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은밀한 밤의 방문자
“상황이 이렇게 꼬이다니 우려스럽군요.”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들어오는 집무실은 고요했다. 방금 막 실내복을 갈아입은 카를로타의 금발은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는데 바닥에서 풀쩍 뛰어오른 고양이가 무릎에 올라왔지만 그녀는 평소처럼 쓰다듬어 주지 않았다.
“혼인식 일정을 앞당긴 것이 그들을 색출해 내는 데 유리하게 작용할지는 모르나 상황이 이렇게 되니 염려스럽습니다.”
“본래대로 진행되는 것보다 우세한 상황이네. 조반니도 이제 한계인 모양이니 그대로 놔두면 손쓸 수 없을 만큼 미쳐 버릴 테지. 하루라도 빨리 이 모든 것을 끝내야 하네.”
깊은 생각에 잠기는 법이 없는 카를로타는 그렇게 말한 뒤 잠시 침묵했다. 오늘 아침 일찍 조반니의 구금 소식과 함께 그가 죄를 자백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전해져 보통 때보다 일찍 잠에서 깬 카를로타였다. 급작스러운 그의 구금 소식에 크게 동요하진 않았지만 때가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기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주기가 분명 전과 다릅니다. 편지를 통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병의 진행 경과가 좋지 않으니 빨리 이곳을 떠나게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마땅한 치료법이 없는 이상 사람들과의 접촉을 줄여 증세가 악화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망상의 원인이 다른 이들을 의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면 그 어떤 의심도 할 수 없게 외따로 지내게 해야 합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일세. 이번에야말로 먼 곳으로 보내야 하네. 이런 대도시가 아니라 사람들을 쉬이 만날 수 없는 별장 같은 곳이 좋겠지. 굳이 루바노가 아니어도 좋을 걸세. 좀 더 일찍 했어야 할 일을 내 어리석음 때문에 내버려 둔 것이야.”
“각하께서도 그간 그를 면밀히 살펴보시지 않았습니까? 광증이 이렇게 이른 시기에 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데 어쩌다 그런 거짓 자백까지 하게 됐을까요? 아무리 광증이 있다 한들 살인을 저질렀다는 헛된 말을 하다니요.”
조반니에 대해 전부 알지 못하는 주세페는 그가 사람을 죽였을 리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조반니는 선한 심성을 지닌 호방한 사내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카를로타는 달랐다. 조반니가 살인자가 된다 해도 놀라지 않을 그녀는 긴 생각에 잠겨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평소에 좀처럼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이대로 둔다면 공안국의 조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겁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혼인식 전에 올빼미들의 눈에 띄게 될 걸세. 조반니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은 최후의 방법으로 보류해야 하네.”
단돌로를 만나 혼인식 날을 앞당기도록 넌지시 이야기한 것은 카를로타였다. 목적은 두말할 것도 없이 암살 계획에 차질을 주기 위해서였다. 예정보다 시기가 더 당겨졌으니 넉넉한 기한을 두고 준비를 하고 있었을 단테의 12인이 급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남은 일수는 이제 단 3일. 그들은 그 안에 모든 준비를 끝내고 혼인식 날 단돌로의 저택으로 숨어들 것이다.
“조반니가 정말로 살인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으니 섣불리 판단을 내려선 안 되네. 가능하다면 살인 사건에 대한 조사와 재판이 천천히 진행되도록 해야 해. 구금되어 있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지.”
“각하께서는 그가 살인을 했을 거라고 의심하시는 겁니까? 혹 광증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광증 때문이 아닐세. 조반니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네. 만약 그의 자백이 거짓된 것이 아니라면 그 책임은 내게 있을 걸세.”
카를로타는 그렇게만 말하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세페가 잠시간 혼란을 느끼는 사이 말을 돌렸다.
“혼인식 날 단돌로 위원의 저택 내에 배치할 호위병들은 선발이 끝나는가?”
“네. 저택 밖을 지킬 경비병들의 선발 또한 마쳤습니다. 의심을 받지 않을 만한 적절한 수로 조정해 배치할 예정입니다. 본디 각하께서 많지 않은 수의 호위병을 대동하시는 터라 그 점을 고려했습니다. 미리 일러두지 않아도 단돌로 가문의 시종들이 손님의 이름을 명부에 기록할 겁니다. 혼인식 장의 출입에 관해서는 심려를 놓으셔도 됩니다. 혼인식 전날 밤의 관저를 통제할 경비병들도 선발을 마쳤습니다.”
카를로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주세페가 고민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암살 계획에 관해 조반니에게 전해 들었을 텐데요.”
주세페가 로미오를 떠올리기 전에 이미 그를 생각하고 있었던 카를로타는 또다시 긴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신중할수록 더 나은 대답을 내놓는다는 것을 아는 주세페는 얌전히 기다렸다. 그러나 이어 들려온 그녀의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준비를 하게. 그를 만나 봐야겠네.”
“직접 만나 비밀을 밝히시려는 겁니까?”
“그에게 이번 암살에 대한 준비를 맡길 생각이네. 조반니는 점점 더 미쳐 갈 테니 이 일을 맡길 수 없어. 구금된 이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허튼 일은 벌이지 못할 테니 차라리 다행인 일이야.”
“알피에리 그자는 맹인이 아닙니까? 두 눈이 보이는 자에게도 쉽지 않은 임무일 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네. 그가 올곧은 눈빛을 갖고 있던 것을 기억하네. 나는 그런 눈을 가진 자에게 믿음이 있네. 올빼미들을 모두 소탕하려면 정치적 경력을 갖고 있지 않아 의심을 살 일이 없는 데다 일을 그르칠 만한 과도한 명예욕이 없되 오랫동안 이어져 온 이 기나긴 전쟁 같은 싸움을 두 눈으로 목도해 본 자가 필요해. 그는 장교였지 않은가? 그리고 형제의 복수를 위해 입회를 치렀지. 이 땅에 가장 맹렬히 단테의 12인을 파괴할 뜻을 가진 자가 있다면 첫 번째는 나이고 두 번째는 그일 것이네. 몸속 깊이 그들을 처단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는 자는 조반니가 아니라 그야. 자진하여 올빼미가 되었으나 조반니 그 아이는 이런 일에 적합하지 않네.”
“알피에리 대위를 향한 각하의 신임이 이렇게까지 두터울 줄은 몰랐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제게는 그저 보통의 맹인처럼 보였습니다. 독특할 정도로 고상한 외모를 갖고 있긴 하나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젊은 사내 말입니다.”
“조반니에게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지 않나. 비록 미쳐 가고 있지만 그는 가능성을 지닌 이들을 알아보는 예리한 눈을 갖고 있지. 알피에리 그자는 여태껏 조반니가 택해 왔던 자들과는 다르네. 이것은 공화국의 운명이 걸린 문제일세. 이 땅에서 나고 자란 루바노인이자 한때 군에 몸담았던 장교이며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평범한 민중인 그에게도 충분히 명분이 있네.”
“그가 과연 오롯이 모든 일을 처리해 낼 수 있겠습니까?”
“그의 눈이 되어 줄 자들이 물론 필요하겠지. 모든 것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아야 할 문제네.”
