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서로에게 건네는 햇살 같은 위로
아침부터 햇빛이 눈부시게 내리쬐며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와 초록빛을 머금은 나뭇잎들을 흔들었다. 기준은 아침부터 드레스 룸에 틀어박혀 거울을 떠날 줄 몰랐다.
“아빠!”
주말이라고 느지막이 일어난 랑일이가 넓은 집을 돌아다니며 기준을 불렀다. 기준은 고개를 내밀며 외쳤다.
“랑일아, 아빠 여기 있어.”
랑일이가 주방으로 향하다가 방향을 틀어서 드레스 룸으로 달려왔다.
“아빠!”
“잘 잤어?”
기준은 제 다리에 철썩 달라붙는 아들을 번쩍 들어 올렸다. 랑일이가 기준의 목에 팔을 감고는 어리광을 부렸다.
아주 어렸을 적에도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지는 않았는데 랑일이는 그동안 하지 않았던 행동을 모조리 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런 것을 받아 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아빠, 어디 가?”
랑일이가 기준에게서 조금 몸을 떼며 제 아빠를 바라봤다.
“아빠가 어제 말했잖아. 아빠 점심에 일 때문에 잠시 나가야 하니까, 랑일이는 설이네서 밥 먹고 설이랑 놀고 있으라고.”
랑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준은 평소 정장 차림이 대부분인데 편해 보이는 셔츠에 가벼운 슬랙스를 입었기 때문이다.
랑일이가 왜 그런 옷을 입고 회사를 가느냐고 묻는 눈빛이기에 기준은 애써 그 눈을 피했다. 혹시라도 희원을 만나러 가는 것을 알게 되면 따라가겠다고 할 게 안 봐도 뻔했다.
“아침 먹고 설이네 갈까?”
“응.”
기준은 랑일이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서둘러 드레스 룸을 빠져나왔다.
* * *
차에서 내린 랑일이는 허겁지겁 대문 안으로 들어가 마당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설이에게 달려갔다.
“설아!”
“아이고, 우리 왕자님 왔어? 인사해야지.”
해준이 번쩍 들어서 안으니 랑일이가 웃으며 목을 끌어안았다.
“작은아빠, 안녕하세요.”
해준이 랑일이의 엉덩이를 두어 번 토닥이고는 바닥에 내려 주니 랑일이는 다시 설이를 부르며 달려갔다.
“잘 부탁해. 아침 좀 늦게 먹어서 점심은 천천히 먹여도 돼. 루세 씨, 잘 부탁해요.”
기준은 신나게 흙을 파고 있는 두 꼬맹이를 보며 해준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말씀 나누시고 천천히 오셔도 돼요. 잘 먹이고 잘 놀게 할 테니까요.”
“랑일이가 루세 씨가 해 주는 음식 먹는다고 엄청 기대하고 왔어요.”
제 배우자를 칭찬하니 옆에 선 해준이 팔불출처럼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고 웃었다. 기준은 제 동생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제 배우자에게 잘하는 게 나쁘지 않으니 그 꼴을 보며 기준은 해준을 퉁바리 놓지 않았다.
“근데 형, 데이트 가냐?”
해준의 말에 기준이 미간을 좁혔다.
“상담이라고 했잖아.”
“완전 데이트 복장인데? 만날 정장만 입는 사람이 정장 아닌 거에 뭐 이렇게 힘을 주고 나왔어? 설마 옷 샀냐?”
“뭔 소리야. 주말에도 내가 정장 입고 나가야겠냐?”
기준이 제 동생에게 무슨 헛소리냐는 듯 나무랐지만 그런 거에 기가 죽을 이해준이 아니었다. 이씨 집안에서 가장 제멋대로 살고 있는 게 이해준이었기 때문이다.
“본가 올 때도 정장 입고 오는 인간이 작은형이거든. 나는 형 옷이 정장밖에 없는 줄 알았잖아.”
해준이 얄밉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기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제 동생을 노려봤다.
“늦어. 얼른 가.”
“암튼 간다. 잘 부탁해. 루세 씨 잘 부탁해요. 아들! 아빠 다녀올게!”
“응, 아빠 안녕!”
랑일이가 잔뜩 흙이 묻은 손을 바지에 쓱쓱 닦고는 손을 흔들었다. 해준은 여전히 기준을 놀리듯 웃다가 결국 손을 흔들어 주었다.
차에 시동을 건 기준은 시간을 확인하고 조금 속도를 높였다. 한낮의 햇볕은 다소 뜨거웠다. 그런 햇볕 아래에 희원을 서 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희원의 집 앞이라고 해도 말이다.
기준은 희원과 어디에서 만날까 고민하다가 직접 데리러 가서 픽업하기로 했다. 희원은 번거로우니 주소를 알려 주면 찾아가겠다고 했지만 기준은 끝까지 알려 주지 않았다.
저 멀리 보이는 집 앞에 청바지에 오버 핏 셔츠를 입은 낭창한 몸이 바람을 타듯 하늘하늘 서 있는 게 보였다. 기준이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살짝 확인하고는 천천히 다가가 차를 세웠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조막만 한 새하얀 얼굴이 여느 때보다 더 싱그러웠다. 기준은 희원이 보면 볼수록 봄 햇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어여쁘고 아름다운 사람, 보면 볼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었다.
“어서 타세요.”
“네, 감사합니다.”
희원이 옆자리에 올라타고 안전벨트를 맸다.
“왜 나와 계셨어요. 날씨 더운데. 제가 전화하면 나오시면 되지.”
“어떻게 그래요. 그래도 나와서 기다리고 있어야지요.”
희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갈색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염색하셨나 봐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왜 몰라요? 딱 봐도 티 나는데. 잘 어울리시네요.”
희원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은은한 갈색이 되어 있었다. 작은 강아지같이 귀엽다고 기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더 어려 보이기도 했지만 그 말을 굳이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둘은 30분 정도를 달려 조용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미리 예약을 해 둔 룸에 마주 앉았다.
기준이 알아서 음식을 시키고 조금 뒤에 전채 요리부터 차례로 나오기 시작했다. 스테이크가 나왔을 때 기준은 샐러드를 먹고 있는 희원을 힐긋 보고는 말없이 고기를 썰었다. 그러고는 희원이 자기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썰려고 나이프를 들자 말했다.
“선생님, 이걸로 드세요.”
“네? 아뇨, 제가 해도…….”
마다하는 희원을 저지하며 기준은 아예 손을 뻗어 접시를 바꾸어 갔다. 희원은 기준의 상냥함에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둘이 반쯤 음식을 먹었을 때였다.
“그날 동물원에 가서 다른 가족들 보고 랑일이가 시무룩해하던가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포크를 들고 멈칫했다. 희원이 들고 있던 포크를 자리에 놓자 기준이 고개를 저었다.
“드세요. 식으면 고기 맛없어요. 어떤 내용의 이야기든 괜찮으니 드시면서 편하게 말씀하세요.”
희원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실 그날 랑일이가 왜 그렇게 우울한지에 대해서만 군더더기 없이 사실만 이야기하고 말려고 했다. 아빠인 기준은 아들이 왜 그런 기분인지를 알아야 하니 말이다. 이렇게까지 상황을 키울 일은 아니었기에 사실 희원은 기준이 만나자고 했을 때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기준의 말대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랑일이 앞에서 이야기하기에는 곤란했다. 그래서 덜컥 약속을 잡았지만 이렇게 스테이크를 앞에 두고 거창하게 말하기에는 조금 뭐했다.
