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악몽 (20/30)

20. 악몽

“오늘은 침대 밖으로 나오시면 안 됩니다. 되도록 발목을 움직이지 마시고 이렇게 앉아만 계셔야 합니다.”

조반니는 바짓단을 걷고 앉아 있는 로미오의 옆에 붙어 그의 발목에 헝겊을 감았다. 어느새 동이 터 창밖에서는 새소리가 들렸다.

부목을 댄 로미오의 발목은 겉보기에도 크게 부어올라 있었다. 약초가 발라져 헝겊 안쪽에서 코를 찌르는 약초 냄새가 났다. 부러진 뼈를 바로 잡기 위한 모든 처치를 끝냈으나 밤사이 발목의 붓기는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밤새 로미오의 방을 떠나지 않고 그의 다리를 살펴본 조반니는 발목뼈가 부러졌다고 판단했다.

“약종상을 시켜 집으로 몇 가지 약을 보내 놓겠습니다. 1층으로 내려오셔서 약을 받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병원으로 가는 길에 저택 관리인의 집에 들러 오늘은 특별히 아침부터 와 달라고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갈고리 고양이 술집에도 들러 대위님의 사정을 설명하며 최소한 열흘은 쉬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감사드립니다.”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한 로미오는 안색이 극도로 어두웠다. 잠을 자지 못한 이유는 발목의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 지난밤 조반니에게서 맡았던 비 냄새와 그의 체취가 마음을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아침을 먹을 생각도 들지 않아 조반니가 가져다준 수프와 빵을 몇 입 먹지 않고 치워 둔 뒤 그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이 모든 것이 결코 착각이나 우연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제 실수로 대위님께서 이리되신 것을 보니 제 어리석음을 탓하지 않을 수 없군요. 어쩌자고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던 걸까요? 대위님의 뒤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갔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휴, 정말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일부러 그러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간신히 대답했지만 로미오는 머릿속이 어지러워 조반니와의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정황들이 말해 주는 한 가지 결론을 믿고 싶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착오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조반니를 의심하는 것이 미친 짓이라는 걸 알았다. 그를 상대로 의문을 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조반니에게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전날 밤의 일은 꿈이 아니었다. 전혀 연결 고리가 없는 각각의 다른 인물이 한 사람이라고 느껴질 만큼 유사한 체취와 숨소리를 갖고 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단순한 의심에 불과하고 명백한 증거가 없는 가짜라 할지라도 그날의 목격자인 자신이 느낀 이 직감만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 부정하기가 어려웠다.

“곧 아침을 먹을 시간인데 오늘따라 엔초가 늦게 일어나네요. 저는 엔초를 깨워 놓고 이만 가겠습니다. 엔초가 먹을 아침은 모두 차려 놓았으니 걱정 마세요.”

“……고맙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오늘은 일찍 들어오겠습니다.”

“……예. 다녀오십시오.”

침대에 앉아 조반니가 방을 나가는 소리를 듣던 로미오는 문이 닫히고 나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복도 너머에서 그가 엔초의 방으로 들어가 엔초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여닫히고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1층의 정원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집 안이 고요해지자 로미오는 다친 오른쪽 발목을 몸쪽으로 끌어당기며 두 팔로 몸을 감쌌다.

놓친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밤새 수십 번도 더 겁탈당하던 당시의 기억을 되살렸던 로미오였다. 행위 중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는 동안 흡사 다시 겁탈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잠을 자지 못해 정신이 명료하지 않은 데다 믿지 못할 의심을 하고 있는 탓에 마음을 가다듬기가 힘들었다. 간밤의 일이 악몽처럼 느껴졌다. 침착함을 찾으려 애쓸수록 혼란만 가중돼 몇 번이고 숨을 가다듬고 나서야 밤새 정리한 생각을 차분히 하나씩 떠올리는 게 가능해졌다.

현재로서 네 가지 단서가 있었다. 혼란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으니 그 단서들을 정리해야 했다. 새벽 내내 조반니가 이 방을 계속 드나들어 생각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으니 그가 없는 지금 해야 했다.

첫째로, 검은 망토의 사내는 끝자락이 휘날리되 바닥에 끌리지 않을 정도의 긴 망토를 입고 다녔다. 하숙집의 3층 벽에서 발견된 그 망토에는 모자가 달려 있었는데 망토에서는 어젯밤 조반니에게서 맡은 체취가 났다.

둘째로, 그는 체격이 좋았다. 자신보다 반 뼘 가까이 크거나 혹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건장했다. 왜소하고 볼품없는 몸을 가진 것이 아니라 기골이 탄탄한 몸을 갖고 있었다.

셋째로, 그는 자신이 장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위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으니 자신을 알고 있는 주변부의 인물이 확실했다. 자신을 표적으로 노리고 신분을 알아내 겁탈 중에 대위님이라고 불렀을 가능성도 있으나 이런 상황에서 그 가능성은 일단 덮어 두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이것만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진실이었다. 구체적으로 확정 짓고 싶지 않아 간밤 동안 생각을 미루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자의 눈 색깔.

검은 망토의 사내는 금색 눈을 갖고 있었다. 첫 번째 겁탈에서 그의 눈을 마주 봤던 것을 기억했다. 어두운 골목이었지만 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똑똑히 봤다.

모든 단서를 종합해 보면 자신을 겁탈한 사내는 검은 망토를 갖고 있고, 체격이 좋으며, 자신을 대위님이라고 불렀고, 비에 젖었을 때 독특한 체취를 풍기는 데다 금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아니다. 앞서 나갈 수는 없었다. 우연일 수도 있으니 섣불리 단정 지어서는 안 됐다. 그 누구도 쉽게 믿지 못할 희박한 확률로 우연히 여러 요소들이 일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반쪽짜리 진실이다. 조반니가 이 사건과 무관하다는 증거를 찾지 못한 상태로 오로지 한 가지 의심만 하고 있으니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찾으려 한다면 조반니가 이 사건과 관계가 없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선량한 의사이자 이웃이자 자신에게 마음을 고백한 유일한 사람으로 남겨 두고자 하는 노력 없이 일방적인 생각에 매몰되는 것은 정당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진실처럼 보이지만 진실이 아닌 것들이 있었다. 이 의심에는 분명 모순이 있을 것이다.

모든 단서가 조반니에게 너무나도 잘 들어맞았지만 자신이 무시하고 지나쳐 버린 것이 있다고 믿었다.

이런 의심을 했다는 사실이 우습게 느껴질 만큼 너무도 명백히 반대되는 증거가 어딘가에 있을지 몰랐다. 자신의 마음속에 피어오른 조반니의 죄를 씻어 줄 강렬한 진실 말이다. 그가 이 사건과 결코 관련이 없음을 증명해 줄 단 하나의 진실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여전히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조반니를 의심하게 된 이 상황이 끔찍한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아닐 것이라고 그 누구보다 강하게 믿고 싶어 하는 마음과 이 의심이 사실인지를 밝혀내기 전까지 속단할 수 없다는 마음이 충돌했다. 누군가 나서서 자신에게 조반니가 범인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자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때려눕혀 두들겨 패 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인정할지 몰랐다. 자신 역시 그를 의심해 왔다고.

조반니는 불과 며칠 전에 그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직접 사 온 다디단 사과주를 건네며 그의 애틋한 마음을 부드러운 말로 고했다. 그런 그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의심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이런 의심을 하는 것은 조반니에게도 실례였지만 그를 믿고 있는 자신에게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행위였다.

추후에 모든 것이 우연이고 단지 착각이었음이 밝혀진다고 해도 마음에 남은 이 생채기만은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장 믿고 의지해 온 이에게서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얼룩을 남긴 끔찍한 기억을 엿본다는 것은 괴로운 경험이었다. 조반니와 검은 망토의 사내에게서 공통점을 눈치채고, 부정하고, 의심하고, 믿지 않으려 수십 번도 더 생각을 고쳐먹는 것은 마음이 후벼 파이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과 같았다.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칼질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무관하다면 어젯밤 그런 착각에 빠진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조반니와 검은 망토의 사내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이라면 왜 자신은 계단 통로에서 로사티 1번가 포목점의 악몽을 엿본 것인가. 도대체 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그 망토로 확인을 해 보는 것. 이 비참한 의심의 종지부를 찍을 방법은 그 방법밖에 없었다. 망토를 갖고 와 이것이 단순히 의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자. 그렇게 해서 이 정신 나간 의심을 거두고 잠깐이나마 조반니를 의심했던 것에 대해 묵언의 사죄를 하자.

발레리아를 찾아가자.

찾아가서 망토를 받아 오자.

“……형.”

문이 열리고 문틈 너머에서 엔초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미오는 창백한 안색을 감추기 위해 뺨을 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늦게 일어났구나. 어서 밥을 먹고 화실에 갈 준비를 해.”

“많이… 다쳤어? 아파?”

걱정스러워하기 때문인지 엔초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큰 불안감을 느끼는 것처럼 들렸다. 로미오는 어떻게 날이 밝았는지 모를 만큼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통증이 그리 심하지 않으니까 걱정 마. 선생님께서 약도 발라 주셨어. 오늘 하루 동안은 일어날 수 없겠지만 네가 걱정할 정도로 다친 게 아니야. 괜찮으니까 어서 아침을 먹고 화실에 가.”

우물쭈물하던 엔초는 복도를 돌아본 뒤 문을 닫고 들어왔다. 문고리를 잠그려는 것처럼 꼭 밀어 닫는 소리에 로미오는 엔초가 앉을 수 있도록 침대에 자리를 마련해 줬다.

“걱정이 많이 되는구나. 이리 와.”

머뭇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엔초가 품 안으로 뛰어 들어와 가슴에 안겼다. 뺨을 묻으며 세게 끌어안는 엔초의 포옹에 로미오는 등을 안아 주었다.

“괜찮대도.”

엔초는 얼굴을 더 깊게 묻더니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볼 수 없지만 로미오는 엔초가 자신의 눈을 보고 있다고 느꼈다.

“……어쩌다가 계단에서 넘어진 거야?”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어. 하지만 정말로 괜찮아. 크게 다치지 않았어. 이것 봐.”

엔초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목을 댄 발목을 보여 주던 로미오는 자신의 등을 안고 있는 엔초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상함을 느끼려는 찰나 엔초가 입술을 작게 달싹이며 말했다.

“나…….”

엔초는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걱정하는 것처럼 문을 돌아봤다. 말을 잇길 어려워하는 모습에 로미오는 손을 더듬어 엔초의 뺨을 쓸었다.

“왜 그래? 할 말이 있어?”

“…….”

“해도 돼. 무슨 할 말이야?”

한참을 말없이 안겨 있던 엔초는 주저하며 말했다.

“나… 어젯밤에 형이 선생님이랑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서 잠에서 깼어. 1층 정원에서 말소리가 들려서…… 그래서 자다가 깼어.”

“그래? 그랬었구나. 몰랐네. 그런데?”

“침대에서 일어나서 복도로 나가려고 했어… 형이랑 선생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듣고 싶었거든. 내가 방문을 열었을 때 선생님이 계단을 막 올라오고 계셨는데…….”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듯 엔초는 말끝을 흐렸다. 겁을 먹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등을 안고 있는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가자 로미오는 엔초의 몸을 감싸 안았다.

계속 이야기해 보라고 말하려는데 엔초가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형을 계단 밑으로 미는 걸 봤어…….”

순간 로미오는 엔초의 등을 감싸고 있던 손을 멈췄다.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선생님이 형을 민 게 맞아. 선생님이 팔로 형을 이렇게 밀었어.”

표정이 남아 있던 로미오의 얼굴은 차갑게 얼었다. 그는 엔초에게 잘못 보았을 것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대신 그대로 굳었다.

“…….”

엔초는 로미오가 무슨 대답이라도 해 주길 바라며 끈질기게 로미오의 눈을 봤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얘기해 주길 바랐다. 어젯밤 본 그 장면은 악몽을 불러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가히 충격적이었다. 조반니가 로미오를 계단에서 밀 리가 없는데 그 순간이 포착된 것이었다. 실수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또렷이 그 장면을 본 까닭에 겁이 났다. 오늘 아침에 일부러 늦게 일어난 척 방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형을 일부러 민 것 같았어. 장난을 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실수로 그런 것도 아니야. 선생님이 이런 식으로…… 형? 내 말 듣고 있어?”

엔초는 팔로 로미오의 가슴을 떠미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도 로미오가 그럴 리가 없다고 얘기해 주길 바라는 것처럼 간절히 눈빛을 보냈다. 자신이 본 것을 믿고 싶은 마음과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스스로의 판단으로는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어른인 로미오가 대답을 내려 주길 바랐다. 조반니가 계단에서 로미오를 밀어 다리를 부러뜨렸다는 사실은 상상만으로도 무서웠다. 그래서 한 번 더 확실히 말했다. 로미오가 단호하게 반박해 주길 바라서.

“선생님이 왜 그러신 거야?”

다른 때 같았다면 대수롭지 않게 엔초가 잘못 봤을 것이라고 말했을 로미오였다. 엔초는 잠에서 막 깬 상태였고 시각은 어두운 밤이었던 데다 뒤를 돌아선 조반니에게 실수로 부딪친 것은 로미오 자신이었다. 무엇보다 조반니가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엔초가 잘못 본 것이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

하지만 지금 로미오는 엔초가 헛것을 보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계단에서 자신을 밀었다는 말을 엔초의 착각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은 그와의 사이에 견고히 쌓여 있던 믿음에 금이 갔기 때문이었다.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이런 문제들로 조반니를 의심하고 있는 이 상황 자체에 로미오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어젯밤을 기점으로 하루아침에 조반니가, 아니, 그를 대하는 자신이 달라졌다. 마음 한구석에 조반니가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피어나고 있었다. 자신이 그에 대해 전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의심도 함께였다.

여태 자신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이면이 조반니에게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그가 자신을 계단에서 밀었을 확률도, 검은 망토의 사내와 관련이 있을 확률도 강하게 부정할 수 없었다.

