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미치광이의 체취 (19/30)

19. 미치광이의 체취

이른 새벽에 열린 중앙 지부 회의에 참석한 상위 단원은 모두 열한 명이었다. 정례 회의였기 때문에 로미오의 참석은 허가되지 않았는데 대총장의 사망으로 열두 명이 된 상위 단원들은 정례 회의에 반드시 참석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한 자리가 공석이었다.

“조반니는 어떻게 된 거지?”

회의가 시작되기 전 다 몬티가 물었을 때 레오나르도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언질을 받지 못했습니다. 요 며칠 사이 바빠 보이기는 했습니다만 오늘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들은 게 없습니다. 친치아, 혹시 아는 게 있어?”

“아뇨. 저도 조반니를 못 본 지 꽤 됐는걸요.”

회의장에 도착했을 때부터 무언가 단단히 벼르는 것 같던 노프리는 준비해 온 몇 가지 서류를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엘베라의 쪽으로 넘겼다. 탁자 중앙의 촛불을 정면으로 보고 있는 엘베라의 올빼미 가면의 콧대 부분이 유난히 희게 빛났는데 그녀는 비어 있는 조반니의 자리를 잠시간 바라봤다.

회의가 시작되자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노프리보다 도밍고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대총장 선출 문제를 염두에 두고 짐짓 걱정스러워 보였다.

“이제 슬슬 선출에 관한 논의를 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늦어져서 좋을 것은 없으니 말입니다.”

대답한 것은 엘베라였다.

“그 문제라면 당분간 미루도록 하오. 대총장께서 급사하신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거니와 노프리에게 좋은 계책이 있다고 하니 그 이야기부터 들어 보는 게 좋겠소. 그의 계책이 시기와 잘 맞물려 적절히 시행된다면 공화국의 미래가 흔들릴 만한 일이 벌어질 거요. 그럼, 이야기를 해 보시게.”

가명으로 둘러대며 프란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노프리는 그의 저택에서 발견했다는 서신 몇 장을 필사해 갖고 왔다. 보낸 이는 다른 31인 위원회의 위원이었는데 서신에 적힌 날짜가 비교적 최근이었다.

“자식이나 부인 없이 시중드는 비서 하나와 나이 든 하인들만 줄줄이 둔 데다가 드나드는 자들이라고는 조만간 가는 귀가 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늙은이들밖에 없으니 발각될 일은 없습니다. 비싼 보석이나 옷에 탐욕을 부리는 자라 부탁받은 루비 반지를 마련할 때까지는 저택에 꾸준히 드나들 수 있습니다. 서신을 필사할 기회는 아직 많습니다.”

“필사해 온 그 서신의 내용을 설명해 주시게.”

“이 서신에는 조만간 있을 다른 31인 위원회 위원의 맏아들의 혼인식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혼인식을 성대하게 열 것이라는 쓸데없는 말이 긴 글로 적혀 있지요.”

서신은 어지럽게 흩날리는 글씨체로 필사되어 있었지만 읽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노프리가 어떻게 프란코 앞으로 도착한 서신을 볼 수 있었느냐는 차치하고 급한 상황에서 어렵게 베껴 적은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서신을 보내온 자는 현 통령이 31인 위원회의 위원장이었을 때 그와 한 무리를 이루던 자입니다. 혼인식에 관해 이야기하며 통령의 참석 여부를 거론하는 것으로 봐 통령이 참석할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31인 위원회의 위원들이 파를 갈라 친목을 도모하는 것은 새로울 것이 없지. 서신에 특별한 점이 있는가?”

물은 것은 다 몬티였다. 노프리는 가면의 눈구멍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를 희번덕댔다.

“그 혼인식 날 통령을 암살할 기회를 노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별다른 논의 없이 갑작스럽게 거론된 암살 공작에 다 몬티가 눈살을 찌푸리자 도밍고와 소피아를 비롯한 다른 단원들도 동조하기 힘든 눈빛이 됐다. 미리 귀띔을 들은 것은 엘베라와 친치아 두 사람뿐이었다. 레오나르도는 본래 표정 변화가 적은 자라 얼굴빛이 달라지지 않았으나 암살 계획에 쉽게 동조하지 못하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현 통령이 선출된 이후 군의 감시가 전보다 더 엄중해진 데다 체포되는 연루자들의 수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 않습니까? 구금의 강도와 고문 방법도 나날이 악독해지고 있습니다. 통령의 처분에 반기를 드는 민중도 적지 않으나 우리를 공화국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원흉의 수괴로 여기는 수법을 쓰니 공화국의 안보에 공헌하는 통령이라고 여겨져 지지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노환으로 몸져눕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이니 이 기회에 처단하는 것이 옳습니다. 혼인식이라면 춤과 노래가 함께 하는 자리이니 암살 기회를 노리는 것이 쉬울 겁니다.”

“민중의 지지를 얻는 통령을 살해해 봐야 민중에게 반감밖에 심어 주지 않을 것이네. 통령이 살해당한다면 우리가 가장 의심받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지.”

“그 부분이라면 위장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통령에게 증오를 갖고 있는 최측근의 소행으로 몰아가는 것이 안전할 겁니다.”

“암살한다 해도 그 역할을 할 자가 없지 않은가? 혹 통령을 처단한 자가 체포되지 않고 무사히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이라도 강구한 것인가? 단지 장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네. 확실한 보장이 있어야 해.”

다 몬티는 노프리의 계획이 터무니없음을 알려 주기 위해 온건한 말투로 재차 말했다.

“마땅히 좋은 방법이 있다면 말해 보시게.”

통령을 암살하고 현장을 빠져나온다 해도 온 나라가 그 암살자 하나를 잡기 위해 갖은 수를 쓸 게 뻔하니 암살 공모에 가담한 단원들은 꽤 오랫동안 먼 곳에서 은신해야 할 것이다. 한 나라의 원수를 죽인 자니 이 나라에 발붙이고 사는 것은 힘들 게 분명했다. 실패할 경우 위험부담은 그보다 더 커졌다.

“다 몬티의 말이 맞습니다. 암살에 성공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붙잡힌다면 조직의 정체가 전면에 드러나게 될 겁니다. 이 문제는 좀 더 숙고해야 합니다.”

“그렇소. 또한, 암살을 계획하기에 앞서 그 일을 할 만한 적임자를 찾는 것이 먼저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조직원들 중 가장 대담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데다 칼을 잘 쓰고 암살 직후 무사히 도주할 만한 능력이 있는 자를 물색해야 하오. 그 일에 적합한 자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조직원들이 한마디씩 거들자 노프리가 친치아를 봤다. 그러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바치시 축제 날 있었던 벽보 사건을 모두 기억하실 거예요. 대위님의 남동생이 연루된 그 사건요. 그때 대위님의 동생과 일을 공모를 했던 소녀의 친동생을 어제 만나 봤어요.”

“포섭 대상으로 고려 중이라는 그 사내아이 말인가?”

“네. 그 소년은 누나의 억울한 죽음에 큰 분노를 느끼고 있어서 회유만 잘한다면 그 화살을 통령에게로 돌릴 거예요. 아직 조직에 관해 노출하지 않았으니 우려할 점은 없어요. 서신 속에 적힌 혼인식 날까지 그 소년을 적임자로 만들어 보는 건 어때요?”

“그 소년에게 어떻게 암살을 맡긴다는 말이지? 그만한 자질을 갖고 있을 리 만무한데다 그런 중요한 일을 맡기기에 그 소년은 아직 포섭 단계에 놓여 있네. 적임자로 만든다 한들 그것이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모든 암살 공모에 반드시 능력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죠. 혁명을 기도한다는 대의를 갖고 있는 우리 중에 암살자를 뽑는 것보다는 다스릴 수 없는 강한 분노를 갖고 있는 데다 스스로를 버릴 준비가 돼 있는 멋모르는 소년이 더 적임자일 수도 있어요.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이 힘들다면 독살도 노려 봐야 해요.”

“한낱 민중이자 어린아이에 불과한 소년이 통령의 숨통을 끊을 암살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궁금하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봐. 소년에게서 비범한 면모를 보았나?”

“그 소년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양부모예요. 소년의 누나가 군으로 끌려갔던 날 부대 앞으로 찾아가 애걸했던 양부모는 소녀가 죽고 한동안 그 집을 떠나 다른 곳에 살았다는군요. 근래에 다시 그 집으로 돌아왔지만 소년의 말에 의하면 이 나라를 떠날 준비를 하는 모양이에요. 진짜 핏줄은 누나가 유일했기 때문에 소년은 이제 혼자 남았다고 생각하더군요. 누나의 누명을 벗겨 주기 전까지는 절대 이 나라를 떠날 수 없다는 게 소년의 생각이에요. 그 소년, 누나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정부 청사에 투서까지 했대요. 투서가 통하지 않자 직접 청사로 찾아가 소란을 피우다가 공안국에 체포될 뻔했다고 해요. 남매 사이가 각별했나 봐요.”

“소년의 절실함을 이용하자는 것인가?”

“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바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위해서 흔쾌히 목숨을 걸 거예요. 누나가 죽고 난 후 소년은 이미 그 자신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어요. 암살에 성공한 뒤 이 나라를 떠나 숨어 살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하면 소년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예요. 물론 저는 그것이 단순한 약속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만약 암살에 실패한다면? 그 소년이 그 자리에서 붙잡혀 군으로 인치될 경우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나?”

친치아가 대답하지 못하자 노프리가 말했다.

“실패할 경우 그 자리에서 자결하게 만든다면 뒤탈이 없지 않겠습니까?”

잔인한 대답이었지만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친치아가 이어 말했다.

“소년이 암살자 역할을 할 거라면 저와 대위님은 더 이상 그 소년과 접촉할 수 없어요. 그 소년이 통령의 암살 공모 뒤에 거대한 조직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되니까요. 소년에게 암살 모의를 제안한 것은 이 나라와 비스카르디 통령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되 암살 음모를 일삼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꾸미는 것이 좋아요. 소년을 속이기 위해서 최소한 세 명에서 다섯 명의 사람이 필요하며 그중에서 반드시 한 명은 소년에게 얼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야 해요.”

엘베라가 이 논의에 대한 허점을 지적하지 않고 잠자코 있자 도밍고가 의문을 제기했다.

“통령의 혼인식 참석이 흔치 않은 좋은 기회라는 것은 알겠으나 혹여나 소년이 밀고라도 하게 된다면 그 후의 일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조직의 이름을 노출하지 않는다 해도 취조 과정에서 소년과 접촉한 모든 이들이 통령이 준비한 교수대 위로 올려보내질 것이오.”

“맞는 말입니다. 암살에 적합한 자는 조직 내에서 찾아야 합니다. 다른 지부에 조직원을 파견해 적임자를 물색할 필요가 있어요.”

“통령의 암살 공모는 그 어떤 일보다 정보가 누설되는 것을 가장 엄격히 해야 하는 중차대한 일이오. 적임자를 찾는 과정에서 외부로 말이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조직의 와해를 이끄는 일이 될 거요. 이 일은 철저히 중앙 지부 내에서만 거론돼야 함이 옳소.”

“하지만 그저 한두 번의 만남을 가졌을 뿐인 어린 소년에게 암살을 맡긴다는 것은 쉽게 용납할 만한 일이 아니에요. 현재로선 친치아만이 그 소년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나요? 바로 어제까지 민중들 속에 섞여 살았던 평범한 소년에게 별안간 이 나라의 운명을 짊어질 만한 능력이 생겼다니 쉽게 납득할 수 없군요. 소년이 암살 직전에 어린아이처럼 겁을 먹고 말을 바꿀 수도 있는 일 아닌가요?”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엘베라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 암살을 모의한 그날이 오기 전까지 끊임없이 소년을 시험해야 할 것이오. 통령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는 바로 그 직전에라도 소년이 그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된다면 암살 공모는 철회해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그 소년과 접촉하는 모든 조직원들은 출신지와 성별, 이름, 나이, 머리 색, 가능하다면 목소리까지 속여야 하오. 친치아. 통령의 암살 공모 날까지 너는 그 소년과 우연으로라도 두 번 다시 마주쳐서는 안 된다. 그 소년의 포섭을 추진한 로마니엘로 대학의 하위 단원이 소년에게 불온한 말을 한 전력은 없겠지?”

“네, 그럼요. 그녀는 표면적으로 그저 소녀의 선생으로서 그 집을 드나든 것에 불과해요.”

“암살에 적합한 자를 중앙 지부 내에서 물색하려는 시도도 해 보겠소. 비록 오늘 이 자리에서 암살 모의가 오갔으나 조직의 보위를 위해 이 공모가 언제든 무산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 주시오.”

엘베라의 말이 끝나자 노프리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직원들을 둘러봤다.

“오늘 그 저택에 팔찌를 전달하러 들러야 하는데 추가로 서신이 더 발견된다면 필사를 해야 하니 함께 보석상으로 위장해 들어갈 자가 필요합니다. 북부나 남부 사투리 구사할 수 있는 자라면 위장에 더 용이할 겁니다.”

“제가 가도록 하지요.”

손을 든 것은 다 몬티였다.

“제 고향인 몬티 지방의 사투리를 섞어 쓰는 보석상으로 위장해 루비와 진주를 조달하는 일을 맡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노프리, 보석상으로 보일 만한 복장이라면 뭐든 상관없겠지?”

노프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베라가 말을 이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암살단을 조직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겠소.”

엘베라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녀는 조반니의 빈자리에 시선을 주더니 친치아와 레오나르도를 눈여겨보는 것처럼 그 둘을 바라봤다.

가벼운 침묵 후 다시 입을 뗐을 때 그녀의 눈은 모두를 향해 있었다.

“오늘 이 정례 회의의 내용은 엄비에 부치겠소. 이 자리에서만 논함이 맞을 듯하니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조반니에게는 통령의 암살 공모에 관해 거론하지 않을 것을 약속해 주시오. 그가 다음 정례 회의에 참석하면 그때 논의의 내용을 알리는 것으로 하겠소.”

* * *

“형, 선생님은 어젯밤에 언제 돌아오신 거야?”

“늦게 오셨어. 일이 바빠서 그러시는 것 같아.”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아침 식사 자리에는 로미오와 엔초 둘밖에 없었다.

조반니는 이른 아침 쪽지 한 장을 남겨 두고 집을 나섰는데 쪽지에는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았으니 엔초와 함께 먹으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로미오의 방 문고리에 걸려 있던 그 쪽지의 내용은 엔초가 읽어 줬다.

“이것 봐, 스포르차 선생님은 글씨를 정말 잘 쓰셔. 글씨체가 아주 멋있어. 아, 참. 형은 볼 수 없지?”

로미오는 어젯밤 조반니에게 피에트로의 편지와 프란코 바르톨루치 위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그는 늦은 새벽녘에 들어왔다.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이 치고도 서너 시간이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잠들지 못하고 몇 시간째 뜬눈이었던 로미오는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 그가 3층으로 올라가 문을 닫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 아침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으나 조반니는 쪽지 하나를 남겨 놓고 일찌감치 집을 나갔다. 그가 나가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아마 동이 트기 전에 집을 나섰을 것이다. 아직도 우초 경사를 의심하며 그의 덜미를 잡기 위해 바쁜 것일까.

불안감이 달래지지 않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도 있을 것이다. 조반니의 경우 그 반대에 해당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중앙 지부의 회의에서 미행 문제에 대해 얘기해 볼 것을 제안했지만 조반니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고집스럽게 우초 경사를 의심하고 있다면 자신의 이야기가 소용없을 것이다. 조반니를 대신해 중앙 지부에 이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겠지만 자신의 발언이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보통 때 같았다면 바로 옆에서 조용히 접시를 달그락대며 식사를 하고 있었을 조반니였다. 엔초와 단둘이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으니 그가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는지 궁금해졌다.

“엔초. 내 부탁을 한 가지 들어줄래?”

