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돌풍처럼 불어닥친 고백 (6/31)

6. 돌풍처럼 불어닥친 고백

[놀의 이기준 이사, 출국. 미 행사 참석]

[놀의 이기준 이사, 남다른 패션 감각]

[연예인 못지않은 화려한 피지컬, 놀의 이기준 이사]

습관적으로 웹 서핑을 하던 희원은 경제란을 장악하고 있는 기사에 눈이 동그래졌다. 출국? 희원이 뉴스를 클릭해 봤다.

기준이 공항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실려 있었다. 평소 보던 정장 차림이 아닌 조금 더 편안한 모습이었다.

연예인 못지않은, 남다른 패션 감각… 이런 기사 제목이 왜 떴는지 절로 납득이 갈 만큼 기준은 멋진 피지컬을 자랑하고 있었다. 기준의 기사들은 경제란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연예란에 있다고 해도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몇 시기에 이렇게 기사가 떴을까? 허겁지겁 시간을 확인한 희원은 마치 제 말 하면 온다는 호랑이처럼 액정을 장식하고 있는 ‘랑일이 아버님’에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희원 씨. 아침 일찍 죄송합니다.

아침이라고 하기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희원은 여느 사람들에 비해 기상 시간이 좀 이른, 그야말로 아침형 인간도 아닌 새벽형 인간이었다.

“아뇨, 괜찮아요. 근데 출국하신다고 기사 떴던데요.”

―네, 지금 공항입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미루고 미루다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거라서요. 랑일이는 어머니께서 데리고 가실 겁니다.

“아,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희원은 평소에는 기준이 재벌가 자제라는 걸 잘 느끼지 못했다. 재벌가 자제치고는 소탈했기 때문이다. 어디 가서 고압적인 태도로 갑질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자신이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티 내지도 않았다. 스스럼없이 거리를 걷고 누군가를 시키기보다는 자신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언론에 그의 모습이 불쑥 나오거나 그를 모시고 있는 원 실장이 등장하거나 하면 그제야 그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곤 했다.

―언제 오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아… 언제 오시는데요?”

―일요일 밤에 귀국이에요.

오늘이 수요일이니 꽤 긴 일정이었다. 게다가 수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공항에 간 걸 보니 아마 빠듯한 일정을 꽉꽉 눌러 담은 듯했다.

“그럼 랑일이는 주말까지 계속 본가에 있는 거예요?”

―네. 그리고 랑일이 등원, 하원은 아마 어머니가 계속해서 해 주실 거예요.

기준의 말에 희원은 자신도 모르게 등을 꼿꼿이 세웠다. 그저 수많은 학생들 중 한 명의 할머님일 뿐인데 그게 기준과 연관이 되니 절로 긴장되었다.

“네, 걱정하지 마시고요,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희원이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기준이 속삭였다.

―희원 씨.

“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또 달랐다.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은 느낌이었고, 어째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아직 생각 중이신 거죠?

“아, 네. 빨리 답을 해야…….”

―아니요. 늦어도 괜찮아요. 대신 제가 고백한 거 잊어버리지만 마세요. 그럼 끊을게요.

통화 종료 화면을 보고 희원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어떻게 잊어버릴까. 잊어버리다니 말도 안 된다. 그 따듯한 음성과 다정한 눈빛, 그 달콤한 단어를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이 제멋대로 콩닥거리는 것을.

다만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에 대한 확신이 아닌 자신에 대한 것이. 희원은 기준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그게 어떤 식이든 말이다. 그래서 더욱 입을 떼기가 힘들었다.

“모르겠다. 너무 어려워.”

이미 까맣게 된 액정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희원은 기준이 선물한 한약 봉지를 입에 물었다.

* * *

희원은 자꾸만 주먹 쥔 손을 폈다 접기를 반복했다. 여느 날과 같은 아침이었지만 희원은 긴장으로 손끝이 저렸다.

아직 랑일이는 오지 않았다. 랑일이가 아빠와 등원하면 평소 오던 시간대가 있으니 언제쯤 올지 아는데 오늘은 할머니랑 같이 오기 때문에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저 랑일이의 할머니일 뿐이라고 생각하려고 하지만 그게 쉽게 되지 않았다.

못 보던 차가 저쪽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차는 좁은 골목길에 위치한 유치원 앞에까지는 오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기사가 재빠르게 내려서 뒷문을 열었다. 누가 내릴지 희원은 알 것만 같아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마치 구세주같이 평소 랑일이와 친하게 지내는 윤이네 아버지가 뒤에서 인사를 건네는 바람에 희원은 시선을 거두고 윤이네와 눈을 맞췄다.

“안녕, 윤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작은 꽃 같은 아이는 눈웃음을 지으며 희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윤아, 그럼 아빠는 갈게. 오늘도 재밌게 지내고 이따 저녁에 봐.”

“응, 아빠!”

윤이 아빠가 돌아서고 윤이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선생님! 어, 윤아!”

들어가려던 윤이가 그 자리에 멈췄다. 랑일이였다.

“랑일아, 뛰면 안 돼. 넘어져. 윤아, 잠깐만.”

희원이 랑일이에게 다가가 번쩍 안아 들었다. 랑일이가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희원이 랑일이를 안고 와 윤이 옆에 내려 주었다. 윤이가 랑일이를 보고 쪼끄만 손을 흔들며 웃었다.

“랑일아, 선생님께 먼저 인사해야지.”

기품 있는 목소리에 희원이 뒤돌아봤다. 랑일이가 윤이와 인사를 하다가 똑바로 서서 희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네, 랑일이 안녕하세요. 할머님, 안녕하세요.”

랑일이와 인사를 나눈 희원이 박 여사에게도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전화받으셨겠지만 랑일이 아범이 출장을 가서 이번 주는 제가 랑일이를 데리고 올 예정입니다. 우리 랑일이 잘 부탁드려요.”

“네, 할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 나 들어갈래요. 윤이랑.”

랑일이가 윤이 손을 잡고 희원의 옷자락을 쭉쭉 잡아당겼다. 희원이 허리를 숙여 랑일이와 눈을 맞추고는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랑일이는 제 할머니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할머니,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랑일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응! 할머니 안녕!”

의젓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랑일이가 작은 손을 펴서 흔들었다. 그에 박 여사가 웃으며 같이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희원은 기준이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기준의 어머니인 박 여사는 상당히 우아하지만 매서운 눈초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웃는 그 순간 인자한 할머니가 되었다. 차가워 보이지만 다정한 기준이 박 여사와 똑 닮았다고 희원은 생각했다.

“선생님.”

“네, 할머님.”

희원은 박 여사와 단둘이 서니 괜히 긴장하게 되었다.

“랑일이가 집에서 선생님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랑일이가 무척 사랑스럽잖아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네.”

꼭 그 말이 잘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금쪽같은 내 손자를 다른 유치원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말처럼 들려, 희원은 웃음을 만들어 내는데 입꼬리가 어색하게 떨렸다. 박 여사는 깊은 눈으로 희원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동안 랑일이가 가장 늦게 하원했다고 랑일이 아범이 이야기하더라고요.”

“네, 아버님께서 워낙 중요한 일들을 맡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이번 주만큼이라도 조금 일찍 데리고 갈까 하는데, 가장 빠른 하원이 몇 시인가요?”

유치원마다 하원 시간이 달랐다. 2시에 끝나는 곳도 있었고 그보다 더 늦게 끝나는 곳도 있었다.

