며 박 여사의 말에 뭐라고 대꾸할지 고민했다. 박 여사는 기준이 희원네 인사를 다녀온 다음 날부터 틈틈이 희원을 집에 데리고 오라고 했다. 하지만 그걸 기준이 중간에서 여태 막고 있었다.
“희원 씨 바쁜 건 어머니도 아시잖아요.”
희원네에서는 정식으로 인사한 뒤 제대로 인정받고 만나고 있는 것이지만, 기준네는 아직이었다. 물론 기준네 식구들도 둘이 연애하는 걸 알고는 있지만, 정식으로 인사하지는 않은 것은 기준의 독점욕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못 만나게 하는 거니? 내가 뭘 어쩐다고?
박 여사의 말에 기준은 턱밑까지 반박하고 싶은 말이 치솟았지만 꾹 눌러 삼켰다.
“희원 씨가 진짜 바쁘다니까요.”
―내가 직접 전화할까?
“아, 어머니! 왜 그러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절대 전화하지 마세요. 부담스러워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희원이 박 여사랑 단둘이 통화하는 것도 막아야 했다. 기준은 지금이라도 희원의 전화번호를 바꿔 줄까 싶었다.
―이기준. 내가 뭐 희원이를 잡아먹니?
“네? 희원이요?”
뭔가 뉘앙스가 이상했다. 희원이라니? 박 여사가 그렇게 누군가를 편하게 부르는 건 해준의 배우자인 루세가 전부였다.
―설마 희원이가 얘기 안 했니? 우리 간간이 전화 통화도 하고 그러는데.
“뭐라고 하셨어요?”
―너 희원이네 집에서 술 취해 쓰러져 잔 날도 희원이랑 통화했었는데 모르고 있었구나?
기준은 순간 뭐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 희원에게 전혀 들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어쩐지 희원이 왜 집에 인사하러 안 가냐고 묻지도 않고 가만히 있기에 기준은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더니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기준의 입장에서는 희원이 자신의 집안사람들과 천천히 친해지는 게 좋았다. 분명 기준을 빼고 시도 때도 없이 만나며 그게 자칫하면 기준의 험담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기준은 무엇보다 희원을 집안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랑일에게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머 몰랐구나? 이만 끊으마. 일하렴.
박 여사는 자신이 할 말만 하고는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와, 이희원. 아무 말도 안 했다 이거지?”
* * *
기준은 일을 빨리 끝내고 랑일이 한복을 자신이 직접 받으려고 했다. 1층 로비에서 희원을 기다렸다가 놀라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원래 인생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었다. 아무리 이사라고 해도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일을 중간에 가로채어 대충 결재하고 마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하아, 씨발. 정말 그만두고 싶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 일을 그만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당연히 놀은 자신의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일에 파묻혀 사는 건 당연하다 여겼다.
아침에 눈떠서 밤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좋아할 장난감을 만들지를 고민했다. 아이들이 잘 때도 꼭 끌어안고 손에서 놓지 않을 인형, 로봇, 자동차 등을 구상하는 게 기준의 일과였고 일상이었다.
하지만 요즘 기준은 일보다 더한 재미를 찾았다. 바로 연애였고 희원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기준이 딱 그런 셈이었다.
결국 기준은 차에 타서 욕을 내뱉었다. 일이고, 이사 자리고, 기업이고…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희원 씨.”
결국 11시가 다 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희원에게 전화를 하고 말았다.
―기준 씨?
“희원 씨, 혹시 깨웠어요?”
―아니요, 근데 무슨 일 있어요? 목소리가 왜 그래요?
그래도 기준이 퇴근하면서 꼬박꼬박 전화를 한 탓에 희원은 이제 기준이 퇴근한다는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잠에 들지 않았다.
한번은 기준이 피곤할 텐데 기다리게 하는 거냐며 미안하다고 전화 안 할 테니 그냥 자라고 했다가 희원이 그러면 자신도 다음에 늦게까지 일하게 되면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기함을 한 적이 있었다.
“희원 씨, 나 너무 힘들어요.”
기준은 주차장에서 차를 출발시키지도 않은 채 우는소리를 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요즘 희원만 보면 자꾸 엄살을 부리게 되었다.
사실 아직 체력은 멀쩡해서 집에 가고도 남지만 정신적으로 피로한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이 모든 피로감의 원인은 희원을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에서 기인했다.
