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17. 서서히 벗겨지는 광인의 그림자 (17/30)

17. 서서히 벗겨지는 광인의 그림자

“그랬군요. 전혀 몰랐습니다. 체사 왕국 출신이시라는 이야기는 스포르차 선생님께 얼핏 들었는데 말입니다.”

“조반니가 아마 잊어버렸을 거예요. 그는 특정한 부분에서 기억력이 좋지 않거든요.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정보는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기억하지 못해요. 그래서 가끔 허술해 보이기도 하죠.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한해 아주 치밀하고 집요한 데다 비상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은 반면 그렇지 못한 것은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쉽게 잊어버리고 소홀하죠.”

길을 걷고 있는 로미오는 친치아의 팔꿈치를 잡고 있었다. 로미오보다 좀 더 앞서서 걷고 있는 친치아는 능숙하게 보폭을 조절해 로미오를 안내했다.

두 사람의 대화 주제는 친치아의 과거였는데 놀라운 것은 그녀가 몰락한 백작 가문의 아가씨였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친치아를 만났던 날 그녀가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 온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은 틀린 추측이 아니었다. 현재 그녀는 부모의 생사는 모른다고 하며 체사를 떠날 때 자신의 시종 한 명을 데리고 왔다고 했다. 그 시종은 지금도 깜짝 놀랄 때면 친치아를 ‘아가씨!’하고 부른다고 했다.

겨우 열한 살에 한낱 마구간지기에서부터 집안의 그루터기와 같았던 집사에 이르기까지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일을 겪으며 부모와 헤어졌으나 친치아는 그 사실을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다. 선뜻 위로할 수 없는 비극적인 이야기인 탓에 로미오가 그녀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기만 하며 쉽게 말을 건네지 못하자 친치아는 유쾌한 목소리로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제가 누렸던 호화로운 생활에 불만이 많았어요. 참 이상한 아이였죠. 거만한 귀족들을 보며 제가 얼마나 과분한 기회를 갖고 태어났는지를 깨달았고 그들이 평민을 벌레 보듯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날마다 연회에 끌려다니며 드레스 자락이나 붙잡고 우아하게 춤을 추는 게 저와 맞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죠. 그리고 제 부모는 양아버지와 양어머니였어요. 일찍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양아버지와 혼인했지만 어머니 역시 제가 일곱 살에 병으로 돌아가시면서 양어머니가 생겼어요. 가문의 위세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인 혼인이었으니 사랑 같은 건 없었죠. 전 몰락한 가문에 대해 아픈 기억 같은 건 없어요.”

“왕정에 반감을 느꼈다면 공화정을 이상적인 것으로 추구할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그렇지 않으셨습니까?”

“맞아요.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 나라에도 귀족과 다를 것 없는 삶을 누리며 그들과 흡사한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더군요. 고귀하게 태어났으니 길에서 음식을 팔거나 잡화점에 들어가 필요한 물건을 사는 건 비천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요. 귀족이라면 치를 떠는 제 눈에 그들은 귀족과 다를 것 없는 자들이에요. 광장과 청사의 화려한 조각들을 보세요. 가난과 예술은 함께 갈 수 없어요. 그런 예술 작품에 시간과 돈을 쓰는 사람들은 따로 있어요. 이 나라에 계급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죠.”

왕과 귀족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백작 가문의 아가씨로 태어난 친치아가 어떻게 단테의 12인의 사상에 경도되었는가는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로미오는 친치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그녀를 속이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자각하고 적당히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친치아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면 알수록 자신의 처지가 부각됐고 그것은 절대 유쾌하지 않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조직을 이루고 있군요. 스포르차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하위 단원들 중에서도 각양각색의 과거를 가진 이들이 있다지요. 민중의 손으로 만들어진 민중 결사라는 본질에 걸맞은 것 같습니다.”

로미오는 불편한 감정을 오래 끌지 않기 위해 친치아를 단순한 몇 마디로 규정했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땅으로 와 새 삶을 시작한 어린 소녀가 아니라 한때 귀족이었으나 이제는 반정부 조직의 일원이 된 정치범. 그렇게 단순화했다.

“곧 술집에 도착할 것 같네요. 제가 맹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걱정이 되는데 당신과 있는 동안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게 있을까요?”

“보행 시에는 지금처럼 해 주시면 됩니다. 미처 예기치 못하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생긴다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의 곁을 지나가던 행인 하나가 친치아에게 공손한 어투를 쓰는 로미오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남매라기에는 너무 다르게 생겼고 상호 간 존대를 하기에는 누가 봐도 로미오 쪽이 훨씬 더 나이가 많아 보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선생과 제자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오빠와 여동생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존대를 하니 자연히 눈길이 가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친치아가 행인이 지나가고 나자 로미오에게 말했다.

“호칭을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조금 전에 지나간 사람이 우리의 대화를 들었나 봐요.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네요.”

“조금 전이라면 제 옆을 지나간 그 사람 말입니까?”

“네.”

지하 지부로 연결된 술집 앞에 도착하자 친치아가 짧은 고민 후 해결법을 제시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전 당신을 대위님이라고 부를게요. 아니면 바꾸는 게 좋을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럼 그렇게 부를게요. 당신은 저를 친치아라고 이름으로 부르되 하대해 주세요. 어때요?”

“좋습니다. 그편이 자연스러울 것 같군요.”

“굳이 때와 장소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니 중앙 지부의 회의 시에나 다른 단원들과 함께 있을 때도 그렇게 불러 주세요.”

“예.”

두 사람이 술집 안으로 들어가자 가게 안에는 손님이 없었다. 지난번처럼 그릇을 닦고 있던 주인은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인사를 한 친치아는 로미오를 데리고 지하로 이어진 계단 문을 열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그녀는 조반니가 그랬던 것처럼 로미오에게 계단이 끝나는 지점을 알려 주며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안내했다.

회의장 앞에 도착하자 계단을 내려올 때와 마찬가지로 친치아는 로미오를 안으로 안내했다. 실내에는 이미 몇 사람이 자리해 있는데 그들은 두 사람에게 저마다 인사를 건넸다.

가면과 로브를 받아 입은 친치아와 로미오는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 앉았는데 로미오의 자리는 맨 끝자리였지만 맹인임이 고려돼 친치아의 옆에 앉게 됐다. 오늘 회의는 정례 회의가 아닌 데다 친치아와 레오나르도 두 사람이 만날 포섭 대상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기 때문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조반니와 엘베라도 그랬다.

조금 기다리자 레오나르도가 도착했는데 그는 다른 이들에게는 목례를 하고 로미오에게는 말로 인사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로미오가 괜찮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자 레오나르도는 친치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인사 외에 다른 말을 나누지 않는 두 사람을 본 친치아는 슬그머니 로미오에게 말했다.

“레오나르도의 비밀을 알려 드릴까요? 그는 술을 먹으면 전혀 다른 사람이 돼요. 그에게 술을 진탕 먹이는 건 조반니의 전문이니까 술에 취한 레오나르도를 보고 싶으면 조반니한테 한번 부탁해 보세요.”

레오나르도가 그 말을 듣고 “친치아.” 하고 조용히 부르자 친치아가 웃었다. 조금 더 기다리자 다른 단원들이 도착했고 곧 회의장의 문이 닫혔다.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자리한 것은 로미오와 친치아, 레오나르도를 포함해 일곱 명이었는데 그중에는 노프리도 있었다. 그가 불편할 정도로 로미오에게 계속 눈길을 보내자 친치아가 그 사실을 귓속말로 전했다. 로미오는 마치 보이는 것처럼 그에게 시선을 한 번 주곤 그 후로는 의식하지 않았다.

“오늘은 팔레르모 사립기숙학교에 들러 포섭 중인 여학생들을 만나 봐야 할 것 같아요. 오늘 아침에 시스티로부터 전언을 받았는데 지난번에 말한 그 자매가 보기 드물게 아주 명석하다고 하더군요. 언니 쪽이 특히 그렇다고 하는데 여동생도 수줍음이 많긴 하지만 영특하다고 해요. 아무래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습니다. 조직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두 자매는 시스티가 비밀 모임의 일원인 것을 알고 있다고 해요.”

팔레르모 사립기숙학교는 바치 시민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서 깊은 명문 사립학교였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이전의 아이들이 다니는 그곳 학교는 교장을 비롯한 다수의 선생들이 단테의 12인의 단원이었는데 그들은 아이들 중 몇 명을 단원으로 양성하기 위해 매해 일정한 수의 아이들을 포섭 대상으로 선정해 포섭 활동을 하고 있었다. 교장을 비롯한 선생들은 추천 권한이 없는 하위 단원이었기 때문에 입회가 고려되면 상위 단원들이 파견돼 대상자를 시험했는데 이번에 접촉할 대상은 어린 자매였다.

단테의 12인은 팔레르모 사립기숙학교 외에도 루바노 곳곳에서 고아원과 노동자들의 협회를 운영했는데 그들의 목적은 공동체 조직을 통해 자신들의 사상을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혁명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부차적인 목적도 있었기 때문에 운영에 있어 아주 엄격하고 체계적인 방식을 고수했다.

“대위님께서 동행해 함께 학교를 둘러보면 좋을 듯한데 괜찮을까요? 올해 열세 살이 된 언니 쪽이 사관 학교에 들어가기를 원한다고 해요. 대위님, 사관 학교는 몇 살부터 입학이 허가되는 거죠?”

친치아가 로미오를 쳐다보자 로미오가 모두를 향해 대답했다.

“14세부터 입학이 허가됩니다. 임관은 대개 6년 후 하게 됩니다.”

“만약 그 소녀가 군인이 되겠다고 한다면 입학까지 1년여의 시간이 남았으니 적당하네요. 1년간 지켜보다가 그 소녀를 영입하면 머지않아 제6군단에 내통자를 심을 수 있겠어요.”

그때 노프리가 나섰다.

“이제 막 입회식을 치른 자를 포섭 과정에 노출시키는 것은 좀 더 고려해 볼 만한 사항이 아닙니까? 논의를 거쳐 결정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엘베라가 있었다면 그녀를 향해 말했겠지만 그녀가 없었기 때문에 노프리는 동의를 구하듯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로미오를 ‘입회식을 치른 자’라고 지칭한 그는 그 말을 할 때 로미오를 향해 눈썹을 한 번 씰룩거렸다.

대답한 것은 다 몬티였다.

“단원 추천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으나 그가 제6군단의 장교였던 이상 입회식을 치른 보통의 하위 단원으로 취급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오늘 접촉 대상인 자매의 언니 쪽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그의 역할이 중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친치아, 그 자매들이 학교에 입학한 것이 언제라고 했지?”

“4년 전이요. 입학 당시부터 교장님과 시스티가 두 소녀를 가르쳤다고 해요. 언니 쪽이 군인이 되길 원하는 만큼 그에 적합한 자질도 갖고 있다는데 군인이 아닌 우리가 판단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안 그래요?”

친치아가 노프리를 향해 웃어 보이자 노프리는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끼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시스티는 언니 쪽의 입회를 고려하고 있지만 아직 자매가 너무 어린 데다 동생 쪽이 겁이 많은 편이라네요. 자매가 늘 한 몸처럼 움직일 만큼 언니가 동생을 아낀다고 해요. 동생이 적극적이지 않다면 언니도 입회를 고사할 거예요. 지금으로선 직접 만나 보는 게 가장 중요할 것 같아요.”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소피아가 로미오를 가리켰다.

“함께 팔레르모 사립기숙학교를 방문한다면 그 역시 후원자로 위장하는 것이겠죠?”

“네, 그럼요. 두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면서 언니 쪽의 입회 여부를 따져 볼게요. 군인이 될 자질이 있다면 혁명가가 될 자질도 분명 갖고 있을 거예요.”

* * *

나이 지긋한 선생의 뒤를 아이들 여러 명이 졸졸 따라갔다. 학교의 뜰을 걷고 있는 아이들은 손과 옆구리에 책 한 권씩을 들거나 끼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열 살 전후로 공부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어 뜰에 떨어진 꽃잎으로 장난을 칠 정도의 아주 어린 아이들도 두어 명 있었다.

“선생님! 지난번 수업은 정말 재미있었어요. 다음에도 또 그렇게 수업해요.”

“저는 의자를 들고 나와 교정에서 책을 읽었던 먼젓번의 수업이 좋았어요. 늘 그렇게 공부를 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책상을 전부 치우고 모두 함께 둘러앉아 공부를 했던 수사학 수업이 재미있었어요.”

“그래, 그래. 다음번에도 그렇게 수업해 보자.”

아이들을 데리고 뜰을 몇 바퀴 걷던 선생은 저 멀리서 마차 한 대가 학교로 들어서자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자, 이제 그만 들어가야지. 다음 수업을 들을 차례야. 오늘 있을 논리학 수업에는 특별히 베르가 선생님을 초빙했단다. 곧 학교를 방문하실 테니 어서 들어가서 준비하렴.”

평범한 선생처럼 보이지만 팔레르모 사립기숙학교의 교장인 그녀는 아이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가자 마차를 맞이하러 갔다. 표면적으로는 학교를 정기 방문하는 후원자들과의 만남이었으나 마차에 탄 이들은 학교 운영과는 무관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차에서 내린 레오나르도를 향해 인사하자 그가 모자를 벗으며 인사를 받았다.

“오랜만의 방문입니다. 야외에서 수업하기 좋은 계절이 됐군요.”

후원자답게 옷을 차려입은 그는 평소에 좀처럼 입지 않는 달라붙는 바지와 풍성한 어깨 주름이 들어간 외투를 입고 있었다. 윤기 흐르는 긴 머리는 한 갈래로 단정히 묶었고 손에는 정교한 자수 장식이 수놓아진 장갑을 끼고 있어 젊고 고상한 후원자의 분위기를 풍겼다.

그를 뒤따라 내린 친치아도 레몬빛 머리카락에 어울리는 흰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무릎 아래를 길게 덮는 치맛자락 끝이 점잖게 늘어뜨려져 있어 부유한 명문가의 아가씨 같아 보였다.

“오랜만에 뵈어요. 아이들과 바깥에서 수업 중이셨나요?”

