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속삭이고 부어 준 사랑만큼
“랑일아, 아빠 다녀오세요, 하자.”
토요일 아침, 평소 다 갖추어 입던 정장 차림이 아닌 슬랙스에 셔츠 차림으로 편안한 스니커즈를 신는 기준을 희원이 랑일이를 안고 현관 앞에 서서 바라봤다.
이제 막 깨어서 아직 정신이 없는 랑일이는 희원의 품에 안겨서 그의 목을 꼭 끌어안고는 한쪽 손만 들어서 팔랑팔랑 움직였다.
“아빠 안녕.”
“랑일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재밌게 놀고 있어.”
“응, 아빠.”
기준은 희원과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희원도 같이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기준은 희원의 볼을 어루만지고 뺨에 키스하고 싶었지만 랑일이가 있어서 차마 할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일찍 올게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결국 희원은 랑일이를 안고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와서 손을 흔들었다. 차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도 손을 흔들며 미소 짓는 희원을 보며 기준은 자꾸만 욕심이 났다.
“미치겠네, 정말.”
꼭 사랑하는 배우자와 금쪽같은 자식을 두고 출근하는 가장의 모습인 것 같아서 가슴이 설레어 콩닥콩닥 널을 뛰면서도 그게 미래 어느 날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랑일이는 마치 어미 닭 쫓는 병아리처럼 오전 내내 희원의 뒤를 따라다녔다. 마치 누가 봤으면 둘 사이에 ‘졸졸졸’이라는 의태어가 연상되었을 것이다.
“우리 랑일이 뭐 입을까?”
아침을 먹고 둘이 신나게 마당에서 놀고 난 뒤 11시쯤 되니 날이 슬슬 무더워지기 시작했다. 둘은 쇼핑을 하러 가기로 결정했다. 백화점에 가서 점심도 먹고 랑일이 신발도 한 켤레 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 나 이거 입을래요.”
랑일이가 서랍을 열고 가장 위에 놓인 티셔츠와 바지를 꺼내 들었다. 희원이 사 준 옷이었다. 하얀색 바탕에 핑크빛 줄무늬가 들어간 티셔츠에 흰색 칠부바지였다. 희원은 아이 옷장치고는 커다란 수납장을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예쁜 옷 엄청 많다, 랑일아.”
“이게 젤 예뻐요.”
랑일이는 다른 옷은 필요 없다는 듯 희원이 사 준 옷을 꼭 쥐고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희원을 바라봤다. 희원이 따뜻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이거 입고 나가자.”
희원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는 눈빛으로 랑일이가 옷을 불쑥 내밀었다. 희원은 랑일이를 따라서 웃으며 랑일이 머리통에 티셔츠를 쑥 끼워 주었다. 작은 머리통이 쏙 빠져나오면서 이리저리 헝클어진 머리칼에 희원은 랑일이가 그만 귀여워서 머리에 마구마구 입을 맞춰 주었다.
준비를 마치고 랑일이는 희원의 손을 잡고는 마당으로 나왔다. 커다란 마당에는 차가 두 대 세워져 있었다. 둘 다 기준의 차였다. 희원은 손에 쥔 차 키를 보고서도 한참을 망설였다.
“선생님 더워요.”
내리쬐는 햇볕에 랑일이가 칭얼거리자 희원은 어쩔 수 없이 흰색 차 문을 열고 뒷좌석에 랑일이를 앉혔다.
아침에 기준은 희원을 끌어안고는 랑일이가 일어나기까지 한참을 그런 상태로 구슬렸다. 외출할 일이 있으면 꼭 자기 차를 끌고 나가라고 말이다.
희원이 택시를 타고 가도 된다고 했지만 기준은 그것도 불편하니 꼭 자기 차를 갖고 나가라고, 그러지 않으면 자기가 직접 태우러 오겠다고 해서 희원이 기겁하고 말았다.
기준이 언제 자신이 늘 끌고 다니는 차에서 카 시트를 빼서 여기에 설치해 놨는지 모르겠지만 희원은 카 시트에 앉은 랑일이를 꼼꼼하게 안전벨트를 매 주고 점검했다. 그러고는 희원이 운전석에 오르자마자 기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뭐 하고 있어요?
“랑일이랑 쇼핑하러 나가려고요.”
―차 갖고 나가는 거죠?
혹시라도 택시 불렀다고 하면 기준이 즉시 올 태세였다.
“그러려고요. 아직 출발 안 했어요.”
―응, 잘했어요. 말도 잘 들어주고 착한 애인님이네요.
‘애인님’이라는 단어에 꽂혔는지 기준은 아침에도 희원을 뒤에서 껴안고는 그놈의 ‘애인님’ 소리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희원은 기준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것도 가슴이 간질간질한데, ‘애인님’이라는 호칭에는 더욱 면역이 없어서 부르는 족족 얼굴이 복숭앗빛으로 물들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쫌.”
―왜요. 예뻐서 그런 건데요. 근데 같이 점심 하려고 했는데 어쩌죠? 조금 더 늦어질 것 같아요.
“일이 많아요?”
희원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랑일이가 뒤에서 들썩거렸다. 희원이 뒤를 돌아 랑일이와 눈을 맞추자 재촉하려고 하던 랑일이가 착하게도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희원도 따라서 같이 웃었다.
―조금 일이 꼬이는 바람에요. 미안해요, 모처럼 휴가인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미안해하지 마세요. 랑일이랑 재밌게 놀고 있을게요.”
입 안에서 ‘기준 씨 잘못도 아닌데 왜 미안해하고 그래요.’라는 말이 맴돌았지만 랑일이와 마주 보고 있어서 오래 통화를 할 수가 없었다.
―빨리 끝내고 갈 테니까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재미있게 놀고 있어요.
“네. 걱정하지 말고 힘내서 일하세요!”
―고마워요. 이따 다시 전화할게요. 운전 조심하고요.
“네!”
―사랑해요.
기준의 마지막 말에 희원의 눈이 커다래졌다. 자신도 똑같이 말해 주고 싶은데 아무래도 랑일이가 걸렸다.
“저도요.”
희원이 작게 속삭이고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발그레한 볼이 점점 홧홧해져 희원은 손부채질을 했다.
“선생님.”
“응?”
“더우면 에어컨 틀면 된다고 했어요, 아빠가.”
“어? 어. 고마워.”
희원이 더워서 손부채질을 하는 줄 알고 랑일이가 말했다. 희원은 괜히 더 더워져서 얼른 시동을 걸고 조심스럽게 집에서 출발하기 시작했다.
희원은 지난번에 기준과 함께 랑일이의 생일 선물을 사러 갔던 백화점으로 향했다. 지하에 주차를 하고 난 뒤 희원은 랑일이의 손을 꼭 잡고는 먼저 신발을 사러 갔다. 랑일이는 신발도 많지만 그래도 희원은 자신이 한 켤레 사 주고 싶었다.
“랑일아, 신발 뭐 좋아해? 여름이니까 우리 시원한 신발 신을까?”
“네!”
랑일이는 희원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을 닮은 랑일이를 볼 때마다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음, 우리 랑일이 무슨 색이 좋을까?”
랑일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희원의 신발을 내려다봤다. 희원은 평소와 똑같이 하얀색 운동화를 신은 상태였다.
“하얀색이요!”
아무래도 랑일이는 희원과 그저 똑같은 것을 신고 싶은 모양이었다.
“음, 그럼 우리 랑일이 하얀색 샌들 사 줘야겠다. 랑일이 이거 신어 볼까? 저 죄송하지만 이것 좀 신어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고객님. 사이즈 몇으로 보여 드릴까요?”
희원은 랑일이의 사이즈를 말해 주고 난 뒤 랑일이가 말한 하얀색 샌들을 작은 발에 신겨 보았다. 랑일이가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좋아했다.