밤사이 피에트로의 편지가 계속 마음에 걸려 로미오는 고민 끝에 말을 꺼냈다.

“응. 뭔데?”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하게 묻는 엔초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편지에 적힌 내용이 엔초에게 어려운 것은 둘째 치고 편지를 읽는 간단한 행위조차 혼자 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새삼스레 허탈감도 들었다. 눈만 보였다면 당장 어젯밤에라도 편지를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야, 됐어.”

시력이 남아 있었다면 검은 망토의 사내의 정체도 더 빨리 밝혀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반니의 미행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을 줬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숟가락으로 뜬 수프가 접시 밖으로 흘러내리는 게 느껴져 황급히 숟가락으로 긁어모았다. 접시를 잡고 있는 손등 위로 몇 방울 떨어져 닦을 것을 더듬거리는데 엔초가 더 빨랐다.

“수프를 먹는 게 어려워? 떠먹여 줄까?”

“괜찮아. 혼자 먹을게.”

로미오는 엔초가 손등을 깨끗하게 닦아 주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오늘 밤은 늦게 들어올 것 같으니까 먼저 저녁을 먹고 있어. 그리고 화실에 가기 전에 스포르차 선생님께 전해 드릴 쪽지를 한 장 써 줘. 내가 불러 주는 대로 쓰기만 하면 돼.”

“알겠어.”

아침 식사를 끝낸 로미오는 엔초에게 부탁해 프란코에 관해 몇 자 쪽지를 남긴 뒤 화실에 가는 엔초를 배웅했다.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남게 되자 주방을 정리했다. 전보다 실내 구조에 익숙해져 손으로 더듬거려 먹은 접시와 음식들을 쉽게 치울 수 있었다.

맹인의 시간은 눈이 보이는 사람들보다 더 느리게 갔기 때문에 이른 아침의 잠깐의 여유는 로미오에게 길고 무료한 침묵과 같았다. 엔초의 목소리도 사라지고 자신의 발소리 외에 집 안에서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자 로미오는 1층의 정원으로 내려가 꽃에 물을 줬다. 바닥에 엎드려 손으로 떨어진 꽃잎들과 잎사귀들도 쓸어 모아 정리했다.

저택 관리인이 매일 저녁마다 하는 일이었지만 로미오는 기꺼이 그 일들을 스스로 했다. 계단을 오르는 것도, 복도를 걷다가 원하는 방에 찾아 들어가는 것도 모두 손을 더듬어야 가능한 일이었고 그러다 팔꿈치며 무릎을 부딪쳐 멍이 드는 게 예삿일이었지만 떠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 집에 익숙해진 로미오는 부지런히 저택을 돌아다니며 관리인이 해야 할 몇 가지 일을 대신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느끼는 사실이었지만 이 저택에서는 특유의 냄새가 났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1층에서는 꽃 냄새가 났고 2층에서는 바닥에 깔린 양탄자와 나무 계단의 냄새가 났다. 드물게 올라갈 일이 있는 3층에는 조반니의 서재에서 나는 종이 냄새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가 혼자서 층 전체 쓰기 때문에 나는 그의 체취인지 모를 차갑고 건조한 냄새가 났다.

저택 전체에서 집주인이 젊은 사내임을 알 수 있는 특징이 느껴질 때마다 이 집이 낯선 공간처럼 생각됐다. 눈으로 본 적이 없기에 더욱더 비밀스럽게 느껴졌고 이 비밀스러운 저택의 주인인 조반니 역시 이따금씩 낯선 집주인처럼 여겨졌다. 원할 때 언제든 따뜻한 음식을 준비할 수 있고 튼튼한 나무 계단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릴 수 있으며 복도에 원하는 색과 모양을 가진 양탄자를 깔 수 있는 조반니는 견고한 이 3층 저택의 주인이었다. 이곳엔 그 누구도 함부로 침입해 들어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숨어들어 온다 하더라도 반나절이 채 되지 않아 조반니에게 발각돼 집 밖으로 끌려 나갈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복도의 양탄자를 청소하던 로미오는 조반니의 고백을 들은 이후 처음으로 이 집에 좀 더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검은 망토의 사내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 * *

“또 왔어이?”

늦은 오후 무렵 로사티 하숙집을 찾았을 때 그라나 부인은 집을 청소 중이었다. 1층의 문을 열고 들어서며 집 안의 분위기를 가장 먼저 살핀 로미오는 이상한 점이 없는지 손끝으로 느끼기 위해 벽과 문고리를 더듬었다.

“별다른 일은 없으셨습니까?”

“여긴 늘 똑같어이.”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탄내가 많이 가신 것 같군요. 본래 이 집에서 나던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이. 차를 한 잔 줄 테니 마시고 가는 게 어떠우?”

“예, 주십시오.”

1층의 응접실에서 그라나 부인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지만 로미오의 온 신경은 3층 벽에 향해 있었다. 그 벽의 존재가 검은 망토의 사내처럼 느껴져 편히 차를 마시는 것이 힘들었다. 이런 상태라면 복구가 끝난다 해도 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돌아오기는커녕 그라나 부인부터 다른 곳으로 피신시켜야 할지도 몰랐다.

“문을 잘 잠그고 계십시오, 부인. 혹시 수상한 자가 집 주변에서 보이거든 제게 즉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발레리아와 무소 대위님께 이 근처를 살펴봐 달라고 부탁드린 데다 하숙집 건너편의 포목점 주인에게도 부탁을 드렸습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자가 보이거든 바로 집 밖으로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수상한 사람 같은 것은 없어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우. 그보다 그 망토는 어떻게 됐어이? 주인을 찾았어이?”

“아니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아는 것이 있는지 스포르차 선생님께 여쭤보려고 했지만 어제 밤늦게 돌아오신데다 오늘 아침 일찍 집을 나가셔서 물어볼 기회를 놓쳤습니다. 전에 3층에 살던 분도 찾아뵀으나 그분도 아니라고 하시더군요.”

로미오는 가슴팍의 주머니에 단도 하나를 갖고 있었다. 그보다 좀 더 짧은 칼 한 자루도 바지 주머니 안에 넣어 두고 있었다. 무기를 휘두르는 것이 무리라는 걸 알았고 이런 식으로 칼 두 자루를 갖고 다니는 것이 오히려 경계심을 부추긴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검은 망토의 사내에게 다시 한번 겁탈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역겨운 행위 중에 느꼈던 냄새와 소리가 피부 속에 배어 있는 것처럼 느껴져 이따금씩 몸 이곳저곳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닦아 내게 됐다.

검은 망토의 사내가 비 오던 날 밤 최초로 자신을 표적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있노라면 그의 목적이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겁주고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몸을 억지로 범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이 일을 그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에 관해 더 대담하게 나설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검은 망토의 사내는 자신이 맹인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정체가 들킬 것을 우려하고 있을 것이다. 연기처럼 은밀히 나타났다가 은밀히 사라지지만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몸의 일부분이 로사티 1번가 포목점의 뒷골목에 아직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겁탈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이 두 가지 종류의 서로 다른 요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검은 망토의 사내가 누구인지 밝혀내 그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안전해질 것.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밝히는 것을 포기하고 그 일로부터 멀리 떨어져 모든 기억을 망각해 살아갈 것.

주변 사람들을 지키고 이전의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구와 검은 망토의 사내에 대한 분노가 전자를 부추긴다면 두려움과 수치심이 후자를 강요했다. 죽을 때까지 이 일을 남들에게 밝힐 수 없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운 고립감을 가져다줬다.

“또 들르겠습니다.”

금세 잔을 비우고 일어난 로미오는 하숙집을 나오자마자 3층 저택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의 시각은 늦은 오후였다.

“위원님과 약속을 잡고 온 거요?”

책이 다 완성되지 않았더라도 책값을 미리 지불하고 내일 다시 받으러 올 요량으로 본래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로미오는 다행히 어느 친절한 행인의 도움을 받아 헤매지 않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이 근방에서 가장 좋은 저택이었기 때문에 프란코라는 이름을 얘기하자 쉽게 길을 안내받았다. 넓은 정원과 마구간이 딸린 저택은 호화스러웠지만 프란코가 나이 든 노인이다 보니 외관이 예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저는 책을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문지기는 지팡이에 의지해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는 로미오를 노골적으로 구경했는데 그는 이 저택의 고용인들 중 비교적 젊은 편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들어가쇼.”

문지기는 별다른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문을 열어 줬는데 정문에서부터 저택의 안까지 들어갈 방법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오셨군요.”

마중을 나온 것은 어제 그 비서였다. 저택이 넓었기 때문에 문지기가 지키고 선 정문에서부터 저택 건물까지는 정원을 가로지르는 긴 길을 따라가야 했다.

“저택에 손님이 계셔서 위원님께서 이야기 중이시니 우선 응접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위원님께서 바쁘시다면 책값만 지불하고 돌아가겠습니다. 당장 책을 받아 가려고 온 것은 아닙니다.”

“오셨으니 위원님과 얘기를 나누고 가십시오. 손님들은 금방 돌아가실 겁니다. 그럼 이쪽으로.”

‘이쪽’이라고 말해 봐야 로미오가 방향을 볼 수 있을 턱이 없었지만 비서는 그런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앞서 걸어갔다. 로미오는 지팡이로 바닥을 쓸며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는데 그러는 동안 책값이 든 작은 꾸러미가 허리에 매달려 짤랑대는 소리를 냈다.

응접실에 도착하자 비서는 로미오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었다.

“손님들께서 돌아가시는 대로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고풍스럽고 넓은 응접실에 로미오를 들여보내는 것으로 할 일을 마친 비서는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지팡이와 함께 문 앞에 남겨진 로미오는 저자가 자신을 안내하는 법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벽을 더듬었다. 프란코가 손님과의 만남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 우선 앉아야 했다. 여기서 이렇게 계속 서 있어 봐야 문을 열면 머리를 부딪칠 뿐이었다.

벽을 더듬자 가장 먼저 액자가 만져졌다. 지팡이로 바닥을 쓸어 보니 두꺼운 양탄자가 깔려 있을 때 나는 소리가 났다. 벽을 좀 더 더듬자 둥근 탁자와 의자가 만져졌다. 등받이를 만져 보니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벨벳 누빔 의자였다. 엉덩이 부분을 손으로 더듬어 봤지만 자신이 앉아도 되는 자리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혹 프란코만 앉을 수 있는 자리일 수도 있었고 의자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은 다른 용도가 있는 가구일 수도 있었다. 여러 이유로 여기에 앉는 게 실례되는 행동이라면 멋대로 앉을 수 없었다.

로미오는 앉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문 앞으로 갔다. 그리고 뒤로 다섯 걸음 정도 물러서서 그 자리에 섰다. 간간이 복도를 오가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전부 하인들의 발소리였다. 꽤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문 너머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프란코가 아니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으려던 로미오는 목소리가 가까워져 오자 눈매가 예리해졌다.

그래서 위원님께서는 지금 다른 위원님들과 이야기 중이십니까?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린 로미오는 미간이 좁혀졌다.

노프리의 목소리였다. 문에 귀를 대자 여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다 몬티였다. 대답하는 비서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더니 옆방의 문이 열렸다. 비서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떠나자 옆방은 조용해졌다. 로미오는 손으로 벽을 더듬어 자리를 옮겼다. 노프리와 다 몬티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로미오는 남들보다 귀가 밝았고 방의 구조 때문인지 자리를 옮겨 갈수록 두 사람의 말소리는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렸다.

다 몬티가 단순히 포섭 과정에 합류한 것이라고 생각해 포섭에 얼마나 진전이 있는지를 엿들으려고 했던 로미오였지만 이야기를 듣는 동안 서서히 표정이 굳었다. 두 사람은 속삭이고 있었고 자신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사용했지만 맥락을 통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붉은 사냥꾼을 포획하기 위해…… 발목을 끊을 덫을 놓아…… 참석은 분명해졌으니…….

‘붉은 사냥꾼’은 통령을 지칭할 때 단원들이 사용하는 은어였다. 대화가 한참 동안 이어져 숨을 죽이고 듣는데 잠시 후 비서의 발소리와 함께 말소리가 멈췄다. 둘의 목소리가 동시에 딱 끊기더니 문이 여닫히는 소리와 함께 비서가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로미오는 머릿속으로 방금 들은 대화의 내용을 정리했다.

저들이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이 자신이 짐작하는 그것이 맞을까? 그렇다면 언제 그 일을 시행하려는 것일까? 왜 저런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31인 위원회의 위원의 저택에서 하는 것일까?

설마 프란코가 저들과 같은 계책을 꾸미는 입장인 것일까? 포섭은 이미 성공했으며 저 둘은 오늘 프란코와 함께 불순한 공모를 하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것일까? 조금 전 대화의 주제는 조직 내부에서 거론되고 있는 문제일 가능성이 컸다. 상위 단원 두 명이 저들끼리 비밀스럽게 추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역시 하위 단원인 자신에게까지 들어오지 않는 정보가 존재했다. 물론 저들이 추후에 자신에게 알려 줄 가능성도 있겠지만 어느 쪽이었든 현재로선 자신이 모르는 정보였다.

조반니는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왜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더 컸다. 알았다면 분명 이야기했을 것이다.

방금 들은 그 대화가 얼마나 유용할지는 모르나 자신이 아는 바에 의하면 프란코 바르톨루치는 통령의 사저에서 함께 모임을 가진 적이 있을 정도로 그녀와 가까운 사이였다. 프란코가 통령을 배신했기 때문에 노프리가 포섭에 들어간 것인지 아니면 포섭 과정에서 프란코가 통령에게서 등을 돌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프란코가 이 문제에 관여된 것은 확실해 보였다. 책방에서 흔쾌히 문을 열어 주는 친절을 베풀었던 자인데 내밀한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꽤 긴 시간이 지났을 때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멀찍이 물러나는데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는 말과 목소리가 전혀 다른 것은 그의 특징이었다. 미안하다고 하지만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어 보이는 비서는 로미오를 저택으로 안내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쪽으로.” 하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응접실이 1층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안내를 받았던 것과 달리 이번에 비서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로미오가 맹인이라는 사실을 눈곱만큼도 고려하지 않고 혼자서 계단을 올라갔다.

“기다려 주십시오. 제게 이곳 계단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오르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뒤늦게 양해를 구한 로미오는 지팡이로 계단의 폭을 확인한 다음 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한 발, 한 발 디뎌 올라갔다. 그래서 비서가 계단 위에 거의 도착했을 때 그는 계단을 절반도 오르지 못한 상태였다. 허둥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한쪽 방향으로 휘어진 낯선 계단을 한마디 설명조차 듣지 않고 가벼운 걸음으로 오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이 방 안에서 위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방 앞에 도착해 문이 있다고 생각되는 정면을 봤지만 비서의 목소리도 정면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로미오는 자신이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옆으로 몸을 돌려 섰다. 비서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프란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잡음 없는 나무 문이 부드럽게 열리자 향긋한 차 냄새가 가장 먼저 풍겨 왔다.

“오오, 어서 오시게! 어서 들어오시게.”

프란코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로미오는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던 그의 표정을 수정했다. 정확한 얼굴 생김을 모르지만 웃고 있는 노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르톨루치 위원님. 로미오 알피에리라고 합니다.”

“내 저택에 온 것을 환영함세. 머무르는 동안 편히 시간을 보내시게. 오래 기다리게 했으니 얼른 들어와 차부터 한잔하세. 자, 얼른.”

로미오가 안으로 들어가자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실내에서 지팡이를 쓰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방 내부의 구조를 전혀 모르는 로미오였다.

보폭을 줄여 천천히 프란코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데 두툼한 양탄자에 신발이 걸렸다. 손으로 짚기도 전에 앞으로 몸이 쏠려 바닥에 넘어지자 허리춤의 꾸러미도 함께 쏟아져 동전이 양탄자 위로 흩어졌다. 지팡이도 양탄자 위를 구르자 프란코가 거대한 몸뚱이를 이끌고 구르듯 달려왔다.

