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각자에게 주어진 가장 값어치 있는 유품
카를로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로미오는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긴장이 풀리고 나자 뒤늦게 거실 한편에서 들려오는 엔초의 곤한 숨소리를 눈치챌 수 있었다.
“어린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방법이지만 몸에 무리는 없을 걸세.”
카를로타는 긴 의자에 누워 있는 엔초에게 시선을 줬다. 그라나 부인과 마찬가지로 엔초는 쓰러졌다기보단 편안하게 누운 자세로 잠들어 있었는데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안정적으로 들렸다. 엔초를 직접 안아 거기에 눕힌 체사레는 고개가 틀어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누운 자리를 살펴봐 주었다.
“아이가 몇 살인가?”
갑작스러운 통령의 등장에 정신이 얼떨했으나 로미오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난달에 아홉 살 생일을 맞았습니다.”
카를로타는 잠깐이었지만 조반니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조반니가 엔초의 나이였을 때 카를로타는 스물일곱 젊은이었다.
“이 늦은 밤에 귀관의 집을 찾은 이유는 그간의 모든 비밀을 설명하기 위함일세. 조반니. 그의 진짜 이름은 조반니 비스카르디이며 그는 내 형제일세.”
통령이 이런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이유와 편지를 전해 줬던 체사레가 조반니와 어떤 관계인지 전혀 추측하지 못하고 있던 로미오는 이번에야말로 아주 긴 침묵에 빠졌다. 의문투성이였던 머릿속에 누군가 표백제를 끼얹은 느낌이었다.
“…….”
카를로타의 목소리는 명료했지만 그녀가 한 말이 이해 가능한 언어로 머릿속에 들어와 박히지 않았다. 터무니없고 허황된 남의 공상을 듣는 기분이었다.
이것이 다 무슨 이야기인가? 조반니가 무어라고?
통령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루바노 사람이지만 어린 시절 이 나라를 떠나 살다 장성한 후에야 이곳으로 돌아왔네. 내 가문인 비스카르디 가문은 고위직 인사를 배출한 전력이 없는 평범한 가문일세.”
카를로타는 로미오의 표정을 지켜보다가 말을 끊었다. 로미오는 그답지 않다고 해도 될만큼 큰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의 심정을 헤아리려는 듯 적절한 여유를 둔 카를로타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내가 통령이 되고 많은 이들의 입에 우리 가문이 오르내렸지만 그들이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리 집안이 부유하기는 하나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는 평범한 의학자 집안이라는 것과 내게 형제가 하나 있다는 것이었네. 그러나 그 형제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자들은 없었네. 나는 조반니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는 내가 국정에 몸담기 시작한 후 몇 년이 지나서야 비스카르디가 아닌 스포르차라는 이름을 갖고 뒤늦게 루바노로 돌아왔네. 우리는 한 땅에 살고 있었지만 남처럼 지냈지. 사이가 나쁜 형제라서가 아니라네. 오히려 반대이지. 나는 줄곧 조반니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고 있었네. 귀관에 대한 이야기도 모두 편지로 전해 들었으며 제6군단의 부대에서 귀관을 처음으로 보았던 날 나는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네. 조반니가 미리 나를 찾아와 귀관의 퇴역을 막을 방도가 있다면 그렇게 해 달라고 청을 했기 때문일세.”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너무도 뜻밖이었기 때문에 로미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통령의 앞이라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기막힌 사실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귀관이 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면 조반니와 내가 남매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을 걸세. 우리의 사이를 의심해 본 적 없는 이들은 나와 조반니의 얼굴 생김새에서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하지만 우리가 가족이라는 것을 아는 자들은 어렵지 않게 우리의 얼굴에서 공통점을 찾는다네. 빛깔의 정도는 다르지만 나와 조반니는 금색 눈동자와 금색 머리칼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부모로부터 눈과 머리 색 외에도 큰 키와 풍채를 물려받았네. 나의 목소리에서 왜소하고 연약한 여인의 풍모는 느껴지지 않을 것이야. 그렇지 않은가?”
로미오가 충격에 빠져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등 뒤에 있던 주세페가 가만히 말했다.
“각하의 말씀에 대답을 하십시오.”
카를로타는 주세페에게 손을 들어 보이더니 말을 계속했다.