“랑일아, 어때?”
랑일이가 제 발을 한 번 쳐다보고, 희원의 운동화를 한 번 쳐다봤다.
“우아, 너무 잘 어울린다.”
옆에서 보고 있던 직원이 추임새를 넣었다. 하지만 랑일이는 직원의 칭찬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그저 희원만 바라볼 뿐이었다.
“랑일아, 마음에 들어?”
“네!”
“이거 살까?”
“네!”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희원이 랑일이 샌들을 계산하는 동안에도 랑일이는 희원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 한시도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 꼬마 손님은 좋겠다. 아빠가 선물도 다 사 주고.”
“아빠 아니에요.”
직원의 말에 랑일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선을 긋는 듯한 대답에 순간 희원의 심장이 쑥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아, 아빠 아니구나. 그럼 누구야? 삼촌?”
희원이 웃으며 랑일이 대신 유치원 선생님이라고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마미요.”
“응? 아, 마미. 그렇구나.”
무슨 소리인가 싶던 직원이 희원이 오메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예쁜 마미를 두었구나. 좋겠다, 선물도 받고.”
“네! 예뻐요.”
랑일이가 척척 대답했다. 당황한 이는 희원밖에 없었다. 희원이 서둘러 인사하고는 매장을 벗어났다. 그러고는 랑일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랑일이는 희원이 뭐라고 할까 봐 잽싸게 손을 위로 뻗었다.
“왜? 다리 아파?”
“안아 주세요.”
“그래. 읏쌰!”
희원은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랑일이에게 왜 자신이 마미냐고, 그럼 안 된다고 잘라서 말할 수가 없었다. 랑일이가 안아 달라니 또 마음이 약해져서 그저 덥석 안아 올릴 뿐이었다. 랑일이는 희원을 꼭 끌어안고는 희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선생님이 우리 마미였으면 좋겠어요.”
“랑일아.”
“선생님이 좋아요.”
꼭 안겨서 희원의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는데 그런 랑일이를 당해 낼 도리가 없었다.
“선생님도 랑일이 좋아해.”
그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배고파요. 파스타 먹고 싶어요.”
“그럴까? 파스타 먹으러 갈까?”
“네!”
랑일이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좋아했다. 희원은 그런 랑일이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백화점에 있는 파스타집으로 향했다.
“랑일이는 가리는 거 없이 골고루 먹어서 참 예뻐.”
“선생님도 참 예뻐요.”
아이는 꾸미는 것도 숨기는 것도 없었다. 희원은 이래서 아이들은 참 순수하구나 싶었다.
쇼핑을 먼저 해서 그런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하지만 유명한 파스타집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다행히 자리가 두 군데 있어서 희원은 랑일이를 안고 그중 한 군데에 자리를 잡았다.
“랑일이는 무슨 파스타 좋아해? 크림? 아니면 토마토?”
희원이 메뉴판을 펼쳐서 랑일이에게 사진을 보여 주었다. 랑일이는 희원의 건너편이 아닌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희원의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해물이 잔뜩 든 로제 파스타 사진에 희원의 손가락을 가지고 가서 찍었다.
“이거?”
“네!”
“선생님하고 좋아하는 게 똑같네?”
희원의 말에 랑일이가 작게 손뼉을 쳤다. 그게 무척이나 귀여운 나머지 희원은 랑일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희원이 음식을 주문하려고 할 때였다.
“랑일아?”
누군가 랑일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희원의 허벅지를 차지하고 앉은 랑일이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봤다. 희원의 시선도 같이 머물렀다.
“할무니!”
랑일이가 반갑게 외쳤다.
희원이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랑일이를 안은 채 말이다.
“안녕하세요, 할머님.”
어쩌면 목소리가 떨렸을지도 모른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앞이 깜깜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박 여사가 웃어 보이며 인사했다. 희원은 경직된 표정으로 랑일이를 조심스레 제 품에서 떼어 바닥에 서게 했다. 하지만 이내 랑일이가 자신을 떼어 내는 게 싫다는 듯 희원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으으응.”
랑일이가 칭얼거리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희원은 랑일이를 밀어내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섰다.
“선생님, 안아 주세요.”
정적을 깬 이는 랑일이였다. 여느 때와 같이 단박에 안아 드는 게 아닌 망설이는 희원이 낯설었는지 랑일이가 희원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올려다봤다. 희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어쩔 수 없이 랑일이를 안아 들었다.
“식사하러 오셨나 봐요.”
희원이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박 여사 뒤에는 언제 와서 섰는지 선이 곱고 머리가 긴 남자가 서 있었다. 처음에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몸매를 보는 순간 남자임을 깨달았다.
“어머니.”
“루세야, 인사해. 랑일이 선생님. 선생님, 저희 막내네 배우자예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희원은 이름을 듣는 순간 그가 기준이 이야기한 막냇동생 해준의 배우자라는 것을 알았다. 둘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랑일이가 희원의 품에 안겨서 루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작은마미!”
“안녕, 랑일아. 밥 먹으러 왔어?”
“네! 선생님하고 파스타 먹을 거예요.”
루세는 따듯하게 웃어 보였다. 옆에 있던 박 여사가 랑일이에게 물었다.
“랑일아, 아빠는 어디 갔어?”
“응! 아빠는 회사 갔어요.”
그 순간 희원과 박 여사의 눈이 딱 마주쳤다. 희원은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입이 딱 붙어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휴가라고 하더니…….”
“아, 네! 그런데 갑자기 회사 갈 일이 생기셨다고 해서 제가 랑일이 보게 되었어요.”
희원이 나서서 대답했다. 하지만 대답을 해 놓고 나서 아차,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무슨 일이 있으면 랑일이를 본가에 맡겼던 기준이 갑자기 휴일에, 그것도 휴가 중에 유치원 담임교사를 찾아서 애를 맡겼다고? 그것 자체가 이상했다.
“아, 그게 아니고…….”
늦게나마 변명을 하려고 했는데 반걸음 뒤에 서 있던 루세가 끼어들었다.
“선생님, 아직 식사 전이시죠? 어머니, 아직 주문도 안 하신 것 같은데요.”
그제야 희원은 랑일이와 메뉴만 결정하고 주문도 하지 않은 걸 생각해 냈다. 안겨 있던 랑일이가 덧붙여 말했다.
“선생님, 배고파요.”
“어? 그래, 얼른 주문하자.”
희원은 그렇게 말해 놓고도 어찌할 바 몰라서 멀뚱히 서 있었다. 박 여사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식사도 아직 못 하셨는데 제가 너무 서서 말이 많았네요. 죄송하지만 선생님, 식후에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네?”
“괜찮으시다면 커피 한잔 사고 싶은데, 다 드시고 나면 전화 주시겠어요? 저희는 아직 살 게 있어서 둘러보고 있을게요.”
박 여사의 말에 희원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박 여사가 가게에서 나간 뒤 희원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둘이서 시킨 메뉴가 나왔고 그 뒤에 랑일이를 잘 챙겨 먹였는데, 정작 자신은 뭐를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우선 기준에게 전화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전화를 했는데 기준은 바쁜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메시지를 남길까 하다가 그러면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말았다. 왠지 기준의 성격대로라면 희원이 그의 어머님과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는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대로 백화점으로 달려올 것만 같았다.
희원은 바쁜 기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 스스로 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희원이 정신없는 점심을 하고 난 뒤 박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백화점 VVIP 전용 커피숍에 마주 앉은 박 여사와 희원, 그리고 루세와 랑일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희원의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앉은 랑일이가 파르페를 입에 가득 퍼 넣었을 때 랑일이 맞은편에 앉은 루세가 냅킨으로 랑일이 입술을 닦아 주었다.