“어이쿠, 다친 곳은 없는가? 일어나 보시게. 이런 몹쓸 양탄자를 보았나!”

로미오는 프란코가 자신의 등과 팔을 잡아 일으키는 것을 느끼고 바닥에서 일어섰다. 무릎으로 넘어져 정강이가 얼얼했지만 바닥을 굴러가는 동전 소리가 그보다 더 신경 쓰였다. 입에서 단내가 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프란코는 어딘가 덥게 느껴지는 숨을 내쉬며 안절부절못했다.

“다치지는 않았는가?”

“예, 괜찮습니다…….”

한 번은 넘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넘어짐과 동시에 동전이 바닥을 구르니 낭패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러나 흩어진 동전을 주우려 하자 프란코가 먼저 나섰다.

“내가 주워 드리리다.”

놀랍게도 프란코는 끙, 소리를 내며 바닥에 쪼그려 앉아 동전을 주웠다. 그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떨어진 동전을 줍는 소리에 로미오는 낭패감이 아닌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위원님. 제가 할 테니 내버려 두셔도 됩니다.”

“괜찮으니 걱정 마시게. 하인이 똑바로 펴놓지 않은 양탄자에 걸려 넘어진 것이니 나의 잘못이나 다름없는 것이외다. 내가 미리 시켜 바닥을 정갈히 정리하게 하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내 탓이로세.”

로미오를 향해 흐뭇하게 웃은 프란코는 동전을 전부 줍더니 로미오의 허리에 걸린 꾸러미에 손수 넣어 줬다. 그는 그러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요 앙증맞은 꾸러미에 책값을 넣어 온 것인가?”

별다른 무늬나 장식이 없는 데다 가장 값싼 염료인 황색 염료를 먹인 평범한 꾸러미였으나 프란코는 로미오의 날씬한 허리에 걸린 그 꾸러미가 어린아이들의 알록달록한 장난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톡톡 건드리며 만져 댔다.

제법 가까이에 선 프란코가 큰 목소리로 껄껄대자 로미오는 다시 한번 당황했지만 적당히 대답했다.

“위원님께서 면식도 없는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하며 책값을 넉넉히 준비해 왔습니다.”

“허허, 허허허!”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지만 풍채가 좋은 데다 털이 부숭부숭 난 곰 발바닥 같은 손을 가진 프란코였다. 튀어나온 배 때문에 로미오의 몸집의 두 배 가까이 돼 보이는 그는 작은 꾸러미 입구를 조여 주더니 쓰러진 지팡이를 주워 로미오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쪽으로 와 따뜻한 차부터 먹읍세. 기다리는 동안 하인을 시켜 차라도 가져다주려 했더니 깜빡하는 바람에 입을 심심하게 만들었구먼.”

처음 보는 사이인데 지나친 친절이다 싶었다. 그러나 맹인을 안내하는 법을 모르는 것은 프란코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탁자 앞에 도착한 로미오는 스스로 의자를 찾아낸 뒤 등받이의 모양과 팔걸이의 위치를 더듬은 후에야 어렵게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의자가 얼마나 푹신한지 앉자마자 등과 허리가 푹 꺼지며 파묻히듯 몸이 기대어졌다.

로미오는 볼 수 없었지만 탁자 위에는 색색깔의 과자가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하나같이 모두 주방에서 하인들이 땀 흘려 정성스레 구운 과자들이었다. 각종 잼과 설탕이 발린 달콤한 것에서부터 고소하고 짭조름한 것 등 맛과 모양이 다양했다.

프란코는 득의만만한 미소를 띠며 로미오의 얼굴을 마주 봤는데 주름진 눈이 없어지도록 활짝 웃기도 하고 흘러내린 눈꺼풀 사이로 애써 눈을 크게 뜨기도 하며 로미오의 얼굴을 관찰했다.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위원님을 책방에서 뵀던 날 그 책을 구하느라 바치 시내의 모든 책방을 돌아다녔습니다. 꼭 구하고자 하던 책이었는데 이렇게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위원님의 비서께서 저를 찾아와 사정을 설명하셨을 때도 깊은 감사함을 느꼈는데 이렇게 환대해 주시니 그 마음이 한층 깊어집니다.”

책값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감사 인사부터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 말한 것이었는데 프란코는 로미오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엉뚱한 말을 주절댔다.

“내가 한 나라의 왕이었다면 그대의 얼굴을 새긴 동전을 주조했을 것이네. 이런 절세의 미인을 이제야 만나다니 여태껏 세상을 헛산 것이 아닌가? 어찌 이리도 아름다울꼬?”

프란코가 얼굴을 들이대자 목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탄복하는 것 같은 그의 말에 로미오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허공에 머리를 뒀다. 외모에 대한 적당한 칭찬이라면 감사의 말을 전하면 되지만 프란코의 칭찬은 적당한 수준이 아닌 데다 상황과 맞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사내였다.

강한 불쾌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게 침묵에 빠져들게 됐다.

“…….”

로미오가 여러 감정이 깃든 얼굴로 말이 없는 동안 프란코는 움푹 팬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손을 내저었다.

“사양 말고 차려진 것들을 드시게. 이 과자를 차와 함께 먹으면 앉은 자리에서 예닐곱 개는 금방일세. 어서 먹어 보시게.”

프란코는 어린 손자를 대하듯 설탕을 듬뿍 입힌 과자를 로미오에게 직접 건넸다. 볼 수 없지만 프란코가 팔을 움직이는 기척을 낸 데다 과자를 권하는 말로 미뤄 그가 자신에게 과자를 내밀고 있다는 것을 안 로미오는 손을 뻗었다.

“……감사드립니다.”

과자를 마지막으로 먹어 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 데다 누군가 손에 과자를 쥐여 주는 것은 그보다 더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일단 받아 들었다. 조금 전 프란코의 칭찬으로 아직 당황스러움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는데 프란코는 뭐가 그렇게 좋은 것인지 흡족한 웃음소리를 내며 차를 마셨다. 먹지 않고 다시 과자를 내려놓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아 한입 먹자 프란코는 껄껄대며 크게 웃었다.

“허허, 허!”

그의 웃음소리에 로미오는 더 먹지 않고 그대로 과자를 내려놨다.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프란코의 태도가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과자 맛 같은 건 금방 잊어버렸다.

프란코는 그런 로미오의 심정을 전혀 모른 채 콧구멍을 벌름대며 즐겁게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책을 주고자 마음먹은 것은 나 역시 젊은 시절 온종일 책방을 돌아다니며 책을 구한 경험이 많기 때문일세. 원하는 책을 구할 수 없게 됐을 때의 그 허탈감이란 밤잠까지 설치게 만들 정도로 가슴 아픈 것이지. 그날 그렇게 책을 구하지 못하고 돌아간 그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이렇게 도움을 주는 것일세.”

“사실 그 책은 제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제가 신세를 진 어느 분께 답례로 드리고자 찾고 있는 책입니다. 저는 맹인이기에 책을 볼 수 없는 데다 해부학에 관해 아는 것이 없는 문외한입니다. 그 책의 저자가 해부학자라는 것만 알고서 책을 구하던 중이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주시니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위원님의 아량에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로미오가 말하는 모습이 이른 아침 창가로 찾아와 쪼로롱, 쪼로롱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하는 어느 이름 모를 우아한 새를 닮았다는 생각에 프란코는 콧김을 뿜었다. 외모만이 아니라 목소리까지 그 윤기 흐르는 깃털을 가진 예쁜 새와 닮은 것 같아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자신이 입을 벌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턱까지 괸 프란코는 잇몸에 침이 고이도록 넋을 놓고 로미오를 바라봤다.

“이렇게 저택에 친히 초대해 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책을 받아 가기만 하여도 충분히 감사드릴 일인데 이런 대접을 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또한…….”

로미오가 가진 젊은이 특유의 생기가 칠십 먹은 노인인 프란코를 설레게 했기 때문에 프란코는 로미오가 혼자 말하게 내버려 두고 그의 얼굴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탄력 있는 피부와 맑은 눈동자, 오뚝한 코, 자그마하고 흰 뺨, 그리고 호리호리한 몸까지 전부 마음에 들었다. 관능미를 머금고 있으나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이는 무심함이 프란코를 볼일이 급한 개처럼 조바심 나게 해 침 삼키는 법까지 잊게 만들었다. 젊은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싱그러운 기운을 그냥 보기만 하는 것은 프란코에게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힘든 일이었다.

“그러니 책값에 대해서는 드릴 수 있는 만큼 드리겠습니다. 오늘 가져온 돈이 모자라다면 내일 다시 들러 나머지를 더 드리겠습니다. 그 해부학서가 귀하기 때문에 갖는 값어치만으로도 책값이 대단할 것인데 위원님께서 손수 필경사들에게 맡겨 준비를 해 주셨으니 그 정성에도 값을 매김이 당연할 것입니다.”

비록 프란코가 파란 눈을 가진 요사스러운 정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홀린 듯 로미오를 쳐다보고 있기는 하지만 그에겐 딱히 흉계가 있는 게 아니었다. 프란코는 늙고 푸석푸석한 자신과 대비되는 젊고 아름다운 사내들에게 쉽게 끌리는 징그러운 노인에 불과했다. 간사하고 약삭빠르기보다는 나름대로 점잖게 청을 하는 것에 더 익숙한 신사이기도 했다.

“그 해부학서는 전부 완성되어 위층에 있는 서재에 보관 중이네. 3층 전체가 모두 서재인 까닭에 이곳 응접실로 불러온 것이니 책을 보러 가기 전에 이야기를 좀 더 나눔세. 눈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인가?”

“이름 모를 괴병을 앓고 있습니다.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병이라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점차 시력을 잃어 왔습니다.”

“안된 일이구먼, 쯔쯔쯧.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세, 허어…….”

혀까지 차며 딱해하는 프란코의 반응에 로미오는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사정을 듣고 프란코처럼 마음껏 애석해하는 이들은 흔치 않았다. 대부분 안타까워하면서도 쉽게 그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에둘러 위로를 건넸다.

로미오는 프란코가 아주 솔직한 성미를 가진 자라고 생각하며 적당히 대답했다.

“제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니 그저 받아들일 뿐입니다.”

프란코는 못내 안타까운 듯 재차 혀를 차더니 찻잔을 만지작대며 물었다.

“한데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몸이 그렇게 불편하다면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을 듯 하구먼.”

“술집에서 급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질문이 점점 자세해지자 로미오는 대화를 끊을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그 전에 프란코가 먼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운을 띄웠다.

“책값 대신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는가?”

프란코의 목소리는 기대감에 차 있었고 로미오는 그걸 알고 있었다. 찰나였지만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역시나 원하는 바가 있어서 책을 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일개 퇴역 장교가 31인 위원회의 위원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말씀하십시오. 책값을 대신해 어떤 것을 부탁하시렵니까?”

프란코는 의외로 머뭇거렸다. 로미오가 말없이 대답을 기다려 주자 프란코는 부끄럼타는 소년처럼 말을 아끼다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이 저택에서 나와 함께 지내며 비서로 일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어려운 일은 시키지 않을 걸세. 그저 아침에 내 방으로 와 나를 깨워 옷을 입는 것을 도와주고 다른 위원들과의 모임이 있을 때 자리를 마련해 주는 등의 잡일을 하면 되네.”

생각해 본 적 없는 예상 밖의 제안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본다고 해서 대답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로미오는 다른 사람의 비서가 될 마음이 없는 데다 하고 싶더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방금 막 끓인 차를 찻잔에 따르는 일조차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그였다.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입장인데 다른 사람의 시중드는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로미오는 오늘 겨우 두 번째 보는 자신에게 이런 일을 부탁하는 프란코의 의중이 이해되지 않아 생각에 잠겼다. 오늘 자신을 안내한 프란코의 비서가 무능해서라고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아무나에게 비서 일을 부탁하는 것이 쉽사리 납득가지 않았다. 다른 이도 아니고 31인 위원회의 위원이라는 자가 이토록 성급하니 도저히 통령의 암살 모의를 할 만한 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급이라면 두둑이 줄 텐데 어떠한가? 생각이 있는가?”

프란코는 은근히 기대하며 물었지만 로미오는 예의를 갖춰 잘라 말했다.

“맹인인 제가 위원님의 비서 역할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 오히려 폐만 끼쳐드릴 것입니다. 낯선 손님인 저를 크게 신뢰하시고 이런 제안을 주신 것은 감사하나 죄송합니다.”

“그대가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네. 그저 간단한 일만 시키려는 것일세. 어렵지 않은 일들이야. 실수를 한다고 하며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걸세.”

조건이 좋은 제안을 받은 것은 로미오 쪽인데 오히려 부탁은 프란코가 하고 있으니 입장이 바뀐 것 같아 보였다.

“죄송합니다, 위원님.”

아무리 좋은 말로 이야기해도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로미오는 프란코가 있는 방향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것으로 대답을 마쳤다고 생각하는데 느닷없이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로 몸을 물리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난 프란코가 재빨리 다가와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간곡히 부탁해도 안 되겠는가? 응?”

프란코의 목소리가 발아래에서 들려오자 로미오는 순간 당황해 의자 팔걸이를 세게 잡았다.

“이른 아침 그 종달새 같은 목소리로 나를 깨워 줄 수 없겠나? 이 초라하고 늙은 몸뚱이에 손수 겉옷을 걸쳐 주고 함께 정원을 거닐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눔세. 밤늦게 말벗도 되어 주고 가끔 술잔도 나누다 마음이 통하면 손도 잡아 보고 입도 맞출 수 있지 않겠나? 이 늙은이의 간절한 청일세. 부디 내 비서가 되어 주게.”

본색을 드러낸 프란코는 마음이 급해 말이 빨라졌으나 로미오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주먹을 세게 쥐었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꿇고 앉은 프란코는 잘못을 비는 사람처럼 간절히 로미오를 올려다봤는데 배가 너무 나와 그런 자세로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로미오가 자신의 비서가 되어 준다고 하면 영혼이라도 팔 기세로 제법 참을성 있게 버텼다.

그러나 로미오는 그의 간절함 따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저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부탁하셔도 마음이 바뀔 일은 없습니다.”

“제발, 부탁하네. 이 가련한 늙은이의 소원일세. 으응?”

이 방에 들어올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낯빛이 어두워진 로미오는 불쾌함을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이 있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습니다.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자신이 프란코의 추한 욕망을 자극한다는 사실에 로미오는 구역질을 느끼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성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되기를 원한 적이 없었다. 조반니가 자신의 그림으로 수음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느꼈던 감정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 치밀었다.

순간 검은 망토의 사내가 떠올랐다. 무자비한 구타를 일삼던 그의 목적도 결국은 삐뚤어진 욕구를 풀고자 함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프란코의 모든 말들이 점점 더 거북해졌고 그가 그런 상상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역겨움을 느꼈다. 여태 얼굴을 마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니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저택을 방문하기 전에 미리 이런 일을 예상했어야 했다.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떨어진 빵 조각을 무턱대고 주워 먹으며 낯선 자의 집 안으로 불쑥 들어와 버린 꼴이었다.

“몸이 이렇게 늙었다고 해서 젊음에 대한 동경을 지저분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 주게. 난 그저 좋은 기운을 가진 젊은이들을 보면 마음이 동하는 것일세. 만약 내 비서로 일해 보고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 그만 두어도 좋네. 단 하루만이라도, 아니면 반나절만이라도 내 곁에서 시중을 들며 일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거절하겠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갈 테니 책을 주십시오.”

돈을 꺼내기 위해 꾸러미 속에 손을 넣었지만 손끝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주먹으로 동전을 한 움큼 쥐어 꺼내 놓으려는데 프란코가 급하게 소리쳤다.

