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대답은 그대와 같이
기준은 희원에게 전화를 하면 그때 집에서 나오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희원이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마치 자신이 뭐라도 된 양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기준이 기사처럼 집 앞에 왔다는 말에 유유자적 나가는 건 희원의 사전에 말이 되지 않았다.
역시나 기준의 말을 듣지 않고 미리 집 앞에 나와 있던 희원은 다른 차 유리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며 모습을 점검했다.
기준이 사 준 에메랄드빛 셔츠와 자신이 갖고 있던 물 빠진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셔츠는 촉감도 좋았고 몸에 딱 맞았다. 자신의 사이즈에 정확하게 맞는 옷을 사 온 기준이 신기했다.
희원이 혹시 얼굴에 뭐라도 묻은 게 없나 싶어서 핸드폰에 이리저리 얼굴을 비추는데, 저쪽에서 기준의 차가 들어왔다. 희원이 단박에 기쁜 표정을 지었다. 벌써부터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안녕하세요, 희원 씨.”
“네, 안녕하세요.”
기준이 내리며 인사하자 희원도 웃어 보였다.
“더운데 나와 있지 말라니까요. 어서 타세요.”
기준이 문을 열어 주자 희원은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기준이 희원을 먼저 태우고 운전석에 앉자 희원이 기준을 바라보며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머리 내리셨어요?”
“네. 어울리나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생긴 이마를 드러낸 스타일만 보다가 앞머리를 내린 모습을 보니 청순해 보이면서 어려 보였다.
“고민 많이 했거든요.”
“무슨 고민요?”
“머리를 올릴지 말지, 옷은 무얼 입어야 할지… 이게 어울릴지 저게 어울릴지 얼마나 고민했다고요.”
희원이 눈을 깜박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작게 말했다.
“어떻게 하셔도 다 어울리는데요.”
“응? 뭐라고요? 잘 못 들었는데, 다시 얘기해 줘요.”
희원이 살짝 옆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들으셨잖아요.”
“못 들었는데요?”
“잘 어울린다고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신호등 앞에 서자마자 그대로 희원의 턱을 들어 올리고는 붉은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희원의 눈이 똥그래졌다. 그러든 말든 기준은 제 할 말을 했다.
“희원 씨도 옷 잘 어울려요. 누가 사 줬는지 빛이 나네요.”
희원의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기준은 그렇게 백화점으로 가는 내내 희원에게 예쁘다, 옷이 잘 어울린다,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정말 좋다 등 희원이 듣기 좋은 소리만을 골라 했다. 희원은 계속해서 뛰는 가슴에 정말이지 심장이 고장 난 게 아닐까 싶었다.
백화점에 도착한 둘은 주차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왜요? 무슨 할 말 있어요?”
물끄러미 바라보는 희원의 시선에 기준이 물었다. 희원이 조심스레 말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저, 근데 이렇게 사람 많은 데 오셔도 돼요?”
“저요?”
기준이 자신을 가리키자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그게 그래도 사람들이 랑일이 아버님 얼굴을 알기도 하고요…….”
“저는 연예인도 아니고 그저 일반인인데 뭐 어때요? 괜찮아요.”
기준의 대답에 희원이 다행이라는 얼굴을 했다. 그런데 기준이 불퉁한 표정으로 얼굴을 살짝 들이밀었다.
“근데 언제까지 아버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희원이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더니 시선을 피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기준이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말고 가요. 랑일이 선물 산다면서요. 어서 가요.”
기준이 한 발 뒤로 물러선 희원을 잡아끌며 말했다. 희원이 기준을 살짝 올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과 나란히 걸으며 희원이 물어봤다.
“랑일이는 집에서 주로 어떤 옷 입어요?”
유치원은 원복이 있어서 아이들의 사복 차림을 보는 건 숲 체험이 있는 날 정도일 뿐이었다. 숲 체험 때 랑일이는 주로 행동하기 편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등원했다.
“랑일이라고 뭐 다를 게 있나요?”
기준의 대답에 희원이 눈썹 끝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랑일이가 숲 체험 때 입고 오는 트레이닝복들이 한정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이렇게 불쑥 옆에 서 있는 이 사람의 집안이 재벌가라는 걸 느끼곤 할 때는 희원은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잘 때는 뭐 입고… 아, 잠옷 입죠?”
지난번에 본의 아니게 기준네 집에서 잠든 날을 떠올리고는 희원이 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기준이 희원을 내려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냥 희원 씨 사고 싶은 거 사면 돼요. 선물은 사 주는 사람 마음이죠, 뭐.”
“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받는 사람을 고려해서 골라 줘야죠.”
기준이 희원의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희원 씨는 제가 사고 싶었던 걸 사 준 것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잘 소화할까요?”
“네?”
랑일이 이야기를 하다 도돌이표처럼 다시 돌아온 이야기에 희원이 얼굴을 붉히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빨라진 걸음에 희원이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알고는 기준이 얼른 따라잡고는 옆에 서서 나란히 걸었다.
“아무거나 사 줘도 돼요. 희원 씨가 사 준 거라고 하면 랑일이는 거적때기를 갖다줘도 좋아할 테니까요. 만날 그 옷만 입는다고 할걸요.”
결국 희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준에게 정상적인 대답을 요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희원은 결국에는 랑일이가 편하게 입을 수 있는 티셔츠와 청바지를 골랐다.
왠지 재벌가는 어릴 때부터 중요한 사교 모임 비슷한 곳에 많이 나가곤 할 것 같았다. 드라마 같은 것에서 보면 그런 장면이 종종 나오니까 말이다. 그런 곳에 가면 작은 도련님도 정장을 입고 참석하던데 그래서 랑일이도 그런 종류의 옷은 이미 많을 것 같았다.
“희원 씨, 혹시 배고파요?”
“아직 괜찮아요.”
둘은 백화점 오픈 시간부터 만나서 내내 돌아다녔다. 오후 시간에는 아무래도 사람들이 꽤 많아져 이리저리 치일 것 같기도 하고, 기준은 희원과 오랜 시간 같이 있고 싶기도 했다. 둘은 생각보다 많이 걸어서 기준은 희원이 배고플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괜찮은 모양이었다.
“그럼 희원 씨, 한 군데만 들렀다가 밥 먹으러 갈래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은 희원을 끌고 남성복 매장으로 향했다. 희원은 기준이 옷을 사려고 그러나 보다고 생각하고는 기준의 뒤를 졸졸 쫓았다.