“그날 처음에는 신나서 들썩들썩했는데 아무래도 눈에 가족들과 즐거워하는 아이들이 자꾸만 보이니까요, 점점 어깨가 처지고 나중에는 랑일이 기분이 좀 그랬어요. 게다가 유치원 아이들이 여기저기 지나가면서 ‘나 엄마 아빠랑 여기 온 적 있어.’ 이런 이야기를 하니 엄마라는 말이 자꾸만 맴돌았나 봐요. 자고 깨서도 저한테 안겨서 엄마라는 단어를 곱씹듯 말하는데 그날은 저도 좀 마음이 그랬어요.”
희원은 말을 쏟아 내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떤 표정을 해야 할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도대체 그동안의 경험은 죄다 어디 갔는지, 이론으로 배웠던 학식들은 왜 생각이 나지 않는지,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희원은 입술만 달싹였다.
“선생님이 왜 그런 표정을 지으세요? 그냥 사실인데.”
“네?”
“지금 아무것도 못 했다는 표정 짓고 계시잖아요. 그러지 마세요.”
희원이 고개를 들고 기준을 바라봤다.
“어른들의 이기심 때문에 아이가 피해를 입은 경우죠.”
기준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욕심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이 삼 형제 중 둘째인 저고요.”
희원은 들고 있던 포크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허리를 펴고 앉았다. 기준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먹으라고 해 봐야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아서 기준은 계속 말을 이었다. 스테이크가 식어서 맛이 없다면 다른 것을 더 사 주면 되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제가 기업의 후계자인 줄 알죠. 물론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남이 기업을 잇는 것을 보고 저와 제 형이 배다른 형제인 줄 압니다만, 애석하게도 저희 아버지는 팔불출이라 어머니밖에 모르시죠.”
그러고 보니 팔불출은 이씨 집안의 내력인 듯했다. 물론 형은 아직 제 짝과 아이가 없어서 어떨지 모르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당신과 가장 많이 닮은 저에게 놀을 주기로 마음먹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자식들이 걸리지 않는 건 아니었죠. 그래서 제가 제안을 했습니다. 일종의 거래를 제시한 거죠.”
희원은 갑자기 목이 말랐다. 그래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꼴깍 하고 물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저는 가정을 꾸릴 마음이 없었습니다. 일에 미쳐 있었던 때기도 했고요. 계속해서 들리는 결혼 압박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지요. 그래서 아버지께 정략결혼하고 이혼하는 조건으로 그룹 합병을 제시했죠. 합병한 그룹을 다른 형제들에게 맡기고 저는 본사인 놀만 경영하는 것으로요. 그리고 더 이상 결혼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봤죠.”
계속되는 기준의 이야기에 희원은 이제 눈도 깜빡하지 못했다.
“그런데 사람이 참으로 어리석어요. 정략결혼을 하고 1년 뒤에 이혼을 하기로 합의를 한 뒤 결혼식을 올렸죠. 그렇게 계획대로 되고 끝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랑일이가 태어난 거예요.”
“저, 아버님.”
“네, 말씀하세요.”
희원은 입술을 꽉 물었다. 뭐를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말을 고르는 중이었다.
“랑일이를 낳고 이혼하신 거잖아요.”
“그랬죠. 언론에서 발표한 건 성격 차이였고요.”
“아이를 낳는 게 쉬운 건 아니잖아요. 이혼 안 하실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요?”
기준이 쓰게 웃었다.
“상대는 다 쓰러져 가는 기업을 비싼 가격으로 파는 게 우선이었어요. 그래서 놀에서 정략결혼 이야기를 하고 조건을 제시했을 때 흔쾌히 받아들였죠. 쇼윈도 부부 행세도 말이죠. 하지만 사실 상대는…….”
기준은 랑일이 엄마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거기도 가정을 꾸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어요. 아마 그 기사 기억하실 거예요. 빙부상.”
희원은 기억을 더듬다가 그게 무언지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죠. 이미 상대의 기업은 회장의 건강 문제로 도산 위기였어요. 겉으로 보이는 기업 이미지는 좋았지만 말이죠. 그리고 애석하게도 기업을 이을 사람이 없었고요. 그 오메가는 기업을 이을 마음이 애초에 없었어요. 외국에 나가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죠. 자신이 나가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게 거처를 마련해 주는 게 이혼의 조건이었어요. 랑일이는 그런 어른들의 이기심에 희생된 아이인 거죠.”
기준의 표정이 쓸쓸했다.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처음이 그렇다고 해도, 지금 아버님은 랑일이에게 좋은 아빠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엄마의 빈자리를 제가 채워 주지는 못하죠.”
기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이 다 식어 버렸네요. 나가죠. 다른 데 가실래요?”
희원이 기준을 따라 일어났다. 기준이 먼저 등을 보였다. 그때였다. 희원이 기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차가운 손가락이 기준의 손을 스쳤다.
“자책하지 마세요. 더 많이 사랑해 주면 돼요.”
희원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기준이 가만 서 있다가 희원의 손을 한 번 꾹 잡고는 놓았다.
밖으로 나온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직 밖은 햇빛이 한창이었다.
“걷기에는 조금 날씨가 덥네요.”
희원은 기준의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자신도 우울해졌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약속에 응한 게 아니었다. 그저 랑일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교사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 할 거라고 말해 주고 싶어서 기준을 만난 거였지 기준이 죄책감을 가지라고 응한 자리가 아니란 말이다.
희원은 괜한 짓을 했나 싶었다. 남의 가족사에 끼어들어서 말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를 들추어낸 게 아닌지, 그래서 그를 불쾌하게 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자신의 오지랖이 이럴 때는 원망스러웠다.
희원은 기준을 따라 주차장으로 와서 차 옆에 섰다.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책망하고 있을 때 기준이 말했다.
“시원한 커피, 아니 맥주 한잔하실래요?”
“네?”
혼자서 굴을 파며 반성의 시간을 갖고 있던 희원이 기준의 물음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괜찮으시면 맥주 한잔 어떠시냐고 물었습니다.”
“맥주요? 차는요?”
희원이 잘빠진 검은색 세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기준이 피식 웃었다.
“대리 기사 부르면 되죠. 술, 드실 줄 아세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타세요. 잘 가는 곳 있으니까요.”
하지만 희원은 섣불리 타지 못했다. 기준이 망설이는 희원을 보며 물었다.
“혹시 술 잘 못하셔서 그러시나요? 억지로 드실 필요는 없는데 그럼 커피 마실까요?”
“아뇨, 그게 아니라 낮술, 괜찮으신가 해서요. 지금 시간에 여는 가게도 잘 없을 것 같고…….”
기준이 웃었다.
“설마 제가 맥주 한잔할 수 있는 가게도 모른 채 무작정 마시자고 할까 봐요?”
“아, 그런 뜻이 아니라… 죄송해요.”
희원은 여태 기준을 봐 왔으면서도 그런 질문을 던진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희원은 아이들을 돌보는 교사로서 늘 긴장하며 책임감과 보육과 교육이라는 단어들을 머릿속에 넣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일을 자신이 알아보고 준비하는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건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마음을 놓고 좀 편안해져도 될 자리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곤 했다.
