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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마음을 도려낸 용서 (28/30)

28. 마음을 도려낸 용서

창 너머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눈꺼풀을 깜빡이며 돌아눕자 곁에서 엔초의 곤한 숨소리가 들렸다. 어젯밤 함께 잠이 들며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쉬지 않고 재잘대던 엔초는 평소보다 늦게 잠들었다.

로미오는 손을 더듬어 엔초의 어깨에 요가 제대로 덮여 있는지 확인하려다 순간 손을 멈췄다. 졸음기가 남아 있는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가 그대로 느리게 떼 허공에 들어 올렸다.

잠결에 자신이 잘못 보고 있다고 생각하던 그는 서서히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잠들어 있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순식간에 눈빛이 또렷해졌다.

“…….”

입을 작게 벌린 로미오는 검은 점 너머로 뿌옇게 보이는 자신의 손을 올려다봤다. 손바닥을 뒤집어 손등을 보이게 하자 손등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 손 뒤로는 방 천장이 보였다. 검은 점에 일부분이 가려져 있었으나 천장의 색깔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할 말을 잃고 그대로 누워 있었지만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세차게 뛰었다. 눈을 깜빡이면 이 모든 것이 사라질 것 같아 눈조차 깜빡거리지 않고 손만 올려다봤다. 헛것이라고 생각하려 했으나 눈을 재빨리 한 번 깜빡여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다음 순간 로미오는 얼른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자신의 두 손을 번갈아 내려다보다가 옆에서 누워 자는 엔초를 봤다. 한쪽 뺨을 침대에 대고 자고 있는 엔초는 곱슬머리가 제멋대로 삐쳐 있었다. 어깨 아래까지 덮고 있는 요는 가장자리에 당초무늬 자수가 놓아져 있었고 그 끝자락은 엔초의 발목 언저리를 덮고 있었다. 맨발인 엔초의 발이 요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작은 발바닥과 발가락의 윤곽이 보였다.

“…….”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침묵하던 로미오는 눈 앞에 보이는 검은 점의 크기를 가늠한 뒤 완전히 몸을 돌려 앉아 엔초를 들여다봤다. 등을 낮추고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니 자고 있는 엔초의 얼굴이 가까이에 보였다. 굽혔던 등을 도로 펴는데 읊조리는 것 같은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다시 등을 숙인 로미오는 엔초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서 보며 뺨을 더듬고, 코를 만지고, 귀와 턱을 쓸어내렸다. 손으로 얼굴을 만지며 눈으로 윤곽을 확인하는 느낌이 너무도 오랜만이라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조금도 자라지 않고 그대로인 엔초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며 만져 대자 엔초가 눈가를 꿈틀댔다.

“……형? 왜 그래……?”

잠결에 로미오가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 대자 엔초는 로미오의 손을 잡았다.

로미오는 굳어진 얼굴로 자신의 손 위에 겹쳐진 엔초의 손을 내려다봤다. 작고 하얀 손이 검은 점 뒤로 희끄무레하게 보였는데 손 모양이 흐릿하게나마 구분됐다.

“형……?”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은 엔초는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충격에 휩싸여 있던 로미오는 보인다고 이야기하는 대신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저었다.

“아, 아니야… 미안해. 내가 깨웠지?”

검은 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검은 점이 보였다가 사라지면 전보다 시력이 저하되는 것이 수순이었다. 괜히 엔초에게 앞이 보인다고 말해 주었다가 나중에 다시 눈이 멀어 실망감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시력이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으니 순수하게 기뻐하는 것 역시 경솔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갑자기 흐릿하게나마 앞이 보일 정도로 시력이 돌아오자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여태 검은 점은 단지 시력이 떨어지기 전에 나타나는 전조 증상에 불과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이 점이 사라지면 자신은 빛조차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바로 어젯밤까지만 해도 방 안의 촛불을 켜고 끌 때의 밝음과 어둠밖에 보지 못했는데 밤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검은 점이 전과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자. 금방 아침을 준비할게.”

침대에서 일어난 로미오는 방의 구조를 기억하는 몸의 감각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방 밖으로 나가 집 안을 둘러보자 눈이 완전히 멀기 전과 달라지지 않은 거실이 보였다. 어젯밤에 엔초가 그리다 만 그림들이 부엌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것도 보였다.

엔초의 생일날 줄리오가 준 거울을 떠올린 로미오는 엔초의 방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은 5년 전이었기 때문에 거울 앞에 서고 나자 다시금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리게 됐다.

“…….”

거울 속에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자 턱선의 윤곽이 뿌옇게 보였다. 바치시의 축제가 시작될 무렵 시력에 변화를 느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보다 외곽이 더 뚜렷하게 보였다. 푸른 눈의 빛깔과 이마 위에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의 가닥이 보일 정도였다. 거울 표면을 짚고 있는 손마디와 손톱의 모양도 보였다.

“대체 왜 갑자기…….”

망연히 그 말을 중얼댄 로미오는 거울 속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 * *

“이게 그 소년의 시체인가?”

“예. 발견 당시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군의 추적에 압박을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같습니다.”

마르코는 허리에 한 손을 얹은 채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지난 며칠간 좀처럼 웃는 얼굴을 보인 적 없는 그는 눈가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검거된 단원들의 수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 더 이상 제6군단의 부대 내에는 그들을 가둘 감옥이 없었다. 공안국의 구금실과 중앙 광장에 있는 감옥을 나누어 써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상위 단원들 중 미미한 정보력을 갖고 있었던 세 단원이 어제와 오늘, 취조 도중에 사망해 남은 상위 단원들은 여덟 명이었다. 상대적으로 적은 정보를 갖고 있어 할 수 있는 말이 적었던 세 명의 상위 단원들은 그들이 일부러 함구한다고 오해한 군인들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 결과 사망한 것이었다.

레오나르도와 친치아, 엘베라 외에도 마르코가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다 몬티, 노프리, 도밍고, 소피아, 니콜로는 각각 여러 층에 나눠 구금시키고 있었는데 죽은 상위 단원들의 시체는 남은 단원들의 재판이 이뤄지는 대로 함께 사형대에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사망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제6군단은 좁은 구금실에 수십 명의 단원들을 밀어 넣고 취조와 고문을 반복하며 한 가지 소문을 민중들 사이에 퍼뜨렸다. 단테의 12인 조직 내부에서조차 이름이 잘 밝혀지지 않은 비밀 단원들이 아직 검거되지 않은 자들을 찾아가 암살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아직 검거되지 않은 단원들이 군에 체포돼 정보를 발설하기 전에 비밀 단원들이 미리 처단을 가한다는 것이 소문의 주 내용이었다.

제6군단은 인명록에 이름이 올라왔음에도 아직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단원들을 겁에 질리게 하려는 의도에서 해당 소문을 퍼뜨렸다. 소문의 효과가 제법 좋은 것인지 이른 아침에 시장에 나가 보면 상인들이 그 소문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소년의 얼굴을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장교가 바닥에 내려놓은 포대 자루의 끈을 풀자 소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뺨과 이마에 불그스름한 반점이 번져 있는 소년은 눈을 뜬 채 죽어 있었다. 통령의 암살을 공모한 중죄로 도주 중이던 소년이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소지품을 압수해 왔지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발견하지 못했으며 소년의 양부모가 열흘도 더 전에 루바노의 국경을 빠져나간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 대한 추적도 이뤄져야겠군. 양부모 외에 가족은 없나?”

“누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집 안에 흔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오래전에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죽은 소년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마르코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어린 소년이 눈을 뜬 채 죽어 있는 것은 오래 보고 있기 힘든 광경이었다.

“다 몬티라고 했었나? 그자가 지금 제3 구금실에 구금돼 있다고 했던가?”

“예, 그렇습니다.”

“얼굴을 확인시켜야 하니 그자를 데리고 와라. 노프리라는 자와 함께 암살 공모를 한 자이니 이 소년의 얼굴을 알 것이다.”

“예, 대위님.”

장교가 방을 나가자 마르코는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소년의 시체를 보고 있기가 힘든 나머지 포대 자루를 도로 올려 얼굴을 가렸다.

잠시 후 다른 장교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경례를 하며 말했다.

“파우스토 위원을 조금 전에 취조실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프라타 대령님께서 서쪽 탑에서 열린 회의 때문에 자리를 비우시며 대위님께 조사를 명하셨습니다.”

“알았다. 나가 봐라.”

마르코는 취조실 내의 군인들을 둘러보며 다 몬티로 하여금 소년의 얼굴을 확인할 것을 재차 지시하고 복도로 나갔다. 중앙탑의 계단을 올라가려던 그는 탑 밑을 내려다보더니 방향을 바꿔 아래로 내려갔다. 중간층에 다다라 복도로 들어간 그는 헤매지 않고 능숙하게 다시 복도 반대편 끝에 난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라 계속 내려가자 발아래가 깜깜해졌다.

