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올빼미의 굴속으로
희미한 콧노래 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왔다.
새벽 어스름이 가신 방 안은 환했다. 창문으로 들어온 아침 햇볕이 바닥에 창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로미오는 손을 더듬어 옆자리에 누워 있는 엔초를 확인했다. 오르내리는 작은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있다가 담요를 어깨까지 덮어 주고 몸을 일으켰다.
새벽녘에 엔초와 함께 조반니의 3층 저택으로 온 로미오는 조반니가 급하게 내어 준 방에서 엔초와 함께 잠들었다. 방 안에는 어젯밤 하숙집에서 가져온 엔초의 선물들이 놓여 있었다. 사탕과 과자가 든 상자와 장난감 말, 호두나무 함, 새 옷들, 그리고 동화책 두 권. 엔초는 생일 선물을 전부 가져오고 싶어 했지만 거울은 무게가 나가는 데다 지나치게 커 들고 오지 못했다. 로미오가 준 붓과 끌은 처음 선물 받았을 때처럼 곱게 포장돼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조반니의 말대로 다행히 탄 물건은 많지 않았다. 재 가루를 털어 낸 옷 몇 벌을 챙긴 로미오는 갖고 있던 돈도 전부 챙겼다. 그라나 부인은 집이 보수되는 동안 하숙집을 떠나지 않고 1층에서 계속 지내기로 했기 때문에 피에트로의 유품은 그녀가 맡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화재로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음에도 조반니는 일찍 일어나 지하실을 오가며 집을 정리했다. 문을 열고 나가면 보이는 복도 계단의 위층에 조반니의 침실이 있었는데 로미오는 새벽 무렵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자신과 엔초를 생각해 벽 너머에서 조용히 걸어 다녔는데 나무 계단을 밟는 발소리가 하숙집에서 듣던 소리와 달라 낯설었다. 방 안에서 나는 냄새와 공기도 어딘가 묘하게 스산해 익숙하지 않았다. 문을 여닫고 무거운 물건을 들었다가 내리는 고요한 소음들이 조반니의 저택에 와 있음을 실감케 했다.
방 밖으로 나가자 어젯밤에는 없었던 푹신한 카펫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복도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가 떠돌았다.
어젯밤 조반니에게 집 안의 구조를 대강 전해 들었던 로미오는 벽을 더듬으며 복도를 걸었다. 조반니의 흥얼거리는 콧노래를 따라가자 열려 있는 부엌문이 만져졌다. 흠이나 갈라짐이 없는 깨끗한 나무 문이었다.
“선생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등 뒤에서 인사를 건네자 콧노래 소리가 멎고 활기 넘치는 조반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깨셨군요. 간밤에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으셨나요?”
“덕분에 잘 잤습니다. 엔초도 금방 잠이 들더군요.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계셨습니까?”
“네. 식재료가 많지 않아 간단히 만들었습니다. 준비가 다 됐으니 엔초를 깨워 주세요.”
조반니는 어젯밤의 화재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목소리며 손짓에 힘이 넘쳤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죽이 든 솥을 기분 좋게 휘젓던 그는 로미오가 엔초를 깨우러 방으로 향하자 문간으로 다가가 복도를 내다봤다. 로미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가슴 전체에 뻐근한 두근거림을 느끼고 큰 숨을 들이마셨다.
“아! 이 상쾌한 아침.”
흡족함에 미소 지은 조반니는 싱글거리며 부엌 옆의 응접실로 음식들을 날랐다. 후식으로 먹을 과일까지 전부 차려지자 모두 사이좋게 식탁에 둘러앉았다.
네베식 옥수수죽과 방금 막 화덕에서 꺼낸 것 같은 따끈한 밀빵, 세 가지 종류의 치즈, 그리고 신선한 과일이 차려진 식탁은 로미오가 평소 차려 주던 아침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엔초는 음식들을 둘러보며 눈이 동그래졌다.
“선생님이 이걸 전부 준비하셨어요?”
“그럼, 당연하지. 어서 먹으렴. 대위님? 왼쪽에서부터 차례대로 죽과 빵, 치즈, 우유가 놓여 있습니다. 치즈와 빵은 제가 덜어 드리겠습니다.”
평범한 옥수수죽이라고 생각해 한 입 떠먹은 엔초는 눈이 커졌다. 로미오 역시 손으로 그릇을 더듬거려 작게 한 숟갈 떠먹더니 옥수수죽에서 익숙한 맛이 나자 놀라서 조반니를 쳐다봤다.
“맛이 어떤가요? 지난번에 대위님과 함께 네베에서 먹었던 옥수수죽을 떠올리며 만들어 봤습니다.”
로미오보다 더 놀란 것은 엔초였다. 엔초는 재빨리 서너 숟갈 떠먹더니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큰 눈을 아주 큼지막하게 떴다. 전날 밤에 집이 불타는 불운을 겪었으나 오늘 아침 마법처럼 고향의 맛을 느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혀끝에서 맴도는 감칠맛마저 옛 기억 속의 그 옥수수죽과 똑같았다.
“어렸을 때 먹었던 죽 맛이 나요! 색깔도 똑같아요. 냄새도요. 선생님은 네베 사람인가요?”
“하하,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똑같은 맛이 난다니 다행이야. 대위님께서는 어떠신가요?”
로미오에게서 ‘예, 비슷합니다.’ 정도의 대답을 기대했던 조반니는 로미오가 생각보다 더 놀라 보이자 소리 내 웃었다.
“선생님께서는 한 번 음식을 맛보면 그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재능이 있으신 겁니까? 지난번 네베의 술집에서 먹었던 죽과 맛이 똑같습니다. 그 술집에서 팔던 죽을 이곳으로 가져왔다고 해도 믿을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똑같다니 기분이 좋네요. 처음부터 똑같은 맛을 내는 것이 어려워 조금씩 맛보며 필요한 재료를 추가했습니다. 네베 분이신 대위님과 엔초에게 인정받으니 우쭐해지네요. 이제 어디 가서 네베 음식에 대해 아는 체해도 되겠습니다.”
“그때 기억을 되살려서 만드셨다니 대단합니다. 네베의 옥수수죽은 그때 딱 한 번 드셔 보신 게 아닙니까? 이건 정말…… 정말로 똑같군요. 혹시 그때 주방에서 조리법을 전해 들으신 게 아닙니까?”
“저는 음식의 맛을 잘 기억하는 편입니다. 한 번 맛본 그 맛을 기가 막히게 흉내 내는 게 제 재주죠.”
조반니는 빵에 치즈를 얹어 로미오와 엔초에게 나눠 주고 자신도 죽을 떠먹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로미오가 먹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조반니는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관리인이 가끔 들러 집을 봐주고 있긴 하지만 그동안 제가 전혀 신경 쓰지 않아 지하실이며 1층의 실내 정원이 지저분합니다. 조만간 깨끗하게 치울 테니 그때까지는 집 안이 어수선할 겁니다.”
“어제 들어오며 보니 정원이 아주 넓은 것 같더군요. 지하실은 1층의 계단을 통해 내려갈 수 있는 겁니까?”
“네. 제가 해부를 위해 마련해 놓은 공간이라 좋은 냄새가 나지는 않을 겁니다. 그곳도 깨끗이 치운 뒤에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엔초의 방도 오늘 밤 내로 당장 쓸 수 있도록 깨끗이 치우겠습니다.”
“전 엔초와 같이 방을 써도 괜찮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침실과 서재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저택에 남는 방이 많아 문제없습니다. 이 저택은 저 혼자 살기에는 큰 저택입니다. 침실과 서재는 위층에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엔초는 바닥이 보이도록 옥수수죽을 깨끗이 긁어 먹더니 빵과 우유도 남김없이 말끔히 비워 냈다.
