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13. 시체를 사랑한 의사 (13/30)

13. 시체를 사랑한 의사

“혹시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없었어이. 정말로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우… 요 며칠간 왜 자꾸 안 좋은 일들이 벌어지는 건지 나도 알 턱이 없다우.”

“현재로서 목격자는 없습니다. 간부들이 로사티 거리 일대를 탐문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범인을 잡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라나 부인은 물에 적신 수건으로 로미오의 얼굴을 닦아 주며 혀를 찼다. 파리한 낯빛으로 눈을 감고 있는 로미오는 목과 이마 전체가 땀에 젖어 있었고 턱과 뺨 곳곳에 멍이 들어 있었다. 머리엔 피를 흘린 흔적이 있었고 손목에는 줄에 묶인 자국이 있었다. 이마에 열이 끓고 있었지만 손발은 찼고 숨소리도 미약했다. 그라나 부인의 등 뒤에 서 있는 엔초는 겁에 질려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티모테오는 로미오가 로사티 거리의 어느 여관 골목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고 설명하며 무언가에 눌린 자국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직물로 짠 것으로 추정되는 그것은 시장에서 흔히 상인들이 쓰는 자루와 유사해 보였는데 손목의 자국으로 보아 손이 묶인 채 구타를 당했을 것으로 짐작됐다.

의사가 다녀가고 나자 로미오는 팔꿈치 뼈의 골절로 인해 오른팔 전체에 부목을 대게 됐는데 의사는 팔꿈치 외에 다친 곳은 없다고 이야기하며 내일 아침의 왕진을 약속했다. 왕진을 거절한 것은 그라나 부인이었다.

“됐다우. 이 집에 의사가 있어서 괜찮어이.”

그라나 부인의 그 말 덕택에 조반니가 이 하숙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티모테오는 오늘 저녁 갈고리 고양이 술집에서 조반니와 로미오를 봤을 때만큼이나 기묘한 표정이 됐으나 자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설명을 이어 갔다.

“누군가에게 기습적으로 공격을 당해 골목 안으로 끌려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 무슨 이유로 공격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며 현장에서 칼이 발견된 점으로 미뤄 살해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거기까지 말했을 때 엔초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흡, 흐윽…….”

티모테오는 말하는 것을 멈추고 엔초를 내려다봤다. 엔초가 무서울 정도로 로미오와 똑같이 생겨 놀랐던 티모테오는 로미오에게 이렇게 어린 남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사안이 중하기는 하나 울고 있는 아이를 무시하고 계속 설명할 만큼 급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적당히 말을 줄였다.

“발견 장소 주변을 계속 탐문하겠지만 직접 대위님께 당시의 정황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겁니다.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저희는 내일 다시 오도록 하죠.”

엔초는 울먹이며 침대에 누워 있는 로미오를 내려다봤다. 로미오가 왜, 누군가에게 이렇게 맞은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앞도 보지 못하는 로미오를 멍이 들도록 때린 자의 존재가 공포스러웠다. 이러다 로미오가 죽는 것은 아닐지 몸이 떨릴 정도로 무서웠다.

공안국 간부들이 돌아가고 나자 엔초는 그라나 부인을 껴안고 한참을 훌쩍댔다. 한 팔로는 엔초를 안고 한 손으로는 로미오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주는 그라나 부인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좋지 못한 일들이 잇달아 벌어지는 탓에 그녀는 마음을 놓지 못했다.

엔초는 그라나 부인의 옷깃을 축축하게 적시고 나서야 눈과 코가 붉어진 채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로미오 형이, 흐윽…… 괜찮을까요?”

“괜찮어이. 걱정하지 말어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겁먹은 눈으로 로미오를 보던 엔초는 로미오의 웃옷에 난 이상한 자국을 발견했다. 희고 끈적한 무언가가 말라붙은 자국 같았는데 겨드랑이 바로 아래, 팔뚝과 허리 위쪽에 난 그 자국은 옷에 제멋대로 튀어서 만들어진 자국 같았다.

* * *

창 너머에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손끝을 더듬자 만져지는 것은 이불이었다. 왼쪽 어깨 부근에서 곤한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뜨는데 팔에 닿아 있는 것이 사람의 이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어깨와 팔 전체에 견딜 수 없을 만큼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윽…….”

옆에서 들려오는 것이 엔초의 숨소리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는 분명 엔초의 것이었다. 방 안에서 나는 냄새도 익숙했다. 이곳은 로사티 3번가의 하숙집이었다.

돌렸던 고개를 바로 하자 등이 땀으로 젖어 있는 게 느껴졌다. 이마와 목덜미에도 식은땀이 흘러 있었다. 이마에 놓여 있던 무언가가 옆으로 떨어졌는데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인 것 같았다. 그걸 줍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는데 오른쪽 팔꿈치에 딱딱한 부목이 대어져 있었다.

가장 심한 것은 머리 전체의 두통이었다. 뺨을 움직이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정도로 통증이 어마어마해 평범하게 숨을 쉬는 것이 고역이었다. 침대에 닿아 있는 등과 다리는 감각이 없는 것처럼 저렸고 몸에 거대한 추를 단 것처럼 전신이 무거웠다. 짝을 잘못 맞춘 목각 인형처럼 온몸의 뼈와 근육이 어긋나 움직이는 것 같았다. 척추와 꼬리뼈 부근의 통증도 심해 팔꿈치와 함께 엉덩이뼈가 부러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크게 심호흡을 하자 목덜미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랫배에선 복통이 느껴졌고 이불을 덮고 있었지만 오한이 일었다.

지난밤 일어난 일을 떠올린 로미오는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온 것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스스로 걸어서 이곳까지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자신을 발견했다면 발견했을 때 어떤 상태였을까. 기억을 잃은 것은 언제이며 자신을 발견한 이는 어떤 현장을 목격했을까.

몸의 통증이 선명한 만큼 전날 밤 벌어진 일들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정신을 가다듬고 어제 일어난 일을 순서대로 정리하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자신은 또 한 번 겁탈을 당했다.

머리에 씌워진 자루가 바닥에 끌리며 나는 소리, 등 뒤에서 들려오던 메스꺼운 신음 소리, 걷어차인 턱과 뺨이 부어오를 때 얼굴 전체에 느껴지는 후덥지근한 열기가 자신을 어젯밤의 그 뒷골목으로 데려가는 것 같아 생각을 멈췄다.

검은 망토의 사내가 하숙집이 아닌 골목에서 습격을 감행한 것이 아량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는 이미 자신의 집을 찾아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없는 데다 침입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아, 하…….”

갈비뼈의 통증 때문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데다 현기증이 일어 이마를 감싸는데 다리 사이로 축축한 액이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끈적한 그것은 검은 망토 사내의 체액이었다. 덩어리져 흘러나온 것이 속옷과 엉덩이를 적시는 느낌에 견딜 수 없는 구역감이 치밀었다.

몸 안쪽에서부터 피부 바깥에 이르기까지 몸이 오염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잃은 동안 자신의 몸 안에서 벌어진 일들이 역겨웠다. 허벅지 사이의 통증도 역겨웠고 그 역겨움을 견디고 있는 이 상황도 역겨웠다. 주먹을 움켜쥐며 등을 웅크리자 온몸에 경련이 일었다.

겁탈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 몸을 피부부터 전부 벗겨내 버리고 싶었다. 참을 수 없는 좌절감과 분노가 피부 위에 얇은 막처럼 둘러져 있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타인의 정욕을 해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스로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몸이 이름과 얼굴을 알지 못하는 낯선 사내에게 육체적 만족감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연약한 존재로 전락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키는데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셨습니까?”

갑작스러운 기척에 반사적으로 칼을 찾기 위해 옷 안으로 손을 넣었으나 곧 다시 뺐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조반니였다.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적어도 오늘 하루 동안은 계속 누워 계시는 게 좋습니다.”

로미오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눈을 굳게 감았다. 허벅지 사이로 뜨뜻한 정액이 미끄러져 내리는 게 느껴졌다. 앉아 있기 힘들 정도로 뒤가 쓰라렸다.

“오른쪽 팔꿈치는 제가 간밤에 다시 처치를 해 드렸습니다. 부러진 뼈를 위해 약초를 발라 두었으니 되도록 오른팔은 움직이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며칠 안정을 취한 뒤 다시 살펴봐 드리겠습니다.”

조반니가 접시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죽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죽이 든 접시를 들고 있었다.

“……혹시 어제 제가…….”

애써 목소리를 내며 물었지만 입을 뗀 그 찰나에도 허벅지 사이가 끊어질 것처럼 아렸다.

“……어떻게 이곳으로 돌아왔는지 아십니까?”

“공안국이 대위님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저는 의사 협회의 모임에 참석해 있어 밤늦게 돌아와 그라나 부인에게 사정을 전해 들었습니다.”

허리를 똑바로 펴 자세를 바꾸자 조반니가 어깨와 팔을 부축했다. 손이 닿으니 몸이 경직되며 심장이 빨리 뛰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누워 있는 엔초를 더듬었다. 팔과 다리를 만지고 뺨을 손으로 감싸니 잠들어 있는 엔초에게서는 고요함이 느껴졌다.

앉아 있는 것이 힘들어 등을 구부정하게 굽히고 고개를 숙였지만 이명이 들리며 손안에 땀이 흥건하게 묻어 나왔다.

다리 사이의 축축한 감각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을 가져다줬다. 살아서 이런 일을 감당하게 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연이어 세 번이나 벌어졌다.

엉덩이뼈의 통증이 심해 앉아 있는 것이 고문처럼 느껴졌다.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조차 살갗을 긁어내리는 것처럼 아팠다. 겁탈당할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지금 스스로의 몸이 전시된 기분이었다.

옷을 전부 갖춰 입은 상태로 발견이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너무도 비참했다. 당장 이 옷을 벗어 버리고 싶었다.

“우초 경사님께서 말하길 손목에 포박당한 흔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위님을 공격한 자에 대한 탐문은 지난밤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뤄지고 있을 겁니다. 이만큼 다치신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혹시 당시 정황이 기억나십니까?”

“……기억나지 않습니다.”

“전혀 말인가요? 하나도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예.”

턱마저 부러진 것처럼 아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고 복부의 통증은 숨을 내뱉을 때마다 심해졌다.

“저는 엔초가 화실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며 우는 데다 대위님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하숙집에 남아 있었던 참입니다. 이 죽은 그라나 부인께서 끓여 주신 겁니다. 아래층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계신답니다. 기운을 차리시려면 식사부터 하셔야 하니 어서 드시지요.”

“……사양하겠습니다. 생각 없습니다.”

“그러면 사과를 드시겠습니까?”

로미오는 모르고 있었지만 침대 옆 탁자에는 그가 일어나기 전부터 사과 한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조반니가 오늘 아침 시장에서 사 온 것이었는데 바구니 가득 빨갛게 잘 익은 먹음직스러운 사과가 담겨 있었다.

“아니요…… 팔의 처치도 해 주셨고 다친 곳도 없으니 선생님께서는 그만 가 보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잠들어 계셔서 팔 외에의 다른 곳을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몸 상태를 봐 드릴 테니 누워 보세요.”

“괜찮습니다, 하아…… 정말, 괜찮습니다…….”

가슴의 통증 때문에 숨이 찬 로미오는 큰 숨을 내쉬었다. 조반니는 로미오가 통증을 참기 위해 눈을 질끈 감자 슬그머니 웃으며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좋은 일이 있는 것처럼 피식대는 그는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우초 경사님께서 뒤늦게 현장을 발견하신 데다 대위님께서도 정신을 잃고 계셔서 당시 상황에 대한 단서가 부족합니다. 숨겨진 상처가 있을지도 모르니 봐 드리겠습니다. 뒤늦게 골절이나 부상이 발견되면 치료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조반니는 수척해진 로미오의 얼굴을 뜯어보며 감회에 잠겼다. 걱정하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간밤에 로미오를 겁탈하고 이렇게 얼굴을 보고 있으니 재미있지 않을 수 없었다. 옷을 저렇게 갖춰 입어 봤자 어젯밤에 본 그의 나체는 자신이 머릿속에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로미오의 배 속에 자신의 정액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자 오늘 하루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거 같았다. 자신의 성기에서 쏟아져 나온 그 지저분한 것들이 로미오의 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니 만약 로미오가 사내가 아니었더라면 자신의 아이를 가졌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기괴한 상상이지만 둥그스름하게 배가 부푼 로미오를 떠올리자 그가 그 상태로 옷을 전부 벗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모습이 상상됐다. 소년같이 발그스름한 산홋빛 성기를 내놓은 채 부풀어 오른 배를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로미오라…….

