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벽 너머의 진실
카를로타의 무릎 위에는 점박이 무늬를 가진 고양이 한 마리가 올라가 있었다. 가닥가닥 털이 붙어 있는 카를로타의 옷소매는 손으로 떼어 내는 것이 의미 없을 만큼 털이 한가득 붙어 있었다.
“그자의 동생도 함께였습니다. 제게 문을 열어 준 아이가 그 아이였습니다.”
체사레가 말하는 동안 카를로타의 등 뒤에 서 있는 주세페는 통령의 옷소매에 붙은 고양이 털이 신경 쓰여 그녀의 소매를 내려다봤다. 카를로타의 무릎을 괴고 엎드려 있던 고양이는 그런 주세페를 올려다보며 기분 좋게 그르릉 울었다. 주세페가 검지를 들어 입술에 대 보였지만 고양이는 통통한 앞발을 번갈아 오므렸다 펴며 카를로타의 무릎을 눌러 대기 시작했다.
“되돌아가던 길에 그자와 마주쳤는데 인상적인 외모를 가진 젊은이였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체사레가 말하고 있는 인물을 본 적 있는 주세페는 지난번의 알현을 떠올렸다. 카를로타와 함께 마주했던 젊은 장교의 외모가 뇌리에 깊게 남아 기억하고 있었다. 백랍으로 빚은 것 같은 희고 갸름한 얼굴 생김이 빛바래지 않고 보존되는 액자 그림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실내 정원에 꽃이 가득한 것도 보았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꽃향기가 풍겨 와 안을 들여다보니 갖가지 꽃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꽃이라는 말에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던 카를로타가 손을 멈췄다. 보기 드물게도 그녀는 의심하듯 물었다.
“그가 1층의 정원을 가꿨다는 말인가?”
“전과 달리 천장에 색색의 등잔까지 달아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바닥을 뒤덮고 있던 덩굴도 모두 사라지고 마른 잎들과 거미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양이는 카를로타가 쓰다듬던 것을 멈추자 그녀의 손바닥에 머리를 댔다. 주세페는 카를로타가 고양이의 머리에 손을 올린 채 생각에 잠기자 얘기했다.
“묘지같이 삭막하던 그 저택에 정원을 만들다니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답지 않지 않습니까?”
카를로타는 어린 시절 조반니에게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렸던 조반니는 꽃이며 풀을 밟고 다니길 좋아해 흙발로 제자리를 뛰며 꽃잎과 줄기를 뭉개고 짓이기는 장난을 즐겼다. 말을 알아들을 나이가 돼 어머니가 꽃과 나무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타이르자 조반니는 이렇게 반박했다.
[이렇게 아무 데나 피어서 발에 밟혀도 아무 소리 못 하잖아요. 꽃이 제 발을 피해 도망 다니면 덜 밟고 다닐 수 있을 거예요.]
한 살이 되기 전에 문장으로 말할 줄 알았던 조반니가 이런 반박을 한 것은 세 살 무렵이었다. 걸음마를 하게 되자 조반니는 거미에서부터 개미, 나비에 이르기까지 바닥을 기어 다니거나 날아다니며 움직이는 것들은 신발로 때리거나 무거운 물건으로 깔아뭉개며 괴롭히기 일쑤였다. 집 안의 화분도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에 꽃이며 잎줄기를 천 조각처럼 갈가리 잘라 놔 조반니를 돌보던 유모가 비명을 지르는 일은 흔했다.
그러니 아마 3층 저택의 정원을 스스로 가꾼 것은 아닐 것이다.
“알피에리 대위에게서 그것 외에 특이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나?”
“‘한밤중의 포도주’라는 이름을 가진 살라티코 거리의 어느 술집의 급사로 일한다고 합니다. 늦은 밤 시간대에 그곳에서 일을 하고 일이 끝나면 저택으로 돌아가는 모양입니다.”
“로사티 거리의 하숙집은 어떻게 되었는가?”
“편지를 전해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들러 확인했습니다. 시일 내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듯합니다.”
오래전의 편지에서 조반니는 자신의 저택에서 로사티 3번가로 거처를 옮긴 것에 대해 저택의 관리를 문제 삼았다. 혼자서 큰 저택을 관리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체사레가 확인해 본 결과 본래 하숙집의 3층에 살던 사람은 조반니의 제안으로 집을 비워 준 것이었다. 내고 있던 집세의 열 배에 달하는 돈을 제안받았다고 설명한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조반니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이야기했다. 하숙집의 경관이 마음에 든다고 말한 조반니는 거금을 제시하며 여러 차례 부탁을 했다고 했다.
바치시 축제 날 제6군단의 부대를 방문한 이후 로미오의 존재를 알게 된 카를로타는 하숙집에 화재가 난 날 아침 그 소식과 함께 조반니가 로미오를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가 뜻을 함께할 새로운 올빼미를 무사히 굴속으로 들여보냈다는 소식도 편지로 전해 들었는데 그 인물이 로미오라는 것도 알게 됐다.
조반니가 입회를 추진한 자도, 현재 그의 저택에서 함께 살고 있는 자도, 하숙집의 2층에 살았던 자도, 시 축제 날 제6군단의 부대 내에서 얼굴을 마주했던 자도, 오래전 조반니를 취조했던 자도 모두 로미오였다. 편지 속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다가 늦은 밤 술집에서의 갑작스러운 만남을 통해 조반니의 입으로 직접 이름을 전해 들은 인물.
조반니가 그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다고 믿지는 않았다. 조반니는 사랑에 눈멀 수 없었다. 사랑은 그를 마비시킬 수 없었다.
로미오라는 이름의 그 퇴역 장교를 어린 시절 흙발로 짓밟았던 이름 모를 들꽃 같은 존재로 여긴다면 오랫동안 미뤄 온 대업을 매듭짓는 순간 뭉텅뭉텅 잎사귀와 줄기를 잘라 뒤뜰에 내버릴 것이다. 시들어 썩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가차 없이 버려 버릴 것이다.
“알피에리 대위를 계속 지켜보게. 그자의 동생이라는 그 아이도. 단, 말을 걸거나 가까이 다가서는 안 되네. 오늘 이후로 편지는 반드시 직접 전해 주도록 하며 그자와 그자의 동생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지 말게.”
“알겠습니다, 통령 각하.”
로미오에게서 좋은 파수꾼이 될 자질을 본 한편 그에게 개인적인 욕심이 있지 않은지 의심했던 카를로타였다. 공화국의 역사에 이름을 새기고자 하는 욕심으로 조반니와 손을 잡은 것이라면 로미오의 과욕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관한 의문을 제기한 편지를 보냈을 때 조반니는 단호한 대답을 써 보냈다.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한 가지 예측할 수 없는 점이 있다면 조반니가 로미오를 편지에서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껏 조반니는 연인이라고 여겼던 자들을 편지 속에서 늘 먼저 이야기했다. 그들을 소중히 여기고 공을 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사는 친구에게 새로 산 장난감에 대해 자랑하듯 그들의 이름을 언급했다. 여름에 보낸 편지 속에 언급되었던 인물은 계절이 한 번 바뀌고 나면 두 번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조반니가 일부러 편지 속에서 언급을 피했던 것은 그의 의도이며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 * *
책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책방 주인이 높은 계단에 올라앉아 책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래된 종이 냄새는 나무 냄새와 비슷했기 때문에 마치 커다란 숲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책방에 올 일이 많지 않은 로미오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이곳까지 찾아왔는데 여기까지 오는 길에 발을 헛디디고 넘어져 바지 무릎이 지저분했다. 손으로 털어 정리했지만 꼼꼼히 털어 내지 못해 얼룩이 아직 남아 있었다. 너무 오래 길을 헤매 진이 빠질 법도 했지만 구할 책이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바치에서 가장 큰 책방을 찾은 것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길을 물은 사람만 일곱 명이었는데 그중 세 명은 직접 데려다주겠다며 목적지를 물었다.
“어서 오쇼. 찾는 책이 있는감?”
사다리 위에 앉아 책을 정리하고 있던 주인이 로미오의 머리 위에서 물었다.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해부학서를 아십니까? 저자의 이름은 모르고 제목만 알고 있습니다.”
사람 키의 세 배에 달하는 높은 선반에 책을 꽂던 주인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에 그 책을 찾는 분이 계셨소. 워낙 오래된 책이라 바치 내의 서적상 중에 그 책을 취급하는 서적상은 아마 없을 거요.”
“그 책을 찾으셨다는 분이 혹시 푸치아노 대학교의 교수님이셨습니까?”
“어떻게 아는감? 그분도 그 책을 구할 방법을 묻기에 적어도 이 책방에서는 취급하지 않는다고 알려 줬소. 바치 도서관에도 들려 그 책을 찾아본 뒤에 여기 들렀다는데 도서관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했었지, 아마?”
오늘 아침에 듣자 하니 조반니는 열두 번째 해부학서 집필을 위해 그 책을 구하는 중이라고 했다. 명저라고 정평이 나 있는 책이지만 너무 오래된 데다가 저자가 루바노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 책을 구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돈은 얼마가 됐든 치르겠습니다.”