“저로서는 각하께서 친히 그자를 만나 모든 비밀을 밝히는 것이 차악의 선택처럼 느껴집니다. 알피에리 그자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수년간 금기처럼 지켜지던 비밀이 이런 때에 외부로 발설되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도와줄 자가 필요하니 조반니 외에 적어도 한 명에게는 알려야 할 일이네. 조반니의 광증을 알면서도 그 아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여태 내버려 뒀어. 내심 적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이 넓은 나라 안에 그만한 일을 해 줄 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네. 내 루바노의 시민들일세. 내 나라의 민중들이야. 자네가 우려하는 일은 없을 걸세.”
자리에서 일어난 카를로타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자들과의 조우를 앞둔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을 받는 금색 눈동자는 사형대 위에서 죄인의 목에 칼을 내리칠 준비를 마친 형 집행자의 그것에 가까웠다.
“3일 뒤면 모든 것이 끝날 걸세. 이 자리에서 그 누구의 위협도 받지 않는 평화로운 바치의 시가지를 내려다볼 수 있겠지. 같은 태양이지만 그 빛만은 전혀 다르게 느껴질 것이네. 믿어지는가? 단 3일이네. 3일 뒤면 모든 것이 끝이야.”
문밖의 발소리를 알아차린 카를로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상대는 이미 문 앞에 와 있었다. 문 두드림에 대답하자 굳은 얼굴의 체사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부 청사의 투서함에 조반니의 이름으로 편지 한 통이 투서되었다고 합니다. 구금되어 있는 그가 포르치오 가문을 통해 투서한 편지인 것 같습니다.”
* * *
“그래서 스승님이 칭찬을 해 주셨어.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잘하니까 나보다 나이 많은 누나와 형들이랑 같이 조각을 배워도 될 거라고 하셨어.”
로미오는 죽 그릇에 숟가락을 걸친 채 “그렇구나.” 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목이 대어진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죽을 떠먹고 있는 그는 접시에 담긴 빵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여기. 나눠 먹자.”
죽과 빵을 깔끔하게 먹어 치운 엔초가 사과 하나를 쪼개 큰 쪽을 건넸다.
“먹여 줄까?”
“괜찮아. 내가 먹을게.”
“손을 다쳤잖아. 사과를 쥐기 어려울 테니까 내가 먹여 줄게. 자.”
엔초는 로미오의 입 앞에 사과를 가져다주었다. 로미오가 고개를 기울여 한 입 먹자 먹은 자리를 가리키며 킥킥 웃었다.
“꼭 고양이가 먹은 것 같아.”
손이 불편한 로미오를 돌봐 주겠다며 아침부터 넘치는 열의를 보여 준 엔초는 어제도 이렇게 손수 음식을 먹여 줬다. 업어 봐야 발이 땅에 끌릴 게 뻔한데도 절뚝거리며 집 안을 돌아다니는 로미오를 한사코 업어 주겠다며 작은 등까지 내보였다.
“화실이 파하면 다른 곳에 들르지 않고 바로 집으로 올 테니까 나가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 돼. 알았지?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내가 데려다줄게.”
“응, 그럴게. 고마워.”
전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한 로미오는 숟가락으로 죽만 몇 차례 휘저었다. 몇 숟갈 먹지 않아 죽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젯밤, 조반니의 구금 소식을 듣고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하숙집을 다시 찾은 줄리오로부터 조반니가 자백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줄리오는 조반니가 한 말을 전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조반니가 그런 말을 한 의도는 모르겠지만 대위님께 부탁할 것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용서할 마음이라는 게 뭘 뜻하는 것인지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요.]
조반니가 자백을 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랄 로미오가 아니었다. 이것은 그가 원하던 상황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 살인 사건의 죄가 더 무겁다는 것이었다. 자백하지 않는다면 직접 공안국으로 찾아가 증언하겠다고 협박까지 한 로미오로서는 헛된 짓을 할 필요 없이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조반니의 악행이 드러나는 것을 가장 원한 것은 로미오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 기분은 무엇일까.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일까.
조반니를 향해 살해 의지를 느껴 칼을 휘둘렀는데 막상 그가 사형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확실한 말로 정의하기 힘든 모호한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원해 협박 아닌 협박을 했으면서 왜 조반니가 모든 사실을 자백하고 구금된 지금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일까.
그가 사형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 너무나 명백해져서? 그 어떤 방법으로도 재판 결과를 피하지 못하고 교수형에 처해지리라는 예감 때문에? 그의 남은 삶이 광장의 사형대에 목이 매달려 숨을 거두는 것으로 막을 내리리라는 직감이 들어서?
아니다. 조반니는 어떻게든 사형을 피할 것이다. 그는 이미 재판을 받은 전력이 많지만 죄목을 하나하나 따져 보면 모두 형이 가벼웠다. 분명 뒤에서 손을 쓴 것일 테다.
그러니 이번에도 같은 방법을 쓸 것이다. 가진 것을 모두 동원해 사형을 면하려 들 것이다. 그는 남들이 할 수 없는 짓을 서슴없이 하는 미치광이였다. 어쩌면 지금도 형벌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을지 몰랐다. 그의 지지자들 중에는 재판 결과를 유리하게 조작할 자들이 많을 것이다.
조반니에게 가장 크게 내려질 형은 구금형. 그도 아니면 루바노 밖으로 쫓겨나게 되는 추방형. 아니면 가진 재산을 모두 몰수당하는 재산몰수형. 사형을 제외한 나머지 형벌들 중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사람을 넷이나 살해한 살인마에게 합당하지 않은 형이지만 조반니라면 어떻게든 죗값을 줄여 받을 것이다.
그가 사형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긴 생각들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자 자신이 조반니에게 자백을 강요할 당시 ‘그가 사형만은 피할 것이다’라는 전제를 은연중에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리고 그 전제는 조반니가 사형당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진실을 앞세우고 있었다. 그의 사회적 위신을 실추시켜 죗값을 받게 하겠다는 계산 안에 그의 목숨값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조반니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당했지만, 그를 향한 분노가 살해 의지로 뒤바뀔 만큼 극심한 배신감을 느꼈지만,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할 만큼 그가 한 짓을 용서할 수 없지만 자신은 진심으로 그가 죽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그가 죽음으로 죗값을 치르길 바랐기 때문에 자백을 종용한 게 아니었다. 그가 반드시 사형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에게 자백을 강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얼마나 아둔한 생각이란 말인가?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이 탁자 위에서 그에게 범해졌는데 그의 목숨이 보전되는 방향으로 상황을 따져보고 있다니. 그가 한 짓을 생각하면 이 상황에서 박수를 치며 기뻐해도 모자랄 일이었다. 그런데 왜 마음껏 후련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가 정말로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왜 이런 복잡한 마음을 느끼며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애써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가.
전면적으로 그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고 해도 이 상황을 수용할 수 있었다. 조반니가 자코모 한 명이 아닌 세 사람을 더 죽인 이상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괘념치 않을 수도 있었다. 만약 사형을 받게 된다면…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그를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단호히 치부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어리석어서일까. 아니면 그것이 누가 됐든 남의 죽음을 열렬히 원한다는 것이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그도 아니면 조반니를 피범벅으로 만들며 주먹질을 하던 자신에겐 그를 죽이고 살릴 권한이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일까.
