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비가 온 뒤에
날씨는 더웠고 습했다.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온다고 했는데 여지없이 틀린 것 같았다. 에어컨이 쌩쌩 불어오는 실내에 있다가 문을 열고 잠깐이라도 나가면 금세 후덥지근한 공기에 짜증이 치밀었다.
휴가를 끝내고 온 기준은 계속해서 바빴다. 랑일이 때문에 야근을 할 수 없었기에 집으로 계속해서 일을 싸 들고 가고 있었다. 기준은 그 모든 상황에 짜증이 났다. 금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일이 많았고, 가지고 온 기획안은 그야말로 거지 같았다.
“이 기획안은 누가 썼고, 누가 검수했습니까?”
가뜩이나 여름휴가에, 그것도 주말에 불려 나온 게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나는데, 금요일이라서 모처럼 일찍 퇴근하고 희원과 시간 좀 보내려고 했더니 결재를 해 달라며 갖고 올라온 서류는 그야말로 욕이 치밀어 나올 판이었다.
“왜 대답이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이사님. 말씀해 주시면 다시 써 오도록 하겠습니다.”
“하!”
기준이 코웃음을 쳤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습니다. 설마 이런 기획안을 가지고 뭐를 만들어 내 보자는 건 아니겠죠?”
도대체 누가 쓴 건지 문장은 장황했고 중언부언했다. 핵심 없이 미사여구만 가득한 기획안은 보는 순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이렇게 완성되지 않은 기획안을 들고 온 저의가 뭡니까?”
기준이 기가 차다는 듯 말하며 앞에 선 팀장을 노려봤다. 부장이 여름휴가로 자리를 비워 대신 기획안을 들고 들어왔는데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다시 수정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수정 말고 다시 써 오도록 하세요. 뭐를 하겠다는 핵심 자체가 없지 않습니까?”
요즘 회사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기준도 알고 있었다. 아마 이 기획안은 몇 번 수정을 하라고 지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쳐지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팀장도 몇 번 수정 지시를 했다가 수긍하지 못하는 사원 때문에 골머리를 싸안고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올라왔을 게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다시 써 오도록 하겠습니다.”
기준은 돌아 나가는 팀장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그렇게 팀장이 문밖으로 사라지자마자 원 실장이 이어서 들어왔다.
“이사님.”
원 실장의 표정이 뭔가 심각했다.
“무슨 일입니까?”
하지만 기준은 담담하게 그의 말을 기다렸다. 원 실장이 기준의 책상 위에 태블릿을 올려 두었다. 기사 하나가 떠 있었다.
* * *
다른 연인들 같으면 점심시간에 점심 맛있게 먹으라고 한마디라도 할 수 있을 텐데 희원은 일단 아이들과 만나서 일과를 시작하면 핸드폰을 꺼내 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간혹 학부모들이 아이 때문에 연락을 하곤 해서 그에 회신을 하지만 사적인 연락은 전혀 받지 못했다. 일단은 정신이 없었고 아이들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자잘한 해프닝을 동반한 사고가 나곤 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기 전에 아이들이 줄을 서서 손을 씻고 수건에 잘 닦고 나올 수 있도록 희원이 봐주는 것부터가 점심시간의 시작이었다. 아이들이 자리에 앉고 난 뒤 식사를 하면 되는데 그 과정도 험난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유치원 생활 중에서 그나마 나은 것은 오히려 학습을 할 때이다. 앉아서 같이 책을 본다든가 그림을 그린다든가 노래를 부르고 율동을 한다든가……. 하지만 그 외의 시간은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밥을 여기저기 흘리고 그걸 발로 밟을 때도 있었다. 또한 물컵을 엎거나…….
“선생님, 으앙!”
여지없이 오늘도 또 누군가가 물컵을 쏟아서 옷이 흠뻑 젖고 말았다. 선생님, 소리가 들리자마자 희원과 부담임 교사는 화장지를 들고 붙었다.
“괜찮아, 괜찮아. 울지 마.”
희원이 아이를 안아서 뒤로 빼고는 옷을 닦아 주었다.
“얘들아, 괜찮으니까 밥 먹어요.”
아이들의 시선이 한곳에 쏠렸다가 다시 천천히 숟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희원은 아이 손을 붙잡고는 옷을 갈아입히러 다른 곳으로 향했다.
“괜찮아. 밥 먹다 쏟을 수도 있고 흘릴 수도 있어. 뜨거운 거 아니어서 다행이야.”
어차피 아이들의 음식은 안전을 위해서 국도 미지근하게 나온다. 그러니 유치원에서 뜨거운 것에 델 염려는 없었다.
“선생님, 축축해요.”
아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희원을 올려다봤다. 희원은 아이의 눈물을 훔쳐 주고는 대답했다.
“응, 옷 갈아입고 밥 먹으러 가자.”
희원이 아이를 챙기는 동안 다른 아이들은 밥을 먹으며 정신없는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희원은 날마다 반복되는 이런 혼이 쏙 빠져나갈 것 같은 일상이 그저 행복하고 재미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희원에게 유치원 교사가 천직이라고 할 정도로 그는 아이들이 그저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가끔은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요즘 희원은 아이러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기준과 연애를 하면서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자신을 따르는 랑일이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페로몬 문제로 인해 자신은 그런 사랑스러운 아이를 가지기 힘들다는 생각에 다소 서글프기도 했다.
“선생님, 밥 다 먹었어요!”
랑일이가 번쩍 손을 들고 외쳤다. 랑일이는 기준의 말에 의하면 집에서는 종종 밥투정을 한다는데 유치원에서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늘 가리지 않고 골고루 많이 먹었다.
점심시간마다 먹기 싫어서 뚱하니 앉아 있곤 하는 아이도 있었고 채소 같은 것을 먹기 싫어서 포크로 일일이 골라내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랑일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 먹은 사람은 치카치카 하러 갈까요?”
“네!”
랑일이는 모범생이었다. 모든 일에 앞장섰으며 행동도 민첩하고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선생님들의 손이 덜 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치원에서는 손이 덜 가는 만큼 개인적으로 있을 때는 그만큼의 손길을 받으려고 하는지 둘만 있으면 희원의 껌딱지처럼 굴었다.
랑일이가 스스로 치약을 짜고 양치를 하는 모습을 희원은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어릴 적 기준도 저랬을까? 희원은 문득 기준이 궁금해졌다.
아이들과 섞여서 빨리 밥을 먹으며 희원은 기준을 생각했다. 그는 워낙 바쁜 사람이라서 회사에 있는 동안에는 연락을 해 오고 그러지는 않았다. 둘은 밤에나 통화하곤 했다.
희원은 밥을 한 숟가락 남겨 두고는 핸드폰을 꺼내서 혹시 학부모들에게 연락이 온 게 있나 체크했다. 학부모들은 주로 아이들에 관하여 알릴 게 있으면 등원하며 말하지만 그 외에도 잊고 있던 사항들을 점심에 문자로 남기곤 했다.
“어?”