소녀의 울음소리가 들린 것은 몇 계단 내려가지 않았을 때였다.

“아가씨! 정말로, 흐윽… 흑…… 괜찮으신 거예요?”

울음소리의 주인공은 철창 앞에 달라붙어 안을 들여다보며 우는 소녀였다. 감옥을 지키는 장교는 곁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감옥 안에는 친치아가 구금돼 있었다.

“저는 이제, 윽, 흐으…… 어떡하면 좋을까요?”

친치아의 옆 감옥에는 레오나르도가 구금돼 있었고 그의 맞은편에는 엘베라가 구금돼 있었다.

양팔이 등 뒤로 묶인 친치아는 철창 가까이에 서서 소녀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검거되기 전과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죄수로서 감금돼 있다는 점이 그녀를 다르게 보이게 했다. 쾌활해 보이던 레몬빛 금발도, 늘 미소가 머물던 얼굴도 전과 달라 보였다.

“나는 괜찮으니 내 걱정은 말아. 그것보다 더 이상 이곳에 찾아오지 마.”

친치아의 시종 소녀는 가족이 아니기에 구금을 면했다. 친치아가 체포되자마자 이곳으로 끌려와 조사를 받았지만 단원이 아님이 입증돼 극적으로 풀려났다.

이곳을 매일같이 찾아오는 소녀는 마르코가 들를 때마다 같은 말을 하며 울고 있었다.

“본래부터 널 이 나라로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 실수였어. 넌 더 이상 그 누구의 시중을 들 필요가 없으니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흐윽, 흑… 저도 함께, 윽, 흐으… 사형을 받겠어요……!”

“그럴 필요 없다는 것 잘 알잖아. 그만 가. 그리고 다시는 오지 않아도 돼.”

마르코는 뭉친 눈가의 근육을 문지르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레오나르도의 감옥 앞으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봤다.

그는 긴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등 뒤로 손이 묶인 채 앞으로 윗몸을 숙여 바닥을 보고 있었다. 발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어둠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그저 바닥만 내려다봤다.

엘베라가 구금돼 있는 감옥 안에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감옥 안에 장교 여러 명이 있었다. 고문으로 온몸이 짓무른 엘베라는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얼굴빛이 극히 좋지 않았다. 의사가 상처를 처치 중이었는데 채찍에 맞은 상처가 곪을 대로 곪아 있어 여러 번 닦아 내도 피가 계속 묻어 나왔다. 처치가 소용없어 보일 정도로 상태가 위중했다.

“곧 죽을 듯합니다. 상처에서 나는 피고름의 양이 상당합니다. 정신을 잃는 횟수가 잦아 조사를 이어 가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고열이 지속되고 있고 호흡도 가쁜 상태입니다.”

장교 하나가 다가와 설명하자 마르코는 의사의 등 뒤로 가까이 다가가 엘베라를 자세히 내려다봤다. 내리깐 그녀의 눈은 이미 산 자의 그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양쪽 어깨뼈가 부러져 있어 어깻죽지 부분이 괴이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상위 단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데다 가장 먼저 검거되었고 가장 혹독한 고문을 치른 그녀였다. 형이 집행되기까지 하루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스스로 걸어 사형대로 올려보내기 위해 감옥의 경비병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녀의 건강을 살폈다. 잔인한 조치였지만 루바노의 법에 따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지켜봐라.”

말은 그렇게 했으나 마르코는 설명하기 힘든 감정에 사로잡혀 엘베라를 바라봤다. 손안에 잡히지 않는 거대한 그림자 같은 조직을 이끌던 자였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색출해 낼 수 없던 자였다. 이렇듯 손이 묶인 채 구금돼 있는 모습이 기묘하고 이상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그토록 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은밀히 움직이던 자가 패전한 병사처럼 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으니 한심함이 아닌 다른 감정이 들었다. 엘베라를 비롯한 나머지 상위 단원들은 이미 죽었음에도 무덤이 파헤쳐진 대총장과 신세가 다르지 않았다. 살아 있지만 산 자에게 내려져서는 안 될 치욕스러운 처분을 받게 될 운명이었다.

검거 초기에는 그들이 무엇을 위해 이 나라의 전복을 꿈꿨는가 하는 문제에 큰 의문을 느꼈지만 이제 더는 그 이유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정신 차려라. 너희들은 내일 재판을 받게 될 거다. 재판의 결과를 들은 후에 직접 두 발로 사형대 위로 걸어 올라가는 것까지가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니 치료는 계속될 거다.”

마르코의 말에 엘베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치료를 받는 동안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먹을 굳게 쥐고 있던 그녀였다. 고개를 드는 사소한 움직임에 힘을 써야 했기 때문에 쥔 주먹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르코는 그녀의 눈을 제대로 마주한 순간 그녀가 여태껏 갖고 있었던 신념에 불쾌한 의문을 느꼈다. 모든 단원들의 진짜 이름과 그들의 출신지, 그들이 조직에 입회한 시기와 이유를 알고 있는 그였다. 상위 단원들에 한해 그들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조사까지 마친 상태였기 다른 것은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가 궁금했다.

“너희에게 내려질 극형의 판결을 짐작할 거다. 재판을 앞둔 심정이 어떻지?”

도발하기 위함도, 골리기 위함도 아니었다. 마르코는 그저 엘베라의 짧은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대의라 믿는 것을 믿고 여기까지 왔지만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참한 죽음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그 심정을 물은 것이었다.

“…….”

그러나 엘베라는 그저 마르코를 올려다보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쇠약해져 있었지만 그것은 침통하거나 패배감을 느끼는 것과는 달랐다. 비굴한 것과도 달랐다.

국가반역죄를 꾀한 죄인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지만 어느 한 부분에선 위정자가 갖추고 있어야 몇 가지 자격을 가진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테의 12인의 단원이 아니었다면 정무를 보는 일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도 날카롭게 정세를 보는 눈을 가지고서 말이다.

잘못된 신념이 그녀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지만 다시 한번 삶이 주어져 지금과 다른 선택을 한다면 그녀의 운명은 더 나은 방향으로 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옥을 떠나기 위해 마르코가 뒤돌아섰을 때 엘베라의 목소리가 뒤늦게 들렸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후회하지 않네. 내일이면 더는 산 사람이 아니게 되겠으나 우리는 지금껏 우리의 뜻에 따라 해 온 일을 후회하지 않네. 판결이 예정되어 있다면 서둘러 재판을 열게나. 우리 중 사형대에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는 아무도 없네. 우리를 처단하고자 한다면 어서 그렇게 하게.”

* * *

“그게 정말이오? 조금 전 그 말, 진심인 거요?”

함께 길을 걷던 이브가 멈춰 서자 로미오도 덩달아 멈춰서 그녀를 돌아봤다. 그녀는 자신이 한 말에 놀라고 있었지만 로미오는 고개를 돌릴 때마다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서먹함과 낯섦을 느끼고 있었다.

검은 점은 여전히 보였지만 운 좋게도 아침에 막 잠에서 깼을 때와 같은 상태로 시력이 유지되고 있었다. 혹여나 오늘 아침에 국한해 잠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엔초에게 그랬듯 로미오는 이브에게 흐릿하게나마 앞이 보인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다행히 그녀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가 긴 은발 머리와 그을린 피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갑작스레 알게 된 로미오는 목소리를 통해 상상했던 것과 이브의 얼굴 생김새가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으나 그 점 하나 때문에 부자연스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혼란스러운 것은 갑작스러운 시력의 변화였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도 알 수 없었다.

“예. 모두 사실입니다. 제가 각하께 청을 드렸고 각하께서 그 청을 받아들이셨으니 곧 당신에게 포상이 내려질 겁니다.”

“그러니까 로미오 당신이 직접 가장 존엄하신, 아니, 가장 존귀하신 카를로타 비스카르디 통령 각하를 만나 내 이야기를 친히 전했다는 거요?”

“예. 어젯밤에 말입니다.”

지난 며칠간 제6군단의 부대 주변을 맴돌며 쑥대밭이 된 바치 시내를 지켜본 이브였다. 루바노를 떠나기 위한 준비를 슬슬 하려던 참이었는데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로미오가 느닷없이 자신을 찾아와 포상금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말로 고마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소. 당신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부대를 나온 뒤로 아무것도 기대하고 있지 않았는데 말이오. 이 나라 사람도 아닌 내가 정말 그런 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거요?”

“각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괜찮으니 받으십시오. 다만 원하셨던 종신 연금이 아니기에 그 액수가 생각보다 모자랄 수도 있습니다. 종신 연금은 엄연히 밀고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니 말입니다.”

