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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몰락한 천재 (22/30)

22. 몰락한 천재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됐다. 하지만 방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똑똑, 똑똑. 작은 손이 열심히 나무 문을 두드려 댔지만 들려와야 할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형…… 자?”

엔초는 로미오의 방문 두드리는 것을 멈추고 문가에 귀를 댔다. 어떻게든 방 안의 소리를 듣기 위해 한껏 머리를 들이밀며 형, 하고 로미오를 불렀다. 몇 번이고 문을 더 두드린 끝에야 안에서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반쯤 열렸다.

아침인데도 방 안은 컴컴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엔초가 문틈으로 올려다보자 로미오는 비스듬히 옆으로 선 채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대답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끝이었다.

“나 다녀올게… 꼭 아침 먹어. 알았지?”

아래층에서 어서 내려오라는 그라나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미오의 부탁으로 그 대신 엔초의 아침 식사를 차린 그라나 부인은 엔초가 입을 옷도 손수 골라 주고 머리도 손봐 주었다. 그러는 동안 로미오는 방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엔초는 어젯밤 늦게 돌아온 로미오가 아침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를 걱정하며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애썼다.

“저녁에 그라나 할머니랑 스포르차 선생님이랑 넷이서 다 같이 저녁을 먹을까? 난 저번에 선생님이 해 주신 네베식 옥수수죽이 먹고 싶어. 형은 어때?”

엔초는 조반니도 당연히 오늘 이 하숙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애써 밝은 목소리로 즐거운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로미오는 이렇게만 대꾸했다.

“……어서 다녀와. 오늘 하루도 스승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

엔초는 어둠 속에서 로미오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로미오는 얼굴을 보여 주지 않고 돌아섰다.

“응… 알았어…….”

풀이 죽은 엔초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미오는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아래층에서 그라나 부인이 엔초를 배웅하는 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앉은 그는 벌린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얼굴을 감쌌다.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손을 더듬어 창을 열었다. 방 안으로 햇빛이 비쳐들자 흉하게 찢긴 침대와 이불이 드러났다.

지난밤 분노와 배신감을 이기지 못하고 칼을 휘두른 로미오는 아침이 될 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해 눈 밑이 어두웠다. 발치에 떨어진 칼은 로미오의 손에 멋대로 휘둘러지며 날 끝에 닿는 모든 것을 찢어 냈는데 팽개쳐져 있는 칼로부터 서너 발자국 떨어진 곳에 조반니에게 선물 받은 옷이 있었다. 여러 가닥으로 찢긴 옷은 넝마가 돼 널브러져 있었다.

부러진 로미오의 오른손가락은 심하게 부어올라 주먹이 쥐어지지 않았는데 발목도 사정이 비슷했다. 바짓단을 내리고 있었지만 크게 부어올라 한눈에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조반니를 죽일 수 없어 칼을 휘둘렀지만 로미오는 그 어떤 것도 해소하지 못하고 밤새 괴로움에 시달렸다. 술에 진탕 취한 것처럼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고 반복되는 생각에 분노를 폭발시켰다가 억누르기를 반복했다. 날이 밝아감에 따라 격했던 감정이 사그라들자 배신감과 분노만큼이나 뼈아픈 감정이 머리를 쳐들었다.

조반니를 잃었다는 것. 세상 그 누구보다 믿고 의지했던 그를 잃었다는 사실이 증오심만큼이나 절절히 다가왔다.

상실감이 사그라들고 난 다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에게 속아 온 스스로를 향한 패배감이 마음을 괴롭혔다. 눈이 멀쩡했다면 처음부터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의 무능함을 한없이 탓하게 됐다.

조반니를 향한 복수심 때문에 옷장에 넣어 두었던 장검을 꺼내기까지 했다. 조반니가 자코모의 살인 혐의를 자백하는 것으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생각에 애써 마음을 다스렸으나 금방이라도 칼을 들고 조반니의 집을 찾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반니가 공안국에 모든 사실을 자백한다면 그는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는 약삭빠르고 비겁한 자니 어렵지 않게 사형을 면할 것이다.

조반니가 가진 사회적 평판을 고려할 때 바치가 얼마나 떠들썩해질지 예상했지만 그가 저질러 온 악행에 제동을 걸어야만 하는 데다 이렇게라도 자코모에게 사죄를 하고 싶었다. 그가 무고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그의 억울함을 푸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앞으로 또 다른 누군가가 조반니의 덫에 걸려 살해당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었다. 더 많은 이들이 조반니의 실체를 알아야만 했다. 혼자로는 역부족이니 조반니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과 감시자 역할을 나눠 가져야만 했다.

사흘이 지나면 조반니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살인자라는 꼬리표가 그의 명성과 지위를 어디까지 추락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나 전과 같을 수 없음은 분명했다.

그는 더 이상 자애롭고 친절한 만인의 의사로 남을 수 없을 것이다.

* * *

“목 잘린 시체라니, 어휴, 끔찍해라. 더군다나 공안국 간부라잖아. 간부라는 자가 그렇게 당할 정도면 보통이 아닌 거야.”

“심지어 시체가 그자 하나인 게 아니라더군. 이웃 소녀와 노인까지 두 구가 더 있다고 해. 셋 다 같은 방식으로 살해한 게 확실해. 지금 죄다 그 집으로 몰려가 구경 중이라고! 듣자 하니 지붕이 완전히 새까맣게 타 버렸다는데.”

“이런 끔찍한 살인 사건은 살면서 들어 본 적이 없어.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 수가 있담? 목을 잘라 죽인 것도 모자라 집에 불까지 지르고 말이야.”

무리 지어 지나가는 사람들은 오늘 아침 바치 시내 일대를 장악한 무시무시한 살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로 목청을 높였다. 시민들은 물론 시장의 상인들과 매일 아침 정부 청사로 등청하는 청사 사람들도 이번 살인 사건에 대해 입을 놀리기 바빠 어딜 가나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바치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잔인한 살인 사건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골목을 걷는 저택 관리인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걸음을 빨리했다. 골목을 돈 후에도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어느 바느질 가게 앞이었다. 분주히 일하는 문하생들이 창 너머로 보였다.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천을 정리 중이던 소녀가 인사했다.

“선생님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저택 관리인은 가게 안쪽 방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들리자 웃옷 속에 손을 넣으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품속에서 꺼낸 것은 둘둘 말린 종이였다.

“앉아서 기다리시게.”

선반 앞에 서서 오래된 바느질 교본을 들여다보는 엘베라의 말에 저택 관리인은 의자를 빼내 앉았다. 등을 보인 채 서서 계속 교본을 읽던 엘베라가 의자에 앉은 것은 잠시 뒤였다. 그녀는 교본 사이에 들어 있던 종이 여러 장을 탁자 위에 펼쳤는데 종이엔 페이지마다 음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저택 관리인이 둘둘 말린 종이를 펼치자 거기에도 음표가 적혀 있었다.

“어젯밤에 지하실에서 추가로 발견했습니다. 절반가량 적혀 있었기 때문에 필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탁자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은 전부 악보였는데 저택 관리인의 손에 든 악보에는 이런 제목이 붙어 있어 있었다.

<상급자를 위한 바이올린 독주곡>

친애하는 잔니에게, 고양이의 주인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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