기준에게서 전화가 와 있었다. 의외여서 희원은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점심시간이라고 해도 아이들 때문에 통화를 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일 있어요?]
하지만 그는 당장 메시지를 확인하지는 않았다.
“선생님!”
“응?”
“치약이 없어요.”
누군가 희원을 불렀다. 아마 개인 치약이 떨어져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같았다. 희원은 휴대폰을 앞치마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바로 일어났다.
정신이 쏙 빠지는 하루를 보내고 하원 시간이 되자 희원은 아이들을 한 줄로 길게 세웠다.
“아직 가방을 못 멘 친구들이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자.”
“네!”
랑일이를 뺀 나머지 친구들은 이제 집에 갈 준비를 했다. 점심시간 이후에 기준에게서 두어 번 전화가 왔지만 받지를 못했다. 그렇다고 따로 메시지가 남겨진 것도 아니기에 희원은 기준이 그저 오늘도 바빠서 늦게 온다는 뜻이겠거니 했다.
어차피 금요일이고 이제 금요일 밤에는 별일 없으면 으레 만나는 게 습관처럼 되어 있어서 희원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랑일아, 아빠가 오늘 늦으시나 보다. 조금만 기다려 줘.”
“네!”
랑일이는 익숙하게 장난감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선생님, 부모님들 오셨어요.”
퇴근을 한 부모들이 한두 명씩 대문 앞에 모여든 상태였다.
“자, 천천히.”
아이들은 차례대로 신발장에서 신발을 빼어 들고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희원은 행여 아이들이 계단에서 넘어지지는 않을까 조심히 아이들을 살폈다. 그러고는 대문 밖 부모들을 확인하고 아이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불렀다.
아이들은 신나서 엄마 아빠 품으로 뛰어들었다.
“선생님 고생하셨어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희원은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고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고개를 숙여 학부모에게 인사를 했다. 아이들이 거의 빠졌을 때 랑일이가 현관문을 열고 빼꼼 얼굴을 내비쳤다.
“안녕! 안녕히 가세요.”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이제 희원과 랑일이만 남았다.
“선생님!”
“응! 랑일아, 안에 들어가 있어. 선생님도 들어갈게.”
저녁이었지만 날씨가 더웠다. 아직 햇볕도 쨍해서 랑일이가 밖으로 나오는 것보다는 희원이 얼른 들어가는 게 나을 듯싶었다. 랑일이가 고개를 쏙 들이밀고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희원도 계단을 오르려고 했다.
“실례합니다.”
어떤 여자의 음성에 희원이 오르려던 몸을 뒤로 돌려서 바라봤다.
“어떻게 오셨어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누구인지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는 유치원 앞에 차를 세워 두고 운전석 쪽에 서 있었다. 일단 여기는 골목길이니 차를 다른 곳으로 좀 붙여서 대는 게 나을 듯했다. 하지만 그 전에 누구인지, 무슨 볼일인지 알아야 했다.
희원이 계단을 내려가 대문 앞에 섰다.
“혹시 아이 중에 이랑일이라고 있나요?”
“네?”
랑일이 이름이 나오는 순간 희원의 눈이 커졌다. 그와 동시에 저쪽에서 빠른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여자와 희원의 사이를 기준이 가로막았다.
희원은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서 기준을 섣부르게 부를 수가 없었다. 눈앞에 기준이 가로막고서는 시야를 차단하고 있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준의 어머니가 희원과 기준의 사이를 안다고 해도 다른 가족들은 둘 사이를 모를 거였다.
갑자기 언젠가 봤던 드라마가 생각났다. 재벌가의 친척들이 나타나 꼬투리를 잡고 자리를 놓고 위협하던 장면이 생각났다. 기준이 놀의 차기 주인이니 그런 것도 간과할 수는 없었다. 경솔한 행동은 삼가야 한다고 희원은 그 찰나의 순간에도 생각했다.
“기준 씨, 오랜만이네.”
“여기 왜 왔어?”
기준에게 인사말을 건네는 여인의 태도에 희원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왠지 모를 친근한 말투가 희원의 심장을 꽉 움켜쥐는 것 같았다. 손이 차가워지고 떨렸다.
“랑일이 아버님.”
희원은 일단 둘의 팽팽한 공기를 갈라야겠다고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둘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순간 희원은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희원의 목소리에 기준이 반사적으로 돌아봤다. 기준의 얼굴이 서늘했다.
“두 분이서 혹시 나누실 대화가 있다면 제가 자리를 피해 드릴게요.”
희원은 둘만을 남겨 두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왠지 외면하고 싶었다. 그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다시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그때였다. 현관문이 열리고는 랑일이가 고개를 쏙 빼며 다시 희원을 찾았다.
“선생님! 왜 안 들어……. 어! 아빠다!”
랑일이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여느 때 같으면 희원이 달려가 랑일이를 품에 안을 텐데 지금 희원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몸이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돌아가.”
기준이 짧게 말했다.
“쟤가 랑일이야?”
하지만 여인은 계단을 폴짝폴짝 뛰며 내려오는 랑일이를 보며 복잡한 얼굴을 해 보였다. 희원의 얼굴도 같이 복잡해졌다. 그제야 희원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말이다. 랑일이 얼굴에 그녀의 얼굴이 숨어 있었다.
“아빠!”
랑일이가 기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랑일아, 아빠가 잠깐 여기 이 아줌마하고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데 그동안 선생님하고 있으면 안 될까?”
기준이 랑일이를 돌아보며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그러고는 희원을 바라봤다. 희원의 굳어 있는 얼굴에 기준은 어서 빨리 이 자리를 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희원의 안색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 랑일아. 선생님하고 잠깐 있자. 아빠가 말씀 나누셔야 한대.”
희원이 랑일이의 손을 잡았다. 랑일이가 이상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희원을 유난히 좋아하는 랑일이가 희원의 손을 뿌리치고 기준에게 갈 리가 없었다.
“네! 아빠 그러면 이따가 봐.”
“그래.”
기준이 웃으며 대답하고는 다시 여인을 마주 봤다.
“다른 데 가서 얘기해.”
여인은 랑일이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눈으로 좇았다. 반면 희원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유치원 안으로 들어갔다.
“선생님.”
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정신이 다른 곳에 나가 있는 사람 같았다.
“선생니임!”
랑일이가 희원의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희원은 자기가 랑일이와 함께 신발장 앞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응? 랑일아, 왜?”
퍼뜩 정신을 차린 희원이 랑일이를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랑일이가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희원을 올려다봤다.
“선생님, 또 아파요?”
어린아이가 알아챌 만큼 안색도, 표정도 좋지 못한 모양이었다. 희원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랑일아, 밥 먹으러 갈래?”
“네, 좋아요.”
랑일이가 가방을 주섬주섬 어깨에 메려고 하는 것을 희원이 말리고는 제가 대신 들었다. 희원은 사실 별로 입맛도 없지만 그렇다고 랑일이를 굶길 수는 없어서 무거운 발을 뗐다.
유치원 문단속을 하고 밖으로 나와서 기준에게 메시지를 남길까 하다가 그의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서 멈췄다.