“뭘 사과를 하고 그러세요. 저한테는 미안하다, 고맙다 이런 말씀 안 하셔도 돼요. 그렇게 따지면 주말에 쉬시지도 못하게 하고는 상담하자며 불러낸 제가 더 죄송하고 감사하지요.”
차에 탄 기준은 자연스럽게 차를 돌려서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조금 복잡한 시내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손이 왜 이렇게 차요?”
“원래 손발이 차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혈액순환 이런 게 문제인가. 잘 아는 한의원 있는데 다음에 같이 가요.”
“아니에요. 한의원 이런 데 몇 번 가긴 했는데, 별로 소용없었어요.”
희원이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제가 아는 데는 다를지도 모르잖아요. 다음에 시간 내주세요. 아셨죠?”
“저 정말 괜찮은데요.”
“마음 같아서는 알아서 약 지어 오고 싶은데 가서 맥 짚어 보고 짓는 게 더 정확하잖아요. 그래서 같이 가자고 하는 거예요.”
“저 진짜 괜찮아요.”
신호에 걸리자 기준이 희원을 쳐다봤다. 희원은 제가 뭘 잘못했나 싶어서 눈을 깜박였다.
“원래 고집이 좀 센 편이죠?”
“네?”
“저도 고집 센데. 랑일이 보셨죠? 랑일이 한번 고집부리면 아무도 못 꺾어요. 그 피가 어디서 왔겠어요?”
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랑일이가 그렇게 고집을 부린 적이 있었나, 그동안의 시간을 되짚어 봤지만 잘 모르겠는 이유였다.
“어? 생각 안 난다는 표정이신데요? 제 아들이지만 랑일이 고집 장난 아닌데. 제자라고 너무 싸고도시네요. 어쨌든 선생님께서 필요 없다고 하셔도 저는 약 지어 와요. 그러니까 이왕 약 드실 거 진맥하고 약 지으세요.”
희원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준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약 드시고 건강하셔야지 랑일이 잘 봐주시죠.”
“네.”
“건강 이야기하다가 술 마시러 가니 참 어폐가 있네요. 하지만 오늘만 좀 예외로 쳐 주세요.”
기준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동네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어느 골목길의 다세대주택 같은 곳에 당당하게 주차를 했다.
“여기는 어디예요?”
“내리세요. 아는 사람네 회사인데 선생님도 다음에 이 동네에 차 갖고 오실 일 있으면 여기에 주차하세요. 2층에 볼일 있다고 하면 돼요.”
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오세요.”
희원이 한 발자국 떨어져서 기준의 뒤에 서니 기준이 희원의 팔을 잡아다 제 옆에 세웠다. 그러고는 그대로 팔을 잡고 걸었다.
“여기 사람 워낙 많은 동네라서 바짝 안 붙으면 인파에 휩쓸리고 이리저리 치이고 그래요. 조금 불편해도 이러고 걸어요.”
기준은 그러면서도 걸음의 속도를 살짝 늦춰 주었다. 희원은 기준에게 바짝 붙어서 걸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며 기준의 향이 바람을 타고 희원에게 훅 다가왔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빠르게 걸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의 향 때문인지 희원은 알 수가 없었다.
조금 걸어서 들어간 곳은 2층 창가 자리였다.
“아까 스테이크 못 드셔서 배고프죠? 꼬치 이런 거 드실래요?”
희원은 바깥 풍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록빛을 머금은 나무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연인들이 기분 좋게 웃으며 팔짱을 끼고 또는 손을 잡고 거닐고 있었다. 희원은 그런 연인들을 부러운 듯 바라봤다.
“왜요? 이런 황금 같은 주말에 데이트해야 하는데 학부모랑 이러고 있는 게 처량해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놀란 눈으로 기준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니에요. 저 아버님하고 있는 거 좋아요.”
“진짜로요?”
기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묻자 희원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기준이 피식 웃었다.
“저만 좋은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준은 희원이 꼭 토끼 같다고 생각했다. 하얗고 앙증맞은 어린 토끼 말이다.
“맥주 나왔네요. 여기 생맥주가 맛있어요.”
맥주가 나오자 기준이 잔을 들고 희원의 잔에 부딪쳤다. 청량한 유리잔 소리가 들리고 기준이 웃자 희원도 웃으며 맥주를 머금었다. 이렇게 낮에 술을 마신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아세요?”
평범한 가게는 아닌 듯했다. 지금 앉아 있는 자리만 해도 창가를 바라보며 둘이 나란히 앉는 자리였다. 하지만 소파가 아니었고 각자 앉을 수 있는 편한 의자이기에 나란히 앉아 있어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게다가 의자의 등받이가 높고 커서 방해받지 않는 느낌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창가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말이다.
“지인이 여기 단골이에요.”
“조금 전 주차한 그 건물에서 일하는 분이요?”
“네. 어떤 지인인지는 안 궁금하세요?”
기준이 도착한 꼬치에서 음식들을 빼냈다. 그러고는 닭고기 하나를 포크로 찍어서 희원에게 내밀었다. 희원이 고개를 숙여서 고마움을 표했다.
“누구인지 여쭤봐도 되는 거예요?”
희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뭐 어때요? 물어봐도 되죠. 형이요.”
“형이요?”
“네. 형하고 여기 가끔 와요.”
“랑일이네는 가족끼리 친한 것 같아요.”
기준이 잠시 생각을 하고는 맥주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가족들은 제가 정략결혼을 하고 알파 오메가의 그 어쩔 수 없는 페로몬 때문에 랑일이가 생긴 것에 대해 저한테 빚을 졌다고 생각해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리지만요.”
희원은 맥주잔을 들고는 가만히 기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들고 있으면 손 시려요.”
기준이 희원을 쳐다보자 희원이 민망함에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기준이 희원의 포크를 가지고 가서 이번에는 다른 고기를 찍어 내밀었다.
“랑일이는 제 러트 때 생긴 아이예요. 집에서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은근히 랑일이가 태어난 뒤 계속해서 결혼을 이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저는 랑일이를 키워 주는 것만 바란 거지 사랑이라는 감정은 없었던 거니 그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던 거죠. 그 사람도 랑일이가 배 속에 있을 때 고민했을 거예요. 표는 잘 안 냈지만 말이죠. 하지만 동시에 생각했겠죠.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는 사람과 살 수 있을지를 말이에요.”
기준이 맥주로 목을 축이자 이번에는 희원이 포크를 내밀었다.
“아무튼 가족들은 랑일이에게도 미안해하고 있고 저에게도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사실 저는 랑일이가 태어난 것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아요. 물론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 제대로 된 가정을 꾸렸으면 좋았겠지요. 그러지 못했던 점은 랑일이에게 가장 미안해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맥주잔을 들어 기준의 잔에 부딪쳤다. 기준이 피식 웃고는 맥주를 마셨다.
“그런데 사실 저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 미지수예요. 그래서 랑일이를 볼 때마다 어떻게 해도 제대로 된 가정은 못 꾸렸겠구나 싶어요.”
희원이 기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냐하면 랑일이에게 하는 것을 보면 사랑이 풍부한 사람 같은데 지금 기준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준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한 번도 타인에게 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희원이 정신과 의사도 아닌데 왜 자꾸 희원만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는지 모르겠다.