어쩌면 조반니가 살아서 죗값을 치르길 원해서일지도 모른다. 죄수들의 오물이 쌓인 지하 감옥에 갇혀 수년간 빛을 보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산 채로 죗값을 받길 원해서.
그러나 정말로 그런 이유로 이런 복잡한 심경을 느끼고 있다면 그 이면에는 사형을 당하는 것보다 구금되는 것이 조반니에게 더 잔인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일까. 아니면…….
“형은 어떻게 생각해? 내가 그분의 집에서 지내며 공부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그렇게 되면 형이랑 떨어져서 살아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아?”
코끝에 진한 사과 향이 닿았다. 생각을 멈춘 로미오는 사과를 크게 한 입 먹고 엔초에게서 사과를 받아 갔다.
마음이 복잡했지만 얼굴에서 표정을 거두며 되물었다.
“뭐라고 했어?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아서 미안해. 스승님께서 네게 무슨 말씀을 하셨어?”
“스승님께서 내가 이제 어려운 과목을 배울 나이가 됐다고 밀라니 선생님의 집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어. 밀라니 선생님의 집에 드나드는 교수님들 중에는 훌륭하신 분들이 많대. 그 집에서 살면서 공부와 조각을 배울 생각이 있냐고 하셨어.”
“밀라니 선생님이라면 형도 들어 본 적이 있어. 그분의 집에 저명한 학자들이 드나들며 어린아이들을 가르쳐 왔단 것도 알아. 다른 생각 때문에 똑바로 듣고 있지 않았는데 중요한 얘길 하고 있었구나.”
바치에는 더 많은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자 어린 학생들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며 공부를 가르치는 후원자들이 많았다.
밀라니 가문이라면 예술을 사랑하는 뼈대 굵은 학자 집안이었다. 그들 가문은 비싼 값에 산 그림과 조각들로 저택을 장식할 정도로 젊은 예술가를 양성하는 데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은 매해 저렴한 학비를 지불했고 지불한 학비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물론 그 기회는 후원받을만한 재능이 있는 아이들에게만 주어졌다.
엔초에게 그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에 로미오는 조반니에 대한 생각을 잠시나마 접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집으로 가정교사를 부르려던 참이었어. 너도 이제 수사학이나 논리학 같은 공부를 해야 할 나이니까.”
“스승님은 옛날에 밀라니 선생님 댁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자며 공부를 했었대. 그땐 밀라니 선생님의 아버지가 아이들을 돌봤는데 이젠 밀라니 선생님이 그 일을 하신대. 밀라니 선생님을 전에 한 번 본 적 있는데 아주 상냥하셨어. 스승님이 말하길 밀라니 선생님의 집이 아주 크고 넓은 데다 정원도 있대. 점심을 먹고 나면 저택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있다고 해. 아주 큰 서재도 있어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어도 되고.”
“그래. 형도 알아. 어디선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 밀라니 선생님 댁에 가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데다 지금보다 조각 실력을 더 빨리 쌓을 수 있을 거야. 다른 아이들과 함께 지내야 하니 불편한 점도 있겠지만 네겐 여러모로 좋은 기회야. 기뻐할 만한 이야기지.”
“스승님께서도 흔치 않은 기회라고 다섯 번이나 강조하셨어.”
엔초는 호기심 많은 표정으로 그곳의 생활에 대해 상상했지만 금세 다시 고민스러워하며 물었다.
“하지만 그러면 형이랑 떨어져서 살아야 해. 한 달에 한 번밖에 얼굴을 볼 수 없을 거고 형이랑 이렇게 같이 아침을 먹을 수도 없어. 형이 보고 싶어지면 어떻게 해?”
로미오는 탁자 위를 더듬어 엔초의 손을 찾아냈다. 말랑한 손을 쥐자 엔초가 풀이 죽은 것도 잠시 팔을 흔들며 장난쳤다.
“이제 아홉 살이니까 의젓해져야지. 형은 네게 조각이나 문학을 가르쳐 줄 수 없어. 밀라니 선생님의 집에 가지 않더라도 가정교사 선생님들께 날마다 공부를 배워야 할 거야. 여기 있는 것보다 그곳에 가는 게 내게 더 도움이 될 텐데?”
“하지만 나는 형이랑 같이 살고 싶어. 영원히 말이야. 떨어지지 않고 형 옆에 붙어 있을래.”
“그런 이유로 이런 좋은 기회를 버리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야. 나와는 언제든 만날 수 있잖아. 먼 곳으로 가 버리는 게 아닌걸.”
엔초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입을 앙 다물더니 서운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은 내가 가 버려도 괜찮아? 나랑 같이 살지 않아도 괜찮아?”
로미오는 손을 올려 엔초의 어깨를 찾아냈다. 좀 더 위로 올라가니 통통한 뺨이 만져졌다.
“네가 여길 떠나면 많이 보고 싶을 거야. 매일 보고 싶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네가 밀라니 선생님 댁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생각할 거야. 하지만 나는 네게 더 좋은 길이 있다면 그 길을 택하고 싶어. 밀라니 선생님 댁에서 공부를 하고 싶어도 그 기회를 누릴 수 없는 아이들을 떠올려 봐. 아주 좋은 기회가 온 거잖아. 네가 보고 싶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보고 싶어 할 거야.”
엔초의 뺨을 쓰다듬은 로미오는 머리를 만져 주었다. 손안에 흩어지는 보드라운 곱슬머리의 감촉이 어지럽던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정리해 주었다.
“형은 스승님과 같은 마음이니까 고민해 봐. 생각해 보고 결정이 나거든 얘기해 줘.”
“만약 스승님께 말씀드리면 곧 밀라니 선생님의 집으로 가게 될 거야. 여기서 열 밤도 잘 수 없을 거야. 형을 이렇게 보는 것도 곧 끝이고…… 내가 가 버리면 누가 형을 도와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형 곁에 아무도 없으면 어떡해?”
“날 도와줄 분들은 주위에 많아. 그라나 부인도 계시고 발레리아와 무소 대위님, 솔로르사노 중위도 있지. 내 걱정은 마.”
엔초는 자신의 턱을 보고 있는 로미오의 눈을 올려다봤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서 가장 예쁜 눈이라고 생각했다.
“네 스스로 만든 기회인 거야, 엔초. 밀라니 선생님 댁에 가지 않겠다고 해도 탓하지 않을게.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이런 기회를 얻어 낸 것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야.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네 선택을 믿을게.”
* * *
“난 아닙니다! 억울해요! 그자의 실종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복도에서 들려오던 억울한 목소리는 두꺼운 철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이른 아침부터 한 건의 실종 신고로 공안국이 소란스러웠다. 바치 시민들의 신분증명서를 발급해 주는 시 행정 기관의 기관장이 실종된 것이었다.
해당 사건을 조사 중인 조사실 바로 옆방에 조반니가 있었다. 칼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 때문에 입고 있던 겉옷을 모두 빼앗긴 그는 얇은 옷차림으로 손이 묶인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죄인 취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는 없었다. 간부들이 지시하는 대로만 움직일 수 있었고 그들이 묻는 말에 대답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었다.
간부들은 조반니가 죄를 자백하고 나서부터 눈빛을 완전히 달리했다. 그들은 양팔에 붉은 자국이 남을 정도로 억세게 몸을 묶었고 의자에 앉히거나 일으켜 세울 때 조반니를 거칠게 당기거나 밀쳐 댔다.