“조반니는 내게서 단테의 12인의 밀탐 임무를 지시받았네. 그는 나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이며 단테의 12인의 수뇌부로 침투해 그들의 자세한 행적을 내게 보고하는 일을 맡아 왔지. 귀관의 포섭도 이미 전부 알고 있었네. 포섭 과정에 대해서도 물론. 귀관을 믿을 만하다고 판단한 것은 조반니였어.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그가 전적으로 귀관을 믿었다는 뜻일세. 귀관이 어떤 자인지 조반니가 놀라우리만치 뚜렷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야.”
카를로타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로미오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뗐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앞으로 전달됐던 편지는 각하께서 보내신 것이었습니까?”
“그렇다네. 오래전에 조반니가 제6군단의 조사를 받았을 당시 그 편지 중 일부가 압수되었다고 들었네. 하지만 우리는 악보의 형태로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기 때문에 의심을 피해갈 수 있었다네. 조반니의 집에는 본래 그가 직접 작곡한 악보가 여러 장 보관되어 있으니 용이하게 위장을 한 것이지.”
카를로타는 사이를 두었다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암살 공모에 대해 전해 들었을 걸세. 조반니가 구금되어 있다는 소식 역시 알고 있을 것이야. 이 일을 이제 마무리 지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이렇게 귀관을 찾아오게 됐네. 3일 뒤 나는 루바노 전역에 깔려 있는 올빼미 무리를 소탕할 것이니 귀관이 내 눈과 손을 대신하여 그 일을 맡아 주게. 이 모든 이야기가 쉬이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일 테니 생각할 여유를 느긋이 주고 싶으나 시간이 많지 않네. 오늘 이 자리에서 모든 결정을 내려야 함이 옳아.”
상황 판단이 빠른 로미오였다. 여태 조반니가 스스로의 정체를 감쪽같이 숨겨 왔다는 사실과 그와 통령이 남매 사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여 인정한 그는 그 사실로부터 느끼는 혼란스러움을 재빨리 갈무리했다.
그리고 짧은 생각을 거듭한 끝에야 대답했다.
“……급작스러운 이야기에 마음이 혼란하여 즉시 답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외람되오나 저는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선생님과의 사이에서 여태껏 쌓아 온 신뢰가 무참히 깨지는 중대한 사건을 겪었기에 더는 그분을 믿지 못합니다. 제 뜻을 보태어 선생님과 협력하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어떤 형태로든 선생님과 긴밀히 연결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카를로타는 턱을 들며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떤 연유로 조반니에게 신뢰를 잃었는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제게 통령 각하와 제 조국인 루바노를 보위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저는 선생님에 대한 제 사사로운 감정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처음부터 제 능력 밖의 일에 개입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맹인인 제가 각하께서 시작하신 대업에 간섭하는 것은 주제넘은 행동이었습니다. 이번 암살 공모와 관련해 감히 말씀을 드리자면 혼인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우선 몸을 피하신 뒤에 선생님께서 구금에서 풀려나시는 대로 차후의 일을 도모하심이 어떨는지요. 각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는 이 일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비밀에 대한 발설은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오고 간 이야기는 제 입을 통해 봉해질 것입니다.”
카를로타는 지그시 로미오를 봤다. 달빛조차 들지 않는 컴컴한 집 안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린 것은 꽤 시간이 흐르고 난 후였다.
“귀관에게는 죽은 형제가 있지 않았던가? 그를 위해 올빼미가 된 것이 아니었나?”
로미오는 말을 아꼈다. 잊을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어느 샌가 잊고 있었다. 피에트로의 죽음이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 했음은 명백한 사실인데 조반니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그 사실을 마음의 무덤 속에 묻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피에트로의 죽음이 자신의 삶을 뒤흔들었듯 조반니가 저지른 짓도 자신의 삶을 뒤흔들었다.
얻은 것이라고는 허탈감과 상실감과 같은 뼈아픈 감정들밖에 없었다. 몸과 마음은 낡았으며 심장 속에는 무수히 많은 칼자국이 남았다.
“제 형제의 복수를 위해 입회를 결정했던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어린 동생과 함께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각하께서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 오신 것들이 저의 경솔한 선택으로 무너진다면 루바노의 안위가 위협당할 것입니다. 앞도 보지 못하는 저와 같은 맹인이 이번 일을 독단적으로 맡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무엇이 귀관의 마음을 돌아서게 한 것인가? 조반니에 대한 실망인가? 오로지 그것 하나?”
로미오가 대답하지 않자 카를로타는 조용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 몇 발자국 다가가 로미오의 앞에 섰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형제를 억울하게 잃은 귀관의 마음을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세.”