“알파와 오메가는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페로몬에 더 휩쓸리는 종류들이잖아요.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웃긴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페로몬에 구애받지 않을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싶어요. 그래서 어느 날은 랑일이에게 꼭 여자가 아니더라도 제가 아닌 다른 보호자가 있기를 바라면서도, 또 다른 어느 날은 핏줄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헛된 꿈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희원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기준이 말하는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에 대해서는 자신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제 얘기만 했나요? 잔이 비었네요. 한 잔 더 드실래요?”
“네, 한 잔 더 마실게요.”
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준에게 뭐라고 말을 해 주어야 할까 고민을 했다. 그때 기준이 말했다.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는 이야기인데 하고 나니 좀 속이 시원하네요.”
그 순간 희원은 생각했다.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이 사람에게 위안을 주었구나. 그걸 자신이 할 수 있어서 다행이구나.
희원은 천천히 기준의 손을 잡았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체온이라도 나누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 * *
둘이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모른다. 맥주 한잔하자는 말은 이제 위스키 한잔하자는 말로 바뀌었다. 맥주를 마시다가 배가 부르다는 이유로 독한 술로 바꾼 기준을 따라 희원도 자연스레 맥주잔을 밀어내고 위스키를 받았다.
“술 잘 드시나 봐요.”
“으음, 남들 마시는 정도 마셔요.”
희원의 대답에 기준이 피식 웃었다. 기준네 집안은 원래 술이 센 편이었다. 그런데 희원은 지금 기준과 같은 속도로 마셔 놓고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조금 더 마실 수 있겠어요?”
“아주 조금만요?”
희원이 엄지와 검지로 아주 조금을 표시했다. 기준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술 마시면 귀여워지나 봐요.”
“누가요? 제가요?”
희원은 여전히 한쪽 손은 기준에게 잡힌 채였다. 기준을 위로하고자 잡았던 손은 이제 기준에게 완전히 잡혀서 어느 순간부터 왼손 한쪽만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손잡고 있으면 안 불편하세요? 랑일이 아버님 왼손잡이잖아요.”
“음, 그렇죠? 근데 저 위로해 주려고 잡은 손 아니었어요?”
기준의 물음에 희원이 곰곰이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아직 위로 다 못 받았는데요?”
“진짜요?”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 그럴 때마다 토끼 같은 거 알아요?”
“토끼요?”
“네, 하얀 토끼. 눈 동그란 귀여운 토끼.”
희원의 볼이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왜 갑자기 덥지?”
희원이 왼손으로 팔랑팔랑 부채질을 했다. 기준이 희원의 잔에 얼음을 가득 담아 주었다.
“종종 위로해 줄 거예요?”
“종종?”
희원은 기준의 말을 따라 했다.
“네, 종종. 가끔씩이요.”
“그러죠, 뭐.”
희원이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자 기준이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희원은 이 사람이 이렇게 웃을 때마다 랑일이가 제 아빠를 똑 닮았구나 싶었다.
“그런데 랑일이는요?”
“실컷 놀고 목욕 중이라고 했어요.”
“그럼 동생네 집에서 재우는 거예요?”
기준이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저녁 시간이었다.
“음,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어차피 지금 데리러 가도 운전을 할 수가 없어서요. 아, 그러면 내일 유치원 못 가려나.”
“왜요?”
희원의 눈썹이 팔자로 누웠다. 기준이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왜요? 보고 싶어요? 반에 아이 한 명 안 오면 조금 더 편하지 않아요?”
“엑! 무슨 소리세요.”
희원이 말도 안 된다는 듯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유치원은 다른 유치원에 비해서 교사가 많은 편이에요. 그래서 한 반당 아이들도 적은 편이에요. 편하긴요. 안 오면 보고 싶고 궁금하고 그래요.”
“지금 학부모 앞이라고 너무 포장하는 거 아니에요?”
기준은 은근히 장난기가 발동했다. 희원의 입술이 살짝 불퉁하게 나왔다. 그게 아이 같아서 귀여워 미치겠는 거다.
“아니에요. 랑일이 내일 안 오면 정말 보고 싶을 것 같은데. 오늘 술 괜히 마셨나 봐요.”
“어! 지금 저랑 술 마신 거 후회해요? 저 위로해 준 거?”
“아니, 아니요!”
조금만 대답이 늦었으면 서운할 뻔했다. 원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데 기준은 자꾸만 희원 앞에서 무방비하게 감정을 불쑥불쑥 꺼내곤 했다.
“제가 내일 조금 일찍 일어나서 동생네 집에 가서 랑일이 데리고 출근할게요. 그럼 되죠?”
“정말요? 아, 다행이다. 랑일이 엄청 귀여운 거 아세요?”
아무래도 술이 슬슬 올라오는 듯했다. 계속해서 엄청 귀여운 짓을 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럼 알죠. 누구 아들인데요?”
“아, 맞다. 아버님 아들이죠. 근데 랑일이도 크면 아버님처럼 될까요?”
“제가 어때서요?”
“사실 귀엽지는 않은데.”
희원의 말에 기준이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취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을 텐데 아무래도 살짝 취한 모양이었다.
“귀엽지는 않다고요?”
“네. 바른말로 귀엽지는 않죠. 멋있죠.”
희원은 제가 말하고도 웃긴지 히힛 웃었다. 기준이 제 이마를 만지며 머쓱해했다.
“아, 완전 방심했네요.”
“네? 뭐가요?”
“아니에요. 이제 슬슬 갈까요?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
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을 하고 나온 둘은 나와서도 같이 손을 잡고 걸었다. 차가웠던 희원의 손도, 버석했던 기준의 가슴도 점점 따듯해졌다.
“오늘 많이 먹었어요?”
“네, 보세요. 배가 올챙이 같아요. 우리 반 애들 배 같아요.”
희원이 자리에서 멈추며 말했다. 기준이 앞에서 희원을 바라봤다.
“어디가요? 거짓말하면 못써요.”
“아닌데? 진짜 너무 먹어서 배가 올챙이처럼 되어 버렸잖아요.”
“그래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대리 기사 올 때까지 조금 걸을까요?”
희원이 긍정의 의미로 손을 조금 더 꼭 잡았다.
* * *
기준은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났다. 어젯밤 해준에게 전화를 해서 술을 마시는 바람에 랑일이를 데리러 못 가겠다고 했더니 해준이 몇 초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대뜸 물었다.
‘형, 혹시 상담 끝나고 데이트 있었어?’
해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서 기준은 인상을 썼다.
‘무슨 데이트?’
‘오늘 입고 나간 옷도 그렇고, 원래 일 아닌 이상은 술도 안 마시잖아.’
기준은 술이 센 편이지만 술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었다. 랑일이가 있으니 웬만해서는 술을 꺼리는 편이기도 했다. 아이 앞에서 술 냄새가 나며 취한 모습을 보여 주지 말자는 것이 기준의 육아 원칙이기도 했다.
‘어쩌다 보니까 마시게 됐어.’
‘누구랑? 설마 선생님이랑?’
기준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싶어서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응, 이것저것 이야기하다 보니까 어쩌다.’
정말 충동적이기는 했다.
레스토랑에서 밥도 못 먹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말을 술술 풀어놓게 된 거고, 그러다 보니 둘 다 심각해져 버려서 스테이크를 반 이상도 먹지 못하고 나온 거다.