로미오는 바닥에 닿아 있는 지팡이 끝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거리를 휘둘러보면 길의 방향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브를 찾기 위해 거리를 돌아다니며 살펴보니 팻말에 적힌 글씨를 읽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확실히 전보다 더 뚜렷하게 앞이 보였다.

“나도 그 점 때문에 마음을 접었던 거요. 애초에 용병 나부랭이인 내게 밀고의 기회가 주어질 리 없는데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거요. 인생이 그렇게 뜻대로 풀릴 리가 있겠소? 사는 동안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려면 죽고 태어나기를 네댓 번은 반복해야 할 거요.”

멀리 군용 마차 한 대가 이리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로미오는 그 마차를 볼 수 있었지만 이브는 친절히 옆에서 설명했다.

“저기 마차 한 대가 이쪽으로 오고 있소. 군인이 마부대에 앉아 있는 것을 보니 제6군단의 마차인 듯하오. 속도를 늦추는 것으로 봐 우리에게 볼일이 있는 것 같소.”

두 사람의 앞에 멈춰 선 마차에서 장교 한 명이 내리더니 경례를 해 보인 뒤 품 안에서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냈다. 얼굴이라도 그려져 있는지 장교는 두루마리와 이브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모시러 왔다고 말하며 두루마리를 읽었다.

“각하의 은전에 따라 가장 존귀한 루바노의 명예를 드높인 자들에 한해 포상받을 대상을 선별했습니다. 금일 낮 살로네 성에서 통령 각하께서 직접 포상을 내린다고 하십니다. 당신의 이름은 이브 헤스로 출신지는 하슬러 공국일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서 타십시오.”

마음을 접었다고 이야기했던 것과 달리 이브는 “하!” 하고 외마디 탄식 같은 웃음소리를 내더니 로미오를 쳐다봤다. 이제야 포상을 받는다는 실감이 나기 때문이었다.

“열흘 뒤에 떠나기로 정하길 천만다행이오. 당신에게 작별 인사를 하자마자 이곳을 떠났다면 이런 은혜도 누리지 못했을 것 아니오?”

“그러게 말입니다.”

이브는 마치 두루마리를 읽은 장교에게 포상금을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에게 진심 어린 감사 말을 전하더니 훌쩍 마차 위에 올라탔다. 그러면서 뒤늦게 로미오에게 인사했다.

“고맙소. 다 덕분이오.”

로미오는 마차에 올라앉아 있는 이브와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있었지만 볼 수 없는 척했다.

“그럼 저는 여기서 돌아가겠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전 내일 아침에 제 고향으로 떠납니다.”

웃고 있던 이브는 얼른 웃음을 그치더니 눈을 크게 떴다.

“고향? 그곳이 어디요?”

“네베라는 이름의 루바노 남부 지역입니다. 여기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함께 밥을 먹으며 어젯밤 갑작스레 내린 결정을 엔초에게 알려 준 로미오였다. 엔초는 자신이 하숙집을 떠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 로미오가 아예 바치를 떠나는 것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던 데다 그 두 가지가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 깜짝 놀랐다. 로미오가 좋은 말로 타이르며 이야기했지만 급기야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살게 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인지 화실까지 데려다주는 길에도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를 여러 번 물으며 풀 죽어 했다.

로미오는 이브의 반응으로 미뤄 이 소식을 전해 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게 놀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부터 남쪽으로 한참을 내려가야 하는 곳인 데다 거리가 무척 멀어 바치에 자주 올 수 없을 겁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을 모두 접고 떠나는 것이지만 정리할 짐이 많지 않아 내일 아침에 바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이브는 네베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크게 놀랐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가는 이유가 뭐요? 당신의 동생이 여기 있지 않소? 그 아이는 어떻게 되는 것이오?”

“제 동생은 어느 저명한 분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어차피 저를 떠나 살기로 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제 동생을 돌봐 줄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서로 떨어져 산다는 점에서 그리 큰 차이가 없는 데다 저는 본래 고향에서 떠나올 때 그곳에 미련을 갖고 있었습니다. 고향을 버리고 왔다고 생각한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더는 이곳에 남아 할 일이 없어 이제라도 돌아가려는 겁니다.”

“그럼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요?”

“예. 다시 돌아와 살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오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올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포상을 받는다면 이전에 말한 대로 여기에서 사실 생각입니까?”

“아마도 그럴 것이오.”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지자 군인이 공손하게 그만 떠나기를 청했다. 그러자 로미오가 말했다.

“어서 가 보십시오.”

이브는 군인이 마차를 출발시키기 전에 서둘러 말했다.

“당신이 이곳을 떠난다니 크게 놀랐지만 당신에게도 당신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요. 나는 네베가 어떤 곳인지 모르지만 당신의 결정을 존중하오. 당신이 떠나고 나면 가끔 당신의 동생을 살피겠소. 한 번밖에 보지 못했지만 아이가 영리한 듯하여 딱히 도움 줄 일은 없겠지만 말이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로미오는 이브가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저는 내일 떠나야 하니 미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마지막 인사가 될 겁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으로 ‘마지막 인사’만 세 번째였다. 서로 악수하며 두 번째 인사를 한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이브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얘기했다.

“그것참 성질머리가 급한 자요. 내일 하숙집 앞으로 배웅을 갈 테니 인사는 그때 받겠소. 그리고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오. 당신은 내가 만나 본 자들 중에 가장 사려 깊은 자요. 이곳에서의 남은 하루 동안 당신을 아는 모든 이들에게 느긋이 작별을 고할 여유를 갖길 바라오.”

* * *

“어서 먹어라. 이게 네놈의 마지막 식사다.”

간수가 빵과 수프가 담긴 식사를 갖고 철창 앞으로 다가왔다. 손이 묶인 조반니는 재갈이 물린 채 좁은 나무 의자에 앉아 그를 쳐다봤다. 그러나 자신의 마지막 식사에 관심 두는 눈치는 아니었다.

“먹지 않겠다면 마음대로 해. 곧 형장으로 이동할 테니 준비해라. 다시 오도록 하지.”

어젯밤 재판이 끝나고 이곳 감옥의 꼭대기 층으로 옮겨져 홀로 밤을 보낸 조반니였다. 잠들지 않고 뜬눈으로 동이 트는 것을 맞은 그는 감옥에 난 작은 창 너머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비쳐 드는 것을 지켜봤다. 창은 머리 위에 나 있었고 아주 작았지만 그곳에서 비쳐 든 굵은 빛 한 줄기가 바닥을 환하게 비췄다.

간수는 지난밤과 새벽 사이에 감옥을 다녀간 이들이 있다고 알려 주었는데 그중에는 줄리오와 세라피나 산소네 교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형을 앞둔 죄수를 만나는 것은 금지돼 있었기에 그들은 만남을 허락받지 못하고 돌아갔다. 간수는 줄리오를 두고 ‘끈질기다’고 표현하며 그가 밤사이 다섯 번도 더 찾아왔다고 설명했는데 조반니는 간수의 그 말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곳 꼭대기 감옥에는 조반니만이 구금돼 있었다. 간수의 발소리가 들리면 그것은 필시 조반니를 담당한 간수였다. 어제 재판정에서 나온 이후부터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조반니는 밤새 재갈이 물려 있어 입가에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피부가 짓눌릴 만큼 단단히 조여 놓았기 때문에 상처가 생긴 것이었다.

“어이.”

다시 목소리가 들린 것은 조금 후였다. 감옥 밖에는 두 명의 간수가 서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은 어깨에 커다란 자루 같은 것을 이고 있었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묵직해 보였다. 그들은 어젯밤 이후 계속 이곳을 드나들었고 바로 조금 전에 식사를 가져다주며 다시 오겠다고 했던 간수가 아니었다. 두 사람 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나와라. 사형장으로 갈 시간이다.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이 옷으로 갈아입어라.”

포대 자루를 맨 간수가 감옥 안으로 들어오더니 바닥에 자루를 내려놓고 입구를 풀었다. 혼자서 할 일이 있는 것인지 조반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바삐 손을 움직였다.

그 사이 조반니는 다른 간수에게 옷을 받아 들었는데 옷이 이상했다.

사형을 앞둔 죄수에게 옷을 갈아입을 것을 권하는 것도 이상했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옷이 지나치게 깨끗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자수 무늬까지 착실하게 들어간 옷은 언뜻 고급 원단을 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망토와 웃옷, 바지 세 벌이 아무리 보아도 죄수복이 아닌 것 같아 간수를 쳐다보는데 그가 손을 풀어 주더니 신호를 주듯 눈을 크게 두 번 깜빡였다.

“무엇하나? 어서 갈아입어라.”

