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독이 든 사랑의 말 (16/30)

16. 독이 든 사랑의 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하늘은 잿빛이었다.

바치 병원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이었기 때문에 병실마다 늘 환자가 넘쳤다.

병원에는 죽을병에 걸린 폐질자를 위한 병실도 있었고 산통을 겪는 여인들을 위한 분만실도 있었기 때문에 각기 각 층에서 갖가지 비명 소리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병원의 가장 꼭대기 층에는 광질에 걸린 사람들을 위한 병실도 있었다. 깨끗하게 빤 요가 깔린 침상은 언제나 청결했고 병원의 창 너머로 보이는 뒤뜰은 잘 손질된 꽃과 나무가 심어져 있어 봄이면 나뭇가지마다 흐드러지게 꽃이 폈다.

오늘은 평소와 다른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조반니였다. 그는 엔초의 생일날 때처럼 머리 모양이 이상했는데 이른 아침 병원에 들어섰을 때 복도를 지나던 다른 의사가 그의 머리 모양을 지적했을 정도였다. 마치 누군가에게 흠씬 쥐어뜯긴 모양새를 하고 있어 볼썽사나웠는데 웃옷 앞섶도 평소와 다르게 제멋대로 여며져 있었다.

“아무래도 병명을 밝히는 것은 어려울 것 같네, 조반니. 이런 증상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원인을 밝히는 것이 불가능하겠어.”

“시력을 제외한 다른 곳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건강한 환자라고 했었나? 참 이상해.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어째서 눈만 그렇게 자꾸 어두워지는 것인지.”

“이 환자가 대체 누구인가? 조반니 자네가 그렇게 신경을 쓴 것을 보면 보통 환자가 아니겠구만. 안 그래? 병명을 밝힐 수 없게 돼 안타깝네. 우리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으니, 참…….”

조반니는 창틀에 걸터앉아 다른 환자의 기록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미오가 가진 병이 의학적으로 명명이 가능한 병인지, 치료법은 있는지 그 누구보다 궁금해했던 그였지만 놀랍도록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존재하지 않는 치료법을 고안해 낼 순 없으니 어쩔 수 없죠.”

지금까지 마흔 구가 넘는 시체를 해부해 안구만 수십 쌍을 적출해 관찰했던 조반니였다. 각기 다른 색의 눈알 수십 개를 메스꺼울 정도로 매일같이 들여다봐 눈이 없는 시체들에게 쫓기는 악몽을 꾼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남다른 열성을 기울이며 적극적으로 로미오의 병에 대해 알아내려고 했던 조반니는 치료가 불가능한 데다 원인 또한 밝힐 수 없음이 확실해지자 ‘시력이 점차 저하되는 괴병을 최초로 발견해 낸 의사’에 대한 꿈을 즉시 접고 관심을 꺼 버렸다. 로미오에겐 노력해 봤지만 방법이 없다고 변명할 마음을 먹은 그는 병명을 밝히는 데에 흥미를 완전히 잃은 나머지 로미오의 증세가 기록된 기록지를 들여다보며 혀를 차는 의사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그분께 병명을 밝힐 수 없는 데다 치료법도 없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래전부터 눈이 완전히 멀 것을 예상하셨던 데다 이미 그렇게 되셨으니 크게 상심하진 않으실 겁니다.”

조반니는 농담 삼아 이런 말도 덧붙였다.

“그래도 앞을 볼 수 있는 추남보다는 맹인이지만 미인인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환자에 대한 치료는 이쯤에서 끝낼 테니 그동안 쌓인 자료와 기록지는 모두 폐기하겠습니다. 비록 치료법은 밝혀내지 못했지만 도움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조반니가 남의 얘기를 하듯 간단히 말하자 기록지를 들여다보던 의사 하나가 못마땅함에 뒷짐을 졌다.

“그 환자의 병명을 밝히기 위해 그 누구보다 애썼던 건 자네잖나? 추후에라도 뭔가 밝혀질지 모르니 기록지는 소중히 모아 두게.”

희귀한 병증 탓에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던 의사들과 달리 조반니는 지금껏 그들을 설득해 가며 로미오를 진찰하고 그의 증세를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세세히 기록했다. 맹인 환자에 대한 기록이라는 기록은 닥치는 대로 모두 끌어모았고 안구 적출에 필요한 시체를 얻기 위해 문고리가 닳도록 뻔질나게 지하 안치실을 드나들었다.

그런 조반니가 이해하기 힘든 이유로 갑자기 손을 딱 놓아 버리니 의사들은 의아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밤늦게 질송 선생님을 찾아가면서까지 애를 쓰지 않았나. 그분이 우스갯말로 자네가 맹인 환자 하나 때문에 밤마다 집으로 찾아와 괴롭히더라는 말씀을 하셨네. 자네가 꿈에 나올 지경이라고 하셨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애를 썼는데 이렇게 포기할 텐가?”

“그래. 지금까지 모아 둔 자료가 아깝지 않은가? 매달리다 보면 진전이 있을지 누가 알아.”

조반니는 의사들의 말을 듣지 않고 문을 보고 있었다. 이상한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눈을 찌푸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갔다. 밖에 누가 있기라도 한 것인지 복도를 내다보더니 복도 끝에서 끝까지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지만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한 번 더 복도 끝에서 끝까지 살피고 문을 닫았다.

“치료법을 알아내고 싶으시다면 자료를 넘겨드리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제 마음은 바뀌지 않을 것 같군요. 전 오늘부로 이 문제에 대해 완전히 손을 떼겠습니다.”

* * *

“그 거리 일대를 수일 동안 샅샅이 조사했지만 망토를 입은 사내를 봤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혹시 인상착의를 착각하신 게 아닙니까? 늦은 밤도 아닌데 그런 자를 봤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나오질 않아 저희도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닙니다. 착각하신 거라면 이제라도 다시 조사를 시작하면 되니 기억을 되살려 보십시오. 정말로 망토를 입은 게 확실합니까?”

공안국 내의 조사실이었다. 티모테오는 뒷머리를 긁적이기도 하고 하품을 하기도 했다. 며칠 사이 동시다발적으로 조사가 필요한 사건들이 터져 이래저래 바빴기 때문에 졸린 눈꺼풀을 자꾸만 비비적거렸다.

“망토를 입은 것은 확실합니다.”

“금색 눈동자를 가진 것도요?”

“예.”

티모테오는 목덜미를 벅벅 긁으며 로미오를 가만히 쳐다봤다. 더 이상 군인이 아닌 그는 군복을 입고 있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하대를 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제 이 도시 어디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사람 같아 보였다. 장교였을 때 로미오에게서 엿보였던 투지라고 해야 할지 엄숙함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그 기색도 퇴색돼 보였다. 이곳에 들어와 자리에 앉을 때 의자 등받이를 심하게 더듬거린 걸 보면 눈이 완전히 멀어 버린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곱상한 외모는 여전했다. 암흑 속에 살고 있지만 그의 외모는 앞을 볼 수 있는 모든 이들이 느낄 만큼 특출났다. 어쩌면 공평한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의 얼굴조차 볼 수 없는 맹인이 된 대가로 저런 외모를 얻은 것이라면.

“망토 외에 다른 인상착의는요?”

“모릅니다.”

“그자가 현장에 남기고 간 단서가 부족해 이런 상태로는 더 이상 추적이 불가능합니다. 당시 현장에서 발견됐던 단도는 대위님의 것이었고 손을 포박한 줄 역시 시장을 돌며 탐문했으나 잡화상점에서 흔히 파는 것이라 사 간 손님을 특정할 수 없었습니다. 머리를 덮었던 자루도요.”

티모테오는 단도에 관해 얘기하며 로미오의 표정을 자세히 살피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떠보듯 물었다.

“로사티 3번가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도 계속 조사 중입니다만 현재로서 방화 가능성은 낮습니다. 뭐, 예상했던 겁니다. 스포르차 선생님께서 불을 질렀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예. 저도 우연한 사고로 일어났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다만 불이 난 이유는 밝혀 주십시오. 같은 이유로 화재가 두 번 나는 것을 미연에 막고 싶습니다.”

“지난번에는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습격을 당하신 데다 이번에는 화재를 겪으셨는데 불운이 이렇게 겹치는 이유가 있을는지요?”

티모테오의 목소리에 미묘한 의도가 들어 있음을 느낀 로미오는 시선을 위로 들었다. 짧은 찰나였지만 정확히 눈이 마주치자 티모테오는 흠칫 놀랐다. 그러나 시선은 다시 엇갈렸다.

로미오는 티모테오가 침을 삼키는 소리를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며 말했다.

“질문의 뜻을 이해하기 힘들군요. 이런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이유에 고의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두 사건 사이에는 인과 관계가 없습니다.”

티모테오는 탁자 위에 올려진 살인 사건 조서를 넘겼다. 적절한 때를 노리는 표정으로 입술을 씹던 그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로미오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실은 며칠 전에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칼에 일곱 차례 찔린 젊은 사내의 시신이 발견됐는데 단서가 부족해 범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살해당한 분의 이름이 자코모 본도네인데 대위님께서도 아시는 분일 겁니다.”

순간적으로 로미오의 시선이 한 점에 멈췄다. 눈꺼풀의 깜빡거림이 느려지더니 완전히 멎으며 푸른 눈동자가 크게 열렸다. 티모테오는 그의 표정 변화를 주시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티모테오는 로미오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자코모의 이름을 꺼내자 그의 표정은 눈으로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로 빠르게 굳었다.

“저희가 현장을 조사하던 중 그분의 집에서 그림 몇 장을 발견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림의 주인공이 대위님인 것 같았습니다. 닮은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아는 분이셨군요? 그분과 어떻게 알게 되셨고 얼마나 친분이 있는지 말씀해 주셔야겠습니다.”

로미오는 혼란에 빠져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자코모가 살해당했다니. 도대체 누구에게? 언제? 불과 며칠 전에 그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대체 어쩌다가 죽임을 당했단 말인가?

“원한 관계에 놓여 있는 상대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몸에 난 상처가 깊어 발견 당시 집 안이 전부 피로 흥건했습니다. 범인이 집 안으로 침입해 칼을 휘두른 것 같은데 목격자가 없어 범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분이 조각가라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 저를 그릴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셨지만 제가 거절해 두 번의 만남을 끝으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닷새 전 그날 어떤 경위로 범인이 그분의 집에 침입했는지는 모르나 아마도 얼굴을 아는 자라 순순히 문을 열어 줬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혹시 짚이는 게 없으십니까?”

자코모가 죽었다는 사실이 쉽게 믿어지지 않아 망연한 기분에 휩싸여 있던 로미오는 탁자 위를 짚으며 몸을 기울였다.

“그분께서 살해를 당하신 게 닷새 전입니까?”

“그렇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날 그분의 행적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웃집을 탐문해 보니 그분이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소리를 들었다는군요. 돌아온 것이 저녁 무렵인데 그날 하루 누구를 만났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듣자 하니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낮 동안 시장을 돌아다닐 때가 많다고 해 상인들을 상대로 탐문을 했으나 이렇다 할 단서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날 아침에 그분이 중앙 광장 근방에서 석고를 파는 석고상에게 조각에 필요한 석고를 부탁했다는 것 외에는 밝혀진 게 없습니다.”

