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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랑비에 마음 젖는 줄 모른다 (5/31)

5. 가랑비에 마음 젖는 줄 모른다

이번 여름은 무덥기도 무덥고 길기도 길다고 하더니 6월인데 벌써 푹푹 쪘다. 며칠 동안 내내 덥던 날씨가 오늘은 창밖으로 비가 톡톡 두들기며 시원한 공기를 선사하고 있었다. 희원은 창밖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희원 쌤, 뭐가 그렇게 좋아?”

원장 선생님의 물음에 희원이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비가 와서요. 애들이 좀 시원할 테니까요.”

“희원 쌤은 온통 애들 생각밖에 없구나?”

희원이 배시시 웃었다. 천성이 맑고 긍정적인 희원은 비가 와서 출근길이 혼잡할 것보다는 아이들이 시원할 것을 먼저 떠올렸다.

“그나저나 애들이 조금씩 늦겠다.”

“아… 그렇겠네요. 미리 나가 있어야겠어요.”

사내 유치원이다 보니 놀 유치원 아이들은 모두 등원이 출근길과 겹쳤다. 아이들은 엄마나 아빠의 손을 잡고 같이 출근길에 올랐고 그러다 보니 비나 눈이 오면 같이 늦곤 했다. 놀 유치원은 게다가 주택가에 위치해 있어서 골목길에 차가 줄지어 들어오기에는 조금 복잡했다.

아이들이 저마다 우산을 쓰고 올 텐데 생각보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희원은 아이들이 행여 비에라도 젖을까 염려스러웠다.

희원은 커다란 우산을 쓰고서 유치원 대문 밖으로 나왔다. 아이들이 엄마 손을 잡고, 또는 자신만의 우산을 쓰고 걸어오고 있었다. 희원은 얼른 아이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조금이라도 젖을까 작은 우산 위에 큰 우산을 덧씌워 주었다.

“선생님!”

랑일이였다. 희원이 뒤돌아보자 저쪽에서 랑일이가 노란색 우비와 노란색 장화를 신은 채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첨벙첨벙 밟으며 뛰어오고 있었다. 희원이 활짝 웃으며 랑일이에게 다가가서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웠다.

“랑일이,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랑일이가 배꼽에 손을 대고 인사했다. 3월에는 아기 같더니 계절 하나를 지냈다고 조금 큰 느낌이 들었다. 발음도 더 정확해지고 구사하는 어휘도 많이 늘었다.

“도련님, 그렇게 뛰어가시면 다쳐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둘이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저쪽에서 기준의 비서인 원 실장이 오고 있었다.

“아! 비서님이시죠? 안녕하세요.”

“네, 오랜만에 뵈어요, 선생님. 오늘 이사님께서 지방에 내려가셔서요.”

“아… 혹시 바쁘신 일이 생겼나요?”

평소에 기준은 자신이 랑일이를 직접 데리러 오지 못하거나 일이 생기면 미리 희원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오늘은 받은 연락이 없어서 희원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갑자기 지방 공장에 내려가실 일이 생겨서요.”

“아, 그렇군요. 그럼 오늘 저녁에도 비서님이 오시는 건가요?”

오늘은 기준을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희원은 조금 시무룩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 선생님.”

랑일이가 길어지는 대화에 지루했는지 희원의 옷자락을 쭉쭉 잡아당겼다. 희원은 원 실장에게 잠시만요, 하고 양해를 구한 뒤 랑일이와 눈을 마주했다.

“선생님, 오늘 병아리 같아요.”

“응?”

랑일이가 희원의 노란색 줄무늬가 들어간 티셔츠를 가리켰다. 희원이 웃으며 랑일이에게 말했다.

“랑일이도 오늘 병아리 같아요. 이거 아빠가 사 줬어요?”

랑일이가 입은 비옷은 지난번 비옷 사건 때 갖게 된 그 옷이었다. 꼭 비옷을 입고 유치원에 가야 한다며 떼를 썼던 그날의 사건 말이다.

“네! 아빠가 선물로 사 줬어요.”

“좋았겠다.”

희원이 웃으며 대꾸하자 랑일이가 신났는지 발을 첨벙첨벙 구르며 덧붙였다.

“오늘 아빠 생일이에요. 그래서 오늘 아빠 선물 줄 거예요.”

랑일이의 말에 희원이 원 실장을 쳐다봤다. 원 실장은 조금 전 희원이 물었던 질문에 대답했다.

“네. 오늘 이사님 생신이에요. 이따 저녁에는 이사님께서 도련님 데리러 오실 겁니다. 그럼, 선생님. 오늘도 도련님 잘 부탁드려요.”

“아, 네…….”

희원은 대답은 했지만 순간 멍해졌다. 생일. 랑일이 아버님의 생일. 그의 생일이 바로 오늘이었다.