기준은 슥 훑더니 티셔츠 하나와 바지를 골랐다. 하늘빛 셔츠와 검은색 슬랙스였다. 그런데 왠지 사이즈가 기준이 입기에는 작은 것 같아서 희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희원 씨. 이거 한 번만 입어 보면 안 돼요?”
“네?”
기준이 내민 옷을 보고는 희원이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봤다.
“혹시 피팅 룸 들어가는 것 귀찮아요? 그냥 사도 사이즈 맞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입어 본 것 보고 싶은데 혹시 귀찮을까요?”
지금 문제는 피팅 룸에 들어가는 게 귀찮고 어쩌고가 아니었다. 왜 이걸 입어 봐야 하는가였다.
“이걸 왜…요?”
“그냥 사 주고 싶으니까요.”
“그러니까 왜…….”
“희원 씨한테 잘 어울릴 것 같으니까요.”
희원이 이마를 짚었다. 여기서 이래 봐야 말이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잠시만요. 죄송해요.”
희원은 옆에 서 있는 직원에게 죄송하다며 실례를 표하고는 기준을 잡아끌었다.
“왜요, 희원 씨.”
“글쎄. 그거 놓고 이리 좀 와 봐요.”
희원은 기준의 손을 잡고 무작정 끌어서 매장을 벗어났다.
“희원 씨, 어디 가요.”
희원은 대답하지 않고 조금 더 걸은 뒤 기준의 손을 놓았다.
“희원 씨.”
“저 그러니까요.”
희원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에 기준이 입을 닫고 먼저 듣기로 했다.
“할 말 있으면 먼저 하세요. 듣고 대답할게요.”
“저, 그러니까 아무 이유도 없이 저런 걸 받을 수는 없어요.”
“그냥 주고 싶어서 주는 거예요. 선물하고 싶어서요.”
희원은 한숨을 폭 쉬었다. 저게 얼마짜리인데! 언뜻 봐도 비싸 보이는 곳이었다. 명품 매장이었단 말이다!
“선물하고 싶다는 그 마음은 감사한데요, 이러시면 저 부담스러워요.”
기준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그냥 주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서요.”
기준이 순순히 사과하자 희원은 기준의 손을 살짝 잡았다.
“저기요, 랑일이 아버님. 아니 그러니까 저기요.”
“그 저기요는 좀 빼고 랑일이 아버님도 좀 빼면 안 돼요? 다른 호칭 없어요?”
이 와중에도 호칭에 집착하는 기준이 조금 귀엽기도 했지만 지금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서 희원이 입술만 달싹거렸다.
“알겠어요. 호칭은 나중에. 우선 희원 씨, 하고 싶은 말 하세요.”
희원이 기준의 손을 조금 더 잡으며 말했다.
“저도 막 선물하고 싶고 그렇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러면 어느 순간 부담스러워질 수도 있잖아요. 지금은 연애 초기니까 뭐든 좋지만요.”
연애 초기라는 말을 희원의 입을 통해 들으니 가슴이 간질거렸다. 기준이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까지 내린 마당이라 그런지 오늘은 기준이 조금 더 편하고 귀여워 보였다.
“우리 선물은 무슨 날에 하는 게 어때요? 그래야 그런 날이 더 특별해지고 기억에도 남고 그럴 것 같아요. 네?”
“알겠어요.”
순순히 답하는 기준에 희원은 착하다고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우리 밥 먹으러 가요.”
희원이 잡은 손을 끌어당겼을 때 기준이 말했다.
“그럼 오늘 데이트 첫날이니까 그 옷 사면 안 돼요? 희원 씨한테 진짜 잘 어울릴 것 같던데. 네? 데이트 첫날 기념 어때요?”
희원이 못 말리겠다는 듯 눈가를 찡그렸지만 이내 졌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양손을 무겁게 하고는 백화점을 나온 둘은 기준이 예전에 희원을 데리고 갔던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여기 기억나요?”
“그럼요. 어떻게 잊어요. 그때 엄청 맛있었어요.”
“좋아해서 다행이에요.”
기준이 차에서 내려 희원의 차 문을 열어 주고 손을 잡아 주었다.
“희원 씨, 제가 이렇게 해 주는 거 여자 취급이나 오메가 취급 하는 거 아니고 소중해서 그런 거 알죠?”
기준의 말에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은 기준이 알면 알수록 다정하고 따듯한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이사님. 이쪽으로 모실게요.”
안으로 들어가자 단아한 차림의 한복을 입은 주인이 기준에게 인사하며 룸으로 안내했다. 둘이 마주 보고 앉자 주인은 물을 따라 주면서 희원을 보며 말했다.
“지난번에 이사님하고 같이 오셨던 분 맞지요?”
눈썰미가 좋은 주인이 웃으며 인사하자 희원이 마주 웃으며 인사했다. 주인은 기준에게 주문을 받고는 자리를 물러났다.
“희원 씨, 점심 먹고 한의원 가도 괜찮죠?”
“오늘도 열어요?”
“그럼요. 저번에도 일요일에 갔잖아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궁금증이 일어 물었다.
“그런데 거긴 원래 일요일에 열어요?”
기준은 설마요,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희원에게 그 사실을 말하면 부담스러워할 게 뻔하니 하얀 거짓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요. 예약하면 열어요.”
어찌 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한의원의 원장은 기준네 주치의나 다름없었다. 정확하게는 박 여사네 집안 주치의다.
한의원은 실력이 좋기로 소문난 곳인데 원장은 언론에 노출되는 것도 싫어하고 사람이 많이 오는 것도 싫어해서 하루에 몇 명만 정해서 손님을 받곤 했다. 그래도 많은 돈을 벌었다. 주된 고객이 박 여사네 식구였기 때문이다.
그런 곳이니 당연히 일요일에 문을 열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기준이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이라며 부탁했을 때 한의사는 흔쾌히 시간을 내주었다. 박 여사의 둘째 아들 이기준이 무엇을 부탁한 적은 난생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예약해 주셔서 감사해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자신의 소중한 아들 랑일이의 선생님이어서 중요했던 희원이 이제는 그 존재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 사람을 위해서라면 그깟 예약쯤은 별것도 아니었다. 그게 뭐 대수라고.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주인이 상을 차리겠다며 룸으로 들어왔다.
“지난번에 보니 고기가 입맛에 맞으시는 것 같아서 조금 더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인은 인자한 웃음을 보이며 희원에게 말했다. 그에 희원이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직접 상을 차린 주인은 맛있게 드시라며 문을 닫아 주었다.
“많이 먹어요, 희원 씨.”