“와서 없으면 전화하겠지.”
“네? 선생님 뭐라고 했어요?”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혼잣말에 랑일이가 눈을 빛내며 물어봤다. 희원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 *
둘은 작은 카페에 마주 앉았다. 기준은 희원이 자꾸 눈에 밟혀 초조했지만 그렇다고 앞에 앉은 이 사람을 외면할 수도 없어서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전시 때문에 입국한다는 소식 들었어.”
“알고 있었구나?”
“근데 여긴 왜 왔어?”
여인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다른 뜻은 없었어. 랑일이 궁금해서 한 번만 멀리서라도 보고 가려고 왔어.”
“당연히 친모니까 궁금해할 수 있는데, 절차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기준으로서는 앞에 앉은 이에 대한 증오 같은 게 없었다. 미움도 관심이 있어야 생기는 감정인데 둘은 서로에 대해 감정 자체가 없었다. 그러니 원 실장이 이사실에 들어와서 소식을 전할 때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지.
“진짜 잠깐만 보고 가려고 했어. 애를 데리고 따로 시간을 갖겠다는 것도 아니라.”
“유치원 교사한테 랑일이에 대해 물어봤잖아. 그렇게 모르는 이에게 애를 불쑥 보여 줄 사람도 아니지만 그다음엔 어떻게 하려고 한 건데?”
원래도 충동적인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기준이 이성적이라면 랑일이 친모는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음 내키는 대로 즉흥적으로 행동할 때가 있었다. 아마 오늘도 그랬을 것이다.
“아… 그런 것까지는 생각을 못 했어.”
기준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랑일이에 대해 궁금하고 만나고 싶을 수도 있어. 그리고 그런다고 해도 내가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친모니까. 그런데 그렇게 충동적으로 굴면 어쩌겠다는 거야? 랑일이 생각은 안 해?”
눈앞의 이는 원래 성정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기준은 랑일이 친모가 뻔뻔하고 악독하기라도 하면 자신도 그렇게 나갈 텐데 그게 아니니 더욱 골치가 아팠다.
“이기적인 너랑 나 때문에 랑일이가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는 생각 안 해 봤어?”
“랑일이한테 혼란을 주려고 한 건 아니었어. 정말 그냥 한 번만 보려고 했을 뿐이야. 워낙 랑일이는 언론에도 공개 안 되어서 사진 한 장 없으니까.”
기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우리가 지금 이러고 앉아 있는 것도 웃기다고 생각해. 당신 그때 내가 다시 생각해 보자고, 랑일이 같이 키우는 게 어떻겠냐고 했을 때 그림 그리겠다고 떠났잖아. 그리고 지금까지 연락 한 번 없다가 고국에 들어오니 이제야 랑일이가 궁금했다고?”
잠시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때는 정말 이 나라 벗어나서 그림만 그리고 싶었어.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경영권은 당신네 회사로 넘어가고… 조금만 더 여기 있으면 내가 죽을 것만 같았어. 그런데 그렇다고 랑일이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야.”
기준은 끊었던 담배 생각이 절실했다.
“그건 당신 사정이고. 나한테 당신 감정을 강요하지 마.”
기준은 이제야 와서 랑일이가 궁금했다고 하는 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주절주절 이야기하는데 더 이상 듣고 싶지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친모 때문에 애가 가질 혼란과 상처는 왜 생각 안 해? 당신만 보고 싶다고, 그래서 불쑥 나타나면 다인 거야?”
한때 기준은 그녀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계속해서 생각해 보고 이야기하다 보니 이해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준은 지금 그 누구보다도 랑일이와 희원이 보고 싶었다.
랑일이 친모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래서 당신하고 안 살길 다행인 것 같아.”
“뭐?”
기준이 무슨 말이냐는 듯 물었다.
“당신하고 나는 성향 자체가 안 맞는다는 걸 간과했어. 아마 우리가 랑일이 때문에 계속해서 같이 살았다고 해도 당신과 나는 성격이 안 맞아서 헤어졌을 거야. 언론에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고 보도한 게 사실이 되어 버렸네. 미안해. 또 충동적이었어.”
기준이 고개를 젖히고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손목으로 꾹꾹 눌렀다.
이럴 거라고 예상되어서 희원에게 전화를 한 거였다. 랑일이 친모가 한국에 들어왔는데 불쑥 유치원에 찾아갈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희원은 바쁜지 계속해서 연결이 안 되었고 차마 이런 이야기를 메시지로 대신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인데…….”
“뭐를?”
“그때 당신이 랑일이 때문에라도 같이 살아 보자고 하지 않고 내가 마음에 든다고 좋아한다고 한마디만 해 줬으면 감정이 앞서는 나는 당신에게 잡혔을 거야.”
기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당신은 마음에 없는 소리는 아예 못하는 사람이니……. 사업을 하면서도 입에 발린 소리 못하는 사람인데 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별 뜻 없어. 오지랖이 넓었네. 갈게. 미안해.”
여자가 카페를 벗어나는 순간 기준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 * *
걸려 오는 전화에 희원이 입술을 꾹 물었다. 받아야 하는데 쉬이 손이 가지 않았다. 랑일이가 포크를 물고 희원을 빤히 쳐다보는 순간 희원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희원 씨, 어디 있어요?
기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희원은 왠지 목이 메어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놓인 물컵을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에야 간신히 대답했다.
“랑일이랑 저녁 먹고 있어요.”
여느 때 같으면 랑일이와 기준과 좀 더 오랜 시간을 같이 있고 싶어서 천천히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찾곤 했는데 희원은 지금 돈가스집에 와 있었다.
“선생님, 이거 진짜 맛있어요.”
입 주위에 돈가스 소스를 묻히고 있는 랑일이를 바라보며 희원은 희미하게 웃었다. 냅킨을 들어 입 주변을 닦아 주며 기준에게는 가게 위치를 알려 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아빠 온대요?”
“응.”
랑일이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조금 전 유치원 대문 앞에서 기준과 서 있던 친모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마 아이의 관심에는 아빠와 희원밖에 없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랑일이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하는지를 고민하던 희원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씁쓸했다.
랑일이는 엄마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을까? 하지만 마치 금기어인 것처럼 랑일이에게 ‘엄마’라는 단어를 쉬이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엄마’라는 단어를 말하는 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랑일이도 백화점에 가서 희원을 보고 ‘마미’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지금 희원이 딱 그 격이었다.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았던 모든 것들이 희원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얼굴에 다 묻히겠어, 랑일아.”
희원이 랑일이 볼에 묻은 소스를 닦아 주며 말했다. 랑일이가 히히 웃으며 희원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선생님.”
“응?”
“선생님은 배 안 고파요?”
입맛이 없어서 랑일이 것만 시켰다. 그러다 보니 지금 랑일이만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응, 선생님은 별로 배가 안 고파서.”
랑일이가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그래도 선생님하고 밥 먹는 게 좋은데.”
희원은 달리 할 말이 없어서 그저 랑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물컵에 물을 따라서 한 모금 마셨다.