* * *

랑일이와 가장 친한 윤이가 와서 희원은 랑일이와 윤이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러고 난 뒤 핸드폰을 들고 입술을 짓씹었다.

“어떡하지.”

기준의 생일이라고 한다. 안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에게 받은 게 많은 희원이었다. 한약이 잘 받는지 아니면 그 한의원이 용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기분 탓인 건지 요즘 희원은 컨디션이 꽤 좋았다. 손발은 여전히 찼지만 그래도 자다가 닿은 자신의 발에 흠칫흠칫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동안 남에게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를 기준에게 털어놓은 덕분에 마음도 조금 시원해진 상태였다.

“뭐를 해 주지?”

고민해 봐야 결론이 날 게 아니었다. 그는 모든 걸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무엇을 선물로 줘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희원은 저녁을 같이하는 게 그나마 제일 낫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아버님. 오늘 생일이시라고요. 축하드려요. 이따 저녁에 괜찮으시면 시간 내주실래요? 같이 저녁 먹을 시간이 될까요?]

하지만 여기까지 쓰고서는 희원은 전송을 누르는 데에 망설였다. 오늘 기준이 랑일이와 본가에 갈 수도 있을 테고 아니면 다른 선약이 있을 수도 있는데 괜히 그를 곤란하게 만드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때였다. 랑일이가 현관문을 빼꼼 열고는 희원을 찾았다.

“선생님!”

“응, 랑일아. 선생님 들어갈게!”

희원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서면서 메시지를 전송했다. 어차피 이래저래 후회할 거면 행동으로 옮기고 나서 후회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 *

비가 제법 많이 내렸다. 차 앞 유리를 두들기는 빗방울이 조금 전보다는 적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와이퍼의 속도는 계속해서 빠르게 움직이는 상태였다.

“미치겠네.”

랑일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데 늦지 않게 갈 수 있을지 기준은 걱정이 앞섰다. 게다가 아침에 날아온 메시지에 기준은 조금 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생일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시간을 내 달라는 내용이 포함된 메시지가 희원에게서 온 것이다. 지금까지 약속은 기준이 잡았었고, 희원은 연락을 해도 랑일이 관련 내용이 전부였기에 사실 기준은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기준은 그전에는 생일이라는 것을 챙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랑일이를 키우면서 가족 간의 소소한 행사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랑일이가 있게 되면서 기준에게는 그동안 귀찮다는 이유로 간과했던 일들이 이제는 중요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가족의 생일이라든지, 가족 행사 모임이라든지, 명절이나 안부 같은 것들이 그러했다. 혼자일 때는 그런 것들이 당연하다는 듯 등한시되었으나 랑일이에게는 그 사소한 것들이 랑일이의 교육, 감성과 결부된다는 것들을 알게 되었다.

기준은 랑일이만큼은 여느 아이들과 똑같은 감성과 교육과정으로 살아가길 원했다. 어릴 때부터 외국에 나가 있었던 기준은 생일의 기쁨이나 명절 때 느끼는 가족끼리의 복잡한 느낌 등을 경험해 본 일이 드물었다. 그래서 기준은 랑일이만큼은 그런 소소한 행복과 기쁨을 느끼면서 자라길 바랐다.

원래 오늘은 기준의 생일이라는 이유로 본가에서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기준은 희원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그 약속을 취소했다. 아들자식 키워 봐야 다 소용없다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르겠으나 기준은 본가에 가기로 한 약속은 주말로 미루어 두고 희원과 저녁을 먹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날씨가 도와주지를 않는다. 게다가 서울로 진입하자마자 그를 맞이하는 건 교통 체증이었다. 앞에 줄지어 선 거북이 떼와 같은 차들을 보며 기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준은 우선 희원에게 조금 늦을 것 같다고 말해야겠다 싶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랑일이 아버님!

그토록 짜증이 치솟았는데 기준은 희원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 희원은 마치 자신의 전화를 기다린 양 기준이 전화를 하자마자 받았다. 미성의 목소리가 기준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죄송해요, 차가 너무 밀려서 일찍 간다고 해 놓고는 아직도 차 안이네요.”

―아니에요. 비 많이 와서 차 너무 막히죠? 랑일이랑 놀고 있으면 되니까 조심히 천천히 오세요.

희원의 말에 기준은 더욱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가서 희원과 랑일이를 만나고 싶을 뿐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얼른 갈게요.”

―네! 혹시 몇 시쯤 도착하실 것 같아요? 괜찮으시면 그 시간쯤으로 해서 미리 식당으로 가 있을게요. 먼저 주문해 놓고 있으면 와서 바로 드시면 되잖아요.

