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허락을 구하는 발걸음
눈을 뜬 희원이 자신의 몸을 꽁꽁 묶고 있는 강한 팔을 매만졌다. 기준이 갈았는지 침대 시트는 보송보송한 상태였다. 아마 자신의 몸도 그가 닦아 줬을 것이다. 희원은 기준의 단단한 팔을 살살 어루만졌다.
“더 자요.”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처리까지 하고 잠든 기준에 비해 정신을 잃듯 잠이 든 희원은 조금 더 잤다고 이제는 졸리지 않았다.
“몇 시예요?”
대답이 없자 기준이 다시 물었다.
희원이 손을 뻗어서 침대 옆 협탁에 놓인 핸드폰을 확인했다.
“10시예요.”
“배고프겠다.”
기준이 희원의 홀쭉한 배를 더듬었다. 점점 손이 아래로 향하자 희원은 부끄러워서 기준의 손을 밀어냈지만 기준은 더욱 몸을 붙이며 이제는 대놓고 대담해진 손으로 여기저기를 만질 뿐이었다.
“그만 만져요.”
“내가 내 거 만진다는데요.”
“뻔뻔해.”
이제는 노골적으로 자기 거라고 말하는 데에 희원은 기분이 좋으면서도 그저 쌜쭉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아니에요?”
갑자기 희원을 바로 눕히고 그 위로 올라탄 기준의 행동에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답해 봐요.”
“뭐를…요?”
어젯밤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가 아직도 살짝 붉었다. 눈도 조금 부었고 말이다. 그게 귀여워서 기준은 웃음이 났지만 대놓고 웃으면 왠지 희원이 삐칠 것만 같았다. 기준은 애써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대답해 봐요. 내 거 아니에요?”
순식간에 희원의 뺨이 분홍빛으로 변했다. 기준은 고개를 내려서 어여쁜 뺨에, 살짝 부어서 귀여운 눈두덩에 입을 맞춘 뒤 눈빛으로 대답하길 종용했다.
“맞아요.”
“뭐가 맞아요?”
“기준 씨 거예요.”
“옳지, 잘한다.”
기준이 다시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어젯밤 내내 물고 빨아서 부은 입술에 말이다.
“그리고 나는 희원 씨 거예요.”
“응.”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이 희원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켰다.
“배고프겠다. 밥 먹어요.”
“근데 랑일이는요? 랑일이 데리러 안 가요?”
기준은 어제 그러고 가 버린 희원이 너무 걱정되어 랑일이를 본가에 맡기자마자 희원네 집 앞으로 간 거였다.
“오늘은 우리 둘이서만 실컷 놀고 내일 데리러 가요. 희원 씨는 모처럼 우리 둘만 있는 건데 싫어요? 꼭 그렇게 랑일이를 지금 데리러 가자고 그래야겠어요?”
기준이 툴툴거렸다. 아이 같은 모습에 희원이 작게 웃었다.
“왜 웃어요?”
“귀여워서요. 기준 씨 그렇게 툴툴거릴 때마다 랑일이 보는 것 같아서 귀여워요.”
기준이 쓰게 웃었다.
“랑일이밖에 모르지요?”
“무슨 소리예요. 삐치지 마요. 오늘 둘이서 실컷 놀고 내일 아침 일찍 랑일이 데리러 가요.”
희원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기준의 등에 얼굴을 비볐다. 조금 꽁했던 마음이 그 작은 스킨십 하나에 슬슬 풀렸다. 자신은 희원에게 있어서 어쩔 수 없다고 기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죠, 뭐.”
“그럼 제가 매일 지겠네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봤다. 그러자 희원이 배시시 웃으며 뻔뻔하게 말했다.
“누가 봐도 제가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같은데요?”
기준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희원이 다시 말했다.
“정말인데요? 그나저나 우리 뭐 먹을까요? 제가 맛있는 거 할게요.”
“뭐래요? 제대로 서지도 못할 사람이. 조금 더 누워 있어요. 다 되면 데리러 올 테니까.”
기준은 일어나 앉아 있는 희원을 다시 침대에 눕히고는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방을 나갔다.
* * *
기준은 정말로 손수 아침을 차리고 난 뒤 방으로 다시 들어와서 희원을 안고 식탁 앞까지 갔다. 희원이 괜찮다며 자기가 갈 수 있다고 했지만 기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식기 전에 들어요.”
기준은 희원의 손에 직접 숟가락을 들려 주고는 건너편에 앉았다. 희원이 눈앞에 차려진 음식을 보며 감탄하며 말했다.
“기준 씨는 요리 잘하는 것 같아요.”
“네, 회사 아니었으면 아마 음식점 했을 거예요.”
기준이 희원의 앞으로 갓 튀긴 생선을 밀어 주며 대답했다.
“진짜로요?”
“네. 어서 먹어요. 다 식겠어요.”
기준은 아예 생선 살을 발라서 희원의 밥 위에 올려 주었다. 희원이 사양하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기준 씨도 먹어요. 맛있어요. 근데 정말 요리에 관심 많아요?”
“네, 어머니가 요리하는 거 좋아하세요. 그래서 본가 가면 일하는 이모님 계셔도 요리는 줄곧 어머니가 하세요. 어릴 때 어머니가 쿠키나 빵 같은 거 구우면 옆에서 구경하기도 하고 조금 더 큰 뒤에는 형제들끼리 부모님 안 계실 때 음식 해 먹거나 그랬어요.”
희원이 눈을 빛내며 기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기준은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해준이 배우자가 요식업 하는 건 이야기했죠?”
“네.”
“근데 해준이도 음식 잘해요. 형도 마찬가지고요.”
“그중에서 가장 잘하는 사람은 기준 씨고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웃었다.
“우리 희원 씨는 어쩌면 그렇게 말을 사랑스럽게 할까요?”
기준이 이번에는 희원의 밥 위에 두툼한 달걀말이 하나를 올려 주며 말했다.
“저는 한식 좋아해서 아마 회사 아니었으면 한정식집 차렸을 거예요.”
“한식이 가장 어려운 음식 아니에요? 나물 무치고 이런 거 여전히 어렵던데.”
기준이 웃으며 명이나물 장아찌를 밀어 주었다.
“외할아버지 고향이 강원도예요. 그런 집안에서 커 온 어머니 덕에 어릴 때부터 처음 보는 나물들 엄청 먹으면서 자랐어요. 그와 동시에 입맛이 조금 까다로운 게 흠이지요.”
“분발해야겠어요.”
희원도 맛있는 것을 만들어서 먹는 걸 좋아하지만 사실 제가 한 음식보다 기준이 해 준 음식이 더 맛있을 때가 많았다. 몇 번 먹어 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무슨 분발이요? 괜찮아요. 지금보다 더 잘해서 뭐 하려고요? 삼계탕 해서 몸보신시켜 줘 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래도요. 기준 씨 입맛 맞추려면 더 노력해야지요.”
희원이 의지를 불태웠다. 기준이 그런 희원에게 물도 마시면서 천천히 먹으라고 물컵을 밀어 주었다.
