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마침내 막은 내려지고
이른 새벽녘 공회당 옆에 자리하고 있는 재판정에서 재판이 열렸다. 살인죄로 붙잡힌 사형수가 공개 교수형을 선고받은 지 이틀 만이었다.
재판 후 형이 집행되기까지 짧은 유예가 주어졌기 때문에 오늘 재판의 죄수들은 약 네 시간 뒤에 형을 받기로 돼 있었다. 죄수들에게 내려질 형이 지나치게 잔인할 것으로 짐작되는 데다 죄수들은 모두 반역자였기 때문에 재판의 내용 또한 뻔해 구경거리가 적었으므로 재판정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직 아침 해가 떠오르기도 전인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재판이 열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도 많았다.
일찍 와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죄수들을 아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재판정 내에 많은 수의 군인들이 배치된 데다 재판정 입구에도 보초를 서는 경비병들이 있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극도로 엄숙했다. 재판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은 잡담을 주고받기 마련이었지만 오늘 재판에서만큼은 그런 소곤거림이 들리지 않았다.
앉아 있는 이들은 대부분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일부는 특히 더 서글프고 침통해 보였다. 그 자신들도 며칠 전에 제6군단의 부대로 끌려가 취조를 받았기 때문에 오늘 재판의 죄수들이 어떤 형을 선고받을지 너무나 잘 알았다. 국가반역죄라는 중죄를 범한 죄수들이 받게 될 형벌은 한 가지로 정해져 있었다.
안개가 걷히지 않은 어둑한 거리를 걸어 홀로 재판정에 도착한 발레리아는 일부러 가장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재판정으로 오는 길에 하숙집에 들러 로미오에게 판결을 함께 보자고 이야기했으나 그는 아침 일찍 들러야 할 곳이 있다며 거절했다. 장소를 얘기하지 않는 것으로 봐 혼자 다녀와야만 하는 곳이 있는 것 같았다. 어젯밤 늦게 그로부터 네베로 내려가 살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발레리아는 대략적인 사정까지 전부 전해 들었기 때문에 그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 혼자 재판정을 찾았다.
재판이 시작되자 실내에는 재판정으로 걸어들어오는 판사들의 발소리만이 홀연히 울렸다. 이번 재판의 죄인들은 판사들이 자리에 앉고 난 후 제6군단의 장교가 쥔 포승줄에 몸이 묶인 채 재판정 안으로 들어섰다.
레오나르도가 가장 앞장섰으며 그 뒤로 친치아와 다 몬티, 노프리, 도밍고, 소피아, 니콜로가 뒤따랐는데 엘베라는 가장 마지막에 들어와 섰다. 그들은 검거될 때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으며 입에는 모두 재갈이 물려 있었다. 상태가 가장 심각한 것은 엘베라였다. 품이 넓은 겉옷을 걸치고 있는 그녀였지만 옷자락이 흔들릴 때마다 몸을 뒤덮고 있는 붕대가 보였다. 피에 절은 붕대 위에 다시 붕대를 몇 번이고 감아 상처 위에 둘러 놓았지만 거동에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고문을 당하기 이전의 온전한 그녀를 본 적이 있었던 발레리아는 그녀가 반역자라는 사실을 잊고 눈을 돌렸다. 검거되고 겨우 며칠이 지났을 뿐이지만 엘베라는 살아 있는 시체와 다름없는 참혹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재판정 한편에 서서 사람들을 주시하던 마르코도 발레리아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두 사람은 눈짓으로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기만 하고 그 이상의 반가움은 표현하지 않았다. 둘 다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재판을 시작하겠소. 본 재판에서 국가반역죄로 심판의 자리에 올라야 할 죄인들은 모두 열세 명이나 그중 한 명의 죄인이 오래전에 사망하였기에 그 관을 꺼내 부수고 부패한 시신을 대상으로 극형에 추시할 것이오. 재판에 궐석한 남은 네 명의 죄인 중 세 명의 죄인은 반역죄의 취조 과정에서 사망해 판결 결과에 따라 형을 집행할 것이오. 남은 한 명의 죄인은 그 본의가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음이 인정되었고, 또 네 사람을 살해한 살인죄로 공개 교수형을 언도받아 이번 판결에서 제외되었소. 하여 본 재판에서는 남은 죄인들에 대한 판결을 내릴 것이오.”
국가반역죄라는 특수한 죄에 관한 재판이었기 때문에 여덟 명의 상위 단원들은 피고인석이 아닌 그 아래의 낮은 단 위에 올라서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지만 혹여나 재판정 내의 군인들에게 체포라도 될까 쉽사리 동정 어린 눈길조차 보내지 못했다.
레오나르도는 의사였기 때문에 그의 체포 소식이 알려지고 그의 주변 인물들 중 다수의 의사들이 제6군단에 조사를 받았는데 그들은 착잡한 듯 고개를 떨구거나 혀를 찼다. 그들이 오랫동안 지켜본 레오나르도는 과묵하긴 하지만 남에게 악의를 품지 않는 평범한 의사였다. 그가 불온한 단체의 단원이었다는 사실이 그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누군가의 꼬임에 의해 벌어진 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젊고 잘생긴 데다가 전도가 유망했던 그는 이제 죄수 꼴로 끌려 나와 사형을 앞두고 있었다.
“죄인들은 반동적 요언과 사상이 적힌 벽서를 통해 민중을 규합하고 반국가적 음모를 꾀하였는데, 이는 명백히 공화국을 전복하려는 음모행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시하오. 또한 이들은 군주의 죽음을 획책하고 그 계획에 따른 준비행위를 하였기에 루바노의 반역법에 의해 국가반역죄로 처형함이 옳소.”
상위 단원들은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굴욕을 견디는 것처럼 보이는 이는 노프리 혼자였고 나머지 이들은 그저 침묵하며 판사의 말을 들었다. 그들은 아직 그 누구도 살해하지 않은 데다 이 자리에 공화국의 시민으로 서 있었지만 이 나라가 가장 적대시하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자리에 앉아 재판을 지켜보는 이들과 근본적으로 그 존재가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군주의 죽음을 계획한 반역죄는 군주에게 신체적 상해를 입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동시에 그 권위에 도전하여 침해하고자 하는 목적 두 가지를 갖고 있소. 따라서 죄를 벌하기에 앞서 이들의 반역이 지니는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법령에 따라 처리하고자 하오.”
재판정 내에서 감히 흐느끼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은 친치아의 시종 소녀가 유일했다. 발레리아는 판사가 판결문을 읽는 동안 그 소녀가 연신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떠는 것을 봤다.
“죄인들은 반동적인 목적을 나누어 가진 다른 단원들의 행방을 감춰 주기 위하여 그들의 이름을 문서로 작성하여 은닉을 돕고 국가전복 활동을 고무하였으므로 이 역시 죄로 다스림이 옳소. 또 죄인들은 형벌을 피하고 국가반역죄의 흔적을 숨기기 위해 도피를 시도하였으니 이 역시 법령에 따라 형벌을 적용할 것이오.”
판사는 이외에도 판결문에 적힌 갖가지 세세한 죄목들을 전부 읽었다. 국가반역죄라는 이름으로 상위 단원들에게 내려진 죄목은 십수 가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판결문을 전부 읽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들에게 내려질 형벌의 판결만을 남겨 둔 채 판결문 낭독이 끝나자 재판정 내는 그야말로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판사는 판결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자신의 발아래에 선 죄인들을 내려다봤는데 그의 눈빛은 사형수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사형집행인의 눈빛이었다.