저도 모르게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와 입을 다문 조반니는 로미오의 흰 엉덩이를 상상하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숨 쉬는 게 불편하신 것으로 보아 다른 쪽에도 골절이 있을지 모릅니다. 누워 계시면 살펴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지 마시고 옷을 벗고 여기에 누워 보세요.”

“……정말 괜찮습니다. 살펴봐 주시지 않으셔도 되니 염려 놓으십시오.”

“자꾸만 걱정이 돼서 그럽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손대지 마십시오!”

조반니가 어깨를 감싼 순간 로미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손을 쳐 냈다. 속옷 안이 정액으로 흥건해 있어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데다 조반니의 손이 몸에 닿자 전신이 급속도로 뻣뻣하게 굳으며 공포감이 몰려들었다. 좋은 의도라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건드리려는 조반니의 시도에 저도 모르게 적대감을 품게 됐다.

“하아, 하…… 하아…….”

목청을 높여 큰 소리를 내자 흉부의 압박감이 심해졌다. 살을 후려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세게 조반니의 손을 쳐 낸 로미오는 자신이 쳐 낸 게 조반니의 손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얼굴이 굳어졌다.

눈을 크게 뜬 조반니는 놀란 것도 잠시 한쪽 입꼬리를 씰룩댔지만, 조반니의 표정을 볼 수 없는 로미오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뒤늦게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하아…….”

조반니는 짧고 빠르게 들리는 로미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눈을 빤히 봤다. 그는 가슴께에 비정상적인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사죄드리겠습니다, 하…… 손은 괜찮으십니까?”

로미오가 어깨를 웅크리고 머리를 숙이자 조반니는 고개를 쭉 빼고 그의 얼굴 밑에서 눈을 올려다봤다. 늘 곧고 침착하던 로미오의 눈빛 속에는 공포와 긴장이 어려 있었다.

두 번은 버텼지만 세 번은 아니라는 건가? 아니면 역시 눈이 완전히 먼 상태에서 겁탈을 당했기 때문인가?

지난밤의 겁탈이 로미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 같자 기분이 좋아졌다. 검은 망토의 사내가 아니라 조반니로서 로미오의 이런 표정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간밤에 그렇게 사정을 하고도 로미오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성기 끝이 간지러워지며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범해질 때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로미오가 자신을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젯밤에 그렇게 쑤셔 댔으니 한동안은 뒤가 계속 벌어져 있을 게 분명했다.

“몸에 손을 억지로 대려 해서 죄송합니다. 어제 일로 많이 놀라셨나 보군요.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저도 그라나 부인께 이야기를 듣고 몹시 놀랐습니다.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렸어야 했는데 제 실수였습니다. 도대체 누가 대위님께 그런 짓을 한 것인지…….”

조반니는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로미오의 옆에 누워 있는 엔초의 발을 슥 밀어낸 그는 로미오에게 가까이 붙어 앉아 침대 밑에서 고급스럽게 포장된 상자를 꺼냈다. 바로 오늘 아침에 바치에서 가장 유명한 재단사에게서 받아 온 것이었다.

“이 소리가 들리십니까?”

상자를 흔들자 로미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쫓아 고개를 움직였다. 그는 지금 그 어떤 것에도 흥미가 없어 보였고 조반니는 그 사실을 알았지만 모른 척 무시했다.

“제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상자 안에는 새 옷이 들어 있습니다. 전부터 대위님께 드리고자 마음먹고 있었는데 때를 놓쳐 이제야 드리게 됐네요. 일전에 제가 이사를 온 기념으로 저녁 식사를 준비했을 때 드리려던 선물입니다. 새 이웃이 된 것을 축하하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죠.”

로미오는 계속해서 이상한 숨소리를 냈다. 조반니는 그 숨소리가 어젯밤 들은 신음 소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침대 옆에 세워 두었던 새 지팡이도 내밀었다.

“여기 지팡이도 있습니다. 대위님께서 쓰시던 지팡이가 오래돼 보여 새것을 주문했습니다. 전에 쓰던 지팡이와 같은 높이의 것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눈대중으로 한 것이라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지팡이 역시 고급스러운 포장지에 둘둘 말려 있었는데 손잡이에 리본까지 정성스레 묶여 있었다. 보통 때 같았다면 얼굴도 모르는 자에게 습격을 받은 로미오의 마음을 헤아리는 척하며 위로하는 연기를 했을 조반니였지만 오늘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로미오가 선물을 받을 상황이든 아니든 신경쓰지 않고 무작정 선물을 들이밀었다.

“받아 주십시오, 대위님.”

만약 로미오가 다 낫는다면 그와 함께 바치 근방의 소도시로 놀러 갈 생각이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에게는 지루하지만 로미오에게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굳이 근사한 식사 한 끼를 같이할 필요는 없었다. 함께 식료품점에 들러 필요한 것을 사거나 시장에서 열리는 경매를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의미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여도 상관없으니 로미오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우초 경사님이 말씀하시길 골목에서 지팡이가 부러진 상태로 발견이 됐다는군요. 오늘부터는 이 지팡이를 쓰세요.”

로미오는 현기증을 느끼는 듯 머리를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자신이 선물을 받을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피력하지 못하고 가슴을 감싸 쥐었다.

“하아… 하…….”

머리의 통증이 너무 심해 상황에 맞지 않게 선물을 들이미는 조반니를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을 여력도 없었고 선물이 과분하다며 거절할 여력도 없었다.

“손잡이를 한 번 잡아 보세요. 대위님께 맞을지 모르겠군요.”

지팡이의 포장지를 갈기갈기 찢은 조반니는 로미오의 손에 손잡이를 쥐여 주려다가 엔초 때문에 로미오의 옆에 앉을 수 없자 엔초를 짐짝처럼 침대에서 밀어냈다. 무릎으로 어깨를 밀어 버리니 몸집이 작은 엔초가 그대로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가슴의 통증으로 숨을 헐떡이던 로미오는 그 소리를 듣고 침대를 더듬었다.

“엔초가 떨어졌습니까?”

잠에서 깬 엔초가 바닥에 엎드린 채 어깨를 쥐며 앓는 소리를 내자 조반니는 걱정하는 척을 했다.

“불쌍하게도 간밤에 대위님을 걱정하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나 봅니다. 뒤척이다 떨어졌네요.”

“엔초를 일으켜 주십시오.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조반니가 손을 내려 엔초의 어깨를 우악스레 잡아 일으키자 잠에서 덜 깬 엔초가 질질 끌려 일어났다. 잠결에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빈 엔초는 일어나 앉아 있는 로미오를 보고 눈이 큼지막해졌다.

“형!”

와락 달려든 엔초가 로미오를 껴안자 로미오는 양팔을 벌려 엔초를 안아 주었다. 로미오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엔초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흐으윽, 흑…… 형……!”

조반니는 로미오에게 안겨 있는 것이 엔초가 아니라 자신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지루한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당장이라도 엔초의 목덜미를 잡아 로미오에게서 떼어 내고 대신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더 필요한 게 있으신지요?”

조반니는 로미오가 자신을 원하는 대로 부리거나 이용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물었다. 그가 만약 사과가 달지 않다며 바닥에 와르르 쏟아 내 바구니를 내팽개친다면 시장을 다 뒤져 가장 달고 싱싱한 사과를 다시 구해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로미오는 손으로 더듬어 엔초의 눈물을 닦아 주며 고개를 저었다.

양 뺨이 눈물로 흥건한 엔초는 로미오의 가슴팍에 대고 종알대며 지난밤에 자신이 느꼈던 두려움과 걱정을 털어놓았다. 보지 못하는 대신 소리만 들을 수 있는 로미오는 엔초에게 귀를 기울이고 이야기를 전부 들어주었다.

조반니는 두 형제의 대화가 끝날 즈음이 돼서야 로미오에게 어젯밤 의사 협회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 주었다.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제 의사 협회의 모임에 참석해 대위님의 증상에 관한 안건을 냈는데 치료 방법에 대한 많은 의견들과 그 의견들에 관한 반박들이 제시되었습니다.”

조반니는 로미오가 엔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까이 껴안자 시샘하듯 눈을 흘기며 그 모습을 쳐다봤다.

“지난달에는 체사 왕국과 프리올로 공국, 하버 왕국의 의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시력 저하를 호소하는 환자를 치료해 본 경험이 있는지를 묻고 답장을 부탁했습니다. 다행히 답신이 일찍 도착했지만 애석하게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답신을 준 예순두 명의 의사들에 따르면 약 15세경부터 시력이 차츰 떨어지는 증상을 호소한 환자의 사례를 접해 본 적이 많으나 시력 저하를 늦출 방법이나 원인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합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프리올로 공국에서 온 어느 의사의 답신입니다. 읽어 드리겠습니다.”

조반니는 사과 바구니 아래에 깔려 있던 편지들을 꺼냈다. 각 나라의 국경을 오가며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편지는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이곳에 도착해 다소 닳아 있었다.

“제가 젊은 시절 어느 귀족 어르신 댁에서 주치의로 일할 때 정원을 다듬는 정원지기 청년이 시력 저하 증상을 호소한 적이 있었습니다. 열두 살 무렵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원인 모를 증상을 경험한 그 청년은 열다섯 살이 되자 왼쪽 눈의 시력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고 이후 열여덟 살 무렵엔 아주 가까이서 보지 않고는 글을 쓰거나 읽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열네 살부터 정원지기로 일했던 그 청년은 스물다섯 살에 완전히 눈이 멀어 저택을 떠났습니다. 편지를 받고 그 청년을 수소문해 찾아본 결과 현재 그는 양쪽 눈이 완전히 실명해 낮과 밤만을 구분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망막에 문제가 생겨 기능이 위축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편지를 읽은 조반니는 나머지 편지들에 적힌 내용들을 모두 기억했기 때문에 편지를 뒤적이지 않고 바로 설명했다.

“답신의 내용을 간추린 결과 의사들이 보고한 맹인 환자들의 평균적인 시력 저하 발병 나이 대는 15세로 추정됩니다.”

로미오는 엔초의 울음이 다 그치고 나서야 대답했다.

“……제 경우와 비슷하군요. 병명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저도 그들과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모양입니다.”

“많은 환자들이 수년에 걸쳐 시력을 잃어 가다가 밝고 어두운 정도만을 구분하는 것에 이르러 더 이상 시력 저하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아마도 그럴 겁니다. 대위님께서도 현재 낮과 밤을 볼 수 있는 수준이지요?”

“예, 어둡고 밝은 정도만 알 수 있습니다.”

“답신에 적힌 환자들의 사례와 대위님의 증상이 일치하는 것 같으니 대위님의 눈 상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습니다. 두 차례 더 서신을 주고받은 뒤 다음번 의사 협회 모임에서 본격적인 치료 방법을 논의할 생각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 병원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로미오에게 안겨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엔초가 빨갛게 부은 눈으로 조반니를 돌아봤다. 코를 훌쩍거린 엔초는 울먹이며 물었다.

“……선생님께서, 흐윽… 로미오 형의 눈을 고쳐 주시는 건가요?”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할 거란다. 나 외에도 많은 의사 선생님들이 대위님께 도움을 주실 거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 테니 걱정 말렴.”

엔초가 로미오를 올려다보자 로미오는 엔초의 뺨을 감싸며 등을 안아 주었다.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고 예감하는 로미오였지만 엔초를 생각해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재판 날짜가 앞당겨져 저는 오늘 밤 재판에 참석해야 합니다. 몸이 불편하신 대위님을 위해 저녁 식사를 만들어 드리고 싶지만 죄송스럽게도 그럴 수 없게 됐네요. 재판이 끝나는 대로 곧장 올 테니 몸을 쓰지 마시고 편히 쉬세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병원에서 뵙죠.”

* * *

“재수 없는 작자 같으니라고!”

씩씩대며 옷소매를 털자 흰 석회 가루가 사방으로 날렸다.

짜증스러운 손짓으로 무릎과 허벅지를 턴 것은 키가 후리후리하게 큰 데다 깡말라 마치 기다란 짚 한 단 같아 보이는 사내였다. 입고 있는 옷은 허옇게 가루가 묻어 무척 낡아 보였다.