“비 많이 와서 제 차로 이동하려고 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기준은 시간이 조금 걸려도 둘을 데리고 이동하려고 했다. 비가 조금 전보다는 수그러들었다고 해도 여전히 걸어서 이동하기에는 불편했기 때문이다.

―오늘 종일 바쁘셔서 배고프시지 않아요? 시간 단축하는 겸 랑일이랑 천천히 가 있을게요. 가게는 유치원 근처라서 금세 가요.

랑일이는 비옷을 입히고 장화까지 신겨서 보낸 상태였다. 하지만 랑일이가 분명히 희원에게 안아 달라고 할 게 뻔했다. 랑일이는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도 하지 않았던 어리광을 요즘 희원에게 마음껏 부리곤 했다.

그걸 기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랑일이에게 선생님 힘들게 하면 안 된다고 당부를 하는데도 기준이 데리러 가면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랑일이는 희원에게 곧잘 안겨 있곤 했다.

“그럼 식당 위치 알려 주세요. 그쪽으로 갈게요. 비 너무 많이 오고 바람 많이 불어서 가기 힘들면 괜찮으니까 유치원에 계세요.”

―네, 그럴게요. 그럼 이따 뵈어요.

기준은 희원과 이야기하면 할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더 그를 만나고 싶었고 시간을 점점 더 많이 갖고 싶었다.

기준이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랑일이가 작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제 아빠를 반겼다.

“아빠!”

랑일이 옆에 앉은 희원도 웃으며 기준을 맞이했다. 기준이 미소 지으며 둘에게 다가갔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에요, 저희도 이제 막 와서 음식 시켰어요. 마음대로 시켰는데 괜찮으실까요?”

희원의 물음 끝에 조심스러운 감정이 묻어났다. 기준은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마음대로 시키라고 한 건 다른 이가 아닌 기준이었으니 말이다.

희원이 예약한 식당은 이탈리아 음식점이었다. 파스타와 뇨끼 등 이탈리아 가정식으로 이름이 난 곳이었다.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기준이 랑일이에게 말했다.

“랑일아, 아빠 옆으로 와. 선생님 식사하셔야지.”

기준이 랑일이에게 자리를 옮기라고 말했지만 랑일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희원의 팔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희원이 랑일이를 보며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괜찮아요, 아버님.”

“랑일이가 옆에 있으면 식사하기 불편하시잖아요.”

랑일이는 제 아빠의 말에 더욱 몸을 붙였다. 그러고는 제 아빠를 불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기준이 제 아들의 어리광과 고집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희원이 화제를 돌리듯 말했다.

“아버님, 혹시 뇨끼 좋아하세요? 랑일이가 감자 좋아해서 시켰는데 여기 꽤 맛있거든요.”

희원이 랑일이 접시에 뇨끼를 덜어 주며 기준을 바라봤다.

“랑일이가 저와 식성이 비슷해요.”

“아! 그럼 다행이다. 랑일이가 있어서 랑일이 입맛에 맞추다가 생각난 곳이 여기였거든요.”

옆에서 랑일이가 포크를 들고 음식을 열심히 입 안에 집어넣고 있었다. 볼이 불룩해진 모습을 보며 희원이 입가를 닦아 주며 웃었다. 기준은 둘의 모습에 마음이 따듯해지는 걸 느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아세요?”

“아… 사실 여기 대학교 때 몇 번 왔던 곳이에요. 친구들하고요.”

음식이 꽤 고급스럽고 맛있는 곳이었다. 가게의 규모도 꽤 크고 손님들도 많았다.

“데이트하러요?”

“아니요! 정말 친구들하고요.”

기준의 물음에 희원이 손사래를 치며 강하게 부정했다. 물론 그 친구들 무리에 옛 연인이 있기는 했지만 정말 단둘이 하는 데이트는 아니었다. 뭔가를 해명하려고 하면서도 옆에 있는 랑일이를 신경 쓰는 희원의 모습에 기준이 피식 웃었다.

기준은 랑일이만 챙기는 희원의 모습에 그의 접시에 음식을 가득 담아서 내밀었다.

“랑일이만 챙기지 마시고 좀 드세요.”

희원이 머쓱한지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뒤로도 희원은 랑일이를 살피느라 자신은 얼마 먹지 못했다. 그럴수록 기준의 미간은 좁아졌는데 그러다가도 희원과 눈이 마주치면 그려 낸 듯한 미소를 짓곤 했다.

셋이 어느 정도 식사를 끝마치고 난 뒤 희원이 계산서를 주섬주섬 챙기며 말했다.

“오늘 생일인 거 미리 알았으면 선물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오늘 저녁은 선생님께서 사시는 거 아닌가요?”

“맞아요! 제가 사는 거예요.”