그래 봐야 진짜로 못 본 것은 며칠 안 되었지만, 한창 연애에 불이 붙은 연인에게는 고작 며칠이 마치 억만 년 같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예요? 아직 회사예요? 데리러 갈까요?
“이 밤중에 어딜 나와요! 위험하게!”
기준이 다급하게 외쳤다.
“누가 잡아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누가 잡아가요? 남자를? 그것도 차 끌고 가는데…….
기준의 말에 희원이 황당하다는 듯 웅얼거렸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그래요? 희원 씨가 몰라서 그래요. 아무튼 위험해서 안 돼요.”
―알았어요. 근데 기준 씨 막 잠 와서 운전 못 하겠고 그런 거예요? 그럼 택시 타요. 괜히 운전하지 말고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희원 씨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 랑일이 한복 잘 받았어요. 랑일이가 엄청 좋아할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요.
사이즈가 랑일이한테 딱 맞을 법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치수를 재고 맞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랑일이는 희원이 준 거라면 무조건 좋다고 할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희원 씨. 내일 유치원도 일찍 퇴근해요? 우리는 점심 무렵에 퇴근하거든요.”
―들었어요. 그래서 유치원도 일정을 오전에 송편 만들고 놀이하다가 가는 걸로 잡아 놓은 거예요.
“희원 씨 괜찮으면 같이 퇴근할래요?”
기준은 희원이 너무 보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랑일이 한복 입혀서 유치원에 데려다주면서 얼굴을 잠깐이라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본가에 가서 한복을 랑일이 머리맡에 놔주고 자신은 또 내일 새벽같이 출근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도 일찍 출근해요? 힘들어서 어째요.
“괜찮아요. 내일 희원 씨 볼 거 생각하며 힘내 볼게요.”
기준은 희원의 얼굴이 벌써부터 아른거렸다. 명절 내내 같이 있고 싶었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어쨌든 기준도, 희원도 가족 모임이 있으니 말이다.
―내일 같이 퇴근해요. 대신에 집에 가는 길에 운전은 내가 해요.
희원의 말에는 기준 씨 가는 동안이라도 눈 좀 붙여요, 라는 걱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다정하고 따듯한 마음이 기준은 고마웠다. 그리고 벌써부터 내일이 기다려졌다.
* * *
아이들은 저마다 만든 송편이 든 상자를 들고 재잘거렸다. 그중에서 랑일이만이 아직 가방을 메지 않은 상태였다.
“자, 엄마 아빠 오셨다. 얘들아, 추석 잘 보내고, 맛있는 것도 많이많이 먹고!”
아이들이 유치원 마당에서 한 줄로 늘어서 있다가 희원의 말에 조잘조잘 떠드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엄마!”
각자의 엄마를 부르고 빨리 나가고 싶어서 아이들은 벌써부터 그 작은 발을 동동거렸다.
“얘들아, 뛰면 안 돼! 우리 한 사람씩 나가자.”
마당에서 대문까지는 짧은 거리지만 아이들이 서로 부딪치거나 발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희원은 재차 당부했다. 그러고는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고는 아이의 부모님과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5세 아이들의 하교가 끝난 뒤에는 6세와 7세 아이들이 기다리며 서 있었다. 희원은 얼른 랑일이 손을 붙잡고는 비켜 주었다.
“자, 친구들 갔다. 우리 랑일이는 선생님하고 조금 더 기다릴까?”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두 손을 쭉 위로 뻗었다. 자기를 안아 달라는 뜻이었다. 희원이 웃으며 랑일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우리 애기가 진짜 많이 컸구나!”
랑일이는 부쩍부쩍 커서 이제는 제법 무게감이 느껴졌다.
“선생님, 아빠 언제 와요?”
“아빠 조금 있으면 오셔.”
“오늘 선생님 우리 집 가요?”
“응!”
기준이 그렇게 대놓고 티를 냄에도 불구하고 아직 회사 사람들은 기준과 희원의 관계를 모르는 듯했다.
그에 희원은 원 실장에게 부탁해 기준을 조금만 잡고 있어 달라고 했다. 기준과 같이 퇴근하기로 했는데 기준이 일찍 와 버리면 어쨌든 희원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좀 애매했다.
“선생님, 우리 오늘 뭐 해요?”
“음, 랑일이 하고 싶은 거 있어?”
“선생님, 오늘 집에 가지 마요.”