조반니는 그의 표정을 주시하다가 아무 말 없이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었다. 옷을 다 갈아입자 간수는 조반니의 입에서 재갈을 빼 주고 감옥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꼭대기 층에서 감옥의 아래까지 내려가기 위해서는 죄수들만이 오르내리는 계단을 써야 했는데 그는 무슨 일인지 간수들이 사용하는 복도 반대편 계단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정확히 첫 계단에 발을 디뎠을 때 간수가 목소리를 달리해 빠른 어조로 말했다.

“이대로 감옥 밖으로 나갈 겁니다. 마차가 한 대 세워져 있을 테니 지체하지 말고 바로 오르셔야 합니다.”

조반니는 간수를 쳐다봤지만 놀라지 않았다. 다른 것을 묻지도 않았다.

“마차는 곧장 바치 성벽을 향해 달릴 겁니다. 성벽 입구의 경비병이 검문을 위해 마차 안을 들여다볼 텐데 뭔가를 묻지는 않을 겁니다. 마차 안에 모자가 있을 테니 그 모자를 써서 금발을 가리십시오. 신발도 준비돼 있을 테니 그것을 신으십시오.”

계단을 전부 내려가자 그곳에는 밖으로 나가는 문만 있을 뿐 경비병이 없었다. 간수가 허리춤의 열쇠로 문을 열고 나가자 조반니가 그의 뒤를 따랐다.

감옥을 둘러싼 담장의 정문을 지나면 바로 중앙 광장이 펼쳐졌는데 간수는 정문이 아니라 뒤편의 쪽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경비병 한 명이 서 있었는데 그는 발소리를 듣고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별말 없이 주위를 둘러본 뒤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가자 작은 마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간수는 조반니가 마차에 타자마자 급하게 문을 닫았고 마부는 말이라곤 일절 없이 마차를 속히 출발시켰다.

감옥의 담장으로부터 멀어지는 마차 안에서 조반니가 준비된 모자를 눌러썼을 때였다. 마차 창 너머에서 섬찟한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무엇인가가 아주 높은 높이에서 갑작스레 추락해 떨어지는 소리였다.

퍼억!

바람을 잔뜩 머금은 무언가가 요란하게 터진 것 같은 소리기도 했는데 그 소리가 들린 직후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죄수가 떨어졌다! 저 탑의 꼭대기에서 죄수가 떨어졌어!”

조반니는 마차 창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거리를 내다봤다. 저만치에 있는 중앙 광장의 바닥에 추락한 것 같은 시체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마차는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금세 거리가 멀어졌으나 피를 흘리고 떨어진 자가 조금 전 자신이 감옥에서 벗고 나왔던 옷을 입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앙 광장 위로 내리쬐는 햇빛 덕에 피범벅이 된 머리가 금발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얼굴 전체가 피로 젖은 시체는 추락하기 전에 얼굴이 짓이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는데 등 뒤로 팔이 묶인 데다 입에 재갈이 물려 있어 누워 있는 모양새가 끔찍했다.

몸을 바로 한 조반니는 마차 창에 달린 장막을 내리고 모자를 제대로 눌러썼다. 지저분한 금발은 뒤로 깔끔하게 넘겨 감추고 새까매진 발은 준비된 구두 안에 넣었다. 탁탁 뒤꿈치로 쳐 신으니 신발은 발에 딱 맞았다.

쉬지 않고 달린 마차는 금방 성벽 앞에 도착했는데 급하게 달려온 탓에 말이 숨을 거칠게 내쉬며 연거푸 투레질을 했다. 성벽 문 앞에는 수십 명의 군인들이 도열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오가는 사람들을 매서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멈추시오!”

성벽 앞을 지키는 경비병이 외치자 마부가 마차를 세우고 기세 좋게 얘기했다.

“살로네 성에서 출발한 마차입니다. 마차 안에 타고 계신 분은 관저의 2층 벽에 걸 그림을 의뢰받으신 조각가로 이름은 빈센조 모딜리아니입니다.”

마부가 빈센조라는 조각가의 신분을 증명하는 신분증명서와 통행증을 건네자 경비병은 꼼꼼히 확인하면서도 의심하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추후에 관저에 확인을 하면 될 일이지만 빈센조라는 이름의 조각가가 이 시간에 성문을 통과할 것이라고 미리 일러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통령에게 미리 일러 주지 않은 이유를 따질 수 없는 데다 마차에는 통령의 관저에 출입했음을 증명하는 표식으로 공화국의 문장이 수놓아진 덮개가 덮여 있었다.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자가 한 사람이오?”

“그렇습니다.”

통령의 관저인 살로네 성에 조각가가 드나드는 것은 있을 법한 이야기인데다 빈센조 모딜리아니라는 이름은 가진 조각가 역시 실제로 있었다. 다만 생사 여부를 따지자면 죽은 것으로 처리되지 않았을 뿐 수년째 실종 상태인 조각가였다.

하지만 그 이름을 가진 사내가 관저를 출입했다는 사실을 통령에게 확인하면 그만인 경비병이 뭔가 수상함을 눈치채고 그 사실을 세세하게 캐낼 확률은 적었다. 경비병은 예술에 조예가 없었기 때문에 빈센조 모딜리아니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 없는 것이 그가 무명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무식하기 때문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했다.

“안을 확인하겠소.”

마차 창 앞으로 다가간 경비병이 장막을 치우자 안에 탄 것은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걸친 사내였다.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사내는 먼지 한 톨 없는 멋들어진 구두를 신고 있었다. 무릎 위에 팔을 걸친 채 턱을 괴고 있는 자세가 자못 우아해 보였는데 다소 야위긴 했지만 모자 아래로 보이는 날렵한 턱선 덕분에 상당한 미남인 것처럼 보였다. 입가를 손으로 가볍게 가린 채 무언가에 골몰해 있던 사내는 모자챙을 살짝 들어 마차 밖을 봤다.

“무슨 일이신지요?”

예술적인 울림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에 경비병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장막을 내렸다. 코 아래로밖에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의심하지 않았다.

“확인이 끝났소! 성벽의 문을 여시오!”

경비병이 외치자 닫혀 있던 성벽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느리게 열렸다.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조반니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입가의 재갈 자국을 가리고 있던 손을 뗐다.

감옥이 있는 중앙 광장에서 성벽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던 말은 마부의 채찍질에 다시 속력을 냈다. 열린 성벽 문밖으로 나가자 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펼쳐졌다. 그 길을 달려 내려가던 마차는 정신없이 한참을 덜컹대다 수풀 어귀에 멈춰 섰다. 그 너머부터 끝없는 숲길이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한 번 숲길 안으로 들어서면 완벽히 모습을 감출 수 있었다.

수풀 어귀에 커다란 포도주 통을 실은 짐마차 한 대와 위장을 하듯 진녹색 휘장에 덮인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그 마차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알아본 조반니는 모자를 벗고 자신도 마차에서 내렸다.

“오셨습니까?”

멀리서 인사한 주세페는 정중히 묵례를 했다. 그는 야윈 데다 안색이 좋지 못한 조반니의 얼굴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일단 마차의 문의 열었다. 그러자 검은 머리쓰개와 망토로 몸을 가린 카를로타가 내렸다.

공안국의 감옥에 구금돼 있을 때 줄리오를 통해 청사에 투서했던 편지가 두 남매가 주고받은 마지막 연락이었다. 그날 이후로 서로가 쓴 편지는 물론 얼굴조차 보지 못한 둘이었다. 조반니는 한눈에 보기에도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초췌하게 야위어 있었지만 카를로타는 놀라거나 걱정스러운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그럴 성미도 아닌 데다 조반니는 네 사람을 살해한 대가로 사형을 선고받은 죄수였다. 카를로타는 감옥 안에서 고행과도 같은 일을 견뎠을 조반니의 마음을 헤아릴 생각이 없었다.

“감옥에서의 생활은 어떠하더냐?”

그렇게 첫마디를 한 카를로타는 조반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바로 앞에서 그의 금색 눈을 올려다보자 그사이 몰라보게 핼쑥해진 조반니가 대답 없이 눈만 내리깔았다.

굳게 입을 다문 그를 말없이 보던 카를로타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쓰개를 치워 내며 말했다.

“너는 사람을 넷이나 살해했다. 그 대가로 짧게나마 구금되어 죄수의 취급을 받은 것이다. 오늘부로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니 평생 남들의 눈을 피해 숨어 살아야 할 거다. 억울함을 느끼려거든 네 손에 살해당한 자들을 생각해라. 그들은 네 손에 살해당했으나 넌 적어도 여기 이렇게 살아 있지 않으냐?”