“희원 씨 나중에 나랑 같이 살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할 거예요.”
기준이 건네준 물을 마시던 희원이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사레들렸어요? 조심 좀 하지 그랬어요. 물 따듯한 걸로 줄까요?”
희원이 연신 고개를 저으며 물을 들이켰다. 기침을 해 대느라 눈꼬리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기준이 희원의 등을 쓰다듬어 주고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 주었다.
“괜찮아요?”
“네에. 그런데 그렇게 갑자기 말하면 어떡해요.”
“뭐를요?”
희원이 눈을 흘겼다. 하지만 기준은 왜 그러냐는 듯 희원을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나랑 같이 살면 어쩌고 그러면…….”
기준이 피식 웃었다.
“그럼 나랑 같이 안 살려고요?”
“그런 건 아니지만…….”
희원이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았다. 기준이 고개를 꺾어서 희원의 붉은 입술을 찾아 입을 맞췄다. 희원이 놀라서 뒤로 살짝 몸을 물리려고 했지만 기준은 등을 쓰다듬고 있던 손으로 희원이 몸을 빼는 걸 가로막았다. 입술을 떼고 기준이 혀로 희원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밥 먹다가 뭐 하는 거예요.”
희원이 기준을 밀어내며 말했다. 하지만 기준은 다시 확인하듯 입을 가볍게 맞췄다.
“우리 다음 주쯤에 희원 씨네 인사하러 가요. 희원 씨가 가족들한테 시간 물어봐 줘요.”
희원은 잔뜩 부끄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되겠어요. 희원 씨네 가족들한테 인사하고 우리 가족들한테도 정식으로 인사하고는 마음껏 만날래요.”
“지금도 마음껏 만나고 있잖아요.”
얼굴이 발그레한 게 예뻐 죽겠어서 기준이 계속해서 뺨을 어루만졌다.
“지금은 평일에 아침저녁으로 유치원에서만 잠깐 보잖아요. 양가 가족들한테 정식으로 인사하고 희원 씨 아무 때나 여기 와서 쉬다가 갈 수 있도록 하려고요. 그러다가 다음 날 내가 출근길에 태워다 주기도 하고 같이 퇴근도 하고 그럴 거예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내 연인한테 잘하겠다는 건데.”
다정한 기준이 좋아서 희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배에 얼굴을 비볐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결혼하고 싶은데, 조금 더 참으려고요. 아직은 연애를 더 많이 하고 싶거든요. 본가에다 랑일이 맡기고 둘만 하는 데이트도 더 많이 하고요.”
“랑일이랑도 시간 많이 보내고 싶은데…….”
희원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기준이 희원의 코를 엄지와 검지로 약하게 꼬집고는 매서운 눈을 했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랑일이보다는 내가 더 먼저예요.”
희원이 피식 웃으며 다시 기준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했다.
“질투쟁이.”
* * *
“아빠, 또 어디 가?”
소파에 앉은 랑일이가 외출 준비 중인 제 아빠를 보고는 뾰로통한 얼굴로 팔짱을 착 꼈다.
“아빠가 일이 좀 있어서…….”
“저번 주에도 아빠가 나 할머니네 놔두고 일요일에 데리러 왔잖아.”
랑일이의 표정이 점점 사나워졌다. 입도 점점 나오고 있었다.
“아빠가 지난주에는 랑일이한테 미안해서 희원 선생님하고 같이 놀고 일요일에 같이 잤잖아.”
희원의 이름이 나오자 랑일이의 표정이 스르르 풀어졌다가 다시 뚱해졌다.
“오늘은 선생님이 없잖아.”
어제 랑일이가 희원에게 금요일이니까 주말 내내 같이 놀자고 했으나 기준이 선생님은 바빠서 안 된다며 거절했다. 몇 주 동안 주말에는 희원과 함께했던지라 랑일이는 당연히 희원하고 주말을 보낼 줄 알았는데 희원이 거절한 것도 아니고 제 아빠가 단칼에 잘라 내는 바람에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게 토요일에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기에 이번 주말에는 희원은 집에 있어야만 했다. 잦은 외박을 하기에는 이번 주는 집안 식구들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다음 주에 같이 놀면 되잖아.”
“내일도 선생님 없잖아.”
조만간 랑일이가 뒤로 넘어가서 바닥에서 떼굴떼굴 구르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걱정을 하던 차에 현관에서 이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랑일이 오늘 큰아빠랑 놀까?”
오랜만에 본가를 찾은 이준이 서 있었다. 랑일이가 잔뜩 심술 난 표정을 지었다가 이준의 손에 들린 우주선 모양의 가방을 보고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했다.
“큰아빠, 그게 뭐예요?”
“형, 그게 뭐야?”
랑일이와 기준이 동시에 물었다.
“고양이.”
“고양이?”
기준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큰아빠, 고양이요?”
“응, 고양이.”
“형, 무슨 고양이?”
기준은 눈앞에 있는 광경을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물었다. 그러자 이준이 해탈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됐어.”
“무슨 소리야?”
“아는 사람 고양이인데 맡아 주기로 했어.”
“그럼 형네 집에 데려다 놔야지. 어쩌자고 여기로 데리고 왔어?”
기준의 물음에도 제 형은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이준의 행동에 기준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일단 이이준이 남의 고양이를 맡아 준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남과 연관되는 걸 귀찮아하는 인간이 바로 제 형이었다. 기준보다 더 인간관계를 귀찮아하는 인간이 이이준이었다.
“고양이만 여기 둔다고 다가 아니잖아. 고양이 관련해서 용품들은 어쩌고? 사료랑 화장실 이런 거 필요한 거 아니야?”
“다른 용품은 차 안에 있어.”
“미쳤나 보다, 이이준.”
무슨 속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는 이이준이 그렇게 아끼는 차에 고양이용품을 잔뜩 싣고 올 리가 없었다. 게다가 본가로 오면 그 속사정을 대충이라도 식구들한테 얘기해야 하는데 그 귀찮음을 감수하고 들어왔다는 건 분명 그 행동에 꿍꿍이가 있는 거였다.
“너 바쁜 거 아냐?”
“아, 그래. 그럼 랑일이 좀 봐줘, 형.”
“랑일아, 고양이 볼래? 쿄우라고 하는데, 엄청 순해. 큰아빠 방에 가서 볼까?”
이준은 자연스레 랑일이의 관심을 고양이로 돌렸다.
“아빠, 잘 다녀와!”
“그래, 랑일아. 고마워. 큰아빠랑 잘 놀고 있어. 형, 랑일이 좀 부탁할게!”
이준이 랑일이 손을 잡고 2층으로 올라가는 걸 보고는 기준은 현관문을 나왔다.
“지금 나가니?”
“네.”
기준이 정원으로 나가니 꽃밭을 둘러보던 박 여사가 기준을 불러 세웠다.
“선물은 샀니?”
“지금 사러 가려고요.”
“미리 준비하지 그랬어. 늦으면 어쩌려고.”
“아직 시간 충분해요. 선물 사고 희원 씨랑 점심 먹고 가려고요.”