엄격한 표정으로 재판정 내의 모든 사람들을 둘러본 후에야 판사는 다시 죄인들을 봤다. 루바노 역사 속으로 사라질 그들의 이름이 적힌 판결문을 내려놓은 판사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여, 루바노 공화국의 이름으로 죄인들에게 공개 화형을 가한 뒤 가산을 몰수하는 재산 몰수형을 선고하도록 하겠소.”
재판정 내에 짧은 수군거림이 퍼졌으나 곧 가라앉았다. 울음을 터뜨리는 이도 없었고 재판 결과에 만족하며 후련한 기색을 내비치는 이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공개 화형이 집행된 지 수십 년 만에 이례적으로 내려진 공개 처형 판결이었기 때문에 충격에 빠져 말을 얹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여덟 명의 상위 단원들은 그 어떤 말이나 표정도 내비치지 않고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네 시간 뒤면 더는 산 사람이 아니게 될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할 여유조차 남지 않은 그들이었다. 주어진 유예는 너무나 짧았고 형벌은 몹시 잔인했다.
가장 뒷자리에 앉아 판결을 모두 들은 발레리아 역시 그 어떤 만족스러움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여덟 명의 죄인의 얼굴을 차례로 한 번씩 본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판정을 막 나가려고 할 때 판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다만 각하께서 은전을 내리셨기에 한 명의 죄인에 한해 감형을 통해 죄행을 벌하겠소.”
판사는 어젯밤 자신의 앞으로 도착한 통령의 서한을 펼쳤다. 죄인에게 판결을 내리는 판사의 노고를 치하하는 말로 시작된 그 서한에는 특정 죄인의 감형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죄인 친치아 콘델로는 국가전복을 음모하고 반역죄를 범하여 엄한 징치가 요구되오. 그러나 연소한 죄인을 화형에 처하는 것은 극악한 처단일뿐만 아니라 국가전복 음모에 가담하고자 반국가적 조직에 입회하였을 때 죄인이 입회 의사를 결정함에 있어 옳고 그름을 변별할 능력이 미약하였음을 인정하는 바, 그 공평하고 의로운 도리에 의해 공개 화형이 아닌 종신구금형에 처하는 바요.”
수군거리던 사람들은 다시 한 차례 속닥대는 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통령이 그의 순수한 뜻에 따라 반역자에게 너그러이 은전을 내린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판사의 말을 들은 친치아는 고개를 재빨리 쳐들고 레오나르도를 올려다봤다. 굳어진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으나 레오나르도는 그저 짧은 눈길만 주고 고개를 바로 했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발레리아가 이곳에 자리해 있음을 이미 알고 있던 레오나르도는 재판정 문 앞에 서 있는 그녀를 응시했다. 이 자리에 로미오가 없었기 때문에 눈을 가볍게 내렸다가 들며 대신 인사를 전했다.
“형의 집행을 위하여 죄인들을 구금하시오. 네 시간 뒤, 가장 존귀한 루바노 공화국의 법에 따라 이들을 모두 화형에 처하겠소.”
* * *
“평온한 루바노의 땅 아래에 묻힌 자여. 그 영혼과 육신에 축복과 평화가 깃들었나니 진정한 믿음으로 구원받으소서. 우리의 기도는 불시에 꺼져 버린 생명에 다시 빛을 밝히어 그대의 떠나감을 축복할지니 그 어느 하늘 아래서든 영원한 안식을 찾으리라.”
장례를 도와주는 이들의 추도사가 끝나자 로미오는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멀찍이 물러나 있는 묘공들도 저마다 눈을 감으며 묵도를 올렸다. 바치시의 묘지에서 열린 간소한 장례식에는 추도사를 읽고 구슬프게 울어 주는 여인들도 있었고 묘석 위에 올릴 꽃도 마련돼 있었다.
갖고 있는 검은 옷 중 가장 깨끗한 옷을 골라 입은 로미오는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날이 맑아 바치시 묘지 위로 이른 아침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로미오는 검은 점 너머의 뿌연 윤곽을 따라 피에트로가 묻혀 있는 땅을 눈으로 더듬었다. 카를로타가 준비해 준 장례식은 묘지기도 아직 졸음을 다 이겨 내지 못했을 정도로 이른 시간에 치러졌다.
“추도의 기도가 끝났으니 이제 관을 덜어 내겠습니다요.”
추도사를 읽은 여인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물러가자 묘공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로미오와 마찬가지로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예, 부탁드립니다.”
“그럼 지금부터 땅을 파도록 하겠습다요. 자, 모두들 시작하지.”
여러 명의 묘공들이 달라붙어 삽으로 땅을 파자 아침 이슬을 머금은 축축한 흙이 주위에 높은 담처럼 쌓여갔다.
묘지에 자욱하게 깔려 있던 안개가 서서히 걷혀 가고 있었다. 늦은 밤의 묘지는 으스스했지만 아침의 묘지는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묘지 내에 심어진 나무 위에 흰 가면올빼미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묘지에서 올빼미를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안개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녀석은 묘공들이 땅을 파내는 소리에 날갯짓을 하며 멀리 날아갔다.
로미오는 눈가를 손으로 가리고 그 움직임을 눈으로 좇다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뿌옇게 보였지만 하늘이 쾌청한 빛을 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추도가 시작되기 전부터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있던 로미오였다. 그것은 착잡함이나 안타까움과는 달랐다. 그는 자신이 피에트로를 떠나보낼 준비를 마쳤다고 느끼고 있었다.
“관을 건드려선 안 되네. 조심하게.”
땅속에서 관이 드러나자 가장 팔뚝이 굵은 묘공이 다른 묘공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관에 삽이 닿지 않도록 주변을 깊이 파내고 손으로 관 주변의 흙을 치워 냈다.
“한 번에 들어 올리지. 하나, 둘, 셋!”
바닥에 무릎을 대고 엎드린 묘공들은 힘을 모아 단번에 관을 밖으로 꺼냈다. 무거운 관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은 그들은 훼손된 흔적이 없는지 이리저리 살핀 뒤 로미오에게 물었다.
“이 관이 맞는지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요.”
묘공들은 로미오가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눈으로 확인해 줄 것을 청했다. 로미오는 가까이 다가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관을 손으로 만졌다. 땅속에 들어 있어 차가웠지만 이 관이 오래전에 조반니가 준비해 준 떡갈나무 관임을 알 수 있었다. 단단하고 섬세함이 느껴졌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크기도 피에트로의 체격에 맞아 이 너머에 들어 있는 것이 피에트로의 시신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매장한 이후 처음으로 만져 보는 관이었다. 이 길로 네베를 떠나게 될 테니 두 번 다시 만져 볼 수 없는 관이었다.
로미오는 한참을 관을 손으로 짚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묘공들을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는 고통이 아닌 다른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예, 맞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마차에 싣겠습니다요. 아주 조심히 모시겠습니다.”
로미오는 뒤로 물러서서 묘공들이 피에트로의 관을 들어 올리는 것을 지켜봤다. 묘공들이 전부 몇 명인지도 알 수 있었고 그들이 관을 들고 멀어지는 뒷모습도 볼 수 있었다. 검은 점에 가려져 전부 보이지는 않았지만 관이 있었던 땅속의 구덩이도 볼 수 있었다.
