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올빼미의 포획을 알리는 마지막 총성
“그가 정말 스스로 찾아왔단 말이야? 일이 틀어졌음을 눈치채고 모든 정보를 우리에게 넘기기 위해?”
포치 소장을 뒤따르는 군인들의 가장 맨 뒤에서 마르코가 걷고 있었다. 굳은 표정을 한 그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는데 마르코의 팔꿈치를 잡고 걷고 있는 로미오도, 그의 뒤를 따르는 발레리아도 앞서가는 장교들과 표정이 달랐다.
“엘베라가 사로잡혔다는 것을 알고서 찾아온 걸 겁니다. 제 예상이 맞았군요. 엘베라는 저를 습격하기 전에 이미 상위 단원들과 논의를 끝냈던 겁니다. 발레리아와 이브가 아니었다면 엘베라는 제게서 정보를 얻어내 그들에게 돌아갔을 테고 외국으로의 망명과 루바노 내에 은거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했을 겁니다. 밤새 두고 보며 시간을 벌다가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다고 판단해 직접 찾아온 걸 겁니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걷는 장교들은 오랜 숙적으로 여겨 오던 단테의 12인의 와해가 눈앞에 닥쳤기에 엄숙해져 있었지만 로미오와 마르코, 발레리아는 표정이 굳어 있었다. 부대를 찾아온 자의 정체 때문이었다.
“문을 열어라.”
“예, 소장님.”
도착한 곳은 고문실의 아래층에 위치한 취조실이었다. 철문을 지키고 선 군인들이 문을 열자 안에는 열 명의 군인이 있었다. 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나무 탁자에 앉은 사람을 에워싼 그들은 무장한 상태였다.
초를 켜지 않았으나 다행히 취조실에는 창이 달려 있었다. 새벽빛이 스며들어 오고 있어 불을 켜지 않아도 서로의 얼굴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탁자 앞에 앉아 있는 것은 레오나르도였다. 그는 팔이 뒤로 묶인 채 문을 열고 들어온 수십 명의 군인들을 올려다봤다.
바로 옆에서 레오나르도를 지키고 선 군인이 포치 소장을 향해 경례를 하며 설명했다.
“레오나르도 디오니시오라는 이름의 상위 단원입니다. 인명록에 적혀 있던 그 이름입니다. 다만 얼굴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포치 소장을 조용히 응시하던 레오나르도는 장교들의 얼굴을 일일이 한 명씩 훑는 대신 맨 뒤에 서 있는 세 사람을 쳐다봤다. 로미오와 마르코, 발레리아의 얼굴을 차례로 본 그는 로미오에게 시선을 두며 말했다.
“저들이 내 얼굴을 알고 있으니 확인하십시오.”
엔초의 생일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레오나르도를 만났던 마르코와 발레리아였다. 함께 음식을 나눠 먹고 엔초에게 선물을 건네며 생일을 축하한 그들이었다.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남인데 이곳은 무려 제6군단의 취조실이었다. 레오나르도가 상위 단원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사실에 대한 충격도 사그라든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온 그를 취조실에서 마주하자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들었다. 그는 엔초의 생일날 보았던 점잖고 말수 적은 의사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린아이의 생일 선물로 동화책을 선물할 줄 아는 평범한 사내가 바로 그였다. 반역자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그 가면을 벗겨 내면 그도 그리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것은 로미오였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자리해 있는지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던 로미오였지만 레오나르도의 목소리를 듣자 감당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그 자신이 감성적이고 나약한 인간이라서가 아니었다. 레오나르도는 머지않아 사형을 당하지만 그가 엔초의 생일날 줬던 동화책은 엔초의 방 책장 한편에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꽂혀 있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자가 정말로 상위 단원의 인명록에 이름이 올라 있는 그자인가?”
포치 소장이 세 사람을 돌아보자 로미오가 애써 표정을 숨기며 대답했다.
“……예. 그자의 이름은 레오나르도 디오니시오가 맞습니다. 상위 단원 중 한 명입니다.”
로미오의 대답에 포치 소장은 나무 의자를 빼내 앉았다. 그가 맞은편에 앉자 레오나르도는 포치 소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들에게 요구할 것이 있습니다. 제 요구 사항을 들어준다면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주겠습니다.”
“협상을 하러 왔다는 말이로군. 한데 말이지, 이미 우리에게 네놈들의 단원 하나가 붙잡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안다면 협상을 요구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도 알 텐데.”
제6군단의 사령관인 포치 소장이었다. 제6군단이 창설된 이래 단테의 12인의 가장 결정적인 덜미를 붙잡은 순간이었다. 취조실 내의 군인들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레오나르도를 매섭게 주시했다. 그들의 목적은 단테의 12인을 잡아 처넣어 루바노의 번성에 힘쓰고 통령 각하에게 그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이 목전 앞에 닥쳐와 있었기 때문에 금방이라도 레오나르도에게 달려들어 목 아래에 검을 댈 것처럼 엄중한 표정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협상을 하러 온 것입니다.”
레오나르도의 시선이 다시금 로미오에게 머물렀다. 그는 금방 다시 포치 소장을 보더니 말을 계속했다.
“이곳에 붙잡혀 있는 상위 단원을 비롯한 나머지 단원들을 극형에서 사면해 줄 것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재판에 회부되더라도 이번 협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상부에 우리의 감형을 주장해 주십시오. 내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면 군이 원하는 것을 내어 주겠습니다.”
스스로의 뜻으로 이곳까지 찾아왔지만 레오나르도는 엄연한 포로였다. 팔이 포박된 채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다시 이곳을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군인들이 지금 당장 고문실로 끌고 가 엘베라에게 지난 밤 동안 가했던 끔찍한 고문을 가한다고 해도 저항할 수 없었다.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군. 네놈은 제 발로, 그것도 혼자서 이곳으로 걸어들어왔다. 이곳에 앉아 우리에게 협상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우리가 허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협상이 결렬될 경우 목숨을 내놓기를 각오하고 이곳으로 찾아온 겁니다. 나머지 상위 단원들은 외국 지부로의 망명을 결정한 상황이며 모든 준비는 이미 지난밤에 끝났습니다. 협상이 통하여 당신들이 우리를 체포하기 위해 나선다면 내가 정보를 제공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나머지 단원들이 협상 결렬을 눈치채고 즉각 움직임을 보일 겁니다. 바치 전역의 연락망은 물론 바치 외의 소도시에서 중간 연락책을 담당하는 하위 단원들도 상위 단원들이 쉽게 찾아낼 수 없는 방법으로 잠적하게 될 겁니다. 당신들은 바치 전역을 수색하는 수고로움을 겪어야만 할 것이며 수색 과정은 몇 달에 걸쳐 끝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배짱을 부리는 것 같은 말투였지만 레오나르도는 이런 때에 배포를 세울 성미가 아닌 데다 무엇보다 그의 목소리와 눈빛 속에는 말수 적고 신중한 본래의 모습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협상가다운 전략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레오나르도였다. 단지 이것 외에 그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군단장인 포치 소장을 상대로 만용을 부리듯 어리석은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이미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손에 들린 패가 승률이 낮은 조악한 패인데다 이길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목숨이라도 더 얻어 내기 위해 협상하려 하고 있었다.
“이미 당신들은 우리에 대해 잘 알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중 어린 소녀가 있다는 것도 알 겁니다. 우리가 어떤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질지 알고 있으나 사형만은 면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어린 소녀는 반드시 거기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녀에게는 화형과 같은 극형보다 종신구금형이 적합합니다.”
레오나르도는 그 말을 하며 로미오를 올려다봤다. 조용한 시선이 잠시간 머무르더니 포치 소장에게 하던 것과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게 내려질 형벌을 협상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나머지 단원들이 사형을 면할 수 있다면 저는 어떻게 되어도 좋습니다. 무엇보다 친치아만은…… 그녀에게만은 남은 삶을 허락해 주십시오. 감옥 안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고 해도 좋습니다.”
레오나르도의 목소리가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안 로미오는 주먹을 굳게 한 번 쥐었다. 그 모습을 본 포치 소장이 레오나르도의 말을 막았다.
“네놈들에게 내려질 형벌은 군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자리에서 목숨의 보전을 요구하여도 우리가 확약할 수 없는 것은 없으니 처음부터 협상의 내용이 잘못된 셈이지. 설사 협상 가능한 문제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고분고분하게 네놈에게 응할 이유는 없다.”
“여기 있는 알피에리 대위에게는 내 요구를 들어줄 만한 능력이 있을 것입니다.”
포치 소장이 레오나르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맛살을 찌푸리는 사이 레오나르도가 로미오를 말없이 응시했다.
제6군단이 통령과 조반니의 관계를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 레오나르도는 그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로미오가 언제가 됐든 통령과 은밀히 만나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는 분명 이 자리에서 자신이 요구했던 것을 통령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는 그런 인간이었다. 자신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물론 통령이 자신들의 사정을 헤아려 관용을 베풀어 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른 모든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더라도 단테의 12인에게만큼은 베풀지 않을 자가 통령이었다. 하지만 로미오라면 다를 것이다.
통령이 이번 일을 위해 로미오를 이용했을 가능성은 적었다. 그녀는 루바노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극악한 내용이 담긴 칙서를 공표할 만큼 악독한 자였지만 개인적인 성정은 그것과 조금 달랐다.
소문으로 들은 것이 전부였지만 비스카르디 통령은 호혜 관계를 유지할 만한 상대에게 너그럽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모습을 보인다고 했다. 그녀가 로미오에게 밀명을 지시하는 과정에서 조반니의 누이로서의 면모를 여과 없이 보여 주었다면 로미오와 통령의 관계는 단순히 퇴역 장교와 한 나라의 원수로 치부할 수 없을 것이다. 통령이 로미오의 개인적인 청을 매몰차게 거절할 확률은 낮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친치아의 목숨은 이 자리에서 확실히 보장받는 게 가능했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엘베라를 체포한 지난 밤부터 오늘 아침에 이르기까지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닙니까? 당신들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짐작하고 있으니 말하십시오. 당신들이 원하는 그 정보를 갖고 있는 상위 단원들은 현재 특정한 장소에 은신해 있습니다. 그들의 은신 장소와 내 요구를 맞바꾸는 것으로 협상을 끝내시지요.”
레오나르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보고 있던 로미오는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밤새 엘베라의 고문을 직접 지켜보고 고통에 휩싸인 그녀의 신음 소리를 낱낱이 모두 들은 그였지만 조직의 말로를 스스로의 손으로 결정짓고자 하는 레오나르도의 이야기는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포치 소장에게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레오나르도는 사실 로미오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긴말로 설명하고 있었지만 원하는 것은 하나였다. 자신들을 살려 달라는 것.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들어올 경우 네놈들을 일거에 체포할 수 있는 ‘그것’을 원한다. 네놈들의 조직망이 일목요연하게 적힌 인명록. 그 인명록을 원한다. 인명록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겠지?”
포치 소장의 말에 레오나르도는 그 특유의 차분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위 단원들 중 소수가 그 인명록을 나눠 갖고 있습니다. 망명을 결정하고 그 인명록은 특정한 장소에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 장소와 더불어 현재 상위 단원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곳의 위치도 알려 주겠습니다. 거짓은 없으니 믿어도 좋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협상에 응하는 대답을 원하며 포치 소장을 바라봤지만 그는 쉽사리 입을 떼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거짓말로 협상을 마무리하고 추후에 번복을 해도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포치 소장으로서는 레오나르도를 고문실로 데려가는 손쉬운 방법이 있었다. 그의 협상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 굴욕적으로 느껴지는 면 또한 있었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자 레오나르도가 말했다.
“이미 우리는 조직이 더는 건재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단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며 협상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과 계획대로 루바노를 벗어나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망명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갈라졌습니다. 협상 과정에서 오랜 시간이 소모되거나, 그렇듯 오랜 시간이 소모되었음에도 협상이 결렬될 경우 망명을 택한 단원들이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행동을 개시할 겁니다. 우리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난다면 저를 고문해 정보를 얻어 낸다고 하더라도 체포에 어려움을 겪을 겁니다.”
“협상에 응해야만 하는 이유를 들어 우리를 협박하는 것인가?”
“단원들 중 일부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협상에 응하는 게 당신들에게 더 유리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조직이 무너질 위기에 처한 지금 하위 단원 열 명과 상위 단원 한 명의 목숨이 동등한 값으로 매겨져 있습니다. 갖고 있는 정보 간에 뚜렷한 격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협상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들에게 넘길 수 있는 정보에 대해 함구할 겁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비밀을 발설하느니 이 자리에서 숨이 끊어지는 쪽을 택할 겁니다.”
레오나르도가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로미오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포치 소장에게 말했다.
“저자의 말대로 하십시오. 이미 지난 밤부터 엘베라의 고문이 지속되고 있어 군의관은 물론 고문자 노릇을 할 장교의 수가 부족합니다. 이자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곳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협상을 결렬시키고 고문실로 데려간다고 해도 쉽게 답을 얻어내는 것은 힘들 것이며 추후에 협상을 재개하여도 그 역시 원하는 대답을 들을 거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포치 소장의 얼굴에서 고심의 흔적이 엿보이자 레오나르도가 덧붙였다.
“말 그대로입니다. 당신들은 이 자리에서 협상을 마무리 짓지 않을 시 얻게 되는 이득이 아니라 그 손실을 고려하는 게 좋을 겁니다. 나를 협박하고 고문하면 어떻게든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그것은 순전히 착각입니다. 협상이 깨진 이후의 상황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신중히 판단하십시오.”
취조실의 창 너머로 햇살이 비쳐 들고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가시고 바치 시가지를 둘러싼 성벽 위로 해가 떠오르는 중이었다. 마주 앉아 있는 레오나르도와 포치 소장의 머리 위로 햇빛이 드리워지며 두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내게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 남은 것이 나와 단원들의 목숨인 까닭에 그것을 걸고 협상을 청하는 겁니다. 협상이 타결되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나를 고문실로 데려갈 테지요. 그곳에서 벌어질 일들을 모두 계산하고서 이곳으로 찾아온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들과 우리 사이에서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했던 숙원을 이루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 레오나르도는 포치 소장에게서 자신과 다른 상위 단원들의 운명을 보고 있었다.
“소장님.”
로미오가 침묵하는 포치 소장을 종용하듯 그를 부르는데 레오나르도가 포치 소장이 아닌 로미오를 올려다보며 이야기했다.
“말로써 제게 약속하시면 됩니다. 제 요구에 응해 주겠다고……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말로써 약속해 주십시오. 협상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로미오는 그 순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레오나르도가 포치 소장이 아닌 자신에게 말하고 있음을.
“좋다.”
자리에서 일어선 포치 소장은 선 채로 레오나르도를 내려다봤다. 그는 거짓 약속을 할 생각으로 속임수에 불과한 대답을 내놓았다.
“요구를 들어주지. 협상을 받아들이겠다.”
자신의 부관을 돌아본 포치 소장은 입술을 굳게 닫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지금 당장 중앙탑의 꼭대기로 올라가 가장 존귀한 루바노 공화국의 이름을 드높일 기회가 왔음을 나팔수에게 알려라. 부대 내에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면 마구간의 모든 말을 연병장 밖으로 끌어내라. 그리고 장교와 사병들을 집결시켜라. 단테의 12인의 검거에 나설 것이다.”
* * *
“흐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당분간은 식량을 아끼는 게 좋겠지.”
팔레르모 기숙사립학교의 교장은 선반 위에서 꺼냈던 밀빵 두 덩이를 다시 접시 안에 넣었다. 일부러 불을 밝히지 않은 실내는 아침이 되었음에도 어두컴컴했는데, 창가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의자에 팔레르모 기숙사립학교의 웅변학 선생인 시스티가 앉아 있었다.
“물을 드시게.”
교장이 다가가 물을 건네자 시스티는 잔을 받아 들어 몇 모금 마셨다. 그 사이 교장은 커튼이 쳐진 창 너머로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날이 완전히 밝아 거리에는 장사를 준비 중인 행상인들이 많았는데 지난 며칠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곳에 머물고 있어 줄곧 같은 풍경만 보아 오고 있었다. 교장과 시스티의 집은 아니었지만 안전하다고 판단할 만한 곳이었다.
“잠깐 눈을 붙이는 게 어떠시겠어요?”
“나는 괜찮으니 자네나 눈을 좀 붙이게. 통령의 암살이 있기까지 아직 하루가 남았어. 이곳에서 기다리다 보면 중앙 지부에서 연락이 올 걸세. 잘만 한다면 곧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겠지. 그때까지 편히 한숨 자 둬.”
시스티가 빈 물잔을 교장에게 도로 건넸을 때였다. 창 너머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여러 명의 발소리도 들렸다. 정확히는 군홧발 소리였다.
벌려 놓았던 커튼을 얼른 도로 치며 뒤로 물러섰지만 말발굽 소리와 군홧발 소리는 급하게 집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거칠게 나무 문을 걷어차는 소리로 이어졌다.
쾅!
군홧발에 차인 나무 문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자 다시 한번 발길질이 이어졌다. 육중한 소리와 함께 나무 문이 바닥으로 쓰러지자 허리에 검을 찬 수십 명의 군인이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말에서 뛰어내린 장교 하나가 집 안으로 들어서며 교장과 시스티 선생을 향해 엄포했다.
“가장 존귀한 루바노의 수호자인 제6군단의 이름으로 모두 체포하겠다. 네놈들은 분명 팔레르모 기숙사립학교의 교장과 선생일 테다. 그렇지 않나?”
장교가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창가의 커튼을 거칠게 뽑아내자 집 안으로 환하게 햇빛이 비쳐 들었다. 두 사람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공포에 사로잡혔지만 장교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끌어내라!”
장교의 명령에 군인들이 두 사람에게 달려들어 팔을 잡고 집 밖으로 끌어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놓아주게! 우리를 왜 체포하려는 겐가?”
모른 체하며 저항했으나 군인들에게 당해 내지 못한 교장은 시스티 선생과 함께 길거리로 끌려 나갔다. 내동댕이쳐지듯 바닥으로 넘어지며 신발이 벗겨지고 나서야 거리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해 보였던 길거리는 제6군단에게 완전히 포위돼 있었다. 곳곳에 군복을 입은 장교들이 보였는데 끌려 나오는 것은 자신들만이 아니었고 고함 소리도 여러 곳에서 들려왔다.