기준은 오늘 희원네 집에 인사하러 가기로 했다. 괜히 식사 시간에 가면 희원네 집에서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점심 이후에 가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아직 백화점 오픈 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긴장이 되었다.
“가서 말 잘하고.”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왜 걱정이 안 되겠어. 조건부터가 우리 쪽이 달리는데.”
정곡을 찌르는 박 여사의 말에 기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어머니, 아들인데 좀 응원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응원은 하지. 근데 현실적으로 그렇잖니.”
“이혼한 게 죄는 아니잖아요.”
기준이 불퉁하게 말했다. 그에 박 여사가 비웃으며 말했다.
“너 그런 표정 지을 때마다 랑일이랑 똑같은 거 알고 있니?”
“희원 씨도 만날 그런 소리 해요.”
“자랑이다, 얘. 늦겠다. 잔말 말고 얼른 가서 잘하고 와.”
박 여사가 얼른 가라고 손짓했다. 기준은 차고로 가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어머니, 형, 고양이 가져온 거 보셨어요?”
“어.”
“형 좀 이상해요.”
“네 형이 이상해져도 좋으니, 누구 좀 만났으면 좋겠구나.”
박 여사는 늦는다며 어서 가라고 했다. 그러고는 돈 아끼지 말고 선물 좋은 거 사 들고 가라고 신신당부했다.
“어머니, 저 진짜 가요.”
“그래, 말할 때 한 번 더 생각하고.”
학교 다닐 때도, 랑일이 친모와 결혼하려고 상견례를 가졌을 때도 박 여사는 이렇게 당부하지 않았다. 원래 어릴 때부터 자기 일에 똑 부러졌던 기준이었기에 걱정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기준은 운전하면서 박 여사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기준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아들인데, 편 좀 들어 주시지. 너무 냉정하네, 우리 엄마.”
* * *
“희원 씨.”
“기준, 으읍!”
기준은 희원을 차에 태우자마자 입술을 찾아 물기부터 했다. 희원이 당황해서 밀어냈지만 기준은 희원의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핥고 빨아들였다. 그러고는 희원을 잡아당겨 끌어안고 목덜미에 코를 묻고 향을 맡았다.
“기준 씨.”
“잠시만요. 오는 내내 이러고 싶어서 혼났어요.”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너무 떨려서요.”
기준은 이제야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기준 씨가 떨기도 해요?”
몸을 뗀 희원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요, 나도 사람인걸요.”
“뭐가 떨려요?”
“희원 씨가 박 여사 만났을 때 그런 느낌?”
희원이 후유 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때의 상황이 되살아나서 지금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준 씨는 이런 자리 처음 아니잖아요.”
희원은 문득 말을 내뱉고는 아차 싶어서 기준의 눈치를 살폈다. 기준은 그런 희원의 볼을 검지로 살짝 치고는 말했다.
“처음이에요. 말했잖아요, 정략결혼이었다고. 이렇게 선물 사서 인사하러 가지도 않았고 형식적인 상견례 하고 끝이었어요. 하물며 신혼여행도 안 갔어요. 바쁘다는 핑계로.”
“진짜요?”
“네. 그러니 내가 지금 얼마나 떨릴지 짐작이 가죠?”
이번에는 희원이 기준의 손을 잡아끌어 등을 도닥여 주었다.
“긴장하지 말아요. 저희 집은 제가 좋다고 하면 같이 좋아해 줄 거니까요.”
“용기가 나네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그제야 미소 지었다.
“점심부터 간단하게 먹고 선물 살까요? 짐 들고 다니기 힘드니까요.”
“그래요. 기준 씨, 뭐 먹고 싶어요?”
“나는 희원 씨.”
기준이 귓가에 속삭이자 희원이 살짝 째려봤다. 기준이 개구지게 웃으며 뺨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나는 희원 씨 좋아하는 거면 뭐든 괜찮아요.”
“그 말이 제일 어려운 거 알죠? 얼른 골라요. 오늘은 내가 사요.”
기준은 희원이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양손 가득 든 선물을 보며 희원이 불퉁하게 말했다. 점심을 희원이 산다고 할 때 그러라고 너무나도 흔쾌히 말하기에 무슨 꿍꿍이인가 했다. 기준은 선물을 사는 내내 말도 안 되게 비싼 걸 사려고 해서 희원이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결국 희원 씨 말 들었잖아요.”
“그럼 몇백만 원짜리 양주를 그렇게 많이 사려고 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버님도 계시고, 형님이랑 매형도 계신다면서요.”
트렁크를 열고 물건을 담는 기준을 희원이 소리 없이 째려봤다.
“그럼, 한우는 뭐고요? 한우를 종류별로 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것도 그래요. 어머님도 드려야 하고, 형님네랑 누님네도 드려야 하잖아요.”
“그렇게 비싼 거 부담스러워요. 그러면 제가 나중에 기준 씨네 갈 때 제 어깨가 어떻겠어요.”
희원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불퉁하게 말하자 기준이 살짝 입을 맞추고 말했다.
“알았어요. 그래서 희원 씨 말 들었잖아요. 말 잘 들었는데 칭찬은 못 해 줄망정 혼만 내고.”
“알았어요. 결국엔 내 의견 따라 줬으니까 고마워요.”
“선생님한테 칭찬받기 진짜 힘드네요.”
기준이 어깨를 으쓱이며 조수석 문을 먼저 열어 희원을 타게 했다. 문을 살짝 닫아 주며 기준이 말했다.
“어차피 희원 씨는 아무것도 안 사 가도 우리 집에서는 쌍수 벌려 환영이니까 부담 가질 필요도 없는데.”
불퉁한 말에 희원은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째 기준이 떼쓰는 게 랑일이보다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다.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기준은 희원을 끌어다가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어때요? 괜찮아요?”
온통 힘을 주고 신경을 쓴 게 역력해서 희원은 작게 웃었다.
“왜요? 어디 이상해요?”
“뭘 그리 긴장을 해요. 어떻게 해도 멋있는데요.”
“그거야 희원 씨한테만 그런 거죠. 박 여사가 말 한마디 할 때도 한 번 더 생각해 보라고 그랬어요. 전적으로 제가 불리하다고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어찌나 신신당부하던지 누가 보면 남의 엄마인 줄 알 것 같아요. 어쩌면 그렇게 응원 한마디를 안 해 줘.”
희원은 기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제가 응원하잖아요.”
기준은 괜히 헛기침을 하고는 심호흡을 했다.
“충분히 멋지니까 걱정하지 말고. 설마 그럴 일 없지만 기준 씨가 말문이 막히면 제가 옆에서 도울게요.”
“고마워요.”
둘은 시간을 확인하고 난 뒤 차에서 내렸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3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늦지는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기준은 차 트렁크에서 선물을 하나씩 꺼냈다. 그러는 동안 희원은 대문을 열었다.
차 트렁크를 한가득 차지하고 있는 선물들을 보며 희원은 역시 기준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말렸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기준은 양손 가득 선물을 들었다. 그래도 손이 모자라 희원도 그를 도왔다. 기준이 무거운 것을 죄다 든 탓에 희원의 손에 들린 것은 그나마 가벼운 것들이었다.