로미오는 더한 충격에 빠져 앞으로 기울였던 몸을 바로 했다. 장교였던 시절의 버릇이 남아 의자에 앉을 때면 늘 어깨를 똑바로 펴고 허리를 세웠지만 그런 것은 잊고 비스듬히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닷새 전이라면 엔초의 생일날이었다. 자코모가 자신의 집 앞으로 찾아와 얘기를 나눴던 날이었다. 그가 그날 밤 살해를 당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본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니. 겨우 두 번 만났을 뿐이지만 그는 살해 위협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누군가 살해할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이 컸다.

“……그날이라면 제집 앞에서 그분과 만났습니다. 로사티 3번가의 하숙집 말입니다. 그날이 제 동생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티모테오는 맹인인 로미오가 자코모를 일곱 차례 칼로 찔러 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날 로미오가 자코모를 만났다는 사실에 눈썹을 한껏 찡그렸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순간 로미오는 뒤늦게 조반니를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날의 일을 숨길 이유가 없었고 숨길 수도 없었지만 마음속에 의혹 하나가 싹텄다. 그리고 그것은 티모테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렇지만 섣부른 의심은 할 수 없었다. 조반니가 이 일에 관련되어 있을 리 없었다. 말이 되지 않았다.

“……그분은 스포르차 선생님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습니다. 그날 그분께서 선생님께 조각에 필요한 대리석을 부탁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오셨으나 스포르차 선생님께선 3층에 계셨기 때문에 제가 문을 열어 드렸습니다. 제 동생의 생일날이라 2층에는 다른 손님들이 계셨고 스포르차 선생님께서는 뒤늦게 아래층으로 내려와 그분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티모테오가 자세를 고치며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그날 나눈 대화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초대받았던 손님들의 이름도 모두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 * *

“여기! 포도주를 더 가져와. 술맛이 깨지기 전에 어서!”

“이쪽부터 먼저 달란 말이야! 우리가 먼저라고.”

“몸을 따뜻하게 데울 수프를 한 그릇 주시오. 저쪽 탁자에서 먹고 있는 송아지 구이 한 접시도 같이!”

“얼른 가져와, 얼른! 한 번 술기운이 달아나 버리면 흥이 오르지 않는다고!”

북적거리는 갈고리 고양이 술집 안에 손님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오갔다. 다른 날보다 유난이 손님이 많은 이유는 인근에서 도박장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한탕 해 먹고 내빼기 위해 도박장으로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도박장 문이 닫히자 이곳 술집으로 몰려들었다.

갈고리 고양이 술집은 바치에서 가장 큰 술집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술집 저 술집 기웃거리지 않고 곧장 이곳으로 기어들어 와 한 자리씩 차지하고 술이며 음식을 시켜 댔다. 여급의 말대로 한쪽에서 말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돈을 잃은 처지는 다들 같았기 때문에 서로 술에 취하자 잔을 부딪치며 돈 몇 푼에 죽고 사는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했다.

“지금 가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여급이 바삐 술병과 음식들을 내가는 동안 다른 급사들도 쉴 틈 없이 주방에서 음식을 날랐다.

술이 진열된 선반 바로 앞에 술청이 마련돼 있어서 사람들은 그 앞에 서서 술을 마셨는데 로미오가 할 일은 사람들이 찾는 술을 급사에게 내어 주고 주방에서 날라져 온 접시며 잔을 닦는 것이었다. 하루 사이 선반에 든 술의 위치를 완벽히 외운 로미오는 스무 종 가까이 되는 술을 실수 없이 꺼내 급사들에게 전달했다.

“저 사람은 누구지? 못 보던 얼굴인데.”

“차림새를 보니 급사 같은데 술이나 음식을 나르는 일은 하지 않는 모양이지?”

“급사라고 하기엔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이봐, 아가씨. 저자가 오늘부터 이 술집에서 일하게 된 급사인가?”

손님들 중에는 로미오를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여급은 그들이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도록 적당히 대답을 했다. 오랫동안 로미오에게 관심이 있었던 여급으로선 로미오를 향한 손님들의 관심이 썩 달갑지 않았지만 선반 앞에 서서 조용히 접시와 잔을 닦는 로미오를 보고 있노라면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손님들의 이목을 피하게 하려면 로미오에게 가면이라도 씌우는 수밖에 없었다.

“대위님! 아르디토산 포도주 두 병요!”

술청 앞으로 다가가 외치자 로미오가 뒤를 돌아 손으로 선반을 만지더니 아르디토산 포도주가 진열돼 있는 칸을 찾아냈다. 빠른 손놀림으로 술병 표면을 더듬어 두 병을 꺼냈는데 그렇게 하는 동안 늘씬한 허리가 도드라지며 호리호리한 뒷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여기 있습니다. 이쪽에 둔 접시들은 전부 닦았는데 주방으로 가져다드리면 되겠습니까?”

“직접 가져다드릴 수 있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포도주를 받아 든 여급이 사라지자 로미오는 깨끗하게 닦은 접시들을 한데 포갰다. 자코모의 일이 머릿속을 맴돌아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웠지만 손을 계속 움직인 덕에 일이 밀리진 않았다.

티모테오는 조반니를 불러 그 역시 조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의 진위가 복잡한 데다 마음속에 피어나기 시작한 증명되지 않은 의심을 사실로 간주하기엔 그 의심이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는 그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자코모가 죽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심란함은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집에서 발견됐다는 자신의 얼굴 그림을 떠올리니 접시를 닦던 손이 느려졌다. 자신은 자코모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불과 몇 주 전 우연히 바치 병원에서 마주쳐 그의 존재를 알게 됐는데 닷새 전에 살해당해 죽었다니.

바치 병원의 복도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자코모는 이런 일은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그의 죽음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마음 한편을 서늘하게 했다. 그날 병원에서의 그 만남 이후 자코모에게는 죽음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엔초의 생일날 문간에서 보았던 모습이 마지막이었기에 그때가 생각났다. 저녁 식사를 권하며 떠나지 못하게 했더라면 그는 살해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자 피에트로가 떠올랐다.

눈이 먼 자신에게 왜 자꾸만 죽음이 목격되는 것일까. 왜 그들은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것인가.

“이보쇼. 여기 술을 한 병 더 주쇼.”

술청의 구석에서 취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참 전에 술집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던 젊은 여자 손님이었다. 목소리는 쉰 듯하면서도 힘이 있어 시끄러운 술집 안에서도 또렷하게 들렸는데 특이한 것은 나이 든 사내 같은 그녀의 말투였다.

로미오는 접시 정리하는 것을 그만두고 술청 위를 손으로 더듬으며 그녀에게로 걸음을 옮겨갔다.

“어떤 술을 드시겠습니까?”

“먹던 것으로.”

한 가지 더 특이한 점은 그녀에게서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 손에 철로 만든 장갑이라도 끼고 있는 것인지 술잔을 잡을 때 철커덕대며 쇠와 유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시킨 술을 기억하고 있어 선반에서 같은 술을 꺼내 내려놓는데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한 잔 가득 따라 보쇼.”

탁탁. 잔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술을 따라 보라는 시늉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손님에게 술을 따르는 것은 급사의 일이 아니었고 로미오는 술을 따르기 위해 술병의 입구와 잔의 입구를 더듬어야 했지만 부탁을 들어줄 수 없으니 알아서 드시라는 말을 했다가 화를 내는 손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선 술병 뚜껑을 땄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급사를 불러 대신 술을 따라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손님에게 자신이 맹인임을 설명하자니 앞도 못 보는 자가 이런 곳에서 왜 일을 하는 것이냐며 소란을 피우고 화를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병 입구를 손으로 만져 확인한 뒤 잔의 위치를 확인하고 천천히 술을 붓는데 위협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오늘 빌어먹게 기분이 좋지 않으니 똑바로 술을 따르는 게 좋을 거요. 갖고 있는 돈을 전부 털어 술이나 진탕 마시자고 여기 들어온 것이니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조심히 따라 주쇼.”

로미오는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덮개로 얼굴을 가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목소리가 정면이 아니라 아래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여자의 으름장을 듣자 술을 따르는 도중에 실수를 하는 것과 따를 수 없으니 알아서 마시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별 차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이 맹인임을 설명할 필요를 느끼고 술 따르던 것을 멈추는데 여자가 별안간 버럭 화를 냈다.

“이런 젠장맞을! 눈을 똑바로 처뜨고 술을 따르는 거야? 얼굴에 붙은 그 옹이구멍 두 개를 잡아 떼어 버릴까 보다!”

술이 잔 밖으로 흐르는 느낌에 로미오는 기울이고 있던 술잔을 바로 하고 닦을 것을 가져왔다.

“죄송합니다. 얼른 닦아 드리겠습니다.”

“죄송? 죄송하다고? 이 빌어먹을 급사 나부랭이 자식이 어디 되먹지도 않은 염병할 놈의 사과를 하고 자빠졌어? 지금 당장…….”

로미오가 술을 따르는 내내 술청 위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여자는 고개를 들어 로미오를 보더니 말문이 막혀 입을 벌렸다.

“…….”

술집 어디에서나 볼 법한 급사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상대가 자신의 상상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던 탓이었다.

보름 전 루바노 국경을 넘어 여기저기를 떠돌다 마차도 없이 엿새 만에 바치에 도착해 바로 오늘 아침까지 도박장에서 뒹군 떠돌이 용병, 이브 헤스는 철 의수를 찬 오른손으로 모자를 벗었다. 허리까지 오는 긴 은발을 쓸어 넘긴 그녀는 술에 취한 눈으로 로미오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평소였다면 술 한 잔도 제대로 따르지 못하냐고 욕을 계속 퍼부었을 그녀였지만 로미오의 파란 눈에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쳐다봤다.

“…….”

“괜찮으십니까? 사과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로미오가 손을 더듬어 포도주를 닦자 이브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알딸딸하게 취했기 때문에 로미오가 맹인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그녀는 속으로 ‘루바노 사내들은 다 이렇게 곱상하게 생겼나.’ 하며 포도주에 젖은 손을 털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실수를 무마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사죄를 하고 싶거든 공짜로 술이라도 한 병 더 주쇼.”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에 로미오가 대꾸하려는데 그녀가 갑자기 자신의 목을 더듬더니 웃옷 속으로 손을 넣어 주머니를 뒤졌다. 별안간 술에서 깨 눈빛이 명료해진 그녀는 바닥을 두리번거렸다.

“잃어버린 게 있으십니까?”

부산스럽게 몸을 움직이는 소리를 들은 로미오는 그녀가 급히 뭔가를 찾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브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바닥에 엎드려 술청 밑을 한참 더듬더니 벌떡 일어나 욕을 쏟아 냈다.

“제기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아버지!”

술값을 집어 던지듯이 로미오에게 건넨 이브는 남은 술병을 낚아채 술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또 오십시오.”

로미오는 이미 술집 밖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 이브에게 인사하고 마저 접시를 닦았다. 닦은 것들을 주방으로 가져다주고도 한동안 계속 접시를 닦다 손님들이 어느 정도 물러가고 나자 장작을 가지러 밖으로 향했다.