“랑일아, 천천히 먹어.”
랑일이는 입술을 꼼꼼하게 닦아 주는 루세의 손길을 받다가 손을 들어서 희원에게 보여 주었다.
“선생님, 손 끈적끈적해요.”
랑일이의 말에 희원이 물티슈로 손가락 사이사이를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랑일이가 배시시 웃었다.
“선생님, 이거 맛있어요. 선생님도 한 입 먹어요.”
“드세요.”
“선생님도 한 입 드세요.”
희원이 높임말을 정정해 주자 랑일이가 완벽한 문장을 구사해 냈다.
“저번에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랑일이가 선생님을 무척이나 잘 따르네요.”
“아, 네.”
희원이 작게 대답하고는 랑일이의 숟가락 손잡이 부분도 물티슈로 잘 닦아 준 뒤 손에 쥐여 주었다.
희원은 어색한 분위기에 앞에 놓인 컵을 들었다. 가뜩이나 차가운 손에 얼음이 한가득 든 커다란 유리잔이 들어오자 머리가 띵하니 아파 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오늘 랑일이랑 만나서 백화점에 오신 건가요?”
한기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긴장한 탓인지 이제는 잔을 들고 있는 손도 저릿했다. 희원이 커피를 한 모금 머금으며 할 말을 찾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싶어 머리를 굴리는데 딱히 둘러댈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저…….”
희원이 잔을 내려놓고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손을 올린 뒤에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대로 말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희원의 핸드폰이 아닌 박 여사의 핸드폰이었다. 박 여사가 액정을 확인한 뒤 전화를 받기는커녕 핸드폰을 끄는 게 보였다.
“전화받으셔도 괜찮은데요.”
“아니에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화라 조금 뒤에 통화해도 괜찮아요.”
“네.”
“죄송해요, 괜히 전화가 와서 대화가 끊겼네요.”
“아니에요, 할머님.”
박 여사의 사과에 희원이 손사래를 쳤다. 박 여사가 웃으며 다시 말했다.
“하던 말씀 마저 하세요.”
희원이 입술을 꾹 물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다가 담당하는 아이의 할머님을 우연히 만나 차를 한잔 마시는 건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건 마치 길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서 ‘어, 여기 어쩐 일이세요?’, ‘더운데 시원한 거 하나 드세요.’ 이런 수준의 일상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희원의 앞에 앉은 두 명 중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연인의 어머니였고, 그 옆에 앉은 다른 사람은 그의 동생의 배우자였다.
“저 할머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 랑일이 이야기인가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또 이렇게 갑자기 말씀드려도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희원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박 여사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편하게 하세요.”
“저, 자리 불편하시면 제가 랑일이 데리고 잠깐 피해 드릴까요?”
루세의 상냥한 물음에 희원이 심호흡을 하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같이 들으셔도 돼요.”
희원이 무릎 위에 올린 양손을 꽉 쥐었다 폈다. 말해야 했다. 어쩌면 박 여사는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왜 드라마를 보면 그렇지 않은가? 재벌가 정보력은 무척이나 빨라서 이미 아들이 누군가와 만나고 있다는 것을 그 어머니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저 부족한 거 알지만, 그래서 죄송하지만, 기준 씨랑 만나고 있습니다.”
옆에서 파르페를 입 안 한가득 집어넣고 있던 랑일이가 제 아빠의 이름이 불쑥 튀어나오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루세가 주의를 끌어 어서 먹으라고 하자 다시 파르페의 과자를 오독오독 깨물어 먹었다.
“선생님이 뭐가 부족하고 뭐가 죄송하다는 건가요?”
박 여사의 말에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선생님께서 이혼을 하시길 했어요, 아니면 아이가 있기를 하세요?”
“그건 아니지만…….”
희원이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박 여사의 말이 맞긴 하지만 그래도 기준은 재벌가의 차기 주인이었고 장차 기업을 이을 사람이었다.
“그게 저희 집은 평범하고…….”
“그게 뭐 어때서요?”
“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로 흘러가는 대화에 희원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저, 그래도…….”
“제가 봤을 때 굽히고 들어가야 할 입장은 이기준일 것 같은데요. 안 그러니, 기준아?”
“어머니!”
어떻게 왔는지 기준이 서슬 퍼런 눈을 하고는 뒤에 서 있었다. 희원이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빠!”
제 아빠의 목소리에 랑일이가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뒤돌아봤다. 기준은 뛰어왔는지 땀이 뚝뚝 떨어졌다.
기준이 희원을 끌어다가 제 뒤로 숨겼다.
“어머니.”
“저기 기준 씨.”
딱딱하고 차가운 말투에 희원이 기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좀 앉아서 커피도 한 잔 마시고 그러렴.”
“지금 커피나 마실 때…….”
기준이 화를 내려고 하자 희원이 기준의 소매를 더욱 세게 잡아당기며 눈빛으로 그러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고는 옆에서 여전히 파르페를 먹고 있는 랑일이를 눈짓했다.
기준은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 앉았다. 희원이 따라서 앉고는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가방을 열어 손수건을 꺼내어 조심스레 들이밀었다.
기준이 제 손 위에 얹힌 손수건을 들고는 땀을 닦아 냈다. 그러고는 희원을 한 번 바라본 뒤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희원이 건넨 손수건에서 희원의 향이 옅게 났다.
“저, 시원한 거 한 잔 드세요.”
덩달아 눈치를 살피던 루세가 기준의 앞으로 차가운 커피를 조금 더 밀어 주었다. 기준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고는 잔을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왜 전화 안 받으세요?”
“이야기 중이었잖니. 그나저나 루세야, 괜한 짓을 했구나.”
박 여사가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조금 전 중요하지 않은 전화라며 아예 전원을 껐던 그 전화의 발신인이 바로 기준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기준에게 지금 이 상황을 알려 준 이는 다름 아닌 루세였는지 박 여사의 말에 루세는 어색하게 웃었다.
“선생님, 나 손 끈적끈적해요.”
뭐를 어떻게 먹었는지 양손이 온통 아이스크림 범벅이 된 랑일이가 제 손을 희원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앞에 앉아 있던 루세가 눈치 좋게 일어나 랑일이의 손을 잡아 쥐었다.
“작은마미랑 화장실 갔다 올까? 손 씻고 오자.”
“그래, 같이 다녀올래, 랑일아?”
랑일이가 희원과 가겠다고 말하기 전에 얼른 희원은 랑일이를 부추겼다. 랑일이는 어쩔 수 없이 루세의 손에 이끌려 화장실로 향했다. 이제 박 여사와 기준, 희원 세 사람만이 남았다.
“어머니, 희원 씨한테 뭐라고 말하시려고요?”
“아무 말씀 안 하셨어요.”
희원이 대신 대답했다. 하지만 기준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으로 제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럼 이제 무슨 말씀 하시려고요? 제 앞에서 하세요.”
“마치 내가 뭐라고 할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내가 우리 아들한테서 떨어지라고 뺨이라도 때릴까 봐 그러니? 아니면 물이라도 뿌릴까 봐 부리나케 달려온 거니?”
기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 그런 생각을 했니?”
박 여사의 물음에 기준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제 어머니만 노려봤다. 희원은 중간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먹만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궁금하신 것 있으면 저한테 물어보시면 되잖아요.”
기준은 박 여사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제 할 말만 했다. 희원이 기준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라는 눈빛으로 말이다.
“백화점에서 우연히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커피 한잔 마시자고 한 것뿐인데 왜 그렇게 열불을 내고 그러니?”
박 여사의 말이 맞았다. 지레짐작해서 술술 불어 버린 쪽은 희원이었다. 희원은 괜히 저 때문에 모자가 다투는 것 같아서 안절부절못했다.
