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잿더미 속의 비밀
“해서 그분의 입단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넓은 탁자에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은 흰 로브를 입고 올빼미 가면을 쓰고 있었다. 입만 드러나는 가면은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같은 가면을 쓰고 있어 기괴한 가면극이라도 준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리석으로 만든 넓은 탁자는 워낙 육중해 쉽게 옮길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서른 명이 족히 둘러앉아도 될 정도로 넓었다. 하지만 앉아 있는 사람은 열한 명이었다. 원형의 회랑 내에 목소리가 울려 서로 간의 거리가 먼데도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었다.
중앙 지부에서 열린 오늘 회의에 참석한 상위 단원들은 중요한 안건 하나를 놓고 긴 이야기를 이어 갔다. 대총장은 오늘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여름이었다. 와병 중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의 거처와 사정에 대해 유일하게 아는 것은 단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엘베라’라는 단원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녀 역시 오늘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단원들은 대총장의 건강 상태에 대한 염려를 내비쳤다.
조반니는 탁자의 가운데에 앉아 있었는데 가면의 눈구멍 안쪽으로 보이는 금색 눈동자가 탁자 중앙에 놓인 촛불 때문에 벌꿀색으로 반짝였다.
조반니의 왼편에는 레오나르도와 친치아가 앉아 있었다. 상대적으로 몸집이 작은 친치아는 의자에 감싸인 것처럼 보였는데 며칠 전 레오나르도가 머리를 잘라 줘 레몬빛 금발이 귀 아래에서 찰랑였다. 레오나르도는 늘 묶고 다니는 긴 머리를 풀고 있었는데 머리끈은 회의가 시작되기 전 그의 머리를 손으로 빗질하며 장난을 쳤던 친치아의 손목에 끼워져 있었다.
“퇴역한 제6군단의 장교라…….”
조반니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단원 하나가 생각에 잠겨 턱을 매만졌다. 얼굴이 가려져 있었으나 가면 아래의 입가에 주름이 많아 적어도 마흔을 넘긴 것처럼 보였다.
이름 대신 ‘다 몬티’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그녀는 지금은 없어진 루바노의 옛 지방인 몬티 출신이었다. 다 몬티는 몬티에서 왔다는 뜻으로 출신지를 드러내는 별칭이었는데 그녀는 상위 단원들 중 조반니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편이었다.
“그자가 다시 군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없겠나?”
“없습니다. 그분은 맹인이기에 더는 군에 남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군을 나오신 데다 결정을 번복할 만한 분이 아닙니다.”
친치아의 옆에 앉아 있던 다른 단원이 입을 열었다.
“그자가 다시 군으로 돌아가느냐, 돌아가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네. 그가 하는 말들을 어떻게 믿지? 한때 제6군단의 장교였던 자의 말을 무슨 수로 신뢰할 수 있느냔 말이야.”
입을 연 단원의 이름은 도밍고로 그 또한 본명이 아니었다. 키가 작고 깡마른 그는 조반니보다 열 살 가까이 많았는데 신중한 성격이었다. 머리숱이 적어 위에서 내려다보면 정수리가 훤했기 때문에 조반니는 그를 독수리에 비유하곤 했다.
“그분은 강직한 분이십니다. 교묘하게 거짓말을 하거나 속임수를 쓰는 데에 능수능란한 분이 아닐뿐더러 맹인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자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자를 상대로 술수를 부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분이 저의를 갖고 있었다면 제가 가장 먼저 알아봤을 겁니다.”
“자네는 이미 두 번이나 군의 취조를 받았어. 단원 추천은 신중을 기할 문제네. 그리고 다른 자도 아니고 제6군단의 장교라니 위험이 너무 커. 군이 그를 퇴역시킨 대신 은밀한 지시를 내렸을지도 모르지 않나? 자네가 단테의 12인의 단원이라는 것을 그가 눈치채고 군과 내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럴 가능성은 적습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전 이미 그분께 제가 단테의 12인의 단원임을 밝혔고 그 사실을 밝혔을 때 그분의 반응으로 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단원 몇 명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회의가 있기 전 조반니에게 이 사실을 미리 전해 들은 레오나르도와 친치아만이 놀라지 않았다.
상위 단원이 포섭 대상에 불과한 자에게 쉽게 신분을 밝혔다는 사실이 직접적인 위험으로 다가온 까닭에 단원들은 순식간에 엄격한 표정이 됐다. 말단 단원과 접촉 시에도 이름과 얼굴을 전부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신분 노출에 철저한 그들이었다. 다른 상위 단원들의 동의를 얻지 않은 상태에서 멋대로 단테의 12인의 단원임을 밝히는 것은 가장 경계해야 할 금기였다. 지부 내에서 징계를 받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포섭 과정에서 독단적으로 그자에게 신분을 노출하다니! 지금 그 말에 대해 책임질 수 있겠나?”
잠자코 있던 다른 단원 하나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노프리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숱이 많은 데다 끝이 치솟은 눈썹 때문에 인상이 험악해 보였는데 제 나이보다 열 살 이상 들어 보이는 것이 특징이었다. 아직 마흔 살도 되지 않았지만 외양은 쉰에 가까워 보였다. 새 단원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짧게는 석 달, 길게는 1년 넘게 시간을 들일 정도로 경계심이 많은 그는 화를 쉽게 내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나빠지기 전에 친치아가 나섰다.
“실은 조반니가 레오나르도와 제게 그자를 소개했어요. 그자를 만나 보았기 때문에 전 조반니의 말을 믿어요. 그자는 맹인이에요. 남을 속이는 것이 불가능한 자예요. 그가 군과 내통하고 있다면 필시 조반니에게 비밀을 들켰을 거예요.”
“정말인가? 레오나르도 자네도 그자와 만났나?”
“예. 그와 짧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군인으로서의 감이 있는 자처럼 보였으나 뭔가를 눈치챈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지팡이의 도움 없이는 걸을 수 없는 평범한 맹인 장교였습니다.”
조반니는 손보지 않아 제멋대로 삐친 금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엉킨 뒷머리가 손끝에 걸리자 손을 떼고 미리 준비해 온 말을 했다.
“그분은 제6군단에 의해 형제를 잃어 군에 적개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닌 군이 동생을 죽였다고 믿고 있습니다. 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입대했으나 분신과 같았던 동생을 빼앗기고 군에게 버림받듯 퇴역당했습니다. 한때 루바노의 수호인이었으나 이제는 아닙니다.”
“공화국군이었던 자가 단지 가족을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리 쉽게 반란을 주모하는 투사가 되다니 믿기 힘들군. 그가 변덕스럽게 마음을 바꾸는 것이 훗날 우리에게 약점으로 작용하지 않겠나?”
“맞는 말일세. 이 나라와 통령을 쉽게 등졌듯이 언제든 우리로부터 돌아설 가능성도 크네.”
“아니요. 죽은 형제의 존재가 그분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이상 그 그림자는 절대 상실감만을 가져다주지 않을 겁니다. 그분은 형제의 죽음에 분노하며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나라를 등진 것은 그분이 상황에 따라 쉽게 마음을 바꾸는 얄팍한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형제의 죽음에서 비롯된 상실감이 그분의 인생을 뒤흔들 만큼 파괴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남은 삶은 죽은 형제에 대한 애틋함이나 그리움이 아니라 슬픔과 분노가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갈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지금 당장 우리와 공통의 신념을 나눠 가지지는 못할 겁니다. 군인이었던 과거를 거짓말처럼 잊을 만큼 강한 입단 의지를 보이시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나 입단이 결정되면 머뭇거리거나 돌아보지 않으실 겁니다. 그분은 제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 믿을 만한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일원이 된다면 군에 관한 유용한 정보들을 넘겨받을 수 있을 테지요.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저를 배신하고 다시 군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군 내부의 심장에 칼을 꽂기 위해서일 겁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었지만 조반니는 버벅대거나 눈치를 살피지 않았다.
단원들 중 조반니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으나, 로미오가 자신들의 편이 될 경우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대해 계산한 몇몇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듯 보였다. 조반니의 말대로 공화국군 장교를 포섭한다면 조직에 확실한 도움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맹인이었다. 올빼미 가면이 필요 없는 자였다. 설사 입단이 불발되더라도 앞을 못 보는 자이니 불발에 대한 반작용도 크지 않을 것이다. 중앙 지부의 위치는 물론 단원들의 얼굴을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동의하시는 분과 그렇지 않으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절반이 넘는 수가 이 자리에서 손을 든다면 이틀 뒤 그분을 이곳 지부로 데려오겠습니다. 그날 그분께 ‘진실의 질문 다섯 가지’를 주고 대답을 통해 남은 의문을 해소시켜 드리겠습니다. 입단에 관해 절반이 넘는 동의가 있을 시 그 자리에서 입회식을 추진토록 하겠습니다. 그럼 진실의 질문 다섯 가지로 그분을 시험하는 것에 동의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 * *
“같이 가, 기다려!”
“얼른 와!”
“스승님, 내일 뵐게요!”
아이들 여럿이 왁자지껄 떠들어 대며 문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로미오는 지팡이 손잡이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거기 그렇게 서서 기다린 지 한참 된 것처럼 보였는데 꼼짝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엔초가 자신을 보지 못하고 가 버리면 길이 엇갈릴 수 있었기 때문에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데리러 와 달라고 다섯 번도 더 말한 엔초였다. 로미오는 집을 나서기 전 옷매무새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옷이 잘못 말려 있거나 접힌 것을 모른 채 엔초를 기다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엔초는 그럴 아이가 아니었지만 로미오는 엔초가 자신을 부끄러워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조금 전 화실에서 나온 한 아이가 바로 앞으로 다가와 자신을 구경하듯 한참 보다가 지나갔다. 로미오는 맹인인 자신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하나둘 나왔지만 엔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이들의 말소리는 비 오는 날 창문을 타고 꼬리를 끌며 미끄러지는 빗방울 소리처럼 빠르고 소란스럽고 불규칙했다. 발소리도 힘차고 빨라 바로 코앞에서 들리다가도 삽시간에 금방 저 멀리 사라졌다.
자신이 전혀 다른 방향을 보고 서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려는 찰나 엔초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엔초의 발소리가 들리며 다른 아이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잘 가, 엔초! 내일 봐!”
“응, 내일 봐!”
누군가와 인사를 한 엔초는 한달음에 뛰어오더니 품에 뛰어들어 허리를 껴안았다. 로미오는 엔초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엔초의 등을 안았다.
엔초가 고개를 들어 자신의 배에 턱을 대는 게 느껴졌다.
“얼마나 기다렸어?”
“조금 전에 왔어. 방금 인사한 건 친구인가 보구나.”
“응, 집으로 가려면 저쪽 방향으로 가야 해서 같이 갈 수 없어. 그래서 항상 여기서 인사하고 헤어져.”
“그 친구의 이름이 뭐지?”
“차코야.”
“저번에 말했던 그 친구야?”
“응. 그 차코야. 키는 이만하고 머리 색이 붉고, 음, 또… 말이 많아. 이제 가자!”
엔초가 손을 잡자 로미오는 지팡이로 바닥을 쓰는 대신 똑바로 세워 잡았다. 엔초가 집까지 가는 길을 알고 있는 데다 대화를 하면서 걸음 수를 셀 수는 없었다.
엔초는 보폭이 빠른 편이었지만 같이 걷기 시작하자 로미오의 걸음걸이에 맞춰 천천히 걸으며 로미오를 이끌었다.
“눈토끼 한 마리가 깡총, 데굴데굴 굴러가 깡총.”
오늘 생일을 맞은 엔초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로미오의 손을 잡고 폴짝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로미오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엔초를 볼 수 없었지만 제자리에서 뛰는 소리와 움직임을 통해 엔초가 양발로 바닥을 차며 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엔초는 로미오가 넘어질세라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열 번에 한 번은 잡은 손이 휘청거릴 정도로 힘껏 솟구쳐 튀어 올랐다.
“오늘 저녁이 기대되지?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 선물도 받을 텐데.”
엔초가 너무 심하게 뛰어 손을 놓칠 거 같자 로미오가 넌지시 손을 당기며 말했다. 그러자 엔초는 뛰는 것을 멈추고 로미오의 팔에 매달렸다.
“아주 많이 기대돼! 어제 스포르차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선물을 기대해도 좋대. 대단한 선물을 주실 건가 봐. 내가 어떤 선물인지 말해 달라고 계속 졸랐는데 가르쳐 주지 않으셨어.”
“손님들이 많이 올 거야. 말로 대위님과 무소 대위님도 오시고 솔로르사노 중위도 올 거야. 다들 네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어 하셔. 그러니까 선물을 받거든 꼭 감사하다고 말해야 해. 알았지?”
“응!”
“그리고 스포르차 선생님께서 아시는 분들도 오실 거야. 선생님께서 네 생일을 위해 초대하셨고 그분들이 초대에 응해 시간을 내 오시는 것이니 그분들께도 감사하다고 말씀드려.”
“응, 그럴게. 그런데 형은 무슨 선물을 준비했어?”
“비밀이야. 집에 어서 가서 저녁을 먹고 선물을 풀어 보자. 네가 좋아할 만한 것을 준비했어. 지난번 생일 선물보다 더 좋은 것으로 말이야.”
“그래! 빨리 가자!”
로미오의 손을 잡은 채 걸음을 재촉하며 폴짝대던 엔초는 저만치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두 형제를 보고 뛰던 것을 멈추었다. 열다섯 살쯤 돼 보이는 키 큰 형과 자신 또래로 보이는 남동생이었다. 쌀쌀맞아 보이는 형은 귀찮은 기색으로 자꾸만 동생을 밀어냈고 동생은 팔짱을 끼며 토라진 표정으로 뭐라 말했다.
두 형제를 빤히 보던 엔초는 더 이상 폴짝거리지 않고 로미오를 올려다봤다. 로미오는 자신이 쳐다보는 것을 모르고 앞만 보며 걸었다. 두 형제가 스쳐 지나가자 엔초는 뒤를 돌아 두 사람을 쳐다봤다.
그리고 생각에 잠겨 말없이 걷다가 로미오의 손을 당겼다.
“형.”
로미오가 엔초의 머리 위의 허공을 향해 “응, 왜?” 하고 묻자 엔초가 팔을 뻗어 로미오의 뺨을 잡고 고개를 아래쪽으로 내리게 했다. 그제야 눈이 마주쳤지만 하려던 말을 주저하게 됐다.
“할 말이 있어?”
엔초는 자신과 똑같은 로미오의 파란 눈을 응시하다 물었다.