사내는 미남이라고 하기에 약간 모자란 얼굴이었지만 뺨의 윤곽이 뚜렷한 데다 눈매가 날렵해 눈빛이 제법 매력적이었다. 고집스럽고 말 걸기 까다로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지나가던 이들 중 몇몇은 뒤를 돌아볼 정도로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외모를 갖고 있었다. 굳이 꼽자면 콧대도 높고 숱 많은 짙은 눈썹도 꽤 잘생긴 편이었기 때문에 볼품없게 생긴 추남은 결코 아니었다.

“믿을 구석이라고는 이제 조반니뿐인데 그 자식에게 굽실거려야 한다니! 아니꼬운 그 얼굴을 보려니 벌써부터 구역질이 나는군.”

사내의 이름은 자코모 본도네로 그는 조각가였다. 조각에 필요한 대리석을 구하기 위해 아침부터 시장을 돌아다닌 그는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오늘처럼 온종일 도시를 돌아다닐 때가 많았다. 직접 채석장까지 가 대리석을 캐 바치로 실어 올 때도 있는 그는 실력은 좋지만 손님들의 주문을 가려 받는 데다 취향이 까탈스러워 늘 가난했다.

오늘도 아침부터 시장을 돌아다녔지만 남을 어르고 구슬리는 법을 모르는 고약한 성질머리 때문에 대리석 장수와 한바탕 말다툼만 하고 빈손으로 돌아가게 됐다. 부탁할 곳이라고는 이제 한 곳뿐이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바치 병원으로 향했지만 길을 걸으면서도 씨근덕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 꼬르륵대는 자신의 배에도 불평을 했다.

“빌어먹게도 배가 고프군. 이 젠장맞을 허기.”

주머니에 든 돈을 세어 보던 자코모는 병원 앞에 도착해 허옇게 가루가 묻은 옷을 한 번 더 털었다. 병원 안으로 들어간 그는 성큼성큼 걸어 조반니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복도에 걸린 그림들을 훑어보았지만 성에 차는 작품은 없었다.

조반니가 교수로 재직해 있을 때 그의 해부학 실습에 입회할 기회도 얻고 쓰다 남은 안료도 얻으며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던 자코모는 젊은 시절부터 조반니를 잘 알았는데 그때도 지금도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첫째로, 조반니는 부유한 데다 재능이 넘쳤지만 자신은 예술이 아닌 의학에 삶을 바쳤다며 조각과 그림을 단순한 취미 취급하기 일쑤였다. 으스대거나 거들먹거린 적은 없지만 가난뱅이 조각가인 자코모의 눈에는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둘째로, 조반니는 젊은 시절 자코모가 사랑했던 여인을 빼앗은 적이 있었다. 엄밀히 말해 그 여인이 조반니를 더 흠모해 그를 택한 것이지만 마침 그 여인과 잘돼 가던 찰나에 조반니가 그녀와 동침을 해 기회를 가져가 버렸으니 빼앗겼다는 말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셋째로, 조반니는 오래전에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자코모에게 모욕을 준 일이 있었다. 모욕을 당할 당시는 몰랐으나 훗날 조반니가 일부러 수치를 주기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코모는 때를 놓쳐 조반니에게 아무런 복수도 하지 못했다. 어떤 모욕이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말하는 것은 괜히 치욕감만 되새겼으므로 자코모는 씨근덕대며 생각을 멈췄다.

“죽일 놈의 석회 가루들. 털어도 털어도 도저히 떨어지지가 않는단 말이야. 빌어먹을! 이 빌어먹을 놈의 석회 가루들!”

미처 털지 못한 어깨의 석회 가루를 탁탁 털어 내던 자코모는 병원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뭔가가 바닥을 끄는 소리에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눈을 치떴다. 대체 어떤 작자가 이런 소음을 내는가 하는 표정으로 뒤를 홱 돌아보았으나 순간 어깨를 털던 손을 딱 멈췄다.

복도 끝에서 걸어오고 있는 것은 어느 노부인과 지팡이를 든 사내였다. 바닥을 지팡이로 쓸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사내는 옆에 선 노부인의 부축을 받아 걷고 있었다. 오른쪽 팔꿈치에 부목을 대고 있었고 그 부목에 감긴 붕대는 목에 걸려 있었다. 턱과 뺨에 멍이 들어 있는 데다 걸음이 온전하지 않은 것으로 봐 몸이 불편한 듯했는데 그에게 시선이 꽂힌 것은 그의 지팡이도, 불편해 보이는 걸음걸이도, 얼굴에 든 멍 때문도 아니었다.

“…….”

노부인과 사내는 자코모의 앞을 지나쳐 그대로 걸어갔으나 자코모는 입을 벌린 채 사내를 바라보았다. 눈은 커졌으며 눈썹은 이상한 모양으로 치켜 올라갔다. 한마디로 얼빠진 표정이었다.

태어나 저렇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내는 처음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게 스쳐 지나갔으나 사내의 푸른 눈과, 희고 갸름한 얼굴과, 속눈썹 그림자가 내려앉은 매끄러운 뺨을 똑똑히 봤다. 피딱지가 굳어 있지만 그림같이 우아한 입술과 곱고 윤기 흐르는 흑발도 분명 보았다. 사내는 단정한 걸음으로 걷고 있었고 병원의 뜰에 심어진 붓꽃 같은 날씬한 몸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걸음걸이가 영혼을 끌어당기듯 육중하게 느껴졌다. 한 발자국씩 내딛는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음을 뒤흔들 정도로 무겁게 느껴졌다.

길을 지나다가도 아름다운 것을 보면 발길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히곤 하는 자코모는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저도 모르게 뒤를 따라간 적이 있었다. 나이에 연연하지 않아 예순의 노인이건 열다섯 된 앳된 소녀이건 마음에 들면 그림의 대상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선선히 허락을 한 이들도 있었지만 전신상을 그리기 위해 나체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면 뺨을 때리거나 물세례를 퍼부으며 욕을 흠씬 퍼붓는 이들도 있었다.

예술에 대한 열망이 강한 나머지 여인의 나체를 보고 정욕이 아닌 예술혼을 먼저 느끼는 자코모는 아름답지 않은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고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시간을 들여 눈여겨보지 않았다.

방금 지나간 그 사내가 보는 이를 눈멀게 만들 만큼 아름다우니 넋이 나가는 게 당연했다.

“자, 잠깐, 잠…….”

바보처럼 말을 더듬는 사이 지팡이를 짚은 사내는 노부인과 함께 이미 저 멀리 걸어가 복도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여인도 아닌 사내를 보고 이렇게까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자코모는 뛰어가 그를 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사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바치를 이 잡듯 뒤져도 저런 사내는 찾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주 오래전에 열셋 먹은 어느 소년에게 특별한 영감을 느껴 조각의 대상이 되어 줄 것을 부탁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이후 같은 사내를 보고 이런 강렬한 열망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헛것을 보았나? 아니야. 헛것이 아니다. 저 지팡이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것을 보면 헛것이 아니야.’

자코모는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복도 모퉁이 앞에 서서 고개를 내밀자 저만치에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여기서 놓치면 그를 그릴 기회는커녕 이름조차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을 가다듬은 자코모는 헛숨을 들이켜며 외쳤다.

“잠깐! 잠깐 기다려 주시오! 할 말이 있소!”

복도에 목소리가 울리자 사내가 뒤를 돌아봤다. 노부인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인지 사내를 계속 부축하려다가 그가 뒤를 돌아보자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자코모는 한달음에 달려가 사내의 앞에 섰으나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빛에 하려던 말을 삼켰다.

“그, 저…….”

빛을 비추면 청금석처럼 빛날 것 같은 파란 눈과 소년 같은 우윳빛 뺨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이는 스물다섯 혹은 여섯쯤 되어 보였는데 원숙한 여인들이 가질 법한 매혹적이고 깊은 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맑은 빛을 띠는 눈과 달리 얼굴에선 생기가 아니라 음울함이 느껴졌다. 고요히 가라앉은 눈동자 속에는 어둡고 서늘한 고독이 초상처럼 새겨져 있었다. 오래전 어린 딸을 잃은 어느 여인을 그리며 그녀의 눈빛 속에서 느꼈던 고통과 흡사해 보였다. 그 여인은 딸의 생김새를 설명하며 자신의 품에 딸이 안겨 있는 모습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깃과 섶을 달지 않은 작은 옷과 신발을 남기고 영원히 떠난 딸에 대해 여인은 죽어서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했다.

사내에게서 심성이 여린 이들의 눈을 볼 때 흔히 느낄 수 있는 연약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병색이 짙은 데다 부상을 입고 있었지만 본능적으로 용병이나 군인일 것이라고 생각됐다. 가녀리고 섬세한 외모와 달리 자세가 곧았고 팔이나 어깨의 움직임에서 절도 있는 동작의 여파가 느껴졌다. 낯선 자에 대한 적대감이 표정에 드러났지만 겁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부상을 입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처, 처음 뵙겠소. 내 이름은 자코모 본도네고 조각가요. 이상한 사람이 아니니 수상하게 여길 것 없소.”

어린 시절 밤만 되면 그림 액자 밖으로 빠져나오는 어느 기이하고 아름다운 여인에 관한 책을 읽은 기억이 있었다. 이 사내가 병원 어딘가에 걸린 그림 속에서 튀어나와 마주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빼앗고 홀연히 다시 그림 속으로 사라지는 신비스러운 존재가 아니라면 분명 인간일 것이다.

“괜찮다면 내게 이름을 가르쳐 주겠소?”

깐깐한 성질머리를 누르고 점잖게 목소리를 가다듬은 자코모는 꿀꺽 소리가 나도록 침을 삼켰다.

그림 같은 사내, 로미오는 자코모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고자 했으나 시선이 닿은 곳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등 뒤에 있는 벽이었다.

자코모는 로미오의 파란 눈동자가 자신의 눈이 아닌 엉뚱한 곳을 향하자 충격에 휩싸였다. 아름답다고만 생각한 그의 두 눈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허공에 머무르고 있었다.

“……앞을 보지 못하오?”

낯선 자에 의해 멈춰 세워졌고 이름을 가르쳐 달라는 청을 받았으며 맹인이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로미오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눈동자를 움직여 자코모의 미간 언저리에 시선을 고정한 그는 차분히 대답했다.

“저는 당신을 오늘 여기에서 처음 보았고 당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제게 이름을 묻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미오의 목소리가 상상만큼이나 듣기 좋자 자코모는 다시 한번 침을 삼켰다. 그러나 곧바로 입을 딱 다물며 변명했다.

“무, 무례를 용서해 주시오. 말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 예의도 잊고 결례를 범했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마음이 급하여, 아니, 어찌 됐든 이름이라도 알아야 추후에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하지만 이렇게 이름을 대뜸 묻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라 우려는 했소만…….”

로미오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주절거리던 자코모는 본심을 털어놨다.

“내게 조각의 대상이 되어 줄 수 있겠소? 그러니까 내 말은…….”

로미오는 대답 대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고개를 숙인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또 그러이?”

그라나 부인이 어깨를 감싸자 로미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자코모는 그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그의 손목에 남아 있는 섬뜩한 줄 자국을 보고 깜짝 놀라 손을 뺐다. 강제로 묶은 듯한 그 줄 자국은 어울리지 않는 손목 장식처럼 로미오의 흰 손목에 기이하게 남아 있었다.

“어디가 불편한 것이오?”

자코모는 로미오의 표정을 살피려 했지만 그가 자신보다 머리 하나 가까이 작아 얼굴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로미오는 힘들게 숨을 삼키더니 팔로 배를 감쌌다. 자코모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린다고 생각한 그는 핏기가 가신 입술을 물며 대꾸했다.

“……저는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다친 오른쪽 팔과 손목의 자국 때문에 로미오가 정말로 용병쯤 된다고 생각한 자코모는 서둘러 말했다.

“그렇다면 이름만이라도 알려 주겠소?”

그때 복도 끝에서 문이 열렸다. 병실 안에서 조반니의 목소리가 들리자 자코모는 서둘러 몸을 돌리고 우연히 복도를 지나는 척 멀어졌다.

“오셨군요, 대위님.”

복도 끝 병실에서 고개를 내민 조반니가 로미오를 향해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병실 안에는 다른 의사들도 있었는데 다들 몹시 바빴다.

“들어오시지요. 그라나 부인께서도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조반니는 다른 의사들처럼 발목까지 오는 긴 망토 모양의 흰옷을 입고 있었다. 허리와 옷소매가 조여진 그 옷은 별다른 장식이 없는 데다 멋을 내기 위해 입는 옷이 아니었지만 조반니에게는 직접 재단한 옷처럼 근사하게 잘 어울렸다. 키가 작달막한 땅딸보 의사들과 달리 큰 키와 준수한 외모 덕에 꼭 혼자서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조반니가 의사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 영락없는 예술가처럼 보였던 그는 지금 완벽한 의사 같아 보였다.

