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작교 역할 하는 짹짹이
“아빠, 비 와?”
랑일이가 아침에 번쩍 눈을 뜨고 가장 먼저 한 질문은 바로 이거였다. 어젯밤 그토록 비 안 오고 날씨 맑을 거라고 이야기했지만 아이는 자면서도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오늘 미세 먼지도 없고 날씨도 정말 좋아. 걱정 안 해도 돼, 랑일아.”
기준은 랑일이를 품에 안고 창가로 데리고 가서 바깥을 보여 주었다. 물빛을 풀어놓은 듯한 하늘에 하얀 구름만이 두둥실 떠가고 있었다.
“우아! 진짜 좋다!”
랑일이는 기준의 목을 끌어안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렇게 좋아?”
“응!”
망설임 하나 없는 랑일이의 대답에 기준은 자주 외출하지 못한 게 못내 마음이 쓰였다.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풍날이다. 체육복을 입은 랑일이는 신이 났다. 어젯밤 내내 정말 소풍 가냐고, 비 와도 가는 거냐고 몇 번을 물었는지 모른다. 기준은 랑일이의 반복되는 질문에도 짜증 내지 않고, 귀찮아하지 않고 꼬박꼬박 대답해 주었다.
“랑일아, 늦으면 소풍 못 간다. 신나게 놀려면 맘마 많이 먹고 가야 해.”
“응! 아빠, 나 완전 기대돼!”
어디서 기대된다는 단어를 배웠는지 랑일이는 요즘 뭐만 하면 기대된다는 말을 했다. 원래도 또래에 비해 말을 잘하는 랑일이였지만 그래도 생소한 단어를 입에 올릴 때마다 아들 바보 기준 아빠의 광대도 올라가곤 했다.
랑일이는 그렇게 신이 나는지 아침을 먹으면서도 허공에 발을 구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기준은 그런 랑일이를 보며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4월 내내 그토록 차가운 바람이 불어 대더니 이제는 따스한 공기를 실은 바람만이 살랑살랑 머리칼을 간지럽혔다. 뒷좌석 유아용 카 시트에 혼자 올라앉는 랑일이를 보며 기준은 날씨가 춥지도 않고 적당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이번 황금연휴는 1일부터 5일까지 이어졌다. 1일 근로자의 날이 금요일이었고, 5일이 화요일이라 직장인들은 보통 4일에 연차를 내고 여행을 가거나 길게 쉬려고 했다.
사내 유치원인 놀 유치원은 봄 소풍을 언제로 잡아야 할지 고심 끝에 결국 어린이날 다음 날인 6일로 잡았다. 아이들은 어린이날의 연속인 양 즐거워했다. 그건 랑일이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
차 문을 열어 주니 랑일이가 대문 쪽에 서서 다른 아이들과 인사 중인 희원을 힘차게 불렀다. 희원이 아이들을 다른 선생님과 들여보내고는 뒤를 돌아서 그대로 팔을 벌려 주었다. 랑일이가 전력 질주하는 모습에 뒤에서 기준이 멋쩍게 웃었다.
“선생님! 우리 소풍 가요!”
랑일이가 그대로 희원에게 폭 안겨 들었다. 희원은 랑일이를 일단 꼭 안아 주고는 품에서 떼어 낸 뒤 배꼽에 손을 대고는 인사를 했다.
“랑일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희원을 따라서 랑일이도 인사를 했다. 희원은 품에 뛰어드는 아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기본적인 것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선생님이었다. 랑일이는 인사를 하기 무섭게 다시 희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선생님, 우리 언제 가요?”
기준은 성질 급한 아들 녀석을 바라보며 그저 웃었다.
“다른 친구들 다 오면 갈 거예요. 아버님, 안녕하세요.”
희원이 랑일이의 질문에 대답하고는 기준과 인사를 나누었다. 소풍을 간다고 더 가볍게 입은 모양인지 청바지에 하얀 운동화를 신은 모습이 마치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 걱정하지 마세요. 잘 다녀올게요.”
“걱정 안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기준은 언제 걱정했냐는 듯 말했다. 과한 걱정으로 아들의 유치원 반까지 변경하려고 했던 사람이 말이다.
“랑일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응! 아빠, 다녀오겠습니다.”