그렇다고 또 식사를 하기는 좀 그렇고, 날씨도 너무 좋고, 사실 충동적인 마음도 있어서 맥주 한잔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요즘 이기준 이상하네.’
‘아무튼 랑일이 좀 부탁해. 랑일이한테는 내가 말할게.’
‘됐어. 안 그래도 랑일이 목욕하고 밥 먹더니 잠들어 버렸어. 설이 방에서 나란히 자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자. 근데 술 많이 마셨어?’
‘그러게.’
기준은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생각보다 많이 마시고 말았다. 집에 돌아올 때 확실히 희원은 취했다. 그래서 자꾸만 헤실헤실 웃어서 기준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상태로 꾸벅꾸벅 졸더니 어느 순간 자신의 품에 얼굴을 비비고 잠이 들어 버렸다. 희원에게서는 같이 술을 마셨는데도 알코올 냄새보다는 달콤한 꽃에서 나는 향이 났다. 기준은 그렇게 집에 가는 길 동안 희원을 품에 안고 같이 짧은 잠을 잤다.
그렇게 희원을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온 기준은 일찌감치 잠에 들었다. 둘이 낮부터 술을 마셨기 때문에 꽤나 오랫동안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오니 9시밖에 안 된 상태였다. 기준은 그대로 씻고 잠에 들어 오히려 평소보다 더 많이 자기는 했다.
해준은 어차피 랑일이를 데리러 올 거 조금 일찍 와서 자기네 집에서 해장하고 출근하라고 했다. 기준은 오랜만에 마신 술에도 멀쩡하게 일어났다. 아무래도 술은 체력적인 문제도 있지만 어떤 기분으로 마셨느냐도 한몫하는 것 같았다.
기준은 자꾸만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혹시 숙취로 인해 얼굴이 푸석해 보이지는 않는지, 컨디션은 괜찮아 보이는지 걱정되었다. 드레스 룸에서도 타이를 이것저것 들어 대 보기도 하고 시계도 이것저것 차 보기도 했다.
월요일인데도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기준은 느긋하게 운전하며 랑일이를 데리러 갔다.
“랑일아!”
랑일이를 부르며 기준이 안으로 들어가자 랑일이가 도도도 뛰어나왔다.
“아빠!”
“잘 잤어?”
“응. 유치원 원복 어디 있어?”
랑일이는 기준의 목을 끌어안고는 얼굴을 비비면서도 유치원 원복부터 찾았다. 유치원에 가는 게 즐겁기는 랑일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한 발 떨어져서 해준이 부자 상봉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한마디 했다.
“둘이 어디 가? 둘이 그냥 유치원 가고 회사 출근하는 거 아냐?”
해준의 말에 두 부자가 똑같은 표정으로 해준을 바라봤다.
“만날 가는 데 대충 나가면 되지 오늘 어디 시상식 가냐? 왜 이래들. 어서 밥이나 먹어. 그러다 늦지 말고.”
부자는 해준이 퉁바리를 놓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식탁에 앉았다. 늘 맞이하는 아침이었지만 기준은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아침을 먹고 난 뒤 빨리 가자며 재촉하는 랑일이를 안고 기준은 차로 향했다. 랑일이는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해준에게 손을 흔들고는 덤으로 뺨에 뽀뽀도 해 주었다.
“작은아빠, 안녕!”
“랑일이 다음에 또 와! 형 조심히 가.”
기준은 해준 부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랑일이와 함께 유치원으로 향했다. 차 안에는 기준이 미리 사 놓은 숙취 해소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 * *
거실에 배를 쭉 깔고 엎드린 랑일이는 무언가를 그리는 데에 집중 중이었다. 커피를 들고 거실로 나오던 기준이 랑일이를 보고 말했다.
“랑일아, 안 불편해? 책상에 앉아서 하지?”
“으응.”
랑일이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계속해서 왼손을 빠르게 놀렸다. 작은 발이 동당동당 움직이는 게 귀여웠다.
“그런데 랑일아, 뭐 하는 거야?”
“응.”
랑일이는 뭔가에 빠져 있으면 주위에서 말하는 게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릴 적 자신도 그러했다는데 자신을 꼭 빼닮은 것 같아서 기준은 피식 웃었다. 기준이 랑일이를 바라보다 물었다.
“선생님?”
“응?”
“선생님이야?”
제 아빠의 물음에 그제야 랑일이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올려다봤다. 기준은 랑일이 옆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종이 속 그림을 가리켰다. 강아지가 그려진 앞치마를 입고 웃고 있는 남자는 딱 봐도 희원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아빠가 모르는 게 어디 있어?”
기준은 의기양양하게 말하면서도 랑일이가 그린 깨알 같은 앞치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랑일이는 다섯 살 아이치고는 그림도 제법 그리는 편이었다.
“그런데 랑일아, 그림 왜 그리는 거야?”
“편지.”
“편지? 무슨 편지?”
랑일이가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날.”
“선생님 날?”
고개를 갸웃하던 기준이 스치는 날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승의 날! 금요일이 스승의 날이었다. 그래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마 랑일이는 유치원에서 스승의 날에 대해 배운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거 선생님 드리려고?”
“응, 선생님이 달력 보여 줬어. 금요일이 선생님 날이라고 했어.”
다섯 살짜리의 대답에 기준이 입을 벌렸다.
“랑일이가 말 안 해 줬으면 큰일 날 뻔했다. 아이고, 예뻐라!”
기준이 랑일이를 끌어안고 볼을 마구 비비자 랑일이가 손을 뻗어서 제 아빠를 밀어냈다.
“으응! 이거, 그림 그릴 거야!”
기준이 순순히 밀려나 주자 랑일이는 제 아빠네 회사에서 나오는 색연필로 색칠을 하기 시작했다. 기준은 랑일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도 스승의 날을 맞이해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선생님!”
랑일이가 커다란 종이를 들고서 뛰기 시작했다. 대문 앞에 나와서 다른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아이들을 유치원 안으로 들여보내던 희원이 랑일이의 목소리에 입꼬리를 올리며 눈꼬리를 접었다.
“랑일아, 천천히! 넘어져.”
“선생님!”
랑일이가 희원의 앞에 멈추어 서서 활짝 웃었다. 랑일이의 얼굴에 기준의 얼굴이 드러나서 희원은 순간 저번에 같이 보냈던 주말이 생각났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네, 랑일이도 안녕하세요.”
랑일이가 머리를 숙여서 인사하자 희원도 같이 바른 자세로 인사를 했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랑일이가 들고 있던 종이를 쑥 내밀었다.
“이게 뭐야?”
“선생님 날 선물 주는 거예요.”
“드리는 거예요.”
뒤에서 기준이 랑일이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드리는 거예요.”
랑일이가 제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말했다. 기준이 고개를 숙이며 희원에게 인사를 하며 웃었다. 조금 전 랑일이의 휘어지던 눈매와 똑 닮아 있어서 희원은 괜히 랑일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이게 뭘까?”
희원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 말하며 종이를 펼쳤다.
“우아! 이거 랑일이가 그렸어요?”
“네!”
랑일이가 배를 내밀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희원이 랑일이 앞에 몸을 굽히고 앉아서 랑일이를 꼭 껴안았다.
“랑일아, 정말 고마워. 선생님 진짜 기뻐.”
“선생님, 고맙습니다.”