“정말 맛있었어요. 잘 먹었습니다!”
로미오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음식을 갓 조리해 따뜻한 상태로 식탁 위에 올려놓지 못했다. 애정이 담겨 있지만 늘 차거나 식은 아침을 먹어야 했던 엔초는 모처럼 먹은 따뜻한 아침 식사에 부른 배를 문질렀다.
화실에 갈 시간이 되자 조반니와 로미오는 저택 밖으로 나와 엔초를 배웅했는데 조반니는 식사를 하는 동안 흐트러진 엔초의 옷소매도 바로 해 주고 뺨이나 입가에 빵부스러기가 묻지 않았는지도 봐 주었다.
잘못 묶은 신발 끈이나 옷에 묻은 음식 자국은 보통 화실에 도착해 스승님이 봐 주었기 때문에 조반니가 어머니처럼 자신의 옷이며 얼굴을 살펴보자 엔초는 생긋 웃었다. 로미오도 아침마다 옷매무새를 만져 주었지만 그는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을 놓칠 때가 많았다. 로미오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엔초는 종종 화실까지 가는 길에 혼자서 입가를 닦기도 하고 이상한 모양으로 뻗친 머리를 손으로 쓸기도 했다.
“저 길로 나가면 곧장 화실로 가는 길이 나올 거다.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을 거야.”
“네, 선생님. 걱정하지 마세요. 형! 나중에 봐!”
“조심히 다녀와.”
손을 흔들어 보인 엔초가 종종걸음으로 사라지자 두 사람은 저택으로 올라갔다. 깨끗하게 비운 접시는 밀어 두고 빨갛게 잘 익은 사과를 반으로 쪼갠 조반니는 큰 쪽을 로미오에게 건넸다. 사과가 아주 달고 맛있어 조반니도 로미오도 금세 꼭지와 씨만 남기고 모두 먹어 치웠다. 조반니가 하나를 더 쪼개 역시 더 큰 쪽을 건네자 로미오는 거절하지 않고 받아 들었다. 서로 사과를 나눠 먹는 동안 응접실에는 두 사람이 번갈아 아삭대는 소리만 울렸다.
“드디어 때가 왔군요.”
오늘은 로미오가 단테의 12인의 입회식을 치르는 날이었다. 엄밀히 말해 입단 자격을 증명받아야 입회식을 치를 수 있으니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입회식은 보통 상위 단원들이 모두 참석한 늦은 밤에 열리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니 엔초는 저택 관리인에게 맡기도록 하죠.”
“입회식이 진행되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말로 설명드려도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단테의 12인은 아주 오래전에 지하에 그들의 근거지를 만들고 중앙 지부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곳으로 연결되는 길은 바치 시내에 총 다섯 군데가 있는데 저는 살라티코 거리의 술집으로 통하는 문을 사용합니다. 술집의 주인도 단테의 12인의 단원이라서 출입하기 위해서는 얼굴을 확인받아야 합니다. 제가 대위님을 모시고 갈 테니 해가 지기 전까지 살라티코 1번가로 오십시오.”
“오늘 입회식에 디오니시오 선생님과 콘델로 양도 참석하는 겁니까?”
“네. 두 사람은 새 단원 선출에 반대와 찬성표를 던질 수 있는 상위 단원이라 반드시 참석합니다.”
“대총장이라는 자는 오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겁니까?”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이것은 순전히 제 추측이지만 그자는 이미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조반니는 들을 사람이 없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문을 닫고 왔다.
“제가 입단하기 전부터 대총장을 보필해 오던 상위 단원 하나가 있었습니다. 대위님도 오늘 그자를 만나실 텐데 ‘엘베라’라는 이름의 여성 단원입니다. 대총장이 병환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무렵부터 그녀 역시 중앙 지부 회의에 불참하는 횟수가 잦아졌습니다. 만약 대총장이 사망했다면 적어도 한 달 전에 죽었을 것입니다. 차기 대총장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질 경우 단원들 사이에 혼란이 야기될 수 있는 데다 한 달 전이라면 제가 비토리오의 일로 제6군단의 조사를 받은 시기와 겹칩니다. 여러 문제들로 인해 대총장의 사망을 알릴 시기를 놓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잘하면 오늘 어떤 형태로든 그자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선생님께 대총장의 죽음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겁니까?”
“반반입니다. 대총장이 자신의 뒤를 이을 단원을 선택하고 명을 달리했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사망한 상태라면 대총장 자리를 놓고 단원들 간의 의견이 합치되지 않을 겁니다. 대위님의 입단이 제가 대총장으로 추대되는 데에 강한 입김을 미칠 수 있길 바라야죠. 물론 대위님께서 조직에 유용한 정보를 넘겨준다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입회식에 참석하는 것은 열세 명의 단원이 전부입니까?”
“대총장이 자리에 나오지 않는다면 열두 명이 될 겁니다. 조직이 창설되던 당시 상위 단원은 대총장을 포함해 모두 열두 명이었으나 과반수의 투표로 안건을 상정할 때 반대와 찬성이 여섯 표씩 나와 선출이 무효화된 적이 많다 보니 한 명이 더 추가됐습니다. 5여 년 전만 하더라도 새 단원의 입회식은 루바노 전국의 각 지부에 있는 모든 상위 단원이 참석해 그 수가 대단했지만 지부마다 조직원들 간의 위계나 입회 절차가 조금씩 달라진 데다 통령 각하께서 단테의 12인과 관련된 칙령을 발표한 이후부터 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입회식이 약식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오늘 입회식에 나올 질문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만 대답하시면 됩니다.”
“정해진 질문 외에 추가 질문은 없겠습니까?”
“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이견을 내는 단원이 없다면 제가 입회식을 추진하기 위해 의견을 밀어붙일 겁니다. 레오나르도와 친치아는 적어도 제 편이니 상위 단원들 중 저를 포함한 세 명의 표는 확보된 것이지요. 설사 반대표가 과반수로 나와 입단이 불가하더라도 적절한 시기를 노려 다시 한번 대위님의 입단을 추진할 겁니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그 어떤 의심의 씨앗도 심어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누군가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이미 싹이 튼 것입니다. 상위 단원들 중에는 예리한 자들이 많습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각 단원들의 이름과 대위님께서 눈여겨보셔야 할 그들의 특징에 대해서는 입단 허가가 난 이후에 자세히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본래 말단 단원은 입회식을 제외하고 상위 단원들과 마주칠 일이 없지만 대위님은 특수한 경우입니다. 퇴역한 제6군단의 장교라는 신분을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제가 그럴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조반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위를 정리했다.
“전 이제 병원에 가 봐야 합니다. 대위님께서는 저녁이 되기 전까지 뭘 하실 생각이신가요?”
“시장에 나가 일자리를 알아볼 생각입니다. 전에 갈고리 고양이 술집의 여급에게 일자리를 부탁한 적이 있는데 며칠 전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 주인 어르신께서 제 사정을 좋게 봐주신 것 같더군요. 그래서 그곳에도 들러 봐야 합니다.”
조반니는 식탁 위를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눈을 한 바퀴 굴린 그는 ‘음.’ 하고 입 속으로 소리를 냈다.
“갈고리 고양이 술집에서 일을 하시려고요?”
“기회가 된다면 말입니다. 아무래도 맹인인 제게 일자리를 내주는 곳은 없을 것 같습니다. 여급이 주인 어르신께 여러 번 부탁을 드렸다고 하니 운이 좋다면 그곳에서 일하게 될 겁니다.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해 볼 생각입니다.”
조반니는 빠르게 눈을 굴리며 자신의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로미오가 갈고리 고양이 술집에 들러 일자리를 알아봤을 것이라고는 예상 못 했다.