“네, 많이 드세요.”
둘은 가벼운 대화를 이어 가며 식사를 했다. 집에서 랑일이와의 식사 시간은 여전히 정신이 없었다. 아무리 랑일이가 순하고 의젓하다고 해도 아직 다섯 살짜리 아이는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갔다. 그래서 집에서는 여유롭게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그건 희원도 마찬가지였다. 희원도 종일 유치원에 있으면서 오전 간식, 점심, 오후 간식을 챙기면서 정신이 쏙 빠지는 일상을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희원 씨, 갈비찜 맛있어요.”
기준이 희원의 그릇을 가지고 가서 갈비찜을 수북이 쌓아 주었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희원이 야무지게 갈비를 먹는 동안 기준은 그런 희원을 구경했다. 저렇게 잘 먹는데 평소에 활동량이 많아서 그런지 전혀 군살이라는 게 없었다. 오히려 조금 마른 체형이었다. 기준은 그래서 그런지 희원을 볼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싶었다.
“왜 구경만 하세요? 어서 드세요.”
이번에는 희원이 기준의 앞에 생선 접시를 밀어 주었다. 자신을 이렇게 챙겨 준 사람이 있었나 싶어서 기준은 왠지 마음이 포근해졌다.
* * *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둘을 맞이했다. 한의원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오늘도 마찬가지라서 희원이 몰래 두리번거렸다. 일요일에도 예약하면 문을 연다고 기준이 그랬는데 과연 일반 환자도 그에 해당이 되는 건지 아니면 기준만 해당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리 오세요.”
기준은 의자를 빼서 희원을 앉히고 옆에 서서 할아버지 의사가 맥을 짚는 것을 유심히 살폈다.
“요즘은 어떠세요? 아직도 자다가 손이나 발에 몸이 닿아서 깨곤 하나요?”
“아니요. 요즘에는 괜찮아요. 잠도 잘 자고 손발이 저릿하거나 그런 것도 적어졌어요.”
“다행이네요. 날짜를 보니… 한약을 거르지 않고 잘 드셨나 봐요.”
“네, 선물 받은 건데 잘 먹어야죠.”
희원의 대답에 기준이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펴는 것을 보고 한의사가 미소 지었다. 기준을 어려서부터 봐 온 할아버지 한의사는 저 도련님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보았다. 사람 오래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달은 약을 좀 바꿀 거예요.”
“네.”
“혹시라도 몸에 이상이 있으면 바로 연락 주셔야 해요.”
“네.”
희원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꼬박꼬박 대답했다.
“그리고 가기 전에 침을 좀 놔 드릴게요.”
“침이요?”
오히려 기준이 놀라서 물었다. 한의사는 뭐가 잘못됐냐는 듯 기준을 힐긋 쳐다보고는 곧 깔끔히 무시하고 침통에서 침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프지 않을까요?”
“도련님, 뭘 그리 걱정하고 그러세요? 설마 이 할아범이 침 잘못 놓을까 봐요?”
한의사가 퉁바리 놓자 그제야 기준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껌딱지처럼 희원의 옆에 착 붙어 있었다. 침까지 다 맞고 난 뒤 한의사가 말했다.
“혹시 도련님, 두 분이 만나는 사이십니까?”
그 질문에 오히려 희원이 눈치를 봤다. 기준에게 도련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평범한 한의원은 아닌 게 자명해졌다. 기준은 보통 한의원처럼 말했지만 말이다.
“만나는 사이 맞는데, 당분간은 좀 비밀을 지켜 주실래요?”
“이 할아범이 늙었지만 아직은 눈치가 있습니다.”
기준이 하하 웃으며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예쁘죠?”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할아버지 한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은 괜히 민망해져 얼굴이 분홍빛으로 변해서 기준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러든 말든 기준은 허허실실 웃을 뿐이었다. 한의사는 그런 기준을 따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둘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도련님, 희원 님의 페로몬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알파의 페로몬 테라피가 효과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두 분이 괜찮으시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 한번 논의를 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입니다.”
기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약을 받았다. 기준은 밖으로 나와서 약을 차 트렁크에 실으며 제 일인 것처럼 기뻐했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지난번보다는 몸이 조금 괜찮아진 것 같다니.”
“네, 다행이에요. 다 한약 지어 주신 덕분이에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조금 전까지 침을 맞았던 희원의 손을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
“침 맞는 동안 아프지는 않았어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준이 희원을 끌어다 안고는 등을 쓸어 주었다. 그러고는 조수석 문을 열고 희원을 차에 타게 했다. 기준이 운전석에 앉자 희원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할 말 있어요?”
희원은 할 말이 있으면 눈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 이제 그쯤은 알고 있는 기준이 먼저 운을 띄워 주었다.
“왜 한약값도 내고 그러세요.”
희원의 눈썹이 한껏 처졌다. 하지만 기준은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마일리지로 계산했다니까요.”
“한의원에 마일리지가 어디 있어요!”
희원이 한숨을 쉬며 대꾸했지만 이런 것쯤에 아랑곳할 기준이 아니었다.
“여기 한의원은 마일리지 있어요.”
“거짓말하면 못써요!”
“진짜라니까요. 허, 이제 내 말을 안 믿네.”
기준의 반응에 희원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에 기준이 피식 웃고는 그 입술에 입을 촉 하고 맞췄다. 불시에 입맞춤을 당한 희원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제 스킨십에 좀 익숙해질 때 되지 않았어요? 매번 그렇게 놀라면 마치 나쁜 놈 된 것 같잖아요.”
“그게 아니라…….”
“알았으면 눈 좀 감아요. 입 좀 제대로 맞추게.”
희원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기준이 다시 촉 하고 짧게 입을 맞췄다.
“말 잘 들어서 예뻐요. 한약 안 거르고 잘 챙겨 먹어서 몸이 좋아진 거라잖아요. 누구 애인인데 이렇게 말 잘 들어요?”
기준이 다시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입술을 떼면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아줬다. 희원이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말해 봐요. 누구 애인인지.”
희원이 말은 못 하고 기준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
“나라고요?”
“네.”
“내 이름 몰라요?”
“알아요.”
“근데 왜 이름을 안 불러요?”
“그게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늘 ‘랑일이 아버님’ 하고 부르다가 갑자기 이름을 부르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럼 연습해 와요. 다음 주에는 내 이름 잘 부르나 한번 볼 거예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이 이번에는 희원의 볼을 부드럽게 감싸고 아랫입술을 핥았다. 희원이 입술을 살짝 떼고 입을 열자 기준이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말캉한 혀가 기다렸다는 듯 기준의 혀를 마주했다.