놀 유치원은 사내 유치원이라서 다른 곳보다 하원이 늦었다. 대부분 학부모들 퇴근 시간에 맞추어 끝났으나 원래 하원 시간은 4시였다. 나머지 시간은 방과 후 수업에 해당되었다.

“4시까지 오시면 돼요. 랑일이가 좋아하겠어요.”

희원이 웃어 보였다.

하지만 간과한 게 있었다. 랑일이였다. 이랑일. 이희원 껌딱지 이랑일.

“싫어! 할머니랑 안 가.”

“랑일아, 할머니께 그러면 안 돼. 할머니가 랑일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 일찍 오셨는걸.”

“싫어! 선생님하고 있다가 늦게 갈 거야!”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4시에 랑일이에게 할머니가 데리러 오셨다고 하자 랑일이의 표정이 단번에 뚱해졌다. 그 얼굴을 본 희원이 아차 싶어서 그때부터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 매일 늦게 가다가 일찍 가면 좋지 않느냐고 했더니 랑일이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선생님하고 있을 거야.”

“랑일아.”

“흐앙.”

결국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희원의 다리를 붙잡고 있던 랑일이가 결국에는 두 팔을 올리고 자기를 안으라는 식으로 희원을 올려다봤다. 하얀 얼굴이 금세 눈물범벅이 되었다.

“아고, 우리 애기.”

희원이 랑일이를 들어 올리자 랑일이가 덥석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비볐다. 눈물 콧물이 희원의 목과 어깨에 묻었지만 희원은 아무렇지 않아 했다. 그저 박 여사를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할머님.”

“아니에요, 선생님께서 죄송할 일이 뭐가 있어요. 제가 랑일이를 잘 몰랐네요.”

“아유, 아니에요. 조금 진정되면 다시 말해 볼게요. 차라도 한잔하시면서 기다리실래요?”

랑일이가 희원의 목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가기 싫다는 듯 말이다. 박 여사가 제 손주의 모습에 그저 웃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아무래도 이따가 다시 데리러 와야겠네요.”

“아… 어떡하죠.”

희원은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랑일아, 우리 애기. 오늘은 할머니랑 조금 일찍 집에 가고 다음에 선생님하고 따로 놀까?”

고개를 푹 파묻고 울던 랑일이가 고개를 삐죽 들었다. 기준을 똑 닮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희원은 순간 어릴 적 기준이 이런 얼굴이었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왠지 기준은 어릴 적에도 입을 앙다물고 당차게 굴었을 것 같다. 잘 울지도 않고 어린 꼬마 신사처럼 말이다.

랑일이가 불쑥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희원이 쳐다보고는 웃음 짓자 랑일이가 여전히 불퉁한 얼굴로 손가락을 더 들이밀었다. 그에 희원이 같이 손가락을 걸어 주자 그제야 랑일이가 배시시 웃었다.

* * *

―그래서 랑일이가 결국 새끼손가락 걸고 난 뒤에나 웃으며 갔다고요?

“네에. 할머님께 너무 죄송했어요.”

―그게 왜 희원 씨가 죄송할 일이에요. 랑일이를 모른 어머니 탓이고 고집부린 이랑일 탓이죠.

밤에 자려고 침대에 누웠을 때 걸려 온 전화는 다름 아닌 기준이었다.

“그런데 시차가 날 텐데 괜찮으세요?”

뉴욕은 9시로 이제 막 하루가 시작될 때였다. 기준은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희원에게 전화를 한 셈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내내 잤습니다.

“그래도 피곤하시겠어요.”

희원은 기준이 걱정되었다. 아마도 회사를 오래 비울 수 없어서 빡빡하게 일정을 잡고 간 모양인데 그렇다고 해도 가자마자 일이라니!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라 금방 익숙해질 겁니다. 그나저나 출장은 그야말로 오랜만이라서 좀 피로하긴 하네요.

“재벌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요.”

희원이 작게 한숨 쉬었다.

―지금 저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네? 아, 네. 건강 조심히 일하세요.”

희원은 부정하기보다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에 기준이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고 희원은 생각했다.

―보고 싶네요.

“네?”

아직까지도 그의 이런 유의 말에는 면역이 없었다.

―잘 자요. 좋은 꿈꾸고요. 운전해야 해서 그만 끊을게요.

“네. 운전 조심하시고요, 힘내세요.”

―좋네요. 희원 씨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먼저 끊으세요.

무심코 뱉은 말에 희원은 왠지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복숭앗빛으로 달아올랐다. 서둘러 전화를 끊은 희원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쓰고는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자꾸만 가슴이 콩닥거려서 쉬이 잠에 들 수가 없었다.

* * *

기준은 목요일에도 전화를 걸었다. 희원이 지친 몸을 침대에 뉘었을 때 기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희원 씨, 혹시 자고 있었습니까?

한국은 밤 9시였고 뉴욕은 아침 8시쯤이었다.

“아직이요. 자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해요. 지금 한창 출근 준비 중인 거 아니세요?”

―네, 하지만 희원 씨랑 통화할 시간은 있습니다.

희원은 기준과 전화를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기준의 전화 목소리가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옆에서 듣는 목소리도 좋았지만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또 다른 멋이 있었다.

“잘 주무셨어요? 시차 때문에 혹시 못 주무시고 그런 건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원래도 많이 자는 편이 아니라서요.

“잠이 최고의 보약이라고 하는데 어떡해요.”

아이가 생기고 난 뒤 부모는 아이의 시간에 맞추어 생활이 돌아가기 때문에 깊게 자는 것부터 포기하게 된다. 아기가 젖먹이일 때는 두 시간 정도마다 깨기 때문에 잠을 깊게 잘 수가 없고 그건 아이가 조금 커도 마찬가지였다. 밤부터 아침까지 푹 자는 아이는 드물었다.

―희원 씨는 잘 자는 편입니까?

기준의 물음에 희원은 대답을 망설였다. 희원은 몸이 차가운 편이라서 자다가도 자신의 손발에 깜짝 놀라서 깨곤 한다. 그뿐이 아니다. 이불을 둘둘 말고 자는데 조금이라도 집이 춥거나 서늘하면 그것에 또 깼다. 즉, 잠에 있어서는 조금 예민한 편이었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니 잘 못 자는가 봅니다. 한약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조금 남았어요.”

―좀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까?

희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달 먹고 효과를 본다면 그야말로 명의가 아닐까 싶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럼 한 달 더 먹어 보죠.

“네. 제가 다 먹고 난 뒤에 가 볼게요. 위치 아니까요.”

요즘은 손발에 닿아서 깨는 빈도는 많이 줄어들었다. 여름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로 한약 효과를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속는 셈치고 한 번 더 먹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같이 가요. 한약 얼마나 무거운데 그걸 혼자 들고 오려고 그래요.

“괜찮아요. 애들도 막 안고 그러는데 그깟 한약쯤이야 별것도 아니에요.”

―지금 그걸 빌미로 데이트 신청하는 거잖아요.

핸드폰을 들고 있던 희원이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얼굴이 순식간에 홧홧해졌다.

―왜 대답이 없어요?

희원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기준이 물었다. 희원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면…….”

―아무렇지도 않게라뇨. 지금 열과 성을 다해서 꼬시고 있는 거잖아요.

“아…….”

희원은 기준을 알면 알수록 그 새로움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차갑고 말수도 적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다정하고 능글맞기도 했다.

―아, 이제 출근해야겠네요. 잘 자요. 오늘은 중간에 깨지 말고 푹 자요.

“네, 그럴게요. 오늘도 힘내세요!”