신이 난 랑일이는 희원의 손을 꼭 잡고는 어서 들어가자고 졸랐다. 기준은 어느 순간부터 아침에 희원과 대화를 조금 더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아빠의 심정을 어린 아들이 알아챌 리가 만무했다. 기준은 재촉하는 아들을 가늘게 뜬 눈으로 보며 피식 웃었다.
“잘 다녀와. 선생님,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기준이 희원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희원이 웃으며 같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 와중에도 랑일이는 희원의 손을 잡고 흔들어 댔다. 기준은 돌아서 차로 향하면서도 희원의 대학생 같은 모습이 눈에 선해서 미소 지었다.
* * *
가정의 달이고 뭐고 기준은 짜증이 치솟기 시작했다. 여느 직원들은 6시에 칼같이 퇴근하려고 준비 중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기준은 콘텐츠 사업부 이사이지만, 크게는 놀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기에 직장인들의 로망인 칼퇴근을 실행할 수 없었다.
랑일이가 소풍을 갔다가 5시에 돌아와 간식을 먹고 6시에 하원한다고 하여 오늘만큼은 늦지 않고 그 시간에 맞추어 가려고 했다. 그런데 일 못하는 직원을 둔 죄로 남들 다 하는 좋은 아빠도 못 하게 생겼다.
“지금 그러니까 나보고 퇴근도 하지 말고 기다리고 앉았다가 컨펌을 해라, 그 말인 겁니까?”
콘텐츠 사업부 부장이 쭈글이처럼 어깨를 좁히며 머리를 조아렸다.
“지난번에는 다 퇴근한 금요일 밤에 사람을 불러내더니 오늘은 퇴근도 못 하게 이게 뭐 하는 겁니까?”
물론 금요일에 회사에 다시 돌아온 덕에 우연히 희원을 만났던 것은 꽤나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은 지금이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미리 체크를 했어야 했는데…….”
“됐습니다. 변명할 시간 있으면 가서 서류나 다시 만들어 오세요.”
기준은 귀찮다는 듯 나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부장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꽁지 빠지게 이사실에서 도망갔다.
기준은 능력 없는 직원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원 실장을 호출했다.
“네, 이사님.”
“미안한데 랑일이 픽업 좀 해서 본가에 좀 데려다주고 퇴근하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기준은 웬만해서는 랑일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건 자신이 하려고 했다. 그리고 다른 임원들과는 다르게 출퇴근도 직접 운전하여 했기 때문에 원 실장한테 이런 부탁을 하는 게 드물었다.
“유치원에는 전화해 둘게요. 사적인 일까지 떠맡게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이사님. 도련님 일이 어떻게 사적인 일입니까?”
원 실장은 기준이 어려서부터 봐 왔고 원래는 아버지 밑에 있다가 기준이 임원이 되자 비서실 실장으로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러니 원 실장에게 이 회장네 집안사람들은 단순히 모시는 상사 이상이었다.
기준은 랑일이가 소풍이 어떠했는지 조잘조잘 떠들어 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같이 맞장구쳐 주고 그래서 더 신나게 이야기하길 바랐는데 그걸 해 주지 못해서 몹시 기분이 상한 상태였다.
다이아몬드 수저 물고 태어났고 어차피 회사는 자신의 것이니 그거 믿고 결재나 할까 싶다가도 하나하나 눈으로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성이 차는 성격 때문에 애초부터 그런 건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기준은 하는 수 없이 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아버님.
“선생님, 죄송합니다만 제가 시간에 맞추어 못 갈 것 같아서 전화드렸습니다. 비서가 대신 갈 텐데 그편으로 랑일이 보내 주시면 본가로 갈 겁니다.”
―아, 네. 아버님. 비서님께서 랑일이 데리고 가신다는 말씀이시죠?
희원은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했다. 기준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희원이 랑일이가 비서님과 출발할 때 다시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6시 10분쯤 되어 희원에게 다시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원 실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사님.
“무슨 일 있습니까?”
―별다른 건 아니고요, 도련님께서 저랑 같이 안 가겠다며 울음이 터져서요. 이사님께서 한번 통화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전화드렸습니다.
원 실장의 상당히 곤란한 듯한 목소리에 기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 녀석의 고집이 여기서 또 발동된 것 같았다. 기준은 전화를 받기 전에 희원을 먼저 찾았다.