“정말 우연인 거 맞으세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박 여사는 여느 재벌가 안주인과는 달랐다. 아들이 누구를 만나나 사람을 시켜서 캐고 다니지도 않았고 아들 몰래 상대를 만나서 모욕을 주지도 않았다. 그건 이씨 집안 그 누구도 마찬가지였다.
기준의 정략결혼과 이혼, 그리고 랑일이가 받았을 상처를 헤아린다면 누구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준네 집안은 가히 상식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준은 지금 전혀 상식적이지 못한 행동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머님께 그러지 마세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평소에는 희원의 눈빛만 보고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척척 알아채더니 지금 기준은 이성을 잃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희원이 눈빛으로 보내는 요청을 전혀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희원이 기준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말로 표현했다.
“지금 네 어미가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을 할 거라고 생각하니? 왜? 네가 좋은 조건을 가졌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거니, 설마?”
당황하고 놀란 건 기준이 아닌 희원이었다. 가뜩이나 큰 눈이 놀라서 토끼 눈처럼 동그래졌다.
“그야말로 근거 없는 자신감이구나.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그런 일을 당할 사람이 누군데 그러니?”
박 여사의 말에 기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안 그래요, 선생님? 그나저나 선생님네 집안에서는 알고 계신 건가요?”
“네? 뭐를…요?”
희원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기준. 설마 승낙도 안 받고 지금 그러는 거니?”
“조만간 인사하러 가려고 했어요.”
기준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마치 엄마한테 혼나는 아이처럼 말이다. 희원은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힐긋거리다 눈만 깜박였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는구나.”
“그런 거 아니라고요. 정말 조만간 인사드리려고 했어요.”
“선생님, 나 손 닦고 왔어요.”
랑일이가 희원의 앞에 달려와서 작은 양손을 펼쳐 보였다.
“이제 손 깨끗해졌네? 잘했어, 랑일아.”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희원은 랑일이에게 관심을 갖고 칭찬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랑일이는 평소와 똑같이 반응하지 않는 것에 성이 안 차는지 결국에는 희원의 손을 끌어다가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 두었다. 쓰다듬어 달라는 뜻이었다. 희원이 결국에는 랑일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짧게 입 맞춰 주니 그제야 랑일이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선생님, 우리 언제 집에 가요?”
슬슬 지루한지 랑일이가 희원의 허벅지로 기어 올라와 앉으며 물었다.
“지금 아빠랑 할머님이랑 말씀 중이니까 우리 조금만 기다리자.”
“나 집에 가고 싶은데. 집에 가서 선생님이랑 놀고 싶어요.”
랑일이 때문에 대화의 흐름이 끊기자 박 여사는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랑일이에게 물었다.
“랑일아, 선생님이 그렇게 좋아?”
“네!”
랑일이는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선생님.”
“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희원이 깜짝 놀라서 대답했다. 죄를 진 것도 아닌데 자꾸만 움츠러들게 되었다.
“다음에는 집으로 한번 놀러 오세요. 같이 식사 한번 해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 말에 희원은 긴장이 확 풀리는 듯했다. 최소한 박 여사가 자신을 싫어하지는 않는구나, 같이 식사하자고 집에 초대할 만큼 마음을 보여 주었구나, 그런 생각에 희원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박 여사의 따듯한 눈과 마주했을 때 희원은 그제야 차갑게 식었던 손에 피가 도는 것만 같았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지 말고 빠른 시일 내에 찾아뵙고 인사드리도록 해. 그게 먼저야.”
박 여사가 냉랭한 얼굴을 하고는 제 아들에게 말했다. 미소를 지우니 기준과 더욱 닮았다는 게 느껴졌다.
“갈 때 양손 두둑이 들고 가. 그래야 뺨이라도 안 맞고 물이라도 안 맞지.”
“어머니.”
“됐어. 가자 루세야. 선생님, 다음에 꼭 오세요.”
간다는 소리에 희원이 랑일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박 여사는 기준에게 독설을 날리고는 희원의 손을 덥석 잡고 다시 한번 꼭 놀러 올 것을 당부했다. 희원이 비로소 미소를 지으며 다음에 뵙겠다고 말했다.
“랑일아, 다음에 선생님하고 할머니네 와. 알았지? 할머니 갈게.”
“응! 할머니 안녕.”
랑일이가 희원의 다리를 잡고는 한 손을 흔들었다. 희원은 랑일이를 달고는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박 여사와 루세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희원이 털썩 소파에 앉았다. 온몸의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 랑일이가 다시 희원의 위로 올라앉으려고 하니 기준이 떼어서 제 허벅지에 올렸다.
“으으응, 선생님. 선생님한테 갈래.”
랑일이가 떼를 썼지만 기준은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랑일이가 기준의 손을 억지로 풀고는 다시 희원의 허벅지로 기어올라 앉았다.
“희원 씨, 괜찮아요?”
긴장이 풀린 희원은 랑일이를 품에 안고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뉘었다. 반면 기준은 안절부절못한 채 희원의 눈치를 살폈다.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뭐가요? 어머니를 우연히 만난 게 기준 씨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게 아니라, 진작 인사드리러 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요. 생각이 짧았어요.”
“네?”
예상과 전혀 다른 말에 희원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랑일이는 졸린 건지 희원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가슴에 뺨을 딱 붙인 채 희원의 옷자락을 손가락으로 비비댔다. 희원은 랑일이가 잠들 수 있도록 등을 도닥여 주면서도 기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오버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누가 연애한다고 일일이 집에다 얘기해요. 어제는 잘 만나다가도 갑자기 오늘 헤어질 수도 있는 게 연애인데요.”
덤덤하게 말하기 시작하는 기준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헤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희원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준이 이별을 말한 것도 아닌데 그의 입에서 나온 ‘헤어짐’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벌써부터 손끝이 저릿했다.
“그런데 저는 희원 씨랑 그렇게 만나는 게 아니거든요. 어느 미친놈이…….”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기준은 랑일이를 흘긋 쳐다봤다. 랑일이는 어느새 고롱고롱 잠에 빠져 있었다. 희원이 기준의 시선을 따라 랑일이를 바라보고는 도닥이던 손의 템포를 조금 늦췄다. 아직 깊게 잠든 게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이도 많고 애까지 딸린 이혼남이 흠잡을 데 없는 희원 씨를 상대로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연애를 한다면 그것만큼 나쁜 게 없다고 저는 생각해요.”
“기준 씨, 나이랑 애랑 이혼이 잘못은 아니잖아요.”
희원은 기준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물론 잘못은 아니에요. 다만 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순전히 제 가치관에 준한 이야기를요. 생판 모르는 다른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고요. 돌싱이 결혼 경험이 없는 사람과 사귀다 헤어지든 말든 타인의 이야기라면 상관없어요. 하지만 제 이야기일 때는 다르죠. 상대가 희원 씨라면 더욱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 씨를 상대로 가벼운 마음으로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희원 씨한테 연애하자고 처음 말했을 때도 그랬지만 저는 신중하게, 많이 생각하고 난 뒤에 이야기를 꺼낸 거예요.”
“알아요, 기준 씨. 어떤 마음인지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제가 더 확실히 했어야 해요. 희원 씨 집에도 찾아뵙고 귀한 사람과 진중하게 만나 보고 싶다고 허락도 구했어야 해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미안해요, 희원 씨.”
이건 순전히 둘만의 이야기였다.
누가 들으면 그냥 연애 한번 하는 걸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느냐고, 가볍게 만나다 아니면 헤어지면 되는 거 아니냐고, 당장 결혼을 할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느냐고 비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기준과 희원, 둘의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기준의 말을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희원에게 기준은 그런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조건이 좋은 재벌가 이기준이 아닌 희원을 더 높이 평가해 주고 사랑해 주는 다정하고 따듯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희원은 기준과 다음을 계속해서 바라고 있었다.