“그 말인즉슨 집 안으로 침입해 경사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살해 이유는 경사님이 선생을 미행했기 때문이고요?”
“네. 그리고 제가 마음을 준 분께 우초 경사가 수작을 걸었습니다. 그분을 이 일에 연루시키고 싶지 않아 이름을 말씀드릴 순 없지만 그 일로 말미암아 우초 경사에게 좋지 못한 감정을 갖게 됐습니다. 우초 경사의 배후에는 저를 해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우초 경사가 그들의 지시로 저를 미행했습니다.”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감도는 조사실의 공기는 숨이 답답할 정도로 무거웠다. 조사실 내의 모든 눈이 조반니에게 쏠려 있었는데 모두들 살인마를 보는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조사과에 속하지 않는 다른 분과의 간부들까지 수군대며 조사실 앞을 지나갔다. 조반니의 유명세를 익히 알고 있는 몇몇은 곁눈질을 하며 소곤댔다. 저자가 우초 경사의 목을 잘라 죽였대.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장의사가 시신에다 머리를 붙이는 중이라더군.
“경사님이 선생을 미행한 이유는 무엇이며 그 배후에 누가 있다는 겁니까?”
“바로 그 점을 조사해 주셔야 합니다. 저도 그 누구보다 그 배후가 궁금합니다. 어쩌면 그자들이 공안국 내부로 숨어들어 왔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곳 어딘가에서 염탐 중이라면 공안국 내부도 절대로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 배후에 공안국이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다면 이 일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 몰래 공안국 안으로 숨어들어 올 자는 없습니다. 혹 살인 동기를 감추기 위해 없는 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게 아닙니까? 진실을 말하십시오. 경사님을 살해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꾸며 낸 말도 아닙니다.”
“옆집에 살던 이웃 소녀와 경사님의 뒷집을 지나던 노인을 살해한 이유는 뭡니까?”
“그들이 제 얼굴을 봤기 때문입니다. 목소리만 들었거나 뒷모습을 봤다면 죽이지 않았을 겁니다.”
물은 말에 답했으니 잘못한 것이 아니었지만 대답하고 있는 태도가 문제였다.
조반니에게서 엿보이는 지나친 평온함에 간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반니는 자신의 앞날에 닥쳐올 일을 모르는 사람처럼 조금도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았다. 흡사 진범을 대신해 죄를 자백하는 대리인 같았다.
그래서 간부는 저도 모르게 조사 시작 전에 했던 말을 다시 하게 됐다.
“정말로 선생이 살해한 게 맞습니까? 공동의 정범이 있는 게 아닙니까? 선생에게 지시를 했거나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 말입니다.”
“혼자 한 일입니다. 그런 일을 하는 데 도움은 필요 없어요.”
조반니를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찾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두리번댄 그는 조사실 창밖을 살피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밤사이 저를 찾아온 사람은 없었습니까?”
줄리오에게 모든 얘기를 전해 들은 로미오의 심경 변화가 궁금한 조반니는 은근히 기대하며 물었다.
“공안국 건물 앞을 서성이는 사람이 없던가요?”
“없었습니다.”
간부가 잘라 말하자 조반니는 로미오에게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마간의 말미를 주면 그도 마음을 굳힐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 번 더 물었다.
“정말로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곧 선생의 저택을 수색할 예정이니 추가로 자백할 것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하십시오. 몇 건의 살인을 더 저지르고 감추고 있다면 수색이 시작되기 전에 자백하는 게 좋을 겁니다.”
“감추고 있는 살인 사건 따윈 없습니다. 그리고 전 이번 자백 이후 그 누구도 살해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조용히 남은 생을 살다 제 묘석에 의사이자 해부학자로서 인류사에 이바지하였음을 길고 아름다운 말로 새겨 놓고 죽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러려면 사는 동안 죽인 이보다 살린 이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입증해야겠지요.”
말이 끝나자마자 간부가 소리 나게 펜을 내려놨다. 그는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선생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살인죄를 저질렀는지 모르는 겁니까? 선생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넷이나 말입니다. 미행이니 배후니 하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선생이 죄 없는 이들을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던가요? 그래서 이렇게 자백을 한 게 아닙니까?”
“선생은 구금되어 있던 어젯밤 무료함을 달래야겠다며 종이와 펜을 요구했습니다. 그것이 죄를 고백한 죄인의 태도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제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지 여부가 중요합니까? 저는 자백을 했고 조사 절차에 따라 재판에 넘겨질 겁니다. 불필요한 요구를 해 봐야 피차 서로 번거로워질 겁니다. 제가 마음 깊이 반성해 봐야 죽은 자들이 살아 돌아오지 않으니 죄인으로서의 적절한 태도를 요구하는 건 이쯤에서 끝내시는 게 어떨는지요.”
간부의 표정이 한층 더 나빠졌지만 조반니는 흘깃대며 천장만 노려봤다. 입술을 씰룩거린 그는 복도를 지나는 발소리가 들리자 얼른 문을 돌아본 뒤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
“그런데 정말로 저를 찾아온 사람이 없습니까? 만약 없다면 저를 공안국 밖의 거리가 내다보이는 구금실에 구금시켜 주실 수 있습니까? 창살을 통해 밖을 내다보며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때 복도 너머가 소란스러워졌다. 문이 여닫히는 소리와 함께 바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살인 사건과 관련해 신빙성 있는 증언을 하기 위해 제 발로 공안국을 찾은 이들의 목소리였다.
조반니가 있는 조사실의 옆방, 그곳에는 조반니를 잘 아는 의사들과 몰려와 있었다. 자코모의 죽음의 전말을 전해 듣고 공안국을 찾은 이들도 있었는데 하나같이 표정이 침통했다.
“이 코도 그놈한테 맞은 겁니다!”
조사실 내에 울린 목소리가 얼마나 쩌렁쩌렁한지 벽에 걸린 등잔 불빛이 흔들렸다. 자신의 코를 가리키며 외친 사람은 며칠 전에 조반니에게 얼굴을 맞아 코가 돌아간 의사였다.
“조반니는 본래 폭력을 쓰길 좋아했습니다! 의사들 사이에서도 그에게 멱살을 잡힌 자가 여럿 됩니다. 남의 여자를 멋대로 빼앗아 동침을 일삼을 때부터 그놈의 본성을 알아봤어야 했어요. 사람을 넷이나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긴 했지만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습니다. 그자는 그러고도 남을 자입니다!”
한쪽으로 비스듬히 휜 코를 가진 의사는 그 상태로 굳어 버려 더는 아프지 않은 자신의 코를 쿡쿡 눌러 댔다.
“사람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잡니다! 그 무명의 조각가도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살해당했을 거예요.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해 칼을 휘둘렀을 겁니다!”
의사의 등 뒤에서 눈물을 훌쩍이던 어느 깡마른 여인과 젊은 사내들도 나섰다.
“그가 정말로 자코모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나요? 흑, 흐윽…! 살해한 이유가 뭐라고 하던가요?”
“자코모가 무슨 잘못을 했답니까? 그토록 잔인하게 죽인 이유가 뭐냐는 말입니다!”
“그자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직접 만나 본도네 씨를 살해한 이유를 따져야겠습니다.”
다른 한 무리의 의사들은 이런 말을 했다.