―선생님께서는 도련님 안고 달래고 계셔서요.
“그래요. 그럼 랑일이 좀 바꿔 주세요.”
이럴 줄 알았으면 어머니인 박 여사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그동안 4년 내내 랑일이를 키운 이는 기준보다는 박 여사였다. 그에 미안한 감정이 있기에 기준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 선에서 해 보려고 했다. 물론 본가로 가는 것부터가 또 박 여사에게 부탁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는 하고 싶었다. 그런데 다른 이도 아닌 이랑일이 복병이 될 줄이야!
―도련님, 이사님이세요.
핸드폰 너머로 원 실장이 랑일이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너머로 희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랑일아, 아빠시래. 여보세요, 해야지.
희원의 목소리가 들리고 바로 랑일이의 잔뜩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나, 선생님…….
“그래, 랑일아. 아빠야. 아빠가 회사 일이 많아서 지금 데리러 못 가. 미안해. 실장 아저씨 알지?”
―선생님…….
“응? 선생님? 아빠 말 좀 들어 봐, 랑일아. 실장 아저씨 차 타고 할머니네 가 있으면 아빠가 갈게.”
―선생님. 아빠, 선생님.
평소에는 똑똑하게 할 말 다 하는 랑일이가 계속해서 희원만 찾고 도무지 기준의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으면 눈을 맞추며 설득을 할 텐데 그럴 수 없는 게 답답했다. 이런 상황을 만든 그 모든 원인에 짜증이 일었다.
―아버님, 저예요.
보다 못한 희원이 랑일이 대신 전화를 받았다.
“네, 선생님. 죄송해요. 원래 랑일이가 이러지를 않는데…….”
―괜찮아요, 아버님. 랑일이가 지금 자다가 깨서요. 아이들이 좀 오래 걸었더니 너무 피곤했나 봐요. 원래 자다가 깨면 투정도 부리고 그러잖아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랑일이 녀석이 너무 힘들게 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네요.”
―저 죄송한데, 혹시 몇 시쯤 끝나실 것 같으세요?
기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을 정확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이따가 부장을 한 번 더 닦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그게 확실하지가 않아서…….”
―아… 그럼 아버님, 이렇게 해요. 유치원에서 저랑 랑일이랑 같이 있을 테니까요, 일 보시고 연락 주세요. 저는 저녁에 별다른 일정 없어서 제가 랑일이 더 데리고 있어도 괜찮아요.
“아닙니다, 선생님. 제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선생님도 피곤하실 텐데요. 랑일이 원 실장 차 태워 보내시면 됩니다. 조금 울어도 가다가는 그치겠죠.”
그렇게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희원도 엄연히 그만의 사생활이 있을 텐데 랑일이 때문에 그 시간을 뺏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희원은 괜찮다며 다시 말했다.
―운전할 때 뒤에서 아이가 울면 신경 쓰이잖아요. 랑일이가 지금은 쉽게 괜찮아질 것 같지가 않아서요. 저 정말 괜찮으니까 일 보시고 전화 주세요. 정말 괜찮아요. 며칠 동안 푹 쉬다 나와서 피곤하지도 않고요. 정 미안하시면 저번에 사 주셨던 샌드위치 한 번 더 사 주세요.
랑일이가 희원의 말을 이해했는지 옆에서 희원에게 “선생님, 나 선생님이랑 있을래요.”라고 정확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기준은 여우 같은 아들에 이마를 짚었다.
결국 희원에게 랑일이를 맡기게 된 기준은 전화를 끊고 곧바로 부장을 한 번 더 닦달했다. 그리고 그다음에 바로 샌드위치를 주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 *
랑일이는 원 실장이 차에 타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희원의 품에 찰싹 붙어 있었다. 원 실장이 탄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투정 부리듯 희원의 어깨에 눈을 비볐다.
“랑일아, 기분이 안 좋아요?”
소풍을 간 랑일이는 처음에는 엄청 신이 났다. 동물을 볼 때마다 작은 부리 같은 입술을 벌리고는 감탄하며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평일인데도 휴일의 연장으로 쉬는 건지 가족끼리 나온 아이들을 보며 눈썹이 축 처지는 걸 희원은 눈치챘다.
“선생님이 제일 좋아요.”