“희원 씨, 늦은 감이 있지만, 괜찮다면 집에 가서 가족들께 인사드려도 될까요?”
기준은 매우 조심스럽게 말했다.
재벌가라고 으스대지 않는, 극우성 알파라며 희원을 깔보지 않는 기준은 희원에게 늘 진실한 사람이었다. 희원이 그런 그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네. 식구들 시간이랑 고려해서 약속 잡을게요.”
그제야 기준이 한시름 놓았다는 듯 소파에 깊게 기대어 앉았다.
* * *
원래 계획은 토요일까지 별장에서 놀다가 오는 거였지만 회사 때문에 일찍 올라오게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백화점 쇼핑 후에 셋이 시간을 보내려고 했지만, 그것 역시 어머니를 만나면서 못 하게 되었다.
랑일이는 피곤했는지 집에 와서도 계속해서 낮잠을 잤고 돌아오는 길에 희원도 잠들고 말았다.
“희원 씨, 조금 더 잘래요?”
기준이 자는 랑일이를 방에 눕히고 나오자 소파에 깊숙이 파묻혀 있는 희원이 보였다. 기준의 물음에 희원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고개를 저었다.
“오는 내내 자서 미안해요.”
희원의 사과에 기준이 옆에 앉아 희원을 품에 안고는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그런 걸로 미안해하지 마요. 피곤하면 자는 거지, 그게 왜 미안해요.”
“그래도요. 주말에 휴가인데도 오전 내내 일하고 온 사람이 운전하는데 뒤에서 잤잖아요.”
“그게 뭐 어때서요.”
“근데 기준 씨 차는 어쨌어요?”
그러고 보니 집에 올 때는 희원이 끌고 온 차를 타고 돌아왔다.
“회사에 두고 왔어요.”
“그럼 백화점까지 뭐 타고 왔어요?”
“택시.”
“힘들었겠다. 점심은 먹었어요?”
기준이 고개를 묻은 채로 저었다. 희원이 홱 돌아보며 눈을 크게 떴다.
“여태 점심도 안 먹었다고요?”
“네.”
“왜요?”
마치 큰일이라도 난 듯 구는 희원을 다시 품에 끌어다 안으며 기준이 대답했다.
“일 빨리 끝내고 희원 씨랑 놀고 싶어서요.”
“그럼 아까 백화점에서라도 뭐 좀 먹자고 그러지 그랬어요.”
“랑일이가 잠들어 버렸잖아요.”
“랑일이는 제가 안고 있으면 되잖아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말을 안 해요? 속상하게.”
희원의 말에 기준이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갑자기 날아든 입맞춤에 희원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까지도 수줍은 게 많았다.
“속상해요?”
“기준 씨도 제가 밥도 못 먹고 일하면 속상할 거잖아요.”
그랬다. 희원이 밥도 거른 채 야근했다는 것을 알고는 무작정 샌드위치 가게로 끌고 간 일도 있으니 희원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희원이 기준의 품에서 뒤채며 벗어나려고 했다.
“어디 가려고요.”
“밥해 줄게요. 배고프겠어요.”
기준은 품에서 벗어나려는 희원을 더욱 꼭 끌어안고는 다시 희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하아. 좋다.”
“기준 씨.”
“조금만요. 지금은 희원 씨가 더 고파요.”
기준이 희원의 향을 맡았다. 기준만 아는 달콤한 향이 미미하게 났다.
“희원 씨, 페로몬 좀 풀어 봐요.”
“네?”
“향 맡고 싶어요.”
희원은 아직까지도 페로몬 문제가 다 치료된 게 아니기 때문에 극우성 알파인 기준도 평소 희원의 향을 희미하게밖에 맡을 수 없었다.
“희원 씨, 혹시 페로몬 푸는 거 싫어요?”
희원이 망설이자 기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희원이 몸을 살짝 떼고는 기준을 바라봤다.
“일상에서 페로몬 풀어 본 적이 거의 없어서 익숙하지가 않아요.”
“나는 그런 점이 좋아요.”
“어떤 게요?”
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기준이 조금 떨어진 희원을 다시 끌어다가 품에 안고는 말했다.
“희원 씨 페로몬 나만 아는 거요. 목덜미에 코 박고 있으면 달콤한 과일 냄새 나는 거 알아요? 페로몬 안 풀어도 나는데 희미해서 조금 더 맡고 싶어요. 조금 더 진하게. 그런데 이런 거 아무하고도 안 해 봤다는 거잖아요. 그쵸?”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준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래서 좋아요. 내가 독점하는 거니까. 나만 아는 거잖아요.”
그러고는 기준은 다시 희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마치 랑일이가 어리광 부리듯 희원을 꼭 끌어안고 몸을 비비대는 기준의 모습에 희원은 긴장을 풀고 페로몬을 조금 열었다.
“하아.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오늘 힘들었어요?”
“응, 희원 씨 보고 싶어서.”
희원은 기준이 일하는 날도 아닌데 출근했으니 당연히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준이 중얼거리는 말의 내용을 들어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기준에게 폭 안긴 희원은 기준의 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희원 씨, 우리 방에 들어갈까요?”
기준이 희원의 목덜미에 쪽쪽 짧게 입을 맞추고는 물었다. 그러고는 희원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몸을 떼더니 그대로 희원을 안아 들었다. 눈이 동그래진 희원이 얼결에 기준의 목을 끌어안고 바짝 몸을 붙였다. 기준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방으로 들어온 기준은 당연하다는 듯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조심히 희원을 침대 위에 눕혔다.
“희원 씨, 나 못 참겠어요.”
“뭐를…요?”
“이것 봐요.”
누운 희원의 위를 점령한 기준이 희원의 손을 끌어다가 자신의 앞섶 위에 댔다. 벌써 딱딱해진 성기가 느껴졌다.
“기준 씨…….”
“희원 씨만 보면 얘가 발딱발딱 서요. 벌써부터 자지가 터질 것 같아.”
희원의 귓불이 붉어졌다.
“그, 그런 말 좀…….”
“왜요? 부끄러워요? 그럴 게 뭐 있어요. 어서요. 어서 페로몬 좀 풀어 줘요.”
기준은 마치 주인에게 몸을 붙이는 대형견처럼 희원의 몸에 파고들었다. 희원이 손을 바르작거리다가 결국에는 기준의 등을 쓰다듬으며 페로몬을 조금 풀었다.
기준이 희원의 빗장뼈에 코를 갖다 비볐다. 그러면서 희원의 허벅지에 제 앞섶을 문질렀다. 노골적인 행동에 희원도 몸이 달아올랐다.
“기준 씨…….”
“으응, 좋아. 너무 달콤해.”
기준이 희원의 빗장뼈를 이로 잘근잘근 물었다. 희원의 허리가 튕겼다. 기준이 희원의 셔츠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보들보들 맨살을 어루만졌다.
매만져 오는 손길이 간지러운지 희원이 몸을 뒤틀었지만 기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입을 맞추고 허리를 쓰다듬으며 제 성기를 희원의 허벅지에 비볐다.
“못 참겠어요.”
기준이 자신의 바지 버클을 풀고는 벗어 던졌다. 단단한 허벅지 사이에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성기가 결국 속옷을 비집고는 대가리를 내밀고 있었다.
“랑일이 깨면 어쩌려고요.”
“그러니까 빨리요. 응?”