묘공들을 뒤따라가니 그들은 묘지 담장 밖에 세워진 마차에 관을 싣고 금색과 흰색 자수가 놓인 검은 천으로 그 위를 감싼 후 꽃을 얹었다. 마차는 장례를 위해 검은색으로 치장되어 있었는데 통령의 명령에 의해 네베로 출발하는 마차임을 알 수 있도록 공화국의 문장이 수놓아진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마부도 검은 장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관이 다 실리자 그는 마부대에서 내려와 로미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말씀하신 곳까지 무사히 모셔가겠습니다.”
“관의 주인이 열여덟 살 난 저의 동생입니다. 부디 목적지에 안전하게 다다를 수 있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마부가 다시 머리를 조아리고 마부대에 오르자 뒤에 세워진 마차에 묘공들도 올랐다. 관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마차는 덜컹대지 않고 천천히 출발했다.
홀로 남은 로미오는 멀어져가는 마차를 지켜보다가 묘지를 둘러봤다. 이곳에 다시 올 일이 없음을 실감한 그는 마차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하숙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
“말로 대위님!”
하숙집 2층을 올려다보던 발레리아는 멀리서 들린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군용 마차 한 대가 멈추어서는 게 보였다. 마차에서 급하게 내린 갈리에누스는 군복차림으로 한달음에 뛰어왔다.
숨을 고르는 그의 모습에 발레리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급하게 온 것인가?”
“예, 하아…… 제가 늦지는 않았습니까?”
“로미오가 아직 짐도 미처 다 꾸리지 못했어. 아직 시간이 많으니 걱정 말게.”
오늘 이른 아침에 직접 제5군단의 부대로 찾아가 로미오가 네베로 돌아가게 됐다는 갑작스러운 소식을 갈리에누스에게 전한 발레리아였다. 여유가 없어 그녀에게 더 많은 말을 묻지 못한 갈리에누스는 행여나 인사도 하지 못하고 로미오가 네베로 가 버릴까 조급한 마음으로 급히 온 것이었다.
“다행입니다. 혹시나 길이 엇갈려 대위님께 인사를 드리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여기 서 계신 겁니까?”
하숙집의 2층을 올려다본 갈리에누스는 손으로 눈가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다른 날보다 유난히 날씨가 맑아 눈이 부셨다.
2층 창은 커튼이 쳐진 채 굳게 닫혀 있었는데 오래된 집이었지만 부지런한 집주인 덕에 창틀이 튼튼하고 깨끗했다. 화재의 흔적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로사티 거리 일대에서도 특별히 깨끗한 편에 속하는 집이었다.
“로미오가 떠나기 전에 가 볼 곳이 있다고 해서 외출 중이야. 안내해 주겠다고 하니 사양하더군. 집 안에는 그라나 부인과 엔초만 있어. 함께 2층을 정리하고 있을 거야. 엔초도 내일 떠나야 하니 말끔히 비워야 하겠지.”
“그렇군요. 엔초도 내일이면 이 집을 떠나겠군요. 무소 대위님께도 소식을 전해 드렸습니까?”
“응. 오늘 아침에 상위 단원들의 재판이 열려서 그 재판에서 만나 소식을 전해 줬어. 마침 곧 형이 집행될 시간이군.”
“예… 그렇지 않아도 오는 길에 중앙 광장에 사형대가 마련돼 있는 것을 봤습니다.”
갈리에누스는 애써 복잡한 표정을 거두며 눈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발레리아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으나 곧 얼굴을 풀었다. 감상에 오래 젖어 있기에 형은 곧 집행될 예정이었고 형 집행이 끝나면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런저런 감정을 가져 봐야 소용없었다.
“이제 그라나 부인께서 이 집에서 홀로 지내시겠군요.”
“그런 셈이지.”
“부인께서 많이 쓸쓸해하실 듯합니다.”
“로미오에게 듣자 하니 스포르차 선생의 일로 많이 상심하셨다고 해. 재판을 직접 보신 후에 크게 놀라신 모양이야. 공개 교수형 판결을 듣고 하숙집으로 돌아오신 후에도 내내 눈물을 흘리셨다는군. 사형이 집행됐던 중앙 광장 쪽으로는 당분간 가지 않으실듯해.”
사정을 아는 발레리아와 달리 갈리에누스는 조반니가 죽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심지어 자세한 소식을 들어 보니 조반니는 교수형을 당하기 전에 탑 아래로 추락해 숨을 거뒀다고 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채 모두에게 전시 당하듯 목이 매달려 죽은 까닭에 그가 살인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가혹한 방식으로 죽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높은 곳에서 추락해 죽었으니 로미오에게는 그 의미가 다르게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피에트로를 떠올려 보면 조반니의 죽음은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로미오는 괜찮으니 걱정 말아. 스포르차 선생의 죽음을 의연하게 넘길 거야. 이제 어딜 가도 스포르차 선생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야. 어디에서도 이름이 보이지 않으면 슬플 일도 없을 테지.”
“스포르차 선생님께 살해당한 분들 중에 대위님께서 아시는 분이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연달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혹시 대위님께서 네베로 돌아가시는 게 이 일의 영향이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아 보이신다고는 하나 스포르차 선생님과 많이 친밀하셨으니 말입니다.”
“네베로 돌아가는 이유는…… 글쎄. 로미오에게도 여러 생각이 있겠지.”
“대위님께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것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입니다. 이제 이곳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평화롭게 지내실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요.”
갈리에누스가 아쉬운 듯 깊은 한숨을 쉬자 발레리아도 짧은 한숨을 쉬었다. 가장 좋은 것은 바치에서 모두 함께 사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 역시 로미오의 결정에 못내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가지 말라고 말릴 수 없는 데다 그가 네베로 내려가는 것이 조반니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훌훌 마음을 털듯 목소리를 바꿔 말했다.
“난 이만 들어가서 그라나 부인을 도와드려야겠어. 엔초가 많이 시무룩해한다니 달래 주기도 해야겠고.”
“저는 제6군단이 성벽 근처에서 통행하는 자들을 감시하는 데에 손을 보태야 합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시간이 나겠나?”
“예, 괜찮습니다. 거리 수색을 핑계로 대면 대위님과 인사를 나눌 시간 정도는 있을 겁니다.”
“상위 단원들의 형 집행이 끝나는 대로 무소 대위도 이리로 올 거야. 혹 근처를 지나가다 만날 수도 있을 듯하군.”
“무소 대위님께서 요 근래 많이 고되시겠군요. 안부도 제대로 전해 드리지 못해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오늘 아침에 보니 얼굴이 말이 아니었어. 피에트로의 일이 아니었다면 우리 넷 모두가 지금쯤 부대에 있었을 테니 무소 대위가 혼자 할 일을 나눠 했겠지.”
발레리아의 그 말이 옛 기억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갈리에누스는 하숙집의 2층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로미오를 따라 처음으로 이곳 하숙집을 방문했던 때를 기억했다. 문을 열고 나온 것은 그라나 부인이었다.
“그러고 보면 전과 달라진 게 많은 것 같습니다. 한때의 순간인지 모르고 영원할 줄 알았던 것들이 이젠 더 이상 전의 모습을 갖고 있지 않군요. 곁에 계시지 않은 분들도 있고 말입니다.”
갈리에누스처럼 가만히 하숙집의 2층을 보던 발레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지.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것에 따라 형편과 모습을 바꾸면서 살아가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로미오가 고향에 내려가 그곳에서 행복하길 바라자고. 여태 많은 불행을 견뎠으니 꼭 그래야 해.”