카를로타는 자신의 오른쪽 다리를 짚었다.
“내 오른쪽 다리에는 짐승의 이빨에 물린 흉터가 있다네. 조반니가 네 살이었을 무렵 숲으로 함께 산책을 갔다가 야생 여우를 만나 공격당한 자국이지. 수풀 속에서 뛰어나온 여우가 조반니에게 덤벼들어 그를 보호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인데 피부가 찢어져 뼈가 드러날 정도로 상처가 심각했네. 어린 조반니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도시에서 저명하다고 알려진 수십 명의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았네. 그들이 다리를 잘라 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상태가 위중해 비스카르디 집안사람들이 모두 모여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지. 그러나 조반니는 달랐네. 내가 내 방 침대에 앉아 상처를 처치받을 동안 그는 저택의 앞마당을 뛰어다니며 꽃을 발로 짓밟는 놀이를 했네. 자신을 대신해 여우에게 다리를 뜯긴 내 존재는 잊은 것처럼 천진난만하게 뛰어놀아 내 방 창문을 타고 조반니의 순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네. 나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깨달았네. 저 아이는 장차 그 누구의 통제도 통하지 않는 괴물로 자랄 것이라고.”
로미오는 말없이 카를로타의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에는 놀라움을 느꼈으나 서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녀도 조반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형제니 당연했다.
“눈앞에서 누이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고도 조반니가 겁을 먹기는커녕 걱정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나는 운이 좋아 다리를 잃지 않고 건강을 되찾았지만 조반니는 그날의 일에 대해 단 한 번도 내게 고마움을 표시한 적이 없었네. 어렵사리 몸을 회복해 처음으로 두 다리로 내 방을 걸어 나갔던 날 힘겹게 걷는 내 모습을 보고 조반니가 한 것이라고는 걸음걸이가 우스꽝스럽다며 웃음을 터뜨린 것이 전부였지. 조반니는 본래부터 그랬다네. 모든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비탄스러워하는 순간에조차 감정의 굴레에 갇히는 법이 없지. 슬픔, 연민, 동정, 죄책감. 조반니에게는 그런 감정을 느낄 능력이 존재하지 않네. 커 가는 동안 그보다 더한 모습을 숱하게 보여 온 까닭에 그것이 연극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네.”
카를로타는 자신의 다리에 남아 있는 상처를 천천히 매만졌다.
“조반니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어떤 사악한 존재가 그의 인간다운 감정을 모조리 잡아먹으며 조반니를 악한으로 만든 것은 아니네. 그는 날 때부터 그런 인간이었어. 그렇게 만들어져 태어난 것이네. 살면서 그를 만나게 될 모든 이들에게 끔찍할 정도로 냉담하고 잔인한 모습을 보여 신뢰를 깨트리고 실망시키고 기만하려 드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네. 조반니가 죽어야만 끝나는 문제야. 그는 본래 그렇게 태어났고 고칠 방법은 없으니 조반니가 이 땅에서 사라져야만 그의 인간답지 않은 차가운 심장도 사라지겠지.”
“……저는 선생님의 진실된 모습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분을 믿어 오다가 입에 담을 수 없는 일을 겪고 큰 절망을 맛보았습니다. 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분의 곁에 머무는 것은 제 몸과 마음에 보이지 않는 흉터를 남길 뿐입니다.”
카를로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반니가 귀관에게 저지른 잘못을 모두 알지 못하나 이해하네. 그는 내게도 셀 수 없이 많은 실망을 안겨다 줬지. 어떤 때에 조반니는 주인을 따르는 개처럼 내 말을 잘 듣는다네. 세상 모든 형제들이 그렇듯 피를 나눈 존재로서 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것일세. 그 옛날 어린 자신을 대신해 여우에게 다리를 물린 내게 그러했듯 그의 마음은 얄팍한 믿음의 껍데기에 둘러싸여 있다네. 누구에게든 진심을 주는 법이 없지. 절체절명의 순간에 조반니가 다른 모든 것들을 제치고 나를 위할 것이라는 확신은 하지 않네. 평생 남을 위하는 법을 모른 채 살아가야 할 그 아이가 고작 누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위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믿음일 것이야. 그 아이는 자신을 존재케 한 조물주와도 같은 부모에게도 냉담하기 이를 데 없었네.”