“저항한다면 제6군단의 독단적 권한으로 이 자리에서 처단하겠다!”
“왜, 왜 이러는 거요! 대체 무슨……!”
“가장 존귀한 루바노 공화국의 안위를 위협하고 반란을 꾀한 죄로 네놈들은 재판에 회부될 것이다! 단테의 12인의 단원들은 한 놈도 빠짐없이 모두 체포될 것이니 순순히 따라라. 네놈들에게 호송 명령서는 필요치 않아!”
군인들에 의해 끌려 나온 이들은 하나같이 항변했으나 그들은 인명록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자들이었다. 상위 단원들의 포섭 활동을 물밑에서 도와주는 자들에서부터 아주 오래전에 입회식만 치른 말단 단원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사정이 다양했다.
영문을 모르는 행인들은 서둘러 몸을 피했고 말 탄 장교들은 손에 들린 인명록을 확인하며 사병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몸을 숨기고 있는 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수십 명, 아니, 어쩌면 수백 명이 될지도 모르는 군인들은 고함을 치고 검을 빼 휘두르며 인명록에 적혀 있는 자들을 거칠게 집 밖으로 끌어냈다. 비명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한데 뒤엉키자 평화롭던 거리는 순식간에 큰 혼란에 빠졌다.
“단 한 놈도 도주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모두 체포해라!”
도축된 고기를 실어 나르는 푸주한들이나 사용하는 지저분한 뒷골목도 군인들이 점령했고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어 평소엔 좀처럼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유곽의 뒷골목에도 군인들의 고함 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려 댔다.
같은 시각, 그곳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어느 외진 거리에 있는 바느질 가게에도 수십 명의 군인들이 도착해 있었다.
“안을 샅샅이 뒤져라!”
문을 부수고 들어간 군인들은 주인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것으로 추정되는 텅 빈 가게 안을 뒤졌다. 선반마다 들어차 있던 천은 땅에 떨어져 짓밟혔고 바느질 가게의 조수들이 사용하던 나무 의자는 바닥으로 넘어져 군인들의 군홧발에 차였다. 응접실도, 조수실도 엉망으로 헤집어지며 난장판으로 변했다.
바치 밖으로 이어지는 성벽 외곽의 시모네타 거리 역시 군인들에 의해 포위돼 있었다. 마차가 지나다닐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사병들이 도열한 가운데 말에서 내린 장교 하나가 어느 허름한 포도주 가게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나무 문을 여러 차례 발로 차 부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자 수십 명의 군인들에게 지시해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사람들이 웅성대며 그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발 빠른 포고원 하나가 직접 손으로 쓴 포고문을 길거리에 뿌리며 목청껏 외쳤다.
“단테의 12인이 모두 체포될 것이라는 소식이오! 가장 존귀하신 비스카르디 통령 각하의 명으로 제6군단이 그들을 모조리 검거한다고 하오!”
* * *
“하여, 저항하는 자들은 그 자리에서 처단하고 시체는 목만 거두어 얼굴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상위 단원 중 사망한 대총장과 알피에리 대위, 그리고 그와 함께 밀정의 일을 했던 조반니 스포르차라는 바치 병원의 의사를 제외하고 11명의 상위 단원들을 모두 체포했습니다. 지난 밤사이 고문을 당했던 자와 오늘 아침 협상을 청했던 두 명의 상위 단원은 지하 구금실에 구금돼 있으며 망명을 준비하던 나머지 자들은 취조실에 구금돼 있습니다. 각하의 암살 공모에 가담했던 자들도 속히 잡아들이고 있으며 ‘광인의 종’이라고 불리는 독초를 제조한 약초 상인은 추적 중입니다.”
통령의 집무실에는 주세페와 체사레를 포함한 통령의 보좌관 5인이 모두 자리해 있었다. 루바노 밖에 체재하며 통령의 일을 도와 오던 보좌관 3인은 급보를 받고 속히 통령의 관저로 돌아와 있었다.
넓은 의자에 등을 기대앉아 있는 통령은 자신의 앞에 선 장교들의 얼굴을 차례차례 바라봤다. 포치 소장을 비롯한 고위급 장교들이 가장 앞에 서 있고 그들의 뒤로 젊은 장교들이 서 있었는데 젊은 장교들의 틈에는 로미오도 있었다. 혼자서 군복을 입지 않은 그는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다른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턱을 들고 허리를 세운 자세로 앞을 보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그들과 달랐다.
“이것이 그 독초인가.”
카를로타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병 안에는 종 모양의 독초 잎 한 장과 잎을 빻아 만든 가루가 들어 있었는데 제6군단이 상위 단원들로부터 직접 회수한 것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빼앗아 갈 수도 있었을 끔찍한 독초였지만 카를로타는 유리병의 뚜껑을 열어 손수 확인했다.
“그들이 이것으로 내 목숨을 앗아 가려 했다는 말이지. 이 마른 잎 한 장으로.”
카를로타의 등 뒤로 내다보이는 살로네 성 밖의 전경은 바치 시가지를 비추고 있었는데 길목마다 검은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깔려 있었다. 장교들은 말을 탔고 사병들은 걸어서 이동하고 있었다. 끌려 나온 사람들의 비명과 끌어내고자 하는 군인들의 고함이 뒤섞여 바치 시내 일대는 어지럽고 무질서한 상태였다.
“암살자 역할을 할 소년이 있었을 것으로 파악 중입니다. 그 소년은 현재 인치 전으로 은신 장소를 알아냈으나 그곳에 머무른 흔적만 발견됐습니다. 미리 눈치채고 도주를 한 것으로 보여 근방을 탐문해 추적하고 있습니다. 암살 장소가 31인 위원회의 위원인 단돌로 가문의 혼인식인 점을 고려하여 혼인식 참석자를 대상으로 취조도 진행할 것입니다. 상위 단원 중 두 명의 단원이 이번 암살 공모에 직접적으로 가담했으니 그자들은 엄중한 조사를 받을 것입니다. 지난밤에 고문당한 단원이 차기 대총장으로 이야기되었던 자인만큼 가장 많은 정보를 갖고 있을 것으로 보여 검거가 종결될 때까지 수차례에 걸쳐 그자를 취조할 것입니다.”
포치 소장의 말이 끝나자 카를로타는 독초 병을 내려놓고 양손을 맞잡았다. 오랫동안 열망해 오던 일이 꿈같이 이뤄졌음에도 그녀의 얼굴에서 만족스러운 미소는 딱히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본래 그녀가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통령의 보좌관 5인은 알고 있었다. 통령이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왔고 지금 이 순간 얼마나 흡족해하고 있는지.
“바치 내에 있는 단원들을 모두 검거하기 전까지 바치시의 성벽을 둘러싼 다섯 개의 성문은 폐쇄될 것이오. 반드시 그곳을 통과해야 하는 자들은 경비병의 검문 하에 출입이 허용될 것이며 검문은 제6군단의 감시 아래에 이루어지게 될 것이오. 금일 내린 지령은 시일 내로 등사되어 제5군단과 제4군단에 보내질 것이니 바치 이외의 지역에서 벌이는 검거에서 제5군단과 제4군단 휘하부대의 협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소장은 부대로 돌아가 직접 훈령을 내리고 군을 지휘하도록 하시오.”
“예, 통령 각하.”
“단테의 12인의 은거지로 알려진 중앙 지부에 대한 수색도 면밀히 이뤄져야 할 것이오. 바치 내에 있는 단원들의 검거가 마무리되면 루바노 전역을 열두 구역으로 나누어 샅샅이 수색하시오. 상위 단원들의 망명을 도울 국외 지부에도 제6군단을 파견하여야 하므로 바치 내의 주재 대사들에게 통고문을 보내 알릴 것이오. 국경 지역까지 부대가 전진하는 것은 보름 안에 반드시 이뤄져야 하니 검거에 전력을 다하시오.”
“예, 통령 각하.”
포치 소장에게 이야기하며 로미오의 얼굴을 보고 있던 카를로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척을 들은 로미오가 눈동자를 움직여 이쪽을 보자 그를 향해 말했다.
“알피에리 대위.”
군인 신분이 아닌 그였지만 포치 소장도 이미 그를 그렇게 칭한 데다 카를로타에게는 다른 뜻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로미오를 그렇게 불렀다.
“귀관은 오래전에 퇴역식을 치렀으나 다시 군으로 돌아와 있기에 중대장의 호칭으로 명한 것일세. 루바노의 명예를 회복시킨 귀관의 공을 기리기 위해 소령으로 진급시켜 대대장에 임명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귀관이 받아들인다면 재임관에 관한 임명권을 이 자리에서 소장에게 위임할 것이네. 비록 귀관은 군에서 물러났으나 그 공이 명백하기에 진급 심사를 받는 것에 아무런 문제도 없으며 군단장 또한 대위의 공적을 인정하여 재임관을 받아들일 것이네.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통령 각하.”
포치 소장은 즉시 대답했는데 그를 제외한 다른 장교들은 감히 별다른 이견을 내비치지 못했다. 이견이 있다고 해도 이 자리에서 반대의 뜻을 보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통령의 권한이라면 퇴역 장교를 다시 군으로 불러들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자가 루바노의 역사에 길이 남을 공적을 세운 자라면 더욱이.
“귀관이 원한다면 오늘 낮 재임관을 위한 임관식을 거행해 훈장을 내리겠네. 임관식 이후 다시 이곳에서 나와 마주했을 때 귀관은 알피에리 소령으로 불릴 것이네.”
모르는 이가 볼 때 통령의 제안은 오래전에 억울하게 군에서 내쫓긴 어느 가여운 장교의 공을 인정해 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로미오에게는 달랐다.
그에게 있어 카를로타는 통령이자 조반니의 누이였다. 조반니와 카를로타 사이에 얽힌 비밀을 몰랐을 때 그녀는 단지 군주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제는 달랐다. 늦은 밤 갑작스레 하숙집으로 찾아왔던 그녀와 나눈 은밀한 대화를 모두 기억하는 로미오는 그녀가 들리지 않는 무언의 인사를 자신에게 건네고 있음을 알았다. 그날 밤 둘이서 나눴던 맹약과도 같은 지시를 그대로 이루어 주었음에 대한 감사 인사였다. 입 밖으로 꺼내 말할 수 없지만 그녀는 다시 만난 이 자리에서 치하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받아들일 마음은 없었다. 로미오 자신에게 있어 그의 남은 삶은 제6군단과는 거리가 먼 평화로운 삶이었다. 자신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에 불과하며 엄연히 이야기하자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은 조반니이기도 했다. 자신이 겨우 지난 이틀 동안 이뤄 낸 것은 그가 통령의 밀명을 받고 십 년간 홀로 외줄 타기를 하며 지켜낸 것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조반니에 대한 괴롭고 고통스러운 감정은 여전히 마음 깊이 상처로 남아 있었지만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를 인정했다.
“외람되오나 저는 이미 수 달 전에 퇴역하여 장교로서 이행해야 할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었습니다. 다시 군으로 돌아가 대대장직을 수행하는 것은 명예로이 군에서 나오고자 했던 제 의사에 반하는 것으로, 베풀어 주신 아량에는 감사드리나 저는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고민의 여지 없이 대답을 내놓은 것 같자 장교 몇이 부동자세를 유지한 채 로미오가 있는 쪽으로 슬쩍 눈을 돌렸다.
“군에서 퇴역하던 때에 제겐 이미 가야 할 길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각하께서도 지금과 같은 아량을 베풀어 주셨고 저 또한 같은 답을 드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각하께서는 그때의 제게 군인이 아닌 한 명의 공화국 시민으로 돌아갈 것을 기꺼이 허락해 주셨습니다. 해서, 이제 그렇게 되고자 합니다. 제 마음속에는 공화국군의 장교로서 갖고 있는 자부심이 영원토록 남아 있을 것입니다. 각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 역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카를로타가 자신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준 것이었기 때문에 로미오는 감사함을 표하고자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비록 그녀의 눈조차 똑바로 보지 못해 제대로 된 인사가 되지 못했지만 카를로타는 로미오에게 부응하는 뜻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간단한 끄덕임이었으나 그녀의 눈빛 안에서 그 진짜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귀관의 뜻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네.”
몸을 돌린 카를로타는 등 뒤의 창가 앞으로 다가갔다. 바치 시가지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등을 보인 채 포치 소장에게 말했다.
“상위 단원 중에 알피에리 대위의 포섭을 추진한 자가 있다고 하지 않았소? 조반니 스포르차라는 이름의 바치 병원 의사라고 하였던가.”
“그렇습니다, 통령 각하.”
“그자의 목적도 루바노의 명예를 되찾는 것이라고 들었소만. 현재 그는 살인 혐의로 투옥되어 있다고 알고 있으나 마땅히 예우할 필요가 있다면 그렇게 하여야 하지 않겠소? 그자가 무슨 연유로 입회식을 치르게 되었으며 어떤 까닭으로 그 업을 미처 달성하지 못하였는지 알고 싶소. 그러니 그자에 대한 조사도 진행하시오.”
* * *
“대체 어떻게 사람을 그런 곳에 가둬 둘 수 있는 겁니까? 수일 째 그곳에서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팔이 묶여 있으면 정신이 멀쩡한 자도 미쳐 버릴 겁니다!”
“도련님, 진정하세요.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놔라! 이자들이 지금 조반니를 독방에 가두고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고 이야기하지 않더냐? 사람을 그런 곳에 구금한 것도 모자라 먹을 것도 주지 않다니, 그런 가혹한 처사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화를 내는 줄리오와 그를 말리는 하인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간수는 조금 전에 했던 대답을 늘어놨다.
“그는 이미 한 번 탈옥을 한 자요. 탈옥수에게는 원칙적으로 이미 한 번 구금된 감옥을 내어 줄 수 없소. 그리고 그자는 이제 곧 청사 옆의 감옥으로 옮겨질 거요. 정 만나고 싶거든 나가서 기다리쇼. 지금 바로 호송시킬 거니 볼 수 있을 거요. 오늘 밤에 재판도 열린다니 그자가 받을 형벌이 궁금하다면 그 재판에나 참석해 보쇼.”
“절대로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죄수를 이런 야만적인 방식으로 다룬 당신들 모두는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톡톡히 지게 될 겁니다!”
“좋을 대로 하쇼.”
지난번과 달리 줄리오는 아버지의 이름을 들먹이지 못했는데 간수는 그 이유를 알았기 때문에 퉁명스럽게 말하고 돌아섰다.
분을 참지 못한 줄리오는 두 주먹을 꾹 움켜쥐었으나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에 홱 돌아섰다. 하인 여럿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문 앞에서 기다리던 세라피나 산소네 교수가 경직된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지난 며칠간 조반니를 보기 위해 이곳을 드나들었던 그녀였다. 우연찮게 줄리오와 마주쳐 조반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조반니를 감옥에서 빼낼 방도를 줄리오와 함께 고민했다. 그러나 도무지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았다.
“이제 곧 청사 옆의 감옥으로 옮겨질 거라고 합니다. 조반니 녀석, 정말로 독방에서 물 한 모금은커녕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모습은 보지 못하고 나오신 겁니까?”
“예, 보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야위어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곧 조반니가 나온다니 여기서 기다려야겠습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지요. 오늘 밤에 재판이 열린다고 하는데 그 재판에도 참석해야겠습니다.”
조반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줄리오와 세라피나 산소네 교수만이 아니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지난 며칠간 공안국을 드나들던 중에는 젊은 여인들이 많았다. 조반니와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줄리오를 알아보고 얼른 그에게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
“스포르차 선생님께서 어떻게 되신 거죠?”
“조반니가 지금 어디에 갇혀 있는 거라던가요?”
“청사 옆의 감옥으로 옮겨지면 그곳에서 또다시 구금되는 것이겠지요?”
“조반니에게, 흐으윽… 전해 줄 말이 있는데 전해 주시겠어요……?”
“그분께 이 편지를 전해 주세요. 설령 사형이 내려진다 해도 저는 그분을 끝까지 믿을 거라고 말이에요!”
그때 젊은 여인들을 헤치고 누군가 곁으로 다가왔다. 머뭇거리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것은 세라피나 산소네 교수였다.
“저…… 제 이름은 갈릴레아 자니라고 합니다. 푸치아노 대학교의 의학부 교수예요… 스포르차 선생님과는 일전의 재판으로 알게 된 사이인데 선생님께서 현재 어떤 상태인지요?”
갈리레아는 걱정스럽다 못해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줄리오는 조반니로부터 갈리레아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으나 세라피나 산소네 교수가 그녀를 알아보자 근심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자세한 사정을 털어놨다.
“조반니를 잘 아는 분이시로군요. 저도 조반니를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녀석이 며칠 전에 탈옥을 해 작은 독방으로 옮겨졌다고 하는데 그 독방의 위치도 알 길이 없습니다. 지난번에는 지하 감옥에 구금돼 있었는데 말이죠. 그 녀석, 대체 무슨 생각으로 탈옥을 했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탈옥을 했더라도 만약 저를 찾아왔었다면…… 차라리 그랬다면 방법을 마련해 줬을 텐데요.”
“저도 탈옥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일이 선생님께 좋지 못한 영향을 미쳤나 보군요… 제가 스포르차 선생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저 역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손을 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14인 위원회의 위원이신 제 아버지께 말씀드려 이 문제를 의회에서 거론케 하셔달라고 부탁했지만 조반니가 네 명을 살해한 데다 그 방법이 지극히 잔인해 어쩔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조반니는 이미 의사 협회에서 제명이 된 데다 재판이 진행되면 그의 해부학서도 폐기 위험에 처해질지 모른다고 하시더군요.”
갈릴레아 자니는 고개를 크게 움츠리더니 줄리오와 세라피나 산소네 교수를 번갈아 보며 목소리를 떨었다.
“스포르차 선생님께서 정말로 살인을 저지르신 겁니까? 자백하셨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지만… 정말인가요? 의심할 길 없이 명백한 사실인 겁니까?”
세라피나 산소네 교수는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렸다. 줄리오도 숨을 눌러 삼키며 고개를 떨궜다. 조반니의 자백 직후 누구나가 그렇듯 큰 충격에 휩싸였던 두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거짓 자백일 것이라고 의심했지만 조반니가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를 모함할 이유가 없는 데다 속속들이 증거가 발견돼 무턱대고 부정하지 못했다.