“이번 기회에 예전의 그 방적공 사건을 다시 조사해 보쇼. 조반니가 정말로 죽였을지 누가 압니까? 이보게들, 그때 그 사건을 두고 다들 의아스러워 했지 않나?”
“맞는 말이오. 그때 그 사건에 대한 조사는 물론 추가 살인이 없는지도 조사해 보시오. 여태껏 조반니가 자신의 본성을 감추고 우리 모두를 농락하지 않았소? 몇 건의 살인을 더 저질렀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오.”
“옳은 말입니다. 사람을 넷이나 죽인 자가 다섯, 일곱이 어렵겠습니까? 바치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중 해결되지 않은 사건을 조사해 보세요.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지도 모릅니다.”
조반니가 속한 의사 협회와 반대되는 정론을 갖고 있는 다른 협회의 의사들은 조반니의 체포 소식에 그 누구보다 빨리 공안국을 찾아 입방아를 찧어 댔다. 조반니에게 살해된 자들의 억울함이 아닌 조반니에게 품고 있던 앙심을 푸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오래전에 조반니에게 크고 작은 망신을 당했다든가, 혹은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굴욕적으로 거절당한 경험이 있다든가 하는 이유로 각자 원한을 품고 있는 그들은 조반니가 의학계에서 내쳐져도 손해 볼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조반니에게 악의는 없지만 이번 살인 사건에 대해 떠들어 대기 위해 찾아온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분위기에 휩쓸려 한두 마디씩 거들었다.
“자백한 이유가 뭐랍니까? 살해한 이유는 또 무엇이고요?”
“불을 낸 것도 그의 소행인 거요? 직접 불을 질렀다고 실토한 거요?”
“그는 의사가 아닙니까? 정말로 그가 범인이 맞는 겁니까?”
물론 조반니를 옹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조반니가 그간 쌓아 온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님을 몸소 입증해 주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스포르차 선생이 사람을 죽였을 리가 없소. 뭔가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할 거요.”
“그럼요! 그분은 사람을 죽일 분이 아니세요. 누군가 누명을 씌우기 위해 이런 소란을 일으킨 것 아닌가요?”
“전 불과 열흘 전에 스포르차 선생님께 이 다친 팔을 치료받았습니다. 그분의 자애로운 손길을 떠올려 보면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조반니는 누군가를 살해할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합니다. 조사가 제대로 이뤄진 겁니까?”
그리고 이 모든 소리는 조반니가 있는 조사실로 들려왔다. 몇몇 목소리는 주인공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지만 조반니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반응한 것은 그의 허기진 배였다.
꼬르륵…….
어제 구금실 간수가 준 저녁 식사와 오늘 아침 식사를 거부한 조반니는 수프 안에 독이 들어 있지 않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식사를 하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공안국 간부는 음모니 배후니 하는 조반니의 헛소리가 계속되자 그 점에 대해서도 의아해하며 물었다.
“음식에 독이 들었다는 의심도 선생이 말한 그 ‘배후’와 관련이 있는 겁니까? 그들 중 누군가가 선생을 해하기 위해 공안국 내에 잠입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요. 저를 노리는 자들이 도처에 있으니 제가 먹을 음식에 독을 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구금된 죄수에게 내어 주는 모든 음식은 믿을 만한 방법으로 만들어집니다. 왜 그런 근거 없는 의심을 하시는 겁니까?”
“배후에 있는 세력에 대해 알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저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습니다. 저 자신을 위해 모든 이들을 의심해야 합니다.”
이미 이틀 넘게 굶은 상태였지만 조반니는 완강했다. 간부는 망상에 가까운 헛소리를 하는 조반니를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대화가 되는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말이 통하지 않고 있었다. 고함을 지른다거나 주먹을 휘두르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만의 괴상한 논리에 따라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하고 있으니 설득이 어려울 것 같았다.
“그 배후에는 의사들도 연관돼 있을 겁니다. 저를 견제하는 의사들이 그 세력에 협력하고 있는 겁니다. 목적은 저를 퇴출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늘 제 주위를 맴돌며 어딘가에 숨어 험담을 떠들어 대는데 이 조사실이 조용한 걸 보면 적어도 여기까지 들어오진 못했나 봅니다. 하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간부는 정신이 나간 사람을 보는 눈으로 조반니를 쳐다봤지만 그는 험담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주위를 휘둘러 살피느라 눈과 몸이 바빴다.
* * *
“연회가 열리는 장소는 단돌로 저택 중앙에 있는 홀이다. 2층에 위치한 서재와 하인들이 머무는 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홀에 있는 계단을 거쳐야 한다. 내부의 구조를 보면 저택이라기보다는 성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모습이지. 저택의 안까지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구간과 정원을 지나야 하며 저택의 뒤뜰에는 단돌로의 아들이 어려서 검술 수업을 받던 공터가 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잡초만 관리되고 있는데 통령이 참석하는 자리라 혼인식 날 저택 밖과 중앙 홀은 물론이고 이 뒤뜰에도 경비병과 호위병이 배치될 거다.”
“검술에 통달했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비스카르디 통령도 검을 제법 쓰는 편이니 조심하려무나. 검을 거두거나 휘두르는 동작쯤은 간단히 할 거야. 호위병의 감시망에 들지 않고 불시에 공격을 하더라도 방어할 만한 능력이 있을 거다. 대적이 가능할 수준은 아니겠지만 치명상을 막을 정도는 될 것이니 큰 상처를 입혔다고 해도 방어 과정에서 빗맞는다면 목숨이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질 게다. 그 시간 동안 공화국군의 추적이 이뤄질 테니 반드시 일격에 죽여야 해.”
노프리와 다 몬티의 말을 듣던 소년은 자신의 앞에 놓인 칼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제가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어요. 절대로 실패하지 않아요.”
소년의 집에서 이뤄진 만남은 긴 시간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식은 빵과 수프를 나눠 먹으며 소년의 일상생활에 대해서도 몇 마디 주고받은 노프리와 다 몬티는 일부러 집 안에 초를 밝게 켜지 못하게 했다. 이미 수차례 소년과 만남을 가져 왔지만 그때마다 얼굴을 자세히 보여 주지 않고 있었다.
노파로 변장한 다 몬티의 어두운 눈을 핑계로 불을 밝히지 못하게 하자 소년은 의심하지 않고 말을 따랐다.
“통령과의 몸싸움이 벌어진다 해도 자신 있어요. 저는 기운 좋은 어린 소년이고 통령은 나이가 들었으니 제가 죽일 각오로 덤빈다면 소용없을 거예요.”
“혼인식이 있기 전날 집을 깨끗하게 정리하도록 하려무나. 언제든 몸을 피할 수 있도록 채비를 모두 갖추고 있어야 해. 그리고 이 종이를 받아라. 만일 암살에 실패하거든 이 종이에 적힌 장소로 가. 그곳에서 널 기다리는 사내가 루바노 밖으로 몸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줄 거다. 배를 타고 이동하기 위해선 바다 여행을 하기에 좋은 복장을 갖추는 게 좋을 게야. 모든 것은 확률의 문제지만 실패하게 된다면 이 나라를 평생 떠나 살아야 해. 각오는 돼 있겠지?”