“뜰을 걸으며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수업이 논리학이라 아이들을 모두 들여보냈어요. 시스티는 지금 웅변학 수업 중이라서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두 자매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릴 테니 저를 따라오세요.”

“아, 그 전에 소개해 드릴 분이 한 분 더 계세요.”

친치아가 옆으로 비켜서서 손을 잡아 주자 마차 안에서 로미오가 내렸다. 지팡이를 바닥에 바로 대고 선 그는 자연스레 친치아의 팔꿈치를 잡았다.

“오늘 아침에 전언을 받고 답을 드릴 시간이 없어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며칠 전에 입회식을 치르신 분이에요. 지금은 퇴역하셨지만 본래 제6군단의 대위님이셨어요.”

“로미오 알피에리라고 합니다.”

로미오가 교장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자신을 소개하자 그녀는 인상적인 그의 외모에 작게 감탄했다. 옷차림은 후원자라고 하기에 조금 모자란 듯 평범했지만 기품 있는 외모가 뇌리에 깊이 들어와 박혔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보는 이를 호릴 것 같은 파란 눈동자였다. 다만 그 눈동자는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맹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6군단이라면…… 그렇군요. 잘 오셨어요, 환영합니다. 팔레르모 사립기숙학교에는 처음이시죠?”

“예, 처음입니다. 제가 바치 사람이 아닌 까닭에 오래전에 바치로 옮겨 와 살기 시작했는데 팔레르모 사립기숙학교에 대한 이야기는 바치 사람들에게서 종종 들었습니다. 교육 수준이 높은 명문 학교라고 알고 있습니다.”

“유능한 선생님들이 계신 덕분이에요. 가난한 학생들의 학비를 면제해 주고 실력 있는 선생님들에게 가르침 받을 수 있도록 장학 제도를 마련한 것이 이 학교가 바치 시민들에게 명성을 얻은 이유일 겁니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기 어려운 대낮에 비밀 결사의 단원들이 버젓이 학교를 찾은 것은 자칫 허술해 보일 수 있었지만 학교에서 누군가와 마주치더라도 레오나르도와 친치아를 의심하는 선생이나 학생은 없었다. 두 사람은 가난한 학생들의 학비를 후원해 주는 후원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기 때문에 대내외적으로 후원자 행세를 할 수 있었다. 만약 누군가 정기적으로 학교를 방문하는 두 사람을 수상히 여겨도 그들의 이름과 후원금이 상세히 적힌 후원자 명단을 보여 주면 그만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실제로 2년 전에 학교의 기숙사를 보수하는 데에 기부금을 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친치아보다 훨씬 그럴듯하게 위장할 수 있었다. 기부금을 낸 것은 순전히 그의 의지였는데 그는 여든 명의 학생들이 기숙사비를 내지 않고도 기숙사에서 먹고 잘 수 있을 만큼 큰 돈을 기부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두 자매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장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학교 안의 작은 교실이었다. 특이한 것은 교실 안에 교실처럼 보이는 또 다른 방이 있다는 것이었다. 방은 소리가 새어 나갈 수 없는 폐쇄적인 구조로 만들어진 데다 창이 없었다. 교수진의 일부가 단테의 12인의 단원일 뿐 학교 전체가 조직 활동을 위해 운영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밀담은 나누기에는 비밀스러운 장소가 필요했다. 교장을 제외한 모든 선생들이 수업 중이었으므로 다행히 복도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똑같이 생긴 두 소녀가 앉아 있었는데 두 자매는 세 사람을 보고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트로이아 자매입니다. 얘들아, 인사드리렴.”

교장의 소개에 두 소녀가 고개를 숙여 보였는데 그들의 눈길은 로미오에게 오래 머물렀다. 친치아의 부축을 받고 있는 그가 놀랄 만한 외모를 갖고 있는 데다 한눈에 보기에도 앞을 못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니네타 트로이아입니다. 제가 언니예요.”

먼저 목소리를 낸 소녀는 대신 소개해 주길 기다리고 있는 동생을 톡톡 쳤다.

“직접 이름을 말씀드려.”

로미오가 맹인이라는 사실을 안 언니가 로미오를 눈짓으로 가리키자 동생 쪽이 부끄러워하며 인사했다.

“차나 트로이아예요… 만나 뵙게 돼서 반가워요.”

열세 살이라는 나이가 비밀 결사의 단원이 되기에 지나치게 어리다고 생각하고 있던 로미오는 두 소녀의 앳된 목소리를 듣고 불편함을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들을 자신들의 지지자로 키우려는 단테의 12인의 치밀함에 반감 또한 느꼈다. 정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포섭하려는 이유가 명석한 머리 때문이라면 그 명석한 머리를 반란자로 키워 내는 데 쓸 게 아니라 교육자로 키워 내는 데 쓰는 것이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앉으세요.”

교장의 말에 모두가 자리에 앉았는데 탁자에는 의자가 여섯 개 딸려 있어 여섯 사람이 딱 알맞게 앉을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로미오가 앉으려고 하자 그의 옆에 앉게 된 니네타가 로미오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아 의자를 만질 수 있게 해 줬다는 것이었다.

니네타의 행동에 놀란 것은 로미오만이 아니라 그를 의자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던 친치아도 마찬가지였다. 손을 의자 등받이에 대주는 것은 로미오가 부탁한 방법이었는데 친치아는 처음에 손수 의자를 뺀 다음 로미오의 팔과 등을 부축해 그를 직접 앉히려고 했다. 그 방법은 넘어질 위험이 컸지만 로미오가 말하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해 자신을 그렇게 도와준다고 했다.

로미오의 놀란 시선을 눈치챈 니네타는 수줍어하지 않고 공손히 대답했다.

“이렇게 해 드려야 의자의 위치를 아실 것 같아서 그런 거예요.”

로미오는 니네타라는 소녀의 목소리가 또렷하고 정확한 데다 쭈뼛대거나 주저하는 기색 없이 차분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직감하자 다시 한번 불편해졌다. 자신은 이 비범하고 사려 깊은 소녀를 반정부 조직의 단원으로 영입하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과연 신념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이분은 제6군단의 대위님이셨단다, 니네타. 궁금한 것이 있다면 이분께 물어보렴.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네게 필요한 대답을 해 주실 거야.”

군인이었던 자와 군인이 되고자 하는 소녀가 마주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목적을 갖고 있었다. 기이한 대화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로미오는 가장 먼저 이 질문을 건넸다.

“진심이 아닌 마음으로 사관 학교에 입학한다면 6년간의 긴 교육 과정을 거치는 동안 신념이 흔들릴 만한 일을 겪게 될 겁니다. 제6군단의 장교로 임관되기까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릴 텐데 그 긴 시간 동안 스스로의 믿음을 굳건히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놓았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군요.”

로미오의 물음에 니네타는 침착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민중 해방으로 가장 빠른 길은 혁명이며 저는 자유를 그 어떤 것보다 존엄한 것으로 보기에 그 두 가지가 합해질 경우 자유를 이념으로 추구하는 혁명가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혁명은 이 나라의 수호자인 제6군단의 장교가 됨으로써 가장 빠르게 이룰 수 있다고 믿어요. 비록 겉으로 내세울 순 없지만 뚜렷한 확신을 갖고 있다면 신념이 흔들릴 일은 없을 거예요. 신념이라는 건 마음 먹기에 따라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죠. 저는 신념과 상념을 혼동하지 않아요. 지금 이 자리에서 대위님께 증명해 보일 방법은 없지만 전 저의 신념을 믿어요.”

니네타는 당연하다는 듯이 로미오를 대위님이라고 부르며 혁명이니 신념이니 하는 말을 내뱉었다. 어린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에 그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아까와 다를 것 없는 목소리였지만 하고 있는 말의 내용 때문에 이질감까지 느껴졌다.

“이 학교가 아니었다면 저는 제 여동생과 가난 속에 죽었을 거예요. 가난의 고통이 제게 신념을 심어 주었고 그 신념은 제가 죽고 다시 태어나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을 거예요. 가난이 제게 큰 상처를 새기면서 신념도 함께 남겼어요. 저희는 입고 나갈 옷이 없어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어요. 신발이 다 해져서 그나마 신고 다닐 수 있는 신발을 여동생과 나눠 신었던 적도 있어요. 단순하고 보잘것없는 이유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가난의 혹독함이 저를 정치적인 인물로 자라게 한 것이죠.”

외우고 있는 것처럼 거침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외운 것이 아니었다. 너무도 강렬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막힘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역시 가난인가. 로미오의 머릿속에 여러 인물들이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피에트로였다.

“군에 들어가면 그들은 맹목적으로 이 나라에 충성할 것을 가르칠 겁니다. 루바노에 헌신하고자 하는 군인으로서 끊임없이 교육받게 될 텐데 먼 훗날 정말로 장교가 됐을 때 느낄 괴로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지 묻고 싶군요.”

“제가 선택한 일이니 제 책임이 되겠죠. 그런 걸 두려워하지는 않을 거예요. 제가 아니어도 이 나라에서 태어난 많은 가난한 아이들이 저와 같은 길을 걸을 거예요. 제가 미리 그 몫을 해낸다면 많은 수의 아이들이 구태여 희생될 필요 없을 거예요.”

니네타는 고민 없이 대답을 내놓고 로미오의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아이다운 단순한 해답이라고 하기에 니네타는 아이답지 않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는 신념을 위해 제 인생을 바치는 것이 무섭지 않아요. 민중의 해방을 생각하면 제게 두려움 같은 건 없어요.”

노회한 교장은 니네타의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가 말하는 것을 들어 보셔서 아시겠지만 무척 영리하답니다. 암기 과목의 성적도 무척 좋고 논리학과 수사학도 좋아해 집중도가 좋아요. 음악 수업에서 한 번 들은 음을 보름 뒤 다시 물어도 그대로 기억할 정도인 데다 시 암송에 있어서도 기억력이 탁월합니다. 좀 더 일찍 교육을 받았다면 열다섯 살이 되기 전에 대학에 입학했을 거예요. 니네타만이 아니라 차나도 그렇습니다. 차나는 논리학에 굉장히 소질이 있어 상급 논리학 반에 넣어도 무리 없이 수업을 잘 따라갑니다. 석판에 쓰지 않고도 일고여덟 자리 숫자를 순식간에 계산하는 데다 한 번 읽은 책은 그 자리에서 내용을 외운답니다.”

교장의 칭찬이 끝나자 니네타가 로미오를 향해 말했다.

“시스티 선생님께선 제가 군인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저도 시스티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해요. 합당한 자질을 가진 자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에 앉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거예요. 저는 제가 군인이 되기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정치적인 인간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남을 위해 인내하거나 희생하고 유대할 때 기쁨을 느껴요. 다른 사람들과 협조적인 관계를 맺는 것에서 안전함을 느끼고 동맹을 맺는 것을 본능적으로 선호해요. 신뢰받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남을 신뢰하기도 하죠. 제가 이 학교의 학생이 됐을 때 얼마나 큰 안도감을 느꼈는지 아신다면 놀라실 거예요.”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 트로이아 자매가 부모 없이 길거리에서 동냥을 하다 시스티에게 발견돼 이곳으로 오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로미오였다. 니네타는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한데다 능력을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커 보였다.

자신이 그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고 여겨 사관 학교에 입학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 로미오는 입회식 때 자신이 했던 말이 이 소녀를 겨냥한 말이었음이 실감 났다.

잃을 것이 없는 가난한 민중은 혁명의 주모자가 되기 쉬웠다. 단테의 12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 조건에 적합한 데다 명석하기까지 한 아이들을 찾아내 포섭하는 것일 테다. 열의만 넘치는 것은 조직에 도움이 되지 않지만 열의가 넘치는 동시에 권모술수에 능한 지략가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 탐나는 포섭 상대였다.

“저는 꼭 군인이 될 거예요. 그리고 시스티 선생님과 교장님과 여기 계신 분들께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거예요.”

니네타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하며 세 사람을 둘러봤다. 누가 더 강한 결정권을 지닌 것인지 몰라 로미오와 친치아, 레오나르도를 차례로 본 뒤 다시 로미오를 봤다.

목소리를 통해 짐작되는 니네타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리던 로미오는 의문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태어나 한 번도 몸소 경험해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혁명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됐는지 궁금하군요. 이 땅에는 많은 이상주의자가 있지만 그들 모두가 혁명을 꿈꾸지는 않습니다. 가난으로 고통받은 모든 이들이 혁명가가 되길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육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까?”

“네, 한 번도요. 그런 소극적인 방식으로 신념을 이루고 싶지는 않아요. 되어야 한다면 책임자나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저는 시험당하거나 의심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 대범함을 유용한 곳에 쓰고 싶어요. 이 나라가 민중에게 혁명을 허락하지 않으니 혁명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런 자질을 갖춰야 할 거예요. 전 책상 앞에 앉아 교양있게 펜을 움직이기보다는 허리에 검을 차고 군복을 입는 쪽을 택하고 싶어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권위를 맹신하는 건 아니에요. 단지 혁명으로 가는 과정 중에 권위와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두려움은 없습니까? 이 나라는 공화국에 반기를 드는 이들에게 반역자라는 꼬리말을 달고 그들을 사형대 위로 올려보내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평생 도망자 신세가 되어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돼도 상관없어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영광스러운 일을 한다면 그런 불명예쯤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요. 그리고 도망자 신세가 되는 것은 혁명이 실패했을 때의 이야기죠. 만약 성공한다면 여기 계신 세 분과 저, 그리고 제 여동생과 교장 선생님 모두가 원하는 세상이 올 거예요. 꿈같은 이야기지만 현실이죠. 그때가 되면 그 누구도 가난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 모두 함께 가난할 거예요. 배를 곯는 궁핍함과는 다른 형태로 우리 모두가 조금씩 더 가난해져서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거예요.”

니네타는 말을 맺으며 교장을 쳐다봤다. 그녀가 만족스럽게 머리를 끄덕이자 덩달아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다시 로미오를 봤다.