“그, 그렇다면 이렇게 하세! 오늘 해가 질 무렵까지 이곳에 남아 내 비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지켜보게. 그리고 할 만하다고 여겨지면 그때부터 일을 하는 것으로 하게. 어떤가? 지금껏 내 저택에서 비서 일을 한 자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네. 모두들 일을 마음에 들어 했지. 여기서 일한다면 하인이 아니라 아들처럼 대해 줄 것이네. 궂은일은 시키지 않을 것이야. 좋은 것들을 보고 좋은 옷을 입고 이렇게 원할 때 마음껏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을 걸세.”

프란코는 로미오의 신발이라도 핥을 것처럼 간절했으나 로미오는 얼른 이 자리를 떠나기 위해 의자 팔걸이에 걸쳐 뒀던 지팡이를 더듬었다. 허공에 손을 내저으며 찾으니 프란코가 쩔쩔매는 와중에도 로미오의 손에 지팡이 손잡이를 쥐여 줬다.

지팡이를 잡고 있던 프란코와 손이 닿은 로미오는 지팡이를 몸 쪽으로 가까이 붙이며 물러섰다. 가까스로 예의를 지키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이 돈은 저택에 초대해 주신 것에 대한 답례로 드리는 것이니 책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 * *

“술집? 자네가 웬일로 술집에 다 가는가?”

“술을 마시러 가는 것이 아니라 볼일이 있어 가는 것입니다. 술은 마시지 않고 금방 나올 겁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됐네, 뭘 또 거짓말을 해. 난 가 볼 것이니 내 신경은 쓰지 말고 편히 술을 마셔. 자네가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 술을 즐겼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네. 내일 보세.”

동료 의사가 손을 흔들며 사라지자 레오나르도는 그런 게 아니라고 항변하지 않고 술집으로 들어갔다. 바치 병원과 조반니의 저택에 들렀다가 이리로 온 레오나르도는 술집 안을 둘러봤다. 병원에서는 조반니가 일찍 병원을 나섰으나 어디로 간 것인지 모른다고 대답했고 저택 관리인도 마찬가지였다.

술집 안에는 손님이 많았는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술청 앞에 서서 잔을 닦고 있는 로미오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간 급사 하나가 선반을 가리키자 그는 능숙하게 손을 더듬어 술병을 꺼내 줬다.

레오나르도는 술청 앞으로 다가가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레오나르도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미오는 레오나르도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오나르도는 그의 표정이 어둡다고 느꼈지만 그는 조반니를 대하듯 자신을 대했다.

“선생님이시군요. 언제 오셨습니까?”

유리잔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는데 로미오가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 레오나르도는 조용히 잔을 옮겼다.

“조금 전에 왔습니다. 혹시 조반니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저택에 들러 보니 관리인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나 늦게 들어올 것이라고 하더군요. 병원에서는 이미 반 시간 전에 병원을 나섰다고 합니다. 어디에 간다더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잔을 닦던 로미오의 손이 느려졌다. 표정을 살피니 그는 걱정스러워하면서도 뭔가를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저도 오늘 아침에 선생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근래 들어 밤에 늦게 들어오십니다.”

“조반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글쎄 말입니다.”

로미오는 레오나르도에게 미행 문제를 얘기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하며 닦은 잔을 정리했다. 좀 더 신중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에 말을 아꼈다.

“스포르차 선생님께 전할 말씀이 있으시다면 제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게 없으시다니 그러면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돌아서려는데 술 취한 사내 한 명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가 요란하게 술청 위에 엎어져 로미오에게 새 술을 꺼내 줄 것을 요구하자 로미오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재빨리 그쪽으로 돌렸다. 그는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추며 손님에게 설명했다.

“원하시는 술이 있다면 말씀하시고 돌아가 계십시오.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손님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중얼대며 술청을 치자 로미오는 흔들리는 잔을 손으로 더듬어 잡았다. 사내가 치켜세운 손가락을 로미오에게 들이대는 모습에 레오나르도가 제지하려는데 지나가던 여급이 얼른 다가왔다.

“어떤 술이요? 네,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여급의 만류에 술 취한 사내가 돌아가자 여급은 로미오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마저 바쁘게 음식을 날랐다. 또 다른 술 취한 손님이 다가와 로미오가 좋은 말로 그를 되돌려 보내는 것을 본 레오나르도는 술집을 나서는 대신 구석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지나가는 급사에게 술 한 병을 주문한 그는 혼자 술을 마시며 간간이 술청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술 한 병을 전부 비우고 한 병을 더 주문해 절반가량 마셨을 무렵엔 손님들이 많이 빠져 술집 안이 한산했다. 밤이 늦자 일이 끝난 로미오는 자리를 정리했고 술을 마시며 그를 지켜보던 레오나르도는 남은 술병을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가시는군요.”

로미오는 지팡이를 챙겨 술집을 나서자 등 뒤에서 들려온 레오나르도의 목소리에 그를 돌아봤다. 여급이 일러 줬기 때문에 그가 구석에서 술을 마신 것을 알고 있었던 로미오는 그가 마치 자신을 기다린 것 같자 물었다.

“가지 않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혹시 제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십니까?”

로미오는 레오나르도의 목소리가 조반니의 비슷한 위치에서 들려온다고 생각했다. 첫 만남에서 느낀 것이었지만 레오나르도의 목소리는 밝고 쾌활한 조반니와 확연하게 달랐다. 차갑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나 차분하고 조용했다. 발소리도 그랬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오랜만에 술을 마시고 싶어 마신 겁니다. 마침 일이 끝나셨으니 집까지 함께 가도록 하죠. 조반니에게 물어볼 것이 생겼습니다.”

레오나르도를 대할 때마다 하는 생각이었지만 그는 조반니의 친구치고 아주 점잖았다. 예전에 조반니에게 들어 보니 오래전에 조반니는 레오나르도를 놀려 먹거나 심한 장난을 치는 걸 즐겼다고 했다. 술에 취한 레오나르도의 머리카락을 자른 적도 있었고 그가 먹던 음식에 이상한 양념을 뿌려 곤란하게 만든 적도 있다고 했다. 레오나르도의 얼굴을 전혀 모르지만 그가 조반니의 그런 장난에 크게 반응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조반니가 말하길 레오나르도는 여덟 살 때까지 이름이 없었다고 했다. 고아나 다름없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명석한 머리 덕에 의사가 됐다고 했다.

두 사람이 친구가 된 계기를 조반니에게 들은 적이 없어 물으려는데 술집 앞에 의외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위님.”

술집 문 앞에 군복 차림으로 서 있는 것은 갈리에누스였다. 그는 머리 위로 손을 올려 경례를 하더니 레오나르도에게도 인사를 했다.

“디오니시오 선생님께서도 이곳에서 술을 드셨군요. 엔초의 생일날 마지막으로 뵈었었지요? 그간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네, 오랜만이군요. 저는 잘 지냈습니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갈리에누스는 오래 기다린 모양인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모자를 쓰며 대답했다.

“댁까지 모셔다드리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밖에서 창을 통해 보니 잔을 닦고 계시는 모습이 생각 외로 잘 어울리셔서 놀랐습니다. 대위님께서 급사라니 처음에는 믿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보니 왜 이 술집에서 일하기로 하신 건지 이해가 되네요.”

망토에 관해서는 아니지만 발레리아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들은 갈리에누스였다. 로미오를 살펴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갈리에누스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길을 안내했다.

“가시지요. 디오니시오 선생님께서도 이쪽으로 가십니까?”

“네. 조반니에게 볼일이 있어 그의 저택에 들를 생각입니다.”

그래서 세 사람은 함께 걷게 됐는데 로미오나 레오나르도는 넉살 좋게 말을 붙이며 잡담을 늘어놓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서서 말을 하는 것은 갈리에누스의 몫이었다.

“하숙집이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실 겁니다. 다친 분이 계시지 않은 게 정말 다행입니다. 3층에서 불이 시작됐다는 게 정말입니까?”

“공안국의 조사에 의하면 바닥의 양탄자에서 불이 시작됐다는군.”

“하필 생일날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엔초가 많이 슬퍼했겠습니다.”

“다행히 선물은 하나도 타지 않았어. 자네가 준 그 장난감 말을 제 몸처럼 끼고 다니며 갖고 놀아. 그것 외에 다른 장난감은 관심도 없을 정도로 아주 좋아하네.”

“기분 좋은 이야기로군요. 다행입니다.”

로미오는 레오나르도의 선물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도 말했다.

“선생님께서 주신 동화책도 엔초가 좋아합니다. 옆에서 동화의 내용을 들어 보니 어린아이들이 재미있어할 만하더군요. 제가 비록 볼 수는 없지만 책에 실려 있는 그림도 훌륭한 듯합니다. 책을 펼쳐볼 때마다 엔초가 그림을 많이 칭찬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생일날 한사코 사양하던 자신의 주머니에 두 주먹 가득 사탕과 과자를 넣어 주던 엔초를 기억했다. 가장 맛있다고 생각되는 맛을 골라 아끼지 않고 선물하던 엔초의 모습은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아이에게 어울릴 만한 선물을 고르느라 다른 사정은 고려하지 못했네요. 다음번에 다시 기회가 온다면 대위님께서 손으로 만져 모양을 느낄 수 있는 데다 던지고 잡으며 함께 놀 수 있는 장난감을 선물하겠습니다.”

뜻밖의 광경이 펼쳐진 것은 조반니의 저택이 있는 거리로 들어섰을 때였다. 골목 어귀에 제6군단의 마차가 서 있었다. 포위하듯 빙 둘러 서 있는 군인들 중 아는 얼굴을 발견한 갈리에누스가 로미오에게 말했다.

“제6군단입니다.”

골목 안쪽에서 소란스러운 고함이 들리더니 군인들이 윽박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두 군인이 웬 젊은 남자 하나를 끌고 나왔다.

“왜 이러는 겁니까! 난 벽보 같은 것은 붙이지 않았어요! 이거 놔요!”

소리를 따라 고개를 움직이던 로미오는 순간 레오나르도를 올려다봤다. 그도 비슷한 표정이 됐지만 갈리에누스가 옆에 있는 데다 무언으로 로미오와 눈빛을 주고받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원들이 이런 시기에 벽보를 붙이고 다닐 리 없었지만 레오나르도는 골목에서 끌려 나온 남자의 얼굴을 주시했다. 벽보는 단원들이 은밀히 접선하고자 할 때 특정 구역에 부착하기도 했기 때문에 만약 저자가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하위 단원이라면 일이 복잡해졌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구경하는 가운데 남자는 군인들에 의해 마차에 태워졌다. 그리고 뜻밖의 일이 한 가지 더 펼쳐졌다.

“로지오!”

골목에서 나온 이브가 로미오를 발견하고 신이 나 소리쳤다.

“내가 잡았소! 내가 단테 놈들을 잡았다고! 다 당신 덕분이요!”

갈리에누스는 낯선 여자가 로미오를 아는 체하는 데다 단테의 12인을 잡았다는 그녀의 말에 놀라는 정도에 그쳤지만 로미오와 레오나르도는 달랐다.

로미오는 크게 표정이 굳어졌고 그건 레오나르도도 마찬가지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단테의 12인을 잡았다고 외치는 이브가 로미오와 잘 아는 사이라는 사실이 레오나르도에게는 미묘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사내에게 의문을 느끼고 있던 그의 눈빛에 다른 종류의 의혹이 깃들었다. 아주 사소하고 가벼운 의혹이었지만 그 의혹은 전적으로 로미오를 향했다.

“종신 연금을 받거든 먹다 죽을 만큼 성대한 식사를 대접하겠소!”

이브가 덧붙여 한 말에 레오나르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로미오를 내려다봤다. 이브가 마차에 오르자 군인들도 모두 말에 올랐다. 마차가 떠나고 나니 소란스러웠던 골목 어귀가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조금 전에 그분은 누구십니까? 대위님의 이름을 잘못 알고 계신 듯한데요.”

갈리에누스가 물었지만 로미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지만 레오나르도의 표정을 짐작했다. 상황이 원치 않게 껄끄러워졌다는 것도 알았다. 이런 우연찮은 일로 레오나르도가 자신을 의심할 리는 없지만 이런 우연이 겹쳐지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자신은 조직으로 숨어든 밀정이 맞았으니 만약 레오나르도가 무언갈 의심한다면 그 의심은 틀린 게 아니었다. 이브가 자신에게 도움을 구했을 때 우려했던 상황이었다.

연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테의 12인의 단원들은 기본적으로 서로를 감시했다. 사소한 정보라 할지라도 다른 단원들을 상대로 가볍게 입을 놀리거나 포섭 과정에서 경솔한 모습을 보이면 요주의 대상이 됐다.

로미오처럼 입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말단 단원이 단테의 12인을 밀고하려는 자와 친분이 있다면 상황에 따라 한 번쯤 의심할 만했다. 의심이 합당한 방향으로 기울지 않는다면 금방 철회되겠지만 일단 한 번 의심을 사면 대개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가령 레오나르도가 몹시 조심스러운 성미였거나 로미오의 입단을 반대했더라면 그는 이 상황에서 과도하게 의심하려 들 것이다. 가령 말도 안 되게 로미오가 조반니까지 완벽히 속여 조직 내로 숨어들었다든가, 하는 식의 의심을 시작하면 그 진위를 가리기 위한 시도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도는 로미오에게 알려지지 않고 은밀히 진행될 것이며 혹 그 과정에서 수상한 점이 포착된다면 조직 내부로 이야기를 전달할 것이다.

“……술집에 몇 번 찾아와 술을 마신 손님이다.”

“그렇군요. 어쩐지 옷차림새가 술집에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레오나르도에게 사정을 설명하면 갈리에누스에게 부자연스럽게 보일 게 뻔했다. 그래서 로미오는 갈리에누스에게 이야기하되 레오나르도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을 더했다.

“내가 제6군단의 퇴역 장교라는 사실을 알고 도움을 청하더군. 종신 연금을 받는 것이 목적인 자야. 이브 헤스라고 들어 봤나? 용병이라고 하던데.”

“이브 헤스라면… 아, 그렇군요.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오른팔에 의수를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사관 학교 생도 시절에 무쇠 팔의 이브라는 별칭에 대해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가 루바노에 있는 데다 대위님과 아는 사이인 줄은 몰랐습니다. 대위님께 도움을 받는다면 적어도 아무런 정보 없이 단테의 12인을 쫓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그자도 참 운이 좋군요.”

* * *

“젠장맞을!”

나무 탁자를 거칠게 내리치는 소리가 조사실 안을 울렸다. 얼마나 세게 내리쳤던지 탁자의 다리 부분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조사는 뒷전으로 미뤄 두고 이브의 붉은 눈과 도톰한 입술을 칭찬할 낯간지러운 말을 고민하던 마르코는 좋은 말로 그녀를 만류했다.

“자, 자. 이러지 마시고 조금만 진정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철 의수를 차고 있는 오른손은 내버려 두고 왼손으로만 사정없이 탁자를 내리치던 이브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씩씩대느라 탁자가 갈라진 것도 몰랐다.

“그자가 틀림없소! 내가 이 두 눈으로 그가 벽보 근처를 수상히 배회하는 것을 봤단 말이오. 조사를 제대로 한 게 맞는 거요? 이럴 수는 없는 법이야!”

조사실 내의 다른 군인들은 골목에서 붙잡힌 사내가 벽보와 전혀 관계없는 평범한 행인이라는 마르코의 설명에 미친 사람처럼 흥분해 화를 내는 이브를 흘끔댔다. 무쇠 팔의 이브에 대해 들어 본 자도 있었고 아닌 자도 있었는데 다들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그 누구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던 그녀가 순식간에 돌변해 화를 내자 조사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조사는 면밀히 이루어졌습니다만 아쉽게도 그자는 무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그 길을 우연히 지나가다가 벽보에 관심을 가진 모양입니다. 그 앞에 서서 들여다보던 모습이 의심을 샀나 봅니다.”

“내 종신 연금! 코앞에서 놓쳤어!”