“으음.”
희원이 깊어지는 입맞춤에 기준의 셔츠를 꼭 쥐었다. 두 혀가 희원의 입 속에서 서로 얽히고 비벼졌다. 기준이 희원을 살짝 밀자 희원의 몸이 조수석 시트에 푹 파묻혔다. 기준이 살짝 고개를 틀어 희원이 숨을 쉴 수 있도록 도왔다.
기준은 희원의 볼을 조금 더 부드럽게 어루만지더니 손을 내려서 희원의 손을 잡아 쥐었다. 항상 차가웠던 손이 기준의 손에 잡혀서 따듯해져 갔다. 동시에 둘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소리가 서로의 귀에 들리는 듯했다.
* * *
한편 아침 일찍부터 사라진 아빠가 저녁이 다 되도록 나타나지 않자 랑일이는 입술이 불퉁하게 나왔다.
어젯밤 졸음을 참아 가며 설이와 노는 바람에 일요일 아침에 늦잠을 잔 랑일이는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 아빠가 아침에 깨어나 보니 없어서 그 커다란 집 곳곳을 다 뒤졌다.
겨우 해준과 이준이 랑일이를 안고 달래고 놀아 주며 마음을 가라앉혀 놨는데 이기준은 뭐를 하는지 들어올 생각을 안 했다.
“작은아빠, 아빠 언제 와요?”
“랑일아, 아빠 조금 있으면 올 거야.”
“나 전화할래요.”
랑일이가 1층으로 내려와 거실에 있는 전화기를 찾아 기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기준은 무얼 하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랑일아, 우리 저녁으로 맛있는 것 먹을까?”
거실로 루세가 나와서 수화기를 들고서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있는 랑일이를 들어 올렸다.
“작은마미, 아빠한테 전화할래요.”
“아빠가 많이 바쁘신가 봐. 우리 설이랑 맛있는 것 해 먹을까?”
해준의 배우자인 루세는 요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설이를 낳은 뒤에는 일요일에는 가게 문을 열지 않지만 그가 운영하는 퓨전식 술집은 꽤나 유명해서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루 종일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아빠에 단단히 뿔이 난 랑일이가 고개를 저으면서 루세의 어깨에 제 얼굴을 비볐다.
“우리 왕자님이 단단히 뿔이 났네.”
오랜만에 본가에서 잠을 청한 이준이 거실로 내려오다 랑일이를 발견하고는 랑일이에게 손을 뻗었다. 랑일이는 자연스레 루세에게서 이준에게로 넘어갔다.
“랑일아, 아빠한테 다시 전화해 볼까?”
이준의 말에 뒤따라 내려오던 해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눈이 마치 ‘이 도움 안 되는 인간아!’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기준보고 해결하라고 해. 또 모르지. 이기준이 아빠라고 제 몫을 해낼지.”
“지금 형 연애 못 한다고 심술부리는 거야?”
해준의 타박에도 이준은 꿋꿋하게 핸드폰으로 기준에게 전화를 했다. 두어 번 해도 전화를 안 받기에 이준은 누가 이기나 보자는 심산으로 다시 전화를 했다. 랑일이는 두 번째까지는 관심을 갖다가 이제는 관심을 돌려서 옆에 서 있는 루세의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작은마미, 나 가게 갈래요.”
“그럴까? 가게 가서 맛있는 것 해 먹을까?”
“응. 설이랑요.”
루세가 해준을 돌아보니 해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 전화 중인 이준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만 좀 해. 둘이 한창인데 왜 방해하고 그래? 아무튼 성격 안 좋다니까.”
이준이 뭘 했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지 말고 형도 가게 같이 가자. 거기서 저녁 먹고 집으로 가자.”
“그러든가. 랑일이 여분 카 시트 있어? 그거 내 차 뒤에 설치해. 내가 랑일이 데리고 움직일게.”
이준의 말에 해준이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내 차에 설치하면 돼. 설이랑 뒤에 앉아서 놀라고 하지, 뭐.”
“그럼 그러든지.”
이씨 집안은 첫아이인 랑일이에게 모두가 끔뻑 죽었다. 그 까탈스러운 이이준이 망설임 없이 제 차 뒤에 유아용 카 시트를 설치하라는 것만 봐도 그랬다.
* * *
그 시각 희원과 기준은 커피를 한 잔씩 사서 차에 타 이야기 중이었다.
“희원 씨, 혹시라도 히트사이클 오면요…….”
조심스러운 화제였지만 입에 올리기에 조심스럽다고 미루어 두기만 할 문제는 아니었다. 연인이기에 당연히 이야기해야 할 부분이었다.
“언제 올지는 모르겠어요.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주기가 일정하지 않아요. 여느 오메가들에 비해서는 그 주기가 띄엄띄엄 불규칙적이고 횟수도 적은 편이에요.”
“아직 올해 들어서 한 번도 안 왔죠?”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6월인데 아직이었다.
“저는 희원 씨가 원한다면 도움이 되고 싶어요.”
알파의 러트 때, 오메가의 히트사이클 때 혼자서 억제한다는 게 얼마나 큰 괴로움을 수반하는지 기준도, 희원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약을 먹는다고 해도 러트나 히트사이클이 오면 온몸에 오르는 열감과 다스릴 수 없는 본능에 사로잡혀 누구라도 좋으니 성욕을 풀어 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주기를 알 수 없는 것이 문제가 되었고 그건 시한폭탄에 버금가는 거였다.
“히트사이클 오기 전에 전조 현상은 미세하게라도 있어요.”
“응, 그럼 그럴 때 꼭 이야기해 줘요. 설마 아니겠지 싶어 그냥 넘기지 말고요.”
“알겠어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 씨.”
기준이 희원의 손을 꼭 잡고 눈을 마주했다.
“한약 먹으면서 양약은 끊은 것 맞죠?”
“네, 그랬어요.”
희원은 이전까지 페로몬이 일정하지 않은 것 때문에 양약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한약으로 바꾸면서 그 약을 끊은 상태였다. 아직까지는 페로몬에 큰 변화가 없었다. 타인이 알아차리지 못했던 페로몬이 갑자기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희원 씨 괜찮으면 이렇게 데이트할 때만이라도 페로몬 조금씩 풀어도 될까요?”
기준의 물음이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웠다.
“저는요…….”
희원이 상응하듯 조심스레 입을 뗐다. 기준은 재촉하지 않고 희원을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시간을 주었다.