벌컥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온 기준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숨소리도 거칠었다. 기준은 희원을 보자마자 얼어 있던 표정이 탁 풀렸다.
“아빠!”
랑일이가 먼저 제 아빠를 부르며 작은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웃으며 반겨 주었을 희원이 움칠 놀라는 표정을 짓는 게 기준의 눈에는 더 먼저 들어왔다.
“오셨어요.”
뒤늦게 희원이 인사를 건넸다. 기준이 건너편에 앉아서 손수건으로 땀을 닦고 물을 한 잔 마시는 동안에도 희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희원 씨는 다 먹었어요?”
“식사하셔야죠?”
둘이 동시에 물었다. 희원이 다시 물었다.
“아직 식사 전이시죠?”
“네, 아직이요. 그런데 희원 씨는 왜 안 먹고 있어요? 다 먹은 거예요?”
“배가 별로 안 고파서요.”
희원의 대답에 기준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기준은 희원을 먹이지 못해서 안달인 사람이었다. 랑일이가 밥 안 먹겠다고 투정 부리면 기준은 ‘그럼 먹지 마!’ 하고 말할 사람이었다. 밥그릇을 들고 쫓아다니면서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려고 하는 아빠는 아니란 말이다. 그런 사람이 희원의 끼니는 어찌나 그렇게 챙기는지…….
“뭐를 좀 먹었어요?”
기준은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지금 희원이 입맛이 뚝 떨어져서 둘러대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 점심을 좀 많이 먹었나 봐요.”
희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메뉴판을 가리켰다.
“뭐 드셔야죠? 뭐로 시킬까요?”
기준은 입맛이 썼다.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랑일이를 본가에 보내고 희원과 단둘이 앉아서 그의 불안과 염려를 풀어 주고 싶었다.
“랑일이랑 같은 거로 시킬까요? 안심 돈가스 괜찮으세요?”
기준이 대답하지 않자 희원은 알아서 시키겠다고 하며 직원을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기준이 희원의 손을 먼저 잡았다. 손에 닿는 희원의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희원 씨도 같이 먹어요.”
“일단 시킬게요.”
희원은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직원을 불러서 주문했다. 그러고 난 뒤 둘 사이에는 별말이 오가지 않았다. 이제 랑일이는 자기 몫의 돈가스를 거의 먹은 상태였다.
“선생님.”
배가 부른지 랑일이가 희원에게 딱 달라붙어서 껌딱지 행세를 시작하려고 했다. 희원은 그 와중에도 랑일이와 눈을 맞추고 웃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늘도 우리 집 가서 자요.”
기준과 눈이 딱 마주쳤다. 하지만 이내 희원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기준의 눈빛을 피했다.
“랑일아, 오늘은 선생님이 약속이 있어. 다음에 같이 놀자.”
랑일이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보다 기준의 표정이 걷잡을 수 없이 굳어졌다. 희원이 랑일이와 계속해서 눈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랑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선생님, 다음에는 꼭 같이 우리 집에서 놀아요.”
“그래.”
약속을 지키는 희원이기에 그걸 믿어야 하는 걸까? 기준은 지금이라도 희원을 품에 안고 귓가에 미안하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얼음장 같았던 그의 손이 꼭 그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준은 불안하고 한편으로는 속상했다.
“약속, 있었어요?”
“네. 그래서 먼저 일어나 볼게요. 죄송해요.”
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준이 따라 벌떡 일어났다.
“약속이 몇 시인데요? 데려다줄게요.”
희원을 잡아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왠지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희원은 여전히 억지로 웃는 웃음을 띠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음식 나올 때 됐잖아요.”
그제야 기준은 깨달았다. 희원이 자신의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않고 서둘러 음식을 시킨 이유를 말이다. 희원은 애초부터 기준의 발을 여기에 묶어 두고 이렇게 자리를 피하려고 한 거였다.
“희원 씨, 늦어요?”
“네?”
“그 약속 늦게 끝나냐고요.”
“글쎄요…….”
희원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랑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랑일아, 선생님이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갈게. 월요일에 보자. 먼저 갈게요. 주말 잘 보내세요.”
희원은 서둘러서 밖으로 나갔다.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바람에, 그리고 랑일이를 혼자 남겨 둘 수가 없어서 기준은 엉거주춤 서서 희원의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가게를 나온 희원은 빠르게 걸었다. 기준이 뒤따라 나올 수 없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시야에서 빨리 사라져야겠다는 생각으로 뛰다시피 걸었다. 마침내 눈앞에 보이는 골목길로 접어들었을 때 발걸음을 늦췄다.
손끝이 벌벌 떨렸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그 무엇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하아.”
어깨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쭉 빠졌다. 그와 동시에 심장이 발밑으로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떨어진 심장이 데구루루 굴러서 흙먼지와 함께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빠르게 걸었음에도 온몸이 서늘했다. 피가 차가워진 것 같았다. 손이 차가웠다. 식은땀이 등골을 따라 주르륵 흘렀다.
“바보 같아.”
희원은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그 자리를 도망쳐 나온 자신에게인지, 아니면 희원을 계속해서 눈으로 좇으며 안절부절못하는 기준에게인지…….
희원은 정처 없이 걸었다. 약속이 있다는 소리는 당연히 거짓말이었으니 이제부터 무얼 하면 좋을까 고민했다. 별로 집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집에 가 봐야 우울감만 더할 뿐이었다.
금요일이라서 그런지 온통 거리는 시끌벅적했다. 원래라면 기준과 랑일이와 맛있는 저녁을 먹고 계속해서 시간을 같이 보냈을 거였다.
희원은 조용한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실까, 아니면 누구를 만날까 고민했다. 일단 조금 걸어야겠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들고서 전화번호부를 검색했다.
“이럴 때 만날 사람도 없냐.”
대학도 조기 졸업하고 바로 취직하여 내내 일만 한 희원인지라 갈 만한 곳도 딱히 만날 사람도 없었다.
“뭐 이래.”
인생을 참 재미없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하여도 똑같지 않을까 싶었다.
희원은 터벅터벅 걷다가 결국에는 집에 가기로 했다. 집에 가서 혼자 술이나 한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원 씨, 약속 끝나고 집에 갈 때 꼭 연락 줘요. 그게 안 되면 집에 들어가서라도 꼭 연락 줘요.]
핸드폰 진동이 울려 액정을 확인하니 당연하게도 기준이었다.
“바보 같아.”
그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다시 덜커덩 소리를 내는 것 같은 심장에 희원은 자조했다. 그리고 이내 핸드폰을 꺼 버렸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작은 라멘집 하나를 발견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곳인지 인테리어도 가게 간판도 새것이었다. 희원은 창문을 통해서 안을 들여다봤다. 안에는 혼자 술을 마시는 손님 두어 명이 있을 뿐이었다. 희원은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희원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창가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생맥주 한 잔이랑 냉라멘 하나 주세요.”