희원이 속삭이고는 전화를 끊었다. 희원은 또다시 괜히 부끄러워져 얼른 이불을 뒤집어썼다.

* * *

며칠 동안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 낮에는 한여름처럼 무더웠다. 아직 초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전화를 끊은 기준은 점점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못했다.

희원에게 고백을 하고 나니 앓던 이 빠지듯이 시원해졌다. 그러면서 막혔던 행동 역시 시원시원 망설임이 없게 되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랑일이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시작하다 어느새 둘만의 이야기로 흘러갔다. 딱히 용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거창한 주제를 논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연인이 속삭이듯 일상을 공유하고 소소한 말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기준이 능글스럽게 굴면 희원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눈에 선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며 고개를 숙일 테다. 하얀 얼굴의 뺨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어서 손부채질을 할 게 분명했다.

기준은 운전을 하며 희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자꾸 웃음이 났다. 둘이 전화를 하다 보면 꼭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기준은 신중한 희원이 좋았다. 기준의 배경을 보고 선뜻 연애하자고 대답할 수도 있었을 텐데 희원은 그러지 않았다.

어릴 때에는 기준의 배경을 보고 달라붙는 오메가들이 꽤 되었다. 기준 역시 학생 때는 관계만 맺던 오메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기준의 씨를 받아서 놀 그룹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일단 기준은 오메가한테 별로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일이었다.

기준은 20대 중반부터 계속해서 집안에서 결혼 압박을 받았다. 결혼 압박은 기준의 형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나마 집안의 의견을 듣는 척이라도 하는 이는 기준이었다. 기업에 대한 생각도, 욕심도 기준이 더 많았다.

그래서 기준은 그 말도 안 되는 정략결혼을 추진한 거였다. 첫 번째 원하는 바는 더 이상 결혼 압박 같은 귀찮은 일을 강요하지 않기. 두 번째는 기업의 합병이었고 그로 인해 놀은 온전히 자신이 갖는 거였다.

사실 기준은 결혼하고 오메가가 랑일이를 임신한 것을 알고 난 뒤에는 그 결혼이 계속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했고 기준은 사랑이 없지만 사랑 없는 알파 오메가 간의 관계는 비일비재하니 그중 하나가 연장된다고 여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리어 오메가가 처음 계획대로 이혼에 대해서 말을 꺼냈을 때도 반대할 수 없었다. 그것 역시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둘 다 알고 있는 상태에 랑일이를 빌미로 결혼 생활을 강요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기준이었기에 그는 요즘 자신의 마음이 생소하면서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자신도 누군가를 마음에 둘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준은 희원이 충분히 생각하고 자신에게 오기를 바랐다. 이것저것 다 재어 보고 난 뒤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하길 바랐다. 연민해서이거나 거절하기 힘들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게 아니길 바랐다. 그래서 열과 성을 다해서 꼬시고 있지만 재촉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기준은 이제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희원이 보고 싶었다. 아이들을 품에 안고 환하게 웃는 희원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저와 닮은 앞치마를 입고 귀엽게 구는 희원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벌써 보고 싶어서 큰일이네.”

조금 전까지는 희원이 느긋하게 온다고 해도 괜찮다고 자신했는데 희원을 생각하다 보니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누구를 향한 마음은 그야말로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마치 가슴앓이 열병을 맞이한 사춘기 소년처럼 기준의 심장은 시도 때도 없이 뛰고 있었다.

* * *

―오늘 전국에는 구름이 많고 밤에는 돌풍과 비가 오는 곳도…….

희원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쿠션을 끼고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리모컨을 돌리다가 흘러나오는 일기예보에 귀를 쫑긋 세웠다.

“밤에 비 온다고?”

오늘은 기준이 돌아오는 날이었다.

기준은 계속해서 같은 시간에 전화를 걸어서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했다. 뉴욕의 아침 출근길은 서울보다 더하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계속되는 기름진 식사에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오히려 한식을 더 좋아한다고 했다.

희원은 기준과의 통화가 재미있었다. 기준이 간혹 짓궂은 장난을 걸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도 했지만 그런 것쯤은 괜찮았다. 그가 그렇게 능청맞게 구는 건 그만큼 자신이 편해졌다는 증거이니 말이다.

기준은 오늘 밤에 도착한다고 했는데, 일기예보에서 돌풍이 분다고 해서 걱정이 되었다.

“들어올 수 있는 건가?”

전화를 해 볼까 했는데 시간을 보니 이미 비행기에 타고 있을 시간이었다.

“뉴욕은 괜찮은 건가? 비 안 왔으면 좋겠다.”

희원은 빗소리를 들으며 따듯한 커피를 마시거나 아이들이 좋아할 그림책을 골라 먼저 읽는 것을 좋아했다. 희원이 그림책을 읽어 줄 때 아이들이 짓는 표정이 있었는데, 머릿속으로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과 헤벌어진 입을 상상하면 그게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그래서 주말에 비 오는 걸 좋아하는 희원인데 오늘만큼은 비가 오지 않았으면 싶었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지, 시간이 흐르고 점점 빗방울이 툭툭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희원은 유리창을 바라보며 결국 울상을 지었다.

“하아, 정말 이게 뭐람. 어제까지 날씨 좋았는데.”

걱정이 한 아름이라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거실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희원은 결국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두어 시간이 남았다.

희원은 그길로 우산을 집어 들었다. 지금 출발하면 그가 들어오기 전에 공항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지하철에서 내린 희원은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비가 그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비가 쏟아지면 어쩌지 싶어 지하철에서 내내 가슴을 졸였다. 오는 동안 계속해서 일기예보를 체크했다.

하지만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비가 오지 않아도 천둥과 번개가 친다는 것을 말이다.

공항으로 서둘러 들어간 희원은 시간대를 확인했다. 이제 도착할 때가 되었다. 희원은 안도감에 등줄기에서 땀이 나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왜 안 나오지?”

까치발을 한다고 해서 당장에 기준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희원은 계속해서 발꿈치를 올리고는 기준이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나 기다렸다. 혹시 무슨 일이 난 건 아닐까 싶어 스마트폰으로 검색어를 연신 쳐다보며 발을 굴렀다.

시계를 보니 이미 30분이나 지연되었다. 이제는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고 가슴이 타기 시작했다. 희원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기를 몇 번, 결국에는 이로 손톱을 씹었다. 이렇게 초조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순간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나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비행기 한 대가 착륙한 모양인데 과연 저 인파에 기준이 있을까? 희원이 앞뒤 생각하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네, 희원 씨.

“어디세요?”

―네? 저 공항인데, 근데 희원 씨 무슨 일…….

“하아, 다행이다.”

당연히 무사하니 전화를 받았을 텐데 희원은 지금으로서는 상황 판단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계속해서 소란스럽게 뛰던 심장 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희원 씨, 무슨 일이에…….

“희원 씨!”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 눈앞에 기준이 나타났다.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기준을 발견한 순간 그제야 희원은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준의 놀란 눈과 그 뒤에 몇 번 기준 대신 랑일이를 데리고 왔던 원 실장이 보였다.

무사한 기준을 본 순간 희원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보다 어떻게 여기 있어요?”

희원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말보다 눈물이 먼저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원 실장이 조심스레 다가와서 기준에게 속삭였다.

“보는 눈들이 있으니 차로 가시는 게 좋겠어요. 캐리어는 제가 들겠습니다.”

“아니에요. 어쨌든 얼른 차로 가죠. 희원 씨, 일단 차로 가요. 갈 수 있죠?”