같은 머리 색과 같은 눈동자를 가진 두 사람이었다. 이렇게 마주 보고 서 있으니 누가 봐도 남매처럼 보였다. 두 사람 다 키가 컸으므로 그 점도 닮아 보였다.

“너를 멀리 보낼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할 거다.”

조반니는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세게 한 번 물며 카를로타의 눈을 가만히 봤다. 어린 시절엔 이렇게 지그시 눈을 보면 카를로타는 점잖은 목소리로 원하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업어 달라고 손을 뻗으면 업어 주었고 책장을 가리키면 그곳에 꽂힌 책을 빼 와 옆에 앉아 읽어 주었다.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조반니는 성벽을 돌아봤다. 저 성벽 너머에 바치 시가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로미오도 있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떠나야 하지만 3층 저택도, 그 저택 안에 남아 있을 애장품에도 미련이 없었다.

조반니의 발목을 잡는 것은 오직 로미오 하나였다.

“……이곳에 남고 싶습니다.”

“이유는? 이곳의 무엇이 네게 미련을 심어 주었지?”

조반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 순간 사형을 받는 것과 이 나라를 떠나는 것에 별 차이가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어젯밤 재판정에서 봤던 로미오의 모습이 자신이 눈을 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떠올릴 모습이라고 생각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살아온 세월의 배를 더 살아야 하는데 그 긴긴 시간 동안 다시는 로미오를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은 사형을 당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루바노는 제 고향입니다. 고향을 떠나고 싶어 할 자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조반니의 거짓말에 카를로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조반니는 그런 그녀의 표정 변화를 보고도 뒷말을 덧붙여 설명하지 않고 다른 말을 했다.

“저를 빼내기 위해 여러 방법을 강구하셨을 테니 그 점에 대해서만큼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꼭 이곳을 떠나야 하는 겁니까? 누님이라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실 수 있지 않습니까? 굳이 이 나라를 떠나지 않고도 제가 숨어 살 방법을 마련해 주실 수 있지 않나요?”

침묵의 차례가 이번에는 카를로타에게 돌아갔다. 그녀가 입을 다물고 말없이 조반니를 올려다보자 조반니가 다시 말했다.

“며칠이 걸려도 좋습니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 제가 이 나라를 떠나지 않고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여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곳을 떠난다면 저는 평생 인생의 즐거움 따위는 전혀 모른 채 후회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누님께선 제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카를로타를 대할 때 적당히 순종적이면서도 때때로 장난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는 조반니였지만 그는 지금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막대한 후회를 느끼고 무조건적인 해결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카를로타는 조반니의 말을 무시하듯 이야기했다.

“단테의 12인의 검거 소식을 들었을 거다. 그 검거는 내가 알피에리 대위를 찾아가 모든 진실을 털어놓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나는 그를 직접 만났으며 바로 어제 살로네 성의 뒤뜰에서도 그와 긴 이야기를 나눴어.”

카를로타에게서 눈을 떼고 다시 성벽을 보고 있던 조반니가 미간을 찌푸리며 홱 고개를 돌렸다. 큼지막한 눈으로 카를로타를 내려다본 그는 콧등을 일그러뜨렸다.

“언제 말입니까? 언제 대위님을 만나셨던 겁니까?”

“네가 구금된 이후 내게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는 나와 너의 관계는 물론이고 우리 비스카르디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도 알고 있다. 그 옛날 우리가 어떻게 루바노로 들어와 살게 됐으며 너와 나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말이지. 내가 모든 일을 지시했고 그가 그 지시를 수행하였기에 검거가 이뤄진 것이야.”

짧은 혼란에 휩싸인 조반니는 머릿속으로 몇 가지 계산을 끝낸 후에야 되물었다.

“대위님께서 정말로 모든 걸 알고 계신다는 겁니까? 그간 누님과 제가 해 온 일들을 모조리 다요?”

“그래.”

조반니는 카를로타와의 비밀이 자신에게 약점이 아닌 데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가 이 일을 지휘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 놀라고 있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로미오가 모든 것을 알았다 해도 상관없다고 판단해 금방 혼란을 물리쳤다.

이제 무슨 일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지경에 이른 그였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자신이 여기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보아하니 카를로타는 다른 방법을 마련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카를로타가 시킨 대로 국외로 잠시 피신하였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방법을 마련해 내는 수밖에 없었다. 절대로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네가 그자에게 품고 있는 마음을 알고 있다. 오래전에 나와의 편지에서 의도적으로 그의 이름을 숨겨 왔던 것 역시 알고 있다. 이 나라에 머무르고자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냐?”

조반니는 어차피 떠나야 하는 자신에게 이런 것을 묻는 카를로타를 이해할 수가 없어 되물었다.

“다 지난 옛일을 꺼내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제가 처음부터 누님께 그분의 이야기를 드리지 않았던 것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언젠가는 누님의 눈에 그분이 띄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누님께만 숨긴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분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불필요하게 그분의 존재를 떠벌리는 것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게 도움 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일례로, 그분께서 제 3층 저택에 머무셨을 때 의사들의 모임이 제집에서 주최될 뻔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대위님의 얼굴을 알게 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모임의 장소를 바꿨습니다. 저는 제가 특별히 원할 때에만 대위님의 존재를 남들에게 알립니다.”

“내게 믿음이 있었다면 그의 존재를 얼마든지 얘기했을 것이다. 내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돼서야 뒤늦게 알린 것은 네가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냐? 너는 네가 아끼고 사랑하는 것들을 남에게 알리고 그 기쁨을 나누는 법 또한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그것은 누님의 오해입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미 전부 끝난 일인데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조반니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다시 한번 성벽 문을 돌아봤다.

“나는 너를 위해 많은 일을 감수했다. 너를 빼낼 만한 자들을 까다롭게 선별해 위장에 용이한 마차와 통행증을 준비하였어. 너 역시 나를 대신해 여러 일을 해 주었지만 나는 네게 사람을 살해하라고 지시한 적이 없다. 지금쯤 네가 아닌 다른 이의 시체가 너로 이야기되며 형장에 도착했을 것이다. 죽음을 면했다고 해서 이 일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라. 너는 무고한 네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갔다.”

“…….”

“조반니. 나를 봐라.”

점점 더 짙어지는 미련 때문에 표정이 굳어져 가던 조반니가 자신을 보자 카를로타는 그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게 그럴 능력이 없으니 속죄하는 마음을 강요하지 않으마. 하지만 네 죄의 무게를 모른다면 너는 언젠가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또다시 이런 짓을 저지른다면 너의 안위를 보장하기 위해 더 많은 이들이 필요할 것이며 거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을 거다. 내가 언제까지고 너를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음을 달리 먹어라.”

경고이기도 하고 충고이기도 했다. 누이로서, 그리고 동시에 통령으로서 하는 말이기도 했다.

조반니는 카를로타의 뜻을 새겨들을 마음이 없었지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카를로타는 아무리 많은 경고를 해도 조반니의 통제되지 않는 충동성이 언제든 다시 그의 폭력적인 본성을 끌어낼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나 외에 또 다른 한 사람이 너를 위해 귀중한 희생을 치렀다. 그는 너를 위해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렸다. 그자가 네게 묻고자 하는 것이 있어 여기에 와 있으니 이야기를 나누거라.”

카를로타가 뒤를 돌아보자 주세페가 그녀가 내렸던 마차의 문을 열었다. 안에서 나온 지팡이가 가장 먼저 바닥에 닿았고 곧 마차에 타고 있던 인물이 얼굴을 드러냈다.

성벽의 문을 보고 있던 조반니는 마차에서 내린 상대를 보고 순간적으로 큰 충격에 휩싸여 입을 벌렸다. 여기에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한 상대였기 때문에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잠깐 들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이 딱딱하게 굳은 것처럼 박동이 느려지는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입속으로 웅얼대게 됐다.

“어떻게…… 이곳에…….”

마차에서 내린 로미오는 지팡이로 바닥을 짚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카를로타가 뒤로 물러서자 로미오는 조반니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섰다. 다섯 발자국 남짓한 거리에서 조반니와 마주 선 로미오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대위님께서 어떻게… 여기 계신 겁니까?”

로미오는 흐릿한 윤곽 너머의 조반니를 응시했다. 지금껏 목소리로만 알아 왔던 그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오래전에 그를 제6군단에서 취조했을 때보다 더 선명하게 보였다. 안개가 낀 듯 뿌옇던 얼굴이 눈썹의 모양과 표정을 흐릿하게나마 드러내고 있었다.

어젯밤 재판정에는 볼 수 없었지만 이제는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저를 만나러 오신 건가요?”