그러나 로미오는 더 이상 뭔가를 물으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묻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단테의 12인의 포섭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눈앞에서 보고 있는 로미오는 이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쉬이 짐작했다. 교장이 니네타를 어떻게 가르쳤는지도, 앞으로 니네타가 어떤 인물로 자랄지도 불 보듯 뻔했다. 단테의 12인에 입회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들의 존재조차 몰랐을 것이다. 니네타와 같은 아이들이 루바노 공화국에 대항할 반란자로 커 가고 있는 것을 영영 몰랐을 것이다.

대화를 계속 이어가 봐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데다 착잡함을 느꼈기 때문에 로미오는 침묵했다.

그러자 친치아가 니네타와 차나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알고 있죠?”

두 소녀는 입을 모아 네, 하고 대답했다. 목소리가 똑같아 한 사람이 대답하는 것처럼 들렸다.

“우리는 우리와 뜻을 함께할 사람이 필요해요. 그리고 여기 있는 두 사람이 먼 훗날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우리는 앞으로도 꾸준히 학교를 방문해 여러분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거예요.”

친치아의 미소에 니네타와 차나가 서로를 마주 봤다. 자매의 얼굴에는 밝은 빛이 떠올랐다.

“이곳에 마주 앉아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날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이야기해 줄게요. 그때 두 사람을 우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거예요.”

* * *

“이름이 로미오예요? 어쩜, 너무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들을 것 같아요. 얼굴과 이름이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요. 그렇죠?”

술청 위에 한껏 몸을 기댄 여자는 술에 취했으면서도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었다. 조금씩 비틀대느라 어깨에 걸치고 있는 숄 소매가 흘러내렸는데 그 소매를 끌어올려 고쳐 입은 것이 벌써 수십 번째였다.

귀여운 생김새 때문에 창가 쪽에 앉아 술을 마시는 사내 몇이 그녀를 흘끔댔는데 문제는 그녀가 자신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묵묵히 잔을 닦고 있는 어느 이름 모를 급사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급사라는 자가 사내답기는커녕 예쁘장하게 생겨 은근히 자존심이 구겨졌다.

“사는 곳은 어디예요? 어디에 살아요?”

“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을게요. 살짝만 알려 주세요. 어디 사시는 누구인지 정도는 알고 싶어서 그래요. 네?”

“죄송합니다.”

“아이, 참. 죄송하다는 말은 그만하시고 사는 곳을 알려 주세요. 이 근방에 사시는 건 아니죠? 이 근처에 사셨다면 이제야 이렇게 마주치는 게 말이 되지 않잖아요.”

음식을 나르는 여급은 두 사람을 곁눈질하느라 눈과 손이 바빴는데 여자가 손님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제지하지 못하고 속만 끓였다.

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 손님은 술을 마시기 전부터 로미오에게 관심을 보이더니 술을 다 마시고도 가지 않고 말을 걸어 댔다. 눈이 예쁘다며 대화의 물꼬를 튼 그녀는 시 낭송을 하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목소리를 칭찬하더니 언제부터 이곳에서 일하게 됐는지를 묻고 이름을 물었다. 로미오가 맹인임을 밝혔지만 대화하는 데 문제가 있냐며 즐겁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어머. 손이 너무 고와 보여요.”

여자는 굳은살 없이 길게 뻗은 로미오의 긴 손가락과 가지런한 손톱을 보고 눈을 빛냈다.

“그런 손으로 잔을 닦고 계시니까 우아해 보여요. 손이 어떻게 이렇게 고울 수가 있죠?”

뼈대가 크지만 희고 부드러워 보이는 로미오의 손이 살며시 한번 잡아 보고 싶게 생겨 여자는 로미오의 손등을 만졌다. 손님인 그녀를 쫓아내거나 거절하지 못하고 있던 로미오는 손등 위에 갑자기 손이 닿자 흠칫 놀라 팔을 뒤로 물렸다. 여자 손님의 손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말도 없이 만져진 까닭에 자신도 모르게 팔부터 물린 것이었다. 잔을 닦으며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더 놀라기도 했다.

팔레르모 사립기숙학교에서 두 자매를 만난 뒤 중앙 지부로 돌아가 군에 관한 기밀을 넘겨준 로미오는 부대 내부의 도면만이 아니라 장교들의 조직도, 고문의 순서와 방법 등을 상세하게 폭로해야 했다. 하지만 그를 생각에 잠기게 만든 것은 그것이 아니라 트로이아 자매였다.

이 이상 연루자가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 로미오는 단테의 12인의 와해를 앞당길 수 있다면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머나, 제가 갑자기 손을 만져서 놀라신 거예요? 미안해요. 괜히 함부로 손을 만져서…….”

“……괜찮습니다.”

로미오는 팔을 바로 하고 잔을 계속 닦았다. 멋쩍어진 여자가 다시 몸을 기대며 사는 곳을 물으려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군인이 맞았군?”

여자가 뒤를 돌아보니 허리에 검을 찬 웬 은발 머리의 여자가 우적대며 사과를 먹고 서 있었다. 이브의 목소리라는 것을 안 로미오가 그녀를 향해 “또 오셨군요.” 하며 인사하자 여자는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이브는 철 의수를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사과즙을 바닥에 대고 대충 턴 후 여자에게 말했다.

“이보쇼. 내가 이자와 할 이야기가 있는데 남은 얘기는 다음에 하는 게 어떻겠소? 이자는 앞으로 계속 여기서 일할 거요. 어디 도망가지 않을 거야.”

술청 앞으로 다가온 이브의 말에 손을 만져 로미오를 놀라게 한 것에 미안함을 느낀 여자가 머뭇댔다. 이브의 철 의수가 꽤 위협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에 그녀는 고집 피우지 않고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말하며 술집을 나갔다.

“오늘도 술을 드시러 오셨습니까?”

로미오는 소리와 냄새를 통해 이브가 사과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이 아니라 말이나 소가 힘 있게 마구 음식을 씹는 소리가 들렸다.

“지난번에 이어 오늘도 빈털터리 신세라 술은 마실 수 없을 것 같고 다른 용건이 있어서 왔소. 때마침 한가한 것 같으니 잘됐군.”

“제게 용건이 있으신 겁니까?”

“그렇소. 그것도 아주 중요한 용건이요.”

이브는 남은 사과를 전부 먹더니 주위를 둘러봤다. 여급이 막 주방으로 가져가려던 더러운 수건이 보이자 그 수건을 가져가 철 의수를 아무렇게나 닦았다.

“잠깐만요, 그건 바닥을 닦는 데 쓰는 수건이라 더 더러워질 거예요. 새 수건을 가져다드릴게요.”

“됐으니 이거나 버려 주쇼.”

여급의 걱정에 이브는 손을 휙휙 저으며 앙상하게 남은 사과를 건넸다. 어떻게 이렇게 먹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먹은 사과는 지나치게 깨끗해서 이상해 보였다. 돈이 없어 내리 이틀을 쫄쫄 굶고 겨우 구한 사과인 탓이었다.

“어제 골목에서 우연히 이런 걸 발견했는데 뭔지 알 거요. 이게 무슨 개뼈다귀 뜯어 먹는 소리인가 싶어 버리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 뒀는데 갖고 있길 잘했지. 이 근방에 있는 골목들이 하나같이 너무 복잡해 하마터면 길을 잃을 뻔했지만 대신 이런 벽보를 건지게 됐소.”

이브는 옷 속에서 꾸깃꾸깃한 벽보 한 장을 꺼내 술청 위에 얹었다. 당연히 로미오는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물었다.

“꺼내 놓으신 게 뭡니까?”

“단테와 12인인지 단테의 12인인지 하는 놈들이 붙인 벽보요.”

순간 로미오는 잔을 닦던 손을 멈췄다.

“이 12인이라는 숫자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번거롭게 외우기만 힘들지 의미가 있는 거요? 뭐, 몇 명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니 그 점은 넘어가고. 가장 존귀한 루바노 공화국의… 음, 카를 뭐라고 하더라? 아, 그렇지! 그 이름도 존귀한 카를리나 비스콘티니 통령 각하께서 이 단테와 12인 놈들을 잡으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종신 연금을 내린다던데 사실이오? 당신은 그놈들을 잡는 제5군단의 장교였으니 잘 알 것 아니오.”

로미오는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엉터리투성이인 이브의 말을 정정했다.

“통령 각하의 존함은 카를로타 비스카르디이고 저는 제6군단의 장교였습니다. 말씀하고 계시는 비밀 결사 조직은 단테와 12인이 아닌 단테의 12인입니다.”

“내가 다 틀렸군? 하지만 당신 이름이 로지오라는 건 알고 있소.”

“로미오입니다.”

이브가 로지오나 로미오가 그게 그거 아니냐는 눈빛으로 어깨를 으쓱하자 로미오가 충고했다.

“그들의 이름을 입에 직접적으로 올리는 것은 주위를 끌기 좋으니 돌려 말씀하시는 걸 권해 드립니다.”

“그럼 앞으로는 단테 놈들이라고 줄여 부르도록 하지.”

이브는 남은 음식과 술을 얻어먹기 위해 주위를 둘러봤다. 그녀는 의수를 찬 팔 안쪽을 벅벅 긁다가 급사 하나가 음식 접시들을 들고 곁을 지나가자 접시 제일 밑에 깔려 있던 포도주 잔을 슬쩍했다.

“거하게 한탕 해 먹고 여생을 편하게 사는 게 내 꿈이오. 용병질도 지겨워 이제 더는 할 마음이 없어. 난 열 살 때부터 이 짓을 해 왔소. 돈만 많으면 이 도시에서 가장 으리으리한 집을 한 채 사고 싶소.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빈둥대는 게 내 평생의 꿈이지. 더 이상 떠도는 건 싫소. 그러기에는 이 팔이 너무 낡았어.”

이브는 포도주를 한 입에 털어 넣더니 막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선 손님들 쪽을 쳐다봤다. 탁자 위에 안주로 나온 식어 빠진 닭 다리 하나가 놓여 있자 눈치 보지 않고 그걸 집어 왔다. 다른 테이블에서 그녀를 알아본 손님 하나가 ‘아니, 당신은!’ 정도의 의미를 담아 흠칫 놀란 소리를 냈지만 그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냉큼 닭 다리를 한 입 먹었다.

“이 음식들은 전부 버리는 것이겠지?”

“예, 손님들께서 남기신 음식은 모두 처리합니다.”

“내가 굶어 죽기 직전이라 좀 먹겠소. 음식 냄새만 맡아도 돌아 버릴 것 같아.”

“그러십시오.”

이브는 말도 하지 않고 다섯 입 만에 닭다리를 끝장을 내더니 빈 닭 뼈만 골라 뱉어 냈다. 남은 뼈는 지나가는 급사의 손에 들린 접시에 감쪽같이 올려놓았다.

“내가 단테 놈들을 잡으면 이 나라의 영웅이 되지 않겠소? 통령 각하께서도 내게 그만한 예우를 해 주시겠지. 명예와 돈이 한 번에 따라오는 일이니 내가 그놈들을 잡을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쇼. 당신은 퇴역했지만 어쨌든 군인이었잖소. 그놈들을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 것 아니오?”

“저는 그들의 사상에 감화된 연루자를 취조해 본 경험은 있으나 직접적인 조직 활동을 하는 단원을 체포해 본 적은 없습니다. 관련자들을 체포하는 것만으로는 손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만큼의 종신 연금은 내려지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단테 놈들을 직접 잡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거요. 연루된 자들이 아니라 조직의 일원인 자들을 잡을 수 있게. 내가 만약 당신 도움을 받아 그놈들을 잡는다면 종신 연금의 일부를 떼 주지. 서약서를 남겨도 좋소.”

로미오는 다 닦은 잔을 정리하며 말이 없었다. 거절하면 이브는 내일도 이곳으로 찾아올 게 분명했다.

“제가 퇴역한 장교라는 사실은 누구에게 들으셨습니까?”

“이 술집의 주인장에게 들었소. 당신 칭찬을 했으니 고마워하쇼. 저번에 그 사내들을 보고도 당신이 나를…… 그자들이 또 오지는 않았소?”

“예. 그 이후로 그분들을 다시 뵌 적은 없습니다.”

로미오는 과격해 보이는 이브가 어떤 면에서는 섬세하다고 생각했다. 겨우 두 번째 만남에 상대가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성급했지만 그녀는 파악하기 쉬운 사람이었다. 나쁜 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확실해졌다. 그럼에도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내가 정말로 간절해서 그러오.”

이브는 로미오가 부탁을 들어줄 것 같지 않자 허리 높이까지 오는 술청을 훌쩍 뛰어넘어갔다. 마음을 돌릴 요량으로 로미오의 손에 든 잔을 가져간 그녀는 수건으로 반질반질하게 표면을 닦았다. 정교한 움직임이 불가능한 의수의 손가락 부분이 벌어지자 억지로 눌러 고정시키고 왼손으로 닦았다.

“내게 도움을 준다면 죽은 내 아버지도 당신께 고마워할 거요. 내 미리 당신에게 내 아버지의 가호가 있기를 바라겠소. 내 아버지가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소만 당신에게 큰 가호를 내려 줄 것이오.”

이브는 로미오에게 들리도록 주머니 속의 목걸이를 쓰다듬었다.

“아니요. 도움은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생긴 것과 달리 고집이 센 로미오 때문에 잠시간 입을 다물고 머리를 굴리던 이브는 문득 뒷문 옆의 창밖을 쳐다봤다. 창 너머에 누군가 서 있어 자세히 보니 창가에 이마를 대고 이곳을 들여다보는 그림자가 보였다. 언뜻 금발 머리가 비쳐 보였는데 은밀히 안을 들여다보는 모양새가 퍽 불순해 보였다. 지난번 그자들과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 주시하는데 다른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이런. 후훗.”

목소리가 들린 곳을 보니 한 사내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거들먹거리며 서 있었다.

“바치의 미인들이 전부 어디에 갔나 했는데 여기 모여 있었군. 이 도시에는 추녀들만 있나 했는데, 후훗. 하기야 그럴 리가 있나? 어디에나 미인은 있기 마련인 것을. 여기 계신 두 미인께 술을 대접할 기회가 있다면, 훗, 좋겠는데. 술값은 물론 내가 모두 내지. 미인들께 그 정도는 전혀 아깝지 않으니, 후훗.”