“제가 페로몬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난 뒤에도 아무렇지 않아 하고 오히려 그 뒤에 사귀자고 해 주셔서 저는 고마웠어요.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알파와 오메가는 둘 사이에 페로몬을 중시하잖아요. 저도 그 문제 때문에 헤어졌던 적도 있고요. 그런데 오메가 이희원이 아닌 사람 이희원을 좋아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기준이 희원의 입술을 살짝 빨고 놓았다.
“당연하잖아요. 이렇게 심성도 곱고 아름답기까지 한 사람을 어떻게 그깟 페로몬 때문에 멀리할 수가 있어요.”
“고마워요.”
“그런 말 말고 다음에는 다른 말을 해 줘요.”
“어떤……?”
“좋아한다든가, 사랑한다든가.”
희원이 부끄러운 듯 커피만 홀짝이자 기준이 웃었다.
“잠깐만요. 우리 중요한 이야기 중인데 자꾸 누가 전화를 하네요.”
기준이 무음 상태로 해 놓은 핸드폰이 계속해서 빛을 깜박이자 희원에게 양해를 구했다.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준이 액정을 확인했다. 다름 아닌 제 형이었다.
“왜?”
―이기준이 재미가 얼마나 좋으면 전화를 안 받고 그래? 어디야?
“아직 밖인데.”
―밖인 건 나도 알고. 랑일이가 계속 찾아.
“그래? 찾을 때 됐긴 했네. 아직 본가야? 좀 바꿔 줘.”
희원이 시계를 확인하는 게 보였다. 기준이 희원의 핸드폰 액정을 손으로 덮으며 계속해서 통화했다.
“응? 루세 씨네 가게? 거기 가서 밥 먹는다고?”
―그러고 나서 나는 집으로 갈 건데 넌 어떻게 할래? 랑일이 짐은 본가에 있는데.
“알았어. 일단 해준이랑 통화해 볼게.”
전화를 끊자 희원이 벌써부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요? 희원 씨 붙들고서 집에 못 들어가게 한 사람은 저인데요.”
“그래도요. 집에 랑일이 있는데 빨리 들어가시게 했어야 하는데.”
기준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랑 같이 있는 것 싫은가 봐. 자꾸 집에 보내려고 하는 것 보면.”
“또 떼쓴다.”
희원의 말이 순간 유치원 선생님 말투여서 기준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거 아세요?”
“뭐를요?”
“이렇게 떼쓸 때 랑일이랑 똑같은 표정 짓는다는 거요.”
기준이 커다란 손으로 희원의 눈을 가렸다.
“좀 창피하니까 이러고 잠깐만 있어요.”
희원이 키득거리며 웃는 게 기준의 손바닥에 진동으로 전해졌다. 한참을 그런 채로 둘은 온기를 느끼고 난 뒤 기준이 손바닥을 내렸다.
“오늘은 아쉽지만 이만 데려다줄게요. 랑일이가 좀 삐쳤나 봐요.”
“얼른 가요.”
“자꾸만 가자고 그러고.”
기준이 볼멘소리를 하자 희원이 고개를 슬며시 돌리며 웃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리고 오늘 머리 내리고 오시니까 더 랑일이랑 똑같아요.”
기준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자 이번에는 희원이 기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귀엽다는 얘기예요.”
“세상 태어나서 귀엽다는 얘기는 처음이네요.”
“정말인데.”
“귀여운 사람한테 그런 얘기 들으니까 좀 쑥스럽네요. 가요.”
기준이 차에 시동을 걸고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는 동안 기준은 해준에게 전화를 걸어 랑일이 짐을 챙겨서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합류하기로 했다. 그 전에 먼저 희원을 집에 데려다주는 게 우선이었다.
“조금 있으면 7월인데, 유치원 방학은 어떻게 돼요?”
“놀은 사내 유치원이라서 길게 못 해요. 거의 맞벌이라서 방학하면 맞벌이인 부모님들은 아이 맡길 데가 당장 없잖아요. 그래서 딱히 방학이랄 것도 없어요. 대신에 7월에는 나이별로 반을 합쳐서 움직여요. 선생님들은 돌아가면서 휴가 가고요.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휴가 가면 그때가 방학인 거죠. 랑일이네는 언제가 휴가예요?”
기준은 여태 자신이 제대로 된 휴가를 간 적이 있나 싶었다. 콘텐츠 부서만 맡고 있다면 잠시 자리를 비워도 괜찮은데 말은 콘텐츠부의 이사지만 전반적인 것을 통솔하고 있기 때문에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우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출장도 주말 끼어서 갈 판이니 말이다.
“왜요? 저랑 휴가 맞춰 갈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준은 순간 그런 욕심이 생겼다. 이번 여름은 희원과 소소한 일상을 즐기고 싶다는 그런 욕심 말이다.
* * *
랑일이에게는 비밀이 하나 생겼다. 거울에 서 있던 랑일이가 뒤에서 타이를 매고 있는 기준을 쳐다봤다.
“아빠, 쉬잇?”
랑일이가 쪼그마한 손가락을 제 입술에 갖다 대며 눈짓했다. 기준이 웃으며 랑일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응, 유치원 가서 말하면 안 돼. 선생님하고 랑일이 둘만의 비밀이니까.”
“응, 아빠. 나 약속 잘 지켜.”
랑일이가 거울을 다시 들여다보며 한 바퀴 뱅그르르 돌았다.
“그렇게 좋아?”
“응. 선생님이 준 선물 좋아!”
랑일이는 신이 나는지 거울을 보며 몸을 이리저리 좌우로 흔들었다.
지난 일요일에 기준이 쇼핑백을 들고 랑일이를 데리러 갔을 때만 해도 랑일이는 시큰둥했다. 눈을 세모나게 뜨고는 입술을 불퉁하게 내민 채 뾰로통해 있었다.
그러다 기준이 쇼핑백 안에 있는 청바지와 티셔츠를 보여 주며 랑일이 귀에 뭔가를 속삭이자 그제야 눈이 왕방울만 해져서 반짝반짝 빛을 냈다.
랑일이가 당장이라도 옷을 입어 볼 것처럼 바지춤을 잡기에 기준이 기겁하며 말리고 또 말렸다. 집에 가서 입어 보고 사진 찍어서 선생님한테 보내자고 하니 비로소 잠잠해졌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기준은 랑일이에게 다른 친구들에게 선생님한테 선물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면 다른 친구들이 샘이 날 수도 있으니 우리끼리 비밀로 하자고 말했다. 선생님이 꼭 랑일이하고의 비밀로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며 기준은 때아닌 주입식 교육을 했다.