그가 그곳에서 일을 한다니. 안 될 일이었다. 절대로.
“제가 저번에 병원에서 일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알아봐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던 걸 기억하시나요?”
“기억합니다. 무척 감사드리지만 선생님께서 애를 써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말로 대위님과 무소 대위님께서도 도움을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급사로 일할 수 없다면 두 분께 부탁드려 볼 생각입니다.”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병원에서 일하는 게 가장 낫지 않을까요? 어느 쪽이 더 안전한가를 따진다면 누가 보더라도 술집보다는 병원이 나을 겁니다. 병원에서 일한다면 저와 얼굴을 자주 볼 수 있을 겁니다. 함께 집으로 돌아올 수도 있고요.”
“아니요. 여급에게 제가 직접 부탁한 일이고 기회가 왔으니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조반니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로미오가 병원에서 일해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 내는 사이 로미오는 식탁 위의 접시를 전부 치우고 엔초가 흘린 빵 부스러기를 손으로 쓸어 치워 냈다. 식탁 위의 빈 접시를 찾기 위해 더듬던 그는 식탁 위에 올라와 있던 조반니의 손을 잡았다.
“그건 제 손입니다.”
눈을 굴리느라 바쁜 와중에 로미오가 자신의 손을 잡자 조반니는 금방 표정이 바뀌며 웃었다.
“제 손도 치워 주실 건가요?”
로미오는 “죄송합니다.” 하고 손을 물리더니 조반니가 들고 있던 빈 접시를 가져가기 위해 손을 더듬었다. 조반니는 접시를 슬쩍 치워 내며 자신의 손을 내밀었고 접시인 줄 알고 만졌으나 조반니의 손등이자 로미오는 손을 뗐다.
“접시를 주십시오.”
“여기 있습니다.”
“아니요, 선생님의 손 말고 빈 접시 말입니다. 제가 치워 드리겠습니다.”
로미오는 몰랐으나 조반니는 장난기가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로미오가 가져갈 수 있도록 손가락을 내밀었다.
“여기 가져가세요.”
조반니가 접시인 척 장난스레 또 손을 내밀자 로미오는 조반니의 손을 잡았다가 다시 뗐다. 계속 더듬자니 조반니가 자꾸 손을 내밀 것 같아 접시를 달라는 뜻으로 손을 벌려 보였다. 조반니가 쿡쿡 웃으며 접시를 건네니 로미오는 그제야 받아 들어 정리했다. 정갈하게 접시를 포개지 못하고 삐뚤삐뚤 겹쳐 쌓았지만 손으로 열심히 더듬거려 식탁 위를 모두 정리했다.
“아침 식사 감사드립니다. 오래 머물지 않겠지만 머무는 동안 선생님께 폐 끼치지 않겠습니다. 그럼 저녁때 뵙겠습니다.”
* * *
“정말 잘됐어요!”
손님들이 드문드문 있는 술집 안은 한산했다. 문밖에 앉아 있는 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안까지 들려올 만큼 한가로웠다.
주인이 자리를 비우고 있어 술집에는 급사들밖에 없었는데 여급의 목소리는 손님들이 보지 못하는 가게 안쪽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기쁜 나머지 로미오의 두 손을 잡고 흔들어 대느라 등 뒤로 묶은 머리채가 정신없이 찰랑대는 것도 몰랐다. 불편한 몸으로 일을 해야 하는 로미오의 처지가 딱하게 생각되면서도 이따금씩 술집을 찾는 손님이었던 그가 이곳에서 자신과 함께 일하게 됐다는 사실에 여급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제 사정을 헤아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 오늘도 양품점과 잡화점 네 군데에서 모두 거절당해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입니다.”
“제가 많이 도와드릴게요. 아무 걱정 마세요!”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여급은 장갑을 끼지 않은 로미오의 손이 희고 곱다고 생각하며 그의 손을 놓았다. 상아색 손톱이 어찌나 반듯하고 예쁜지 자꾸 눈길이 갔다.
“아직 감사 인사를 하기에는 일러요. 이곳에는 저녁마다 온갖 손님들이 다 몰려들다 보니 적어도 주에 한 번은 싸움판이 벌어지거든요. 주문이 바쁘면 음식 접시를 한꺼번에 다섯 개씩 들고 나를 때도 있어요. 주문을 받으랴, 싸우는 손님들을 말리랴 정신이 쏙 빠질 때도 많죠. 각오하셔야 할 거예요.”
주인의 허락으로 갈고리 고양이 술집의 급사로 일하게 된 로미오는 자신이 얼마나 볼 수 있는지 주인에게 상세히 이야기한 뒤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다. 여급이 여러 번 부탁을 하기도 했고 급사를 한 명 더 쓸 사정도 됐던 데다 로미오가 퇴역 군인이라는 사실을 가게 주인이 나쁘게 보지 않았기 때문에 허락된 일자리였다.
여급은 로미오를 여관 내의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다니며 탁자의 위치와 주방의 구조에 대해 알려 주었다. 몇 번 반복하자 로미오는 걸음 수를 기억해 정해진 곳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됐다. 북적이는 저녁 시간대에 손님들 사이사이를 누비는 것도 잘만 한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로미오가 주로 하게 될 일은 접시를 닦거나 술병을 정리하는 일이었지만 여관에서 오래 일할 마음을 먹은 그는 일을 가릴 생각이 없었다.
“여기에 올 때마다 늘 손님들이 많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술을 찾는 손님들의 목소리가 바쁘게 들리던 것을 떠올려 보면 급사 일이 만만치 않을 테지요. 항상 손님으로만 왔던 터라 아직 낯설지만 금방 적응할 겁니다.”
“내일부터 바빠질 테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서 쉬세요. 그럼 내일 뵐게요! 댁까지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예, 내일 뵙겠습니다.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로미오는 여급의 배웅을 받아 술집을 나오며 재차 감사 인사를 전하고 살라티코 거리가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지팡이로 바닥을 쓸며 앞서가는 사람의 발소리를 뒤따라가는 그는 골목 쪽으로 붙어 걷는 짓은 하지 않았다. 앞서 걷던 사람이 방향을 바꿔 사라지면 멀찍이 물러나 느리게 걷다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를 듣고 그 사람의 뒤로 붙어 걸어갔다.
살라티코 1번가에 다다른 로미오는 자신이 제대로 도착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길을 가던 사람을 붙잡아 물어보았다.
“여기가 살라티코 1번가가 맞습니까?”
그렇다는 대답에 얌전히 서서 조반니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역시나 골목 가까이 붙어 서서 기다리는 것은 피했다. 주위에 발소리가 뜸해지면 자리를 벗어나 주변을 걸어 다녔고 다시 또 주변이 뜸해지면 제자리로 돌아왔다.
“대위님!”
제법 기다린 끝에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였으니 조반니가 분명 아주 큰 소리로 외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 서자 다시 “대위님!” 하는 외침이 들렸다.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목소리도 가까워져 머릿속으로 조반니가 자신에게 걸어오는 모습을 그리게 됐다. 그의 얼굴은 알 수 없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키가 큰 금발 머리의 사내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
걷는 자세는 발소리로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머릿속에 그려진 조반니는 경쾌한 보폭으로 당당하게 이리로 걸어왔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빠른 걸음으로 온 조반니의 목소리에는 가쁜 숨이 섞여 있었다.
“조금 전에 왔습니다.”
“가시죠. 이쪽입니다.”
조반니는 로미오가 자신의 팔꿈치를 잡을 수 있도록 하며 2번가로 이어지는 길 쪽으로 몸을 돌리게 했다.
“그런데 일자리는 구하셨나요?”