핸드폰 전원을 꺼 버린 뒤라 희원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창밖을 건너다보며 깊은 한숨을 쉬며 다시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준에게 거짓말을 하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있는 건 사실이다. 기준이 랑일이 친모에 대한 것을 설명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물론 그때는 둘의 관계가 이리될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그저 담당하는 학생에 대해 더 깊게 많이 알고 싶어서 기준의 말에 귀 기울였다. 희원은 그때 기준도, 랑일이도 참 힘들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원래 자신의 이야기가 되면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는 법이다. 희원은 물어볼 자신이 없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말이다.
희원이 기준과 단순한 연애만 하려고 한다면 랑일이 친모는 사실상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기준도 그렇겠지만 희원은 더 먼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친모는 손거스러미같이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대화를 해야만 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희원은 결국 라멘보다 맥주에 먼저 손을 댔다. 가뜩이나 차가운 손끝에 차가운 잔이 닿아서 온몸이 전기에 통한 것같이 찌릿했다.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니 머리털이 주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희원은 맥주를 반쯤 들이켠 뒤 그제야 라멘에 손을 댔다.
“여기 맥주 한 잔만 더 주세요.”
차가운 것을 들이켜면 머리가 이성적으로 돌아갈까? 희원은 온몸을 차게 만들고 싶었다. 감정이 너울거려 자꾸만 밖으로 비집고 나왔다. 이걸 꾹꾹 눌러 삼키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차가운 음식을 집어삼켜도 머리는 알코올 기운으로 점점 먹먹해져 갈 뿐이었다. 희원은 결국 맥주만 세 잔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여기서 애를 쓴다고 해도 더 이상 생각은 진전되지 않았다.
희원은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와서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다. 몇 잔 마시지도 않은 술에 취하는 것 같았다. 집에 가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잠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 오네?”
일기예보에 비 온다는 이야기가 있었던가? 해가 졌지만 하늘에 칙칙한 먹구름이 끼어 있는 게 보인다. 희원은 비가 툭툭 떨어지는데도 걸음을 빨리할 생각도 않고 천천히 걸었다.
빗방울은 금세 굵어지고 내리는 속도도 빨라졌다. 어깨를 툭툭 치는 빗방울이 자꾸만 울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울고 싶은 걸까? 울어 버리면 속이 시원해질까? 아침까지, 아니 아이들을 집에 보내며 랑일이와 단둘이 남아서 기준을 기다릴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설렜고 오늘은 그와 어떤 시간을 보낼까 기대했다.
그런데… 그 몇 시간 만에 달라졌다. 손바닥 뒤집듯이 말이다.
희원은 더욱 거세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바닥만 보며 걸었다. 땅을 파고 땅속으로 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울감이 점점 몸뚱이를 부풀리며 희원을 잠식해 가는 그 순간이었다.
“희원 씨!”
누군가의 품이다! 그리고 그 순간 희원은 소리 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 * *
기준은 오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히터를 틀고 무릎 담요를 희원에게 덮어 주고 속력을 높일 뿐이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집 안의 온도를 높이고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따듯한 물을 받기만 했다.
“왜 그러고 서 있어요. 욕실 들어가서 몸 좀 녹여요. 욕조에 물 받고 있어요.”
욕실에서 나온 기준이 말했다. 하지만 희원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입은 채 아무 말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희원 씨.”
참다못한 기준이 희원을 불렀다. 그제야 희원이 고개를 들었다. 희원의 눈가가 붉었다.
“감기 걸려요.”
기준은 희원의 손목을 끌어다가 욕실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문을 닫아 주었다.
한참을 욕실 밖에 서 있는데 희원은 나오지 않았다. 문에 귀를 댔는데 물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기준은 그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기준은 주먹을 들어 문을 노크했다.
“희원 씨.”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준은 피가 다 식어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욕실 문을 벌컥 열었다.
“희원 씨!”
기준이 안으로 들어갔다. 희원은 욕실에 무릎을 세우고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기준이 욕조 턱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척에 희원이 고개를 들고 기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희원 씨, 왜 이러고 있어요.”
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준은 손을 물에 집어넣었다. 다행히 물은 여전히 따듯했다. 기준이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무서웠어요.”
희원이 입을 뗐다. 기준이 다시 엉거주춤 자리에 앉고는 희원을 바라봤다.
“기준 씨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무서웠어요.”
“원래 충동적인 사람이에요. 일 때문에 잠깐 들어왔는데 랑일이가 궁금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앞뒤 안 가리고 무턱대고 온 거예요.”
“앞으로도 그럴까요?”
희원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기준이 희원의 젖은 머리를 만져 주었다. 커다란 손이 머리에 내려앉자 희원은 다시 울컥 울음이 솟았다.
“왜 이렇게 울어요, 마음 아프게.”
희원이 고개를 저으며 눈가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러지 마요. 눈 아파요.”
기준이 희원의 손목을 잡고 말렸다. 희원이 코를 훌쩍이며 세운 무릎에 턱을 괴고 말했다.
“앞으로 또 랑일이가 보고 싶으면 들어와서 랑일이를 만나려고 하겠죠?”
“아니요.”
기준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단정 지어요?”
“그럴 사람이에요. 모성애라는 게 있었으면 아이를 두고 자신의 길 찾겠다고 뒤도 안 돌아보고 가지 않았겠죠. 그게 아니더라도 그 뒤에 아이가 보고 싶었으면 얼마든지 보러 왔을 거예요. 지금까지 아무 소식도 없다가 일 때문에 들어와서 보러 오는 게 아니라요.”
희원은 기준의 손길을 받으며 가만히 있었다.
“물 다 식지 않았어요? 이제 그만 나와요.”
“페로몬에 문제가 있어서 아이를 낳을 수 없겠다는 생각에 누구를 만나는 게 두려웠어요.”
희원의 말에 머릿결을 만지던 기준의 손이 멈칫 굳었다. 하지만 희원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직업을 갖고 싶었어요. 아이들이 너무 좋은데 평생 내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컸거든요.”
기준은 묵묵히 희원의 속마음에 귀를 기울였다.
“기준 씨가 연애하자고 했을 때 망설였던 건 누군가를 쉽게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은 연애를 하다가 마음이 맞지 않으면 헤어지곤 하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았어요. 연애 말고 결혼이 하고 싶었거든요. 가정을 꾸리고 사랑하며 살고 싶었어요. 그래서 기준 씨가 만나자고 했을 때 내가 기준 씨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지 생각했어요.”
기준은 한 번 더 물의 온도를 체크했다. 아직은 따듯해서 희원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기로 했다.
“기준 씨가 지금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고 주제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솔직하게 말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물만 쳐다보던 희원이 기준과 눈을 마주했다. 기준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랑일이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늘 마음 저편에 ‘아이를 가질 수 없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누군가를 만나는 게 두려웠는데 기준 씨에게는 이미 랑일이가 있으니 그게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겠구나 싶었어요. 랑일이 같은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마미가 되어 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죠. 그런데 오늘 일로… 만약 랑일이가 나중에 친엄마를 찾으면 어떡하나… 그리고 기준 씨도 만약 그 누군가와 재혼해서 랑일이에게 동생을 만들어 주겠다고 하면 어떡하나…….”