“기준 씨, 조심히 들어와요.”
대문의 턱이 조금 높았다. 오래된 집인 것 같았지만 내부는 굉장히 깔끔했다. 대문에서 현관까지 가는 길에는 자갈이 깔려 있었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는지 현관문이 열리며 희원과 닮은 남자가 나왔다. 아마 형인 듯했다.
“형, 이것 좀.”
기준이 인사를 하기도 전에 희원이 먼저 양손 가득한 선물을 가리켰다. 기준의 형은 희원에게서 선물을 받아 들고 현관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희원은 현관문을 붙잡아 기준을 들어오게 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식구들이 죄다 나와 서 있었다. 기준이 당황해 주춤거리니 희원이 기준의 손에서 선물을 가져가 마루 위에 올려놓았다. 2층으로 된 집은 단조로운 구조였지만 꽤나 컸다.
“안녕하십니까, 이기준입니다.”
선물을 내려놓은 기준이 신발을 채 벗지 못하고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그러자 희원이 기준의 손을 잡아끌었다.
“일단 들어와요. 엄마, 우리 어디 앉아? 소파에?”
“어서 와요. 여기 거실로 와서 앉아요.”
그렇게 거실에 가족들이 엉거주춤 서 있게 되었다.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이기준입니다. 희원 씨와 교제하고 있습니다.”
“희원이 아비입니다. 여기는 희원이 엄마고요.”
“희원이 엄마예요. 그나저나 뭘 그렇게 많이 사 왔어요.”
“아닙니다. 더 사려고 했는데 희원 씨가 자꾸 말리는 바람에 이것밖에 못 사 왔습니다.”
희원이 옆구리를 꾹 찔렀다. 하지 말라는 식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기준은 모른 척했다. 그런 모습에 희원의 누나가 웃었다.
“여기는 형이고, 누나예요.”
늦둥이 막내라고 하더니 딱 봐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 보였다. 다행히 형과 누나는 경계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엄마, 차 내올게요.”
누나가 차를 가지러 주방으로 향했고 소파에는 다섯 명이 둘러앉게 되었다.
“희원이한테 대강 말은 들었습니다만…….”
희원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더 많이 닮은 듯했다. 백발이 자연스러운 희원의 아버지는 눈이 매섭게 생겼는데, 기준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희원의 곱게 그려진 눈꼬리였기에 딱 봐도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쪽을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도 어머니의 것을 고대로 가져온 듯했다. 게다가 아버지의 말투는 어딘지 모르게 차가웠다.
“오해하지 말아요, 이 양반이 평생 연구하고 강의만 했던 양반이라서 말투가 딱딱해요.”
집에 오는 길에 희원은 간략하게 가족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퇴직했지만 한때는 고전문학 교수로 유명했던 아버지, 유치원 원장 교사였던 어머니,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누나와 중학교 영양사로 있는 형.
“희원 씨에게 아버님께서 교수셨다고 들었습니다. K대 고전문학 교수님이셨다며 희원 씨가 자랑 많이 했습니다.”
기준의 말에 아버지는 희미하게 웃었다. 집에서는 조용하고 어느 순간부터 말수가 줄어든 막내아들이 밖에 나가 자랑을 하고 다녔다는 게 아버지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정말 그 뉴스에서 봤던 이기준 이사 맞아요?”
누나가 차를 탁자 위에 올려 두며 물었다.
“네,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시겠지만 제가 희원 씨에 비해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교제하고 싶어서 매달렸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요.”
뺨이 붉게 달아오른 희원이 기준의 팔을 툭 쳤다.
“어디가 거짓말이에요?”
기준이 당황스럽다는 눈으로 희원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에 희원이 살짝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매달렸다는 말이요.”
그에 기준은 희원에게서 눈을 돌리고 희원의 부모님을 번갈아 보았다.
“제가 희원 씨 좋아서 좀 매달렸습니다. 부모님과 형님, 누님께 정식으로 허락받고 교제하고 싶은데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이 이것이었기에 기준은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었다.
“이기준 씨 집안에서는 알고 있습니까?”
“아버님, 말씀 편하게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희 집에서 어머니는 알고 계십니다. 다른 형제들도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저희 집에 인사하는 것은 오늘 희원 씨 가족분들께 먼저 허락을 받은 뒤에 하기로 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도 탁자 위에 놓인 차에 손을 대지 않았다. 어머니가 시원한 차를 기준에게 밀어 주었다.
“좀 마시면서 이야기해요. 뭐가 그리 바쁘다고 말들만 해요? 가뜩이나 긴장돼서 목마를 텐데.”
그제야 가족들은 조용히 차를 한 모금씩 마셨다. 기준도 따라서 목을 축이고는 조금 전 아버지의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사실 찾아뵙지 않고 뭐 하느냐며 좀 혼이 났습니다.”
희원은 기준의 과장에 차를 마시다 콜록콜록 잔기침을 했다. 기준은 제가 원인이 된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희원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희원이 누구 병 주고 약 주냐는 식으로 쳐다봤지만 기준은 그 눈빛을 애써 모른 척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누가 요즘 연애를 일일이 양가 집안에 말하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처음부터 희원 씨와 단순히 연애만 하고 싶어서 만나자고 한 게 아닙니다.”
기준의 말에 이번에는 가족들이 전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준을 쳐다봤다. 기준은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아, 정말 가족이구나.’ 싶었다. 희원이 놀랐을 때 짓는 표정하고 똑같았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기준은 뻔히 다 알면서도 물었다.
“정말 우리 희원이랑 연애 말고 다른 걸 하려는 거예요?”
누나가 못 믿겠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희원 씨랑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결혼하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는 것은 희원 씨와 조금 더 연애를 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기준은 더 이상 감출 것도 없었다. 있는 그대로 다 말하고 갈 작정이었다.
“아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형이었다. 지금까지 별말이 없었던 형이 매서운 눈으로 기준을 쳐다봤다. 그 눈빛에는 희원을 향한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다섯 살 난 아들이 한 명 있습니다.”
“이런 말, 좀 그렇긴 한데…….”
형은 망설였다. 무슨 말을 꺼낼지 예상한 기준이 망설이지 말고 말씀하셔도 된다고 말하자 형은 앞에 놓인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입을 뗐다.
“희원이가 페로몬에 조금 문제가 있는 것 알고 있습니까? 혹시 그래서 희원이를…….”
“형!”
희원이 성을 내듯 소리를 높이자 기준이 희원의 손을 꼭 쥐었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꺼내기 어려운 화제일 텐데 말씀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희원 씨를 오메가, 제 아이를 키울 사람으로 생각한 적 없습니다. 희원 씨가 만약 알파였다고 해도 저는 희원 씨한테 만나 달라고 졸랐을 겁니다. 저는 극우성 알파입니다. 원래 알파는 알파끼리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것 아시죠? 형님도 알파라고 들었습니다만. 저는 희원 씨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지 다른 조건 때문에 필요로 하는 게 아닙니다.”