조반니는 숨도 고르지 않고 그렇게 물었다. 몹시 궁금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에 로미오가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예. 갈고리 고양이 술집에서 급사로 일하게 됐습니다.”
찰나였지만 조반니는 입술을 모으고 콧잔등을 찡그렸다. 한껏 심술 난 표정이었는데 당연하게도 로미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잘됐군요! 일자리를 구하셔서 다행입니다.”
애써 기쁜 척했지만 심사가 뒤틀린 조반니는 칫, 하고 작게 혀를 찼다.
“여급이 힘을 써 주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모르는 체할 수도 있었는데 제 사정을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그녀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누구요? 갈고리 고양이 술집의 여급요?”
“예. 시력이 어느 정도 남아 있을 때도 그곳에 자주 갔지만 여급의 얼굴을 가까이서 본 적은 없습니다. 목소리를 들어 보면 쾌활한 인상을 갖고 계실 것 같은데 제 추측이 맞습니까?”
조반니는 있는 대로 이맛살을 구기면서도 친절하게 대답했다.
“붉은 기 도는 갈색 머리를 갖고 계십니다. 늘 머리를 높이 올려 묶고 계셔서 손님들에게 술과 음식을 가져다주고 돌아설 때 길게 늘어진 머리끝이 흔들리곤 합니다. 처진 눈매와 늘 웃는 것 같은 입매가 특징입니다. 목소리만큼이나 인상도 밝습니다. 체구는 작지만 술병 여러 개를 한 번에 들고 여관 안을 누비시는 모습은 아주 노련합니다.”
“역시나 그렇군요.”
“여급의 인상이나 외모가 궁금하셨군요?”
“예. 그녀가 제게 낯선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같이 일하게 될 텐데 얼굴의 생김새나 인상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때 머릿속에서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 수월할 것 같아서 여쭤본 겁니다. 그래도 제가 눈이 완전히 멀기 전에 만난 분이라서 다행입니다. 앞을 완전히 보지 못하게 된 이후에 만났더라면 선생님의 설명만으로는 생김새를 상상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눈이 보이던 시절에 그녀가 탁자 사이를 바쁘게 지나다니던 모습을 기억하는 데다 흐릿하지만 머리카락의 색깔이나 옷차림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조반니는 순간적으로 로미오가 여급에게 관심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여인과 손 한 번 잡아 본 적 없는 숙맥인 그가 설마하니 그녀에게 호감이 있는 것일까.
“제 얼굴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술집 앞에 도착해 조반니가 멈춰 섰다.
“대위님께선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시지 않습니까?”
“예, 그렇지요.”
“설명해 드릴까요?”
“무엇을요? 선생님의 외모를 말입니까?”
“저와 알게 된 지도 벌써 몇 달이 흘렀는데 아직 제 얼굴을 모르신다니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물론 그건 대위님의 잘못이 아니지만요.”
로미오는 혹시나 자신이 조반니의 얼굴을 모르는 것을 그가 무례하게 느끼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반대의 경우였다면 자신은 아무렇지 않았겠지만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종종 자신과 다른 관점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기도 하니 조반니도 그럴지 몰랐다.
미처 고려하지 못한 문제였기 때문에 공손하게 이야기했다.
“선생님께서 금발 머리와 금색 눈동자를 갖고 계시다는 것은 압니다.”
“제 외모가 준수한 편이라는 것도 아시나요?”
장난인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조반니의 목소리가 진지하자 로미오는 웃지 못했다. 조반니는 자신이 다른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외모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로미오에게 알려 주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로미오에게는 외모를 자랑하는 말처럼 들렸다.
“무소 대위님께서 일전에 갈고리 고양이 술집에서 선생님을 뵙고 돌아가는 길에 선생님께서 뭇 여인들이 다 반할 만큼 준수한 외모를 갖고 계시다고 하더군요. 같은 사내들도 느낄 만큼 말입니다.”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체적으로 상상하실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하시던가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로미오가 자신의 얼굴을 몰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그의 시력이 남아 있던 시절에 구태여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르쳐 주지 않았던 조반니였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랐다. 자신의 외모가 수려하다고 해서 로미오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다줄 수는 없겠지만 여급의 얼굴을 궁금해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자신의 외모도 알려 주고 싶어졌다. 별다른 관계가 아닌 여급의 얼굴은 알면서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이런 말을 직접 하자니 부끄럽지만 전 상당히 미남인 편입니다. 어디서든 외모로 주목받을 정도로요.”
명백히 자랑하는 말투였으므로 이번에는 로미오가 웃었다.
“그렇습니까?”
눈을 내리며 짧게 미소 짓는 로미오를 본 조반니는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그의 미소가 아랫도리로 열을 몰리게 만들었다.
“전에 저와 함께 네베에 가셨을 때 여관 주인의 따님께서 선생님께 관심을 보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수도에서 온 낯선 외지인에게 그런 상냥한 관심을 내비친 것을 보면 선생님의 말씀이 사실일 겁니다.”
조반니는 사타구니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허벅지 위로 길쭉하게 돋아난 자신의 성기 윤곽을 확인했다. 로미오가 오늘 아침에 자신의 손을 더듬었듯 성기도 만져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 크기는 점점 더 커졌다.
술집 뒷골목으로 가 로미오가 자신의 성기를 만져 주는 상상을 하자 그의 손목을 낚아채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뺨이 붉어진 로미오의 바지를 벗기고 속옷 안으로 손을 넣어 희롱하고 싶었다. 로미오가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자 성기는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우람해졌다. 로미오가 흥분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것이 상상됐다. 아, 선생님…… 하아…….
그 목소리는 분명 자신을 애태우며 괴롭힐 것이다. 다른 이에게 성기가 빨리는 것에 비할 바가 못 되는 큰 자극일 것이다. 흥분한 로미오가 나체로 자신에게 안기며 미소 지어 준다면 못 할 짓이 없을 것이다.
“콘델로 양 말입니다. 두 번밖에 만나 보지 못했지만 제가 오래전에 우연히 본 적 있는 어느 쾌활한 소녀의 얼굴로 상상하게 됩니다. 콘델로 양과 나이만 비슷할 뿐 전혀 상관없는 소녀이지만 콘델로 양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 소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외향적인 성품 때문인지 콘델로 양의 옷차림이나 머리카락의 색도 밝은 색으로 상상됩니다. 검은 머리나 갈색 머리를 가졌을 수도 있겠지만 제 상상 속에서는 그렇습니다. 콘델로 양의 머리 색깔은 무엇입니까?”
“…….”
“선생님?”
만족시켜 줄 테니 자신과 동침을 하자고 이야기해 볼까. 아니면 여인과 동침을 해 본 경험이 있냐고 물어볼까. 그가 없다고 대답하면 자신이 그 방법을 알려 주겠다고 나서 볼까. 말로 설명하다가 분위기가 야릇하게 흘러가면 살살 구슬려서…… 아니지. 그 전에 술을 먹이는 것도 괜찮다. 적당히 취할 정도로 만들면 옷을 벗기기 수월해질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로미오는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냐는 뜻으로 물은 것이었지만 그가 마치 자신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묻는 것처럼 들려 조반니는 생각을 멈췄다.
“아…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콘델로 양의 머리 색이 궁금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친치아는 밝은 금발 머리를 갖고 있습니다. 햇빛 아래에 서면 백발처럼 보일 정도로 옅은 금발을 갖고 있어요. 상상하신 게 들어맞았네요. 그럼 혹시 제 목소리에서도 그런 게 느껴지시나요?”
“어떤 것 말입니까?”