로미오는 조반니를 ‘그 아이’라고 부르는 카를로타의 말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더 이상 그 누구의 보호도 필요하지 않을 만큼 훌쩍 커 버린 조반니에게서 손을 잡고 함께 숲을 거닐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겹쳐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동생을 향한 누이의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반니가 미행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을 걸세. 그는 몇 해 전부터 이상한 광증에 시달려 왔는데 내가 그 증상을 처음으로 알아차린 것은 10여 년 전이었네. 특정한 주기 때마다 그 아이는 이상한 말을 해 왔지. 막연히 추측하기에 그것은 망상과 관련된 병이지만 원인은 알 수 없네. 조반니가 스스로 그런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탓에 병에 관해 알아내는 것이 어렵다네.”
로미오는 의혹 섞인 눈빛이 됐다.
“선생님께서는 미행자의 모습을 실제로 목격하신 적이 있습니다. 비록 미행자에 대한 의심의 정도가 과하긴 하나 미행하는 자는 정말로 존재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적어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감시한다고 여기는 것이 광증의 첫 번째 증상이네. 존재하지 않는 가짜의 인물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조반니는 몇 해 전에 시장의 잡화상들 중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 드는 것 같다고 내게 호소한 적이 있네. 은밀히 사람을 보내 조사하게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네. 착각일 것이라고 알려 줬을 때 조반니는 자신에게 앙갚음을 하려는 자가 있다며 집요하게 굴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 일을 잊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 망상은 대개 우연찮게 들려온 소리나 기척으로 시작된다네. 돌이켜 보면 열두 살 무렵에도 그런 행동을 보인 적이 있었네.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으며 누군가와 대화하듯 혼잣말을 하고 집 주위에 누군가 숨어 있다며 밤늦게 양초를 들고 나가 집 주위를 둘러보고 다녔지. 하지만 지금처럼 증세가 위중했던 적은 없었네. 그때의 조반니는 단지 의심을 하는 정도에 그쳤으나 이제는 모든 것을 진실처럼 여기고 있는 모양이야.”
“미행에 관한 의심이 전부 선생님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말씀이십니까?”
“조반니와 나는 남들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을 갖고 있는 사이네. 그의 주변부의 인물들을 의심하고 경계하는 것은 내가 지난 십 년간 해 온 일이지. 정말로 미행하는 자가 있다면 왜 내게 발각되지 않았겠나? 나의 5인의 보좌관들조차 조반니가 주장하는 그 미행자의 정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네.”
“각하께서 지금 제게 하고 계시는 이 이야기를 선생님께 해 드린다면 선생님도 착각에서 깨어나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이 망상임을 선생님께 이야기해 드린 적이 있으십니까? 광증이 심하기는 하나 선생님께서는 분별력을 갖고 계십니다. 설득한다면 자신의 논리가 잘못됐음을 깨달으실 겁니다.”
“이것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네. 아주 오래전에. 하지만 조반니는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네. 대신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이냐고 반박하더군. 내게 믿을 마음이 없다면 다시는 미행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겠다고 선을 그어 버렸지.”
카를로타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로미오는 그녀가 자조하고 있다고 느꼈다.
“광증을 우려해 가까이서 조반니를 지켜봐 왔으나 내가 안일했네.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내버려 둔 것은 조반니가 이 과업을 완성시켜 줘야 하기 때문이었네. 내 이 어리석음을 귀관의 앞에서 인정하는 바일세. 내 욕심이 이런 결과를 불러왔어. 스스로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미쳐 가는 조반니를 내버려 둔 것은 내 잘못일세.”
“선생님께서는 살해 혐의를 받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조사 결과와 무관하게 진실입니다. 선생님께서 일전에 있었던 무명의 조각가 살인 사건이 자신의 소행이 맞다고 제게 직접 고백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번 살인 사건의 범인도 선생님이십니다.”
“알고 있네. 나 역시 조반니를 의심하지 않아. 그는 살인자가 맞을 걸세.”
어렵지 않게 대답을 내놓은 것처럼 보였지만 카를로타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것 역시 내 안일함에서 비롯된 결과일세. 나는 곁에서 지켜본다는 명목으로 조반니를 내버려 두었지만 실상은 그에게 살인까지 허용한 것이야. 그가 죄 없는 나의 민중들을 살해하도록 허락했고 그 이면에는 내 그릇된 욕심이 자리하고 있네. 조반니가 완수해 주어야 하는 과업 때문에 그의 비인간적인 이기심으로 인해 벌어질 일들을 눈감아 주었지.”