의심이라는 것은 악마가 심은 씨앗과도 같았다. 땅속에 맹렬히 뿌리를 내리고 한 번 싹을 틔운 이상 절대로 그 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었다.

다른 모두가 조반니를 의심하는 상황이 닥쳐도 끝까지 그를 지지하며 믿을 정도로 조반니를 깊이 신뢰했던 로미오는 어젯밤 자신의 마음 안에 뿌리내린 의심의 씨앗에 그 자신도 모르게 물을 주고 있었다.

“……네가 잘못 본 걸 거야.”

엔초를 달래기 위해 그렇게 말했지만 로미오의 뺨은 파리했다. 무엇하나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상태로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발목의 통증에 버금가는 가슴의 둔통이 느껴졌다.

“……선생님께선 그런 짓을 할 분이 아니시잖아.”

“응. 그렇긴 하지만…….”

“앞서서 먼저 계단을 올라가시던 선생님께 내가 부딪쳤던 거야. 어젯밤에 네가 본 건 착각이니까 겁먹을 필요 없어.”

“……역시 그렇겠지? 선생님이 그런 무서운 짓을 하실 리가 없으니까…… 선생님은 좋은 분이신데.”

“그래. 그러니까 어젯밤 일은 잊어버려.”

로미오는 두 팔로 엔초를 안았다. 머뭇거리며 안겨 오는 엔초는 아직도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어깨를 몇 차례 떨었다.

“그만 아침을 먹고 화실에 갈 준비를 해. 나는 다리 때문에 이 방에서 나갈 수 없어. 혼자서 식사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지?”

* * *

문하생들이 기거하는 방 너머에는 응접실이자 서재로 이용하는 방이 있었다.

한때 빼곡히 책이 꽂힌 책장으로 가득했던 그곳은 현재 손님들과 담소를 나누는 공간으로 사용됐다. 어려서 상당한 책벌레였던 방의 주인은 더 이상 그때만큼 책을 읽지 않는 데다 바느질 가게의 주인이 돼 있었기 때문에 책장은 오래전에 치워져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방 안에는 갖가지 직물들이 쌓인 선반이 들어차 있었다.

“하슬러 공국 출신의 떠돌이 용병이라고 합니다. 이브 헤스라는 이름에 대해 들어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엘베라는 이른 시간에 찾아온 레오나르도를 위해 차를 끓였으나 두 사람 다 찻잔에는 입을 대지 않고 있었다.

이 시간에 늘 그렇듯 바느질 가게는 문을 닫고 있었다. 느지막한 오후가 되어서야 일을 시작하는 엘베라였다. 그녀의 조수 역할을 하는 몇 명의 소년·소녀들만이 문 너머에서 색색의 천을 정리하며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평범한 바느질 가게의 조수가 아니었다. 엘베라가 손님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누군가 가게를 방문하면 완곡한 말로 돌려보내는 것 외에도 다양한 일을 했다.

“이브 헤스라. 글쎄. 들어 본 것도 같군. 한데 그 별 볼 일 없는 용병 하나 때문에 이런 이른 아침에 나를 찾아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젯밤 군에 체포됐다던 그자가 평범한 민중이라는 사실은 자네도 알 것이야. 설사 그자가 올빼미라 하더라도 자네는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와 야단을 떨 성미가 아니지.”

“그자가 알피에리 대위와 잘 아는 사이더군요.”

엘베라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그를 의심하는 것인가?”

레오나르도는 잠시 말이 없다가 계속 이야기했다.

“그를 향한 최초의 의심은 제게서 시작된 게 아닐 겁니다. 선생님께서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레오나르도는 엘베라와의 관계를 위장할 필요가 있을 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엘베라의 나이는 쉰에 가까웠고 레오나르도는 그녀와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났으니 적당한 호칭이었다.

“알피에리 대위가 올빼미가 되던 날 선생님께서도 느끼신 바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추가 질문을 하신 것이겠지요. 지금껏 입회식에서 진실의 질문 다섯 가지 외에 추가 질문을 받은 자들이 몇이나 있었던가요.”

“자네는 그를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군. 그렇지? 그가 하슬러 공국 출신의 용병에게 정보를 흘려 은연중에 가담시키는 것이라고 가정했을 때 현재로서 그 가정을 무너뜨릴 반대 격의 증거가 없기에 막연히 추측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일피에리 그자에게 다른 뜻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로 말이야.”

“제6군단의 장교는 포섭하기 까다로운 상대라 조직 내에서 오랜 숙고의 대상이었습니다. 입회를 했다고 해서 그 어떤 의문도 제기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는 우리의 손으로 직접 받아들인 새 올빼미네. 그를 시험할 기회는 조직원들의 거수를 통해 정해졌어. 입단도 마찬가지지. 자네 역시 그날 그의 입회를 지지하지 않았나?”

“제가 그의 입회를 동의한 것은 조반니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입회식 날 그자가 내놓은 대답은 제 결정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자가 명쾌하지 않은 대답을 내놓았더라도 저는 손을 들었을 겁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조반니를 신뢰할 줄은 몰랐군. 하지만 그런 발언은 새 올빼미의 입회 결정 권한을 가진 상위 단원에게 적합하지 않으니 삼가게. 그날 여섯 가지 질문을 통해 우리는 궁금증을 해소했고 이제 와 근거 없이 그를 의심하는 것은 분란만 일으킬 뿐이야.”

“그의 자격을 면밀히 시험하기 위해 마지막 추가 질문을 한 것은 선생님이십니다. 입회 당시에는 그를 신뢰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완전히 믿으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자네야말로 그날 조반니에 대한 믿음으로 찬성표를 던졌으나 알피에리 그자가 하슬러 공국의 용병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의심하는 것인가? 혹 그자가 꼬리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대한 근거가 있다면 이 자리에서 말하게.”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저는 어제의 그 일로부터 어떤 결론을 이끌어 내려는 게 아닙니다. 단지 알피에리 대위를 상대로 품은 의문이 얼마나 쉽게 해소 가능한 종류의 것인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선생님이라면 판단을 내려 주실 것 같아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레오나르도가 갖고 있는 근거라고는 로미오와 이브의 친분이 유일했다. 이는 의심의 이유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빈약했으며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사소했다. 로미오가 입단한 이상 한 번쯤은 그를 시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이곳까지 찾아온 레오나르도였지만 그 자신도 전적으로 로미오를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는 상위 단원인 조반니에게 포섭되어 입회를 치렀고 그 과정에서 아무런 문제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엘베라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자네는 알피에리 그자 하나만을 의심하는 것인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로미오를 향한 의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엘베라는 돌연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하려던 말을 뒤로 미루려는 것처럼 화제를 돌렸다.

“현재 통령을 살해할 방법으로 독초를 고려 중이네. ‘광인의 종’이라 불리는 식물에 대해 들어 보았나? 종 모양을 한 맹독성 식물로 루바노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데다 수십 년간 약초학을 공부한 자들이나 알 법한 희귀 식물이지. 그걸 먹으면 광인처럼 날뛰다 죽어 간다고 해 광인의 종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네. 그 독초를 구하기 위해 이름깨나 알려진 고위 관리들과의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사보카 출신의 약초 상인과 접촉 중이네. 그 상인에게서 말린 광인의 종의 가루를 얻을 생각이야. 술에 태웠을 때 성질이 희석되지 않고 빛깔에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나 한 모금만으로도 충분히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독성을 갖고 있으니 손쉽게 통령의 숨통을 끊을 수 있을 테지.”

“그 독초 가루를 조달하기까지 며칠이 걸립니까?”

“통령이 참석할 혼인식이 열리기 전에 충분히 우리의 손에 들어올 것이네. 어쩌면 오늘 당장 얻게 될지도 몰라. 남은 것은 그 독초 가루를 어떻게 통령이 마실 술에 타느냐는 것인데 그 문제에 관해서는 방법을 강구 중이네. 몇 달 전의 일이지만 다 몬티가 포섭을 시도했던 자들 중에 통령의 관저 경비병을 누이로 둔 젊은 청년 하나가 있네. 그리 선호되는 방법은 아니나 다시 한번 그자의 포섭을 시도해 볼 생각이야. 가능하다면 혼인식이 있는 날 아침 관저 내에서 통령을 살해할 방법도 고려 중이네.”

“암살자를 선발하는 것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친치아가 말했던 그 소년이 낙점되었습니까?”

엘베라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암살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번 정례 회의가 아닌 암살에 가담하기로 한 단원들의 은밀함 만남 속에서 거론될 것이네. 그들은 중앙 지부 밖에서 만남을 가질 것이야.”

“그 말씀은…….”

“오늘 이후로 중앙 지부 내에서 암살에 관한 이야기는 오가지 않을 걸세. 조반니는 지난번 정례 회의의 내용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야.”

엘베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반니에 대한 신뢰보다 조직의 보위에 관한 걱정을 앞세울 때가 왔네, 레오나르도.”

그녀는 평범한 바느질 가게의 주인처럼 선반에서 천 한 필을 꺼내 살펴봤다. 레오나르도의 눈 속에 의혹이 어리더니 목소리가 커졌다.

“설마 조반니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니.”

선반 앞에 등을 보이고 서 있던 엘베라가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눈빛은 여느 때와 달랐는데 레오나르도는 급사했던 대총장도 저런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조반니‘도’ 의심하고 있네. 알피에리 그자와 같이.”

조반니가 의심의 대상이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레오나르도는 혼란스러운 표정이 됐다.

“알피에리 그자를 향한 자네의 의심은 헛된 것이 아니야. 나도 같은 생각이네. 다른 점이 있다면 두 사람 다 밀정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지.”

레오나르도는 오랜 친구로서, 그리고 중앙 지부 하나를 괴멸시킬 수 있는 막강한 정보력을 갖고 있는 같은 상위 단원으로서 엘베라의 발언에 큰 의문을 느꼈다. 그가 밀정이라니. 대체 무슨 근거로?

“어떤 이유로 조반니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는 무려 10년 전에 우리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강력한 결정권을 가진 상위 단원인 그를 의심하신다니요. 이 사실이 조직 내에 알려졌을 때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모르시는 겁니까? 섣부른 의심이라 해도 위험합니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그를 의심해 오고 있었네. 그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세. 그가 10여 년 전 올빼미가 되기 위해 중앙 지부 회의실의 둥근 탁자 가운데에 섰을 때를 기억하네. 그가 다른 마음을 먹고 그 자리에 섰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아니야. 어떤 경로로 불온한 생각을 갖게 됐었는지도 알 수 없고 언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르나 내 의심은 섣부른 것이 아니네. 분명히 말해 두지. 나는 아무 근거도 없이 그를 의심하는 게 아니네.”

“조반니를 의심하고 있다면 어째서 알피에리 대위의 포섭을 허가하신 겁니까? 조반니가 정말로 다른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위험한 일이 아닙니까?”

“말하지 않았나. 나는 조반니의 배후를 알아내기 위해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는 것일세. 그가 제6군단의 장교를 끌어들였으니 조만간 그 배후가 진짜 얼굴을 드러낼 걸세.”

“조반니가 지금껏 포섭해 온 자들은 왜 의심하지 않으십니까? 알피에리 그자만을 의심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포섭 방법이 미심쩍었기 때문이지. 조반니는 확연히 전과 다른 방식으로 알피에리 그자를 영입했어.”

“아무리 말씀하셔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군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조반니를 의심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배후를 잡기 위해 여태 이런 위험한 진실을 숨겨 오셨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그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가 저 말고 또 있습니까?”

“자네만 알고 있네.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처음이야.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하게 될 것이라고 짐작해 본 적 없네. 그러나 나는 자네를 믿고 있어. 자네는 조반니의 배후와 전혀 관련이 없는 제삼자이며 내가 자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무런 위험도 초래하지 않지. 곧 이 의심도 끝이 날 걸세. 모든 사실이 밝혀졌을 때 비로소 내가 지금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네. 나는 정말로 오랫동안 기다려 왔어. 아주 긴 세월을 조반니의 덜미를 잡을 날만을 기다려 왔지. 나 역시 그를 감시할 밀정 하나를 심어 배후를 캐내기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이네.”

엘베라는 혼란스러워하는 레오나르도를 내버려 둔 채 문 앞으로 다가갔다.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조반니에게 통령의 암살에 관한 거짓 정보를 흘릴 생각이네. 말하자면 진짜 암살 계획과는 다른 가짜 암살 계획이지. 조반니에게 흘린 그 거짓 정보가 어떻게 새어 나가는지 지켜보다가 새어 나가는 정보를 따라가 볼 생각이네. 그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험하는 것이니 이곳에서 이야기가 끝나거든 곧장 친치아에게로 가 입단속을 시키게. 경솔하게 행동한다면 친치아도 조반니의 배후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네.”

“조반니에게 이중의 거짓 정보를 흘리는 것을 단원들이 납득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에게 어떤 말로 설명한다한들 제가 지금 느끼고 있는 혼란보다 덜 한 것을 느끼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 알고 있네. 긴 설명이 필요할 테지. 파장이 적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치러야 할 일이었어. 그들의 혼란과 불신은 모두 내 책임이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조반니의 덜미를 잡을 방법이 없어. 통령의 암살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적기야.”

“만약 조반니의 배후가 밝혀진다면… 현재로서는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만약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배후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조반니가 그간 여러 정보들을 그자에게 넘겼을 것이라는 사실이야. 그런데도 우리가 아직 건재한 이유는 조반니 역시 나와 같은 입장이기 때문이겠지.”

문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시라고 인사하는 소녀의 목소리도 들렸다.

“조반니는 조직을 한 번에 괴멸시킬 확실한 방법을 찾기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야. 활의 시위가 팽팽하나 아직 화살을 쏠 단계는 아니네. 누가 먼저 손을 놓느냐의 문제지. 수면이 잔잔한 듯 보이지만 이미 파문은 오래전에 시작됐어.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고 있으니 자네도 나도 대비해야 해.”