희원이 기쁜 듯 말했다. 기준은 희원이 짓는 아이 같은 표정들을 볼 때마다 왠지 희원을 놀리고 싶었다.

“돈 쓰시는 게 뭐가 그리 좋으세요?”

“네? 아……! 아니 그게…….”

“장난입니다. 가시죠.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

기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한테 선물 드리는 게 좋아서…….”

하얀 얼굴이 복숭앗빛으로 물든 게 귀여웠다. 마음 같아서는 희원의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때 랑일이가 희원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선생님.”

“응?”

“쉬야. 쉬야 할래요.”

“화장실?”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이 기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계산하고 있을 테니 아버님께서 데리고 다녀오실래요?”

왠지 희원이 랑일이를 데리고 화장실에 다녀오면 그새 기준이 계산을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부탁한 건데 의외로 기준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랑일이였다.

“싫어. 선생님하고 갈래.”

랑일이가 기준을 보며 불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는 희원의 옷자락을 더욱 꼭 쥐는 거였다. 희원은 할 수 없다는 듯 기준을 보며 신신당부했다.

“절대 계산하시면 안 돼요. 제가 얼른 랑일이 데리고 화장실 다녀올게요.”

기준은 손을 꼭 잡고 화장실로 향하는 희원과 랑일이를 보며 웃었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지갑을 꺼냈다.

계산을 끝낸 기준이 먼저 밖으로 나왔다. 비를 퍼붓던 하늘이 어느새 고요해진 상태였다. 기준은 하늘을 바라보며 즐거운 생일날을 맞이한 것에 웃었다. 이렇게 행복한 생일날이 있었던가 싶었다.

그나저나 꽤나 유명한 집인지 여전히 손님들로 북적거리고 주차장에 들고 나는 차도 꽤 많았다. 기준은 사람들과 차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희원과 랑일이가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랑일이가 희원의 품에 꼭 안겨서 웃으며 제 아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기준을 발견한 희원도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희원?”

가게로 향하던 어느 누군가 희원의 이름을 불렀다.

랑일이를 품에 안고서 기준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희원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기준도 함께 목소리의 주인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곳에는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이희원, 이희원 맞지?”

늘 방싯거리던 희원의 얼굴이 무표정으로 싹 바뀌었다. 희원은 그대로 아무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려 기준에게 향했다. 그러고는 기준에게 가려고 발을 내디뎠는데 발걸음이 중간에 툭 가로막혔다. 희원의 반듯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희원. 오랜만이네.”

희원은 대꾸하지 않고 자신을 가로막은 사람을 비껴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남자가 희원의 팔을 잡았다. 동시에 기준의 표정이 확 굳었다.

“너 설마 결혼했냐?”

남자가 랑일이를 안고 있는 희원을 위아래로 훑었다. 희원이 더러운 게 묻었다는 듯 잡힌 팔을 신경질적으로 털어 냈다. 랑일이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희원의 목을 더 끌어안고는 얼굴을 푹 묻었다. 랑일이는 차마 희원을 부르지는 못하고 희원의 머리를 매만지며 얼굴을 비볐다.

“괜찮아, 랑일아. 비켜 줄래?”

더 이상 모른 척하기에는 틀렸다는 것을 안 희원이 먼저 랑일이를 달랜 뒤 차갑게 말했다. 기준과 랑일이와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바쁜 기준이 내준 시간을 일분일초라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봤는데 너무 쌀쌀맞네. 잘 지냈어? 그런 것 같네. 결혼도 하고. 그때 페로몬 억제제 먹은 거 맞나 보네. 애까지 낳은 거 보면.”

희원이 이를 으득 물었다.

한때는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게 혼자만의 사랑이었고 상대는 그저 욕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희원은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사람이었기에 그 사랑을 금세 잊어버리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없었던 일로 치부하기에는 함께했던 시간이 있었고 추억들이 있었다.

헤어지고 난 뒤 상대는 또 다른 오메가를 만났다고 했다. 상대방의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희원은 자신의 가슴이 더 이상 그런 이야기들에 흔들리지 않길, 모진 가슴이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희원이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한숨을 내쉬고는 비켜서 기준에게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기준이 먼저였다.

“누구예요?”

“아니에요, 아무것도.”

희원이 얼굴을 굳힌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희원의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알파는 기준을 의기양양한 얼굴로 쳐다봤다. 기준이 꽤나 유명한 사람이지만 알파는 설마 눈앞의 이 남자가 그 이기준 이사일 거라는 사실을 상상도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빠!”

랑일이가 성큼 다가온 기준을 보고 제 아빠를 불렀다. 그러면서도 희원의 목을 꼭 끌어안고는 그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희원을 붙잡고 있던 알파의 얼굴이 순간 굳는 걸 기준은 알아챘다. 기준이 피식 웃었다.