“희귀한 필사본이나 지금은 구할 수 없게 된 고문서를 수집하는 사람이라면 갖고 있을지도 모르오. 그런 사람들에게 부탁하면 한 권쯤 줄 줄 누가 아는감? 아무튼 여기엔 그 책이 없으니 다른 데를 찾아가 보쇼. 나도 구경해 본 적 없는 책이요.”
로미오는 그 책을 구하는 것으로 조반니에게 보답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의사인 조반니나 교수인 갈릴레아도 구하지 못한 책이었다. 바치의 도서관에도 없다면 외국으로 눈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무슨 수로 루바노 밖에서 그 책을 찾는단 말인가. 저자의 이름을 안다 해도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았다.
“아이고, 위원님. 마침 오셨네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이나 내일 들러 주실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예, 예.”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서자 주인이 반색을 하며 사다리 아래로 쫓아 내려왔다. 책방으로 들어선 것은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옷을 걸친 노인이었는데 비서인지 집사인지 모를 젊은 사내를 대동하고 있었다. 뒷짐을 진 채 배를 내밀고 들어선 노인은 등 뒤로 맞잡은 양손에 반지를 주렁주렁 끼고 있었다. 웃옷 자락에 가린 신발 굽에도 금 자수가 촘촘히 수놓아져 있었고 그 굽을 덮고 있는 옷 끝자락에도 사치스러울 정도로 정교한 오색 자수가 수놓아져 있었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그 책을 찾으러 오셨습니까요?”
비록 백발이 허옇지만 풍채만은 좋은 노인은 튀어나온 배를 한껏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만. 준비가 다 되었는가?”
“이거 면구스러워서 어쩝니까? 아직 준비가 돼 있지 않았습니다. 딱 하루! 하루만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굽실대던 책방 주인은 노인의 등 뒤에 선 그의 비서를 곁눈질했다. 이곳에 올 때마다 늘 비슷한 나이대의 젊은 사내를 대동하고 오는 노인은 책값을 치르는 등의 자잘한 일을 비서에게 맡겼다. 신기한 점은 올 때마다 비서가 바뀌어 있다는 것이었다. 더 신기한 점은 그 바뀌는 비서들이 하나같이 검은 머리에 파란 눈을 갖고 있어 언뜻 한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무슨 문제가 있어 옷을 갈아입듯 변덕스럽게 비서를 갈아치우는지는 모르지만 비서들이 전부 비슷하게 생겨 열 번째부터는 바뀌는 횟수를 세는 것을 그만뒀다.
“으흠, 그 책을 위해 서재 한가운데에 자리를 떡 하니 마련해 두었는데 말일세. 책이 평소보다 늦게 들어오는 이유가 있는가?”
“아, 예. 최근 들어 제지업자들 간에 분쟁이 일어나 수공업자 협회에서 중재를 하는 중이라 그렇습니다.”
고문서나 책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인 노인은 31인 위원회 중 한 사람으로 이 책방의 오랜 단골이자 지금껏 가장 많은 책을 사 간 귀한 손님이기도 했다. 자신의 저택을 장서로 빼곡하게 꾸며 놓고 산다고 들었는데 그의 목적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모으는 것이었다. 책방의 매상고를 책임져 주는 대단한 부호인 데다가 31인 위원회 중 한 사람이다 보니 주인이 비위를 맞추는 것은 당연했다. 갖고 싶은 책은 서적 제작에 필요한 필경사와 서적 채식사들을 수십 명씩 고용해서라도 꼭 구하고 마는 노인은 비위만 잘 맞추면 더할 나위 없이 너그러웠다.
“그리 급한 일이 아니니 서두르지 말게. 그보다 오늘은 다른 책이 필요하네. 일전에 자네가 말한 그 고서 말일세. 아주 오래전에 어느 문필가가…….”
노인은 말을 하다 말고 책장 틈에서 빠져나온 로미오를 보고 말을 멈췄다. 주인에게 목례를 한 뒤 곁을 스쳐 지나간 로미오는 손으로 벽을 더듬어 문 쪽으로 걸어갔다.
노인은 주름져 흘러내리는 눈꺼풀을 한껏 끌어 올리며 입을 벌린 채 로미오를 쳐다봤는데 그러는 동안 눈동자에는 광채가 어렸다. 가죽만 남은 뺨이 흥분으로 움찔움찔 떨리기도 했다.
“저번에 말씀하신 고서라면 어떤 책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이것 참, 제가 깜빡깜빡하는 것이 습관이라 죄송스럽습니다. 문필가라면 어떤 문필가를…… 위원님?”
손으로 벽을 더듬어 문을 찾던 로미오는 문이 아니라 엉뚱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노인의 입가에는 서서히 미소가 걸렸다. 들뜬 어린아이처럼 주름진 입술을 모아 오오, 하고 소리 없는 감탄한 노인은 로미오가 지팡이로 바닥을 쓸며 문의 위치를 찾자 잰걸음으로 다가가 얼른 문을 열어 주었다.
“이리로 나가시게. 문은 이쪽에 있네.”
문손잡이에 손을 대면 죽는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늘 뒷짐을 지고 다니며 비서가 먼저 문을 열어야만 들어가거나 나가는 노인이었다. 그가 문고리를 직접 당긴 것으로도 모자라 문을 잡아 주기까지 하자 책방 주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인의 비서만이 바닥을 향해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감사드립니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로미오가 인사하자 가까이서 로미오의 얼굴을 본 노인은 다닥다닥 붙은 누런 이를 훤히 드러내며 얼굴 가득 웃음을 띠었다. 그는 로미오가 밖으로 나가자 유리 너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책방 주인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로미오는 책방을 나와 로사티 거리가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숙집에 들러 집이 얼마나 복구되었는지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가능하다면 3층도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조반니 역시 시일 내로 그곳으로 돌아가려 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로미오! 기다리고 있었어.”
로사티 1번가로 들어서자 발레리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멀리서 로미오가 알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치더니 가까이 다가와 무릎부터 털어 줬다.
“무릎에 뭘 묻히고 다니는 거야?”
“글쎄 말입니다…….”
넘어졌다고 말하기가 겸연쩍어 로미오가 대답을 둘러대자 발레리아는 흙이 묻은 신발도 털어 줬다.
“넘어졌군? 어디 들렀다가 오는 길인가 보지?”
“책방에 들렀다가 왔습니다.”
“멀리 갈 일이 있다면 다음부터는 내게 부탁해. 남는 것이 시간이니 어디든 같이 가 줄게. 그런데 무슨 볼일이 있어 책방에 들렀어?”
지팡이를 거둔 로미오는 발레리아의 팔꿈치를 잡고 그녀의 안내를 받았다.
“혹시 ‘인체의 해부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책을 아십니까? 저자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아주 오래된 해부학서라는 것은 압니다. 누이께서 의사라고 하시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쭤보는 겁니다. 그런 비슷한 제목의 책을 누이분의 서재에서 보셨거나 아니면 책 제목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글쎄. 들어 본 적 없어. 나는 장난으로라도 의학서를 볼 일이 없어서 말이야. 그런데 해부학서라니? 그런 걸 읽고 있어?”
“아니요. 스포르차 선생님께서 구하고 계신 책입니다. 구하기 힘드신 것 같아 제가 대신 알아보는 중입니다.”
“돌아가거든 물어볼게. 갖고 있지 않은 책이라면 구할 수 있는지도.”
“그래 주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발레리아는 오랜만에 만난 로미오의 얼굴이 나빠 보이지 않자 슬쩍 물었다.
“스포르차 선생의 집에서 함께 사는 건 어때?”
그녀는 로미오와 엔초의 사정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간 로미오가 별 탈 없이 잘 지낸 것처럼 보이자 미리 안심했다. 집이 있었다면 흔쾌히 로미오와 엔초에게 방을 내줄 테지만 그녀도 얹혀사는 사정이라 두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못해 애석해하고 있었다.
“그래? 엔초가 그 저택을 마음에 들어 한단 말이지?”
“선생님께서 엔초에게 신경을 써 주신 덕분입니다. 엔초와 단둘이서 함께 살 때는 알지 못했지만 선생님의 댁에서 머무르니 제가 엔초를 키우기에 부족한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선생님께서 부지런한 분이시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늘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시고 밤늦게까지 책을 읽거나 지하실에서 연구하시는 것을 보면 얼마나 열성적인 분이신지가 느껴집니다.”
“불편함이 있을 줄 알았는데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야.”
‘불편함’이라는 말에 로미오는 조반니의 수음 사건을 떠올렸다. 현장을 목격한 것이 아니니 사건이라고 하기에 뭣하지만. 발레리아가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괜히 헛기침이 나오며 자신의 표정을 신경 쓰게 됐다.
생각을 돌리기 위해 화제를 바꾸려는데 발레리아가 물었다.
“먼젓번의 그 일은 어떻게 된 거야? 자코모라는 이름의 조각가가 살해당한 일 말이야. 네 말대로 정말로 공안국이 찾아왔더군. 범인을 찾고 있는 중인 건가?”
“예. 한데 단서가 부족한 데다 목격자가 없어 범인을 잡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합니다.”