랑일이는 알겠다며 제 아빠와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그날 밤부터 내내 머리맡에 옷을 두고 잤다.
드디어 수요일, 숲 체험을 가는 날이 되자 랑일이는 망설임 없이 희원이 사 준 옷을 선택했다. 스스로 옷을 찾아 입고는 거울에 몇 번이고 비추어 보았다. 줄무늬가 들어간 노란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랑일이를 보니 기준은 자연스럽게 희원이 떠올랐다.
“자기랑 똑같은 걸 선물해 줬네.”
기준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평소 희원이 즐겨 입는 옷하고 비슷했다.
[오늘 랑일이가 제가 선물로 준 옷 입고 올까요?]
희원의 메시지에 기준이 아침이라 정신이 없는 중에도 곧바로 회신을 했다.
[네, 지금 거울에서 떠날 줄을 몰라요.]
기준은 희원에게 랑일이의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을 전송했다. 곧이어 희원이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이따가 올 때 운전 조심히 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출근길이 이렇게 기쁠 날이 올 줄이야! 기준은 거울 앞을 떠날 줄 모르는 랑일이를 옆구리에 끼고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얼른 가야지. 늦으면 선생님 못 봐.”
기준의 재촉에 랑일이가 그제야 걸음을 재게 놀렸다.
차에 탄 뒤에도 랑일이는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흥얼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6월치고는 날이 흐려서 그런지 바람이 살짝 차가웠다. 하지만 흐린 날씨와는 상관없이 랑일이의 기분은 그저 맑을 뿐이었다.
“선생님!”
기준이 뒷좌석 안전벨트를 풀자 랑일이가 빠르게 차에서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뛰어 풀썩 희원의 품에 안겼다. 이제는 제법 묵직한 몸이 전속력으로 달려와 안기니 희원이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밀렸다.
“이랑일. 선생님 힘드셔.”
기준이 조용히 랑일이를 타이르려고 하자 희원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희원이 제 다리를 붙잡고 있는 랑일이를 살짝 떼고는 “안녕하세요.” 하고 먼저 인사를 했다. 그러자 랑일이도 어느새 의젓한 모습을 하고는 배꼽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다시 또 착 달라붙었다.
“선생님, 나 선생님한테만 말할래요.”
랑일이가 소곤거리자 희원이 랑일이를 들어서 안았다. 랑일이가 희원의 목을 끌어안고는 귓가에 작게 속살거렸다. 희원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로 눈을 마주했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기준이 한 발자국 옆에서 바라봤다.
“응, 우리끼리 비밀이야.”
“나 비밀 잘 지켜요.”
랑일이가 가슴을 쫙 펴고는 말하는데 그게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랑일아, 이제 들어갈까? 아빠, 숲에 잘 다녀오겠습니다 해야지.”
“아빠, 안녕!”
희원이 하라는 대로 인사는 안 하고 랑일이는 대강 인사를 하고는 희원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아침마다 반복이라 기준은 별로 서운하지도 않았다.
기준이 희원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둘은 들어가자고 하고는 그렇게 기준의 차가 골목길을 빠져나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 * *
숲으로 들어서니 바람이 조금 더 찼다. 다행히 아이들은 반팔 위에 겉옷을 입고 있거나 긴팔을 입고 있었다. 해가 쨍 하고 떴으면 이런 바람쯤은 시원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르지만 해가 도통 구름 속에 가려져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이들은 날씨가 흐려도 밖에 나온 것만으로 즐거운지 연신 재잘거렸다. 숲 체험을 담당해 주는 선생님이 나무와 꽃을 설명해 줄 때마다 작은 입을 벌려 가며 감탄하고 박수를 쳤다. 희원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저 웃을 뿐이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다람쥐가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자 아이들의 흥분도는 더욱 고조되었다.
“다람쥐다!”
“선생님 다람쥐예요!”
누군가의 소리에 아이들의 시선이 한 곳에 모이자 깜짝 놀란 다람쥐가 사사삭 소리를 내며 다른 나무로 움직였다. 아이들은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홀린 것처럼 다람쥐가 옮겨 간 나무로 종종종 따라갔다.
“어어! 얘들아, 뛰면 안 돼. 넘어져.”
자칫 뛰다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희원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아이들을 주시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미 다람쥐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어어어!”
랑일이 짝인 윤이가 미끄러운 나뭇잎을 밟고 미끄러지려고 하는 걸 희원이 발견하고 그대로 손을 뻗어서 윤이를 잡았다. 윤이는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는데 놀랐는지 흐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윤아, 놀랐어?”
희원이 윤이를 품에 안았다. 옆에 서 있던 랑일이도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졌다.
“윤, 윤아! 흐아앙.”
“랑일아, 랑일이는 왜 울어.”
오히려 울던 윤이가 랑일이가 울어 버리자 그에 눈물이 쏙 들어간 모양이었다. 부담임 선생님이 와서 윤이를 받아 들고 희원이 이어서 랑일이를 안아 들었다.
“우리 애기가 왜 울어?”
“흐앙, 선생님.”
“그래그래, 왜 울어.”
“내가, 내가 손을 놓아서. 으앙.”
유치원에서는 외부로 나갈 때 둘씩 짝을 지어서 이동했다. 그때마다 희원이 말했던 건 옆의 짝하고 꼭 손을 잡고 갈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다람쥐에 눈이 팔려서 그만 손을 놓고 따로따로 뛰어다닌 거였다. 랑일이는 자신이 윤이 손을 놓아서 윤이가 미끄러진 것 같아서 어린 마음에 눈물이 터졌다.
“랑일아, 울지 마. 나 괜찮아.”
랑일이가 소리 내어 울어 버리자 부담임 선생님 품에 안겨 있던 윤이가 내려와서 랑일이 발목을 잡고 살살 위로하듯 쓰다듬었다.
“윤아, 미안해.”
랑일이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서도 윤이를 향해 사과했다. 희원은 랑일이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 주었다. 랑일이는 어리지만 또래보다 의젓하기도 하고 책임감도 강해서 다른 아이들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작은 행동에도 책임감을 느끼곤 했다.
“윤아, 진짜 괜찮아?”
“응, 괜찮아. 랑일아, 울지 마.”
작은 손으로 랑일이의 얼굴을 닦아 주는 윤이에 희원이 둘을 바라보며 따듯하게 웃었다.
한바탕 소동이 있은 뒤 아이들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버스에 타고 유치원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었다.