“더 고민할 것도 없어요. 합격이네요. 그쵸, 여보?”
묵묵히 보고 듣고 있던 어머니가 말했다. 기준이 어리둥절해 있자 아버지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가장 예뻐하면서도 가장 마음 저린 아이네. 누구한테 갈지 궁금했는데 그 마음이 진심이라면 다행일세.”
“감사합니다.”
기준이 벌떡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우리 집에서 제일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아이예요. 지금처럼만 사랑해 주세요.”
형도 누나도 당부했다. 어머니가 같이 웃으며 기준에게 말했다.
“시간 내서 왔는데 차만 한 잔 마시고 가면 서운하지. 와서 술이라도 한잔하고 가요. 아까 보니까 비싼 술 사 왔던데 같이 마셔요.”
“네?”
“희원아, 그래도 괜찮지? 그치?”
“엄마.”
희원이 기준의 앞을 묘하게 가로막으려고 하자 누나가 희원을 잡아끌었다.
“벌써부터 보호하는 거야? 뭘 어떻게 한다고? 조금 이따가 네 매형이랑 새언니도 온다고 했어. 온 김에 다 같이 얼굴 보고 가야지.”
“누나.”
“막내야, 우리가 뭐 어떻게 하니? 술은 마실 줄 알죠?”
형은 이미 주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희원만 끙끙거리며 앞을 막아섰지만 기준이 그런 희원의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나 술 잘해요.”
희원이 간절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절대! 절대!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시면 안 돼요! 알았죠?”
“괜찮아요, 희원 씨.”
“안 된다고요. 약속해요! 약속!”
기준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커다란 식탁이 놓여 있었다. 기준네 집도 식구가 많지만 사실 기준네는 한꺼번에 식구들이 한 식탁에 둘러앉는 경우가 드물었다. 가족 행사가 있어서 식사할 일이 생기면 밖에서 먹든가 아니면 정원에서 먹곤 했기 때문이다.
“식탁 보고 놀랐죠? 워낙 식구들이 한꺼번에 모이는 경우가 많아서요.”
희원이 기준을 아버지 앞에 앉히며 설명했다. 희원네는 꼭 행사가 아니어도 자주 모이곤 했다. 제철 음식을 보고 가족들을 떠올리고 그걸 핑계로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 보니 외식을 하기보다는 집 안에서 먹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형이 상을 차려요. 영양사라서 이것저것 음식도 잘하거든요. 형수는 회사 일 때문에 바빠서 이따 저녁 되어야 올 거예요. 형수가 회사 사장님이거든요.”
희원이 조잘조잘 집안 식구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 형이 안줏거리들을 내주고 기준이 사 온 양주가 식탁 위에 놓였다.
“자, 한 잔 받게.”
양주잔 안에 얼음과 레몬이 들어 있었다. 꼭 바에 와 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식탁 위에는 화려한 안주들이 놓여 있었다. 기준이 잔을 들어서 술을 받았다. 찰랑거리는 투명한 액체가 얼음에 섞여 들었다.
기준은 잔을 받고 아버지부터 차례로 술을 따랐다. 희원네 가족은 모두 술을 즐기는지 아무도 빼지 않고 잔을 받았다. 보통 양주는 호불호가 갈려서 술이 약한 사람은 꺼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희원 씨도 마시려고요?”
“조금만요.”
기준은 희원이 술에 취해 헤실헤실 웃던 게 기억났다. 그렇게 술이 세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괜찮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러면서도 조금만 마시겠다는 말에 희원이 술에 취했을 때 그렇게 예쁘고 귀여울 수가 없었는데 그걸 또 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나서 반갑네.”
희원의 아버지가 건배를 하자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만나서 반갑다는 둥, 희원이 많이 아껴 주어야 한다는 둥,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술을 마시는데 정말 술을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잘 마시는 건지 그 독한 양주에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는 거였다.
기준은 과일을 집어서 희원의 손에 슬쩍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희원이 취하지 않도록 그의 양주잔에 얼음을 몇 개 더 넣어 주었다. 그걸 본 누나가 피식 웃었다.
“그게 지금 양주예요? 완전 얼음물이지?”
누나의 핀잔에 기준이 그저 웃었다. 괜히 희원이 민망해져서 화장실 좀 갔다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원이랑 술 마신 적 있어요?”
다시 누나가 물었다.
“네, 맥주 몇 잔 마신 적 있습니다.”
“술 취한 것 봤어요?”
“네. 원래도 잘 웃는데 웃음이 많아지더라고요.”
“귀여운 거 이미 봤네요? 못 봤으면 오늘 보여 주려고 했는데, 이미 봤다니 뭐…….”
누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서 잔을 들고 기준의 잔에 부딪쳤다. 누나를 따라 기준도 한 모금 들이켰다. 입 안에 새콤한 레몬 향이 돌았다. 화장실에 다녀온 희원이 옆에 앉으면서 잔을 들이켜는 기준을 바라보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게 마치 그렇게 빨리 마시지 말라는 뜻 같았지만 기준은 그 시선을 슬쩍 외면했다.
그 뒤로도 계속 같은 패턴이 오갔다. 누군가 기준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에 기준이 답하고, 그러고는 잔이 서로 부딪쳤다. 기준은 한 명이었고, 희원네 가족은 이미 네 명이었다. 그러다 매형과 형수가 도착했다.
“우리 매형이고, 형수님이에요.”
“우리 도련님 진짜 최고다. 나 너무 신기해요. 기사로 보던 사람을 실물로 보니까, 꼭 연예인 보는 것 같아요. 우리 도련님 진짜 인기 많구나?”
“형수님…….”
희원이 그만하라는 듯 손을 저었지만 형수는 뭘 그만하냐며 도련님이 언젠가 꼭 멋진 사람이랑 사랑할 줄 알았다면서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희원네는 가족들이 죄다 교육자라서 분위기가 정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형수는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활달했다. 가라앉기 일쑤인 집안의 분위기를 띄우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그나저나 우리 형님이 또 솜씨를 발휘하셨네요? 저 인사 왔을 때랑은 너무 차이 나는 거 아닙니까, 형님? 벌써부터 차별하시는 거예요?”
매형이 툴툴거리며 식탁 앞에 앉았다.
“뭘 차별을 해. 그때는 요리를 얼마 안 해 봐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라니까.”
“잔 비었네요.”
매형은 형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며 기준에게 술을 건넸다. 이미 양주 한 병이 동이 난 상태였기에 희원은 그만 이 자리를 파투 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자리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걸 희원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글쎄 그때 형님이 저 왔을 때는 뭘 줬는지 압니까? 이런 메뉴가 없었다니까요? 그 뭐였지, 여보?”
매형은 잔을 따라 주며 계속해서 두덜거렸다. 누나는 기억도 안 난다고 대답했고 형은 정말 그때는 요리에 취미 붙인 지 얼마 안 돼서 그랬다며 술이나 마시라고 퉁바리를 놓았다.
“근데 요리는 정말 처남이 잘하지. 처남이 해 준 요리 먹어 봤어요?”