“어제 마르코를 만났는데 마르코도 조사를 받았다고 했어. 너와는 관계없는 일이 맞는 거지?”
“걱정 마십시오. 저는 무관합니다. 스포르차 선생님께서 의심을 받고 계신 터라 범인이 잡히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숙집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옅은 탄내가 떠도는 집 안은 화재가 났던 날 그 모습 그대로였다.
“왔어이?”
그라나 부인은 집을 정리 중이었던 지라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로미오는 그녀가 옮기고 있던 물이 든 양동이를 들어 주며 물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부인? 이곳에서 지내는 건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어이. 매일 청소를 하니 벌써 이렇게 말끔해졌지 않우? 이제 좀 내 하숙집 같어이.”
“괜찮다면 2층에 올라가 집 안을 살펴봐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우. 올라가서 살펴보고 가져갈 물건이 있으면 가져가도 된다우.”
발레리아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가자 2층에서 탄내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화재 이후 하숙집에 처음 와 본 발레리아는 바닥의 탄 자국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세상에……”
로미오는 벽을 더듬지 않고 능숙하게 집 안을 걸어 다녔다. 오랫동안 비워 둬 냉기가 도는 집 안은 다행히도 무너지거나 기울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만하길 정말 다행이야. 너와 엔초가 다치지 않은 것만 해도 정말 운이 좋았어.”
“맞어이. 다들 무사한 걸 생각하면 하늘이 도운 일이 아닐 수 없어이. 불길이 조금만 거셌어도 어떻게 되었을지, 쯧쯧.”
“제가 그날 밤 탄내를 맡고 잠에서 깨 다행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깊은 잠에 빠져 계셨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네가 3층으로 올라가 스포르차 선생을 데리고 나왔다지?”
“올라간 것은 맞지만 오히려 선생님께서 집 밖으로 저를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거실에 불이 크게 번져 있어서 선생님께서 저를…….”
조반니가 자신을 안고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고 얘기하려던 로미오는 입을 다물었다. 순간 또다시 조반니의 수음 사건이 떠올랐다. 눈을 굳게 감으며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발레리아가 걱정스레 말했다.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우선 밖으로 피해. 불이 크지 않았길 망정이지 하마터면 집 안에 갇혀서 나오지 못했을 거야. 스포르차 선생은 불길쯤은 혼자 뚫고 나오실 분이니 그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선생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불같은 건 무섭지 않으니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그는 정말로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야. 너와 엔초가 무사한 게 가장 중요하니 무슨 일이 생기거든 남 생각은 말고 몸부터 챙기도록 해.”
“예. 꼭 그러겠습니다.”
닫힌 방문을 전부 열어 방 안을 확인한 로미오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라나 부인이 매일 청소를 해 창틀이며 문손잡이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고맙습니다, 부인. 어제 하루 잠깐 비운 것처럼 집이 깨끗하군요.”
“내 집이니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우. 어서 이 집으로 돌아와 전처럼 다 같이 살 수 있다면 그것만큼 또 좋은 일이 어디 있어이?”
“집의 상태를 보니 곧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층으로 올라가 선생님의 집도 둘러보겠습니다.”
위층으로 올라가니 탄내는 더 짙었다. 연기가 자욱했던 계단 통로는 이제 말끔했지만 조반니의 집 문을 열자 문고리가 삐거덕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얼굴 가득 끼쳐 오던 불길을 기억하는 로미오는 그날 조반니가 얼마나 위험했던가를 다시금 상기했다. 발레리아에게는 스스로의 몸부터 챙기겠다고 대답했지만 다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때와 똑같이 이 문을 열고 들어갈 것이다.
“불이 여기서 시작된 건가?”
그을린 바닥을 뜯어내고 새로 덧대 화재의 흔적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지만 천장의 그을림은 그대로였다. 불길이 손자국을 남기듯 거실 전체를 휩쓸고 지나간 탓에 검게 탄 자국이 군데군데에 남아 있었다.
“공안국에서는 이곳에서 난 불이 아래층으로 번졌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중입니다.”
“원인에 대해서는 뭐라고 했지?”
“양탄자에서 불이 시작됐으나 어떤 경위로 불이 붙기 시작했는지는 모른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도 불이 될 만한 것을 양탄자 위에 올려놓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화재 당시 바닥과 양탄자가 완전히 타 버려 원인을 밝히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발레리아가 거실을 걸어 다니며 바닥을 확인하는 동안 로미오는 벽을 더듬으며 집 안을 돌아다녔다. 조반니가 이곳으로 돌아와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지 벽의 높은 곳까지 손을 뻗어 만져 보고 창문도 여닫았다.
“아, 그렇지. 그자는 어떻게 됐어? 너를 골목에서 습격했던 정체불명의 사내 말이야. 우초 경사가 그 일을 담당했다고 하지 않았나?”
“잡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목격자를 수소문했지만 그날 일을 목격한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근거 없는 추측이지만 혹시 자코모라는 조각가를 살해한 자와 너를 습격했던 자 간에 연관성이 있지 않겠어? 지금껏 전례가 없었던 일이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데다 두 사건 다 목격자가 없다는 점이 미심쩍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이 도시를 돌아다니는 법을 잘 아는 자의 소행이 아닐까?”
“저도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만 습격을 받을 당시 저는 자코모라는 분과 아는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범인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 다니는 법을 잘 아는 자라는 추측에는 동의합니다. 우초 경사도 그자가 골목을 통해서만 다녔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바치 시내의 골목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빠져나오기가 힘들 정도로 미로 같은 공간이라 만약 그렇다면 범인은 바치 시내의 밀집된 건물과 좁은 골목은 물론 도심 전체의 전경을 본뜬 지도라도 갖고 있어야 말이 됩니다. 그런 것을 갖고 있지 않다면 비상하게 머리가 좋아야만 가능합니다.”
조반니의 집을 나와 벽을 짚으며 계단을 내려가던 로미오는 손끝에 뭔가가 걸리는 것을 느끼고 멈춰 섰다. 고르고 판판해야 할 벽에 작은 홈이 파여 있었다. 3층의 계단 머리였다.
“왜 그래?”
“여기에 뭔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손바닥으로 넓게 더듬어 보니 홈은 네모난 모양으로 파여 있었다. 날카로운 물건으로 별 의미 없이 긁어 놓은 게 아니었다.
“뭐지 이게?”
발레리아도 손으로 그 부분을 만져 보곤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스쳐 지나가듯 눈으로 보면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미세했지만 더듬어 보니 알 수 있었다. 손으로 힘을 줘 벽을 누르자 사람의 얼굴 반절 크기만 한 나무 벽이 그 너머의 빈 공간으로 천천히 밀려 들어갔다.
벽은 그릇이나 상자 따위를 덮는 덮개처럼 구멍을 막고 있었다.
“누가 벽에다 이런 짓을 해 놓은 거지? 이건 단순히 칼집을 파 놓은 게 아니야. 벽이 뒤로 밀리고 있어.”
벽이 뒤로 전부 밀리자 발레리아는 텅 빈 공간 아래로 빠지지 않도록 벽을 덜어 냈다. 예리하고 정교한 것으로 반듯하게 잘라놓은 벽은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만큼 크기가 작았다.
“이게 대체 뭐지? 잠깐, 이 너머에 뭔가가 있어.”
“벽 안쪽에 말입니까?”
“꺼내 볼게.”
벽 안으로 손을 넣은 발레리아는 둘둘 말린 검은색 망토를 꺼냈다.
“이건 망토잖아.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의아한 얼굴로 발레리아의 말을 듣고 있던 로미오는 순식간에 딱딱하게 표정이 굳어졌다. 발레리아는 뭉쳐진 망토를 넓게 펼치더니 의혹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무슨 망토지?”
“……어떤…… 망토입니까? 망토가 무슨 색입니까?”
“검은색이야. 모자가 달렸어. 길이가 아주 긴 것으로 봐 여자의 것은 아니야.”
발레리아가 망토를 자세히 살펴보는 동안 로미오는 손끝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끼고 숨을 멈췄다.
“이 옷을 넣기 위해 벽을 파 넣어 둔 건가? 설마하니 스포르차 선생이 이런 괴상한 짓을 했을 리는 없고. 그라나 부인, 이 망토가 벽 속에서 나왔는데 혹시 아십니까?”
아래층에서 청소 중이던 그라나 부인이 올라오자 발레리아는 망토를 넓게 펼쳐 보였다. 키가 큰 편인 그녀도 팔을 높이 들어야 할 만큼 긴 망토는 끝자락이 바닥에 닿지 않고 흔들렸다. 허리 부근에 옅은 핏자국이 묻어 있었는데 망토가 찢기거나 베인 자국 없이 깨끗해 발레리아는 그 핏자국을 눈치채지 못했다.
“망토? 그게 어디서 난 것이우?”
“이 벽에서 나왔습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중에 이런 모양으로 뚫려 있는 벽을 발견했습니다.”
그라나 부인은 잘려 나간 벽을 보더니 보기 드물게 호통을 쳤다.
“누가 내 집에 이런 짓을 했어이!”
로미오는 발레리아에게서 망토를 가져갔다. 손으로 더듬어 모자를 확인한 뒤 망토의 냄새를 맡았다.