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 실장이 먼저 길을 트고 기준이 앞섰다. 그리고 그 뒤를 희원이 고개를 푹 숙이고 따라붙었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희원은 그대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아, 죄송해요. 잠시만 이러고 있을게요.”

희원은 눈물이 흐르지 않게 아예 눈을 꾹 감아 버렸다. 기준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옆에서 조용히 희원을 바라봤다. 그때 누군가 밖에서 똑똑 창문을 두드렸다. 원 실장이었다.

“이사님, 커피 좀 드세요.”

“고마워요. 고생하셨어요. 얼른 들어가세요.”

기준은 원 실장에게 받은 커피 한 잔을 희원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희원이 커피를 두 손으로 쥐며 인사했다.

“이제 좀 괜찮아요?”

“네.”

“어쩐 일이에요, 여기까지.”

희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골랐다. 기준은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비가 온다고 해서… 나왔어요.”

“공항에를요?”

“네, 갑자기 걱정돼서 집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왔어요.”

기준이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기준의 표정을 살핀 희원이 계속해서 말했다.

“어제 말씀해 주신 시간이 훨씬 넘었는데도 나오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무슨 사고라도 난 건 아닌지 계속해서 검색도 하고 그랬는데 그런 건 아무것도 없고, 비는 안 오는데 천둥 번개는 계속 쳐서 그것 때문인가 싶기도 하고,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어요.”

“난기류를 만났어요. 그래서 다 와서도 내려오지를 못하고 상공에서 30여 분을 돌았어요.”

“정말요? 무서웠겠다.”

희원도 난기류를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단순한 비행기의 흔들림이 아닌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장이 계속해서 착륙을 시도하는지 비행기가 내려갔다가 훅 하고 다시 올라가고, 그걸 몇 번 경험하니 처음에는 괜찮았던 사람들도 긴장으로 얼어붙었다.

옆에 있던 아이가 불안해하며 결국 울음을 터뜨리기에 희원은 자신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주머니 속에 있던 초콜릿을 꺼내 아이의 손에 쥐여 준 적이 있다. 결국 무사히 착륙하고 나서는 서로 박수를 치고 안도의 숨을 내쉰 적이 있었다. 그걸 경험하고 나니 희원은 난기류 하면 그때의 무서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오래 기다렸겠어요.”

“정말 일분일초가 한 시간 같았어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얼마나 떨었는지 몰라요. 전화도 안 되고…….”

기준이 다정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걱정도 해 주고 여기까지 무작정 달려와 주어서.”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기준이 희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제야 희원은 정신이 돌아왔다. 희원이 피곤할 텐데 얼른 가자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미안해요. 싫으면 밀어내요.”

“네?”

기준이 그대로 희원의 뺨을 쥐고는 입을 맞췄다. 희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기준은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조금 더 부드럽게 희원의 입술을 빨고 핥았다. 희원은 기준을 밀어내기보다는 자신이 들고 있는 커피를 꼭 쥐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고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기준이 희원의 뺨을 몇 번 더 부드럽게 매만지고는 뒤통수로 옮겨서 컬이 들어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휘저었다. 손에서 흐트러지는 갈색 머리칼이 기다란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갔다.

기준은 희원의 말랑한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춥 하고 물기 어린 소리가 차 안에 울렸다. 희원이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전에 기준이 벌린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희원은 망설이는 듯 뒤로 살짝 빼려고 했지만 이내 기준에 의해서 혀가 잡혔다. 말캉한 혀가 서로 얽혀 들자 둘이 조금 더 밀착되었다. 기준은 희원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기준은 반듯한 치열을 훑고 입 안쪽 여린 살을 문질렀다. 서로 혀가 문질러지고 조금 세게 혀를 빨았을 때 희원이 숨이 막히는지 한 손으로 기준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그에 기준은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희원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숨을 골랐다. 기준이 시트에 기대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미안해요. 입 맞추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사랑스러워서…….”

희원이 기준을 힐긋 쳐다봤다. 차 안이 어두워서 발개진 얼굴이 안 보이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희원은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기준의 귀에 들릴 것만 같아서 가슴께를 손으로 꾹 눌렀다.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닌데 정말 미안해요.”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저…….”

작은 목소리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기준이 고개를 돌려 희원을 바라봤다.

“듣고 있어요. 말씀하세요.”

“저, 대답할래요.”

기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난기류는 지금 이 심정에 댈 것도 아니었다. 기준은 희원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빌었다. 무언가를 이토록 바랐던 적이 있을까?

“저, 연애…할래요.”

작은 목소리가 심장을 관통하는 것만 같았다.

“혹시, 못 들으셨어요?”

기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희원이 기준을 바라보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물방울같이 길쭉한 눈꼬리가 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맑은 눈에 당혹감이 가득한 상태라 기준은 그대로 눈을 감고는 등받이에 머리를 털썩 기댔다.

“아, 미치겠다.”

“네?”

“이런 기분이구나.”

기준은 벅찬 감정에 핸들에 이마를 기대며 엎드렸다.

“고마워요.”

기준이 얼굴만 옆으로 돌려서 희원을 바라봤다. 토끼 같은 커다란 눈과 하얀 얼굴이 기준을 바라보다가 창문으로 돌려 버렸다. 희원은 얼굴이 홧홧해서 당장이라도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어쩜 사람이 그래요?”

“네?”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러워요?”

“아니 그게…….”

기준이 마치 작정했다는 듯 다정하면서도 부끄러운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나랑 연애를 할 수 있지? 정말 미치겠네.”

더 이러고 앉았다가는 부끄러움에 없어질 것만 같았다. 희원은 쭈뼛거리며 말했다.

“이제 그만 집에 가요. 너무 늦었어요.”

“그래요, 모셔다드릴게요. 밤길 위험한데 누가 잡아가기라도 하면 큰일이죠.”

희원은 결국 복숭앗빛으로 익은 뺨을 차가운 손으로 꾹 눌렀다. 자신이야말로 미칠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에 기준은 히터를 약하게 틀었다. 6월이지만 비가 와서 살짝 서늘한 데다 반팔만 입고 달려온 희원이 혹시라도 감기에라도 걸리면 안 되니 말이다.

“혹시 춥거나 그래요?”

“아니요, 괜찮아요. 히터 트셨잖아요.”

“나중에라도 몸이 안 좋으면 꼭 얘기해야 해요.”

“네, 그럴게요.”

기준의 다정함에 희원은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근데 쉬지도 못하고 내일 바로 출근하시려면 힘들겠어요.”

“어쩔 수 없죠. 회사에서 돈 많이 받으려면 그만큼 일해야 하는 거니까요.”

“누가 들으면 그냥 평범한 회사원인 줄 알겠어요.”

“일개 회사원 맞는걸요. 아직은 아버지 회사니까요.”

기준이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앞으로 연애를 하려면 일을 좀 줄여야겠네요.”

“아… 그러실 것까지야.”

“왜요? 일주일에 한 번, 그거로 돼요?”

“그런 게 아니라… 어차피 평일 저녁에는 데이트 못 하잖아요.”

희원의 입에서 나오는 ‘데이트’라는 단어가 가슴을 간질였다. 기준은 자꾸만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것 같았다. 평생 느껴 보지 못한 기분에 미친놈처럼 계속 웃음이 흘렀다.

“랑일이 때문에?”

“칼퇴근이 가능한 직업이 둘 다 아니잖아요. 그리고 아버님은 육아하셔야죠.”