문 앞으로 다가온 두 사람의 인기척과 함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게 해라.”

문이 열리자 등이 굽은 초로의 노파와 윤기 흐르는 밤색 머리를 가진 젊은 사내가 서 있었다. 옷차림으로 보아 노파는 바치 시내 어디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늙은이 같았는데 얼굴에 검버섯이 핀 데다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 옆에 선 사내는 다리 선이 드러날 정도로 딱 붙는 바지를 입고 화려한 목걸이 장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바치 시내 어디에서나 볼 법한 젊은이 같아 보였다. 각각 다른 이유로 이 시간에 바느질 가게를 찾은 것 같았다.

“거래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렇게 말한 노파가 굽히고 있던 등을 펴며 자세를 바로 했다. 노파 특유의 기운 없는 몸짓과 한껏 끌어 내려 주름을 만들고 있던 입매가 사라지자 순식간에 젊은 여인으로 돌아왔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검버섯이 가짜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그녀는 다름 아닌 다 몬티였다.

“약초 상인에게서 광인의 종의 가루를 받았는가?”

“네. 추가로 잎 두 장도 함께 받아 왔습니다. 만만치 않은 값을 치렀으나 쉽게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 거래를 진행했습니다.”

다 몬티의 옆에 있던 사내가 가발을 벗으며 품속에서 작은 병을 꺼내 보였다.

“이게 가루입니다. 이 병 속에 든 양은 상당히 많은 양이라 족히 서른 명을 죽일 수 있다더군요. 집게손가락으로 한 줌만 집어도 사람 하나를 죽이는 데에 충분하다고 합니다.”

풍성하던 밤색 가발을 벗고 생기 넘치는 표정을 거두자 본래의 얼굴로 돌아온 사내는 바로 노프리였다. 입가와 목의 주름을 극단에서 일하는 무희들이 쓰는 화장품으로 가린 그는 조반니 또래의 혈기 넘치는 젊은이에서 험악한 인상을 지닌 까다로운 사내로 돌아왔다.

다 몬티와 노프리는 눈썹의 모양을 바꾸고 주름을 가리거나 덧댄 데다 서 있는 자세와 말하는 어투, 목소리의 높낮이, 복장, 걸음걸이를 완벽히 바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단순히 옷을 다르게 입어 노파와 젊은이를 흉내 낸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몸에서 다른 영혼을 끌어낸 것처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장해 있었다.

진중한 성격의 중년 여인인 다 몬티는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초라한 노파로, 마흔 언저리의 나이에 신경질적인 성미를 갖고 있었던 노프리는 강렬한 눈빛을 가진 젊은이로.

“가루보다는 흡수가 더디지만 이 잎도 독성을 시험하기에 충분하다고 합니다. 씹을 필요 없이 삼키기만 해도 수초 후에 목이 죄는 고통을 느끼며 의식을 잃는 데다 숨을 거두기까지는 반나절이 걸린답니다.”

“약초 상인의 행선지에 대해서도 약속을 받아 냈는가?”

“네. 오늘 중으로 체사로 향하는 배에 탈 예정입니다. 통행증을 이미 마련해 둔 데다 갖고 있던 짐도 모두 정리했더군요. 체사와 발렌차를 거쳐 프리올로를 한 바퀴 도는 긴 여정에 오른답니다. 적어도 해가 두 번 바뀌어야만 다시 루바노로 돌아올 겁니다. 공화국군이 그자를 추적한다면 반년 이상 공을 들여야 할 겁니다.”

엘베라는 가루가 든 약병과 헝겊에 쌓인 잎 두 장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루바노의 미래를 좌우할 최후의 방법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죽기에는 아직 이른 젊은 통령의 목숨값이었다.

“그리고 이 편지. 바르톨루치 위원의 편지를 필사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마지막 편지일 것 같습니다.”

다 몬티가 필사한 편지 넉 장을 품에서 꺼내 엘베라에게 건넸다.

“통령의 혼인식 참석은 확실해졌습니다.”

“혼인식 날짜도 정해졌나?”

“네. 스무닷새 뒤 31인 위원회의 한 명인 단돌로 위원의 붉은 지붕 저택에서 혼인식이 열립니다. 참석이 정해진 위원들의 이름을 필사해 왔으나 인명록이 변경될 가능성을 고려해 이틀 뒤 다시 바르톨루치의 저택에 방문하겠습니다.”

“그 밖에 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나?”

“혼인식이 있기까지 별다른 움직임은 없을 듯합니다. 듣자 하니 이미 나흘 전부터 혼인식을 준비하기 위한 수행원들이 단돌로의 저택을 바삐 드나든다더군요.”

“혼인 상대도 알아냈는가?”

“제2 행정장관의 첫째 딸이라고 합니다. 혼인식에 다섯 명의 행정장관들이 모두 참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장관의 첫째 딸이 귀족 자제들이 다닌다는 체사의 왕립 학교에서 공부를 한 터라 혼인식 손님들 중에는 체사의 귀족도 많을 겁니다. 함께 수학한 학생들 중에 체사 국왕의 오촌 조카도 있다고 하더군요. 손님들 중에 체사인이 많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쪽으로도 정보원을 몇 명 보내야겠군. 잘된 일이야. 체사의 귀족들까지 참석하는 자리라면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해.”

필사된 편지의 내용을 훑은 엘베라는 곧 편지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형형한 빛이 어렸다.

“오늘로부터 스무닷새의 시간이 주어졌군. 비스카르디 통령.”

* * *

“회갈색 벽돌로 이루어진 3층 저택이라면… 아, 저 집이군.”

바구니 안에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사과가 가득 담겨 있었다. 청과상과 이야기를 나누며 손수 가장 맛있어 보이는 것들로 골라 바구니를 채운 발레리아는 조반니의 집 앞에 도착해 창문을 올려다봤다.

문을 두드리려는데 저 멀리 익숙한 마차 한 대가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미소를 지은 발레리아는 가까이 다가온 마차에서 내린 갈리에누스에게 인사했다.

“마침 자네도 왔군.”

“이런. 대위님께서도 오셨군요?”

“이 시간에 이렇게 군용 마차를 타고 와도 되는 건가?”

“제6군단의 부대에 볼일이 있어 그곳에 다녀오는 길이라 괜찮습니다.”

제5군단의 부대는 여기서 한참 멀리 떨어진 시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낮 동안 한가로이 바치 시내에 머무를 수 없는 갈리에누스가 이런 시간에 조반니의 저택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로움이 필요했다.

“사과를 보니 저도 뭔가를 사 왔다면 좋았을 것 같군요.”

갈리에누스가 자신의 빈손을 들어 보이자 발레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대낮에 장교가 과일 바구니를 사는 건 이상해 보일 거야. 나야 시간이 남아도는 데다 군인이 아니니 문제가 없지만.”

“돌아가는 길에 하숙집에 들러 그라나 부인이 잘 계신지도 살펴볼 생각입니다. 가는 길에 사과를 사 가면 되겠군요.”

“내가 다녀오는 길이니 그럴 필요 없어. 부인께도 사과 한 바구니를 드렸으니 그것 또한 필요 없어. 부인께서 또 광나게 집 안을 청소하고 계시더군. 도와드리려고 했지만 손을 휘휘 저어 쫓아내셨어.”

발레리아가 저택의 문을 두드리자 마흔 안팎의 나이 든 사내가 문을 열고 나왔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로미오에게 들어 조반니가 관리인을 고용했다는 사실을 아는 발레리아는 그가 평범한 저택 관리인치고 비범해 보이는 인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인사를 건넸다.

“저희는 로미오를 찾아온 손님들입니다. 스포르차 선생께서는 안에 계십니까?”

“아니요. 아침 일찍 나가셨습니다.”

“그러면 로미오가 혼자 있습니까?”

“네, 2층에 계십니다. 들어오시지요.”

1층의 정원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놀란 것은 갈리에누스였다. 그는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잊고 그 앞에 멈춰 서서 정원 내부를 둘러봤다. 정원이 너무나 아름답게 잘 가꾸어져 있어 발레리아도 놀랐지만 갈리에누스가 놀란 이유는 조금 달랐다.

“여기가 정원이 맞긴 했군요. 본래 이런 곳이었다니 믿겨지지 않습니다.”

“아, 그렇군. 자네는 여기에 와 본 적이 있지?”

“예. 제가 이곳을 수색했을 때만 하더라도 전혀 이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다시는 꽃을 피울 수 없을 것 같은 죽은 식물만 가득했었지요.”

“이곳이? 믿기지 않는데.”

예전에 조반니를 체포했을 당시 정원의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와 집 안을 둘러봤던 갈리에누스는 1층 정원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했다.

마른 잎들과 날벌레들이 날아다니던 잿빛 정원을 기억하는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지 못해 내부를 몇 번이고 둘러봤다. 종류를 다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다양한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있는 정원은 문밖과 전혀 다른 세상인 것처럼 느껴졌다.

“꽃향기가 마음을 배부르게 하는군. 이 정도 꽃들이라면 화원이 부럽지 않겠어.”

저택 관리인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며 로미오가 나와 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던 발레리아와 갈리에누스는 로미오의 방으로 안내받고 나서야 그 이유를 깨닫게 됐다.

“아니, 어쩌다 다리를 다친 거야?”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얼마나 다치신 겁니까?”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로미오는 한쪽 다리에 부목을 대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발목의 붓기가 심각해 보였다.

그 때문인지 로미오는 안색이 좋지 않은 얼굴로 인사했다.

“……그렇지 않아도 부탁드릴 것이 있었는데 이렇게 오셨군요. 중위 자네도 잘 왔네.”

놀란 두 사람을 향해 로미오는 자연스럽지 못한 미소를 보냈다. 너무 놀라 하마터면 사과 바구니를 떨어뜨릴 뻔한 발레리아가 얼른 침대로 다가오자 로미오가 말했다.

“죄송스럽지만 차는 대접해 드리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차는 무슨. 필요 없으니 걱정 마. 그보다 어쩌다가 이렇게 다쳤어? 언제 이렇게 된 거야?”

“어젯밤에 계단에서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이 집의 저 2층 계단에서 말이야?”

“예… 다친 곳은 다리뿐이니 놀라실 것 없습니다.”

그러나 발목의 상태가 심각해 보여 발레리아는 걱정스러운 얼굴이 됐다. 갈리에누스도 부은 로미오의 발목을 살피며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양쪽 발목이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붓기가 심한 탓이었다.

“처치는 이게 끝인 겁니까? 붕대로 감아 부목을 대어 놓으면 붓기가 가라앉는다고 합니까?”

“걱정 말게. 선생님께서 약초를 발라 주고 나가셨어.”

“무슨 일로 아침부터 관리인이 있다 했더니 그래서 그랬던 거였군. 그런데 이렇게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건가?”

“선생님께서 밤에 돌아오시면 다시 한번 봐주실 겁니다. 뼈에 문제가 생겨 적어도 오늘 하루는 움직이지 않는 게 좋다고 하셨습니다.”

로미오는 발목만이 아니라 얼굴의 혈색도 좋지 않았다. 의사가 아닌 발레리아와 갈리에누스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창백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봤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라고 짐작하는데 로미오가 주저하다 발레리아에게 말했다.

“……제가 드렸던 망토 말입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지금 가져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필요한 일이 생겨서 그럽니다. 요긴하게 쓸 일이 생겨 당장 필요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로미오는 그 망토로 자신이 하게 될 일을 망설이고 있었다. 검은 망토로 진실을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그였다. 이런 확인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에 극심한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다가 검은 망토가 조반니의 옷일 거라고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러 버린 것인지.

“굳이 다시 가서 가져올 필요 없어. 여기 갖고 왔으니까.”

발레리아는 자신의 겉옷 안쪽에 손을 넣었다. 정갈히 접어 말아 놓은 검은 망토가 웃옷 안쪽에서 나왔다.

“자, 여기.”

발레리아가 로미오의 손에 망토를 펼쳐 건네자 로미오의 다리를 심각한 눈으로 보고 있던 갈리에누스가 물었다.

“그게 뭡니까?”

로미오는 손을 더듬어 망토를 만졌다. 갈리에누스의 눈에는 로미오의 망토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커 보였다. 누구의 망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로미오가 자세히 살펴보거나 입어 보지 않고 손으로 쥐고 있기만 하는 모습이 이상해 발레리아에게 물었다.

“저 망토가 무슨 망토이기에 그러십니까?”

하지만 그녀는 눈빛만 주고 대답하지 않았다. 로미오도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이나 말을 아꼈다. 오늘따라 그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로미오가 말을 덧붙였다.

“……한 가지 더 부탁이 있습니다.”

로미오는 발레리아와 갈리에누스가 볼 수 있도록 망토를 들어 길이를 보여 주려다 손을 멈췄다. 비슷한 체격을 가진 두 사람이 비슷한 치수의 옷을 입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니 이 방법은 확실한 해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나마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 이렇게 확인해 봄으로써 자신의 마음속 심판관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이 방법으로 의문을 해소하고 싶었다.

“위층으로 올라가시면 왼쪽 복도 끝 방에 관리인이 머무는 방이 있습니다. 그 방에 새끼를 가늘게 꼬아 만든 옷 바구니가 있는데 그 바구니 안에서 선생님의 긴 겉옷 한 벌을 가져다주십시오. 끝자락이 길고 옷소매가 긴 옷이어야 합니다.”

로미오가 목소리를 죽여 얘기하자 발레리아와 갈리에누스는 로미오에게로 귀를 기울이며 몸을 낮췄다.

“관리인이 모르게 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옷을 만져도 흔적이 남는 것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어찌 됐든 선생님께서도 모르셔야 하는 일입니다. 제가 그분의 옷으로 뭔가를 했다는 사실은 비밀로 지켜주십시오.”