“제가 인내심이 많은 편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조반니는 성기에 손이 스치도록 허리끈을 매만졌다. 로미오의 얼굴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척 성기를 손바닥으로 비볐다. 표정과 눈빛에는 노골적인 욕정이 드러났지만 로미오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목소리가 유일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보다는 선생님의 저음의 목소리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느낍니다. 선생님께서는 권유하는 말씀을 많이 하시기도 하죠.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신중한 분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또 다른 건요? 제 외모를 하나하나 뜯어 구체적으로 설명드리면 대위님께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자세히 아실 수 있을까요?”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외모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선생님과 함께한 일들이 제게 선생님의 인상을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 어떻게 생기셨든 저는 선생님을 선명하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조반니는 성기가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술집 문을 열었다. 그릇을 닦고 있던 주인은 마흔 언저리로 보이는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조반니를 여느 손님들처럼 맞이했다.
“이게 누구신가? 조반니 아니야? 오랜만에 왔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별다른 일 없이 잘 지냈습니다.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장사가 잘되나 봅니다.”
“말도 마. 오늘도 잠깐 이렇게 한산한 거야. 곧 손님들이 들이닥칠걸. 앉아, 뭘 줄까?”
“늘 먹던 것으로 주세요.”
조반니는 문에서 멀리 떨어진 구석 테이블로 로미오를 데려갔다. 술집 안에는 식사 중이던 손님이 두 명 있었는데 조반니는 그들의 접시에 남은 음식의 양을 확인하고 로미오와 함께 의자에 앉았다.
“잠시 기다려야겠습니다.”
낮은 목소리로 말한 조반니가 편하게 의자에 기대앉자 로미오도 테이블에 지팡이를 걸쳤다.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 의자를 밀고 일어나는 소리와 두 손님이 음식 값을 계산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간 듯 실내가 조용해졌다.
“이쪽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조반니는 로미오의 팔꿈치를 잡아 안내했다. 술집 주인의 앞서가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도 조반니도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짠 듯이 행동했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초에 불을 붙이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밝아졌다. 등 뒤에서 어마어마한 두께의 나무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히더니 그 너머에서 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
로미오는 발아래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계단이었다.
“이곳 지하에 중앙 지부의 회의장이 있습니다. 제가 앞서 걷겠습니다. 한참을 내려가야 계단의 방향이 바뀌니 방향을 꺾을 필요 없이 쭉 내려가겠습니다.”
“예.”
계단에 부딪히지 않도록 지팡이를 들어 올린 로미오는 앞서가는 조반니의 발소리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나무 계단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발을 내디디니 돌계단이 느껴졌다. 나무로 지어진 평범한 술집 지하에 어떻게 돌계단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손을 더듬자 냉기가 서린 돌벽이 만져졌는데 계단의 폭은 양팔을 다 펼칠 수 없을 만큼 좁았다.
긴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발밑의 바람이 옷자락을 휘날리게 했다. 휘이이잉……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통로에 갇혀 으스스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계단은 어디까지 내려가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척 길었는데 조반니의 일정한 발소리가 시계추처럼 계단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제 여기서부턴 계단이 왼쪽으로 휘어집니다. 걸어 내려오신 것만큼 다시 내려가야 합니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조반니가 몸을 먼저 틀며 팔을 잡아 주자 로미오도 몸을 틀었다. 다시 걸어 내려가기 시작하자 어느 순간부터 바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계단 통로에 막혀 있던 답답한 공기가 느리게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더니 계단 끝에 도착하자 통로 전체에 스며 있던 냉기도 사라졌다.
“도착했습니다.”
조반니의 말과 함께 마지막 한 발을 내디딘 로미오는 발밑에 평지가 나타났음을 깨달았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긴 계단 끝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대한 지하 공간이었다.
머리 위의 천장은 사람 키의 수백 배에 달할 만큼 높았고 중앙 광장을 다섯 개쯤 합친 것 같은 광대한 땅 위에 제단처럼 꾸며진 대리석 층계가 펼쳐져 있었다. 층계 위에는 손으로 쉽게 열고 닫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문이 달린 전당이 있었다. 놀라운 것은 전당 양쪽으로 집채만 한 조각상 두 개가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아 창을 들고 있는 조각상은 기괴하게도 머리가 가면올빼미의 형상을 띄고 있었다.
인간의 몸에 동물의 머리가 달린 두 조각상은 사람이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컸다. 만드는 데 적어도 몇 년, 혹은 몇십 년이 걸렸을 것처럼 보였는데 수십 명의 사람이 달라붙어 긴 사다리를 오르내리거나 천장에 매달려 조각하지 않는 이상 제작이 불가능해 보였다. 사람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믿음직했다.
돌벽을 따라 빙 둘러진 횃불 때문에 천장까지 길게 늘어진 조각상 그림자가 춤을 추듯 흔들렸는데 두 조각상은 흡사 이곳을 찾은 사람을 경계하기 위해 세워진 문지기 같았다. 지하에 이런 공간이 숨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이했는데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그 기이함이 한층 짙어졌다. 어떤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지상의 재해를 피해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킬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면 이해가 됐다. 선택받은 소수의 이들이 집을 짓고 후손을 낳아 산다면 지하 도시라고 부를 만한 장소가 될 것 같았다.
“이곳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조반니는 자신이 이곳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의 감상을 곁들어 눈에 보이는 전경을 로미오에게 설명했다.
그가 거대한 조각상과 엄청난 높이의 계단, 그리고 계단 위에 위치한 성전 같은 내부 공간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로미오는 자신이 넓은 공간에 서 있음을 느꼈다. 주위에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는데 사람이 있다 해도 주위가 트여 있어 잘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단테의 12인이 어떻게 제6군단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됐다. 감히 누가 평범한 술집 지하에 이런 공간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겠는가.
“대위님께서 여기 서 계시고 제가 저 끝으로 가 선다면 거리가 너무 멀어 서로를 발견할 수 없을 겁니다. 이곳이 아주 넓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공기의 흐름을 통해 넓은 정도가 가늠됩니다. 깊은 땅속에 어떻게 이런 거대한 공간이 있을 수 있는 겁니까? 무너질 위험은 없습니까?”
“이곳을 만들거나 발견한 자에 대한 기록이 없어 추측만 할 뿐입니다. 조직을 창설한 단테 피치니가 비밀 결사 활동을 위해 만들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나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으며 수십 년간 지켜본 결과 붕괴 가능성이 아주 낮기에 이곳을 은거지로 쓰는 것입니다. 저 신비스러운 조각상 역시 사람이 조각한 것은 맞지만 조각 과정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다리 하나를 조각하는 데만 적어도 5년이 걸릴 것이라는 계산이 나오더군요.”
“크기 때문에 지상에서 끌어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점이 가장 섬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곳에서 모든 작업에 착수했을 테니까요. 수십 명의 조각가 외에도 조각에 전혀 조예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여럿 동원됐을 겁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수백 명이요. 자, 그럼 저리로 가시죠.”
조반니의 팔꿈치를 잡고 그를 따라 걷던 로미오는 한참을 걸어서야 계단 앞에 도착했다. 계단의 넓이는 수십 명이 일렬로 늘어서 오르내린다 해도 문제없을 만큼 넓었는데 신발 밑창에 닿는 것이 돌이 아닌 대리석이었기 때문에 매끈한 느낌이 들었다.
인내심을 갖고 걸어 올라가 계단 위에 도착하자 음침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와 동시에 목소리를 냈다.
“오셨군요.”
문 안쪽에서 나온 여섯 명의 남녀는 올빼미 가면을 쓰고 순백색의 로브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로미오는 바닥에 옷자락이 끌리는 소리를 들었다.
“안에서 모두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눈을 가린 것과 다르지 않으니 덮개는 씌우지 않겠습니다.”
한 여인이 앞으로 나와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따라오시라며 앞서 걸었다.