‘같잖은 새끼.’

알파는 겁도 없이 자신이 알파임을 으스대듯 페로몬을 내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걸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희원이 아닌 기준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알파는 아마 열성인 듯했다. 페로몬이 강하지 않았지만 상대가 극우성이나 우성이면 예민하게 느낄 수 있을 터였다. 아마 그걸 알고 페로몬을 내보낸 듯했다.

희원은 타인의 페로몬을 맡을 수는 있긴 했지만 그게 같이 서 있는 극우성 알파인 기준만큼 예민한 건 아니었다. 지금 페로몬에 문제가 없다면 우성인 희원도 그 페로몬에 금세 예민하게 반응할 거였다.

이 찌질한 새끼는 그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마도 희원은 대학 때 사귀는 동안 그의 미세한 페로몬에 반응하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희원 씨, 랑일이 데리고 차에 가 있어요.”

“네?”

처음으로 불린 자신의 이름에 희원이 당황한 얼굴로 기준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눈앞에 서 있는 전 알파를 보고는 기준을 다시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괜찮아요. 어서, 차에 가 있어요.”

조금 더 진해지는 페로몬에 랑일이도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는 희원이 조금이라도 반응하면 안 된다는 거였다. 그게 어떤 방향이든지 말이다.

“같이 가요.”

“1분, 아니 30초도 안 걸려요. 희원 씨, 랑일이랑 차에 먼저 가 있어요, 어서요.”

기준이 다정하게 웃으며 랑일이의 머리를 부스스 흩트리고 그런 뒤 희원의 머리도 매만져 주었다. 희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기준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며 어서 가 있으라고 눈짓했다.

분명 눈웃음을 짓고 있는데 눈에 기분 나쁜 감정이 배어 있어서 희원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기준이 하라는 대로 했다.

희원은 차로 향하면서 기준에게 다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옛 알파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희원이 랑일이를 고쳐 안으며 엉덩이를 도닥여 주었다. 혹시라도 이상한 분위기에 랑일이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말이다.

기준은 둘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 그 둘이 차 안에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페로몬을 풀었다. 극우성 알파의 짙은 페로몬이 눈앞의 같잖은 알파의 페로몬을 짓이겼다.

“같잖은 새끼가 어디서 페로몬을 풀어? 페로몬 감추는 거 교육 못 받았나 보지?”

기준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조용히 내뱉었다.

“으윽, 지금 뭐 하는……!”

“너야말로 뭐 하는 새끼야. 희원 씨가 너랑 함께한 그 과거, 난 생각만으로도 짜증 나. 사랑만 받아도 모자랄 사람한테 어딜 감히! 경고하는데 동문회니 뭐니, 행여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아는 척할 생각 마. 찌질한 새끼가 우리 희원 씨한테 말 거는 거 상당히 불쾌하니까.”

기준은 페로몬을 감출 생각이 없다는 듯 풀어서 자근자근 씹었다. 희원을 페로몬으로 누르려던 알파는 도리어 기준의 페로몬에 바들바들 떨었다. 알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 기준이 가소롭다는 듯 웃고는 등을 돌렸다.

페로몬을 거둔 기준이 혹시라도 희원에게 영향을 끼칠까 봐 조금 시간을 두고 차 문을 열었다.

“아빠!”

기준이 차에 타자 희원과 이야기를 하던 중인 랑일이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희원이 기준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괜찮으세요?”

“뭐가요?”

“혹시 그 사람하고 무슨 일이라도…….”

희원의 말에 기준이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설마 지금 제가 그 사람을 어떻게 하기라도 했을까 봐…….”

“아니요! 그 사람이 행여 아버님께 피해라도 끼쳤을까 봐 그래요.”

“그래서 내가 그 사람한테 화라도 냈을까 봐 걱정됩니까?”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아빠! 집에 언제 가?”

“그래, 랑일아, 가야지. 가자.”

둘의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니 랑일이가 제 아빠를 보며 재촉했다. 기준은 희원이 그 알파 놈을 언급하는 것 자체로도 불쾌하고 화가 났다.

랑일이가 있어서 더 이상은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된 둘은 침묵 속에서 희원네 집으로 향했다. 셋이 맛있는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낼 때는 참 좋았는데……. 희원은 불쑥 나타난 제 과거가 그리 미울 수가 없었다.

작게 흔들리는 차, 게다가 배부르고 등까지 따스하니 랑일이는 금세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픽 쓰러져 잠에 들었다. 희원은 왠지 마음이 불편해서 편안하게 앉지도 못하고 등을 꼿꼿이 세운 채 기준의 눈치를 살폈다.

“저기, 혹시 화나셨어요?”