“무리하게 여기까지 오시게 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되도록 서둘러 대위님의 상태를 보는 것이 중요해 다른 날로 미룰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색이 나쁘군요. 현기증이 느껴지십니까?”

“예… 앉아서 쉴 수 있을까요?”

“그럼요. 팔을 잡아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조반니는 로미오를 부축해 안으로 들여보내다가 복도 저 멀리에 있는 자코모를 발견했다. 자코모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더니 멋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오랜만이야, 자코모. 여긴 어쩐 일이지?”

가까이 다가온 자코모는 뺨을 긁으며 쭈뼛댔다. 뭔가 부탁할 일이 있을 때 그는 그렇게 뺨을 긁어 댔다.

“대리석 문제로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어. 오래 걸리지 않을 텐데 시간이 있나?”

“지금은 환자가 있어 시간을 내주는 게 어렵겠는걸. 한가하다면 여기서 기다려 주지. 진찰이 끝나는 대로 다시 얘기하도록 해.”

조반니는 대답도 듣지 않고 쌩 하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말할 기회를 놓치고 혼자 복도에 남겨진 자코모는 언제 쭈뼛거렸냐는 듯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한가하다면 기다려 달라고? 마음에 안 드는 자식!’

도움을 받는 입장인 자코모가 조반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대화 도중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가 버리는 것은 차라리 다행인 일이었다. 조반니는 자신의 편의를 위해 남을 쉽게 무시했는데 오래전 그는 저녁 식사를 핑계로 벽화를 그리던 중 사다리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다른 조각가의 진찰을 거절한 일이 있었다. 급하게 의사가 필요했던 상황에서 자신의 낮잠을 우선시했던 적도 있었다.

자코모는 사람 좋은 체하는 조반니의 넉넉한 성품이 가짜라고 생각했다.

“조금 전 그 사내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지? 그보단 분명 대위라고 불렀었지. 군인이었나 보군.”

자코모는 병실 문에 걸린 조반니의 명패를 노려보았다. 병실 문에 귀를 대고 안의 대화를 엿듣는 음침한 짓을 하는 대신 휙 돌아선 그는 발소리를 크게 내며 자리를 떠났다.

* * *

“됐습니다. 눈 상태에 대해서는 세세히 기록해 두었으니 병원에 다시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검사만으로는 시력 저하의 원인을 밝힐 수 없어 오늘 기록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의사 협회에 안건을 부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사이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시력이 많이 떨어져 우려가 되긴 합니다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창가 앞의 널찍한 의자에 앉은 그라나 부인은 잠들어 있었다. 밤늦게까지 로미오를 간호한 그녀는 모자란 잠을 참지 못하고 도중에 잠이 들었다.

조반니는 여러 방법으로 로미오의 눈을 살펴봤는데 그러는 사이 의사 몇 명이 분주히 병실을 드나들었다. 그들은 로미오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조반니와 주고받았고 낯선 소리가 나는 진료 도구들로 로미오의 눈을 살펴봤다. 눕거나 앉거나 선 자세로 눈을 내어 준 로미오는 의사들이 도통 알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거나 고개를 내젓는 소리를 모두 들었다. 한 번에 다섯 명도 넘는 의사가 동시에 어깨며 턱을 붙들고 눈을 살피기도 했는데 그들에 의해 눈꺼풀과 관자놀이가 만져지는 것은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조반니는 겉옷을 벗을 필요가 없는데도 로미오에게 겉옷을 벗을 것을 요청하고 그의 몸 여기저기를 만졌다. 지난밤의 겁탈로 로미오가 예민해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을 대하듯 아주 조심스레 몸을 만졌다.

“큰 기대를 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병의 치료법을 밝혀낼 가능성보다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큽니다. 눈앞에 종종 나타난다는 검은 점은 다른 환자들의 사례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증상이라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 쉽지 않을 겁니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장담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검사가 모두 끝날 무렵 조반니는 로미오에게서 그가 거처를 옮기려 한다는 사실을 듣게 됐다. 듣던 중 불행한 이야기였지만 짐짓 이해하는 척 좀 더 캐물었다.

“그래서 지내실 곳은 정하셨나요?”

“아니요.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로사티 3번가만큼 살기 좋은 곳을 찾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로미오는 더 이상 지금의 하숙집에 머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고민에 잠겼다. 바치를 떠나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떠난다고 해서 검은 망토의 사내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순 없었다. 사람들이 나다니는 거리에서 습격을 당했으니 사람이 없는 곳은 그보다 더 위험했다.

꼭 검은 망토의 사내가 아니더라도 어쨌든 하숙집은 떠나야 했다. 그곳에 처음 세 들어 살 당시 자신은 군인이었고 피에트로는 살아 있었다. 모든 것이 바뀌었으니 거처도 달라지는 것이 당연했다. 솔직한 말을 하자면 비어 있는 피에트로의 방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하숙집 곳곳에는 여전히 피에트로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 흔적들은 매 순간 깊은 고통으로 다가왔다.

“군에서 취조를 받은 이후부터 엔초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여 네베로 다시 돌아갈 생각도 해 봤습니다. 혼자 잘 자던 아이가 제 옆에서 자려고 하고 이른 아침이 되면 일찍 깨 제게 이런저런 말을 건넵니다. 새벽 중에 악몽을 꾸기도 하고 제 손을 늘 잡고 있으려고 합니다. 어젯밤 일로 앞으로 더 불안해할 겁니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그곳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네베 이야기가 나와 조반니는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로미오는 그 사실을 모르고 계속 말을 이었다.

“물론 제가 입단을 결정한 이상 바치를 떠날 수는 없을 겁니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그 하숙집을 떠난다는 것 외에는요.”

“소도시 곳곳에 지부가 있어 다른 도시로 옮겨 가 살게 되더라도 입단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다만 저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지니 그 점이 문제가 되겠죠.”

“로사티 3번가의 하숙집은 꽤 오랫동안 산 곳이라 떠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라나 부인께서도 늘 제게 잘해 주셨고 피에트로와 엔초에게도 친절하셨으니까요.”

“좋은 집주인을 만나는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지요.”

로미오의 말에 동의하는 척하고 있으나 꿍꿍이가 있는 조반니는 눈알을 굴렸다. 로미오가 거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순간 이미 로미오를 자신의 3층 저택으로 끌어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눈알과 함께 머리도 바쁘게 굴리고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주신 지팡이 말입니다.”

로미오는 손을 더듬어 의자 옆에 걸린 지팡이를 잡았다.

“바닥에 닿을 때의 느낌이 가볍고 부드러워 이곳으로 오는 동안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손잡이의 높이도 잘 맞습니다. 손으로 만져 보는 것만으로도 값비싼 나무로 만든 지팡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전에 쓰던 것과 비교해 아주 단단하게 느껴집니다.”

“가능한 한 튼튼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긴 했습니다. 대위님께 얼른 드리고 싶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웃돈을 주고 빨리 완성해 주십사 부탁드렸습니다.”

조반니는 싱긋 웃었지만 로미오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자신의 무릎께를 만졌다. 로미오와 마주 보고 있는 이 시간이 즐거워 조반니는 미소를 머금은 채 기다렸다.

“저렇게 좋은 지팡이를 드리는 것 없이 받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제게 주신 도움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 드린 것 없이 받기만 해 선생님을 뵐 낯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어요. 대위님께 도움을 드리는 것이 제게는 큰 즐거움입니다. 더군다나 지난번에 지팡이 손잡이가 흔들리는 것을 제가 보지 않았습니까? 계속 그 지팡이를 쓰시는 것이 신경 쓰여 드린 선물입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한데, 옷은…….”

로미오는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선생님께서 가시고 엔초가 대신 옷을 살펴봤는데 옷이 지나치게 비싸 보였습니다. 마음은 정말 감사하지만 옷은 돌려드리겠습니다.”

조반니가 주고 간 것은 촘촘하게 은 자수가 수놓아진 데다 단추 장식이 많은 리넨 옷이었다. 검푸른 빛이 도는 그 옷은 피부에 부드럽게 닿는 데다 원단 하나하나를 자르고 꿰매고 덧대 공들여 재단한 것처럼 보였다. 소매에는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목깃에는 정교한 주름이 들어가 있었다. 재단에 대해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 만져 보더라도 알 수 있을 만큼 고급원단을 사용한 옷이었다. 엔초는 옷이 아주 예쁘다며 몇 번이나 입어 보라고 권했지만 로미오는 옷을 펼쳐 보기만 하고 그대로 다시 상자 안에 넣었다.

“그렇게 비싼 옷은 받을 수 없습니다.”

로미오가 돌려주겠다고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조반니는 얼른 실망한 척을 했다.

“대위님만을 위한 옷입니다. 상점에 걸려 있는 것들 중 아무 옷을 골라 온 게 아니라 제가 재단사에게 직접 부탁한 것입니다. 입지 않으신다니 마음이 아프군요. 대위님께서 그 옷을 입으신 모습을 생각하며 정성껏 재단을 부탁했는데 말이에요, 휴…….”

“…….”

소리 나게 한숨을 쉬자 로미오가 뒷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제가 아는 이들 중 그런 옷이 어울릴 만한 분은 대위님밖에 없으셔서 옷을 돌려받아 봐야 다른 분께 선물로 드릴 수도 없는데 말입니다, 휴우…….”

일부러 한숨을 한 번 더 크게 쉬자 로미오는 생각에 빠진 얼굴이 됐다. 조반니가 한쪽 눈만 뜨고 몰래 쳐다보는 사이 로미오는 대안을 생각해 냈다.

“그러면 저도 선생님께 답례를 드리겠습니다.”

조반니는 꼬고 앉은 무릎 위에 팔을 얹고 턱을 괴며 로미오를 가까이서 쳐다봤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빙긋 웃은 그는 자신의 한숨 두 번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낸 로미오가 귀엽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그치지 못했다.

“선생님께서 지팡이와 옷을 선물해 주셨으니 저도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을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조반니는 선물 같은 것이 필요 없었지만 거절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진짜로 원하는 것을 말해 보자면 로미오가 자신의 뺨에 입을 맞춰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도 안 된다면 안아 주는 것. 그도 안 된다면 손을 잡아 주는 것.

“대위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니 기대되는군요. 어떤 선물을 주시려고요?”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뭐든 좋습니다.”

“글쎄요. 없는 것 같군요.”

“갖고 싶었던 물건은 없으십니까? 무엇이 됐든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흐음, 글쎄요. 그보다는 다른 것이 갖고 싶은데 주실 수 있으신가요?”

“말씀만 하십시오.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도 괜찮습니다.”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 그렇군요. 구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로미오가 정말로 뭐든 줄 기세자 조반니는 웃음을 참았다. 서로의 성기가 닿을 만큼 가까이 껴안고 입을 맞춰 달라고 하면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제게 대위님의 시간을 하루만 주시겠습니까?”

짧았지만 로미오의 얼굴에 대답을 망설이는 기색이 드러났다. 보통 사람들처럼 눈이 커지거나 의문 어린 숨을 들이켜지는 않았지만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며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건 로미오가 할 말을 잃었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조반니는 그 표정이 좋아 빙그레 웃었지만 로미오는 조반니의 목소리에 묻어 나오는 웃음기를 알아차리고 선뜻 반응하지 못했다.

“제게 시간을 내주는 것이 대위님께 어려운 일일까요? 그저 하루만 빌려주시면 됩니다.”

조반니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며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 같은 목소리를 냈다.

“저는 갖고 싶은 선물이나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대위님의 하루면 충분합니다.”

“…….”

하루만 시간을 내 달라는 말은 어떻게 들어도 다르게 해석할 수 없었기에 로미오는 벌리고 있던 입술을 다물고 침묵에 빠졌다.

자신을 향해 귀엽다고 말하며 입술의 빵 부스러기를 닦아 준 조반니의 행동에 불편함을 내비친 것이 불과 어제 일이었다. 그가 맹인인 자신을 도움이 필요한 어린아이로 여겨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였지만 하루의 시간을 내어 달라는 말은 그보다 훨씬 노골적이었다. 조반니가 베푸는 순수한 친절과 속뜻이 따로 있는 말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잘못 추측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빤한 말이었다.