랑일이는 자신의 기분을 쉬이 말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랑일이가 또래에 비해 너무 의젓해서 희원은 그게 마음이 아팠다. 마치 감정을 숨기는 것을 교육받은 아이처럼 굴 때마다 차라리 떼를 쓰고 발을 구르고 울음을 터뜨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도 랑일이 좋아해. 그래서 우리 애기가 기분이 안 좋으면 선생님도 속상해.”
귓가에 속삭이는 희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랑일이 좀 더 희원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희원은 다 안다는 듯 랑일이의 등을 쓰다듬어 주고 더욱 꼭 끌어안아 주었다.
“배는 안 고파? 우리 뭐 먹으러 갈래?”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은 기준에게는 유치원에서 둘이 있겠다고 했지만 모든 아이들이 제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서 텅 비어 버린 유치원에 둘이 있어 봐야 랑일이의 기분만 더 안 좋게 될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우리 고기 먹을래?”
“네!”
“걸어갈 수 있어?”
희원의 물음에 랑일이는 조금 더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건지 고개를 젓고는 다시 품속을 파고들었다.
“그래! 그럼 선생님이 조금 더 안아 줄게.”
랑일이가 희원의 목을 끌어안고 뒷머리의 머리칼을 작은 손으로 만졌다. 희원이 소리 내어 웃자 랑일이가 조금 더 꼼지락거리며 만지는 게 느껴졌다.
희원은 유치원 선생님들하고 종종 가곤 하는 고깃집으로 향했다. 유치원에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그리 시끄럽지 않고 깔끔했다.
“선생님.”
5분 정도를 안고 걸었을까. 랑일이 희원을 불렀다.
“응?”
“내려 주세요. 걸어서 갈래요.”
“그럴래?”
희원이 랑일이를 바닥에 내려 주자 랑일이는 고사리 같은 손 한쪽을 쭉 뻗었다. 희원이 랑일이의 손을 꼭 잡아 주자 랑일이가 방긋 웃었다. 이제 기분이 좀 풀린 듯해서 희원은 한시름 놓았다.
“가서 고기 많이 먹어야 해.”
“네.”
착한 아이처럼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에 희원이 부드러운 손길로 랑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가게로 들어온 희원은 랑일이를 옆에 앉히고는 고기를 주문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서 기준에게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다. 그때 타이밍도 좋게 기준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 왔다.
“네, 아버님.”
―선생님, 죄송합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한 시간 정도 더 걸릴 것 같은데, 본가에 부탁해서 랑일이 데리러 갈게요. 정말 죄송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이미 시간은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희원은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아서 랑일이와 둘이 저녁을 먹으며 천천히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기준은 너무나 미안해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아버님. 랑일이랑 저녁 먹으러 왔으니까 천천히 일 보고 오세요.”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도 생활이 있으시잖아요. 내일 출근도 하셔야 하고요. 얼른 사람 보낼게요.
“아버님, 지금 랑일이랑 고깃집 들어와서 이미 주문도 했어요. 그러니까……. 어? 잠깐만요.”
옆에서 통화하는 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랑일이가 희원의 소매를 쭉쭉 잡아당겼다. 희원이 기준에게 양해를 구하고 랑일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 랑일아? 아빤데 바꿔 줄까?”
“네.”
기분이 괜찮아졌던 랑일이는 입이 좀 나온 게 다시 불퉁해지려는 모양이었다.
“아빠.”
―어, 랑일아.
“다른 사람 싫어.”
―응?
기준은 다짜고짜 다른 사람은 싫다고 말하는 랑일이에게 뭐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시 기다렸다.
“선생님이랑 있을 거야.”
랑일이는 쐐기를 박듯 다시 한번 말했다. 기준은 그제야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고 말을 골랐다.
―아들 그건 안 돼. 선생님이 너만 볼 수는 없는 거야.
기준은 랑일이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해야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집에 가서 가족들하고 밥도 먹고, 친구들도 만나고 그래야지. 아빠가 일하고 퇴근하는 것처럼 선생님도…….
“싫어. 나 집에 안 가. 나도 선생님 같은 엄마 갖고 싶어!”
옆에서 듣던 희원이 서둘러 랑일이를 품에 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랑일아, 선생님이 아빠랑 통화할게. 읏차! 그동안 선생님 무릎에 좀 앉아 있자.”