스스로의 의지로 이곳에 조반니를 만나러 온 것이었지만 로미오는 조반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차분히 호흡을 골라야 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서 있는 키 큰 금발 머리의 사내가 바로 조반니였다. 검은 점에 얼굴의 일부분이 가려져 있었지만 볼 수 있었다. 짙은 금색 눈썹과 각진 눈썹뼈, 화려한 빛깔의 눈동자, 날카롭게 뻗은 콧대, 날렵하면서도 굵은 턱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온화하고 부드럽기보단 강렬하고 뚜렷한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눈동자와 같은 금색의 머리카락은 정리되지 않은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눈부시게 환했다. 어둡거나 붉은 기가 섞인 금색이 아니라 한낮에 매섭게 내리쬐는 태양 빛을 닮은 순수한 금색이었다.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던 그가 마치 태어나 처음 만난 사람인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눈앞의 사내가 조반니라는 사실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한꺼번에 너무도 많은 감정이 들어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에서 흐릿한 형상만을 갖고 있었던 조반니였다. 얼굴을 본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착각이었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그려지는 흐릿한 회색 그림자 위에 눈앞의 선명한 얼굴이 덧입혀졌다. 여태껏 수도 없이 들어 왔고 지금도 듣고 있는 그의 목소리 위에 얼굴이 입혀지자 비로소 완벽한 한 사람으로 그 존재감이 느껴졌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다시 눈이 먼다고 해도 오늘 본 그의 얼굴을 기억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확신에서 오는 규정하기 힘든 감정은 또 다른 괴로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조반니의 얼굴을 뚜렷하게 마주한 이 순간 그가 자신을 잔인하게 범했다는 사실이 그의 존재만큼이나 절실히 실감 났다. 자신을 가축 취급하며 몸을 취했던 엽기적인 사내가 바로 조반니였다. 그는 지금 자신의 앞에 이렇게 서 있었다.

목울대 깊은 곳을 달군 응어리가 손끝으로 번져 나가는 느낌과 함께 한 가지 생각이 격렬히 요동쳤다.

어젯밤 통령을 찾아가 했던 이야기를 후회했다.

조반니를 이곳에 남게 해 달라고 부탁하지 말았어야 했다.

“……대위님?”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힘들어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지만 마음속에서 제멋대로 뒤엉킨 감정들이 스멀스멀 몸을 덮쳤다. 스스로가 유린당할 만한 연약한 존재처럼 느껴지자 조반니를 향한 분노가 다시금 솟구쳤다. 비 오던 날 밤을 시작으로 여러 번에 걸쳐 그가 자신에게 저질렀던 짓을 잊을 수도, 벗어날 수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명료한 목소리로 그에게 하고자 하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그를 비난하고 성을 내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에는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여기에 온 것이었다.

이미 어젯밤에 결정을 내렸고 마음을 정하기도 한 상태였다. 이런 순간을 예견하지 못했던가? 이렇게 다시 견딜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일 거라는 것을 모르고서 그런 선택을 했던가? 아니었다. 알고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강요당한 적이 없었다. 이 자리에 서고자 마음먹은 것은 자기 자신이었으며 모든 결정은 스스로의 선택에 이루어졌다. 조반니를 네베로 데려가고자 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그를 용서하고, 숨겨 주고, 함께 속죄의 길로 나아가겠다고 결심한 것은 자신이었다.

“……대위님? 혹시…….”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조반니는 자신의 눈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정확히 닿고 있음을 눈치챈 그의 표정이 서서히 달라졌다. 의아함을 나타내는 눈썹의 움직임과 말을 삼키려는 듯 다물렸다가 떼지는 입술을 보고 있자 그가 주저하며 말했다.

“설마…….”

로미오는 고개를 숙였다. 지팡이 손잡이를 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또 한 번 정확히 마주 보자 조반니는 놀란 기색을 내비쳤지만 로미오는 그의 의문에 답하지 않았다.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대답해 주십시오.”

로미오의 목소리를 들은 조반니는 자신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여태 얼마나 로미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는지 꿈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해야 할 말을 고르는 시간조차 아까워 뚫어져라 로미오를 바라보게 됐다. 시력이 돌아온 것이냐고 묻는 대신 그의 푸른 눈을 말없이 마주 봤다. 그는 분명 자신을 보고 있었다. 만약 다시 전처럼 눈이 먼다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눈맞춤이었다. 로미오의 새파란 눈 속에 담긴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동시에 본 최초의 순간이자 최후의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침묵했다.

“선생님께서 제 눈을 고쳐 주고자 애쓰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저는 그것이 진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그러셨던 겁니까? 선생님께서 제게 저지른 짓이 본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저를 위해 치료법을 알아내려고 하셨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모든 것들은 연극이었던 겁니까?”

조반니는 고조되는 호흡을 억제하며 로미오의 목소리를 마음속에 새겼다. 지금 이 순간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로미오가 지금 여기 있었다. 그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곧 이 나라를 떠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순간적으로 잊혀질 만큼 마음이 벅찼다. 자신에게 닥친 나머지 일들이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라는 근거 없는 예감이 들었다.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자신이 그간 로미오를 얼마나 그리워했으며 지금 얼마나 커다란 기쁨을 느끼는지 말로 쏟아 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로미오가 답을 요구하는 질문을 했으므로 들떠 있는 마음을 억눌렀다.

목을 가다듬은 후 가슴을 세차게 두드려 대는 쿵쾅거림을 외면하고 대답했다.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대위님께 거짓 없이 답해 드리는 것이라는 걸 압니다. 다른 모든 이들에게는 거짓말을 하더라도 대위님만은 속이고 싶지 않으니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조반니는 서로의 눈을 보며 이야기하는 것이 이토록 낯선 일이었던가, 하고 생각하며 끈질기게 로미오를 바라봤다. 그와 나누는 이 대화가 서둘러 끝나 버리지 않길 바라기도 했고 로미오의 물음이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의 본심을 꺼내 보이길 요구하기도 했기 때문에 약간의 사이를 둔 뒤 말했다.

“저는 정말로 치료법을 밝혀내고자 노력했습니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요. 질송 선생님을 매일같이 찾아가 그분과 치료법을 논의하며 이미 이전에 독파했던 수백 권의 의학서를 처음부터 다시 읽었습니다. 밤낮없이 시체를 수거해 와 눈을 해부했고 그 결과를 세세하고 낱낱이 모두 기록했습니다. 잠을 아껴 가며 병명을 밝혀내고 치료법을 찾아내려고 했지요. 하지만 그것은 대위님을 향한 애절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때도 대위님께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제 노력들은 사랑하는 이의 병을 고쳐 주고자 하는 낭만적인 발로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순전히 제 이익을 위해서 그런 일을 했습니다.”

조반니는 로미오가 더는 이런 이야기에 놀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이해를 바라는 것은 주제넘은 행동이었다.

“의문의 괴병의 치료법을 처음으로 밝혀낸 의사로 칭송받고 싶었습니다. 엉터리 치료법을 발견해 냈더라도 사람들이 속아 넘어갔다면 저는 아무런 효과도 없는 방법을 치료법으로 찾아냈다며 모두에게 공표하고 그 치료법을 대위님께 썼을 겁니다.”

“그렇게 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셨겠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로미오의 목소리는 차분한 한편 차가웠다. 조반니는 로미오의 마음을 제대로 짐작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너무도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는 아주 많은 감정을 한꺼번에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상반된 여러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해 밀어냈던 상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며 이야기하고 있는 심정. 그 심정이 어떤 것일지 상상해 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제가 하는 행동은 일반적인 상식이나 경험에 의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대위님께서는 언제나 제게서 불쾌함을 느끼실 겁니다. 저는 그런 인간입니다… 이미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답이 부족했던 것인지 로미오는 말이 없었다. 조반니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반응을 대신하며 로미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짧은 침묵조차 소중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로미오가 말없이 자신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에서도 충분히 만족감을 얻었다. 그가 좀 더 이렇게 있어 주기를.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좋으니 여기 이대로 있어 주기를 바랐다.

“선생님께서 저지른 잘못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십니까? 제게 하셨던 잘못들에 책임을 느끼고 계십니까?”

조반니는 눈을 들어 로미오를 응시했다. 긴 눈맞춤 끝에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대답과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답이 일치함을 깨달았다. 로미오의 심정은 정확히 헤아리기가 힘들었지만 당당히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자신이 내놓으려는 대답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로미오는 거짓말로 포장된 답을 원하지 않았고 자신은 조금 전에 로미오에게만큼은 솔직해지겠다고 약속했다.

“……아니요. 느끼지 못합니다.”

대답한 순간 로미오는 눈을 굳게 한 번 감았다. 자신이 들은 대답을 마음 깊은 곳에 묻으며 견디는 듯했다.

“선생님께 살해당한 분들의 억울함과 고통을 이해하십니까?”