“피에트로 형은 죽은 거지?”
말이 떨어지자마자 로미오는 가던 길을 멈춰 섰다. 그의 걸음이 우뚝 멈추자 엔초도 덩달아 멈춰 서서 물었다.
“왜 죽었어?”
“…….”
엔초는 자신의 손을 잡은 로미오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잠시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응, 형?”
“…….”
“피에트로 형은 왜 죽은 거야?”
긴 침묵 끝에 로미오가 대답했다.
“……사고가 있었어.”
“사고?”
“……운이 좋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거야.”
로미오는 그렇게만 말하고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피에트로가 나빠서도 아니고 누군가의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것도 아니야. 그 누구의 탓도 아니야.”
“피에트로 형이랑 다시 만날 수는 없는 거야?”
“……응.”
“영원히?”
“……응.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어.”
엔초는 로미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 됐다.
“그래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르면 피에트로 형이 돌아올 수도 있잖아.”
엔초는 죽음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도 실감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로미오가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아니. 다시 만날 수 없어… 어머니나 아버지처럼 더 이상 우리 곁에 없어. 잠이 든 것도 아니고 멀리 떠난 것도 아니야. 다시 만날 방법은 없어.”
“그러면 피에트로 형은 지금 어디 있어?”
“……묘지에 있어. 언제든 만나러 갈 수 있으니까 형이랑 같이 나중에 보러 가자. 여기서 멀지 않아.”
“피에트로 형이 묘지에서 밥은 먹을 수 있어? 공부도 할 수 있어?”
로미오는 피에트로가 자신과 엔초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거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피에트로가 남기고 간 추억과 그의 존재가 꺼지지 않는 불빛처럼 가슴속에 남아 있을 거라고, 다시 만날 수 없지만 우리의 마음 안에 언제나 살아 있을 거라고.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건 할 수 없어. 피에트로는 묘지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땅 아래에 묻혀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로미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죽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피에트로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엔초에게 더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더는 설명할 수 없었다. 말을 이어 가기가 힘들었다.
엔초는 난해한 질문을 받은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때가 되면 피에트로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서.
“피에트로의 일을 알고 있었구나. 거짓말해서 미안해. 사실대로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서 말하지 못했어.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피에트로 형이 공부를 하러 갔는데 형이 슬퍼하는 것 같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라나 할머니도 많이 우시면서 힘을 내야 한다고 나를 안아 주셨어. 또 지난번에 형이 피에트로 형의 방 문 앞에 서 있는 것도 봤어. 형이 방 안에 들어가는 걸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어. 피에트로 형이 정말로 공부를 하러 간 거라면 나한테 편지도 썼을 테고 형이 슬퍼하지도 않을 텐데. 그리고 피에트로 형이 다니던 학교에 관한 소문도 들었어…….”
엔초는 피에트로가 자신이 죽었다는 걸 알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로미오의 표정 때문에 물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궁금했기 때문에 꼭 묻고 싶었다.
“형도 나중에 죽어?”
엔초는 시무룩한 눈으로 로미오를 올려다봤다. 혼란스러운 얼굴이었으나 로미오가 볼 수 있는 것은 엔초의 얼굴이 아니었다. 뿌연 회색과 흰색이 뒤섞인 형체 없는 흐릿함이 로미오가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로미오는 몸을 돌려 서서 허공에 손을 더듬었다. 그리고 엔초의 어깨를 찾아내 감쌌다.
“형은 오래 살 거야. 네가 지금의 형보다 나이가 더 많아져도 그 어디에도 가지 않고 언제나 곁에 있을게. 널 혼자 남겨 두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정말? 형은 그럼 오백 살까지 살 거야?”
로미오는 엔초의 작고 부드러운 두 손을 힘껏 잡았다.
“응.”
* * *
“엔초가 좋아할지 모르겠습니다. 선물 고르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더군요. 어떤 선물이 좋을지 매일같이 고민하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사탕 하나만 줘도 펄쩍 뛰며 좋아하는데 당연히 기뻐하겠지. 그런데 자네는 부대를 옮기더니 얼굴이 좋아 보여. 그 사이 제5군단에 적응을 했나 보군?”
“예, 업무가 익숙해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말로 대위님께서는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누이동생분과 함께 지내신다고 하셨죠?”
“그 애가 아침 일찍 나가면 집에 남아 허드렛일을 하는 게 내 일이 됐어. 실은 아버지의 일을 도울까 생각 중이야. 그러려면 바치를 떠나야 하는데 여기보다 살기 좋은 도시가 있으려나 싶어.”
“아무렴 바치가 최고지. 이만한 곳이 또 어디 있어?”
각자 선물을 한 개씩 손에 들고 있는 갈리에누스와 마르코, 발레리아는 로사티 3번가의 하숙집 앞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다. 가장 큰 선물을 갖고 있는 것은 갈리에누스였는데 그의 선물은 엔초의 키만큼 기다랬다. 얼핏 빗자루 같아 보였는데 포장지에 꼼꼼히 싸여 있어 내용물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발레리아와 마르코는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선물 상자를 들고 있었다.
발레리아는 군복을 입지 않았고 갈리에누스는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더 이상 가슴팍에 제6군단의 문장을 달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변하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다. 로미오가 군에 있었던 시절과 똑같았다.
“똑똑.”
마르코가 입으로 소리를 내며 문을 한 번 더 두드리자 문 너머에서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들뜬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어서 오세요!”
문을 연 것은 엔초였다. 문고리에 매달려 세 사람을 올려다보는 엔초는 함박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엔초를 오랜만에 본 발레리아와 마르코, 갈리에누스는 차례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안녕, 엔초. 오랜만이야. 옷이 아주 멋있는걸?”
“이야, 오늘 생일 주인공답게 잘 차려입었군. 누가 보아도 주인공 같아.”
“정말이네. 너무 멋있는 옷을 입어서 몰라볼 뻔했어. 다른 사람 같아 보이는데?”
엔초는 생일을 맞아 목깃에 진녹색 리본이 달린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앙증맞은 요정 같아 보였다. 하늘거리는 흰색 리넨 웃옷은 구름을 껴입은 것 같았고 검은 반바지와 구두는 고급스럽게 반짝거려 보석 같은 엔초의 파란 눈을 더욱 파랗게 만들었다.
세 사람이 옷을 칭찬하자 엔초는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라나 할머니가 생일이 되면 입으라고 사 주신 생일 선물이에요!”
생일 선물로 옷을 준비한 마르코가 움찔하자 선물의 내용물을 알고 있는 발레리아와 갈리에누스가 조용히 웃었다.
그때 계단 위에서 로미오가 내려왔다.
“방문한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 먼저 하고 문을 열어 줘야 한다고 얘기했잖아, 엔초. 그렇게 문부터 열면 안 돼.”
“하지만 무소 대위님이 문밖에서 ‘똑똑’이라고 하셨어. 목소리를 듣고 열어 준 거야.”
“퇴역 후에 어떻게 지내고 있나, 로미오? 군복이 아닌 평범한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은 오랜만이군.”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서 위로 올라오십시오. 음식 준비가 거의 다 끝나 손님만 기다리면 됩니다.”
“집 안에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해 벌써부터 배가 고프군.”
배를 쓸어내리던 마르코는 엔초가 작은 손으로 자신의 배를 누르며 장난치자 “요 녀석이?” 하며 엔초의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 엔초가 까르르대자 빙그르르 한 바퀴 돌려 바닥에 내려 주곤 뺨을 꼬집었다.
“스포르차 선생님과 그라나 부인께서는 외출하셨습니다. 곧 오실 겁니다.”
“음식 준비를 도와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괜찮네, 중위. 선생님께서 대부분의 음식들을 하셔서 나머지 준비는 나 혼자서도 충분해. 손님들이 오실 때까지 시간이 아직 있으니 올라와서 편히 기다려.”
다 함께 위층으로 올라가자 집 안은 생일을 맞이해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식탁에는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진 식탁보가 깔려 있었고 문 앞에는 화환이 걸려 있었다. 창틀과 천장에도 꽃줄기와 리본을 엮어 만든 장식들이 보기 좋게 걸려 있었다. 닫힌 피에트로의 방문 앞에도 화환이 걸려 있었는데 세 사람은 그 화환을 보았으나 애써 표정을 감추며 시선을 돌렸다.
“손님이 많이 오려는 모양인가 보군. 의자가 대체 몇 개야?”
“저건 케이크로군요. 무척 커 보이네요.”
“이 화환은 엔초의 옷차림을 닮은 거 같은데 누가 만들었어?”
“케이크도 화환도 전부 스포르차 선생님이 만들어 주셨어요! 케이크는 어젯밤부터 계속 저렇게 가려 놔서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높이가 3단이나 된대요. 그리고 크림을 듬뿍 넣어서 아주 맛있을 거래요.”
“엔초, 이건 뭘 것 같아? 먹을 건 아니지만 이 안에도 선물이 들어 있어.”
발레리아가 내용물을 알 수 없도록 선물 상자를 천천히 흔들자 엔초가 눈을 빛냈다.
“모르겠어요. 뭘 준비하신 거예요? 상자 안에 뭐가 든 거예요?”
“한번 맞혀 봐. 뭘까?”
상자를 높이 들어 올렸다가 내리자 엔초의 고개도 들려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 모습이 귀여워 발레리아가 머리를 쓸어 주는데 아래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께서 오셨나 봅니다.”
문을 열어젖힐 때 나는 소리로 조반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로미오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조반니는 하숙집 문을 열고 들어서며 혼잣말을 중얼대다 로미오를 향해 양손의 사과파이를 들어 보였다.
“빵집에서 사과파이를 찾아왔습니다. 그라나 부인께서는 아직 안 오셨나요?”
“예. 조금 전에 말로 대위님과 무소 대위님께서 오셨습니다. 솔로르사노 중위도요. 사과 냄새가 먹음직스럽게 느껴지는군요.”
하숙집에 있는 화덕이 작아 직접 반죽을 만들고 사과를 설탕에 졸여 빵집에 맡긴 조반니는 평소에 만드는 사과파이보다 훨씬 큰 사과파이를 두 판이나 만들어 왔다.
“그 커다란 화덕 안에 이 사과파이만 들어가 있어 빵집이 사과 냄새로 가득하더군요. 제가 사과파이를 들고 가는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달라고 하는 손님도 있었답니다.”
조반니는 허리까지 오는 짧은 겉옷을 툭툭 털고 문을 닫았다. 앞서서 계단을 오르던 로미오는 순간 그 소리에 걸음을 우뚝 멈췄다.
“제가 시간 맞춰 주문한 엔초의 생일 선물이 늦지 않게 도착해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어 로미오는 조반니를 돌아봤다. 그가 옷을 터는 저 소리가 기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지난번과 마찬가지였다. 그가 자신을 ‘대위님?’하고 불렀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대체 이 기분은 무엇일까.
“제 선물 때문에 엔초가 다른 분들의 선물을 까맣게 잊어버리진 않을까 걱정이 되네요. 하지만 엔초가 제 선물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하면 그것만큼 기분 좋은 것도 없을 겁니다.”
“…….”
중요한 어느 순간에 저 소리를 들은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늘어뜨려진 옷자락 끝을 터는 저 소리가 안개에 덮인 기억의 호수에 얕은 물결을 일으켰다. 수면 아래에 분명 뭔가가 잠겨 있었다.
“세 분 다 오랜만입니다. 시간 맞춰 오셨네요. 대위님께 듣자 하니 말로 대위님께서도 퇴역을 하셨다고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위층으로 올라가자 집을 구경하고 있던 세 사람이 돌아봤다. 그런데 조반니를 본 세 사람은 동시에 놀란 표정이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조반니의 머리 모양이 손보지 않은 것처럼 부스스했다. 늘 세련되고 깔끔하게 정돈돼 있던 그의 금발 머리는 방금 잠에서 깨 손으로 대강 빗은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추레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고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보여 줄 만한 모습이었으나 세 사람은 자신들이 조반니에게 가까운 사람이었던가 의문을 품었다.
“네, 무료하긴 하지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발레리아는 말을 흘리며 조반니의 옷을 내려다봤는데 머리보다 더한 것은 그의 옷이었다. 조반니는 짧은 망토 안에 색깔이 각기 다른 두 겹의 옷을 겹쳐 입고 있었다. 옷의 색깔은 서로 어울리지 않았고 겹쳐 입는 옷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조반니는 자신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두 가지 옷을 아무렇게나 껴입고 있었다. 이런 날 조반니의 머리 모양과 옷차림새가 무엇이 중요하냐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평소 모습과 달라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솔로르사노 중위님께서도 잘 지내고 계십니까? 저도 일하던 병원을 옮길 때면 늘 기대감과 함께 어색함을 느낍니다. 부대를 옮긴 이후로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제6군단에 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업무를 하고 있어 적응을 빨리했습니다. 함께 사관 학교를 졸업했던 생도들도 있어서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갈리에누스는 조반니의 옷을 흘끔댔다. 부엌으로 가 사과파이를 접시에 담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 로미오를 보니 그는 경직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슬며시 다가가 물으니 로미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망토 자락을 터는 소리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지 못했으나 엔초의 생일에 집중하기로 하고 그 의문을 잠시 내려놓았다.
곧 아래층에서 방문객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나가 볼게요! 제 생일 손님일 거예요!”
오늘 자신의 생일에 오는 모든 손님들에게 직접 문을 열어 주기로 한 엔초가 밖으로 뛰쳐나가자 로미오가 손을 닦으며 같이 내려가려고 했다. 그러자 조반니가 나섰다.
“제가 내려가 보겠습니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엔초는 문 앞에 서서 문틈에 대고 말했다.
“밖에 계신 분은 누구세요?”
문밖에서 ‘저희는 생일에 초대받은 손님이에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반가운 대답에 활짝 웃으며 문을 열자 문 앞에는 레오나르도와 친치아가 선물과 음식을 들고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엔초를 내려다보고 비슷한 표정으로 동시에 놀랐다. 엔초가 겨우 한 번 만났을 뿐인 로미오와 너무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세요! 저는 엔초 알피에리예요.”
엔초가 수줍어하지 않고 밝은 목소리로 환영하자 친치아가 놀란 표정으로 웃었다.
“안녕. 내 이름은 친치아 콘델로고 이분은 레오나르도 디오니시오 선생님이야. 만나서 반가워.”
“두 분 다 안녕하세요? 제 생일에 와 주셔서 감사해요. 스포르차 선생님의 초대로 오신 거죠?”
“응. 이분은 의사 선생님이시니까 디오니시오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돼.”