희원이 랑일이를 무릎에 앉히고 뒤에서 폭 감싸 안았다. 자칫하면 이러다 고깃집에서 제 아빠와 싸우다 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버님, 저 진짜 괜찮아요. 랑일이랑 있는 것 재밌어요. 이미 고기도 나왔고요. 둘이 먹고 있을 테니까 어서 오셔서 같이 드세요. 아직 저녁도 안 드셨을 텐데요.”
기준은 더 이상 실랑이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한시라도 빨리 일을 마치고 가는 게 나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빨리 마치고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네, 주소 보내 놓을게요. 천천히 일하고 오세요.”
* * *
기준은 머리가 아파 왔다. 랑일이가 은근히 고집이 있어서 저러면 진짜 골치가 아프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지금까지 금기어인 것처럼 ‘엄마’라는 단어도, 존재도 신경 쓰지 않고 입에 올리지 않았던 랑일이인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더욱 난감한 것은 랑일이는 아이라서 희원의 앞에서 서슴없이 저런 말을 꺼낼 거라는 거다.
불쑥불쑥 치고 들어올 때 기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벌써부터 곤란해졌다. 집에 가서 랑일이에게 ‘선생님 같은 엄마’ 이런 말은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거라고, 하면 안 된다고 단단히 일러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나저나 기준은 책상 위에 놓인 샌드위치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빨리 끝내고 희원에게 속이 꽉 찬 샌드위치를 안겨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인생사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일이 자꾸만 꼬이기 시작했다.
속으로 부장을 엄청 까고 있는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부장이 서류를 들고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들어왔다. 서류를 훑는 기준의 눈이 매의 것과 닮았다. 콘텐츠 사업부 부장은 맹수 앞에 놓인 보잘것없는 먹잇감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기준은 이러다 막말이 나갈 것 같아서 심호흡을 하며 애써 참아 냈다.
“지금 이따위 서류 하나 때문에 퇴근도 못 하게 막고 있었던 겁니까?”
기준이 이를 윽물며 말을 한 자 한 자 뱉어 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부장씩이나 되어서 지금 기한도 못 맞추고 그 날짜에 맞추어 검수도 제대로 못해서 이 사달을 만듭니까?”
제대로 칼같이 퇴근해서 랑일이를 데리고 갔으면 자신이 희원에게 폐를 끼칠 일도 없었다. 랑일이가 고집을 부리고 떼를 쓸 일도 없었을 테고, 희원의 소중한 시간을 하염없이 잡아먹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기서 더 말해 봐야 이미 지난 시간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고 기준으로서는 1초라도 빨리 퇴근하는 게 더 나았다.
“됐습니다. 더 말해서 뭐 하겠습니까? 들어가세요. 나도 퇴근할 테니.”
기준은 결재판을 툭 내려놓고는 먼저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알아서들 퇴근하세요.”
기준은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미 핸드폰으로 검색해 봤던 주소를 상기하고는 곧장 그 고깃집으로 차를 몰았다.
작은 가게 앞에 간신히 주차를 하고는 기준은 고깃집 안으로 들어섰다. 희원이 가장 안쪽에 둘이 앉아 있다고 미리 귀띔해 주어 기준은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아빠!”
랑일이가 먼저 기준을 발견하고는 웃었다. 언제 떼를 쓰고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던 건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예쁜 미소로 기준을 향해 엉덩이를 들썩이는 랑일이를 보며 기준이 기가 막혀 웃었다.
“오셨어요? 아직 저녁도 못 드셨죠? 앉으세요, 고기 더 주문할게요.”
“선생님 빨리 들어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기준은 자신의 저녁 식사보다는 희원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먼저였고 그의 귀갓길이 더 중요했다.
“아빠, 오늘 선생님이 나 집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랑일이의 말에 기준이 무슨 말인가 싶어 희원을 바라봤다.
“랑일이가 집까지 바래다주면 이제 떼쓰지 않는다고 그래서 집까지 같이 가기로 약속했어요.”
“네? 아니, 그래도……. 이랑일! 선생님을 곤란하게 하면 안 되는 거야.”
기준이 얼굴을 굳히고 랑일이에게 말하려고 하자 희원이 서둘러서 막았다.
“아버님, 괜찮아요. 안 그래도 랑일이와 오늘 일에 관해서 드릴 말씀도 있으니까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세요?”