금쪽같은 아들이 여기서 딱 걸릴 게 뭐람. 그렇다고 데이트에 랑일이를 데리고 나가기에는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터라 그건 살짝 걸렸다.

“그럼 주말에는 저랑 데이트할 거죠?”

희원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 자주 해도 귀찮아하지 않을 거고요?”

“네.”

기준은 아이처럼 웃었다. 결국 희원도 수줍은 듯 웃었다.

“근데 지금 본가로 가시는 거예요?”

“아뇨. 지금 본가까지 갈 여력이 없네요.”

“그럼 저 그냥 지하철역에서 세워 주세요. 피곤하신데 괜히 저 집까지 데려다주시지 말고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츳 하고 혀를 찼다.

“희원 씨는 꼭 내 입에서 내가 지금 희원 씨랑 같이 있고 싶어서 데려다준다는 소리를 하게 만드네요. 막 확인 사살하고 그러고 싶나 봐요.”

희원은 기준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고 흠흠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서도 작게 정말 괜찮은데, 하고 중얼거렸다. 기준이 그 작은 소리를 못 들은 척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신나게 퍼붓던 비가 이제 올 만큼 왔는지 집에 돌아가는 길은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았다. 집 앞에 도착한 둘은 살짝 창문을 내리고는 청량한 공기를 맞이했다.

“희원 씨. 오늘 여러모로 고마워요.”

기준이 아예 몸을 틀어서 희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희원이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모로 저었다. 자기가 더 고마웠다. 기준이 무사히 귀국하고 자신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어서 말이다.

아직 모든 생각이 다 정리가 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염려되는 부분은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기로 했다. 닥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좋은 사람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주말인데 쉬지도 못하고 피곤하겠어요. 얼른 들어가세요. 운전 조심하시고요.”

“네, 그럴게요.”

희원이 차에서 내리자 기준도 따라 내렸다.

“희원 씨.”

다정한 부름에 희원이 기준을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기준은 차 뒷좌석에서 쇼핑백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희원의 앞에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선물이요.”

“선물이요?”

“네. 말 그대로 선물이에요. 생각나서 샀어요. 이유 없이 그냥 주고 싶어서 주는 선물이에요.”

희원이 쇼핑백을 들고는 기준 한 번, 쇼핑백 한 번 쳐다봤다.

“옷이에요. 셔츠. 평소에는 아이들 때문에 티셔츠 이런 거 입는 것 같은데, 주말에는 셔츠 즐겨 입는 것 같아서 샀어요.”

“아…….”

주말에 기준과 만난 건 몇 번 안 되는데, 희원은 기준의 눈썰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정확하게 짚어 낸 탓이었다.

희원은 티셔츠보다는 셔츠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다만 평일에는 아이들과 활동하기에 셔츠가 불편하고 혹시라도 단추 같은 것에 아이들이 다칠까 봐 단추가 있는 옷은 가급적 피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소한 옷차림 같은 것을 기준이 기억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희원은 아무 날도 아닌데 선물을 받는 게 어색했지만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고맙다고 말하는 게 기준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잘 입을게요.”

“나중에 데이트할 때 입고 나와요. 잘 어울리나 보고 싶어요.”

기준은 희원 같은 외모는 뭐를 갖다 입혀도 예쁠 거라고 자신했다. 희원이 들으면 분명히 부끄러워하겠지만 사실인데 어쩌랴.

“내일 또 출근하려면 피곤하잖아요. 어서 들어가요. 잘 자고요.”

“네. 도착하면 연락 주세요.”

“그래요.”

기준은 희원을 품에 안고는 이마에 입을 맞췄다. 눈을 감은 희원의 모습이 기준을 행복하게 했다.

* * *

유치원에서는 생일을 맞이한 아이들을 모아 한 달에 한 번씩 생일 파티를 했다. 케이크나 간식, 그 외의 선물은 모두 유치원에서 부담했고, 다만 선물을 꼭 주고 싶은 아이들은 개인적으로 주는 게 가능했다.

6월이 생일인 랑일이는 아침부터 신이 났다. 기준을 따라 거울 앞에 선 랑일이가 거울을 보다가 제 아빠를 바라봤다. 머리를 정돈하던 기준이 랑일이를 내려다보니 랑일이가 뭔가 간절한 눈빛을 해 보였다.

“왜, 랑일아?”

랑일이가 기준이 들고 있는 왁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응? 이거?”

“나도 할래.”

제 아빠가 머리를 넘기고 매만지는 게 멋있게 보였던 모양이다. 기준이 피식 웃었다.

“너도 머리 넘긴다고?”

“응, 나도 머리에 이렇게 할래.”

랑일이가 제 아빠 흉내를 냈다. 기준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오늘 생일인데 한 번쯤은 괜찮겠지 싶어서 랑일이 앞에 앉아서 눈을 마주했다. 랑일이가 기쁜 듯이 배시시 웃자 기준은 랑일이를 낳은 것에 대해서는 역시 후회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자, 어때? 마음에 들어?”

“응!”

넘긴 머리가 마음에 드는지 랑일이가 생글생글 웃었다.

“아빠, 가자!”

랑일이가 기준의 손을 꼭 잡았다. 작은 손의 온기에 기준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랑일이는 원래도 유치원 가는 걸 좋아하는데 오늘은 생일 파티까지 있으니 더욱 신이 난 모양이었다. 창밖을 보며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뭐가 그렇게 좋아?”

기준이 뒷좌석을 거울로 바라보며 묻자 랑일이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생일! 선생님이 선물 줘.”

“선물?”

“응!”

랑일이는 생각만으로도 기쁜지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러고는 익숙한 골목길로 들어서자 두리번거리며 안전벨트를 풀려고 했다.

“차 완전히 서고 나서 안전벨트 풀어야지.”

랑일이는 꼭 골목길로 들어오면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혼자 안전벨트를 풀려고 했다. 아침마다 반복되는 행동이었지만 기준은 랑일이의 안전 교육을 위해 같은 말로 계속해서 당부했다.

“선생님!”

여지없이 희원이 유치원 입구에 서서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있었다. 랑일이는 전력으로 뛰어서 희원의 다리를 붙잡고 뺨을 비비댔다.

“랑일이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랑일이가 얼른 몸을 떼고는 배꼽 인사를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찰싹 달라붙었다. 희원이 습관처럼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손을 멈칫했다.

“우아! 랑일이 오늘 머리 멋지다!”

“아빠랑 똑같아요.”

랑일이 말에 희원이 고개를 들어서 기준을 바라봤다. 기준은 평소랑 똑같긴 한데 어째 오늘따라 조금 더 힘이 들어간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랑일이가 리틀 이기준이라고 할 정도로 똑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에 희원은 웃음이 났다. 순간 부자가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진짜 아빠랑 똑같네. 진짜 멋지다.”

희원이 엄지를 들어 보이며 웃자 랑일이가 배시시 웃었다.

“오늘 생일이라며 머리를 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아빠가 부러웠나 봐요. 아버님이 내린 머리 하면 그 모습도 랑일이랑 똑같겠죠?”

희원은 앞머리를 내린 기준도 보고 싶었다. 그건 그 나름대로 청순할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기준의 표정이 살짝 묘했다. 희원이 왜 그러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기준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자 희원에게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그 전에 랑일이의 귀를 양손으로 살짝 가렸다.

“아버님이라는 호칭 좀 바꿔 주면 안 될까요?”

“네?”

“으으응! 아빠 답답해.”