의미심장한 지시에 발레리아와 갈리에누스는 다시 한번 서로의 눈을 마주 봤다. 로미오는 여유 있고 느긋하게 부탁하고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부탁은 조용히, 그리고 신속히 진행해야 하는 부탁인 것처럼 보였다.

“이 망토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긴 옷이어야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퇴역을 했다고는 하나 발레리아는 군인이었다. 갈리에누스도 마찬가지였다. ‘하라’는 지시를 들었을 때 거부하고 의심하며 당위성을 따지는 대신 일단 움직이고 보는 것이 몸에 밴 두 사람이었다.

“긴 겉옷이라면 옷의 색깔에 상관없이 전부 괜찮은 거겠지?”

“……예.”

“내가 옷을 가져올 테니 중위 자네가 망을 봐.”

“알겠습니다.”

발레리아가 먼저 방을 나가자 갈리에누스가 문 앞에 섰다. 그는 열린 문틈 사이로 발레리아가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래층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정원을 오가는 관리인의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잠시 후 위층에서 방문을 여는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짧은 침묵 후에 다시 발레리아의 발소리가 들린 것으로 봐 그녀가 방에서 옷을 갖고 나온 것 같았다.

정원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관리인의 발소리가 들린 것은 그 직후였다. 계단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관리인이 3층으로 올라가려 하자 갈리에누스는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갔다.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만.”

태연히 관리인에게 다가가자 그가 계단을 올라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갈리에누스는 닫힌 엔초의 방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방이 엔초의 방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3층 계단 머리에서 발레리아의 적갈색 머리카락이 살짝 보였다가 사라졌다. 계단을 내려오려다가 뒤로 물러선 것이었다. 짧은 찰나에 그녀의 손에 무사히 옷이 들려 있는 걸 본 갈리에누스는 관리인에게 손짓했다.

“대위님께서 엔초의 방에 있는 책 한 권을 찾아달라고 하시더군요. 어린아이의 방이기는 하지만 손님인 제가 멋대로 들어가기가 꺼려집니다. 함께 들어가셔서 책을 찾아주시겠습니까? 지난 생일에 받은 동화책 중 한 권이라고 합니다.”

“그러지요.”

관리인이 먼저 앞서서 엔초의 방으로 향하자 갈리에누스는 뒤따라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며 복도를 돌아보니 3층에서 내려온 발레리아가 로미오의 방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사이 관리인이 책장에서 동화책 두 권을 찾아 보여줬다.

“이 책들인가요?”

“예, 맞는 것 같습니다. 바로 찾을 수 있는 자리에 놓여 있었군요. 감사드립니다.”

관리인이 보여 준 두 권의 동화책 중 한 권을 받아 든 갈리에누스는 곧장 방을 나왔다. 등 뒤에서 자신을 따라 나온 관리인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그는 곧장 로미오의 방으로 향했다. 발레리아가 무사히 조반니의 옷을 가져온 것을 확인한 후에야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자, 스포르차 선생의 옷이야. 관리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이것과 같은 색의 옷을 제일 위에 올려 놨지만 관리인이 옷이 없어진 걸 알아챌 수도 있어. 확인이 끝나는 대로 제자리에 가져다 둘 테니 어서 확인해 봐.”

발레리아가 로미오가 확인할 수 있도록 조반니의 겉옷을 펼치자 로미오가 망토를 꽉 쥐었다. 그는 또다시 말하기를 머뭇거렸다.

“확인하려던 게 무엇인데 그래?”

“…….”

“응, 로미오?”

“……선생님의 옷과 이 망토를 겹쳐서 확인해 주십시오.”

“뭘 말이야?”

“옷이 비슷한가를 말입니다.”

지난번에 이 망토를 집으로 가져간 후 망토에 묻어 있던 핏자국을 발견했던 발레리아는 순간 손을 멈칫했다.

“옷소매의 길이와 어깨 폭을 자세히 살펴봐 주십시오. 한 사람의 옷이라 하더라도 옷의 종류에 따라 몸에 꼭 맞게 입거나 크게 입는다면 치수가 달라지니 그 점을 감안해 주셔야 합니다. 만약 한 사람의 옷처럼 보인다면…….”

갈리에누스는 오늘 망토를 처음 본 데다 자세한 사정은 몰랐지만 로미오의 의중을 파악했다. 로미오는 어디서 난 것인지 모를 저 검은 망토가 조반니의 옷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의심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조반니의 옷이 맞는지를 확인하려 하고 있었다.

“중위, 이 옷을 들어 주게.”

“예.”

발레리아가 갈리에누스에게 망토를 주자 갈리에누스가 펼쳐 들었다. 발레리아가 3층에서 갖고 온 조반니의 옷은 공교롭게도 망토 형태의 겉옷이었기 때문에 비교하기가 수월했는데 두 옷은 길이가 같았다. 소매의 길이도 일치했고 어깨의 폭도 맞았다.

“한 사람의 옷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소매며 옷자락의 길이가 비슷해.”

발레리아의 말에 갈리에누스도 동의했다.

“제 눈에도 그렇게 보입니다. 체격이 웬만큼 크지 않고서는 이 옷을 입기 힘들 겁니다. 왜소한 몸을 가진 사람이 입는다면 거추장스러워서 걷기 어려울 겁니다.”

“중위 자네에겐 그럭저럭 어울리겠군. 자네보다 몸집이 더 큰 사내에게도 맞게 어울리겠어. 무소 대위에게도 어울릴 거야.”

발레리아는 자신의 말에 로미오가 양손으로 주먹을 눌러 쥐는 것을 봤다. 마음속으로만 추측하려 했지만 잿빛으로 변한 로미오의 얼굴색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망토가 스포르차 선생의 것이라고 의심하는 거지?”

하지만 로미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

망토를 받아 든 갈리에누스는 자신의 몸에 대 보았다. 이 망토가 조반니의 것으로 의심되지만 그에게 입힐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뭘까. 망토가 정말로 조반니의 옷이었든 아니었든 로미오는 조반니를 ‘의심’하고 있었다.

의심이라는 것은 믿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믿음이 필요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 믿음을 조반니에게 직접 확인함으로써 해소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옷의 상태를 볼 때 가난한 자의 옷은 아닙니다. 옷값을 줄이기 위한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옷을 물들이는 데에 비싼 염료를 썼군요.”

“스포르차 선생의 것이 아닐 수도 있으니 괜찮다면 내가 이 망토를 갖고 바치 시내의 상인들을 탐문해 볼게. 평범한 망토지만 사 간 자가 평범한 체격을 지닌 사내가 아니니 기억하는 자들이 있을지도 몰라. 이 망토를 비교적 최근에 사들였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야.”

발레리아는 로미오에게 도움이 되고자 이야기했지만 로미오는 어젯밤보다 더한 혼란에 휩싸여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말이 되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검은 망토가 조반니의 것일 리가 없었다. 조반니가 검은 망토의 사내일 리 없었다. 자신이 무언가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두 옷을 비교하는 것만으론 충분한 단서를 얻었다고 볼 수 없었다. 혼자서 이렇게 생각의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한쪽으로 그 방향이 치우치는 것이 당연했다.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조반니에게 직접 확인하는 것이었지만 이 문제는 정직하게 대답할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검은 망토의 사내와 관련이 없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또 문제였다. 이미 어젯밤에 검은 망토에 대해 그에게 설명하지 않았던가. 대조해 보기 위해 망토를 입어 줄 것을 부탁할 경우 예상 가는 그의 반응은 한 가지였다. 더 큰 문제는 그가 망토를 입는다 해도 자신이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겁탈당하던 날 조반니의 행적을 확인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으며 그 한 사람에게는 사건의 진상을 설명해야 했다. 그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다. 이 일은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되는 일이었다.

역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조반니가 검은 망토의 사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 놓고 그를 추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맞다면…… 자신의 의심이 모두 진실이라면…….

그렇다면 조반니는 두 얼굴을 가진 미치광이였다.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광인이었다. 자신이 본래 알고 있던 그는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런 짓을 했다 해도 충격을 금치 못했을 일인데 지금의 이 상황은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처참했다. 심경이 복잡하다는 말로는 표현되지 않을 만큼 경악스러웠다. 목이 타는 갈증과 함께 메스꺼움이 치밀 정도였다.

조반니에 대한 자신의 판단과 편견을 전부 처음부터 되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했다. 그와의 첫 만남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방 안에 제 지팡이가 보이십니까?”

로미오가 무릎 위에 덮여 있던 요를 걷자 발레리아와 갈리에누스가 동시에 팔을 부축했다.

“이런 몸으로 어디를 가려는 거야?”

“……제 지팡이를 찾아 주십시오. 지난밤에 분명 저기에 놓아뒀는데 없어졌습니다.”

“방 안에 지팡이는 보이지 않아. 다른 곳에 둔 게 아니야?”

“지팡이가 없다면…… 괜찮습니다. 지팡이 없이도 갈 수 있습니다.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어디에 가려고?”

“본래 로사티 하숙집 3층에 살던 분을 다시 만나 봐야겠습니다. 그분께 묻고 싶은 것이 생겼습니다.”

* * *

“한심한 작자 같으니라고! 죽여 버릴 테다!”

복도를 걷던 조반니는 뒤를 돌아봤다. 자신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의사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 그가 나지막하게 읊조린 말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목소리를 높여 묻자 의사가 복도 저 멀리서 이쪽을 돌아봤다.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에 조반니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다 들리는 목소리로 그런 험한 말을 하면 좋지 않습니다. 이곳은 병원이니까요.”

의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조반니는 갈 길을 마저 갔다. 병실로 들어간 그는 문을 닫기 전에 복도로 고개를 내밀고 주변을 확인했다. 구멍을 막기 위해 천을 덮고 그 위에 못질을 박은 병실 문은 흉물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조반니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창가로 다가갔다.

병실 내에 퍼져 있는 이상한 냄새 때문에 온종일 창문을 열어 놓아야만 견딜 수 있었기 때문에 오늘도 병실의 모든 창이 열려 있었다. 그렇게 해 놔야만 숨이 막혀 죽는 일을 방지할 수 있었으므로 비가 들이닥치는 날에도 절대 문을 닫지 않았다.

“저 정원은 정말로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정원을 향해 중얼댄 조반니는 자신의 코를 막았다. 바람을 타고 정원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냄새의 근원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데다 몸을 병들게 할 만한 것이 아닌지라 일단 두고 보고 있었지만 유쾌해질 수 없는 냄새였다. 다른 사람들은 맡지 못하는 냄새니 오직 자신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죽어 버려라! 머저리 같은 녀석!

복도에서 다시 속닥대는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역겨운 작자, 염병을 앓을 놈, 참수를 당해 뒈질 녀석! 아까 그 의사가 아니라 다른 목소리였다. 음침한 중얼거림이었지만 조반니의 귀에는 선명히 들렸다. 복도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욕지거리에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나 휑뎅그렁한 복도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지난 며칠 사이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었기 때문에 조반니는 복도로 나가 사람 그림자를 찾는 대신 문을 쾅 닫았다.

최근 들어 왜 자꾸만 남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험한 말을 입에 올리는 자들이 많아진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는 자신에게 치료를 받던 환자 하나가 입속말을 하는 척하며 욕지거리를 했다. 좋은 말로 지적하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며 당황한 체했다. 그 환자 외에도 복도를 지나며 험한 말을 중얼대는 의사와 간호인들이 있었다. 지적하면 역시나 발뺌하며 하지 않은 척했기 때문에 다섯 번 중 세 번은 무시하는 것으로 반응을 대체했다. 하지만 하루에도 서너 번씩 그런 식의 욕지거리를 들으니 피로한 기분이 들며 신경이 예민해졌다.

“이 병원도 조만간 그만둬야되겠군. 정신 나간 자들이 유독 꼬이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병실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났고 환자와 의사들은 욕지거리를 해 대는 자들뿐이니 이곳에서 일하는 것에 더는 미련이 없었다. 다행히 여러 대학교에서 자신을 초빙하기 위해 보내왔던 편지를 아직 보관 중이었다. 그 제안이 유효하니 오늘 당장 이 병원을 그만두게 되더라도 걱정할 것은 없었다.

그때 복도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욕지거리가 아니었다.

“이보게, 조반니! 환자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거칠게 문이 열리더니 의사 하나가 화난 얼굴로 들어섰다. 그는 흉하게 못질을 해 놓은 문을 향해 곱지 못한 시선을 주더니 성을 냈다.

“자네가 어제 치료한 그 환자가 다시 병원을 찾았어! 다친 손에 발랐던 약초 때문에 피부가 썩어 들어간다며 난동을 부렸다네. 가까스로 진정시켜 놓았지만 어떻게 할 텐가? 자네가 병증과 관계없는 약초를 발라 준 것을 확인했네!”

조반니는 놀라지 않고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의사를 쳐다봤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손을 다친 환자라면 어제 그 환자가 아닙니까? 뜨거운 김에 쐬어 손을 다친 환자요.”

“그래! 그 환자가 밤사이 손등에 바른 약초 때문에 고름과 진물이 났다며 병원을 찾았어. 자네, 이틀 전에도 산파에게 약을 잘못 건네줬던 것을 아는가? 단순히 착각한 것이라고 생각해 넘어갔지만 이번에도 또 같은 실수를 했잖나? 무슨 이유로 번번이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인진 모르겠지만 자네가 요즘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야. 문에 못을 박아 놓는 것으로도 모자라 정원의 꽃이며 풀을 전부 뜯어 놓고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며 의사들에게 호소를 하지 않았나?”

“문에 박아 놓은 저 천은 구멍을 막기 위함입니다. 누군가 저를 감시하기 위해 벽에 구멍을 냈습니다.”

“또 그 소린가? 누군가 자네를 감시한다고?”

이미 조반니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네댓 번도 더 들은 의사는 문에 붙은 천을 잡아 뜯었다. 못에 박혀 있던 천이 찢겨 나가자 문 가운데에 손가락 반 마디만 한 작은 자국이 드러났다. 얼핏 구멍처럼 보이지만 동그란 모양으로 깊게 팬 자국이었다.