느물거리는 사내는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는데 술에 완전히 취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웠지만 멀쩡한 상태도 아니었다. 그는 뽐내듯이 로미오와 이브에게 걸어오며 주방을 향해 외쳤다.

“이봐, 급사! 이 술집에서 가장 비싼 술을 줘!”

바로 앞에 급사를 두고 급사를 찾은 사내는 수작질을 할 참으로 느끼하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술을 사 준다는 말에 혹했지만 재수 없게 능글대는 데다 이야기를 방해받은 탓에 이브가 철 의수를 흔들며 빈정댔다.

“‘바치’의 미인‘들’이라니. 이것 보시오. 난 바치 사람이 아니고 이자는 사내요. 눈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거요?”

이브의 말에 남자는 여유 있는 표정을 거두고 로미오를 가까이서 봤다. 얼굴도 모르는 낯선 자에게 미인이라고 불린 로미오도 가히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그는 조용히 잔을 가져가며 이브에게 말했다.

“술을 드시지 않을 거라면 그만 가 주십시오. 저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술에 취해 로미오를 짧은 머리의 여자로 착각한 사내는 자신이 잘못 봤다는 사실을 깨닫자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사내의 동료로 보이는 자들이 다른 테이블에 앉아 낄낄대자 입술을 물며 짜증스러운 표정이 됐다. 그러더니 들으라는 것처럼 혀를 찼다.

“계집애같이 곱상하게 생긴 얼굴이니 착각할 만도 하지. 그렇다면 여기 계신 이 은발 머리의 미인에게만이라도 술을 대접할까 하는데. 오른팔이 굉장히 인상적이군, 후훗. 하지만 희고 가녀린 여인의 팔 만큼이나 아름다운 건 없지. 괜찮다면 의수를 잠깐 벗어 주는 게 어때?”

사내가 철 의수를 건드리자 이브가 인상을 썼다.

“이자를 여자로 볼 정도면 술은 그만 퍼마시고 집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거요. 이자의 어깨와 손을 보쇼. 이게 어디 여자의 것이오?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취한 것이니 우리 대화는 그만 방해하고 돌아가쇼. 그리고 이 팔은 장식이 아니야.”

그때 뒷문이 거칠게 열렸다. 키가 큰 사내 하나가 빠른 걸음으로 술집으로 들어섰는데 이브는 그가 조금 전 창밖에서 안을 훔쳐보던 그 사내임을 깨달았다. 머리가 금발이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시던 사람들에게 미소로 양해를 구한 후 포도주 잔을 하나 챙기더니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느물거리며 작업을 걸던 사내의 얼굴에 냅다 뿌렸다.

“으악! 내 눈……!”

느물대던 사내가 얼굴을 감싸자 금발 머리의 남자는 다짜고짜 그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얼마나 높이 들어 올렸는지 바닥에서 발이 들릴 정도였다.

“컥, 억… 당신은 누…… 엑!”

이 술집에는 정말 별별 미친 자식들이 다 있군. 속으로 중얼댄 이브가 미친놈치곤 아주 준수한 미남에 속하는 금발 머리 남자의 얼굴을 구경하는데 옆에 있던 로미오가 의심하듯 물었다.

“선생님?”

이브는 놀라서 금발 머리의 사내를 가리켰다.

“아는 자요? 아니, 그보다 목소리 한 번 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안 거요? 그리고 도무지 누굴 가르칠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저자가 선생이오? 조금 전 그자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때려죽이려는 중인데.”

“선생님이 맞으십니까? 선생님?”

남자의 멱살을 쥐고 흔들던 조반니는 로미오의 말을 무시하고 남자를 밀어 바닥에 넘어뜨렸다. 뒤로 나뒹굴며 테이블에 머리를 부딪친 남자는 넘어진 의자들에 깔렸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퍼지자 급사들이 달려와 조반니에게 달라붙었다.

“윽, 컥…! 당신 뭐야! 왜 갑자기, 쿨럭……!”

로미오가 손을 더듬거리며 술청을 넘어가려고 하자 이브가 어깨를 잡았다.

“금발 머리에 금색 눈을 가진 사내요. 미친 것처럼 보이지만 얼굴만은 멀쩡하군. 선생이라기보다는 예술가의 풍모가 강한 인상인데 정말로 아는 자요?”

때마침 조반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의 무례한 언행에 대해 당장 저분께 사과하십시오.”

“사과는 무슨…! 당신이 대체 누군데 내게 사과하라 마라야!”

“하십시오. 그것도 아주 정중하게 말입니다. 자, 하세요.”

“웃기고 있, 컥……!”

조반니가 남자의 멱살을 잡다 못해 목을 조르려 들자 급사들이 팔이며 가슴을 붙잡고 매달렸다. 소란이 커지자 로미오는 조반니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다급하게 이브에게 부탁했다.

“제가 아는 분이 맞습니다. 저분은 의사 선생님이십니다. 싸움을 말려 주십시오.”

팔짱까지 끼며 구경하던 이브는 솔깃해서 로미오를 쳐다봤다.

“내가 저자를 말리면 단테 놈들을 잡을 수 있게 도와줄 거요?”

로미오가 대답 대신 직접 술청을 넘어가려 하자 이브가 말렸다.

“농담이오, 농담.”

반은 진심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서도 은근히 뭉그적거리는데 술집 구석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저 여자, 무쇠 팔의 이브 아니야?”

“어디? 오, 정말이군. 그 ‘이브’잖아?”

“맞아, 저 팔을 보라고. 분명 이브 헤스야. 저자가 어떻게 이 술집에 있지?”

쑥덕대는 소리가 퍼지자 눈이 쏠렸다. 알 만한 사람들이 전부 그녀를 알아보고 귀엣말을 주고받자 이브는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술청을 뛰어 넘어갔다. 남자의 목을 조르기 직전인 조반니에게 다가가 한 손으로는 그의 가슴팍을 떠밀고 한 손으로는 넘어져 있는 남자의 멱살을 잡아 한 번에 일으켰다. 얼마나 힘이 셌던지 남자를 부축하기 위해 달라붙어 있던 급사들이 줄줄이 일으켜 세워졌다.

“술집이 난장판이 되기 전에 싸움은 이쯤 하쇼.”

조반니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이브의 철 의수를 내려다봤다. 자신의 가슴팍을 짚고 있는 그녀에게서 강한 힘이 느껴졌는데 의수 안은 비어 있었다. 가슴에 부딪혔을 때의 무게감과 안이 비어 있기 때문에 나는 헐거운 덜컥거림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의수 안쪽에 난 상처에서 통증도 느끼고 있었다. 팔을 거둘 때의 표정이 불편해 보였고 무엇보다 의수의 이음매 부분에서 고름이 섞인 진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오른팔의 철 의수, 은발, 붉은 눈, 그을린 피부, 용병처럼 보이는 옷차림. 조반니는 예리한 눈으로 이브를 핥듯이 뜯어봤다. 누군지 알 듯한데 그녀가 로미오와 어떤 관계이며 왜 여기 있는 건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여기엔 어떻게 오셨습니까, 선생님?”

로미오가 술청을 넘어 다가오자 조반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얘기했다.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들렀습니다. 괜찮으신가요?”

조반니가 밖에서 안을 훔쳐본 것을 아는 이브는 그의 거짓말에 팔짱을 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조반니는 로미오의 얼굴과 몸을 살피며 재차 괜찮은지 물었다. 로미오가 괜찮다고 대답했음에도 어린아이 대하듯 그를 계속 걱정하며 이곳저곳을 살폈는데 그 상냥한 태도에서 미묘함이 느껴졌다.

“왜 이 시간에 병원에 계시지 않고 이곳을 지나가고 계셨습니까?”

“저를 미행하는 자를 뒤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이 길목에서 놓쳐 주변을 둘러보던 중 술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목격했습니다. 화를 참지 못하고 저지른 일이지만 저자가 대위님께 무례한 말을 하는 것을 도저히 참고 볼 수 없었습니다.”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미행하는 자를 직접 쫓으시다니요. 아무리 생각해도 공안국에 검문을 부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직접 이렇게 뒤를 쫓아 봐야 그자가 누구인지 모르면 잡을 수 없을 겁니다. 그가 선생님을 유인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자가 오늘 낮에 제 병실 문에 구멍을 내 제가 하는 말을 엿듣고 있었습니다. 그 구멍을 뒤늦게 발견하고 즉시 막았으나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더 한 일을 꾸미려 들 겁니다. 저는 겁날 것이 없으니 제 걱정은 마세요. 오늘이야말로 그자가 누구인지 밝혀내야겠습니다.”

조반니는 태연히 설명했지만 벽에 난 구멍 이야기에 로미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자가 선생님께서 하시는 이야기를 몰래 엿듣기까지 했다는 말입니까?”

“보기보다 대담한 자입니다. 뭘 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감시하는 것이 목적인가 봅니다. 어쩌면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을 수도 있지요.”

“그런 짓을 하는 자라면 정말로 위험한 게 아닙니까? 혼자서 쫓으시면 안 됩니다. 도움을 청하십시오. 병실 문에 구멍을 낼 정도라면 다른 의사 선생님들께로 알리셔야 합니다.”

“아뇨. 제 손으로 잡겠습니다.”

이브는 이상한 모양을 한 조반니의 머리와 아무렇게나 겹쳐 입은 그의 옷을 훑어봤다. 미적 감각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껴입은 꼴을 보니 미친 자인 것 같기도 했다. 로미오와 무슨 사이인지 모르는 데다 대화의 내용이 끼어들 만한 것이 아니라 듣고만 있으니 조반니가 돌아봤다.

“그런데 이분은…….”

이브가 대답하려는데 조반니가 기다리지 않고 이어 말했다.

“당신은 분명 이브 헤스일 겁니다. 그렇지요? 하슬러 공국 출신의 괴력의 용병. 소문으로만 전해 듣다 여기서 이렇게 만나 뵙다니 영광입니다. 루바노에 계셨군요.”

조반니는 사내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며 여자들이 쉽게 거절할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거친 용병질에 잔뼈가 굵은 이브였지만 로미오의 파란 눈에 말문이 막혔던 만큼 이런 쪽으론 솔직했기 때문에 조반니의 미소가 그럭저럭 먹혔다.

“나를 잘 아오?”

“아무렴요. 바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도시에 대한 첫인상이 좋게 기억될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렇지 않아도 여기가 생각 외로 마음에 드오. 그런데 내 고향까지 알고 있는 자는 드문데 나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요?”

“익히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악명 높은 철혈의 용병 부대 ‘붉은 발’의 용병 대장으로 멘차카 전투에서 이름을 날리시지 않았습니까? 한데 이런 미인이실 줄은 몰랐네요.”

조반니가 예의를 지키되 겉치레처럼 들리지 않는 칭찬을 하자 이브는 헛웃음 비슷한 걸 지으며 악수를 청한 그의 손을 잡았다. 조반니가 루바노 남자들에 대한 편견을 바꾸기에 충분한 미남인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

“로지오와는 어떤 사이요?”

로미오에게 부탁할 일이 있는 이브였기 때문에 그녀는 조반니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가 로미오와 친하다면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누가 아는가. 그가 로미오를 설득해 줄지.

“로지오가 아니라 로미오입니다.”

조반니는 웃는 얼굴로 이름을 고쳐 주었으나 로미오를 향한 이브의 시선에 다른 감정이 섞여 있지 않은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보아하니 우연히 손님으로 술집을 찾은 듯한데 자코모와 다를 것 없는 자라면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눈 밖에서 로미오의 주위를 맴도는 것은 신경에 거슬리는 일을 만들 뿐이었다.

“저는 대위님과 같은 하숙집에 세 들어 사는 이웃 사이입니다. 대위님께서 급사로 일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런 일이 또 일어났네요.”

“로미오가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당신인 것을 알아차리고 내게 싸움을 말려 달라고 부탁했소. 여간 친한 사이가 아닌 듯하오.”

“대위님께서 제 발소리를 통해 알아차리셨나 봅니다. 기분이 좋군요.”

“그게 기분이 좋을 일이오?”

“그럼요.”

로미오는 자신을 향한 조반니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가 말 한마디 떼지 않았음에도 그인 것을 알아차렸던 건 발소리 때문이었다. 발소리를 통해 체격이 좋은 남자라는 사실을 먼저 느꼈고 그 발소리가 조반니의 발소리와 유사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신속하고 빠른 걸음 뒤에 갑작스러운 소란이 벌어지자 지난번에 조반니가 그를 미행했다고 오해해 어떤 사내를 공격했던 사건이 떠올랐다. 상대가 반항하기 전에 급습하듯 밀어붙이는 방식이 비슷했다. 공격을 당하는 상대가 위협을 직감하지 못하고 있다 갑작스레 고함부터 내지르는 것도 그때와 유사한 데다 오늘 그 비명을 지른 사내는 자신에게 욕될 만한 말을 한 불량배였다. 조반니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한 것은 괜한 억측이 아니었다.

그런데 거기까지 생각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일련의 일들을 놓고 보면 조반니는 이런 일에 꽤 자주, 그것도 그가 먼저 나서서 스스로 휘말렸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폭력적이었다. 하지만 조반니가 벌인 폭력적인 사건들과 그를 연결 지어 생각하려니 그것 또한 마뜩잖았다. 자신은 남들에게 조반니를 상냥하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설명해 왔다. 조반니가 벌인 일들만 놓고 보면 그는 참을성이 부족하고 남의 멱살을 쥐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 왈패 같았다.

그가 그런 사람이었던가?

“그런데 대위님과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시죠?”

“일전에 내게 시비를 걸던 손님들이 있었소. 그때 그가 내게 도움을 준 일로 알게 됐소. 오늘은 내가 단테 놈들을 잡는 데에 도움을 받기 위해 이 술집을 찾은 거요.”

“단테 놈들이라면…….”

“단테의 12인 놈들 말이오. 그놈들을 감옥에 잡아 처넣는 자에게 큰 연금이 내려진다는 소문을 들었소. 내 목적은 그 연금이요.”

조반니는 망설이거나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 연금의 액수가 상당해 그걸 노리고 밀고하려는 자들이 많긴 하지요. 하지만 대위님께서는 이미 퇴역을 하신 데다 이곳 일 때문에 도움을 드리기 힘드실 겁니다.”