랑일이는 희원과 오래 같이 있고 싶은 모양이었다.
“내일 랑일이 할머니 댁에 가야 하잖아.”
“그럼 선생님하고 같이 갈래요!”
“어?”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인지라 희원은 당황했다. 그러고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랑일이가 나중에 희원이 기준네 집에 인사하러 가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스러웠다.
“랑일아!”
“아빠!”
기준의 목소리에 희원의 품에 안겨 있던 랑일이가 휙 뒤돌아봤다. 희원도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니 오늘도 여전히 끝내주는 피지컬을 자랑하는 기준이 서 있었다.
“내릴까?”
희원이 랑일이를 내려 주자 랑일이가 다다다 뛰어 기준의 다리를 꼭 끌어안았다. 랑일이도 제 아빠를 본 지 오랜만이었다. 어제 본가로 갔지만 늦게 도착한 기준은 곤히 잠든 랑일이 얼굴만 보고 오늘 아침에도 아직 잠에서 안 깬 랑일이를 들여다만 보고 출근했다.
“우리 아들 잘 있었어?”
기준은 자신의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랑일이를 쑥 들어 올려서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랑일이가 소리 내어 웃는데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희원은 행복해졌다.
“랑일아, 희원 선생님하고 집에 갈까?”
“응!”
랑일이가 좋은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렇게 셋은 기준의 차에 타서 이동했다. 가는 동안에 기준이 조수석에 타고 희원이 운전을 하는 바람에 랑일이가 뒷좌석에 혼자 앉아 좀 뚱했지만 그래도 이내 기분이 풀려서 계속해서 조잘조잘 떠들었다.
“아빠!”
역시나 피곤했는지 잠이 든 기준은 도착해서도 쉬이 깨지 않았다. 뒤에서 랑일이가 기준을 툭툭 두드렸다.
“아빠!”
“으응. 어? 어!”
“아빠, 다 왔어!”
기준이 벌떡 일어났다.
“여기 어디예요?”
“마트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마트 주차장이었다. 기준이 아직 잠이 덜 깨어 희원을 바라봤다.
“집에 아무것도 없을 것 아니에요. 우리 셋이서 장 보고 가요.”
희원이 웃으며 기준의 안전벨트를 직접 풀어 주었다. 희원에게서 기준만이 느낄 수 있는 달콤한 향이 미미하게 났다. 기준이 눈을 깜박이다 뒤에 있는 랑일이를 힐긋 쳐다보고는 한 번 꾹 참았다. 당장이라도 끌어다 목덜미에 코를 박고 싶었기 때문이다.
“피곤하죠? 빨리 장 보고 집에 가서 더 자요.”
희원이 어린아이 어르고 달래듯 말하자 기준이 힘없이 웃었다.
“괜찮아요. 오는 동안 좀 자서 괜찮아졌어요. 가요.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요.”
“오늘은 제가 할 거예요. 그동안 야근하느라 고생한 …위해서요.”
“네?”
희원이 목소리를 죽이는 바람에 잘 못 들었다.
“못 들었어요?”
“뭐라고 했어요?”
희원이 랑일이 눈치를 보고는 다시 기준에게 조금 몸을 기울인 뒤 말했다.
“그동안 야근하느라 고생한 우리 자기를 위해서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그러고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눈썹을 갉작이고는 말했다.
“오늘 나 생일이에요? 아니면 지금 명절이라고 명절 선물 주는 건가? 하아, 오늘 집에 못 갈 줄 알아요. 내일 내가 아침에 데려다줄게요. 집에 가지 마요.”
희원은 랑일이 눈치를 다시 살핀 뒤 얼른 차에서 내렸다. 조금 더 있다가는 기준이 입이라도 맞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카트에 탄 랑일이가 발을 까닥까닥 움직였다. 대형 마트에 와서 카트를 탄 건 희원과 장을 보러 다닐 때가 전부인지라 랑일이는 신이 났다. 기준이 카트를 끌고 옆에서 희원은 언제 리스트를 적어 왔는지 리스트대로 하나씩 물건을 집어서 넣었다.
“아빠! 나 우유!”
랑일이는 요즘 크려고 하는지 우유도 많이 마시고 밥 먹는 양도 늘었다. 집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유치원에서는 가리는 음식도 없이 골고루 먹었다. 희원은 랑일이가 요구한 우유를 집어서 카트 안에 넣고 어린이용 치즈도 하나 넣었다.