랑일이가 제 아빠의 손을 억지로 떼어 내려고 하며 칭얼거렸다. 그러고는 희원에게 손을 뻗었다. 희원이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랑일이를 안아 들었다. 랑일이가 좋다고 희원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랑일아, 아빠 간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기준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인사를 했다. 희원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뒤돌아서는데 하얀 목덜미가 분홍빛으로 변해 있었다. 기준이 그 모습을 보고 귀엽다는 듯 웃었다.

* * *

유치원 마당으로 나온 희원은 계단에 앉고는 랑일이를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오늘도 다른 아이들은 이미 집으로 돌아갔고 기준이 15분 정도 늦는다고 해서 둘이 밖으로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랑일아, 오렌지 먹을래?”

“네!”

랑일이의 대답에 희원이 앞치마에 넣어 두었던 작은 오렌지 하나를 꺼내서 랑일이를 끌어안은 채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새콤달콤한 향이 둘의 코를 찔렀다. 랑일이는 벌써부터 군침을 흘리며 발을 동동거렸다.

“랑일이는 무슨 과일 좋아해?”

“나는요, 딸기요.”

“선생님도.”

“우아! 우리 똑같아요.”

랑일이가 뒤돌아보며 코를 찡긋거렸다. 희원도 마주 웃어 주고는 작은 입 속에 오렌지를 쏙 넣어 주었다. 아기 새같이 랑일이가 오물거리는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희원은 랑일이 등에 얼굴을 묻고 웃었다.

“귀여워.”

랑일이가 간지러운 듯 킥킥 웃었다.

“선생님도요. 선생님도 귀여워요.”

그 말에 희원이 그저 웃었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정말로 기준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라고 말한 게 십분 이해가 되었다. 피붙이도 아닌 제 눈에도 이렇게 예뻐 보이는데 아빠 눈에는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희원이 랑일이 입 속에 다시 오렌지를 넣어 주자 랑일이도 희원의 손에서 오렌지 한 개를 빼앗아 희원의 입 속에 넣어 주었다.

“선생님.”

“응?”

“토요일에 할머니네 가요.”

“랑일이 생일 파티 하러?”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랑일이는 좋겠다. 오늘은 유치원에서 파티하고 토요일에는 할머니네서 파티하고.”

랑일이 생일은 토요일이었다. 희원은 랑일이네 집이 곧잘 모이곤 하니 토요일에도 모일 거라고 생각했다. 역시나였다. 그날도 모여서 저녁을 먹는 모양이었다.

“아빠한테 선물 뭐 사 달라고 했어?”

“아직이요. 비밀이에요.”

“비밀? 토요일이 생일이잖아.”

“네. 토요일에 말할 거예요.”

랑일이는 매우 소중한 것을 감춘 듯 비밀이라고 말했다. 랑일이가 선물로 무엇을 바랄지 궁금해진 희원은 랑일이에게 말했다.

“나중에 유치원 오면 선생님한테 선물로 뭐 받았는지 말해 줘.”

“네!”

랑일이가 마치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라도 한 양 환하게 웃었다.

* * *

“랑일아, 이제 가자.”

토요일 저녁, 본가에서 오랜만에 식구들이 모두 모여 저녁을 먹기로 했다. 오랜만에 기준의 형인 이준도 온다고 하여 랑일이는 오랜만에 보는 큰아빠 생각에 신이 났다.

랑일이는 이 집안의 첫 아이로, 첫 정이 무섭다는 것을 몸소 실감하게 해 주는 아이였다. 무뚝뚝한 기준의 형도 종일 무릎 위를 밟고 놀아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기업 전체를 호령하는 이 회장 배 위에 엎어져서 놀아도 이 회장조차 허허 웃기만 했다.

“아빠, 이제 가자!”

랑일이가 방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그게 뭐야?”

“자랑할 거야.”

랑일이가 유치원에서 받은 선물을 들어 보였다. 정확하게는 희원이 준 그림 카드였다.

“할머니네 갖고 가려고?”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이 직접 그림도 그리고 편지도 쓴 카드였는데 랑일이는 친구들에게서 받은 수많은 선물은 별로 관심도 없고 오로지 희원에게서 받은 그 카드 한 장만 소중하게 자신의 방에 두었다. 그러더니 할머니네 갖고 가서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 근데 그렇게 들고 가면 꾸겨질 텐데.”

“그럼 가방에 넣어 갈래.”

“그래.”

기준은 랑일이와 본가에 갈 때 챙겨 가는 가방 속에 희원이 준 카드를 잘 집어넣었다. 가방을 챙겨 들고 기준이 물었다.

“선생님이 그렇게 좋아?”

“응!”

랑일이가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기준이 피식 웃고는 랑일이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본가에 도착한 기준과 랑일이 주차하고 밖으로 나오니 설이와 놀고 있던 해준이 설이를 안고 다가왔다.

“설아!”

랑일이가 설이를 먼저 만지려다가 해준과 눈이 마주치자 배꼽 인사를 했다.

“작은아빠 안녕하세요.”

“응, 랑일이 안녕. 형, 왔어? 옷 샀냐?”

“설이 안녕.”

기준이 해준에게서 설이를 받아 들며 대답을 회피했다. 지난번 출장 갔을 때 희원에게 줄 선물을 사면서 자신의 옷도 사긴 했는데 패션에 관심 많은 해준이 제 작은형이 평소 입지도 않는 스타일의 옷을 보며 관심을 표했다.

“형, 요즘 연애하냐? 왜 스타일을 바꾸고 그래?”

“야, 내가 언제 정장만 입었냐고.”

기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충 대답하자 해준은 잘 걸렸다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얘기했지? 형은 본가 올 때도 정장 입고 온 사람이라고.”

“됐고. 형 왔어?”

“응. 아버지랑 얘기 중.”

“오랜만에 행차하셨네.”

“건드리지 마. 또 삐쳐서 집에 간다고 그러면 어떡해.”

해준의 말에 기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든 말든 기준은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삼 형제의 우애를 중요하게 여기는 박 여사는 그런 일이 벌어지면 또 화를 낼 거였다. 팔불출 이 회장은 박 여사가 화를 낼 일을 만들면 불호령을 할 테니 그건 피해야 할 일이었다.

“아빠, 설이랑 놀래.”

정원에서 집까지 들어가는 길을 못 참고 랑일이가 보챘지만 기준은 들어가서 인사부터 하고 노는 거라고 말할 뿐이었다.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해준을 보고는 팔을 뻗었다. 해준이 눈웃음 지으며 번쩍 랑일이를 들어 올렸다.

“우리 왕자님이 유치원 다니면서 도리어 어리광이 많이 늘었어.”

기준도 그 말에는 동의하는지 별로 반박하지 않았다.

“아버지! 우리 왕자님 왔어요!”

해준이 집 안에 들어서며 큰 소리로 말하자 주방에서 해준의 배우자인 루세와 이야기를 나누던 박 여사가 먼저 거실로 나왔다.

“할머니!”

해준이 랑일이를 내려 주자 랑일이가 박 여사의 다리를 잡고 얼굴을 비볐다. 기준이 없는 그 며칠 동안 유치원에서 집에 안 갈 거라며 떼를 쓰고, 아침에는 조금 더 빨리 나가자고 성화를 부리던 랑일이는 자기가 언제 그렇게 할머니를 곤란하게 했냐는 듯한 얼굴로 박 여사에게 애교를 부렸다.

“랑일이 왔어? 배고프니?”

“응, 나 배고파요. 고기 먹어요?”

랑일이는 본가 정원에서 고기 구워 먹는 걸 좋아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조용하게 스테이크를 먹는 것보다는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 기준과 단둘이 있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아이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많은 식구들이 이렇게 모여서 복작거리는 것을 더 신나 했다.