이브가 주먹을 부르쥐자 마르코는 삐뚤어진 탁자를 바로 하며 바보같이 웃었다.

“안타깝게 됐습니다.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

이브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다시 탁자를 내리치자 마르코는 이브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외모에 반해 조사 내내 실없이 웃어 대던 마르코는 이브의 팔을 조심히 내려 주며 나름대로 멋들어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보통의 제6군단의 장교라면 종신 연금을 노리는 이브의 태도를 엄격히 지적하며 존귀하신 통령 각하와 이 나라의 안위에 대한 연설을 늘어놨겠지만 마르코는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목소리를 부드럽게 냈다.

“단테의 12인의 색출은 루바노의 존폐와 관련된 중한 문제입니다. 루바노인도 아닌 분이 벽보를 수상히 여겨 이렇게 알려 주시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브는 분함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한동안 씨근덕대더니 한참 만에야 진정을 되찾았다. 허탈함에 고개를 떨군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내일부터 배 터지게 밥을 먹을 수 있나 했더니 염병할 놈의 용병질을 다시 시작해야 할 판이오. 이곳으로 올 때까지만 해도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아오? 내 남은 인생이 이제야 빛을 보게 되는 것 같아 들떠 있었단 말이오. 이 지겨운 무쇠 팔도 다 끝이라고 생각하며 이 자리에 앉은 것인데 내게 이럴 수 있는 것이오?”

“저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자가 단테의 12인이 맞다면 이 얼마나 좋은 소식이겠습니까?”

마침 이브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마르코가 슬그머니 물었다.

“괜찮으시다면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나 같은 자에게 군인들이 밥도 주는 것이오?”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제가 바치 시내의 괜찮은 술집에서 식사를 한 끼 사 드릴까 합니다.”

“내게 단테 놈들을 잡을 수 있는 확실한 정보라도 줄 참이오? 아니라면 관두는 게 나을 거요.”

평소였다면 옳다구나 하며 승낙했을 이브였지만 그녀는 배고픔도 잊을 정도로 종신 연금에 혈안이 돼 돈을 내지 않고 배를 불릴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찼다.

그녀의 단호한 말에 마르코는 등 뒤에 선 군인들을 둘러보고 헛기침을 했다. 루바노 사람도 아닌 이방인인 그녀에게 제6군단의 장교만 아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마르코가 대답이 없자 이브는 철 의수로 머리를 감싼 채 탁자가 내려앉도록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질문할 거리를 떠올리고 다시 한번 크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로지오 알피 뭐라는 곱상하게 생긴 맹인 장교를 아오? 한밤중의 포도주라는 술집에서 급사로 일하고 있는 자인데.”

이브에게 수작을 걸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던 마르코는 놀라서 되물었다.

“어떻게 알피에리 대위를 아십니까?”

“우연히 알게 됐소. 이 부대의 퇴역 장교라기에 잘 알 것 같아 물어본 것이오. 친분이 있는 사이였소?”

“있다마다요. 같은 대대의 대위였습니다. 알피에리 대위가 소위로 임관할 당시부터 알고 지냈으니 모르는 게 없는 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위가 퇴역을 했지만 종종 만나 술을 마시기도 합니다.”

“그렇소?”

자신이 마음에 들어 했던 여자들이 로미오에게 호감을 보였던 적이 꽤 있었기 때문에 마르코는 이브가 로미오의 이름을 잘못 불렀다는 사실은 금방 잊고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하니 로미오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려나.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볼일이 끝났다는 태도였다.

“그만 가겠소.”

이브를 붙잡으려던 마르코는 그녀에 대한 것을 로미오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체포된 자와 관련해 추가적으로 밝혀지는 것이 있다면 즉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맙소. 당분간 이 부대 주위를 기웃거릴 것이니 나를 찾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닐 거요.”

이브는 대강 목례를 하더니 문 앞으로 다가갔다. 걸어 잠근 철문을 의수로 잡아 뜯어 열려고 하자 군인들이 제지하며 빗장을 풀었다. 밖으로 나가기 전 이브는 마르코를 돌아봤다.

짧은 생각에 잠긴 그녀는 분개해 탁자를 내려칠 때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것을 물어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로지오에 관해 한 가지 물어도 되겠소?”

* * *

주변을 휘둘러 살피는 동안 수상한 소리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컴컴한 골목 안쪽까지 들어가 사방을 둘러봤지만 역시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큰 거리로 나왔을 무렵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침을 한 조반니는 저택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여러 날 동안 빨지 않고 계속 입은 꾀죄죄한 진홍색 망토가 부슬비에 척척해졌을 때쯤 집 앞에 도착한 조반니는 주변을 둘러보며 문을 열었다. 여러 번 잠가 확인한 후 정원을 가로질러 2층으로 이어지는 문을 여는데 위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미오가 있는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계단을 올라가자 복도 끝에 있는 방에서 로미오가 실내복 차림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 오십니까?”

열이 나는 이마를 손으로 짚은 조반니는 아침에 나가며 얼굴을 보지 못한 로미오가 반가워 미소를 지었다.

“아직 잠들지 않으셨군요. 엔초는요?”

“한 시간 전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새벽녘에 일찍 집을 나서느라 아침 인사를 드리지 못했는데 이렇게 밤 인사라도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오늘 갈고리 고양이 술집에서 별다른 일은 없었나요?”

“예, 없었습니다.”

“여전히 그곳의 일을 그만둘 마음은 없으시고요?”

“……예.”

로미오의 대답을 예상한 조반니가 일부러 작게 한숨을 쉬자 로미오는 고개를 숙였다. 잠시 묵묵히 그렇게 있던 그는 뒤늦게 물었다.

“선생님께선 아침에 식사를 하고 나가셨습니까?”

“네, 먹고 나갔습니다.”

조반니는 다 늦은 밤에 아침 식사 여부를 묻는 로미오가 귀여워 짧은 웃음소리를 내곤 그의 방 앞으로 다가갔다.

“늦은 시간이니 어서 주무세요. 저도 위층으로 올라가 곧장 잠자리에 들 생각입니다.”

조반니가 기침을 하며 문을 닫아 주려는데 로미오가 손을 더듬어 문고리를 잡았다.

“감기에 걸리셨습니까?”

“비를 맞아서 그렇습니다. 어제 비가 많이 내려 걱정을 했는데 대위님께서는 감기에 걸리지 않으신 것 같네요. 다행입니다.”

“어젯밤에 늦게 들어오신 걸 압니다. 미행자를 잡기 위해 거리를 돌아다니신 겁니까?”

“네. 하지만 잡지 못했어요.”

로미오는 조반니의 목소리에 앓는 기운이 섞여 들린다고 생각했다. 연거푸 기침을 하는 그는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의 몸 상태를 신경 쓰고 있자니 더 시급한 문제가 생각나 레오나르도가 찾더라는 이야기를 전한 뒤 이브의 이야기를 먼저 했다.

그러자 조반니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분께 골목을 살펴보라고 말씀드린 건 접니다. 안심하세요. 오늘 붙잡힌 그자가 단테의 12인의 단원일 가능성은 적습니다. 설사 맞다 하더라도 조직의 기밀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말단 단원일 것이며 그럴 가능성 또한 아주 적습니다. 현재 조직원들은 벽보 선전 활동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골목에서 발견된 벽보는 예전에 붙여진 벽보일 겁니다.”

“그분이 제게 도움을 받았다며 감사 인사를 하실 때 디오니시오 선생님도 옆에 계셨습니다. 이번 일이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께 드릴 이야기가 있다고 하셔서 함께 집으로 오는 도중에 그런 일이 벌어지자 디오니시오 선생님께서 도로 되돌아가셨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옆에 있었다니 그 점은 우려가 되는군요. 제가 내일 만나 얘기해 보겠습니다.”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로미오는 방 안으로 들어가 프란코에게서 받아 온 책을 갖고 나왔다. 고개를 돌린 채 기침을 하던 조반니는 책 제목을 보지도 않고 고개부터 끄덕였다.

“잠시 기다리고 계시면 금방 옷을 갈아입고 와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책 제목이 뭔가요?”

일말의 의심도 없이 로미오가 책을 읽어 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한 조반니는 그가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엔초도 동화책이 읽고 싶을 때면 책을 가슴에 껴안고 자신의 방으로 찾아왔다. 엔초는 이른 아침 창가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만큼 성가셨지만 로미오는 달랐다. 그에게는 언제든지 책을 읽어 줄 수 있었다. 요리법이 적힌 요리책이라도 좋았다.

“읽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어린아이도 아닌데 어떻게 선생님께 책 읽기를 부탁드리겠습니까.”

로미오는 조반니의 오해를 부인하며 그가 볼 수 있도록 책의 표지를 들어 보였다.

“‘인체의 해부에 관하여’라는 해부학서입니다. 선생님께서 찾으시던 책을 제가 구했습니다.”

로미오는 책을 뒤집어 들고 있었지만 조반니는 그 점을 지적하는 대신 아주 놀란 표정이 돼 물었다.

“그 책을 어디서 구하신 거지요?”

“프란코 바르톨루치라는 위원에 대해 아십니까? 31인 위원회의 위원인데 제 사정을 듣고 책을 필사해 주셨습니다. 지난번에 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후 오늘 그분의 저택으로 찾아가 책을 받아 왔습니다.”

“프란코 바르톨루치라면 비스카르디 통령과 친분이 있는 위원들 중 한 명입니다.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고서를 수집한다는 이야기도 들은 듯한데 신기한 우연이군요. 처음 보는 자의 사정을 헤아려 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마음씨가 넓은 자인가 봅니다. 필사 상태가 굉장히 좋군요. 책 등도 단단한 데다 제목에 금박이 입혀져 있네요?”

엔초에게 책을 보여 줘 확인했기 때문에 로미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조반니의 말대로 책은 많은 공을 들여 만들어진 것 같았다. 프란코의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이라 불쾌함을 느꼈지만 책을 넘기는 조반니가 좋아하는 것 같아 불쾌감을 억누르고 마음을 놓았다. 프란코의 저택에서 그런 꼴을 당한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도 잠시나마 내려놨다.

“그 책으로 다음 해부학서 집필을 준비하시면 될 겁니다. 겨우 책 한 권이지만 선생님께 꼭 구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로미오는 말을 하면서도 혹시나 조반니가 오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약간 머뭇거렸다. 이렇게 책을 구해 줬다고 그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대위님께서 저를 위해 이 책을 구해 오셨다니 가슴이 벅찹니다. 영영 읽을 기회가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 책을 구하실 생각을 하셨는지… 이런… 정말로…….”

다행히 조반니는 다른 생각 없이 그저 책을 구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열이 올라 뺨이 붉어진 와중에도 자신이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전하려는 것처럼 책을 연신 쓰다듬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로미오는 비록 좋지 못한 일을 겪기는 했지만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반니는 책이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생각보다 더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책이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값은 얼마나 치르셨습니까? 제가 책값을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그 책과 책값 모두 제가 선생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로미오가 책방을 찾아갔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조반니는 지팡이를 짚고 총총대며 책방으로 들어가는 로미오의 모습을 상상하며 빙그레 웃었다. 그가 책방 주인에게 책을 묻는 모습도 상상했다. 제목조차 읽을 수 없는 책을 오직 자신을 위해 찾으러 다녔다고 생각하니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입을 맞출 수도 없고 손도 잡을 수 없으니 로미오의 팔을 부드럽게 한 번 잡았다 떼는 것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 기대감을 가득 품고 책을 펼쳐 그 자리에서 몇 자 읽었다. 필사 상태가 훌륭해 들여다보고만 있어도 책의 내용이 눈에 절로 들어왔다.

“아, 역시. 책이란 모름지기 이렇게 들었을 때 묵직해야 하는 법입니다. 깨의 씨처럼 작은 글자들이 저를 행복하게 하는군요.”

소리에 집중해 조반니의 목소리와 숨소리를 듣고 있던 로미오는 조반니의 손이 닿았던 자신의 팔을 짚었다.

“몸이 안 좋으시군요. 손이 뜨겁습니다.”

조반니는 조금 전에 몇 차례 기침을 한 데다 목소리도 쉰 것처럼 들렸다.

“뭘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이 책이 실력 있는 필사가들에 의해 필사된 건 분명해 보입니다. 이토록 정교하게 옮겨 적었다니 놀랍습니다. 바르톨루치 위원이 이 정도로 아량이 넓은 자인 줄은 몰랐네요. 책값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정말로 이 귀한 책을 그냥 받아도 될까요?”

구하고자 애를 많이 썼던 책인 데다 다른 사람도 아닌 로미오가 준 것이었기 때문에 조반니는 금덩이라도 되는 것처럼 책을 두 팔로 안았다.

“예, 물론입니다. 그보다 따뜻한 물 한잔과 적신 수건을 가져다드릴 테니 올라가 계십시오. 기침 소리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밤이 늦었으니 대위님께선 이만 주무세요. 저는 올라가서 이 책을 읽다가…….”

입으로는 말을 하고 눈으로는 책을 읽느라 바쁘던 조반니는 순간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좋은 꾀를 떠올랐다. 고개를 퍼뜩 든 그는 소리 없이 입꼬리를 씩 올려 웃더니 갑자기 아픈 사람 행세를 하며 크게 기침을 했다.

“그러면, 콜록…! 부탁을 드려도, 콜록… 될까요?”

“예. 어서 올라가 계십시오.”

“죄송합니다, 콜록……! 휴우…….”

켈룩대며 책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간 조반니는 재빨리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가슴의 단추는 적당히 풀고 양쪽 소매도 넉넉히 접어 올렸다. 몸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한기를 느꼈지만 방 안에 은은하게 촛불을 켜고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이리저리 자세를 잡으며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로미오의 발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다가 때맞춰 기침을 시작한 조반니는 로미오가 벽을 더듬으며 방 안으로 들어오자 연극을 시작했다.

“하……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네요. 열이 나는 것 같습니다. 비를 맞은 게 대수일까 싶어 신경 쓰지 않았더니, 후우…….”

“여기 따뜻한 물 한 잔부터 먼저 드십시오.”

보기 좋게 근육이 잡힌 팔을 머리 뒤로 베고 빙글빙글 웃던 조반니는 로미오가 내민 잔을 받아드는 척하며 자신의 얼굴과 가슴 위로 쏟았다.

“이런!”

놀란 척 잔을 떨어뜨리자 로미오가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몇 배는 더 크게 놀라며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물이 쏟아진 겁니까? 제가 선생님께 쏟은 겁니까? 괜찮으십니까?”

“실수로 물을, 콜록…! 엎질렀습니다, 콜록…… 열이 더 나는 것 같군요, 콜록……!”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어서 닦아 드리겠습니다.”

닦아 주려 해도 닦을 것이 없는 데다 있다고 해도 볼 수 없는 로미오였다. 조반니가 물세례를 맞은 채 기침을 해 대자 로미오는 당황해 방을 나가기 위해 벽을 더듬었다.

“닦을 것을 얼른 가져오겠습니다.”

“닦을 것이라면, 콜록……! 여기 있습니다, 휴우우…….”

엉큼하고 흉악하게 웃은 조반니는 직접 몸을 닦는 대신 허공에 들린 로미오의 손에 닦을 것을 쥐여 줬다. 어떻게 닦아 줘야 할지 몰라 로미오는 멈칫했지만 조반니가 기침을 계속하자 그 소리로 그의 팔 부근을 짐작했다. 손끝에 젖은 옷이 만져지자 미안함에 얼른 팔을 닦아 줬다.

“가뜩이나 어제 비를 맞으셨을 텐데 물 한 잔도 제대로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가 도리어 일을 만들어 드리는 것 같습니다…….”

“비를 맞은 것처럼, 콜록…! 제 얼굴도 흥건한데 뺨을 닦아 주시면 안 되나요?”

“뺨이 어디에…….”