“단테의 12인을 일소하는 것은 루바노를 위한 일입니다. 각하의 사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닐뿐더러 선생님께서는 지시를 받고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로미오는 목소리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조반니를 옹호하는 자라면 그것이 통령이라고 할지라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각하께서는 그간 선생님으로부터 믿음이 깨지는 일을 겪으신 데다 위기의 순간에 선생님께서 형제로서의 의리를 저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선생님께서 살인자라는 사실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십니까? 본래 인간답지 않은 마음을 갖고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분의 손에 죄 없는 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망상을 이유로 이해해 주기에는 죄의 무게가 너무도 무겁습니다. 각하께서는 어떻게 선생님께 흔들림 없는 신의를 가지실 수 있는 겁니까? 단지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그분을 감싸시는 겁니까?”
“나는 조반니가 무슨 짓을 저지르든 그를 비난하지 않을 걸세. 그가 수십 명의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네. 그는 이 세상 유일한 내 형제이며 우리 가문의 마지막 사람일세. 나는 조반니가 태어나던 순간을 모두 지켜봤네. 그 아이의 존재가 이 세상에 닻을 내렸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데 어떻게 저버릴 수 있겠는가. 형제라는 것은 쓸모없어진다 하여 낡은 물건처럼 치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 귀관에게도 동생이 있지 않나.”
카를로타는 어둠 속에서 어렴풋하게 보이는 엔초의 얼굴을 바라봤다.
“형제란 그런 것이지. 끊어 내려고 해도 끊어 낼 수 없는 것. 귀관의 말속에 답이 있네. 형제이기에 끝끝내 신의를 버릴 수 없는 것이야.”
당연한 대답을 요구한 것이 된 로미오는 말을 삼켰다. 통령의 대답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말문이 막혔다.
“조반니는 우리 비스카르디 집안의 마지막 유품과도 같지.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내게 남기고 간 것들 중 가장 값어치 있는 유품이네. 귀관은 어떠한가? 저 아이가 먼 훗날 죄를 저지른다면 버릴 수 있겠는가? 다른 이들이 모두 손가락질하고 돌을 던질 때 귀관도 그들의 틈에 섞여 같은 목소리를 내겠는가? 핏줄이지만 죄를 지었기에 응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앞장설 수 있겠나?”
로미오는 고개를 숙였다.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만약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엔초가 만약 살인자가 된다면 자신은 엔초가 저지른 죄를 함께 질 각오로 엔초의 편에 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두둔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엔초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것들 중 가장 귀한 것이었다. 카를로타에게 조반니가 그러하듯이.
“조반니를 내 옆에 가까이 두려고 한 적도 있었으나 조반니가 스스로의 병을 눈치채지 못하는 데다 그 아이는 내 말에 순응하기에는 너무 커버렸네.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였다면 내 말을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통하지 않는다네. 그 아이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 가고자 하는 곳에 가고야 마는 고집을 갖고 있지. 가령 의학 말일세. 해부학에 생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열중하지 않던가? 귀관도 가까이서 지켜보았으니 알 테지. 이제는 광증 때문에 그 일도 그만두어야 하겠지만.”
“이제 선생님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각하께선 선생님이 재판을 받는 것을 지켜보실 생각이십니까?”
“그는 사형을 언도받을 걸세. 여러 번의 기회가 있겠지만 적어도 사형대에 올라가기 전에 손을 쓸 생각이네. 그리고 먼 곳으로 보내 그곳에서 평생을 살게 할 것이네. 휴양지라면 좋겠지만 휴양지가 아니어도 상관없을 걸세. 그에게는 비 오는 날 창가에 앉아 할 일 없이 빗소리를 듣고 밤이 되면 별을 보며 늦은 저녁 식사를 드는 삶이 필요해. 그렇게 한다 하여도 언제든 또 사람을 살해할 필요를 느낀다면 망설임 없이 그럴 것이고 거짓말을 일삼아 나를 실망시키겠지. 죗값을 치르지 않을 테니 자신의 죄에 대한 뉘우침도 없을 것이야. 그러니 나는 남은 생을 모두 바쳐 조반니의 감시인이 되어야 할 걸세. 그를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여야만 해.”
이로써 조반니는 징벌을 피하는 것이 됐지만 로미오는 그것이 온당하지 않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수 없었다. 상대가 통령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었다. 같은 상황이라면 자신도 그녀와 같은 선택을 내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조반니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어쩌면 조반니는 자신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네. 어려서부터 총명한 아이였으니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데다 나의 부모 역시 조반니에게 늘 이야기해 왔으니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충분히 알 것이야.”
