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파국
순간 로미오는 자신이 지금껏 지하실의 존재를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곳은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미지의 장소였다. 조반니에게 허락을 받은 적은 없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곳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몰래 둘러볼 수 있다면 그러는 편이 좋았기 때문에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고리를 소리 나지 않게 돌리며 방 밖에 귀를 기울이자 관리인이 지하실에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계단을 올라와 3층으로 향하는 소리를 문 뒤에서 듣던 로미오는 관리인의 방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방 밖으로 나갔다. 절뚝거리며 복도를 걷다 벽을 짚고 계단을 내려갔다. 굴러떨어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1층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엎드려 손으로 지하실 계단의 입구를 확인했다.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뒤 발을 내려 계단의 높이를 확인한 로미오는 벽에 의지해 한 칸씩 내려갔다. 볼 수 없는데도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계단을 절반가량 내려갔을 때 지하실의 넓은 공간이 펼쳐지며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벽을 짚고 있는 손에 뭔가가 걸려 만져 보니 종이였다. 벽에 걸려 있는 것으로 봐 편지나 서류는 아닌 것 같았다. 그림일 가능성이 컸지만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포기하고 계단을 전부 내려갔다.
바닥에 발을 디디자 냉기가 느껴졌다. 이 지하실에서 유용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역시 눈이 보이지 않으니 무리였다.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이 처음 와 보는 장소를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하실의 구조를 모르는 상황에서 탁자 위에 놓인 물건들을 살펴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간단히 둘러보기만 하자는 생각에 벽을 따라 걷는데 손끝에 나무 막대기 같은 것이 닿았다. 손잡이로 추정되는 부분이 만져져 손으로 더듬은 로미오는 의아함에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자신의 지팡이였다.
“지팡이가 왜 여기에…….”
관리인이 가져다 놓았을 리는 없었다. 자신은 분명 어젯밤에 침대 옆에 지팡이를 걸쳐 두었고 오늘 아침에 관리인에게 물어봤을 때 그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설마 조반니가 가져다 놓은 것일까.
지팡이가 여기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어 일단 내버려 두고 벽을 좀 더 더듬었다. 그러다 발치에 놓여 있는 나무 상자를 보지 못해 발이 걸려 넘어졌다. 손으로 바닥을 잘못 짚으며 넘어진 탓에 손바닥이 쓸려 몹시 쓰라렸다.
손바닥을 감싼 로미오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에 다시 벽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 차가운 대리석 조각상을 손끝으로 찾아냈다.
손을 내려 더듬어 보니 조각상은 둥근 나무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탁자 위에는 각종 붓과 끌이 놓여 있었다. 사람의 진짜 머리 크기와 동일한 조각상은 아직 덜 깎인 것처럼 느껴졌다. 조반니의 작업물인 것 같다고 추측하는데 자신의 얼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이마와 코를 자세히 더듬었지만 아니었다. 예리한 모양으로 다듬어진 콧대는 자신과 전혀 달랐다. 날카롭고 단단한 얼굴 윤곽을 가진 조각상은 풍성한 머리칼과 목젖이 뚜렷한 굵은 목을 갖고 있었다. 얼굴 전체를 몇 번이고 반복해 만지는데 불현듯 이 조각상이 조반니 자신을 본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그의 얼굴을 만졌을 때 손끝으로 느꼈던 생김새를 기억했다. 눈썹뼈의 모양과 눈두덩이의 파임이 특히 비슷했다.
조각상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손을 더 더듬어 지하실을 돌아다녔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있다고 해도 볼 수 없으니 여기서 시간을 더 보내 봐야 소용이 없었다.
그만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1층의 정원 문 너머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하실의 벽을 타고 들려오는 그 소리는 조반니의 목소리였다. 누구를 찾아오셨습니까? 그는 집 밖에서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물었다. 집 앞에 막 도착해 낯선 손님과 마주친 것 같았다.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 계단을 올라가는데 별안간 뭔가를 바닥에 집어 던지는 소리가 이어 들렸다. 조반니인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거세게 문에 몸을 부딪치는 소리도 들렸다. 격양된 조반니의 목소리에 위층에서 관리인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상체를 숙여 지하실의 어둠에 몸을 숨기자 관리인은 그대로 지나쳐 정원으로 나갔다.
계단을 전부 올라가자 목소리는 더 선명하게 들렸는데 싸움을 하는 것 같았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조반니가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목소리가 거칠었다. 관리인이 진정하라며 말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조반니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젊은 사내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괴로운 신음을 흘렸는데 그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가까스로 대답하고 있었다.