“이걸 보고 구멍이라고 우기는 것은 자네밖에 없네! 이 자국은 자네가 이 병실에 오기도 전부터 있었던 것이야. 이 평범한 자국 하나에서 도대체 무슨 망상을 하는 건가? 이 병원에 자네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어. 자네에게 들리도록 욕을 한 사람도 없네. 무슨 망상에 빠져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제 그만두게.”

“저것은 흔적이 아니라 구멍이 맞습니다. 저를 엿보기 위해 누군가가 구멍을 낸 겁니다. 욕지거리도 제 귀에 명백히 들립니다. 도대체 왜 들리는 소리를 들리지 않는다고 하시는 겁니까? 제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단지 주변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예리하게 포착하는 능력이 있는 데다 남들보다 귀가 밝은 것뿐입니다. 누군가 이 병원에서 이상한 짓을 벌이려 하는데 모르시겠습니까? 정원에서 나는 저 냄새에 대해서도 벌써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제가 미리 갖가지 위험들을 눈치채 말씀드리는 것인데 왜 이런 식으로 반응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말하지 않았나! 그것들은 전부 자네의 착각이야. 저 문밖에서 자네를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왜 여태 잡히지 않았겠나? 그리고 자네는 그 망상만이 문제가 아니네. 입고 있는 옷에서 냄새가 난다는 걸 모르겠나? 그 지저분한 머리 모양 하며 옷이며, 도저히 봐줄 수가 없네. 자네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거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니 피하는 의사들까지 생겼네.”

“또 제 머리 모양을 문제 삼으시는 겁니까? 저라고 늘 몸을 단장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옷에서 냄새 같은 것은 나지 않습니다. 저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적도 없습니다.”

때마침 또다시 복도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 후레자식! 창문으로 뛰어내려 버려라!

조반니는 그 소리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들리십니까? 저 욕지거리가 들리시나요? 저런 식입니다. 복도를 지나며 저런 식으로 욕을 하는 자들 때문에 저도 더 이상은 이곳에서 일하고 싶지 않군요. 이 병원도 운명이 다한 것이겠지요. 루바노에서 가장 좋은 병원이라는 명성도 그 빛이 바래는 겁니다. 환자들로도 모자라 이제는 의사와 간호인들까지 광증에 걸렸나 봅니다.”

조반니의 말에 의사는 복도를 돌아보더니 더욱 화난 얼굴이 됐다.

“대체 무슨 소리가 난다는 건가? 복도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네. 헛소리 그만하고 가서 그 환자를 보게. 지금 당장 가서 왜 그런 처방을 내렸는지 변명이라도 하게!”

의사에게 떠밀리듯 병실을 나간 조반니는 똑바로 여미지 못한 허리끈을 바닥에 질질 끌며 시끄러운 소리를 따라갔다. 열린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어제 처방을 내렸던 그 환자가 길길이 날뛰며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이제 손이 썩어 들어갈 거야! 전부 썩을 거라고!”

조반니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조반니를 손가락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저자야! 저자가 내게 몹쓸 약초를 발라 줬어! 이보시오들, 저런 어중이떠중이 같은 자가 여기서 의사 흉내를 내게 내버려 둬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요? 저자 하나 때문에 나는 손을 잃게 생겼다고!”

어중이떠중이라는 말을 평생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조반니였다. 모욕적으로 들리는 말이었지만 조반니는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태연하게 말했다.

“제가 잘못된 처방을 내렸을 리 없습니다. 저는 병증에 맞는 약초를 상처에 발라 드렸으며 그 약은 절대로 손을 썩게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시 봐 드릴 테니 손을 보여 주시지요.”

“필요 없으니 치우쇼! 다른 의사에게 처방을 받을 것이니 손도 대지 마쇼!”

남자는 어제 조반니가 매어 준 붕대를 전부 뜯었다. 상처가 드러나며 심각한 악취가 풍기자 간호인들이 코를 막으며 물러났다. 남자의 말대로 상처는 정말로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 보라고! 살이 푸른색으로 변하고 있어. 저자가 내게 썩은 약을 발라 준 거야!”

조반니는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남자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의사 몇이 수군대며 자신을 쳐다봤지만 그 사실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어디 한 번 항변해 보게, 조반니. 무슨 생각으로 이런 실수를 한 건가?”

담담하던 조반니의 표정이 바뀐 것은 썩은 자신의 손을 붙들며 난동을 부리던 남자가 조반니의 몸에서 냄새가 난다며 ‘미친 자가 아니냐’고 속된 말을 쏟아 냈을 때였다.

“몸에서 악취나 풍기는 주제에 의사라니!”

점점 더 심해지는 남자의 행패를 지켜보던 조반니는 긴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피식 웃었다.

“이제 알겠군요.”

침착하게 말했지만 조반니의 눈에는 통제할 수 없는 분노가 어렸다.

“당신은 ‘그’가 보낸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남자는 고름이 나오는 손을 부여잡고 소리를 질러 대다 조반니의 엉뚱한 말에 한층 얼굴이 험악해졌다.

“발뺌할 생각 마십시오. 전부 그자가 시킨 일이 아닙니까? 제가 제대로 된 처방을 내렸음에도 이렇게 소란을 피우라고 그가 지시했겠죠. 제 말이 틀렸습니까?”

이제 알겠다는 듯 고개를 재차 끄덕인 조반니는 남자에게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난밤 로미오를 간병하느라 잠을 자지 못했지만 조금도 졸린 기색 없이 흰자위를 크게 떴다.

조반니는 티모테오가 이 남자를 보냈을 거라고 확신하며 눈을 희번덕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어제 병원을 찾은 남자를 순순히 치료해 줬으니 자신이 한 방 먹은 셈이었다.

“그가 뭐라고 하던가요? 저를 해하라고 지시했습니까? 대위님께 마음이 있지만 저 때문에 그 마음을 고백할 수 없으니 제가 없어지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했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누가 나를 보냈다는 말이오? 얼굴이나 저리 치우쇼!”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하시군요. 어젯밤에 저택 앞으로 찾아온 것도 당신이지 않습니까? 날이 갈수록 대범해지는군요. 하지만 저는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미행과 염탐에는 한계가 있으니 이제 그런 방법을 쓸 수밖에 없겠지요. 이렇게 얼굴까지 드러내며 병원에 찾아오다니 꽤 조급함을 느낀 모양입니다?”

“헛소리 마쇼! 난 당신에게 잘못된 처방을 받아 여길 찾은 거요. 이 손을 보니 당신의 잘못이 명백해진 것 같아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니오?”

마음 같았다면 남자의 멱살을 잡고 쓰러뜨렸겠지만 조반니는 피식대는 웃음을 흘리며 말을 그쳤다. 이자는 분명 이 병원에서 나가자마자 공안국으로 쫓아가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티모테오에게 털어놓을 것이다. 하지만 티모테오는 이미 자신이 모든 사실을 눈치채고 있다는 걸 알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티모테오가 바란 일일지도 몰랐다. 로미오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을 압박하고 그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이렇게 사람을 시켜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그의 의도일지도 몰랐다.

“맞습니다. 제가 잘못된 약을 처방한 것 같군요. 하지만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니 처치는 해 드리기 힘들겠군요. 다른 의사분께 처방을 받으십시오.”

머릿속으로 오늘 밤 티모테오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 조반니는 온순한 양처럼 목소리를 바꿨다.

“부디 손이 썩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 * *

꽃에 물을 주며 콧노래를 부르던 남자는 무심코 아래층을 내려다봤다. 멀리서 걸어오는 두 사람을 발견한 그는 흥이 나 있던 것도 잠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물그릇을 텅, 소리 나게 내려놓은 남자는 아래층을 향해 외쳤다.

“여긴 왜 또 왔소!”

멀리서 걸어오던 두 사람은 저택의 문 앞에 멈춰 서더니 위를 올려다봤다. 둘 중 여자 쪽이 외쳤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돌아가시오! 당신네들과 할 얘기 같은 건 없어!”

“꼭 물어봐야만 하는 것이 있으니 부탁드립니다!”

호소하는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남자는 씩씩거리면서도 일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두 사람이 군인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 또 찾아온 거요?”

벌컥 문을 연 남자는 발레리아의 부축을 받고 서 있는 로미오의 안색이 곧 쓰러질 것처럼 좋지 않자 순간적으로 화를 누그러뜨렸다.

두 사람은 지난번 들고 온 그 망토를 갖고 있지 않았다. 빈손인 데다 군인들을 끌고 온 것도 아니었고 거리에는 군용 마차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번의 그 수모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의적일 수 없었다.

“뭐가 궁금해서 또 찾아온 거요? 그 망토에 대한 이야기라면 정말로 아는 것이 없소.”

발레리아를 향해 억울하게 항변하자 로미오가 나섰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왜 갑자기 하숙집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신 겁니까?”

느닷없는 질문이었지만 남자는 두 사람을 얼른 돌려보내기 위해 묻는 대로 대답했다.

“내가 원해서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게 아니오. 조반니 스포르차라는 그 의사 선생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이사를 권유한 거요. 그가 하숙집 3층에 꼭 살고 싶다며 집요하게 나를 설득했소. 그 하숙집에 그렇게까지 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난 처음에 거처를 옮길 마음이 없어 거절했소. 그러자 그다음 날 또다시 찾아와 부탁하더군.”

남자는 말을 하다 말고 로미오의 표정이 차갑게 굳자 의아한 얼굴이 됐다. 하지만 말을 계속했다.

“그자가 3층을 비워 주는 대가로 준 돈이 어마어마한 액수라 이 집을 살 수 있었지만 여기로 이사 오고도 한동안은 그가 다시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고 말을 바꾸면 어쩌나 걱정했소. 그도 그럴 것이 평범한 하숙집 3층에 세 들어 살기 위해 그런 거금을 줄 이유가 없지 않소? 나야 뭐 이런 좋은 집을 얻게 돼 불만은 없지만 이상한 제안이라는 생각은 내내 했었소.”

남자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로미오는 이마를 감싸며 어깨를 움츠렸다.

지금 이 순간 뒷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얼얼한 충격을 느낀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조반니가 하숙집으로 이사 왔던 날을 기억했다. 자신은 그날 죄 없는 어느 행인을 검은 망토의 사내로 착각해 길거리에서 두들겨 팼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집에 들렀다가 조반니와 마주쳤고 그는 우연히 하숙집으로 이사 오게 됐다고 말했다. 엔초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이곳에 산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자신이 그 집의 2층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조반니가 알고 있었을 확률. 구태여 조목조목 상황과 이유를 따질 필요도 없었다.

그는 분명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 알고서 거짓말을 한 것이다.

“혹시 스포르차 선생이 3층 집에 살고자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까?”

창백할 정도로 얼굴이 희게 질린 로미오를 대신해 발레리아가 물었다.

“그 집에서 내려다보는 거리 풍경이 마음에 든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 집에 살아 본 것도 아닌데 그런 걸 어떻게 안다는 말이오? 하등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거리 풍경이 무어라고…… 이보시오. 괜찮은 거요? 그러다 넘어질지도, 어어!”

쓰러질 것처럼 벽에 몸을 기댄 로미오는 숨이 격해졌다. 손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고 뺨은 차게 식었다.

조반니는 처음부터 거짓말을 했다.

자신의 윗집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그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무엇을 노리고서?

* * *

오늘 회의는 통령의 관저인 살로네 성 옆에 있는 루바노 정부 청사에서 열렸다.

청사 앞의 광장이 무척 넓었기 때문에 회의장에 들어가기 위해선 오로지 두 다리만으로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가야 했는데 광장을 전부 가로질렀다고 해서 코앞에 회의장이 대령되는 것은 아니었다. 청사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80개의 계단을 올라야 했다. 정치가들 사이에서 국정에 참여할 기회를 얻으려면 회의장 계단을 오를 수 있을 만큼 건강한 것이 우선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떠도는 이유는 순전히 이 계단 때문이었다.

이날 열린 회의에는 31인 위원회와 14인 위원회, 그리고 통령과 그의 보좌관 5인 중 두 명이 참석하게 돼 있었다. 회의장에 마련된 의석은 500석으로 그중 130석은 1,000명의 시민들로 이뤄진 ‘민중 평의회’ 구성원들 중 매 회의마다 새롭게 선발되는 130명을 위한 자리였다. 회의의 종류에 따라 의석이 꽉 찰 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오늘 회의에는 민중 평의회가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빈자리가 많았다.

넓디넓은 회의장 계단을 비 맞은 늙은 개처럼 터덜터덜 오르는 자가 한 명 있었으니 바로 프란코였다.

“위원님.”

프란코는 평소처럼 뒷짐을 지고 걷고 있지만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린 채 비서의 말에 대답도 없이 계단만 올랐다. 평소보다 배가 꺼져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로미오에게 매몰차게 거절당한 이후 프란코는 먹는 양이 줄 정도로 크게 상심해 있었다. 매일 찾던 과자도 절반으로 양이 줄어 하인들은 요즘 깨끗하게 비워진 과자 쟁반을 보기가 힘들었다. 벌써 며칠째 과자가 절반 넘게 주방으로 그대로 돌려보내지고 있었다.

“말 시키지 말게. 말할 기분이 아니네…….”

프란코는 금방이라도 계단 위에 주저앉을 것처럼 한숨을 푹 쉬었다. 이따금씩 저택 복도에 서서 시름을 앓듯 창밖을 내다볼 때가 많은 그는 로미오가 한 입 베어 먹은 과자를 자신의 방에 보관 중이었다. 반지와 목걸이를 보관할 용도로 만들어진 커다란 보석함에 부스러기 하나 빠뜨리지 않고 고이 보관하고 있는 그 과자는 프란코의 말 상대였다.

프란코는 그 과자를 들여다보며 혼잣말을 중얼대기도 하고 너털웃음을 짓기도 했다.