손님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뒷문으로 나가는데 발밑에 뭔가가 밟혔다. 허리를 숙여 바닥을 더듬거리니 떨어져 있는 것은 목걸이였다. 목에 거는 줄과 특이한 모양으로 깎여 있는 보석이 만져졌다. 이 문을 이용하는 급사들 중 한 명이 떨어뜨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머니에 넣는데 저만치서 요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발걸음 수를 세며 장작이 있는 곳으로 가 하나씩 주워 드는데 씨근덕대는 사내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이봐, 거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임을 안 로미오가 그들을 향해 돌아서자 사내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발소리는 셋이었고 자신을 부른 사내는 체격이 좋았다. 목소리가 굵고 낮은 데다 머리보다 높은 위치에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지금 여자 하나를 찾고 있는데 말이야. 옷차림새를 보아하니 이 술집의 급사로구만? 그렇지? 혹시 검은 로브를 입고 허리춤에 이만한 검을 찬 여자가 이 술집에 들르지 않았나?”

로미오가 자신의 눈 상태를 설명하려는데 다른 사내가 하나가 어깨를 쳤다.

“잠깐. 이 자식 장님인 것 같은데? 어이, 고개를 들어 봐.”

눈을 보려는 의도로 어깨를 친 것이었지만 로미오에게 있어 갑자기 몸을 잡아당기거나 만지는 행위는 살금살금 다가와 깜짝 놀라게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사내가 어깨를 친 순간 품에 안고 있던 장작을 놓친 로미오는 장작들이 발치로 떨어져 나뒹굴자 뒤로 물러섰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가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는 상황을 맞닥뜨리자 검은 망토의 사내가 생각났다. 일시적으로 몸이 긴장됐지만 주위의 소리에 집중했다. 믿을 것은 소리가 유일했다. 사내들이 칼을 빼내 들면 대항하지 말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했다.

“맞구만. 이 자식 눈깔을 보라고. 흐리멍덩한 게 척 봐도 장님이잖아.”

“빌어처먹을! 그 여자가 분명 이 술집에 들러 술을 마셨을 텐데 이제 어디서 찾는담?”

“장님이어도 소리는 들을 수 있을 거 아니야. 그 여자의 목소리가 아주 특이했었잖아. 이봐, 너. 장님에다가 귀머거리인 건 아니겠지? 이 술집에서 목소리가 걸걸한 여자를 본 적이 없나?”

로미오는 이브를 떠올렸다. 낯선 사내들과 주먹다짐을 할 성격도 아니거니와 급사의 신분으로 손님이 될 수도 있는 자들과 싸울 순 없으니 고분고분 답해 주는 편이 좋았지만 로미오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사정이 있다고 해도 씩씩거리며 여자 하나를 찾는 사내 셋을 도와줄 수는 없었다.

“그런 손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착각을 한 것일 수도 있으니 술집 안으로 들어가셔서 확인해 보십시오.”

로미오가 바닥에 떨어진 장작을 주워 들려는데 사내 하나가 발로 장작을 차며 위협했다.

“우리가 들어가면 그 여자가 우릴 보고 도망칠 거야. 우린 오늘 아침 도박장에서 그 여자에게 사기를 당해 거금을 날렸거든. 그 여자는 분명히 남은 돈으로 술을 퍼마시기 위해 이 술집으로 숨어들었을 테니 들어가서 대신 확인을 해 주는 게 어때?”

“죄송합니다. 그런 식으로 손님의 얼굴을 확인시켜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분을 찾고 싶으시다면 직접 들어가서 확인하십시오.”

“이 급사 자식이 어디서 고집이야. 오줌을 지릴 때까지 두들겨 맞아볼 테냐?”

위협을 하며 손바닥에다 주먹을 부딪치는 소리를 낸 사내는 로미오가 겁을 먹고 말을 바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눈빛을 달리하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저는 이 술집의 급사이기에 손님들끼리 싸움을 붙일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싸움이 아니지. 여자 하나가 우리 세 명에게 상대가 될 리가 없잖아? 그리고 돈만 받아 내면 소란 일으키지 않고 금방 끝낼 거라고. 그러니 어서 들어가서 확인해 봐.”

“정말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여 사과한 로미오가 장작을 주우려고 하는데 사내 하나가 대뜸 멱살을 끌어당겨 뺨을 쳤다.

“이 자식이 감히 어디서 고집을 부려!”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간 로미오는 제자리에서 휘청이다 똑바로 섰다. 입술 끝이 찢어서 입 안에 피 맛이 났다. 얼굴이 얼얼할 정도로 뺨을 얻어맞자 자신도 모르게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쭈. 주먹을 쥐는데.”

뺨을 친 사내가 가소롭다는 듯이 빈정대는데 다음 순간 로미오의 뒤쪽에서 빈 술병 하나가 힘껏 쏜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와 사내의 이마 한가운데에 꽂혔다.

“억!”

사람의 머리가 아니라 단단한 바위에 유리병을 내리친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술병이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튀었다. 이마를 맞은 사내는 그대로 뒤로 쓰러져 흰자위가 뒤집어졌다. 이마에서 피가 흐르자 다른 두 사내가 험악한 표정으로 술병이 날아온 쪽을 쳐다봤다.

“대체 어떤 자식이, 으억……!”

사내는 저 멀리서 그들이 서 있는 곳까지 다섯 걸음 만에 다가온 이브에 의해 주먹을 얻어맞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다른 한 사내가 재빨리 품에서 단도를 꺼내 휘둘렀지만 이브는 몸을 숙여 피한 후 철 의수로 사내의 가슴과 배를 두 번 후려쳤다. 감당할 수 없는 괴력에 사내는 멱따는 소리를 내며 허공에 붕 떠 내동댕이쳐졌다.

세 사내가 삽시간에 바닥에 나뒹굴며 신음하자 이브는 삐거덕대는 철 의수를 흔들며 그들의 얼굴을 살폈다. 녹슨 어깨 부분을 매만진 그녀는 흐트러진 은발을 정리했다.

“도박장에서 봤던 그놈들이군. 그런데 어쩌나. 나도 너희들처럼 사기를 당해서 돈을 다 잃었어. 이것 봐.”

이브는 자신의 주머니를 밖으로 빼 보여 주더니 주먹질을 하려는 것처럼 철 의수의 손가락을 움직였다. 얼굴을 얻어맞은 사내는 바닥에서 일어나려다 그녀의 의수와 긴 은발 머리를 보고 사색이 됐다. 도박장에서 본 그녀는 망토를 쓰고 있었던 데다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도박을 했기 때문에 머리의 색깔도, 특이한 오른팔도 보지 못했다.

용병이니 해적이니 하는 얘기를 주워들을 일이 많은 사내는 은발 머리와 철 의수를 보고 대번에 누군가를 떠올렸다.

“내게 돈을 받아 내고 싶다면 자리를 옮겨서 결판을 내자고. 내가 지면 이 급사에게 돈을 꿔서라도 갚겠어.”

이브는 로미오를 손짓으로 가리키더니 그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농담이니 걱정 마쇼. 내가 질 일은 없으니 그쪽한테 돈을 빌릴 일도 없을 거요. 그리고 입가에 피가 묻었으니 닦으쇼.”

아까와 달리 술이 깬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로미오의 시선이 이상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시선은 허공에서 사선 방향으로 움직이다 자신의 입을 향했다. 소리를 따라 움직이는 눈동자가 부자연스러웠다.

로미오는 입가를 더듬어 피를 닦았으나 보통 사람들처럼 손에 묻은 피를 확인하지 않았다. 바닥에 널브러져 신음하는 사내들을 쳐다봤지만 그들을 본다기보다는 신음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 같았다.

“호, 혹시 ‘이브’? 그 ‘무쇠 팔의 이브’?”

얼굴을 맞아 코피가 난 사내가 이마가 깨진 사내를 부축하며 덜덜 떨었다. 로미오는 사내의 목소리가 겁에 질린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브가 있는 방향을 봤다.

바로 옆에 서 있는 그녀는 자신보다 키가 작은 것 같았는데 술 냄새와 녹슨 철 냄새가 났다. 무쇠 팔의 이브에 대해 들어 본 적은 없지만 자신이 나서서 이 싸움을 막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나를 안다니 이야기가 빠르겠군. 긴말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이라도 내빼. 돈을 잃은 건 피차 처지가 비슷하니 그 점은 서로 이해하기로 하지.”

“그, 그런…! 그건 우리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고! 이대로 돌아가면 잃은 돈은 다 어쩌란 거야?”

“그러니까 말하잖아. 나도 빈털터리야. 돈을 갚으려면 다시 도박으로 따야 하는데 도박장이 문을 닫았으니 어쩌겠어? 아까 술집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엿들어 보니 이 나라에는 공안국인가 뭔가 하는 녀석들이 있다는데 그 녀석들이 도박장을 감시하기 위해 검문을 돌 거라는군. 당분간은 도박장이 다시 열릴 일 없으니 나도 돈 나올 구멍이 없어.”

한 번 팔을 휘두르면 장정 일곱이 나가떨어진다는 괴력의 용병 이브 헤스. 전 세계를 떠돌며 평생을 용병질로 먹고살아 온 전설의 떠돌이 용병 이브 헤스. 동쪽의 어느 바다에서 심심풀이로 해적들의 목을 따고 다녔다는 소문도 있었고 지나가는 배를 나포하고 선원들을 인질로 삼기도 해 바다 너머의 어느 해양 국가에는 얼굴이 실린 수배 전단까지 나붙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맨손으로 멧돼지를 때려잡고 창을 던져 하늘을 나는 새를 맞힐 수 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있었다.

‘무쇠 팔의 이브’라는 별명을 들은 사람들은 자연히 힘 좋아 보이는 거구의 용병을 떠올렸지만 이브는 특별히 키가 크지도 않았고 별명에 어울릴 만한 덩치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녀의 몇 안 되는 자랑거리 중 하나인 여우 가죽으로 만든 로브와 그 안쪽에 차고 있는 갑옷, 웬만한 사내들도 쉽게 휘두를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허리춤의 검을 제외하면 그녀는 여느 여인들 같은 보통의 체구를 갖고 있었다.

도톰하다기보단 두껍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입술과 석양을 닮은 붉은 눈동자, 그을린 구릿빛 피부가 돋보이는 이브는 오른팔이 전부 의수였다. 팔 위에 의수를 덮은 것이 아니라 오른팔 전체가 어깨부터 없었다.

언동이 과격한 데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철 의수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으나 그런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녀는 용병 생활만 15년 넘게 해 왔지만 아직 스물여섯에 불과한 젊은이였다.

“피차 처지가 같다니? 우린 네놈한테 사기를 당해서 돈을 잃었다고!”

이브는 사내들보다 키가 작았지만 턱을 들고 그들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난 지금 내 아버지의 유품을 잃어버려서 기분이 굉장히 좋지 않아. 유품이 아니라 내 아버지를 다시 한번 잃은 심정이라 사람 하나 정도는 쉽게 죽일 수 있는 기분이 들어. 그걸 찾기 전까지 도박이고 뭐고 없어. 그걸 찾을 때까지는 이 나라를 떠날 수 없다고. 그건 내가 다섯 살 때부터 갖고 있었던 내 가족의 유일한 유품이야.”

떨어진 장작을 챙기던 로미오는 조금 전에 바닥에서 주웠던 목걸이를 떠올렸다. 주머니에서 그걸 꺼내는데 이브가 철커덕대며 철 의수를 휘둘렀다.

“기어이 결판을 내고 싶다면 덤벼. 한 놈씩 덤빌 필요 없으니까 동시에 덤비도록 해라. 젖 먹을 차례를 기다리는 애새끼들같이 서로 순서를 기다리지 말고 한 놈이 나가떨어지면 바로 덤벼들어.”