“우리 랑일이 왔어?”

서재에서 누군가 나오며 랑일이를 불렀다. 기준의 형인 이준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큰아빠!”

“못 본 새에 많이 컸네.”

이준이 랑일이를 안자 랑일이가 그대로 얼굴을 비비대며 웃었다.

“못 본 게 아니라 안 본 거지.”

해준의 말에 기준이 해준에게 눈치를 줬다. 해준은 삼 형제 중 가장 오냐오냐 자랐지만 위의 두 형제는 일적으로 연관이 많이 지어져 있어서 관계가 조금 복잡했다.

“형 오랜만이다.”

“그래. 너 우리 회사에 차 대 놓고 나한텐 말도 안 했더라?”

기준이 아차 싶었다. 희원과 낮에 맥주를 마시러 간 그날이었다. 주말에 몰래 대 놓고 맥줏집에서 한잔한 건데 기준보다 더 워커홀릭인 이 인간이 아무래도 주말에 회사에 있었던 모양이다.

기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묘하게 얼굴이 굳은 제 동생을 보고 이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걸 놓칠 해준이 아니었다.

“형, 큰형네 회사에는 왜 간 건데?”

“주차하러.”

하지만 호락호락 넘어갈 해준이 아니었다. 해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했지만 랑일이가 구세주처럼 불쑥 끼어들었다.

“할머니, 배고파요.”

“그래그래. 우리 랑일이, 오늘 주인공인데 얼른 맛있는 것 먹자. 해준아, 뭐 하니. 얼른 형들 데리고 나가서 고기 좀 구워.”

해준은 양팔에 제 형들을 끼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곧바로 나갈 것만 같던 랑일이가 가방 속을 주섬주섬 뒤졌다.

박 여사가 랑일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랑일아, 뭐 해?”

“할머니 나 유치원에서 생일 파티 했어요.”

“그래? 좋았겠다.”

랑일이가 찾던 물건을 손에 들고서 생긋 웃었다.

“그게 뭐야?”

“선물 받았어요. 선생님한테요.”

랑일이가 희원에게 받은 카드를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옆에 서 있던 이 회장이 받아 들고는 살펴봤다.

랑일이를 꼭 닮은 아이가 커다란 개와 나란히 앉아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동글동글한 글씨로 랑일이에게 쓴 편지가 있었다. 마음이 따듯해지는 그런 카드였다.

“랑일이 좋았겠다!”

“네!”

이 회장의 손을 잡고 랑일이가 다시 정원으로 나오며 다른 손에는 카드를 꼭 쥐고 다른 식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뒤에서 할아버지와 손자의 모습을 박 여사가 흐뭇하게 바라봤다.

식구들이 다 같이 모였을 때 케이크의 불을 붙이고 노래도 불러 주고 잔을 채우고 축하를 했다. 랑일이가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방싯거리며 웃었다. 랑일이는 또 한 차례 희원에게서 받은 카드를 보여 주며 선생님 자랑을 실컷 했다.

“랑일이 아빠한테 선물 받았어?”

“아니요.”

해준의 물음에 랑일이가 고개를 저었다.

“뭐 받고 싶냐고 물어봐도 비밀이래. 오늘 이야기한다고 나한테도 말 안 했어.”

기준이 맥주를 마시며 대답했다. 옆에 있던 이준이 랑일이에게 물었다.

“랑일아, 그래서 선물 뭐 받고 싶어?”

랑일이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이요!”

“선생님?”

“네! 선생님 같은 마미요!”

정원에 있던 식구들이 누가 짠 것도 아닌데 멈칫했다.

시선이 랑일이에게서 기준에게 못 박혔다. 잠시 멈칫했던 기준이 잔을 들고는 술을 한 모금 넘겼다.

“응? 아빠?”

랑일이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으니 제 아빠에게 고개를 들고 물었다.

기준은 실로 난감했다. 희원과 아무 사이가 아니라면 담담하게 사람은 선물로 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아무리 선생님이 좋아도 선생님이 가족이 될 수는 없는 거라고 평소 성격처럼 진지하게 대답할 텐데, 희원과 별 사이가 아닌 게 아니니 문제가 되었다.

기준은 여기서 섣불리 말 한마디를 잘못 던졌다가는 그게 크나큰 파장을 일으킬 게 불 보듯 뻔하다는 걸 느낌상으로 알고 있었다.

“랑일이가 유치원 선생님을 정말 좋아하나 보구나.”

침묵을 깬 이는 기준이 아닌 그의 형인 이준이었다. 이준이 다리를 굽히고 앉아서 랑일이와 눈을 마주했다.

“응! 선생님 진짜 좋아요.”

“그렇게 좋아?”

랑일이가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이 커다란 손으로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사람은 선물로 줄 수가 없는 거야.”

“왜요?”

“음, 아직은 랑일이가 어려울 텐데,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이준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골랐다. 그때 해준이 화사하게 웃으며 랑일이를 들어 올렸다.

“랑일아, 사람은 돈으로 살 수가 없잖아. 물건이 아니니까. 물건만 선물로 줄 수 있는 거야.”

랑일이는 입술을 삐죽였다. 해준은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 선물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해 봐야 알아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니 선물은 물건에 한정 지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오버해서 선물이란 말이지, 선물은 마음의 선물도 있고, 어쩌고 해 봐야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떨 때는 아이의 눈높이에서 단순하게 설명하는 게 필요한데 제 형들은 그런 게 부족했다.

“그래도 선생님 갖고 싶은데.”

“우리 랑일이는 선생님의 어디가 좋을까?”

해준이 자연스럽게 랑일이와 자리를 옮기며 가족들에게 알아서 놀라고 손짓했다. 그래도 랑일이 또래의 설이를 키우는 해준이라 그런지 자연스럽게 아이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릴 줄 알았다.

기준이 흘긋 쳐다봤지만 해준은 제 형을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가족들과 이야기하라고 쫓아 보내고는 랑일이를 데리고 정원에 그네가 놓인 곳으로 향했다.

“작은아빠.”

그네를 타며 랑일이는 해준을 불렀다. 해준이 랑일이의 작은 등을 천천히 밀어 주며 응? 하고 대답하자 랑일이가 조그맣게 말했다.

“나도 엄마 갖고 싶어요.”

해준은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 어린 게 얼마나 그런 말을 하고 싶었을까? 하지만 눈치가 빠르고 속이 깊은 랑일이는 섣불리 그런 말을 뱉지 않았다.

해준은 기준이 어떻게 결혼을 했고 랑일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 집안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어차피 정략결혼에 이혼을 할 예정이었다면 그깟 페로몬쯤은 이길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해준 역시 우성 알파이기 때문에 잘 안다. 알파와 오메가에게 페로몬이라는 것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마음대로, 의지대로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사실 기준은 결혼 생활을 이어 나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는 것을 해준은 알고 있다. 기준이 취해서 한 번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자리에 이준과 해준이 함께 있었다.

하지만 사랑 없이 한평생을 타인과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는 뻔한 것이기에 형제들은 그걸 말렸다.

그런데 지금 해준은 그때 제 형에게 사랑 없이 사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 게 후회가 된다. 말리지 말 것을, 랑일이 엄마가 이혼에 대해서 너무 확고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매달려 보라고 그럴 것을 그랬나 싶다. 사랑하는 조카가 그 작은 입으로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때 해준은 마음이 아팠다.

“랑일아.”