조반니가 정말로 사람 넷을 살해한 것이라고 이해하려 하니 도저히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어 몇 번이고 의심했다. 어떻게든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죄를 덜어 주기 위해 애쓰는 동안 의심은 더 짙어졌고 결국 죄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공안국을 들락거리는 이유는 조반니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가 공안국 간부들을 상대로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고는 하나 조반니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그가 자백하는 것은 듣지 못했다. 미약한 믿음이라고 할지 어리석음이라도 할지 모를 감정이 줄리오와 세라피나 산소네 교수를 이곳으로 찾아오게 만들고 있었다.
“스포르차 선생께서 죄를 인정하지 않으셨나요. 그 내막은 자세히 모르나 그분께서 인정한 이상 사실일 겁니다.”
세라피나 산소네 교수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말을 아끼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바치 대학교에도 현재 조반니에 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는데 그에게 해부학을 배운 학생들에서부터 의과대학 교수에 이르기까지 조반니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는 자들이 없었다. 조반니에게 우호적이었던 자들이 하루아침에 돌아서서 그를 비난하는 모습은 지켜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세라피나 산소네는 조반니와 그리 특별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조반니에게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데다 그 도움을 쉽게 배신할 만한 성미가 아니었다. 조반니가 살인자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끝내 그녀가 알고 있는 조반니의 본래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밤 조반니의 재판이 열리면 내일 아침에 바로 형이 집행될 겁니다. 재판 전까지 어떻게든 손을 써야 하는데 그 녀석은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요. 자신에게 어떤 형벌이 내려질지 짐작하고 있다면 항변이라도 해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변호를 거부한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 텐데…….”
비관적인 상상에 사로잡힌 줄리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든 그는 조금 전 간부가 걸어 잠근 문을 바라봤다.
이미 한참 전에 굳게 잠긴 문이었지만 그 문 너머에선 간부들이 바삐 복도를 오가고 있었다.
조금 전에 줄리오에게 퉁명스레 설명했던 간수는 다른 간수 두 명과 긴 복도를 걷고 있었다. 복도 끝에 다다른 그들은 허리춤에 매달린 자물쇠로 문을 열었다. 다 함께 달라붙어서 겨우 감옥의 철문을 열자 손이 뒤로 묶인 채 서 있던 조반니가 앞으로 쓰러져 바닥으로 넘어졌다.
“일어서라.”
통나무처럼 몸을 바로 해 수십 시간을 갇혀 있던 조반니였다. 간수들이 어깨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그는 비척대며 일어서지 못했다. 너무 오랫동안 한 자세로 있었던 데다 잠을 자지 못해 온몸의 근육과 관절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꼴이 아주 우습군.”
조반니의 탈옥으로 징계를 받았던 간수는 혀를 차며 조반니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지저분한 금발 머리가 뒤로 넘어가며 얼굴이 드러나자 조반니의 몰골은 비렁뱅이를 방불케 했다. 구금된 후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아 구금 당시와 비교해 마치 다른 사람처럼 야위어 있는 데다 뺨은 푹 들어가 보였고 빛을 오랫동안 보지 못해 눈 밑에는 검게 그림자가 생겨 있었다. 손보지 못한 금발 머리가 이마를 다 덮다 못해 윗뺨을 찌르고 있었다. 복도는 그다지 눈부시지 않았지만 캄캄한 곳에 줄곧 갇혀 있던 조반니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지금부터 네놈은 청사 옆에 있는 감옥으로 옮겨질 거다. 이곳을 나가거든 즉시 마차에 올라라. 사람을 넷이나 죽인 살인마에게 호송 마차를 내어 주는 것이니 감사하게 생각해라.”
“…….”
“내 말 알아들었나?”
“…….”
조반니는 휘청이지 않고 가까스로 똑바로 섰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길게 자란 금발로 얼굴을 가린 채 바닥 쪽으로 머리를 숙이고 있었는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오늘 밤 재판이 열릴 거라는 이야기도 들었을 거다. 재판이 끝나면 사형 집행 직전의 죄수들이 머무는 감옥 꼭대기 층으로 가게 될 거다. 그곳에서 아침까지 기다리다가 동이 트면 형 집행을 위해 감옥 밖으로 옮겨질 것이다. 보나 마나 사형일 테니 사형장으로 간다고 봐야겠지.”
“…….”
“어이, 내 말을 듣고 있는 거야?”
조반니는 대꾸를 하지도 않았고 간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구금 초기에 미친 작자처럼 굴며 밤새 떠들어 댔던 그였지만 무슨 일인지 이젠 말을 아예 하지 않았다. 입을 열 때마다 알아듣기 힘든 어투로 얘기해 대답해 주지 않았더니 말을 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반드시 들어야 할 대답 따윈 없었기 때문에 간수가 눈썹만 으쓱이며 끌고 가려는데 조반니가 갑자기 말했다.
“……혹시.”
그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저를 찾아온 사람은 없었습니까.”
조반니의 그 한마디에 간수는 다시 한번 눈썹을 들썩였다. 괴상한 어투로 말하던 그가 제법 정상적으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을 가만 올려다보니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이쪽을 쳐다보는 눈빛이 명료했다.
“대학교 교수라는 자들과 의사 몇 명이 다녀갔다. 그중에 네놈의 안부를 묻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런 분들 말고 말입니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젊은 사내 하나가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자는 없었다. 그런데 이제 제법 말을 똑바로 하는군. 그사이 정신을 차린 것인가?”
“…….”
조반니는 고개를 바로 하더니 또다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간수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조금 전처럼 눈썹을 으쓱하며 조반니의 팔에 묶인 포승줄을 붙잡고 복도를 걸었다. 비틀대며 걷는 조반니의 맨발은 앙상한 데다 꾀죄죄했다.
계단을 내려가 밖으로 이어진 문을 열자 지난밤에 호송 소식을 미리 전해 들은 사람들이 가까이 몰려들었다. 그들의 틈에 있던 줄리오가 달려들 듯이 다가오며 외쳤다.
“조반니!”
그는 큰 소리로 고함을 치면서도 사람의 몰골이 아닌 조반니를 보고 망연자실한 표정이 됐다. 줄리오의 옆에 서 있던 세라피나 산소네 교수도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자신의 입을 가렸다. 갈릴레아 자니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조반니, 괜찮은 거야? 조반니!”
그러나 줄리오는 간수들에게 제지당해 더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조반니는 줄리오의 목소리를 듣고도 그에게 눈길 주지 않고 바닥을 보며 걸었다.
조반니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이들도 호송 마차 주위를 에워싸고 그를 불렀다.
“스포르차 선생님!”
“조반니!”
“선생님!”
하지만 조반니는 간수들이 이끄는 대로 팔이 묶인 채 마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 마차는 지체하지 않고 청사가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 * *
“형,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나 무서워.”
엔초는 로미오의 허리를 껴안고 배에다 뺨을 묻은 채 거리를 둘러봤다. 로미오가 퇴역하기 전에 입었던 군복과 같은 군복을 입은 군인들 무리가 로사티 3번가를 지나고 있었다. 말 탄 장교들은 일곱 명에 이르렀고 걷고 있는 수십 명의 사병은 셀 수 없을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
장교들이 사병들에게 바삐 뭔가를 지시하자 그들은 길 가는 행인들에게 물러서라며 주의를 줬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 하숙집 앞 역시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복잡한 말로 그라나 부인에게 자신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설명했는데 엔초는 그들이 로미오의 부탁을 받았다는 것만 알아들었다. 바치시 축제 당시에도 군인들이 한꺼번에 집에 찾아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덜컥 겁이 나 울먹거렸지만 다행히 로미오는 금방 돌아왔다.
“당분간은 로사티 거리가 계속 소란스러울 거야. 하지만 저들이 널 해치지는 않을 거야. 아무런 일도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로미오가 엔초의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엔초는 더 단단히 로미오를 껴안으며 불안한 듯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야? 큰일이 벌어진 거야?”
로미오는 무릎을 숙여 몸을 낮추고 엔초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더듬거리듯 만지다가 다정히 어깨를 짚으며 설명했다.
“우린 안전해. 저들은 무소 대위님과 같은 군복을 입고 있잖아. 보이지? 죄 없는 자들에게는 위협을 가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우리가 도움을 청하면 기꺼이 우리를 도와줄 거야. 그러니까 무서워할 것 없어. 그보다 3일 뒤면 밀라니 선생님 댁으로 떠나게 되는 걸 알지? 얼른 화실에 다녀와. 다녀와서 그라나 부인과 함께 저녁을 먹자. 그리고 밤늦게까지 형과 노는 거야. 오늘 밤은 특별히 함께 자자. 내일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말이야.”
통통한 뺨을 쓸며 얘기하자 겁을 먹어 있던 엔초는 고개가 흠칫 떨릴 정도로 크게 놀라 되물었다.
“정말?”
엔초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혼자서 잠드는 법과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를 정리하는 법을 가르친 로미오였다. 한 침대에서 같이 자는 것은 아주 어린 아이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왔기 때문에 어른스럽게 혼자만의 방을 써 오던 엔초였다. 로미오가 선뜻 같이 자자고 말하자 겁먹은 표정을 얼른 풀며 신이 나 방긋 웃었다.
“정말이지?”
로미오의 방 침대에서 나는 로미오의 냄새와 커다란 요를 덮고 함께 누워 잠드는 것을 좋아하는 엔초는 로미오의 어깨에 매달렸다. 허리를 숙이고 있는 로미오의 목에 팔을 감자 로미오가 손으로 등을 쓸어줬다.
“약속하기다?”
“응, 약속할게.”
“알았어! 나 화실에 얼른 다녀올게.”
“저녁에 먹고 싶은 게 있어?”
“없어! 나는 형이 먹고 싶은 거라면 그게 뭐든 다 좋아. 그럼 다녀올게!”
제자리에서 폴짝 뛰며 좋아한 엔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흔들며 멀리 뛰어갔다. 저만치 사라지는 발소리를 향해 로미오가 손을 흔드는데 엔초가 멀리서 한 번 더 외쳤다.
“안녕, 형! 나 가!”
작아진 목소리가 꽤 멀리서 들려 팔을 높이 들어 손을 흔들자 그보다 더 작아진 목소리로 “나 정말 갈게!”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곧 더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로미오는 엔초가 뒤돌아보지 않고 멀리 뛰어갔음을 깨닫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창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제6군단의 부대를 홀로 빠져나와 이곳 하숙집으로 돌아온 로미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엔초와 함께 평범한 아침 식사를 했다. 하룻밤 사이 세상이 뒤바뀌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큰 일이 벌어졌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 안을 정리했다. 식탁 위의 빈 빵 접시를 치우고 그릇을 닦는 동안 창 너머에서는 군인들의 말발굽 소리와 고함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하지만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고 집안일을 좀 더 하기 위해 손으로 거실 이곳저곳을 더듬으며 할 수 있을 찾았다.
잠시 후 시장을 다녀온 그라나 부인이 1층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그녀는 손수 사 온 약초와 헝겊을 준비하며 응접실로 들어갔다.
“여기 와서 앉어이. 손이 크게 부어 있는 것 같아 약초를 받아 왔다우.”
“오늘 저녁에 의사 선생님께서 왕진을 오실 겁니다. 부인께서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밖이 저렇게 뒤숭숭하니 의사가 늦게 올 것 같다우.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이리 와서 얼른 앉어이.”
로미오를 1층 응접실로 데려간 그라나 부인은 그를 의자에 앉히고 손을 살폈다. 조반니를 구타하느라 손가락이 부러진 것을 꿈에도 모르는 그녀는 혀를 끌끌 찼다.
“어쩌다가 이렇게 다쳤어이?”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통증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라나 부인은 약초를 덜어 로미오의 다친 손가락에 발라 준 뒤 깨끗한 헝겊을 감아 줬다. 그러면서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장에서 상인들에게 들어 보니 조반니의 재판이 오늘 밤이라고 하우. 청사 옆에 있는 재판정에서 열린다고 했어이.”
그라나 부인은 크게 상심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헝겊을 두르던 손을 멈춘 그녀는 생각이 많아진 것인지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이게 정말 다 무슨 일이란 말이우? 재판이라니 대체…… 정말로 사람을 넷이나 죽였다는 게 사실인 거이? 그래서 재판을 받는 것이우?”
조반니의 체포 소식을 듣고 그 누구보다 놀랐던 그라나 부인이었다. 로미오가 자세한 사정을 알 것이라고 생각해 물었지만 그녀는 로미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호로록 한숨을 쉬었다. 조반니가 투옥된 이후 매일 아침 3층 계단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그녀는 조반니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재판 소식이 전해지자 크게 마음이 상해 전에 없이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러다 정말로 큰일이 나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이. 재판에서 행여나 사형이 내려지면 그보다 끔찍한 일이 어디 있겠어이?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오늘 밤 재판에 같이 가 보지 않을라우?”
로미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떨궜다. 얼른 대답하지 않자 그라나 부인은 한층 심란한 표정이 됐다. 그녀는 로미오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아 그의 얼굴을 골똘히 들여다봤다.
“……저는 됐습니다. 부인 혼자서 다녀오십시오.”
조반니의 재판 이후 벌어질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로미오였다.
조반니가 홀연히 종적을 감추고 이곳을 떠나면 그를 잘 알던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겠지만 시간이 지나며 차츰 그의 존재를 잊을 것이다. 단테의 12인의 색출이 마무리될 때 즈음에는 바치도 평화로운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조반니와 영원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테니 처음부터 시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밀라니 선생님 댁으로 떠난 엔초가 가끔 집으로 찾아오면 함께 밥을 먹는 것이다. 큰돈을 받지 않아도 되니 일을 구할 수 있으면 구할 것이다. 텅 빈 하숙집에서 그라나 부인과 단둘이 지내며 종종 함께 시장에도 나가고 음식도 손수 만들어 먹을 것이다. 그라나 부인이 마음을 추스른다면 3층에 새 식구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단테의 12인의 입단을 결정하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꼬였던 삶이 완전히 제자리를 되찾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은 모든 위협에서 자유로울 것이며 조반니가 마음속에 남겼던 칼자국 같은 상처는 결국 흉터로 남을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면 말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그러면 된 것이다.
* * *
철문 너머에서 장교들의 고함 소리와 무언가를 거칠게 발로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여러 명의 발소리가 쉴 새 없이 문 앞을 지나다녔고 중앙탑의 꼭대기에서는 이따금씩 나팔 신호가 울려 퍼졌다.
“그렇다면 그 소년의 행방을 현재 알 수 없다는 이야기군요.”
탁자 위에 올려진 조서를 겹쳐 정리하는 마르코는 맞은편에 앉은 레오나르도를 보는 대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고개를 숙인 그는 찌푸린 눈가를 문지르며 입술을 물었다.
정오가 가까워 오는 무렵이었다.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검거된 이들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검거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자들은 마흔 명가량 됐다. 제6군단의 부대 내 연병장으로는 끊임없이 호송 마차가 들어왔고 마구간은 텅 비어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중앙탑의 복도를 느긋하게 걸어서 지나다니는 장교는 없었다. 모두들 발길을 재촉하며 바삐 걷거나 혹은 뛰어다녔다.
검거된 단원들은 취조 과정에서 군인들의 분풀이 대상이 됐는데 레오나르도도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 역시 왼쪽 뺨과 입가에 핏자국을 달고 있었다. 마르코 이전에 그를 담당한 장교가 주먹으로 뺨을 때렸기 때문이었다.
“후우…….”
짧은 한숨을 내쉰 마르코는 연거푸 조서만 정리했다. 그는 그 어떤 것도 묻거나 요구하지 않는 레오나르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선생께서는…….”
그러나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얼굴에 드러난 복잡한 심경은 마르코의 이마에 굵직한 주름을 하나 만들어 냈다. 단테의 12인이 붙잡혔다고 해서 한순간에 평화가 찾아올 거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모든 일이 마무리돼 이 나라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말하려면 적어도 계절이 몇 번은 바뀌어야 할 것이다. 짐작하던 바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상황에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 복잡한 생각이 들어 다시 조서만 몇 차례 정리하는데 레오나르도가 목소리를 냈다.
“……친치아는 지금 무얼 하고 있습니까?”
이곳에 마주 앉은 이후 그가 뭔가를 물은 것은 처음이었다. 질문하는 말에 대답만 해 오던 그가 한 첫 물음이었다.
마르코는 레오나르도가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얼른 대답했다.
“콘델로 양은 다른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조사를 진행하는 장교들이 거칠긴 합니다만 콘델로 양이 별다른 저항 없이 착실히 조사를 받고 있으니 위협을 가하진 않을 겁니다.”
레오나르도와의 협상이 이뤄진 직후 군인들은 가장 먼저 그의 집을 찾아갔다. 집 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필요한 물건을 선별해 레오나르도의 소지품을 압수해 왔다. 가족이 없는 레오나르도였기 때문에 달리 따로 불러 취조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에게서 넘겨받을 수 있는 정보는 이미 모두 넘겨받았기 때문에 암살자 소년과 관련해 몇 가지 묻기 위해 이곳으로 부른 것이었다.
“시일 내로 상위 단원들은 재판을 받게 될 겁니다. 상부에서 본보기로 상위 단원들에 한해 공개 처형을 서두를 가능성이 큽니다. 선생은 알피에리 대위에게 극형을 면해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대위에게 무슨 권한이 있겠습니까? 대위는 더 이상 이 일에 개입하지 않겠다며 일찌감치 로사티 하숙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상위 단원들의 처분에 관해 그가 나설 일은 없을 겁니다.”
마르코의 설명에 레오나르도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역죄를 꾀했으니 당연히 사형에 처해지겠지요. 다만 친치아 하나만은 부디 살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협상을 청한 겁니다. 그녀 한 명 몫의 처분이라면 충분히 협상 조건으로 내걸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무엇보다…….”
레오나르도는 마르코의 눈을 응시하다가 말을 멈췄다. 그에게 로미오와 통령의 관계가 그와 자신이 생각하는 보통의 관계가 아니라고 설명할 순 없었다.