“안으로 들어갈 겁니다, 대위님. 그대로 걸어가기만 하겠습니다.”
“예.”
로미오가 조반니의 팔꿈치를 잡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팡이는 제게 주세요.”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로미오가 지팡이를 건네자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이 지팡이를 받아 갔다. 받아 든 남자는 “좋은 지팡이네요.” 하고 말하더니 잊지 않고 돌려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로미오는 겹쳐 울리는 발소리를 통해 문을 열고 나온 이들이 몇 명인지 추정했다. 그들의 숫자를 직접적으로 조반니에게 물을 수도 있었으나 조직 내의 그의 위치를 고려할 때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그를 보모처럼 보이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긴장되시나요?”
조반니가 속삭이듯 물었다. 양옆에서 낯선 사람들이 따라오고 있었고 여기는 외부와 차단된 지하 공간이었다. 조반니가 지금까지 단원들을 속여 온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긴장할 만한 성격이 아닌 로미오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상위 단원들이 자리해 있을 겁니다. 그들은 원형으로 펼쳐진 의자에 앉아 있는데 빙 둘러진 의자 가운데에 설 공간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나아가 서시게 될 겁니다.”
“예.”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낯선 곳이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집중해 주위의 소리에 귀 기울이던 로미오는 조반니가 장난을 치듯 팔꿈치를 흔드는 것을 느꼈다. 그의 팔꿈치를 잡고 있던 자신의 손이 같이 흔들흔들 떨리자 조반니가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지상으로 돌아가면 밤이 될 듯한데 저녁 식사로 무엇을 만들어 드릴까요?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신가요?”
이런 곳에서 저녁 식사 얘기라니,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 마음을 바꿨다. 조반니의 목소리에선 자신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그는 일부러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뭘 드시고 싶으십니까?”
“전 오랜만에 양고기가 좋을 것 같습니다. 닭고기를 넣은 국물 요리도 괜찮을 것 같고요. 엔초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궁금하네요. 전에 대위님께 들은 것도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조반니가 평소보다 천천히 걷고 있는 것이 느껴졌는데 잡고 있는 팔꿈치를 통해 그의 체격이 짐작됐다. 굵은 팔뚝은 단단한 뼈대를 갖고 있었고 살집이 있기보다는 근육질인 것처럼 느껴졌다. 큰 키 때문에 그의 목소리는 확연히 머리 위에서 들려왔는데 목소리에서 여유가 넘쳤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낮으니 체격과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이곳에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조반니가 자신을 무사히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공기가 달라졌다. 바깥보다 좁은 공간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여러 명의 목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수군거림에 가까운 목소리들을 들은 로미오는 흘끗대며 귀엣말을 하는 사람들을 상상했다. 자신에게 들리지 않도록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은 자신을 향해 있을 것이다.
입회 자격이 있는지를 검증받는 과정에서 불쾌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고 조반니가 얘기했던 것이 떠올랐다.
“손을 놓으시고 이쪽으로 오세요.”
앞서가던 여인의 말에 조반니의 팔꿈치를 잡고 있던 손을 놓자 그가 귓가에 대고 ‘따라가시면 됩니다.’ 하고 이야기했다. 로미오는 고개를 끄덕인 뒤 여인을 따라갔는데 열 걸음 만에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됐습니다. 여기 그대로 서 계시면 됩니다.”
말소리는 이제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목소리는 최소 여덟 명 이상이었는데 조반니의 말대로 그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빙 둘러선 모양으로 앉아 있었다.
저 멀리서 조반니의 발소리가 들렸다. 몇 걸음 걷던 그가 자리에 앉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깥의 문이 닫혔다. 수군거림이 멎고 주위가 잠잠해지자 조반니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불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말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로미오는 조반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신이 명료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목소리가 일종의 신호처럼 느껴졌다.
속임수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여기서 통과하면 조직 내부로 잠입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의례를 치르기에 앞서 오늘의 의례자께서 맹인이라는 점을 유념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분은 목소리로만 말하는 이가 있는 방향을 가늠하실 수 있으며 이곳의 내부 구조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십니다. 불분명한 소음이나 갑자기 들려오는 큰 소리를 위협으로 느끼실 수 있으니 그런 행동은 삼가 주십시오.”
조반니의 말이 끝나자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이었는데 일정한 간격을 두고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섰다. 의례를 행하는 동안 보조 역할을 할 이들인 것 같았다.
“이곳에서 의례가 진행되는 동안 이루어지는 일을 외부에 흘리지 않겠다고 맹세해 주세요.”
어린 소년의 목소리였다. 로미오는 조반니에게 들은 대로 대답했다.
“이곳에서 들은 이야기를 외부에 발설하는 부도덕한 행위는 범하지 않겠습니다. 의례자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의례는 제시되는 질문들에 반드시 모두 답해 주셔야만 끝납니다. 그럼.”
강제적인 행위는 없었으나 지금껏 이 자리에 서서 비밀을 엄수하겠다고 선서한 이들은 스스로가 낸 목소리에서 생각보다 큰 효력을 느끼고 그들 자신이 말한 대로 모두 비밀을 유지했다. 오직 로미오만이 이 순간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토록 쫓고자 했던 자들이었고 알아내고자 했던 것들이 눈앞에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로미오를 사냥 직전의 짐승처럼 기민하면서도 유연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첫 번째 질문이오.”
오른쪽 대각선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이 든 남자였는데 목소리가 가느다랗고 높아 마른 체격의 사내일 거라고 짐작됐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자 말이 이어졌다.
“단테의 12인의 존속을 보장받기 위한 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입단 과정에서 제시되는 질문은 매번 조금씩 달라졌는데 질문의 목적은 대상자가 얼마나 현명하고 침착한지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해당 대상자를 추천한 단원을 제외한 나머지 상위 단원들이 합의해 적절한 질문을 건네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오늘 로미오가 대답해야 할 문제들이 어떤 것인지 조반니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추측은 그런대로 맞아 들어갔다.
“정치적 비밀 결사는 비밀 유지를 최우선으로 두어야만 존속이 가능합니다. 통령이 잇달아 칙서를 공포해 군의 감시가 삼엄해진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입단 시 치르게 되는 의식을 허식 없이 간소화하는 것이 조직을 유지하는 데에 유리할 겁니다. 내부에서 감시자 역할을 할 이들이 필요하기에 단원들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서로에게 경고하고 비판하는 것을 서슴지 말아야 하며 조직 활동에 제한이 있는 하위 단원들이 존재하는 이상 상위 계급의 단원들끼리 호혜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보다는 서로의 관리자가 되는 것이 유용할 겁니다. 권위를 가진 자는 언제든 변할 수 있으며 권력은 변질되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마지막 말은 피에트로가 했던 말이었기 때문에 그 말을 할 때 로미오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이오. 권력과 지배자를 불신하고 결정권을 가진 우두머리 집단을 부정하는 우리가 상위 단원과 하위 단원으로 나눠 단원들 간에 계급을 나누는 것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소?”
“바깥 세계의 계급과 서열이 절대 권력에 의한 수직적 위계라면 이곳에 존재하는 단원들 간의 위계는 연대를 초석으로 하여 만들어진 위계일 겁니다. 자율성이 인정되는 위계를 채택하되 계급 간의 압도적인 세력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바탕에 믿음과 평등이 수반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연합한 자들이 공동체 내에서 서로를 잘 알고 있고 어떤 한 개인이 권력을 휘두르고자 할 때 그자를 비판하고 통제하는 자가 있다면 모순될 것이 없습니다.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권위에 복종하겠다는 뜻은 아니니 말입니다.”
로미오의 대답이 끝나자 다른 단원이 나섰다. 여자의 목소리였는데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 신중하고 온화한 목소리였다.