“그래서 도움을 줄 때까지 끈질기게 부탁할 생각이오.”

이 술집에서만 벌써 두 번을 싸운 조반니를 급사들이 곱지 못한 눈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조금 전 그 사내가 얼굴이 포도주에 절은 채 조반니에게 다가왔다.

“당신! 대체 뭐야? 누구이기에 이런 행패야!”

켈룩대던 그가 로미오에게 윽박을 지르려 하자 조반니가 그사이를 가로막아 섰다.

“이분께 무례한 언사를 하신 것에 대해 사과하신다면 저도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보아하니 바치 분이 아니시군요. 이곳에 우연찮게 들른 외지인이십니까?”

“당신이 알 바 아니오!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사과를 하라는 거요? 저자에게 계집애같이 곱상하게 생겼다고 한 게, 익……!”

조반니가 목을 조르려는 것처럼 두 손을 벌려 보이자 남자는 움찔대며 뒤로 물러섰다. 멱살을 잡혔을 때 무지막지한 힘을 느꼈는데 도대체 무얼 하는 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팔뚝을 보니 어디 광산에서 금광을 캐기 위해 수십 년간 곡괭이질이라도 한 것 같았다. 흰자위를 뜨고 쳐다보는 금색 눈동자도 정신이상자의 그것 같았다.

“머리의 꼬락서니와 옷차림을 보니 당신도 제정신이 아니로군! 머리가 돌았으니 사람을 죽일 기세로 그렇게 덤벼들었겠지. 퉷, 이 도시에는 미친 자들만 모여 있나? 어이, 그만 가자고! 더러운 일만 겪었어.”

술값과 음식값을 바닥에 집어 던진 남자는 또 멱살이 잡힐세라 동료들을 이끌고 술집을 나갔다. 조반니가 보인 과한 행동에 의문을 느끼고 있던 로미오는 남자의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머리의 꼬락서니와 옷차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저를 미행하는 그자를 계속 찾아야 하는 데다 밤늦게 조사를 받으러 공안국에도 들러야 하니 오늘 저녁은 늦을 것 같습니다. 엔초와 먼저 저녁을 드세요. 그럼.”

“선생님,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할 말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자가 벌써 멀리 달아났을지도 몰라요.”

조반니와 로미오의 대화 속에서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것으로 이야기되자 이브는 머리를 굴렸다. 같이 살 정도로 친하다면 생각보다 더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대위님을 이곳에 이렇게 두고 가자니 발이 떨어지지 않는군요. 온종일 걱정이 됐던 이유가 이런 일을 직감해서였을까요? 막상 가려니 아침에 집을 나서시는 대위님의 뒷모습을 볼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듭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아쉬우면서도 애가 탑니다.”

낯간지러운 조반니의 말에 로미오는 이브를 의식한 듯 고개를 숙이며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브는 완전히 두 사람의 관계를 오해하고 둘의 대화를 듣지 못한 척 딴청을 부렸다. 음, 허기가 지는데 어디 남는 음식 없나?

“그건 그렇고…….”

조반니가 돌아서서 이브의 의수를 가리켰다.

“어깨 안쪽에서 진물이 나고 있군요. 의수가 녹이 슬면서 접합부가 곪아 상처가 생긴 걸 겁니다. 썩어 들어갈 위험이 있으니 가능한 한 빨리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시는 게 좋습니다. 바치 병원으로 오십시오. 제가 봐 드리겠습니다.”

“말은 고맙소만 가진 돈이 없소. 주머니를 털어 봐야 먼지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요.”

“그런 걱정은 접어 두세요. 돈을 받지 않고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정말이오? 농담을 하는 게 아니고 진심이오?”

듣던 중 반가운 얘기에 이브는 이자를 믿어도 되냐고 묻는 것처럼 로미오를 쳐다봤다. 곪은 상처 때문에 밤마다 잠들지 못할 정도였는데 무상으로 치료를 해 준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네, 거짓말이 아닙니다. 병원에 오셔서 저를 찾아 주세요. 대위님, 그러면 집에서 뵙겠습니다.”

로미오는 공안국이 할 일을 대신하려는 조반니를 말리기엔 그의 의지가 굳건해 더 이상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욕되는 말을 한 사내의 멱살을 잡은 것 역시 과한 처사라고 지적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고백한 그였다. 과했다고 지적하면 조반니의 말이 길어질 것이고 그 말의 내용은 자신의 말문을 막히게 할 게 뻔했다.

그래서 그가 그저 안전하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조심하십시오. 그자가 위험한 자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니 염려 마세요.”

이브는 간지러운 팔 안쪽을 벅벅 긁으며 술집을 나서는 조반니를 따라 나갔다. 로미오에게 물어도 됐지만 기왕이면 그에게 이름을 직접 듣고 싶었다.

“당신 이름이 뭐요? 내게 이름을 말해 주지 않았소.”

빠른 걸음으로 술집을 나서던 조반니는 이브를 돌아봤다.

“조반니 비스카르디입니다. 그럼.”

이브는 이상한 표정이 됐다. 그 사이 조반니는 저만치 멀어져 갔고 그가 골목 끝으로 모습을 감추고 나자 이브는 골똘한 얼굴로 턱을 만졌다.

“비스카르디?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비스카르디, 비스카르디…… 아!”

통령과 성이 같지만 이름 중 몇 글자를 잘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 이브는 신경 쓰지 않고 술집으로 들어갔다.

* * *

“계십니까?”

정중히 문을 두드린 노인은 옷소매에서 편지를 꺼냈다. 얼굴의 일부와 몸을 전부 가리는 검은 로브 위로 성성한 백발이 몇 가닥 흘러내려 있었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한 번 더 문을 두드리자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 안쪽에서 ‘누구세요?’ 하는 어린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스포르차 선생님께 드릴 편지를 갖고 온 사람이란다. 문을 열어 보렴.”

문이 빼꼼히 열리자 키가 작은 남자아이가 문손잡이에 매달려 있었다. 조심스러운 눈빛도 잠시 일전에 마주친 것을 기억한 듯 반색했다.

“할아버지는 저번에 선생님께 편지를 받아 가셨던 분이시죠? 그때 집 앞에서요. 맞죠?”

노인은 지난 몇 년간 죽은 식물 줄기로 뒤덮여 있었던 실내 정원에 꽃내음이 가득하자 머리를 넣고 정원 안을 들여다봤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1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꽃은 질색입니다, 벌레가 꼬여 성가실 뿐이죠.]

이 집의 주인은 정원을 왜 관리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아주 오래전에 그렇게 대답했었다.

“나를 기억하는구나. 스포르차 선생님께서 안에 계시면 불러다오.”

“집에는 저와 이 저택을 관리하는 분만 계세요. 그분은 지금 저녁을 준비하고 계셔서 바빠요. 스포르차 선생님은 곧 오실 거예요. 저한테 편지를 주시면 제가 전해 드릴게요.”

엔초가 손을 내밀자 노인은 편지를 옷소매에 도로 넣었다.

“이 편지는 직접 전해 주어야 하는 편지란다. 다음에 다시 오마.”

노인이 돌아서자 엔초는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안녕히 가세요.”

노인은 편지를 소매 깊숙이 넣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러다가 멀리서 지팡이를 짚고 걸어오는 젊은 사내를 발견하고 발길을 늦췄다. 얼굴을 유심히 보다 그가 자신을 지나쳐 조반니의 집 쪽으로 걸어가자 뒤따라가며 불렀다.

“잠시. 스포르차 선생님의 댁에 사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사내는 이쪽을 돌아보더니 경계하는 것처럼 눈빛이 매서워졌다. 지팡이를 고쳐 잡는 손에는 핏줄이 섰고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는 허공에서 기민하게 움직였다.

“저는 스포르차 선생님께 드릴 편지를 갖고 온 심부름꾼입니다. 로사티 3번가의 댁에 사실 때도 편지를 몇 번 전해 드렸지요. 그 댁의 이웃에 살던 분이 아니십니까? 스포르차 선생님께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이 편지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여기 편지가 있습니다.”

편지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편지 표면을 손으로 쓸어 소리를 내자 사내가 소리를 쫓아 고개를 움직였다. 얼굴에서 경계심이 거둬졌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내용이 담긴 편지니 부탁드리겠습니다.”

편지를 건네니 사내가 허공에 손을 들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 주자 그는 진짜 편지인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겉면을 만져 본 후 옷소매에 넣었다.

“누구라고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편지를 보여 드리면 아실 겁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사내는 마치 볼 수 있는 것처럼 목례로 인사를 받았다. 지팡이를 쓸며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그는 조반니의 집 앞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는 조금 전 그 사내아이가 나와 허리를 껴안았다. 두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자 노인은 걸음을 돌렸다.

거리가 조용해지자 잠시 후 저택의 문이 다시 열리고 엔초가 고개를 내밀어 밖을 내다봤다. 두리번거리며 살핀 엔초는 곧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창가로 다가가 한 번 더 밖을 내다본 엔초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3층으로 올라가니 로미오는 조반니의 방에 들어가는 대신 문틈 사이에 편지를 끼워 넣고 있었다.

“형, 그 할아버지가 갔어.”

층계가 어두컴컴해 엔초는 로미오의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나 전에도 그 할아버지를 본 적 있어. 그때는 선생님께서 그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줬어. 아마 그 할아버지는 재판장이나 교수님일 거야. 그렇게 생겼거든.”

“다음번에는 문을 열어 주지 마. 편지는 그분께서 어떻게든 스포르차 선생님께 전해 드릴 테니까 네가 응대할 필요 없어. 당분간은 스포르차 선생님과 나 외의 다른 사람들에겐 문을 열어 주지 마.”

“응, 그럴게.”

“오늘은 선생님께서 늦으실 테니까 먼저 저녁을 먹자.”

2층으로 내려가자 저택 관리인이 저녁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는 조반니의 부탁으로 오늘은 밤늦게까지 여기 머물 것이니 맡길 일이 있다면 알려 달라고 이야기했다.

로미오는 엔초와 저녁을 먹는 동안 그가 1층으로 내려가 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하고 창문을 여닫으며 밖을 살피는 소리를 들었다.

조반니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지 생각하느라 평소보다 느리게 식사를 하던 로미오는 지난번과 달리 접시가 바뀌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음식이 아침 식사를 할 때처럼 떠먹기 좋은 오목한 접시에 담겨 있었다.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식사를 하며 조반니를 미행한다던 자가 벌일 여러 가지 위험한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조반니라면 위험한 일과 맞닥뜨려도 쉽게 해결할 테지만 상대가 어떤 자일지 알 수 없는 이상 안전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안심하기 어려웠다. 의심하지 않으려고 해도 검은 망토의 사내가 떠올랐다. 그 사내가 조반니를 미행하는 자와 동일인일 가능성을 면밀히 따져 봤지만 부정도, 확신도 할 수 없었다. 필요하다면 자신이 공안국에 먼저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 따름이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이브에까지 미쳤다. 그녀는 자신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조반니가 이브의 치료를 자청한 것은 자신 대신 그녀를 설득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최악의 경우 이브가 자신과 조반니가 단테의 12인의 단원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될 것이다. 염탐꾼으로 잠입했다는 말을 그녀가 믿을지 미지수인 데다 그런 사정을 설명하기 전에 그녀가 제6군단에 밀고를 해 버리면 일이 꼬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성가신 상황이 생기는 것은 막아야 했으니 조반니도 그 점을 우려해 그녀를 자신에게서 떼어 내 주려 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조반니가 자신에게 했던 고백이 떠올랐다. 실제로 그는 그 고백 이후에 태도를 조금 달리했다. 자신이 불편하게 여길 만한 일을 전보다 더 세심히 봐주었고 전이었다면 엔초를 의식해 하지 않았을 말이나 행동을 다 같이 있는 식사 자리에서도 서슴없이 했다.

지금껏 그가 자신을 포섭 대상으로 여겨 접근했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고백 후 그것들이 다르게 해석됐다. 우연이라고 믿었던 일들의 전후 사정이 이해되며 그가 자신의 곁에 머물기 위해 했던 몇 가지 거짓말도 알아차리게 됐다. 자신의 형편을 신경 써 줬던 것을 그의 고백과 무관하게 볼 수 없었다. 조반니가 자신에게 그의 마음을 터놓던 순간을 떠올려 보면 그 순간마저도 그의 배려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거절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지 않았으며 지나치게 간절해하거나 낙심해 자신에게 죄책감을 심어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부쩍 갈고리 고양이 술집의 일을 신경 쓰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 같이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그는 오늘 하루 동안 위험하거나 어려운 일이 없었는지 자신에게 확인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는데 그가 하는 말의 대부분이 걱정하는 말이었다. 긴 대화를 하고 있노라면 결국은 그곳의 일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요지였고 조반니의 마지막 말은 대개 이런 식으로 끝났다.

[대위님께서 그곳의 일을 하지 않고 지내실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해가 질 무렵만 되면 급사로 일하고 계실 대위님께 무슨 나쁜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걱정이 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한눈을 팔다 가위로 제 손가락을 자를 지경이에요. 어느 날 갑자기 제가 손가락이 잘려 오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그러나 조반니가 그러면 그럴수록 이 집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그의 호의를 무턱대고 받는 것은 짐스러웠다. 이런 자신의 본심을 이야기하면 조반니가 펄쩍 뛰며 그런 생각은 접어 두라고 말릴 것이란 것도 알았다. 지난번에 옷과 지팡이를 선물 받았을 때 그에게 보답해 주고자 마음먹었으니 그 보답에 해당하는 선물을 전해 주는 것을 끝으로 이 집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의 관계는 이제 전과 같을 수 없었다. 자신이 그의 마음을 거절했다고 해서 조반니가 스스로의 진심을 억누르고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선택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 역시 한 끼 식사조차 함께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호의를 불편하게 느끼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며 그것 역시 선택에 의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여태껏 이 집에서 엔초와 함께 조반니의 보호를 받으며 안락하게 생활해 왔지만 그가 마음을 고백한 이상 이 집에서 계속 함께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형. 나, 하숙집이 복구돼도 스포르차 선생님과 이 집에서 계속 같이 살고 싶어.”