“아, 네. 그럴게요. 죄송합니다. 랑일이 때문에 자꾸만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아니에요. 앉으세요. 식사하세요. 저희도 더 먹을래요. 그치, 랑일아? 더 먹을 수 있지?”
랑일이가 손에 포크를 꼭 쥐고는 결의에 찬 눈빛을 해 보였다. 그러자 희원이 귀엽다는 듯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랑일이를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결국 집까지 오게 된 희원에게 기준은 따듯한 차를 한 잔 타 주고는 랑일이를 얼른 씻겨서 나오겠다고 말했다.
오늘 많이 걸었던 랑일이는 아무리 낮에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서 잠들었다고 해도 밤이 되니 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면서도 혹시 희원이 중간에 차에서 내려 도망가기라도 할까 봐 졸린 눈을 끔벅거리며 희원의 손을 꼭 붙들었다.
기준은 랑일이를 어서 재우고 희원과 빨리 대화를 끝낸 뒤 희원을 집에 보내 주는 게 그를 위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랑일이를 씻긴 뒤 수건에 돌돌 말았다.
랑일이는 목욕을 하는 중에도 따듯한 물에 들어가 앉아서 꾸벅꾸벅 졸더니 결국 머리를 말려 주고 품에 안았을 때는 고롱고롱 잠에 빠져든 뒤였다. 랑일이를 얼른 방에 누인 뒤 기준이 서둘러 거실로 나왔을 때였다.
“아…….”
거실에는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댄 희원이 그대로 잠에 빠져 있었다. 기준은 희원을 깨우려고 손을 뻗었다가 망설였다.
희원도 분명히 피곤했을 거다. 소풍 가서 종일 여러 아이와 부대끼며 걷고 뛰고, 꼬맹이들이 안아 달라고 하면 거절하지 못하고 안아 주고 그랬을 게 뻔했다. 그중 오늘 희원을 가장 많이 힘들게 했을 아이는 단언하건대 이랑일이었을 것이다.
기준은 주말에 오롯이 랑일이하고만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웬만하면 아주 급한 일이 아니고서는 회사 일도 뒷전으로 밀어 놓고 그동안 랑일이의 영아 시절을 함께하지 못한 것에 대해 보상이라도 해 주듯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물론 기저에 기준의 아들 바보 면모가 깔려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마음과는 별개로 몸이 피곤하고 힘든 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모든 운동을 섭렵하고 운동으로 다져진 몸을 갖고 있어도 어린아이의 체력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종일 조잘조잘 떠들어 대는 말에 대꾸해 줘야 하고 이것 하자, 저것 하자 하는 것을 따라 주려면 몸이 힘든 것보다는 정신적으로 피곤한 게 더 컸다.
아무리 유치원 선생이 직업이라고 해도 힘든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준은 곤히 잠들어 있는 희원을 애처로운 듯 바라봤다.
하얀 얼굴이 처음 봤을 때에 비해 조금 마른 듯했다. 붉은 입술을 아이처럼 조금 벌린 채로 색색거리며 자는 게 귀여웠다. 새로운 아이들과 적응하려면 몇 년 된 교사라도 힘들겠지 싶었다.
“으응.”
희원이 앉아 있는 게 불편한지 몸을 이리저리 틀며 소파에 얼굴을 묻었다. 기준은 우선 희원이 편하게 자도록 눕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디가 좋으려나.”
희원이 잠에서 깨도 덜 당황할 수 있는 곳이 좋을 것 같았다. 고민을 하던 기준은 어딜 생각해도 희원이 자다 깨면 여지없이 당황할 것 같아 점점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냥 지금 깨워서 집에 보내야 하나? 랑일이가 없으면 깨워서 집까지 바래다줄 텐데 랑일이가 곤히 자고 있어서 애 혼자 집에 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제 아들에게 시달리고 피곤한 사람을 지금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할 수 없지 뭐.”
기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희원의 앞에서 일어났다.
* * *
여긴 어디일까?
잠에서 깬 희원이 눈앞의 처음 보는 가구들에 눈을 깜박였다. 소파. 어젯밤 자신이 기준을 기다리며 기대어 앉았던 그 소파! 점점 뇌가 깨어나며 희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아!”