이브는 물러서라는 뜻으로 로미오의 가슴팍을 떠밀려다 그가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팔을 잡고 뒤로 밀었다.

“물러나쇼.”

로미오가 두 걸음 물러나자 이브는 상체를 낮추고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세 사내는 약속이나 한 듯 줄행랑을 쳤다.

세 사람이 눈 깜짝할 사이에 골목 끝으로 사라지자 싸울 태세를 취하고 있던 이브는 황당한 얼굴이 됐다. 얼마나 급하게 도망쳤는지 바닥에는 그들이 놓고 간 단도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저런 머저리 같은 놈들을 봤나.”

자세를 바로 한 이브는 녹이 슬어 말을 잘 듣지 않는 의수를 손보더니 뒤늦게 로미오에게 물었다.

“나 때문에 저자들에게 위협을 당한 거요?”

로미오의 입술은 그사이 피가 멎어 있었는데 이브의 예상과 달리 그는 겁을 먹거나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낯선 자들에게 억울하게 뺨까지 맞았는데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조금 전 상황이 그에게 큰 위협으로 느껴졌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순간 그가 평범한 급사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저들의 물음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급사로서 손님들끼리 싸움을 붙일 수 없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이브는 로미오가 자신과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자 그가 맹인임을 확신했다. 자연히 아까 술집에서 그에게 했던 욕이 생각났다. 입이 건 데다 교양이라고는 모르는 그녀였지만 맹인에게 눈을 똑바로 처뜨고 술을 따르는 것이냐고 욕을 한 것에 아무런 잘못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무식하지는 않았다.

“혹시 찾고 있는 게 이겁니까? 조금 전에 저곳에서 주웠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의 말을 준비하던 이브는 로미오가 목걸이를 내밀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손에서 얼른 목걸이를 받아 든 그녀는 표면과 목줄을 자세히 살피더니 활짝 웃었다. 20년도 더 전에 죽은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목걸이에 입까지 맞추며 기뻐했다.

“어디에서 주운 거요? 이걸 찾느라 이 일대를 전부 돌아다녔는데 목걸이 비슷한 걸 봤다는 사람조차 없었소! 정말 다행이요. 이걸 찾다니, 하! 정말 고맙소.”

그녀는 목걸이를 목에 걸려다 마음을 바꿔 먹고 로브 안쪽의 튼튼한 주머니에 넣었다. 잘 들어갔는지 손으로 만져 여러 번 확인한 그녀는 그제야 안심하고 홀가분한 한숨을 내쉬었다.

“뒷문 쪽에서 주웠습니다. 혹시 들어오실 때 저 문으로 들어오지 않으셨습니까?”

“저 문이 뒷문이오? 저리로 들어가긴 했지만 저 문 앞에 떨어졌을 리가 없는데.”

“술에 취하셔서 못 보셨나 봅니다. 이 술집에서 일하는 다른 급사의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주워 두었는데 다행입니다.”

로미오는 바닥에 떨어진 장작 하나를 손으로 더듬어 찾아냈다. 하지만 질서 없이 아무렇게나 흩어진 것들을 쉽게 줍지 못해 허공에 계속 손을 더듬거렸다. 그러자 목걸이를 쓰다듬으며 히죽대던 이브가 한 번에 장작을 다섯 개씩 집어 들었다. 멀리 떨어진 것을 발등으로 차 올려 주운 그녀는 순식간에 장작을 전부 정리해 로미오의 품에 안겨 주었다.

“다 주웠으니 들고 들어가 보쇼. 그리고 만약 아까 그자들이 다시 찾아오거든 상대하지 말고 공안국인지 뭔지 하는 자들을 부르는 게 좋을 거요. 사람들끼리 싸움이 나면 그들을 부른다고 하던데 맞소?”

이브는 말을 하는 와중에 로미오의 투명하고 파란 눈을 물끄러미 봤다. 참으로 인상적인 눈이었다. 대륙과 바다를 십수 년간 떠돌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죽였고 때론 살렸지만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한낮 오후의 태양 빛이 작열하는 바다도 이자의 눈만큼 빛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까 그분들이 다시 찾아올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작을 주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앞으로 조심하…… 아니, 아니, 잠깐! 조금 전에 술집에서 했던 말을 사과하고 싶소. 당신이 맹인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런 말을 지껄이지 않았을 거요. 내 말에 기분이 상했을 줄 아오. 정말 미안하오. 내 오른팔을 걸고 진심으로 사과할 테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쇼.”

술집에서의 그 말이 로미오에게 모욕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예의를 지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이브는 장작더미를 안고 있는 로미오의 행동거지에서 묘한 절도를 느끼고 그의 행동을 유심히 봤다.

“정말 괜찮은 거요?”

“제가 맹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서 그런 말을 하셨다는 걸 압니다.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사과를 받아 준 것으로 이해하겠소. 한입으로 두말 하기 없기요?”

“제가 술을 붓는 실수를 했으니 서로 잘못한 것으로 해 두지요.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어 그만 가 보겠습니다. 술을 또 드시고 싶을 때면 다시 들러 주십시오.”

돌아선 로미오는 곧장 뒷문으로 걸어가지 않고 앞으로 다섯 걸음 걸어가더니 왼쪽으로 일곱 걸음 옮기고 오른쪽으로 반 바퀴 몸을 돌려 문간을 손으로 정확히 잡았다. 이브는 로미오의 걸음걸이를 보고 그가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만 하는 생활을 오랫동안 해 왔을 것이라고 짐작하며 크게 외쳤다.

“내 아버지를 찾아 줘서 고마웠소! 술집에서 했던 말은 다시 한번 사과할 테니 잊어 주쇼!”

* * *

“히히힝! 다그닥, 다그닥.”

복도를 돌아다니며 장난감 말을 타던 엔초는 2층 창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봤다. 조반니가 고용한 저택의 관리인은 주방을 오가며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로미오가 갈고리 고양이 술집의 급사로 일하게 됐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엔초는 장난감 말을 갖고 놀기도 하고 조반니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과자와 사탕을 먹기도 하며 혼자 놀았다.

“워워, 이제 쉬자. 너무 많이 달렸어. 갈기를 손질해 줄게.”

기수 흉내를 내며 말을 쓰다듬은 엔초는 창가 가까이 다가갔다. 장난감 말에게도 창밖 풍경을 보여 주며 대화를 하듯 말을 걸다 지팡이를 든 로미오가 걸어오고 있는 게 보이자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1층의 문을 열자 실내 정원에는 진한 꽃향기가 가득했다. 창을 스치는 빗소리가 듣기 좋은 악기 소리처럼 정원 내에 울리고 있었다. 조반니와 저택 관리인이 며칠 동안 바쁘게 오가며 마련해 놓은 이곳은 작은 꽃집 같기도 했다. 여기서 잠시 머물면 옷에 꽃 냄새가 스며 걸을 때마다 몸에서 꽃냄새가 났다.

“형! 어서 와!”

문을 벌컥 열자 머리 위로 가느다란 빗발이 쏟아졌다. 로미오는 시장에서 산 식료품을 가슴팍에 껴안고 걸어오다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비가 보슬보슬 쏟아지는 거리는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옜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아니야, 방금 내려온 거야. 스포르차 선생님은 아직 오지 않으셨어.”

엔초는 로미오를 허리를 꽉 안은 뒤 식료품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혼자 뭘 하고 있었어? 또 장난감 말을 갖고 놀고 있었어?”

“응! 너무 많이 달려서 말을 쉬게 해 주고 있었어. 그리고 먹이도 먹이고 갈기도 빗어 줬어. 형은? 오늘 일은 어땠어?”

“손님들이 많아서 바빴지만 괜찮았어. 그런데 주머니에서 바스락거리는 건 뭐야?”

“사탕 껍질이야. 얼른 올라가자!”

엔초는 말에게 풀을 먹이는 것처럼 장난감 말의 주둥이를 로미오에게 비비고 로미오의 손을 잡았다. 2층으로 함께 올라가자 저택 관리인이 저녁 준비를 끝내 놓은 상태였다. 그는 조반니가 돌아오거든 전해 달라며 오늘 하루 자신이 한 일들을 적은 목록을 로미오에게 전달하고 돌아갔다.

젖은 옷을 갈아입은 로미오는 엔초와 탁자 앞에 앉아 조반니가 오기를 기다렸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에 대해 조잘대는 엔초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로미오는 시간이 지나도 조반니가 오지 않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따라 내려온 엔초가 정원의 꽃들을 만지고 냄새 맡으며 구경하는 동안 로미오는 창가에 서서 보이지도 않는 창밖에 시선을 뒀다.

“형, 이 하얀 꽃은 무슨 꽃이야? 단 냄새가 나.”

“어떤 꽃?”

엔초는 궁금한 마음에 꽃을 가리키며 물었다. 하지만 로미오가 빗소리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착각해 다른 곳을 쳐다보자 나중에 조반니에게 물어봐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아니야. 무슨 꽃인지 알 것 같아.”

로미오는 조반니가 공안국에서 조사를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꽃잎이 떨어져 있는 창 틈새를 손으로 더듬었다. 엔초의 생일에 왔던 손님들 중 몇몇도 조사를 받게 될 테니 공안국이 그들을 찾아가 갑작스럽게 벌어진 살인 사건에 대해 묻기 전에 미리 언질을 해 줘야 했다.

엔초의 생일날 자코모가 조반니에게 했던 험담과 그 험담에 대한 조반니의 반응을 여러 번 곱씹어 봤지만 조반니가 이번 일과 관련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억측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는 그날 밤 의사 협회의 모임에 다녀왔고 다녀온 이후로 내내 집에 머물러 있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자코모를 해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자코모가 했던 험담을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이야기했던 데다 설사 그것이 거짓이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자신을 험담했다는 이유만으로 살해하려 드는 것은 정신이상자가 아닌 이상 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조반니가 그럴 리 없었다.

물론 조반니와 자코모의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겉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관계의 두 사람이 오래전에 있었던 모종의 일로 죽고 죽이는 사이가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조반니와 자코모가 그런 관계일 것이라고 근거 없이 추측할 수는 없었다. 원한이라는 것은 서로 간에 깊은 오해와 갈등이 얽혀야만 가능한 것인데 두 사람의 사이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집 앞으로 찾아와 간단한 부탁을 할 순 있으나 아주 가깝거나 친밀하지는 않은 사이. 그 정도의 관계처럼 보였다.

조반니가 살해의 원인이 되는 복수심이나 분노, 질투와 같은 감정을 자코모에게 느꼈을 가능성 또한 적었다. 그처럼 인망이 두텁고 부유한 자가 가난한 무명의 조각가를 해하고 싶어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무엇보다 사람을 일곱 차례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은 마음을 먹는다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은 찰나의 불같은 감정으로 그런 짓을 행할 수 없으며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이미 평범한 사람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봐야 했다. 자신이 아는 이들 중 그런 방법으로 남을 살해할 만한 인물은 없었다.

범인은 분명 그날 생일 파티에 있었던 사람들과 관계가 없는 다른 사람일 것이다. 자신과 조반니가 알지 못하는 전혀 다른 인물일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의심을 접고 나자 조반니가 다른 날보다 늦게 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엔초, 선생님이 걸어오고 계시는 게 보여?”

말을 타고 정원을 돌아다니던 엔초는 창문에 볼을 대고 거리를 살폈다.

“아니. 보이지 않아.”