“희원 씨, 조심.”
추석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마트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기준이 물건 고르느라 정신이 없는 희원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는 당겼다.
“사람들이 많아서 치이겠어요. 이리 좀 더 붙어요.”
“아, 네. 고마워요.”
기준은 희원을 자신의 옆에 꼭 붙였다. 희원이 기준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런데 뭘 이렇게 사요? 뭐 해 주려고?”
“어차피 명절이라서 본가 가면 맛있는 것 잔뜩 먹겠지만 오늘이랑 내일 아침은 제가 해 주고 싶어서요.”
“착하기도 해라. 근데 분명히 내일 아침까지 해 준다고 했어요?”
“네.”
기준이 희원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선생님! 나 저거 먹을래요.”
랑일이가 가리킨 것은 공룡 모양의 치킨 너겟이었다. 희원이 웃으며 그것을 들자 물건을 정리하던 직원이 랑일이에게 물었다.
“아빠들하고 맛있는 것 사러 왔구나?”
“네!”
아직 아빠‘들’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랑일이는 아빠 소리만 듣고 힘차게 대답했다. 희원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다른 코너로 이동하려고 했다.
“여기 아빠랑 많이 닮았네?”
직원은 기준의 차가운 인상에 차마 그를 제대로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귀엽고 예쁘장한 희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가 봐도 랑일이는 기준을 빼다박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희원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랑일이로서는 그저 희원과 닮았다는 소리가 기분 좋을 뿐이었다.
“네!”
그래서 힘차게 대답하고 말았다. 희원과 기준의 눈이 마주쳤다. 희원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그가 곤란해한다는 걸 알면서도 기준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기준 씨, 과일 사야 해요.”
희원이 먼저 발걸음을 내딛자 뒤에서 기준이 희원에게 바짝 붙어 따라오며 말했다.
“천천히 가요. 누가 따라와요?”
“천천히 가고 있어요.”
“저 직원이 보는 눈이 있네요. 랑일이가 희원 씨 닮았대요.”
희원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기준을 쳐다봤다. 그 눈빛이 마치 ‘코로 봐도 기준 씨 닮았는데 어딜 봐서요?’라고 묻는 듯했다. 기준이 어깨를 으쓱이며 능글맞게 웃으며 희원에게 속삭였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희원 씨랑 나랑 닮았나 봐요.”
“네?”
희원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어떻게 결론이 그렇게 나지 싶었다. 하지만 기준은 더 이상 설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다음 식품 코너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셋이 산 물건을 계산대에 올려 두며 희원은 기준을 힐긋 쳐다봤다.
“이건 언제 넣었어요?”
결국 희원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어봤다. 기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 아빠가 넣었어요.”
랑일이가 마치 고자질을 하듯 말했다. 희원이 넣지 않았던 물건들은 죄다 기준의 소행이었고, 딱 봐도 희원이 평소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 희원은 이제 와서 물건을 빼기도 그렇고 해서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 * *
“우리 랑일이가 간식 먹을 시간인데, 뭐 먹을까?”
랑일이와 기준이 나란히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 희원은 냉장고를 정리했다. 냉장고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만큼 기준이 그동안 얼마나 바빴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랑일이 우유까지 집어넣고 뭐를 간식으로 주면 좋을까 궁리하며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뒤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희원을 덮쳤다. 바로 랑일이였다.
“아이고!”
“히히, 선생님!”
랑일이가 희원의 등에 폴짝 업혔다. 방심하고 있던 터라 희원이 앞으로 푹 고꾸라지려는 걸 간신히 손을 짚어서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를 면했다.
“우리 애기 뭐 먹을까?”
희원은 냉장고 문을 닫고 랑일이를 등에 업고 일어났다. 랑일이가 희원의 목을 꼭 끌어안고는 등에 얼굴을 비볐다.
“선생님, 나 사과! 사과 먹을래요.”
마트에서 사과를 담았던 걸 기억하는지 랑일이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말했다. 희원은 알았다고 대답해 놓고도 랑일이를 즉시 내려놓지는 않았다.
“선생님, 전화 왔어요!”
식탁 위에 둔 자신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하는 걸 랑일이가 알려 주어 희원은 그제야 랑일이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희원이 핸드폰을 집으러 가는 사이 옷을 갈아입은 기준이 거실로 나왔다.