이 냄새가 맞았다. 한시도 잊어 본 적 없었다. 그자의 냄새였다.
숨이 거칠어지며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마치 눈앞에서 검은 망토의 사내와 마주친 것만 같았다. 이건 틀림없이 그자의 망토였다. 이게 어떻게 여기 있단 말인가!
“부인께서는…… 부인께서는 모르시는 망토입니까?”
“모른다우! 이런 건 본 적도 없어이. 도대체 누가 벽에다 이런 짓을 했단 말이우?”
“이런 구멍이 있는 것도 모르셨습니까?”
“몰랐어이. 누구든 이런 짓을 하는 자가 있었다면 내가 그 자리에서 혼쭐을 내줬을 것이우!”
로미오는 손으로 벽을 더듬었다. 검은 망토의 사내가 자신을 겁탈하기 위해 이 집에 침입했던 날 벽을 뚫고 망토를 넣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따져 봤으나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어쩌면 그날이 아니라 다른 날 이 집에 침입해 넣어 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하숙집이 불에 탄 후 2층과 3층이 비어 있는 것을 알고 경고성으로 이 집에 숨어들어 옷을 감춰 두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집과 자신의 동태를 계속 지켜봤을 것이다. 어느 쪽이었든 그자가 이곳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고 생각하자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기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벽을 뚫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 벽을 뚫는 동안 이 집에 드나드는 모든 이들에게 정체를 들킬 가능성이 전방에 도사리고 있었다.
자신을 한 번 더 겁탈할 마음을 먹을 경우 망토를 수거해 가는 데에 막대한 위험이 따랐다. 똑같은 망토가 두 벌이 아닌 이상 범행을 위해선 반드시 이 집으로 들어와 이 벽 속에 숨겨 둔 망토를 가져가야 했다. 이곳까지 올라오기 위해서는 1층의 그라나 부인의 눈을 피해 집으로 들어선 뒤 발소리를 죽이고 계단을 올라와야 했으며 그렇게 한다 해도 3층에는 엄연히 사람이 살고 있으니 모든 일은 은밀히 진행해야 했다. 만약 화재 이후 집으로 침입해 망토를 숨겼다면 화재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밤낮없이 이곳을 드나드는 공안국의 눈을 피해야 했을 것이다.
벽을 뚫은 시기는 차치하고,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이곳에 망토를 숨겨야 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가령 검은 망토의 사내가 여기에 망토를 숨기는 것보다 그의 집에 숨기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다면?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의 집 바닥 밑에 이웃의 시체를 숨기는 것보다 내가 살해한 그 이웃의 가족이 살고 있는 집에 시체를 숨기는 것이 더 안전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혹시 그자에게 이 집을 더 안전하게 느낄 만한 중대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로미오, 왜 그래? 안색이 좋지 않아.”
“……혹시 망토에서 망토의 주인을 유추할 만한 단서가 보입니까?”
“그런 건 없어. 그런데 왜? 짐작 가는 게 있어? 이 망토가 무엇인데 그래?”
예컨대 이 집이 그에게 익숙한 장소이고 여기 서서 벽을 뚫던 중 누군가에게 들키더라도 적당한 응변으로 대처할 수 있다면…….
“부인. 스포르차 선생님께서 이사 오시기 전에 본래 이곳에 살던 분의 현재 거취를 아십니까?”
로미오는 긴 생각 끝에 검은 망토의 사내가 자신을 이 집에서 겁탈한 직후 벽 속에 망토를 숨겼을 거라는 가정보다 더 말이 되는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가정이었으나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입 안이 말랐다.
“그곳이 어디인지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발레리아. 저를 도와주십시오.”
* * *
“치료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앞으로는 의수 관리에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많이 녹슨 데다 오랫동안 사용해 이음매 부분이 헐겁습니다. 자칫하다간 크게 다치실 겁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오. 한데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다 보니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오. 의수 하나를 마련하는 데만 해도 적지 않은 돈이 들어 몇 날 며칠을 굶어야만 그 돈을 마련할 수 있으니, 원. 어디 돈 많은 부잣집에라도 고용이 된다면 돈이 생기겠지만 이 나라가 나 같은 용병을 쓰지 않는 까닭에 돈이 궁하오.”
“그간 모아 놓은 돈은 전부 어디에 있습니까? 세계 제일의 용병이니 떵떵거릴 만큼의 돈을 갖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용병대에 한 번 고용돼 전투에 나가면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시지 않습니까?”
“술을 마시는 데 전부 써 버렸소. 여기서 도박으로 탕진한 돈도 상당하오.”
“그래서 한 푼도 갖고 있지 않은 겁니까?”
“한심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내가 보기보다 씀씀이가 큰 편이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용병대와 계약을 한 것이 벌써 넉달 전의 일이오. 돈이 남아 있을 리가 있겠소?”
이브가 웃옷을 입는 동안 조반니는 이브의 의수를 헝겊으로 깨끗하게 닦았다. 겉에 묻어 있던 포도주 자국과 고름을 닦아 내자 의수는 녹이 슬었지만 그런대로 튼튼해 보였다. 비싼 값을 치른 것인지 이음매 부분도 정교했고 크기도 이브의 몸에 잘 맞았다. 어깨에 매달고 다니기에는 많이 무거웠지만 이브는 능숙하게 철 의수를 어깨에 얹고 가슴 끈을 몸에 고정했다.
“당분간 오른쪽 어깨는 움직이지 않는 게 좋습니다. 붕대는 내일 중으로 풀어 주시면 됩니다. 도와드릴까요?”
“여기를 묶어 주쇼.”
등 뒤의 끈을 조정하는 동안 이브가 어깨를 돌리며 의수를 움직이자 조반니가 의사다운 잔소리를 했다.
“어깨를 움직이시면 상처가 다시 터질 겁니다. 밤잠을 편히 주무시려면 윗몸에 오른팔이 붙었다는 생각으로 팔의 쓰임을 최소화하셔야 합니다.”
이브는 잠자코 팔을 내려놓고 병실을 둘러봤다. 수도에서 가장 큰 병원답게 환자들이 넘쳐나 치료를 받는 동안 복도에 오가는 발소리가 여럿 들렸다. 다급한 간호인들의 외침도 들렸고 창문 너머에서는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고맙소. 그 지독한 통증이 이렇게 씻은 듯이 나았으니 오늘부턴 편히 잠들 수 있겠소. 정말로 돈을 내지 않아도 되겠소?”
“그럼요. 지난번에 약속드린걸요.”
조반니의 머리 모양이 오늘도 이상했기 때문에 이브는 이제 조반니가 저런 머리 모양을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더는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실력자들 중에 흔히 괴짜가 많은 것을 생각해 보면 머리 모양이 대수랴 싶었다.
“그 문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단테의 12인 말입니다. 여전히 그자들을 잡을 생각이신가요?”
조반니가 치료에 쓴 칼과 붕대를 정리하며 물었다.
“물론이오. 내 목적은 종신 연금이요. 다른 건 없소.”
“혹시 대위님께서 어떻게 퇴역하게 되셨는지 들으셨습니까?”
조반니는 이브가 로미오에게 관심이 있어 단테의 12인의 핑계를 대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매일같이 술집에 찾아가 로미오에게 수작을 걸 심산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연기에 능하기 때문이지 아니면 로미오에게 정말로 마음이 없기 때문인지 이브에게서 그런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듣지 못하였소만. 퇴역 전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대위님께서는 퇴역 전에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셨고 명예를 지키고자 군에서 나오셨습니다. 단테의 12을 잡기 위해 도움을 드리는 과정에서 또다시 그때의 일로 상처를 입으실까 걱정이 됩니다. 남에게 함부로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닌지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제 입으로 말씀드릴 수 없군요. 제가 멋대로 이야기한 걸 아신다면 대위님께서 크게 상심하실 겁니다. 제6군단과 관련된 일은 공연히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해 대위님을 괴롭게 만들 뿐이니 직접 대위님께 묻는 것은 삼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브는 조반니가 자세한 이야기를 꺼리는 것 같자 나름대로 추측을 했다. 물론 그렇다고 종신 연금에 대한 집착이 사그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뭣하면 제가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당신 같은 평범한 의사가 내게 어떻게 도움을 준다는 말이오?”
“저는 제6군단의 부대로 끌려가 조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경험이지만 약간의 정보를 드릴 수 있을 듯한데 어떻습니까? 제가 도움을 드리면 갈고리 고양이 술집으로 찾아가는 것을 그만두시겠습니까?”
시종일관 웃는 얼굴에 목소리에도 항상 부드러움이 묻어 나왔지만 조반니는 마지막 말을 하며 스르르 미소를 거뒀다. 미묘했지만 어조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말끝도 빨랐다.
“약속하셔야만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약속하시겠습니까?”
웃지 않는 조반니는 다소 매서운 눈으로 이브를 쳐다봤고 그의 그런 태도는 첫인상과 많이 다른 데다 상대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브는 그녀 특유의 편파적인 무신경함으로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저었다.