로미오는 거세진 빗소리에 집중하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창문을 타고 미끄러지는 빗소리는 창의 위치와 높이에 따라 다른 소리를 냈는데 꼬리를 끌며 주르륵 미끄러지기도 하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톡, 톡 소리를 내기도 했다. 어떤 빗소리는 나뭇가지가 타는 것처럼 타닥, 타닥 소리를 냈고 어떤 빗소리는 경사진 면을 타고 내리는 것처럼 빠르고 세차게 뚝뚝 떨어졌다.

로미오는 창을 열기 위해 손을 더듬다가 문고리를 찾을 수 없자 엔초에게 부탁했다.

“이 문을 열어 줄래?”

엔초는 로미오가 밖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창을 활짝 열었다. 열린 창틈으로 빗물이 튀어 로미오의 손등에 묻자 손등을 닦아 주고 창문을 전부 열어젖혔다.

로미오는 반쯤 열린 문에 머리나 이마를 부딪칠 때가 있었기 때문에 문은 반드시 전부 열어 두거나 혹은 닫아 두는 게 좋았다.

“여기에 서 있으면 비가 튀지 않아. 이리 와서 여기 서 있어.”

엔초가 장난감 말을 타고 정원을 빙빙 돌아다니는 사이 로미오는 빗물이 튀지 않는 자리에 서서 거리의 빗소리를 들었다. 눈이 완전히 멀고 나서 비가 오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빗소리가 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저기 스포르차 선생님이 오고 계셔.”

잠시 후 엔초가 곁으로 다가와 창밖을 향해 손짓했다. 빗소리 틈에서 들려올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조반니의 기척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로미오가 엔초와 함께 밖을 보고 있으니 놀란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로 창이 열려 있나 했더니 저를 기다리고 계셨나요?”

머리와 어깨가 비에 젖은 조반니는 창문을 사이에 두고 로미오와 마주 섰다. 품에는 사과주 두 병이 안겨 있었다. 창가에 서서 밖을 보고 있는 로미오가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자 조반니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평소보다 늦으시는 것 같아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일이 많았던 데다 오는 길에 살 것도 있고 해서 늦었습니다. 식사를 먼저 하고 계셔도 되는데 말이죠. 오늘 일은 어떠셨습니까?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술집 근처에서 도박장이 열려 손님들이 많았지만 괜찮았습니다. 여급뿐만 아니라 다른 급사들에게도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입니다. 빗물이 튀니 창을 닫아 드리고 들어가겠습니다.”

창문을 전부 닫고 문으로 들어온 조반니는 어깨와 머리를 털었다. 사방으로 물기가 튀자 로미오는 물에 젖은 개가 몸을 부르르 털어 대는 모습을 떠올렸다.

“빗소리가 크게 들리는데 이곳까지 오시는 동안 많이 젖으셨습니까?”

“아뇨. 빠른 걸음으로 걸어온 덕에 괜찮습니다.”

조반니는 자신이 턴 물기에 로미오가 뺨을 닦자 슬그머니 한 번 더 머리를 털었다. 물기가 또 튀자 로미오는 고개를 돌리며 옷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그게 재밌어 소리 없이 웃으니 엔초도 덩달아 입을 막고 웃었다.

“많이 젖으신 것 같군요… 저택 관리인이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올라가서 바로 식사를 하시면 됩니다. 그분께서 선생님께 전해 달라며 남기고 가신 쪽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 오신 게 뭡니까? 병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술을 사 왔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한잔하시죠.”

“예, 좋습니다.”

자신의 방으로 올라간 조반니가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자 세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촛불을 따뜻하게 밝히고 수프며 찜 요리를 나눠 먹던 중 조반니는 약하게 기침을 했다. 대수롭지 않은 얕은 기침이었지만 로미오는 빵을 먹다 말고 물었다.

“감기에 걸리셨습니까?”

손을 내저으려던 조반니는 로미오의 표정을 보고 얼른 생각을 바꿨다. 그가 자신을 걱정하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비를 흠뻑 맞아서 그렇습니다, 콜록…! 옷을 갈아입기 전만 해도 홍수에 쓸린 생쥐 꼴이었죠. 비를 어찌나 많이 맞았는지 몸이 으슬으슬하군요. 이런 폭우는 정말 오랜만입니다. 최근 1년간 바치에 이런 심한 비가 내린 적은 없었을 정도예요.”

집에 도착했을 때 조반니는 머리와 어깨만 약간 젖은 정도였기 때문에 엔초는 ‘흠뻑’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프를 데워 드릴 테니 주십시오. 따뜻한 걸 드시면 몸을 녹이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수프는 됐습니다. 다만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심각한 오한을 느낄지도 모르니 간호를 미리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그러겠습니다.”

“그럴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제가 만약 고열이 나면 옷을 벗기고 몸을 닦아 주시면 됩니다. 땀에 젖은 옷이 마르면 몸이 식어 감기가 악화될 수 있으니까요.”

“저도 간호를 해 드릴게요! 열이 나면 선생님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 드릴게요.”

옆에서 엔초가 기특하게 끼어들자 조반니는 거짓 미소를 지으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고맙구나.”

로미오를 취하게 하려면 사과주를 몇 잔 먹여야 하는지 궁리하던 조반니가 로미오의 입술에 난 상처를 발견한 것은 로미오가 빵 접시를 비우고 어렵사리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래서 제가 스승님께 그럴 수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차코가…….”

엔초의 종알거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조반니는 로미오의 입가가 찢어진 것을 발견하고 인상을 썼다. 엔초도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로 희미한 상처였으나 로미오의 얼굴만 보며 그의 취한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처를 놓치지 않고 발견했다.

“입가에 상처가 있군요. 언제 생긴 겁니까?”

조반니가 고개를 가까이 기울이자 로미오가 수프를 떠먹던 손을 멈췄다. 접시 가장자리에 덕지덕지 발린 수프가 밖으로 흘러내리기 직전이었다. 수프가 납작한 접시에 담겨 있는 탓이었다.

“오늘 아침에 나가실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상처는 보지 못했는데요. 술집에서 생긴 상처인가요? 어디, 자세히 좀 보겠습니다.”

로미오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려고 하자 조반니가 손대면 덧나서 곪아 버리는 치명적인 상처라도 되는 것처럼 만지지 못하게 했다.

“만지시면 안 됩니다. 찢어졌는데 모르고 계셨나요?”

“아니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별것 아닙니다. 너무 작은 상처라 보지 못하실 줄 알았는데…… 정말 괜찮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어쩌다가 입술을 다치신 겁니까? 부딪치신 건가요?”

“일하는 중에 실수가 있었습니다. 아직 급사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식사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상처라는 말에 엔초가 고개를 빼고 쳐다봤지만 조반니가 로미오에게 얼굴을 들이대고 있어 볼 수가 없었다.

“형, 다쳤어? 어디? 어디를 다쳤어? 많이 아파?”

엔초가 이리저리 고개를 기울이며 보려고 애쓰자 로미오가 조반니의 어깨 너머에서 대답했다.

“크게 다친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조반니의 넓은 등 때문에 로미오를 볼 수 없는 엔초는 식탁 위에 엎드려 조반니의 팔 사이로 로미오를 올려다봤다.

조반니는 로미오의 입술을 뚫어져라 보다가 미심쩍은 표정이 됐다.

“누군가에게 맞으셨군요. 그렇지요?”

조반니의 지적에 로미오는 사탕을 훔치다 들킨 아이의 심정이 돼 입가를 가렸다. 거짓말을 하려니 조반니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을 것 같아 사실대로 얘기했다.

“실은 손님들 간에 시비가 붙어 그 시비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난 상처입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반니가 소리 나게 포크를 내려놓으며 반쯤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에게 맞으신 겁니까? 대체 누가 대위님께 이런 짓을 한 겁니까?”

“처음 보는 손님들이었습니다. 아마 다시 술집을 찾지는 않을 겁니다.”

맞았다는 말에 엔초가 겁먹은 표정이 돼 로미오에게 다가갔다.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보는 엔초의 기척에 로미오는 “괜찮아.” 하며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 ‘괜찮아’는 조반니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대위님께서 경우도, 예의도 없는 자들에게 이런 무례한 짓을 당하셨다니 가슴이 미어지는군요. 화가 치밀 정도입니다. 갈고리 고양이 술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하시면 안 되는 겁니까? 내일이라도 당장 그만두신다면 제가 다른 자리를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병원 일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아니요. 병원에서 일하는 것은 사정이 있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조반니는 로미오가 자신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이 감시하거나 관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로미오가 어려움 없이 일에 잘 적응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술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신이 자세히 알 수 없는 이상 로미오가 술 취한 손님에게 얼굴을 맞는 것과 어느 마음씨 좋은 손님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는 것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에겐 엔초가 로미오의 나이가 될 때까지 로미오가 일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도록 두 사람을 도와줄 능력이 있었지만 일을 그만두게 한다고 말을 들을 로미오가 아니었다.

“지난번에 저를 미행하던 자가 병원에 숨어든 것 같더군요. 어쩌면 환자로 변장해 제게 진료를 받으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위님께서 병원에서 일하시면 도리어 더 불안할 것 같습니다.”

망상에 불과한 것을 진짜라고 믿고 털어놓자 로미오가 놀란 얼굴이 됐다.

“시체 불법 매매 혐의로 재판을 받으셨을 때도 그자가 법정에 숨어들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체 그자가 누구이길래 선생님을 계속 미행하는 겁니까? 공안국에 알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다른 의사들은 아무런 사실을 모르는 데다 그자는 제게 위협을 가하기보다는 주위를 맴돌며 제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목적인 듯합니다. 공안국에 알려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제가 직접 그자의 덜미를 잡을 생각입니다. 술집과 법정, 병원에는 모습을 드러내면서 집 근처를 배회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곳까지 따라와 대위님이나 엔초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겁니다. 저택 관리인에게도 말을 해 두었으니 제가 돌아오는 저녁 전까지 그분이 틈틈이 저택 주위를 살펴보실 겁니다. 그리고 전부 본 것은 아니나 오늘 복도에서 그자의 그림자를 봤습니다. 제가 병실 문을 열자 복도 끝으로 도망가더군요. 옷자락만 보았지만 왜소한 체격을 가진 자였습니다.”

조반니는 자신을 미행하는 자가 카를로타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했지만 그런 말을 로미오에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미오를 병원에 들이는 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계속 술집에서 일하게 놔두는 게 마음에 차지 않아 고민스러웠다. 가장 편한 방법은 로미오가 어쩔 수 없이 급사 일을 그만두게 만드는 것이었다. 갈고리 고양이 술집 지붕을 받치고 있는 대들보 하나를 손본다면 술집을 폭삭 내려앉게 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물론 로미오가 깔려 죽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야 했다.

“제가 대위님께 아무런 도움도 드리지 못하는 것 같아 착잡하군요. 몸과 마음이 편한 곳에서 즐겁게 일하실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그 입술의 상처가 저를 너무나 가슴 아프게 합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제게 유일하게 일자리를 내어 준 곳입니다. 그런 걱정은 마십시오.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즉시 자리를 피하겠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친 엔초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로미오는 엔초를 재우러 방에 데려다주었다.

모처럼 둘만의 시간이 생기자 조반니는 얼른 주방을 정리하고 벽난로가 있는 거실로 로미오와 자리를 옮겼다.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의자 서너 개가 마련된 그곳에 벽난로 불을 때자 더운 훈기가 돌았다.