조반니에게 동성의 연인인 비토리오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 이유 하나만으로 조반니의 모든 행동과 말을 곡해하는 것은 엉뚱한 짓이었다. 조반니는 자신의 눈을 고치기 위해 여러 나라로 편지를 보내는 노력까지 했다. 그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해석하면 그의 그런 행동들도 같은 의도로 봐야 논리가 맞았다.

옷과 지팡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들은 보답을 바라지 않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조반니의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것이다. 조반니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크고 작은 도움을 아무렇지 않게 받는 것은 모순이었다.

그리고 가끔 잊는 사실이었지만 조반니와 비토리오의 관계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전만큼 조반니를 냉혈한으로 여기지도 않았고 비토리오를 만나 본 적 없는 자신이 두 사람의 관계를 속단하는 것은 섣부르다고도 생각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조반니가 그 자신을 사랑했던 상대에게 보였던 태도. 그것만은 진실이었다.

그런 그가 만약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라면…….

“대위님?”

생각에 잠긴 로미오를 향해 조반니가 말했다. 대답을 하기 위해 시선을 든 로미오는 순간적으로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신을 향한 조반니의 저 부름이 기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자신을 저렇게 부르는 것이 처음이 아닌데 여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조반니가 지금과 똑같은 목소리로 아주 중요한 순간에 자신을 부른 적이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기억의 어느 한 부분이 닳은 칼끝처럼 무뎌져 쉽사리 생각이 나지 않았다.

“윽……!”

다시 한번 강한 현기증과 두통이 일었다. 두통은 이곳으로 오는 내내 있었고 조반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도 미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그것과는 강도가 달랐다. 마치 떨어져 나간 기억을 되찾게 하려는 것처럼 온몸을 저리게 했다.

“머리가 아프신가요? 뒤쪽에 자리를 마련해 드릴 테니 잠시 누우시겠습니까?”

조반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로미오는 이마를 감쌌다. 호흡이 가빠져 오는 것 같아 가슴을 크게 부풀려 빠르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몸이 긴장되자 귀가 예민해져 창가의 커튼이 흔들리는 소리에 신경이 쏠렸다.

“하아…….”

숨을 가다듬으며 현기증을 참자 조반니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로미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가를 쓸어내렸다. 잠자코 그대로 있다가 경직된 손끝을 말아 쥐었다가 폈다.

“……시간을 내드리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실은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아침이 되면 엔초를 화실에 보내고 바치 시내를 돌아다니며 일할 곳을 찾아보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됐습니다.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는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선생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위님께서 시간을 내주신다면 엔초와 다 함께 바치 근교로 나가 하루 정도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는데 아쉽군요. 별수 없지요.”

로미오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먹을 쥐었다. 뜻 모를 괴이한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흔들리던 몸과 무릎이 짓이겨지던 느낌이 떠오르자 어두운 골목에 엎드려 있던 순간이 떠올랐다. 강제로 다리를 벌리고 머리채를 틀어잡는 손의 감촉이 실물처럼 느껴지기 직전에 가까스로 생각을 멈췄다.

“하지만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거 같아 기쁘군요. 괜찮으시다면 여기서 일해 보시겠습니까? 환자들의 옷을 매일 모아 병원 내에서 깨끗하게 빨고 있는데 빤 옷을 다시 각 병실로 전달하는 일을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인 데다 각 병실의 위치와 그날 하루 수거해야 할 옷의 개수만 기억하면 돼 간단합니다. 많은 돈을 벌 수는 없겠지만 당장 일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자리가 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 일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혹시 모르지요. 병원을 찾는 손님들 중 대위님께 괜찮은 일자리를 소개해 줄 만한 분이 계실지도요.”

로미오는 머릿속에 떠오르려 하는 이 기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혼란에 휩싸였다. 머리를 부딪친 충격으로 중요한 기억들 중 일부분을 잊어버린 느낌이었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조반니가 게슴츠레 실눈을 뜨고 쳐다보는 가운데 로미오는 숨을 짧게 들이마시며 고개를 숙였다. 수락하는 것으로 알아들은 조반니는 이가 전부 드러날 정도로 입을 크게 벌려 씨익 웃었다.

“그러면 자리를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 * *

마른 빵 한 덩이를 이로 물어뜯은 자코모는 병원 쪽을 주시했다. 빵을 먹는 와중에도 배는 계속 꼬르륵댔다. 가진 돈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빵은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데다 돌덩이처럼 딱딱하고 질겼다. 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잠시 후 로미오와 그라나 부인이 병원을 나오자 자코모는 잘 씹히지도 않는 빵을 재빨리 씹어 삼키고 입가와 손을 털었다. 할 말을 미리 생각해 놓지 못했기 때문에 바로 뒤따라가지 못하고 혼잣말을 중얼댔다.

“어떻게 설득을 해야 하지? 영감을 얻었으니 기회를 달라고? 아니야. 그런 말은 좋지 않아. 그렇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머릿속으로 할 말을 궁리했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뒤를 밟는 모양새가 좋지 않아 머뭇거려졌지만 이대로 돌아가면 후회할 게 분명했다.

고민하는 사이 로미오와 그라나 부인은 멀어져 갔고 자코모는 애꿎은 머리만 연신 긁적이다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은 골목 어귀에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더니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그라나 부인은 왼쪽으로 향했고 로미오는 지팡이로 바닥을 쓸며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걷기 시작했다.

자코모는 먼 거리에서 그 모습을 보며 로미오를 설득할 말을 열심히 궁리했다. 한 번만이라도 그를 그릴 수 있다면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영감을 얻을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 다시없을 역작이 탄생할지도 몰랐다. 로미오가 자신에게 그 실마리를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금 전에는 지나치게 무례했어. 처음부터 좋은 인상을 줬었어야지, 멍청하기는!”

종종걸음으로 걸으며 꿍얼대던 자코모는 곧 걸음을 멈췄다. 생각에 잠겨 바닥을 보며 걷던 사이 앞서가던 로미오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조금 전까지 열 발자국 앞서서 걷던 로미오가 연기처럼 사라져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응?”

뒤를 돌아본 자코모는 눈앞에서 사탕을 뺏긴 어린아이처럼 어안이 벙벙해졌다. 좌우를 살피며 로미오가 사라진 방향으로 걷는데 다음 순간 왼쪽 골목에서 지팡이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로미오가 걸어 나왔다.

“으악!”

놀란 자코모가 짧은 비명을 지르자 자코모의 뒤에서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던 사람도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골목에서 나온 로미오는 지팡이를 가슴 앞에 세우고 자코모를 올려다봤다. 몸에 손을 대거나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는 방어적인 자세였다. 자코모는 당황한 것도 잠시, 로미오가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자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것은 우연이었다. 놀라는 바람에 고개가 움직여졌지만 로미오의 시선은 자신의 눈을 따라오지 않고 한 점에 고정돼 있었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힌 자코모는 변명을 궁리하는 대신 솔직하게 말했다.

“뒤를 밟은 것은 미안하오.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려고 했으나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본의 아니게 뒤를 따라오게 됐소. 정말로 미안하오. 그런데 어떻게 나라는 것을 알았소? 그대는… 맹인이 아니오?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안 거요?”

로미오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자코모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전과 다르게 불편했기 때문에 로미오는 예민해진 신경을 누르기 위해 지팡이를 세게 쥐었다.

자코모는 바닥에 뒤꿈치가 전부 닫기 전 다른 발을 내딛는 성급하고 빠른 걸음걸이를 갖고 있었다. 조금 전 병원에서 들은 그의 발소리로 그가 자신을 뒤따라오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자코모에게 그런 것을 설명할 마음은 없었다.

“흠, 큼! 나를 의심하는 것 같아 이야기하자면 나는 조반니를 잘 아오.”

“병원에서 선생님과 이야기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몰래 뒤따라가는 것이 소름 끼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만 도저히 이름을 듣지 않고는 돌아가기가 힘들어 이렇게 따라오게 됐소.”

“제 이름이 궁금했다면 뒤를 밟기보다 스포르차 선생님께 여쭤보는 편이 더 좋았을 겁니다.”

“그, 그건…….”

로미오는 조반니와 아는 사이라면서 그에게 묻지 않고 자신의 뒤를 따라온 자코모가 조반니와 그리 친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한 번 더 거절하려는데 자코모가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갑작스럽게 들리겠지만 나는 많은 것들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소.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내 구두 굽에 달라붙는 빗소리에서도 영감을 얻을 때가 있소. 조금 전 병원에서 그대를 보고 깊은 영감을 얻었소. 불쾌하겠지만 부디 한 번만 그대를 그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오. 어느 변변찮은 예술가 나부랭이의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비정상적인 욕구를 갖고 있거나 정신에 이상이 있어 그대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오. 내게 영감은 창조의 모태가 된다오. 아름다운 것에서 영감을 얻길 좋아하는 조각가의 간절한 부탁이라고 생각해 부디 한 번만 부탁하오. 만약 허락해 준다면 그에 걸맞은 보답을 하겠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채근하지 않고 기다리겠소. 당장 이곳에서 답을 주지 않아도 되오. 간절하게 부탁드리겠소.”

자코모는 애원하듯 머뭇거리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로미오는 조금 전 병원에서 조반니가 그를 자코모라고 불렀으니 적어도 이름은 거짓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목소리와 어조, 말투를 통해 자코모에게 다른 저의가 없다는 것도 느꼈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뒤를 밟을 생각이었다면 발소리를 죽여서 자신을 몰래 뒤따라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자코모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은 없으나 조각가라는 것도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무엇보다 조반니와 안다는 점에서 그가 위험한 인물일 것이라는 상상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말로 설명한다 해도 그의 청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계속 뒤를 따라오신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로미오는 길 건너편에 있는 공안국 건물에 시선을 줬다. 계속 따라온다면 공안국에 알리겠다는 뜻으로 이해한 자코모가 간절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로미오는 돌아섰다.

바닥에 지팡이를 대고 좌우로 쓸며 방향을 확인한 로미오는 마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귀를 기울인 뒤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다는 판단이 들자 길을 건넜다. 그러나 로미오가 향하는 길 건너편에는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이두 마차였는데 말들은 꼬리를 흔들며 얌전히 서 있었고 마부대에 앉은 마부는 돈을 세고 있었다.

마차가 있는 것을 모르는 로미오는 그대로 앞으로 걸어 나갔고 좌우로 바닥을 쓸던 지팡이는 마차의 뒷바퀴에 걸렸다. 탁, 하고 지팡이가 걸리는 소리를 들은 로미오는 전방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뒤로 물러났으나 바퀴에 걸린 지팡이가 빠지지 않아 몸의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넘어졌다.

멀리서 로미오를 지켜보던 자코모는 그가 쓰러지자 다리가 긴 동물처럼 겅중겅중 뛰어 한달음에 길 건너편으로 달려갔다.

“괜찮으시오?”

자코모는 긴 옷자락이 바닥에 깔리는 줄도 모르고 한껏 허리를 숙여 로미오를 부축했다. 손이 닿자 로미오는 피하려는 사람처럼 몸을 움츠렸고 그런 그의 반응에 자코모는 로미오가 몸에 손이 닿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느꼈다.

넘어지면서 바닥을 제대로 짚지 못해 팔꿈치를 부딪친 로미오는 일어서지 못하고 입술만 세게 깨물었다.

그가 쓰러지는 소리에 마부대에 앉아 있던 마부가 뒤를 돌아보더니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뭐요?”

세고 있던 돈을 주머니에 넣은 마부는 사나워 보이는 콧수염을 씰룩댔다. 마차 뒷바퀴에 지팡이가 끼어 있고 바닥에 로미오가 넘어져 있자 그는 지팡이를 휙 빼냈다.

“장님도 아니고 왜 남의 마차 바퀴에 지팡이를 쑤셔 넣는 거요? 잠깐, 장님이쇼?”

마부는 로미오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무례하게 느껴지는 언사에 자코모가 험악한 표정으로 “이것 보시오!” 하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마부는 퉁명스럽게 지팡이를 던졌다. 자코모가 낚아채 잡자 그는 마부대에 올라탔다.

“거, 길 건널 땐 조심 하쇼.”

마부가 말의 등을 때리자 마차가 출발했다. 길을 가던 이들이 넘어져 있는 로미오를 흘끔대며 보는 가운데 자코모가 로미오의 어깨를 부축했다. 손이 닿자 로미오가 다시 한번 몸을 움츠렸다.

“일어날 수 있겠소?”

“……예, 괜찮습니다.”