외출을 하고 나면 시간이 빨리 갈 테니 좋은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아이들을 통솔해야 하는 유치원 교사들에게는 배로 힘든 날이기도 했다. 행여 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교사들은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게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고 매의 눈으로 아이들을 지켜봐야 했다.
한바탕의 소동이 지나간 뒤라서 그런 건지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희원은 오늘 유독 심신이 피로했다.
물론 놀 유치원도 월차라는 게 있었다. 하지만 희원은 부득이한 일이 아니고서는 월차를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을 두고 휴가를 가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다른 선생님들은 선생도 사람인데 자기 자신을 위해 쉬기도 해야 한다고 하지만 가뜩이나 유치원에서 가장 어린 만 3세 반을 맡고 있는 희원으로서는 자신의 부재가 아이들에게 크게 다가갈 것이라고 생각해 웬만해서는 쉬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자꾸만 몸이 축축 늘어지는 게 마치 감기에 걸린 것 같아 조금 걱정스러웠다. 약이라도 먹고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희원은 마지막 하원생인 랑일이와 유치원 계단에 조금 사이를 두고 앉았다.
“선생님, 안아 주세요.”
“랑일아, 오늘은 선생님이 조금 몸이 아픈 것 같은데 내일 안아 주면 안 될까요?”
랑일이가 서운해하거나 떼를 쓰면 어쩌지 싶었는데 똑똑한 랑일이는 희원이 하는 소리를 단번에 이해하고는 희원이 아프다는 말에 놀란 눈을 했다.
“선생님, 많이 아파요?”
“아니, 많이 아픈 건 아니라서 약 먹으면 괜찮아질 것 같아. 근데 감기에 걸렸을지도 모르니까 오늘은 선생님한테 가까이 오면 안 될 것 같아.”
랑일이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섭섭한 얼굴을 했다. 희원은 떼쓰지 않고 이해하려고 하는 랑일이가 의젓하기도 하고 고마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착하다, 랑일이. 선생님이 내일 많이많이 안아 줄게.”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익숙한 구두 소리가 들리더니 대문 앞에 기준이 와 있다.
“랑일아.”
기준이 랑일이를 불렀는데 랑일이가 주뼛주뼛하다가 이내 흐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기준도 희원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랑일아!”
가까이 있던 희원이 랑일이를 달래려고 품에 안으려다 주춤했다. 기준이 열린 문으로 유치원 마당까지 들어와 대신 랑일이를 품에 안았다.
“흐앙. 아빠. 선생님이, 선생님이 아프대.”
랑일이의 말에 기준이 랑일이가 울었을 때보다 더욱 걱정 가득한 얼굴을 했다. 기준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대로 희원에게 한 발짝 다가가 그대로 희원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희원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지는 건 당연했다.
“일단 타세요. 다 끝나신 거죠?”
기준의 재촉에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오늘은 일찍 정리하고 들어가서 약 먹고 자야겠다는 생각에 랑일이를 보내고 자신도 바로 퇴근하려던 참이었다.
“랑일아, 오늘 선생님 아야 하니까 선생님은 앞에 타시라고 하자.”
기준이 랑일이에게 설명하니 오늘만큼은 랑일이가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선생님 껌딱지인 랑일이가 어린데도 희원의 몸이 별로 안 좋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 모양이었다.
“역시 우리 랑일이 착하네. 고마워 아들.”
“랑일아, 선생님 건강해지면 우리 같이 맛있는 것 먹고 재미있게 놀자.”
“네! 그리고 선생님.”
“응?”
“또 우리 집에서 자고 가요.”
뒷좌석에 올라탄 랑일이를 잘 앉히고 뒷문을 닫으려고 했던 기준이 순간 흠칫했다. 그건 희원도 마찬가지였다. 조수석 문을 열고 앉으려고 하던 희원도 멈칫했다.
“선생님, 네?”
두 어른이 대답하지 않자 랑일이가 다시 졸랐다.
“그, 그래.”
희원이 희미하게 웃었다. 기준이 얼른 운전석에 타고 운전을 하며 물었다.
“지금은 열나요?”
조금 전 이마를 짚어 봤을 때는 다행히 열이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준은 자신이 잘못 짚어 본 것일 수도 있다 생각했다.
“아니에요. 그냥 몸이 좀 축축 늘어지는 것 같아서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요.”
기준이 머뭇거렸다. 조심스럽기는 했다.
“히트사이클 오는 거 아니에요?”
“네?”
솔직히 희원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직 올해 들어서 6월이 될 때까지 히트사이클이 오지 않았으니 올 수도 있겠구나 싶었지만 주말에 둘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이렇게 금세 찾아올 줄 몰랐다.
“이전에는 히트사이클 오면 어떻게 했어요?”
“이전에는 페로몬 때문에 약을 먹어서 그 약 타러 가면서 억제제도 같이 타 오곤 했어요. 그래서 히트사이클 전조 현상 오면 억제제 먹고 휴가 이틀 정도 잡곤 했어요.”
기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페로몬 안정제랑 히트사이클 억제제랑 같이 먹었다고요?”
서로 다른 종류의 약을 두 가지 혼용하는 게 얼마나 몸에 좋지 않은지는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안정제는 만성 질환같이 계속해서 먹던 약이었고 억제제는 일시적인 거라서…….”
“자기 몸을 그렇게 혹사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기준의 말투에 속상함이 듬뿍 묻어 있었다.
“유치원 히트사이클 휴가 며칠이에요?”
“이틀이요.”
“유치원도 연차 있죠?”
“연차라기보다는 월차 개념인 거죠.”
희원의 말에 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히트사이클 휴가에 월차 붙여서 쓸 수 있죠?”
“네?”
“내가 봤을 때는 히트사이클 전조 증상 같은데 붙여서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희원이 대답을 망설였다. 아직 히트사이클이 온 것도 아니고 온다고 해도 지금까지 이틀 이상 연속으로 쉬어 본 적이 없는 희원이었다. 사흘 정도 쉰다고 해도 당장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저기 애들 때문에 사흘은 무리…….”
“지금 학부모인 제가 괜찮다잖아요.”
“아니 그래도 다른 부모님도 좀…….”
“다 알아요, 평소에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몸이 좀 안 좋아서 휴가 좀 쓰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해요? 그런다면 완전 갑질이지.”
희원이 머쓱해져서 괜히 귀 뒤를 긁었다.
“랑일아.”
“응?”
창밖을 보며 놀던 랑일이가 제 아빠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거울 너머로 시선을 마주했다.