“만나서 반가워요! 어서 들어오세요, 어서!”
집주인인 엔초가 마치 어른처럼 집 안으로 안내하는 손짓을 하자 조반니가 계단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둘 다 늦지 않게 잘 왔어. 위층에 대위님의 손님들이 와 계시니 올라와서 인사를 나누도록 해.”
“이건 디오니시오 선생님이 가져오신 백포도주예요. 맛이 아주 그만이에요.”
“좋지, 백포도주. 이리 줘.”
“그런데 머리 모양이 왜 그래요? 뻐꾸기한테 좋은 집이 되겠어요.”
어지간한 일에 잘 놀라지 않는 레오나르도가 신기할 정도로 로미오와 닮은 엔초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조반니의 몸을 한 번 훑었다. 그 역시 조반니의 옷차림새를 보고 이상한 표정이 됐다. 친치아는 머리 모양이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레오나르도가 보기에 심각한 것은 머리가 아니라 옷차림이었다.
“그건 무슨 옷이지?”
“무슨 옷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왜 이상한 옷을 입고 있어. 안에 입은 옷이 대체 뭐야?”
조반니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더니 뭐가 문제냐는 표정이 되는데 문 너머에서 사두마차의 바퀴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마차에서 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 앞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똑똑똑! 경쾌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엔초가 조금 전처럼 문가에 입을 대고 물었다.
“누구세요?”
문밖에서는 대답 대신 하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대체 이 안에 뭐가 들었습니까요?
“줄리오군. 문을 열어 줘, 엔초.”
엔초가 문을 열자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줄리오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뒤로는 선물 상자를 안고 있는 하인이 서 있었다. 그는 상자가 무겁다기보다는 너무 조심스러워 과장된 자세로 상자를 가슴에 껴안고 있었다.
“내가 집을 제대로 찾아왔군. 안녕, 꼬마야. 나와 두 번째로 보는 것이지? 오늘은 그때보다 더 인형처럼 차려입었구나. 오늘이 네 아홉 번째 생일이 맞아?”
“네, 맞아요. 잘 오셨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줄리오는 구면인 레오나르도와 친치아에게도 인사했다.
“디오니시오 선생님과 콘델로 양도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에요. 도련님께서도 초대받으신 줄 몰랐네요.”
“이 꼬마와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어 선물도 줄 겸 오게 됐습니다. 그나저나 콘델로 양, 머리 자른 모습이 아주 보기 좋네요. 먼젓번에는 머리가 길었었죠?”
“디오니시오 선생님이 잘라 주셨어요. 이렇게 짧게 자를 생각은 아니었는데 선생님이 말도 없이 이렇게 잘라 버리신 거 있죠?”
“짧은 머리도 아주 잘 어울립니다.”
은근히 친치아에게 친절한 목소리로 말한 줄리오는 조반니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 역시 이상한 표정이 됐다.
“그나저나 조반니, 옷이 그게 뭐야? 머리 모양은 또 뭐고?”
“다들 내 머리 모양이 어떻다고 그러는 거지? 옷도 그래. 뭐가 문제야?”
조반니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됐다. 옷 문제로 옥신각신하던 그들은 곧 위층으로 올라가 발레리아와 마르코, 갈리에누스와 악수를 나누며 서로의 이름을 소개했다.
“발레리아 말로입니다.”
“마르코 무소 대위요.”
“갈리에누스 솔로르사노 중위입니다.”
여섯 사람이 서로서로 악수를 나누며 각자 로미오, 조반니와 어떤 사이인지 이야기하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짧은 잡담을 곁들인 인사가 끝나자 곧 그라나 부인이 도착했고 음식 준비도 마침 전부 끝났다.
“자, 이제 케이크를 꺼내 볼까?”
테이블 위에 음식들이 차려지자 조반니가 마지막으로 케이크를 갖고 왔다. 반짝거리는 식기 위에 담긴 케이크는 덮개에 덮여 있었는데 조반니가 그걸 치워 내자 엔초가 탄성을 질렀다.
“우와!”
놀란 것은 엔초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전부 놀랐는데 케이크의 높이가 믿기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크림으로 장식된 케이크는 매우 부드러워 보이기도 했는데 가장 위에 먹음직스럽게 모양을 낸 과일 몇 가지와 잣이 얹어져 있었다. 로미오는 바로 옆에 있던 갈리에누스가 케이크를 설명해 줘 케이크가 얼마나 큰지 이해했다.
“이제 초를 불 차례다.”
조반니는 케이크의 제일 위에 초를 꽂았다. 불을 붙이자 엔초는 둘러싸인 사람들의 가장 중앙으로 나가 케이크 앞에 섰다. 들뜬 마음에 볼이 발그레해진 엔초는 두 손을 맞잡았다.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나자 엔초는 뺨을 크게 부풀려 후, 하고 한 번에 촛불을 껐다.
“생일 축하해, 엔초.”
“축하한다, 엔초.”
“정말 축하해. 나이를 한 살 더 먹었으니 의젓해져야 한다.”
“하루밖에 없는 생일이니 오늘 하루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고 즐겁게 보내렴.”
“모두 제 생일에 와 주셔서 감사드려요!”
선물을 줄 차례가 돌아오자 사람들은 저마다 준비해온 선물을 꺼냈다. 가장 먼저 선물을 준 것은 로미오였다.
“어서 풀어 봐.”
로미오가 준비한 선물은 언뜻 펜처럼 보였지만 포장을 뜯자 안에서 나온 것은 조각용 끌과 붓이었다. 손잡이 부분에 금박이 입혀진 그것은 엔초가 지금까지 쓰던 것과 다른 어른용이었다. 윤기가 날 정도로 반짝거리는 끌 끝은 예리하면서도 단단해 가격을 짐작게 했고 붓 역시 가난한 화가들이 한두 푼을 내고 필요할 때마다 쉽게 사는 저렴한 붓처럼 보이지 않았다. 손잡이 끝에는 엔초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지금보다 더 크면 손에 맞게 쓸 수 있도록 큰 걸 사서 네 손에는 아직 조금 클 거야. 손에 익게 되거든 조각하고 싶은 걸 마음껏 조각해 봐.”
“고마워, 형! 정말 마음에 드는 선물이야!”
엔초가 신나 하며 로미오를 껴안자 로미오도 엔초를 꼭 안아 주었다.
“생일 정말 축하해. 늘 지금처럼 건강해.”
다음 차례는 발레리아였다.
“무슨 선물일지 궁금했지? 어서 풀어 봐.”
발레리아의 선물이 무거웠기 때문에 엔초는 의자에 앉아 그녀의 선물 상자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포장을 풀자 안에 담긴 것은 호두나무로 만든 예쁜 함이었다. 열쇠로 잠글 수 있게 자물쇠가 달려 있었는데 함 표면에 섬세한 조각 장식이 곁들어져 있었다.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함이었다.
“안에 소중한 물건을 넣어 보관할 수 있어. 열쇠가 하나밖에 없으니까 열쇠를 갖고 있는 사람만 열 수 있는 거야. 로미오가 보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비밀스러운 물건이 있으면 이 안에 넣어서 숨겨.”
발레리아가 귓속말을 하듯 이야기하자 엔초가 키득댔다.
“감사합니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엔초의 비밀이라니. 그런 것을 상상해 본 적 없는 로미오가 어색하게 웃었다. 보지 못하는 그를 위해 갈리에누스가 함의 모양과 크기를 자세히 설명해 주는 동안 마르코가 자신의 선물을 내밀었다.
“자, 얼른 열어 봐라. 내 선물도 궁금하지?”
상자를 열자 안에는 옷이 들어 있었다. 웃옷과 바지였는데 공교롭게도 지금 입고 있는 옷과 비슷해 마르코는 아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선물이 겹쳐서 애석하군. 옷을 고르기 전에 더 고민해 볼걸 그랬어.”
“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맙습니다! 형, 이것 봐. 아주 예쁜 옷이야.”
들뜬 마음에 로미오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잊은 엔초는 로미오를 향해 옷을 펼쳐 보였다. 로미오는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아주 잘 어울릴 거야. 무소 대위님께서 좋은 옷을 선물해 주셨구나.”
“다음은 제 차례입니까? 자, 엔초. 이건 내 선물이란다.”
갈리에누스가 선물을 건네자 엔초뿐만 아니라 조반니도 궁금해했다.
“중위님의 선물은 뭔가요? 아까부터 궁금했습니다. 특이한 선물처럼 보이는데요.”
선물을 궁금해하는 것은 로미오도 마찬가지였다. 파티가 시작되기 전 갈리에누스가 자꾸만 부스럭대 그의 선물을 만져 봤던 로미오는 선물이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저마다 궁금해하자 갈리에누스는 멋쩍게 미소 지었다.
“대단한 것이 아닌데 포장 때문에 기대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군요. 엔초, 어서 풀어 보렴.”
엔초가 포장을 풀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포장 안에 들어 있던 것은 말머리가 달린 장난감이었다. 기다란 막대 끝에 헝겊으로 말의 머리를 만들어 붙여 놓은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다리 사이에 끼워 말을 타는 시늉을 하며 갖고 노는 장난감이었다. 엔초의 머리만 한 크기의 말머리에는 갈기와 고삐까지 달려 있어 그 생김이 정말로 말 같았다. 최근에 아이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장난감이었는데 이름을 지어 주거나 진짜 말을 기르는 것처럼 갈기를 손질해 주는 아이들도 있었다. 말의 막대로 쓰이는 고급 목재와 고삐 부분에 박아 넣은 금박 장식 때문에 값이 꽤 나갔다.
“우와아!”
앞서와 달리 아주 큰 목소리로 감탄한 엔초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형, 이것 봐! 장난감 말이야! 흰 갈기에 고삐가 달려 있어!”
그러나 로미오는 장난감 말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장난감이 있다더라는 이야기조차 들어 본 적이 없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하는데 옆에 있던 조반니가 설명을 해 줬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말 장난감입니다. 막대 끝에 말 머리가 달려 있어 아이들이 말을 타듯 갖고 놀 수 있습니다.”
“그럼 길이가 엔초의 키만 하겠군요?”
“네. 요 며칠 사이 장난감 가게에 저 장난감 말이 걸려 있는 것을 자주 봤습니다. 중위님께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잘 골라 오셨군요. 엔초, 대위님께서 장난감을 만져 볼 수 있도록 이리 가까이 와 보겠어?”
엔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장난감 말을 껴안더니 가까이 다가와 로미오의 손에 말의 머리 부분을 쥐여 주었다. 로미오는 손으로 푹신한 머리 부분과 고삐 줄을 더듬으며 머릿속으로 말 장난감의 모습을 그렸다. 장난감은 정말로 말의 머리와 비슷했다.
“고맙습니다, 중위님!”
엔초가 갈리에누스를 덥석 껴안자 갈리에누스도 가슴이 눌리도록 엔초를 단단히 안아 주었다. 엔초가 숨이 막혀 푸흐흐 웃자 갈리에누스는 발레리아와 마르코에게 농담조로 말했다.
“지금까지의 선물 중에서는 제 선물이 가장 마음에 드는 모양입니다. 고민한 보람이 있네요.”
다음 차례는 친치아와 레오나르도였는데 두 사람은 누가 보아도 책처럼 보이는 선물을 들고 있었다. 무난한 생일 선물이었다.
“장난감 다음이라니 부담이 되는데요? 자, 이건 우리가 주는 선물이야. 책을 좋아하니?”
“네! 좋아해요. 재밌는 이야기라면 다 좋아요.”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책을 두 권 골라 달라고 서적장에게 부탁해서 산 거야. 오늘 밤에 자기 전에 꼭 읽어 봐.”
친치아가 레오나르도의 것과 함께 책 두 권을 건네자 엔초는 장난감 말을 얼른 내려놓고 예의 바르게 선물을 받았다. 오늘 처음 보는 데다 로미오의 친구들이 아니라 조반니의 친구들인 그들이 손수 자신의 선물을 준비해 왔다고 하니 고개까지 꾸벅 숙여 보였다.
“고맙습니다, 콘델로 누나. 디오니시오 선생님도요.”
로미오를 통해 서로의 호칭을 정리하는 법을 배운 엔초는 넉살 좋게 두 사람을 그렇게 부르며 선물을 뜯었다. 제목을 씩씩하게 읽은 엔초는 책 모서리가 구겨지지 않게 소중히 껴안았다.
“이제 내 차례군.”
줄리오는 하인이 가져온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게 했다. 안에 부피가 큰 물건이 들어 있는 것 같았는데 뚜껑을 연 순간 발레리아며 마르코, 갈리에누스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
안에 든 것은 거울이었다. 그것도 아주 큰.
“최근 귀족들 사이에서 가장 유행하고 있는 유리 거울이란다. 그들에게 이 거울은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과도 같지. 유리 제조 기술이 섬세하면 섬세할수록 거울도 비싸지는데 보관에 특별한 방법은 없어. 표면에 묻은 것을 닦아 주기만 하면 끝이야. 깨지면 산산조각이 나 다칠 수 있으니 그 점만 조심하면 돼.”
거울이라는 말에 로미오는 당황한 얼굴이 됐다.
“고맙습니다. 귀한 선물을 준비해 오셨군요……”
루바노에서 제일가는 갑부인 포르치오 가문에 대해 모르지 않는 로미오는 어젯밤 조반니로부터 줄리오를 엔초의 생일에 초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가 선물로 거울을 준비한 줄은 몰랐기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값비싼 선물을 주고받을 만한 사이가 아닌 이가 다른 것도 아닌 사치품인 거울을 선물하니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돈이 너무 많아 상대에 따라 선물의 가격에 차등을 둘 필요가 없는 줄리오는 부잣집 도련님답게 로미오의 그런 부담감은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축하할 일이 있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축하의 의미가 잘 드러나는 선물을 하는 것이 줄리오의 철칙이었다.
“꼬마야, 어때?”
“이렇게 큰 거울은 처음 봐요! 예전에 옷가게에 걸린 거울을 본 적이 있지만 그곳의 거울은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거울은 아주 깨끗하게 잘 보여요.”
“이 거울은 그 거울과는 달라. 유리 거울이니까.”
“정말로 이 거울을 선물로 주시는 거예요?”
“그럼. 거울은 유용하게 쓸 데가 많단다. 이 정도 선물이면 여기 있는 선물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들겠지?”
선물에 따라 솔직하고 순수한 반응을 보이는 엔초 때문에 은근히 자기 선물이 제일 마음에 들길 바라던 줄리오였으나 엔초는 손가락 다섯 개 펼쳐 보였다.