희원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기준이 흘긋 거울로 뒷좌석을 보고는 말을 골랐다. 기준도 마음이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희원의 옛 알파의 얼굴이 궁금하기는 했다. 그렇게 찌질한 알파 놈이 어떤 면상을 가지고 있나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만나 보니 더 최악이었다. 도대체 어린 시절의 희원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놈을 만난 건지 기가 막혔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기준은 천천히 핸들을 돌리며 무심한 어투로 물었다. 희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아무 관계도 없는데 그런 소리를 듣게 만들었잖아요.”

기준이 한숨을 흘렸다. 이건 이렇게 운전하면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얼굴 보며, 눈을 보며 이야기하고 싶었다. 기준은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조금 이따가 이야기하죠. 생각을 좀 정리해요, 우리.”

“네…….”

희원이 고개를 들어 기준을 바라보다가 작게 대답했다.

희원은 기준이 기분 상해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도 남았다. 그저 학부모와 교사 사이에 밥 한 끼 먹은 것뿐인데 오해를 받았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상대의 옛 알파에게 배우자가 아니냐는 말이나 듣게 만들었다.

게다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쪽같은 아들까지 언급되었다. 희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큰 결례를 범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희원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기준은 랑일이가 계속해서 자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희원은 드디어 올 게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와서 좀 앉으실래요? 얼굴 보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는데요.”

랑일이 때문에 뒷좌석에 앉아 있었던 희원이 기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앞좌석으로 다시 탔다. 희원은 차마 기준을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입을 꾹 닫고 고개를 푹 숙였다.

“뭐 죄졌어요? 왜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어요?”

“죄송해요. 충분히 기분 나쁠 만해요. 뭐라고 하셔도 되고요, 이제 더는 이렇게 사적으로 만나지 말자고 하셔도 돼요. 화내셔도 괜찮아요.”

학부모들은 그랬다. 자신에게 피해가 가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상관없어했다. 그러다가도 자신의 아이가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으면 그것에 대해서는 가차 없었다. 그런 학부모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고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아이의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학부모들은 더욱 민감했다. 희원은 유치원에서 가장 어린 아이들만 데리고 교사 생활을 한 지 벌써 8년이었다.

희원은 기준에게 있어 랑일이가 어떤 아들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랑일이는 기준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 알파가 랑일이를 훑어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네 아이냐고 물었으니, 아마 기준의 분노는 어마어마할 테였다.

“그 알파를 한번 만나 보고 싶긴 했어요. 얼마나 찌질한 새끼인지 말이죠.”

“네?”

기준의 말에 그제야 희원이 고개를 들고 기준을 바라봤다. 희원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져 있었다.

“제가 화가 나는 건, 어떻게 그런 새끼를 만났어요? 와, 진짜 너무 보는 눈 없었네.”

“네? 그게 무슨…….”

“별것도 아닌 게 어디서 팔을 만지고 그따위로 얘기를 해요?”

“죄송해요. 랑일이랑 아버님이 그런 말 듣게 만들어서.”

“그걸 왜 사과를 해요? 제가 지금 그걸로 뭐라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희원은 기준이 하는 소리가 정확하게 뭔지 모르겠어서 눈만 깜박였다.

“페로몬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리 들으면 화 안 나요? 왜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어요?”

“그럼 거기서 어떻게…….”

“그래, 거기서 또 할 말이 없긴 해.”

기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답답했다. 기준은 희원이 그 같잖은 새끼한테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는 게 너무 짜증이 났다.

기준은 거기서 희원이 ‘그래, 나 지금은 페로몬 괜찮아. 근데 만약 페로몬이 이상하다고 해도 난 그때와 상관없이 지금은 사랑도 하고 잘 지내고 있어.’ 같은 말을 당당하게 했으면 속이 시원했겠다 싶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못하는 희원이 그렇게 말하려면 그게 사실이어야 했다.

희원이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는 말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불쾌하셨죠.”

기준이 희원을 바라봤다.

“희원 씨.”

“네?”

희원이 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번째다. 자신의 이름을 기준이 부른 게 말이다. 희원은 왜 자신에게 ‘선생님’이 아닌 ‘희원 씨’라고 부르는지 묻지도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기준이 희원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랑 연애할래요?”

희원의 어여쁜 입술이 퐁 하고 벌어졌다. 놀란 눈이 기준을 쳐다봤다.

“갑작스러우시겠지만 저는 지금 충동적으로 이러는 게 아닙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기준의 마음은 어느새 희원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언제나 키를 낮추고 눈높이를 맞추어 진심을 다해 말하는 모습이라든지, 몸이 피곤해도 전혀 귀찮아하는 내색 없이 늘 똑같은, 사랑 가득한 눈을 보여 준다든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희원은 기준이 말할 때 끝까지 들어 주고 공감해 주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그건 기준의 탓이 아니라고 온 마음을 다해 표현해 주기도 했다.