“지팡이는 여기 있소. 정말 괜찮으시오?”

“……지팡이가 부러지지는 않았습니까?”

“다행히 멀쩡하오. 만약 부러지거나 했다면 내가 저 마부를 가지 못하게 붙잡았을 것이오. 좋은 목재로 만든 튼튼한 지팡이인 것 같은데 바퀴에 걸린 것이 문제였소.”

“혹시 긁히거나 패인 자국이 남지는 않았습니까?”

“괜찮소.”

로미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부목이 대어져 있던 오른쪽 팔꿈치의 붕대가 느슨하게 흘러내렸다. 목에 묶어 놓았던 매듭도 풀리자 로미오는 손으로 목을 더듬었다. 표정에 낭패감이 어린 것을 본 자코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와줘도 괜찮겠소?”

로미오는 왼손으로 붕대를 감으려고 목 뒤로 손을 둘렀지만 무리였다. 몇 번이나 목을 더듬어 본 그는 머뭇거리며 자코모를 올려다봤다.

오묘한 빛을 띠는 로미오의 파란 눈동자를 가까이서 마주한 자코모는 순간적으로 이 상황을 잊어버리고 입을 벌렸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로미오가 등을 보이며 돌아서고 나서야 자코모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풀린 매듭 끝을 묶었다. 묶는 와중에 로미오의 몸이 경직돼 있음을 느꼈는데 갑작스럽게 넘어진 것이 그를 놀라게 한 것 같았다.

“됐소. 또 도와줄 것이 없겠소?”

“아니요… 없습니다. 도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가시오.”

로미오는 한 손으로 오른쪽 팔꿈치의 부목을 더듬어 다친 팔을 가슴 쪽으로 당겼다. 자코모에게서 지팡이를 받아 들고 무릎께를 더듬어 먼지를 털어 냈다. 지팡이를 기울여 바닥에 댄 로미오는 자코모에게 목례를 하고는 걸음 수를 세며 공안국 건물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자코모가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로미오가 몇 걸음 가지 않아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본 그는 주저하다가 말했다.

“제 이름은 로미오 알피에리입니다.”

* * *

재판이 열렸다.

재판정 앞은 재판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여 시장 한복판처럼 소란스러웠다. 재판정은 중앙 광장의 공회당 건물 옆에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공회당 입구의 조각 장식은 오늘 재판 주인공의 작품이었다. 조각에 글자를 새기는 것은 신성하지 못한 짓이었지만 해당 작품을 조각한 조각가가 짓궂게도 몰래 자신의 이름을 써넣어 조각상 제일 아래를 들여다보면 ‘스포르차’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재판을 담당한 피암메타 재판장과 다른 판사들은 가장 먼저 재판정에 도착해 재판정 뒤편에 마련된 방에서 재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재판의 주인공이 유명 인사인 까닭에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그들은 호들갑스럽게 입방아를 찧어 대며 광장으로 들어섰다.

“5년 전인가 그때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죠?”

“다 소문이었다는 게 밝혀진 지가 언제인데 여태 그 얘길 해? 때려죽였던 게 아니라 그 방적공이라는 자가 엎질러진 술을 밟고 미끄러져 바닥에 머리를 박아 죽었다잖아. 술을 엎지른 게 스포르차 그자여서 죽였냐느니 하는 말이 나왔던 거래.”

“하지만 손을 대긴 했겠죠? 털끝 하나 대지 않았는데 어떻게 때려죽였냐는 말이 나왔겠어요?”

“술 취한 사내들끼리 주먹다짐을 한 거지. 방적공 그자, 그 일이 있기 전에도 술에 취해 길 가는 여인의 손목을 잡아 술집으로 끌고 들어간 적이 있다더라고. 부인도 자식도 없는 데다 술만 먹었다 하면 손님들과 싸움을 해 댔다는군. 술집 주인이 그놈더러 잘 죽었다고 욕을 했다나 뭐라나?”

“어허, 큰일 날 소리를. 사람이 죽었는데 잘 죽었다니. 입조심하게.”

“이번에는 사람을 때려죽인 게 아니라 시체를 도굴했다잖아요. 아유, 끔찍해라.”

“도굴한 것이 아니라 훔쳤다더군.”

“훔친 게 아니라 비싼 돈을 주고 매매 업자에게 팔았다고 해.”

“판 게 아니라 샀다는 얘기가 있어.”

재판정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는데 벽에 걸린 촛불과 등잔 불빛 덕에 내부가 대낮처럼 환했다.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천장화는 정밀하고 치밀해 그림이 아니라 조각처럼 보였기 때문에 재판정에 처음 오는 이들은 넋을 놓고 그 천장화를 구경했다.

사람들이 은근한 목소리로 수군대기를 한참, 일가족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재판정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불의를 사고로 죽어 매매 업자에게 팔려 간 동생의 시체를 찾고자 오늘 이 재판에 참석한 가족들이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고 나자 또 다른 방향에 있는 문이 열리고 드디어 오늘 재판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 저런 경박한 옷을!”

“어머머, 저 옷이 다 뭔가요? 어떻게 저런 옷을 입고 나올 수 있담?”

“저런 경망스러운 복장을 하고 재판정에 나오다니!”

“아니, 저, 저런 추잡스러운 옷을!”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으나 재판정 내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들은 조반니를 보며 너나없이 수군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조반니는 몸에 꽉 끼는 옷을 입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장신구나 보석도 달지 않았고 주름과 트임이 없어 맨살이라고는 손이 유일한 데다 전신이 검은색이라 언뜻 나이 든 학자처럼 보였지만 문제는 옷이 몸의 굴곡을 다 드러낼 정도로 지나치게 꼭 맞는다는 것이었다. 웃옷은 너무 짧은 나머지 엉덩이와 허리선을 전부 드러내고 있었고 어깨와 가슴 쪽은 팔을 들었다 올리는 것이 어려워 보일 만큼 착 달라붙어 상체 근육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였다.

바지도 예외는 아니어서 허벅지에서부터 종아리까지 주름 하나 없이 몸에 맞아떨어졌다. 사타구니를 덮거나 가리는 옷자락도 없어 눈 둘 곳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몸치장을 즐기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몸 선이 드러나는 옷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지만 이곳은 재판정이었고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입을 놀리길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은 방금 막 말을 배운 아이처럼 쉬지 않고 나불대며 조반니의 복장을 흉봤다.

“저런 옷을 입고 나오다니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여기가 재판정이라는 걸 잊었나 보죠. 도저히 못 봐주겠군요.”

“누가 저자의 옷을 어떻게 좀 해 봐! 신성한 재판정에 가당키나 한 옷인가?”

피고인석 위에 올라섰음에도 키가 커 허리 위가 훌쩍 보이는 조반니는 당당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보기 좋게 손질한 금발 머리는 풍성하게 반짝였고 매끈한 피부 덕에 얼굴에는 빛이 감도는 것 같았다.

재판정에는 조반니에게 우호적인 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런 소리도 들렸다.

“필시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이겠죠? 스포르차 선생님께서 시체 매매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시체를 합법적으로 사고팔 방법이 없으니 별수 없으셨겠지. 듣자 하니 이번에 해부학서를 출판하셨다지? 내 누이의 제자의 둘째 형님의 사촌이 해부학자라 잘 아는데 스포르차 선생의 해부학서가 루바노의 의학 발전을 족히 100년은 앞당겼을 거라더군.”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재판까지 열 필요가 있나? 허구한 날 물건을 훔치고 도박이나 해 대는 무뢰한도 아닌 분을 말이야.”

“아무렴 그럼요!”

한쪽에는 의사와 해부학자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도 그들대로 오늘 재판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일찍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던 변호인들이 기립하자 피암메타 판사를 비롯한 두 명의 판사들이 재판정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은 깐깐하기로 유명한 피암메타 판사가 조반니의 복장을 보고 불호령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피고인석에 선 조반니를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몸을 조금만 돌려도 엉덩이가 망측하게 드러나는 옷을 입은 조반니는 이미 재판이 시작되기 전 그녀와 만나 얘기를 나눴기 때문에 여유만만한 표정이었다.

남성다움을 한껏 과시하는 조반니의 복장에 재판정 내의 사람들의 시선이 조반니를 따라 움직였다. 수십 쌍의 눈이 피고인석에 선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으니 위에서 내려다보면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점잖고 나이 많은 부인들까지도 조반니를 쳐다봤는데 그들은 그저 우연히 시선이 닿은 척하며 스치듯 보거나 눈가를 만지는 체하며 곁눈으로 봤다. 신발 뒤축이 다 닳도록 바치 광장을 돌아다녀도 조반니만큼 완벽한 팔 근육과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젊고 미끈한 미남은 쉽게 볼 수 없었으므로 당연했다.

조반니는 자신을 따라오는 시선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의도한 것이었다. 추레하고 정돈되지 않은 모습으로 피고인석에 서는 것과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서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남성적인 매력이 드러나는 옷을 고른 것이었다.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재판정 밖에서 재판이 시작됨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재판정 내의 모든 문이 닫혔다.

조반니를 변호하기 위해 자리하고 있는 변호인들은 모두 일곱 명으로 그들 중 무려 여섯 명이 로마니엘로 법학대학 출신이었다. 그들은 조반니를 뒤따르는 비호를 보여 주려는 것처럼 기세가 대단했는데 오늘의 이 재판이 조반니의 명성과 유명세에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듯 냉철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반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는 가족들의 편에는 나이 든 변호인 한 명이 앉아 있을 따름이었는데 그는 눈이 좋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데다 귀까지 어두워 재판을 시작하겠다는 말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서류를 보다 뒤늦게 일어섰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은 정숙해 주실 것을 요구드립니다. 재판정 내에서는 신실한 이야기만이 허락될 것이며 거짓이 있을 경우 엄중한 형벌에 처할 것입니다. 가장 존귀한 루바노 공화국의 이름으로 죄에 관한 평결은 명백한 진실에 의거하여 내려질 것입니다.”

선서가 끝나자 모든 이들이 자리에 앉았다. 서 있는 것은 앉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조반니뿐이었다.

재판은 고발의 내용을 확인하는 것부터 진행되었기에 조반니는 불법으로 산 시체를 해부해 자신의 해부학서의 참고 자료로 썼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했다. 오늘 재판의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던 이들도, 모르고 있던 이들도 시체를 물에 불려 해부했다는 대목에서 눈살을 찌푸리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제기된 고발에 대해 모두 인정하는 바입니다. 시체를 마지막으로 본 것 또한 저입니다. 신원을 밝히는 과정은 거치지 않았으나 그 청년이 저분들께서 찾는 그자인 것을 확신합니다. 제가 시체를 확인했을 때 그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으나 죽음을 맞는 과정에서 고통은 없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조반니는 자신을 미행하는 자가 재판정에 숨어들어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둘러봤다.

어쩌면 지난번 카를로타와 술집에서 만남을 가졌을 때도 자신을 미행하는 자가 뒤를 따라왔던 건지도 몰랐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취객의 평범한 말소리라고 생각했으나 자신이 안일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뒤를 밟아 왔으니 분명 이 재판정에도 숨어들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을 미행하는 것인지 오늘에야말로 밝혀낼 생각이었다.

갈고리 고양이 술집에서 만났던 그 사내를 아직 의심했기 때문에 그를 찾아내고자 사람들의 얼굴을 차례로 훑어본 후 자신이 고용한 변호인의 변론을 들었다.

“존경해 마지않는 재판장님. 피고인 조반니 스포르차의 저서 ‘인체의 해부’는 900장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저서입니다. 저서 속에 실린 대부분의 삽화는 정부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은 시체를 해부해 그린 것입니다. 해당 삽화들은 야만적이거나 저속한 묘사 없이 장기의 기능과 모양을 체계적으로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불법으로 매매한 시체의 해부도는 약 40장에 걸쳐 실려 있는데 이 역시 철저히 의학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기술되었습니다. 해부 과정에서 시신에 대한 학대가 이뤄졌을 것이라는 주장은 피고인에 대한 매도이며 기술 과정에 있어서도 시신의 주인에 대한 능욕은 없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앉아 있던 가족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내가 주먹을 부르쥐며 목청을 높였다.

“그 아이는 제 동생이었습니다! 길바닥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조차 우리에겐 날벼락 같은 불운인데 멋대로 해부한 것도 모자라 동의 없이 책 속의 삽화로 그려 넣었다니요! 당장 그 책을 모두 폐기해야 합니다. 동생의 시신이 그려진 책이 버젓이 팔리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분통을 터뜨리는 목소리에 조반니 측의 변호인이 입을 뗐다.