“세 번째 질문이오. 하나의 조직이지만 우리는 무수히 많은 무정부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오. 같은 뿌리에서 시작됐으나 그 갈래가 각자 다른 모양으로 뻗어 나가 한 그루의 나무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소. 그대가 추구하는 사상은 어떤 것이오? 그대의 신념 안에 핵처럼 숨어 있는 것은 무엇이오?”
“권력을 부정하는 것은 자칫 무질서를 지향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으나 저는 혼돈으로 점철된 미개 사회를 꿈꾸지 않습니다. 다스림을 받는 피지배인의 입장에 놓인 이들이 그들을 묶고 있는 사슬을 벗으면 억압돼 있던 인간의 본성이 깨어날 것이며 그 본성은 많은 이들을 법 없이도 평화롭고 풍요롭게 살아가게 만들 것이라고 믿습니다. 민중의 몸속에는 그들 자신의 삶에 대한 주권을 찾고자 하는 피가 흐르고 있으며 그 피는 권력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아이에서부터 일평생 정치적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노인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의 몸속에 흐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다른 이에게 대리할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그자는 위계에 의해 길들여진 노예일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에 우리에게는 통령도, 군대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배 세력이 없는 국가는 군사 조직을 가진 다른 국가에 의해 정복되거나 정권을 쥐고자 하는 소수 세력에 의해 위협받기 쉬우므로 국외와 국내를 가리지 않고 각처에서 단원들을 포섭하되 반드시 조직에 입단시키기보다는 다양한 형태의 사상을 심어 주는 것이 중요할 겁니다. 단테의 12인이라는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국가의 전복을 꿈꾸는 이들이 그들의 신념에 각기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만인에 의한 지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 겁니다.”
로미오는 자신이 진심으로 단테의 12인의 단원이 되기를 원한다면 지금 이곳에서 어떤 표정으로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반정부조직의 염탐꾼이 되려는 퇴역 군인인 자신으로부터 또 다른 사람을 분리해 내 그자를 연기했다. 죽은 동생이 신념처럼 여겼던 사상을 진리로 여기고 국가를 붕괴시키기 위해 투사가 되려는 자. 이 나라가 동생을 빼앗았다고 믿고 그들에게 복수하고자 혁명가의 길을 자처하는 자. 로미오는 그자의 심정이 되어 이야기했다.
“저는 민중이 권력자들의 발아래에서가 아니라 그들과 같은 위치에서 동등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위계에 따라 남에게 복종하는 가축 같은 삶에서 벗어나 루바노 역사의 기록자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비록 이곳에 함께 있지 못하나 저의 형제도 저와 같은 뜻으로 격문을 붙였을 것입니다.”
대답이 끝나자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네 번째 질문이오. 민중이 권력의 철폐를 주장하는 우리의 사상을 지지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우리가 그들에게 주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뛰어난 단 한 사람의 공명심을 바라기보다는 공화정을 전복시키는 데에 자신의 뜻을 걸 다수의 힘을 믿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민중이 더 나은 삶을 갈망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 설득이 반드시 궁핍한 자들에게만 효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혁명이 성공한 이후의 삶이 지금보다 더 풍요로울 것이라는 믿음은 부호들에게 매력적인 이야기가 아닐 겁니다. 반란자로서 적합한 것은 잃을 것이 많지 않은 가난한 민중이기에 우선 그들을 포섭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들은 공격적이거나 충동적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지만 필요하다면 그들을 통해 폭력적인 방법마저도 불사해야 합니다. 혁명은 때로 갑작스럽고 파괴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 않습니까?”
의자에 기댄 채 턱을 괴고 있는 조반니는 다른 단원들의 표정을 살피는 것을 잊고 로미오만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 조반니는 두 가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과 로미오의 존재가 가져다주는 새삼스러운 즐거움이 그것이었다. 고상하게 아름다운 데다 두려움을 모르며 명석하기까지 한 로미오를 이때껏 누구도 눈독 들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로미오가 자신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여태 그 누구도 로미오를 소유하지 못했던 걸 보니 자신만큼 치밀한 자는 없었던 모양이다.
“마지막 질문이오. 단원들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수개월에서 수년까지 조직의 일원이 될 자격이 충분한지를 검증받소. 그 가운데에 입단이 결렬되는 이들도 있으며 검증 기간은 추천 권한을 갖고 있는 단원들 개개인에 따라 다르오. 그대는 짧은 기간 내에 포섭 대상자로 지정돼 이곳으로 와 우리와 마주하고 있소. 그대는 그대 스스로 그대가 우리의 일원이 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오?”
“스포르차 선생님께서는 첫째로 제가 군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기에 포섭 대상자로 적합하다고 판단하셨을 겁니다. 군인의 신분으로는 내통자라는 사실을 발각당할 위험이 크나 퇴역을 한 이상 군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우므로 파급력이 있는 정보를 누설하더라도 전만큼의 위험은 없을 것입니다. 또 저는 군에 의해 형제를 잃는 경험을 했습니다. 국가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제 의지는 형제의 죽음에서 비롯되었으며 제가 느끼는 슬픔 안에는 본능에 가까운 반란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숭고한 사명감을 가진 이들이 그들 자신의 순수한 마음에 따라 국가에 저항하는 것이라면 제가 가진 신념은 제 형제의 죽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저는 죽은 형제의 남은 뜻을 이루는 것이 제 여생의 과업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토록 강한 동기를 갖고 있다면 조직의 일원이 되기에 적합할 것입니다. 저는 평화롭지 않은 수단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며 고통스럽거나 굴욕적인 일과 마주해 조직의 위험을 초래하는 선택을 해야 할지라도 제 형제의 이름을 걸고 타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원들 몇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말을 주고받았다. 모든 질문이 끝났기 때문에 조반니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예정되지 않은 제지에 조반니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쳐다보았다. 엘베라였다. 그녀는 두 손을 맞잡고 입가에 댄 채 로미오를 보고 있었는데 조반니는 그녀의 표정으로 미뤄 그녀가 추가 질문을 할 것이 분명하다고 추측했다.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추가 질문을 한다고 해서 의례에 어긋나는 게 아닌 데다 로미오의 자격이 충분한가를 검증하려 하는 단원을 막는 건 모양새가 이상했기 때문에 조반니는 자리에 앉았다.
로미오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엘베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찌 보면 그대의 가족은 군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 희생당한 것이 아니오? 지금껏 제6군단의 장교로서 우리와 연루됐다고 의심받는 자들을 색출해 내 온 그대가 군이 아닌 우리에게 가담하고자 마음먹은 것이 그대의 가벼운 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우리에게는 없소. 한 번 배신한 자가 두 번을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장담을 어떻게 할 수 있겠소? 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 자들은 많으나 그들 모두가 하루아침에 나라를 배신하고 우리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다오.”
엘베라가 묻고 있는 바를 정확히 이해한 로미오는 생각할 시간을 요구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제가 갖고 있던 조국을 수호하고자 하는 소명은 제 형제의 죽음으로 인해 진흙탕 속에 처박혀 오염되었습니다. 제게 가족이라고는 두 동생이 유일한데 그 두 동생 중 한 명이 죽었습니다. 제 동생이 인치되어 왔을 때 저는 군에게 아량을 베풀어 줄 것을 호소했으나 무참히 거절당했습니다. 군은 제가 오랫동안 몸 바쳐 온 곳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게 그 어떤 관용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동생을 고문실로 데려가 자백을 강요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 아이가 탑 아래로 떨어져 죽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지금껏 수없이 많은 연루자를 색출해 내고 그들을 취조하였으며 그들이 고문 끝에 목숨을 잃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 그것은 이 나라를 오염시키는 반란분자를 처단하는 것에 불과했기에 그들의 시체가 불에 타는 것은 당연한 처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관 학교의 생도였던 소년 시절부터 공화정의 길을 걸어온 이 나라에 한 치의 반발이나 의심을 가져 본 일이 없던 저는 그들이 반역의 대가로 죽음에 이르는 것이 응당한 일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제 형제가 죽고 저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미 죽어 버린 형제에게 더는 물을 수 없으나 그 아이는 아마도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의심을 갖고 있었을 겁니다. 이 나라가 그 어떤 나라보다 평화롭고 풍요로우며 두 번 다시 누리지 못할 황금의 시대라면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가난에 굶주리는지 해답을 찾지 못해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자유라는 허상 뒤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이들은 궁핍한 삶을 연명하다 죽어 갈 수 있는 것인지, 공화국이 정말로 민중에게 균등한 기회를 나누어 주는 것이 맞는지 의문을 품었을 겁니다.”