매형이 잔을 부딪치고 난 뒤 기준에게 물었다.
“네, 삼계탕 끓여 준 적 있어요. 그 짧은 시간에 삼계탕을 뚝딱 끓여 냈는데 거기에 맛까지 좋아서 정말 감탄했어요. 우리 희원 씨가 손재주 좋은 건 알고 있었는데 요리까지 잘하더라고요.”
기준의 대답에 매형은 마치 자기 자식 자랑을 들은 양 흐흐 웃었다. 팔불출이 둘 앉아 있는 것 같아서 누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희원 씨가 학부모들한테 정말 인기가 좋거든요. 유치원 행사 있을 때마다 손수 편지도 써서 보내오고 애들한테 주는 선물도 정성스레 꾸며 만들고……. 다른 반 학부모들이 내심 부러워하더라고요.”
“기준 씨가 다른 반 학부모를 어떻게 알아요.”
당사자를 앞에 두고 칭찬을 하는 통에 민망해진 희원이 기준을 말리기 위해 불퉁하게 말했지만 기준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사내 유치원인 거 잊었어요?”
사실 기준은 다른 학부모들, 그러니까 회사 내 아이를 둔 다른 직원들과 전혀 소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귀에 들리는 것들이 있었다.
이희원 선생님은 언제나 아이들 바라볼 때 눈에서 사랑이 뚝뚝 넘쳐흐른다든가, 5세 아이들이 엄청 좋아해서 만날 집에 와서 선생님 이야기밖에 안 한다든가, 싹싹해서 학부모 마음에도 쏙 든다든가……. 그 수많은 말을 들으며 기준이 얼마나 흐뭇해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애인이 없는 것 같은데 여동생을 소개해 주고 싶다는 말을 넌지시 던지는 것을 봤을 때 기준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싹 굳었다.
“우리 희원이가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있었지. 미술 대회에서 상도 여러 번 타 왔어. 그래서 우린 희원이가 그림 그린다고 그럴 줄 알았다니까.”
“우리 희원 씨가 어릴 때부터 그랬구나.”
“그나저나 이기준 씨는 너무 우리 희원이, 우리 희원이 그러네.”
형이 기준에게 잔을 들어 보이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기준은 같이 잔을 부딪치며 술을 마시고는 대꾸했다.
“이기준 씨가 뭡니까, 형님. 이 서방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희원의 얼굴이 복숭앗빛으로 달아올랐다. 이 남자가 작정을 하고 왔는지 아니면 이게 본모습인지 희원은 어리둥절했다.
“그래그래, 이 서방. 많이 먹어요.”
“어머님도 말 편하게 하세요.”
기준은 술을 들고 이번에는 어머니의 잔을 채워 줬다. 그러는 바람에 기준도 마시게 되었다.
“천천히 마시든가 아니면 그만 마셔요.”
안주 접시가 바뀌는 틈을 타서 희원이 기준을 잡아끌었다. 기준은 취했는지 웃으며 그저 희원의 뺨을 만져 댈 뿐이었다. 아무리 술을 잘 마시는 기준이라도 일대일도 아니고 일 대 다수로 술을 마셔 대면 취하기 마련이었다.
“이 서방, 희원이 닳겠어.”
앞에서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고 아버지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희원이 민망해져 기준의 손을 잡아 내렸지만 기준은 그저 계속해서 웃으며 희원에게 붙었다.
“어머님 아버님,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희원 씨 너무 예쁘게 낳아 주셨어요.”
기준의 말에 다른 안주를 내려놓던 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버님! 여기 더한 팔불출이 있는데요?”
매형이 웃으며 말하자 희원의 부모님도 그에 동조하는 눈빛이었다. 희원은 이제 기준의 술잔을 뺏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형, 이제 안주 그만 만들어. 다들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아.”
“도련님, 너무 감싼다. 아니 이제 두 병 마셨어요. 우리 인원이 몇인데 너무 많이 마셨대요. 우리 해 봐야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형수님, 좀 봐줘요. 지금 일 대 다수잖아요. 정말 이러기 있어요?”
기준은 취해서 잠이 오는지 희원의 어깨에 자꾸 아이처럼 눈을 비볐다. 평소 같으면 희원도 귀엽다 귀엽다 하겠지만 지금은 아직까지 제정신인 가족들이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지켜보고 있어서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혹시 취했어요?”
누나가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기준이 허리를 꼿꼿이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안 취했습니다!”
눈가가 빨간 게 취기가 오른 듯했다. 게다가 안 취했다고 말하면서도 몸은 반쯤 희원에게 기대어 있었다. 가족들은 언론에서 본 기준의 이미지와 실제로 본 기준의 이미지가 너무너무 다르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희원이 가족들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인사시키고 싶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내심 놀랐다. 희원이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사귀는 사람에 대해 직접적으로 거론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교 때 누군가와 만나는 것 같긴 했는데 그것도 누나만 제대로 아는 것이었지 다른 가족들은 대강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 이후에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 같지도 않아서 가족들은 늘 가슴 한편이 아렸다.
하지만 놀라기는 거기서 다가 아니었다.
희원은 기준을 아무런 언질 없이 불쑥 데리고 가면 난리가 날 것 같아서 미리 그에 대해 말해 두었다. 유치원 학부모인데 지금은 이혼했다고. 하지만 너무 괜찮은 사람이라서 그런 것쯤은 상관없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그 누구도 희원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희원이 누군가를 만나는 데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하고 평소의 희원이 얼마나 옳은 판단을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희원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놀의 이기준 이사라고 말이다. 잠잠했던 가족들은 그에 대해서는 반응이 제각각이었다.
대부분은 진짜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언론에서 봤을 때는 꽤나 냉정하고 인간미가 없을 것 같은 인상인데 보이는 이미지와 다르냐고 물었다. 희원이 희미하게 웃으며 괜한 선입견 갖지 말고 직접 만나 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 가족들은 제대로 실감하고 있었다. 술에 잔뜩 취한 이기준 이사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같이 차갑게 생긴 이기준 이사가, 자신들의 사랑스러운 막내의 어깨에 자꾸 얼굴을 묻고는 비비대며 ‘우리 희원 씨’를 연발하면서 그들의 선입견을 깨부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희원아, 집에 가는 건 무리일 것 같으니까 방에 데리고 들어가서 재워. 좀 도와서 방에 데려다 눕혀라.”
아버지의 말에 짧으면 짧았고, 길었으면 길었을 술자리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기준은 이리저리 뒤척이더니 스르르 잠에 빠졌다. 희원이 한숨을 폭 내쉬고는 그가 조금이나마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옷을 벗겨 주었다.
어차피 가족들 중에서 희원의 방을 벌컥 열 사람은 없으니 희원은 기준의 양말도 벗겨 주고, 셔츠와 바지도 벗겨 주었다. 그러고는 기준 옆에 털썩 앉았다.
기준이 숨을 내쉴 때마다 술 냄새가 폴폴 풍겨 나왔다.