기준이 애처럼 졸랐다. 그러면서 희원의 바지도 잡고 끌어 내렸다. 환한 대낮에 무슨 버튼이 잘못 눌렸기에 기준이 이렇게 발정이 나서 이러는 건지 희원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기준이 희원의 속옷까지도 끄집어 내리고는 자신의 속옷도 벗어 던졌다. 서둘러 다시 몸을 내려 단단하게 올라붙은 성기를 아직 반밖에 발기하지 않은 희원의 성기에 갖다 비볐다.
“지금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단 표정인데요, 희원 씨.”
기준의 말에 희원은 귀신이라도 본 듯 눈을 크게 떴다. 기준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뺨에 입을 맞췄다.
“당연하잖아요.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가만히 있으면 고자지.”
“기준 씨이…….”
희원이 창피한지 고개를 모로 돌리자 기준이 노골적으로 성기를 비비댔다. 그에 따라 희원의 성기도 꿈틀 움직였다. 기준이 마치 삽입하여 움직이듯 허리 짓을 했다. 서로의 성기가 마찰하면서 자극은 점점 심해졌다.
“흐읏!”
“아, 너무 좋아. 미치겠어 진짜.”
기준이 귓가에 대고 마치 짐승처럼 그르릉거렸다. 성관계를 맺을 때 기준의 말과 행동은 너무 자극적이었다. 평소에 반듯한 사람이 그 낮은 목소리로 저급한 단어를 뱉고 노골적인 행동을 보이는 게 절제된 욕망이 폭발하는 것 같아서 희원은 매번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기준이 방금 전에 말하던 독점욕의 형태였기 때문이다. 이기준의 그런 본능적인 모습은 이희원밖에 모른다는 것 말이다.
“아읏, 아아, 기준, 씨, 아아.”
“조금만, 응, 조금만.”
기준의 허리 짓이 조금 더 빨라졌다. 둘의 성기는 마찰하면서 열을 내고 서로의 프리컴으로 인해 미끌미끌했다. 그게 더 자극이 되어 희원은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만 같았다. 희원의 향이 조금 더 진해지고 기준의 향이 조금 더 노골적이 되었다.
희원의 오메가 향은 다른 이들은 알지 못할 거였다. 하지만 이미 몇 번 몸을 맞추고 히트사이클도 같이 보낸 데다가 극우성 알파인 기준은 미미하게 맡을 수 있었다.
“흐읏. 기준 씨.”
“같이, 응? 같이 싸요.”
기준이 희원의 귀를 핥으며 속삭였다.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도는 순간 쾌감이 전율하며 뜨거운 액체가 팟 하고 터졌다. 그러면서 희원은 기준의 허벅지를 자신의 허벅지 안쪽으로 비볐다. 하얗고 말랑한 피부가 와서 닿자 그게 자극이 되었다.
“으읏!”
기준도 낮은 신음을 터뜨리며 그대로 사정했다. 희원의 분홍빛 귀두를 타고 기준이 싼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서로의 정액이 섞이면서 뭐가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아, 넣고 싶어 죽겠어요.”
“랑일이 깰 때 됐잖아요.”
“치.”
기준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게 또 랑일이가 떼쓸 때랑 닮아서 희원은 얼른 기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댔다.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지려는데 기준이 희원의 뒤통수를 잡고는 깊게 입을 맞췄다. 희원의 손에 쥔 침대 시트가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준이 조금 더 입을 맞춘 뒤 떨어졌을 때 희원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밤에 넣게 해 줄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여전히 희원의 몸에 대고 있던 기준의 성기가 다시 커졌다.
* * *
랑일이는 소파에 앉아서 다리를 달랑거리며 흔들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서 기분이 좋은 듯했다.
“소나기 오더니 조금 시원해졌어요.”
기준이 마당에 나갔다가 들어오며 말했다.
“선생님, 비 왔어요?”
희원의 옆에 앉아서 같이 그림책을 보던 랑일이가 희원에게 물었다.
“응, 랑일이 코 잘 때 소나기가 왔었어. 랑일이 꼬꼬 좋아해?”
“네!”
저녁에 삼계탕을 해서 먹을 생각이었다. 희원은 기준이 휴가 내내 음식을 해 줬으니 토요일 저녁만큼은 자신이 하기로 마음먹었다.
“희원 씨, 닭 먹고 싶어요?”
“해 주려고요.”
“해 준다고요?”
“네. 삼계탕 좋아해요?”
기준이 희원에게 다가와서 소파에 앉지 않고 그의 발치에 앉아서 랑일이와 희원의 발을 만지작거렸다.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한다니까 왜 자꾸 뭐를 한대요?”
“일하는 날도 아닌데 일했잖아요. 그리고 휴가 내내 음식은 다 혼자 했잖아요. 그래서 해 주고 싶어요. 하게 해 줘요.”
기준이 난처한 듯 웃었다.
“그럼 요리하는 동안 내가 도와줄 건 없어요?”
“맛있게 먹어 주면 그걸로 족해요. 랑일이랑 놀아 주는 거랑요.”
희원의 대답에 기준이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고 싶다는 표정으로 희원을 올려다봤다. 희원이 배시시 웃으며 그 표정에 화답했다.
“랑일아, 아빠랑 블록으로 집 지을까?”
“응! 선생님, 나 블록 쌓기 잘해요.”
“그럼, 알지. 랑일이 유치원에서도 블록 쌓기 잘하는 거 선생님이 봤잖아.”
“랑일아, 아빠랑 멋진 집 만들어서 선생님께 보여 줄까?”
기준이 랑일이를 희원의 품에서 떼어 내며 말했다.
“선생님! 우리 같이 살 집 만들래요!”
“응?”
희원이 랑일이가 한 말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를 알고 하는 말일까 싶었지만 랑일이는 그저 하고 싶은 대로 뱉은 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받은 기준의 말이 더 가관이었다.
“그래, 랑일아. 우리 선생님이랑 같이 살, 근사한 집 만들자!”
랑일이가 뱉었을 때는 별 뜻 없는 말이었지만 그게 기준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의미를 가졌다. 희원은 얼굴이 달아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얼른 주방으로 향했다.
희원이 기준에게 밥을 해 주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떨리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기준은 의외로 집안일을 잘하는 것 같았다. 휴가 중 음식을 준비하는 것도 그렇고 랑일이 옷차림새나 집 안 청결 상태를 봐서도 그랬다.
지난번에 지나가면서 물어보니 집안일 해 주러 오는 도우미가 있기는 한데 그래 봐야 일주일에 한 번이라고 했다. 아무리 도우미가 온다고 해도 이래저래 잔손이 많이 가는 게 집안일일 텐데 랑일이네 집은 깔끔 그 자체였다.
희원은 자신이 한 음식이 기준의 입맛에 잘 맞을지 걱정하면서 정성을 다했다. 흐르는 물에 닭을 깨끗하게 씻고 손질했다. 대파, 양파, 온갖 약재를 넣은 육수를 끓인 뒤 배 속에 불려 둔 찹쌀을 채우고 닭도 팔팔 끓이기 시작했다.
한참을 놀고 난 뒤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랑일이가 식탁 앞에 앉았다. 기준이 희원의 뒤로 다가와서 티슈로 희원의 이마에 난 땀을 닦아 주었다.
“어떻게 이런 걸 할 줄 알아요?”
기준이 벌써부터 감동했다는 눈으로 희원을 바라봤다.
“여름이라서 더우니까 몸보신해 주고 싶어서요.”
“너무 힘들지는 않아요?”
“뭐가요? 이게요?”
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이 결국 소리 내서 웃었다.
“너무 저를 약하게 보는 거 아니에요? 이게 뭐라고요.”
기준이 랑일이 눈치를 보고는 희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입 맞추고 싶어서 죽겠어요.”
희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기준이 팔불출이어도 이런 팔불출일 줄 몰랐다. 이렇게 눈만 맞추었다 하면 입 맞추고 싶어 하고 손잡고 싶어 하고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일 줄 몰랐다.