“여러 번 부탁해 봐야 소용이 없는 상대라면 나도 더 이상 목맬 필요가 없소. 로지오를 귀찮게 만들 생각은 없으니 그 점은 걱정 마쇼. 오늘 마지막으로 찾아가 보고 또 거절당한다면 다시는 찾아가지 않을 생각이오.”
조반니는 이브가 로미오의 이름을 부르자 눈가를 가늘게 뜨며 입가의 근육을 씰룩댔다. 그녀는 지난번에도 분명 로미오를 이름으로 불렀다. 이름으로 부를 만큼 친하다면 역시 멀리 치워 버리는 게 좋았다.
“그런데 내게 어떤 도움을 줄 거요? 단테 놈들의 은거지에 대한 정보라도 줄 참이오? 그만한 정보라면 내가 빚을 져서라도 당신에게 답례를 하겠소.”
“은거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건 제6군단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전 그들이 골목 곳곳에 붙이는 벽보를 노리는 게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벽보를 부착한 자는 그 자리에서 즉시 체포됩니다. 바치 시내의 뒷골목에서 끈질기게 기다리다 보면 그들 중 한 명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죄 없는 시민이 그들의 꾐에 속아 대신 벽보를 붙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혹시 모르지요. 현장에서 덜미를 잡았는데 그자가 단테의 12인이라면 밀고한 것으로 인정돼 종신 연금을 받으실 겁니다.”
“벽보라면 내가 일전에 한 번 발견한 적이 있소. 그게 그놈들이 붙이는 것이었군. 그런데 당신은 무슨 일로 제6군단에게 조사를 받았던 거요?”
“제가 가르치던 학생 하나가 벽보를 소지한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었습니다. 연루된 모든 이들이 조사를 받는 것이 원칙이라 제가 가장 먼저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 나라도 참 성가신 놈들을 적으로 두고 있는 모양이오. 그래서 어떻게 됐소?”
“저는 결백이 입증되어 풀려났고 제가 가르치던 학생은 고문 끝에 죽었습니다.”
풀려났다는 대답을 할 줄 알았던 조반니가 죽었다고 이야기하자 이브는 붉은 눈을 크게 떴다. 조반니는 오늘 아침으로 닭고기 수프를 먹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으나 고문 끝에 죽었다는 말은 어떻게 들어도 단조롭게 말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내가 괜한 걸 물은 것 같소…… 미안하오.”
“괜찮습니다. 그러면 제가 정보를 드렸으니 이제 대위님을 찾아가지 않으시겠지요? 약속하신 겁니다.”
이브가 막 대답하려는데 인상을 찌푸린 조반니가 돌연 창가를 돌아봤다. 코를 막은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창가로 다가갔다.
“무슨 냄새가 나지 않으십니까?”
“무슨 냄새를 말하는 거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소.”
이브는 고개를 저었지만 조반니는 팔로 자신의 코와 입을 가리더니 이브에게 헝겊을 건넸다.
“입과 코를 막고 병실에서 나가십시오. 어서요.”
갑작스레 다급해진 그의 반응에 이브는 의아한 얼굴로 병실을 둘러봤다.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오? 냄새 같은 건 나지 않소.”
“이 냄새가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아무래도 정원에서 냄새가 올라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유독한 연기일 수도 있습니다. 위험하니 어서 나가세요, 어서.”
신속하게 병실의 창을 모두 닫은 조반니는 이브가 당황해 병실을 둘러보자 그녀를 손수 일으켜 병실 밖으로 내보냈다.
“왜 이러는 거요? 도대체 무슨 냄새가 난다는 것이오?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 병실에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소. 당신이 내 팔에 발라 준 그 약에서 나는 냄새를 착각한 것이 아니오?”
“아닙니다. 분명히 냄새가 납니다. 일단 이곳에서 나가세요.”
조반니는 이브를 데리고 병실을 나가더니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혼자 남은 이브는 복도를 둘러보며 공기 중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조반니는 뒤뜰에 나가 있었다. 그는 코를 막은 채 뒤뜰의 정원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느긋한 오후 햇빛이 쏟아지는 정원은 고요하기만 했다. 성하게 핀 꽃과 나무들만이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며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아무런 위협도 없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원에서 조반니는 땅속에 숨겨 놓은 먹이를 찾는 개처럼 바삐 주변을 걸어 다녔다.
“대체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요!”
이브가 정원을 향해 외쳤지만 조반니는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것처럼 손을 들어 보였다. 뜰 옆의 회랑을 지나가던 간호인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 얼른 다가왔다.
“선생님! 거기서 무얼 하고 계시는 거예요?”
“여기서 이상한 냄새가 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유해한 연기가 나는 것일지도 모르니 다른 선생님들을 불러 주십시오!”
간호인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난처한 듯 제자리를 왔다 갔다 했다. 이브는 다시 한번 코 속으로 깊이 공기를 들이마시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원을 둘러봤다.
“지난번에도 저러시더니 왜 또 저러시는 걸까……”
간호인의 혼잣말에 이브는 조반니를 말리려고 정원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가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땅만 보며 바쁘게 걸어 다니자 포기하고 간호인에게 헝겊을 돌려줬다.
“치료는 고마웠소! 돈이 생긴다면 나중에 술이라도 대접하겠소!”
이브는 정원을 벗어나며 조반니를 한 번 더 돌아봤다. 그가 허리를 숙인 채 정원을 돌아다니는 동안 제멋대로 뻗친 그의 금발 머리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볼수록 특이한 자란 말이야.”
* * *
방금 막 점심 식사를 끝낸 남자는 아래층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입을 닦았다. 방 밖으로 나가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누구쇼?”
계단을 내려가며 큰 소리로 물었지만 대답 대신 다시 한번 쿵, 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법 위협적으로 들리는 문 두드림이었다. 조용히 두드리면 그 소리조차 우아하게 들릴 정도로 고급스러운 목재를 쓴 나무 문이었다. 이 근방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좋은 저택이니 당연했다.
“누군데 이런 대낮에 이렇게…… 아니, 당신은?”
문을 연 남자는 방문객의 얼굴을 보고 떨떠름한 표정이 됐다. 찾아온 용건이 짐작되지 않아 이유를 물으려는데 방문객의 뒤로 낯선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남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옷 속에 단도를 숨기고 있었다.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으니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여자의 어투와 문을 열어젖히는 절도 있는 손짓 때문에 군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데 두 사람이 갑자기 집 안으로 밀고 들어오더니 앞뒤 상황도 설명하지 않고 문부터 잠갔다. 다짜고짜 쳐들어와 주인인 자신을 나가지 못하게 막아서는 태도에 남자는 성을 냈다.
“난데없이 이게 무슨 짓이오?”
그러나 성을 낸 직후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 무례한 방문객, 로미오가 제6군단의 장교라는 사실이었다. 군인들이 집에 들이닥치는 이유는 하나였기 때문에 덜컥 겁이 났다.
“나, 난, 단테의 12인지 뭔지 하는 놈들과는 관련이 없어! 무슨 얘기를 듣고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절대 아니라고!”
이 길로 부대로 끌려가게 될까 봐 급히 항변하는데 로미오가 눈앞에 검은 망토를 들이밀었다.
“이게 뭔지 아실 겁니다.”
“이, 이, 이게 뭐요?”
남자는 눈을 빠르게 껌뻑이며 망토를 들여다봤다. 발레리아는 그가 망토를 처음 본 사람처럼 반응하자 표정을 주시하며 주머니 속에 든 단도를 고쳐 잡았다.
“부인할 생각 말고 제대로 보십시오.”
로미오가 망토를 펼쳐 보였다. 실은 거꾸로 펼쳐 든 것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당황해 있는 남자의 눈 앞에 들이밀었다.
“이건 망토 아니오? 이게 누구 것인데 내게 묻는 거요? 이건 내 것도 아니고 난 누가 이런 걸 입는 것을 본 적도 없어! 어디서 난 망토인데 갑자기 찾아와서 이러는 거요?”
발레리아가 남자의 표정을 살핀 뒤 로미오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리는 것으로 신호를 주자 로미오가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백한다면 형벌이 가벼이 내려질 겁니다. 당신이 이 망토를 입고 그간 한 일을 전부 알고 찾아왔으니 사실대로 이야기하십시오.”
발레리아는 로미오에게 지시받은 대로 남자에게 망토가 맞을지 눈대중으로 가늠했다. 그러나 그에게 망토는 어깨에 걸칠 경우 바닥에 쓸릴 정도로 길었다. 무엇보다 그의 머리는 완벽한 금발이 아니었다. 노르스름한 빛이 도는 갈색이었기 때문에 남자의 머리 색이 금발이 맞는지 확인해 달라던 로미오의 말에 부합하지 못했다. 머리를 물들이는 것은 흔했으므로 그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었지만 머리털의 상태를 볼 때 염료를 먹인 흔적은 없어 보였다.
“죄를 어서 시인하십시오. 당신이 이 옷을 입고 밤거리를 걷는 모습을 목격한 자가 있습니다. 비 오는 날 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거짓말할 셈입니까?”