“아빠.”
기준을 발견한 랑일이가 달려가 푹 안겨 들었다. 그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는 희원은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어! 여보세요.”
희원이 다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는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랑일이와 기준을 힐긋 보고는 조금 더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네, 물어볼게요. 네, 전 괜찮아요.”
희원의 목소리가 조용했다. 기준은 랑일이를 안고서 주방으로 들어왔다가 희원의 목소리가 잔잔한 것에 소리를 죽였다.
“네, 명절 즐겁게 보내시고요, 제가 물어보고 전화드릴게요.”
희원이 전화를 끊고 뒤돌았을 때 똑같이 생긴 부자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에 화들짝 놀랐다.
“놀라라. 기척 좀 내고 서 있지 그랬어요?”
“무슨 전화예요? 무슨 일 있어요?”
희원은 희미하게 웃고는 랑일이에게 줄 사과와 과도, 접시를 꺼내어 식탁 앞에 앉았다. 기준이 랑일이를 의자에 내려 주고 집요한 시선을 보냈다.
“저기, 기준 씨.”
희원이 사과를 깎으며 눈을 맞췄다.
“내가 깎을까요? 아니면 다 깎고 천천히 얘기해요. 그러다 다칠까 봐 걱정돼요.”
누구와 전화한 건지 궁금한 와중에도 기준은 희원을 재촉하지 않았다. 희원은 깎은 사과를 접시에 예쁘게 내려놓고 포크로 찍어서 기준에게 먼저, 그다음에 랑일이에게 주었다.
“선생님, 토끼가 살아 있어요!”
희원에게 토끼 모양 사과를 받으며 랑일이가 재밌어했다. 기준은 희원에게 받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먹고 희원의 입에 넣어 주었다. 희원이 자연스럽게 사과를 받아먹으면서 오물거리는 게 그리 예쁠 수가 없었다.
“기준 씨.”
“네.”
“어머니가 명절 마지막 날 와서 저녁 먹으라고 하시는데요… 괜찮을까요?”
희원의 물음에 기준은 처음에 어머니가 희원의 어머니라고 생각해서 그러자고 대답하려고 하다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어머니?”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우리 박 여사 말하는 거예요?”
“네.”
그제야 기준은 박 여사의 전화를 받고 기가 막혔던 자신을 떠올렸다. 희원이 그동안 일언반구도 없었는데 알고 보니 어느새 둘이 ‘희원이’, ‘어머니’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희원 씨. 나 좀 섭섭해요.”
랑일이가 사과를 다 먹고 거실에 나가 자동차를 가지고 놀기 시작하자 기준은 금세 풀이 죽은 표정을 그려 내고는 말했다. 희원은 저 표정이 분명히 그려 만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큰일이라도 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요?”
“나는 희원 씨에게 숨기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저도 없어요!”
희원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말했다.
“언제 박 여사랑 그렇게 친해졌어요? 전화도 자주 하고 그런다면서요?”
“아……!”
기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삐죽였다. 희원은 그 순간 기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지금 질투해요? 어머니한테?”
희원의 물음에 기준이 시선을 피하면서 헛기침을 했다. 그게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희원은 식탁 위에 올려 둔 기준의 손을 끌어다가 살살 만졌다.
“말 안 해서 삐쳤어요?”
“삐치긴요.”
“내가 어머님하고 잘 지내면 좋잖아요. 나한테 기준 씨같이 멋진 연인을 만들어 준 분이 어머님이잖아요. 그러니까 잘해야죠.”
“그거야 그렇지만…….”
희원은 거실을 살짝 엿보고는 기준의 뺨에 입을 맞췄다. 기준이 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명절 마지막 날에 인사하러 가도 될까요? 가서 아버님도 뵙고 싶어요. 다른 가족들은 다 뵈었는데 아버님만 못 뵈었잖아요.”
아마도 희원을 정식으로 인사시키면 집에서 더욱 귀찮게 굴 게 뻔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알았어요. 근데 약속해 줘요. 선물 이런 거 사지 말고 부담도 갖지 말아요.”
희원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은 조금 망설이다가 끝내 한마디 덧붙였다.
“자기는 나만 좋아해야 해요. 그럴 거죠?”
결국 희원이 식탁에 엎드려 소리 내어 웃었다. 점점 귀여워지는 기준 때문에 어깨까지 들썩이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