“제가 선생님의 본 모습을 깨달았던 날 저와 선생님은 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분노하여 그 이상의 깊은 이야기는 하지 못했지만 각하의 말씀대로 선생님께선 어려서부터 남들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어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의 선택이나 호오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시더군요.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용서할 마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선생님께서도 분명 일찍이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와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나 통령이 아닌 누이로서 조반니를 대신해 귀관에게 사죄를 구하는 바일세. 그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경고를 할 수 있었다면, 혹은 그가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았더라면 좋았을 걸세. 못난 동생을 둔 누이의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니 내 이 비루한 말뿐인 사죄가 조금이나마 귀관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길 바라네.”
카를로타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로미오는 황급히 대답했다.
“제가 감히 어찌 각하의 사죄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말씀은 부디 삼가 주십시오.”
불편한 마음을 느낀 로미오는 고개를 숙였다.
통령에게는 죄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조반니의 부탁으로 자신의 퇴역 문제와 관련해 손을 쓰기까지 했다. 피에트로가 목숨을 잃었던 날 부대로 자신을 만나러 왔던 것도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자신은 통령의 너그러운 아량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대가 없이 한 번 가졌던 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 일을 자신 몰래 카를로타에게 부탁한 것이 조반니라는 사실이 마음 한구석을 날카롭게 찔러 왔다. 그는 그날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퇴역을 막으려 했다. 자신이 계속 군에 머무르는 것이 그에게 이득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통령과의 관계를 비밀에 부쳐야 하는 상황에서 그녀를 직접 찾아가 부탁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 그런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제가 각하의 청을 거절하여 이번 암살 공모에 대한 중책을 맡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조반니에게 뒷일을 맡기는 것도 생각해 보았으나 그러려면 추후에라도 그와 나 사이의 관계를 밝혀야 하네. 하지만 그는 이제 살인자 신세가 되지 않았나. 다른 방법이 없기에 직접 내가 나설 수밖에. 물론 그렇게 된다면 올빼미들이 소탕된 후 그 혼란을 잠재우는 것은 어려워질 것이야. 아무리 단테의 12인을 절멸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더라도 통령인 내가 직접 나의 형제를 시켜 수년간 그들을 밀탐하게 했다는 것은 쉽사리 납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네. 올빼미를 포획하고자 직접 올빼미가 되어 그들의 무리에 숨어 들어갔다는 것이, 그것도 루바노의 원수인 이 내가 직접 모든 것을 획책했다는 것은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이야깃거리네. 루바노를 오랫동안 괴롭혀 온 썩은 이를 뽑아냈으나 그 방식이 잘못되었으니 이 나라가 비로소 완전히 평화로워질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말씀하신 대로 루바노 내에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제가 이번 일을 맡는다면 각하께선 수년간 이 일을 지휘해왔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칠 생각이십니까?”
“그렇다네. 조반니의 존재 또한 철저히 숨겨 민중들이 진실을 알지 못하게 할 것이야. 그러나.”
카를로타는 로미오의 다친 손과 발목에 눈길을 줬다.
“광증을 이유로 조반니에게는 휴식을 주려 하면서 귀관에게 무리한 일을 권한다면 그것 또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일 걸세. 귀관은 현재 손과 발이 불편하기까지 하니 말일세. 이것은 나의 소명이지 귀관의 소명이 아니지 않은가. 귀관에게는 그 어떤 의무도 없으며 모든 것은 나의 책임 여하에 따른 문제네.”
일전에 한 번 만나 보았던 것과는 무관하게 통령이 어떤 성품을 갖고 있는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 들어 온 로미오였다. 그렇기에 그녀가 한 말에 마음이 동요했다. 대업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해도 그녀의 입장을 이해할 텐데 그녀는 자신의 다친 손과 발을 놓치지 않고 본 데다 그 어떤 강요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함부로 가까이 닿을 수 없는 영명한 군주이면서 문제 많은 동생을 둔 평범한 누이로 보였기에 근엄함과 너그러움이 동시에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금 한 나라의 통령인 그녀의 입지가 절실히 이해됐다. 자신 역시 단테의 12인에게 대갚음해 주어야 할 것이 있지만 그것은 한낱 민중의 입장에서 그칠 뿐이었다. 하지만 카를로타는 통령이었다. 이 나라를 다스리고, 다스려야 할 원수였다. 자신과 같은 일개 퇴역 장교를 찾아왔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마지막 선택지일 것이다.