“아닙니다. 협상을 위해 이곳을 찾았을 때 저는 이미 사형을 예견했습니다.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개인적인 이유를 들어 알피에리 대위님께 부탁을 할 만큼 그분과 저 사이에 깊은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뒤늦은 후회지만 어리석은 협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적당히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들자 마르코가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선생께 해 드릴 것은 없습니다. 이곳에 있는 동안 다른 단원들보다 좀 더 넓은 구금실을 쓸 수 있게 해 드리는 것이 유일합니다.”
레오나르도는 고맙다는 뜻을 담아 눈짓을 한 번 해 보였다.
잠시 후, 복도에서 노프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교들에게 붙들려 걷고 있는 그는 바닥에 질질 끌리는 발소리를 냈다. 윽박지르듯 명령하는 장교들은 목소리가 한껏 격양돼 있었다.
긴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걷던 그들은 줄줄이 늘어서 있는 취조실을 지나 중앙탑의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바로 위층으로 올라간 그들은 그곳까지 짐짝처럼 끌고 온 노프리를 취조실 안에 처넣었다.
“얌전히 조사에 응해라.”
문을 걸어 잠그기도 전에 의자에 털썩 앉혀진 노프리는 손이 묶인 채 휘청대며 등받이에 몸을 댔다. 그는 체포된 단원들 중에서도 극히 태도가 불순한 편에 속했는데 그를 담당한 군인은 사정을 쉽게 봐주는 성미가 아니었다.
“묻는 말에 제대로 답해라. 알아들었나?”
노프리의 맞은편에 앉은 장교는 허리춤에 채찍을 차고 있었다. 고문을 담당하는 장교가 아니었지만 위협하기 위해 채찍을 갖고 다니며 취조 상대를 협박하는 데에 사용했다.
노프리는 매서운 눈으로 장교를 쳐다봤는데 검거 과정에서 머리에 피를 흘린 터라 이마에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강한 구타를 당해 입 안에도 한가득 피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사흘 내로 자신이 사형대 위에 올라가게 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니, 알기 때문인지 검거된 이후부터 비협조적인 자세를 고수했다.
“네놈은 통령 각하의 암살을 위해 바르톨루치 위원과 론디넬리 가문의 부인에게 접근했다고 실토했다. 기억하나? 그들 외에 이 일에 관여된 자가 또 있다면 그자의 이름을 얘기해라.”
그러나 노프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치켜뜨고 장교를 노려보더니 바닥에 피를 뱉어 냈다. 이런 상황에서 온순해지기엔 성격이 지나치게 괄괄한 데다 무엇보다 그는 제6군단과의 협상을 주장했던 레오나르도에게 반대했었다. 협상이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제6군단이 협상 조건을 지킬 거라는 보장이 없는데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갖은 수치와 모욕을 참아야 했기 때문에 화를 참지 못하고 씨근덕댔다.
“알피에리 그자와 조반니는 지금 어디에 있지? 통령이 조반니를 시켜 여태껏 밀명을 내려 왔는데 제6군단은 이에 대해 아무런 반발도 하지 않나?”
노프리가 눈썹을 씰룩대며 빈정대듯 얘기하자 장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상상해 본 적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장교는 인상을 쓴 채 노프리를 쳐다만 봤다. 그러자 노프리도 덩달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취조실 내의 군인들을 둘러봤다.
“비스카르디 통령이 우리를 와해시키고자 조반니 그자를 우리들 틈에 잠입시켰다는 걸 모르고 있었나? 실상을 말하자면 조반니를 통해 새로운 단원을 수도 없이 양성해 낸 셈이지. 조반니에 의해 입단이 추진된 단원이 몇 명인지 알고 있는가? 모두 통령이 내린 지시였으니 비스카르디 통령이 적극 가담해 포섭을 부추겼다고 해도 될 정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얌전히 재판을 기다리다가 사형을 당하는 것밖에 없는 노프리는 마지막 말을 하며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든 조반니에게 복수를 하고 제6군단에 혼란을 가져다주려는 의도가 드러나는 비웃음이었다. 이 문제가 민중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지기라도 한다면 통령의 입지가 흔들릴 게 뻔했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노프리가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지? 조반니라는 이름의 상위 단원은 현재 살인 혐의로 감옥에 투옥되었다. 통령 각하께서는 친히 그자의 공적까지 인정해 주기 위해 조사를 명하셨지만 그놈은 곧 사형을 받을 거다. 사람을 넷이나 살해한 미친 작자가 통령 각하의 명을 받았다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 헛짓거리를 할 생각은 집어치워라. 네놈들은 그저 우리가 묻는 말에 대답하면 된다.”
장교가 단호히 말하자 노프리가 눈을 부릅떴다. 그는 목과 뺨이 서서히 붉어지더니 목소리를 높여 일갈했다.
“통령이 그의 형제인 조반니에게 수년 전 밀명을 지시해 그자가 입회식을 치른 것이야! 그는 여태 우리를 배신하기 위해 때를 기다려 오며 통령과 비밀리에 편지를 주고받아 왔다. 통령이 그 비밀을 제6군단에 숨기려 한다면 이는 분명…….”
“입 다물어라! 네 놈들의 검거는 우리 연대의 퇴역 장교가 한 일이니 이는 엄연히 제6군단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자의 이름은 거론될 필요 없어. 다시 묻지. 바르톨루치 위원과 론디넬리 가문의 부인 외에 이번 암살 공모를 위해 접촉한 자가 더 있나?”
장교는 노프리의 말을 받아 적기 위해 조서를 펼쳤으나 기껏 한 말을 묵살당한 노프리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본래부터 조반니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노프리는 조반니가 눈앞에 있다면 죽이고 싶을 정도로 격한 심정이었기 때문에 장교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고함쳤다.
“우리 상위 단원 중 하나가 통령의 필체로 쓰인 암호 문서를 해독했다! 믿지 못하겠다면 해독을 맡은 단원에게 직접 물어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가름내면 될 것, 윽…!”
그러나 노프리는 장교가 배를 걷어차는 바람에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고문실로 옮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바로 옆방에는 조금 전에 반쯤 끌려오다시피 해 부대에 도착한 프란코가 조사를 받고 있었다.
노프리에게 속았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통령의 암살 공모에 빌미를 제공한 것이 된 프란코는 어렵사리 비서를 대동하는 것을 허락받고 그와 함께 취조실 나무 의자에 앉게 됐다. 아침부터 바치 일대를 떠들썩하게 한 검거 소식에 혀를 내둘렀던 그는 몇 시간 뒤 저택을 찾아온 제6군단을 보고 사색이 돼 질겁을 했다. 노프리가 프란코를 이용한 것뿐이라고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취조실이 아니라 고문실에 있을지도 모를 프란코였다.
“그, 그, 그렇다면 그 보석상 놈이 실은 그놈들 중 하나였다는 겐가? 그놈이 나, 나를 속이기 위해 내 저택에 드나들었다는 게야……!”
분노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 프란코가 손을 벌벌 떨자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비서가 나섰다. 하지만 프란코는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군인이 이어 한 말에 손을 더 심하게 떨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창백해진 그가 하마터면 의자 뒤로 넘어갈 뻔해 비서가 그의 손을 잡아 줘야 했을 정도였다.
“위원님, 괜찮으십니까?”
비서가 몸을 부축하며 어깨를 감싸 준 후에야 프란코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진정 후에 찾아온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감이었다.
조금 전 군인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름에 맥빠진 표정으로 멍하게 입을 벌린 프란코는 한참이 지나서야 이렇게 혼잣말을 중얼댔다.
“그랬군… 그랬어…… 조반니 스포르차라는 그 의사 놈과 나의 어여쁜 파랑새가…… 허어…….”
* * *
이날 바치 시내에는 상인들의 장사가 끝났음을 알리는 저녁종 외에도 이례적으로 또 다른 종이 울렸다. 바로 정부 청사에서 회의가 있음을 알리는 종이었다. 땅거미가 진 거리에는 여전히 군인들이 깔려 있었고 그들의 고함 소리는 길거리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었는데 회의를 알리는 종소리는 그보다 더 우렁차 이른 저녁잠에 든 사람들을 깨울 정도였다.
갑자기 열린 회의에는 31인 위원회와 14인 위원회 그리고 1,000명으로 이뤄진 민중 평의회 구성원 중 이번 회의를 위해 급하게 선출된 130명의 시민이 참석했다. 통령과 그의 보좌관들이 회의장 앞쪽에 가장 먼저 와 앉아 있었기 때문에 비록 거리는 멀었지만 시민들은 통령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번 회의에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는데 바로 결석이 많다는 점이었다. 결석은 불시에 열린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위원들의 결석이 아니라 오늘 아침 제6군단의 손에 들어간 단테의 12인의 인명록에 이름이 오른 자들의 결석이었다.
“그렇다면 파우스토 그자가 여태 그들에게 포섭되어 비밀리에 활동을 해 왔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봐야 할 거요. 명단에 이름이 버젓이 올라와 있다고 하지 않소? 여간해선 놀라지 않는 위원장님께서 오늘 이른 아침에 그 소식을 듣고 하마터면 쓰러지실 뻔하셨소.”
“지금 파우스토 그자의 말구종까지 죄다 불려가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가문이 풍비박산나는 것은 시간문제예요. 재산을 몰수당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을 겁니다.”
“공안국 간부 중에도 인명록에 이름이 올라온 자가 있다고 하더이다. 듣자 하니 타도니오 가문에도 이름이 오른 자가 있다고 하던데?”
“다행히 타도니오 위원이 아니라 그 가문의 재봉사 하나가 단원이라고 하오. 하지만 안심하긴 이르오. 어찌 아오? 아직 체포되지 않은 자들 중에 위원들이 있을지.”
“바르톨루치 위원은 그 댁에 드나들던 보석 장수에게 감쪽같이 속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자도 여러모로 이번 일에 휘말려 큰 화를 입게 생겼습니다.”
위원들만 소란스러운 것처럼 보였으나 민중 평의회에 속한 시민들 중에도 오늘 낮 제6군단으로 체포된 자들이 있었다. 비록 이 자리에 결석은 없었지만 민중 평의회의 시민들도 누가, 무슨 이유로, 어떻게 잡혀갔더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수군거리느라 바빴다.
회의장의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모르지 않는 카를로타였지만 그녀는 위원들의 입방정에 끼는 대신 회의 시작 전까지 점잖게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도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는데 오늘 그녀는 회의가 있을 때마다 늘 입고 나오는 검은 드레스가 아니라 붉은 계열의 드레스를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옷의 무늬와 자수 장식을 볼 수 있었는데 그녀의 옷은 사치스럽고 휘황찬란한 것과는 거리가 먼 짙붉은 색이었다. 치마의 폭이 좁은 데다 주름이 없는 단색 옷이라 비교적 검소해 보였는데 카를로타의 금발과 무척 잘 어울려 멀리서도 그녀를 돋보이게 했다.
단지 옷 한 벌이지만 그녀의 그 옷은 공화국의 상징인 붉은 매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는 데다 단테의 12인의 검거에 대해 논하기 위해 급하게 열린 이번 회의에서 다분히 어떤 의미를 띠었다. 루바노의 안보만을 중하며 사시사철 같은 옷만 입고 회의에 참석했던 통령이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모습으로 자리해 있으니 위원들의 눈이 쏠리는 것도 당연했다.
가까이 다가와 평소처럼 아부를 하던 위원들은 정각이 되어 회의장 문이 닫히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회의를 시작하겠소.”
회의를 주관하는 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여러 위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다소 흥분한 상태로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에 루바노인들이 그토록 바라오던 오랜 염원과 같은 일이 이뤄졌으나 위원들 중에도 체포된 자가 여럿 있습니다. 그저 흉흉한 소문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파우스토 위원의 집에서 비밀문서가 발견됐다고 합니다. 파우스토 위원의 6살 난 어린 손자까지 제6군단의 조사를 받는다고 하니 이것이 다 무슨 일인지, 원…….”
“필시 파우스토 위원도 재판에 회부될 것입니다. 비록 지도자 격 단원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 가문의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아직 색출이 마무리되지 않았으니 또 누가 인명록에 이름이 올라 있을지, 쯔쯧…….”
이 모든 일을 통령의 공으로 돌리기에 앞서 이번 일이 얼마나 많은 반작용을 불러올지 걱정하는 위원들은 이번 일을 통령의 정치적 입김과 연결 짓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스무 살가량 나이가 적은 젊은 통령을 앞에 두고 회의의 논조의 방향을 은근히 바꾸려 들었다.
그러나 통령에게 찬동하는 위원들 역시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의견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단테의 12인을 일소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문제요. 이렇듯 나라 곳곳에 그자들이 숨어 은밀히 활동을 해 왔고 그 영향력이 의회에까지 미쳐 있지 않았소? 그들이 검거되었으니 이제 의회는 그 어떤 불순함도 없이 오롯이 루바노 민중을 위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었소.”
“맞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번 일의 임무를 맡은 것이 제6군단의 퇴역 장교라고 들었습니다. 그자가 퇴역식을 치를 무렵 각하께서 친히 그자를 만나 퇴역을 면해 주기 위한 아량을 베푸셨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그렇군요.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로군요.”
카를로타가 통령으로 취임하기 이전에 함께 31인 위원회의 위원으로 지내며 그녀를 지지한 여러 위원들이 입을 열자 민중 평의회 시민들이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전대의 통령과 달리 카를로타는 연설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었고 민중 평의회 시민들의 이야기도 침착하게 귀담아들었으나 안건이 안건인지라 그들은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자가 통령 각하의 아량에 보답을 한 것이 아니겠소? 듣자 하니 눈이 먼 장교라고 하더이다. 각하의 깊은 관용 덕택에 이 모든 일이 이뤄진 것이오.”
“맞습니다. 모든 것이 넓은 도량을 가지신 각하의 뜻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군에서 퇴역한 자가 그런 일에 기꺼이 개입할 생각을 했겠습니까. 포상까지 마다한 것으로 보아 그 자신의 명예를 위해 한 일도 아닌 듯한데요.”
“그자 외에도 이번 일에 큰 공적을 끼친 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평범한 의사라고 알고 있는데 그자의 목표도 통령 각하와 이 나라의 명예를 되찾기 위함이 아니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분명 통령 각하의 은덕에서 비롯된 것일 겁니다.”
이번 검거가 통령의 정치적 영향력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수의 위원들은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기도 하고 하려던 말을 삼키기도 하며 제각각으로 반응했다. 확실한 것은 이번 일로 말미암아 제6군단의 공적이 통령의 공적으로 기록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지금껏 많은 통령들이 루바노의 원수 자리를 거쳐 갔으나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전 통령인 라파엘레 갈라시가 임기 기간 동안 수십 명의 연루자를 색출해 내는 것에 그친 것을 떠올려 보면 더욱 그랬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 퇴역한 장교는 불미스러운 일로 군에서 물러났다고 합니다. 불온한 말이 적힌 벽보를 사주한 친형제가 취조 중에 목숨을 잃었다고 알고 있는데 그자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소문이…….”
어느 위원 하나가 자신의 의견이 아닌 척하며 소문을 핑계로 말을 꺼냈다. 이번 검거의 성과를 축소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줄곧 침묵하고 있던 카를로타가 운을 뗐다.
“위원들의 우려를 이해하오.”
카를로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도 위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이는 모두 그녀 특유의 낮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 덕분이었다.
말이 끊긴 위원은 쭈뼛대며 머리를 휘둘러 주변을 살피더니 슬그머니 입을 닫았다.
“하나, 이는 쇠락하고 있던 루바노의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감내하여야 할 것들이오. 지금껏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단테의 12인에 연루되었으며 그들 중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는지 위원들 모두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소. 나의 민중들이 루바노를 덮친 불온한 역병에 길들여져 고통받아왔음은 자명한 사실이니 단테의 12인이 검거된 지금 그들의 완전한 축출을 위해 이 나라가 오랜 진통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카를로타는 꽉 찬 의석을 둘러보며 위원들의 얼굴을 훑었다. 그녀는 130명의 시민들도 바라봤다.
“이 나라가 안정을 되찾기까지 걸리는 긴 시간은 그간 나의 민중들이 핍박받아 온 날들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을 것이오. 나의 통치권이 미치는 이 땅 어디에도 더는 고통받는 민중이 존재하지 않아야 하오. 기나긴 시간 동안 늙은 개처럼 신음하던 루바노가 이렇듯 긍지를 드높일 기회를 얻었으나 이를 자연히 얻어 낸 기회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며, 또한 마찬가지로 나와 그대들 모두가 겪어온 거친 루바노 역사의 격랑을 잊어서도 안 될 것이오.”
회의장 내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카를로타의 눈빛은 묘하게도 조반니를 닮아 있었다.
“이 나라는 이제 번영의 시대를 맞을 것이오. 공화국이 열린 이래 단 한 번도 맞이한 적 없는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니 새 시대와 역사를 맞을 준비를 하시오.”
* * *
“그랬군… 그런 일이 있었던 거였어. 지금 생각해 보니 남매라고 할만한 얼굴 생김새의 특징이 떠올라.”
찻잔을 내려놓은 발레리아는 찻잔 손잡이를 느리게 문질렀다. 늦은 저녁을 먹고 모처럼 갖게 된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거실 의자에 앉은 엔초가 입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그림을 그리고 있어 집 안에는 사각대는 소리와 흥얼대는 콧노래 소리가 작게 울렸다. 이야기 중인 로미오와 발레리아를 그리고 있는 엔초는 벌써 열 장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로미오는 손을 더듬어 찻잔을 들어 올렸지만 마시지 않고 그대로 쥐고 있었다. 입술 끝에 닿는 따뜻한 향을 맡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가로 가져갔다.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는데 발레리아가 물었다.
“그래서 스포르차 선생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떤 방법으로든 감옥에서 빼내지실 겁니다. 그리고 바치를 떠나실 겁니다. 아마 루바노를 완전히 떠나시겠지요.”
“상위 단원들이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취조 과정에서 그들의 입을 통해 비밀이 발설되지 않을까?”
“저도 그 점이 우려되긴 합니다만 단원들이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제6군단이 쉬이 믿지는 않을 겁니다. 해당 주장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한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으나 그 방법은 상위 단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겁니다.”
“통령 각하께서 친히 그 진위를 가려 주시는 것 말이야?”