“다섯 번째로 마음에 들어요. 저는 중위님이 주신 장난감 말이 제일 좋아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주 소중히 쓰면서 매일매일 들여다볼게요.”
엔초가 너무도 솔직히 대답하며 거울 속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자 로미오가 당황해 “엔초.” 하고 말했다. 그러자 줄리오가 하하, 웃으며 로미오에게 말했다.
“역시 어린아이들한테는 장난감이 최고죠. 나무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거울을 놓을 만한 자리로 어디가 괜찮겠습니까?”
거울을 쉽게 볼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모두들 어린아이처럼 옹기종기 모여 거울을 들여다봤다. 이렇게 전신을 비추고도 남을 정도로 커다란 유리 거울은 사치스럽기만 하고 쓰임이 적어 의사인 조반니와 레오나르도도 좀처럼 볼 일이 많지 않았는데 한때 귀족 가문의 아가씨였던 친치아만이 거울을 신기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망의 조반니의 차례가 돌아왔다. 빈손인 그는 줄곧 열린 창 너머에서 마차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는데 때마침 그 소리가 적절히 들려오자 엔초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가 주는 선물이 오늘 생일에서, 아니, 적어도 열세 살이 되기 전까지 있는 네 모든 생일에서 가장 훌륭한 선물이 될 거다.”
아래층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반니가 올라오라며 대답하자 발소리가 여럿 들리더니 의외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아르고 과자점의 주인아주머니였다.
“손님들이 많이 와 계시네요. 주문하신 쉰한 종류의 사탕과 서른세 가지 종류의 과자가 든 선물 상자입니다! 많은 양의 사탕과 과자를 주문한 손님께만 드리는 특별한 표 열 장도 들어 있어요. 이렇게 많은 사탕과 과자를 주문한 손님은 처음입니다. 가게에서 파는 모든 종류의 과자와 사탕이 한 종류도 빠지지 않고 전부 들어가 있어요.”
과자점의 조수들이 낑낑대며 들고 올라온 것은 엔초가 들어가도 충분할 정도로 커다란 선물 상자였다. 심지어 아주 무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주인아주머니의 말을 통해 선물의 내용물을 짐작한 엔초는 입이 귀에 걸려 조반니를 올려다봤다.
주인아주머니가 생일을 축하한다고 인사하며 조수들과 함께 돌아가자 도리어 조반니가 아이처럼 엔초를 재촉했다.
“어서 풀어 봐.”
엔초는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발을 구르더니 로미오를 가까이 오게 했다.
“같이 열어 보자. 하나, 둘, 셋!”
두 사람이 함께 리본을 풀고 뚜껑을 열자 바로 옆에 있던 갈리에누스와 친치아가 놀라서 안을 들여다봤다.
“이 안에 든 게 전부 다 몇 개입니까?”
“와, 한 달 내내 매일매일 먹어도 남겠어요. 도대체 얼마 치의 과자와 사탕을 산 거죠?”
키가 가장 커 제일 뒤에 서서 보고 있던 마르코도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상자 안에는 빈틈없이 과자와 사탕이 차 있었다. 이 정도면 아르고 과자점의 과자들을 죄다 쓸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와아! 우와, 와아아! 이게 다 사탕이랑 과자예요? 전부 다요?”
너무 기쁜 나머지 펄쩍 뛰며 함성을 지른 엔초는 뚜껑 바로 아래까지 꽉 차 있는 과자와 사탕들 안으로 손을 넣었다. 물고기 모양과 고양이 모양, 클로버 모양 같은 다양한 모양의 사탕은 전부 색깔도 제각각이었다. 소용돌이무늬가 새겨진 막대사탕도 있었고 예쁜 은박 포장을 입힌 알사탕도 있었다. 잼이 든 쿠키와 버터를 듬뿍 넣은 버터 쿠키, 오렌지 조각 모양의 주황색 쿠키가 알록달록한 포장지 속에 들어 있었다. 다양한 맛과 색을 가진 과자와 사탕들이 한가득이어서 상자 안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났다.
로미오가 상자의 크기를 알고 싶어 손으로 더듬자 마르코가 로미오의 손을 가져다 상자 겉면을 만지게 해 준 뒤 상자 안에 넣게 했다. 엔초의 허리를 넘는 커다란 상자 안에 든 것이 전부 과자와 사탕이라는 것을 알게 된 로미오의 눈이 커졌다.
“이 안에 전부 사탕과 과자가 들어 있는 겁니까?”
“맞아. 전부 사탕과 과자야. 엔초가 이걸 다 먹을 때쯤엔 다음 열 살 생일이 돌아오겠구만.”
조반니는 바스락대는 사탕과 과자들 사이에서 아르고 과자점의 문양이 찍힌 표 뭉치를 꺼냈다.
“이걸 들고 가면 아르고 과자점에서 먹고 싶은 사탕이나 과자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어. 이 상자에 든 걸 다 먹은 후에 써도 좋고 친구들에게 나눠 줘도 좋아. 이걸 내기만 하면 누구에게든 먹고 싶을 것을 줄 거다.”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갈리에누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조반니의 허리를 껴안은 엔초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이렇게 많은 과자들과 사탕은 처음 봐요! 평생 먹어도 다 못 먹을 것 같아요. 정말로 고맙습니다, 스포르차 선생님! 최고의 생일 선물이에요.”
* * *
“그것참, 귀족이라니 말만 들어도 까탈스럽게 느껴지는데 어떻습니까?”
“제가 오랫동안 겪어 본 바에 의하면 귀족들에게는 특권 의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흔히 말하는 평민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으니 오만한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사업 수완을 발휘하는 데에 더없이 좋은 상대들이죠. 비위를 맞추는 것은 상인이라면 무릇 갖추고 있어야 할 능력이니까요.”
“부인께서는 백포도주가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샴페인을 한 잔 드시겠습니까?”
“샴페인? 알았어이. 한 잔 가져다줄 테니 기다리고 있어이.”
“아니요. 한 잔 드시지 않으시겠냐고 여쭤봤습니다.”
“한 잔이 아니고 두 잔을 마시고 싶은 거이?”
“아니요. 제가 먹겠다는 것이 아니라……”
“말로 대위님, 이 음식에 대해서 잘 아시나요? 제가 본디 루바노 사람이 아니라서 루바노 음식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거든요.”
“그 음식은 단단한 식감을 선호하는 동부 지방에서 즐겨 먹는 매운 오리 구이예요. 그나저나 루바노 분이 아니셨군요. 괜찮다면 고향이 어디인지 여쭤봐도 되려나요?”
각자 서서 접시를 하나씩 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주제로 자유롭게 대화를 이어 갔다.
엔초는 장난감 말을 껴안은 채 과자와 닭구이 요리를 번갈아 먹고 있었는데 그의 대화 상대는 레오나르도였다.
“저도 예전에 머리를 기르려고 한 적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제게 조각을 가르쳐 주는 스승님께서 긴 머리를 갖고 계시거든요. 하지만 머리가 길면 늘 묶어야 하고 머리카락이 자꾸 옷에 달라붙어서 힘들대요. 로미오 형이 그러는데 제 머리끝이 곱슬거린대요. 고불고불한 머리는 기를 수가 없어서 포기했지만 저도 언젠가는 머리를 길러 보고 싶어요. 선생님께서는 왜 머리를 길러요? 머리를 길러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어요?”
“아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언제부터 머리를 길렀나요?”
“글쎄.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구나.”
바로 옆에서 사과파이를 포크로 한 입 잘라 먹던 로미오는 엔초가 바스락대며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자 물었다.
“배가 고프지 않아? 사탕은 식사를 다 한 후에 먹으면 어떨까? 스포르차 선생님께서 맛있는 요리를 많이 준비하셨어.”
“응, 알았어.”
레오나르도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금방 다시 엔초의 옆으로 돌아와 동생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로미오를 말없이 관찰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는 사과파이 하나를 먹는데도 남들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의사가 될 생각을 하셨어요? 어렸을 때도 의사가 꿈이었나요?”
예전에 조반니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는 엔초였다. 레오나르도는 포도주 잔을 기울이며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맞아. 의사는 원래 내 꿈이었단다. 원래부터 그랬지.”
백포도주를 한 잔 마신 레오나르도는 로미오의 접시 바닥이 으깨진 잼과 빵 부스러기로 엉망인 것을 봤다. 접시 밖으로 음식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로미오는 포크질에 집중하고 있었다. 손을 천천히 움직이며 접시의 무게를 느끼는 그는 커다란 사과파이 조각을 손톱만 한 크기로 조각낸 끝에야 아주 작은 조각을 입에 넣을 수 있었다.
“로미오. 이 양고기 요리를 한 점 먹어 봐. 맛이 아주 신묘해.”
“대위님, 더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백포도주를 더 마시고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로미오.”
발레리아와 갈리에누스, 마르코는 각자 음식을 덜어 갈 때마다 로미오에게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그들은 조바심을 내거나 조심스러워하지 않고 익숙한 태도로 로미오를 배려했는데 그건 엔초도 마찬가지였다.
“형, 포크를 이렇게 잡아 봐. 그러면 파이 조각을 집기 더 쉬워.”
“어떻게? 이렇게?”
“응.”
로미오는 손을 더듬어 자신의 잔에 포도주를 부을 수 있었고 음식의 위치를 찾아 도움 없이 접시에 담을 수도 있었다. 그가 그렇게 접시에 음식을 담다가 식탁 위로 부스러기와 양념을 흘려 식탁보 군데군데가 더러워져 있었지만 눈길을 주거나 불편해하는 이들은 없었다.
단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본 것이 다였지만 레오나르도는 조반니의 말대로 로미오가 수수한 사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점에 조반니가 끌려 한다는 것도 알았다. 조반니는 변덕이 심하고 까다로운 사람보다는 무던하고 욕심 없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를 친구로 두고 있기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살면서 남을 등쳐 먹길 좋아하는 이들을 원치 않게 많이 만나 온 탓에 조반니는 그 반대인 사람을 본능적으로 좋아했다. 지금껏 낭만적인 만남을 가져 왔던 사람들이 대부분이 그랬다.
하지만 로미오는 제멋대로에 자신만만하고 남들이 두려워하는 일을 양심의 가책 없이 쉽게 해내는 조반니에게 동화될 만한 인간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로미오는 근본적으로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위험한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들이 조반니와 깊은 사랑에 빠졌던 것을 생각하면 로미오와 조반니는 적어도 한 번은 사이가 틀어질지 몰랐다.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엔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로미오가 주위를 둘러보자 레오나르도가 물었다. 로미오는 주위의 기척을 한 번 더 살핀 후 말했다.
“지금 서 계신 위치에서 스포르차 선생님께서 보이십니까? 조금 전부터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은데 혹시 부엌에 계십니까?”
“조반니는 여기 없습니다. 한참 전에 3층으로 올라갔습니다.”
로미오는 레오나르도의 대답 직후 그가 포도주를 마시는 소리를 들었다. 가벼운 목넘김을 끝으로 입술이 다물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부엌 쪽에서 엔초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친치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아 그쪽을 쳐다보는데 레오나르도가 물었다.
“사과파이를 한 조각 덜어 드릴까요?”
레오나르도가 들고 있던 포도주 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로미오는 공손히 거절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음식을 막 먹기 시작했을 때도 로미오에게 빈 잔과 접시를 건네며 음식을 덜어 주려고 했던 레오나르도였다. 로미오는 레오나르도의 배려에 감사를 느꼈지만 동시에 그의 배려를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 없기에 불편함을 느꼈다.
묵묵히 사과파이를 먹으며 마주 서서 백포도주를 마시는 레오나르도의 기척을 듣고 있자니 그런 마음이 한층 강해졌다.
조반니가 자신의 입단 문제를 고려해 그와 친치아를 초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조반니는 단테의 12인의 와해를 위해 친구인 레오나르도마저 속이고 있는 것이었다. 조반니는 레오나르도를 좋은 사람이자 믿을 만한 친구라고 설명하면서도 단테의 12인이 무너지는 순간 그 역시 체포될 것이라고 예사롭게 이야기했다. 이 나라가 만약 그들에게 온정을 베푼다면 그 온정이 레오나르도와 친치아에게 가장 먼저 돌아가길 바란다고 말했으나 그 말을 할 때 조반니는 죄책감이나 착잡함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조반니와 한패가 돼 그들을 속이는 입장에 놓여 있는 로미오였다. 감성적인 인간이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직접적인 악의가 없는 눈앞의 상대를 속이는 것에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감쪽같이 속일 자신이 없어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비밀 결사의 단원인 동시에 평범한 의사이자 조반니의 친구이며 엔초에게 동화책을 선물해 준 생일 파티의 손님인 레오나르도를 속여야만 하는 상대로 보고 그의 인생에 단죄를 내리는 처단자 역할을 하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었다.
군인이었을 때는 단테의 12인의 연루자들의 일생을 엿볼 기회는 없었으나 레오나르도는 달랐다. 자신은 그의 이름과 목소리, 그가 해 온 일들을 알았으며 앞으로 보게 될 그의 미래는 자신의 손에 달려 있었다. 한 인간의 삶을 무너뜨린다는 것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비록 그가 잘못된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의 인생이었다. 입단하게 된다면 각기 다른 삶을 사는 여러 사람들의 인생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거대한 고목나무처럼 뿌리 내리고 있는 그들의 인생과 꿈과 그들 가문의 이름, 가족들. 그 모든 것이 일거에 뿌리 뽑혀 흙바닥 위에 나뒹굴 것이다. 그 일을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죽을 때까지 배불리 먹게 해 주겠다거나 두둑한 돈 자루를 쥐여 주겠다는 허황된 약속이 그들을 결속시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라를 바꾸겠다는 신념으로 한배에 올랐다.
더 이상 신념에 의해 희생당하는 자는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라는 평화로운 땅으로 역사 속에 기록되어야 했다.
“오늘 조반니 녀석의 옷차림이 이상하더군요. 조금 전에 저쪽에 서서 머리를 만지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아마 머리를 손보러 위층으로 올라갔을 겁니다.”
조반니가 망토 자락을 털 때 느꼈던 기시감에 대해 의문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로미오는 무의식적으로 포크를 힘줘 잡았다.
“선생님께서 오늘 어떤 옷을 입고 계십니까?”
“망토와 바지를 입고 있습니다. 목깃의 모양이 다른 긴 옷도 두 벌 겹쳐 입었는데 제가 지적한 건 그 겹쳐 입은 옷들이었습니다.”
“망토가… 어떤 색과 모양을 갖고 있습니까?”