“5년간의 연구 성과가 담긴 피고인의 저서는 교본에만 의존하는 보수적인 통념을 철회하고 해부학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인정받아 마땅합니다. 비록 불법적으로 거래한 시체의 해부본이 들어 있긴 하나 폐기를 주장하는 것은 루바노 의학의 발전의 상징과도 같은 획기적인 해부학서의 존재를 매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친애하는 재판장님, 해당 저서를 봐 주십시오. 저서 속에는 풍부한 해부학적 사료가 저술돼 있으며 삽화들은 놀랍도록 정밀해 의학 도감이라고 보아도 손색이 없습니다. 해당 해부학서의 폐기를 주장하는 것은 의학의 퇴보를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비록 피고인이 불법으로 매매한 시체를 해부했다고는 하나 그는 새로운 해부학 이론을 적립한 저명한 의학자입니다. 피고인의 저서가 학문적 권위를 갖고 있는 명저임은 의심할 길 없이 명백합니다.”

“맞습니다, 재판장님. 또 피고인은 충분한 보상을 하기 위해 배상금의 액수와 지급일이 적힌 서류를 공증인으로부터 공증받았습니다. 제출된 서류를 확인해 주십시오. 수십 구의 시체를 합법적으로 조달할 방법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체 불법 매매에 대한 엄정한 처벌만을 요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처사입니다. 한 해 허용되는 시체 수를 고려해 보건대 많은 의사와 해부학자들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시체를 조달하는 것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보다 많은 수의 시체를 합법적으로 기증받을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조반니 측의 변호인들이 줄줄이 입을 열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저들끼리 쑥덕댔다. 호의적이지 못한 눈빛으로 조반니를 보던 이들 중에서도 해부학서 폐기는 지나친 처사라고 생각을 슬금슬금 생각을 바꾸기 시작한 이들이 있었다.

변호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금 전 조반니의 해부학서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제 동생은 피해자였습니다! 죄 없이 죽은 제 동생이 바로 저자의 손에 해부됐다고요! 매매 업자가 죽은 제 동생을 저자에게 돈을 받고 팔아넘겼단 말입니다. 연고도 없는 낯선 이의 집에서 몸이 분리되고 뼛조각째 전시되었을 동생을 생각하면 밤잠이 오지 않습니다! 저자는 동생의 시신을 능욕한 것으로 모자라 우리의 허락 없이 동생의 장기와 유골을 책의 삽화로 실어 다시 한번 능욕했습니다!”

“재판장님, 피고인이 시신을 능욕했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해부학서 집필을 위해 피고인이 5년간 조달한 시체는 모두 144구입니다. 그 기간 동안 피고인은 정부에 이백서른일곱 번의 시신 인도 허가를 신청했습니다. 반려된 횟수가 자그마치 아흔세 번에 달합니다. 증거로 제출한 시신 인도 허가서를 봐 주십시오. 실제로 피고인은 시신의 수가 부족해 약 석 달가량 해부학 연구의 지연을 겪기도 했습니다.”

“방법이 없다고 해서 불법으로 시체를 사들인 것을 정당화할 순 없습니다! 의사라는 자가 시신 해부에 관한 윤리를 어기다니요? 저자는 당장 투옥돼도 모자랍니다. 저런 극악무도한 자가 의사라니요!”

재판정 내가 시끌시끌해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내저었다. 소란이 가라앉지 않자 피암메타 판사가 외쳤다.

“정숙하시오!”

재판정을 울리는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졸고 있던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조금만 목소리가 더 컸다면 재판정 내의 촛불 몇 개를 꺼트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목청껏 소리를 높인 피암메타 판사는 매서운 눈으로 사람들을 훑어봤다. 그라나 부인과 연배가 비슷한 그녀였지만 서슬 퍼런 눈빛은 피의 재판장이라는 별칭이 조금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저, 재판장님… 본 사건에 대하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줄곧 입을 닫고 있던 원고 측 변호인이 입을 열었다. 하늘거리는 새치를 매만진 그는 침침한 눈으로 높은 곳에 올라앉아 있는 피암메타 판사를 응시했다.

“해부학서의 삽화에 실려 있는 유골의 상태를 살펴보면 해부 과정에서 시신이 폭력적으로 학대당했음을 시사하는…… 에…예, 시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해부학자로부터 유골의 상태에 관해 첨언을 들었고…… 에, 그래서… 그 진술을 근거로 삼기 위해 참고인 요청을 하는 바입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서 있던 조반니는 참고인 요청을 하겠다는 말에 자신의 변호인들을 돌아봤다. 그들과 눈빛을 주고받은 뒤 몸을 바로 하며 좋을 대로 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사람들을 둘러보던 조반니는 저만치에 검은 머리를 한 젊은 사내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닮았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금방 시선을 돌렸지만 로미오가 생각났다.

그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내일 아침은 엔초와 다 함께 식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네베 음식으로 꾀면 로미오도 흔쾌히 식사 자리에 나올지 몰랐다. 침이 넘어가도록 먹음직스러운 사과파이도 구우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에…… 해부학서의 폐기에 대한 주장은… 예, 그렇지요. 피고인은 과거에도 시체를 불법으로 사들여 법정에 선 전력이 두 번 있음에도 다시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피고인의 윤리관을 볼 때 징역형을 선고해 주시기 바라며, 마찬가지로…… 에… 이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저서를 폐기하고 향후 20년간 해부학서 지필을 금지하는 처벌을 내려 주십사 부탁드립니다.”

피암메타 판사는 변호인의 이야기가 끝나자 재판정에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고의 주장은 다음과 같소. 첫 번째, 피고인이 해부 과정에서 시신을 학대해 고인을 능욕했다는 점. 두 번째, 해부학서 ‘인체의 해부’에 대한 폐기요. 판결 선고에 앞서 참고인 신문을 하겠소. 참고인들은 재판정 안으로 들어와 증인대에 서시오.”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들어섰다. 그녀는 책 세 권을 들고 있었는데 앳되어 보이는 얼굴 생김새가 생쥐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옆구리에 책을 끼고 들어선 그녀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증언대로 가 섰다. 조반니가 턱을 들고 쳐다보고 있자 긴장한 기색으로 책을 펼쳤다.

뒤이어 세라피나 산소네 교수가 재판정으로 들어섰다. 그녀도 증인대로 가 섰다. 오늘 법정에 나와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 이미 여러 번 고마움을 표시한 조반니였지만 그는 한 번 더 세라피나 교수를 향해 근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가 얼마나 화사했던지 앉아 있던 여인들 몇이 덩달아 미소를 지으며 서로 귀엣말을 했다.

이미 일부 사람들은 저렇게 명망 높고 유능한데다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한 젊은 의사가 시체를 학대했을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세라피나 쪽을 쳐다봤다. 입도 열지 않은 두 참고인들 중 어느 쪽이 더 신뢰할 만한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었다.

“갈릴레아 자니입니다. 푸치아노 대학교의 의학부에 재직 중인 해부학 교수예요.”

임명된 지 한 달 남짓 된 풋내기 교수의 소개에 조반니는 자신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이해했다. 다른 대학교라 하더라도 의학부 교수라면 한 번쯤 마주쳤을 법한데 갈릴레아 자니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조차 없었다.

“해부학서 ‘인체의 해부’ 집필에 참여한 바치 대학교 의학부 교수 세라피나 산소네입니다.”

손끝으로 피고인석을 탁탁 두드리던 조반니는 갈릴레아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소를 보였다. 그러자 갈릴레아는 고개를 낮게 수그리며 헛기침을 했다.

“원고 측 참고인부터 시작하시오.”

갈릴레아는 재판정 내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만큼 또렷하면서도 긴장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서 ‘인체의 해부’ 61장에 망인의 해부본이 나와 있습니다. 유체의 오른쪽 다리뼈가 실린 해당 삽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학대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처 몰랐다는 것처럼 조반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그린 모든 삽화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책을 뒤질 필요가 없었으나 책을 뒤지는 척 건성으로 책장을 넘겼다.

그러다 사람들 쪽에서 작게 속닥대는 소리를 듣고 그쪽을 쳐다봤다. 앉아 있는 이들을 둘러봤지만 속닥대는 소리만 들릴 뿐 말하고 있는 이를 찾을 수 없었다. 빠른 말로 조잘대는 소리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갈릴레아의 말과 겹쳐 재판정 내에 울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우호적인 소리라면 참아 주겠지만 말소리의 내용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빠른 데다 아무리 살펴봐도 말하고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앞만 보고 있었고 귓속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의아함에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은밀한 수다가 고함 소리가 돼 울려 퍼졌다.

지루한 변론은 그쯤에서 끝내쇼!

놀라운 것은 사람들은 물론 판사들도 아무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제 할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저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갈릴레아의 말을 듣고 있었다. 방금 전 재판정에 울린 저 소리를 들은 것은 오직 자신뿐인 것 같았다.

조반니는 터무니없는 이 상황에 인상을 찌푸리고 판사들을 흘겨봤다. 책을 들여다보던 판사 하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 책을 봤다. 재판정 내에 이렇게 크게 울린 소리를 자신만 들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반니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다시 한번 사람들을 가장 앞줄에서 뒷줄까지 훑었지만 범인을 찾을 수 없었다. 속닥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상할 정도로 태연했다.

남들보다 청력이 월등히 좋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데다 저렇게 큰 소리를 자신 혼자 들었을 리가 없었기에 조반니는 세 명의 판사가 조금 전 그 소리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손을 들었다.

“재판장님.”

피암메타 판사가 갈릴레아의 말을 중단시키자 조반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모두 조용히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숙을 지키지 않는다면 재판정에서 퇴장될 수 있습니다.”

조반니의 말에 여태껏 쭉 정숙을 유지해 온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됐으나 조반니는 고함을 친 사내를 찾기 위해 재판정을 둘러보느라 사람들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피암메타 판사는 피고인석까지 거리가 있는 데다 조반니가 자신이 듣지 못한 소곤거림을 들었을 거라고 생각해 무서운 눈이 됐다. 조반니는 그녀의 무서운 눈초리에 힘입어 다시 말했다.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이야기하시겠지만 제게는 들립니다.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재판을 방해하는 행동은 자제해 주십시오. 재판이 끝날 때까지 엄숙하게 있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더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조반니는 피암메타 판사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녀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람들을 훑어보곤 갈릴레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하겠습니다. 삽화에 실린 오른쪽 다리뼈의 표면에는 손가락 반 마디만 한 날카로운 자국이 있습니다. 뾰족한 물체에 찔린 것으로 보이는 해당 자국은 사망 전에 발생했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아주 예리하며 이는 뼈조직을 분리해내는 과정에서 표백이 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종이 위에 그려진 삽화이기에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수 없으나 손상 흔적으로 보입니다. 피고인의 주장에 따르면 망인은 자상이나 골절과 같은 외상 없이 사망했다고 하는데 유골의 손상 흔적은 칼이나 가위로 의심되는 물건에 인위적으로 여러 번 찔리지 않으면 발생하기 힘든 형태로 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해부 과정에서 생긴 불필요한 상흔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영명하신 재판장님. 유체를 해부하는 과정에서 우연찮게 칼에 긁히거나 찔렸을 가능성을 고려해 주십시오. 그것이 학대의 증거라면 피고인이 해당 손상 자국을 삽화에 남긴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재판장님. 삽화에 나온 손상 흔적이 학대의 증거였다면 피고인이 이를 은폐하기 위해 저서에 남기지 않았을 겁니다. 유골에 미세한 훼손이 있다는 이유로 시신에 대한 학대를 주장하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억측입니다.”

“동의합니다. 해당 거증은 학대의 진위를 설명하기에 부족합니다.”

변호인들이 앞다투어 말을 꺼내자 원고 측의 변호인이 말했다.

“피고인은, 에…… 수백 장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삽화를 그렸습니다. 저술 과정에서 손상 흔적을 미처 배제하지 못하고 그대로 그렸을 가능성은 피고인의 저술 습관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피고인의 삽화는…… 에… 세밀하고 정교하며 가감 없이 보이는 그대로 묘사된 것이 특징입니다. ‘인체의 해부’에 실린 삽화들을 살펴보면 표백이 미처 다 되지 않은 유골의 불필요한 얼룩까지도 그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무의식적인 습관으로 인해 그리지 말았어야 할 손상 흔적을 실수로 그려 넣었다고 추측한다면… 에…… 예, 그렇죠. 합리적인 추측이 될 겁니다.”