“아직도 상심해 계시는 겁니까?”

프란코의 비서로서는 그가 직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정도로 시름에 잠겨 있으니 못마땅한 일이었다.

“맛 좋은 과자도… 차도… 전부 소용이 없네. 내게 아무런 기쁨도 줄 수 없다네…….”

“무엇하면 그분께 편지를 써 보심이 어떨는지요. 간곡한 말로 한 번 더 부탁하신다면 그 나리께서도 생각을 바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개를 떨군 채 앞서 걷던 프란코는 슬그머니 비서를 돌아봤다.

“지난번에 그분을 댁까지 데려다드렸던 마부에게 지시해 집을 알아 놓도록 했습니다. 그 나리께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 달라고 말씀하셨지만 마부가 몰래 뒤를 밟아 사는 곳을 알아냈다고 합니다.”

로미오가 한사코 거절했음에도 그날 프란코는 로미오를 마차에 태워 보냈다. 그 누구도 동행하지 않는 조건으로 로미오는 마차에 올랐고 일부러 3층 저택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렸다. 책이 무거운 까닭에 프란코가 집 안까지 실어다 줄 것을 지시했으나 그의 지시는 통하지 않았다.

비서는 이 모든 것을 우려해 마차가 출발하기 전 마부에게 은밀히 로미오의 집을 알아낼 것을 부탁했다.

“내 어여쁜 파랑새의 집을 정말로 알아낸 게야?”

로미오가 돌아간 이후부터 줄곧 그를 그렇게 부르는 프란코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로미오가 마음을 바꿔 프란코의 제안을 승낙할 경우 자신은 나가게 될 것이 뻔한데도 비서는 프란코의 마음을 먼저 헤아렸다.

“네. 그 나리께서 사는 저택의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프란코는 로미오가 떠난 이후 단 한 번도 잡아 준 적 없는 비서의 손을 덥석 잡고 흔들었다.

“잘됐군! 잘됐어! 그래, 그러면 편지를 한 통 쓰겠네. 오늘 저택으로 돌아가자마자 쓸 것이니 얼른 가져다주게! 손수 구운 과자들도 함께 보내야겠어.”

순식간에 얼굴이 밝아진 프란코는 가뿐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청사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회의장에는 이미 자리해 있는 위원들이 많았다. 회의장 가운데에 다른 의석보다 두 단가량 높은 위치에 여섯 개의 의자가 마련돼 있었는데 위원들은 전부 그곳에 모여들어 있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프란코가 몸가짐을 정리한 뒤 그쪽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쓰고 있던 모자까지 벗어가며 정중히 인사를 건넨 상대는 통령이었다.

“오랜만이오. 바르톨루치 위원.”

“각하께서는 늘 이리 일찍 도착해 자리를 하고 계시는군요. 각하의 부지런함은 따라갈 자가 없겠습니다, 허허.”

프란코의 가벼운 아부에 카를로타는 점잖이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위원들은 대부분 카를로타보다 스무 살 이상 많았으니 다들 중늙은이라고 해도 좋았다.

마흔 남짓한, 비교적 젊은 위원들도 회의장 내에 있었지만 통령에게 아부할 기회는 쉽게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아무렴 국정을 돌보는 데 부지런함보다 좋은 자질이 있겠습니까? 회의장 내의 의석이 회의가 시작도 되기 전부터 이리 바삐 채워지니 루바노의 미래 또한 밝게 빛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전부 통령 각하의 은덕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각하께서 이리 근실한 성품을 갖고 계시니 위원들도 태만하지 않고 부지런한 것이지요.”

“암, 그렇고 말고요. 맞는 말씀입니다.”

한 나라의 원수가 되기에 아직 너무나 젊은 카를로타는 이제 겨우 쉰하나였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 틈에 앉아 있어 유독 더 젊어 보였다.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는 주세페는 아직 서른여섯 살이었으니 루바노의 고위 고관들이 모두 모인 이 자리에 가장 미래가 창창한 자리를 고르라고 한다면 카를로타와 주세페의 자리를 고르는 것이 옳았다.

“각하께서는 곧 있을 단돌로 위원의 맏아들의 혼인식에 참석하십니까?”

“그럴 생각이오. 단돌로 위원이 아들을 혼인시키기 위해 신붓감을 고르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고 들었소.”

“고생깨나 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습니다. 잔걱정이 많은 자라 오늘도 낮부터 아들의 혼인식 옷을 고르느라 바쁘더군요. 아직 회의장에 도착하지 않을 것을 보면 여태 해결이 안 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허어, 단돌로 그자도 맏아들에게 참 끔찍한 모양이군. 단돌로 위원을 빼다 박은 얼굴이니 그럴 만도 하지.”

“혼인식 상대가 제2 행정장관의 맏딸이지 않습니까?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혼인식을 치르는 것이 마땅하지요. 각하께서도 일전에 단돌로 위원의 맏아들을 보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그렇소. 위원의 맏아들이 스무 살 남짓한 청년이었을 때 만났던 적이 있소만. 들은 대로 단돌로 위원과 많이 닮은 얼굴이었소.”

“단돌로 위원에게 아들만 넷이 있는데 유독 맏아들이 위원과 똑 닮아 기개가 대단합니다. 미남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얼굴이지만 큰일을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눈빛을 갖고 있지요.”

위원들이 쓸데없는 잡담을 늘어놓는 사이 멀찍이 물러나 서 있던 주세페가 회의장 바깥에 서 있는 체사레를 발견했다. 그와 눈빛으로 말을 주고받은 주세페는 통령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통령 각하. 잠시.”

카를로타가 고개를 기울이자 주세페는 귓속말을 전했다. 카를로타는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에 가십니까?”

위원 여럿이 입을 모아 묻자 카를로타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회의 시작 전까지 돌아오겠소.”

사람들을 헤치고 나온 카를로타는 미소를 거둔 얼굴로 주세페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대화를 엿들을 사람이 없는 청사 건물의 정원으로 나가자 체사레가 서 있었다. 달이 휘영청 떠오른 정원에는 바람 소리만이 음산하게 맴돌았다. 직사각형으로 둘러진 회랑에 갇힌 밤바람이 정원에 난 잡초를 거칠게 쓸어 댔다.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체사레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말을 전했지만 편지의 주기가 평소와 확연히 달라 카를로타의 눈가가 잦아들었다.

“내용은?”

“올빼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각하께서 지금 당장 아셔야 할 만큼 급박한 사안은 아닙니다. 다만…….”

체사레는 말을 흐렸다.

“편지 곳곳에 잘못 표기된 철자들이 보였습니다. 필체로 미뤄 급하게 적은 것은 아닌데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독의 여지가 있을 정도는 아니나 틀린 철자들이 많아 해독하는 데 시간이 지체됐습니다. 그리고 미행에 관한 이야기도 적혀 있었습니다.”

카를로타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체사레는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혹 그 주기가 돌아온 것이 아닐는지요?”

* * *

조사실 내에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울렸다. 티모테오는 등잔 불빛 하나에 의지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적막할 정도로 조용한 조사실에는 티모테오 혼자였다.

노곤한 기분에 미간을 비빈 그는 창밖에서 종소리가 들리자 자리를 정리했다. 바치 시내의 모든 상인들이 장사를 정리할 시간이었다.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은 약 두 시간 후에 울리게 돼 있었다.

“수고가 많아.”

조사실을 나온 티모테오는 복도를 지나는 간부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공안국 건물을 나왔다. 집이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 그는 평소에 잘 다니지 않는 샛길로 빠져 다른 날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때마침 집 앞에 이웃 소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경사님. 엄마가 달걀을 가져다드리라고 해서요. 오늘 아침에 시장에서 산 싱싱한 달걀이에요.”

“그래, 고맙다. 잘 먹겠다고 전해 드려라.”

달걀 일곱 개가 꿰어진 꾸러미를 받은 티모테오는 열쇠로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컴컴한 집 안에서 촛대를 찾아 불을 켠 그는 달걀을 가져다 놓기 위해 부엌으로 향하다 소스라치게 놀라 걸음을 멈췄다.

촛불이 희미하게 닿는 거실 구석에 침입자가 있었다.

“뭐지 당신은!”

군복 허리춤의 검을 빼려던 티모테오는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하고 황당한 얼굴이 됐다. 버젓이 얼굴을 내놓고 있는 침입자는 집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당당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스포르차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여긴 어떻게 들어오신 겁니까?”

어둠 속에서 붙박이 가구처럼 서 있는 것은 조반니였다. 그는 부엌을 정면으로 보고 우뚝 서 있었는데 양손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이런 시간에 집 앞으로 찾아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인데 이렇게 집 안에 들어와 있으니 기겁을 하는 게 당연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헛것이라도 본 줄 알았네요. 자칫하다간 소리를 질렀을 겁니다.”

놀란 척하고 있었지만 티모테오는 의아함과 불쾌감을 참고 있었다. 상대가 조반니이긴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의 허락 없이 집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다짜고짜 성을 내며 집 밖으로 끌어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상대가 조반니였기 때문에 일단 참고 잠겨 있던 문을 돌아봤다.

“저 문을 열고 들어오신 겁니까?”

“…….”

“대체 어떻게요?”

“…….”

조반니는 대답 없이 티모테오를 쳐다보기만 했다. 가슴 언저리까지만 촛불이 닿아 표정이 자세히 보이지 않자 티모테오는 촛대를 들어 조반니의 얼굴을 비췄다.

“잠긴 문을 연 방법은 모르겠지만 나가 주십시오. 선생님께서 이런 경우 없는 행동을 하시다니 놀랐습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나가서 합시다.”

티모테오가 문으로 다가가려는데 별안간 조반니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다섯 걸음 만에 바로 앞으로 다가온 그가 품 안에서 단도를 꺼내자 티모테오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무슨……!”

티모테오가 방어하기 위해 몸을 돌렸지만 조반니가 그 전에 가슴을 깊이 찔렀다. 막지 못하고 칼에 찔린 티모테오가 짧은 신음을 내며 뒷걸음질 치는데 조반니가 칼을 도로 빼더니 사정없이 윗몸 여기저기를 찔러 댔다.

잔인한 난도질에 티모테오는 도망치기 위해 몸을 돌리다가 바닥으로 엎어졌다. 조반니는 엎드린 자세가 된 그의 등과 목, 허리, 엉덩이를 칼로 후벼 파며 쑤셔 댔다.

“그윽, 큭…! 악!”

티모테오는 엎드린 자세로 칼을 맞으면서도 조반니를 피하기 위해 몸을 비틀고 팔을 들어 올려 막았다. 도망치기 위해 네 발로 기어 일어나려 했지만 조반니가 몸을 돌리게 해 어깨와 쇄골, 배를 차례로 찔러 댔다. 무자비한 칼질에 티모테오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 앉자 양팔을 허우적댔다.

“그, 으악…! 그만, 허윽, 그……!”

찔렀다 뺄 때마다 옷은 더 많은 양의 피로 번져 갔고 바닥도 서서히 피로 흥건해졌다. 망설임 없이 칼을 휘두르던 조반니는 피범벅이 된 티모테오의 팔에 칼이 빗맞아 튕겨 나가자 즉시 품 안에서 새 단도를 하나 더 꺼냈다. 피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칼날은 티모테오의 얼굴로 쇄도해 들어갔다.

“아악, 극, 으……!”

눈썹과 눈썹 사이, 광대뼈 아래, 인중, 관자놀이에 사정없이 칼날이 들어갔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공포에 질린 티모테오는 앉은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뒤로 넘어가 바닥에 누웠다. 그는 오직 살기 위해 팔을 들어 머리와 몸 위로 쏟아지는 조반니의 칼을 막았다.

“소용없으니 집어치워!”

조반니가 티모테오의 팔을 잘라 낼 기세로 칼을 후려치자 얼굴 전체가 피범벅이 된 티모테오가 그만해 달라는 것처럼 손을 길게 뻗었다. 눈가에 고인 눈물이 난도질당한 뺨 위로 흘러내려 상처 사이로 스며들어 갔다.

“감히 대위님께 마음을 품다니! 벌레만도 못한 네가 그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그는 내 것이야! 알아들어?”

손바닥을 다섯 차례 찔린 티모테오는 팔을 축 늘어뜨리며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는 칼을 맞아 속살이 벌어진 오른쪽 뺨을 감싸며 전신을 부들거렸다.

“네가, 감히, 그를!”

저항 없이 누워 있는 티모테오의 심장 부근을 다섯 번, 여덟 번, 열다섯 번. 횟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찔러 대던 조반니는 티모테오의 웃옷이 완전히 피에 젖어 더 이상 어디를 찔러야 할지 분간할 수 없게 되자 칼질을 멈췄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었으나 총 마흔일곱. 티모테오의 얼굴과 몸에 가해진 칼자국은 모두 마흔일곱 개였다.

“후우…….”

조반니는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큰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본래 티모테오에게 하던 대로 존대를 했다.

“경사님이 대위님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습니다. 지난 몇 달간 나를 미행하고 염탐한 것으로도 모자라 대위님께 마음을 품다니요. 그는 경사님에게 어울리는 분이 아닙니다. 과분할 정도로 아름다운 분이니 경사님과는 짝이 맞지 않아요.”

“그으…… 흐… 허윽…….”

티모테오는 피범벅이 된 얼굴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크게 뜬 눈은 깜빡거리지 않았다.

“경사님은 분명 오늘 밤에 내가 이곳으로 찾아올 거라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그동안 나를 괴롭히는 것이 재미있었습니까? 당신을 잡기 위해 밤거리를 헤매는 내 모습을 보고 통쾌해했습니까? 정말로 대위님을 흠모했다면 나를 괴롭히기보다는 직접 대위님께 마음을 고백하는 게 나았을 겁니다. 물론 그렇게 했다고 해도 결말은 달라지지 않았을 테니 이렇게 칼을 맞았을 겁니다. 남의 것을 탐낸 자는 그 죄를 돌려받기 마련이니 억울해하지 마십시오. 대위님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조반니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티모테오의 뺨을 발로 밟았다.