그 순간이었다. 기준이 희원의 얼굴을 감싸고는 그대로 입을 맞췄다. 희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퍼뜩 정신을 차린 희원이 기준을 밀어냈지만 기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깊게 입을 맞췄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 기준은 매서운 눈을 하고 있었다.
“기준 씨.”
“희원 씨, 나 화났어요.”
“네?”
“나와서 얘기해요. 이제 물 차가워져서 감기 걸려요. 일단 나와요. 옷 꺼내서 문 앞에 둘게요.”
기준이 그대로 등을 돌렸다. 희원은 그 등을 보는 순간 외면당하는 것 같아서 그대로 그의 등을 껴안았다.
“가지 마요. 나한테 등 돌리지 마요.”
기준은 희원의 손을 떼어 내고는 말했다.
“나가서 얘기해요. 감기 걸린다고요. 아프면 어쩌려고 그래요.”
기준은 희원의 몸을 커다란 타월로 감싼 뒤 손목을 잡고 욕실에서 데리고 나왔다. 욕실에 오래 있어서 기준의 옷도 축축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기준은 희원을 침대에 집어넣고 온몸을 이불로 감쌌다.
“잠시만 기다려요. 옷만 갈아입고 올게요.”
“가지 마요.”
희원이 기준의 손목을 잡았다. 기준이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고집쟁이.”
기준이 그대로 희원의 위를 점령했다.
“분명히 말했어요. 나 화났다고.”
“알아요.”
“알긴 뭘 알아요? 말도 안 듣고, 고집만 부리고.”
“미안해요.”
희원이 기준의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말했다.
“잘못한 게 뭔지나 알고 미안하다고 하는 거예요?”
희원이 여전히 기준의 손목만 바라보며 시선을 피했다. 모로 돌린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서 기준이 희원의 볼에 손을 얹고 자신을 바라보게 고개를 돌렸다.
“대답해 봐요. 뭐를 잘못했냐고요.”
“내가 얘기한 게 기분 나빴던 거…….”
“거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희원 씨, 어떻게 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요?”
기준의 얼굴이 정말 상처받은 것 같아서 희원이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기준은 희원의 어깨를 눌러서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조끼를 벗어서 침대 밖으로 떨어뜨렸다. 넓은 어깨 탓에 셔츠가 팽팽했다.
“내가 희원 씨를 그냥 애나 낳아 주는 오메가로 생각했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나라고 희원 씨랑 미래를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내가 희원 씨한테 연애하자고, 나랑 만나 보면 안 되겠느냐고 말했을 것 같아요?”
희원의 위를 점령하고 있던 기준이 허탈하다는 듯 몸 위에서 내려와 침대에 털썩 앉았다. 희원이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고 기준과 마주했다.
“희원 씨가 페로몬 문제 있는 것도 알고 시작한 거잖아요. 그거 잊었어요? 한의원 간 게 내가 연애하자고 말한 것보다 더 전인걸요. 그거 알고도 시작한 거잖아요. 희원 씨가 마음에 들어서 이희원이라는 사람을 놓치면 안 되겠다 싶어서 열렬히 꼬신 거 왜 몰라요? 이혼한 데다가 애도 있는데 그런 사람이 파릇파릇한 사람한테 연애하자고 하면서 얼마나 고민했겠어요? 미래를 꿈꾸지 않은 채 그저 연애만 하자고 말한 거면 그거야말로 양심이 없는 거지. 희원 씨, 고작 나를 그렇게 양심 없는 놈으로 봤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희원이 고개를 마구 저었다.
“내가 애 낳아 줄 오메가 찾는 줄 알았어요?”
“아니요.”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해요? 내가 랑일이 엄마 찾는 줄 알았어요? 난 그저 이희원이 좋아서 그런 건데 희원 씨는 날 그런 눈으로 본 거예요?”
“아니에요.”
기준의 손등에 퍼렇게 힘줄이 돋아 있었다. 힘이 바짝 들어간 기준의 손을 희원이 살살 매만졌다.
“미안해요. 그런 거 아니란 거 알아요.”
“근데 왜 그렇게 말해요?”
“그냥 혼자 땅 팠어요.”
“잘 아네요. 혼자 땅 판 거.”
희원이 눈을 내리깔았다. 기준이 희원의 뺨을 살짝 손가락으로 툭 건들고는 자신을 보게 했다.
“시선 피하지 말아요. 외면당하는 것 같아서 마음 아파요.”
희원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지금 울어야 할 사람이 누군데 그래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시선을 마주하고는 손끝으로 기준의 눈꼬리를 매만졌다.
“누가 그렇게 만져 주면 화 풀린대요?”
“미안해요.”
“고집불통.”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땅 파서 지구 내핵까지 뚫었을 거야.”
희원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그렇게 속상해하면 내가 마음이 아파요, 안 아파요?”
희원이 또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자 기준이 매서운 눈을 했다.
“대답해 봐요.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혼자 삽질하고 자기 비하나 하고 그러면 내가 속상해요, 안 속상해요?”
“속상해요.”
“잘못했죠?”
“네, 잘못했어요.”
“혼나야 돼, 아주.”
기준이 그대로 희원의 뒤통수를 커다란 손으로 잡고는 입을 맞췄다. 평소 달콤하고 다정한 입맞춤과는 달리 거칠고 난폭했다. 아랫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질 정도였다. 혀가 뽑힐 것 같았고 숨이 턱턱 차오르는데도 기준의 희원을 놓아주지 않았다.
희원이 기준의 어깨를 밀고 결국에는 손바닥으로 짝짝 때렸을 때에야 기준은 희원을 놓아주었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한 채 희원이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시작이에요. 밤새 괴롭힐 거예요. 놓아 달라고 울어도 내 거라고 새겨 넣을 거예요.”
기준은 셔츠 단추를 신경질적으로 풀었다. 그러고는 침대 밑에 패대기쳤다. 말 그대로 집어 던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고는 희원을 침대에 눕혔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희원을 뒤로 눕히는 손길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혹여 희원의 뒤통수가 침대 헤드에라도 닿을까 조심하는 손길이었다.
침대에 누운 희원은 손을 들어서 기준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세게 뛰는 심장박동이 손끝에 와 닿았다.
“느껴져요? 이렇게 매 순간 희원 씨 볼 때마다 가슴이 뛰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미안해요.”
“오늘 밤에 각오해요.”
기준은 그대로 꽁꽁 싸맨 이불을 젖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하얀 나신에 기준의 욕망이 들들 끓었다. 기준은 자신의 벨트 버클을 풀고 바지를 끌렀다. 그러고는 성기만 밖으로 꺼냈다.
“다리 벌려요.”
“기준 씨.”
“불러도 소용없어요. 화난다고 몸으로 화풀이하는 사람 아닌데, 그리고 그래 본 적 단 한 번도 없는데 오늘은 소용없어요. 희원 씨가 내 마음 모르는 것 같으니까 내가 희원 씨한테 얼마나 욕정하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몸으로 보여 줄 수밖에요.”
