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숲속의 은둔자 (30/30)

외전. 숲속의 은둔자

“저기에 있네요. 보이세요?”

“저 하얀 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맞아요. 제가 저 뒤쪽으로 갈 테니까 알피에리 씨가 이 길을 막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되도록 몸으로 막아 보겠지만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밧줄을 쓰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시작할까요? 새끼 양이지만 조심하셔야 해요. 붙잡히지 않으려고 머리로 들이받을 수도 있거든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긴 로미오와 드루시아가 주시하고 있는 것은 한적한 시골길을 걷고 있는 새끼 양이었다.

멀리서 보면 하얀 털 뭉치가 굴러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분명 새끼 양이었다. 드루시아의 집에서 탈출해 혼자서 마을을 떠돌고 있는 새끼 양은 태어난 지 이제 막 한 달이 돼 몸집이 자그마했다. 여기저기 두리번대며 총총 걸어가고 있었는데 풀이 잔뜩 묻은 뭉실뭉실한 엉덩이 털이 하얬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로미오는 시골 일꾼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밭일을 하기에 편한 복장을 갖춘 그는 굽이 없는 가죽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마치 새끼 양의 엉덩이처럼 신발 밑창에 풀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웃옷은 걸리적거릴 일 없이 짧되 품이 넉넉했고 챙이 넓은 모자는 조그만 얼굴을 햇빛으로부터 가려 주고 있었다. 걷어붙인 소매 아래의 팔뚝은 그가 네베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방증하듯 희었다.

드루시아가 신호를 보내며 움직이자 로미오는 주머니에서 밧줄을 꺼내 손에 감았다.

구름조차 한가로워 보이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양 탈출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시장에 나간 드루시아의 남동생을 대신해 새끼 양 포획에 도움을 주기 위해 밭일을 하다 말고 온 로미오는 넓은 시골길 한복판을 주시했다. 뿌옇게 보이는 길 너머에 새끼 양이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거리가 먼 데다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식별할 정도는 됐다.

네베로 오기 전 기적적으로 돌아온 시력은 별 차도 없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검은 점은 사라져 있었는데 보통 사람들과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무슨 일이든 더듬더듬 손으로 만져 혼자 하는 것은 가능했다.

드루시아는 자세를 낮춰 나무 뒤로 멀리 돌아가더니 길 한복판으로 나가는 대신 울타리를 넘어갔다. 울타리 너머의 땅은 특별히 누군가의 소유인 것이 아니었다. 오래전에 마을 사람들 몇이 길과 들판을 구분하기 위해 말뚝 몇 개를 박아 놓고 울타리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 너머로 넘어간 드루시아는 몸을 낮추고 살금살금 새끼 양의 뒤를 따라가더니 멀찍이 앞질렀을 때쯤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새끼 양은 드루시아를 발견하고 놀라서 몸을 틀더니 로미오 쪽으로 뛰어왔다.

“이 녀석! 거기 서!”

“메에에!”

“알피에리 씨! 새끼 양이 그쪽으로 뛰어가고 있어요!”

드루시아가 뒤에서 쫓아오자 새끼 양은 펄쩍펄쩍 뛰며 달려왔다. 로미오는 나무 뒤에 숨기고 있던 몸을 빼고 길 한가운데로 나가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흰 뭉치를 향해 팔을 벌렸다.

로미오를 본 새끼 양은 우왕좌왕하더니 울타리 사이로 빠져나가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그 틈에 로미오는 재빨리 다가가 새끼 양의 엉덩이를 껴안고 울타리 밖으로 반쯤 빠져나간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메에에!”

새끼 양이 발버둥을 치며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자 로미오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얘기했다.

“괜찮아. 가만히 있어.”

드루시아가 얼른 뛰어와 새끼 양의 목에 목줄을 채우자 로미오는 바닥에 새끼 양을 내려 줬다.

양이 크게 울며 머리를 흔들자 드루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새끼 양의 머리를 마구 만졌다.

“이 녀석도 참, 탈출하는 데 재주가 있다니까요. 언제 여기까지 온 걸까요?”