* * *
이른 새벽에 재판이 열린 것과 달리 사형은 정오가 가까워 올 무렵 집행되었다.
상인들은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고 시장 소년들도 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손님들을 모을 시각이었다. 마지막 공개 화형이 집행된 것이 자그마치 40여 년 전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구경을 나와 있었다.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갈 죄인들의 살아생전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고 오늘 이 사형을 구경하지 못한 이들에게 소문을 퍼뜨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사형 집행 시각이 다가오자 공개 화형이라는 말에 몸서리는 치는 이들의 손을 억지로 끌어 잡고 중앙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정확한 시각에 형을 집행하기 위해 감옥 안에는 이미 죄인들이 포승줄에 묶여 사형장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포승줄의 가장 앞에 선 엘베라는 어찌저찌 두 발로 걸을 수 있었지만 몸이 성하지 않았다. 장교 한 명이 그녀의 몸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사형장까지 가는 도중에 쓰러질 것이 뻔했다. 이미 오늘만 해도 몇 번인가 의식을 잃은 그녀는 목숨줄을 겨우 부여잡고 있었다.
“하아, 하…….”
죽어 가는 사람처럼 희미한 숨을 내쉬기 시작한 것이 벌써 이틀째였다. 그녀의 뒤로 레오나르도가 섰고 그 뒤로는 다 몬티와 노프리를 비롯한 다른 단원들이 섰으나 그중 그 누구도 엘베라의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곧 산 채로 몸이 불태워질 그들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서로 대화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취조 과정에서 가장 크게 군에 반감을 드러냈던 노프리조차 포승줄에 팔이 묶인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형 집행을 앞두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면하고자 자결을 꾀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군인들이 면밀히 감시하고 있었는데 얼굴에 나타난 표정으로 미뤄 그들은 이미 그것조차 포기한 것 같았다.
유일하게 화형을 면한 친치아만이 감옥 내에 남아 있었다. 형이 집행될 시간에 맞춰 그녀는 종신구금형을 선고받은 죄수들이 구금돼 있는 다른 감옥으로 옮겨질 예정이었다. 그녀가 여생을 보내게 될 감옥은 아주 깊은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다.
빛도, 사람도 없는 그곳에서 친치아는 그녀의 남은 평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중앙 광장에 마련된 사형대로 호송되기만을 기다리는 동안 레오나르도가 호송을 인도할 장교에게 물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입을 다문 채 바닥을 보고 있었는데 레오나르도만이 장교에게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이틀 전에 공개 교수형을 언도받은 사형수 말입니다. 조반니 스포르차라는 이름을 가진 자입니다. 그자의 소식에 대해 아십니까?”
장교는 조반니가 누구인지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형이 집행되기 전에 탑 아래로 추락했다고 하더군. 숨이 끊어진 채로 사형대에 올랐을 거다.”
교수형이 집행되었다는 것은 통령이 어떤 방식으로든 조반니를 탈출시켰다는 뜻과 상통했다. 레오나르도는 조반니가 무사히 바치를 빠져나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더는 묻지 않았다. 그의 진짜 정체를 한 번도 눈치채지 못했으나 어쨌든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것이 사실이었다. 조반니에게 큰 배신을 당한 것이나 다름 없지만 곧 사형을 당할 레오나르도는 배신감에 사무쳐 있지 않았다.
“이제 형장으로 갈 시간이다.”
중앙 광장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사형 집행을 알리는 종소리는 감옥 안까지 들릴 만큼 아주 크게, 그리고 여러 번 울렸다.
장교가 포승줄을 손에 쥐자 간수들이 다가와 단원들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레오나르도는 재갈이 물리기 전에 감옥 안에 있는 친치아를 돌아봤다. 그리고 호송을 담당한 장교에게 부탁했다.
“짧은 말을 전할 시간을 주십시오. 금방이면 됩니다.”
“그렇게 해라.”
장교의 허락이 떨어지자 레오나르도는 양팔이 묶인 채 친치아의 감옥 앞으로 다가가 섰다.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친치아는 검거 당시와 비교해 조금 해쓱한 상태였다. 레몬빛 단발머리가 뺨과 입가로 흘러내려 있어 표정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친치아.”
레오나르도가 불렀지만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레오나르도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종신구금형이라고 해도 어쨌든 목숨을 부지했으니 화형에 처해지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 죽음으로부터 살아난 것이니 어떻게든 살아 있음에 의미를 갖길 바란다.”
“…….”
“살아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오래전에 네가 내게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해? 그 말을 되새기며 남은 삶을 살아 나가라. 네 시종만큼은 너의 감형을 그 누구보다 기뻐하고 있을 테니 적어도 그 아이가 감옥을 찾을 때면 화형을 면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게 될 거다.”
그녀에게서 대답이 없어 레오나르도가 돌아서는데 뒤늦게 친치아가 입을 뗐다.
“……난 혼자서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재판장은 통령의 은전이라고 설명하며 감형을 내렸지만 아마 다른 몇 가지 이유들이 개입돼 있을 거예요. 그렇죠?”
레오나르도가 돌아보자 친치아는 고개를 들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도, 그런 그녀를 레오나르도를 보는 눈빛도 두 사람 다 죄수의 눈빛이 아니었다.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지금 돌이켜 보면 제6군단과의 협상을 막았더라도 같은 결과가 벌어졌을 것 같아요. 당신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여기 있는 모두가 어느 정도 예견했을 거예요.”
너무도 많은 말을 해야 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친치아는 입을 다물었다. 수 분 후면 레오나르도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게 될 운명이었다. 그와 지금껏 함께 한 일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 기억들을 정리하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추억은 많았지만 그중 어떤 것도 친치아를 위로해 주지 못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짤막한 인사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레오나르도.”
친치아는 다른 상위 단원들을 둘러봤다. 긴 눈빛을 주고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금방 다시 시선을 떨구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떨구기 전 유일하게 다 몬티만이 친치아에게 눈짓으로 마지막 인사를 보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기에 그녀는 짧은 인사 후 친치아처럼 깊게 고개를 떨궜다.
감옥의 문이 열리자 문 너머로 수십 명의 군인들이 사형장까지 이어지는 길을 만들고 있는 게 보였다. 상위 단원들의 죄목과 그들에게 내려진 판결이 정치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감옥에서 바로 사형대로 향하지 않고 중앙 광장 주변을 한 바퀴 빙 돌게 돼 있었다. 죄수의 얼굴을 시민들에게 보여 주고 그들이 얼마나 비참한 운명에 처했는지 전시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경우에 따라 죄수의 옷을 전부 벗겨 나체로 걷게 해 수치심을 주기도 했는데 다행히 오늘 재판의 죄수들은 포승줄에 몸이 묶이기만 했다.
“모두 물러서라!”
말을 탄 장교가 포승줄의 가장 앞에 서서 먼저 나아가며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그 잠깐 사이 엘베라의 호흡이 비정상적으로 빨라지며 그녀가 몸을 가눌 수 없어 비척대자 장교가 그녀를 가장 맨 뒷줄로 데려가 걷게 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가 가장 앞줄에서 걷게 됐다.
살아서 걷는 마지막 길이었지만 수군대는 사람들의 눈초리와 손가락질을 받으며 구경거리로 전락한 신세였다. 생의 마지막 발걸음이었지만 온전히 뜻대로 걸을 수 없었다. 앞에서 이끄는 대로, 군이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가며 이곳에 모여 있는 모든 이들에게 얼굴을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레오나르도는 멀리서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지만 그쪽을 보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만 걸어 나가며 울음이 섞인 그 외침을 지나쳐 갔다.