“알아듣게 얘기하쇼! 대체 이 망토가 무엇인데 이러는 거요? 난 이 망토가 무엇인지 모르고 입은 적도 없어! 이 비슷한 옷을 갖고 있지도 않아. 로사티 하숙집을 떠나온 이후 그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이곳으로 옮겨 올 때 내 물건을 빠짐없이 모두 가져왔는데 대체 이게 어디서 발견됐다고 내 옷이라고 확신하고 이러는 거요?”
“같은 말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전부 알고 찾아온 겁니다. 여기서 자백하지 않을 경우 추가적으로 발견된 증거를 공안국에 가져가 알리겠습니다. 당신은 절대 사형을 면할 수 없을 겁니다.”
로미오가 질문하는 동안 발레리아는 남자의 반응을 면밀히 살폈다. 그의 눈빛, 입매의 움직임, 숨소리, 목소리의 변화. 그러나 남자는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망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데 범인으로 몰리고 있어 울분에 가까운 억울함을 느끼고 있었다.
“나 정말 돌아 버리겠군! 이 건 내 옷이 아니오! 목격자가 있다니 도대체 무슨 목격자가 있다는 것인지도 이해되지 않고 비 오는 날밤의 일이라니, 그것도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소! 난 평범한 이 나라의 시민이요. 공화국의 체제에 순응해 살아가고 있는 내게 도대체 왜 이런 잘못을 뒤집어씌우는 거요? 난 단테의 12인과 관계되지 않았어! 이 망토는 생전 처음 보는 거란 말이오!”
남자는 절박한 심정이 돼 머리를 감싸 쥐었지만 로미오가 품에서 단도를 꺼내 턱 밑에 들이대는 바람에 고개를 뒤로 물리며 뒷걸음질쳐야 했다.
“이익, 힉……!”
“마지막으로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자백하십시오.”
“난 아니라고! 아니야! 이 옷이 어떤 옷인지 모른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거요?”
“지금 당장 목격자를 불러와 당신을 추궁하겠습니다. 당신이 내게 한 짓에 대해 모두 밝혀낼 겁니다.”
“무엇을 밝혀내겠다는 거요! 난 아무 짓도, 으익……!”
로미오가 턱 바로 밑에 칼날을 들이대자 남자가 비명을 지르듯 목소리를 높였다. 칼끝에 찔리지 않기 위해 고개를 한껏 쳐든 그는 뒤로 물러서는 것도 잊은 채 절박하게 고함쳤다.
“믿어 주시오! 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어! 이 망토는 정말로 모르는 일이오!”
비명에 가까운 호소를 하는 남자는 턱을 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반응에 꾸밈이나 거짓이 없음을 확신한 발레리아가 다시 한번 어깨를 두드리며 신호를 줬다. 그러자 로미오는 단호하고 매섭던 눈빛을 거두고 단도를 내렸다. 경직돼 있던 입매가 풀리자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돌아왔다.
“……미안합니다. 오늘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 주십시오. 실례가 많았습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 당장이라도 집 밖으로 끌어낼 것처럼 윽박지르던 로미오가 순식간에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 돌아서자 남자는 겁에 질린 한편 황당한 표정이 됐다.
집 밖으로 나온 로미오는 손에 들린 망토를 꽉 쥐었다. 혼란스러움에 고개를 떨구고 이마를 감쌌다.
“괜찮아?”
발레리아가 부축하자 로미오는 길 한편으로 물러섰다. 어두운 표정을 한 그는 숨소리가 고조돼 있었다.
“이 망토가 무엇인데? 내게 말해 줄 수 없는 거야? 비 오는 날 밤의 일은 또 무슨 이야기야?”
발레리아는 자세한 사정을 듣지 못하고 로미오가 부탁한 대로 그와 함께 이곳으로 와 그가 지시한 대로 했다. 로미오의 반응을 보니 이 망토와 관련해 어떤 사연이 있는 것 같았는데 로미오는 그의 확신이 빗나가자 깊은 실망감과 불안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죄송합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사정이 된다면 이 망토를 저 대신 맡아 주시겠습니까? 시일 내로 찾으러 갈 테니 그때까지만 보관해 주십시오. 금방 찾으러 가겠습니다.”
“보관해 주기만 하면 돼? 내가 도와줄 게 없겠어?”
“예… 이 망토를 맡아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두 사람은 그길로 다시 하숙집으로 돌아갔으나 그때까지도 로미오는 쉬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고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하기만 했다. 파리한 뺨은 핏기가 가셔 점점 더 창백해져 갔다.
“……저, 한 가지 더 부탁이 있습니다.”
하숙집 앞에 도착했지만 로미오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그가 어렵사리 입을 뗀 것처럼 보이자 발레리아는 무엇이든 들어줄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말해. 어떤 부탁이야?”
“……틈날 때마다 이곳에 들러 그라나 부인을 살펴봐 주시겠습니까? 부인께서 잘 지내시는지, 그리고 누군가 다녀간 흔적은 없는지 살펴봐 주십시오. 다만 이 망토에 관한 일은 비밀로 해 주십시오. 하숙집 3층의 벽에 관해서도 당분간 비밀을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사정을 설명하지 않고 이런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괜찮아, 걱정 마. 그렇게 할게.”
발레리아가 로미오에게서 망토를 건네받는데 어린 소녀 하나가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 안녕하세요, 대위님.”
심부름꾼 같은 옷차림을 한 소녀는 열두 살쯤 돼 보였다. 소녀는 로미오의 외모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발레리아를 의식한 듯 그녀를 한 번 올려다보더니 공손히 말했다.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 오지 않으셔서 모시러 왔어요. 지난번에 말한 그곳에서 친치아가 기다리고 있어요.”
약속 같은 것은 한 적이 없었으나 로미오는 반문하지 않았다. 이 소녀는 친치아가 고향에서 데려왔다던 그 시종일 것이다. 발레리아가 의심하지 않도록 적당히 핑계를 댄 것으로 봐 단테의 12인과 관련해 급하게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레리아. 여기서 헤어져야겠습니다. 약속이 있던 것을 깜빡했습니다.”
“그래. 조심히 다녀오도록 해.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거든 언제든 불러 줘.”
로미오가 지팡이에 의지해 소녀를 따라가자 그녀는 낯선 곳으로 로미오를 안내했다. 친치아에게 로미오를 안내하는 법을 들은 소녀는 길을 걷는 동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상세히 설명했는데 도착한 곳은 중앙 광장에서 한참 떨어진 어느 외진 거리였다.
“저기에 아가씨가 계세요. 전 이만 가 볼게요.”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친치아는 소녀가 물러가자 로미오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대위님. 만나 보셔야 할 사람이 있어서 급히 찾았는데 놀라셨어요?”
“아니, 놀라지 않았어. 무슨 일이지?”
로미오가 지팡이를 거두자 친치아는 그에게 팔꿈치를 내어 주고 자연스럽게 거리를 걸었다.
“한 소년이 대위님을 뵙길 청하고 있어요. 지금부터 저와 함께 소년의 집에서 대화를 나누게 되실 텐데 그 소년은 포섭 대상이긴 하지만 아직 우리에 관해 아는 것이 없어요. 그러니 저와 대위님의 관계를 위장해야 해요. 저를 엔초의 생일 손님으로 초대할 만한 정도의 친한 이웃 소녀로 생각해 주세요.”
“알았어. 그런데 그 소년이 누구지? 나를 만나 보고자 하는 이유가 뭐지?”
검은 망토의 사내에 대한 생각을 미처 정리하지 못해 머릿속이 복잡하던 로미오는 친치아가 이어 한 말에 잡념을 멈췄다.
“소년의 누나가 바치시 축제 때 대위님의 동생과 함께 군으로 체포되었던 로마니엘로 대학교의 학생이에요. 고문 도중에 죽은 소녀요. 유품을 정리하던 중 대위님의 동생 앞으로 보낸 비밀 편지가 발견됐대요.”
* * *
“흑, 으윽…….”
소년은 흐느껴 울며 연신 어깨를 들썩거렸다.
초대받은 곳은 손님이 왔을 때 유일하게 응대할 수 있는 응접실이었지만 집이 워낙 오래되어 그마저도 제대로 구색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의자는 낡았고 탁자는 기울어졌으며 바닥에서는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탁자 위에는 스물여섯 통의 편지가 놓여 있었는데 받는 사람의 이름이 모두 피에트로였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흔적이 역력한 낡은 편지였다.
“누나가 남긴 편지는, 흐윽… 이게 전부예요…….”
소년은 눈물을 글썽이며 차곡차곡 정리한 편지를 로미오의 앞으로 밀었다. 볼 수 없으나 로미오는 손으로 편지를 더듬었다. 흐느껴 우는 소년의 목소리는 차마 그 마음을 다 헤아리기 힘들 만큼 처절했다. 피에트로를 묘지에 묻던 날 자신은 그렇게 울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편지 외에 다른 건 발견되지 않았어?”
친치아가 묻자 소년은 눈물로 흥건해진 입술을 물며 대답했다.
“네, 흐윽, 흑… 이 편지가 전부예요…….”
로미오는 탁자를 더듬어 편지 하나를 집었다. 손으로 표면을 쓸자 잉크가 묻은 자국이 만져졌다. 피에트로의 이름이 쓰인 부분인 것 같았다.