처음에 그의 인상에 차갑고 무뚝뚝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철저히 편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준은 그 누구보다 다정하고 상냥했다.
“앉아 있어요. 다 됐어요.”
“뜨겁잖아요. 무겁고 뜨거운 거 드는 건 내가 할게요. 희원 씨 위험해요.”
“과보호.”
희원이 그렇게 말하며 코를 찡긋했다. 그러면서도 기준의 다정한 행동이 마냥 좋아서 행복한 얼굴을 했다.
기준은 희원을 의자에 손수 앉히고는 보글보글 끓고 있는 삼계탕을 직접 식탁 위에 옮겨다 두었다. 셋은 식탁에 둘러앉아서 희원이 준비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희원 씨.”
한술 뜬 기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희원을 불렀다.
“맛…없어요?”
희원이 설마 싶어서 한술 먹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이렇게 못하는 게 없어요?”
“네?”
“진짜 맛있어요. 랑일아, 맛있지?”
희원이 발라 준 닭고기를 후후 불어서 입에 넣던 랑일이가 당연하다는 듯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척 들었다.
“놀랐잖아요.”
“다음에도 또 해 줘요? 자주는 말고 가끔. 아주 가끔요.”
그 말인즉슨 희원의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끔 하겠다는 그 결심과 동일한 거라서 희원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 * *
랑일이는 목욕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희원의 품에 껌처럼 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낮잠을 실컷 잔 탓인지 저녁을 먹고 신나게 놀았는데도 여전히 눈이 말똥말똥했다.
“랑일아, 이제 자야지.”
“잠 안 오는데?”
랑일이는 제 아빠의 말에 즉각 대답하고는 희원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랑일아, 여기서 잘 거야? 네 방에서 안 자고?”
“응! 나 선생님하고 잘 거야.”
랑일이는 평소에 기준과 자지 않고 자신의 방에서 잤다. 어릴 때부터 떨어져서 잤기 때문에 여느 아이들처럼 자다가 무섭다며 품에 파고들거나 아빠가 좋아서 아빠랑 자고 싶다거나 그러는 일은 없었다.
그런 랑일이가 휴가 내내 희원을 찾았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희원과 기준의 사이를 떡하니 차지했다.
기준은 점점 몸이 달아오르는데 희원은 태연하게도 랑일이를 품에 더 꼭 끌어안을 뿐이었다. 기준이 그런 두 사람을 조금 노려봤지만 둘은 이미 서로만 보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기준의 눈빛을 알 리가 없었다.
랑일이는 희원의 옷을 만지작거리면서 옛날이야기를 들려 달라,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 한참 동안 이런저런 요구를 하다가 결국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기준은 희원이 그러는 동안 희원의 맞은편에 누워서, 물론 랑일이를 사이에 끼고, 희원의 머리를 매만져 주었다. 컬이 들어간 어여쁜 갈색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쉬이 잠에 들지 않는 아들 때문에 한숨이 비집고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삼키곤 했다.
“잠들었어요?”
랑일이가 고른 숨을 새액새액 뱉어 내자 기준이 희원에게 물었다.
“네.”
“랑일이가 사이에서 자서 어떡하죠? 거실로 나갈래요?”
기준은 꼭 몸을 섞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지닌 사람처럼 말했다. 그에 희원이 작게 웃었다. 기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고는 희원이 일어나기 전에 자신이 먼저 희원을 안아 들었다.
“내려 줘요.”
“쉿! 랑일이 깨요.”
기준이 희원의 입술에 짧게 촉 입을 맞추고는 희원을 잘 안고 거실로 향했다. 거실 소파에 내려 둔 기준이 그대로 희원에게 입을 맞췄다.
“왜 이렇게 예쁘지?”
“부끄럽게 왜 그래요.”
은은한 조명에 난처해 보이는 희원의 얼굴이 살며시 드러났다.
“나 진짜 심각하게 말하는 건데요, 희원 씨.”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심각해요?”
“진짜예요.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저 자신이 낯설고 그래요.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할 수 있다는 거에 스스로 놀라는 중이에요.”
기준이 희원의 이마에, 뺨에, 그리고 코에 차례차례 입을 맞췄다. 기준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비로소 희원이 작게 속삭였다.
“저도요. 저는 제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사랑받을 수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희원 씨 같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고 배겨요?”
희원은 기준의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히트사이클이 오지 않는다고 하여 버림받았다. 자신을 속인 게 아니냐며 진실된 사랑 어쩌고저쩌고 늘어놓는 궤변을 들으며 이별을 당했다. 그래서 희원은 자신은 더 이상 누군가를 좋아하지도, 사랑을 받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해 주는 이가 있다니! 그동안 가슴 아팠던 게 기준으로 인해 한꺼번에 치유되는 것 같았다.
“기준 씨를 만난 게 내 인생에 행운인 것 같아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환하게 웃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미소에 희원의 가슴이 떨렸다.
“희원 씨가 나한테는 행운 같은 존재예요.”
“사랑해요.”
희원의 고백에 기준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가 이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한발 늦었네요. 안 되겠다. 온몸으로 사랑해 줘야겠어요. 일단 고백부터 하고 시작할게요. 사랑해요.”
기준이 본격적으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거실 소파 위에서 진득하게 입을 맞추던 둘은 결국 랑일이가 혹시라도 깨서 거실로 나올까 봐 드레스 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흣, 기준 씨, 기준…….”
벽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거울에 희원은 이마를 박고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희원이 신음을 뱉을 때마다 거울이 희뿌옇게 변했다가 다시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기준 씨, 제발.”
기준은 희원의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구멍을 혀로 찌르고 핥고 있는 중이었다. 희원은 쾌감으로 인해서 다리가 풀려서 무릎이 꺾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기준이 양손으로 자신의 엉덩이를 받치고는 양쪽으로 벌리고 있어서 희원은 그저 거울을 손으로 짚고 바르르 떨 뿐이었다.
꽃봉오리처럼 오므려진 구멍이 기준이 혀로 찌를 때마다 봉긋 입을 열었다가 혀를 빼면 도로 닫히곤 했다. 언제 봐도 예쁘고 청순한 구멍이었다. 기준은 조금 더 페로몬을 풀며 납작한 혓바닥으로 주름을 슥 핥았다.
“흐읏!”
기준이 쥐고 있는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지더니 거울을 타고 하얀 정액이 질질 흘렀다. 쾌감에 못 이긴 희원이 결국 먼저 사정하고 만 것이다. 기준은 구멍에서 입을 떼고는 양쪽 볼깃살에 번갈아 가며 입을 맞추고 빨아들였다.
기준이 몸을 일으키고는 희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얀 엉덩이에 예쁘게 키스 마크 남은 거 알아요?”
“기준 씨이…….”
기준이 관계를 가질 때마다 짓궂고 야해진다는 걸 알지만 갈수록 그 수위가 더 높아지고 있어서 큰일이라고 희원은 생각했다.
“거울 좀 봐 봐요. 내가 빨아 준 게 그렇게 좋았어요? 거울에 쌀 만큼?”
가뜩이나 복숭앗빛으로 달아오른 얼굴이 기준의 말에 의해 더욱 붉어졌다.
“얼른 봐 봐요. 희원 씨가 얼마나 야한지.”
“하지 마요. 놀리지 마요.”
희원이 뒤돌아서 기준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애원했다. 기준이 개구지게 웃으며 희원의 뺨이고 이마고 있는 대로 입을 맞췄다.
“예뻐서 그래요. 그러게 누가 이렇게 예쁘랬나?”
기준이 다시 입을 맞추고는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희원이 작게 신음을 흘리며 기준의 품에 푹 파묻혔다.