사과주를 한 잔씩 손에 든 로미오와 조반니는 편할 대로 의자에 앉았다. 조반니는 벽난로 바로 앞의 나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고 로미오는 푹신한 벨벳 의자에 다리를 넓게 벌려 앉았다.

조반니는 로미오의 잔에 든 사과주의 양을 확인하며 바닥이 보일 때마다 채워 넣었는데 로미오는 사과주가 입에 맞는 것인지 생각보다 잘 마셨다. 사과파이에 이어 사과주라니. 그는 사과로 만든 것이라면 다 좋아하는 것 같았다.

“대위님. 좋지 않은 소식이 하나 있는데 말씀드려도 될까요?”

자코모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로미오는 조반니가 조심스러운 척하며 운을 떼자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대한 치료법을 알아내는 것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위님과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들을 일일이 조사했지만 그런 증상을 겪는 환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 외에 다른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시력이 다시 돌아올 방법은 아무래도 없는 듯합니다. 병의 진행을 막을 방법에 대해 여러 요법을 제시하는 의사들도 있었지만 확실하지 않은 관계로 치료법을 밝혀냈다고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사실상 대위님이 갖고 계신 괴병에 관해 알아낸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봐야 합니다.”

로미오는 잔의 입구를 더듬어 사과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상했던 이야기입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위해 힘 써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선생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은 있었으나 치료법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전 이미 맹인으로 살아가고 있고 남은 삶 역시 그렇게 살게 될 거라고 오래전에 단념했습니다. 실망 같은 것은 하지 않았으니 선생님께서도 상심하지 마십시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군요.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치료법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말이죠……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저를 위해 애써 주신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됐습니다. 제게 죄송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로미오가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이자 조반니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잔을 들어 올린 그는 마시는 대신 꿀꺽 소리만 내고 말을 계속했다.

“올빼미에 관한 이야기도 하겠습니다. 대위님과 제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단원들의 인명록을 입수하는 것입니다. 한 명이 체포됐을 때 동시다발적으로 전 지부가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앙 지부의 상위 단원들은 하위 단원들의 정보를 나눠 갖고 있는데 그 흩어진 인명록이 전부 제 손에 들어와야 합니다. 해당 인명록은 다 몬티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하위 단원 하나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저도 일전에 인명록을 본 적이 있는데 두께가 상당했던 것으로 미뤄 세세하게 기록이 돼 있을 겁니다.”

“주 포섭 대상이 학생들이니 인명록 속에는 여러 대학교의 학생들의 이름이 포함돼 있겠군요?”

“네. 교수 중에도 단원들이 있고 학생들 중에도 있습니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아이들은 교육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요직에 앉히지 않지만 좋은 자질을 갖고 있다고 판단되면 엄격히 심사합니다. 적합한 자격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아이들에 한해 일단 입회를 허락할 때도 있으나 그 경우엔 조직의 이름을 비밀로 하기도 합니다.”

“단테의 12인에 입단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입회식을 치르는 아이들이 있단 말입니까?”

“네.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 일종의 교육 단체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적게는 5년, 길게는 10년까지 가까이서 지켜보며 조직 활동을 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면 단테의 12인의 이름을 알려 주며 정식 단원으로 영입하는 겁니다.”

“선생님께서는 저 외에 지금까지 몇 명을 추천하셨습니까?”

“그 수가 많은 데다 결렬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정확하지는 않으나 추천 권한을 갖게 된 이후 지금까지 제가 포섭한 단원은 서른 명 가까이 됩니다. 그중 몇 명은 중앙 지부가 아닌 다른 지부로 옮겨 가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입회식을 마지막으로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자들도 있습니다. 추천자인 제 이름을 잊어버린 이들도 많을 겁니다. 저는 포섭 대상에 대한 관찰 기간이 길지 않은 편이며 대위님은 가장 짧은 기간에 제가 포섭을 제안한 대상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공안국 내에도 단원이 있습니다. 간부급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티모테오를 떠올린 로미오의 표정에 의혹이 서리자 조반니는 고개를 저었다.

“티모테오 우초 경사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를 포섭하려고 시도한 적은 있습니다.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 포섭 대상에서 제외했으나 공안국의 간부를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옛날부터 꾸준히 있어 왔습니다.”

“공안국 내에서 활동하는 단원과 외부에서 접촉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간부 중 한 명과 우연한 자리에서 만난 적은 있으나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공안국에 의해 정체를 들킬 위협에 처한다면 그가 나서서 손을 쓰겠지만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조반니는 로미오가 빈 잔을 내려놓자 그의 얼굴에 취기가 올랐는지 확인하며 사과주를 부었다. 잔을 채우는 것이 빠르다고 생각했는지 로미오가 손을 들어 보였다. 조반니는 시치미를 뚝 떼고 슬그머니 몇 모금 더 부은 뒤 술병을 물렸다.

“혹시 포르치오 가문의 도련님도 단원입니까?”

“줄리오는 아닙니다. 포섭하기 위해 접근했지만 대화를 시작하고 수초 내에 그가 단원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조직의 몸집을 은밀히 불려 나가는 과정이 무척 까다로워 1년에 단 한 명의 단원도 추천하지 못하는 상위 단원들도 많습니다. 최근에는 노프리가 31인 위원회의 위원 한 명과 접촉 중이라고 하더군요.”

“노프리라면 제게 반대표를 던진 자가 아닙니까?”

“네. 그자가 꽤 오래전부터 친분을 쌓아 오던 31인 위원회의 위원에게 미끼를 던졌다는데 아직 포섭 과정 중에 있어 이름을 듣지 못했습니다. 꽤 거물인 듯한데 제 입장에선 섣불리 관심을 보이기가 힘듭니다. 나서는 게 부자연스러운 상황이라고 봐야겠지요. 이름 끝자리라도 들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선생님의 출판 축하회에 위원 두 분이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분들과는 관련이 없습니까?”

“그분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한때 그 두 분을 포섭 대상으로 삼은 적이 있습니다만 줄리오처럼 적합한 인물이 아니기에 포기했습니다. 가능하다면 대위님께서 노프리가 작업 중인 위원이 누구인지 알아내 보시겠습니까? 예전에 친치아가 노프리와 함께 포섭 활동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현재 친치아는 레오나르도와 함께 움직이고 있지만 친치아가 노프리와 사이가 나쁘지 않으니 그로부터 뭔가 들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웃음이 많은 데다 명랑해 착각하기 쉽지만 친치아는 머리가 좋은 편입니다. 웃는 낯으로 허를 찌를 때가 많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로미오는 사과주를 두 모금 마셨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로미오의 목젖을 따라 눈을 굴린 조반니는 그의 매끄러운 목선을 실컷 구경하고 말을 이었다.

“단원들 중 바치가 아닌 타 도시의 연락망을 관리하는 단원들도 있습니다. 니콜로와 소피아라는 이름의 단원들인데 기억하시겠습니까?”

“예. 단원들 중 가장 목소리 구분이 용이한 자들이라 기억하고 있습니다. 니콜로는 키가 작은 반면 체격이 다부진 자일 것이고 소피아는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을 가진 자일 겁니다. 니콜로라는 자는 말투에서 미세하게 북부 억양이 묻어나오더군요. 소피아라는 자는 성격이 급한 자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맞습니다. 얼굴을 보신 것처럼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다 몬티가 갖고 있는 인명록과 함께 그 두 사람이 갖고 있는 인명록도 넘겨받으면 조직을 와해시키는 것이 수월해질 텐데 도통 틈이 보이지 않아 고생 중입니다. 그 둘을 감금하고 협박해 인명록을 얻어 낸 뒤 중앙 지부를 제외한 나머지 지부부터 붕괴시킬 생각을 해 봤지만 벌집에서 꿀 한 주먹을 퍼내자고 무턱대고 안을 쑤시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벌들을 한 마리도 빠짐없이 잡아들여야 하니 벌집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며 기다리는 수밖에요.”

“대총장 선출에 관해서는 제가 해야 할 일이 없겠습니까?”

“네. 대위님께서 해 주셔야 할 일은 아직 없습니다.”

조반니는 로미오가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 빈 술잔을 내려놓자 그의 눈치를 보며 사과주를 부었다.

“다음 회의에서 군에 관한 정보를 넘겨주시게 될 텐데 거짓을 보태거나 숨길 필요 없이 그대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군이 단테의 12인을 색출해 내기 위해 사용하는 취조법이나 연루자를 선별하는 기준 같은 것들 말입니다. 부대 내의 고문실과 지하 감옥의 도면도 요구받을 테지만 그 부분은 대위님께서 맹인이시니 정확히 그려 내지 못하더라도 의심받지 않을 겁니다. 그 경우라면 거짓말을 하셔도 좋습니다.”

“거짓 없이 사실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진실을 말하되 그들이 알아차릴 수 없도록 거짓을 섞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군 내에 내통자 역할을 하는 단원이 없는 이상 제 말이 거짓으로 드러날 확률은 적지 않습니까?”

“지난번에 보니 엘베라가 대위님을 믿지 못하더군요. 뭔가 눈치채고서 의심하기보다는 본래 의심이 많은 자라 그러는 걸 겁니다. 그자가 대위님을 주의 깊게 보고 있으니 대위님께서 알고 계시는 사실 모두를 그대로 전달해 군이 당분간 우리의 꼬리를 밟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시켜 줄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군에서 수색에 어려움을 겪겠지만 지금 대위님과 제게 중요한 것은 군이 연루자 색출에 낭패를 겪는 게 아니니까요. 다른 이들을 전부 속이더라도 엘베라를 속이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다 몬티라는 자는 선생님께 우호적인 단원이 맞습니까? 목소리만으로 그녀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만.”

“느끼신 대로입니다. 그녀는 주로 바치가 아닌 다른 도시에서 단원 포섭 활동을 합니다. 너그러운 성미를 가진 자이니 레오나르도와 친치아 다음으로 그녀와 가깝게 지내시는 게 좋습니다.”

로미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물었다.

“엘베라 그자는 어떤 이유로 단테의 12인이 된 겁니까? 그녀의 과거에 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가난한 시골 마을의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전염병으로 가족을 전부 잃었다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름 외에 성은 알지 못하는데 아마 엘베라라는 이름도 진짜 이름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소녀 시절에 어느 구리 세공인의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가게에 드나들던 단원의 눈에 띈 것이 계기가 돼 입단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신을 신발이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궁핍했지만 책 읽기를 좋아해 구리 세공인의 조수 일을 하며 번 돈의 대부분을 철학서를 사는 데 썼다고 하더군요. 그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정치적인 식견 외에도 철학적 논쟁에서 쉬이 이길 만한 소양을 갖추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로미오가 사과주를 몇 잔 마셨는지 계산한 조반니는 로미오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로사티 3번가의 하숙집이 복구가 됐을지 궁금하군요. 그라나 부인께서 그곳에 남아 계셔서 걱정스러우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시간이 날 때 한 번 들러 보겠습니다.”

로미오는 무릎 위에 걸치고 있는 팔을 떼고 상체를 뒤로 젖혔다. 허리를 펴 앉은 그는 의자 팔걸이에 팔을 얹고 손을 더듬어 잔을 쥐었다. 조반니는 몇 모금 마시지 않은 자신의 술잔을 빙빙 돌리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부터 대위님께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 여쭤봐도 될는지요?”

“예, 그러십시오.”