자신의 옷을 무엇인가가 잡고 있었다. 희원이 조심스레 뒤를 돌아봤다. 희원의 눈이 커졌다가 꾹 감겼다.
‘미쳤어, 이희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희원의 옷을 랑일이가 손에 칭칭 감고 있었다. 그리고 랑일이를 품에 안고 잠든 기준이 보였다!
희원이 랑일이의 손에 감긴 자신의 옷을 풀기 위해서 힘을 쏟았다. 하지만 어째 자세가 어정쩡해서 쉽게 되지 않았다.
“으으응.”
랑일이가 칭얼거리자 커다란 손이 랑일이의 가슴을 토닥였다. 길쭉한 손가락과 커다란 손바닥, 기준의 손을 보며 희원은 자신을 잡아 주던 단단한 손길이 생각났다. 도닥이던 손이 순간 멈췄다. 그럼과 동시에 희원의 심장도 멈추는 것 같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움직이며 기준이 눈을 뜬 거다.
“아!”
기준이 짧은 탄식과 함께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머리 하나 뻗치지 않고 눈곱 하나 끼지 않은 채 멀끔한 모습이었다.
희원은 랑일이 손에서 제 옷을 빼려던 것을 멈추고 서둘러 제 머리를 꾹꾹 눌렀다. 그러고는 혹시 눈곱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눈가를 비볐다. 그 손을 기준이 잡고 내려 주었다.
“눈 아파요, 그렇게 마구 비비면.”
“죄송해요. 남의 집에서 잠이나 자고. 깨우지 그러셨어요.”
기준이 희원의 손을 여전히 꽉 잡아 쥐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차마 깨울 수가 없었어요. 깨우면 집에 간다고 하실까 봐요.”
희원이 갇혀 있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귀에서 김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
“랑일이 혼자 집에 둘 수도 없고 그러면 모셔다드릴 수도 없어서요.”
“어린애도 아닌데 혼자 가면 뭐 어때요. 잠들어 버려서 너무 죄송해요.”
“종일 랑일이 때문에 힘드셨을 텐데 그런 분을 그 밤중에 혼자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죠. 그건 제가 용납이 안 돼요.”
희원은 기준이 겉모습과는 다르게 정말 따듯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재벌가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기준에 의해 점점 깨져 갔다.
“으으응.”
랑일이를 사이에 두고 손을 잡고 있던 둘이 랑일이가 이리저리 뒤척거리며 칭얼거리자 화들짝 놀라서 손을 놓았다. 랑일이가 뒤척이면서 손에서 희원의 옷을 놓쳤다. 그러고는 손에 들어온 게 없으니 허전한 듯 손가락을 꼼질꼼질 움직였다. 랑일이의 모습에 희원이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으응, 응? 아빠! 응? 선생님?”
눈을 뜬 랑일이가 눈앞에 희원이 보이자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났다.
“어! 진짜 선생님이다!”
랑일이가 뒹굴뒹굴 굴러서 희원의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그러고는 기분이 좋은지 발을 동동 구르며 움직였다. 기준이 피식 웃으며 랑일이의 등을 도닥여 주었다.
“저 먼저 씻겠습니다. 선생님, 저쪽에 보이는 게 욕실이니 편하게 씻으세요.”
기준은 희원이 더 이상 민망하지 않도록 먼저 일어나 안방으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희원은 길쭉한 기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매일 딱 떨어지는 정장만 입은 모습만 보다 편안한 트레이닝 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그를 보니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선생님, 왜 여기 있어요? 나 보고 싶어서요?”
랑일이가 이리저리 뻗친 머리를 하고는 고개를 삐죽 들고 물었다. 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귀여운 랑일이 머리통 이곳저곳에 입을 맞췄다. 랑일이가 좋다고 까르륵거리며 웃는 소리가 조용하기만 했던 집 안을 가득 채웠다.
* * *
씻고 나온 희원이 민망함을 주렁주렁 달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친구네 집도 아니고 학부모네 집에 와서 잠을 자고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아침까지 얻어먹는다. 이게 정상은 아닌데 기준과 랑일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아서 희원은 자신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 보려고 노력 중이었다.
“조금만 앉아 계세요. 금방 차릴게요.”
“제가 뭐 도와 드릴 건 없어요?”