“아니요…… 저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영원히요.”

하지만 조반니는 곧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제가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저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지 못하는 데다 자제력이 부족하다는 것도 압니다. 대위님의 마음에 공감할 수는 없지만 대위님께 저지른 짓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제게 살해당한 사람들이 억울함을 느끼는 이유도요. 이해할 수 없지만 압니다. 제 마음과 감정으로 완전히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외울 수 있습니다. 먼 외국 나라의 말을 배우듯 기억할 수 있습니다. 죄책감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왜 제가 그런 감정을 느껴야 하며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말이 빨라진 조반니는 서둘러 이야기를 끝맺고 침묵했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니 한참 만에야 로미오가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어젯밤에 제게 기회를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어떤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까? 제게 저지른 짓을 후회하고 참회하고자 말씀하셨던 겁니까?”

그것은 묻는 말이 아니라 확인하기 위한 말이었다. 조반니는 알 수 있었다. 로미오는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서 확인하려 하고 있었다.

이 대화가 어떤 식으로 끝날지는 알 수 없지만 조반니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제 죄를 온 마음으로 뉘우치고 했던 말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대위님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대위님께서는 제게 즐거움을 주는 분이십니다. 너무나 중요한 분이시죠. 그리고 그것은 곁에 있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비롯된 감정이 아닙니다. 저는 구금되어 있는 동안 대위님을 향한 마음이 더 확고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얼마나 대위님을…….”

그러나 조반니는 말을 끊었다. 자신의 말이 로미오를 분노하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을 향해 쏟아 낼 비난을 각오하고 대답을 기다렸지만 로미오는 노여워하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제 곁을 떠나 계시는 동안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불과 닷새 전만 해도 선생님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선생님께서 이대로 떠나시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하니 결정을 내려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용서하거나, 용서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제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고 싶습니다.”

로미오는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조반니의 눈동자에서 그의 이마로, 뺨으로, 코로, 입술로, 턱으로, 그리고 다시 눈을 올려다봤다. 검은 점 너머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뚜렷한 금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선생님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곳까지 저를 만나러 오신 건가요? 고민하신 끝에 얻은 대답을 제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요?”

어젯밤 이미 마음을 정리한 로미오였지만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쉴 새 없이 자꾸만 여러 생각이 떠오르는 탓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애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십니다. 그 말의 뜻을 선생님의 방식대로 해석하고 있기에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시는 걸 겁니다. 그러니 제게 입에 담지 못할 저지르고도 마음을 품고 있다고 말씀하셨을 테죠. 두 가지를 동시에 주장하는 것이 저를 얼마나 혼란스럽고 분노하게 만드는지 선생님께선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것이 누가 됐든 다른 사람의 감정과 기분을 느끼는 것은 선생님께 불가능한 일이니 제가 괴로움을 호소해도 선생님께는 그 괴로움이 보이지 않을 겁니다. 왜 다른 이들이 선생님께 죄의식을 느낄 것을 요구하는지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그들은 어떤 특정한 감정을 끊임없이 요구하지만 선생님께선 그런 것을 느껴 본 적이 없으시니 말입니다.”

로미오가 무슨 말을 하든 그의 화를 돋우지 않도록 솔직하고도 적절한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조반니였다. 그러나 로미오가 한 말은 대답을 요구하는 말도 아니었고 자신의 책임을 탓하는 말도 아니었다.

“선생님께선 신발 밑창에 끼인 작은 돌조각을 빼낸 것과 누군가를 잔인하게 살해한 것의 차이를 모르실 겁니다. 걸을 때마다 발을 불편하게 하는 데다 신발을 망가뜨려 돌조각을 빼냈을 뿐인데 모든 이들이 화를 내고 울부짖으며 그것이 얼마나 야만스럽고 비열한 행동인지를 주장하는 겁니다. 신발 밑창에서 빼내진 돌조각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웠을지 공감할 것을 강요하고 후회와 반성을 요구하며 선생님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면 이해하기 힘든 게 당연합니다. 왜 그 행동이 잘못된 것이며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하고 왜 벌을 받아야 하는지 납득되지 않으실 겁니다. 왜 사람들이 하찮은 돌조각을 안타까워하고 가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으실 겁니다.”

로미오는 조반니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지는 것을 지켜봤다.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든 미루어 짐작하기 위해 한껏 귀를 기울이고 눈을 굴리던 그가 그 모든 것을 멈췄다.

여태 그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났던 전쟁. 소리 없는 그 전쟁에 교전이 끝났음을 알리는 백기를 갑작스레 마주한 사람 같았다.

“제게 저지르셨던 잘못도 같은 이치로 이해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이 그 정도로 잘못한 일인지 선생님께선 의문을 느끼고 계실 겁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명백한 진실인데 제가 부정하고 거부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제가 선생님께 얼마나 이해받기 힘든 인간일지 압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그럴 겁니다. 사람들은 항상 수긍하기 힘든 이유를 들며 놀라고, 겁에 질리고, 두려워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선생님의 잘못을 지적할 겁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너무 많고 느껴야 할 감정은 그보다 많으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남의 감정을 헤아리고 이해하기를 강요받으실 겁니다.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 밖의 일을 억지로 권하는 이들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로미오는 조반니가 자신에게 했던 모든 말을 기억했다. 그 말속에서 얻은 해답이었다.

“저라면 더 이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쪽을 택했을 겁니다. 이 세상은 납득할 수 없는 것투성이며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 자신의 애정과 행복을 남들에게 나누어 주니 거기에 제가 낄 자리는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해해 보려고 노력한 끝에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혼자 은둔했을 겁니다.”

조반니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듣기만 했다. 로미오는 조반니의 표정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침묵하고 있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침묵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선생님께서 제게 품고 계신 마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형태이지만 그것이 애정임을 인정합니다. 평범한 보통의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인 터라 믿지 못했으나 이제는 아닙니다.”

조반니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믿을 수 없는 눈길로 로미오를 바라보는데 그가 자신의 표정이 의미하는 바를 안 것인지 이어 말했다.

“선생님께서 더는 저를 속이지 않으려 하신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제게 솔직해지고자 마음먹으시고 다른 것들을 포기하셨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묻고 있었지만 그렇게 되길 원하는 목소리였다. 조반니는 이 이상 말하는 것이 로미오의 마음을 흔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 말만을 묻고 대답을 기다렸다.

“……제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선생님을 진정으로 용서해 드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니 선생님께서 저지른 죄가 없던 것으로 하기엔 너무도 큰 죄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체 어떻게 제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으셨는지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제가 살아 있는 한 그 일에 관한 기억은 평생 저를 악몽처럼 따라다닐 겁니다. 선생님을 뵐 때마다 그 일을 처음부터 다시 겪는 듯한 고통도 참아야 할 겁니다.”

조반니는 로미오가 감정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냉철함을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 안에 휘몰아치는 감정을 이해하진 못하지만 알 것 같았다. 그가 이 순간 얼마나 동요하고 있고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그런 와중에 또 얼마나 자신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그러나 저는 제 마음에 안식이 찾아들길 바라기에 선생님을 떠나보내지 않겠다고 결정 내렸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용서할 여지조차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저는 제 심장을 갈가리 찢는 심정으로 이런 결정을 내린 겁니다. 내일 이른 아침이 되면 저는 이곳을 떠나 네베로 갈 겁니다. 바치에서의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그곳으로 내려가 살 겁니다. 선생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조반니가 크게 놀라 카를로타를 돌아봤다. 얼마나 놀랐는지 숨을 삼키는 소리를 크게 냈을 정도였다. 저만치에 서 있는 카를로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이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생각에 재빨리 로미오를 본 조반니는 눈이 커졌다.

“정말입니까?”

조반니는 들뜬 마음에 다시 카를로타를 향해 외쳤다.

“누님, 정말입니까? 대위님께서 하신 말씀이 사실입니까?”

카를로타의 눈빛을 통해 이 모든 것이 장난이 아님을 깨달은 조반니는 억누를 수 없는 웃음이 비집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이 길로 루바노를 떠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흡사 사형을 앞둔 사형수의 심정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로미오를 떠나지 않아도 된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목적지가 루바노 밖이 아니라 네베라는 사실에 새 삶을 부여받은 기분이었다. 환호를 지으며 뛰어오르는 것으로 모자라 지금 자신이 얼마나 기쁜지 숨도 쉬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 내고 싶었다.

“선생님께선 네베로 내려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게 되실 겁니다. 이곳에서 하셨듯이 마을 사람들을 해치거나 위협하려 드신다면 저는 제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선생님께 처단을 내릴 겁니다.”