조반니는 벽난로 불빛에 뺨이 불그레한 로미오가 귀엽다고 생각하며 입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대위님께서는 누군가를 마음에 두셨던 적이 있으신가요?”

자코모의 일을 생각하고 있던 로미오는 대답하는 대신 조반니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가벼운 이야기를 할 기분이 아닌 데다 그가 그런 것을 궁금해하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얼른 대답하지 않자 조반니가 다시 물었다.

“여인을 흠모해 보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신가요?”

로미오는 고개를 바로 하고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잔을 놓고 이마에 손을 대자 취기가 오른 것인지 얼굴이 뜨거웠다.

“예, 없습니다.”

“한 번도요?”

“예.”

“한 번쯤은 있을 줄로 알았는데 놀랍네요.”

조반니는 턱을 괸 채 로미오가 여인과 동침을 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로미오가 다른 이와 몸을 섞는 것을 실제로 용납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런 장면을 상상함으로써 로미오에게서 남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것은 즐거웠다. 음모가 없는 선홍빛 성기를 쥐고 흔들며 여인의 나체에 비비는 로미오라니 이 얼마나 짜릿한 상상인가. 단단해진 성기를 세우고 허리 짓을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로미오의 모습을 상상하자 사타구니가 뜨거워졌다.

“대위님께 마음을 표현했던 분들은 많았을 것 같은데요. 어떤가요?”

벽난로 불빛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던 로미오는 잔을 들어 사과주를 전부 마셨다. 큰 숨을 내쉰 그는 생각에 잠긴 듯 빈 잔을 매만졌다.

“글쎄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로미오가 다른 사람과의 동침 경험이 있는지를 캐내는 것이 목적이었던 조반니였지만 빈 잔을 매만지는 로미오의 옆얼굴을 보고 있자니 더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가 본심을 고백하고 싶었다. 오늘 이 대화 이후로 로미오가 자신을 어려워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떻게 해도 지금 당장 그와 몸을 섞는 것은 불가능했고 마음을 고백한다고 로미오와의 관계가 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당황할 만한 고백의 말을 무턱대고 해 버리고 싶었다.

언젠가 자신이 그에게 욕정을 느낀다고 말하려면 마음을 고백하는 게 먼저였다. 고백을 해 야릇한 분위기를 만들고 나면 좀 더 노골적으로 육체적인 끌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로미오의 온몸을 애무하는 상상만으로 밤을 새울 수도 있는 자신이었다. 적어도 로미오가 자신의 마음 끝자락, 티끌 같은 그 일부분에 대해 짐작해 주길 바랐다. 자신이 얼마나 자주 그를 생각하고 얼마나 자주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며 얼마나 자주 그런 상상에 빠지는지 그가 조금이라도 헤아려 주길 바랐다.

만약 로미오가 원한다면 자신은 산 채로 심장이라도 꺼내 보일 준비가 돼 있었다. 그만큼이나 그에게 강렬하게 끌리고 있었다.

“그러면 혹시 같은 사내를 마음에 두셨던 적은 없으신가요?”

조반니는 자신의 잔을 내려놓고 로미오의 쪽으로 몸을 틀어 앉았다. 난롯불 소리를 듣고 있던 로미오는 조반니의 기척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만약 대위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겼는데 그 상대가 사내라면 어떨 것 같으신가요?”

“…….”

“혹은 누군가 대위님께 마음을 고백했는데 그자가 사내라면 대위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거지요?”

별다른 빛이 드러나지 않던 로미오의 눈빛이 서서히 변했다. 그는 오래 걸리지 않아 조반니의 의중을 파악하고 손에 든 잔을 내려놨다.

“……저, 선생님.”

로미오는 바닥에 잠시간 시선을 뒀다. 빈손을 맞잡은 그는 신중한 태도로 입을 뗐다.

“이런 말씀을 드린다고 해서 제가 선생님께 유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이야기드리자면……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린 적이 없기에 사랑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나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제가 만약 마음이 뛰는 상대를 만난다면 그 상대는 여인일 겁니다.”

그 순간 조반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로미오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러운 기척에 로미오가 고개를 뒤로 물리자 조반니는 로미오가 앉아 있는 의자 아래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로미오의 손목을 잡았다. 세우고 있는 허벅지 사이로 딱딱해진 성기가 머리를 쳐들자 바지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불뚝 일어선 성기는 속옷 아래에서 꿈틀대며 굵직하게 크기를 키워 갔다.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지금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대위님께서 사랑에 빠진 상대가 같은 사내라면 어떨지요.”

로미오는 말하느라 살짝 벌리고 있던 입술을 다물었다. 손목 위에 가볍게 얹어진 조반니의 손은 떨어지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젖지 않았으나 젖은 것처럼 느껴지는 손바닥은 따뜻했다.

“단지 상상입니다. 정말로 벌어질 가능성이 낮은 상상요.”

로미오는 조반니가 웃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목소리를 통해 눈치챘다. 그는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눈을 똑바로 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상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럴 일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로미오가 손목을 빼려고 하자 조반니는 스르르 힘을 풀고 손목을 놓아줬다. 그러나 손이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손끝을 다시 잡았다. 평소였다면 공손히 손을 물렸을 로미오였지만 잡힌 손을 빼내지 못하고 그대로 있었다. 닿아 있는 손 너머로 뜻 모를 미묘한 긴장감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부드러운 건드림이었지만 조반니의 손에서는 악력이 느껴졌다.

“…….”

“…….”

로미오가 시선을 더듬어 조반니와 눈을 맞추자 조반니는 로미오에게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자 거실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벽난로 불빛 때문에 옆얼굴이 불그스름한 두 사람은 난롯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만 들리도록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선생님. 손을… 놓아주십시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로미오였지만 조반니는 그의 말문이 막힐 만한 말을 던졌다.

“대위님께 마음이 있습니다.”

로미오의 푸른 눈동자가 크게 열렸다가 잦아들었다. 벽난로 빛을 받아 작아진 검은 동공이 가볍게 흔들리는 속눈썹에 반쯤 가려졌다.

“오래전부터 혼자 애틋한 마음을 품어 왔습니다. 대위님께서 이미 눈치채셨을지도 모르지만요.”

눈을 내린 로미오는 혀로 입술을 한 번 핥았다. 긴장을 느낄 때 나타나는 행동이었다.

“…….”

조반니는 단단해진 성기 끝에서 끈적한 것이 배어 나와 속옷을 적시는 걸 느꼈다. 겁탈로 달래야 했던 더러운 욕정이 치밀어 오르자 배 속이 뒤틀렸다. 로미오를 향한 육욕이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부추기며 그의 나신을 상상하게 만들었지만 이성을 가다듬었다.

“제 진심을 말씀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이야기드립니다. 대위님을 생각할 때면 마음이 두근거려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제 생에 다시 오지 않을 운명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떨립니다. 대위님을 떠올리면 맨발로 돌길을 걷고, 가시덤불이 우거진 산을 넘고, 돛 없는 배로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잠들지 않고도 수일의 밤을 견딜 수 있고 물 없이도 황량한 사막을 건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반니는 로미오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얽어 넣으며 그의 눈동자에 차례로 스쳐 지나가는 감정을 읽었다.

로미오는 놀랐고, 곤란해하고 있었고, 거절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난처해하면서도 이런 상황을 예감한 듯 대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련하고 유연하게 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마치 또래 소녀의 사랑 고백에 당황한 소년처럼. 단테의 12인의 입회식 때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고서도 흔들림 없이 냉철했던 로미오가 자신의 고백에 대답을 망설이는 게 끔찍이도 좋았다.

아, 이 순진한 어린 양 같은 사내를 어쩌면 좋을까.

“대위님의 모든 것이 제 마음을 뒤흔듭니다. 마주 보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두 눈동자와 우아한 목소리와 단정한 걸음걸이. 무엇하나 빼놓지 않고 제 마음 깊숙한 곳을 자꾸만 세차게 건드려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대위님께서 제 곁을 지나실 때 느껴지는 공기의 흐름조차 제 가슴을 뛰게 한다면 믿으실까요? 눈을 감아도 대위님이 생각납니다. 매 순간 너무도 열렬히 생각하느라 대위님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기꺼워하고 아낄 여력이 없습니다. 태어나 그 무엇도 이토록 애끓게 원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말을 맺었으나 로미오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얼굴을 감추려는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그저 조용히 듣기만 했다.

“대위님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대위님의 모든 것이 저를 설레게 합니다. 대위님께서 길고 흰 손가락으로 차분히 무언가를 잡으시거나 주워 들 때, 제가 대위님을 불렀을 때 제 목소리가 있는 방향을 찾기 위해 대위님께서 고갯짓을 하실 때, 꿀이 듬뿍 든 사과파이를 먹기 위해 대위님께서 포크질을 하실 때조차 저는 마음이 들뜹니다. 대위님의 모든 것이 제 심장을 자꾸만 간질여 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듭니다.”

“…….”

“제 마음을 받아 달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알아만 주세요. 제가 한시도 잊지 않고 늘 대위님을 생각하며 대위님의 모든 것에 푹 빠져 있다는 사실을 그저 알아만 주시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조반니는 로미오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싶을 것을 참으며 손을 놓아줬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눈으로 구경하는 게 전부인 까닭에 징그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얼굴만 봤다.

난롯불에 발갛게 달아오른 로미오의 뺨을 보며 그의 아름다운 나체를 상상하는데 로미오가 갑작스러운 이름을 꺼냈다.

“……비토리오 나르디 말입니다.”

비토리오? 엉뚱한 이야기에 조반니는 양쪽 눈썹을 번갈아 치켜올렸지만 로미오의 눈빛이 깊어졌음을 느끼고 뒷말을 기다렸다.

“……그자가 제6군단에 인치돼 고문실에서 숨을 거뒀을 때 선생님의 앞으로 남겼던 유언이 있었습니다. 그가 선생님께 전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불필요한 것이라고 판단해 제가 소각시킬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조반니는 로미오가 자신과 눈을 맞추기 위해 시선을 옮기는 것은 지켜봤다. 그는 흔들리던 시선을 한곳에 고정했는데 그 지점은 자신의 눈이 아니라 이마였다. 고개를 움직여 로미오와 눈을 맞춘 조반니는 로미오의 마음속에 일어난 동요를 눈치채고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의 고백이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영향을 미친 것 같아 기뻤다.

“유언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군요. 그가 뭐라고 남겼습니까?”

유언의 내용이 전혀 궁금하지 않은 데다 이런 때에 갑자기 비토리오의 이야기를 꺼내는 로미오의 의중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조반니는 로미오의 장단을 맞췄다. 목을 축일 겸 사과주를 한 모금 마시는데 로미오가 정확히 사과주를 두 모금 꿀꺽, 꿀꺽 마셨을 때 말했다.

“당신을 만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를 잊지 말아 주세요, 조반니.”

순간 조반니는 입에 대고 있던 잔을 황급히 떼며 눈을 큼직하게 떴다. 삽시간에 눈빛에 생기가 돌며 환해졌다. 순간적으로 흥분한 나머지 귀두 끝에서 끈적한 것이 한가득 새어 나와 성기 기둥을 타고 미끄러질 정도였다.