“선생님이 아프셔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 랑일이 먼저 할머니네 가 있을까?”
“선생님 많이 아파요?”
“응?”
랑일이의 관심의 화살이 당연하다는 듯 희원에게로 돌아와 희원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으로서는 병원 문도 다 닫혔을 텐데 병원을 운운하는 기준의 속마음도 잘 모르겠기에 더욱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병원 가서 약을 받아서 드셔야 금세 낫지. 그치?”
“응! 선생님 얼른 병원 갔다 와요.”
기준의 말이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지 랑일이는 희원에게 병원에 빨리 갔다 오라고 부추기기까지 했다.
본가에 도착한 기준은 희원에게 랑일이를 안에 데려다주고 오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차에서 내리며 랑일이는 끝까지 걱정과 당부를 잊지 않았다.
“선생님, 꼭 병원 가야 해요.”
“응. 선생님 걱정해 줘서 고마워, 랑일아.”
“선생님, 주사 하나도 안 아파요.”
예방접종을 하러 갔을 때를 떠올린 랑일이는 병원이란 말에 곧바로 주사를 연상한 듯했다. 혹시라도 희원이 주사가 무서워서 병원에 안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주사가 전혀 아프지 않다고 희원을 안심시켰다. 희원은 그런 랑일이가 귀엽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와, 랑일이 씩씩하네! 선생님도 용감하게 병원 갔다 올게.”
“네! 내일 봐요, 선생님!”
“응, 내일 봐, 랑일아.”
희원은 점점 몸이 푹푹 꺼져 가는 것 같았지만 귀찮은 내색도 없이 랑일이의 말에 끝까지 대답해 주고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랑일이 금방 데려다주고 올게요. 조금만 기다려 줘요. 창문 올리고 있어요.”
기준이 랑일이를 데리고 본가 안으로 들어간 동안 희원은 열이 나는 것 같아서 조수석 창문을 살짝 내렸다. 기준은 창문을 올리고 있으라고 했지만 자꾸 몸이 더운 것 같았다.
“집 진짜 크다.”
희원이 기준네 본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집이었다. 희원네 집도 전원주택 이층집인데, 여기는 마치 고대 성 같았다. 담도 엄청 높고 대문도 커다랬다.
“안은 더 넓겠지?”
눈앞에 보이는 대문만 해도 성문 같았다. 안으로 잔디밭이 깔려 있는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차도 몇 대씩이나 들어갈 수 있을 듯했다.
“진짜 부자구나.”
이럴 때 기준의 집이 재벌가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나저나 조금 더 더워진 듯해서 희원은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창을 내렸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빨리 집에 가서 약 먹고 한숨 자고 싶었다.
그때였다. 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게 사이드미러를 통해 보였다. 희원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 차를 바라봤다. 희원이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이 집 차인 것 같은데 기준의 차가 문 앞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어서 곤란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희원이 고민하는 동안 기준의 차 뒤에 검은색 차가 섰다. 그러고는 운전석에서 남자가 내렸다. 기준과 닮았지만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였다. 희원은 창문을 올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려서 설명을 해야 마나 고민을 했다.
“형!”
“차를 왜 여기다 세워 놨어?”
“잠깐만.”
기준이 쏜살같이 튀어나와서 남자를 제 차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고는 제 차로 다가와서 희원에게 창문을 올리라는 듯 손짓했다. 희원은 기준이 시키는 대로 창문을 올렸다. 그러는 바람에 둘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았다.
기준은 남자와 몇 마디 더 주고받더니 그대로 차로 와서 운전석에 앉았다. 그러고는 즉시 차를 뺐다.
“창문 올리라고 그랬죠.”
기준이 운전하면서 딱딱하게 말했다.
“네?”
“급하니까 우리 집으로 갈게요.”
“병원 간다고…….”
“하아, 미치겠네.”
기준이 신경질적으로 타이를 풀어 뒷좌석으로 던졌다. 희원이 눈만 깜박거리며 기준을 쳐다봤다.
“미안해요. 지금 희원 씨한테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기준은 조금 더 속력을 높였다. 본가에서 기준네 집까지는 정말 얼마 걸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기준은 주차를 대충 했다. 그래 봐야 어차피 자기네 집이라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들어가기 전에 물을게요, 희원 씨.”
기준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골랐다.
“지금 희원 씨 히트사이클 오기 일보 직전인데, 희원 씨 원하는 대로 해 줄게요.”
희원은 그래서 더웠구나 싶었다. 이렇게 갑자기 올 줄은 몰랐다.
이전에도 물론 히트사이클은 있었고 전조 증상도 있었다. 보통 조금 몸이 안 좋아서 감기인 줄 알고 약을 먹었는데, 그다음 날도 몸이 안 좋고 그러다 열이 나고, 그래서 아, 히트사이클이구나 하고 알아채어 휴가를 냈다.
이렇게 몇 시간 사이에 그 모든 전조 증상이 한꺼번에 나타날 줄 몰랐다. 그래서 희원은 히트사이클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희원 씨, 지금 희원 씨네 집으로 가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려서 무리일 것 같아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페로몬에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전조 증상이 빨리 진행이 되면 가는 길에 히트사이클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옆에 있는 기준은 극우성 알파였다.
“랑일이 본가에 보내 뒀으니 차라리 우리 집 가서 쉬는 게 낫겠어요.”
“그치만 그러면…….”
“그래서 묻는 거예요. 희원 씨가 원하면 제가 자리 피해 줄게요. 저는 며칠 본가에 가 있어도 되고 호텔에 가 있어도 돼요.”
희원이 불안하고 초조한지 손톱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기준이 차분히 그 손을 잡아 내리고는 눈을 맞췄다.
“희원 씨, 히트사이클 오면 이런 향 나는구나. 그걸 우리 형이 맡을 뻔한 게 화가 나네.”
기준이 희원을 진득하게 바라보다 그대로 시트에 몸을 기댔다. 차 안의 공간이 좁아서 이제 기준도 슬슬 한계였다. 희원이 눈을 내리깔았다. 시야에 걸리는 기준의 중심부에 희원이 더운 숨을 내쉬었다.
“기준 씨.”
기준의 눈이 커졌다.
“지금 내 이름 부른 거예요?”
기준은 알파로서 들들 끓는 욕심과 욕망보다 지금 희원이 제 이름을 불렀다는 것에 더욱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그 하얀 얼굴에 붉디붉은 입술로 제 이름을 부를 때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런데 뒤이어 나온 말은 더 가관이었다.
“기준 씨. 기준 씨랑 같이 보내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