저녁 식사를 끝낸 뒤 이것 역시 단순한 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지팡이를 닦고 있을 때 엔초가 불쑥 말했다.

“만약 하숙집으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스포르차 선생님과 같이 살고 싶어. 2층과 3층의 이웃이 아니라 우리 집에서 함께 말이야.”

엔초는 생일 선물로 받은 동화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읽고 있었다. 로미오는 엔초가 책을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

“이 집에서 선생님과 함께 사는 게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응. 이 3층 저택도 좋고 선생님도 좋아. 선생님이 저번에 나한테 동화책도 읽어 주셨는데 형은 모르지? 선생님은 동화책을 정말 재밌게 잘 읽어 주셔.”

“동화책? 언제?”

“지난번에 내가 좋지 않은 꿈을 꾸고 밤늦게 깼을 때 읽어 주셨어. 복도로 나와서 형의 방으로 가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위층에서 내려와서 형을 깨우지 말라고 하면서 책을 읽어 주겠다고 하셨어. 침대 맡에 앉아서 읽어 주셨는데 꼭 책 속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여러 목소리를 내면서 읽어 주셨어.”

지팡이를 닦던 로미오의 손이 느려졌다. 동화책을 읽어 주는 것은 자신이 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엔초에게 부족했음이 실감 나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선뜻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동시에 조반니에게 고마움도 느꼈다.

“선생님이 동화책을 읽어 주신 적이 있구나. 몰랐네. 그게 좋았어?”

“응! 그렇게 책을 읽어 주시니까 금방 다시 잠들 수 있었어. 선생님이 매일매일 책을 읽어 주시면 좋겠어.”

“형도 동화책을 읽어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미안해.”

“괜찮아.”

엔초는 로미오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솔직한 말을 계속했다.

“선생님이 아침마다 따뜻한 수프를 차려 주는 것도 좋아. 김이 나는 부드러운 빵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좋아. 선생님이 나한테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전부 사 주겠다고 하신 적도 있어. 그리고 형이 저녁 늦게 돌아오는 날에는 대신 함께 놀아 주겠다고도 하셨어.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도 하셨어. 나한테 그림을 가르쳐 주신 적도 있고 조각하는 걸 봐주겠다고 하신 적도 있어.”

엔초는 주머니에 넣어 뒀던 과자를 꺼내 먹었다. 매일 먹고 있는데도 아직 선물 상자 속에 사탕이며 과자가 넘쳤다.

“선생님은 늘 나한테 잘해 주시니까 나도 선생님이 좋아. 선생님이랑 계속 같이 살고 싶어.”

로미오는 부모이자 형인 자신이 해 줬어야 할 일을 대신해 준 조반니에게 말로 다 하지 못할 감사함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보지 못할 때에도 엔초에게 한결같았다. 이 집에서 함께 사는 동안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 집에는 재밌는 것도 많아. 지난번에 선생님이 그려 놓으신 특이한 장난감 그림을 봤어. 불을 붙이면 작은 구슬이 화살처럼 빠르게 발사되는 막대기 장난감인데 바퀴와 손잡이가 달려 있었어. 선생님은 그걸 ‘총’이라고 이름 붙이셨나 봐. 그림 옆에 그렇게 적혀 있었어.”

“그래?”

“그리고 공중에 떠다니는 새 모양의 장난감 그림도 봤어. 사람이 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크기로 그려져 있어서 장난감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림 옆에 아주 어려운 말이 써져 있었는데… 음, 뭐랬더라…… 아! ‘동력’, ‘역학’ 그런 말이 써져 있었어. 또, 사람 모형을 한 장난감 갑옷도 봤어. 선생님은 그 장난감 갑옷 안에 스프링이랑 톱니바퀴를 달아서 저절로 움직이게 할 생각이신가 봐.”

로미오는 다 닦은 지팡이를 의자 옆에 걸쳐 두며 넌지시 말했다.

“집 안의 물건을 함부로 만진다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던 걸 기억하지? 그림도 마찬가지야. 선생님께서 먼저 보여 주신 게 아니라면 멋대로 들춰 보거나 해선 안 돼. 선생님이 계시지 않을 때 방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도 실례되는 행동이야.”

“마음대로 본 게 아니야. 하숙집에 불이 났던 날 형이랑 같이 잤던 방 침대 밑에서 발견했어. 침대 밑에 그림이 떨어져 있었는데 먼지가 쌓여 있었어. 몰래 본 게 아니야. 보고 나서 바로 다시 침대 밑에 넣어 놨어. 그리고 거기에 형 그림도 있었어.”

“내 그림?”

“형 얼굴이 그려진 그림이었어. 선생님이 형을 보고 그린 것 같아. 보자마자 형이란 걸 알았어. 아주 똑같았거든.”

로미오는 조반니가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는 사실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나를 보고 그리신 게 아닌데 네가 알아볼 정도라면 아주 잘 그리셨겠구나.”

예술에 대해 전혀 모르는 로미오는 자코모나 조반니와 같은 조각가들이 주변 사람들을 그리는 것이 특이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관찰하고 종이 위에 옮겨 담는 것이 그들의 일이니 대상이 사람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다만 조반니가 자신에게 부탁하지 않고 상상만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그에게 지금껏 받은 것이 있으니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었다. 자신을 그리게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도 무례하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근데 그 그림 표면에 녹은 설탕 같은 게 잔뜩 붙어 있었어.”

엔초는 한 입 남은 과자를 꿀꺽 삼키더니 옷에 묻은 가루를 털었다.

“예전에 형의 옷에도 그런 게 묻어 있는 걸 본 적이 있어. 그리고 스포르차 선생님이 이사를 와서 다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던 날 식탁 바닥에서도 비슷한 걸 봤어. 하얗고 끈적거리고 미끈거리는 것 같았는데 더러워 보여서 만지지 않았어. 다음 날 다시 보니까 가루처럼 말라붙어 있었는데 형의 그림 위에도 그런 자국이 있었어. 그게 뭘까?”

엔초는 순간 로미오의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을 보고 옷을 털던 손을 멈췄다. 로미오가 눈을 크게 뜰 때면 그의 파란 눈이 평소보다 더 또렷하고 크게 보였는데 지금도 그랬다.

“왜 그래, 형?”

엔초는 로미오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영문을 몰라 동화책을 덮었다. 로미오는 차마 입을 뗄 수도 없을 만큼 큰 당혹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는데 얼마나 놀란 건지 속눈썹이 떨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왜 그렇게 놀라?”

“…….”

“형?”

입술을 벌리고 있지만 로미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놀란 표정 그대로 그냥 그렇게 있기만 했다. 충격을 받은 것처럼 입을 벙긋거리다 숨을 삼켰다.

“그림을 보여 줄까? 내가 침대 밑에 다시 넣어 둬서 아직 거기 있을 거야. 선생님은 그 그림이 침대 밑에 떨어져 있는 걸 모르시는 것 같아.”

“……아냐, 엔초. 괜찮아, 됐어.”

엔초는 로미오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쪼르르 방으로 갔다. 등 뒤에서 지팡이가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만류하는 로미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미오는 놀라면서도 당황한 동시에 주저하고 있었지만 엔초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 밑을 더듬었다. 뿌옇게 먼지가 앉은 그림을 꺼내 로미오의 얼굴 그림인 것을 확인하고 가져갔다.

“여기 있어.”

로미오에게 건넸지만 로미오는 손을 내밀긴커녕 뒤로 물리며 그림을 받지 않았다.

“괜찮아… 안 봐도 돼. 그림이 있어도 난 볼 수 없어. 알잖아.”

“그럼 이걸 만져 봐. 만져 볼 수는 있잖아. 왜 이런 게 우리 집에도 있고 이 그림에도 있는 거야?”

엔초가 그림을 내밀자 로미오는 몸을 뒤로 젖혔다. 로미오가 그림을 무서워하는 것처럼 반응하자 엔초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왜 그래? 무서운 그림이 아니라 형 얼굴이야.”

“……알아. 하지만 만져 보지 않아도 돼.”

로미오가 그림을 받으려고 하지도 않자 엔초는 머리를 긁적였다. 침대 밑에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그림은 표면에 허연 것이 딱딱하게 말라붙어 눅눅했다. 점점이 혹은 무질서하게 뿌려 놓은 그것은 언뜻 밀가루 반죽 같기도 했다.

“이게 뭔지 궁금해서 냄새를 맡아 봤는데 이상한 냄새가 났어. 형은 이게 뭔 줄 알아?”

“…….”

그림을 높이 들어 들여다보는데 로미오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냄새 맡지 마, 엔초. 그리고 그림을 가져다 놔. 선생님께는 그림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도록 해. 이 그림에 대한 얘기는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

비밀로 해야만 하는 이유를 물으려는데 아래층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낯선 여자의 목소리도 함께였다.

* * *

“그 말씀은… 그날 참석하셨던 의사 협회의 출입 기록에 선생님의 성함이 기록돼 있지 않다는 이야기군요?”

“그렇습니다.”

티모테오는 조반니의 머리 모양과 옷을 흘끔대는 걸 참기 위해 작성 중인 조서에 시선을 고정했다.

조반니는 서로 색이 다른 긴 옷과 짧은 옷을 겹쳐 입고 등 뒤에 진홍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는 내기라도 한 것 같은 난해한 옷차림이었지만 지금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기 때문에 두어 번 흘깃댄 뒤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흠… 곤란하게 됐네요. 선생님께서 그 시각에 모임에 참석 중이셨다는 것이 기록으로 입증돼야만 이번 사건과 무관함이 인정되는데 말입니다. 참석한 의사 협회가 선생님께서 속해 계신 의사 협회도 아니었던 데다 정기 모임은 더더욱 아니었고 모임이 진행되는 동안 제일 뒷자리에 잠깐 앉아 계셨다가 곧 다시 나오셔서 출입을 입증해 줄 자도 없으니…… 한 사람이라도 좋은데 정말로 없겠습니까? 선생님이 그날 그 시각에 그곳에 계셨다는 사실을 목격한 자가 단 한 명만 있어도 좋습니다.”

“분주하게 논의가 오가던 와중에 조용히 들어갔던 데다 오래 앉아 있지 않고 금방 나와 안타깝게도 저를 본 사람은 없을 겁니다.”

티모테오는 조반니가 자신의 얼굴을 빤히 보자 표정을 관리했다. 그가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어 서로의 얼굴이 꽤 가까웠는데 조반니는 조사가 시작되고 자신의 눈을 단 한 번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보고 있었다.

“살해되신 분과의 친분 관계는 어느 정도였죠?”

“그의 부탁으로 대리석이나 석고를 빌려줄 정도는 됐습니다. 자코모의 사정이 나쁘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늦은 밤에 이뤄진 조사는 조반니의 진술로 시작됐는데 그는 자코모가 살해당하던 날 의사 협회의 모임에 참석했다고 주장하며 협회 중에 오고 간 내용을 설명했다. 로미오를 조사한 직후 그날 조반니가 참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의사 협회의 협회장들을 모두 불러 조사했는데 그들이 진술했던 내용과 일치했다.

문제는 그날 조반니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목격한 이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반니는 그 이유에 대해 같은 의사 협회라 할지라도 협회의 성격이 서로 다른 데다 병립되지 않는 학파를 가진 의사들끼리 사이가 좋지 않아 자신이 속하지 않은 다른 협회의 모임에 몰래 참석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설명했다. 조반니는 그날 그 의사 협회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엿듣기 위해 초대되지 않았음에도 그 자리에 몰래 갔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조반니가 그 시각에 협회 모임에 참석 중이었다는 주장에 대한 증거는 그의 진술이 유일했다. 입증해 줄 기록이나 목격자가 없는 상태니 무턱대고 믿을 수 없었다. 설마하니 그가 그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일까 싶으면서도 범인이 아닐 확률을 배제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미심쩍음을 느꼈다.

“그날 문간에서 그분과 대위님께서 이야기를 나누셨다고 알고 있는데 대화의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로미오와 조반니가 공모를 해 자코모를 살해했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확인이 필요했다. 두 사람이 미리 말을 맞췄을 경우 진술 과정에서 어떻게든 허술한 점을 포착해 낼 생각이었다. 지금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조반니가 그 시각에 정말로 협회의 모임에 참석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평범한 대화였습니다. 대위님께 이미 전부 대화의 내용을 들으셨을 텐데요?”

“확인차 여쭤보는 겁니다.”

조반니는 양쪽 눈썹을 쭉 치켜올리더니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티모테오가 눈치를 보듯 받아 적을 준비를 하자 조반니는 그날의 대화의 내용을 설명했다. 자코모가 그의 험담을 했다더라는.

“그 후에 제가 다음에 다시 찾아오라며 자코모를 돌려보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시는 걸 보고 대위님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가셨습니까?”

“네.”

조반니가 볼 수 없도록 조서를 삐딱하게 젖힌 티모테오는 턱을 괬다. 그날의 대화 내용을 이번 사건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에 조반니는 험담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남을 살해할 만한 인물이 전혀 아니었다.

“저를 의심하시는 이유를 이해하지만 저는 이번 사건과 무관합니다. 제게는 자코모를 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날 그가 그렇게 살해당한 것은 우연이며 제가 만약 그를 살해했다면 필시 저와 그 사이에 강한 살해 동기를 느낄 만한 일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던가요? 조사를 하셨으니 아실 겁니다.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는 것을요.”

조반니의 말이 사실이었다. 굳이 따진다면 자코모가 조반니를 살해하는 것이 더 말이 됐다. 자코모는 오랫동안 궁핍한 생활을 해 오고 있었고 조사 당시 그의 집에는 제대로 된 옷 한 벌조차 없었다. 돈이었든 명예였든 자코모가 조반니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는 것이 더 믿을 만했다.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였다. 그리 말 되는 이야기는 아니나 그 문제라면 조반니에게 살해 동기를 부여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대위님께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만 알려 드리는 겁니다. 자코모 본도네의 집에서 대위님의 얼굴 그림 외에도 수십 장의 그림을 추가로 발견했습니다. 대위님께서 앉거나 누워 있는 등 다양한 자세를 취한 것에서부터 여러 종류의 옷을 입고 있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무척 많았습니다. 제가 비록 그림에 조예는 없으나 아무리 봐도 그게… 별 뜻 없이 그린 그림은 아니었습니다.”