로미오의 팔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댄 조반니는 턱을 쳐들었다. 로미오는 머뭇거리다 더듬더듬 조반니의 뺨을 닦았고 그가 그렇게 닦아 주는 동안 조반니는 뿌듯하면서도 뭔가를 느끼는 것 같은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휴, 물에 젖은 옷 때문에 몸이 차가워지는 것 같습니다. 여기 이쪽도 닦아 주세요.”

조반니는 풀어 헤쳐진 탄탄한 가슴을 내밀었다. 조반니가 손목을 끌어당겨 ‘여기’라고 말한 곳이 가슴 부근이라는 것을 로미오가 깨달은 것은 잠시 후였다.

그런데 젖은 앞섶일 것이라고 생각한 곳이 맨살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얇은 옷자락이 아니라 맨살을 닦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조반니가 좀 더 위쪽을 닦아달라는 것처럼 몸을 살짝 비틀며 계속 손을 움직이는데 가슴근육의 굴곡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자신도 그도 사내이니 가슴을 만지는 것이 꺼려지는 일도 아니었고 엄밀히 말해 만지는 것이 아니라 닦아 주는 것이니 피할 이유가 없었지만 어쩐지 금방 손을 떼게 됐다.

“……갈아입을 옷이 있습니까?”

왜 이런 상황에서 또 생각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조반니가 자신의 그림으로 수음을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럼요. 그런데 몸에 힘이 없어 혼자 옷을 입는 게 어려울 것 같네요. 입는 것을 도와주실 수 있나요?”

로미오는 조반니가 딱딱하게 서기 시작한 그의 성기를 바지 위로 문지르고 있는 걸 모른 채 조반니의 옷을 찾았다.

“예, 알겠습니다. 그 전에 바닥을 닦아야겠습니다.”

로미오는 발아래가 물로 미끄럽자 허리를 숙여 바닥을 더듬어 닦았다. 상체를 숙이자 자연히 어깨가 내려가며 엉덩이와 허벅지가 들려 올라갔다.

다리까지 훨쩍 벌리며 편하게 누운 자세를 취하던 조반니는 바로 눈앞에 작고 동그란 로미오의 엉덩이가 가까이 보이자 성기를 문지르던 손을 멈췄다. 꿍꿍이가 있는 까닭에 피식대던 웃음도 뚝 그쳤다.

“엎지른 물은 전부 깨끗이 닦겠습니다. 침대에서 내려오지 마시고 조금만 그렇게 계십시오.”

로미오가 등을 보이고 바닥을 닦자 엉덩이는 조반니에게 더 잘 보였다.

순간 조반니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나를 시험하는 건가?

눈앞에서 움직이는 로미오의 엉덩이를 뚫어져라 보다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바로 앞에서 로미오가 허리를 숙인 자세로 등을 보이고 있으니 속옷 안에 든 성기가 꿈틀댔다. 저 상태로 바지와 속옷을 잡아 내리기만 하면 작게 주름진 선홍빛 구멍과 매끈하고 새하얀 허벅지가 보일 텐데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어금니만 물게 됐다.

뒤에서 허리를 잡고 퉁, 퉁 앞으로 배를 밀며 성기를 박아 대면 분명 로미오의 흰 엉덩이 살이 흔들릴 것이다. 엉덩이 사이의 구멍과 음낭을 벌려 보고 주무르며 만끽하고 싶었다. 손가락과 혀를 넣고 돌려 대면 로미오가 몸을 떨다가 앞으로 넘어지며 무릎을 꿇을 것이다.

실수인 척 로미오의 허리를 감아 당겨 버릴까. 자신의 성기 위에 로미오가 한 번만이라도 올라앉아 준다면 그의 사타구니 사이에 머리가 끼어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로미오의 엉덩이에 자신의 성기가 닿는다니 생각만으로도 황홀해 정말로 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척하며 로미오를 뒤로 당겨 자신의 몸 위에 넘어지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같이 바닥으로 넘어져 그의 몸을 덮치는 것도 괜찮았다. 로미오의 몸에 딱 한 번만이라도 성기를 비벼 보고 싶었다. 그와 몸이 닿고 싶었다.

“제가 물을 전부 닦은 게 맞습니까?”

로미오가 뒤를 돌자 그의 엉덩이는 사라졌다. 대신 시선이 꽂혀 있던 위치에 로미오의 성기가 자리하게 됐다.

바지와 속옷. 그 두 가지만 벗겨 내면 금방 알몸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입맛을 다시게 됐다. 바지를 뚫고 나올 것처럼 커진 성기를 손바닥으로 비빈 조반니는 큰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네. 물을 엎질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깨끗해졌네요.”

그러고 보면 로미오의 맨살을 만져 보지 못한 지도 벌써 꽤 되었다. 그의 좁은 뒷구멍이 가져다주는 기쁨은 쉽게 잊을 수 있을 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로미오가 급사 일을 마치고 오는 길에 있는 열네 개의 좁은 골목과 다섯 개의 큰길을 머릿속에 그리는데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지금 서 계신 상태에서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여섯 걸음 정도 걸어가시면 제 옷이 있습니다. 팔을 앞으로 뻗으시면 손끝에 옷이 걸릴 겁니다.”

조반니는 속옷 한 장만 걸친 채 바지도 벗어 버렸다. 근육으로 잘 짜인 근사한 몸이 덮을 것도 없이 훤히 드러나자 으슬으슬한 기운과 함께 재채기가 나왔다. 에취, 하고 연거푸 두 번 재채기를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옷입니까?”

로미오는 조반니가 재채기를 하는 소리를 들으며 몸집이 큰 동물이 재채기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손에 들린 조반니의 옷은 품도 넓고 옷소매도 길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가끔씩 잊는 사실이지만 그는 체격이 무척 좋았다.

“네, 그 옷이 맞습니다.”

조반니는 재채기를 한 번 더 하며 이마를 짚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그는 간질거리는 코를 쥐었다.

“하숙집에 관해 선생님께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 그곳에서 뭔가를 발견했는데 혹시 선생님께서 아실지 몰라 여쭙습니다.”

침대 앞으로 돌아온 로미오는 웃옷의 팔 부분을 찾아 건네려다 발치에 조반니가 벗어 던진 옷이 밟히는 것을 느꼈다. 그 옷을 집어 드는데 침대에 드러눕는 소리와 함께 감기 기운이 역력한 조반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옷을 입기 전에 젖은 제 몸을 닦아 주시지 않을 건가요?”

설사 하숙집에서 시체가 나왔다 해도 궁금하지 않을 조반니는 긴 다리를 꼬며 자세를 잡았다. 속옷 한 장만 걸치고 그렇게 자세를 잡아도 우스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잘생긴 얼굴과 좋은 몸 때문이었다. 다만 음흉한 표정 때문에 하인에게 손톱 손질을 받을 준비를 마친 못된 주인 내지 인간으로 변신해 남의 침대에 똬리를 튼 거대한 뱀 같았다.

“이 옷은 어디에 걸면 됩니까?”

“왼쪽으로 두 걸음 걸어가시면 의자가 있으니 거기에 걸어 주세요.”

로미오는 조반니의 젖은 옷을 집어 들었다. 생각만큼 축축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넓게 펼쳐 반듯하게 의자에 걸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선뜻 조반니의 몸을 닦아 줄 수가 없어 적신 수건만 고쳐 쥐었다. 잠자코 그러고 있자 요란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콜록……!”

조반니는 깊은숨을 쉬기도 하고 몸을 떨기도 하며 계속 기침했다. 스스로 도저히 자신의 몸을 닦기 어려운 것이라고 이해한 로미오는 결국 손을 뻗었다.

“그러면 닦아 드리겠습니다.”

“조금 전에 제 옷을 건 그 의자에 앉아서 닦아 주시면 편할 겁니다.”

조반니는 긴 팔로 나무 의자를 끌어당긴 뒤 로미오가 등받이를 만질 수 있게 해 줬다. 로미오가 의자에 앉자 날씬한 허벅지가 눌리며 성기가 자리해 있는 다리 사이에 음영이 졌는데 주름진 그 부분을 본 조반니는 침을 삼켰다.

“하숙집에 관해 물어볼 것이라는 게 뭐지요?”

조반니가 팔을 내밀자 로미오는 한 손으로 손목을 잡고 젖은 수건으로 그의 팔을 닦았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열을 앓는 엔초의 옷을 전부 벗겨 몸을 닦아 준 기억이 떠올랐다. 조반니의 팔은 아주 무거웠는데 피부가 뜨겁게 느껴졌다. 그가 팔이 아니라 다리를 올리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하숙집의 3층 벽에서 검은 망토를 발견했습니다.”

몸에 힘을 풀고 눈을 감고 있던 조반니는 기척 없이 눈을 크게 떴다. 눈꺼풀이 크게 열리자 방 안의 양초 불빛에 금색 눈동자가 엽기적으로 빛났다.

“누군가 벽에 구멍을 내 망토를 숨겨 둔 것 같습니다. 3층에 사시는 동안 그 구멍을 본 적이 없으십니까?”

“…….”

로미오의 표정을 살핀 조반니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냈다.

“글쎄요. 어떤 형태의 어떤 구멍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망토는 또 무엇이고요?”

“계단 머리 부근에 있는 벽이었습니다. 날카로운 것으로 잘라낸 벽 너머에 망토가 들어 있었습니다. 벽은 네모난 모양으로 잘려 있었습니다.”

“벽 너머의 망토라… 어쩐지 으스스하게 들리는데요. 설명만 듣고는 어떤 벽인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네요. 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망토를 거기 숨겨 둘 때 이미 누군가에게 들킬 것을 각오한 조반니였다. 그러나 그 상대가 그라나 부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로미오가 그걸 발견했다니 의외였다. 그를 두 번째로 겁탈한 직후 그 옷을 벽에 숨겨 두고 손쉽게 하숙집을 빠져나갔으니 그 장소를 택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놀란 것은 로미오가 범행 당시 자신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자세히 기억한다는 것이었다. 망토라는 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로미오의 눈빛을 보니 그는 그 이상의 의심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전에 3층에 살던 분의 옷이 아닐까요?”

“그분도 아닌 듯합니다. 그라나 부인께서도 망토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셨습니다.”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기이하네요. 혹시 아주 오래전에 하숙집에서 사셨던 분들 중에 누군가 장난을 친 건 아닐까요?”

“예전에 그 하숙집에 살았던 분들에 대해 그라나 부인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런 짓을 하실 만한 분이 없었습니다. 그분들을 의심하는 건 합리적인 의심이 아닙니다.”

“대위님께선 그 망토에 대해 깊은 의문을 갖고 계시군요. 기이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신경 쓰실 이유가 있습니까? 평범한 망토 한 장인데요.”

로미오는 조반니의 팔을 다 닦고 그의 팔을 침대에 내려 줬다. 맞잡은 자신의 빈손을 매만지던 그는 낯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정확한 사정은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그 망토가 일전에 저를 습격했던 사내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조반니는 그다지 놀라지 않고 반대쪽 팔을 내밀었다. 로미오가 내밀어진 팔을 눈치채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손끝으로 그의 옷소매를 건드렸다. 그러자 로미오가 팔을 닦아 줬다.

“무서운 이야기군요. 그렇다면 그자가 3층에 버젓이 제가 살고 있는데도 하숙집에 침입해 그 옷을 숨겼다는 겁니까?”

조반니는 놀라움과 곤혹스러움, 두려움, 약간의 분노가 드러나도록 목소리를 조절했다. 자신이 이 상황에서 느껴야 할 감정들이었다. 만약 정말로 누군가 로미오에게 위협을 할 작정으로 하숙집 벽에 물건을 숨겼다고 상상하면 쉬웠다. 그렇게 상상하면 자신이 지금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명쾌해졌다. 그 어떤 자도 감히 로미오에게 그런 짓을 할 순 없었다. 그런 짓을 한 자가 있다면 사지를 찢어 펄펄 끓는 물에 삶아 버릴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자가 대체 언제 하숙집에 침입해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인가요? 그라나 부인은 안전하신 겁니까?”

“그래서 저도 걱정이 됩니다.”

“대위님께선 그 망토를 발견하시고 얼마나 크게 놀라셨을까요. 저런, 마음이 아픕니다. 이 일을 공안국에 알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그 정체불명의 사내가 하숙집에 몰래 드나들고 있는 것이라면 두 번째 습격 가능성도 있는 게 아닙니까?”

“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만 단서가 전혀 없어 범인을 잡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제가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혹시 모르니 내일 아침 일찍 하숙집에 들러 그 구멍을 살펴봐야겠습니다. 대위님께서는 되도록 동행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만 하숙집에 들르십시오. 아니면 내일 아침에 저와 함께 가 보시겠습니까?”

“아니요… 말씀은 감사하나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이미 충분히 그곳을 살펴본 터라 괜찮습니다.”

“그런 끔찍한 습격을 당하셨으니 그 벽을 보는 것이 괴로우시겠지요. 이해합니다. 망토는 어떻게 하셨나요?”

“발레리아에게 맡겼습니다.”

“만약 이 일을 공안국에게 알린다면 그 망토도 함께 넘겨야 하니 소중히 보관해야 할 겁니다.”

거짓말을 술술 쏟아 낸 조반니는 로미오가 자신의 팔을 닦는 동안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아래에서 보니 긴 속눈썹이 뺨 위로 뾰족이 나 있는 게 보였다.

하늘 같기도 하고 바다 같기도 한 그의 푸른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밝은 눈 색깔을 갖고 있는데도 화려해 보이지 않는 것이 좋았다. 한때 로미오를 보석상으로 데려가 원하는 보석들을 모두 사 주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보석을 좋아할 것 같지 않은 데다 그 어떤 아름다운 보석을 갖다 댄다고 해도 로미오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광택이 나는 한낱 광물일 뿐이었기 때문에 소용없다고 여겨졌다.

저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을 돈을 내지 않고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혜택처럼 느껴졌다. 그를 알게 된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만난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하니 배부른 식사를 마친 것처럼 마음이 흡족해졌다.

“주무십니까?”

망토에 관해 계속 말을 이어 가던 로미오는 조반니가 아무 말이 없자 그의 팔을 닦던 손을 멈췄다. 조반니는 아까보다 더 단단해진 성기를 허벅지 사이에 끼워 비비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하지만 만약 제가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잠든다면 철썩 소리가 나게 제 뺨을 때려 주세요.”

“그런 일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편찮으신데 제가 너무 긴 이야기를 했나 봅니다. 망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신 듯하니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옷 입는 것을 도와드릴 테니 어서 주무십시오.”

“윗몸과 두 다리도 땀으로 흥건한데 닦아 주지 않으실 건가요?”

조반니의 팔을 내려 준 로미오는 내키지 않는 듯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반니는 끔찍하게도… 아니, 깜찍하게도 그답지 않은 귀여운 목소리를 냈다.

“안 될까요?”

“…….”

“네, 대위님?”

고개까지 꼬아가며 순진한 척 이야기한 조반니는 음률이 깃든 매력적인 저음의 목소리로 한껏 아양을 부렸다. 그러자 로미오는 조반니가 가장 좋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로미오는 남의 곤란한 부탁에 언짢은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만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손하게 당황해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두 가지에 당황하고 있었다. 조반니가 내고 있다고 믿기 힘든 그의 낯선 목소리와 몸을 닦아 주길 원하는 그의 진심 어린 요구였다. 조반니는 정말로 열이 나는 그의 전신을 자신이 닦아 주길 바라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 그는 웃옷과 바지를 입지 않고 있었다. 아까 주워 든 옷은 분명 아래위 두 벌이었다.

“제가 혹여나 몸을 닦아 드리다가 실례를 범하게 될까 걱정이 됩니다… 선생님께서 직접 닦으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손에 힘이 없어 도저히, 콜록…! 할 수가 없네요, 콜록, 콜록……!”