“네. 저는 이미 마음을 비우고 있어요. 더 이상 루바노는 제 고국이 아니에요. 양어머니와 아버지도 이미 이곳을 떠나셨어요. 더는 이 나라에 미련이 없어요. 이 나라는 우리 누나를 배신하고 우리 가족을 배신한걸요.”
소년의 단호한 목소리에 노프리는 다 몬티에게 눈빛을 보내고 설명했다.
“혼인식 날 단돌로의 저택 내로 들어가기 위해 넌 내 하인으로 위장하게 될 거다. 하인이 입을 법한 옷을 줄 테니 그 옷을 입고 내 뒤를 따라다니기만 하면 된다.”
단돌로의 친척 가문의 인명록을 입수해 작업에 들어간 노프리는 단돌로 위원과 먼 친척 관계인 어느 노부인을 표적으로 삼았다. 예순이 넘은 그 부인은 남편 없이 홀로 살며 젊은 사내들과 은밀히 어울리는 것이 취미였는데 눈에 띄는 미남은 아니지만 치장을 하면 그런대로 봐줄 만한 노프리가 우연한 만남인 척 그녀가 자주 드나드는 보석 가게를 찾아갔다.
첫 만남이 수월한 덕에 세 번째 만남에 저택을 방문할 수 있었는데 그 노부인 댁의 시종들은 난데없이 갑자기 저택을 드나드는 낯선 사내인 노프리를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네 번째로 저택을 방문한 날 밤 노프리와 몸을 섞은 노부인은 밤마다 자신을 만족시켜 줄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 곧 있을 친척 조카의 혼인식에 그를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노프리는 소년을 자신의 심부름꾼으로 위장시켜 혼인식에 데려갈 예정이었다. 혼인식이 끝나는 대로 연기처럼 사라질 테니 암살 음모에 가담한 죄로 억울하게 몰린 노부인이 노프리를 찾으려 해도 이름과 출신지, 나이, 모든 것이 가짜이기에 행방을 밝히는 데 애를 먹을 것이다.
“다른 이들이 묻는 말에는 내가 정해진 대로 대답하면 된다. 너는 여덟 살 때까지 시장 소년으로 일하다 몇 해 전부터 내 심부름꾼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나는 모시기 까다롭지 않은 주인 행세를 할 테니 내 뒤를 바짝 따라다니되 겁먹거나 움츠러들며 눈치 볼 필요는 없어. 네 일은 내가 벗은 옷을 들고 있거나 내가 마신 빈 유리잔을 가져다 놓는 등의 간단한 잡일을 수행하는 것이야. 연회가 진행되는 동안 내 옆을 한시도 떠나선 안 되며 평범한 시종인 네게 그런 것을 권할 자는 없겠지만 누군가가 음식을 주더라도 얻어먹어선 안 된다.”
“네. 명심할게요.”
“내 가문은 오래전에 몰락한 가문이기 때문에 혹여 실수로라도 이름이 나와서는 안 되니 주의해라. 가장 중요한 것은 혼인식에서 네가 아는 사람과 마주칠 경우다. 네 쪽에서 먼저 알아보고 피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혹 그쪽에서 너를 알아보고 말을 건다면 내 선에서 막으마. 하지만 내가 없는 자리에서 누군가 네게 아는 척을 한다면 그 자리를 우선 피하고 만약 피하는 것이 어렵다면 발뺌을 해야 한다.”
“걱정 마세요. 저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단돌로라는 사람은 고위직을 지내는 위원이잖아요. 그런 자의 아들의 혼인식 날 손님으로 찾아올 사람들 중엔 저를 아는 사람이 없어요. 있다고 해도 들키지 않을 터이니 걱정 마세요. 그런데 할머니는 혼인식에 참석하지 않나요?”
소년의 물음에 다 몬티가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이 힘없고 초라한 늙은이는 그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통령의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지.”
다 몬티는 자글자글하게 보이도록 분장을 한 주름진 손으로 어깨의 숄을 끌어당겼다.
“할머니도 제6군단에게 자식을 잃었으니 저와 같은 입장일 테죠. 저는 누나를 잃었지만 자식을 잃는 것은 그보다 더 슬픈 일일 거예요. 저와 할머니 말고도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있죠. 그들 모두의 원한을 갚을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요.”
“조심하려무나. 비스카르디 통령은 쉽게 볼 만한 자가 아니야. 그가 31인 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시절 그 악독한 성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기에 호언할 수 있단다. 그는 자신의 적이 될 모든 이들에게 한없이 냉혹한 자니 모든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네. 그럴게요.”
평생 단 한 번도 칼을 휘둘러 본 적이 없는 소년은 이틀 후 자신이 살인자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나의 복수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죄책감과 두려움을 잊고 있었다. 통령의 몸 어디를 어떻게 찔러야 하는지를 온종일 생각하며 밤잠도 잊고 그녀를 찔러 죽이는 상상을 했다.
누나의 죽음을 슬퍼하던 예전에는 해소될 수 없는 상실감과 억울함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지만 이제는 분노가 앞서 있었다. 누나를 잃었으니 통령도 목숨을 잃는 것으로 대가를 치르는 것이 수지에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년을 그렇게 부추긴 것은 다 몬티와 노프리였다.
“네 선택이 너와 같이 억울하게 형제를 잃게 될 다른 아이들의 운명을 막을 수 있을 게다. 네가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죽은 내 딸도 기뻐할 거야.”
“우리 누나도 그럴 거예요. 비록 시체는 거두지 못했지만 누나는 분명 내게 고맙다고 생각할 거예요. 죽어서도 기뻐하겠죠.”
“겁이 나거나 걱정되지는 않니?”
“전 말이죠, 루바노의 정세 같은 어려운 것은 알지 못해요. 오로지 죽은 제 누나만을 생각하고 있어요. 통령이 죽을 경우 입지가 달라질 자들의 복잡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해요. 뭔가를 잃는 사람도 있고 얻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그런 큰 그림을 그릴 능력은 없어요. 오직 제 누나를 위해 하는 일이니 후회하거나 망설일 이유가 없는 것뿐이죠.”
“네가 조금이라도 통령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거나 연회가 열리는 홀 한가운데에서 그를 살해하는 일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면 이번 일에 대해 좀 더 고려할 생각이었는데 다행이구나. 죽은 네 누나도 너를 자랑스러워할 거다.”
“누구 한 명이라도 제 말을 제대로 들어줬다면……그 누군가가 꼭 통령이 아니어도 좋았을 텐데 단 한 사람도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우리 누나는 정말로 억울하게 죽었는데 그 억울함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이 방법밖에 없어요. 저는 곧 살인자가 될 테니 그것만큼은 제 잘못이지만 그 누구도 우리 누나의 억울함을 받아들여 주지 않은 건 제 책임이 아니에요. 그러니 저도 이런 방법을 쓸 수밖에요.”
긴 대화가 끝나자 다 몬티와 노프리는 내일 마지막으로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소년의 집을 나왔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레오나르도의 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친치아가 먼저 와 있었다.
“소년과의 이야기는 잘 마무리됐어요? 어때요?”
문을 닫은 다 몬티와 노프리는 가발부터 벗었다. 가짜 머리털을 치워 낸 것뿐이지만 두 사람은 순식간에 그들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결심이 확고해.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 것 같아.”