“다행입니다. 멀리 갔더라면 아마 오늘 안에 못 찾았을 겁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이런 낮에 탈출해서 다행이에요. 밤늦게 탈출했다면 골치 아파졌을 거예요.”

네베에 온 지 어느새 보름이 훌쩍 넘어가고 있는 로미오는 이제야 비로소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한 너른 길을 응시했다.

네베에 도착한 첫날 밤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혀 자신이 이곳으로 돌아온 이유를 설명했던 로미오였다. 그 자리에는 드루시아도 있었다.

피에트로의 죽음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과정은 예상대로 순탄하지 않았다. 피에트로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과 알지 못하는 이들까지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지만 그 누구보다 가장 슬퍼할 로미오가 의연한 덕에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비교적 빨리 슬픈 마음을 떨쳐 냈다.

로미오가 엔초의 나이였을 때부터 함께 나고 자라 어린 피에트로를 기억하고 있는 아브리아나와 데시가 가장 슬퍼했지만 두 사람 역시 견디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하거나 오래 시름에 잠겨 있지는 않았다. 모두 로미오의 덕분이었다.

네베 생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드루시아에게 도움을 받으며 그녀와 부쩍 가까워진 로미오는 때때로 그녀와 함께 시장에 나가 식료품을 사 오거나 오늘처럼 우리를 탈출한 양을 같이 잡았다. 사물을 뿌옇게나마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드루시아의 도움 없이도 혼자 농사일을 할 수 있게 된 로미오의 하루 일과는 간단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한 후 집 근처의 텃밭을 가꾸거나 마을의 일손을 도운 뒤 정오 무렵에 점심을 먹는다. 이후 다시 일을 하다가 해가 질 무렵에 이른 저녁을 먹고 서둘러 잠자리에 든다. 닷새에 한 번꼴로 마을 광장의 술집에서 마을 사람들과 다 함께 술을 마셨고 이틀에 한 번꼴로 묘지에 들러 어머니와 아버지, 피에트로의 묘를 살폈다.

묘지에 갈 때는 늘 꽃을 들고 갔는데 가끔 누군가가 피에트로의 묘석 위에 꽃을 올려놓고 간 것을 볼 수 있었다. 더 이상 묘지기에게 맡길 필요가 없어져 직접 묘지를 돌보는 로미오는 제법 능숙하게 잡초를 뽑고 묘석을 닦을 수 있게 됐다.

로미오를 ‘알피에리 씨’라고 부르는 드루시아는 어떤 면에선 로미오보다 네베 생활에 익숙했기 때문에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물론 로미오가 더 능숙한 면도 있었다.

“울타리 안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면 새끼 양이 탈출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 안에 어미 양과 같이 가둬 두었습니까?”

“아니요. 어미 양이 어젯밤에 다리를 다쳐서 집 뒷마당의 우리로 옮겼어요. 밤새 거기서 다리의 상처를 살피느라 새끼와 떨어뜨려 놓았어요. 역시 그것 때문에 탈출한 걸까요?”

“다친 어미 양을 새끼 양의 우리에 넣어 주고 울타리를 새로 짓는 게 좋을 겁니다. 현재 울타리 높이가 어느 정도입니까?”

“제가 울타리 앞에 서면 적어도 여기까지는 와요.”

“지금껏 울타리의 높이가 높아서 양들이 탈출하지 않은 게 아니라 탈출하기 충분한 높이인데도 우리 안의 환경이 좋아 얌전히 갇혀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이 기회에 울타리 높이를 높게 지어 보십시오.”

“그럴까요? 그렇지 않아도 동생이 며칠 전부터 울타리를 새로 지어야 할 것 같다고 얘기했거든요. 역시 양들한테는 너무 낮은 높이였던 것 같아요. 제 어깨높이까지 높여 봐야겠어요.”

“울타리를 새로 짓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뇨, 동생이 돌아오면 시킬게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새끼 양을 한 번에 잡을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드루시아는 새끼 양의 턱을 쓰다듬다 말고 옛일을 떠올렸다.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제 양을 잡아 주셨죠? 조반니 스포르차 선생님께서 말이에요. 바로 저 길에서 그분이 제 양을 잡아 주셨잖아요.”