기준이 뿌듯한 얼굴로 둘을 바라봤다. 기준은 그림을 다 그린 랑일이에게 꼭 이 그림을 선생님한테 주면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라고 일러두었다. 똑똑한 랑일이는 기준이 일러 준 말들을 기억하고는 그대로 보여 주었다.
“우리 랑일이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쁠까?”
“선생님이요.”
랑일이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이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기에 희원이 살짝 당황하여 기준을 올려다봤다. 기준도 머쓱한지 눈가를 찡긋거리며 눈썹을 긁적였다.
기준은 이 순간 아들자식 키워 봤자 다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원이 랑일이를 안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자 랑일이가 희원의 목을 꼭 끌어안고는 희원의 뒷머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선생님, 진짜 별거 아니에요.”
기준이 여태 뒤에 숨기고 있던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희원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어어! 선물 안 받는다고 그랬는데…….”
“카네이션이나 편지는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그치만 이건 그냥 카네이션이라고 하기에는…….”
기준이 웃으며 손을 조금 더 앞으로 내밀었다. 카네이션이 흐드러지게 핀 꽃다발이었다.
“카네이션 맞잖아요.”
희원은 난처한 듯 웃어 보였다. 학부모들에게 부담 주기 싫어서 스승의 날 일절 선물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도 꼭 마음을 표시하고 싶다면 카네이션이나 편지 정도만 받겠다고 했는데 누가 이렇게 커다란 카네이션 꽃다발을 내밀 줄 알았을까.
“잠깐만 랑일아, 내릴까?”
희원의 말에 랑일이가 제 아빠의 손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이 양손 가득 들어오는 카네이션 꽃다발을 안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하지요. 랑일이 잘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선생님, 일요일에 시간 내주시면 그때 말씀드렸던 한의원으로 모시고 싶은데요.”
“아…….”
희원은 잠시 망설였다. 아무래도 한의원에 가는 것은 여전히 거리끼게 되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치부라고 생각하는 페로몬 문제가 기준의 귀에도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혹시 안 내키시면…….”
“아니, 아니에요. 갈게요. 장소랑 시간 알려 주세요.”
기준이 희원의 얼굴을 살폈다. 가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건가 싶어서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작게 웃는 희원의 얼굴을 보며 기준은 안심했다.
* * *
희원은 지금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해 본 적이 없었다. 늘 웃는 낯으로 밝게 행동해 왔기에 어렸을 때부터 ‘밝은 아이’, ‘씩씩한 아이’라는 호칭이 희원의 뒤를 따랐다. 어느 순간부터 그게 자신의 몸을 죄는 줄도 모르고, ‘나는 밝은 사람이야, 씩씩해.’라는 판에 자신을 맞추어 왔다.
대학 시절 페로몬 문제 때문에 사귀던 사람과 헤어졌을 때도 마음은 힘들었지만 사람들에게 표현하지 않았다. 그건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희원의 마음 한구석에는 ‘내가 건강했으면 엄마, 아빠가, 형과 누나가 걱정하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이 늘 존재했다. 그래서 집에서도 괜찮다고 말했다.
집에서조차 씩씩하게 구는 희원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 희원은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안녕하세요. 더운데 얼른 타세요.”
오늘도 기준은 희원네 집 앞까지 데리러 왔다. 랑일이를 본가에 맡겼는데 해준이 어떻게 알고 전화를 해 왔다.
‘형, 진짜 연애하냐?’
그런 소리를 뱉기에 기준은 제대로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끊어 버렸다. 그랬더니 메시지가 연달아서 들어왔다. 나중에는 이모티콘으로 ‘파이팅’을 외치기에 진동을 무음으로 바꾸어 버렸다.
“안녕하세요.”
희원이 기준의 옆자리에 앉으며 인사했다.
“왜 나와 계세요. 전화하면 나오시라니까요.”
“아니에요.”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기준이 희원의 안색을 살폈다. 어딘가 평소 같지 않은 모습에 기준은 큰길로 나가기 전에 정차하고는 물었다.
“선생님, 혹시 가시기 싫은데 끌려가는 거예요? 제가 너무 강요했나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희원이 입술을 꾹 물었다.
“지금이라도 괜찮으니 말씀하세요. 한의원까지 가는 건 좀 아니다, 제가 오버했다 싶으면 괜찮으니까 말씀하세요.”
“아니에요, 그런 거.”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직 할 말이 남아서 자꾸만 목이 타고 침이 말랐다.
“그럼 컨디션이 별로세요? 별로인데 제가 불러낸 거예요? 집에 가서 좀 쉬실래요?”
“아니,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희원의 대답에도 기준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희원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창백해 보였다.
“저기 아버님.”
“네, 말씀하세요. 괜찮으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네. 여기서 이야기하기 좀 그러면 선생님 댁 근처에 카페라도 갈까요?”
기준의 물음에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희원은 이 순간에도 어디에서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이 앞섰다. 하지만 기준이 자신에게 그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말했던 것처럼 희원도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기준이 알파 오메가 관계에 대해서 긍정적이지 못하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오메가 이희원이 아닌 인간 이희원으로 그에게 보이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에는 랑일이의 담임교사 이희원이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이희원이 되고 싶었다.
왜 기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계속해서 생각해 봤다. 한의원에 가서 밝혀질 것이기 때문에?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왜 말하고 싶은 건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다만 희원은 그냥 그러고 싶을 뿐이었다.
기준이 차를 몰고 간 곳은 강이 보이는 둔치였다. 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고 살짝 열어 둔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기준은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시원한 음료수도 샀다. 하지만 둘은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기준은 아무런 재촉 없이 그저 음료수를 따서 희원의 손에 들려 주었다.
“저, 근데 아버님.”
“네.”
“한의원 예약하신 거 아니에요? 시간이…….”
“괜찮아요. 언제 가도 상관없으니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희원은 목이 타서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다른 게 아니라요…….”
기준은 희원의 눈을 마주하고는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그에 희원은 자신의 안에 있는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매듭을 풀 용기가 생겼다.
“저 오메가예요.”
처음 뱉은 말이 이것이었다. 기준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계속 이야기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성 오메가인데 페로몬에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한의원 가서 진맥하면 아마 그 이야기가 나올 거예요. 그래서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희원이 첫 번째 매듭을 풀어낸 것처럼 깊게 숨을 내쉬었다.
“문제의 원인은 모르겠어요. 우성 오메가로 발현했는데 히트사이클이 오지 않았어요. 고등학교 내내요. 그러다 거의 고 3 졸업을 앞두고 히트사이클이 온 거예요. 그러고는 또 안 왔어요. 오메가라는 판정을 받으면서부터 페로몬이 좀 불안정하다고 했는데 히트사이클 주기가 불안정하니 병원에 가서 좀 더 세밀하게 검사를 받았어요. 다른 오메가들은 1년에 서너 번씩 오는데 저는 그러지를 않으니까요. 그랬더니 페로몬에 확실히 문제가 있다고 했어요. 이유는 모르고요.”
기준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묵묵히 희원의 말을 들었다. 희원은 기준을 슬쩍 쳐다봤다.
“듣고 있어요. 그러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것 때문에 대학교 때 사귀던 친구하고 헤어졌어요. 오메가인 걸 그 친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사귀는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까 물어보더라고요. 히트사이클 언제 오냐고요. 혹시 억제제 이런 거 먹는 건 아니냐고요.”
“알파였어요?”
“네.”