“허리 아래까지 오는 길이의 붉은색 망토입니다. 조반니 녀석은 붉은 계열의 옷을 즐겨 입는 편입니다.”
아래층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올 손님이 없었으나 로미오는 접시를 내려놨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시는 거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친절에 로미오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통해 그들의 위치를 확인한 로미오는 느리게 걸음을 옮겨 문으로 다가갔다. 문간을 더듬어 확인하고 밖으로 나가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1층에서 크게 들려왔다.
발소리를 죽여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 조용한 층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홀연히 울렸다. 문 앞으로 다가가 문고리에 손을 얹고 문가에 귀를 대는데 문밖에서 조반니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뜻밖의 목소리에 로미오는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고개를 뗐다. 자코모였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문을 열자 자코모가 화들짝 놀라 하숙집 건물을 올려다봤다. 조반니를 찾아왔는데 로미오가 문을 열었으니 당연했다.
“어떻게 여기에…… 조반니와 같은 집에 살고 있소?”
병원에서 헤어진 이후 이렇게 우연히 다시 만났으니 자코모로서는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로미오가 그날 봤을 때만큼이나 여전히 아름다워 잠깐이나마 감탄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에 그는 곧 이마를 찌푸렸다.
“조반니와 같이 사는 것이오? 그러니까 내 말은 그와 같은 하숙집에 세 들어 살고 있는 것이오?”
“그분과 저는 층계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 사이입니다.”
로미오는 다시 한번 자코모가 조반니와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위층을 가리켰다.
“약속을 하고 오신 겁니까? 선생님께서는 지금 3층에 계십니다.”
자코모는 불만스러운 표정이 돼 계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위층에서 사람의 목소리만 들려올 뿐 조반니가 내려오는 기색이 없자 1층 내부를 슬쩍 둘러보았다.
할 말을 망설이는 것처럼 머뭇대던 자코모는 뒤늦게 자신의 옷차림을 깨닫고 앞섶을 손으로 눌러 정리했다. 동시에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지 소매를 킁킁대다 로미오가 맹인이라는 것을 뒤늦게 떠올리고 그가 자신의 후줄근한 옷차림을 볼 일이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지난번에 로미오가 팔을 다쳤던 것을 기억해 냈다.
“팔은 이제 다 나은 것이오?”
자코모의 목소리에 진심 어린 걱정이 섞여 있자 로미오는 잠깐이나마 놀랐다. 자코모는 꼭 자신이 엔초에게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예, 덕분에 이제 괜찮습니다.”
“다행이오.”
자코모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로미오의 눈치를 봤다.
이미 지난번에 제대로 거절을 당했으나 길가의 마차를 보지 못하고 넘어졌던 그의 모습이 그날 밤 집에 돌아가 잠자리에 든 자신의 머릿속에 자꾸만 아른거렸다. 몸이 불편한 그에게 과한 부탁을 했다는 생각에 깨끗이 잊어버리자고 마음을 정리했으나 아쉬운 마음이 남아 있던 것이었다. 질척대며 또다시 같은 부탁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 다시 만난 이상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잠깐 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소? 잠깐이면 되오.”
“저번의 그 부탁이라면 거절하겠습니다.”
“그 이야기가 아니오. 더 이상 그런 제의를 할 마음은 없소.”
“그러면 무슨 이야기입니까?”
자코모는 로미오에게서는 설탕에 졸인 사과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서 풍기는 그 단 냄새에 괜히 침을 한 번 삼키고 목덜미를 슥슥 문질렀다.
“보아하니 조반니와 무척 친한 듯한데 내가 감히 충고 하나 하겠소. 내가 조반니를 알게 된 것이 10년도 더 되었으니 허무맹랑한 충고는 아닐 거요.”
밖으로 나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자코모는 문을 더 밀어 열었다. 그러나 입을 떼려는 찰나 배에서 꼬르륵대는 소리가 눈치 없이 울렸다. 층계를 울리는 그 부끄러운 소리에 뺨이 빨개진 자코모는 자신의 배를 누르며 헛기침을 했다.
“험, 흠! 어떠, 어떻, 어떻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되겠소?”
로미오는 자코모가 가난한 조각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에게선 오래된 옷 냄새가 났다.
사이를 잠시 두며 말을 아낀 로미오는 계단을 돌아봤다.
“오늘이 제 동생의 생일이어서 손님들이 많이 와 계십니다. 제게 하시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으시다면 올라와서 백포도주를 한 잔 드시고 가시겠습니까? 스포르차 선생님께 볼일도 있으신 듯하니 위층으로 올라가서 이야기를 나누시면 될 겁니다.”
로미오는 음식을 드시고 가시라는 말 대신 에둘러 백포도주라고 표현했다. 자코모는 얼굴이 붉어진 와중에 순진하게도 관심을 나타냈다.
“동생이 있었소?”
“형!”
마침 그 동생이 위층에서 뛰어 내려왔다. 엔초는 말 장난감을 껴안은 채 계단을 세 칸씩 뛰어 내려오더니 문가에 서 있는 자코모를 올려다보며 입을 벌렸다. 문짝에 정수리가 거의 닿기 직전인 자코모는 거인처럼 거대했다.
“우와…….”
엔초가 본 사람들 중 가장 키가 큰 사람은 조반니와 마르코였는데 자코모는 두 사람보다 더 컸다. 인상적인 것은 그의 눈이었다. 아몬드 모양의 연갈색 눈이 호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엔초는 거인 같은 자코모를 무서워하지 않고 활짝 웃었다.
“어서 오세요! 그런데 누구세요? 스포르차 선생님의 친구분이신가요?”
놀란 것은 자코모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턱이 빠질 것처럼 입을 벌리고 엔초를 내려다봤다. 이유는 당연히 엔초가 로미오와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문을 연 것이 엔초였다면 로미오가 이른 나이에 아들을 낳았을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상상을 했을 것이다.
“선생님도 의사 선생님이에요? 그런데 의사 선생님처럼 보이지 않아요.”
엔초가 자코모의 남루한 옷차림을 살피자 로미오가 주의를 주듯 이야기했다.
“이분은 의사 선생님이 아니라 조각가셔.”
“정말?”
조각가라는 말에 엔초의 눈이 동그래졌다. 털실 인형처럼 귀여운 엔초를 내려다보던 자코모는 어린 동생을 대하는 로미오의 태도에 입을 얼른 다물었다. 그 자신과 꼭 닮은 동생을 둔 로미오가 마음을 이상하게 했다.
“조, 조각에 관심이 있나 보구나. 이름이 뭐지?”
“엔초예요. 저도 조각과 그림을 배우고 있어요. 그리고 이건 제 말이에요!”
엔초가 장난감 말을 자랑하자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자코모가 부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장난감 치고 꽤 그럴싸한, 아니…… 멋있는 말이군.”
엔초는 입으로 ‘다그닥’ 소리를 내더니 말을 타는 시늉을 하며 로미오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이히힝, 하고 말의 울음소리까지 흉내 내자 로미오가 정말로 말을 타는 것 같다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로미오의 그 미소에 자코모는 넋을 놓고 그를 내려다봤다. 웃는 그가 이성을 잃게 할 정도로 아름다워 말문이 막혔다. 그럴 리가 없는데 로미오의 웃음소리에 사과 단내가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기침을 해 사과 같은 심장을 뱉어 낸다면 자신은 그 심장을 옷소매에 숨겨 달아나 버릴지도 몰랐다.
“이제 케이크를 자를 거야! 얼른 올라와.”
엔초가 로미오의 옷소매를 당기자 자코모가 정신을 차린 듯 재빨리 말했다.
“잠깐이면 되오. 이야기가 길지 않을 것이오.”
망설이던 로미오는 곧 올라가겠다고 말하며 엔초를 위층으로 올려 보냈다. 두 사람만 남자 자코모는 주위를 살핀 뒤 목소리를 낮췄다.
“조반니를 믿지 마시오. 그는 믿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오.”
자코모에게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 생각했던 로미오는 그가 돌연 조반니의 험담을 하자 눈빛을 달리했다.
“하시려는 말씀이 그것이었습니까?”
“그는 선한 사람이 아니오. 그런 것과는 본질부터 거리가 먼 자요. 이것은 내 경험에서 나온 충고가 아니라 조반니를 잘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이 입 모아 하는 이야기니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소.”
“선생님은 좋은 분이십니다.”
자코모는 로미오가 자신의 말을 새겨듣길 바랐지만 로미오는 지난번 병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적의를 드러냈다.
“그분께 부탁할 일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닙니까? 도움을 받고자 하는 상대의 험담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겨우 두 번 만났을 뿐인 저를 더 신뢰하시는 까닭이 이해되지 않는군요. 선생님과 그리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겠지만 이런 식으로 그분의 뒷말을 하시면 동조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대의 말대로 조반니와 나는 신의를 지킬 만한 사이가 아니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험담이 아니오. 조반니는 기본적으로 남의 고통이나 어려움에 큰 관심이 없는 자요. 그대가 알고 있는 모습은 그의 거짓된 모습이오. 그가 가식을 벗고 벌거숭이가 된다면 얼음처럼 찬 심장을 가진 냉혈한을 만날 수 있을 것이오. 화려한 외모와 달변에 넘어가 그를 사랑했으나 상처 입고 버려진 이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시오? 사람들은 조반니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럴 리 없다며 부인하지만 나는 알고 있소. 그는 남을 교묘하게 무시하고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을 즐기며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을 좋아하오. 나 외에도 그를 의심하고 있는 자들이 많으니 그자들을 하나하나 모으면 그 수가 절대로 적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오. 내가 알고 있는 비밀을 지키는 것보다 이렇게 경고하는 것이 그대를 위한 일임이 분명하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오.”
원한을 갖고 있다고 생각될 만큼의 악평이었다. 하나같이 조반니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었기 때문에 로미오는 자코모에게 동의하는 대신 그에게 냉담한 눈길을 보냈다.
자코모는 조반니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한때 자신이 그랬듯 겉으로 보이는 단편적인 일들로 조반니를 오해하고 있었다.
“그분이 없는 자리에서 그분에 대해 실례되는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한때 선생님을 인정이 없는 냉혹한 분으로 오해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곁에서 가까이 지켜보며 그것이 오해였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시고 계신 말씀에 호응해 드릴 수 없으니 계속 같은 이야기를 하실 생각이라면 돌아가 주십시오. 선생님께는 여기 오신 것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내 이야기를 흘려듣지 마시오.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요.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음을 달리 먹으시오.”
“저는 선생님께 진 빚이 많습니다. 제가 남에게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선생님께서 남의 처지를 무시하지 못하는 마음씨 좋은 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전부 착각이오. 그대가 조반니에게 속고 있는 것일 뿐이오. 알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예전에 조반니의 제자 하나가 제6군단에 체포돼 고문 끝에 죽은 사건이 있었소. 몇 번 만나 보지 못했지만 그는 조반니와 안면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게 과한 친절을 베풀기도 했소.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였으니 몸이 아니라 마음이 쇠약한 자였을 것이오. 그는 조반니와 깊은 유대 관계를 갖고 있었지만 그가 감옥 안에서 생을 마감했던 날 밤 조반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술집에서 술을 마셨소. 나와 친분이 있는 조각가가 조반니가 술집에서 웃고 떠드는 것을 직접 보았소. 악마가 아닌 이상 그것이 가능한 일이오?”
비토리오의 사건이 언급되자 로미오는 표정이 달라졌다. 전후 사정을 모르기에 단정 지을 수 없다고 생각해 오던 이야기였는데 숨겨진 목격자가 있었다.
조반니와 처음으로 취조실에서 마주했던 순간이 기억났다. 그때 나눴던 대화들을 되짚어 보는데 자코모가 자신의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게 느껴졌다. 안전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몸이 경직됐다. 물러서 달라고 말하려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대위님.”
조반니가 계단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은 그는 머리도 깔끔하게 손본 상태였다.
“어디 계신가 했더니 여기 계셨군요.”
자코모가 작은 목소리로 ‘젠장’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로미오가 그를 올려다보는데 조반니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오더니 옆으로 와 섰다. 빠른 발소리와 달리 목소리는 평소 같았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손질하고 왔습니다. 사람이 언제나 몸치장에 신경을 쓸 순 없는 일인데 레오나르도와 줄리오 녀석이 뭐라고 하지 뭡니까? 친치아는 제 머리가 뻐꾸기 집에 어울릴 거라더군요. 저라고 늘 외모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건 아닌데 말입니다. 때때로 소홀해질 수도 있는 일이죠.”
자코모를 보지 못한 척 로미오에게 이야기한 조반니는 뻔히 그를 앞에 두고 말을 계속했다.
“사과파이는 어떠셨나요? 진작 맛보여 드렸어야 했는데 이제야 기회가 돌아와 대위님의 평가가 기대됩니다.”
로미오는 조반니가 자신의 쪽으로 돌아서는 기척을 느꼈다.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조반니는 자코모를 문 앞에 두고 자신을 향해 서 있었다. 맞장구치지 않았지만 자코모와 함께 조반니를 헐뜯다 들킨 것 같은 모양새가 되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조반니는 조금 전 대화를 들었을 것이다.
“……예,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다음번에는 더 맛있는 사과파이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흑색 설탕보다 흰색 설탕을 많이 넣어 조리면 단맛이 강해집니다. 단것을 좋아하신다면 그렇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로미오는 조반니가 방금 전 그 대화를 듣고 기분이 상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니 자코모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그를 무시하듯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일 테다. 그런 험담을 듣고 기분이 상하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저, 선생님…….”
그래서 해명을 하려는데 조반니가 먼저 말했다.
“그런데 자코모를 어떻게 아십니까? 위층에서 얼핏 들으니 잘 아는 사이처럼 이야기를 길게 나누고 계시던데요.”
자코모가 대신 대답하기 위해 입을 떼려 하자 조반니가 그를 향해 검지를 들어 보였다. 개에게 명령하듯 손가락으로 자코모를 제지한 조반니는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로미오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실은 지난번에 병원에서 이분과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오늘도 선생님을 뵙기 위해 찾아오셨다기에 문을 열어 드린 겁니다.”
웃는 낯으로 물었던 조반니는 웃음을 거두고 콧잔등을 찌푸렸다. 오늘 우연히 처음 만나 문간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미 두 번이나 만났다고?
“아, 그랬군요.”
조반니는 자코모에게로 돌아서서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금색 눈을 둥그렇게 뜨고 올려다보는 시선에 자코모는 입술을 씹었다.