“나를 건드렸으니 죽음으로 그 죗값을 치르셔야겠습니다. 자코모에게 안부나 전해 주세요.”

티모테오의 얼굴을 옆으로 돌리게 한 조반니는 껍질이 단단한 과일을 벗겨 내듯 칼을 돌려 가며 티모테오의 목을 썰었다. 칼날을 부러뜨릴 기세로 힘을 줘 자르자 서서히 목 안쪽 살과 뼈가 보이기 시작했다. 피에 절어 있는 티모테오의 머리채를 힘껏 당긴 상태로 칼질을 하니 이윽고 머리가 덜렁거리며 떨어져 나왔다.

발로 걷어차자 티모테오의 머리는 긴 핏길을 만들며 부엌으로 굴러갔다.

“하아…….”

칼을 내려놓고 장갑을 벗은 조반니는 걸치고 있던 티모테오의 옷도 벗었다. 피가 튄 옷을 벗어 내자 안쪽 옷은 깨끗했다. 창가에 있는 꽃병의 물로 얼굴과 손을 씻은 조반니는 촛불을 비춰 신발까지 꼼꼼히 확인하고 바닥에 촛대를 던졌다. 나무 바닥에 불이 붙기 시작하자 집 안에 불길이 어른거리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숨길 새도 없이 문이 활짝 열렸다.

“경사님, 엄마가 이 감자도 가져다드리래요.”

문을 열고 들어온 소녀는 집 안의 불길에 깜짝 놀란 것도 잠시 머리가 잘려 나간 티모테오의 시체를 보고 품 안의 감자를 바닥에 와르르 쏟아 냈다. 조반니는 소녀가 소리를 지르기 전에 달려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얼굴을 가릴 여유는 없었다.

“읍…! 급, 으읍!”

겁에 질린 소녀는 몸부림을 치며 조반니를 올려다봤다. 입을 막고 있는 손이 삽시간에 침으로 흥건해졌다.

조반니는 소녀의 입을 막은 채 칼이 떨어진 곳까지 끌고 가더니 칼을 줍자마자 등 뒤로 날이 삐져나올 정도로 깊게 소녀의 가슴을 찔렀다. 정확히 심장을 찌른 것은 조반니가 해부학자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소녀가 피를 쏟아 내며 쓰러지자 조반니는 칼을 버리고 문을 걸어 잠갔다. 집 안에 연기가 들어차며 머리 없는 티모테오와 소녀의 시체를 덮었다.

양손을 깨끗하게 닦은 조반니는 티모테오의 방으로 들어갔다. 창가로 다가가 창을 열려고 했지만 쉽게 열리지 않았다. 집 안으로 들어올 때 분명 열고 들어왔던 창이었지만 녹이 슬어 말을 듣지 않았다. 조반니가 쉽게 넘나들기 힘든 작은 창이었지만 깨진 유리 너머로 다리부터 빼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몸이 전부 빠져나가기도 전에 창문 뒤편의 골목을 지나던 노인과 마주쳤다.

“아, 아, 아니, 세상에!”

집 안에는 불길이 번져 있었고 조반니는 창문을 통해 빠져나오고 있었으니 누가 보더라도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쳐 나온 도둑 같았다. 노인이 놀라서 뒷걸음을 치자 조반니는 재빨리 달려들어 목을 졸랐다.

“엑! 케엑, 하악……!”

목을 압박당한 노인이 몸을 버둥거리다 질식해 쓰러지자 조반니는 맥박을 짚었다. 숨이 멎은 것을 확인한 그는 계획에 없던 두 사람을 죽였음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차분히 골목을 빠져나왔다. 티모테오의 집을 멀리 빙 돌아 나온 뒤 뒤를 돌아보니 밤하늘에 연기가 번져 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불이야! 불이 났어!”

옷매무새를 정돈하던 조반니는 허리 쪽에 핏자국이 묻은 것을 보고 바지의 허리끈을 졸라 그 부분을 가렸다.

미행자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모처럼 느긋하게 걸으며 바치 시내에서 가장 좋은 신발 가게로 향했다. 오랜 숙원을 푼 기분으로 여유를 만끽하다 보니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조반니 하나만을 기다리느라 장사를 접지 못하고 있던 주인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조반니가 보통의 사람들과 비교되지 않는 비싼 값에 구두 제작을 맡겼기 때문에 굽실댈 수밖에 없었다.

“완성이 다 됐습니까?”

“네, 그럼요. 부탁하신 양가죽 구두입니다.”

주인은 상자에 담긴 구두를 보여 주며 조반니를 곁눈질했다. 구두 한 켤레를 부탁받은 게 지난달의 일인데 조반니는 그때와 모습이 많이 달랐다. 며칠 전에 신발의 중간 상태를 점검하러 들렀을 때도 머리 모양과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어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오늘은 상태가 더 나빠 마치 길에서 노숙을 하는 사람 같았다. 준수한 얼굴인데 차림새가 추레해져 그사이 재산을 탕진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구두입니다. 마음에 드는군요.”

“손님께서 주신 신발의 밑그림이 워낙 훌륭한 덕분입죠. 그렇게 세련된 밑그림을 직접 그려 오시는 손님들은 많지 않으니까요.”

상자 속에 든 신발은 정교한 꼬임 문양이 들어간 고급 양가죽 구두였다. 둥글고 넓적한 대신 날렵하고 미끈한 앞코를 갖고 있어 신는 사람의 발 모양을 돋보이게 할 것 같았는데 장미꽃 모양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데다 낮은 굽까지 있어 멋스러웠다.

“부탁하신 이름도 신발 밑창에 새겼습니다.”

주인이 구두를 뒤집어 밑창을 보여 주자 조반니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습니다. 제가 생각하던 그 모습 그대로 새겨 주셨군요.”

신발 밑창에 새겨진 ‘로미오 미오’는 고대 루바노어로 ‘나의 로미오’라는 뜻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신발을 뒤집어 밑창을 구경하지 않는 데다 그렇게 한다 해도 태반이 ‘미오’라는 고대어를 모를 게 뻔했다. 로미오는 맹인이니 이 글자를 읽을 수 없을 것이고 만약 누군가가 알려 줘서 뜻을 알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로미오는 이런 글자를 새겨 놓은 것에 대해 따지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선물 받은 것이니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해 잠깐 당황하고 말 것이다.

만약 따진다면? 로미오에게 하고 싶어 좀이 쑤셨던 낭만적인 말들을 늘어놓아 그의 말문을 막히게 한 후 당황해하는 귀여운 얼굴을 즐기면 된다.

로미오의 기준에선 과할지 모르나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런 구두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로미오의 취향을 최대한 고려해 검소하게 사치를 부린 것이었다. 웃옷과 지팡이는 이미 선물했으니 남은 것은 모자와 바지, 그리고 장갑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번에 맞춰 주고 싶었지만 로미오가 쉽게 받질 않으니 하나하나 따로따로 선물할 심산이었다.

그나저나 ‘로미오 미오’라니. 로미오의 이름 때문에 갸르릉 대는 고양이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이런 것까지 사랑스럽다는 생각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새어 나왔다.

“푹 빠지셨군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 그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가게 주인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신발 주인께 말입니다. 이런 멋들어진 구두가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분이실 것 같네요.”

주인은 로미오가 발이 유난히 큰 데다 남자의 이름을 가진 여자일 거라고 멋대로 생각해버렸다. 구두의 모양과 색은 여자와 남자 둘 다에게 인기 있을 법했기 때문에 절로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보고만 있어도 저를 기분 좋게 하는 분이십니다. 이 구두가 그분의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요. 이 상자에는 저 리본이 어울릴 것 같으니 보기 좋게 매 주십시오.”

주인이 로미오의 눈을 닮은 파란 리본을 상자에 매는 동안 조반니는 구두값을 계산했다. 이미 지난번에 선물한 웃옷에 상당한 거금을 들인 조반니는 그 웃옷에 결코 뒤지지 않는 상당한 액수를 구두값으로 지불했다. 웃옷과 구두값을 합치면 바치 시내에 존재하는 모든 책방의 책을 사들일 수 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상자를 받은 조반니는 신발 가게를 나와 로사티 하숙집 근처의 빵집으로 향했다. 빵집 주인 역시 장사를 모두 마무리하고 조반니 하나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반니가 저택의 반대 방향에 있는 이 빵집을 굳이 찾은 이유는 로미오가 이곳의 사과파이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부탁하셨던 사과파이입니다. 꿀을 듬뿍 넣고 버무려 맛이 그만입니다.”

오늘 아침에 일찍 빵집에 들러 부탁한 사과파이였다. 그러나 기쁜 얼굴로 빵집으로 들어섰던 조반니는 주인에게 사과파이 상자를 건네받기 직전에 손을 멈췄다. 주인의 얼굴을 주시하던 그는 돌연 손을 물리며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이 됐다. 그러더니 사과파이 상자를 빤히 내려다보며 눈가가 가늘어졌다.

얼굴에서 미소가 거둬지자 금색 눈동자가 광기로 빛났다.

“뭡니까?”

조반니가 묻자 주인이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 돼 물었다.

“왜 그러시는지요?”

사과파이가 든 상자 속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방금 갓 굽거나 끓인 음식 속에 독약을 넣었을 때 나는 냄새가 났다. 독약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단순히 음식이 상했거나 겉면을 심하게 태웠을 때 나는 냄새라고 착각할 수도 있었지만 조반니는 알았다.

“왜 음식에 이런 짓을 한 겁니까? 누가 시켰습니까?”

조반니가 음산한 목소리로 묻자 주인은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게 입을 벌렸다. 그가 당황해 있는 사이 조반니는 알겠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렇단 말이지…….”

혼자 중얼거린 조반니는 금방이라도 목을 졸라 죽일 것 같은 눈으로 주인을 노려보다 돌아섰다. 순간 주인은 조반니의 웃옷 안쪽에 묻어 있는 핏자국을 보고 움찔 놀라 자신의 입을 가렸다.

“됐습니다. 사과파이는 버려 주십시오.”

조반니는 사과파이값을 내고 그대로 빵집을 나왔다. 겁에 질린 주인이 등 뒤에서 다급하게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가게를 나온 조반니는 사과주를 살 계획을 접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매서운 눈초리로 주위를 경계했다. 티모테오를 죽였는데 왜 빵집 주인이 사과파이에 독을 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저런 허술한 수를 써서 자신을 독살하려는 건지 몰랐다. 심지어 빵집 주인은 저 빵집에서 수년째 장사를 하고 있는 평범한 자였다. 그런 자가 어떻게 저런 짓을 꾀한 것인지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사과파이 안에 독을 넣은 것이 그가 아닐지도 몰랐다. 다 만들어 놓은 사과파이에 누군가 독약을 넣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버러지 같은 놈! 옷을 똑바로 입고 다녀!”

마주 오던 행인 하나가 욕을 퍼부으며 지나갔다. 신경이 예민해진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조반니는 그냥 넘어가지 않고 그의 멱살을 잡았다.

“뭐라고 했습니까?”

조반니가 마주 오는 것도 모르고 자신의 갈 길을 가기 바빴던 행인은 느닷없이 멱살이 잡히자 당황해 버둥거렸다. 가까이서 본 조반니의 눈에는 광기가 어려 있었다.

“왜 내게 욕지거리를 하는 겁니까? 날 압니까?”

“켁…!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혹시 빵집 주인과 한패입니까? 그자가 시키던가요? 아니면 사과파이에 독약을 넣은 것이 당신입니까?”

행인의 멱살을 세게 틀어쥐고 흔들던 조반니는 행인의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옷 속에 칼이 들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두렵기는커녕 웃음이 나왔다.

“칼을 숨기고 있군요.”

손을 더듬어 옷 안을 뒤지려고 하자 행인이 몸부림을 쳤다. 그가 놓아 달라며 고함을 치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봤다. 칼을 찾지 못한 조반니는 언성을 높였다.

“내 이름은 조반니 비스카르디이고 비스카르디 통령 각하가 내 누이입니다. 나를 해하려 한다면 통령 각하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가서 전하십시오.”

조반니의 말을 들은 행인들 몇이 귀엣말을 하며 지나가는 가운데 조반니는 행인을 거칠게 떠밀치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멈춰서서 거리를 둘러봤다. 자신에게 큰 위험이 닥쳤음을 느낀 것처럼 주위를 경계하던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미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혼잣말을 중얼댔다.

“이제 알겠군. 이제 전부 알겠어. 그렇게 된 거였군. 내 직감은 틀리지 않았어.”

다시 걷기 시작한 조반니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느라 마주 오던 사람과 어깨를 부딪치고도 그대로 지나쳐갔다.

“이보쇼! 어깨를 쳤으면 사과를 해야 할 것 아니오?”

뒤에서 들려오는 고함에도 조반니는 걸음을 빨리했다.

티모테오의 뒤에 거대한 조직이 있음을 깨달은 조반니는 자신이 가야 할 곳을 고민했다. 조직의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으나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분명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저 저택의 창문 너머에서, 그리고 골목길의 사이사이에서.

심지어 그들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꾀하고 있었다. 사과파이에 독을 탄 자와 조금 전 부딪친 행인이 그 조직에 연관돼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들은 자신이 티모테오를 살해하고 돌아오는 길이라는 걸 아직 모를 것이다.

이제부터는 미행이 아니라 납치당할 것을 우려해야 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읽으려 하고 있었고 나아가 행동을 조종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는 차치하고 어쨌든 갖은 수를 써 자신을 괴롭히려고 하고 있었다. 이상한 냄새를 맡지 못하고 사과파이를 받았더라면 자신과 로미오는 오늘 밤 운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그래. 그리로 가야겠군.”

혼잣말을 중얼댄 조반니는 서둘러 걸음을 틀었다. 자신을 해하려는 조직에 연관된 자가 생각나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레오나르도 자네 요즘 무슨 일이라도 있나?”