기준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여 얼마나 마음을 다잡고 다잡았는지 모른다. 기준으로서는 희원에게 연인이 되어 달라고 말하는 게 결코 쉬울 수 없었다.

기준은 얼굴이 알려진 인물이었다. 인터넷 포털에 ‘이기준’ 이름 석 자를 치기만 하면 여기저기 언론에 노출된 사진들이 뜨곤 했다.

물론 기준이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사람들은 설마 그 이기준이겠어 싶어 신경 쓰는 듯 신경 쓰지 않지만 어쨌든 일반인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알려진 인물인 기준과 함께 다니는 건 일반인으로는 때로는 귀찮을 수도 있고 때로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어디 그뿐이랴. 기준은 이혼남에 애까지 있는 싱글 대디이다. 그런 기준이 희원에게 이런 말을 꺼내기까지는 수백 번의 고심이 있었다.

기준은 자신의 마음을 희원에게 알리는 게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희원을 만날 때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볼 때마다 그 욕심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기준은 누르고 또 눌렀다. 하지만 오늘 보니 더 이상은 누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아닌 다른 알파 놈이 희원의 팔을 잡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희원이 그런 빈정거리는 말에 아무것도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만 꾹 물고 있는 것에도 마음이 쓰였다.

“아버님이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아요. 하지만 그래도 조금 갑작스러워서…….”

“압니다. 희원 씨 입장에서는 갑작스럽겠지요.”

그런데 희원은 아까부터 기준이 희원 씨라고 자신을 부르는 게 싫지는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가슴 한쪽이 간지러운 것 같았다.

“지금 당장 대답하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충분히 생각해 보고 마음을 결정하셔도 됩니다. 사실 아이 딸린 이혼남이 이런 말을 해도 될지에 대해 고민하고 또 생각해 봤습니다.”

“아이 딸린 이혼남이 뭐 죄도 아닌데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마음 아파요.”

“이렇게 착하기만 해서 어쩌려고 그러세요.”

기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에도 그 알파 놈한테 나쁜 말 한마디 하지 않는 희원을 보며 기준은 오히려 자신이 화가 치밀었다.

게다가 그 알파 놈은 페로몬까지 방출했다. 그게 얼마나 큰 실례인지 모르지 않을 거였다. 그러면서도 마치 희원이 정말 페로몬 문제가 있나 없나를 시험하듯이 그런 행동을 취했다.

“저 그렇게 안 착한데요.”

“꼭 착한 사람들이 그렇게 대답하더라고요. 어쨌든 곱씹듯 고민해 보고 난 뒤 제 마음을 보인 겁니다.”

“알아요. 신중하신 거.”

어느 누가 자신의 마음을 가볍게 내뱉을까? 희원은 오랜 기간을 기준과 알고 지낸 것은 아니지만 그가 다정하고 세심하며 속이 깊은 사람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저는 괜찮으니 충분히 생각하고 대답해 주세요.”

“네, 그럴게요. 저, 그런데요. 그 알파 때문에 화나신 거 아니죠? 거기서 걔랑 마주칠 줄 몰랐어요. 제가 생일을 망친 건 아닌지 걱정돼요.”

희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식당이 데이트 코스는 아니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맞아요. 그래서 거기서 마주쳐서 당황했어요.”

“우연히 만날 수도 있죠. 그 우연이라는 게 오늘은 참 화가 나긴 하지만 그건 희원 씨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잘못도 안 했으면 왜 자꾸 사과하세요? 정말 뭔가 잘못한 거예요?”

“아니요!”

희원이 펄쩍 뛰었다.

“정 미안하시면 생일 선물 하나 주세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참으로 귀여워서 기준은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저는 앞으로 단둘이 있을 때는 희원 씨라고 부를 겁니다.”

“네?”

아직은 면역이 없었다. 기준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희원은 깜짝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목소리로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들을 때면 가슴이 간질간질, 심장이 콩콩콩콩 빠르게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러다가는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정도는 생일 선물로 해 줄 수 있잖아요.”

“아니, 그래도 너무 갑자기…….”

희원이 망설였지만 기준은 막무가내였다.

“대답해 봐요.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죠?”

“네에…….”

희원이 작게 대답했다. 기준의 입꼬리가 씨익 예쁘게 올라갔다.

“고마워요, 생일 선물.”

“아니에요, 해 드린 것도 없는데…….”

“이걸로 충분해요. 희원 씨. 그럼 늦었는데 들어가서 쉬세요.”

“아, 네. 그럴게요. 오늘…….”

희원은 미안하다고 말하려다 입술을 꾹 물고는 말을 삼켰다.