조반니가 아주 오래전에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를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 걸 목격한 적이 있었다. 조반니가 본색을 드러냈다고 생각한 자코모는 속으로 욕을 뇌까리며 문을 거칠게 열었다.
“조각에 필요한 대리석을 부탁하려고 왔던 거야. 다음에 다시 오지.”
“그래. 오늘은 시간이 없을 것 같군. 다음에 다시 보자고.”
조반니는 오늘 밤 자코모를 목 졸라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하며 문을 닫았다. 그가 로미오를 붙잡고 자신에 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는 사실에 심사가 뒤틀렸다. 로미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지금껏 얼마나 갖은 노력들을 해 왔는데 감히 그가 자신이 공들여 쌓은 것을 무너뜨리려 했다. 심지어 그는 이미 자신 몰래 로미오와 한 번 만나기까지 했다.
“저자가 대위님을 성가시게 하거나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습니까?”
조반니는 문고리를 부러뜨릴 것처럼 세게 잡곤 웃으며 물었다. 로미오를 탓할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이 없는 곳에서 로미오가 자코모와 단둘이 나눴을 대화를 떠올리니 얼굴에 핏기가 오르며 뺨의 근육이 멋대로 씰룩거렸다.
“그런 적은 없습니다. 저분은 제게 위협을 할 만한 분이 아닙니다.”
로미오는 조반니가 자신의 쪽으로 얼굴을 기울이는 것을 느꼈다. 그의 숨소리가 크게 들렸고 체취가 가까이서 느껴졌다. 몸이 긴장돼 고개를 뒤로 젖히자 조반니는 금방 물러났다.
“만약 자코모가 또다시 대위님의 앞에 나타난다면 제게 얘기해 주십시오. 그에게 좋은 말로 설명하겠습니다. 혹여나 그가 대위님께 부적절한 언행을 할까 우려가 되는군요.”
“두 번의 만남 동안 그분이 제게 위협적인 행동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자코모는 본래 성미가 까다로워 수가 틀리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합니다. 나쁜 자는 아닌데 가난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해 그렇게 된 겁니다. 그가 대위님께 불순한 행동을 할까 봐 제 마음이 불편하군요.”
“위협적인 짓은 지난번에도, 오늘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를 그릴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신 게 전부입니다.”
순간 조반니는 흰자위를 드러내며 눈을 크게 떴다. 얼굴이 일그러진 그는 문고리를 잡은 손을 뗐다. 주먹을 쥐자 팔뚝의 근육이 도드라지며 힘줄이 팽팽하게 드러났다.
아직 자코모가 여기 있는 것처럼 문 너머를 노려본 조반니는 어금니를 물었다.
“자코모가 그런 부탁을 했었군요…….”
목으로 조르는 것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줄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조반니는 어금니를 물었다. 질식보다 더한 공포라면 역시 찔러 죽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자신조차 아직 한 번도 로미오를 바로 눈 앞에 두고 그려 보지 못했는데 제 주제에 감히 로미오에게 그런 부탁을 했다니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자코모 녀석, 무명이기는 하지만 실력은 상당합니다. 재능이 빛을 발하지 못해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아마 대위님께 특별한 영감을 느껴서 그런 부탁을 했을 겁니다. 그래서…… 요청을 허락하셨습니까?”
“거절했습니다. 저는 그런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자코모가 보기보다 끈기가 있는 녀석입니다. 한 번의 거절로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혹시 오늘도 대위님께 같은 부탁을 하진 않았습니까?”
“아니요. 그분이 오늘 이곳에 찾아온 것은 순전히 선생님을 뵙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조반니는 자코모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로미오의 귀에 들어갔을 때 그가 자신을 의심하지 않도록 자코모에게 악감정이 없는 척 그를 좋게 표현했지만 자코모가 로미오를 그릴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자 심기가 무척 불편해졌다. 자코모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신경에 거슬렸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은근히 이런 말을 덧붙였다.
“자코모에게 재능이 있기는 하지만 솜씨로만 따지면 제가 나은 편입니다. 사실 운이 없다는 것은 재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와 같죠. 실력이 대단한 자라면 다른 이들이 진가를 알아보기 마련이고 그러면 찾는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무명인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위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조각가로서의 명성이 있는 편이지요. 중앙 광장에 있는 분수대도 제가 조각한 것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내가 더 대단하다’며 자신의 달리기 실력이나 그림 솜씨를 자랑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로미오는 조반니가 엔초 같은 말을 하자 선뜻 호응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렇습니까…….”
“바치시가 저를 고용했다기보다는 부탁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겁니다. 시의 중앙 광장에 놓을 분수대니 가장 실력 있는 조각가를 데려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예, 맞는 말씀입니다.”
“대위님께 제 조각을 보여 드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안타깝네요.”
조반니는 자코모를 살해할 계획을 머릿속으로 짜느라 자신이 아이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로미오와 자코모가 두 번이나 만났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자신의 잘못이기도 했다. 자코모가 로미오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이 안일했기 때문이었다. 로미오가 정해진 장소에서 자신이 파악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사람들과 만난다면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혹시…….”
그렇게 만들 방법을 한 가지 떠올리는데 로미오가 물었다.
“조금 전의 대화를 전부 들으셨습니까?”
조반니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거짓말을 섞어 대답했다.
“처음부터 다 듣지는 못했지만, 네, 들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화가 조금 나더군요. 그래서 일부러 자코모에게 인사하지 않고 무시했던 겁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어린아이 같은 미숙한 행동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뒷말을 즐기지 않습니까? 저도 대위님께 자코모가 불같이 화를 낼 때가 종종 있다고 말씀드렸으니 그것 또한 뒷말일 겁니다. 조금 전까지는 기분이 상했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조반니의 목소리가 정말로 괜찮은 것처럼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로미오는 해명을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험담을 시작한 것은 자코모이며 자신은 동의하지 않았는데 그가 멋대로 이야기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해 봐야 조반니와 자코모를 이간질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려니 그것도 불편했다. 비토리오의 이야기가 풀리지 않은 의혹으로 남아 있었지만 자코모가 한 말속에서 조반니는 완전히 매도되고 있었다.
“…….”
생각에 빠진 로미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동안 조반니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곤란해하거나 고민에 잠긴 로미오는 조반니가 좋아하는 모습들 중 하나기도 했고 앞서의 대화에서 들었다시피 로미오는 자신을 편들며 두둔했다. 그가 혹여나 맞장구쳤더라도 전부 사실이니 별수 없었다. 자코모 녀석은 보기보다 눈치가 빨랐다.
“저는 선생님께서 그런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만 하더라도 엔초에게 정성을 들인 선물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음식과 케이크를 전부 제 손으로 준비해야 했을 겁니다. 아까 그분도 선생님에 대해 뭔가를 오해하셨던 것일 겁니다.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에 서서 그분과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아 죄송합니다.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조반니는 입을 막으며 웃음을 눌러 참았다. 변명과 사과를 하는 로미오가 귀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흡사 결백을 주장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자신과의 관계를 어그러뜨릴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런 변명을 하는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로미오가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일단 만족했다.
“괘념치 마세요.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습니다.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겁니다.”
조반니는 할 수만 있었다면 로미오의 뺨에 입을 맞추고 이 자리에서 그의 성기를 빨아 줬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계단 위를 고갯짓했다.
“그만 올라가는 게 좋겠습니다. 케이크를 자를 시간이에요.”
* * *
“안녕히 가세요. 콘델로 누나, 디오니시오 선생님! 포르치오 형도 잘 가요!”
장난감 말을 껴안은 채 문 앞에 서서 손을 흔드는 엔초는 양쪽 주머니가 사탕과 과자로 불룩했다. 세 사람이 멀어지자 계단 위에서 발레리아와 마르코, 갈리에누스가 내려왔다.
해가 다 진 늦은 밤이 돼서야 파티가 끝나 손님들이 하나둘씩 돌아갔는데 엔초는 문 앞에 서서 그들을 배웅하며 사탕과 과자를 나눠 줬다.
“또 보자, 엔초.”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말로 대위님!”
발레리아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엔초는 주머니에서 꺼낸 사탕과 과자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뒤따라 나온 마르코에게도 한 움큼 주려 하자 마르코가 바지 주머니에 든 다른 사탕을 가리켰다.
“그 사탕이 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걸. 주머니에 든 그 커다란 사탕 말이야.”
“이 사탕요?”
“많이 줄 수 있어?”
“네, 많이 줄게요.”
엔초는 마르코가 고른 사탕과 과자들을 두 손 가득 마르코의 손에 쥐여 주더니 그의 군복 주머니에도 두둑이 넣어 주었다.
“어이쿠,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 잘 먹을게.”
마르코가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밖으로 나가자 갈리에누스의 차례였다. 엔초는 그에게도 사탕과 과자를 한 움큼 쥐여 주었다. 고맙다는 뜻으로 엔초의 뺨을 쓴 갈리에누스는 로미오에게 인사했다.
“수시로 들르겠습니다.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오늘 고마웠네, 중위.”
“생일 파티에 와 주셔서 고마웠어요! 모두 조심히 돌아가세요!”
엔초가 손을 흔들자 세 사람도 손을 흔들어 보였다. 문 앞에 서서 세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열심히 손을 흔든 엔초가 문을 닫으려는데 조반니가 겉옷을 챙겨 계단을 내려왔다.
“어디 가세요?”
“의사 협회의 모임이 있어서 그곳에 다녀올게.”
태연히 거짓말을 하자 로미오가 물었다.
“이런 늦은 시간에 말입니까?”
“금방 돌아올 겁니다. 집 안을 꾸민 꽃 장식들과 남은 음식들은 그대로 두세요. 제가 와서 모두 정리하겠습니다.”
조반니는 엔초와 로미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광장이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집을 나오자마자 눈빛이 달라진 그는 평소보다 두 배 더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도착한 곳은 어느 여관의 뒤편에 있는 허름한 집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걸었음에도 로사티 3번가의 하숙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오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외진 골목 안쪽에 위치해 있는 집이었는데 이 일대에 모여 사는 이들은 전부 가난한 자들이었다.
집 안에서는 양초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창가에 서서 집 안을 들여다본 조반니는 부엌에서 움직이고 있는 그림자를 확인했다. 주위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지길 기다리다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고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안에서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덜컹대며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간에 손을 대고 기다리던 조반니는 자코모가 문을 열고 나오자 재빨리 그를 집 안으로 밀고 들어가며 갈비뼈 아래에 칼을 찔러 넣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자코모는 문고리를 붙잡은 채 몸을 반으로 접으며 팔로 배를 감쌌다.
“윽……!”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기 위해 가슴을 더듬을 필요는 없었다. 몸 안에 칼이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 느껴졌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으며 몸에서 힘이 빠졌다. 벼락같은 통증에 손을 떠는데 조반니가 신속하게 칼을 빼더니 가슴과 허리 옆쪽을 연이어 두 번 찔렀다. 망설임 없는 공격에 자코모는 미처 방어하지도 못하고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이, 게, 무슨…… 윽……!”
조반니는 도로 칼을 빼더니 목젖 아래와 쇄골 가운데, 어깨, 허벅지를 차례로 빠르게 찔렀다. 피부와 살을 찢고 깊이 들어간 칼이 뼈와 뼈 사이에 걸려 제대로 빠지지 않자 조반니는 온몸을 벌벌 떠는 자코모의 어깨를 힘껏 떠밀며 칼을 빼냈다.
쿠당탕!
자코모는 손으로 바닥을 짚지 못하고 서 있는 자세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쓰러진 그는 거칠게 신음하며 옆으로 돌아눕더니 칼에 찔린 목을 손으로 감쌌다. 순식간에 몸 여러 군데에 칼자국이 깊게 패 피가 배어났다.
“흐, 윽…… 그… 흐…….”
“쉿. 조용히 해.”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 조반니는 자코모 외에 다른 사람이 없는지 부엌을 둘러보고 닫힌 방문을 열어 봤다. 식탁 위에 이제 막 한 숟갈 뜨려던 죽이 한 그릇만 놓여 있자 사람이 없음을 확신하고 자코모에게 다가갔다.
“그러게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았어야지. 이렇게 될 줄 몰랐나?”
쓰러진 자코모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손으로 감싸 쥔 목과 가슴, 허리에서 피가 배어 나와 옷깃을 적셨다. 누워 있는 등과 허리 뒤로 피가 고이며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채 눈을 크게 뜨고 조반니를 올려다보는 자코모는 사람이 낼 수 없는 이상한 숨소리를 내며 전신을 떨었다. 그르렁대는 소리는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다.
“그, 으극…….”
조반니가 피 묻은 칼을 빙빙 돌리자 적막한 집 안에 칼끝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식사를 하던 중이었나 보지?”
조반니는 부엌으로 갔다. 나무 그릇에 손을 대 보니 아직 따뜻했다. 죽을 찍어 먹어 본 그는 인상을 쓰며 바닥에 뱉어 냈다.
“이런 형편없는 죽은 처음이군.”
죽 그릇을 엎어 버리려던 조반니는 쓰러져 숨을 헐떡이는 자코모를 보고 마음을 바꿨다.
“그래도 네겐 마지막 식사니 손수 먹여 주지.”
죽 그릇을 들고 자코모에게 다가간 조반니는 그릇 안에 손을 넣어 죽을 한 움큼 집더니 자코모의 입에 밀어 넣었다.
“윽… 극…… 으……!”
“어서 먹어. 사양할 필요 없어.”
“큭, 컥……!”
자코모의 입 안으로 손을 쑤셔 넣어 목구멍 안에 죽을 처넣은 조반니는 다시 한주먹 가득 죽을 퍼 그의 입에 넣었다. 자코모가 괴로운 듯 머리를 내저으며 피하려 했지만 입가에 죽을 바르다시피 하며 억지로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친히 먹여 주고 있는데 씹는 시늉이라도 해 봐. 턱을 움직여.”
“켁……! 윽, 커억……!”
자코모가 거세게 고개를 비틀며 입을 다물자 조반니는 자코모의 얼굴을 향해 죽 그릇을 집어 던졌다. 머리에 그릇을 맞은 자코모는 얼굴이 죽 범벅이 돼 고개가 옆으로 떨어졌고 죽 그릇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대위님을 그릴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면서?”
자코모는 목을 감싸고 있던 손을 가까스로 들어 올렸다. 피로 흥건한 자신의 손을 본 그는 일어나려는 것처럼 바닥을 짚었지만 힘을 쓰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피가 배어 나오는 갈비뼈를 팔로 막았지만 옷은 빠른 속도로 젖어 들어갔다.