“예.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겠지만 설사 스포르차 선생님이 모든 사실이 진실임을 주장하셔도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취급될 겁니다. 스포르차 선생님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던 신분증 발급 기관장은 이미 죽었고 루바노 내에서 통령 각하와 스포르차 선생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들 중에는 비밀을 발설할 만한 자들이 없습니다. 각하께서 선생님께 보내셨다던 암호 편지와 엘베라가 갖고 있던 초상화가 증거가 될 수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 제6군단이 그런 증거에 주의를 기울일 가능성은 적습니다. 더군다나 선생님은 곧 사형을 당하는 것으로 더 이상 산 사람이 아니게 될 겁니다. 모두의 기억 속에 죽은 사람으로 남게 될 테니 이번 일과 관련해 혹 소문이 떠돈다 해도 금방 잊혀질 겁니다.”
그때 엔초가 의자에서 뛰어내려 쪼르르 달려왔다.
“이것 보세요, 다 그렸어요.”
엔초가 발레리아에게 그림을 내밀자 발레리아가 웃으며 받아 들었다. 기쁜 듯이 미소를 지은 그녀는 엔초의 어깨를 감싸며 칭찬했다.
“실력이 정말 대단한걸?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솜씨가 더 늘었구나.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다니.”
“로미오 형이 자꾸 손을 꼼지락거려서 손은 그리기 힘들었어요. 대신 다리와 발은 제대로 그렸어요.”
“정말 잘 그렸어. 나날이 실력이 느는 것 같아. 10년만 지나면 훌륭한 조각가가 되어 있겠는데? 그때가 되면 모두들 네게 작품을 의뢰할 테니 내게 기회 같은 건 없을 거야. 그래도 흔쾌히 그림 한 점 정도는 그려 줄 거지?”
“그럼요! 말로 대위님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드릴게요.”
발레리아가 그림을 자세히 보며 하나하나 칭찬하는데 1층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갈리에누스의 목소리도 함께였다.
“내가 내려가지.”
발레리아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그녀와 갈리에누스가 대화하는 소리가 2층으로 들려왔다. 두 사람이 함께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로미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으로 다가갔다. 손을 더듬어 새 찻잔을 꺼내는 사이 엔초가 문으로 달려 나가며 인사했다.
“중위님!”
엔초가 안기듯이 뛰어들자 갈리에누스는 미소로 엔초를 안아 주면서도 얼굴에 어린 놀란 빛을 어쩌지 못했다. 평소보다 빠른 갈리에누스의 발소리로 그의 기분을 짐작한 로미오는 일부러 평범한 목소리를 냈다.
“왔나, 중위?”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게 전부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뜸 그렇게 물었지만 너무 서둘렀다는 생각에 갈리에누스는 우선 문부터 닫았다. 엔초가 세 사람을 그리기 위해 거실로 돌아가자 갈리에누스는 발레리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로미오가 바로 앞에 따뜻한 찻잔을 놔 주었지만 갈리에누스는 차를 마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로미오와 발레리아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두 분 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그렇게 보입니다만 그래도 혹시…… 그럼 지금 무소 대위님께서는 부대에서 상위 단원들을 취조하고 계시겠군요? 대위님께서도 어젯밤의 일을 상세히 모두 알고 계시는 겁니까?”
갈리에누스가 성급하게 질문을 쏟아 내자 발레리아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전부 이야기해 줄 테니 진정해, 중위.”
그래서 시작된 이야기는 지난 며칠간 일어난 일들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됐다. 로미오는 통령과 조반니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하고 모든 이야기를 들려줬다. 자신이 조반니의 포섭으로 그간 비밀리에 단테의 12인의 활동을 해 왔다는 것과 인명록의 존재, 그리고 엘베라에게 사로잡혔던 것, 엘베라를 부대로 데려가 고문했던 것, 그리고 레오나르도의 협상.
세세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갈리에누스의 표정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모든 일을 함께한 발레리아조차 로미오의 설명을 들으며 새삼스러운 기분에 잠겨 중얼댔다.
“그래, 그렇게 해서 바로 오늘 아침에 협상이 이뤄졌지. 디오니시오 선생이 우리에게 인명록이 있는 장소와 상위 단원들의 은신처를 알려 줘서 그곳부터 급습했고. 수백 명의 하위 단원들을 색출해 내는 것은 반나절이면 충분하더군.”
갈리에누스는 발레리아와 마르코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가장 먼저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듯 말을 아끼더니 물끄러미 로미오를 봤다.
“설마 대위님께서 그런 일을 하고 계셨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퇴역하신 이후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편히 지내시는 줄로만 알았는데 여태 그런 일을 하고 계셨군요.”
갈리에누스는 로미오가 무사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에 뒤늦게 마음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오늘 낮에 제5군단에도 통령 각하의 지령서가 도착했습니다. 단테의 12인을 검거하는 데에 제5군단도 동원될 겁니다. 당분간 바치 시내 근방을 돌아다니며 수시로 들러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겠네.”
“단테의 12인이 제6군단에 의해 색출되는 것을 길거리 곳곳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상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 어리석은 말이겠으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괜스레 사관 학교 생도 시절도 떠오르는군요. 이런 날이 언젠가는 올 줄 알았지만 이렇게 이른 시기에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누구나가 그럴 거야. 제6군단의 장교라면 자연히 옛일들을 생각하게 되지. 우리 모두가 바라 오던 것이니까.”
“중위 자네로선 소위로 임관하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이런 일이 이루어진 것이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네. 심지어 부대를 옮기고 몇 달 지나지 않은 시점이지 않나.”
세 사람은 잠시간 말없이 차를 마셨다. 셋 중 그 누구도 더 이상 제6군단의 장교가 아니었지만 긴 길을 함께 걸어왔기 때문에 이 순간 같은 감정을 나누고 있었다.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던 당시 그들은 모두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었다. 어쩌면 살아생전에 이루지 못할 목표였을지도 몰랐다. 이뤄질 것이라고 꿈꿔 본 적 없는 목표였다.
특히나 생각이 많아진 갈리에누스는 꽤 오랫동안 찻잔만 만지작대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서도 엔초에게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스포르차 선생님의 소식 말입니다. 두 분 다 알고 계시는 겁니까? 그분이 살인죄로 구금되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그라나 부인과 마주쳤는데 부인께서 재판에 가는 길이라고 하시더군요. 이게 다 무슨 일인 겁니까?”
앞서와 달리 로미오의 표정이 조금 달라지자 발레리아는 조반니가 탈옥한 날 그가 하숙집으로 찾아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로미오가 그를 몹시 거부하며 불쾌해하던 것을 기억했다. 조반니의 고백에 놀라지 않았던 것으로 봐 로미오는 조반니의 마음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로미오가 했던 말을 떠올려 보면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이 있는 게 분명했지만 캐물으며 관여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금방 잊고 갈리에누스에게 말했다.
“로미오만이 아니라 나 역시 크게 놀랐어. 그라나 부인께서도 마찬가지야.”
발레리아가 조반니의 투옥과 관련해 자신이 아는 것을 이야기해 주자 갈리에누스의 얼굴에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여러 표정이 떠올랐다. 놀라기도 하고 충격에 휩싸이기도 하던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조반니가 잔인한 방식으로 사람을 넷이나 죽인 살인자인 까닭에 동정하거나 옹호하지는 못했다.
“제가 부대를 옮긴 이후에 정말로 많은 일들이 있었군요. 하필 두 문제 다 스포르차 선생님께서 연관돼 있으시니…… 그분도 참 여러모로 많은 비밀을 숨기고 계셨군요. 그런데 사람을 넷이나 죽였다면 사형을 면치 못하실 텐데요.”
“우리도 그렇게 추측하고 있어. 오늘 밤 재판이 진행되면 내일 형이 집행될 텐데 아마 교수형에 처해지겠지.”
갈리에누스는 여러 생각에 잠겨 찻잔을 들여다봤다. 조반니가 제6군단에게 받았던 두 번의 조사 중 한 번을 담당했던 그였다.
결국 조반니는 단테의 12인 단원이 맞았다. 그의 진짜 의중을 고려하면 반만 맞은 격이었지만 어찌 됐든 군의 포위망을 두 번이나 빠져나간 셈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살인자였다. 그것도 곧 사형을 당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이 마음속에 일어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가 로미오에게 물었다.
“대위님께서는 재판에 가 보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그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갈리에누스는 로미오가 특히 더 조반니와 가까웠던 만큼 가장 크게 상심했을 거라고 생각해 그의 반응을 이해했다.
“맹인인 내가 재판에 참석해 봐야 재판정 내에서 벌어지는 일을 제대로 보지 못할 게 뻔하네. 스포르차 선생님의 마지막을 보고자 한다면 갈 만한 자리겠지. 궁금하다면 다녀오게.”
“아닙니다. 저도 그 자리에 갈 만한 입장은 아닙니다. 단지 그분께서 내일 아침에 사형을 당하실지도 모른다기에…….”
끝을 흐리는 갈리에누스의 말을 들으며 로미오는 두 손으로 찻잔 손잡이를 굳게 쥐었다. 이미 마음을 다잡았다고 생각한 그는 조용히 차를 마셨다.
내일 아침이면 모든 것이 끝날 테니 더는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 * *
“이게 다 무슨 일이랍니까? 조반니가 살인죄로 재판을 받다니요…….”
“아직도 믿어지지 않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말이야. 휴우…….”
재판정으로 향하는 질송 선생은 뒷짐을 진 채 고개를 떨궜다. 그의 뒤를 따르는 블레즈 선생도 근심 어린 표정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중앙 광장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상야등 불빛 때문에 재판정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한 무리의 개미 떼처럼 보였는데 질송과 블레즈 선생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여러 명의 의사들이 한데 모여 걷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거들며 혀를 차기도 하고 충격에 휩싸여 주절대기도 했다.
“사형이 언도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사형이라니, 정말 끔찍합니다. 스포르차 선생이 내일이면 산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끔찍한 건 그 작자의 살인 행각이지. 사람의 목을 잘라 죽였다잖아. 집에다 불까지 질렀다는데 그게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짓이라고 생각하나?”
“시체만 해부하다가 머리가 어떻게 돼 버린 게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화가 난다 한들 어떻게 사람을 넷이나 죽일 수 있나요.”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는 다소 남루한 옷을 입은 사내들이 무리를 이뤄 걷고 있었다. 그들의 틈에는 흐느끼는 여인도 있었다. 죽은 자코모를 위해 오늘 재판에 참석한 그들 중 다수는 조각가였다. 조반니를 알고 있는 자도 있었는데 그들의 목적은 조반니에게 사형이 내려지는 것을 직접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쌓인 분을 풀려는 것이었다.
“그놈은 반드시 사형을 받아야 해! 그런 놈을 살려 둔다면 또다시 살인을 저지르고 말 거야.”
“그 자식이 사형당한다고 죽은 자코모가 살아 돌아오겠어? 불쌍한 녀석! 그렇게 잔인하게 칼에 찔려 죽었는데 조반니 그놈은 여태 살아 있다니. 사지를 찢어 죽여도 모자랄 자식이라고.”
“반드시 내일 아침에 형이 집행되는 것까지 전부 지켜보고 말겠어. 그놈의 숨이 끊어지는 걸 이 두 눈으로 꼭 봐야겠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코모 녀석의 묘석 앞에 설 자신이 없을 것 같아.”
“가여운 자코모 녀석……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할까… 나였다면 죽어서도 편히 눈 감을 수 없을 거야.”
재판정 안에는 이미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는 줄리오는 자신의 하인 여럿과 세라피나 산소네 교수, 그리고 갈릴레아 자니 교수와 앉아 있었다. 그들의 바로 뒷줄에는 그라나 부인이 로사티 하숙집 건너편의 포목점 주인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들 말고도 조반니를 아는 사람들이 재판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치 병원의 의사들과 조반니의 출판 축하회에 초대받은 적 있는 페리 전 시장을 비롯해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저명한 교수와 학자들, 그리고 평소 조반니에게 신세를 져 오던 상인들도 많았다.
살해된 사람만 넷이었기에 그들의 가족과 친구, 선생, 연인, 제자들이 모두 이곳에 자리해 그 수가 대단했다. 흐느끼거나 가슴을 움켜쥐고 우는 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재판정은 도무지 고요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숙해 주십시오.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재판정의 모든 문이 닫히자 판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 명의 판사 중에는 피암메타 판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재판장이 아닌 데다 지금껏 재판정에서 보여 준 것과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 피의 재판장이 저런 표정을 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으나 그녀는 사람들의 눈초리를 신경쓰지 않고 입술만 굳게 다물었다. 조반니가 살인죄로 재판정에 섰고 그 재판을 자신이 담당하게 됐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여러 의미를 주고 있었기 때문에 피암메타 판사는 평소와 같을 수 없었다.
어수선한 재판정 내에 울리던 웅성거림은 조반니가 모습을 드러내자 절정에 이르렀다.
“세상에나!”
“세상에…….”
“아니, 저런…….”
조반니는 간수들에게 팔이 붙들린 채 재판정의 문을 열고 들어와 피고인석 위에 섰는데 그의 양팔은 등 뒤의 줄에 묶여 있었다. 얼굴을 다 가리는 금발 머리는 지저분하게 흘러내려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게 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금색 눈동자만이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냉담한 눈동자는 재판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의 얼굴을 차근차근 훑지 않았다.
변호를 거부했기 때문에 변호인 없이 혼자 피고인석 위에 선 조반니는 이미 자신이 찾는 얼굴이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먹어 버린 오른쪽 귀 대신 왼쪽 귀를 통해 자신이 찾고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먼 곳까지 귀를 기울였지만 이내 그것도 그만두었다. 그 누구에게도 관심 주지 않고 턱을 들어 올린 채 바로 선 그는 마치 남의 재판에 참석한 양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불안해하거나 움츠러드는 기색도 없었다.
그 모습에 분개한 어느 사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살인마! 오늘 밤이 네놈이 살아서 맞이하는 마지막 밤이 될 거다!”
조반니가 휘두른 칼에 몸이 꿰뚫리고 불타 죽은 소녀의 가족이었다. 티모테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줬다가 불난 집에 갇혀 새까맣게 그을린 시체로 발견된 소녀는 이제 겨우 열한 살이었다.
소녀의 가족이 그렇게 외치자 다른 쪽에서도 고함 소리가 들렸다.
“죽은 자코모에게 안부 따위 전해 줄 필요 없어! 어서 사형이나 당해 버려라!”
“지옥에 가거든 우초 경사님께 죄를 비십시오! 경사님은 당신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해 시신조차 온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비열한 살인마! 죄 없는 어린아이를 살해한 야만인 같은 자식!”
“저런 놈은 똑같이 참수형에 처해야 해. 그래야만 자신의 죄를 깨달을 거라고!”
사람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며 외쳐 재판정 내에 소란이 더해지자 판사가 외쳤다.
“정숙하시오!”
짧은 호령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지만 다른 한쪽에서 흐느끼며 우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선명한 그 울음소리에도 조반니는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누구도 자신을 편들고 있지 않았고 자발적으로 나서서 변호해 주는 이도 없었지만 그는 스스로를 변명하려 들지 않았다. 그의 침묵에 어떤 이들은 조반니가 이 상황에 위축된 데다 곧 사형을 받을 자신의 처지를 실감하고 충격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또 다른 이들은 조반니의 눈빛에서 조금의 반성의 여지도 보이지 않기에 그가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어느 쪽의 추측도 정확히 맞지 않았지만 조반니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을 대로 생각하며 그를 향해 증오 어린 눈빛을 보냈다.
* * *
“그래서 내가 차코에게 욕심쟁이라고 했어. 욕심이 그렇게 많으면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했더니 차코가 내 이마를 주먹으로 이렇게 때렸어.”
침대에 마주 누워 로미오의 얼굴을 만지던 엔초는 작은 주먹으로 로미오의 이마를 때렸다. 스치듯 살짝 건드린 것이었지만 행여나 로미오의 이마가 붉게 부어오르기라도 할까 봐 얼른 손으로 문질렀다.
그러는 동안 로미오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네가 한 말이 차코를 화나게 했나 봐. 하지만 친구를 때리는 건 잘못된 행동인데. 차코가 나중에 사과를 했어?”
“응. 그래서 나도 미안하다고 사과했어.”
“차코가 사과를 받아 줬어?”
“응. 이제는 싸우지 않을 거야.”
엔초는 손끝으로 로미오의 길고 촘촘한 속눈썹을 만졌다. 그러자 로미오가 눈을 깜빡거리며 속눈썹을 움직였다. 손가락에 뾰족하게 닿는 느낌이 좋아 빗질을 하듯 살살 쓸다가 두 손으로 로미오의 뺨을 잡았다. 로미오는 어른이라고 할 만큼 충분히 나이가 많았지만 손안에 만져지는 하얀 두 뺨은 작고 보드라웠다.
힘을 줘 뺨을 누르는 장난을 치자 로미오가 미소를 지었다.
“나, 밀라니 선생님 댁에 가면 매일매일 형한테 편지를 쓸게.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쓸 거야.”
“형은 답장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해. 알지? 이제 글자를 쓰기가 무척 힘들어서 편지 한 줄을 적는데도 다른 사람보다 배의 시간이 걸려.”
“알고 있어. 답장하지 않아도 돼. 읽기만 하면 되니까 그라나 할머니께 대신 읽어 달라고 해. 그라나 할머니께도 같이 편지를 보낼 테니까 매일 이 하숙집으로 두 통의 편지가 도착할 거야.”
“그래, 알았어.”
로미오의 콧대를 따라 손을 움직이던 엔초는 로미오가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눈을 내리깔며 생각에 잠기자 손을 뗐다.
“고민이 있어?”
로미오는 고개를 저었지만 엔초는 로미오가 조금 전에 발레리아와 차를 마시면서 지금 같은 표정을 지었다는 것을 알았다. 갈리에누스가 오고 나서도 로미오는 몇 차례인가 또 혼자 생각에 잠기는 것처럼 보였다. 로미오의 옆얼굴을 그리면서 눈빛이 슬퍼 보인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밀라니 선생님 댁으로 가서 그래? 많이 보고 싶을까 봐?”