명령하거나 강제하고 있지 않은 그녀는 이대로 물러갈 마음을 갖고 있는 듯했다. 많은 권위자들이 그와 같은 방식을 택하는 것을 권위를 버리는 것으로 이해하고 물러서지 않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녀는 좋은 의미로 통치자답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호소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이미 부탁을 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것도 단 한 번도 강권을 휘두르지 않고 오로지 말로써.
“제가…….”
그리고 때로는 위엄을 내보이는 것보다 몸을 낮추는 것이 더 현명한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남은 일수 동안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로미오의 등 뒤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주세페와 체사레가 로미오에게 잠시 눈길을 주는 가운데 카를로타가 서두르지 않고 말했다.
“귀관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모두 맡길 것이네. 실패할 경우 귀관을 책망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귀관 스스로의 자책감을 덜어 줄 방법은 없네. 이 일에 대한 중임을 맡은 것을 후회하게 되어도 괜찮겠는가?”
“일을 그르칠 가능성을 경계하느라 이번 일을 망설인다면 그 또한 먼 훗날 저 스스로를 책망하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카를로타는 로미오의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목소리를 바꿨다. 말로 내뱉지 않았지만 목소리 속에 로미오를 향한 감정이 깃들었다. 그녀는 로미오의 선택을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조반니로부터 편지를 받았네. 청사에 투서를 하는 형태로 내게 보낸 암호 편지에는 암살이 혼인식 전날과 혼인식 날 두 번에 걸쳐 이뤄질 것이라고 적혀 있었네. 엘베라라는 단원에 대해 알 걸세. 그자가 조반니에게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암살자는 내 관저에 사는 고양이를 돌보는 의사의 간호인으로 위장할 것이라고 하더군. 살로네 성 내부의 고양이들은 각기 다른 병을 앓고 있어 의사 여럿에게 치료를 받고 있는데 관저에 출입하는 의사는 모두 여섯 명이네. 그들은 관저를 방문할 때마다 젊은 조수를 간호인으로 데려오는데 그 조수들 중 한 명을 포섭했을 것이네.”
“그 간호인의 수상한 움직임을 감시할 생각이십니까?”
“그렇다네. 조반니를 통해 내게 정보가 들어왔음을 그들이 알지 못하도록 해야 하니 은밀히 경계를 강화할 걸세. 생포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야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내 쪽에서 암살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감추어야 하니 나를 살해하는 것에 실패한 암살자가 유유히 관저를 빠져나간다고 해도 막을 수 없겠지.”
카를로타는 생각에 잠기더니 집 안을 몇 발자국 걸었다.
“투서에 바르톨루치 위원에 관한 이야기도 적혀 있었네만. 조반니가 그에게 원한을 갖고 있는 듯한데 혹 이유를 아는가?”
로미오는 프란코의 이야기를 들은 조반니가 성을 내며 날뛰더라는 얘기를 줄리오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아니요. 모릅니다.”
“그자를 보호할 필요가 있겠군. 주세페. 조반니가 바르톨루치 위원을 살해할 방법을 마련해 놓았을 수도 있으니 바르톨루치 위원의 저택 주위를 감시하게.”
“예, 각하.”
“귀관이 해 주어야 할 일은 단테의 12인의 단원들의 인명록을 얻는 것이네. 상위 단원들의 이름과 출신지, 주거지에 대해서는 조반니로부터 전해 들어 속속들이 알고 있으나 하위 단원들에 대해서는 전부 알지 못하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그들의 인명록을 갖고 있는 상위 단원을 습격해 고문을 해서라도 정보를 얻어 내야 하네. 여태 그 인명록을 얻기 위해 조반니를 대총장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것이 됐네.”
“타 지부 단원들의 인명록을 갖고 있는 상위 단원은 니콜로와 소피아입니다. 그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네. 지금으로서는 인명록을 가진 상위 단원들을 되도록 빨리 생포하는 것이 시급하네. 그들이 붙잡혔다는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지방 지부는 물론 바치 내의 하위 단원들까지 위협을 감지하고 움직이기 시작할 걸세. 문제는 생포 과정에서 내가 귀관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이야. 제6군단을 파견할 수는 있겠으나 이것은 자네가 군에 요청을 하는 형태로 이뤄져야 하네. 귀관에게 도움을 줄 자가 있겠나?”
“예, 있습니다.”
“그자의 이름이 무엇이지?”
“마르코 무소 대위입니다.”