기준은 화가 났다. 몸에도 안 좋은 억제제를 일부러 먹는 오메가가 어디 있다고 그런 발언을 했단 말인가.
“정말 찌질한 알파 새끼네요.”
“네?”
거친 단어에 희원이 놀라서 기준을 쳐다봤다. 기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억제제를 일부러 먹습니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걸 텐데.”
사실 기준의 주위에도 억제제를 먹는 사람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사정이 있었다.
기준은 억제제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알파 오메가의 페로몬은 어쩔 수 없는 자연적인 건데 그걸 억지로 조정하는 게 달갑지 않았다. 몸에 무리를 주며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계속 말씀하세요.”
“네.”
희원은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골랐다.
“히트사이클이 아닌 이상 제 페로몬 향은 희미해서 사람들은 제가 베타인 줄 알아요.”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도 여전히 알파, 오메가, 베타의 세계는 서로 달랐고 구분 지어져 있었다. 알파는 여전히 상위 그룹을 차지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짝으로 오메가를 선호했다.
여전히 알파는 자신의 씨를 뿌리는 데에 대한 본능이 있었다. 더 좋은 우성을 낳기를 본능적으로 원했다. 그리고 그 본능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메가가 필요했다.
반면 보통 베타는 베타끼리 관계를 맺었다. 그게 꼭 성적인 게 아니라도 말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베타는 알파와 오메가보다는 베타와 관계를 형성하려 들었다.
희원의 곁에는 베타인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알파와 오메가라고 해 봐야 가족뿐이었다. 그건 베타인 사람들이 희원을 베타라고 착각해서 아무런 부담 없이 다가오는 것도 있었고, 희원 역시 알파와 오메가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페로몬이 어쩌고, 러트와 히트사이클이 어쩌고, 이런 이야기들이 나올 수밖에 없어서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도 있었다.
“묻지도 않으셨는데 이런 말을 하는 건 나중에라도 알고 나면 제가 속였다고 생각하실까 봐요.”
“도대체 어떤 점에서요?”
기준의 물음에 희원은 고민했다. 아마도 기준과 사적으로 알게 된 관계였으면 희원은 자신이 먼저 의도적으로 기준하고 부딪치지 않도록 피했을 거다. 어느 순간부터 희원은 알파를 상대하는 게 어렵고 불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준과는 처음 시작이 어쩔 수 없는 공적인 관계였다가 이제는 이렇게 유치원이 아닌 밖에서도 한두 번 만나는 관계가 되었다.
이제 와서 기준이 알파라서 더 이상 못 만나겠다고 하는 것도 웃기고 그렇다고 베타인 척 지내는 것도 안 될 말이라 희원은 먼저 말해야겠다 싶어서 입을 뗀 거였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요. 아무래도 알파와 오메가는 서로를 신경 쓰게 되잖아요.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해도 말이죠. 그런데 베타인 줄 알고 계셨는데 제가 갑자기 오메가라고 하면 당황하실 수도 있고 기분이 나쁘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희원은 말을 한 뒤에 목이 타는지 음료수를 들이켰다. 기준 역시 목이 타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기준은 목이 타기보다는 속이 탔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셨어요? 제가 갑자기 지난번에 알파 오메가 얘기를 꺼내서요? 랑일이가 제 러트 때 생긴 아이라고 말해서요? 마치 그게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 때문에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진 양 그렇게 들리셨어요? 그래서 제가 오메가라면 치를 떤다고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아뇨, 그게 아니라요…….”
기준은 랑일이가 선물 같은 존재라고 했다. 희원도 그 말에 십분 동의했다. 그렇게 예쁜 아이를, 사랑스러움의 결정체인 아이를 어떻게 알파 오메가의 본능으로 인한 결과로 치부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랑일이의 존재를 떠나 그 과정 속에 본능과 페로몬, 알파와 오메가의 복잡한 것들이 섞여 있으니 희원은 기준의 마음 한편에 오메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선생님은 어떤 거지 같은, 아뇨, 죄송해요. 말이 좀 심했네요.”
기준은 아차 싶었다. 조금 전에 희원의 대학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 정확하게는 그 같잖은 알파 이야기를 들으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기 때문이다. 기준은 깊게 숨을 내쉬며 말을 골랐다. 끊었던 담배가 생각이 났다.
“베타면 어떻고 오메가면 어때요?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데 있어서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상관없었다.
“저는 상관없는데요, 혹시 랑일이 아버님이 부정적으로 생각하실까 봐요.”
“아무리 우리가 안 지 얼마 안 된다고 해도 어떻게 저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런 걱정을 하세요? 정말 사서 하는 걱정이네요.”
희원이 고개를 숙였다.
“저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선생님도 신경 쓰지 마세요.”
“네, 감사합니다.”
희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뭔가 자꾸만 울컥울컥 치솟아서 희원은 주먹을 꾹 쥐고 감정을 삼켰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니요.”
희원이 고개를 젓자 기준이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의원 가도 되죠?”
“네.”
“손발이 찬 이유가 페로몬 문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그걸 떠나서 한약이 선생님 건강에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저는 기쁠 것 같아요. 도움이 되는 선물을 한 셈이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기준의 다정함에 희원은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민망함에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준은 그런 희원을 보고 속이 갑갑해졌다. 하지만 섣불리 위로하고 그의 삶에 대해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 이거요.”
희원이 힐긋 내려다봤다. 손수건이었다. 희원이 더듬더듬 손을 뻗어 손수건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기준은 음악을 틀었다. 볼륨을 조금 더 높였을 때 희원은 창가를 보며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기준이 준 손수건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손수건에서 기준의 향이 났다. 자꾸만 마음이 술렁거렸다.
* * *
한의원 앞에 도착한 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둘은 여전히 건물로 들어가지 못했다. 희원이 마치 봇물 터진 듯 눈물이 터져서 눈가가 짓무르도록 울었기 때문이다. 조금 진정된 듯하면 다시 울컥해서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이제, 괜찮아요.”
희원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기준이 희원의 안색을 살폈다. 하얀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기준은 늘 웃기만 했던 희원이 가슴을 들썩이며 우는 모습을 보자 마음 한쪽이 안 좋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한의원에는 왜 가자고 그래서. 그놈의 한의원. 기준은 저 자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진짜 괜찮으세요? 여기 위치 아셨으니까 나중에 혼자 오실래요?”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갑자기 이래서…….”
민망함에 희원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너무 울어서 눈가는 따갑고 콧물 때문에 기준의 손수건은 못 쓰게 되었다. 가지고 가서 나중에 세탁해서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전에 못생겨진 얼굴을 진정하고 밖으로 나가는 게 더 문제였지만 말이다.
“뭐가 죄송해요. 선생님은 참 죄송할 것도 많네요. 저한테는 그런 말씀 안 하셔도 돼요. 그리고 뭐 어때요. 감정이라는 건 표현하라고 있는 거예요.”
“그래도요.”
“랑일이한테 화가 나는 것과 슬픈 건 나쁜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면서요. 그랬으면서 뭘 미안해하고 그러세요.”
희원은 기준이 참 고마웠다. 기준이 자신의 마음을 풀어내 보여 줬던 순간 희원도 자신의 마음을 보여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걸 보여 주었을 때 기준은 희원을 탓하기보다는 주변의 상황과 그 알파를 탓했다.