그네를 밀어 주던 해준이 랑일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눈을 마주했다.

“작은아빠가 아빠한테 말해 줄게.”

“응! 꼭 선생님 같은 엄마. 선생님이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어요.”

해준이 말을 골랐다.

“선생님은 남자니까 엄마는 아니지만, 그래, 아무튼 아빠한테 랑일이가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말해 줄게.”

랑일이가 팔을 뻗어서 해준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듯 한마디 했다.

“작은아빠, 난 선생님이 제일 좋아요.”

해준이 알겠다고 대답하며 랑일이를 품에 안았다.

* * *

랑일이와 설이는 실컷 놀다가 목욕을 한다며 박 여사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에는 오랜만에 모인 삼 형제만이 오도카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큰형.”

아이들이 자리를 뜨자 그제야 담배를 피우던 이준이 해준을 바라봤다.

“작은형 연애한다.”

확신에 가까운 해준의 말에 기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준이 기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날 그럼 사귀는 사람하고 온 거였어? 그래서 나한테 연락도 안 하고 간 거고?”

“뭐래. 술이나 마셔. 그리고 누가 주말에 출근하냐? 주말 출근은 나도 안 해. 그나저나 형은 그동안 본가에는 왜 안 왔어? 나랑 밖에서는 종종 만나 놓고는.”

기준은 연애를 안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교묘하게 화제를 돌렸다.

“너네랑 보는 건 상관없는데 아버지랑은 보기 싫어서.”

“큰형 좌천당해서 삐친 거라니까.”

해준의 말에 이준이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기준이 해준을 바라보며 그러지 말라고 눈짓했다.

“이해준, 말 가려서 해.”

“알았어, 형. 미안. 괜히 골려 본 거야.”

해준이 이준의 팔을 잡고 얼굴을 비비며 곰살맞게 굴었다. 이준은 막냇동생의 애교에 마지못해 해준을 밀어내면서도 화를 내지는 않았다.

놀 밑에는 어린이와 청소년 독서 논술을 주된 업무로 하는 자회사가 있다. 그 자회사가 기준의 정략결혼으로 얻게 된 회사였다. 즉, 랑일이의 모친 집안이 가지고 있던 회사가 그 회사였다.

원래 이준은 그곳으로 발령이 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 회장의 명령으로 인해 독서 논술 회사가 아닌 그 회사에 납품을 하고 있는, 말이 자회사이지 하청 업체나 다름없는 회사로 출근하게 된 거다.

놀 밑에는 여러 자회사가 있었지만 이번에 이준이 발령 난 곳은 그 자회사들 중에서 가장 힘없고 갑을병정 중 정의 위치에 있는 곳이었다.

이 회장이 삼 형제의 맏이를 가장 낮은 곳으로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기준은 괜히 미안해졌다. 자신은 본사의 이사 자리에 있는데 자신의 형은 가장 작은 곳으로 보내졌으니 말이다.

기준이 괜히 술잔이나 만지고 있으니 이준이 담배를 끄며 말했다.

“됐어. 왜 집에까지 와서 회사 얘기를 하고 그래. 그리고 이기준, 너는 다른 생각 말고 랑일이한테나 잘해. 넌 애 키우면서 회사 다니려면 본사가 딱이야. 다른 회사는 육아 휴직이나 할 수 있는 줄 알아? 출산 휴가도 눈치 보는 마당에.”

“알지. 그래서 젊은 꼰대 소리 들어 가면서도 쥐 죽은 듯 열심히 다니잖아. 패악질도 안 부리고.”

기준의 말에 해준이 피식 웃었다.

“맞아. 우리 작은형 성격 많이 죽었지. 원래 애 생기면 남한테 해코지 못 하잖아. 혹시라도 본인 때문에 내 애가 해라도 입을까 봐. 아이 봐서라도 한 번 참게 되지. 그나저나 큰형, 작은형 연애한다니까.”

“왜 또 그렇게 말이 돌아오는데.”

기준이 잔을 채우며 불퉁하게 말했다. 그에 이준이 대답했다.

“연애 좀 하면 어때? 넌 좀 연애도 하고 그래라. 랑일이한테 엄마도 좀 만들어 주고.”

“그래. 형, 랑일이가 꼭 선생님 같은 엄마라고 하던데, 선생님하고 연애하는 건 안 되겠지? 랑일이 선생님 되게 젊지 않아? 예쁘고 잘생기기도 했다는데. 그런 사람이 애까지 있고 성질도 더러운 우리 형이랑 엮이면 너무 아깝겠지?”

해준은 희원을 본 적이 없는데 마치 본 것처럼 말해서 기준은 조금 흠칫했다.

“근데 넌 선생님 본 적도 없잖아. 어떻게 본 것처럼 말해?”

“엄마가, 박 여사가 며칠 동안 랑일이 데리고 유치원 왔다 갔다 했다며. 엄마가 그러던데. 랑일이가 선생님 진짜 좋아한다고. 선생님이 애들한테 엄청 잘한다며. 엄마가 딸 있으면 선생님 같은 신랑감하고 결혼시키고 싶다고 했어. 예쁘고 잘생기기까지 했는데 상냥하고 애들한테도 진심으로 대하는 데다가 사람이 좋은 것 같다고. 그러면서 엄마가 아들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대. 어디서 제 짝 데리고 온 건 나밖에 없다면서 큰아들 작은아들 걱정이 한가득이었어.”

기준은 박 여사가 사람 한번 잘 본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이희원 같은 남자가 또 있을까. 그때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이 진동했다.

“잠깐. 대화 나눠.”

액정을 확인한 기준이 곧바로 둘과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네, 희원 씨.”

―저녁 드시는데 제가 방해한 거 아니에요?

“무슨 말씀이세요. 전화 잘했어요. 저녁은 먹었어요?”

희원의 전화에 기준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네, 먹었어요. 저녁 드셨어요?

“네, 먹고 형하고 동생하고 술 한잔하고 있어요.”

―재밌겠다.

“나중에 소개해 줄까요?”

―어, 아, 그래요, 나중에요.

희원의 망설임이 무엇인지 알기에 기준은 서운해하지 않았다. 아직은 기준의 마음이 더 크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물론 그럴 테지만 말이다.

“내일 만날 수 있어요?”

기준은 내일 랑일이를 박 여사에게 잠시 맡겨 두고 희원과 만나려고 했다. 어찌 보면 처음 하는 제대로 된 데이트였다.

―네, 만나기로 이미 약속했잖아요. 저 약속한 거는 지켜요.

“그럼요. 알죠. 내일 집까지 데리러 갈게요. 더우니까 밖에 나와 있지 말고 내가 도착해서 전화하면 그때 나와요. 알았죠?”

―알겠어요.

“벌써 보고 싶네요.”

희원의 목소리를 들으니 기준은 더욱 희원이 보고 싶었다. 언제 이토록 빠진 걸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늦게 찾아온 사랑은 눈떠 보면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진행되고 있었다.

―저도요.

작은 목소리에 기준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내일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저, 랑일이 선물을 좀 사고 싶은데요.

“랑일이 선물이요?”

―네, 생일인데 따로 선물을 좀 해 주고 싶어서요. 같이 백화점 좀 가 주실 수 있어요? 혹시 사람 많은 데 가는 거 불편하실까요?

조심스러운 희원의 말에 기준이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괜찮아요. 같이 가요.”

긍정의 대답에 희원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희원은 식구들과 재미있게 놀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기준은 벌써부터 내일이 기대되었다.

(둘만 모르는 연애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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