지금 이 순간 조반니의 수음 사건을 떠올리고 있는 로미오는 대답 없이 손에 든 수건만 고쳐 쥐었다. 그가 환자라는 것을 알지만 선선히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알다시피 그는 자신의 그림으로 ‘그런 짓’을 했던 적이 있었다. 얼굴 그림으로도 그런 짓을 할 정도인데 맨몸을 닦아 달라니 곤란한 게 당연했다. 실례를 범하게 될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조반니일지도 몰라 꺼려졌다.

“…….”

방 안이 조용해지자 조반니는 다시 한번 “네, 대위님?”하고 물었고 로미오는 난처한 고민에 빠져 입술을 오므렸다. 그의 그런 표정을 구경하던 조반니는 곧 쿡쿡 웃으며 일어나 앉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이리 주세요.”

“죄송합니다…….”

조반니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땀이 배어 나오는 다리와 가슴, 어깨를 닦은 뒤 로미오가 펼쳐 보인 옷에 팔을 넣었다. 그만 괴롭혀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도 바지를 입혀 달라고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바지춤의 끈을 묶어 달라고 해 볼까. 성기는 계속 서 있는 상태였다. 끈을 묶던 중 단단해진 귀두 끝에 로미오의 손이 닿는 짜릿한 우연을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이 끈을 묶어 주시겠습니까?”

장난기를 참지 못하고 말하니 로미오가 두 손을 허공에 들었다.

“어떤 것을 말씀하십니까?”

“여기 이 끈 말이에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힘듭니다.”

조반니가 끈을 비벼 꼬며 일부러 소리를 내자 로미오가 “어디에….” 하며 헤맸다. 거절하지 않고 해 달라는 것을 어떻게든 해 주려고 하는 데다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로미오가 사랑스러웠다.

순진하기도 하지.

“그냥 제가 하겠습니다.”

재빨리 말을 바꾼 조반니는 끈을 대충 묶고 한기가 도는 몸 위에 요를 덮었다. 연극이 아니라 정말로 기침이 나와 몇 차례 기침을 하며 침대에 기대 누웠다. 현기증이 일었다.

“몸을 닦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한결 낫네요.”

조반니가 간지러운 목소리를 냈을 때부터 그림 수음 사건을 생각하고 있던 로미오는 애써 생각을 지웠다.

이 일은 이제 정말 그만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 자꾸 생각난다 해도 잊어야 했다. 몸을 닦는 중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정말로 그 그림에 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하지만 그렇게 결심하면서도 자신에게 몸을 닦아 달라고 재차 부탁한 조반니가…… 그러니까, 무어라고 하면 좋을까… 어울리지 않는 말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그림으로 그런 행위를 하고도 이런 부탁을 하는 그가 아이처럼 느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오히려 몸이 닿는 것을 경계하고 쭈뼛댈 것이다. 체면을 망칠 일이 생길 수도 있는 데다 순수한 마음으로 몸을 맡기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반니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역시 ‘그런 짓’을 했다고 해서 그가 상종하기 힘든 무뢰한인 것은 아니었다. 그 일이 조반니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 짓을 했다고 그가 매번 그런 생각만 하는 사람인 것도 아니었다.

“바르톨루치 위원의 얘기를 다시 하겠습니다. 노프리가 접촉 중인 자가 그 위원이었습니다.”

로미오가 화제를 돌리자 조반니는 비웃음 비슷한 것을 지었다. 그가 오늘 이후로 더는 자신에게 검은 망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알아내 달라고 부탁드렸더니 정말로 알아내셨군요? 통령 각하와 연이 깊은 자를 포섭 대상으로 삼다니 노프리도 만만치 않네요.”

“어떻게 신분을 속이고 드나드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바르톨루치 위원의 저택의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바로 옆방으로 노프리가 들어왔습니다. 다 몬티도 함께 위장해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통령 각하의 암살을 공모하더군요. 대화를 엿듣던 중의 제 감으로는 프란코도 암살 공모에 관련된 것 같습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여기 그대로 옮겨 적어 놓았습니다.”

카를로타의 암살 공모 이야기에 조반니가 금색 눈동자를 번뜩거린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로미오는 옷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대화 내용을 적어 둔 것이었다.

순식간에 표정이 달라져 일어나 앉은 조반니는 감기 기운이 사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두 사람이 하는 대화의 내용을 정확히 들으신 겁니까? 그들이 통령 각하를 살해할 것이라고 하던가요?”

“예. 잘못 들은 게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도 모르고 계셨군요. 아직 두 사람이 중앙 지부에 알리지 않았나 봅니다. 계획 단계에 이른 정도인가 봅니다.”

로미오가 건넨 종이를 받아 들었으나 조반니는 내용을 읽을 수 없었다.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바르게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지만 글자가 삐뚤삐뚤한 데다 서너 줄씩 지저분하게 겹쳐져 있었고 기울기도 이상했다. 오래 들여다보며 천천히 읽어 나가면 가능하겠지만 수고스러운 일이 될 것 같았다.

로미오도 그 사실을 아는 것인지 얼른 덧붙여 말했다.

“글자를 알아보기 힘드실 겁니다. 잊어버릴 우려가 있어 적어 둔 것이나 제가 대화의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 말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사용한 모호한 암호를 해석 없이 그대로 전해 드릴 것이니 우선 들어 보십시오.”

로미오에게서 대화의 내용을 듣는 동안 조반니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암살 계획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뒤늦게 오늘이 정례 회의였음을 깨닫고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인정했다. 어쩌면 오늘 그 정례 회의에서 암살 공모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지도 몰랐다. 레오나르도가 전하려 한 이야기도 그 이야기였을지 몰랐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로미오가 묻자 조반니는 생각에 잠겼다.

“계획 단계를 넘어 실행에 옮겨지면 돌이키기 힘드니 그 전에 저지해야 합니다. 암살자를 고용하고 암살 장소를 물색해 단원들을 잠입시키고 나면 어떤 이유를 대든 없던 일로 하기 힘들어질 겁니다. 다음번 회의에 참석해서 동태를 살펴야겠습니다. 이런 시기에 통령 각하가 살해당하신다면 제6군단도 타격을 입을 겁니다. 조직 활동이 활기를 띠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저는 무슨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암살 공모가 지부 내에서 논의된다 해도 대위님께선 전해 받지 못하실 겁니다. 일단 이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척 행동해 주세요. 바르톨루치 위원의 집에 드나들었던 것을 감출 필요는 없지만 그곳에서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해 주셔야 합니다. 저는 혼인식을 열 예정이라는 31인 위원회의 위원에 대해서 알아봐야겠습니다. 혹시 바르톨루치 위원과 다음 만남을 약속하셨나요?”

로미오는 대답을 잠시 망설였다.

“아니요.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자의 집에 드나드는 것이 선생님께 도움이 됩니까?”

“반반입니다. 약속하지 않으셨다니 우선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조반니는 카를로타의 먼젓번 편지가 도착했던 날짜를 계산했다. 다음 편지는 적어도 몇 주를 기다려야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시일 내에 편지를 부쳐야 했다. 체사레가 편지를 받으러 오는 날을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저는 엿새 뒤에 엔초와 이 집을 나가겠습니다. 가져온 짐이 많지 않아 정리가 일찍 끝난다면 그보다 더 빨리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심각해져 있던 조반니는 다음 순간 고개를 홱 들어 로미오를 쳐다봤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기에 눈썹이 일그러졌다.

“이 따뜻하고 조용한 저택도 이제 끝인 것 같아 아쉽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지내는 동안 즐거웠습니다.”

조반니는 못마땅한 잔소리를 들은 것처럼 골난 표정이 됐다. 이 집을 제법 마음에 들어 하는 줄 알았는데 하숙집이 그리운 모양이었다.

로미오의 손목에 실을 묶어 데리고 다니고 싶다고 생각한 조반니는 걱정스러운 척을 했다.

“대위님을 습격했던 자가 하숙집에 침입했는데 엔초와 같이 그 집으로 들어가 사시려고요? 저는 그라나 부인을 다른 곳으로 모실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엔초의 화실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갈까 합니다. 실은 며칠 전에 집을 알아 놓았습니다. 집주인과도 이야기를 나눠 보았는데 집이 좁긴 하지만 엔초와 둘이 살기에는 괜찮을 듯합니다.”

조반니는 코 속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로미오의 다리를 내려다봤다.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지? 아름다운 저 두 다리를 부러뜨려 버리면 당분간 이사는 물론 술집에 나가는 것도 힘들 것이다. 계단에서 미는 것은 자칫 크게 다칠 위험이 있었지만 로미오가 이 집을 나가고자 하니 별수 없었다.

자, 그러면 언제 부러뜨린담? 지금?

“저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편히 주무십시오.”

로미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조반니는 황급히 물었다.

“그, 음… 오늘 갈고리 고양이 술집에서 재밌는 일은 없었나요?”

로미오의 다리를 부러뜨려야 하기도 했고 그의 얼굴을 보며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했기 때문에 조반니는 침대에 앉은 채 로미오를 올려다보며 얘기했다.

“특이한 손님이 있었다든가, 아니면 단골손님께서 우스운 이야기를 들려주셨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나요? 저는 오늘 병원에서 별다른 일이 없어 종일 지루했습니다. 오늘 하루 대위님께서 어떻게 지내셨는지 얘기를 들려주세요.”

조반니는 그 말을 끝으로 나오는 하품을 참지 못하고 입을 가렸다. 몰래 하려는 것처럼 조용히 하품을 한 그는 목소리에서 감기 기운을 감추고 말을 이었다.

“꼭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로미오는 조반니가 자신과 같이 좀 더 있기 위해 핑계를 대고 있다고 느꼈다. 도로 자리에 앉았으나 잠시간 생각에 잠기게 됐다.

자신이 무엇이라고 이 늦은 밤 졸음을 참아 가며 이 자리에 앉혀 두려는 것일까.

조반니의 옆에 이렇게 남아 있다고 해서 열을 내려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깊이 잠들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알려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져온 물은 쏟아 버렸고 열이 나는 그의 몸은 그대로였다. 그저 밤새 이렇게 앉아 있는 게 전부인 맹인인 자신이 무엇이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자신이 그에게 무슨 존재이기에.

“저는 오늘 병원에서…….”

조반니는 먼저 얘기를 시작하더니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였지만 로미오를 붙잡아 두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였다.

말재주가 없는 로미오는 조용히 조반니의 말을 듣고 있다가 이야깃거리가 떨어질 때쯤 불쑥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십니까?”

이야기의 흐름과 관련 없는 엉뚱한 질문에 조반니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말을 해 놓고도 로미오는 상황에 어울리는 질문이 아니라는 생각에 뒷말을 붙였다.

“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제가 식사를 차려 드릴까 합니다. 함께 산 지도 꽤 되었는데 여태 선생님께서 좋아하는 음식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답하는 조반니의 목소리는 밝았다. 그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저는 무엇이든 다 좋아합니다.”

“그래도 특별히 더 좋아하는 음식이 있지 않으십니까?”

“구워서 조리한 음식이라면 다 좋습니다. 오리 구이와 닭구이 같은 음식들요. 육질에 따라 다르지만 구웠을 때의 그 식감이 좋습니다.”

별것 아닌 물음. 기쁘게 대답하는 조반니.

로미오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번엔 엉뚱한 질문이 아닌 불현듯 떠오른 궁금증에 기반한 질문을 했다.

“선생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제게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조반니가 침대에 눕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게 왜 갑자기 궁금하신 건가요?”

“문득 생각이 나서 그럽니다. 예전에 선생님께서 누님과 동생에 대해 이야기하셨던 걸 기억합니다. 그런 것 말고 선생님께서 어떤 아이였는지 궁금합니다. 선생님께선 저의 옛 고향 사람들과 만나 제 옛날이야기를 들으셨지만 저는 그럴 기회가 없으니 말입니다.”

“제 어린 시절과 관련해서 그다지 재밌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부유한 분들이셨습니다. 조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이 있었던 데다 하시는 일 때문에 가진 돈이 어마어마하게-이런 이야기를 원하시는 게 아니군요? 대위님의 표정을 보니 알겠습니다.”

로미오는 조반니가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생각에 잠긴 사이 어린 조반니를 상상했다. 지금의 조반니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그린 어린 남자아이의 얼굴은 비어 있었다. 그래서 튼튼한 몸을 갖고 있는 금빛 머리의 사내아이로 적당히 상상했다.

“선생님께는 친구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재능이 많으신 데다 장난을 즐기고 남에게 아끼지 않고 베푸는 성품을 갖고 계시니 어린 시절에도 그랬을 테지요. 아이와 어른을 막론하고 그런 사람들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이 끊이질 않는 법이니 말입니다.”

“제가 장난치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닙니까?”

조반니는 소리 내 웃더니 금방이라도 장난을 칠 것처럼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대위님께 짓궂은 장난을 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재밌네요. 제가 마음먹고 대위님께 장난을 걸었다면 언젠가 한 번은 대위님께서 제게 크게 화를 내셨을 겁니다.”

“어린 시절에도 장난을 즐기셨습니까?”

“네. 황당한 장난을 자주 쳤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나 아버지께 혼난 기억은 없어요. 제가 도망 다니길 잘하는 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래층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리면 날쌘 동물처럼 난간을 타 넘고 지붕 위로 뛰어내려 집 밖으로 빠져나갔죠.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갈 때면 제 방 위층에서 누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크게 소리치는 법이 없으신 누님은 창문을 열고 ‘어디 가는 거니?’ 하고 점잖게 물으셨고 전 손을 흔들어 보인 후 쏜살같이 사라졌지요.”

“말씀만 들어도 골치가 아프군요. 그런 아이를 키우려면 몸이 여러 개가 필요할 겁니다.”

“저는 공부를 지루해하는 아이였습니다. 열 살 때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할 때 저는 아버지의 서재에 앉아 아버지의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어떻게든 절 학교에 데려가려고 하셨고 그게 불가능하니 누님까지 나섰지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반은 옮겨 줄 것을 약속받고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저보다 대여섯 살 많은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했어요. 저는 친구가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따돌림을 받는 것에 가까웠죠. 괴물 같은 자식이라거나 저 같은 것과는 말 섞고 싶지 않다는 식의 험한 말을 듣기 일쑤였습니다.”

하고 있는 말들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잊고 지내던 기억이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때문에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유년 시절의 기억들에서 조반니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누가 선생님께 그런 말을 한 겁니까? 어떤 이유로요?”

“제가 특이한 아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래 중 가장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저를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아이들은 최소한 저와 체격이 비슷한 아이여야 가능했습니다. 그런 아이들에 의해 학교 뒤뜰의 창고에 갇히거나 머리에 흙 세례를 맞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저는 그런 짓을 당하면 대갚음해 줄 생각에 마음이 설레는 아이였기 때문에 일은 늘 제 손에서 커졌지요.”

조반니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로미오는 말을 꺼낸 것을 미안해했다. 어린 시절의 조반니는 남들에게 주목받는 인기 많은 소년인 줄 알았다.

“어려서 괴롭힘당한 기억이 아이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는지 알고 있습니다. 저도 사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그런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을 여럿 봤습니다. 제가 도와준다 한들 소용이 없어 상급반의 학생들이 나서야만 해결이 되었습니다. 제가 선생님의 아픈 기억을 건드린 것 같아 죄송스럽군요.”

“걱정 마세요. 저는 어렸을 때의 일들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으려면 천성이 명랑하고 밝되 잘난 척하거나 공격적이지 않고 남과 어울리는 것을 즐겨야할 겁니다. 저와는 미묘하게 거리가 있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전 남자아이들에게는 아니지만 또래 소녀들에게는 평판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조반니가 농담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로미오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조반니가 이야기한 특징들이 모두 조반니에게 들어맞는다고 생각한 그는 짧은 생각에 잠겼다. 조반니는 지나치게 영특하고 재능이 많아 따돌림을 당한 것인지도 몰랐다.

“엔초는 어떤가요?”