로미오의 코끝을 쓰다듬으면서 묻자 로미오가 그의 큰 손으로 엔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많이 보고 싶긴 하겠지만 그런 걸 고민하고 있었던 건 아니야. 형은 네가 밀라니 선생님 댁으로 가게 돼서 정말 기뻐. 넌 분명 친구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고 공부도 열심히 할 거야.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도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어디 가서든 적응을 잘했잖아.”
“맞아. 나는 새로운 사람들이 좋아. 새로운 곳도 좋아. 새로운 음식도 좋고 새로운 책도 좋아.”
“형은 새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데 넌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다. 해 보지 못했거나 겪어보지 못한 것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건 특별한 능력인 거야, 엔초.”
엔초가 생긋 웃으며 품 안으로 파고들자 로미오는 엔초의 등을 안아 줬다.
하지만 얼굴에서는 곧 웃음기가 거두어졌다. 애써 표정을 감추자 엔초가 재잘대기 시작했지만 로미오는 다시 혼자만의 긴 생각에 잠겼다.
* * *
“죄인 조반니 스포르차는 두 번의 살인을 저질러 네 사람을 살해하였으며 두 번째 살인에서 그 사실을 은폐하고자 방화를 저질렀소. 마흔일곱 개의 자상이 남은 시신은 방화로 인해 상당 부분 훼손되었고 그 과정에서 집 내부에 남아 있을 죄인의 살인 흔적도 은닉되었소. 특별한 원한 관계 없이 살해 계획을 세우고 살인 후 방화를 한 것은 그 의도가 극히 악랄하다고 보이며 시신의 일부를 잘라 냄으로써 잔인하게 훼손한 점 역시 고의성이 있다고 판시하는 바요.”
재판정 내에 울려 퍼지는 판사의 목소리는 재판정의 높은 천장에 닿을 것처럼 우렁찼다.
판사가 자신의 죄를 조목조목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조반니는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눈초리에 대해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찾고 있던 단 한 사람. 관짝 같은 독방에 구금돼 낮도 밤도 모른 채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기다렸던 단 한 사람이 이곳에 없다는 사실만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자신이 끝끝내 용서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워 피고인석 아래에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자신을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죄인은 살해 후 도주하는 과정에서 현장을 목격한 어린아이와 노인을 살해하였는데, 이들은 손쉽게 제압해 살해하기 쉬운 대상으로 그 살해 수법이 더없이 잔인하며, 또한 죄인은 돌발적인 위협을 가한 시점에 그들의 죽음을 충분히 예견했을 것으로 추측하기에 비록 계획된 살인은 아니나 그 죄가 무거운 것으로 판시하였소.”
조반니가 단테의 12인의 검거에 공적을 끼쳤다는 사실은 이번 판결에 미미한 영향을 미쳤기에 언급조차 되지 않았는데 이는 전적으로 카를로타의 뜻이었다. 통령의 이름으로 면죄를 주려 했다면 법 집행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가능하나 카를로타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제6군단에 명했던 조반니에 대한 조사를 모두 중단할 것을 지시했다.
그 결과 판사는 단테의 12인의 이름을 입에 올릴 이유가 없어졌다. 재판을 구경하는 이들 역시 소문을 통해 그 사실을 전해 들었지만 굳이 관심 갖지 않았다.
“죄인은 저명한 의학자이자 집필가로서 다수의 해부학서와 철학서, 수학 교본의 집필에 몰두하여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으나 네 건의 살인 행각으로 말미암아 그의 저서를 명저로 기리는 것은 죄인에게 희생당한 자들에 대한 능욕으로 판단되오. 그러므로 해당 저서를 모두 회수해 폐기하여도 그 처분에는 조금의 과함도 없소.”
판사가 이야기를 하던 중 재판정 뒤편에 난 작은 문이 열렸다. 앞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무심코 그곳을 본 조반니는 늘어뜨린 금발 머리가 크게 흔들릴 정도로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재판정 내의 등잔 불빛이 닿지 않는 문 앞은 사람 그림자를 겨우 볼 수 있을 만큼 어두컴컴했는데 누군가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 너머에서 나타난 얼굴을 본 조반니는 다물고 있던 입술을 작게 벌리며 숨을 멈췄다.
너무나 먼 거리였고 상대는 목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그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따름이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단 한 사람의 얼굴이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으나 여전하다고 생각됐다. 문을 밀어 닫는 단정한 손짓도, 재판정 내의 소리를 듣기 위해 이쪽을 바라보고 선 자세도,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갸름하고 흰 얼굴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문을 열고 들어선 로미오는 자신이 상상하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섰다.
“또한 마찬가지로…….”
조반니는 뚫어져라 로미오를 바라보며 턱을 치켜들었다. 눈가의 머리카락이 거슬리자 고개를 쳐들었으나 머리카락은 다시 흘러내려 얼굴을 가렸다. 야위었지만 본래부터 갖고 있던 힘이 어딘가로 달아나 버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등 뒤로 묶인 손에 힘을 주자 투둑, 하고 줄이 뜯어졌다. 어깨에 힘을 단단히 주고 한 번 더 힘을 가하자 팔근육이 도드라지며 팽팽하던 줄을 터뜨려 버렸다.
양팔이 자유로워진 조반니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상체를 앞으로 숙여 피고인석 위를 손으로 짚었다. 눈을 크게 뜨며 로미오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보는데 줄이 풀린 것을 본 간수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판사가 말하는 도중에 피고인석 위로 올라왔다. 피고인석 아래의 사람들도 두 팔이 자유로워진 조반니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웅성댔다.
성가신 머리카락을 치워 낸 조반니는 저만치에 있는 로미오를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목을 뺐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전혀 알지 못하고 지팡이를 짚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아 피고인석 아래로 떨어질 듯이 몸을 기울이는데 간수들이 뒤로 다가와 팔을 잡으며 조용히 윽박질렀다.
“얌전히 있어라. 소란을 일으키면 당장 끌어낼 테다.”
간수들이 팔을 붙들거나 말거나 오로지 로미오만을 응시하는데 곧 그가 돌아섰다. 어둠 속에서 그가 손을 더듬어 문고리를 찾아내 재판정 문을 열려고 하자 조반니는 목소리를 높였다.
“대위님!”
피고인석 아래로 뛰어내릴 것처럼 몸을 숙이며 외치자 문밖으로 나가려던 로미오가 순간 손을 멈췄다. 반쯤 열렸던 문이 도로 닫혔지만 로미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목소리를 들었을 터인데 이쪽을 보지 않았다.
“오늘 밤 이후로 더는 저와 다시 만날 수 없게 될 겁니다!”
어리둥절해 웅성대는 사람들 틈으로 조반니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울렸다. 여전히 로미오가 뒤를 돌아보지 않자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외쳤다.
“제게 부디 마지막 기회를 주십시오!”
조반니의 시선이 재판정 뒤를 향하자 사람들 몇이 뒤를 돌아봤다. 그 기척을 느낀 것인지 로미오가 손을 더듬어 문고리를 찾아냈다.
“대위님!”
더 큰 소리로 외쳤지만 로미오는 재판정의 문을 열고 나갔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한 번 더 외치려는데 간수들이 다가와 입에 재갈을 물렸다. 재판정 뒤편의 문은 희미한 소리를 내며 고요하게 닫혔지만 조반니에게는 그 소리가 쿵, 하고 육중하게 다가왔다.
간수들을 뿌리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조반니는 재갈이 물려진 채 닫힌 문만 바라봤다. 등 뒤로 포박된 손은 다시 묶여졌고 어깨는 간수들에 의해 붙들렸다. 그가 재판정을 탈출하려는 것처럼 소란을 일으킨 탓에 겁을 먹고 웅성대던 사람들은 그제야 수군거림을 멈추고 저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정숙하시오!”
재판장이 큰 소리로 외치며 조반니를 매서운 눈으로 쳐다봤지만 조반니는 닫힌 문만 바라봤다. 그 문이 열리기를 바라며 뚫어져라 주시했지만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재판을 계속 이어 가겠소.”
조반니는 조금 전에 자신이 본 로미오의 모습이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하지 않았다. 조금 전 분명 그가 저 문을 열고 들어왔고 자신의 외침에 재판정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내일 아침에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곳을 찾은 걸까?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홀로 이곳을 찾아온 걸까? 혹시 그에게 자신을 용서하고자 하는 의지가 조금이라도 생긴 걸까?
“……해서, 앞서의 이러한 까닭을 들어 죄인에 대한 판결을 내리겠소.”
판사가 판결만을 남겨 두고 잠시 엄숙을 유지하자 재판정 안이 몹시도 조용해졌다. 조반니가 여전히 재판정 뒷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가운데 선고가 내려졌다.
“죄인 조반니 스포르차의 유죄를 인정하여 공개 교수형에 처하는 바요.”
판사이자 재판장인 자의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가장 앞줄에 앉은 줄리오는 그의 하인들이 말리기 힘들 정도로 목청껏 소리를 높여 다시 판결해 줄 것을 요구했으며 다른 이들은 서로 비슷한 이유로 조반니의 사형이 합당한 판결이라고 외치며 그에게 저주 섞인 말을 퍼부었다. 착잡함을 숨기지 못한 질송 선생과 블레즈 선생을 비롯해 조반니를 잘 아는 사람들은 어두운 얼굴로 재판정을 떠났고 그라나 부인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한데 뒤엉킨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를 웅웅 울려 댔으나 조반니는 재판정 뒤편에 난 문만 바라봤다. 평생을 바쳐 써 낸 저서는 불태워지고 지독한 시취를 견디며 밤새웠던 수천 일의 밤이 눈 앞에서 물거품이 되었지만 오로지 로미오가 열고 들어와 다시 사라졌던 문만을 바라봤다.
죽음은 면하게 될 테지만 조반니 스포르차라는 이름의 사내는 내일 아침이면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터였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저 로미오가 사라진 문만을 바라보다가 끝끝내 간수들에 의해 피고인석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 * *
“별장 관리인이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합니다. 주치의들도 입이 무거운 자들로 선별했다고 합니다. 도착하는 대로 당분간 은신하며 지낼 수 있도록 별장 외벽의 담도 새로이 쌓았다고 합니다. 외부에서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없도록 출입을 제한하고 별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주변을 경계할 것이라고 합니다.”
관저를 향해 달리는 마차는 덜컹거림 없이 조용히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카를로타와 주세페가 탄 마차 뒤에는 다른 보좌관 4인이 탄 마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곧장 살로네 성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내일 당장 바치를 빠져나가 국경으로 향하기 전에 당분간 숨어 있을 곳이 있다면 좋을 듯한데 말입니다. 바치 시내는 쉽게 빠져나가겠지만 국경을 넘으려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니 말입니다. 국경 지역의 경비가 강화돼 빠져나가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입니다. 바다를 건너는 데에도 약 한 달이 소요되니 아리아 섬에 도착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두 달 뒤의 일이 될 겁니다.”
“항해하는 동안 조반니가 동행한 자들의 말을 얌전히 듣기만을 바라야겠군.”
카를로타는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물었다.
“조반니에게 살해당한 자들 중 무명의 조각가가 있다고 들었네. 그자의 이름이 무엇인가?”
“자코모 본도네입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 가족이 있지만 그자는 묘를 돌봐줄 만한 이가 없다고 들었네만. 그자의 묘지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아보게. 묘를 옮기는 것이 가능하다면 무기명으로 묘지 관리비를 내고 바치시 묘지로 무덤을 옮기게. 이름 자를 새긴 묘석도 함께 말일세. 가난한 자라 하였으니 변변찮은 무덤을 갖고 있을 것이네.”
“예, 각하.”
“내일 아침에 조반니를 감옥 밖으로 데리고 나올 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모두 준비를 마쳤습니다. 대역 시체도 준비되었습니다. 바치의 성벽 밖까지는 공화국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로 조반니를 데려갈 것이며 검문을 담당한 경비병에게는 관저에서 출발한 마차라고 설명할 예정입니다. 마차 내부를 확인당할 가능성이 있으나 미리 준비한 옷으로 변복한 조반니를 수상하게 여기지는 않을 겁니다. 성벽을 무사히 통과하면 그때부터는 포도주 상인의 짐마차로 위장해 국경까지 이동할 겁니다.”
“성벽까지 이동하는 중에 시간이 많지 않을 듯하니 조반니에게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금하게. 일을 지체해서 안 되니 긴말은 안되네. 그는 이미 내가 손을 쓸 거라는 것을 알 것이야.”
“예, 알겠습니다.”
관저에 도착하자 카를로타는 주세페과 함께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 많아 집무실로 향한 카를로타는 주세페가 내온 차 한 잔을 마시며 정무를 봤다. 조반니의 재판이 마무리되었을 시각이었기 때문에 서류에 날인을 하면서도 이따금씩 손을 멈추고 시간을 확인했다.
다른 4인의 보좌관들이 늦은 밤 인사를 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을 무렵, 잠시 자리를 비웠던 주세페가 집무실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각하, 그가 찾아왔습니다.”
주세페는 어디서 데려온 것인지 점박이 무늬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요 며칠 사이 관저 내에 보이지 않아 카를로타가 찾고 있던 녀석이었다.
“이 녀석은 뒤뜰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제 다리를 절지 않는 듯합니다.”
고양이가 팔다리를 버둥거려 주세페가 내려 주자 고양이는 탁자 밑으로 쏜살같이 들어가 카를로타의 발 옆에 앉았다. 가르릉 대며 털을 고르는 모습에 주세페는 옷소매의 털을 떼며 말했다.
“뜰로 안내해 드려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혼자서 찾아온 것인가?”
“예, 그렇습니다.”
카를로타가 일어서자 고양이가 털 손질을 멈추고 카를로타를 따라나섰다. 주세페와 함께 집무실을 나서니 복도 창틀에서 털을 고르고 있던 고양이 한 마리도 카를로타의 뒤를 따랐다.
뜰에 도착했을 때 카를로타를 뒤따르는 고양이는 네 마리였다.
“저기에 있습니다.”
주세페가 뜰 한편을 가리키니 그곳에는 지팡이를 짚은 로미오가 서 있었다. 밝은 달 아래 호리호리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선 로미오는 허리를 바로 편 자세로 생각에 잠긴 채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발소리를 내며 다가가자 이쪽을 향해 몸을 돌려 서더니 경례가 아닌 묵례를 해 보였다.
카를로타는 로미오의 바로 코앞까지 가 말을 하는 대신 먼 거리에서 이야기하며 다가갔다.
“주위에 고양이가 있으니 발자국 소리가 들릴 걸세. 몸을 비비려 드는 녀석도 있으니 놀라지 말게.”
카를로타를 뒤따르던 고양이들이 뜰에 난 잡초를 밟자 사락대는 발소리가 들렸다. 로미오는 그 소리를 따라 턱을 움직이다가 카를로타가 앞으로 다가와 서자 고개를 숙여 보였다.
“늦은 밤에 찾아와 죄송합니다. 격무에 시달리시는 줄로 알고 있어 일찍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괜찮네. 이렇게 찾아와 줄 것이라고 생각했네. 내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언제든 찾아오게. 주세페가 항상 이곳으로 안내할 걸세.”
주세페는 자연히 두 사람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섰다. 고양이 네 마리는 카를로타의 주위를 맴돌다 좋을 대로 바닥에 앉거나 엎드려 털을 손질했다.
“각하께 감히 청하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금일 낮 장교들과 함께 각하를 알현했을 때에는 말씀드리기 힘들었던 이야기입니다.”
“말해 보라.”
카를로타는 깊은 생각 없이 흔쾌히 답했으나 로미오는 잠시간 말을 아꼈다. 이런 청을 하는 것이 무례함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각하께 말씀드렸던 하슬러 공국 출신의 떠돌이 용병을 기억하십니까? 그자는 제가 엘베라라는 단원에게 사로잡혔을 때 제게 큰 도움을 준 자입니다. 그자가 아니었더라면 일을 그르쳤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그자는 루바노 사람이 아닌 데다 루바노의 정세를 잘 알지 못한 채 이 일에 개입하였지만 단테의 12인의 색출 과정에서 중책과 같은 임무를 수행한 자입니다.”
이브가 루바노를 떠나기까지 아직 여러 날이 남아 있어 그녀에게 진 신세를 갚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통령에게 무턱대고 이브의 자세한 사정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청을 하기에 상대는 통령이었고 이 일은 그런 감정을 개입시켜 포상을 요구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카를로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늘 회의에서 이번 검거에 공적을 끼친 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네. 회의는 내일 다시 열릴 것이니 하슬러 공국 출신의 용병이라는 자도 그 자리에서 거론될 걸세. 루바노인이 아니더라도 루바노의 명예를 드높인 자라면 마땅히 그 공을 인정함이 옳지. 귀관과 비슷한 시기에 퇴역을 한 제6군단의 장교도 이번 일에 공적을 끼치지 않았는가. 그자의 몫 역시 잊지 않고 챙길 것이니 염려 말게.”
로미오는 그렇게 말하는 카를로타에게서 뜻 모를 감정을 느끼고 감사하다며 대답했다. 착각할 만한 목소리가 아닌데 순간적으로 누군가가 떠올랐다.
“……한 가지 더 청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앞서와 같이 먼저 말을 꺼냈음에도 로미오가 망설이자 카를로타는 조용히 기다렸다.
“상위 단원들의 처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카를로타는 미세하게 눈가를 좁혔지만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자들 중 특정 단원의 처분에 관해 청을 해도 되겠습니까?”
“상위 단원들 중 누구를 말하는가?”
“친치아 콘델로라는 이름의 소녀 단원입니다.”
“그자는 체사 왕국 출신의 몰락 귀족이 아니던가? 주세페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네.”
“맞습니다. 그 소녀에 한해 교수형이나 화형과 같은 극형을 면케 해 주기를 간청드립니다.”
카를로타는 짧은 생각에 잠기더니 물었다.
“상위 단원 중에 조반니의 옛 벗이 있다고 들었네. 그자도 의사라고 알고 있네만.”
“예. 레오나르도 디오니시오라는 이름의 단원입니다.”