다 몬티는 구부정하게 숙이고 있던 몸을 펴며 의자에 앉았다. 중앙 지부로 이어지는 술집이 아닌 레오나르도의 집에서 만난 이유는 그곳을 잠정적으로 폐쇄했기 때문이었다. 엘베라가 조반니에 대한 비밀을 폭로한 이후부터 아흐레 가까이 단원들은 지하 지부에 출입하지 않고 있었다.
지하 지부로 이어지는 문이 있는 술집은 장사를 접은 지 오래였고 술집 주인도 바치를 떠난 상태였다. 혹여 누군가에 의해 그곳의 위치가 들통나더라도 지하 지부로 이어지는 나무 문에 쇠로 만든 징을 박아 놓았으니 그 문을 열고 들어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단원들은 네다섯 명씩의 소수 인원만이 밀회를 가졌고 그 장소도 어느 한 곳으로 약속하지 않고 때에 따라 정했다.
“소년의 마음에 정말로 변함이 없던가요? 곧 사람을 죽이게 될 텐데 긴장하거나 겁먹지 않던가요?”
“아주 확고해. 이번 암살이 누나의 복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어.”
다 몬티가 노파의 목소리를 흉내 내느라 가라앉아 있던 목을 가다듬는 사이 친치아가 노프리에게 물었다.
“그쪽은 어때요? 노부인께서 당신한테 빼앗긴 마음을 다시 거두어 갈 일은 없겠어요?”
“웃기는 소리. 이틀 전엔 내게 맞는 보석 반지를 해 주겠다며 시종을 불러 손가락의 둘레를 재게 했다고. 나한테 홀려서 내가 꾸며 낸 거짓말도 의심하지 않아. 거짓 가문의 이름부터 시작해 내 부모의 이름까지 그대로 전부 믿더군. 이 일이 어서 끝나 더는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꿈에 나올 지경이야.”
“놓치면 아까우니 그 보석 반지는 꼭 받아 내세요. 당신은 머리만 손보면 나이보다 10년은 더 젊어 보여요. 그래봐야 본래 얼굴이 제 나이보다 들어 보여 원래 나이대로 보이는 것뿐이지만요.”
농담을 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지만 친치아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조반니가 밀정임이 드러난 이후부터 그를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친치아는 자세한 이야기를 모두 레오나르도부터 전해 들어 왔다.
배신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소년의 공격이 빗나갈 경우 사용하게 될 광인의 종도 준비가 다 됐겠죠?”
“마시게 하는 것보다 얼굴에 뿌리는 방법이 더 효과 있을 것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여 그렇게 하기로 했다. 포도주에 말린 가루를 타 통령의 얼굴에 끼얹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손쉬워. 굳이 입으로 맛보지 않아도 코와 눈으로 들어갈 테니 충분히 목숨이 위태로워지겠지. 그나저나 조반니의 체포 소식은 어떻게 된 거야?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게 정말인가?”
노프리의 말에 레오나르도와 친치아가 동시에 침묵했다. 다 몬티는 두 사람의 표정을 살핀 뒤 한숨을 쉬었다.
“사건의 진상은 알 수 없지만 이런 때에 오히려 잘된 일이야. 공안국에 구금돼 있으니 발이 묶인 것과 다름없잖아. 그렇지 않나?”
레오나르도에게 동의를 구했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조반니가 밀정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부터 목소리를 듣는 것이 어려워졌을 정도로 말수가 준 그는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노프리. 혼인식 당일 날 참석하는 손님들의 이름이 명부에 기록될 텐데 괜찮겠어요? 이름을 기록하는 그 순간을 조심해야 해요.”
“그 노부인, 보기보다 체면을 중시하는 모양이야.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낯선 사내인 나를 친척 조카의 혼인식에 데려가려니 신경이 부단히 쓰이는 것인지 신신당부를 하더군. 언동을 정중히 하되 자신과의 사이가 탄로 나지 않도록 가능한 적은 말을 할 것을 부탁했어. 보아하니 단돌로 가문의 사람들에게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로 나를 소개하려나 봐. 인명록을 작성하는 단돌로 가문의 시종들이 수상하게 여길 수도 있지만 일단 혼인식장에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없을 거다. 신분이 명확하지 않아 확인할 필요성을 느낄 때쯤에는 혼인식이 모두 끝나 있겠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 몬티가 말했다.
“나이 든 부인에게 접근하는 건 조반니가 더 잘해 냈을 텐데 아쉬운 일이야. 그였다면 보다 적은 시간을 들여 이 일에 성공했을 텐데.”
가벼운 말이었지만 그녀의 표정만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믿지 못할 여러 가지 사실들 중에 가장 우려되는 것은 조직의 위험이 코앞으로 닥쳐왔다는 사실이었다. 야단스럽게 떠들지 않을 뿐, 상위 단원인 조반니가 밀정이었다는 사실은 모든 상위 단원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줬다.
실제로 단원들 사이에서 이 일을 두고 엘베라에게 책임 여부를 따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독단적으로 조반니를 의심해 오다 불시에 그 비밀을 터뜨리기보단 위험을 감지한 그날 논의를 거쳐 조반니를 배제했어야 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반대로 조반니가 완벽한 올빼미가 된 이후에 비밀을 알아차린 이상 엘베라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거라는 주장도 있었다. 배제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인 순간 조반니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알 수 없으니 이쪽에서도 숨을 죽이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다.
엘베라는 단원들의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이런 결단을 내렸다.
[우리에게 직접적인 타격이 가해질 것을 염려하는 그대들을 위해 중앙 지부를 폐쇄하겠네. 암살 이후 적어도 다섯 달간은 바치가 아닌 소도시로 흩어져 때를 기다리도록 함세. 이 일에 관해서는 이틀 전에 각 지방 지부로 서신을 보내 알렸으니 지금쯤 대비가 이뤄지고 있을 것이야.]
약 보름 전에는 팔레르모 사립기숙학교의 원장이 학교를 떠났으며 중앙 지부와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는 각 대학교의 교수들도 여러 이유를 핑계로 대어 바치를 떠났다. 문서화되어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하위 단원들은 상위 단원들과의 접촉을 완전히 끊었으니 평범한 민중으로 가장해 물밑에 가라앉아 있는 이들이 바치 내에만 수백 명 있는 셈이었다. 그들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상위 단원들을 고문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몸을 피해야 하는 이들 중 아직 바치에 남아 있는 자들은 이 자리에 있는 레오나르도와 친치아, 다 몬티, 노프리 외에 중앙 지부 상위 단원들, 그리고 엘베라였다.
레오나르도와 친치아는 당장 오늘 밤에라도 바치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채비를 바친 상태였고 다 몬티와 노프리도 암살 당일 단돌로의 저택을 빠져나오자마자 마차를 타고 바치를 떠날 방법을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모든 대비책은 이번 암살 공모가 좋지 못한 결과를 낳았을 경우를 염두에 두고 치밀하게 이뤄졌다.
“소년의 결심이 흔들릴 일이 없는데다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네요.”
친치아는 평소에 잘 마시지 않는 적포도주를 한 잔 마셨다. 술을 부르는 것이 머지않아 실행될 통령의 암살인지, 아니면 믿고 있었던 조반니의 배신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통령의 목숨 줄이 어떤 위태로운 상태로 그 운명을 기다리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죠. 우리의 손을 떠난 이야기예요. 그리고 조반니의 배후에는 과연 뭐가 있으려나요? 그가 구금된 상태로 어떤 방법을 쓸지 궁금해지기도 해요. 엘베라가 어떤 이유로 그를 의심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의심을 믿어야겠죠.”