술잔을 쥔 레오나르도는 불편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는 그는 타오르는 장작불을 바라보며 대답이 없었다.

“…….”

늦은 밤 열린 모임에는 열 명의 의사가 참석했다. 협회에서 개최하는 모임이 아니라 늦은 밤 술 한잔을 곁들여 의학에 관한 토론을 하기 위해 의사들끼리 사적으로 모인 자리였다. 참석자들이 돌아가며 자신의 집에서 모임을 열었는데 오늘의 모임 장소는 레오나르도의 집이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모임이었기 때문에 모임 날짜와 참석하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조반니도 참석했어야 했지만 그가 오늘 오지 않아 의자 하나가 비어 있었다.

의사들은 제각각 무릎에 책을 올려놓거나 음식 접시를 들고 모여서 얘기를 나눴다. 난롯불의 불티가 날리는 아늑한 거실에서 레오나르도는 조반니의 빈 의자를 보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

“이 친구, 술이 모자란가 보구만. 더 부어 줄 테니 인상 펴.”

“난 됐으니 술은 자네나 많이 마셔.”

레오나르도는 술잔을 내려놨다. 오늘 아침 엘베라와 나눈 대화가 머릿속을 복잡하게 해 다른 의사들의 잡담에 끼어들기가 힘들었다.

“조반니는 왜 오늘 모임에 오지 않았지? 이유를 아는가?”

레오나르도가 고개를 젓는데 멀찍한 자리에 모여 서서 이야기를 나누던 의사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자네들 그 이야기 못 들었나? 조반니가 요즘 이상하다던데.”

말을 꺼낸 의사는 바치 시내에서 떠도는 각종 소문을 유난히 좋아하는 자였다. 모임이 열릴 때마다 어딘가에서 주워듣고 온 소문을 화제로 삼는 것이 취미였다.

“바치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에게 들은 얘기인데 조반니가 병실 문에 못질을 하고 정원에 이상한 연기가 살포돼 있다며 병원 의사들을 괴롭힌다더군. 복도를 지날 때마다 혼잣말을 중얼거려 곤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해.”

멀찍한 자리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던 의사 하나가 덧붙였다.

“자네, 그 이야기는 못 들었나? 보름 전쯤에 일어났던 살인 사건 말이야. 무명의 조각가가 살해된 사건.”

“물론 알지. 범인이 잡힌다면 꼼짝없이 사형을 당할 정도로 잔인한 사건이었잖나.”

“그 살인 사건의 범인이 의사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어. 듣자 하니 범인이 그 죽은 조각가의 몸 곳곳을 아주 정확히 찔러 숨통을 끊어 놓았다고 해. 처음에는 소와 돼지의 사체를 많이 만져 본 푸줏간 주인이 범인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그보다는 의사가 더 유력하다더군. 그것도 살인에 경험이 많은 의사 말이야. 더한 이야기는 그 살해당한 조각가가 조반니와 아는 사이라는 거야. 심지어는 살해당하던 날 조반니를 만났다고 해. 증거가 없어 사건이 무마됐다는데 수상쩍지 않나?”

“나도 범인이 의사일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어. 시체에 남은 상처를 보면 의학적 지식이 풍부한 자가 분명하다더군.”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레오나르도가 그들을 쳐다보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반니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곳에서 뒷말을 주고받을 게 아니라 공안국에 이 사실을 알리는 편이 나을 것이네.”

레오나르도의 지적에 의사 몇몇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무는가 싶더니 누군가 다시 말을 꺼냈다.

“레오나르도 자네는 조반니를 의심하지 않나? 우리 모두 조반니를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자네만큼 그와 가까운 사람은 아무도 없어. 모두와 친분이 있는 것 같지만 조반니는 보기보다 남과 깊이 교류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으니 말일세. 우리 모두가 의학부 학생이었을 때도 조반니의 포악한 성정이 드러나는 일이 있었잖나. 모든 의사들이 시체를 다루는 일을 하지만 조반니에겐 지나치게 냉정한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야. 실력이 뒷받침되니 누구도 딴지를 걸지 못하지만 조반니가 시체를 취급하는 것을 보면 도저히 죽은 자에 대한 감정이라고는 없어 보여.”

“시체를 다루는 태도 하나만으로 이리 호들갑을 떠는가? 자네의 그 발언은 방향이 틀렸어. 아무리 그래도 살인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네.”

“그래. 조반니가 살인을 했다고 보는 것은 억측이야.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밖에서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문소리가 들렸다. 조반니의 고함 소리도 함께였다.

문간에 가까이 서 있던 의사가 문을 열자 조반니가 흉포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품에 파란 리본이 달린 상자를 껴안고 있었는데 급하게 온 것인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꼴이 대체 그게 뭔가?”

조반니가 늦게나마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찾아온 줄 안 의사는 잘 왔다고 말하기도 전에 조반니의 몰골부터 지적했다.

“거리에서 구걸이라도 하고 다닐 것 같은 꼬락서니잖아. 옷차림이 그게 뭐야?”

조반니는 방 안을 둘러보더니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 한 의사의 멱살을 잡았다. 앞뒤 재지 않고 멱살부터 틀어쥐자 의사들이 놀라서 몰려들었지만 의사들 중 가장 키가 크고 근골이 남다른 조반니를 말릴 자는 없었다.

“자네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전부 알고 있으니 거짓말을 해 봐야 소용없어! 나는 모든 걸 알고 있어.”

조반니가 엉뚱한 말을 하자 멱살이 잡힌 의사가 그의 손목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 이러는 건가? 이거 놓게!”

의사가 버둥거리자 조반니는 웃옷을 찢어 버릴 것처럼 더 세게 멱살을 끌어당겼다. 레오나르도조차 손댈 수 없을 정도로 분노에 차 있는 조반니는 의사들이 손을 떼어 내려고 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진정하게, 조반니! 놓고 이야기해!”

“갑자기 찾아와서 왜 이러는 건가? 이 손부터 놓게!”

의사들의 만류에도 조반니는 멱살을 쥔 의사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분명 그들이 자네를 꼬드겼을 거야. 자네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모든 자들이 이 일에 가담하고 있는 거겠지. 그렇지 않은가? 그들의 정체가 뭔지 말해. 나를 해하기 위해 작당하고 있는 무리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자가 도대체 누구지? 내가 아는 자인가?”

“알아듣게 얘기하게! 도대체 무슨 소리를……!”

멱살을 잡혀 있던 의사는 조반니에게 주먹을 얻어맞고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바닥에 코피가 뿌려지자 의사들이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주먹질을 하는 와중에도 조반니는 껴안고 있는 상자가 찌그러지지 않게 팔로 안았다.

그는 자신에게 주먹을 맞은 의사를 향해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네가 사랑했던 여자를 내가 가로챈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앙심을 품은 것이겠지. 그때 그 일로 이번 일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여자와 약혼을 하려 했었다고 자네 입으로 떠벌리고 다녔잖나?”

그러자 다른 의사가 외쳤다.

“자네에게 여자를 뺏긴 자들이 어디 한두 명인가? 그자들을 전부 모으면 바치 외곽 성문에서부터 중앙 광장까지 각양각색의 사연을 가진 사내들이 줄줄이 인파를 이룰 것이네! 왜 갑자기 이런 행패를 부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두게! 이자의 얼굴을 봐. 코뼈가 돌아갔어!”

코를 맞은 의사는 휘어진 자신의 콧대를 더듬으며 비명을 질러 댔다. 그의 비명 소리에도 조반니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덤비려고 하자 레오나르도가 그의 가슴을 떠밀며 외쳤다.

“나가! 당장!”

“음모를 꾸미고 있는 자들의 이름을 밝혀! 그들이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이지? 나를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말해!”

집 밖으로 떠밀리면서도 소리를 치던 조반니는 레오나르도가 밖으로 끌고 나가 문을 닫아 버리자 그를 노려봤다.

“너도 저자와 한패가 될 셈이야? 그래?”

“네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자는 이 방에 없어. 대체 네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음모라니 무슨 이야기야? 머리와 옷은 또 왜 그런 거고. 오늘 모임에는 왜 참석하지 않았어? 우리가 마지막으로 언제 봤었는지 기억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엘베라와의 대화를 떠올린 레오나르도는 혼란스러운 심정이었지만 조반니는 대꾸 없이 품 안의 상자부터 확인했다. 리본이 삐뚤어져 있자 바로 하며 상자가 기울어지지 않게 똑바로 들었다. 주먹질을 하느라 금발 머리가 지저분하게 이마로 흘러내려 눈가를 가렸지만 손으로 정돈하지 않고 치렁치렁한 그대로 놔둔 채 분노에 찬 목소리를 쏟아 냈다.

“내가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라고 들어가서 전해.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니 나를 음해하려 한 이상 절대 남은 생을 편하게 보내지 못할 거라고 전해. 그리고 당분간은 의사 모임에 오지 않을 테니 그렇게 알아. 나는 한가롭게 모임 따위에 참석하고 있을 수 없어. 이건 내 목숨이 달린 일이야.”

“제발 알아듣게 얘기해! 목숨이 달린 일이라는 게 뭘 뜻하는 거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어떤 조직이 나를 감시하고 있어. 원흉이 되는 자를 처리했다고 생각했지만 내 착각이었어. 그자는 여러 갈래의 뿌리 중 하나에 불과했어. 앞으로 더한 감시가 이어질 거야. 만약 나와 닷새 이상 연락이 닿지 않는다면 공안국에 알리고 대위님을 보호해 줘. 부탁할 사람은 네가 유일해.”

주절대며 이상한 말을 늘어놓은 조반니는 멋대로 말을 끊고 돌아섰다.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상자만은 반듯하게 들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가는 거야? 아직 내게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았잖아! 아까 한 말들을 다시 자세히 들려주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어.”

레오나르도가 등 뒤에서 외쳤지만 조반니는 걸음을 서두르며 대답했다.

“대위님께서 기다리고 계신 이상 난 집으로 돌아가야 해. 너와 이야기할 시간 따윈 없다고.”

레오나르도가 뒤따라가 그를 붙잡기도 전에 조반니는 재빨리 계단을 내려갔다.

“조반니!”

계단 난간으로 다가가 불렀지만 조반니는 어두운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 * *

로미오는 양초도 켜지 않고 컴컴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엔초의 방은 비어 있기 때문에 조용했다. 오늘 낮에 발레리아의 도움을 받은 로미오는 이곳의 짐을 모두 로사티 3번가 하숙집으로 옮겼다. 갖고 왔던 짐을 남김없이 모두 보내 이 집에 남아 있는 물건 중 로미오의 것은 없었다. 이 저택에 살았던 흔적을 지우고자 한다면 이 방에서 몸만 그대로 빠져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왜 갑자기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오늘 아침에 내가 했던 말 때문에 그래?]

갖고 온 짐들과 함께 엔초를 마차에 태웠을 때 엔초는 머뭇거리며 그렇게 물었다. 로미오는 고개를 저었지만 얼굴에 드리운 그늘까지 숨길 순 없었다.

[밤이 늦거든 먼저 잠들어. 난 선생님과 할 얘기가 있어서 여기 남아야 해.]

그 말을 했을 때 발레리아도 함께 마차에 타고 있었다. 그녀는 검은 망토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자신이 필요해지거든 언제든 얘기해 달라고 당부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밤까지 로사티 하숙집에 남아 엔초와 그라나 부인을 살펴보겠다고도 했다.

텅 빈 집 안에 관리인과 단둘이 남은 로미오는 꼼짝하지 않고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관리인이 저녁을 가져다줬지만 먹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일찍 오겠다던 조반니는 밤이 늦도록 오지 않고 있었다. 검은 망토는 몇 시간 째 로미오의 손에 계속 들려 있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었기 때문에 조반니가 저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볼 수 있도록 무릎 위에 올려 두고 있었다.

방에 홀로 앉아 낮 동안 있었던 일을 정리하는 동안 로미오는 자신이 어떻게든 상황을 더 나은 쪽으로 해석하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숙집으로 이사 오던 당시의 조반니의 사정을 여러 방면으로 상상하며 그가 거짓말한 이유가 따로 있었을 것이라고 믿으려 하고 있었다.

그가 이미 그때 자신을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에 무리해서 하숙집으로 이사 온 것이라고.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 이르다고 판단해 이사 온 이유를 거짓말한 것이라고. 그 순수한 의도 뒤에 더러운 저의 같은 것은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조반니를 이해해 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자니 자신이 조반니를 무한히 신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노력의 바탕에는 덜 고통스러운 상상을 하기 위한 무의식이 깔려 있었지만 조반니를 향한 믿음은 그보다 훨씬 더 크게 작용했다.

그만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다른 모든 이들이 이 일에 관여돼 있다고 해도 조반니만큼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하루의 시간을 이렇게 허비해 버렸다.

굴을 파 놓고 그곳에 사슴이 빠지길 기다리는 것은 로미오의 방법이 아니었다. 사슴이 가는 길목마다 덫을 놓고 덤불 속에서 기다리기보다는 등에 활을 메고 찾아 나서는 것이 로미오의 방식이었다. 화살에 맞는 것이 새끼 토끼라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짐승의 그림자가 보이는 순간 지체하지 않고 활을 쏴 행동을 개시한다. 신중한 방법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것이 로미오의 방식이었다.

상대가 조반니가 아니었더라면 어젯밤 층계 계단에서 즉각 추궁했을 것이다. 당신에게서 검은 망토 사내의 체취가 나는데 그자는 자신을 해하려 했던 인물이라고 설명했을 것이다. 그자와 같은 냄새를 풍기는 이유를 따지고 진실을 밝히려 했을 것이다.

쿵.

망토를 펼쳐 손으로 더듬으려는 찰나 집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물건을 떨어뜨리는 소리였는데 위층이나 아래층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지하실에서 나는 소리였다.

<5권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