“이 편지들은… 흑, 윽… 전부 누나의 서랍이 아니라 침대 바닥에서 발견됐어요…”
소년은 흐느끼던 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얼굴을 문질러 닦고 주먹을 세게 쥐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고 바닥에 숨겨 놨던 것 같아요. 답장은 발견되지 않았어요. 이 편지들만 있었어요…… 마지막 편지에 적힌 날짜를 보면 바치시의 축제가 있기 나흘 전이에요… 왜 줬던 편지를 도로 전부 받아서 숨겼는지도 모르겠고 누나가 받았던 답장들이 어디로 가 버렸는지도 모르지만…….”
가까스로 울음을 참던 소년은 다시 눈물을 떨궜다.
“누나가… 윽, 흐윽…… 피에트로라는 형을 좋아했었나 봐요…….”
피에트로가 그 소녀를 두둔했던 이유를 그저 짐작만 하고 있었던 로미오는 이제야 그 이유를 완벽히 이해하고 편지를 내려놨다.
그날 함께 죽었던 두 사람이었다. 어쩌다 그런 위험한 짓을 공모하게 됐는지도 전부 이해가 됐다. 피에트로가 소녀에게 보냈을 답장의 행방은 알 수 없었지만 보지 않아도 그 내용을 알 것 같았다.
“우리 누나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누나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따로 있을 거예요. 전 그렇게 믿어요. 우리 누나는, 흑, 흐윽…… 그저 학교를 다니면서 법을 공부하는 게 꿈이었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런데… 난 누나한테 인사조차 못 했어요… 마지막 모습도 제대로 볼 수 없었어요. 누나는 정말 착했는데, 흑…… 아무 잘못도 없이 그렇게 잔인하게 죽었어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이에요… 으, 흐윽…….”
소년의 말은 로미오에게 피에트로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하게 했다. 죽기 직전에 극심한 고통을 겪었을 피에트로가 직접 눈으로 본 것처럼 머릿속에 그려지자 로미오는 말을 아꼈다.
소년 역시 언제고 누나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리움이 잦아들면 그 자리에는 고통 속에 생을 마감한 누나의 끔찍한 말로만이 남을 것이다.
“넌 이 편지의 내용을 알아? 편지를 열어 봤어?”
친치아는 편지를 집어 들었지만 읽지 못하고 소년에게 물었다. 그녀는 로미오에게 허락을 구해야만 편지를 읽을 수 있는 입장이었다. 피에트로는 단테의 12인의 단원이 아니었던 데다 편지에는 자신이 신경 쓸 이유가 없는 애정 어린 말들도 적혀 있을 것이다. 피에트로의 유품과도 같은 이 편지를 로미오의 동의 없이 멋대로 뜯어 볼 순 없었다. 하지만 이 소년을 포섭하는 데에 유용하게 쓰일 만한 정보가 들어 있다면 편지의 내용을 확인해야 했다.
“네, 알아요… 흐윽, 흑…….”
소년은 울음이 잦아들길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편지 속에는 벽보에 대한 이야기와 제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말들이 적혀 있었어요… 누나가 법학을 공부했었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어려운 말들 말이에요. 당신은 군인이죠? 그렇죠? 죽은 우리 누나의 누명을 벗겨 줄 수는 없나요? 그렇게 한다 해도 누나가 살아 돌아오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억울함은 풀 수 있을 테니까…… 다른 사람들은 누나가 공화국이 적으로 삼은 이들에게 가담했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니에요. 누나는 억울하게 죽은 거예요…….”
소문으로 들어 로미오가 제6군단의 장교라는 것을 아는 소년은 애원하는 것 같은 목소리를 냈다.
“당신이 나를 도와줄 수는 없나요?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게요. 제발…… 제발 죽은 우리 누나를 도와주세요.”
“……아니. 네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
로미오는 피에트로를 묻던 날 어두운 묘지에 서서 땅을 파내는 소리를 들었던 때를 기억했다.
“나는 그 일로 퇴역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군인이 아니다. 도움을 줄 수 없을 것 같아 미안하구나.”
심장 통증 같은 것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가슴 아랫부분을 저리게 했다. 피에트로가 죽었다는 사실과 다시 한번 직면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직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 또한 실감 됐다.
입을 떼기가 힘들 만큼 괴로웠지만 상대가 어린 소년이었고 자신과 같은 처지였기 때문에 애써 마음을 억눌렀다.
“네 누나의 시신을 돌려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사과하마. 그 일이 있었을 때 나는 아무런 손도 쓰지 못했어. 제6군단은 그런 곳이다. 내가 퇴역하지 않고 여전히 군인이었다고 해도 지금 네가 하는 부탁은 들어줄 수 없었을 거다.”
로미오는 손을 더듬어 편지를 챙겼다. 앞을 볼 수 있었다 해도 이 자리에서 당장 편지를 읽어 보진 못했을 것이다.
“누나는…! 그냥 실수를 했던 거예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순간 잘못된 생각을 해서 그런 짓을 했던 거예요…… 아님, 어쩌면 누군가 시켜서 그런 짓을 했을 수도 있어요. 그 점에 대해 충분한 조사가 이뤄졌었나요? 누군가 우리 누나에게 그런 짓을 시켰던 거라면요? 편지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혹시 누군가 지시를 한 거라면… 피에트로라는 그 형도 마찬가지일 수 있잖아요. 분명 취조 중에 죽었다고 했죠? 조사가 이뤄지던 중에 죽은 거라면…… 그렇다면…….”
로미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하다. 내게는 아무런 힘도 없어. 이렇게 호소해 봐야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어.”
친치아는 소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로미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소년을 포섭하기 위한 미끼를 던지며 시험할 순 없었다.
“……편지는 고맙다.”
“제발 내 말을 들어줘요!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뭐든 줄 테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말해 줘요! 난 우리 누나의 누명을 벗기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어요. 나한테 남은 건 우리 누나가 남기고 간 옷가지 몇 벌밖에 없다고요……!”
로미오는 소년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왔다. 문을 닫기 전 소년이 탁자를 내리치며 울분에 찬 비명을 토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이 나라가 우리 누나를 죽인 거나 다름없어요! 난 절대로 용서 못 해!”
밖으로 나오자 우르릉, 하고 하늘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로미오는 친치아와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품에 안긴 편지들이 옷깃에 스쳐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편지를 읽기 위해서는 자신의 눈을 대신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죽은 피에트로의 사정을 잘 알고 있고 편지의 내용을 보여 줘도 괜찮을 만한 사람. 친치아는 아니었다.
“노프리가 현재 접촉 중인 31인 위원회의 위원이 있어요.”
두 길로 갈라진 골목 어귀에 다다르자 친치아가 말을 꺼냈다. 로미오는 편지들을 갖고 조반니의 3층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현 통령이 31인 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시절 그녀와 같은 패를 이룬 자니 찬동자인 셈이죠. 노프리의 말에 따르면 포섭을 시도하던 중 아주 좋은 기회가 포착됐다고 해요.”
로미오는 대답을 하는 대신 편지 몇 통을 품속의 주머니로 넣었다. 그는 피에트로를 묘지에 묻었던 날로 되돌아간 얼굴이었다.
“프란코 바르톨루치라고 들어 보셨어요? 일흔 먹은 노인치고 꽤 정정한 자예요. 노프리가 보석상으로 위장해 그자의 저택에 드나들며 정보를 캐내는 중인데 그 집에 자주 드나드는 31인 위원회의 위원 중에 통령의 오른팔 역할을 자임했던 자도 있다더군요. 그자를 통해 통령에게 접근하기 위한 획책을 꾀하는 중이에요. 우리는 조금 전 만난 그 소년을 포섭할 계획인데 첫 포섭을 제안한 건 로마니엘로 대학교의 법학과 교수예요. 하위 단원인 그녀는 그동안 저 집을 꾸준히 드나들며 소녀의 가족을 보살펴 주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편지들이 발견된 거예요. 저는 저 소년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거라고 믿어요.”
“…….”
“대위님께서 편지의 내용을 먼저 보신 뒤에 제가 넘겨받을 수 있을까요? 포섭 과정에서 저 소년의 억울함을 이용하려면 편지의 내용을 확인해야 할 것 같아요.”
묵묵히 편지만 쥐고 있던 로미오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 위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래… 그러지.”
* * *
“그래서 내가 멱살을 덥석 잡았지! 그랬더니 그 후레자식이 겁에 질려서 한 번만 봐달라는 거야. 아, 글쎄 그래서 냅다 밀어 넘어뜨리니 그놈이 앓는 소리를 내면서 나자빠지지 뭐야?”
“이 친구 허풍이 심한 건 여전하구만. 나이도 있고 하니 조심하게. 그러다 크게 봉변을 당하는 수가 있어.”
거나하게 취해 술집을 나오던 두 사내는 술집 문 앞에 팔짱을 끼고 기대어 선 여자에게 눈길을 줬다. 비를 맞고 서 있는 여자가 바치에서 가장 번화한 이 술집에서도 좀처럼 찾기 힘들 만큼 상당한 미인인 데다 옷차림새가 특이했기 때문이었다. 옷차림새보다 더 특이한 건 오른팔의 의수였는데 그 의수도 비를 맞아 흠뻑 젖어 있었다.