희원이 식탁 앞에서 엉거주춤 서서 물었다. 기준이 고개를 저으며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는 채소를 볶기 시작했다.
“선생님, 아빠 오므라이스 잘해요.”
랑일이가 어린이용 의자에 앉아서 희원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진짜? 잠깐만 랑일아. 선생님 손 차가운데.”
씻고 났더니 손이 더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기준이 랑일이 몫의 오므라이스를 식탁 위에 올려 두고는 랑일이가 만지고 있는 희원의 손을 잡아 쥐었다. 잘생긴 얼굴이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설마 찬물로 씻으셨어요?”
기준의 물음에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왜 이렇게 손이 차가워요. 보약이라도 한 제 지어 드려야지 안 되겠네.”
기준이 혼잣말하듯 말을 흘리고는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접시에 희원의 몫과 제 몫의 밥을 담았다. 따듯한 국을 퍼서 각자의 자리에 놓아 주고 기준은 여전히 어찌하지 못하고 서 있는 희원의 어깨를 잡아 자리에 앉혔다.
“앉아 계세요. 물컵만 놓으면 되니까.”
모든 일을 도우미에게 시킬 줄 알았는데 손수 밥을 하고 차리기까지 하는 기준의 모습에 희원은 솔직히 놀랐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재벌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희원은 또 이러한 재벌이 있을까 궁금했다.
“자, 드세요. 랑일이도 먹고.”
“아빠, 잘 먹겠습니다!”
“아버님, 잘 먹을게요.”
기준이 웃어 보였다. 한술 뜬 희원이 그 맛에 감탄했다.
“맛있어요, 정말.”
“입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많이 드세요.”
그렇게 셋은 평일 아침을 같이했다.
밥을 먹고 난 뒤 희원이 설거지를 하겠다고 했지만 기준은 고개를 저었다. 평일 아침은 늘 분주했지만 오늘은 랑일이가 평소보다 일찍 깬 바람에 커피까지 내릴 수 있었다. 기준은 커피를 희원에게 쥐여 주었다.
“이런 것도 할 줄 아세요?”
“별걸 다 하죠?”
기준이 웃었다.
“원래 이것저것 소소하게 하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장난감 만드는 일 하는 거고요.”
희원이 뭔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하려던 이야기는 결국 하지 못했네요.”
“아… 죄송해요. 제가 잠드는 바람에.”
“아니에요. 그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라. 이놈 얘기를 본인 앞에서는 할 수 없는 거니까, 혹시 선생님 시간 괜찮으시면 일요일 점심때라도 같이 만나서 말씀하실래요?”
“네?”
“아, 죄송합니다. 일요일은 선생님도 쉬시는 날인데, 제가 또 저만 생각했네요.”
기준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희원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아버님. 그게 아니라 랑일이는 어쩌나 싶어서요.”
“잠시 동생네에 맡기려고요. 동생네도 아이가 있거든요. 어떻게 시간 괜찮으세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시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시간과 장소 정해서 다시 연락드릴게요.”
“네.”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랑일이가 유치원 원복을 입고는 희원의 앞에 섰다.
“랑일이 준비 다 했어?”
“네!”
“우리 랑일이 최고네. 혼자서 옷도 잘 입고.”
희원은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간 옷깃을 꺼내 주며 옷매무새를 만져 주었다.
“그럼 갈까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랑일이는 어쩐지 신이 나 보였다.
“선생님, 빨리 가요!”
“그래.”
랑일이가 희원의 손을 꼭 붙잡고는 현관으로 향했다. 신나서 신발을 신는 랑일이를 보며 희원이 미소 지었다.
유치원 앞에 도착하여 내린 희원이 기준에게 미안한 얼굴을 했다.
“어젯밤에 잠들어 버려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제가 더 죄송하죠.”
하지만 그런 희원에게 기준은 더 미안해했다. 어쨌든 평일에 희원을 외박하게 만든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랑일이는 제 아빠와 선생님 사이에 끼어 뱅글뱅글 주위를 돌며 즐거워하기에 바빴다.
“선생님, 선생님!”
“응?”
희원이 눈길을 주자 랑일이가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또 우리 집에서 같이 자요. 더 많이 놀았으면 좋겠어요.”
해맑은 랑일이의 모습에 희원은 그저 따라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기준은 그 순간 희원의 웃는 모습이 소년 같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