“좀 적당히 마시지. 주는 대로 받아 마시지 말라니까 약속도 안 지키고.”
희원은 불퉁거리면서도 기준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반듯한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고는 이불을 덮어 주었다.
거실로 나온 희원은 식탁을 정리하고 이제는 거실로 자리를 옮긴 가족들을 바라보며 툴툴거렸다.
“왜 그렇게 많이 먹여?”
“우리가 뭘 먹여?”
누나의 말에 희원이 째려봤다. 희원네 집안에서 희원이 가장 술을 못했다. 그렇다고 희원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술을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 집안사람들의 주량이 셌다. 형수와 매형까지 말이다.
“그렇게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건배하는 게 어디 있어?”
“엄마, 우리 막내가 벌써부터 자기 사람이라고 싸고도는 것 좀 봐.”
“좋기만 한데 뭐. 놔둬.”
누나의 말에 엄마는 그저 웃으며 희원을 끌어다 옆에 앉혔다. 희원은 엄마의 손에 이끌려 거실에 털썩 앉으며 앞에 놓여 있는 물컵을 들었다.
“어! 도련님, 그거 마시면 안 돼. 그거 소주예요.”
형수가 다급하게 외치는 바람에 희원이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컵을 내려놨다.
“누가 소주를 컵에 마셔요! 소주잔은 어디다 놓고.”
“우리 막내 성질부리는 것 좀 봐. 이 서방 취하게 만들었다고 막 화도 내.”
누나가 마구 웃으며 희원의 뒤통수를 문질렀다. 희원이 신경질을 부리며 물을 찾았다. 하지만 상 어디에도 물이 없었다.
“도련님, 물 마시려고요? 물 갖다줄게요.”
“아니에요, 형수님. 제가 갖다 마실게요.”
희원이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매형에 의해 다시 앉혀졌다.
“우리 처남을 엄청 예뻐하던데요? 완전 팔불출이 따로 없어요.”
“놀리지 마요, 매형. 매형만 하겠어요?”
희원이 괜히 입술을 삐죽이니 형수가 물을 가져다주며 말했다.
“이씨 집안에서 팔불출 1위 하겠던데요 뭐. 아버님 자리 뺏기시겠어요.”
여태 잠자코 있던 희원의 아버지가 그 말에 큼큼 헛기침을 했다. 희원네는 부부끼리 서로 사이가 꽤나 좋은 편이었다. 자식 사랑도 대단해서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밖에 나가서도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하고 칭찬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런 자타 공인 팔불출들이 인정하는 팔불출이라니! 희원은 벌써부터 낯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 사람 아끼면 좋지 뭘 그러냐. 그나저나 내일 엄마랑 나랑은 텃밭 가서 아침에 없으니까 희원이가 일어나서 잘 설명하고 챙겨 줘. 꿀은 냉장고에 있으니까 일어나면 꿀물도 좀 타 주고.”
“네. 알아서 할게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은퇴를 하고 나자 교외에 있는 텃밭에 가서 가꾸는 걸 취미로 삼기 시작하더니 주말마다 가는 것 같았다.
“아버지, 텃밭 저희도 갈래요.”
형수가 말하자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뭘 따라오니. 엄마랑 둘이서 좀 있겠다는데. 그리고 주중에 내내 일했는데 좀 쉬어라. 여보, 우리는 이만 들어갑시다. 애들끼리 놀라고 하고.”
아버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에 엄마도 자리를 뜨고 남은 건 형 내외랑 누나 내외였다.
형과 누나 내외는 내일 아침 일찍 집에 간다며 신경 쓰지 말고 늦게까지 자라고 희원에게 말했다. 희원은 알겠다며 아침에 조심히 가라고 물병과 컵을 들고는 먼저 방으로 들어왔다.
기준은 얌전히 자고 있었다. 희원이 그런 기준을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잘생기면 뭐 해. 말도 안 듣고.”
희원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물병과 컵을 협탁 위에 올려 두고 욕실로 향했다.
욕실에서 나온 희원은 기준의 옆으로 들어갔다. 침대가 크지 않아서 비좁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희원이 기준의 옆에 눕자 기준이 취해서 잠이 든 상태에서도 기가 막히게 희원을 끌어안았다. 독한 술 냄새가 나서 희원이 고개를 살짝 뒤로 뺐지만 기준은 조금 더 몸을 붙였다.
“진짜! 내일 일어나기만 해 봐!”
희원은 그리 말하면서도 기준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좀 매만져 주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서 핸드폰을 들었다. 살짝 몸을 떼고는 상체를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댔다.
희원은 번호 하나를 찾아서 액정에 띄우고도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망설였다. 술을 일찍부터 마시기 시작해서 아직 시간은 10시밖에 안 되었지만 지금 시간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는 게 실례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기기에는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모르겠다.”
희원은 한숨을 내쉬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통화 연결음이 조금 흐른 뒤 들리는 여성의 음성에 희원이 침을 꼴깍 삼켰다.
“안녕하세요, 할머님. 저 이희원입니다. 늦은 밤에 전화드려 죄송합니다.”
―아유, 아니에요. 괜찮아요.
“할머님, 잠깐 통화 괜찮으세요?”
희원이 전화를 건 상대는 다름 아닌 랑일이의 할머니, 즉 기준의 어머니인 박 여사였다.
―네, 통화 괜찮아요.
“너무 늦게 죄송합니다. 그래도 전화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기준 씨가 술에 좀 취해서 저희 집에서 자고 가려고 하는데 그래도 될까요?”
기준이 희원네 집에 인사를 간다는 건 박 여사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기준이 밤늦게까지 집에 안 오면 얼마나 걱정을 하겠느냐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희원은 전화를 하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기준이가 뭐 실수한 거는 없죠?
박 여사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그런 거 없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가족들이 술을 잘 마시는데 일일이 상대하다 보니 주량을 넘어서요. 아침에 일어나면 해장국 끓여서 속 풀게 하고 가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나저나 랑일이는 자나요? 주말마다 아빠랑 못 놀아서 속상해할 텐데 오늘도 그렇게 돼서 랑일이한테 너무 미안하네요.”
―랑일이는 잘 자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기준이가 실수한 게 없다니 다행이네요.
“네. 늦었는데 할머님, 주무세요. 밤늦게 죄송합니다.”
희원이 통화를 마무리하려고 할 때였다.
―언제까지 할머니라고 부를 거예요?
“네?”
희원은 단번에 알아듣지 못해서 되물었다.
―기준이 안 쫓겨났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승낙을 받은 셈 아닌가 싶어서요.
“아……. 그럼, 제가 어머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희원은 용기를 내며 말했다. 기준처럼 넉살맞게 ‘이 서방이라고 불러 주세요.’라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눈치는 빠른 편이라 ‘어머님’이라고 호칭을 바꿔도 되겠냐고, 그 정도는 말할 수 있었다.
박 여사가 웃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다음에 맛있는 거 해 줄 테니 집에 와요. 우리 식구들은 기준이가 누구랑 사귀고 있는지 다 아니까 그렇게 격식 갖춰서 인사할 필요는 없고 그냥 저녁 한 끼 한다고 생각하고 가볍게 놀러 와요.