조반니와 로미오의 관계를 고려할 때 로미오가 그자의 감형을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맞았기 때문에 그 점에 의문을 가지려던 카를로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조반니에게 있어 옛 벗이라는 것은 표면적인 사이에 불과할 것이다. 조반니의 입을 통해 이야기되는 레오나르도는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는 낡은 카드일 테니 조반니로부터 레오나르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로미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로미오가 요구하고 있는 친치아라는 소녀의 목숨이 레오나르도라는 상위 단원이 협상으로 내걸었던 조건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카를로타는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각하께 이런 청을 드리는 것이 죄에 따라 엄히 죄인을 징치하는 루바노 법의 운용을 멋대로 이용하려 드는 것 같아 외람스럽습니다. 그들은 모두 반역죄를 꾀한 반역자이기에 그런 자들의 극형을 면케 해 주기를 청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그들의 교도를 가장 우선시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상위 단원 모두의 목숨의 보전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소녀 단원에 한해 형벌의 정도를 가벼이 내려 주시길 청하는 것입니다.”
“왜 내게 이런 청을 하는 것인가? 귀관이 그 소녀의 안위를 염려하는 까닭을 말하라.”
“그 소녀는 먼 땅인 루바노로 와 이곳에 정착한 외지인입니다. 멸문한 가문에 대한 기억을 갖고 어린 시종 하나를 데리고 도망쳐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녀의 죄는 분명하나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그녀가 이전에 저질렀던 죄를 모두 잊으리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직 어린 소녀이므로 감당키 힘든 극형은 면케 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아이라 하여 자신이 한 일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네. 루바노인도 아닌 자가 이 나라의 정치 체제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결사에 입회에 혁명을 주도한 것은 틀림없는 중죄네. 그들에게 극형을 내려 초라하고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하는 것은 이 나라가 보일 수 있는 가장 큰 경고이며 그것은 아직 색출되지 않은 단원들에게도 본보기가 될 걸세. 그자가 누구이고 어떤 이름을 가졌으며 어떤 태생을 갖고 있는지는 중요치 않네. 이 나라와 나를 위협한 자들에게 죄목에 걸맞지 않은 형벌을 내리는 것은 루바노의 실정과 모순되는 처단일세.”
카를로타의 목소리는 일순 서늘하게 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목소리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며 말을 이었다.
“귀관의 성품을 잘 알고 있네. 그 소녀 단원의 사정을 외면하지 못하여 나를 찾아온 것이지 않은가. 포상을 마다한 귀관이 누이도 아닌 한낱 반역자 소녀의 목숨을 구제해 줄 것을 청하는 것은 귀관이 그 소녀의 죄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 아닐 것이네. 사사로운 이익을 위함은 더더욱 아닐 걸세.”
로미오가 대답하지 못하고 머리를 떨구는데 카를로타가 말했다.
“청을 들어주겠네. 친치아 콘델로라는 이름의 소녀 단원에게는 죄과에 상응하지 않는 가벼운 형벌을 내려 줄 것이네. 상위 단원들은 공개 화형에 처해질 것이니 그 소녀 단원에게 내려질 가장 가벼운 형은 종신구금형이 될 걸세.”
친치아가 혼자서 목숨을 건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 로미오였지만 카를로타의 대답을 듣는 순간 눈을 굳게 감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불에 몸이 타는 고통을 느끼며 죽어 가는 형벌은 산 자에게 내려지는 형벌 중 가장 끔찍한 형벌이었다. 여생을 감옥에서 마치는 것은 아무래도 그보다 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청해도 되겠습니까? 인명록에서 보셨듯이 단원들 중에는 팔레르모 사립기숙학교의 교장이 있습니다. 그자가 학생들을 상대로 포섭 활동을 진행해 왔는데 포섭 대상 중에 트로이아라는 이름의 어린 자매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언니 쪽이 군인이 되길 원하고 있어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혹 가능하다면 그 자매의 처분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들 자매 외에도 만약 입회를 준비 중이던 아이들이 있다면 적어도 그 아이들에 한해…….”
로미오는 카를로타가 깊은숨을 들이마시는 기척을 듣고 말을 멈췄다. 그녀에게서는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는 기척도 느껴졌다.
“반역죄라는 이름 하에 어린아이들까지 모조리 처형대 위로 올려 보내지는 않을 것이니 염려 놓게. 당연한 일일세. 마땅히 형벌에 차등을 두어야지.”
카를로타를 피도 눈물도 없는 몰인정한 이로 만든 것이 된 로미오는 일순 부끄러움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각하의 아량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카를로타는 로미오를 가만히 응시했다. 푸른 눈 속에 스며 있는 혼란이 자신의 대답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것을 본 그녀는 짧은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돌렸다.
“내일 이른 아침에 조반니의 형이 집행될 걸세. 그 전에 감옥에서 그를 빼내 곧장 루바노 밖으로 내보낼 것이네.”
눈을 내리뜨고 있던 로미오는 지팡이를 굳게 한 번 잡았다. 카를로타는 고개를 고정한 채 눈을 내려 그 모습을 본 뒤 다시 로미오의 눈을 올려다봤다.
“조반니가 갈 곳은 토르토라 해협 너머의 남쪽 바다에 위치한 아리아 섬이네. 여러 나라의 귀족들이 별장을 두고 있는 휴양지 섬인 그곳엔 조반니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 조모가 별장 하나를 갖고 계셨네. 주인 없이 수십 년째 비어 있어 있던 그곳에 몇 달 전 기별을 보내 사람이 지낼 수 있도록 관리를 부탁했네. 조반니를 그곳에 은거하게 할 생각이네.”
로미오는 아리아 섬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을 뿐 그곳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다. 단지 카를로타의 말을 통해 볕 좋은 넓은 바다를 가진 휴양지 섬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낮이면 한가로이 선박을 타며 쪽빛 바다 위를 떠돌고 저녁이 되면 석양을 보며 포도주를 마시고 밤이 되면 섬에서 가장 규모가 큰 극단으로 가 연극을 구경하는 것이다. 그곳에서의 삶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평화롭게 지속될 것이다.
어쩌면 조반니는 그곳에서 여생을 끝마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예기치 않은 행운이 찾아들어 씻은 듯이 광증이 나으면 다시 해부학을 공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평생을 의학에 몸 바치고자 했던 그였으니 때가 되면 시체를 구하러 나설 것이다. 휴양지 섬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니 아리아 섬을 떠나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전처럼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외부와의 접촉을 금하고 별장 안에서만 지내게 할 것이네. 그는 이곳에서 죽었으니 아리아 섬이라고 다를 것은 없을 걸세. 조반니 스포르차라는 이름은 먼 외국 땅에서조차 쓸 수 없는 이름이네. 그의 진짜 이름 역시 마찬가지이지.”
“……선생님께서 이곳을 떠나시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럴 것이네. 다시 돌아온다면 그에게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주어야 하겠지만 쉽지 않을 걸세. 설사 준다 하더라도 자신이 교수형 당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들킬 위험을 무릅쓰며 평생을 살아야 할 테니 이곳은 위험하네. 만일 그가 간절히 원한다면 아리아 섬에서 멀지 않은 발렌차 왕국으로 가 그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게 할 걸세.”
“그렇다면 내일 아침에 즉시 떠나시는 겁니까?”
“그렇다네. 말하자면 오늘이 조반니가 루바노에서 마지막으로 보내는 날인 것이네. 영원히 고국을 떠나 살아야 하지만 조반니는 그런 감상에 젖지 않을 것이야. 이곳을 떠나게 되는 것에 별다른 미련은 없을 걸세.”
카를로타는 로미오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봤다. 그러다가 물었다.
“귀관은 조반니의 재판에 참석하였는가?”
로미오는 줄곧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해도 카를로타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눈을 보고 있다고 믿으며 대답했다.
“예. 재판정에 들른 후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어떤 판결이 내려졌는가?”
“선생님께서는 교수형을 언도받으셨습니다. 선생님의 해부학서는 폐기 처분될 예정입니다. 철학서와 수학 교본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서로 지정된 것과 다름없어 서적상들이 선생님의 저서를 취급할 경우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카를로타는 로미오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해서 짧게나마 침묵하며 그를 기다렸다. 그는 고민에 잠긴 것처럼 보였는데 해야 할 말을 정하지 못한 것은 아닌 듯했다. 마음속으로 정한 할 말을 입 밖에 꺼내어 말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의 내밀한 마음을 조용히 추측한 끝에야 묻고자 하는 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조반니가 이곳을 떠나는 것에 이견이 있는가?”
고양이 한 마리가 로미오의 발치로 다가왔다. 점박이 무늬를 가진 그 고양이는 로미오의 주위를 한 바퀴 걷더니 로미오를 올려다보며 울었다.
“……아닙니다.”
로미오가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자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지며 손마디가 하얘졌다.
“저는 선생님께서 이곳을 떠나시는 것에 대해 그 어떤 판단도 내리고자 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분을 곁에 둠으로써 수도 없이 되새길 고통의 크기가 너무도 크기에 그분이 여기에 머물러 계시기를 바랄 수 없는 입장입니다.”
로미오의 두 배에 달하는 나이를 가진 카를로타였다. 차분히 로미오의 말을 들은 그녀는 로미오가 이어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침묵하자 그에게 말할 기회와 여유를 주기 위해 기다렸다. 하지만 로미오는 무언가 말하기 위해 벌리고 있던 입술을 도로 닫았다.
달 밝은 밤, 뒤뜰에 마주 선 두 사람은 약속한 것처럼 잠시 침묵했다. 기다려 주어도 로미오가 입을 열지 않자 카를로타는 로미오의 얼굴을 오랫동안 지켜보다가 말했다.
“귀관의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그 혼란은 무엇인가?”
로미오는 턱 근육이 도드라질 정도로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더는 꽉 쥘 수 없을 만큼 손에 힘을 줘 지팡이 손잡이를 잡았다가 뗐다.
“무엇이 귀관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가?”
카를로타는 선뜻 말하지 못하는 로미오를 대신해 묻고 있었다. 스스로의 감정이 명확하다면 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느냐고.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했고 내일 아침 조반니가 이곳을 떠날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다면 그만 물러가면 되지 않느냐고. 왜 여전히 이곳에 서서 하고픈 이야기가 있는 이처럼 말을 아끼고 있느냐고.
“…….”
로미오는 숨이 가슴에 걸린 듯한 괴로움을 애써 억누르며 입을 뗐다.
“……일전에 각하께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저는 선생님과의 사이에서 큰 신의를 잃는 일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그분을 볼 때마다 제가 겪은 고통스러운 일을 떠올리며 그분을 혐오스럽게 느끼기까지 합니다. 선생님께선 평범한 이들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법을 잊으신 것처럼 제게 거침없는 행동을 일삼으셨습니다. 겉으로는 아닌 체하며 저를 속이셨고 버젓이 얼굴을 마주 보며 속임수로 저를 농락하셨습니다.”
로미오는 통령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계속 말했다.
“제 곁에는 많은 이들이 있고 저는 어떻게든 다시 삶을 살아 나가겠으나 선생님에 대한 분노만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저지르셨던 일을 평생 저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하며 상상 속에서나마 선생님께 원망을 쏟아 낼 것입니다.”
로미오의 목소리에는 조반니를 향한 짙은 경멸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제게 마음의 안식을 가져다주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저를 더 고립시켜 끔찍한 감정만을 되새기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시간이 흘러 제 마음 안의 고통이 서서히 사그라들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저 자신을 위해서라도 선생님을 용서하여야만 한다는 판단이 듭니다. 선생님께서 이대로 떠나시는 것은 해결법이 될 수 없기에 그분을 붙잡아야 하지만…… 거듭 생각을 해 보면 제게 그분을 용서할 용기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하셨던 말 중에 거짓말이 너무나 많아 이제 더는 그분의 말씀을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끝끝내 또 그분에게서 속죄의 말을 듣고 용서하려 한다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집니다.”
로미오는 다시 한번 굳게 지팡이 손잡이를 쥐었다.
“한때 저는 선생님께서 죽기를 바랐던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 살해 의지를 느낄 만큼 그분을 증오해 밤새 칼을 휘두르기도 했습니다. 불같던 마음은 이제 온전한 형태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타들어 가 재 가루로 남았습니다. 심장이 검게 그을려 전과 같은 분노를 더는 느낄 수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이곳을 떠나고 나시면 이전의 삶을 되찾으리라고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저는 지금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견딜 수 없는 혼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를 괴롭게 하는 여러 것들 중 가장 두려운 것은…….”
카를로타는 로미오의 목소리에서 그가 숨겨 오던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느꼈다. 쉽게 정의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선생님께서 제게 보여 주셨던 마음이 진심일 것이라는 의심입니다. 선생님의 마음 한 자락, 그 끄트머리가 미약하게나마 진심이라면…… 그렇다면…….”
로미오는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에 빠졌다.
조반니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이곳에 머물길 바란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조반니가 스스로 그의 입으로 그 말을 했을 때 자신은 그 마음을 부정하며 반박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추악한 호기심이라고 일갈하며 그가 내뱉은 말을 부인했다. 이제 와 다시 조반니의 마음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이 비참할 정도로 미련하게 느껴져 고통스러웠다. 왜 무시해 버려도 좋을 그의 마음을 이제 와 되돌아보는 것인가.
조반니가 자신에게 저지른 짓을 떠올려 보면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큰 비극일진대.
“조반니가 귀관을 흠모한다고 말하던가.”
카를로타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듯 물었다. 그녀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로미오였지만 크게 놀라지 않았다. 조반니와 통령은 오랫동안 둘만이 아는 비밀을 나눠 가져 온 사이였다. 조반니가 하나하나 다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도 통령처럼 비범한 자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조반니는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것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네. 볕 좋은 봄날,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에서는 아름다움을 찾지 못하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자유분방함 때문인지 아름다운 대상에 한해 지대한 관심을 보여 왔네. 상대가 누가 됐든 아름답기만 하면 관심을 두고 지켜보며 때로는 무례한 호기심까지 내비치곤 했네. 세상에 푸른 귀와 붉은 귀를 가진 두 종류의 인간이 있고 대부분의 인간이 자신과 다른 귀를 가진 자를 사랑한다고 할 때 조반니는 상대가 가진 귀의 색깔을 염두에 두지 않네.”
카를로타는 어두운 뜰에 서 있음에도 새파랗게 빛나는 로미오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를 처음 봤던 순간을 기억했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던 젊고 아름다운 장교는 이제 군복을 입지 않지만 여전히 그때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푸른 귀와 붉은 귀의 인간을 모두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네. 말하자면 귀의 색깔은 손쉽게 무시해 버리고 그저 상대의 아름다움 자체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지. 조반니가 누구를 마음에 두었든 그것은 그가 자유롭게 선택할 문제이니 관여할 생각 없으나 조반니가 여태껏 보여 줬던 모습을 생각해 보건대 그가 귀관에게 품고 있는 마음은 조금 다른 듯하네.”
로미오는 카를로타가 한 말이 조반니가 했던 말과 겹쳐진다고 생각했다. 오래전에 그도 자신에게 그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조반니가 품고 있는 마음이 귀관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조반니와 주고받던 편지에서 그 사실을 느꼈네.”
밤바람이 한차례 뜰을 휩쓸고 지나갔다. 잡초가 흔들리는 소리가 넓은 뜰 안에 갇혔다.
로미오는 귓가를 스치는 밤바람 소리를 들으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 죄를 자백할 것을 강요한 것은 저입니다. 자백하지 않으면 제가 직접 고발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고 사형을 언도받은 것은 그 죄에 대한 죗값이니 가엾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사형을 면한 것이 되었으나 그분은 지금껏 쌓아 왔던 업적과 성과를 모두 잃었습니다. 스포르차 선생이 아닌 살인마라는 불명예를 안고 돌팔매질과 같은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억울하게 죽임당한 자들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일평생 남의 존경을 받으며 살아오신 선생님께 가해진 창날 같은 날카로운 비난의 말들과 내일이면 사라질 그분의 존재는 형벌이라면 형벌일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선생님께 받았던 몇 가지 도움을 떠올려 보면 저는 이 이상 그분의 단죄를 주장할 처지가 못 됩니다.”
로미오는 피에트로를 생각해 냈다. 마음속으로 그의 얼굴을 생각하려고 했지만 떠오른 얼굴은 열두 살 남짓 된 어린 피에트로였다. 자신은 그 무렵에 피에트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제게 형제의 복수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분이 투옥되신 관계로 저 하나의 공적처럼 이야기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선생님께서 해내신 일입니다. 제가 선생님에게 깊은 증오심을 느끼는 것과는 무관하게 그분은 제게 과분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단테의 12인의 와해를 이끌 유일한 방법을 제게 알려 주신 겁니다. 그분은 또 제 형제의…….”
조반니가 피에트로의 시신을 바꿔치기해 주었다고 말하려던 로미오는 입을 다물었다. 이 발언이 적절한가를 따지는데 카를로타가 먼저 말했다.
“귀관의 형제를 땅에 묻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
로미오의 눈 속에 놀란 빛이 어리자 카를로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모두 알고 있네.”
카를로타는 그 점을 문제 삼을 생각이 없었기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미오는 오히려 그런 그녀의 반응 때문에 피에트로를 땅에 묻었다는 사실이 남들에게 발설할 수 없는 비밀임을 한 번 더 실감했다. 조반니와 자신만이 알고 있다고 믿어 왔으나 이제는 세 사람의 비밀이 된 것이다.
마음을 가다듬은 로미오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죄의 무게를 따지기 전에 선생님께서 치르신 대가와 그분께서 제게 주신 도움을 하나씩 짚어 보며 이 혼란한 마음에 대한 답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저는 선생님을 용서할 수 없고 그분께선 평생토록 그 어떤 방법으로도 제게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기에 저는 선생님과 너무나 많은 일을 함께하였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제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길 바란다면 선생님을 떠나보내고 제 안의 분노를 성급히 종식시키기보다는 언제든 그분으로부터 대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놓는 것이 더 현명할 것입니다. 설사 제가 선생님의 참회를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 해도 말입니다.”
“용서하려는 마음이 확고하지 않으나 그러고자 하는 것인가?”
“……예. 먼 훗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용서하고자 뜻을 굳히고 마음의 고통을 몰아내는 것에 전념할 순 없겠으나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용서를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태로 큰 고통을 겪고 있기에 차라리 용서하는 쪽을 택하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선생님께서 이곳을 떠나시면 제게는 한 가지 방법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뒤늦게 그분의 뉘우침 어린 말을 듣고자 해도 제게 그 말을 할 상대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용서하는 것이 영원토록 불가능한 일이 됩니다.”