순간 조반니는 탁자 아래로 내리고 있던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표정만은 태연히 유지했지만 티모테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통제할 수 없는 극렬한 분노를 느끼고 목부터 서서히 붉어졌다.

“조심스러운 추측이지만 그분께서 대위님께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놀랍군요. 자코모가 설마하니 대위님께…….”

조반니는 거칠어지는 숨결을 애써 감추며 주먹을 더 굳게 쥐었다. 죽은 자코모에게 욕설과 악담을 퍼붓고 그의 시체에 침을 뱉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버러지만도 못한 그가 로미오에게 그런 감정을 품었다는 사실에 이성이 뿌리 뽑혔지만 침착하게 연기를 했다.

“자코모가 대위님을 두 번밖에 만나 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쩌다 그런 마음을 품게 된 걸까요?”

티모테오는 옷깃에 가려 붉으락푸르락해진 조반니의 목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에게서 엿보이는 감정을 포착하기 위해 눈의 깜빡거림조차 최소화하며 조반니의 눈가와 입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조반니와 비토리오 사이에 있었던 소문을 알고 있는 티모테오였다. 조반니가 동성의 사내에게 끌리는 것은 사실이니 로미오에게 마음이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었고 그렇게 가정하면 자코모를 죽일 이유가 생겼다.

“자코모가 대위님을 그리고자 했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요. 어쩌면 그날도 제가 아니라 대위님을 만나기 위해 집으로 찾아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불쌍한 자코모 녀석.”

조반니가 안타까움에 가벼운 한숨을 내쉬자 티모테오는 고민에 잠겼다. 자모코와의 사이를 고려할 때 조반니는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적당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가 만약 범인이라면 실로 대단한 연기력이었다. 지금 당장 바치에서 가장 잘나가는 극단으로 가 가장 까다로운 연기력을 요하는 배역을 꿰차 루바노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가 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헛짚었다는 생각에 티모테오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혹시 대위님께서 자코모 본도네와 관련해 선생님께 별다른 이야기를 하신 적은 없습니까?”

“자코모가 대위님께 그림의 대상이 되어 줄 것을 부탁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으나 그 이상은 모릅니다. 애초에 제가 두 분의 만남을 주도한 것이 아닌 데다 대위님께서는…….”

조반니는 말을 하다 말고 별안간 이야기를 멈췄다. 그러곤 무언가 비밀스러운 사실을 갑작스레 깨달은 것처럼 티모테오의 얼굴을 뚫어져라 봤다.

“왜 그러십니까?”

“…….”

“선생님?”

“…….”

조반니는 느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형형한 눈빛 속에 광기가 어렸다.

“……대위님께선 자코모의 마음을 전혀 모르셨을 겁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었어요. 조사는 이쯤 하면 충분할 것 같은데 궁금한 점이 아직 남아 있는지요?”

* * *

“누구 안 계십니까?”

문을 두드린 조반니는 빵집 안을 들여다봤다. 늦은 시각이었고 불이 꺼져 있었지만 주인이 아직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공안국을 나와 이곳까지 걸어오는 내내 자코모의 일로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문고리를 부술 기세로 거칠게 흔들었다. 그러나 창문이 요란하게 흔들리는 소리만 들릴 뿐 빵집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젠장.”

조반니는 문 앞을 서성거리다 별수 없이 돌아섰다. 내일 아침 일찍 빵집의 문이 열리자마자 가져갈 수 있도록 갓 구운 사과파이를 부탁하려고 들른 것이었는데 예상대로 시간이 너무 늦어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휑한 밤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도 몇 없었다.

포기하고 발길을 돌린 조반니는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도착했다. 불빛이 비치지 않는 2층을 올려다본 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단단히 걸어 잠그는데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2층으로 이어지는 정원의 문을 열자 계단 머리 위에 로미오가 양초를 들고 서 있었다. 집까지 오는 동안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날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 있던 조반니는 로미오를 보고 손의 힘을 스르르 풀었다.

“아직 주무시지 않고 계셨군요?”

“예… 선생님께서 돌아오시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반니는 정원 문을 잠그고 계단을 올라갔다. 기다렸다는 로미오의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계단 통로가 어두워 그 미소는 어둠에 묻혔다.

“……선생님을 미행한다던 그자의 일이 어떻게 됐을지 궁금합니다. 잡으셨습니까? 공안국의 조사도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로미오의 목소리가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 줘 조반니는 가뿐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조사는 별 탈 없이 잘 받았습니다. 범인에 대한 단서가 부족한 것 같더군요. 저를 미행하던 자는 놓쳤지만 그자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그것도 의외의 곳에서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차근차근 이야기해 드릴 테니 섣불리 놀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조반니는 로미오에게서 양초를 받아 들었다. 그에게 양초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아마 밤늦게 돌아올 자신을 위해 켜 뒀을 것이다.

“그보단, 오늘 갈고리 고양이 술집에서 별일은 없으셨나요?”

“예, 없었습니다.”

실내복 차림으로 자신의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로미오의 존재가 자코모에 대한 분노를 완전히 가라앉히자 등 뒤에서 따라 오는 로미오의 발소리가 즐겁게 느껴졌다. 로미오는 발소리마저도 그다웠다. 날씬한 몸으로 사뿐사뿐 걷는 귀여운 발소리.

“저녁에 손님 두 분이 다녀가셨습니다. 선생님께 전해 달라며 편지 한 통을 갖고 오신 분과 갈릴레아 자니라는 이름의 교수님 한 분이십니다. 편지는 선생님의 방문 앞에 두었고 갈릴레아 자니 교수님께선 말을 전해 달라고 하신 뒤 돌아가셨습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선생님께서 부탁하셨던 책을 구하기 힘들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해부학서 말입니다.”

“그렇군요. 꼭 읽어 보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어쩔 수 없게 됐네요.”

“그 책이 무슨 책입니까?”

“아주 옛날에 출판된 어느 저명한 해부학자의 해부학서입니다. 구하기가 까다로워 갈릴레아 자니 교수님께 부탁드렸던 일인데 역시 구하기 힘든가 봅니다.”

로미오는 복도를 앞서 걷는 조반니의 뒤를 따라갔다. 걸음걸이가 어딘가 어색해 보였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조반니와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며 걷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갈릴레아 자니라면 지난 재판 때 선생님의 혐의를 증명하기 위해 참고인으로 참석했던 분이 아니십니까?”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그 재판을 계기로 그분과 편지를 주고받게 됐지요.”

“그분이 책을 구하지 못해 크게 죄송스러워하시더군요. 재판에서 그렇게 만나신 분인데 선생님께 도움을 드리고 계신가 봅니다.”

“비록 재판에서는 서로 견해가 엇갈렸지만 그날 재판정을 나오는 길에 짧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분께서 제게 공박을 가한 것을 사죄하시기에 흔쾌히 사과를 받아드렸죠. 저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고 인정하시면서 오래전에 출판한 제 해부학서를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하셨습니다.”

조반니가 뒤를 돌아보며 말하는 기척을 느낀 로미오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그린 자신의 얼굴 그림이 떠올랐다.

“그러셨군요…….”

로미오는 자신의 그림에 묻어 있었던 것에 대한 생각을 멈추기가 힘들어 부자연스레 목덜미를 쓸었다. 엔초에게는 대답을 얼버무렸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너무나 명백했다.

“오늘 중앙 지부에서는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나요?”

로미오는 조반니가 자신의 그림으로 수음을 했다는 사실에 그를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어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엔초가 겁탈의 흔적을 목격했다는 사실에 대한 섬찟함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남에게 밝힐 수 없는 부끄러운 말이 적힌 조반니의 비밀 일기를 훔쳐본 기분이었다. 흡사 조반니가 실제로 수음하고 있는 장면을 은밀히 훔쳐본 기분까지 들었다.

그건 조반니의 사적인 일이었다. 남에게 알릴 필요가 없는 데다 그가 직접 보여 주거나 떠벌리지 않은 이상 죄를 따져 물을 수 없었다. 전혀 불쾌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지만 불쾌함과 모욕감을 느낀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멋대로 남의 편지를 훔쳐본 주제에 거기에 적힌 낯뜨거운 말을 지적할 순 없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해도 마음만은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조반니가 자신에게 다른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고작 며칠 만에 그가 그림 속 자신을 보며 수음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낯을 들고 그를 대하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조반니가 다른 사람과 동침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이든 둘 다 조반니의 사사롭고 은밀한 비밀인 것만은 분명하니 적어도 자신의 조심성을 탓하며 조반니에게 사과라도 할 수 있는 후자가 나았다. 수음의 흔적이 남은 그림을 발견한 것은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조반니가 그 그림으로 했던 행위는 조반니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함께한 사람도 없었으며 오로지 그 혼자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재미였다.

따지고 보면 조반니는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비토리오의 일로 취조를 할 당시 그가 했던 거리낌 없는 말을 기억했다. 자신의 얼굴 그림에 뿌려진 그것에 대한 일은 사과를 받을 일도, 할 일도 아니었다. 언급해 봐야 조반니를 대하는 것이 껄끄러워지기만 하는 데다 자신이 모를 것이라고 믿고 있는 조반니를 난처하게 만들 뿐이었다.

자신이 그 그림을 알고 있다는 걸 조반니가 눈치챈다면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피차 서로의 얼굴을 보기가 거북해져 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세 분이서 함께 팔레르모 사립기숙학교를 방문하셨다면…… 대위님? 저녁을 드시면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표정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눈앞이 환해졌다. 조반니가 얼굴 앞에 촛불을 가까이 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와 가까이서 얼굴을 맞대고 있다고 생각하자 절로 시선을 피하게 됐다. 지극히 사사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그가 자신을 생각하며 수음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됐다. 자신의 앞에서 한없이 상냥하고 친절한 그가 그런 행위를 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음이 복잡해 조반니와의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산다는 것은 이런 문제까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었다. 역시 이 집을 빨리 떠나는 게 좋았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엔초가 말썽을 피운 건가요?”

“……아닙니다. 졸려서 그러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선생님을 미행하던 자가 누구였습니까? 말씀하시는 걸 들어 보니 크게 위협이 될 만한 자는 아닌 모양입니다.”

조반니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저를 미행하던 범인은 티모테오 우초 경사였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로미오가 눈가를 찌푸렸다. 생각지 못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우초 경사가 말입니까?”

“제 병실 문에 구멍을 낸 것도 그고 오늘 저녁 제 뒤를 따라왔던 것도 그입니다. 그는 제가 자코모를 죽였다고 의심해 병원에 사람을 보내 저를 감시했습니다. 자코모가 살해되기 전에 저를 미행했던 것은 제가 자코모를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의사 협회에 참석했다는 제 주장을 전혀 믿지 않으며 제가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가 제 해부학서 출판 축하회에 왔던 걸 기억하실 겁니다. 시체 매매 혐의를 통보하기 위해 왔으나 진짜 목적은 저를 감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단테의 12인의 단원이라는 사실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제 뒤를 계속 밟는 이상 언젠가는 그 사실도 들키게 될 겁니다. 내일부터는 행동거지를 더욱 조심하며 주위를 잘 감시해야겠습니다.”

로미오는 조반니가 하고 있는 이야기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껏 조반니를 미행했던 것이 티모테오라니?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가 어떻게 선생님을 의심할 수 있었단 겁니까? 다른 일도 아니고 살인 사건인데 무슨 근거로 이번 일을 미리 감지하고 선생님께 사람을 붙였단 말입니까?”

“그것까진 모릅니다. 하지만 우초 경사가 범인인 것은 확실합니다. 병원에 숨어들었던 것은 그의 측근이지만 오늘 저를 미행하다 덜미가 잡힐 뻔한 것은 우초 경사 본인이 맞습니다. 보기보다 약삭빠른 자입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저를 미행했던 주제에 시치미를 떼고 저를 공안국으로 불러 조사했으니까요. 지난번 재판 때도 분명 그자가 저를 감시하기 위해 재판정에 사람을 몰래 들여보냈을 겁니다.”

“우초 경사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증거 말입니다.”

“없습니다. 하지만 의심할 길 없이 명백합니다. 우초 경사에게 미행을 그만둘 것을 부탁하면 그는 거짓말로 둘러대며 제가 이번 사건의 범인임을 확실시하기 위해 압박을 가할 겁니다. 죄 없는 시민을 감시하며 대화까지 엿들으려는 하는 것은 재판까지 갈 만한 일이니 현장을 잡기 위해 당분간 숨죽이고 있겠습니다. 이 일이 알려지면 우초 경사는 더 이상 공안국에 남아 있지 못할 겁니다.”

조반니는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로미오는 그의 이야기에 두서가 없는 데다 인과관계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일련의 일들을 짜 맞춰 우초 경사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우초 경사는 저를 의심하고 미행한 것에 대해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될 겁니다.”

조반니가 미행과 감시를 당하는 이 상황에 위협감과 불안감을 느낀 것일까. 그래서 무관해 보이는 우초 경사를 지목해 의문을 풀려는 것일까. 그의 뒤를 밟는 우초 경사를 현장에서 잡은 것도 아니고 병원과 재판정에 숨어들었다던 그자가 우초 경사의 사람이었다는 증거도 현재로선 없는데 조반니는 자신의 의심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우초 경사가 이번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조반니를 의심한 이유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이유를 이해한다 치더라도 그 방식이 공안국 간부라는 지위에 맞지 않았다. 조반니를 범인으로 의심했다면 미행을 하기보다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 그를 조사하고 자코모를 조반니에게서 미리 떼어 내 보호하는 것이 더 유리했을 것이다.

우초 경사가 조반니와 자코모 사이를 전부터 눈여겨봤고, 두 사람 사이의 어떤 미묘한 기류를 감지했으며, 조반니가 사람을 손쉽게 죽일 만한 간악한 자라고 오해하고 있었어야만 이번 일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조반니에게 우호적인 사람들 중 하나였고 조사 당시 자코모가 누구인지도 몰랐던 눈치였다.