“그렇다면 제6군단의 힘이 필요할 경우 그자에게 도움을 받도록 하게. 단,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될 시 올빼미들이 달아날 것이니 모든 것은 반드시 동시에 이뤄져야 하네. 제6군단에 의한 대대적인 색출이 이뤄지는 것은 루바노 밖으로 나가는 국경을 모두 폐쇄하고 난 후의 일이어야 하네. 자네에게 도움을 줄 제6군단의 장교에게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도움을 청하되 부대를 움직이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 되어야 하네.”
로미오는 명심하겠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혼인식 전날의 암살은 어떻게 막으실 생각이십니까?”
“경비병과 호위단의 경계를 강화할 생각이네. 나는 저녁 식사를 끝내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무실에서 보내나 그 시각에 다른 곳에 머무르며 암살자를 기다릴 것이네.”
“암살자를 생포하지 못하신다면 다음 날 혼인식에 참가하셔야 하겠군요.”
“내가 혼인식 날 꼬리를 빼고 나타나지 않는다면 올빼미들이 밀정이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될 테니 그래야 할 걸세. 그들에게 암살의 기회를 다시 한번 주어 체포하는 방법밖에 없네. 하지만 귀관이 만약 중앙 지부의 하위 단원들과 타 지부 단원들의 인명록을 모두 얻어 낸다면 혼인식 날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될 걸세. 인명록을 얻어 내기 위해 상위 단원들을 습격해야 하는데 좋은 계획이 있겠는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내 쪽에서 사람을 보내 주겠네. 고문 기술자도 여러 명 선발하여 보낼 걸세.”
로미오는 고민에 잠기더니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도움을 줄 자가 한 명 있습니다. 군인이 아닌 데다 루바노인이 아니지만 단테의 12인을 괴멸시키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자입니다.”
“그자가 누구인가?”
“하슬러 공국 출신의 떠돌이 용병 이브 헤스입니다. 그리고 발레리아 말로라는 이름의 제6군단의 퇴역 장교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으로부터 이 일에 관한 비밀을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예. 믿을 만한 자들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특히 이브 헤스는 장정 열 명의 몫을 해내는 괴력을 가진 자라고 들었습니다. 그자가 있다면 고문 기술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카를로타는 로미오를 믿고 두 사람에 대해 재차 확인하지 않았다.
“상위 단원들의 주거지를 아는가?”
“예. 알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을 찾지 못하거든 내 관저로 찾아오게나. 자네의 얼굴을 알고 있는 경비병이 한 명 있네. 잠깐 얼굴을 비추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기다리면 내가 상위 단원들의 임시 은신처를 알아내 위치를 알려 주겠네. 내일 하루 동안의 말미를 줄 테니 생포 방법을 마련하도록 하게. 나는 오늘 자정이 되기 전 각 국경을 지키는 수비군에게 일시적으로 국경을 폐쇄하라는 지령서를 보낼 것이네. 지령서는 이틀 뒤 저녁 해가 지기 전까지 도착할 걸세.”
“만약 단원들이 무언가를 눈치챈다면 도주를 시도하겠군요.”
“그러니 더욱 기민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여야 하네. 루바노 국경 밖으로 이어지는 모든 성문이 닫히는 것은 노을이 질 무렵에 끝날 것이며 성문이 닫혔다는 소식을 접한 올빼미들이 달아날 준비를 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일 것이네. 내가 내일 밤 체사레를 보내 암살자의 생포 여부를 알려 줄 터이니 그 소식을 듣고 인명록을 갖고 있는 단원들을 습격하게나. 그들로부터 인명록을 얻어 내 그것을 내게 넘기는 것까지가 귀관의 일일세. 나는 루바노 전역의 성문이 닫힘과 동시에 제6군단을 움직여 올빼미들을 소탕할 걸세. 그 전에 반드시 내 손안으로 인명록이 들어와야 하며 이 모든 것은 단 하루 만에 이루어져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올빼미들이 생포되고 나면 귀관은 루바노의 흥망을 결정지은 공로를 인정받게 될 것이네. 그 과정에서 내가 통령의 권한을 이용했다는 사실은 비밀에 부쳐야 하네. 유념하게. 귀관의 임무는 전면에 나설 수 없는 나의 심복 역할을 하는 것이네.”
“제 손에 루바노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실수는 없을 것입니다.”
로미오는 고개를 돌려 엔초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볼 수 없지만 보고 있다고 믿었다.
“이 나라를 위하여. 그리고 평화로워진 이 세상을 살아갈 제 형제를 위하여 절대로 실패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