기준은 희원의 무릎을 세우고 양쪽으로 넓게 벌렸다. 그러고는 당장이라도 집어넣을 것처럼 곧추선 성기를 잡고 가랑이 사이에 비비댔다.
“흐윽!”
아직 젖지 않은 구멍에 이미 커다랗게 몸집을 부풀린 성기가 대가리를 들이미니 아픔이 먼저 찾아왔다. 기준은 페로몬을 풀고는 희원의 빗장뼈를 잘근 물었다. 희원이 허리를 튕겼다. 기준은 페로몬을 조금 더 풀면서 방금 전에 물었던 빗장뼈를 혀로 핥았다.
“하읏.”
“힘 풀어요.”
“기준 씨.”
“불러도 오늘은 안 들어줄 거예요.”
“아, 아읏! 흣!”
기준이 페로몬을 조금 더 풀자 희원의 심장이 조금 더 빠르게 뛰었다. 그와 동시에 콧속으로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훅 들어왔다. 기준이 손을 내려서 희원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말랑한 성기가 기준의 손안에서 점점 모양을 갖추어 갔다.
기준이 손을 조금 더 내려서 고환을 주물럭거렸다. 희원의 다리가 저도 모르게 조금 더 벌어졌다. 구멍에 힘을 조금 풀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준이 허리를 확 치받았다.
“으읏! 아파요, 아파.”
“벌이에요.”
“기준 씨.”
“안 들어준다고 했어요.”
기준은 희원의 입술을 물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입을 벌리자마자 그 안에 혀를 집어넣었다. 말과는 다르게 키스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져서 희원의 가랑이가 조금 더 벌어졌다.
기준이 희원의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으며 매만졌다. 그러고는 허벅지 뒤쪽을 주물럭거렸다. 커다란 손은 점점 위로 올라와서 결국 궁둥이를 아프게 주물렀다. 희원의 입은 아직 기준이 제 입술로 막고 있는 탓에 희원은 신음조차 흘릴 수 없었다.
기준이 조금 더 궁둥이를 주무르다 양쪽으로 벌렸다. 기준의 성기 끝을 빠듯하게 물고 있던 구멍이 억지로 벌어졌다.
“으읍!”
기준이 고개를 꺾어서 좀 더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페로몬을 더 풀자 희원의 안에서 뭔가가 팍 터져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희원이 움찔 구멍을 조였다.
“읏!”
성기 대가리를 꽉 물어뜯는 구멍에 기준이 입을 뗐다. 둘의 입가에 서로의 타액이 실처럼 이어졌다.
“자지 끊어 먹을 생각이에요? 필요 없어서?”
“그렇게 말하지 마요.”
희원이 입술을 삐죽였다.
“입술 삐죽인다고 뭐 귀여울 줄 알아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고개를 모로 돌렸다. 조금만 더 건드리면 울 것만 같았다.
“몸이 훨씬 솔직한 거 알아요? 벌써 희원 씨 구멍은 좋다고 질질 싸잖아요.”
“그런 말 하지 말라고요.”
“왜 하지 마요? 사실인데.”
희원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입술에 상처 나요. 예뻐 죽겠는데 왜 상처 내고 그래요? 그렇게 스스로 상처 내면 좋아요?”
꽉 깨문 탓에 살짝 피가 맺힌 입술을 기준이 살살 어루만졌다.
“입술만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스스로 희원 씨 마음에 상처 내지 말라고요. 귀한 내 사람인데 상처 내는 이가 희원 씨 본인이라고 해도 싫어요. 속상하고 마음 아프고 그렇단 말이에요.”
“미안해요.”
“다음에는 그러기 없기예요? 그렇게 혼자 땅 파고 혼자 아파하고 그러기 없기예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예뻐 죽겠는데 누가 그랬어. 속상하게. 힘 좀 풀어 봐요. 그렇게 꽉 물고 있으면 희원 씨 구멍 다쳐요. 내가 마구잡이로 넣을 수는 없잖아요. 예쁜 구멍 찢어지면 어떡해요.”
“치, 언제는 울고불고 그래도 막 한다고 하더니.”
“그럴 건데? 밤새 물고 빨고 안 놔줄 건데요?”
기준이 희원의 볼기를 아프지 않게 툭툭 도닥였다. 조금 전 거세게 잡고 벌렸던 성마른 손길은 어디로 갔는지 그 손길은 다정하기만 했다. 희원은 그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했다.
결국 희원의 눈꼬리를 따라서 눈물 자국이 길을 이었다. 기준은 예쁘게 빠진 눈꼬리에 입을 맞추고는 눈물을 혀로 핥았다.
“눈가가 붉어졌어요. 토끼 같아.”
“흣! 가고 싶어요.”
“응?”
기준이 다 알면서도 되물었다. 그에 희원이 손을 내려서 기준의 손을 잡았다.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귀두를 누르고 있는 손가락을 말이다.
“기준 씨이……. 읏!”
희원이 고개를 저으며 애처롭게 쳐다봤다.
“희원 씨는 모르나 보다.”
“뭐를, 요?”
“그렇게 쳐다보면 더 괴롭히고 싶다는 걸요.”
“히잇!”
기준이 희원의 귀두를 엄지로 몇 번 비볐다. 희원이 고개를 젖히며 허리를 튕겼다. 당장이라도 쌀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싸고 싶었다. 온몸이 쾌락에 팔딱거렸지만 기준은 페로몬을 조금 더 풀면서도 희원의 성기를 놔주지 않았다.
“기준 씨…….”
“예뻐, 예뻐 죽겠어요.”
“으읏!”
기준이 다른 한 손으로는 고환을 만지며 계속해서 귀두를 비볐을 때 희원은 신음하며 덜덜 떨었다. 뒤로 왈칵 흐른 액체가 침대 시트를 적셨다. 기준이 그대로 자신의 성기와 희원의 것을 한 손으로 잡고는 위아래로 문질렀다.
“아아! 아, 아!”
“흣!”
둘은 같이 소리를 내며 그대로 사정했다. 기준의 커다란 손이 온통 하얀 액체로 뒤덮였다.
“앞뒤로 싼 거예요?”
희원은 차마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어서 귀를 가리는 대신 눈을 꾹 감았다.
“눈 감지 마요. 나한테서 도망가지 마요.”
기준이 희원의 목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도망간 적 없…….”
“아까 도망갔잖아요.”
희원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기준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얼굴을 들고 눈을 마주했다.
“대답해요. 나한테서 도망가지 마요.”
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불안했던 걸까? 왜? 모든 걸 다 갖고 있는 남자가? 희원이 손을 뻗어서 잘생긴 얼굴을 쓰다듬었다.
“소리 내서 대답해 줘요.”
“도망, 안 갈게요.”
“약속해요.”
“으응.”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기준이 붉은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얼굴을 내려서 빗장뼈를 빨았다. 하얀 몸에 붉은 자국이 덮어졌다.
“그리고 앞뒤로 싼 거 가지고 부끄러워하지 마요. 나한테 반응한 건데 그게 왜 부끄러워요?”
“그래도…….”