구경 중인 시민들은 단테의 12인의 어렴풋한 존재만을 느꼈기에 그들의 직접적인 이름을 입에 담는 대신 ‘반역자’라고 단순히 표현하며 입방아를 찧어 댔다. 일곱 명의 상위 단원들 중 한 명이라도 아는 자가 있을라치면 호들갑을 떨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자의 이름을 얘기했다.
중앙 광장에 서서히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광장 주변은 사람들이 수군대며 혀를 차는 소리로 가득 찼다.
“지난 수십 년간 공개 화형이 이루어진 적이 있었던가?”
“없었죠. 비스카르디 통령 각하의 칙서를 보고 까무러칠 뻔했던 기억이 나네요. 사람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것은 누가 처음으로 생각해 낸 형벌일까요?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
“검게 탄 시체를 대체 누가 거둬 가려나, 쯔쯔쯧. 살을 태우는 냄새가 몇 날 며칠을 광장에 떠돌겠어. 시체 썩는 냄새가 고약하다 못해 코를 찔러 대서 당분간은 이 근처를 지날 수가 없을걸.”
“화형당한 시체를 사형대 위에 그대로 걸어 둔다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그게 다 통령 각하의 뜻이 아니겠어? 저자들은 이 나라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자들이 아닌가. 저들 일곱 명의 죄인들 외에 또 다른 수백 명의 죄인들이 다음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잖나. 당분간은 이렇게 계속 형이 집행될 거야. 그것도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시선은 제일 뒤에서 걷는 엘베라에게 가장 많이 쏠렸다. 누가 보아도 혹독한 고문을 당한 것으로 보이는 그녀는 포승줄에 팔이 묶인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몰골이 형편없었다.
극악한 죄를 지은 죄인에 한해 시민들은 돌멩이를 던져 대거나 흠씬 욕을 퍼붓기도 했지만 반역자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일곱 명의 상위 단원들에게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한층 거세진 것은 엘베라의 뒤로 죄인을 호송할 때 쓰이는 마차가 등장했을 때였다. 그 마차에는 취조 중에 사망한 세 명의 상위 단원들의 시체가 묶여 있었다. 부패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의 단계에 이른 것처럼 보이는 시체들은 얼굴 전체에 보랏빛을 띤 채 마차에 묶여 있었다. 마치 마차 뒤를 따라 걷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선 채로 몸을 묶어 놓았는데 시민들 중에는 차마 그 시체들을 보지 못하고 눈을 피하는 이들이 많았다.
“형 집행을 위한 판결문을 읽겠소!”
사형장 앞에 도착하자 일곱 명의 상위 단원들이 사형대 위로 올려보내졌다. 마차에 매달려 있던 세 단원의 시체는 장교들에 의해 사형대 위로 올려보내져 화형을 집행하기 위해 마련된 나무 기둥에 몸이 묶였다.
사형대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발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곧 목숨을 잃게 될 죄인들의 얼굴을 낱낱이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그들의 눈빛은 산 사람이 쉽게 설명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사형대 위로 대총장의 시신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끔찍한 비명으로 뒤바뀌었다.
이미 오래전에 매장됐으나 무덤이 파헤쳐져 꺼내어진 대총장의 시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어디가 머리 부분이고 다리인지 분간하는 것이 불가능해 시체라기보다 유골에 가까웠다. 온몸 전체가 회색에 가까운 기괴한 빛을 띠어서 썩어 들어간 살점이 붙어 있는 부분조차 사람의 몸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시체에서 나는 끔찍한 냄새가 아주 멀리까지 퍼져 나가자 사람들은 도망치듯 뒤로 물러서며 코를 쥐었다.
대총장의 시체를 안고 올라온 군인은 사람이라고 보기 힘든 그것을 화형에 처할 수 있는 나무 기둥에 묶었다. 그나마 형태를 유지한 것은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이었는데 그 옷조차 어떤 형태의 옷인지 정확히 알아보기 힘들었다. 살점이 없어 몸에 붙어 있을 수 없는 다리뼈는 기둥에 매달아도 소용이 없었기 때문에 시체에 붙어 있던 벌레들과 함께 발아래의 짚단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두 눈구멍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머리뼈만이 간신히 목에 붙어 기둥에 묶였다.
“이곳에 자리한 열한 명의 죄인들은 국가반역죄를 공모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소! 이들의 죄목은 루바노의 법 아래 공명한 판결에 의거해 내려졌으며 통령 각하의 은전에 따라 극형을 면한 한 명의 죄인은 종신구금형을 언도받았소!”
형 집행인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우렁찬 목소리로 판결문을 읽는 사이 상위 단원들도 모두 나무 기둥에 몸이 묶였다. 기둥 아래인 발밑에는 불을 붙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짚단이 쌓아 올려져 있었다. 불을 붙일 경우 수초 내에 커다란 불길을 일으키며 타들어 갈 만한 양이었다.
상위 단원들 중 유일하게 몸을 떨고 있는 것은 노프리였다. 그는 재갈이 침에 젖을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린 채 겁에 질려 있었다. 공포에 휩싸인 눈은 발아래에 깔린 짚단을 향해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사형대 아래에서 이쪽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외면했다. 두 뺨이 전부 눈물에 젖은 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보지 않고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저만치서 자신이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바로 마르코였다. 말 위에 올라 있는 그는 이쪽을 보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그 누구에게도 눈길 주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다. 판결문 낭독이 끝나자 사람들의 웅성거림 틈으로 우레 같은 형 집행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열한 명의 죄인들에게 즉시 화형을 집행하라!”
짚단에 불을 붙일 자들이 사형대 위로 올라오자 사람들 사이에서 탄식이 울렸다. 형 집행 방법이 생각보다 더 잔인하게 느껴진 탓에 질겁해 고함을 지르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중앙 광장을 지나던 사람들은 그 소리에 가는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르코는 말을 돌렸다. 등 뒤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불길이 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의 허리를 걷어차 속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 * *
“형, 정말 가야 하는 거야? 정말로……?”
엔초가 문 앞에 서서 애원하듯 묻자 2층에서 짐을 갖고 내려오던 로미오가 문간에 멈춰 섰다.
짐마차에 짐을 싣던 발레리아와 갈리에누스는 두 사람을 돌아보았지만 곤란한 표정이 돼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
조금 전부터 울 것 같은 얼굴로 몇 번이고 정말로 가야 하는 것이냐고 묻는 엔초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눈가가 붉었다. 오늘만큼은 절대 화실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써 하숙집에 남아 짐 정리를 돕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짐 정리는 뒷전이고 로미오의 뒤만 따라다녔다.
“이미 집을 깨끗이 정리한 데다 말로 대위님과 솔로르사노 중위가 손수 짐 옮기는 것을 도와주기까지 해서 이제 2층에는 짐이 남아 있지 않아. 네베에 가기로 이미 어젯밤에 결정을 내려서 마음을 바꾸기 힘들 것 같아. 서로 떨어져 살게 되겠지만 형이 자주 편지를 부칠게. 네가 원한다면 다시 만날 때까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자.”
로미오가 이미 다섯 번도 더 한 말을 반복하며 다시 설명했지만 엔초는 로미오의 팔에 매달리며 손을 잡았다.
“왜 꼭 가야 하는 거야? 왜? 그냥 여기서 살면 안 돼?”