갈릴레아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해부 과정에서 유체가 어딘가에 떨어지거나 부딪치는 것만으로는 해당 상흔이 생길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의도를 갖고 인위적인 힘을 가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63장과 71장, 76장에 실린 망인의 골반 삽화에도 유사한 손상 자국이 묘사돼 있는데 저서에 실린 삽화들 중 해당 손상 자국이 보이는 것은 망인의 유체가 유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갈릴레아는 조반니의 변호인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녀의 말이 맞았기 때문에 변호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피고인이 ‘인체의 해부’ 이전에 출판했던 해부학서를 살펴보면 피고인은 허벅지와 정강이뼈의 관절과 근육 조직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특히 오래전부터 넙다리를 지나는 혈관과 하지 전체의 동맥을 정확히 묘사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입니다. 피고인이 망인을 해부하는 과정에서 유체에 특정한 이유로 물리적인 손상을 주었으며 이는 아마도 혈관이나 동맥을 관찰하는 중에 이뤄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상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얕은 수군거림이 퍼졌지만 피암메타 판사는 별 동요 없이 세라피나 교수에게 말했다.

“피고인 측 참고인. 증언을 시작하시오.”

세라피나 교수는 참고할 책이 없었으므로 그냥 이야기했다.

“저는 스포르차 선생이 바치 대학교에 재직하던 무렵 ‘인체의 해부’의 집필을 함께했습니다. 해부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으나 스포르차 선생은 시체 해부에 있어 윤리를 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시체 조달과 관리에 있어서도 부패를 염려해 신속하고 빠른 방법으로 유체로부터 뼈를 분리해 냈습니다. 해부 과정에 벌어지는 시신에 대한 학대는 시체 처리 과정의 지연을 초래하는데 이는 스포르차 선생의 해부 방식과 어긋납니다.”

“피고인이 시신을 학대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소?”

“아니요. 없습니다.”

세라피나의 단호한 대답에 조반니의 변호인이 입을 열었다.

“피고인은 잉태한 젊은 여인을 해부한 적이 있는데 그 시신은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조달해 온 것이었습니다. 배 속에 태아를 갖고 있는 젊은 여인의 시신은 인도 과정이 까다로워 지난 3년간 열다섯 구만이 허용되었습니다. 그 열다섯 구중 열 구가 피고인에게 인도되었는데 이는 피고인이 지난 수년간 해부용 시신을 훼손하거나 손상시키지 않고 온전한 모습으로 수습해 반환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피고인의 해부 방식을 고려해 보건대 참고인의 거증만으로 학대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불가능하며 삽화가 삽입되는 과정에서 오류나 혼동이 있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변론이 진행되는 사이 세라피나는 조반니가 조용히 혼잣말을 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아주 작은 소리로 뭐라 중얼댔는데 얼핏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반론할 말을 정리하고 있다고 생각한 세라피나는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인체의 해부’는 스포르차 선생의 5년간의 연구 결과가 담긴 해부학서이며 긴 시간을 바친 그 저서의 가치가 모독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라피나의 말을 듣는 동안 앉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조반니는 표정이 서서히 바뀌어 갔다. 그는 누군가를 주시하며 눈을 가늘게 뜨기도 하고 생각에 빠진 듯 입술 끝을 물기도 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덮었다.

“피고인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시오.”

피암메타 판사의 말에 조반니는 기다렸다는 듯 반성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해부한 망인과 여기 나와 계신 그분의 형제분들께 사죄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결단코 망인의 유체에 학대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조반니는 너무 많은 시신을 해부했고 서로 유사한 조건을 가진 시신만 수백 구를 봐 시체 매매 업자에게 불법으로 산 젊은 사내의 시신에 대해 기억하지 못했다. 사인이 독특하거나 뇌리에 남을 만큼 심한 훼손을 당한 게 아니니 기억 날 턱이 없었다.

해부 후 되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시신에 한해 뼈의 강도나 손상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톱질을 하거나 못을 박아 넣거나 돌로 내리찍어 부러뜨리는 등의 실험을 수도 없이 했기 때문에 아마도 갈릴레아의 주장이 맞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전부 이야기해 봐야 불리하기만 했다. 증거가 될 유골은 어차피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은 한낱 삽화뿐이고 자신은 저명한 의사인 데다 피암메타 판사까지 자신의 편이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

“망인의 유골에 남은 자국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아마도 뼈를 분리해 내는 과정에서 칼끝이 유체를 강하게 긁어서 생겼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조반니의 말에 재판정이 술렁거렸다. 그의 말은 갈릴레아의 증언이 사실일 가능성을 높이는 것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방정맞게 입을 놀려 댔다.

“시신 수백 구를 해부했으니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매일 죽은 사람의 몸을 들여다보는 것이 일인데 그게 기억이 나겠어?”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아니라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발뺌을 하는 거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설마 스포르차 선생님께서 정말 그런 짓을 했을까 봐서요. 그럴 분이 아니신데…….”

“맞아요. 그런 만행을 저지르시기엔 인덕이 두터운 분이시잖아요. 가난한 환자들에게 진료비를 받지 않으신 적도 많으신 데다 점잔 빼는 의사들이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서 모른 체할 때 가장 먼저 나선 분이 바로 스포르차 선생님인데요.”

“암. 그놈의 알량한 체면 차리는 작자들과는 다르신 분이지. 고상하게 책이나 들여다보는 의사들만 있었다면 우린 아직도 병든 소나 닭에게 행해지는 치료법을 받았을 거야. 시신을 학대했다니, 말이 되지 않아.”

사람들이 시끄러운 틈을 타 원고 측 변호인이 손을 들며 발언권을 가져가려 했다. 그러나 피암메타 판사는 고개를 저으며 조반니에게 눈길을 줬다.

그러자 조반니는 슬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 시신에서 나는 악취와 싸워 가며 밤을 지새우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썼습니다. 열흘 내내 산 사람과는 말 한마디 섞지 못하고 시신만 들여다봤던 적도 있었습니다. 부패가 진행되는 탓에 부엌에서 한 끼 식사를 만들 시간조차 없어 시신의 옆에서 빵과 물로 허기를 해결할 때도 많았으며 시신이 깔린 탁자 위에서 잠이 들었다가 동틀 무렵 깨 그 자리에서 다시 해부를 이어 간 적도 있었습니다. 시신에서 나는 냄새가 벽을 타고 옆집으로 퍼져 나가 쫓겨나듯 거처를 옮긴 적도 무수히 많았습니다. 몸에서 나는 악취를 맡은 것은 동물도 마찬가지였죠. 거리에서 마주치는 길고양이들이 저를 보고 털을 세우며 달아날 때면 전 온몸을 망토로 휘감아 냄새를 숨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나 명예를 목적으로 그런 고행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곳에서 거짓을 고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더라도 의학에 대한 제 신념만은 진실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그것은 지난 15년간 의학에 바친 제 젊은 날을 근거로 들어 거증할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 말했을 때 재판정 내에 탄식하는 소리가 퍼졌다.

“이런 일에 휘말리게 돼, 흐윽…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지…….”

조반니는 돌연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꼴사납지 않았다. 오히려 가엽고 불쌍해 보여 조반니의 처지를 안타깝게 만들었는데 이는 전적으로 그가 미남인 덕이 컸다.

“세상에나!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릴 정도니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크셨을까요…… 딱하셔라.”

“너무한 처사이기는 해요. 굳이 이렇게 법정에 세워 시신을 학대했다느니 어쩌니 할 필요가 있을까요? 다 그 시신 매매 업자의 잘못인데.”

“그러게 말이야. 보지도 않고 어떻게 학대를 했다고 주장해?”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드는 동안 어떤 한 여인은 마치 자신이 고통을 겪은 양 가슴에 손을 얹고 슬퍼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사회적 인망도 두텁고 유능한 데다 장래가 유망하기까지 한 저 스포르차 선생을 매도한 갈릴레아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피암메타 판사 역시 조반니가 눈물을 보이자 치켜 올라간 눈매를 특이한 모양으로 씰룩댔는데 그것은 심경의 변화를 느낄 때 나타나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이미 조반니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을 때 한차례 당황했던 갈릴레아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곱지 못한 시선을 보내자 더더욱 당황했다. 조반니가 재판정에서 눈물을 보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데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비난의 눈빛을 보내자 더 이상 아무런 발언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조반니가 눈물로 농간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자신도 조반니도 의사의 신분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보단 조반니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에,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에게 공박 받은 조각상처럼 잘생긴 사내가 눈앞에서 구슬프게 울고 있다는 사실에 어쩔 도리 없이 동요하게 됐다.

‘저런 사내를 마다할 여자는 세상에 없다’는 조반니를 향한 찬양에 가까운 칭찬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망인에게 어떤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흑…….”

조각같이 매끈한 조반니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피고인석 위로 떨어지자 사람들은 더 노골적인 눈초리를 갈릴레아에게 보냈다. 누군가는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저렇게까지 매도할 필요가 있어?

재판정 내의 모든 여인들이 술렁이며 분위기를 형성하자 팔짱을 낀 채 조반니를 볼썽사납게 보고 있던 사내들도 슬금슬금 태도를 바꿨다.

“정숙하시오!”

피암메타 판사가 호통을 치자 수군거림이 멈췄다. 조반니는 눈물을 닦는 척 고개를 숙이곤 좌우로 눈알을 굴려 사람들의 표정을 몰래 확인했다. 그들의 동정 어린 시선을 확인한 후 마음을 추스른 것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통스러운 심정을 가다듬는 척하다 눈가가 젖은 채 입을 뗐다.

“저는 제 영혼에 새겨진 시신의 썩은 냄새를 부끄러워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죄를 저지른 것은 분명하나 망인을 기만하지는 않았습니다. 해부 과정에서 저는 죽은 자에 대한 예의를 가장 우선으로 하겠다는 제 철칙을 지켰습니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적절히 여유를 줘 말을 끊은 조반니는 재판정의 분위기를 살피며 계속 말했다.

“저는 해부학을 신성시하거나 거룩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모든 의사는 병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해 하늘이 내린 대리인이 아니기에 영묘하고 불가사의한 능력 따위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칼을 들고 사람의 몸을 열어 보는 것. 그것이 의사들이 할 일입니다. 인간으로부터 질병을 가장 빨리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은 해부학의 발전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연 대가로 재판정에 서야 한다면 언제라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미치광이가 되지 않는 이상 저는 해부학에 관한 연구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법적 심판을 모욕이나 공격으로 여기지 않겠습니다. 망인과 이 자리에 나온 망인의 형제분들께 다시 한번 진심 어린 사죄의 말씀을 전합니다.”

듣기 좋은 목소리로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으니 사람들 몇이 조반니가 흐느꼈을 때처럼 낮게 탄식했다.

판결 선고에 앞서 판사들이 모두 퇴장하자 짧은 시간이 주어졌다. 피고인석에서 내려간 조반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다리를 꼬고 앉았다. 눈가에 매달린 눈물을 닦은 그는 하품을 하며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댔다. 이미 분위기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데다 재판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판결이 뒤집힐 일은 절대 없었기 때문에 이미 형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어 마음이 편했다. 재판 결과를 예상한 것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들 역시 크게 수군거리거나 소란 피우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판결을 내릴 차례가 되자 퇴장했던 세 판사들이 법정 안으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은 피암메타 판사는 판결문을 읽기 전에 눈빛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망인의 형제들에게 시선을 줬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그들을 굽어살피는 눈이 아니었다.

“판결을 선고하겠소. 불법으로 시신을 매매한 죄의 무게는 무거우나 피고인에 대한 형을 정하는 데 다음의 이유를 참작하였소. 첫째, 매매한 시신의 해부본을 사사로운 목적이 아닌 해부학서 집필에 인용했으며, 더욱이 그 해부학서에서 드러나는 피고인의 학파가 의학계에 더할 수 없이 큰 기여를 하였다는 점. 둘째, 시신 수의 부족으로 연구에 지연을 겪은바, 이로 인하여 시신 인도에 관한 피고인의 불가피한 사정이 엿보인다는 점. 셋째, 유체에 학대가 가해졌음을 주장하기 위한 증거가 유골이 아닌 삽화이기에 그 신빙성이 희박한 점. 넷째, 피고인이 망인의 측에 배상금을 약속하였으며 그 배상액이 막대한 액수로 산정되었다는 점을 참작했소. 이상과 같은 이유로 피고인 조반니 스포르차를 벌금 500가토에 처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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