“그분은 아름다운 분이지. 보고 있으면 넋을 놓게 돼. 나도 알아. 그런 미인을 또 어디에서 만날 수 있겠어? 장담하는데 너와 내가 아는 이들 중 가장 아름다운 분이실 거야. 이름도 우아하지. 로미오. 혀가 둥글게 말리면서 부드럽게 움직이는 그 느낌이 아주 좋아. 난 그분의 이름을 부를 일이 많지 않지만 혼자 있을 때 가끔씩 발음해 보곤 해.”
“흐…… 그윽… 그…….”
조반니는 로미오, 하고 느긋하게 이름을 부르더니 자코모의 멱살을 들어 올렸다.
“얘기하고 있잖아. 입 다물고 조용히 들어. 다른 사람들에겐 할 수 없는 이야기야.”
멱살을 놓자 자코모는 바닥에 뒷머리를 찧으며 쓰러졌다. 그는 양초가 타들어 가듯 천천히 가슴 쪽으로 다리를 말고 몸을 웅크렸다. 입을 크게 벌려 신음하자 칼에 찔린 상처에서 푸르륵, 소리를 내며 피가 쏟아졌다.
“난 처음 봤을 때부터 그분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어. 아름다운 데다 구조적으로 완벽하잖아. 눈매의 넓이와 코의 길이, 입술의 두께, 귀의 모양. 심지어 턱 선의 윤곽까지 아주 완벽하지.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그분을 보면 이상하게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한단 말이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고 푹신한 침대에서 재우고 싶다가도 눈이 뒤집히게 겁탈을 하고 싶어. 그의 엉덩이에 성기를 마구잡이로 쑤시고 나면 입을 맞춘 뒤 부드럽게 안아 주고 싶어져. 참 이상한 일이지 않나?”
자코모가 눈을 돌려 조반니를 올려다봤다. 부릅뜬 눈은 경악에 질려 있었다. 피에 젖은 입술을 오므린 그는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턱을 떨었다.
“이건 고백이야. 난 그분을 벌써 세 번이나 범했어.”
“컥…! 큭!”
자코모는 피가 섞인 죽을 바닥에 뱉어 냈다. 그는 칼에 찔린 상처 사이로 숨을 빼앗기는 것처럼 쇳소리 같은 신음을 내쉬었다.
“한 번 맞혀 봐. 그분을 다시 범할 기회가 있을 것 같아? 내게 그 기회가 올까?”
자코모는 경련하는 입술을 죽을힘을 다해 벌리며 목의 상처를 손으로 막았다. 하지만 찢어져 붉은 살이 드러난 목젖의 상처에서는 피가 계속 흘렀다. 잘못 엎질러진 포도주처럼 바닥 위로 흘러내리는 피는 사람이 흘리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양이 많았다.
“……넌…… 허, 윽… 미쳤, 어…….”
“뭐라고? 잘 안 들려.”
조반니는 죽이 묻은 손을 자코모의 옷에 닦았다. 피에 젖지 않은 정강이 쪽의 깨끗한 바지 위에 죽을 전부 닦아 낸 조반니는 피가 묻은 칼도 닦았다.
“그분은 얼굴만큼이나 훌륭한 몸을 갖고 있지. 옷을 전부 벗겨서 엎드리게 한 후 뒤에서 내려다보면 황홀하기 그지없어. 특히 그 엉덩이. 손으로 쥐어 벌리면 작은 구멍을 내보이는 흰 엉덩이가 얼마나 보기 좋은지 아나? 뼈가 도드라진 발목도 끝내주지. 은밀한 부위에서 나는 냄새도 나를 기분 좋게 해. 네가 착각하지 않게 친절히 알려 주자면 난 오늘 네가 그분께 내 험담을 한 것과 그분을 그릴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한 것 모두에 화가 났어. 그 두 가지 사실에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었다고.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모를 거야. 난 정말 그분이 내 본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갖은 수를 써 왔어. 날 이중적이거나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진 마. 사람들은 누구나 상황에 따라 진짜 모습을 숨기니까.”
자코모는 목을 감싸고 있던 손을 떨구고 가슴을 헐떡였다. 의식은 있으나 빛이나 움직임에 반응할 수 없는 상태였다. 임종을 맞이하는 연갈색 눈동자는 반쯤 닫혀 있었고 동공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그는 조반니의 목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다. 죽어 가는 와중에 그가 하는 말의 내용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를…… 내버려 둬…….”
“흐음, 글쎄. 그럴 마음은 없는데.”
조반니가 발로 어깨를 밟자 옆으로 누워 있던 자코모가 천장을 보고 누웠다. 양다리와 팔을 벌린 채 널브러진 그는 눈을 뜨고 있었으나 동공이 한 점에 멈춰 있었다.
“넌 나를 방해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분을 봤어도 못 본 척했어야지.”
조반니가 허리를 숙여 자코모의 눈을 들여다봤지만 그는 눈 맞춤에 응하지 못하고 천장만 올려다봤다. 손으로 뺨을 툭툭 쳤지만 시선을 옮기지 못했다.
“겁탈할 때 느끼는 쾌감과 희열 때문에 그분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겁탈하지 않을 때도 그분이 마음에 들더군.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아름다운 것들은 전부 내 것이어야 해. 내 손안에 있어야 하지. 내가 원하면, 그럼 가져야 해. 다른 이유는 없어.”
조반니는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봤다. 먼지 쌓인 창틀을 손으로 쓸어 본 그는 끽끽대는 낡은 창문을 흔들고 손을 털었다.
“큭, 허억…… 윽… 헉…….”
자코모가 큰 소리를 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가 먼 거리를 급하게 뛰어온 사람처럼 크게 숨을 몰아쉬자 조반니는 발치에 있던 죽 그릇을 걷어차 그를 맞혔다.
“입 닥쳐!”
순간적으로 격분해 고함을 지른 조반니는 자코모의 가쁜 숨소리가 멎자 그에게 다가갔다.
이야기를 시작한 이상 끝맺을 필요가 있었다.
“그분을 겁탈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참을 수가 없어서였어. 겁탈한 걸 들키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유혹을 이길 수가 없었어. 대위님을 겁탈하고 싶다는 생각이 한번 들기 시작하니 다른 건 눈에 보이지 않더군. 일단 옷을 벗기고 성기를 비비기 시작하면 그 뒤의 일들은 어떻게 돼도 좋은 상태가 되는 거야. 물론 난 그분과 처음부터 좋은 관계를 맺을 수도 있었어. 겁탈하지 않고 옷을 벗길 방법을 궁리할 수도 있었지. 우린 평화로울 수 있었어. 처음으로 그분을 범했던 날로 다시 돌아간다면 골목으로 끌고 가 강제로 옷을 벗기는 대신 비를 맞지 않도록 내 겉옷을 씌워 줬을 거야. 그날은 비가 왔었으니까.”
그러나 조반니는 그 말을 한 직후 고개를 저으며 금방 말을 바꿨다.
“거짓말이야. 다시 돌아간다면 그분이 추위에 떨지 않게 내 겉옷을 입혀 준 다음에 범하겠지.”
“……그…… 윽… 으…….”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분이 사실을 알게 되면 나를 죽이려 들지도 몰라. 하지만 그분 성미에 정말로 죽이진 못할 거야. 그런데 말이지. 겁탈이란 게 그렇게 큰일인가? 내가 강제로 그분의 몸을 취한 게 그렇게 용서할 수 없는 일인 건가? 폭력을 쓰긴 했지만 정중하게 사과드릴 마음이 있어. 바닥에 엎드려서 용서를 빌 생각이 있다고. 난 대위님이 정말로 마음에 들어. 얼굴이나 몸뿐만 아니라 뻣뻣하고 목석같은 성격까지도 좋아. 단점 같은 건 보이지 않아. 정말로 완벽해. 맹인인 것쯤 아무렇지도 않지. 그가 앞을 볼 수 없다는 건 조금의 흠도 되지 않아. 그렇게 완벽한데 어떻게 그게 문제가 되겠어?”
“……으…… 흐…….”
“그분이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하군. 남은 음식과 집 안의 장식들을 그대로 두라고 말했지만 아마 정리하고 있을 거야. 사랑스럽지 않나? 무엇이든 혼자서 하고 본단 말이야.”
자코모는 더 이상 신음하지 않았다. 그는 피로 축축하게 젖은 옷을 수의처럼 입고 눈을 감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고 숨도 쉬지 않았다.
조반니는 자코모의 눈꺼풀을 벌려 보곤 그의 턱 아래에 손을 댔다. 맥박이 뛰지 않자 코와 입에 손을 대 확인했다. 숨이 끊어진 것이 확실하자 부엌 옆의 뒷문으로 향하며 인사했다.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군. 그럼 잘 가라고. 짧은 생이었지만 의미가 있었길 바라지.”
잠긴 뒷문을 열고 나간 조반니는 큰 거리로 나가지 않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휘파람을 불며 걷던 그는 놀랍게도 골목을 통해서만 로사티 거리로 들어섰다. 마차로도 꽤 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인 데다 길눈이 어두운 사람은 도중에 목적지를 잃어버릴 정도로 복잡하게 엉킨 골목이었으나 조반니는 손쉽게 로사티 3번가로 들어섰다. 옷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고 나올 때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에 옷매무새를 정돈할 필요 없이 하숙집 안으로 들어갔다.
2층으로 올라가니 로미오와 그라나 부인은 집 안을 치우고 있었고 엔초는 장난감 말을 타고 돌아다니며 놀고 있었다.
“선생님이십니까?”
발소리를 내며 문 앞에 서자 로미오가 접시를 닦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조반니는 로미오의 얼굴을 본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문간에 기대어 섰다.
“네. 말씀드렸던 대로 협회의 모임이 일찍 끝났습니다.”
조반니는 접시를 옮기는 로미오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가 마음에 든다고 자코모에게 말로 고백했기 때문인지 로미오의 뒷모습이 평소보다 더한 만족감을 가져다줬다.
“정리가 거의 마무리되었으니 올라가서 주무십시오. 오늘 하루 음식 준비부터 모임 참석까지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로미오가 집 안을 걸어 다니는 것이 보기 좋아 조반니는 흐뭇하게 웃으며 그의 뒷모습을 좇았다. 로미오의 고상한 걸음걸이가 자코모를 살해해야만 했던 자신의 난처한 처지를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엔초가 신이 났군요. 당분간은 저 말을 계속 타고 다니겠어요. 제법 말을 타듯이 잘 갖고 노네요.”
엔초 쪽은 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한 조반니는 로미오의 뒷모습만 쳐다봤다. 정확히는 엉덩이와 다리를 훑었다.
“이름을 지어 주기 위해 이런저런 이름을 붙여 보기에 몇 가지 추천해 줬습니다. 진작에 장난감을 사 줬어야 했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엔초가 저렇게 좋아하니 다행입니다. 이리 주세요. 정리하는 것을 도와드리지요.”
집을 모두 치우고 남은 음식들을 정리하고 나자 그라나 부인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조반니도 잠자리에 들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밤 되세요, 대위님. 엔초도 잘 자렴.”
“선생님께서도 편안한 밤 되십시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선생님!”
그러나 3층으로 올라간 조반니는 침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잠든 척하기 위해 아주 작은 촛불 하나를 켠 그는 거실 의자에 앉았다. 잘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허리를 세우고 앉아 종이와 펜을 가져와 그림을 그렸다.
아래층에선 곧 불이 꺼지고 로미오와 엔초가 잠자리에 들었다.
피에트로의 방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뒤척이지 않고 잠을 청했는데 로미오는 방에 들어간 엔초가 장난감 말을 갖고 노는 소리를 들었다. 침대 누워서 갖고 노는 것인지 바닥에 몇 번인가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혼자 말 흉내를 내며 놀던 엔초는 잠시 후 조용해졌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로미오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돌아누웠다. 피에트로가 죽은 이후 밤마다 어렴풋한 잠에 빠졌다가 깨기를 반복하는 것이 버릇이 됐기 때문에 오늘도 평소처럼 여러 번 몸을 뒤척이다 얕은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깬 것은 세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옆으로 누워 벽 가까이 이마를 댄 자세로 잠들어 있던 로미오는 캄캄한 방 안에서 눈을 떴다. 잠에서 막 깬 직후였지만 방 안에 퍼져 있는 기묘한 냄새에 절로 숨을 참게 됐다.
뭔가가 타는 냄새였다.
코 속 깊이 공기를 들이마셔 다시 한번 확인할 필요 없었다. 분명 매캐한 탄내였다. 방문을 돌아본 로미오는 의심을 거듭하며 냄새를 재차 확인하지 않고 바로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잠이 달아나자 문밖의 섬뜩한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나무 바닥이 불에 타는 소리였다.
방문을 열어젖히자 집 안의 불을 모두 끄고 잠들었음에도 눈앞이 밝게 보였다.
화재였다. 집 안에 불이 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리의 근원은 천장이었는데 머리 위에서 희끗희끗한 불덩어리가 보였다. 마른 나뭇가지나 풀을 모아 불을 피울 때 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타닥, 타닥 나무 조각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천장이 타들어 가고 있음을 깨달은 로미오는 삽시간에 눈빛이 달라졌다.
“엔초!”
즉시 큰 소리로 외친 로미오는 엔초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일어나! 어서, 엔초!”
침대로 다가가 더듬자 누워 있는 엔초가 만져졌다. 어깨를 흔들어 깨우니 엔초는 웅얼대며 뒤척거렸다. 엔초를 안아 옆구리에 끼고 집 밖으로 뛰어나가자 층계에도 지독한 탄내가 퍼져 있었다.
“으응… 무슨 일이야?”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그라나 부인을 깨워!”
로미오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눈을 비비는 엔초를 얼른 계단 아래로 내려보냈다.
“어서! 시간이 없어!”
로미오의 급박한 고함 소리에 정신을 차린 엔초는 층계에 떠도는 희뿌연 연기에 겁먹은 얼굴이 됐다. 집 안을 보니 천장에 불이 붙어 있었다.
“선생님!”
계단을 올라가며 조반니를 부른 로미오는 3층에 올라가 본 적이 많지 않았지만 구조가 2층과 같았기에 익숙하게 조반니의 집 문을 찾았다.
“선생님! 집 안에 불이……!”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조반니의 집 안에서 더 거센 불길 소리가 들려와 뒤로 물러섰다. 눈앞에 불덩어리로 추정되는 밝은 빛이 커다랗게 보였고 아래층보다 더한 열기가 느껴졌다. 벽이나 천장이 아닌 바닥이었다. 팔로 얼굴을 가리며 숨을 참게 될 정도였다.