“네베는 이곳만큼이나 살기 좋은 곳이야. 고향으로 돌아가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묘지도 직접 관리할 수 있고 농사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기억나지 않겠지만 네가 아기였을 때는 형도 밭을 일굴 줄 알았어. 기억하던 대로만 하면 금방 그곳에서의 생활에 적응해서 잘 살 거야.”
“하지만 여기서 네베는 너무 멀잖아… 형이 여기에 살면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볼 수 있는데 네베로 가 버리면 어떡해 해?”
평소에 떼를 잘 쓰지 않는 엔초였지만 로미오의 결정이 너무 갑작스러워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집을 부렸다.
여태껏 엔초를 나이보다 의젓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로미오는 풀이 죽어 매달리는 엔초를 보며 자신이 이 문제를 너무 안일하게 여겼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서로 떨어져 산다는 점에서 어쨌든 결과는 같았기 때문에 자신의 결정을 엔초가 쉽게 이해해 줄 줄 알았던 것이었다.
“정말 미안해. 하지만…….”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엔초가 허리를 껴안으며 배에다가 얼굴을 묻었다. 가지 마, 하며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로미오는 표정이 어두워져 엔초의 등을 안았다.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엔초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미안해, 엔초.”
로미오가 곤란한 듯 보이자 발레리아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엔초가 많이 서운한가 보구나. 그렇지?”
엔초는 로미오의 배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목소리를 작게 해 말했다.
“로미오 형이 계속 바치에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멀리 가 버리지 않고요. 혼자 네베로 가 버리면 로미오 형이 쓸쓸할 거예요. 다시 돌아오고 싶어지면 어떻게 해요…….”
“로미오가 쓸쓸해할 거라고 생각해?”
엔초가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자 로미오는 이제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엔초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었다.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손안에 닿는 느낌을 기억하고 싶었다. 다시 만나게 될 때쯤에는 엔초가 지금보다 자라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한결 자란 엔초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내 생각은 좀 다른걸. 다른 곳도 아닌 고향이잖아.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로미오가 내게 네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어. 로미오는 그곳에서의 생활이 아주 즐거웠다고 애기했지. 홀로 떠나는 것이지만 분명 행복하게 잘 지낼 거야. 엔초 네가 여기서 건강하게 잘 지내면 그만큼 더 행복해하겠지. 그렇지 않아, 로미오?”
발레리아의 말에 엔초가 로미오를 올려다보자 로미오가 뺨을 만져 주며 대답했다.
“맞아. 정말 그럴 거야.”
마음이 편치 않은 로미오가 다시 한번 엔초를 안아 주는데 셋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갈리에누스가 슬쩍 다가왔다.
“마차 한 대만 있으면 언제든 만나러 갈 수 있으니 걱정 마, 엔초. 여기엔 너를 비롯해 우리 모두가 있으니 대위님께서도 종종 바치를 생각하실 거야. 어쩌면 우리 모두를 보기 위해 수시로 이곳에 오실 수도 있지.”
엔초는 로미오가 네베에서 혼자서도 잘 지낼 거라는 것과 자주 자신을 만나러 올 수 있다는 사실에 입술을 꾹 물고 서운한 마음을 참았다. 엔초의 축 처진 눈썹을 손끝으로 만진 로미오는 얼른 갈리에누스의 말을 거들었다.
“그래. 보러 오려고 하면 얼마든지 올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
때마침 하숙집 앞에 마르코가 도착했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어두운 얼굴이었던 그는 하숙집에 모여 있는 네 사람을 보더니 크게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표정을 풀었다.
“내가 늦지는 않았나?”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린 마르코는 짐마차 안을 들여다보다 말고 눈가가 빨개진 엔초를 보고 어이쿠, 하며 웃었다.
“이제 오십니까?”
“상위 단원들의 형 집행은 전부 끝났나?”
“그래, 다 끝이야. 이제부턴 아직 색출되지 않은 하위 단원들의 검거가 이뤄질 거야. 또 정신없이 바빠지겠지. 그나저나 이 일대 거리는 제법 한산해졌군.”
마르코는 맥빠진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며칠 전과 비교해 로사티 거리가 눈에 띄게 조용했다. 군복을 입은 군인들은 여전히 여기저기 보였지만 수가 그리 많지 않은데다 이따금씩 보이는 군용 마차도 소란스러운 소리 없이 그저 길을 지나가기만 했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군요. 취조해야 하는 단원들의 수가 많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신 모양입니다.”
갈리에누스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마르코는 손을 저었다.
“아니야, 얼굴이 상하기는. 제5군단과 공안국의 협조 덕에 구금자들의 관리가 훨씬 수월해졌어. 다 덕분이지. 자네도 고생이 많아.”
마르코는 자신의 뺨을 슥슥 만지더니 로미오에게 달라붙어 있는 엔초의 볼을 잡아당겼다.
“요 녀석이 울음을 터뜨렸어?”
마르코의 그 말에 엔초가 로미오를 더 가까이 껴안자 로미오는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엔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결정을 내렸으니 제 잘못입니다. 미리 말해 줬다면 좋았을 텐데요.”
엔초의 머리를 이상한 모양으로 흐트러뜨린 마르코는 허리를 숙여 엔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미소 지었다. 풀이 죽은 엔초는 로미오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처럼 힘껏 로미오에게 매달렸다.
“만나지 못하는 곳으로 가 버리는 게 아니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라. 더군다나 네베라면 여기와 달리 평화로울 테니 이런 시끌벅적한 곳보다는 지내기 편할 거야.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옛날 일이긴 하지만 나는 로미오를 처음 봤을 때 딱 농부의 인상을 가졌다고 생각했어. 네베에 가면 거짓말처럼 그곳에 적응할 테니 걱정 마.”
마르코가 엔초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겠거니 생각하면서도 로미오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그래. 그 당시 자네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었어. 나 농부요, 하고 말이야.”
엔초가 여전히 로미오를 안고 있자 마르코는 엔초를 잘 돌보겠다는 뜻으로 로미오의 어깨를 툭툭 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짐은 저게 끝인가?”
“예, 이제 더는 실을 짐이 없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엔초와 올라가 집 안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그런데 인사를 전해야 할 사람들을 모두 만나고 온 거야?”
“예. 하지만 깜빡 잊은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제가 떠난 것을 모르고 계신 분이 있다면 나중에라도 대신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래. 그러지.”
로미오는 떠나기 전에 마르코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발레리아와 갈리에누스를 돌아봤다. 세 사람 다 자신이 흐릿하게나마 앞을 볼 줄 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로미오는 틈틈이 세 사람의 얼굴과 몸의 움직임을 눈에 새겼다.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뒷모습이나 발소리와 일치하는 걸음걸이 등을 눈에 담았다.
세 사람 다 눈이 멀기 전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올라가서 집 안을 마지막으로 한 번 둘러보자. 어때?”
로미오가 엔초의 손을 잡자 엔초는 울상이 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2층으로 올라가 집 안으로 들어가니 거실은 허전하게 비어 있었다. 가장 먼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로미오는 문 입구에 서서 안을 둘러봤다. 찬찬히 눈으로 둘러보는 것으로 인사를 끝내고 엔초의 방으로 들어갔다.