“오늘 생일 축하드려요.”

“네, 고맙습니다.”

희원은 미안하다는 말 대신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는 복숭앗빛으로 물든 얼굴을 숨기듯 얼른 차에서 내렸다. 기준이 창문을 내리고는 손을 흔들자 희원도 웃으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 * *

방문을 콕 닫고는 문에 기대섰다. 희원은 왼쪽 가슴을 손바닥으로 누르고는 숨을 내쉬었다. 손바닥에 빠르게 콩콩거리는 심장의 박동이 느껴졌다.

“어떡해.”

‘연애’를 하자고 했다. 별 볼 일 없는 자신에게 말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집안도 평범했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었다. 우성 오메가이긴 하지만 페로몬에 문제도 있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아이들 보는 것밖에 없다.

기준의 말은 갑작스러웠다. 그래서 놀란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기준은 제 사정을 모조리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부족한 면까지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과 연애하고 싶다고 했다.

“뭐라고 답하지?”

아직 희원은 기준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알지 못했다. 기준과 함께 있으면 좋기는 했다. 그는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속마음을 훌훌 내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게 자신의 말을 잘 들어 줘서 고마운 마음인 건지 아니면 다른 어떤 특별한 마음인지 희원은 아직 잘 모르겠는 거다.

“후유. 정말 모르겠다.”

희원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숨을 크게 내쉬며 진정해 보려고 했지만 왜 이렇게 가슴이 쿵쿵 뛰는지 알 수 없었다.

‘저랑 연애할래요?’

자꾸 그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희원은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머릿속을 맴도는 그의 목소리까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좋다고 할 걸 그랬나?”

하지만 제 마음도 모르고 덜컥 승낙했다가 나중에 그게 아니었네 어쨌네 하면 그게 더 곤란했다. 희원은 기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희원은 옆으로 돌아누웠다. 베개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눈앞에 다정하게 웃는 기준의 얼굴이 선했다. 길게 빠진 눈꼬리와 쌍꺼풀 없지만 커다란 눈. 언뜻 보면 차가운 눈동자.

하지만 그 눈빛이 얼마나 따듯한지 희원은 안다. 검은색 눈으로 저를 바라볼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놓이고 안정되었는지 모른다. 마치 녹음이 짙은 숲속에 들어와 하늘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아, 어렵다.”

든든한 그와 연애를 하면 좋을까? 당연히 좋을 것이다. 하지만 망설여진다. 유치원 교사가 학부모와 연애를 하는 게 괜찮을까? 사람들이 손가락질하지 않을까?

그는 재벌가 자제다. 기업의 차기 주인이다. 그런 그와 연애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고운 시선으로 봐 줄까? 무슨 꿍꿍이가 있어 꾀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희원은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현실이 훅 하고 치고 들어왔다. 희원은 현실에서 도피하듯 눈을 꾹 감았다.

결국 뒤척이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희원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푸석해 보였다. 연애. 그게 뭐라고. 생전 연애 한 번 해 보지 못한 사람처럼.

희원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출근을 했다.

“선생님!”

아이들의 목소리에 희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이들과 같이 인사를 하고 다독여 주고 학부모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때 멀리서 익숙한 부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랑일이가 폴짝폴짝 뛰며 희원에게 두 손을 뻗었다. 희원이 웃으며 랑일이를 들어 안았다. 자연스럽게 작은 몸뚱이가 폭 하고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도 눈부시게 멋진 기준이 환하게 웃었다. 누구는 눈앞의 누구 씨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기준은 어째 어제보다 더 빛이 났다.

“안녕하세요.”

“잠 못 주무셨어요? 눈이 살짝 충혈되었는데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죠?”

희원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밤새 아침에 기준을 어떤 얼굴로 맞이해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그를 보자마자 마음만큼 얼굴도 스르르 풀렸다. 그럼에도 푸석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 게 부끄러웠다.

“한약은 잘 드시고 있는 거죠?”

“네.”

“선생님 들어가요. 아빠 안녕.”

좀 더 이야기를 하려고 했더니 랑일이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들어가자고 졸랐다. 기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제 아들을 흘깃 쳐다보다 마주 웃어 버렸다. 랑일이와 똑 닮은 소년 같은 모습에 희원은 가슴이 뛰었다.

“천천히 생각해도 돼요. 하지만 이왕 천천히 대답해 줄 거 긍정적인 대답이었으면 좋겠어요.”

기준이 희원에게 한 발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희원의 볼이 발그스름해졌다. 희원이 부끄러워 유치원으로 뛰어 들어가려고 하는데 기준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이렇든 저렇든 예쁘네요.”

그 순간 희원은 생각했다. 저 사람에게 벗어날 수 없겠구나. 자신은 단단히 코가 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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