“희원 씨가 이렇게 안길 때마다 얼마나 좋은지 모르죠?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들어 볼래요?”
기준이 희원의 머리를 끌어다가 제 가슴께에 올렸다. 빠르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에 희원이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응, 어때요? 이러다 나 죽는 거 아닐까? 심장 터져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요.”
“근데 지금은 심장이 터지기 전에 이게 먼저 터질 것 같아요.”
기준이 희원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성기를 만지게 했다. 볼 때마다 그 위용에 겁먹게 하는 길고 굵은, 정말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몽둥이 같은 성기가 자랑스레 제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자지 터질 것 같아요. 들어가게 해 줘요.”
조르는 모양새에 희원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기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희원의 다리 한쪽을 제 허벅지에 감게 만들었다. 다리가 넓게 벌어지자 기준은 자신의 성기를 희원의 아래에 대고 몇 번 비비댔다.
“흐읏, 흐, 기준 씨이…….”
“뒤에서 넣는 게 무리가 덜 갈 것 같은데 그러면 얼굴 못 보잖아요.”
거울이 있지만 희원이 부끄러움에 고개를 안 들 것을 알고 있는지라 기준은 이 상태에서 집어넣기로 했다.
“살살 할게요. 응?”
희원이 겁을 내며 자꾸만 몸에 힘을 주자 기준이 달콤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 희원이 기준과 살짝 눈을 맞추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나비 날개 같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기준은 눈에 입을 맞추고 다시 뺨에도 입을 맞췄다.
“읏!”
주름을 문지르던 성기 끄트머리가 머리를 들이밀며 안으로 들어섰다. 귀두만 집어넣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숨이 막혔다. 희원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 기준의 어깨를 꽉 쥐었다.
“아프면 물든가 할퀴든가 해요. 입술 깨물지 말고.”
기준이 귓가에 속삭이는 동시에 희원의 허리를 잡고 아래로 내리면서 허리를 쳐올렸다.
“아아! 아윽!”
작살에 꽂힌 물고기처럼 희원이 파드득 튀어 올랐다. 등골을 따라 소름이 쫙 끼치는 느낌이 들었다.
“다 들어갔어요, 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희원이 기준을 쳐다봤다. 기준이 눈꼬리를 할짝 핥고는 짧게 몇 번 더 입을 맞췄다.
“뽀뽀 귀신.”
아직도 힘이 드는지 희원이 눈꼬리를 치켜올렸지만 기준은 그것조차 예쁜지 다시 입을 맞췄다.
“뽀뽀 귀신이라서 좋으면서.”
“진짜 다 들어갔어요?”
“만져 볼래요?”
희원이 못 믿겠다는 듯 물으니 기준이 희원의 손을 밑으로 잡아끌었다. 희원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쳐다보면서도 기준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따라갈 때였다.
“아읏!”
희원이 파드득 기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달라붙었다. 잠시 긴장을 푼 사이에 기준이 채 들어가지 못한 성기를 뿌리 끝까지 밀어 넣었다.
“거짓말쟁이.”
“이래야 긴장을 푸니까요.”
맞는 말이긴 했다. 이러지 않았으면 아마도 겁을 집어먹고는 커다란 성기가 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방해했을 거다. 하지만 희원은 뭔가 억울한 듯 매서운 눈초리를 해 보였다. 그것도 기준에게는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거 모르나 봐요. 희원 씨는 그렇게 째려봐도 예쁜 거.”
희원이 코를 찡긋거리며 부끄러운지 시선을 피했다.
“이제 움직일게요.”
희원이 기준의 어깨에 더욱 매달렸다. 기준은 희원이 한쪽 다리로만 서 있는 게 힘들 것 같아서 아예 양다리를 자신의 허벅지에 감도록 했다. 공중으로 붕 뜨게 된 희원이 기준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흐읏! 떨어질 것 같아요.”
“겁먹지 마요. 안 떨어져요.”
기준이 희원의 엉덩이를 잘 받치고는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희원이 말한 대로 기준은 뽀뽀 귀신이라는 별명이 잘 어울릴 만큼 틈만 나면 뽀뽀를 해 댔다. 그게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좋아서 문제인 희원이 기준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으며 숨어 버렸다.
“뽀뽀 못 하게 막는 거예요?”
“하읏!”
기준이 페로몬을 푸는 바람에 숲에 잠긴 것 같은 향이 훅 콧속을 파고들고 폐부를 찔렀다. 빽빽하게 우거진 여름 숲에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느낌이 들었다.
“움직일게요.”
기준이 희원의 볼기짝을 양손에 움켜쥐고는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기준의 힘에 밀려서 거울에 대고 있는 등이 땀으로 젖어서 뿌득뿌득 소리를 냈다. 거기에 둘의 신음이 그 위를 덮었다.
“아읏! 기준, 아아! 천천히!”
“여기서 더 읏, 천천히 못, 해요.”
기준도 이제 한계였다. 공중에 뜬 다리가 기준의 허리를 쓸며 조였다 풀기를 반복했다. 그와 동시에 희원의 구멍이 팽팽해지다 못해 터질 것 같은 기준의 성기를 꽉 물고 빨아들였다.
“흐읏! 흣! 기준, 씨. 으으!”
더운 숨이 기준의 귓가에서 울렸다. 기준이 페로몬을 열수록 희원의 페로몬도 더욱 깊어졌다. 히트사이클 때보다는 연하지만 달콤한 과일 향이 기준의 콧속을 파고들었다. 기준만 알 수 있는 향이었다.
“희원, 희원 씨.”
기준이 허리를 더욱 빠르게 쳐올리며 동시에 희원의 몸을 더욱 아래로 내리꽂았다. 희원이 행여 떨어질까 기준의 목을 더 꼭 끌어안았다. 신음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게 신경 쓰이는지 희원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희원 씨, 입술, 입술 읏, 깨물지 마요.”
“아아! 아응!”
기준이 희원의 입술을 찾아서 물었다. 그러고는 깊게 입을 맞췄다. 희원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쾌락을 향해서 달리는 그 길이 미칠 것만 같았다. 한차례 사정해서 수그러들었던 성기가 다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는 기준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배에 비벼졌다.
“으읏!”
기준이 희원을 높게 들었다가 한 번에 꽉 껴안았다. 그러고는 희원을 들어서 몸을 빼냈다.
후드득. 기준의 성기에서 하얀 우유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계속해서 기준의 배에 비벼지던 희원의 성기에서도 정액이 질질 새어 나왔다. 기준이 희원을 끌어다 그의 성기와 자신의 성기를 한꺼번에 잡고는 서로 비비댔다.
“아아!”
귀두가 서로 맞비벼지자 머리끝까지 쾌감이 찌르르 올라왔다. 희원이 못 참겠다는 듯 기준에게 안겨 들었다. 기준이 그런 희원을 세게 끌어안고는 벅차듯이 숨을 몰아쉬었다.
“사랑해요, 사랑해 희원 씨.”
기준이 숨을 고르듯 연신 사랑을 속삭였다. 낮은 목소리에 희원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왜 울어요?”
희원과 눈이 마주친 기준이 놀랐는지 희원의 안색을 살폈다. 기준의 말에 희원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벅차서, 기준의 사랑이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난 것을 깨달았다.
“어디 있다 왔어요?”
희원이 눈썹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눈꼬리를 따라 길게 눈물이 흐르자 기준이 꼼꼼하게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늦게 나타나서 미안해요. 희원 씨 늦게 찾은 만큼 더 잘할게요. 사랑해요.”
희원은 결국 기준의 목을 끌어안고는 엉엉 울어 버렸다. 기준이 속삭이고 부어 준 사랑만큼 눈물이 넘쳐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