“네, 그럴게요.”
―그럼 잘 자요. 다음에 봐요.
“네. 안녕히 주무세요.”
박 여사와 통화를 마치고 난 뒤 희원은 전화를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기준과 한 발씩 서로에게 다가선 느낌이 들었다. 희원은 다시 자리에 누우며 기준에게 바짝 붙었다.
* * *
목이 말라 깬 기준은 어둑어둑한 사위에 초점을 맞추느라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자신이 술을 마시다 결국 희원네서 잠든 걸 깨달았다.
“아……!”
기준은 짧게 탄식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점수 따겠다고 와서는 술 마시다 취해서 잠이나 자다니!
“응? 왜요?”
기준이 뒤척이며 일어나 앉는 소리에 희원이 덩달아 깨서 상체를 일으켰다.
“목말라요? 물 줄까요?”
희원은 물음을 던지면서도 이미 물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고는 기준에게 내밀었다.
기준은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는 물을 마셨다. 한 잔을 쉬지도 않고 단숨에 들이켠 기준이 컵을 내밀자 희원이 한 잔 더 주냐고 물었다. 기준이 고개를 저었다. 희원이 컵을 받아 들고는 기준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요? 머리 아파요?”
“희원 씨.”
“네. 꿀물이라도 타다 줄까요?”
기준이 그대로 희원을 끌어안았다. 아직도 술 냄새가 풍겼다.
“미안해요, 희원 씨.”
“뭐가요?”
“혹시 취해서 밉보인 거 아니에요?”
희원이 기준을 떼어 내고는 살짝 흘겼다.
“내가 주는 대로 받아 마시지 말라고 했죠? 이기지도 못할 술을 왜 그렇게 마셔요? 말도 안 듣고.”
“미안해요. 근데 나 진짜 취해서 실수했어요?”
“그런 거 없었으니까 안심해요. 더 자요. 머리 아플 텐데. 아니면 좀 씻고 다시 잘래요? 내 방에 욕실 딸려 있으니까 씻고 좀 더 자요.”
기준이 희원을 끌어안았다.
“그래서 나 합격이에요?”
“이제 와서 뭘 걱정해요? 벌써부터 이 서방이라고 다들 그러고 있는데. 속옷이랑 챙겨 줄게요. 형 거 새 속옷 있으니까 그거 갖다줄게요. 그동안 좀 씻어요.”
기준이 애교를 부리듯 희원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중얼거렸다.
“희원 씨. 나 머리 아파요.”
“진짜 술 깨기만 해 봐. 아주 혼나야 돼.”
“응, 그건 술 깨고요. 그 전에 나 좀 씻겨 줘요.”
기준이 희원을 더욱 꽉 끌어안고는 계속해서 비비댔다. 희원은 어째 이 남자가 점점 앙탈이 심해지는 것 같아서 걱정스러웠다.
“희원 씨랑 같이 씻고 싶어요.”
이제는 노골적인 그의 말에 희원이 기준의 어깨를 툭툭 때렸다. 하지만 뻔뻔쟁이 이기준은 계속해서 희원을 끌어안고 비비댈 뿐이었다.
희원은 기준의 온갖 아양과 애교, 그리고 치댐까지 꿋꿋이 모른 척한 뒤 그를 욕실에 집어넣고 머리만 감겨 주고 나왔다.
기준이 계속해서 투덜거리며 자기가 술에 취해서 욕조에서 잠들면 어쩔 거냐고 매정하다고 했지만 희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한 번 째려봐 준 뒤 기준을 뒤로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해 가지고 잔뜩 불만이 섞인 눈으로 희원을 쳐다보며 나온 기준이 그대로 희원에게 달라붙었다. 드로어즈만 입고 위에는 벗은 채인 기준의 등짝을 때린 희원이 기준을 침대에 앉히고는 뒤에 무릎으로 서서 자리를 잡았다.
“이러고 나오면 어떡해요. 에어컨 틀어 놔서 공기 차가운데 감기 걸리려고!”
희원은 기준이 들고 있는 수건을 빼앗아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했다. 등짝을 때린 손길도 그다지 매섭지 않았지만 머리를 말리는 손길은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었다.
“새벽 3시에 이게 뭐 하는 거예요.”
“화났어요?”
기준이 뒤를 힐긋 돌며 물었다.
“가만히 좀 있어요.”
“미안해요. 말 안 들어서.”
“됐어요.”
젖은 수건을 챙겨서 희원이 욕실로 들어가려는데 기준이 희원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기준의 품에 풀썩 기대게 된 희원이 손바닥으로 기준의 가슴을 밀어냈다.
“미안해요, 희원 씨. 말 안 들은 거 잘못했어요.”
희원이 기준을 올려다봤다.
“다음에도 몸 생각 안 하고 그러면 혼나요.”
“네.”
기준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들한테 잘 보이려고 노력한 거 고마워요. 그건 칭찬해요.”
“누가 선생님 아니랄까 봐 당근과 채찍 쓰는 것 좀 봐.”
기준이 불퉁하게 말하자 희원이 삐죽이는 그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젖은 수건을 들고 욕실로 사라졌다.
“이리 와요.”
희원이 욕실에서 나오자 기준이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들고 공간을 가리켰다. 희원이 피식 웃으며 기준의 옆으로 들어가자 기준이 희원을 꼭 끌어안았다.
“매일 이렇게 자고 싶어요. 희원 씨 꼭 끌어안고.”
“누구랑 같이 자는 거 불편하지 않아요? 계속 혼자 잤잖아요.”
희원이 고개를 위로 올려서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요 근래에 희원 씨랑 줄곧 이러고 잤잖아요. 어디 불편해 보였어요?”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기준이 물었다.
“혹시 희원 씨, 불편해요?”
“아니요. 저도 요즘 기준 씨랑 이러고 많이 잤잖아요. 좋아하는 거 모르는 거 아니죠?”
기준이 웃으며 희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직 그에게서 술 냄새가 났다.
“피곤할 텐데 자요. 아침에 부모님은 텃밭 가신다고 하고 누나네랑 형네도 일찍 간다고 하니까 푹 자요.”
“일어나서 인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빠가 기준 씨 푹 자게 두라고 했어요. 다음에 또 놀러 오래요.”
“점수 제대로 땄나 보다. 이제 한시름 놨어요.”
“기준 씨 멋지다고 했잖아요.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희원이 기준의 벗은 어깨를 매만지며 말했다. 기준이 그런 희원의 손을 가져가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예쁜 사람 데려가겠다고 허락 구하는 자리인데.”
“통보 아니고요?”
“그럴 수도 있고요.”
기준이 희원의 손바닥을 혀로 핥았다. 그러자 희원이 놀라 손을 잡아 빼려고 했다.
“응, 안 해요. 술 취했을 때는 안 할 거예요.”
기준이 희원을 다시 품에 잘 안고는 이마에 입을 맞추며 눈을 감았다. 희원이 잘생긴 눈썹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잠시 바라보다 자신도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