드루시아는 멀리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길을 가리켰다. 다 비슷해 보이는 길이었지만 그녀는 용케 알아보고 회상에 잠겼다.

“그분께서는 잘 지내시려나요?”

드루시아의 말에 로미오는 그녀가 가리키는 길의 반대편을 바라봤다. 시선이 가 닿는 곳에는 건넛마을로 이어지는 숲이 있었다.

울창한 숲속에는 약 오십여 년 전에 지어진 오래된 저택이 하나 있었다. 로미오가 어린 시절에도 본 적 있는 저택이었는데 네베에 온 날 마을 사람들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버려진 저택이라고 했다. 저택의 주인이 그곳을 내버려 둔 채 죽어 돌볼 사람이 없는 데다 너무 외진 곳에 위치해 있어 살 만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거미줄이 무성하게 쳐진 데다 낡아서 흔들거리는 나무 문을 가진 그 저택을 둘러본 로미오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 카를로타가 네베로 보낸 조반니의 감시인들과 은밀히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마을 인근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조반니는 그다음 날 그 저택으로 들어갔고 그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로미오는 단 한 번도 그를 만나러 가지 않고 있었다.

조반니의 감시인들과 연락할 방법은 마련돼 있었기 때문에 조반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한밤중에라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조반니를 만날 방법은 숲속의 저택으로 찾아가는 것이 유일했다.

로미오는 그 유일한 방법을 외면하고 있었다.

네베에 도착하고 난 뒤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붉은 지붕 집을 수리하는 데만 해도 열흘이 넘게 걸린 데다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살기 위해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데 다시 며칠이 걸렸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온전히 조반니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이기도 했다. 스스로의 결정을 감내하고 이곳으로 왔고 또 그간 마음을 정리하려 애쓴 덕에 확연히 전보다 초연해졌지만 조반니가 네베에서 은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할 마음은 아직 없었다.

그를 이해하기로 결정했음에도 그와 만나 사적인 대화를 하고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여전히 꺼려졌다.

조반니의 회복을 돕고자 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광증을 치료하기 위해 은밀히 주치의를 알아보았지만 거기까지였다. 감시인을 통해 조반니의 일상을 전해 듣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그가 정확히 어떤 모습으로 저택에서 생활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마을 사람들 중 누군가가 그 저택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즉각 조치를 취해야 했기 때문에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데다 아직 안전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어 조반니와 불필요한 만남을 가지는 것이 꺼려졌다.

“양을 잡는 것을 도와주셨으니까 오늘 점심은 제가 대접할게요. 어떠세요?”

긴 생각에 잠겨 있던 로미오는 드루시아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모처럼 식사 대접을 해 주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이틀 전과 그 전날에도 제게 점심을 대접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랬나요?”

“저도 이제 엄연히 네베 사람인데 늘 대접만 받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은 제가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시간이 되시겠습니까?”

“저녁이요? 네, 그럼요. 당연히 되고 말고요. 좋죠.”

로미오가 어느 정도로 볼 수 있는지 아는 드루시아는 구태여 괜찮겠느냐고 여러 번 묻지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면 저녁때 뵙겠습니다. 동생분도 꼭 모시고 오십시오. 배부르게 드실 수 있도록 넉넉히 음식을 준비하겠습니다.”

“기대되는걸요? 그럼 저는 포도주 두 병을 챙겨 갈게요.”

그때 멀리서 아브리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멀리 보이는 언덕 위에서 나타난 그녀는 팔을 높이 들고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로미오! 엔초에게서 편지가 왔시!”

* * *

그래서 매일 즐겁게 지내고 있어. 밀라니 선생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야. 이곳에서 제일 좋은 건 원하는 만큼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거야. 나흘에 한 권씩 읽는 걸 목표로 하고 있는데 말처럼 쉽지 않은 것 같아. 요즘 가장 재미있는 수업은 기하학 수업인데 기하학 선생님께서 얼마나 똑똑하신지 형은 모를 거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