미리 정리해 놓은 엔초의 작은 침대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내일 밀라니 선생님 댁으로 떠날 수 있게 책장의 책들도 모두 정리해 놓은 상태라 책장도 텅 비어 있었다. 조반니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과자와 사탕이 아직도 한가득 남아 있어 그것들만이 커다란 꾸러미에 담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피에트로의 방으로 들어가자 방 안은 오래전부터 그랬듯 아주 고요했다. 로미오는 눈으로 차근차근 둘러보며 방 안을 걸어 다녔다. 한 손으로는 엔초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는 벽을 쓸며 걷다가 피에트로의 침대 앞에 멈춰 섰다.
빈 침대를 손으로 더듬어 만지는데 엔초가 걱정스레 물었다.
“형이 네베로 가버리면 피에트로 형은 어떻게 되는 거야? 형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묘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잖아. 피에트로 형을 만나러 가고 싶으면 누구에게 같이 가 달라고 해야 해?”
그러나 말을 한 직후 엔초는 이브를 떠올렸다.
“그 붉은 눈을 가진 누나에게 같이 가 달라고 해도 돼?”
하지만 로미오는 고개를 저었다.
“바치 묘지에는 더 이상 피에트로가 없어. 형이 네베로 데려갈 거니까.”
“정말? 어떻게?”
로미오의 말에 엔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엔초의 놀라는 표정을 볼 수 있는 것에 고마움을 느낀 로미오는 엔초의 손을 힘줘 잡았다.
“잠들어 있는 피에트로를 마차에 태워서 데려가는 거야. 실은 벌써 먼저 네베로 보냈어. 도착하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묘 옆에 편안하게 잠들게 해 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할 것 없어.”
“그럼 이제 피에트로 형은 어머니랑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되는 거야?”
“응.”
기쁜 이야기에 엔초는 생긋 웃다 말고 로미오의 얼굴을 말끄러미 봤다.
“이제 슬프지 않아?”
로미오는 엔초가 자신의 표정을 열심히 살피는 모습에 “응?” 하고 물었다.
“피에트로 형의 얘기를 할 때마다 형이 항상 슬퍼 보였는데 오늘은 아닌 것 같아. 피에트로 형을 네베로 데려가게 돼서 전만큼 슬프지 않은 거야? 이제 괜찮아?”
엔초의 말을 들은 로미오는 생각에 잠긴 듯 피에트로의 침대를 내려다봤다. 엔초는 자신의 말이 로미오를 고민에 잠기게 했다는 생각에 머뭇거렸다. 혹여나 로미오가 다시 슬픈 표정으로 돌아갈까 봐 손을 끌어당기는데 로미오가 슬픈 기색 없이 대답했다.
“응, 그런 것 같아.”
그렇게 대답한 로미오는 묵묵히 피에트로의 침대를 매만지다가 돌아섰다.
“그만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1층으로 내려가자 한 손에 사과파이를 든 그라나 부인이 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반니의 사형 이후 편히 밤잠도 자지 못할 정도로 슬퍼하는 그라나 부인은 안색이 어두웠다. 하지만 그녀는 네베로 떠나는 로미오를 위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사과파이를 손수 준비했다. 그것도 로미오가 가장 좋아하는 로사티 2번가 골목 끝에 있는 빵집의 사과파이를 일부러 사 온 것이었다.
“네베까지 가려면 한참 걸리지 않우? 여길 떠나는 마음이라도 달래면서 가는 길에 먹어이.”
사과파이를 건네면서도 그라나 부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울적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갈리에누스와 마르코, 발레리아가 선뜻 뭐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 로미오가 사과파이를 받아 들었다.
“마지막까지 이렇게 사정을 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로미오는 손바닥에 따뜻하게 닿는 사과파이 상자를 매만지다가 짐마차로 향했다. 수십 벌의 옷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수십 권의 책을 가진 것도 아닌 로미오였다. 간소한 물건 몇 가지와 피에트로의 유품이 가득 들어찬 마차 한구석에는 작은 선물 상자가 고이 놓여 있었다.
그 선물 상자를 갖고 온 로미오는 그라나 부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시력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직접 고르지 못했을 선물이었다.
“부인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받아 주십시오.”
“무얼 또 이런 것을 주고 그러우…….”
그라나 부인이 상자를 열자 안에 든 것은 예쁜 손수건이었다. 조반니가 처형되고 나서부터 한 번도 웃은 적이 없던 그라나 부인은 예쁜 자수가 든 손수건을 만지며 쓸쓸히 웃었다.
“부인께 그동안 신세를 너무 많이 져 감사하다는 말로는 인사가 부족할 겁니다. 피에트로와 엔초를 데리고 이곳에서 처음 살기 시작했던 때를 기억합니다. 가난한 시골뜨기였던 제게 이 하숙집은 낯선 외지 생활로부터 잠시 벗어나 몸과 마음을 편히 맡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저는 이 하숙집과 로사티 3번가를 마음의 고향처럼 느낍니다. 저와 제 동생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부인의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여유가 생기거든 찾아뵐 테니 그때까지 건강하십시오.”
그라나 부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내려다보며 이야기하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로미오는 떠나기 전에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감사함을 느꼈다.
“이 손수건을 보며 모두 다 함께 살던 때를 기억할 거라우. 정말 고마우이…….”
발레리아가 그라나 부인을 달래는 사이 로미오는 덩달아 울먹거리는 엔초를 가까이 오게 했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엔초는 울지 않으려고 입을 삐죽거렸다. 로미오는 엔초를 안아 준 뒤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엔초의 눈을 마주 봤다.
이렇게 엔초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으니 더는 여한이 없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눈이 멀어 버린다고 해도 좋았다.
“도착하자마자 편지할게. 네게서 답장이 도착하면 그 답장을 읽는 대로 또 편지를 보낼 테니까 우린 서로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늘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거야.”
손으로 엔초의 뺨을 감싸자 엔초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잘 가, 형…흐윽…….”
로미오는 손으로 엔초의 어깨를 만졌다. 팔을 만진 후, 손목을 만지고, 손끝도 만졌다. 손을 내려 허리를 만지고 다리를 만진 다음 발목 끝까지 내려가며 몸의 곳곳을 만졌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보며 손등으로 뺨의 눈물을 닦아 줬다.
“함께 있을 수 없겠지만 형은 항상 널 생각할 거야. 밀라니 선생님 댁에서 공부하는 게 힘들어지거든 언제든지 편지로 얘기해 줘. 그럼 형이 얼른 바치로 돌아올게.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형은 항상 네 편이라는 걸 잊지 마. 형은 너를 위해서 못 할 일이 없어. 세상에서 그 어떤 누구보다 널 가장 사랑하니까 당연한 일이야. 네가 형을 사랑하는 것의 수백 배는 더 사랑해. 네가 다 상상하지 못할 만큼.”
엔초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품에 안기자 로미오는 두 팔로 엔초를 안았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
서로의 가슴이 깊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안고 있다가 몸을 떼자 엔초가 코를 훌쩍이며 두 손으로 로미오의 뺨을 잡았다.
다시 한번 엔초를 꽉 안아 준 로미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갈리에누스와 마르코, 발레리아를 쳐다봤다. 세 사람의 얼굴을 차례로 보는데 마르코가 커다란 손으로 엔초의 양 뺨을 문지르듯 눈물을 닦아 주며 분위기를 풀 겸 말했다.
“자네 그런데 우리의 얼굴을 제법 정확히 쳐다보는군. 본래는 그렇게 보지 못했잖나?”
마르코의 말에 발레리아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말이야. 나도 마침 그 생각을 하던 참이었어. 우리 셋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있는 거지?”
아주 정확한 지적이었기 때문에 로미오는 약간 웃어 보였다.