“엔초요?”

“이 집에서 같이 지내며 엔초를 관찰해 보니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놀라울 정도로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엔초는 화실에서 인기가 많은 편인가요? 인형 같은 외모 덕에 친구가 많을 것 같긴 합니다만.”

관찰했다느니, 사랑스럽다느니 하는 말은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엔초에 대한 조반니의 관심을 의심할 리 없는 로미오는 순수하게 대답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소수의 친구들과 잘 지내는 것 같습니다.”

“엔초처럼 귀여운 아이도 훌쩍 자라 언젠가 청년이 된다니 섭섭하군요. 지금처럼 평생 작고 귀여울 수 없으니 다 커 버리기 전에 마음껏 귀여워해야겠어요. 5년만 지나면 목소리도 달라지고 몸도 커질 테니 몇 년 남지 않은 셈이군요. 대위님께서 이름을 부르면 못 들은 척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릴 테지요.”

조반니가 모든 부모들이 두려워하는 농담을 하자 로미오는 보기 드물게 약간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네, 아마 그럴 겁니다. 제 냄새가 좋다며 허리를 껴안고 뺨을 비비는 것도 끝일 겁니다. 손도 잡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보드라운 뺨에 수염이 나기 시작하고 귀여운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어져 ‘형!’ 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대위님을 부를 텐데 정말 괜찮으신가요? 그때가 돼서 귀여운 엔초는 어디로 가 버렸냐고 물어봐야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팔다리가 굵고 어깨가 벌어진 웬 사내 녀석이 한 명 있을 따름이죠. 순전히 제 생각이지만 엔초는 커서 분명 미남이 될 겁니다. 지금은 비록 여자아이처럼 예쁘지만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어깨와 팔의 골격을 만져 보니 다 자란 후에 키가 무척 클 것 같더군요. 대위님보다도 더 말이죠.”

그때였다. 아래층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똑. 세 번의 두들김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조반니는 삽시간에 눈빛이 달라져 재빨리 문을 돌아봤다.

“쉿.”

조반니는 재빨리 손가락을 세워 입가에 가져다 댔다. 별안간 그가 침대를 박차고 일어서자 로미오는 미소를 거두고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 됐다.

“왜 그러십니까?”

발소리를 죽여 문 앞으로 다가간 조반니 목소리를 낮췄다.

“조금 전에 누군가 1층의 정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조반니는 문 바로 옆에 놓인 탁자 서랍 속에서 신속하게 칼을 꺼냈다.

로미오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긴장했다. 이런 늦은 시간에 집을 찾아올 사람은 많지 않았다. 조반니가 서랍 안에서 꺼낸 것이 칼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지만 일단 숨죽여 기다렸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저 혼자 내려가 볼 테니 대위님께서는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조심하십시오. 무슨 일이 생기거든 제가 곧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상대를 바로 찌를 수 있도록 칼 손잡이를 고쳐 잡은 조반니는 문고리를 돌렸다. 그러다 다시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또 들립니다. 그자가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정확히 세 번 두드리는 소리에 조반니는 로미오를 돌아봤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아무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겁니까?”

로미오가 고개를 기울이며 아래층의 소리를 들으려 애쓰자 조반니는 문을 활짝 열었다. 멎었던 문 두드림이 다시 들려오자 목소리를 낮춰 재빨리 말했다.

“지금요. 지금 두드리고 있습니다. 들리시지요?”

그러나 로미오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강한 의문을 느끼고 문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귀를 기울였다.

“대체 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것인지…….”

조반니는 아래층에서 계속 울려 대는 소리에 덩달아 의아한 표정이 됐다.

“이 소리가 들리지 않으신다고요? 지금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제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아래층은 조용하기만 합니다.”

큰 소리는 아니지만 식별 가능한 소음이었다. 똑, 똑, 똑. 성가시게 문을 두드려 대고 있는 상대는 한밤중의 기분 나쁜 장난을 즐기고 있었다. 조반니는 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로미오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일단 방 밖으로 나갔다.

“방 밖으로 나오지 말고 여기 계세요. 절대 나오시면 안 됩니다.”

당부를 하며 문을 닫은 조반니는 발소리를 죽여 계단을 내려갔다. 문 두들김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몸을 낮추고 발끝으로 걷는데 1층 정원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을 때 소리가 멎었다. 상대가 도망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조반니는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질렀다. 밖으로 이어지는 문을 벌컥 열었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어디에도 도망치는 사람의 그림자와 발소리는 없었다.

텅 빈 거리를 내다보던 조반니는 입술을 씹으며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수상한 방문객의 정체는 티모테오인 것일까? 그가 이제는 집 앞까지 찾아와 자신을 농락하는 것일까? 아니면, 가령 집을 착각한 어느 행인이 문을 두드린 직후 뒤늦게 이 집이 아닌 것을 깨닫고 급히 왔던 길을 되돌아간 것일까? 그래,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만…… 아니. 아니다. 그렇다면 집주인에게 사과도 하지 않고 도망갈 이유가 없다.

분명 티모테오 그자일 것이다.

“젠장.”

칼을 내리며 돌아서는데 언제 위층에서 내려온 것인지 정원에 로미오가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이상했다.

“내려오시면 안 됩니다, 대위님. 위험한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요. 어서 올라가세요.”

조반니가 서둘러 로미오를 올려보내려는데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선생님께서 마치 들으신 것처럼 문을 열고 나가셔서 놀랐습니다. 문밖에선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잘못 들으신 게 아닙니까?”

“설마요. 대위님께서도 이상하시군요. 똑, 똑, 똑, 하는 세 번의 문 두드림 소리는 여러 번 들려왔습니다. 제게 들리는 소리가 대위님껜 들리지 않는다니 의아스럽군요.”

문을 잠그려던 조반니는 다시 들려오는 똑, 똑, 똑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선명한 소리였다. 이어서 목소리가 들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말소리였다. 뭔가를 빠르게 속삭이는 소리가 저택의 문 너머에서 들렸다.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지만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반니는 망설이지 않고 집 밖으로 뛰쳐나가 주위를 둘러본 뒤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한 손에 칼을 들고 거리를 내달리던 그는 길 한복판에 멈춰서 욕을 짓씹었다.

“빌어먹을 자식! 또 쥐새끼처럼 도망치다니.”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저 멀리 로미오가 보였다. 그는 집 밖으로 나와 이쪽을 보고 서 있었다. 칼을 거둔 조반니는 서둘러 로미오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나오시면 안 됩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행여나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그를 얼른 들여보내는데 로미오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듣고 이러시는 겁니까? 문 너머에서는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가 들렸다는 것인지…….”

조반니는 로미오가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로미오와 비슷한 표정이 됐다.

분명 문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그자는 티모테오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로미오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뻔히 들리는 소리를 왜 자꾸 듣지 못했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로미오는 티모테오를 의심했던 지난번에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다.

“분명히 목소리까지 뚜렷하게 들렸습니다. 속삭이는 것 같은 말소리였어요. 그가 늦은 밤에 저를 찾아와 농락하고 있는 겁니다. 우초 경사 그자가 제게 해를 가하고자…….”

조반니는 말을 해 놓고도 금방 입을 다물었다. 로미오의 표정은 한층 더 굳어졌다.

“역시 아직도 우초 경사를 의심하고 계시는군요.”

어두운 거리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문을 잠갔고 잠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미오는 긴 고민 끝에 입을 뗐다.

“선생님께서 예민해지셔서 없는 소리를 들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목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혹여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를 착각하신 거라면 선생님께서 그만큼 신경이 날카로워지셨기 때문일 겁니다. 빗소리를 사람의 목소리나 문 두드리는 소리로 착각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요, 대위님. 빗소리가 아닙니다. 어떻게 빗소리와 사람의 목소리를 착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자는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일 겁니다. 대위님이야말로 이상하시군요. 문밖에서 난 소리를 듣지 못하셨다고요? 그렇게 선명한 소리를요?”

조반니에게 도리어 의심당하고 있었지만 로미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았다.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정말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반니의 태도는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키며 왜 보지 못하냐고 따지는 것과 같았다. 사람의 목소리라니. 문 두들김이라니. 그런 것은 결코 들리지 않았다. 조반니는 주위가 조용한 가운데 별안간 밖으로 뛰쳐나갔고 그런 그의 날카로운 태도는 결코 정상적이지 않았다.

“제 말을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문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선생님께서 착각을 하신 겁니다. 밤이 늦은 데다 몸이 아프셔서 예민함이 한계에 다다르신 듯합니다.”

로미오가 정중히 말하자 조반니는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상대가 로미오였기 때문에 반박하지 않고 침묵했으나 저번과 달리 버젓이 들린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로미오에게 미심쩍음을 느꼈다.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도 로미오는 미행자가 티모테오일 거라는 자신의 추리를 믿지 않았다. 로미오가 자신의 합당한 의심을 번번이 부정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왜 이렇게까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일까? 그가 설마 자신보다 티모테오를 더 신뢰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아니라 왜 그를 믿는 것일까? 가령 로미오가 티모테오와 각별한 관계라면…… 아니지. 아니다. 이건 엇나간 추론이다. 로미오가 그럴 리 없었다. 아니, 잠깐. 반대일 수 있지 않을까? 티모테오가 로미오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라면?

그래, 그럴 수 있다.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가정하면 몇 가지 의문이 풀렸다. 왜 여태 이런 의심을 하지 못했던 걸까? 티모테오가 자코모를 살해한 범인으로 자신을 지목한 것도, 자신을 미행하는 것도 로미오에게 다른 감정을 품고 있어서라고 이해하면 이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의 목적이 로미오에게서 자신을 떼어 놓는 것이라면 말이 됐다.

아, 이제 알 것 같았다. 역시 티모테오 그자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그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이 모든 일을 벌인 것이었다. 로미오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남몰래 더러운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런 주제에 여태 자신을 미행하고 밤중에 해괴한 짓을 벌여 로미오로 하여금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도록 만들었다. 그래, 분명하다. 이런 뻔한 진실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티모테오 우초! 간사하기 짝이 없는 자였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자였다. 이제 더 이상 참아 줄 수 없었다. 티모테오를 살해하는 것만큼은 마지막까지 보류하고 싶었지만 그가 로미오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가 로미오의 털끝 한 올이라도 건드리게 해서는 안 됐다.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로미오는 자신의 것이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의 것이었다.

“제가 어떻게 해 드려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렇게까지 곤란해하시는데 도대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요한 정원에 울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티모테오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던 조반니는 먼저 꼬리를 내렸다.

“대위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제가 착각을 한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빗소리였던 것 같네요.”

목소리를 누그러뜨렸지만 로미오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조반니는 티모테오를 향한 분노가 서서히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고 이빨을 드러냈다. 숨소리가 거세지자 목에 핏대가 섰지만 로미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만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 올라가시지요.”

티모테오를 손봐야 하는데다 로미오가 이 집에서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하니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

조반니는 자신을 뒤따라 계단을 오르는 로미오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그가 전부 올라왔다고 생각될 때 급하게 돌아섰다.

“그건 그렇고…….”

몸이 부딪친 척 팔꿈치로 로미오의 가슴을 거칠게 떠밀자 그가 뒤로 기울어지며 균형을 잃었다.

“아……!”

넘어지지 않기 위해 벽을 짚었으나 로미오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1층으로 떨어진 그는 문에 머리를 부딪치고 바닥으로 쓰러져 신음했다.

“대위님!”

놀란 목소리를 내며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간 조반니는 이런 와중에 일부러 로미오의 허리를 손으로 더듬으며 부축했다. 부딪친 머리를 감싸고 있는 로미오는 고통스러운 숨을 몰아쉬며 오른쪽 다리를 부여잡았다.

“윽, 다리가…….”

“다리를 다치신 겁니까? 어디 한번 보겠습니다. 자, 바지를 이렇게…….”

“아, 윽……!”

오른쪽 발목을 붙잡으며 몸을 웅크린 로미오는 깊은 통증에 숨을 참았다.

“윽……!”

계단을 구르며 어깨와 등이 마구잡이로 계단에 쓸려 온몸이 욱신댔지만 발목 부근의 통증은 그보다 몇 배 더 강했다. 머리를 세게 부딪쳐 헛구역질이 치밀었고 계단 모서리를 잘못 들이받아 팔뼈가 저렸지만 발목의 통증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심했다.

“이것 참 큰일이군요. 계단이 너무 어두워 빛이 필요합니다. 위층으로 올라가실 수 있겠습니까? 저를 안아 보세요. 제게 매달리시면 됩니다.”

조반니가 몸을 내주자 로미오는 그의 어깨를 잡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두 다리를 움직이니 발목의 통증이 심해져 절로 신음이 나왔다. 조반니와 어깨가 밀착돼 일으켜 세워지는 동안 그의 숨소리가 귓바퀴에 닿으며 크게 들려왔다.

“세상에나. 아무래도 뼈가 부러진 것 같군요.”

로미오는 자신의 다리를 살피는 조반니에게서 젖은 비 냄새를 맡았다. 얇은 실내복 너머에선 그의 체온과 함께 몸을 아주 가깝게 붙여야만 나는 체취가 느껴졌다. 3층 복도를 떠도는 체취보다 더 선명하고 노골적인 체취였다.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날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라 머릿속을 빼곡히 메웠다.

로사티 1번가 포목점 골목에서 벌어졌던 첫 겁탈. 겁탈을 당하며 맡았던 비 냄새. 그건 단순한 비 냄새가 아니었다. 비에 젖은 몸에서 나는 냄새였다. 믿을 수 없는 것은 그 냄새가 조반니에게서 나는 냄새와 겹쳐진다는 것이었다. 검은 망토의 사내가 자신의 위로 올라탔을 때 느껴졌던 역겨운 체취가 조반니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강하게 코를 자극했다.

두 냄새가 같은 냄새일 리 없다고 생각하려 했지만 목이 조이는 느낌과 함께 순식간에 전신의 근육이 말라비틀어지듯 쪼그라들었다. 숨을 참으려 진정하려 했으나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며 겁탈 당시의 느낌이 재현됐다. 짧은 연극처럼 그때 들었던 소리가 들렸고 그때 맡았던 냄새가 났으며 허벅지와 허리에 감각이 느껴졌다.

“하아, 하…… 아…….”

옷이 벗겨진 채 흔들리던 몸과 머리 위에서 들려오던 게걸스러운 숨소리. 그리고 냄새. 검은 망토의 사내에게서 나는 냄새는 분명 지금 조반니에게서 나는 냄새와 동일했다. 두 냄새는 같은 냄새였다.

“왜 그러십니까?”

어째서 그날의 기억이 겹쳐지는 것인가. 왜 조반니에게서 검은 망토의 사내의 흔적을 엿보고 있는 것인가.

자신이 미쳐 가고 있는 것일까?

자신을 범한 범인의 정체를 밝히는 데에 몰두해 그 일과 무관한 순간에조차 그의 흔적을 더듬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너무 똑같았다. 이 냄새는 분명 그 냄새였다. 자신을 범하던 사내에게서 나던 냄새였다. 착각할 수 없는 냄새였다.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위님?”

조반니가 그렇게 말한 순간 로미오는 고꾸라지듯 앞으로 몸을 숙였다. 거칠어졌던 숨이 일순 멎었다.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기이한 감각과 함께 마음의 늪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왜 그러시는 건가요? 발목의 통증 때문인가요?”

잊고 있었던 기억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정신을 잃은 상태로 범해지던 자신을 향해 검은 망토의 사내가 했던 말. 자신의 무의식에 깊이 닻을 내리고 있던 잃어버린 기억이었다.

선명한 목소리는 기억나지 않았으나 그자는 자신을 대위님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조반니처럼.

“그만, 하아… 그만, 저를… 위층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두 사람이 계단을 전부 올라왔을 때 2층의 복도 끝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사라졌다. 어두운 통로 너머에 있는 엔초의 방문이 소리 없이 닫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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