짧은 판단이었지만 이곳 바닥에서 시작된 불이 아래층의 천장을 타고 번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계십니까, 선생님!”
손을 허공에 내젓자 손끝에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가 만져졌다. 눈앞이 밝았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해 불이 있는 방향이 분간되지 않았다.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었으나 로미오는 벽을 더듬어 집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의 방향을 찾지 못해 다시 빠져나올 수 없을지도 몰랐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불길이 번지는 소리가 바로 세 걸음 옆에서 들려왔고 재 가루가 날려 얼굴에 붙는 게 느껴졌다.
“선생님! 집에 불이 났습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집 안의 가구의 위치를 모르는 데다 조반니가 있는 방의 위치도 알 수 없었다. 눈이 보이는 사람도 겁을 먹을 일이었지만 로미오는 입구에서 멀어져 거침없이 집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벽을 더듬다가 문고리가 만져지자 일단 열었다.
“선생님! 여기 계십니까?”
방구석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등 뒤에서는 열기와 불길이 일렁거리고 나무 바닥이 타는 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더듬더듬 나아가는데 잠에 취한 조반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위님?”
“불이 났으니 어서 나오십시오! 아래층은 물론 선생님의 집에도, 아……!”
다음 순간 조반니가 벌떡 몸을 일으키는 소리와 함께 그에 의해 몸이 들어 올려졌다. 로미오는 조반니가 자신을 안아 올렸음을 깨닫고 그의 어깨를 안았다.
“제 목을 꽉 잡으세요!”
자는 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반니의 얼굴에는 졸음기가 전혀 없었다. 그는 다급하게 외친 것과 달리 로미오를 안은 채 교묘하게 히죽대며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로미오의 등을 받치고 두 다리를 옆으로 안자 몸이 밀착되며 맞붙었다.
급박한 척 느긋하게 계단을 내려가니 아래층에서 그라나 부인의 놀란 목소리와 엔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우! 집에 불이 났어이!”
“나가세요, 얼른! 물건을 챙길 시간은 없습니다! 불이 계속 번지고 있어요!”
조반니가 외치자 그라나 부인이 엔초의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나갔다. 이미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연기와 집 안의 불빛을 본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하숙집 건물을 가리키며 고함을 질러 댔다.
“불이야! 불이 났어!”
“불이에요, 불! 여기 불이 났어요!”
“뭐든 상관없으니 끌 것을 가져와! 모두들 어서!”
고요한 거리에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지자 컴컴하던 집 안에 하나둘씩 양초가 켜지며 거리로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시끄러운 소란에 눈을 비비고 창밖을 내다본 사람들도 금세 정신을 차리고 각자 양동이며 그릇에 물을 받아 갖고 나왔다. 그라나 부인이 사는 1층에는 불길이 번지지 않았지만 2층과 3층에서는 연기가 끊임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물러나 계십시오, 대위님! 이쪽으로 오시면 안 됩니다!”
로미오를 먼 곳으로 대피시킨 조반니는 사람들을 도와 물을 퍼 날랐다. 로사티 3번가에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자 거리 통금 단속을 위해 근처를 지나던 공안국이 달려왔다.
“저 불길들을 잡아야 해! 이미 창 쪽은 다 타 버렸다고!”
“물을 좀 더 길어다 줘요! 남은 불길은 이쪽뿐이에요!”
사람들이 물을 길어다 하숙집 건물에 뿌렸으나 불을 단번에 끌 수는 없었다. 2층에 난 불이 간신히 잡히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은 계단 머리에서부터 바깥까지 긴 줄을 만들어 손에서 손으로 물을 옮겼다.
조반니는 집 안으로 가장 먼저 들어가 줄의 맨 앞에 서서 불길을 잡았는데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보태어지는 손이 많아지자 집 안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 있게 됐다.
“끌 것을 더 가져다주십시오! 어서요!”
몸집은 작으나 사그라지지 않고 꾸준히 타던 3층의 불이 모두 꺼진 것은 어스름하게 동이 터 올 무렵이었다. 거리에 나와 있던 사람들 중에는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연기가 서서히 걷히며 타다 만 하숙집 건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혀를 내둘렀다. 2층의 창틀까지 그을음이 번진 하숙집은 그야말로 타다 남은 모양새로 우뚝 서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멀리 물러나 있던 로미오는 한밤중에 일어난 화재에 놀라 훌쩍이는 엔초를 안아 주면서도 집 안에 남아 있을 피에트로의 유품을 떠올렸다. 다른 것은 타 버리더라도 그것들만은 무사하길 바랐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이 안타까운 웅성거림으로 번져 가자 조반니를 찾았다.
“선생님이 보이십니까? 선생님께서 밖으로 나오셨습니까?”
그라나 부인 역시 사람들을 둘러보며 조반니를 찾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불이 꺼졌다는 것 외에 집 안의 상황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도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보이지 않어이. 아직 3층에 있는 것 같어이.”
“엔초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울먹거리는 엔초를 그라나 부인에게 맡긴 로미오는 지팡이도 없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아무나 붙잡고 집 안의 상황에 대해 물으려니 그들은 불이 난 이유에 대해 저들끼리 추측하기 바빴다. 앞이 보이지 않아 손을 허공에 내저으며 하숙집이 있는 방향을 찾으려는데 누군가 덥석 손을 잡았다. 흠칫 놀라 손을 빼려는데 손을 잡은 것은 조반니였다.
“안에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조반니가 아직 집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로미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밖에 나와 계셨군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손을 놓아준 조반니는 로미오를 데리고 사람들 틈을 빠져나왔다. 공안국 간부들이 건물 안으로 줄줄이 들어가며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바닥이 무너질 위험을 우려한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떠들어 대자 로사티 거리 전체가 시장 바닥처럼 시끌시끌해졌다.
“불은 모두 껐습니다.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만 바닥과 천장이 많이 탔습니다. 집 안에 재 가루가 날리는 데다 연기가 가득해요. 남아 있는 물건들을 일일이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소실된 것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위님과 엔초의 방, 피에트로의 방까지는 불길이 번지지 않았더군요.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위독한 사람이 없다니 다행입니다. 선생님께서 혹시 다치시기라도 한 줄 알았습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그라나 부인과 엔초는 어디에 있나요? 모두 괜찮은 거지요?”
“예. 모두 무사합니다.”
로미오는 말을 하다 말고 조반니가 기침을 하자 그의 어깨를 감쌌다.
“괜찮으십니까?”
조반니는 숨을 크게 들이켜더니 다시 콜록댔다.
“불을 끄던 중에 연기를 마셨지만, 콜록…!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나 조반니는 부축을 바라는 것처럼 몸을 기댔다.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네요. 현기증도 나는 것 같고요. 목도, 흠, 아픈 것 같네요. 휴…….”
“제 어깨를 편히 잡고 팔을 두르십시오.”
연약한 척을 하기엔 지나치게 건장한 조반니였지만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커다란 몸뚱이를 로미오에게 기댔다. 너무 힘을 줘 기대니 로미오가 뒤로 밀리는 게 느껴져 요령껏 균형을 잡고 로미오에게 한 몸처럼 달라붙었다.
직접 집에 불을 내고 그 불이 난 집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자는 척했던 데다 자기 손으로 낸 그 불을 끄기 위해 가장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으니 이례적인 미친 짓을 한 셈이었지만 조반니는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대위님께선 어떻게 3층으로 올라와 절 찾으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집 안의 구조가 익숙하지 않으신 데다 바닥이 크게 타고 있어 위험했는데요. 자칫하다간 집 안에 갇히실 뻔했습니다.”
당초 계획대로였다면 로미오가 아래층에서 자신을 다급하게 부르면 연기를 한껏 마신 척 콜록대며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로미오는 불이 난 집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방까지 찾아 들어왔다.
“선생님께서 불이 난 것을 모르고 잠들어 계실 것 같아 그랬습니다. 밤중에 나가시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셔서요. 깨어 계시지만 방 안에 갇혀 있거나 연기를 마셔 쓰러져 계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번에는 그러지 마세요. 대위님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저는 제 몸 건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사람입니다. 불 같은 건 무섭지 않아요. 여의치 않았다면 다리가 부러질 것을 각오하고 창문으로 뛰어내렸을 겁니다.”
로미오의 뺨과 콧잔등에는 검댕이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이 먼지 구덩이 속에서 털 손질을 한 고양이 같단 생각에 조반니는 미소를 지었다. 진짜 고양이는 보이는 족족 발로 차 버릴 테지만 로미오가 고양이라면 늘 안고 다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로미오가 위층으로 자신을 찾으러 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정말로 겁이 없고 사랑스러웠다.
“제가 3층으로 올라가 선생님을 찾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선생님도 그러셨을 겁니다.”
“물론이죠. 타 죽더라도 대위님을 구했을 겁니다. 불길이 대수인가요? 대위님이 방 안에 갇혀 계셨다면 맨손으로 문을 뜯어냈을 겁니다.”
조반니는 마침 절묘하게 주머니에 들어 있던 손수건을 꺼내 로미오의 콧잔등을 닦아 주었다.
“말하자면 대위님께서 제 은인인 셈이군요. 감동했습니다. 저를 구하기 위해 불이 난 집 안으로 들어오시다니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으면 좋을까요?”
얼굴에 갑자기 손이 닿으니 로미오는 직접 닦으려는 듯 손수건을 가져가려고 했다.
“아닙니다. 은혜라고 하실 것까지는…….”
조반니는 로미오가 손수건을 가져가기 전에 재빨리 코를 닦아 준 뒤 흰 뺨에 묻은 검댕은 귀여우니 내버려 두기로 하고 손수건을 치웠다.
“그건 그렇고 집이 저렇게 타 버려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복구가 되는 동안 당분간 다른 곳에 거처를 마련해야 할 것 같네요. 혹시 엔초와 함께 마땅히 머물 만한 곳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당장 생각나는 곳은 없습니다.”
마땅한 수가 없는 로미오는 하숙집이 있는 방향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검은 망토의 사내가 생각났다. 그자가 거처를 옮긴 자신을 따라올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 짧은 고민을 한 끝에 여관에 가기로 마음먹고 엔초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봤다.
“우선 날이 밝는 대로 집 안에 남은 물건들 중 쓸 만한 것들을 가지고 나와야겠습니다.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물건들만 챙겨 당분간 엔초와 근처의 여관에서 지낼 겁니다.”
“세상에. 여관이라고요? 안 되지요, 안 됩니다. 제가 잘못 들은 거라면 좋겠군요. 여관이라니!”
조반니가 차마 눈 뜨고 못 들어줄 무서운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크게 놀라자 로미오는 자신이 말실수라도 했나 하는 표정이 됐다.
“왜 그렇게 놀라시는 겁니까?”
“여관이란 술 취한 손님들이나 바치를 방문한 외지인들이 하룻밤 묵기 위해 드나드는 곳입니다. 낯선 여관에서 대위님을 도와줄 사람이라고는 엔초뿐인데 취객들이 행여나 해코지라도 한다면 큰일입니다. 술이 들어가면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으로 돌변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나요?”
“여관이 어떤 곳인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잠깐 머무는 것이니 괜찮을 겁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1층까지는 불이 미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여관이 여의치 않다면 그라나 부인께 신세를 질까 합니다. 집을 보수하는 동안 어차피 도움도 드려야 하니 당분간 그라나 부인과 함께 지내는 것도 방법일 겁니다.”
조반니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안겨 있는 엔초를 발견하고 개에게 명령하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라나 부인이 잠시 맡겨 놓은 것인지 엔초는 어떤 아주머니에게 안겨 울다가 조반니의 손짓에 얼른 뛰어왔다.
“형!”
뺨이 눈물로 얼룩덜룩한 엔초는 뛰어들듯이 로미오에게 안겨 훌쩍였다.
“울지 마. 많이 놀랐지?”
“흑, 윽… 무서웠어…… 흐윽…….”
로미오가 엔초의 얼굴을 더듬으며 다친 곳을 확인하는 모습에 은근한 질투를 느낀 조반니는 로미오의 품에서 엔초를 빼내 안아 올렸다. 뜻하지 않게 두 알피에리 형제를 번갈아 안게 된 조반니는 로미오가 들을 수 있도록 엔초의 등을 소리 내 토닥였다.
“저런, 많이 무서웠나 보구나.”
엔초는 번쩍 안아 올리기에 제법 무겁고 컸지만 조반니는 한 팔로 엔초의 엉덩이를 받쳐 편하게 안았다. 흐느끼는 소리가 성가셨지만 상냥하게 눈물까지 닦아 줬다.
“제게 좋은 대안이 있습니다. 하숙집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제 3층 저택에 머무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직 처분하지 않아 저택이 그대로 있습니다.”
“아니요. 저희는 여관에서 지내도 괜찮습니다.”
로미오의 거절을 예상했던 조반니는 기다렸단 듯이 엔초에게 권했다.
“어때, 엔초? 머물 곳이 마땅하지 않으면 당분간 함께 살겠어? 내 저택에는 실내 정원과 서재는 물론 온갖 재밋거리가 가득한 지하실도 있단다. 아주 근사한 저택이지. 네가 머문다고 하면 커다란 방을 내어 줄게. 장난감을 보관할 수 있는 방도 따로 마련해 줄게. 두말하면 입 아픈 이야기지만 여관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편할 거야.”
조반니를 껴안고 있던 엔초는 고개를 떼고 그와 얼굴을 마주 봤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머리를 끄덕이자 조반니는 가엾다는 듯이 엔초를 쓰다듬었다.
“그래. 어서 우리 집으로 가자꾸나.”
그때 집 안에서 공안국 간부들이 나왔다. 두 사람에게 다가온 그들은 검게 그을린 얼굴로 설명했다.
“불은 3층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3층에 사시는 분이 어느 분이십니까?”
“접니다.”
화재의 원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간부들은 시원찮은 표정이었다. 바닥이 심하게 탄 데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아 집 안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힘들었다.
“현재 내부를 조사 중입니다. 양탄자에서 불이 시작된 것으로 파악되나 화재의 원인은 찾지 못했습니다. 붕괴 위험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조사가 끝날 때까지 당분간 거처를 옮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조반니는 일이 척척 맞아떨어질 때 흔히 짓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득의양양하면서도 자신만만하고, 동시에 여유 넘치는 미치광이 같은 표정이었다. 불이 난 집 안에 누워 로미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만을 기다렸던 그 순간에도 그는 지금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원하는 것을 손에 완전히 넣어야만 만족할 광인의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