* * *
“조심해서 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또 들르고.”
“고맙습니다, 부인. 편안한 밤 되십시오.”
가게 앞까지 나온 주인의 배웅을 받은 로미오는 새것처럼 수선한 옷을 들고 하숙집으로 향했다.
늦은 밤이었지만 주위를 경계할 필요가 없어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도 긴장하거나 돌아보지 않았다. 서성거리듯 주위를 살피며 걸을 이유가 사라지자 바치의 밤거리가 이토록 평화롭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자신을 해칠 사람은 구금돼 있었다. 골목으로 밀어 넣어 발길질과 주먹질을 할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그 사실이 다시금 분노와 허탈감을 불러일으켜 로미오는 상념에 잠기는 대신 절뚝대는 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돌아갔다.
이상한 점이 발견된 것은 하숙집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문을 연 로미오는 안으로 들여가려다 말고 문고리를 잡은 채 손을 멈췄다.
집 안에 꽃 냄새 같기도 하고 빻은 잎을 말린 냄새 같기도 한 기이한 냄새가 났다. 향수인 것 같다는 생각에 코를 막는데 낯선 분위기가 몸을 휘감는 게 느껴졌다. 냄새가 아닌 스산한 공기가 하숙집 1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기척이 느껴졌다.
시선이었다. 누군가 열린 문 앞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라나 부인이나 엔초는 아니었다.
“…….”
바로 앞에 사람이 서 있을 때 느껴지는 답답한 공기가 양 뺨에 와 닿았다. 낯선 침입자는 말소리도 내지 않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었다.
누구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손에는 무엇을 들고 있는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가.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저 위험한 침입자에게 보여 줄 반응을 재빨리 판단해 행동을 취하려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닫으십시오.”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나이는 마흔 전후로 추정됐으며 발음은 명료하고 뚜렷했다. 허락 없이 남의 집에 들어온 주제에 정중했다.
“당신에게 위협을 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공격을 해야 할까. 아니면 곧 가해질 공격에 대한 방어를 해야 할까. 로미오에게는 칼이 없지만 저자는 칼을 갖고 있을 수 있었다. 휘둘러지는 칼을 맨몸으로 막으며 주먹으로 제압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1층의 소란을 듣고 그라나 부인과 엔초가 깰 확률은 컸지만 두 사람 다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문을 닫은 뒤 잠가 주십시오.”
침입자의 지시에 응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우선 문을 닫았다. 그러나 문을 닫자마자 발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옷자락인 것 같아 발을 떼는데 그라나 부인의 손이 신발 끝에 차였다.
“향을 맡으면 기절하게 되는 약초물을 썼으니 몸에 해가 가지는 않을 겁니다. 의식이 돌아오는 데는 한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로미오는 볼 수 없었지만 문 옆의 바닥에 그라나 부인이 앉아 있었다. 편안한 자세로 벽에 등을 기대고 누워 있는 그녀는 정신을 잃고 눈을 감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이며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닥에 쓰러진 사람이 그라나 부인이라는 것을 안 로미오의 목소리가 매서워졌다.
“제 이름은 주세페 모파입니다. 통령 각하를 보좌하는 5인 중 한 명입니다.”
예상 밖의 정체였지만 로미오는 동요하지 않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무턱대고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당신은 위험한 방법으로 이 집에 침입하여 나이 든 부인을 공격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말을 무슨 근거로 믿겠습니까? 통령 각하의 보좌관이라는 자가 저를 찾아올 이유는 없으며 설사 찾아온다 하더라도 이런 방법을 쓰지는 않을 겁니다. 이 무슨 무례한 방문입니까?”
로미오는 주세페가 칼을 갖고 있을 가능성을 우려해 그에게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칼날에 옷자락이 스칠 때 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칼집이 씌워진 칼을 갖고 있는 사람이 흔히 내는 달그락거림도 들리지 않았다.
“노부인께 저희의 신분을 감춰야 했기에 약재상으로 위장했습니다. 더 은밀한 방법이 있었다면 그 방법을 택했겠지만 당신을 만나 보고자 하는 분의 존재를 극비에 부쳐야 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당신을 우리가 있는 곳으로 초대하는 것보다 이 방법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집 안에 당신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또 누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보다, 당신의 신분을 먼저 증명하십시오. 믿을 수 있는 근거라야만 당신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배포를 부렸지만 로미오는 온몸의 촉각을 날카롭게 긴장시키고 있었다. 위층에 엔초가 있었다. 저자는 그라나 부인에게 쓴 방법을 엔초에게도 썼을 것이다. 의심스러운 것은 약초물 향을 맡게 했다는 설명이었다. 실은 평범한 약초물이 아니라 독약을 썼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라나 부인이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라 서서히 죽어 가고 있는 것이라면?
“당신의 기억력이 비상하기를 바라겠습니다.”
주세페는 그렇게 말하며 층계 위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그곳에서 기다리던 체사레가 로미오를 향해 말했다.
“스포르차 선생의 집 앞에서 제게 편지를 받아 가셨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목소리를 들은 로미오는 미간을 좁히며 머리를 쳐들었다. 계단 위에서 들려오는 노신사의 목소리는 예전에 조반니의 집 앞에서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던 그 목소리였다. 품위 있고 점잖은 목소리였기 때문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 또한 통령 각하를 보좌하는 5인의 보좌관 중 한 명입니다.”
주세페는 체사레의 목소리에 대한 로미오의 반응을 살핀 뒤 말했다.
“증명이 됐다면 위층으로 올라가시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체사레가 그때 그 노인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여전히 주세페의 말을 믿지 않는 로미오였다. 그러나 자신은 한 명이었고 저들은 두 명이었기 때문에 이 이상 캐물으며 시간을 끌지 않기로 했다. 눈이 보였다면 위층에 있는 엔초의 안전을 확인한 다음 두 사람을 제압할 방법을 고민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위층으로 올라가기 전 허공에 손을 더듬어 그라나 부인을 찾아낸 로미오는 그녀의 코와 입 앞에 손을 대 몸에 별다른 이상이 없는지 살폈다. 편안한 숨소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수선한 겉옷을 그녀에게 덮어 줬다.
“들어가십시오.”
2층으로 올라가자 주세페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섰다. 로미오는 순순히 안으로 들어가 늘 놓는 자리에 지팡이를 세웠다. 그러면서도 엔초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동시에 집 안 어딘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상대의 기척을 느끼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고개가 향해 있는 곳에서 숨소리가 들려 누구냐고 물으려는데 꿈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목소리를 기억하는가?”
너무도 뜻밖의 목소리였기 때문에 절로 입술이 벌어지며 눈썹에 주름이 잡혔다. 일시적으로 엔초를 찾는 것을 잊은 로미오는 침묵에 빠져들었다. 환청을 듣고 있는 게 아니라면 방문자의 정체는 명백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이런 방법으로 귀관의 집을 찾은 점을 용서해 주게. 실례를 범했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로미오는 자세를 바로 하며 머리 위로 손을 올려 경례했다.
“예를 갖추지 못해 죄송합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통령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