희원이 말을 얼버무렸다. 기준이 희원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희원 씨 페로몬 조금 더 진해진 거 알아요? 달콤한 향 나요.”
기준은 다시 희원의 뺨이니 이마니 콧잔등이니 여기저기 입을 맞췄다.
“기준 씨. 이제 그만 내려와요. 힘들어요.”
“그 말 오늘은 안 듣는다고 했어요.”
“그래도……. 앗!”
기준이 몸을 돌렸다. 갑자기 바뀐 위치에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준이 자신의 아래에 있고 그 바람에 기준을 깔고 앉은 자세가 되어 버렸다.
“힘들면 희원 씨가 내 위에 앉아요.”
“기준 씨, 그게 아니라…….”
희원이 눈썹을 팔자로 눕히며 애원했지만 기준은 전혀 들어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넣어 봐요.”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몇 번을 쌌는지 모른다. 이제는 더 이상 나올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희원 씨가 이렇게 내 위에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는 것도 좋은데 그래도 내 거를 안에 넣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혼자서 못 넣겠으면 내가 도와줄게요.”
“아니, 기준 씨, 그게 아니, 읏!”
기준이 희원의 골반을 잡고는 사정을 했음에도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성기 위에 앉혔다. 이게 도와준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구멍을 찔러 오는 성기에 희원은 등을 둥글게 말았다.
“쌌는데 이건 왜… 잠깐, 기준 씨, 잠깐.”
여전히 굵은 성기는 마치 몽둥이 같았다. 희원이 자신의 안을 꽉 메우는 성기를 피하려고 엉덩이를 들어 올렸지만 기준이 여전히 골반을 잡고 있기에 그것도 쉽지 않았다. 기준은 희원의 골반을 잡고 아래로 누르는 동시에 허리를 위로 튕겼다.
“아아!”
희원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개통해 줬으니까 이제 움직여 봐요.”
하지만 이번에도 기준은 희원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희원의 골반을 앞뒤로 밀고 당겼다. 희원은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흐읏, 흣! 기준, 씨, 흣.”
희원은 기준의 팔뚝을 잡고 앞뒤로 흔들렸다. 그가 자신을 좀 놓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름 숲에 와 있는 듯한 페로몬 향에 절여져 온몸이 더욱 그에게 빨려들어 가는 것 같았다.
온통 나무가 빽빽한 땅에 등을 대고 누워서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숲에 누웠을 때 수많은 나무 틈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너무 예뻐서 일어날 수 없는 느낌이 바로 지금과 같았다.
“희원 씨, 조금만, 응?”
자꾸만 달달한 향을 내뿜는 희원이 예뻐서, 복숭앗빛 뺨이 예뻐서, 기준은 희원을 점점 몰아붙였다. 그림같이 잘빠진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맛보고 싶었다. 목이 말라 그 눈물을 마시고 싶었다.
“기준, 기준 씨, 그만, 그마안.”
“예뻐요, 응? 예뻐. 내 위에서 울어 줘요.”
기준의 손에 더욱더 힘이 들어갔다. 단단한 팔을 붙잡고 희원이 인형처럼 흔들렸다. 아래를 꽉 메운 성기는 계속해서 희원을 찌르며 그를 들쑤셨다. 기준이 간간이 허리를 튕길 때마다 탄력 있는 엉덩이가 방아를 찧듯 쿵쿵 내려앉았다.
“흣! 아아! 아!”
희원의 신음이 점점 커지고 땀방울이 뚝뚝 기준의 가슴에 떨어졌다. 땀에 젖은 갈색 머리칼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꽃잎을 찍어 내듯 군데군데 붉은 자국이 찍힌 몸은 낭창하게 흔들렸다.
“희원 씨, 희원 씨.”
“으응, 기준, 기준 씨. 아!”
“안에 싸도 돼요?”
“응?”
흔들리던 희원이 한쪽 눈만 비죽 뜨며 물었다. 여전히 기준이 흔들 때마다 눈이 움찔움찔 감기며 아래를 꽉꽉 물어 왔다.
“안에, 읏. 안에 싸도 되냐고요.”
“으응, 응…….”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준이 희원을 들었다가 콱 눌렀다.
“아아!”
“읏!”
뜨거운 액체가 내벽을 때리며 쏟아졌다. 희원이 바들바들 떨며 동시에 사정했다. 희원이 싼 액체는 기준의 가슴과 배 여기저기에 튀었다.
순간 희원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기준이 상체를 일으켜 희원을 품에 꼭 안았다.
“아, 아파, 아파요, 기준 씨.”
“쉿, 괜찮아요. 괜찮아.”
노팅이었다. 더 이상 커질 수 없다고 생각한 성기가 내벽을 찢어발길 것처럼 몸집을 부풀렸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처음 겪는 노팅에 희원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파, 아파요. 빼 줘요, 흐윽.”
눈물이 줄줄 흘렀다. 모든 내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기준의 성기가 제 구멍을 다 찢을 것만 같았다. 배를 뚫고 나오는 게 아닐까 겁이 났다.
“괜찮아, 괜찮아요, 희원 씨. 조금만, 응? 미안해요.”
기준이 희원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귓불을 빨고 귓바퀴를 따라 핥았다. 쌕쌕 가쁜 숨을 토해 내는 입술에 자신의 숨을 불어 넣어 주며 타액을 흘렸다. 페로몬을 더 풀어서 온몸을 감쌌다.
기준이 자기 것이라고 표하겠다고 한 말이 이런 뜻인 줄 몰랐다. 희원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기준을 밀어내지 못했다. 그런 희원이 어여뻐서 기준은 꽉 죄는 내벽에 자신도 고통스러우면서도 희원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아파, 흐, 흐윽.”
“미안해요, 미안해. 힘 조금만 풀어 봐요. 응?”
어린애를 달래듯 기준이 희원의 등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희원은 눈물을 기준의 어깨에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몸이 쪼개지는 것만 같았다. 기준의 페로몬에 의식을 잃을 것만 같았다. 차라리 정신을 놓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기준의 손길이 좋아서, 그의 속삭임이 너무 다정해서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도 들었다.
“사랑해, 응? 사랑해요.”
자신의 성기를 압박하는 희원의 내벽에 기준도 힘들면서 그는 계속해서 입을 맞춰 가며 희원을 달랬다. 희원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기준의 어깨에 파묻은 얼굴을 들지 않았다.
“대답해 줘요, 희원 씨.”
“몰라, 대답 안 흣, 해요.”
“왜, 응? 화났어요? 노팅해서? 응?”
희원은 툭툭 기준의 등을 때리고 어깨를 때렸다. 하지만 기준은 그런 손길을 막아 내지 않고 계속해서 사랑을 속삭이며 투정 섞인 손길을 받아 냈다.
몸을 꽉 채웠던 성기가 드디어 몸에서 빠져나왔을 때 희원이 침대에 털썩 누웠다. 꼼짝도 하지 못하겠는 몸을 가까스로 모로 돌리며 툭 말을 내뱉었다.
“나도, 나도 사랑해요.”
(둘만 모르는 연애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