로미오는 잠시 말을 끊은 뒤 이어 얘기했다.
“통령이 민중의 손에 의해 뽑혔다고 하여 정말로 그것이 자유인지를 묻는다면 저 역시 이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이 도시의 가장 높은 자리에는 권력자가 앉아 있고 길거리에는 부랑자가 넘칩니다. 공화정이라는 것은 결국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태껏 이 나라가 자유로운 나라라고 의심 없이 믿어 왔으나 실은, 민중은 지배자들에게 자유를 맡기고 구색을 갖춰야 할 순간에 일시적으로 그 자유를 돌려받는 것인 겁니다. 민중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민중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는 모든 불합리한 권리에 반기를 들어야 합니다. 약탈과 착취가 없는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민중은 스스로 밭을 일구고 옷을 지어 입으며 함께 키운 염소의 젖을 나눠 짜 마실 것이며 그들 사이에서는 그 어떤 투쟁도 배신도 없을 것입니다.”
진심이 아닌 말들이었지만 두 가지 진실이 있긴 했다. 피에트로는 세상을 떠났으며 로미오는 피에트로를 위해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제 형제는 살아 돌아올 수 없으며 저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와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그 아이가 제 옆에 앉아 식사를 할 때면 들리던 그릇의 달그락거림도, 집 안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그 아이의 발소리도, 제 곁으로 그 아이가 다가올 때 느껴지는 숨소리나 옷자락의 스침도 영원히 들을 수 없습니다. 제가 제 형제의 죽음을 대가로 치렀으니 이 나라도 민중의 해방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먼 훗날 제 형제가 원하던 세상이 왔을 때 저는 꿈에서라도 그 아이를 만나 통령의 관저는 무너졌고 군대는 해체되었으며 거리에는 부랑자들이 사라졌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본래 민중의 것이었어야 했을 이 나라가 드디어 민중에게 돌아왔노라고 말해 줄 것입니다.”
로미오의 말이 끝나자 조반니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개를 맞대고 대화를 나누던 단원들은 몸을 바로 해 앉았다. 모두들 결정을 끝낸 표정이었다.
“진실의 질문 다섯 가지가 끝났고 의례자가 모든 질문에 답했으므로 투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의례자가 우리의 일원이 되는 것에 동의한다면 손을 들어 의사를 표시해 주십시오.”
로미오는 사람들이 손을 드는 기척을 느꼈다.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머뭇거리면서 뒤늦게 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동시에 손을 들었고 조반니가 잠시 기다렸으나 결정을 번복하며 손을 내리는 이는 없었다.
이어 들려올 조반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그가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새 단원이 탄생했군요.”
세 명의 의례 집행 보조인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중 한 명이 로미오의 어깨에 로브를 걸쳐 주었다. 상위 단원들이 입고 있는 것과 같은 흰 로브였다. 다른 한 명은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는데 손끝으로 더듬어 보니 가면이었다.
“입단을 축하드려요. 당신은 이제 우리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단원들끼리는 그들만의 특별한 악수법을 갖고 있어요. 손을 내밀어 주세요.”
소녀의 요청에 로미오는 손을 내밀었다. 조반니에게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소녀가 가르쳐 주는 대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을 상대의 손목 밑으로 넣어 평범하게 악수한 다음 손가락 모양을 바꿔 상대의 손등 일부분과 손목을 가볍게 감싸고 마지막으로 손을 세워 손바닥을 서로 마주쳤다.
“단테의 12인의 단원임을 입증해야 할 순간이 오면 이 악수법으로 신분을 밝혀 주세요. 이 악수법은 위계에 상관없이 모든 단원이 동일하게 사용하며 루바노 내의 모든 지부의 단원들이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약속한 악수법이에요.”
“예, 알겠습니다.”
단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조반니의 목소리와 함께 세 번째 질문을 했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단을 축하해요. 내 이름은 다 몬티라고 합니다. 진짜 이름은 아니고 별칭이지만 이곳에서는 모두 나를 그렇게 부르지요. 몬티라고 불릴 때도 있으니 좋을 대로 불러 주세요.”
옷소매가 스치는 기척이 들렸다. 여자가 악수를 청하고 있다는 것을 안 로미오는 허공에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찾아냈다. 앞서의 악수법대로 인사하고 나자 친치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 올빼미가 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해요, 대위님. 로브를 거치고 계시는 모습이 보기 좋은데요? 입단하게 된 소감이 어떠세요?”
“좋습니다.”
그녀와 악수하자 이어서 레오나르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단을 축하드립니다.”
그와도 악수를 하고 난 로미오는 다른 단원들과도 모두 악수를 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는데 그들 중 ‘노프리’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 단원은 손아귀 힘이 특히 셌다. 만약 자신의 입단을 반대한 이들이 있다면 그중 한 명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람의 이름과 목소리를 한 번에 기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로미오는 단원 한 명 한 명의 목소리에 특징을 매기고 그들의 이름과 연결 지어 체격과 얼굴을 상상했다.
모두와 악수하고 나자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엘베라였다.
“입단을 축하하오. 엘베라라고 부르시오.”
올빼미 가면과 로브를 입고 로미오의 주위로 모여든 이들 중 몇은 로미오의 외모가 쉽게 남들의 눈에 띄기 때문에 그가 비밀 결사 활동을 하기에 적합한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군에 관한 정보가 자신들의 쪽으로 넘어올 것이라는 생각에 그의 입단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엘베라는 그들과 달리 어딘가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새 올빼미가 우리의 품으로 날아들었으니 이 이야기도 해야 할 것 같소.”
로미오와 악수를 끝낸 엘베라가 모두를 향해 돌아섰다. 로미오의 주위로 빙 둘러선 단원들이 일제히 바라보자 그녀가 입을 뗐다.
“대총장께서 한 달 전에 급사하셨소.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던 데다 조반니의 체포 문제로 인해 조직의 발각 위험을 우려해 전하지 못하였소. 부디 용서해 주시오.”
조반니와 로미오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눈빛을 주고받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단원들은 저마다 짧게 탄식하거나 애도의 뜻으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이미 짐작한 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놀라는 사람은 적었지만 대총장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이들은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다.
“대총장께서는 마지막 순간에 편히 눈을 감으셨소. 차기 대총장 문제를 논의하기에 앞서 오늘 이 자리에서 추도식을 엄수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각 지부로 보낼 전갈은 준비되어 있으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보낼 생각이오. 중앙 지부의 연락망을 통해 하위 단원들에게도 부음을 전할 예정이오. 오늘 이 자리에서는 대총장의 뜻을 기리고 조직의 번영을 약속할 것이니 우리의 일원이 된 그대도 추도식에 함께해 주시오.”
엘베라가 로미오를 향해 그렇게 말할 때 그녀의 눈은 무언가를 주시하는 눈 같았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볼 수 없었지만 로미오는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