“그가 그렇게 전해 달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조반니는 하마터면 그러겠다고 대답할 뻔한 것을 가까스로 눌러 참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네, 절대로 대위님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로미오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줬다는 사실에 몸을 떨었다. 듣지 못했으니 다시 한번 말해 달라고 할까? 그가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다니 믿을 수 없었다. 죽은 비토리오에게 처음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로미오가 자신을 ‘조반니’라고 부르다니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었다!

“아, 음…… 비토리오가 그런 말을 남겼을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그가 남긴 유언에 관한 이야기는 왜 갑자기 꺼내시는 건가요?”

조반니는 로미오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 것이 좋아 바보처럼 싱글거렸다. 목소리를 남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방금 로미오의 그 말을 어딘가에 남겨 두고 아침저녁으로 반복해 들을 것이다. 수음을 할 때 특히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았다.

“선생님께서 제게 마음을 고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과 비토리오의 유언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선생님께서 나르디 그자에게 아무리 마음이 없으셨다고 해도 어쨌든 그가 선생님께 애정을 품었던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선생님께선 그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신데 무관한 것처럼 행동하시기에 여쭤보는 겁니다.”

로미오는 자신이 조반니의 마음을 받아 주느냐, 받아 주지 않느냐와는 상관없이 비토리오가 죽던 날 조반니가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들었다던 자코모의 말의 진위를 가리고 싶어 했다. 자신에게 애정을 표현했던 상대에게는 냉혹하면서 자신이 애정을 품은 상대에게는 한없이 상냥하고 따뜻하다면 과연 그것이 진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르디 그자가 죽던 날 선생님께서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더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자에게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느끼지는 못하십니까? 저는 그 당시 제6군단의 장교였고 나르디 그는 반정부 조직의 이념에 선동된 반역자였으니 제게는 그를 불쌍해할 이유가 없으나 선생님은 다를 겁니다. 그에게 동정이나 안타까움을 느끼지 못하시는 선생님과 제게 이렇게 마음을 고백하시는 선생님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나르디 그자가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선생님을 떠올렸다는 것이 선생님께 아무런 의미 없는 사실처럼 느껴지신다면 저를 향한 선생님의 그 마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된 조반니는 바지춤을 벌렸다. 속옷 안으로 손을 넣어 밑으로 내려 벗기자 딱딱하게 선 성기가 기다렸단 듯이 튀어 올랐다. 빽빽한 음모에 파묻힌 검붉은 성기는 로미오를 향해 선 채 흔들렸는데 귀두 끝에서 나온 액 때문에 번들번들하게 젖어 있었다. 속옷을 젖혀 벌겋게 달아오른 굵은 음낭까지 전부 내보인 조반니는 성기 기둥을 쥐고 흔들었다.

“아…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실 줄은 몰랐군요. 하지만 이해합니다. 그런 의문을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퍼런 핏줄이 돌기처럼 솟아 있는 성기는 배꼽에 닿을 정도로 빳빳하게 서 있었다. 젖은 성기가 쿨쩍이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천천히 손을 움직였지만 음낭이 위아래로 덜렁거릴 정도로 힘 있게 흔들어 대니 찔퍽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핏줄 사이사이에 고인 액이 손바닥 마찰로 허옇게 잔거품을 일으키며 귀두 밑의 홈에 엉겨 붙었다.

“진실을 말씀드리자면, 흐음, 큼! 저와 비토리오 사이에는 대위님께서 모르는 일이 있습니다. 서로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던 시절에 비토리오는 저를 두고 다른 상대와 만남을 가졌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고아에다 외로움을 많이 타 항상 곁에 있어 주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인지 그는 번번이 제 눈을 피해 다른 사람들과 밀회를 가졌죠. 저는 그때마다 그를 용서해 주었지만 그는 다시 저를 기만했습니다. 취조 당시 제가 대위님께 저와 비토리오는 연인 사이가 아니라고 얘기했던 걸 기억하실 겁니다. 그건 거짓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연인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그와 마음을 나누는 동안 그가 제게 너무 큰 상처를 줬기에 그와의 관계를 부정했던 겁니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기 때문에 그의 체포 이후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하면서도 그가 제게 보여 줬던 실망스러운 모습에 배신감을 느끼고 애써 외면했습니다.”

뻔뻔하게 거짓말을 지어낸 조반니는 로미오를 속이기 위해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목소리에 울먹거림이 섞여 나오자 예상대로 로미오는 놀란 기색이 됐다. 조반니가 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데다 그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니 당연했다.

“그가 죽던 날 제가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니요. 그 소문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와 저는 서로의 영혼을 절반씩 나눠 가졌던 깊은 사이였습니다. 그가 그토록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는데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조반니는 입술을 물며 성기를 더 빨리 흔들었다. 소리를 죽이기 위해 손바닥을 밀착시켜 쥐고 흔드느라 팔 근육이 경직됐다. 로미오를 바로 앞에 두고 수음하는 이 상황이 좋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흥분됐다. 그가 자신을 봐 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로미오의 좁은 내부를 상상하기가 훨씬 쉬웠다. 신음이 나오지 않게 입술을 물고 있느라 턱이 뻐근했지만 안간힘을 써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저는 지금도 이따금씩 비토리오를 생각합니다. 소년 같았던 비토리오의 웃음을 떠올릴 때면, 흣… 마음 한구석이 저리도록 아파 도저히 참을 수가, 흑……!”

‘흑’이 아니라 ‘윽’에 가까운 신음 소리였지만 조반니가 흐느끼고 있다고 생각한 로미오는 더는 아무 말하지 못했다. 두 사람 간에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조반니를 의심해 눈물짓게 만든 것이 되자 고개가 숙어졌다.

소문은 단지 소문이었다. 조반니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말을 믿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

자신이 그를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조반니가 그런 사람일 리가 없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조반니가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 로미오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슬퍼하지 마십시오, 선생님.”

조반니는 읏, 큭, 하는 숨소리를 삼키며 성기를 점점 더 빨리 흔들었다. 사정이 가까워 오는 성기는 시뻘겋게 달아올라 로미오의 발치에 정액을 쏟아 낼 것처럼 껄떡였다.

“하지만 선생님의 마음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 거절을 이해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로미오는 진지하면서도 신중한 목소리를 냈지만 그 목소리는 조반니에게 자극만 될 뿐이었다. 성기를 흔들던 손을 떼자 손바닥이 움찔움찔 아랫배가 떨렸다.

“대위님께서 거절하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변치 않도록…….”

거기까지 말했을 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고 복도로 걸어 나오는 발소리였다. 문을 홱 돌아본 조반니는 급하게 성기를 속옷 안으로 밀어 넣고 바지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허리끈을 묶기 전에 문이 열렸다.

“목이 말라요…….”

문 앞에는 자다 깬 엔초가 눈을 비비며 서 있었다. 하품을 하던 엔초는 의자에 앉은 로미오와 로미오의 앞에 서서 바지 끈을 묶고 있는 조반니를 보고 눈을 비비던 손을 멈췄다. 조반니는 돌아서 있었지만 그의 사타구니가 두둑하게 도드라져 있는 것이 골반 너머로 보였다. 어리둥절한 마음에 등을 보이고 선 조반니를 향해 선생님, 하고 부르자 조반니가 얼른 다가왔다.

“물을 줄 테니 이리 와라. 대위님, 여기 계십시오.”

조반니가 등을 툭 쳐 주방으로 향한 엔초는 차가운 물 한 잔을 건네받았다. 조반니는 몸을 가리려는 것처럼 돌아서서 손수건에 손을 닦았지만 그의 중심부가 이상할 정도로 불룩하게 커져 있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가 왜 그렇게 됐어요?”

엔초는 다 마신 물잔을 건네며 조반니의 다리 사이를 가리켰다. 눈앞에 바로 보이는 조반니의 그곳은 팽팽하게 부은 것처럼 컸다.

“…….”

조반니는 뒤를 돌아봤지만 물잔을 받아 들지도 않았고 대답을 하지도 않았다.

“아파서 그렇게 된 거예요?”

주위가 컴컴해 조반니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웃음기 없는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조반니가 아파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 엔초는 직접 탁자 위에 물잔을 내려놨다.

“아파서 커진 게 맞아요?”

침묵하던 조반니는 한숨을 내쉬더니 완전히 돌아서서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단다. 하지만 곧 괜찮아질 거야.”

“많이 아파 보여요. 약을 먹는 게 어때요?”

“약? 그래. 그래야지. 물을 다 마셨으면 이제 다시 자러 가자.”

조반니는 엔초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 방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기 전 엔초를 돌려세워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눈짓으로 자신의 사타구니를 가리키며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여기가 아픈 건 창피한 일이니 대위님한테는 말하지 마라. 내 여기가 이렇게 된 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어때, 약속할 수 있겠어?”

엔초는 하품을 아주 크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암…… 네, 그럴게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렴.”

조반니는 엔초가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자 문을 닫았다. 문고리를 쥔 채 한동안 그 상태로 서 있다가 입 모양으로 욕을 하고 거실로 돌아갔다. 그사이 로미오는 잔을 멀리 치워 놓고 술병도 정리해 놓은 상태였다.

“엔초가 목이 말라 자다 깼던 모양입니다. 물을 한 잔 먹이고 다시 재웠습니다.”

바지 속에 두둑한 성기를 숨긴 조반니는 거칠게 술병을 낚아채 입에 대고 마셨다. 분위기가 깨졌다는 생각에 엔초의 방이 있는 방향을 노려보는데 로미오가 말했다.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자코모 본도네가 살해당했다는군요. 칼에 일곱 차례 찔려 사망했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살해 소식이 빨리 전해졌단 생각이 들었지만 조반니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래서 로미오가 자코모의 살해 소식에 마음을 쓰는 기색을 보이는지 흰 눈을 뜨고 쳐다보며 연기했다.

“자코모가요? 아니, 어쩌다가 그런 일이 일어났답니까? 대위님께서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설마 현장을 발견하신 겁니까?”

“아니요. 오늘 공안국에서 우초 경사로부터 들었습니다. 엔초의 생일날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분이 그날 하숙집 앞으로 찾아왔다는 사실을 안 우초 경사가 저를 조사했습니다. 생일에 참석한 손님들은 물론 선생님도 조사할 겁니다.”

“엔초의 생일날이라면 제가 의사 협회의 모임에 갔던 날이네요. 저런, 그날 그런 끔찍한 변을 당했나 봅니다. 이 무슨 흉흉한 일인지.”

조반니는 젖어 있는 속옷이 불쾌해 빠른 걸음으로 벽난로 앞으로 다가갔다. 자코모의 이야기를 전하는 로미오의 표정이 어두워 심술이 났지만 예상한 정도에 그치는 반응이었기에 가볍게 무시했다.

“그날 문 앞에 서서 나눴던 대화를 우초 경사에게 이야기하니 그가 선생님을 의심하더군요. 공안국에서 조사를 받으실 때 불편한 질문을 받게 되실 겁니다. 제가 이번 일과 선생님은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드리긴 했습니다만…… 그날 나눴던 대화가 하필 그런 것이라 사실을 전달함에 있어 오해를 산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대위님께서 제게 죄송하실 필요가 뭐가 있나요? 골치가 아파졌지만 저는 결백한 데다 죽은 자코모를 위한 일이니 하루속히 공안국의 조사를 받아야겠습니다. 그럼 이만 자리를 정리하죠. 벽난로를 끄겠습니다. 대위님과 함께 사과주를 마시니 좋군요. 다음번에도 이렇게 엔초를 재워 놓고 술잔을 기울이도록 하지요.”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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