조반니와 자코모의 관계도 몰랐고, 살인 사건의 조짐 또한 감지하지 못했으며, 조반니에게 여태껏 호의를 갖고 있었으나 이번 살인 사건을 계기로 조반니를 갑자기 의심하게 됐다기엔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미행을 당했다는 조반니의 말과 앞뒤가 맞지 않았다.

“우초 경사가 선생님을 의심했던 이유가 대체 뭐란 말입니까? 선생님께서는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제가 시체 매매 혐의로 재판을 받은 전력이 있는 데다 오래전 일이지만 술집에서 방적공을 죽였다고 오해를 사 재판정에 섰던 적이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저는 늘 그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곤 합니다. 제가 바치의 주정뱅이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갈고리 고양이 술집에 자주 드나들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데다 싸움이 벌어졌을 때 그 상황을 중재하기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보니 그런 일에 휘말리는 것인데 우초 경사는 그 일로 저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제가 폭력적인 사람이라 살인쯤은 쉽게 저지를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게 호의적인 체하지만 저를 계속 감시했을 겁니다.”

조반니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눈가를 문지른 그는 엉망으로 구겨진 망토 끝자락을 손으로 툭툭 쳐 폈다.

로미오는 앞뒤가 맞지 않는 조반니의 말을 쉽게 믿지 못하면서도 일단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조반니의 목소리는 지친 것처럼 들렸는데 이 일에 주의를 쏟느라 피로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남들에게 오해를 받는 것에 억울함을 토로하는 그의 심경이 이해되었기 때문에 그의 추론이 신뢰하기 어렵다고 따지는 대신 우선 잠자코 있었다.

“제가 싸움을 즐기고 법을 어기길 좋아해 다툼에 휘말리고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 우연한 일들로 싸움에 휘말리고 재판을 받다 보니 그런 사람으로 보여지는 겁니다. 시체 매매 혐의로 재판을 받았을 때도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이들이 제게 좋지 못한 시선을 보냈습니다. 저의 결백을 믿어 주는 이들도 많았지만 저를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 따위는 모르는 무뢰한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표면적으로 저를 알거나 짧은 대화 몇 마디만 나눠 본 사람들은 항상 그렇습니다.”

조반니는 복도의 창을 통해 밖을 살폈다. 온종일 먹은 것이 없어 허기가 졌지만 음식을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창밖만 계속 살폈다.

“대위님께서도 비토리오를 동정할 줄 모르는 냉혈한이라고 저를 오해하셨지요. 어딜 가든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걸 보면 제게 문제가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라는 사람이 남들에게 오해를 사기 쉬운 인간이라서요.”

로미오는 조반니가 오늘 술집에서 손님에게 주먹질을 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도 은연중에 그것이 여태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폭력적인 면모라고 이해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조반니가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했다.

“오늘 술집에서 대위님께 모욕적인 말을 했던 자의 멱살을 잡은 것은 이성을 잃고 덤빈 것이 맞습니다. 인정하겠습니다. 사과해 줄 것을 정중히 먼저 요구했더라면 좋았을 테지만 그가 대위님을 향해 무례한 말을 한 순간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렇게 화내실 필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자의 동료들이 술집에 있어서 선생님께서 크게 다치실 수도 있었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조반니의 목소리가 풀이 죽은 것처럼 흐려졌다.

“대위님은 제게 애틋하고 아까운 분이십니다. 낯모르는 자에게 그런 말을 들어서는 안 되는 분이시지요. 그저 이렇게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아쉬울 정도로 제게 소중한 분이신데 그렇게 막 대해지시는 걸 보니 억울한 마음까지 들더군요. 대위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들을 분이 아니신걸요.”

눈앞에서 듣고 있기 힘든 낯부끄러운 말이 쏟아지자 로미오는 할 말을 잃고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조반니가 하는 말이 목덜미를 살살 쓸어 대는 보드라운 깃털처럼 느껴져 대꾸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자신이 아니었다면 조반니가 그 사내의 멱살을 쥘 일은 없었을 테니 감사하다고 말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기 전에 조반니가 말을 이었다.

“냇가에서 우연히 주워 온 아름다운 조약돌이 길가로 굴러가 사람들의 발에 차여 굴러다닌다면 화나는 게 당연할 겁니다. 보기도 아까울 만큼 소중해 고운 손수건에 늘 싸 두었던 것인데 누군가가 그저 돌멩이 취급해 발로 차다니요.”

앞서보다 더한 말에 로미오는 감사하다고 말하기 위해 벌렸던 입술을 바로 다물었다.

그대로 가만히 있자 짧은 정적이 흘렀다.

“…….”

누군가를 마음 깊이 사랑해 본 적이 없다고 해서 그렇게 대해지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조반니의 마음에 부응할 수 없다곤 하나 그가 자신에게 한 말들의 무게를 모르지 않았다. 그의 눈빛을 볼 수 없지만 그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지 짐작 갔다. 아무리 목석같다고 해도 귀가 있는 이상 조반니가 하는 낭만적인 말을 들을 수 있었고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비유하는 말로 곱고, 아름답고, 예쁘다는 말을 썼다. 전에는 조반니가 자신을 사내로 보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지만 그의 고백을 듣고 난 지금은 그것이 그만의 표현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누군가가 그런 표현을 할 때 단호히 선을 긋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누군가의 마음을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다른 종류의 애정이지만 어려서 부모에게조차 받아 본 적 없는 마음이었고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지난번 조반니의 고백 때 자신은 사내를 사랑할 일이 없는 데다 조반니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다고 단언했음에도 자신을 소중한 무언가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조반니를 지적할 수가 없었다. 그를 지적하는 것은 그의 마음을 지적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만 말했다.

“저는 술집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마음 상해하지 않습니다. 급사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이미 그런 일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말쯤은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가 또 말문 막히는 대답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조반니는 혼잣말을 하듯 힘없이 중얼댔다.

“그러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위님께서는 그런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는 분이시니 말이에요…….”

로미오는 볼 수 없는 자신의 발끝을 보며 할 말을 망설였다. 자신이 급사로 일하는 것을 한사코 만류했던 조반니였다. 만약 엔초가 돈을 벌기 위해 시장에서 손님들의 물건을 배달하는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자신의 마음이 어떨지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선생님께서 그 손님의 얼굴에 포도주를 뿌리셔서 내심 감사했습니다.”

농담을 섞어 한 말이었는데 낙담해 있던 조반니가 활짝 웃었다. 소년 같은 웃음소리였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그의 그런 소년 같은 웃음소리를 듣자 그가 자신을 대상으로 수음을 했다는 사실이 번뜩 떠올랐다. 조반니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를 위로한 것이 무색해질 만큼 다시금 낯을 들 수 없게 돼 괜히 귀와 이마를 만졌다.

그 일은 되도록 얼른 머릿속에서 지워 버려야 했다. 그만 생각하는 편이 좋았다.

“다음번에는 그런 상황을 목격하더라도 정중하게 굴겠습니다.”

가능하다면요, 하고 개구쟁이처럼 속닥댄 조반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단지 감사 인사를 한 것인데 그는 생각 외로 기뻐하는 것 같았다.

로미오는 우초 경사에 관한 얘기를 이어 가고 싶었기 때문에 조반니가 볼 수 있도록 웃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이고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미행 문제 말입니다. 비록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선생님께선 우초 경사가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계시는 겁니까?”

“네, 제 추측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조반니가 이런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판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로미오는 어쩌면 조반니가 자신에게 말 못 할 이유로 본래부터 티모테오에게 좋지 못한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고 짐작했다. 아니면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그에게 좋지 못한 감정을 갖고 있다가 이번 사건으로 의심을 받는 바람에 그간의 해묵은 감정이 터져 판단력이 흐려진 것일 수도 있었다.

“우초 경사는 구체적인 살해 동기를 무엇으로 추측하고 있는 겁니까? 그가 선생님을 의심하는 이유엔 선생님께서 재판을 받은 전력이 있다는 것이 유일합니까?”

“그래서 의문입니다. 고작 그런 선입견 하나로 말도 안 되는 추론을 하며 미행과 감시를 하니 말입니다. 살해 동기도 모르겠습니다. 조사 중에 저를 무서운 눈으로 응시하던 것을 떠올려 보면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말도 안 되는 추론을 하고 있는 건 본인이었지만 조반니는 자신의 추리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티모테오의 덜미를 잡을 방법에 대해서만 머리를 굴렸다.

“선생님께서는 우초 경사가 선생님을 감시하는 이유가 그의 잘못된 믿음 하나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네.”

로미오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이야기했다.

“선생님께서 오늘 공안국의 조사에서 무엇을 느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조사를 받을 당시 우초 경사는 이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제게 엔초의 생일날 있었던 일을 전해 들으며 정황을 따진 것이 전부입니다. 그가 정말로 선생님을 의심하고 있다면 그날 밤 선생님의 행적을 입증할 증거가 부족한 것 때문이지 선생님을 범인이라고 확정 짓고 의심하는 건 아닐 겁니다.”

말을 끝내고 대답을 기다렸지만 조반니에게서는 말이 없었다.

긴 대화가 오갈 때 상대의 눈빛을 볼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로미오에게 대화 중의 침묵은 미묘하고 복잡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대화를 주고받을 때 흔히 잠시 생각 중이라 입을 벌린 채 말을 멈출 때도 있었고 어떤 불편함이나 불쾌감을 느껴 입술을 다물며 침묵을 지킬 때도 있었다. 볼 수 있다면 눈빛이나 표정 등으로 미뤄 침묵의 종류를 구분할 수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침묵은 아무런 소리로 내지 않았다.

로미오는 자신이 하는 말이 조반니에게 반박으로 들리지 않길 바라며 말을 이었다.

“미행을 꽤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는데도 제가 선생님을 도와드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닌 데다 선생님께서 이런 일을 여타의 다른 사람들보다 잘 처리하시리라고 생각해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미행에 이어 병원에서까지 감시를 당하시니 신경이 날카로워지셔서 무관해 보이는 사람을 의심하고 계신 듯합니다.”

로미오는 조반니의 머리 모양과 옷을 지적했던 술집 손님의 말을 떠올리고 그것 역시 조반니가 신경이 날카로워졌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미행의 수위가 이렇게 높아질 줄 알았다면 조반니의 집에 이렇게 얹혀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과 엔초의 몫까지 신경 써야 했다. 눈이 안 보이는 자신이 조반니보다 더 치밀하게 주위를 살필 수 없다고 생각해 그가 느낄 불안감을 헤아리지 않고 있었는데 자신이 안일했던 것이다.

“제 생각에는 우초 경사가 아닌 다른 자가 범인인 것 같습니다.”

“…….”

말이 없던 조반니는 눈썹 끝을 한 번 씰룩거렸다. 자신의 추리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어 못마땅함을 느꼈지만 상대가 로미오였기 때문에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위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러면 범인이 누구일 것 같으신가요?”

“글쎄요. 선생님께서 단테의 12인의 단원임을 의심한 누군가의 소행일 수도 있으나 제6군단에서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으니 군은 아닐 겁니다. 공안국 측에서 의심을 했더라면 공안국 내부의 단원이 선생님께 미리 귀띔을 했을 겁니다. 지금으로서는 지난번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이유가 가장 유력해 보입니다. 단테의 12인의 비밀 단원 하나가 선생님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됐을 거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상위 단원들이 부적절한 조직 활동을 할 경우 지부에서 은밀히 감시자를 붙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맞습니다.”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크니 다음번에 열리는 중앙 지부 회의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얘기를 꺼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병원에까지 숨어들어 와 대화를 엿듣는 것은 지나치다고 말입니다.”

조반니는 어물쩍 대답했다.

“그들은 조직 내부에서조차 그 존재가 비밀스럽다보니 얘기를 꺼낸다 한들 발뺌할 가능성이 큽니다. 경솔한 행동으로 제6군단에게 두 번이나 조사를 받은 제가 억울함을 털어놓아 봐야 별다른 호소력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듣고 보니 대위님의 말씀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로미오는 조반니가 그의 확신을 꺾지 못했다는 것을 목소리를 통해 느꼈다. 우초 경사가 정말로 범인이든 아니든 조반니가 누군가로부터 지속적인 감시를 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고 자신의 짐작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 이 자리에서 조반니와 입씨름할 필요는 없었다.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선생님께서 돌아오시는 저녁 시간 전까지 집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나 인기척을 잘 살피겠습니다. 수상한 자를 발견하거든 엔초를 시켜 인상착의를 기록해 두겠습니다. 이런 일에 큰 고충을 느끼고 계실 줄 압니다. 제가 무능한 탓에 아무런 도움을 드리지 못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반대의 경우였다면 선생님께선 저를 미행하는 자를 잡기 위해 조치를 취하셨을 텐데 말입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조반니는 “무능하다니요.” 하고 고개까지 저으며 반박했다.

“그런 말씀은 마세요. 그런데 제 걱정을 해 주시는 건가요?”

로미오는 그렇다고 대답하려다가 조반니의 목소리에 은근한 웃음기가 섞여 있자 말을 삼켰다. 뭐가 그렇게 좋은 것인지 조반니는 대단한 칭찬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미행과 감시로 인해 느끼는 괴로움은 잠시 잊은 것 같았다.

“대위님께서도 이제 저를 잘 아시는군요. 만약 누군가 대위님의 뒤를 밟았다면 그자를 잡기 위해 사람 크기만 한 쥐덫을 만들어 로사티 3번가 곳곳에 깔아 놓았을 겁니다. 섬뜩하게 들리시겠지만 당연한 일입니다. 감히 누가 대위님에게 그런 위해를 가한답니까?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어림도 없지요. 쥐덫이 소용없다면 돈을 주고 용병들을 고용해서라도 바치 전역을 구석구석 뒤져 그자를 찾아낼 겁니다.”

조반니가 오늘 저녁 술집에서 소란을 일으켰던 그 손님의 뒤를 캐내려 했다는 것을 모르는 로미오는 괜한 말을 꺼냈다고 생각하며 “예…….” 하고 짧게 대답했다. 조반니는 자신이 정말로 미행이라도 당한 것처럼 진지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드리는 말씀인데 그분 말입니다. 이브 헤스. 병원에서 얘기를 나누며 적당히 둘러대겠습니다. 단념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대위님께서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고 설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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