“그럴 일 없습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저를 믿어 주세요. 이 자리에서 맹세드릴 테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조반니는 첫 말부터 끝말까지 틈을 주지 않고 빨리 말하더니 어린아이들이 약속할 때 으레 새끼손가락을 걸며 말을 맺는 행위를 하려고 손을 들었다. 그러다 로미오의 다친 손가락을 내려다보고 도로 내렸다. 기쁜 자신과 달리 로미오의 눈빛 속에는 여전히 괴로움이 엿보였다.

“모든 것이 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겁니다. 제가 알던 선생님의 본래 모습은 저의 이 손가락이 부러졌던 날 밤 이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저는 더 이상 선생님을 선량하고 따뜻한 분으로 보지 않습니다. 제가 선생님의 실체를 알게 된 이상 로사티 하숙집의 2층과 3층에 살던 평범한 이웃처럼 지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선 안 됩니다. 제게 있어 선생님은 사람을 죽인 살인자이자 용납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괴물 같은 존재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날카롭게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조반니는 낙담하지 않았다. 자신이 로미오에게 이해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누구도 로미오와 같은 결정을 내리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았다.

“선생님께서 지금껏 스스럼없이 하셨던 모든 행동을 이제부터는 삼가셔야 합니다. 남을 해치고 속임수를 쓰고 거짓말을 일삼아 오셨지만 더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러셨듯 제게 솔직한 모습 그대로를 보이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저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디 제가 오늘의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저는 지금 이 순간에조차 제 결정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더는 저를 괴롭게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네, 약속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선생님께서 탈옥하셨던 날 하숙집으로 찾아오셨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날 선생님께서 얼마나 기괴한 언어로 말씀하셨는지도 아실 겁니다. 그것은 분명 광증의 여파였습니다. 네베로 가거든 그곳에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선생님께서 병을 앓고 있음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병의 주된 증상이 환청이라는 것도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번에 또 광증에 사로잡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실 겁니다. 저와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네, 약속하겠습니다.”

“더 이상 선생님께서 하신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행동이며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었는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전과 같은 짓을 저지르신다면 저는 선생님을 떠나보낼 겁니다. 두 번 다시 저와 만나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제 괴로움을 호소하는 것보다 이렇게 경고하는 것이 선생님께 더 의미 있을 겁니다. 명심하십시오. 오늘 이 기회가 선생님께 주어진 마지막 기회입니다.”

로미오의 말대로 그것은 조반니에게 그 어떤 것보다 효과 있는 경고였다. 고통받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죄를 지적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힘을 갖고 있었다.

“대위님께 절대로 실망을 가져다드리지 않겠습니다. 제게 한 번의 기회를 주셨으니 거기에 대한 보답을 하겠습니다. 비록… 제가 저질렀던 짓은 없는 일이 되지 않을 것이며 저는 오늘 이날부터 전혀 다른 인간이 될 수도 없을 겁니다. 지금껏 이해받지 못할 일을 일삼아왔고 다른 이들이 제게 했던 충고를 모두 무시했지만 앞으로는 다를 겁니다. 남을 상처 주거나 죽이지 않을 것이며 해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 대위님께서 오늘 하신 말씀을 떠올리겠습니다.”

로미오는 조반니가 그 본연의 모습을 목소리에서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번지르르한 말도 없었고 듣기 좋게 꾸며 낸 말도 없었다. 지금 저 말을 하고 있는 조반니는 가짜가 아니었다.

“이대로 저를 보내셨다고 해도 대위님을 원망하지 않았을 텐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대위님께서 제 진심을 알아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제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겁니다. 대위님께서 설사 하루아침에 갑자기 다른 모습으로 변하신다고 해도 좋습니다. 늘 지금처럼 대위님을 이루는 모든 것에 한결같은 애정을 가질 겁니다. 믿으셔도 좋습니다.”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한 조반니는 얼굴 가득 짓고 있던 옅은 웃음을 서서히 거뒀다. 찰나의 생각에 잠긴 그는 자신의 눈길이 가 닿는 로미오의 얼굴 곳곳을 바라봤다.

이렇게 말없이 오랫동안 보아도 로미오는 이제 자신과 눈을 맞추며 침묵을 기다릴 수 있게 됐다.

“그 누구에게도 평생 이해받지 않을 것이고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기회가 찾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자신을 적나라하게 전부 드러낸 시점에서 이미 대위님께 이해받기를 포기했는데…… 그런데도 저를 받아들여 주셨군요. 제가 지금 제 망상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라고 해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저의 진짜 모습과 거짓된 모습 모두를 아는 대위님께서 저를 이해해 주셨으니 더는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살면서 이루고픈 꿈 따윈 더 이상 없습니다. 정말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반니는 거두었던 미소를 다시 지어 보였다. 로미오는 그 미소를 볼 수 있었다.

“대위님의 결정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겠습니다. 남은 평생 그 사실을 증명하며 살아가겠습니다.”

멀리 서 있던 주세페가 가까이 다가왔다.

“시간이 됐습니다. 마차에 오르십시오. 지금 바로 네베로 출발할 겁니다.”

곧 다시 만나게 될 테지만 조반니는 짧은 인사를 전하기 위해 고개를 기울여 로미오의 눈을 가까이에서 봤다.

투명하고 푸른 두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 로미오와 처음으로 마주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눈치채지 못하고 흘려보냈던 운명의 순간이었던 건지도 몰랐다.

“그러면 네베에서 뵙겠습니다. 조심히 오셔야 합니다, 대위님.”

짐마차로 다가가자 주세페가 문을 열어 줬다. 로미오를 돌아보며 마차에 오르는데 카를로타가 다가왔다.

다시 한번 두 남매에게 기약 없는 이별이 찾아온 셈이었다.

“네베에 도착하여도 머무를 곳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을 거다. 바로 어제 사람을 보냈으니 그들이 네가 살 만한 곳을 마련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해라. 그들이 어떤 요구를 하든 내가 시킨 것이라고 생각하고 얌전히 따라라.”

“네, 알겠습니다.”

조반니가 로미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대답하자 카를로타가 손으로 조반니의 팔을 짚었다.

“나는 너를 감시할 것이다. 너를 감시하기 위해 그곳에 사람을 보낼 것이며 그들은 네 숨통을 죄듯 너의 모든 것을 지켜볼 거다. 네 신분을 증명해 줄 그 어떤 것도 이 나라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라. 누이로서 네 목숨을 한 번 살려 줬으나 두 번은 없다. 내 입지를 위태롭게 하는 일을 더는 하지 말거라.”

싱긋 웃어 보인 조반니는 자신의 팔을 짚은 카를로타의 손을 잡았다. 주름진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자 카를로타는 조반니가 어렸을 때 종종 그를 향해 짓곤 했던 표정이 됐다.

“네베에서 자리를 잡는 대로 편지를 보내겠습니다. 제 걱정은 마시고 무탈히 잘 지내십시오. 뵈러 가지는 못하겠지만요.”

조반니는 카를로타에게 눈짓 인사를 한 뒤 마차 문을 닫았다. 창 너머로 보이는 로미오는 수풀 어귀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활짝 미소 지은 조반니는 온 마음이 기대감과 희망으로 부푸는 것을 느꼈다.

네베에서 시작될 새 삶에 로미오가 있었다. 그는 자신을 떠나보내지 않았다.

자신은 먼 곳으로 떠나지 않고 이곳에 남을 수 있었다. 그 누구도 아닌 로미오와 함께.

마부가 말을 때리자 마차는 가파른 비탈길 아래로 힘차게 내달렸다.

* * *

그 시각 바치 시가지의 중심에 위치한 중앙 광장에는 사형대가 마련되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사형대 위에는 죄수의 목을 매달 수 있도록 높다란 나무틀이 놓여 있었다. 교수형을 당할 예정인 죄수가 탑의 꼭대기에서 추락해 숨이 끊어졌으나 시신을 대상으로도 형을 집행하는 루바노의 법에 따라 죄수는 죽은 채로 간수들에게 이끌려 형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추락의 충격으로 얼굴이 모두 짓이겨져 생김새를 알 수 없게 된 죄수는 참혹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곤 피가 엉겨 붙은 금색 머리 빛깔이 유일했다.

처형 장면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구경꾼들과 형 집행을 촉구하며 고함을 질러대는 사람들의 함성이 한 데 뒤엉켜 중앙 광장은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웠다. 죄수에게 모욕적인 말을 던지며 바닥에 침을 뱉어 대는 이들은 죄수가 이미 목숨이 끊어졌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형 집행을 위한 판결문 낭독이 끝나자 죄수의 시체는 그를 아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밧줄에 목이 매달렸다. 많은 이들이 울먹이며 죄수의 이름을 외쳤지만 곧 사형대의 바닥이 밑으로 꺼지며 시체는 목이 매달린 채 높이 들어 올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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