“뭘 보쇼?”
신기한 눈으로 보고 있으니 여자는 갈 길이나 가라는 것처럼 눈을 위로 치떴다. 외지인처럼 보이는 데다 범상치 않은 인상이라 두 사내는 못 본 체하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사내들이 떠나고 나자 이브는 비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술집 안을 들여다봤다. 오래 훔쳐보지 않고 돌아서서 주위를 몇 걸음 걷다 창틀을 밟고 훌쩍 뛰어올라 지붕 위로 올라갔다. 쉬지 않고 내리는 비에 머리와 옷이 젖은 빨래처럼 축축했다. 2층 창문 너머에서 불빛과 함께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좋을 대로 퍼질러 앉아 턱을 괸 이브는 오늘 낮에 시장 상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일로 학생 두 명이 죽었는데 그중 한 명이야. 이 거리 뒷골목의 포목상이 그 젊은 장교와 잘 아는 사이거든.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일이 있고 나서 퇴역을 했다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그래. 안 된 일이야.]
빗물이 찬 신발에서 질퍽거리는 소리가 나자 이브는 신발을 벗었다. 쥐어 비틀어 물기를 짜고 싶었지만 의수가 말을 듣지 않아 두 손으로 짜낼 수가 없었다. 비가 이대로 계속 내릴 것 같아 포기하고 다시 신발을 신는데 1층에서 로미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지만 갈 곳이 없는 데다 조반니의 말대로 골목에서 죽치고 기다렸지만 소득이 없어 시들해진 참이었다. 조반니와 약속을 하기도 했고 퇴역 전에 로미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됐으니 더는 그에게 도와달라고 요구할 수 없었다. 비록 형제는 없지만 어려서 일찌감치 가족의 죽음을 겪어 본 까닭에 동생을 잃은 로미오의 심정을 무시할 수 없었다. 형제라는 것은 부모에게서 함께 갈라져 나와 피와 살을 나눈 존재가 아닌가. 부모의 죽음보다 덜 고통스러울 이유가 없었다.
지붕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로미오가 술집을 나왔다. 문을 나서자마자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삽시간에 머리와 어깨를 적셨지만 로미오는 걸음을 서두르지 않고 지팡이로 바닥을 쓸며 단정히 걸었다. 그가 저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붕 위에 앉아 있던 이브는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로미오를 뒤따라가며 조용히 걷다가 그의 옷소매가 전부 젖었을 때쯤 발소리를 내며 등 뒤로 다가갔다.
“오늘 그 의사 선생에게 오른팔을 치료받았소. 덕택에 통증이 완전히 가라앉았으니 고맙소.”
이쪽을 돌아본 로미오의 표정은 어딘가 평소와 달라 보였다. 그의 평소 모습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없었지만 그래 보였다. 어쩌면 로미오가 동생을 잃고 군에서 퇴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처음 술집에서 만났던 그때부터 그는 줄곧 지금과 같은 표정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가족을 잃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표정.
“제가 치료해 드린 것이 아닌데 제게 감사 인사를 하시는군요.”
“물론 치료를 해 준 것은 당신이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당신에게 도움을 받은 것도 맞지 않소? 바치 병원이 그렇게 으리으리할 줄 몰랐소. 조반니 선생은 분명 실력 있는 의사일 거요. 그가 내 어깨에다 의술이 아니라 요술을 부린 게 아닌가 싶소만.”
“선생님께서는 유능한 분이십니다. 의학자로서 명성이 높기도 하시지요.”
“돈도 없는 나를 흔쾌히 치료해 줬으니 인덕도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소?”
로미오는 짧은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계속 걸었다. 이브는 더 이상 따라가지 않고 그의 등 뒤에 서서 말했다.
“당분간 단테 놈들을 잡아야 해서 이제 한밤중의 포도주에 올 일은 없을 것 같으니 미리 인사하겠소.”
로미오는 인사 대신 목례를 해 보였다. 그가 돌아서자 이브도 돌아섰는데 서로에게서 멀어지던 두 사람 중 먼저 뒤를 돌아본 것은 이브였다.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던 마차 한 대가 로미오의 앞에서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마차의 창문이 열리더니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로미오에게 말을 건넸다. 로미오가 경계하며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멀리서 본 이브는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로 다가갔다.
“오늘 낮 책방에서 나리께 문을 열어 드렸던 분을 기억하십니까?”
가까이 다가가니 마차 안에 웬 젊은 남자가 앉아서 로미오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이브를 쳐다봤지만 신경 쓰지 않고 로미오에게 계속 말했다.
“저는 그 자리에 있었던 비서입니다.”
남자는 로미오를 ‘나리’라고 높여서 지칭하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그렇지 않았다. 마차 안에 앉은 채로 창문만 열어 말하고 있는 태도 자체도 그랬다. 비를 맞고 있는 로미오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그는 지시받은 말을 전하러 온 것에 불과해 보였다.
“제가 모시는 분은 31인 위원회의 위원이신 프란코 바르톨루치 위원님이십니다.”
순간 로미오가 들고 있던 고개를 약간 움직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빗소리 때문에 남자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그였다.
프란코 바르톨루치라면 친치아가 말했던 그자였다. 노프리가 접촉 중이라는 포섭 상대. 기막힌 우연이었지만 놀라는 기색을 드러내는 대신 눈가의 빗물을 닦는 척 얼굴을 쓸며 침착하게 물었다.
“용건이 무엇입니까?”
“책방 주인에게 나리께서 찾고 있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위원님의 서재에 그 책이 보관돼 있습니다.”
“‘인체의 해부에 관하여’라는 책은 해부학서입니다. 그분께서 그 해부학서를 갖고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리께서 그 책을 구하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의원님께선 고문서를 수집하는 수집가로서 은혜를 베풀고자 마음먹으시고 오늘 낮에 필경사들을 시켜 그 책을 필사하게 하셨습니다. 나리께서 관심이 있으시다면 책이 완성되는 대로 위원님의 저택으로 초대하겠습니다. 오셔서 책을 가져가십시오.”
대화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이브는 남자가 로미오처럼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갖고 있자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푸른 눈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남자의 눈은 로미오와 같은 푸른빛이었다. 오늘 같은 날 먹구름 낀 하늘이 가질 법한 어두운 회청색이 아니라 햇빛이 작렬하는 한낮 오후의 쪽빛 바다가 가질 법한 푸른색이었다. 서로 닮은 얼굴은 아니지만 머리 색과 눈 색이 같은 두 사람이 마주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연고도 없는 제게 책을 주고자 하는 이유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군요. 저는 맹인입니다. 글을 볼 줄 모르는 제가 책을 구하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으십니까?”
로미오는 원하는 것을 주겠다는 감미로운 제안에 덥석 그러겠다고 대답할 만한 성미의 인간이 아니었다. 구하기 어려운 책을 필사까지 해서 주겠다고 하는 데에 다른 저의가 있을 거라고 의심하는 게 당연했다. 가령 책값으로 감당하기 힘든 액수를 부른다면 곤란했다.
“위원님께서는 젊은 시절부터 그분만의 신념에 따라 수천 권의 책을 수집해 오셨습니다. 고서를 구하기 위해 책방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나리의 신세를 딱하게 여기시는 것은 장서가이자 애서가로서의 그분의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편히 받으셔도 됩니다. 또 책이라는 것은 읽기 위해서만 수집하는 것이 아니니 나리께서 맹인이라는 점에는 아무런 의문도 느끼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대가 그 프란코였기 때문에 만약 남자가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돌아설 경우 미끼를 던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오히려 더 좋은 말로 한 번 더 제안을 하고 있었다. 프란코가 대가 없는 은혜를 베푸는 이유를 설명받았다고는 하지만 오늘 낮에 책방에서 프란코를 딱 한 번 본 로미오였다. 선뜻 그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프란코가 요주의 인물인 것은 확실했기 때문에 우선 승낙했다.
“책값으로는 얼마를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그것에 관한 이야기는 저택에 오셔서 위원님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위원님께서는 인정이 두터우신 분이시니 그리 과한 금액을 요구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책이 절반 넘게 완성되었으니 내일 저녁 중으로 들러 주시면 됩니다. 저택을 방문하시거든 문지기에게 책을 받으러 왔다고 얘기하세요.”
사내는 고개를 까딱여 묵례를 하더니 마차 창을 닫기 전에 물었다.
“이름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알고 있으면서 묻는 듯한 목소리였다.
“로미오 알피에리입니다.”
사내는 고개를 한 번 더 까딱인 뒤 창문을 닫았다. 마부가 말을 때려 마차를 출발시키자 고급스럽게 장식된 이두 마차가 빗속으로 사라졌다. 말발굽과 바퀴 소리가 멎고 나니 거리는 다시 빗소리로 가득 찼다.
“아는 자요?”
대화를 옆에 서서 모두 들은 이브가 묻자 로미오는 지팡이를 바로 잡았다. 그는 대답을 피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즐거웠습니다. 종신 연금을 꼭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로미오가 먼저 그 자리를 떠나자 이브는 가만히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