그게 마치 희원에게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페로몬 그게 뭐 어때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아서 꽁꽁 얼었던 마음이 스르르 풀어졌다.
“저 이제 나가도 돼요.”
“그래요.”
기준이 먼저 차 밖으로 나갔다. 희원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정리했다. 여전히 눈과 코가 빨갰지만 그래도 많이 진정되었다. 기준은 희원이 나올 때까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희원이 드디어 진정하고 차 밖으로 나오자 기준이 희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희원이 민망함에 발끝을 내려다보자 기준이 피식 웃었다.
“토끼 같은 거 아세요? 새하얀데 코랑 눈이 빨간 토끼. 울어서 배고프겠다. 약 짓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기준이 희원의 어깨를 잡고는 앞으로 세우며 등을 도닥거렸다. 그게 마치 위로 같아서 희원은 또다시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 * *
점심에 잠깐 만나서 약을 짓고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는데 그 이런저런 이야기가 꽤나 심각해지는 바람에, 그리고 그게 모든 일을 처리한 뒤가 아닌 사전에 시작한 것이었기에 둘이 같이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 일요일도 아빠 없이 다른 식구들과 보낸 랑일이가 입이 뾰로통하게 나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희원과 한의원을 나와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난 뒤 커피를 들고 걷고 있을 때 랑일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 랑일아.”
―아빠, 언제 와?
랑일이의 물음에 기준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희원을 살폈다. 희원은 여전히 기운이 없어 보였다. 생각에 빠져 있던 희원은 랑일이 이름을 듣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고 기준을 쳐다봤다. 그제야 희원은 2주 연속으로 랑일이에게서 아빠를 뺏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해졌다.
“아빠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기준의 대답에 랑일이보다 오히려 희원이 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빠, 심심해. 집에 가고 싶어. 빨리 와.
“할머니네 설이 있잖아.”
―그래도 심심해.
랑일이는 여태 해준의 딸 설이와 잘 놀아 놓고는 이제 와 심심하다는 핑계를 대며 기준에게 투정을 부렸다.
“랑일이 기다려요. 얼른 들어가세요.”
희원이 안절부절못하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기준은 랑일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희원과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다.
“랑일아, 아빠가 갈 때 맛있는 거 사 갈게. 조금만 기다려 줘.”
―싫어. 지금 와.
“아빠가 지금은 못…….”
기준이 못 간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희원이 기준의 소매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 눈썹은 한껏 처져서는 눈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랑일이 기다리니까 집에 들어가라고.
“그래, 아빠 지금 갈게.”
―응! 빨리 와!
랑일이의 한껏 밝아진 목소리가 핸드폰을 뚫고 흘러나왔다. 기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희원은 언제 우울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활짝 웃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요? 저랑 헤어지는 게?”
괜한 심술이었다. 기준은 타인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아니, 기준은 다른 이와 이렇게 사적인 시간 자체를 보내지 않는 사람이다. 심술은커녕 농담도 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자꾸만 희원에게는 평소의 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랑일이가 걱정돼서…….”
희원이 그 자리에서 펄쩍 뛰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손사래를 치면서 기준의 표정을 살피는데 그 모습이 꼭 뭐 마려운 똥강아지 같아서 기준이 피식 웃었다.
“농담이에요. 가요. 모셔다드릴게요.”
“저 그냥 지하철 타고 가면 돼요. 랑일이가 기다릴 텐데 빨리 가 보셔야 되잖아요.”
기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희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한약 무겁습니다. 날도 덥고요.”
“죄송해요. 제가 같이 있는 게 싫다는 게 아니라… 랑일이가 자꾸 눈에 밟혀서요.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짧게 한마디 했는데 희원은 슬그머니 꼬랑지를 내리며 시무룩해졌다. 기준이 살짝 고개를 꺾어서 희원을 쳐다보고는 웃었다.
“화낸 것 아니고 정말 한약 무거워서 그거 들고 가시게 하는 게 싫어서 그런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일에 사과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자꾸 그러세요? 마치 제가 뭐라도 한 것처럼. 가요. 밖에 오래 서 있기에는 더운 날씨예요. 하얀 얼굴 타겠어요.”
기준이 희원의 손을 살며시 잡아끌었다. 희원은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주억이며 기준에게 끌려서 차에 탔다.
기준은 희원을 바래다주는 내내 희원에게 당부했다. 한약은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한다, 너무 차가운 것 많이 먹으면 안 된다, 혹시라도 먹다가 몸에 이상이 있으면 꼭 말해 줘야 한다 등……. 기준이 수많은 당부를 하는 동안 희원은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 가운데 전혀 귀찮은 내색은 보이지 않았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희원이 손가락을 꼼질꼼질 움직이다 입을 뗐다.
“저기 아버님.”
“네.”
“오늘 정말 감사해요.”
“스승의 날 맞이해서 제가 랑일이 사랑해 주시는 거에 정말 감사해서 드리는 선물인걸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눈을 마주했다.
“한약뿐만이 아니라요, 이야기 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이런저런 이야기 하고 싶을 때, 누군가 들어 주기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싶을 때, 주저하지 마시고 연락하세요. 해결해 드리지는 못해도 듣는 것만으로 엉킨 실타래가 풀린다면 그거라도 제가 할게요.”
희원은 기준의 다정한 말에 다시 울컥했지만 입술을 꾹 깨물며 두 주먹을 꾹 쥐고는 애써 감정을 눌렀다.
“다음에는 제가 랑일이랑 아버님께 맛있는 것 살게요.”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비로소 희원이 원래의 제 얼굴을 하고는 웃어 보였다. 기준은 맑은 얼굴을 보며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희원은 기준의 차가 골목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기준이 먼저 들어가라고 했지만 고집스럽게 한약을 끌어안고 끝까지 손을 흔들었다.
집에 들어온 희원은 신발장 앞에 위치한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눈가를 찡그렸다.
“못생겼어.”
얼마나 울었는지 아직도 눈가가 빨갰다. 그런 얼굴을 하고는 기준과 있었다는 것에 갑자기 창피해졌다. 얼굴이 홧홧해져 희원은 서둘러 욕실로 쏙 들어갔다. 샤워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옷을 벗으려다가 문득 주머니 속에 있는 손수건이 생각났다.
“아, 창피해.”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손수건을 보다가 희원은 얼른 물에 손수건을 담갔다. 미지근한 물로 손수 깨끗하게 빨아서 다림질까지 해서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기준이 무섭기만 했다. 극우성 알파에, 다른 학부모보다도 큰 키, 날카로운 눈, 차가운 눈빛… 게다가 분위기는 어떻고. 말을 하지 않고 서 있을 때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 위에 군림했던 사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원래부터 지배 계층이었던 사람 같았다. 그가 무엇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희원은 기준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가 무척이나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어쩌다 학부모와 사적으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시간을 나누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시간을 가질수록 기준은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준은 희원의 삶에 대해 섣불리 아는 척하지 않았고 판단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희원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고 희원이 자책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러지 말라고 손을 잡아 주었다. 자신의 감정을 담백하게 이야기했고 대신 화를 내 주었다. 그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희원이 울자 조용히 내밀었던 손수건. 희원은 그가 내밀었던 손수건에 얼굴을 묻었을 때 얼마나 커다란 마음의 안정을 느꼈는지 모른다. 얽히고설켜서 복잡했던 마음이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희원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심장이 빠르게 뛰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