카를로타는 로미오의 목소리에서 묻어 나오는 괴로움을 눈치챘다. 눈빛 속에도 아픔이 스며 있었다.
“선생님께서 제게 진심을 내보이셨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씀하실 때의 그분의 솔직한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선생님께서 숨김없이 모든 것을 실토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해 무시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분의 마음속에도 고통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그분을 이해하려 한 이들이 많았는데도 결국은 이해받지 못하셨으니 말입니다. 그 누구의 손도 잡지 못하게 만든 것은 선생님 자신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그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난 일은 그분의 잘못만은 아닐 겁니다.”
말을 하고 있는 이 순간에조차 로미오는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뼈를 깎아 내는 고통이었다. 조반니를 용서하고자 애쓰는 지금 그는 스스로의 마음을 고요히 난도질하고 있었다.
“저는 선생님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그 전쟁이 그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미련하게도 그렇게 되길 원하고 있습니다. 긴 세월을 괴물로 살아오신 그분의 마음에 부디 안식이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로미오는 숨을 삼켰다.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고통도 함께 삼켰다.
“선생님께서 사형을 받으실 거라고 믿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죽어 없어지면 그것을 대가로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으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진심으로 바라지 않으며 끝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 마음을 뒤덮은 분노 뒤에 감춰져 있던 본심일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을 증오하지만 그분이 죽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 혹여나 선생님께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면…….”
로미오는 눈을 감고 한 차례 마음을 다스렸다. 그런 뒤에 다시금 말을 이었다.
“가장 앞장서서 그분의 죽음을 반대할 것이라는 그 마음이…… 그것이야말로 진실일 겁니다.”
로미오는 재판정에서 조반니가 자신을 향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의 그 외침이 귓가에 맴돌았다.
“제 마음의 상처는 선생님께서 죽어 없어져도 사라지지 않을 테니 그분이 영영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오히려 그렇게 된다면 저는 버티기 힘든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생에 다시 오지 않을 치욕스러운 일을 겪었으나 저는 살아 있으며 산 자는 무엇이든 용서할 수 있는 법이 아닙니까.”
“살고 죽는 문제가 살아 있는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난제이자 고뇌라면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은 삶을 삼킬 정도로 중대한 문제가 아니지. 귀관의 말을 이해하네.”
“선생님을 다시 전처럼 신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언제든 다시 그분께 비난을 쏟아 내고 싶어질 것이고 그분이 저지른 짓을 떠올리며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선생님께서는 네 명을 살해하셨습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람을 무참히 살해한 살인자가 바로 선생님이십니다. 그런 분께 기회를 주고자 하는 저는 어리석은 인간일 겁니다. 그러나 그분을 용서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 누구도 아닌 저를 구제할 것이기에 마음을 정했습니다.”
“조반니를 향한 믿음을 지키는 것은 누이인 내게만 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네. 그가 두렵지는 않은가?”
“두렵습니다. 교화될 수 없는 본능을 가지셨기에 두렵고 제가 오늘의 이 결정을 뼈아프게 후회할 날이 올 것 같아 두렵습니다. 하지만 더는 결정을 번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일 이후로 두 번 다시 선생님과 그 어떤 말도 나눌 수 없게 된다면 저는 남은 평생을 용서할 상대를 잃은 채 살아가야 할 겁니다. 선생님께 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주저되기도 하고 저의 진실한 마음에 기대는 것이 약점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늘이 지나고 선생님과 다시 마주했을 때 그분께 기만당하거나 속지 않기 위해 제 마음을 숨기려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수할 것입니다.”
“귀관은 조반니를 향해 연민을 느끼는가? 그를 동정하나?”
“모르겠습니다. 저 스스로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으나… 어쩌면 그럴 것입니다. 마음의 괴로움을 덜기 위해 선생님을 향한 다른 모든 감정을 불살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그분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광증을 앓고 있는 데다 가진 모든 것을 잃었으며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차가운 마음을 갖고 태어난 그분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구태여 그분이 저지른 죄로부터 그분의 존재를 멀리 떨어뜨려 놓고 보고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습게도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가 무능하여 선생님의 광증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오랫동안 환청을 호소하셨고 존재하지도 않는 미행자를 쫓아 비 오는 밤거리를 내달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분의 병만큼은 결코 그분의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온전한 정신을 갖고도 선생님을 도와드리지 못한 제게 잘못이 있습니다.”
로미오는 무겁게 고개를 떨궜다.
“선생님께서는 여러 날에 걸쳐 징후를 보여 왔습니다. 옷차림과 머리 모양이 기괴해지기 시작했던 것이 신호였을 겁니다. 다른 누구보다 선생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데다 하숙집의 화재로 한때 그분의 저택에 들어가 살았던 저입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그분이 밤늦게 돌아오시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기만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지르신 두 번째 살인은 그분의 광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제가 주의를 기울였다면 광증의 악화를 늦출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분을 회복의 길로 이끌수도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주어졌음에도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실에 대한 죄책감이 조반니를 용서하고자 하는 귀관의 뜻에 영향을 미쳤는가?”
“그렇습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카를로타는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 그자의 배신행위에 대한 용납을 의미하진 않네. 사죄를 받아 주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다르니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이루려고 하지 말게나. 명백히 용서하여도 마음의 안식은 그보다 늦게 찾아올 수 있는 법일세. 조반니를 동정하는 것을 자책할 필요도 없네. 그가 앓는 광증에 책임을 느낄 필요 또한 없네. 조반니에게 복수심이 아니라 동정을 느끼는 것은 귀관이 나약한 자이기 때문이 아니며 언젠가 때가 되면 귀관의 그 인간다운 마음이 어떤 형태로든 해답을 줄 것이네.”
카를로타는 조급하지 않게,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결정을 요구하듯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묻겠네. 조반니가 떠나지 않기를 원하는가?”
뜰 안에 갇힌 밤바람이 한차례 더 불었다. 카를로타의 드레스 자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예.”
짧은 대답이었으나 그 대답을 하는 로미오는 스스로의 결단을 감내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카를로타는 로미오가 가진 고뇌의 깊이를 속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우물처럼 깊고 쓸쓸했다. 지난번에 그가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던 때에 그에게선 처절함이 엿보였지만 이제는 메마르고 어둑한 적막감이 엿보였다.
다른 것도 보였다.
그 자신이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조금쯤 깨달았으리라는 것.
“비로소 각하께 답을 드리고 나서야 알 것 같습니다. 만약 또다시 이런 일을 겪는다면 그때는 저 자신을 잊을 만큼 격정적인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다시 배신당한다면 그때는 고통을 삼키고 억누르기보다 다른 이에게 말로써 그 고통을 이야기하고 그 누구도 아닌 저를 위하여 상대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을 것입니다.”
로미오는 머리를 깊이 숙여 자신의 긴 이야기를 들어준 카를로타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밤바람에 떠밀린 구름이 달을 가리자 뜰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구름이 전부 걷히며 서로의 얼굴이 보일 때쯤이 돼서야 로미오가 말했다.
“오늘 재판정에서 본 선생님께서는 광증을 일시적으로 이겨 내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각하께서 광증의 주기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떠올려 보면 선생님께선 언젠가 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환청을 들으실 겁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언제든지 다시 망상에 사로잡혀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귀관이라면 조반니가 스스로의 병을 인정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네. 누이인 내 말은 듣지 않으나 귀관은 다를 것이야. 조반니가 병을 인정한다면 다시 광증의 주기가 찾아와도 전과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네. 살인에 관한 문제 역시 염려 말게. 조반니가 머무는 곳에 사람을 붙일 것이네. 감시당한다고 해도 조반니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을 걸세. 그가 불만을 토로하여도 들어주지 않을 걸세.”
“혹 만약 제가 오늘의 이 결정을 내린 것은 후회하게 된다면…… 이런 결정을 내렸음에도 선생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 괴로움이 더 짙어지면 각하께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게. 얼마든지 말일세.”
카를로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반니를 루바노에 남게 하려면 그가 지낼 곳을 마련해야 하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적당하되 조반니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머무는 곳이어야 하네. 살인자가 숨어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평화로운 곳이라면 더 좋을 걸세. 계절의 변화가 조반니에게 미칠 영향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나 바치 같은 도시보다는 숲과 들이 펼쳐진 곳이 더 나을 것이네. 행여나 마을을 걷고 있는 외지인을 발견하더라도 배척하며 의심하기보다는 낯선 자를 대하는 정도의 관심만 보이는 자들이 사는 곳이라면 좋을 것이네.”
지난 몇 달에 걸쳐 아리아 섬을 알아보고 자리를 마련했던 카를로타였기 때문에 당장 이 자리에서 그런 곳을 생각해 내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로미오는 자신의 마음에 떠오른 한 장소를 머릿속에 그렸다. 스스로 그곳을 생각해 냈다는 것에 놀랐지만 곧이어 그곳보다 더 적절한 곳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조반니가 루바노에 남는 이상 어디를 가든 위험은 늘 따를 테니 적어도 통령이 조반니를 쉽게 감시할 수 있는 곳이 좋을 것이다. 자신이 그곳의 지리와 환경을 조반니보다 더 잘 알아 필요할 때 그를 즉각 저지하거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런 장소는 한 군데밖에 없었다.
“선생님께서 은거할 만한 곳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만나 본 적 있는 자들이 있으나 그들은 밀집된 좁은 땅에 살지 않습니다. 서로가 가족처럼 친밀하지만 집과 집 사이의 거리가 먼 데다 날이 저물면 빛 없이는 길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사위가 캄캄해지는 곳입니다. 밤이면 하늘의 별을 볼 수 있고 해가 진 저녁이면 노을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은 울창한 나무숲의 흔들림을 들을 수 있고 가을이면 옥수수가 자라는 황금빛 땅을 볼 수 있습니다. 겨울에는 눈 때문에 몇 날 며칠을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기도 하는 곳입니다.”
“그곳이 어디인가?”
“제 고향인 네베입니다.”
로미오는 머릿속으로 네베의 풍경을 면밀히 그린 뒤 계속 말했다.
“제가 살던 마을에는 버려진 농가 같은 별장이 두어 군데 있습니다. 본래 농기구를 모아 두는 헛간으로 사용하는 곳인데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이 그런 집을 하나씩 갖고 계셨습니다. 어린 시절과 비교해 보면 마을을 떠난 자들이 많아 그런 집들도 주인을 잃고 버려졌을지 모릅니다. 마을 사람들은 저를 알고 있으니 제 이름으로 그중 한 곳을 쓰고자 한다면 어렵지 않게 허락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마을의 뒤편에 난 숲은 다른 마을로 이어지는 길로 쓰이는데 숲 깊숙이 들어가면 충분히 은거가 가능합니다.”
네베에 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은 카를로타는 로미오의 얼굴을 찬찬히 보다가 물었다.
“조반니가 그곳에 머문다면 귀관은 때때로 그곳으로 그를 만나러 갈 것인가?”
“아닙니다. 저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뜻밖의 대답에 카를로타가 의문을 담아 되물었다.
“이곳에서의 삶을 모두 내버려 두고 말인가?”
“저의 어린 동생은 조각과 그림을 공부하기 위해 곧 제 곁을 떠나게 됩니다. 제가 바치에 머물러야 하는 유일한 이유인 그 아이가 저를 떠난 이상 제게는 반드시 이곳에서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그 아이를 가까이 두고 지켜볼 수 없겠으나 그 아이는 건강하고 명랑합니다. 지금보다 나이를 먹어 스스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멋진 사내아이로 자란다면 비록 곁에서 지켜보지 못하더라도 기꺼이 기뻐할 겁니다.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 오래전에 포기했던 본래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본래의 삶이란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장교로 임관하지 않았더라면 선택했을 삶입니다. 이런 순간에 제 고향을 떠올린 것을 보면 이것 역시 어떤 의미로 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한때 고향을 버리고 떠나왔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그 죄책감을 씻으려는 선택인지도 모릅니다.”
고심하여 본 적 없는 문제를 손쉽게 결정 내린 것처럼 보였지만 로미오는 스스로가 이곳의 생활을 모두 버리고 네베로 돌아가는 것에 별다른 저항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올 때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리라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자신이 내놓은 대답이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예견된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선생님께서는 네베가 아니라 다른 곳에 머무르실 수도 있을 겁니다. 제가 사는 마을에서 반나절을 걸어가면 다른 이웃 마을이 나옵니다. 그 이웃 마을 외에도 근방에 작은 마을이 여럿 있는 데다 마을 곳곳에는 허름한 농가들이 많습니다. 낯선 외지인이 마을에 들어온 낌새를 눈치채도 어울릴 것을 강요하는 자들은 없을 겁니다. 네베인들은 은혜를 입은 자에겐 과분한 친절을 베푸나 낯선 상대와는 쉬이 도움을 주고받지 않는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어디에 사시든 적어도 달에 한 번은 그분을 뵈러 갈 수 있을 겁니다. 광증의 경과를 지켜보며 각하께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밤 네베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도록 하겠네. 머물 곳이 준비돼 있지 않다 하더라도 우선 귀관의 고향 마을 근방에 조반니가 머물 곳을 정해 보겠네. 나 역시 조반니를 멀리 보내고 싶지 않았으니 잘된 일일세. 아리아 섬은 좋은 곳이지만 그곳으로 보낸다면 조반니를 감시하기가 힘들어지네. 별장 관리인과 편지를 주고받는 것만 해도 한 달이 걸리니 그곳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선 늘 뒤늦게 보고받게 되는 것이지. 먼 시골 마을이라 하더라도 루바노 안이고 귀관이 그의 곁에 머문다면 상태를 살펴보는 것도 수월해질 걸세.”
“다만 큰 위험이 따를 것입니다. 어쨌든 네베에는 선생님의 얼굴을 아는 자들이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마을 사람들 중 누군가가 선생님을 알아본 상황에서 그분이 바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선생님께서는 도망자 신세가 될 것입니다. 마을에 떠도는 소문에 늘 귀를 기울이며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겠으나 선생님께선 철저히 숨어 사셔야만 할 겁니다.”
“내가 보낸 자들이 조반니를 감시하며 밤낮없이 집 주변을 살필 것이네. 만일 또다시 조반니가 광증에 미쳐 날뛴다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불사하여 그 누구도 해할 수 없게 할 것이네. 손발을 묶고 집 안에 가두어 짐승처럼 사육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일세. 자유를 잃고 시골 마을에 묶여 사는 것은 조반니가 감내하여야 할 일이니 그에게 잘 당부하겠네. 응당 그래야 하지.”
카를로타는 당장 오늘 밤부터 준비해야 할 일이 생긴 탓에 긴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설핏 혼잣말처럼 들리는 말을 했다.
“더는 귀관에게 그 어떤 것도 일임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렇게 또 내가 하여야 할 일을 일임하게 되었군.”
카를로타의 발치에 앉은 고양이가 앞발을 들어 카를로타의 드레스 자락을 긁자 멀리 서 있던 주세페가 다가왔다. 카를로타는 그에게 손을 들어 보이더니 고양이가 드레스의 올을 뜯도록 내버려 두고 로미오에게 말했다.
“귀관의 죽은 형제를 고향으로 함께 데려가야지 않겠는가? 네베로 가려면 바치의 성문을 지나야 하지만 이런 시기에 관을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네. 그러니 내 이름을 빌려주겠네.”
생각지 못한 은혜에 로미오가 보기 드물게도 급히 물었다.
“각하께서 친히 말씀이십니까?”
“그러하네. 단, 시신의 부패를 우려해 관은 땅속에서 꺼낸 그 즉시 마차에 실어 출발해야 하며 네베까지 가는 도중에 멈출 수 없네. 말을 탄 파발꾼이 쉬지 않고 네베로 향하여도 하루 만에 갈 수 없는 먼 거리이니 관을 실은 짐마차는 그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네. 묘공들도 같이 보낼 터이니 그들이 네베에 도착하기까지 시일이 걸릴 걸세. 도착하면 귀관의 고향 마을 내의 묘지에 묻는 것까지 지시하겠네.”
피에트로의 무덤을 떠올리긴 했으나 이곳에 두고 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로미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고향 땅의 묘지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묻혀 있었다. 그곳에 피에트로를 묻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다시 고통을 느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다른 마음이 들었다.
피에트로가 네베로 돌아가 그의 이름이 새겨진 묘석 아래에 잠들 것이라고 생각하자 마음속에 엉켜 있던 끈 하나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피에트로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해 여태 내버려 두었던 복잡한 매듭이었다.
“귀관의 형제가 묘지에 어떤 이름으로 잠들어 있는지 알고 있네. 관을 옮기는 것은 언제로 하면 되겠는가?”
“선생님께서 내일 아침 네베로 떠나신다면 저는 그다음 날 떠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틀 뒤 아침 바치 묘지로 와 묘공들에게 묘를 확인시켜 주게. 확인만 해 준다면 그 자리에서 즉시 마차에 실을 걸세.”
“사정을 헤아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통령 각하.”
로미오가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표정을 드러내자 카를로타는 조반니를 바라볼 때 가끔 내비치던 눈빛으로 로미오를 봤다.
“오늘 이곳에서 내린 결정이 귀관의 마음속에 자리한 번뇌를 몰아낼 수 있기를 바라겠네.”
카를로타는 로미오의 결정에 대한 감사를 표하려는 것처럼 눈을 짧게 내렸다가 들어 보였다. 로미오는 비록 볼 수 없었으나 그것은 통령으로서가 아니라 조반니의 누이로서 건넨 인사였다.
“마지막으로 청할 것이 있습니다. 내일 선생님께서 네베로 떠나시기 전에 그분을 만나 한 가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묻고 난 후에 꼭 대답을 듣고자 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로미오가 카를로타에게 할 마지막 요청이었다. 예상대로 카를로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일 이른 아침, 형이 집행되기 전에 조반니를 감옥에서 빼내어 마차에 태울 걸세. 바치의 성벽을 빠져나간 뒤에 다른 마차로 옮겨 타야 하니 그때 조반니를 만나게. 그는 루바노 밖으로 보내질 거라고 믿고 있을 것이니 긴 설명이 필요할 걸세. 직접 그에게 귀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질문에 대한 답을 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