“그렇게 보이십니까?”
갈리에누스만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로미오를 향해 인사했다.
“조심히 가십시오. 저도 종종 편지 하겠습니다.”
“그동안 고마웠네, 중위. 눈먼 상관을 모시느라 고생이 많았어.”
“네베를 지날 일이 생기거든 꼭 들러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곳에서의 새 삶이 대위님께 많은 기쁨과 행운을 가져다줄 수 있기를 마음 깊이 바라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몸 건강히 지내십시오.”
로미오는 갈리에누스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가 떼는 것으로 인사를 마쳤으나 갈리에누스의 표정에서 서운함이 묻어나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할 말이 남은 것처럼 보였지만 애써 삼키며 다른 사람들이 인사할 수 있도록 뒤로 물러섰다.
다음 차례인 마르코는 코 속 깊이 숨을 크게 들이켜더니 작별 인사 시간을 느긋하게 가지려는 것처럼 느리게 도로 내쉬었다. 그 역시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라나 부인과 엔초가 이미 눈물을 보였기 때문에 금방 다시 만날 것처럼 호쾌하게 말했다.
“가서도 잘 지내게. 닭도 잡고 양도 치고 말이야. 아마 금방 적응할 거야. 다른 곳도 아니고 고향이지 않나?”
“예, 그럴 겁니다. 건강히 잘 지내십시오.”
“엔초는 우리가 잘 돌볼 테니 걱정하지 말아. 그라나 부인도 성심껏 살펴 드릴테니 그 점도 걱정 말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여태껏 제게 도움 주셨던 일들,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말로 인사를 하고 묵례를 하려는데 마르코가 어깨를 끌어당겨 포옹하며 등을 쳤다. 그는 키가 컸기 때문에 로미오는 팔을 한껏 들어 마르코의 등을 가볍게 감쌌다.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아쉬운 것은 마르코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는 길게 포옹을 하고 몸을 뗐다.
발레리아의 차례가 되자 그녀는 먼저 팔을 벌렸다. 로미오가 똑같이 팔을 벌려 안자 그녀는 로미오를 포옹하며 등을 쓸었다.
“조심히 가. 많이 보고 싶을 거야.”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혹시 네베에 오시게 되거든 크게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네베에서도 건강히 잘 지내.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했던 일들도 가끔 떠올려 줘. 바치가 조금이라도 그리워지면 언제든 다시 돌아와. 기쁜 마음으로 환영할게.”
긴 포옹이 끝나자 로미오는 마지막으로 그라나 부인에게 다시 인사하고 그라나 부인에게 안겨 있는 엔초의 손을 잡았다.
엔초는 여전히 울음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착하면 꼭 편지해야 해? 알았지?”
“응, 약속할게.”
마차에 오르기 전 로미오는 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발견했다. 저 멀리서 솟아오르는 연기는 여러 줄기였다. 중앙 광장에서 시작된 연기임을 알 수 있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연기는 바치 시내에 있는 모든 이들이 알 수 있을 만큼 짙고 검었다.
그 모습을 오래 쳐다보는 대신 로미오는 얼른 마차에 올랐다. 마부대에 앉은 마부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이야기한 후 창 너머의 길을 살피는데 마르코가 누굴 기다리는 거냐고 물으려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자네 정말로 무언가 보이는 게 아닌가? 지금 저 길을 내다보고 있지?”
마르코가 손으로 길을 가리켜 보이자 그제야 갈리에누스도 맞장구를 치며 물었다.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저 길이 보이시는 겁니까? 시력에 변화가 생긴 겁니까?”
“그래, 로미오. 눈이 보이는 거야?”
“아무리 봐도 그렇다니까. 시력이 돌아온 거라면 거짓말할 이유가 무엇 있나? 정말 앞이 보이는 거야?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묻는 세 사람에게 더는 거짓말할 이유가 없어 사실대로 이야기하려는데 저 멀리서 이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기다리쇼!”
평범한 이들이 도저히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저 멀리서 이곳까지 뛰어온 이브는 숨차 하는 기색도 없이 마차 안을 들여다보며 로미오가 아직 있는지 확인했다. 이상한 것은 그녀의 철 의수와 옆구리 사이에 기다란 상자 같은 것이 끼어 있다는 것이었다.
“휴, 하마터면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할 뻔했소. 아직 떠나지 않아서 다행이오.”
“오지 않으셔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포상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로미오는 이브가 씩 웃는 것을 봤지만 보지 못한 척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액수를 들으면 너무 놀라 아마 한동안 기절해 있을 거요. 그러니 말하지 않겠소. 확실한 것은 내가 오늘부로 이 길을 사두마차를 타고 다닐 거란 거요. 이렇게 두 발로 바치 길거리를 뛰어다닐 일은 없다 이 말이오! 하! 이 철 의수가 다 뭐요? 당장 잡아 뽑아 버려야지. 이제는 그 누구보다 가벼운 삶을 살 거요. 이런 쇳덩어리와는 이별이오.”
즐거워하는 이브의 목소리에 마르코는 은근한 목소리로 축하한다고 얘기한 뒤 그녀의 옆구리에 끼인 상자에 호기심을 보였다.
“그건 무엇입니까?”
“이곳까지 오는 길에 웬 점잖아 보이는 노인이 로미오에게 이걸 전해 달라고 부탁했소. 그런데 그 노인이 아무래도 그날 밤 하숙집을 찾아왔던 그자 같소. 발레리아, 당신도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소? 엘베라가 우리에게 사로잡혔던 날 밤 하숙집을 방문했던 노인 말이오. 그 노인이 조금 전 그 노인이었던 것 같소.”
고급스러운 포장지에 감싸인 상자를 살피던 발레리아가 얼른 고개를 들고 로미오를 올려다봤다.
의외의 인물이 거론되자 로미오도 발레리아를 마주 보며 상자를 받아들었다. 이브가 말하는 인물은 분명 체사레일 것이다.
“어서 풀어 봐, 로미오.”
“안에 뭐가 든 겁니까? 무거워 보이지는 않는데 말입니다.”
“척 보기에는 지팡이 같아 보이는데 말이야. 길쭉한 것이 뭐로 보나 그래.”
“내 생각도 같소. 아마 지팡이인 듯하오.”
로미오가 포장지를 풀자 안에서 나온 것은 상자라기보다 무언가를 보관하기에 용이해 보이는 함이었다. 단단한 데다 섬세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함을 열자 안에는 붉은 벨벳 천에 감싸인 지팡이가 들어 있었다. 단단한 원목 지팡이였는데 화려한 금장이 둘러져 있었다. 손잡이에는 로미오의 눈을 닮은 푸른 보석들이 아름다운 무늬를 이루며 박혀 있었고 바닥에 닿는 지팡이의 끝부분도 은으로 정교하게 장식돼 있었다. 매끈한 모양의 손잡이를 잡자 손안에 불편함 없이 밀착돼 쥐어졌다.
“예상대로 지팡이로군? 그런데 그 노인이 누구이기에 이런 것을 선물하는 거요?”
이브가 의아해하는 가운데 로미오는 나무 함 안쪽에 공화국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카를로타의 이름 철자가 새겨진 작은 카드도 보였다. 카드를 뒤집자 간결한 인사말이 쓰여 있었다.
글자가 흐릿하게 보여 카드를 눈 앞으로 끌어당기자 읽을 수 있었다.
이 지팡이가 언제든 귀관이 가고자 하는 길로 인도하길 바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