정원으로 난 문을 열자 조반니의 목소리가 저택 입구의 문 너머에서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또다시 이런 것을 보낸다면 공직에서 추방당하게 만들어 드릴 테니 가서 전하십시오. 제 말이 우습다면 어디 한번 해 보시든지요.
조반니의 협박에 상대가 뭐라 말하며 떠나자 조반니는 저택 문을 반쯤 부수듯이 홱 열며 들어왔다.
“바닥을 깨끗하게 치우고 만약 저자가 또 찾아온다면 그 즉시 쫓아내십시오!”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관리인에게 지시하던 조반니는 로미오가 문 앞에 서 있자 말을 멈췄다. 로미오는 볼 수 없었지만 그는 분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문 앞에서 누구와 이야기를 하신 겁니까?”
로미오의 물음에 조반니는 험상궂게 인상을 쓰면서도 억지로 흥분을 다스렸다.
“바르톨루치 위원에 관한 일을 왜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그자의 비서가 방금 편지와 선물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바르톨루치 위원이 대위님께 비서 일을 제안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로미오에게 가까이 다가온 조반니는 감정을 누르기가 어려워 심호흡을 했다. 그는 로미오를 걱정하는 동시에 프란코와 그의 비서를 경멸하고 있었다. 숨소리와 목소리에서 그 여파가 엿보였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화내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 진정하십시오.”
“편지에 모욕적인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바르톨루치 위원이 넓은 아량을 가진 자인 줄로 알았는데 정신이 어떻게 되었나 봅니다. 대위님의 앞으로 온 편지를 멋대로 뜯은 것은 사과드리겠습니다만 편지의 내용을 보고 도저히 그냥 참을 수가 없어 갈기갈기 찢어 버렸습니다. 비서가 갖고 온 선물은 바닥에 던져 망가뜨렸습니다.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것이 과자라 먹을 수 없게 됐지만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대위님께서 그런 더러운 과자를 드시게 놔둘 순 없으니까요.”
“예… 저도 바르톨루치 위원의 선물을 받을 마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편지에 무슨 말이 적혀 있었습니까?”
“대위님의 목소리가 아침마다 환청처럼 들린답니다. 자신의 시중을 들고 몸을 씻겨 주는 것이 늙은 시종이 아니라 대위님이기를 바란다는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낮잠을 잘 때마다 어김없이 꿈에 대위님이 나오는데 그 꿈속에서…… 하아…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늙어서 망령이 든 게 아니라면 절대 그런 말을 편지에 적어 보낼 수 없을 겁니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화를 참는 것 같던 조반니는 있는 대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꿈에 나올 것처럼 무섭게 표정을 구긴 그는 품 안에 든 상자를 꽉 껴안으며 저택 문을 노려봤다.
“도저히 참을 수 없군요! 내일 아침에 날이 밝는 대로 편지에 적힌 망언을 토대로 정부 청사에 투서를 넣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바르톨루치 위원을 31인 위원회 자리에서 끌어내리겠습니다. 평생 두 번 다시 공직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겠습니다. 비서라는 그자도 한통속이니 똑같이 만들어 버리겠습니다.”
상상만으로 이미 프란코의 머리 가죽을 벗겨 버린 조반니였다. 편지를 본 순간 눈이 돌아가 비서의 멱살을 잡고 그를 벽에 처박은 조반니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방에 있는 칼을 생각하고 있었다. 로미오가 없었다면 정말로 칼을 갖고 내려와 방금 막 저택을 떠난 비서의 뒤를 쫓아갔을 것이다.
“아니요, 그러지 마십시오. 바르톨루치 위원이 제게 비서 일을 제안한 것은 맞으나 거절했으니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그와 두 번 다시 만날 일도요.”
“마음 같아서는 그자에게 받아 온 책을 짓밟고 불태워 버리고 싶습니다. 그자가 대위님께 책을 준 이유가 따로 있었다고 생각하니 그 책을 받은 저 스스로가 염치없는 무뢰배처럼 느껴집니다. 그 역겨운 책을 제 책장에 둬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대위님께서 바르톨루치 위원의 초대를 받아 저택에 찾아갔던 날 그자가 대위님을 보며 그런 불순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그 어떤 것보다 저를 화나게 합니다.”
말을 하는 동안 감정이 점점 격해진 조반니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더한 말을 했다.
“왜 이 세상 모든 이들이 제 마음 같지 않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왜 저는 대위님께서 그런 말을 듣고 계실 때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는 것일까요? 대위님께서 제 손바닥만 한 크기로 작아지신다면 저는 매일 제 겉옷 호주머니 속에 대위님을 넣어 다닐 겁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조금 전의 그 더러운 편지 같은 것을 받을 일도 없을 테지요. 바르톨루치 위원 같은 노망난 노인을 처음부터 만나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조반니는 말을 마치고도 격한 감정을 해소하지 못해 불쾌감을 드러냈다. 로미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혼자 씨근덕대며 이마를 쓸었다. 그러다 로미오의 손을 보고 놀라 물었다.
“손바닥을 다치셨군요. 어쩌다가 다치신 겁니까?”
사람을 고용해 프란코를 살해해 버리겠다고 마음먹은 조반니는 옷 속에서 얼른 손수건을 꺼냈다. 로미오의 손바닥은 어딘가에 쓸려 핏방울이 작게 맺혀 있었다.
“상처에 바를 약초가 제 방에 있으니 얼른 위층으로 올라가시지요.”
로미오는 조반니의 다정한 목소리에도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손을 가져가 손바닥에 난 상처를 손수 닦아 주고 반대 손에도 상처가 있지는 않은지 꼼꼼히 살피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다가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께 긴히 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시간 괜찮으십니까? 긴 이야기가 될 겁니다.”
“무슨 이야기인가요?”
“올라가서 말씀드릴 테니 옷을 갈아입고 제 방으로 오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 전에 발목을 조금만 살펴보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발을 보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조반니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아침에 비해 붓기는 다행히 가라앉았네요. 하지만 밤새 통증은 계속될 겁니다.”
조반니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발목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평소였다면 그의 상냥함에 멋쩍음을 느꼈겠지만 지금 로미오는 그런 것을 느끼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약초를 새로 발라야겠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드문드문 대위님의 방으로 찾아가 발목의 상태를 살필 테니 제가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지더라도 신경 쓰지 마시고 푹 주무세요. 가능한 한 조심히 방을 드나들겠습니다.”
“예… 감사드립니다.”
“그럼 올라가실까요?”
조반니는 로미오를 부축해 계단을 올라가며 망토 자락을 털었다. 손끝으로 툭툭 쳐 정리하는 습관적인 태도였기 때문에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조반니에게 몸을 기대고 계단을 오르던 로미오는 순간 표정이 얼어붙었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자 순간적으로 몸을 휘청이게 됐다. 머리를 깊이 숙이며 숨을 삼켰지만 어젯밤 바로 이 계단에서 느꼈던 기이한 감정이 다시 솟구쳤다. 마음속 호수에 가라앉아 있던 마지막 기억의 조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저 소리. 망토를 터는 저 소리. 손으로 두 번 쳐 옷자락을 정리하는 소리.
그때와 똑같았다. 검은 망토의 사내가 두 번째 겁탈을 위해 하숙집으로 침입했을 때. 그는 문 앞에 서서 정확히 손으로 두 번 망토를 털었다.
여태 잊고 있었던 그 사실이 조금 전 조반니가 그의 망토를 정리한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대위님?”
몸이 경직된 로미오는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뒤로 물러설 수도, 걸음을 떼지도 못한 채 조반니의 어깨에 팔을 두른 상태로 계단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더 이상 우연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믿을 수 없었다.
너무도 많은 증거들이 단 한 가지 진실을 동시에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이 의심이 결코 의심이 아니라고 입 모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왜 그러시죠?”
“…….”
“대위님?”
조반니는 굳어진 로미오의 얼굴을 살폈지만 로미오는 표정이 보이지 않도록 머리를 떨궜다. 급격히 어두워진 낯빛으로 그대로 서 있던 그는 한참 만에야 겨우 입을 벌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따라 이상하시군요.”
조반니의 부축을 받아 계단을 전부 올라간 로미오는 그가 자신을 방 앞으로 데려다주자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섰다.
“……옷을 갈아입고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조반니는 이상한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싱긋 웃었다.
“얼른 오겠습니다.”
조반니는 로미오가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선물을 줄 생각에 마음이 급해 더는 묻지 않고 3층으로 올라갔다. 한쪽 팔에 몰래 끼고 있던 구두 상자를 고이 들고 올라가 미리 써 놓았던 편지를 서랍에서 꺼냈다.
이 구두가 대위님을 좋은 곳으로만 데려가 드릴 겁니다. 존경과 애정을 담아, 조반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